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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 13-08-25 13:3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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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강-롬8장 26-27(성령님의 기도)1308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8장 26절에서 27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50페이지입니다.
로마서 8:26-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님이 등장하게 되죠. 사람들만 있는 세상에서 성령이라는 낯선 분이 개입하게 되면 사람들은 성령, 거룩한 분이니 영접할 생각을 하게 될 거예요. 그러나 막상 성령님이 개입하게 되면 우리는 매우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너는 빌 바도 모르는 존재다.”라고 지적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26절에 보면 성령께서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너는 빌 바도 모른다. 너는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지,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될지조차 근본적으로 모르는 존재다”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겁니다.
우리로서는 굉장히 당황스럽지요?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데 하나님 쪽에서 치고 들어오니까. 그러면 내가 그동안 교회에서 한 일이 다 헛짓이라는 말인가, 라는 저항심이 저절로 나오지요. 성령께서 우리에게 너는 기도할지도 모른다고 지적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24절에 보면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은 보이는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모든 기도하는 내용들을 분석해 보면 모두 다 보이는 것들을 수집해서 미흡한 것을 채워달라고 기도를 한 거예요. 인간이 실수한 겁니다. 그동안 하나님 잘못 믿은 거예요. 엉터리였습니다. 성령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다들 그렇게 기도하니까 그런 기도가 옳은지 알았지요. 막상 성령님이 치고 들어오니까 우리의 본색이 들통이 난 거지요. 우리는 기도할 바라는 모른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가야될 길, 우리가 어디로 가야되는지 조차도 인간은 모르는 거예요.
이것을 성경에서는 간단한 표현으로 합니다. “인간은 갇혀 있다.” 동서남북 어느 방향도 탈출구가 없고 그 속에 갇혀 있어요. 이런 상황을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미리 보여줬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나라가 등장하는데 이스라엘나라가 처음부터 등장하기 전에 먼저 애굽나라 라는 것이 설정이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나라가 히브리인들이 따로 독립해서 세운 나라가 아니고 애굽에 같이 살던 나라에요. 애굽에 산다면 그들이 기도하고 바라는 모든 것들은 다 어디서 배웠는가 하면, 애굽에서 배운 것들입니다.
‘저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이 좋아 보이는데 나는 없으니까 기도해서 얻어야지.’ 애굽에 살면서 히브리인들은 애굽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여기서 벗어난다는 생각도 못하고 그냥 애굽에서나 출세하면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신의 축복이라고 생각들을 한 겁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을 거론해도 그 하나님의 뜻은 모르고요, 나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고 등쳐먹는 식으로 종교생활을 해왔던 거예요. 원래 히브리인들은 애굽에서 나올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냥 그 땅에서 편하게 살고 싶었어요. 노예생활 청산하고 같은 시민으로서 살고픈 소박한 마음밖에 없었습니다.
거기서 강제로 나오는 것은 히브리인들의 뜻이 아니고 누구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강제조치인 거예요. “애굽에서 나오라.” 히브리인들은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기서 나와 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생활 대책도 없는데 죽으라는 이야기밖에 안되잖아요. 그래서 모세는 “여러분은 이 땅에서 나가야 됩니다.”라고 이야기할 때에 누가 극심히 반대했느냐 하면, 바로 나와야 될 히브리인들, 백성들이 도리어 아론을 하나님 앞에 고소합니다. “하나님이여 저 인간들 좀 혼내주세요. 저 인간들이 와서 우리가 사는 형편이 더 어렵게 되었습니다. 손좀 봐 주세요. 하나님!”이라고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공격한 거예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를 구원하러 오신, 자기를 구출하러 오신 그 사람을 구출 받아야 될 백성들이 구원자에 대해서 고발조치 한다는 겁니다. 그만큼 잘못된 하나님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애굽에서 있었던 부귀영화를 자기들도 누리고 싶다는 심정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기대했고 여호와를 찾았던 겁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뭐냐 하면, 그 결과가 어린양의 죽음이었습니다. 나 혼자 잘못생각하고 우리끼리 잘못생각하면 나중에 개과천선하지, 하고 쉽게 넘어가는데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기대하고 그것을 소망했더니 그 결과가 흠 없는 어린양이 피 흘려 죽는 사태까지 유발하게 되었습니다.
구원되고 싶지도 않은 백성들을 강제로 구원하는 조치가 다른 것이 아니었어요. 그들의 소원과 기도를 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뜻대로 해주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반대로 나갑니다. 너희들이 기도하고 간곡히 부르짖는 그 죄로 인하여, 네가 기도하는 그 죄로 인하여 내가 죽었다는 그것만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너희들이 교회 오면서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그것, 그 자체가 너희들을 더욱 세상 사람으로, 세속적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더욱더 죄를 추가적으로 가중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어린양의 피를 바른다고 하니 피가 주술적이고 기능적인 일을 하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으로 알았지 자기 자신이 용서받아야 될 죄인인 것을, 나에게 어떤 죄가 가득 들어 있다는 것을 생각을 안 해요. 그리고 광야에 나갔습니다. 나간 현실은 뭐냐, 갈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 26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개입하는 이유는 처음부터 우리를 단정 짓습니다. “너는 처음부터 갈 바를 알지 못한다. 왜, 네가 소망하고 네가 기도하고 네가 간절히 바라는 그 모든 것들은 그 방향성이 천국이 아니고 사실은 지옥이다.”라는 거예요.
보다 넓은 길, 보다 성공하는 길, 보다 남에게 꿇리지 않게 살아가는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도움으로 마저 채울 수 있을까, 그쪽으로 가는 그 길은 바로 그 사람들을 지옥으로 넓은 길로 몰아넣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생명은 어디 있느냐 하면, 넓은 길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찾는 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찾는 이가 없는 좁은 길의 끝에 생명이 있어요. 우리가 이 육신적인 본성 자체가 남에게 밀리지 않고자 하는 그런 골수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우리가 자진해서 좁은 길로 갈 위인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성령님이 투입이 되어야 돼요. 성령님이 들어가서 하루하루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방향자체가 틀려먹었다는 것을 지적해주지 아니하면 우리는 자꾸 지옥 가는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해 낼 수 있는 것, 그리고 내가 해 내지도 못했는데 외부에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집어넣은 것, 그 갈림길, “내가 해낼 수 있는 것과 내가 해 낼 수 없는데 나에게 주어진 그 갈림길에서 네가 기도하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기도 내용은 이렇습니다. “주님이여, 나는 이런 것들을 원하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은혜주사 내가 원하는 것이 죄인 줄 알게 해서 그것이 지옥이라고 지적해주시고 내가 미처 생각도 못한 길로 나를 이끌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하는 성도의 기도입니다. 다른 기도 하면 안돼요. 다른 기도 하면 주께서 응답을 안 하십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는 반드시 자신이 갖고 있던 뜻을 모두 드러내야 돼요. 우리 교인들이 기도를 잘 안하시는데 우선 이것이 안돼요.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다 드러내려 하니까 씹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죠. 너무 많은 사람들이 뒤에서 뒷 담화를 하니까 우세스러워서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이 낫다고 여기죠. 속에 들어 있는 것을 솔직하게 드러내놓고 거기에 소스를 치는 겁니다. “주여, 이것이 내 뜻인데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해야 이것이 기도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하나님이여, 예수 믿는 사람이 너무나 적습니다. 우리 교회라도 부흥되어서 예수 믿는 사람 많이 나오게 하시고 아프리카 같은 오지에도 선교사를 많이 보내서 세계에 복음이 널리 전파되게 하옵소서.”라고 하는 것이 이 목사의 뜻인데 “주여, 제발 이 뜻이 죄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이게 기도입니다.
고상해 보이고 굉장히 복음적으로 보이는 것들 많지요? 입에서 나오는 것은 다 더러운 것밖에 없어요. 그렇게 해서 교회 부흥시켜서 뭘 하겠다는 것입니까? 결국은 당회장 자신의 명예와 위신과 관련된 기도가 목사 입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능력 있는 목사 티를 좀 내고 싶다는 말입니다. 내가 주의 종인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그 탐욕, 욕심, 그것이 바로 애굽적이고 악마적이에요. 성경에 보면 성령께서 나올 때는 항상 악마를 대동하고 나옵니다.
악마가 무서운 것 같지만 사실은 성령님의 시다바리입니다. 인간들이 그동안 내뱉은 모든 뜻이 죄에 지배 하에서 나온 뜻인 것을 노골적으로 까발리면서 성령께서는 겸해서 주어지거든요. 성령께서 나오는 지점이 뭐냐,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거든요. 제가 아까 출애굽 할 때 어린양이 죽었다고 했지요. 죽음의 힘이 살고자 하는 힘을 이겨내야 비로소 그것이 생명이라는 겁니다. 살고자 하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고 살고자 하는 그것은 이미 인간이 자신이 죽었다고 자백하는 것밖에 안돼요. 죽어가고 있으니까, 자꾸 무서우니까 자꾸 살아보겠다고 하는데 이미 산사람한테는 살겠다는 그것이 남의 이야기가 되어버렸지요?
이미 영생 얻은 사람에게는 살겠다는 생각이 없고 어떻게 죽이시는가, 그것만 남아 있어요. 이 땅에서 무슨 일 하다가 죽는가, 그것만 남아 있어요. 오늘 본문 내용을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갈 바를 알지 못하기에 너희는 기도해도 소용없다. 그러면 성령께서 기도하시지요. 기도하시는데 그냥 기도하시는 것이 아니고 중요한 단어가 하나 나옵니다.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 아예 우리가 연약하다고 단정을 짓고 나오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 아예 우리가 기도할 줄 모른다고 단정 짓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중요한 단어,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그 뒤에 나오는 단어가 뭐냐, “탄식”입니다. ‘휴, 이것들아!’ 이런 식이지요. 탄식하는 거예요. “기도하는 꼬라지하고는!” 이런 식인 거예요. ‘휴, 저것도 기도라고. 백날 기도해봐야 하나님이 응답도 안 해주는, 마귀만 응답해주는 그런 기도만 해대는 저 꼴 좀 봐.’ 이런 식이라는 말이지요. 우리의 기도가 성령으로부터 탄식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의 기도는 항상 기도하는 내 자리로 되돌아온다는 점이 문제에요.
기도를 내가 하게 되면 기도하는 나의 이익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세상에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뭔가 반대급부와 보상을 기대하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빙자해서 자신의 영광을 노리고 하는 기도라는 말이지요. 그것은 성령 보시기에 탄식거리밖에 안돼요. ‘무슨 저따위 기도가 다 있어. 내가 그렇게 기도해도 못 알아듣네.’ 그런 식으로. ‘저것도 기도라고 아멘, 하는 것 봐라. 어딜 그것도 기도라고 거룩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붙이나?’ 성령께서 이런 식이에요.
제가 이렇게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면 기도하지 말까요?”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러나 저러나 기도해야 돼요. 왜냐? 방금 한 것 다시 할게요. 기도라는 것은 갈림길을 만드는데 갈림길이 뭐냐 하면, 내가 해 낼 수 있는 것, 내가 기도해서 응답 받을 수 있는 것 그거예요. 내가 기도해서 응답받았다, 그걸 다 끄집어내세요. 끄집어 내놓고, “이것이 내가 지금까지 알 수 있는 한계인데 제발 이것이 죄인 줄 알게 해주시고 제발 내 뜻대로 안되게 하옵시고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주의 뜻에 일임하는 그 갈림길에서 기도가 나와야 돼요.
기도는 일종의 파열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적막이 깨지고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 다정해 보이는 이웃집 부부가 어 제 밤사이에 와장창 깨질 때 주위 사람들은 알지요. 아, 저것이 부부의 본 모습이다. 친하게 지내고 서로 예뻐해도 어제 밤 사건에 비추어 보면 다 가식적인 것으로 드러나잖아요. 진짜 기도라 하는 것은 파열음, 깨지는 소리가 나야 돼요. “내가 하나님 믿어서 이익 본 것이 없습니다. 나는 손해 봤습니다. 이쯤에서 하나님 그만 믿으렵니다. 예수 안 믿으렵니다.” 그 시점, 그 순간에 평생 해보지 못한 기도가 그 틈을 비집고 튀어나옵니다. 감추었던 현실이라는 것은 우리가 아는 현실의 막을 뚫고 나올 때 그 뚫을 때의 파열음, 깨지는 소리가 나와야 돼요.
진짜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와 좋게 지내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찢어버려요. 찢어버리면 내가 그렸던 모든 인생의 스케줄과 계획들이 그 성령에 의해서 같이 찢어지는 겁니다. 「전도서 속의 그리스도」라는 책을 쓰면서 그런 글을 썼어요. “인생이란 허공에 쓴 낙서”라고 했어요. 백날 써봐야 나중에 허공에다 낙서한 것밖에 안돼요. 인생이란 소유를 가지고 판돈으로 해서 세상에 나가서 게임해서 남의 돈 따내려고 하는 이 모든 애굽판, 세상 판, 이것이 다 허공에다 한 짓거리에요.
처음부터 게임이라는 것이 없었어요. 스스로 게임을 만들고, 거기에 자신이 자존심을 걸었고, 그게 안 되니까 자살을 시도했고, 그것이 다 헛꿈, 인생이란 다 어젯밤 꿈같아요. 인생 자체가 전혀 현실적이 아니에요. 그냥 같이 노닥거리는 애굽이라는 놀이판입니다. 성령님의 이 뜻은 기도부분에 있어서 구약부터 상당히 중요한 교훈을 주는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이 뭐냐,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나오는데 여러분이 다 아는 내용이에요. 엘리야선지자가 북쪽의 아합왕을 만나서 내기를 걸었습니다.
850대 1로 붙읍시다. 고등학교 때 17대 1로 붙었다는 이야기는 영화 속에는 나오지만 850대 1로 붙어서 이겼다 하는 것은 구라라도 너무 심하게 느껴지잖아요. 850대 1이라는 것은 사실은 엘리야 하나, 이 하나는 없는 존재고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전부 다 850에 붙게 되어 있지 하나에 붙는 바보 등신은 없습니다. 850대 1로 붙읍시다, 할 때의 이 850은 인간으로 생겨먹은 존재는 전부 다 거기에 동의하고 납득할 수밖에 없는 종교행위를 하는 사람이라고 보면 돼요. “과연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인지 한 번 붙어봅시다.” 하고 붙는 장면이에요.
결과를 우리가 미리 알아요. 결과를 미리 알기에 재미가 떨어지는데 결과를 모른다고 치고 850대 1의 현장에 들어가 봅시다. 송아지 한 마리 잡는 거예요. 제단 쌓아서 송아지 잡아놓고 “진짜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말고 불로 응답하는 신이 진짜 신이라고 해서 실제로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목격할 수 있는 장면을 한 번 만들어보자.”하는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빼고 인간이 안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현장에 나타난 신은 참된 신이라고 간주하자고 게임의 내용을 걸고 붙었어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장구치고 북치면서 부흥집회를 열었습니다. “신이시여, 신이시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살아있음을 우리에게 목격하게 하옵소서. 모든 백성에게 납득이 되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소망하는 그 소망을 몰라요. 보이는 것으로, 그들은 간증으로 버티는 사람들이에요. 엘리야가 옆에서 놀립니다. “너희들의 하나님이 주무시는 모양인데 좀 깨워야지? 더 난리를 좀 쳐보지.” 그래서 약이 오르니까 난리를 쳤는데 그래도 안 되니까 칼을 가지고 자해를 합니다.
자기 맨 몸을 칼로 막 긋습니다. 피가 나지요. 그걸 보는 백성들은 흥분할 수밖에 없어요. 피를 보는데 흥분이 되지요. 스페인 투우 있잖아요. 소가 날뛰는 그 자체보다도 소가 피를 흘리면 그것을 보고 군중들이 흥분하거든요. 피를 보니까 백성들과 피를 흘리는 자기들끼리는 흥분했는데 하나님은 전혀 흥분을 안 하셨어요. 조용했습니다. 자기들끼리 시끄러웠지요. 그래서 “치워라. 내가 나설게.” 하고 엘리야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제단 쌓을 때도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어요.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 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만한 도랑을 만들고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 그리하라 하여 세 번 그리하니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왕상 18:30-35)
돌 열두 개를 취하는데 그 열둘이란 열두 지파, 인간들의 손에 의해서 완전히 망쳐버린 이스라엘, 우상집단으로 변해버린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열두 돌을 놓습니다. 그 다음에 곡식 종자 두 세아, 두 세아는 한 18리터 정도 되는데 그 두 세아의 곡식 종자를 심을만한 공간을 만들어서 도랑으로 냅니다. 그 다음에 물을 붓는데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세 번을 붓는 것이니까 열 두 통의 물을 거기에 붓습니다. 12가 두 번 강조되었지요? 돌도 열 두 개고 물도 열 두통이지요. 무슨 뜻이냐 하면, “이스라엘이라는 것이 원래 이스라엘 자체적으로 자기를 구원하거나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이스라엘 나라 차제는 처음부터 하나님계획이지 이스라엘 우리 계획은 아니었잖아요.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이니 알아서 책임”져 달라는 뜻에서 하나님의 책임 하에 있는 맡겨버린 열 두 지파로 제단의 모양새를 그렇게 만듭니다.
물이 흘러서 철철 넘치지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 보기에 ‘이상하다. 불로서 응답받아야 되는데 불의 상극인 물을 채우니까 바짝 말라도 불이 붙을지 의심되는데 물을 가득한데다 번개가 친다 해도 안 될 판이잖아요. 장마철에 산불이 나던가요? 장마철에 산불 내라는 소리하고 똑같은 거예요.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거든요. 그렇게 해 놓고 그 다음에 엘리야가 기도합니다. 기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것이 있잖아요. 그 약속이 유효함을 보여주옵소서.”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책임질 문제지 우리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기도로 유지될 수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저는 믿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맹세하신 것은 우리보고 지키라고 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것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인 것을, 지킬 수 없는 무능자 인 것을 날이 갈수록 더욱 더 까발려 주옵소서.”라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하나님의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바른 태도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850명 그 인간들은 칼 가지고 자기 몸을 찌르고 소리 지르면서 자기들은 흥분한 거예요. 부흥회 하면서 자기들은 흥분했는데 이게 흥분한다고 해서 성사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부흥회 하면서 박수친다고 해서 성령이 오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여, 부르면서 고함을 치고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기도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깜짝 놀라서 일어서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간절히 기도하고, 애곡하면서 기도하고,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는 것,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겁니다. 우상의 극치에요.
엘리야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그 기도의 내용이 뭐냐, 구약자체는 몰라요. 신약 마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 변화 산에 올라갔는데 거기에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임원진들 세 사람 데리고 가지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 세 사람을 데리고 갈 때 저 쪽에서 하늘나라 대표자가 세 명 등장합니다.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가 등장하지요. 그때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제가 방금 이야기한 열왕기상 18장에서 엘리야가 무슨 생각으로 기도했더니 응답되었느냐, 이것을 구약당시는 몰랐었는데 신약의 변화 산에서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와의 대화중에 그 해답이 풀립니다.
그게 뭐냐, “예수님, 언제 돌아가십니까?”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예수님의 별세, 죽으심에 대해서.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구원받는 문제는 살아 있는 내가 온갖 정성과 봉사와 헌금을 쳐 바른다고 해서, 교회에 바친다고 해서 구원될 문제가 아니고, 착하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선교사 보내고 온갖 좋은 일 다 한다고 해서 구원될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대신 돌아가셔야 됩니다.”라는 그 정보가 성령을 통해서 미리 앞당겨서 엘리야에게 온 겁니다. 그래서 엘리야로 하여금 그 시대의 표현으로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대로 이루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한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제단에 열두 돌을 쌓고 물을 열 두통 부었던 그것은 단순하게 보기에는 그저 돌덩이고 물로 보이지만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지시는 그 취지를 그 당시의 도구와 기제를 가지고 표현한 거예요. 노아 방주에서 나오면서 더러운 짐승도 실었는데 그 더러운 짐승은 그냥 두고 깨끗한 짐승을 잡아 죽이는 것은 장차 오실 흠 없는 예수님께서 죄 많은 우리,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을 미리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보여주는 거예요.
그것을 베드로전서 1장 10절에서 뭐냐, 선지자들에게 예수의 영이 미리 가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한테는 예수님이 영이 십자가 이후에 이미 주어졌지만 구약 때는 미리 가 있는 거예요. 미리 가 있기에 엘리야의 모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지시는 그 취지를 그 당시 환경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물을 부었거든요. 물을 부으니 철철 넘치죠. 그런데 거기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불이 그 많던 물을 싹 핥아서 완전히 증발되고 말았어요.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 앞에 살 자가 없다는 겁니다. 어느 인간도, 엘리야도 마찬가지고 850명 그들도 마찬가지고, 어느 인간도 하나님이 무서운 저주의 심판 앞에 살 자가 없는 거예요. 처음부터 저주받아야 마땅한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하나님이 내리시는 그 저주에 주님께서 함께 뛰어든 거예요. 주님이 하나님의 저주에 뛰어들어서 함께 폭파되시는 거예요. 하나님에 의해서 주의 이름이 홀라당 저주를 받는 모습이라는 말이지요. 거기에 같이 뛰어든 사람만이 영생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엘리야를 통해서 보여준 감추어준 비밀입니다. 종교? 교회? 기독교? 이것은 인간들이 해 낼 수 있는 장난감, 또는 문화, 취미활동, 친목단체, 그것밖에 안돼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전부 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가지고 나를 살려내 보겠다는 하나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취지가 뭐냐, 열왕기하 17장 32절에 보면, 북쪽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저희가 또 여호와를 경외하여 자기 중에서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택하여 그 산당에서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니라.” “자기를 위해서 제사 드”린다는 말이 나오지요?
우상이라는 것이 조상 섬기고 부처 섬긴다고 우상이 아닙니다. 우상은 자기를 위해서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할 때 그것이 곧 우상이 되는 겁니다. 자기를 위해서 하겠다는 것은 살아보겠다는 것이거든요. 살아보겠다는 이것은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예요. 교회 와서 간절히 기도하고 간절히 봉사하고 헌금하는 그것이 다 무슨 짓입니까? 한번 살아보겠다는 거예요. 이왕 사는 것 잘 살아보겠다는 것이고 이왕 사는 것 죽어서는 좋은 나라 가보겠다는 자기시도인데 그런 시도는 해 봐야 다시 본래의 자기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 밖에는 안돼요.
백날 신이시여, 주시여, 하지만 그 속내를 주님이 모를 리가 있습니까? “네가 이렇게 설치고 시간 내서 교회 찾는 것, 다 너 좋으라고 하는 짓이잖아. 어디서 꼼수야? 네가 고 3이니까 좋은 대학 가려고 그 짓 하는 거잖아. 어디서 꼼수를 쓰는 거냐?” 우리는 빌 바를 알지 못해요. 우리는 애굽, 이 세상에서 살면서 남이 가진 좋은 것을 못가지면 화가 나요. 인생, 사는 것 같지가 않아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생각을 가지고 어디 오는가? 교회 와요.
교회 왔다는 것은 이미 뭔가 꼬였다는 뜻이거든요. 꼬여서 교회 와서는 성경을 보고 봉사를 하고, 이런 안하던 행세를 하게 됩니다. 새벽기도까지 막 하고. 목사 보기에는 위태위태해요. ‘무슨 문제가 생겼구나. 몇 개월이나 가는지 한 번 보자.’ 과연 몇 개월 가지도 않아요. 사는 게 원활하게 되면 교회 찾지도 않습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죽은 자입니다. 산자가 역사를 움직인다고 우리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그렇게 배웠어요. 그래서 역사의 영웅들은 전부 다 산자, 살아 있으면서 큰 일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혹시 기억이 나실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이미 죽었어요. 예수님은 죽은 분입니다. 죽은 분이 죽음의 세상을 이끌고 산자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살았다고? 실은 너희가 죽은 자로다.” 진짜 산자는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받은 사람 외에는 다 죽었어요. 내가 살았다 하나 실상은 죽은 자고 내가 죽은 자인데 성령이 와서 날마다 살려내는 식으로 살 때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이 항상 느끼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왜 죽은 자 일 수밖에 없는지의 이유를 매일의 생활을 통해서 파악해 가는 거예요.
‘아, 내가 아무리 복음을 알고 십자가를 알고 주님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내가 하는 짓거리는 세상 것만 찾고 돈만 찾는 육신의 본성이 그대로 평생 동안 이어져 간다.’는 사실입니다. 전에도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제가 이전 교회에 있을 때 나이 90넘은 권사님이 죽기 전의 유언이 “내가 죽거든 관은 대리석으로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돌아가실 그 순간, 끝까지 자기의 명예를 포기 못하는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일 거잖아요. “내가 죽어도 너희들은 유산 때문에 싸우지 마라.” 죽은 자는 그런 소리 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그 후손들이 대리석으로 관 해줬을까요, 안 해줬을까요? 턱도 없는 소리입니다. 절대로 안 해줬어요. 죽어버렸는데 뭐. 소용없어요. 복음은 하나님 명예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명예에요. 십자가만 외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나도 살아야 되니까 그런 거예요. 나도 살아야 되거든요. 십자가만이, 그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를 때만이 사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에 같이 참여하는 것을 아무도 원하지 않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눅 14:26) 한다는 이 말을 지킬 위인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흘러가듯 가지요. 하지만 성령님은 그런 우리를 놓치지 않고 기어이 우리로 하여금 처나 자식에게 문제가 생기도록 해서 ‘나는 처나 자식이 좋은 줄 알았더니 나는 예수님이 더 좋아.’라는 쪽으로 방향 틀기, 좁은 길 가기, 이렇게 성령께서 탄식하고 기도하시면서 우리에게 그 응답을 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인생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우리수고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님의 기도의 작품으로서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겁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네 힘으로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성령의 힘으로 오늘도 이 자리에 앉아 있고 “못된 인간이고 생각한다는 것이 돈밖에 모르지만, 자기 성공밖에 모르지만, 하나님의 명예, 복음, 이 하나님의 명예를 걸고 이 못난 너를 기어이 건져 내고야 말리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광주광의 끝부분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신자가 아닌 사람은 30년, 40년 교회 다녀도 결국 이런 소리 합니다. “내가 한 40년 교회 다녔고 장로(목사)도 되었지만 깨놓고 이야기해서 내가 지금껏 인생 산 것은 다 내 덕이고 내 힘으로 살아왔지 하나님이 나 도와준 것 없습니다. 역시 믿을 놈 나밖에 없습니다.”
남에게는 안 들키지만 속으로는 그런 생각 가지고 죽습니다. 성령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반면 성령 받은 사람은 뭐냐, 평생 살아가면서 “하나님, 제가 평생 살아가면 매순간마다 하나님께 욕을 돌리고 하나님의 명예를 추락시키고 하나님을 미워하지 않은 순간이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기어이 주의 품에 안기네요. 참 뻔뻔스럽지만, 평생 동안 주님 욕한 것 밖에 생각 안 나는데, 속으로 주님 미워한 것 밖에 생각 안 나는데 그래도 주님은 ‘네가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고 기어이 주의 품에 안기게 해주시네요. 이 모든 공로는 주의 십자가 피의 공로입니다.” 이런 고백만 할 뿐이에요.
그래서 사도들은 방금 제가 길게 이야기한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한 줄기 빛이 되어 어둠을 밝히는 그대여 내 사랑, 그대 없이는 못살아요. 나 그대에게 모두 드렸으니 나를 버리지 마세요.”라는 식으로. 사랑이라 하는 것은 바로 그대 앞에서 내가 왜 그리도 작아지는지, 그게 대중가요 가사에 나오는 거지만요, 우리는 이런 사랑이 연애할 때 몇 개월에서 한 1년쯤, 잠간일 뿐이고 결혼하고 나서 잊어버린 거예요. “당신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하겠다.” 남자들이 연애할 때 그런 소리들 다 한 번씩은 하잖아요. “결혼하면 당신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하겠다.”고.
기껏 해준 것이 고무장갑 하나 사줘서……. 살아 있는 내가 살아 있는 나를 살리지 못합니다. 어떤 모임에서 한 윤범 목사님을 안 좋게 생각했는지 목사님에게 물었어요. “목사님은 예수를 믿습니까?” 한 윤범 목사님이 아주 명답을 했어요. “나는 예수 안 믿습니다.” 한 윤범 목사님의 그 뜻은 뭐냐 하면, 내가 예수 믿어서는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언급한 거예요. 예수 믿어서 구원받지 못해요. 왜냐, 우리는 예수 믿은 적이 없어요. 왜냐, 우리는 예수 믿는 나를 믿기 때문에.
결국 믿는다, 믿는다, 해도 내 성과나 내 자랑, 내 대견함, 내 잘남, 내 자랑 질, 그것으로 결국 돌아와요. 백날 교회 다녀도 마찬가지고. 아무리 성경 봐도 마찬가지고 목사 장로도 마찬가지에요. 자기자랑 질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내가 예수 믿어도 나 믿는 것 밖에는 안 된다는 그 죄를 깨닫는 것은 성령님의 몫입니다. 우리가 엘리야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모세가 되는 거예요. 그 많은 일을 했던 모세, 그렇게 큰 일 했던 모세나 엘리야도 결국은 십자가 지는 것만 바라보면서 “주님이여, 십자가 언제 지십니까? 십자가 언제 지십니까?” “모세 너는 백성 이끌고 큰 일 했고 엘리야 너는 그 때 850대 1로 붙어서 이겼잖아.” “주여, 그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내가 구원받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십자가 지신 주께서 해주셔야 되는 겁니다.”
“내 사랑 그대여~” 오직 주님밖에 없어요. 오직 주님밖에 없어요. 사도들이 평생을 원치 않는 길로 가면서 늘 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전한 거예요. 가짜들이 얼마나 나왔던지. “여러분, 예수님은 구세주입니다. 성령 받아야 구원받습니다. 십자가 복음…….” 그 이야기를 한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았지만 사도바울은 그들이 가짜인 것을 알았어요. “목사님, 예수 믿습니까?” 사도바울 같으면 “나, 예수 안 믿습니다. 주께서 예수 안 믿는 나를 주께서 구원함을 나는 성령에 의해서 믿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나의 행함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엡 2:8)이라.
이 선물이 선물되기 위해서는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전부 다 수집하세요. 수집해서 그걸 다 쓰레기통에 집어넣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기도했던 모든 성과, 공로, 경력, 경륜, 직분, 쓰레기통에 다 집어넣으시면 그게 바로 내 인생에서 쟁반 깨지는 파열음이고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고 깨질 때 비로소 그 뒤편에 십자가의 진짜 현실, 피 묻은 손으로 주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피가 너를 구원했다.”는, 약속성취자는 오직 주님밖에 없음을 다시 한 번 똑바로 쳐다보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도 성령께서 개입하셔서 우리보고 나무라시고 지금도 탄식하면서 기도하는 그 응답은 오직 십자가를 모독하지 말라는 것, 복음을 모독하지 말라는 그 음성인줄 압니다. 날마다 살면서 자기 자랑하기 바빠서 십자가 모독하고 주의 은혜 까먹었던 저희들, 다시 한 번 용서해주셔서 십자가만이 구원하는 길인 것을 증거 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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