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땅 없는 자

아빠와 함께 2022. 6. 26. 19:14

땅이 없는 자 

2022년 6월 2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15-19

(1:15) 내가 북방 왕국들의 모든 족속들을 부를 것인즉 그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 그 사방 모든 성벽과 유다 모든 성읍들을 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16)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그들에게 선고하여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

(1:17)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

(1:18) 보라 내가 오늘 너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1:19)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역사는 나라마다 있어서 각 나라는 자기 역사만을 고집합니다. 자기 나라의 민족과 국가가 마땅하고 정당한 자세를 갖추고 존재할 만해서 존재한다고 우기고 싶은 겁니다. 인류 역사 전체를 다 아우르는 그런 역사관은 하늘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스케줄에 의하면 역사 자체가 끝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즉 ‘나의 역사가 있다’를 주장하면 바로 그 자가 멸망당할 대상이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인류 역사를 이끄는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을 끝장내는 하나님’은 결코 세상 민족들은 받아들일 수도 없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느 민족도 자신의 민족과 자기 자신이 끝내기를 고대하는 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직 선지자에게만 왜 하나님께서 세상에 종말을 집어넣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예루살렘 중심점으로 하여 세상 모든 역사를 그곳에 집중토록 그동안 이끌어 오셨습니다. 외부에서 보면 이런 견해 또한 ‘이스라엘의 하나님 중심’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을 겁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세상 멸망의 기조, 혹은 전제로 하시는 이유는 참된 신과 다른 신과의 구별은 오직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다른 민족은 신과 참된 신을 구별할 수 있는 권한조차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존재하므로서 그들 민족은 무조건적으로 참된 신을 몰라야 되는 민족으로 분류되는 겁니다.

다른 민족들의 움직임은 당연히 이스라엘 하나님에 의해서 조정됩니다. 하지만 이들 민족들이 자체적으로 가지는 의식이나 사상은 결코 이 세상은 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존속하려고 애쓴 만큼 존속될 수 있는 희망이 성립될만한 세상으로 여깁니다. 오늘날 평범한 현대인들이나 가정에서 갖고 있는 생각들입니다.

세상이 종말이 온다면 그만큼 타당성이 있을 것이라고 여겨질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예루살렘이 망하는 것은 참된 신을 버리고 ‘사람 손으로 지은 신’을 섬겼기 때문이랍니다. 따라서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미리 종말을 알아야 될 민족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도 역시 이방민족과 마찬가지로 망한다는 것은 유일한 종말성이 남겨진 곳은 선지자 본인뿐임을 말해줍니다.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음식점을 내기 위해 개업 전문가에게 조언을 받는다고 해봅시다. 음식점을 내기 위해 투자금을 낸 주인쪽에서는 사람들을 끌어 당길 수 있는 기술적인 방법에 신경쓸 겁니다. 하지만 상담해주는 사람은 그 주인의 인간성에 주목합니다. 그 사람이 평생 살아온 삶을 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인간성 자체를 갈아엎지 않는 한 이 장사 문닫아야 할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 도시 자체를 잘 건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매달리고 하소연하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선지자가 종말을 하는 것으로 종말다움의 끝은 아닙니다.

선지자의 인간성 자체가 장차 오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마태복음 26:39에 보면,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마저도 기도 전의 마음과 기도하고자 하는 의도를 연결시키십니다. 예수님의 자신이 원래 품고 있는 뜻은 기도 후에 주어지는 뜻과 일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즉 예수님 자신 내부에 변화를 기도를 통해서 드러내시는 겁니다. 종말이란 우리 인간들이 나름대로 계산한 모든 설계를 무효화되는 겁니다.

종말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기존의 종말에 관여할 수 없는 우리 인간의 한계를 고백하는 바가 됩니다. “제 자신은 종말이 언제 어떻게 오는 지는 알지 없지만, 이런 나의 뜻을 묵살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뜻, 곧 종말을 실행하시옵소서”라고 부탁하는 겁니다. 종말이란, 종말을 대비하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종말됨을 스스로 맡기게 해달라는 겁니다.

이런 자세로 마음이 바뀌는 것인 신약 세계의 형편입니다. 고린도후서 6:2에 보면,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종말이 되어야 참으로 마음 상태가 종말에 적합한 자를 골라 낼 수가 있는 겁니다.

예루살렘 멸망 소식이 걱정되어 예루살렘 자체를 유지하려는 시도는 부질없는 짓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의의를 온몸으로 자신에게 이전시켰습니다. 그리고 온전한 예루살렘으로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더는 건축구조물로서 예루살렘과 성전의 의미가 없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더는 멸망이나 무너짐 자체가 놀랄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성 자체가 중요합니다. 종말을 받아들이는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십니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1:18-19)

즉 참으로 구원받고자 한다면 예레미야 중심으로 보이면 됩니다. 예레미야에게서 쏟아지는 말씀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 종말적 사실을 말입니다. 구원이란 이처럼 세상의 무너짐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아직 종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현대인들 사이에 소위 ‘소확행’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남의 일에 간섭하거나 세상에서 크게 되고자 하지 않고 ‘소소하지만 확실하고 작은 행복’을 갖고 살고 싶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참으로 불안정적입니다. 계속 자기 인생을 걸고 실험하듯이 시도합니다. 뭔가 더 행복한 게 나타나기를 고대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 13:14에 보면,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기업으로 준 것이 없었으니 이는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들의 기업이 되었음이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레위지파 및 제사장과 나중에 선지자는 이 지상에 땅이 없습니다. 그만큼 그들을 통해서 주님의 종말성을 마음껏 드러내신다고 보면 됩니다. 오늘날 성도가 이런 형편에 있습니다. 소위 이 땅에 여전히 미련있는 자들이 어떻게 극한 몸부림을 치는지 지켜 봅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이 구원받을 때인고, 세상 형편에 마음 빼앗기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5강-예레미야 1장 15~19절(땅 없는 자)220626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장 14~19절입니다. 구약성경 1050페이지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북방 모든 나라의 족속을 부를 것인즉 그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 그 사면 성벽과 유다 모든 성읍을 치리라,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베풀어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다 그들에게 고하라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두렵건대 내가 너로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게 할까 하노라, 보라 내가 오늘날 너로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 역사관은 일방적입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역사가 예루살렘 성소라는 어떤 특정 지역과 관련되어 있다고 이스라엘 선지자가 이야기합니다. 다른 나라의 역사는 완전히 개무시합니다. 우리 단군 조상의 역사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고려서, 또는 조선왕조실록, 오늘날 한국에서 배우는 역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그 최종목적이 지금 대한민국이 얼마나 정당하게 존재해야 하는가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그 역사를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지 않습니다. 역사는 이미 확정되었어요. 예루살렘을 겨냥해서 15절에 보면 “내가 북방 모든 나라의 족속을 부를 것인즉 그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라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중심, 배꼽, 옴파로스(Omphalos)라고 하는데, 이 세상의 중심은 예루살렘으로 이미 확정 났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없어지면 세상은 끝입니다. 아직도 이스라엘 나라는 예루살렘에 의미를 두고 있어요. 그리고 많은 기독교 교회가 마치 지금 있는 예루살렘이 하나님이 지켜주는 곳인 것처럼 그렇게 성경을 예언서로 해석을 해서 예루살렘에 무슨 일이 있으면 마지막 3차대전이 일어나서 예수님이 곧 재림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미 예루살렘의 의미는 어떤 지역의 부동산의 의미, 예루살렘이라는 성전의 의미는 누구에게 넘어갔어요. 예루살렘이라는 특정 지역이 예수님이라는 어떤 인격체로 넘어 가버렸습니다.

예수님은 홀라당 예루살렘의 인격적 의미를 담고 구름 타고 이 땅을 떠났어요. 떠나버리면 이 땅은 예루살렘이 되든, 누가 되든, 이 세상은 파괴될 일만 남아있습니다. 이 말은 인간들이 세상에서 잘해보겠다고 하는 것은 다 헛소리입니다. 어느 누가 예수님 만한 인격이 어디 있으며,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룬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 떠난 이후에 어떤 인간도 자기 인간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합류하려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고 실패로 끝납니다.

어떤 사람이 음식점을 잘해보려고 카운슬러(상담 전문가)를 찾아서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고, 손님은 어떻게 해주면 되고, 내부장식은 어떻게 하면 되는지 이야기하게 되면 진짜 제대로 된 카운슬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 인간성이나 바꿔라’ 가게 구조 바꾸려고 하지 말고, 손님 대접하려고 하지 말고, 네 인간성 자체가 잘못되어있으니, 네가 살아온 과거 다 뒤엎지 아니하면 너는 사업 성공하지 말라는 거죠.

이게 진짜 제대로 된 카운슬러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것을 카운슬러하십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보면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나옵니다. 지금이라도 세상을 포기하고 직장이고 가정이고 삶이고 미련 두지 말고 내가 떠라라 할 때 늘 떠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이 말은 내가 뭘 준비해야 하는 가가 아니라 네 인간성 자체가 예수님의 인간성으로 들어와서 바뀌어 버리면 언제 주님 재림하시더라도 네가 염려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성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에. 그러면 주님의 그 인간성 자체가 어떤 인간성이어야 하는가. 여기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루살렘 망한다. 쳐들어온다’ 그게 쳐들어오는데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그것은 하나님을 섬겨야 할 장소인 예루살렘에서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베풀어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라고 되어있어요. 그래서 이 말씀을 딱 듣고 여러분들은 이렇게 정리하면 됩니다. 세상의 시간 단위로, 초 단위로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시는 원동력은 인간이 아니고 우리 주님이 그렇게 하시고 주님이 개입해서 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주님이 하는 일에 대해서 뭘 알아야 하느냐 하면 왜 내가 사는 이 정든 고향을 우리는 아낌없이 포기해야 하는가. 그것은 제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 죄 때문에 반드시 그런 처벌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면 돼요. 이 땅에 대해서 미련을 가지고 아직도 잘 해보겠다고 하는 이 모든 것,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뒤틀린 것은 모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세상이 뒤틀렸다고 해요.

그런데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세상을 구성하는데 보탬이 된 것이 너라는 거죠. 너의 뒤틀린 사고방식이 세상을 뒤틀리게 하는데 이미 거기에 기여하고 있는 겁니다. 바둑을 좀 두는 사람은 바둑알을 놓을 때 그 바둑알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며 둡니다. ‘내가 너를 이 바둑판 위에 놓지만 내가 너를 죽여줄게. 너는 살려고 하지만 나는 너를 죽이기 위해서 이 판 위에 알 하나, 둘, 셋, 넷,...이렇게 놓는 거야’

자기가 놓은 바둑알을 죽기 위해서 놓는다면 그 사람은 바둑 잘 두는 사람입니다. 5단 인정해 드릴게요. 자기 돌을 아깝다고 살리는 것은 바둑을 못 두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식들을 세상에 보낼 때 ‘잘 살아야 해, 버텨야 해’라고 하면 자식 잘 안되고 ‘네가 세상에 먹히더라도 먹힐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너나 세상이나 똑같아. 같이 뒤틀렸어’라고 그런 식으로 교육했는데

나중에 연락 와서 ‘아버지, 잘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하면 ‘네가 아직도 살아 있구나. 징계를 안 받는 모양이지? 어디 몸은 아픈 데 없나?’라고 하면 ‘건강합니다’라고 대답하죠. 그러면 ‘왜 건강하지? 이상하네. 그러면 밥은 먹고 사나?’ ‘먹고 삽니다’ ‘이상하다. 굶어야 하는데 왜 먹고살지?’

분명히 주님께서 다스릴 때, 이 세상 모든 것을 징계하신다고 했고, 나를 비롯해서 의인이 없는 것은 당연한데 왜 자꾸 이렇게 계속 살지? 아하, 이것은 우리 행동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살려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죠. 하나님께서 살려주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 신경 쓰지 않고 살려주시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걸 십자가에서 함축하고 있습니다. 지금 선지자 이야기하기 전에 다른 이야기 하고 선지자 이야기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39절에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의 태도는 이렇습니다. ‘내 소원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내 소원 있는 것을 아버지가 그냥 방치하지 마시고 내 소원대로 안 되도록 아버지 일이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어요.

대구에 유명한 기도원 중에 주암산 기도원 있는데 그 기도원이 팔렸답니다. 그전에는 누구나 자유롭게 가서 기도했는데 이제는 그 기도원을 산 새로운 주인은 예배를 참석해서 목사에게 세례받지 않으면 오천원 줘도 밥을 안 준답니다. 점심을 안 줘요. 그리고 골방에서 기도하는 것도 허락을 안 한답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어요? 같이 동업하자는 거죠.

그 기도원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 제 소원은 이렇습니다. 그런데 제가 딴 것은 모르지만 절대로 주께서 내 원대로 안 해주는 것에 대해서 제가 찬동하고 수긍하고 그것에 대해 어떤 결과가 나와도 감사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하셔야 해요. 그만큼 이 세상이, 이 북방 나라 전체가 불손하고 더럽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최고의 일본 작가가 있는데 이 사람이 만든 용어가 굉장히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소확행’이라는 용어입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최고라는 겁니다. 성경은 그걸 가지고 같은 세자로 말합니다. ‘더럽다’ 그게 더러운 겁니다. 남 신경 안 쓰고 그냥 내가 마음 낮춰서 소소한 행복이지만 이것도 행복하다고 여기면 되지 않겠느냐. 그것마저도 종말의식이 날아가 버린 거예요. 이 땅에서 그게 내 뜻인 건 맞는데 주의 뜻은 우리가 거기에 발 딛지 않도록 빼내 버리시는 겁니다. 그게 선지자와 관련이 있어요.

이게 정리되지 못하면 오늘 선지자 이야기를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선지자를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그게 뭐냐 하면 이 땅에 자기 땅이 없는 사람이 선지자입니다. 성경에서 여러분이 그걸 찾아내야 해요. 그걸 볼 줄 알아야 해요. 원래 선지자 이전에 제사장이 그 역할을 해야 하는데 제사장이 그 역할을 못 하니까 선지자가 그 역할을 한 겁니다. 여호수아 18장 7절에 보게 되면 “레위 사람은 너희 중에 분깃이 없나니”

그리고 여호수아 13:14에도 보면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기업으로 준 것이 없었으니 이는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들의 기업이 되었음이더라”

땅이 없다는 말입니다. 땅이 없다는 것이 뭔가 답답하다, 불안하다, 초조하다가 아니라 속 시원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땅에 땅이 없는 것이 돈 없어서 못 사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거는 돈을 허투루 써서 다 날려서 그런 거고. 그게 아니고 내 부동산 있고 아파트 있고 다 있는데 내가 그것을 영원히 지킬 필요가 없는 인격으로 존재로 주께서 달라지게 한 거예요.

제가 아까 음식점 낼 때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들이 인간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고 했죠. 어떤 기술이나 요령을 배우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 꼬이는 요령 배운다고 장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 자체가 달라져야 해요. ‘이 식당은 내 식당입니다’라는 사고방식 가지고는 장사 안됩니다. 아홉 군데 열 군데가 다 그렇게 해도 한 군데라도 ‘오는 손님에게 내가 뭐라고 봉사하면 될까. 내가 목숨 부지하는 한 그 사람들을 먼저 챙겨야지’라는 이런 마음으로 장사하는 사람 없습니다.

없는데 혹시 잘못 생각해서 한 군데라도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성공하지요. 사람들이 비교하니까요. 사람들은 입가에 미소하나 놓치지 않습니다. 저 사람이 무엇 때문에 음식을 내고 무엇을 목적으로 사는지 손님들이 바보가 아니고 다 눈치챕니다. 다 알아요. 이 가게가 손님을 이용하는지, 아니면 자기를 이용하라고 자신을 드러내는지 오는 손님이 눈치가 빨라서 바로 압니다. 그리고 한번 더 마음에 들었다고 이렇게 꽂히게 되면 코로나고 우크라이나고 전쟁 터져도 옵니다.

땅이 없는 민족을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완성 시키시려고 합니다. 땅이 없는 민족. 이 땅에 악이 낀 거죠. 문제가 많은 겁니다. 자키쿠(Zakhiku)라는 고대도시, 문서에만 남아있고 실제로는 없는 그 도시가 이라크 지역에 수십 년 만에 가뭄이 와서 저수지가 바닥이 다 노출되면서 거기서 자키쿠(Zakhiku)라는 고대도시가 완전히 드러났어요. 이 말이 뭐냐 하면 주님은 자기 백성이 어느 나라에 적합한지 내 원은 모르고 주님의 원대로 하면 그걸 다 알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데 그 모델로써 선지자를 내세운 겁니다. 오늘 본문에 18~19절에 보면 “보라 내가 오늘 너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구원이라 하는 것은 주와 함께 동거해야 가능해요. 함께 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예루살렘이 멸망해도 누구는 살아있어야 하느냐면 땅이 없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살아있으면 그 이스라엘은 예레미야 중심으로 여기여기 모이라는 식으로 모이면 되는 거예요. 예레미야에게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말씀이 나옵니다.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하면 종말 이후에 삶에 대해서 예레미야가 종말도 이야기하고 종말 그 뒤에 어떤 일이 있는가를 예레미야를 통해서 계속해서 말씀이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종말은 우리가 경험 못 했잖아요. 경험할 수가 없죠. 이 세상에 풍조가 종말을 되게 싫어해요. 종말까지 안 가도록 하자는 것이 이 세상에 과학이고 기술이고 학문이잖아요.

그런데 예레미야는 어차피 인간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애초부터 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남들이 뭐라 하는데 거기에 휘말려 들면 안 된다는 겁니다. 초등학교 5학년에게 너의 소원이 뭐냐고 누가 물었어요. 아이가 다섯 자로 간단히 이야기했어요. ‘돈 많은 백수’ 어떻게 함축해서 다섯 자로 그렇게 이야기를 잘하는지. 더 이상 뭐를 보탤 것이 없어요. 다 들어있어요. ‘돈 많은 백수’

그걸 길게 늘인 초등학교 학생이 있어요. 이름이 김태연인데 트로트 부르는 아이예요. 그 아이가 장래희망이 뭐냐 하면 강남에 가서 아파트 장사해서 돈을 벌어서 엄마에게는 벤츠 자동차를 사주고 아빠에게는 람보르기니 스포츠카를 사준다는 거예요. 그걸 타고, 그리고 뭐 하는데요? 그거 타고 종말을 기다리나 그거 안 타고 종말을 기다리나 종말은 어차피 하나님의 뜻이고 확정된 거예요.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세상은 어차피 종말로 집결되게 되어있어요. 바닥이 중요합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이 똑같이 보이지만 주께서는 겉을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거든요. 그 인간성을 보시거든요. 인간성이 오는 세상에 적합한 인간성으로 이 땅에 달라졌는가를 보는 겁니다. 오는 세상에 적합한 인간성이 뭐냐 하면 선지자죠. 이 땅에서 땅이 없어요.

내 땅이 없는 거예요. 그냥 잠시 사는 것이지 내 땅은 없어요. 이건 누굴 닮았느냐 하면 예수님을 닮아서 그래요. 예수님은 이 땅에 다녀가신 거예요. 여기서 꾸준히 살려고 한 것이 아니에요. 다녀가시면서 이 땅에서 살려는 자들을 종말로 휘몰아 넣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속에 왔다는 것이고 이렇게 들어왔을 때 어떤 점이 좋습니까를 저에게 물으면 세상에 어떤 변화, 어떤 망함, 어떤 뒤틀림이 있더라도 그 뒤틀린 지금이 바로 은혜받을 때요, 같은 말로 선물을 받을 때요, 같은 말로 구원의 날이 되는 겁니다. 매일이 구원의 날이 됩니다. 매일이.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뭐냐. 선지자의 인생관으로 달라졌기 때문에 선지자의 안목을 가지고 이미 땅이 없으니까 이제는 땅을 차지하고 땅을 내 땅이라고 우기는 자들이 얼마나 헛짓하는지를 바라보면서 그들 앞에 예레미야처럼 그들 앞에서 ‘그건 아닌데’라고 때를 따라서 말씀을 전하는 그 일을 하면 됩니다. 별로 어려운 거 없어요.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가. 세상 사람들이 굉장히 민감해하는 것은 나의 적이 당신이 아닌지 굉장히 민감합니다. 특히 시골에 누가 전원주택 짓고 가까이 살게 되면 기존에 토박이 노인네들, 할머니들 모였다 하면 ‘저 인간이 어디서 사고치고 와서 또 우리 마을에서 사고 치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면서 굉장히 살피게 됩니다. 그 집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이장한테 군에 아는 사람한테 가서 저 사람 혹시 전과자 아닌가 뭐라도 떼보라고 하죠. 어디서 살인하고 도망 온 것은 아닌지, 어디서 돈 떼먹고 여기에 우리 사기 치려고 온 것은 아닌지, 특히 여기 계속 살면 되는데 1년쯤 있다가 또 떠나는 것은 아닌지.

요즘 젊은 세대가 특징이 뭐냐 하면 한 곳에 정주하지 않아요. 계속 돌아다녀요. 자기 인생을 실험하면서. 계속 실험적인 인생을 삽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식구가 불안하기 짝이 없지요. 애를 낳는 것도 실험삼아, 결혼하는 것도 실험삼아, 모든 게 실험이에요. 살다가 또 완도가서 한 달 살다가 경찰들에게 온 지역을 다 찾게 만들고. 젊은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얼마나 불안했으면 보다 더 행복한 삶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보다 더 나은 직장이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나만의 소확행같은 안전빵인 어떤 인생이 따로 있을 거라고 여기며 계속 설계하고 실험에 옮기고 그것도 만족 못해서 계속 또 시도하는 거예요. 불안정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 토착민에게 사람들이 겁나는 것은 혹시 귀신이 아닌지, 적이 아닌지 걱정을 하는데 우리가 이 땅에 사는 토착민으로서 이 땅을 생각한다면 딱 하나만 생각하면 됩니다. 귀신 만나는 것을 겁내지 말고 종말은 어떤 식으로 다가오는지 매일 삶을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종말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으시면서 주께서 부르실 때까지 한푼이라도 더 벌고 열심히 사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주님의 계획에 따르면 주님의 언약대로 끝입니다. 나도 끝이고 너도 끝인데 끝을 모르는 사람이 아등바등 발악을 하고 자기만 챙기고 남 공격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주의 은혜에 감사하고 복음을 전하는 그 느긋한 일을 우리가 왜 못하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종말을 두려워하지 않는 선지자, 그 선지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께서 너를 친히 지켜줄테니 겁내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선지자에게 해당되는 그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해당이 되어서 종말을 보는 즐거움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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