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 못할 일
2022년 6월 1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8-10
(1:8)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1:9)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10)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누구든 하나님을 대하는 경우는 경악스러울 겁니다. 같은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도 조심스러울 수도 있지만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는 충격스러울 겁니다. 예레미야도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맡긴 일에 사양하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오해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새삼 책임질 일로 여기는 겁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전시 공간 안에 줄 지어져 있는 전시 박스와 같습니다. 그렇고 그런 존재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수행할 능력자가 이 세상에 특별히 있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자기에게는 특별한 존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세이기에 막상 하나님께서 찾아와서 지시를 하면 자기 본심이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일을 맡기시는 겁니까? 그것은 중보자께서 따로 계신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이방나라와는 달리 온통 율법으로 덮혀 있습니다. 이 세상은 인간의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이스라엘도 역시 인간이기에 욕망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욕망은 이스라엘을 가득 채우는 율법에 의해서 그대로 노출됩니다.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인간은 본인에에 늘 충실하고 열심입니다. 한시도 긴장을 늦추는 일이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손해보고는 참을 수 없어합니다. 율법이 없다면 하등 이상할 일이 아닙니다. 그저 일상이 그러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덮개가 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그 율법은 소위 살아있다고 우기는 인간의 내부 마음을 쪼개고 그 내장을 끄집어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래도 네가 살았다고 하는가? 더 살 이유가 있다고 고집하느냐?”입니다. 이스라엘이 버티고 살아가게 된 근거는 이 율법이 그 소임을 아직 마무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약적으로 설명하면 이러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25) 보통에는 자신의 관은 죽고 난 뒤에 만들기 마련이지만 성도는 죽기 전에 관을 만들어 삽니다.
즉 자신을 이미 죽은 자로 여깁니다. 사람이 ‘두렵다’는 것은 더 망할 것이 아직 남아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지만 신약의 성도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게 작용한 ‘율법의 덮개’는 신약에 와서 ‘율법 완성의 덮개’안의 세계로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보자’ 개념이 모든 개인 활동의 개념을 덮습니다.
중보자란 모든 개인적 활동을 능가해서 그 중보자 가치에 개인의 행함의 가치가 조금도 섞이지 않는 식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예레미야의 능력을 발휘해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주변 열강들의 운명이 예레미야가 증거하는 그 증거의 말씀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지 결코 예레미야의 능력과는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열방 나라 대 이스라엘 구조로 역사가 짜여져가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열방나라 대 예레미야 개인과 대결하는 구조로 역사가 진행됩니다. 이런 구조에 대해서 예레미야가 기여하는 바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이지만 사람들은 그저 조용하고 살고 싶어합니다.
요란스럽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습니다. 그 이유는 평소에 자기를 의식하는 식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안 망하는 선에서 편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즉 “나는 내 할 일 안에서 살고 싶다”는 겁니다. 하지만 예레미야가 부여받은 일은 ‘죽음을 짊어지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신 인간들이 보이는 태도가 유사합니다. 모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기 4:10-11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과 협상에 나섭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모세나 예레미아나 오해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환경과 인간의 관계를 연결하는 몫은 모세도 아니고 예레미야도 아닙니다. 주님의 일하심에 인간이 따라잡는다든지 흉내내거나 모방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의 길과 주님이 가신 길이 나란히 있다고 칩시다. 상식적으로 사람들은 주님의 길을 보고 싶어할 겁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길이 모범적이니 그 주님의 길과 비슷하게 사는 것이 거룩한 삶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주님의 길이 보여서는 아니됩니다. 도리어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보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가신 도로는 인간들의 가고 있는 도로에서 건너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도로에서 주님의 도로와 만나는 길이 없습니다. 끊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주님의 도로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지옥으로 내닫는 그 도로가 보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역량과 지혜와 성실성을 다 부어서 자기만의 도로를 건설하면서 하루하루 이어갑니다.
그러나 그 지혜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지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란 오직 예수님만이 성취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바라보고 있는 이 대자연과 삶의 환경이라는 것도 실은 주님의 지혜에 접수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행동 하나하나를 문제삼아 시비걸지 않습니다.
그저 주님께서 자신께서 필요에 따라 쓰실 겁니다. 예레미야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레미야가 감당할 일의 내용만큼 예레미야가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이상의 것이기도 도리어 예레미야는 계시를 전하는 것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내뺄 수 있는 형편이 아님을 예레미야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계시를 제대로 전하는 조건 하에 예레미야가 구원되는게 아니라 이미 구원관계에 돌입되어 있기에 예레미야는 부담없이 세상 눈치 안 보고 담대하게 주님의 계시, 곧 나라들의 운명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곧 주님의 일임을 이제는 감사하게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강-예레미야 1장 8~10절(감당 못 할 일)220612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장 8~10절입니다. 구약성경 1050페이지입니다.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모든 성경은 예수님 쪽으로 질주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쓸데없이 우리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오해는 나의 행위에 대해서 이게 뭔가 의미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데 보통 큰 착각이 아닙니다. 이 착각으로 인하여 인간은 어리석게도 평생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고 있어요. 자기 행동 하나하나에 굉장히 민감하게 작용합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주께서 얼마나 섭섭하게 생각할 것인가? 내가 이렇게 드리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라고. 하나님은 중보자만 받습니다. 중보자가 그냥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자꾸 중보자 제치고 내가 중보자 자리 앉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중보자 노릇 하고, 내 행동 따라서 하나님이 결정하신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오해 중 하나가 중보기도라는 겁니다. 중보기도라고 라고라고라?
중보기도를 자꾸 언급해요. 중보기도는 예수님만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중보기도를 해서도 안 되고 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어요. 인간에게 기도라 하는 것은 기독교인이 되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에요. 안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기도 열심히 하는지 몰라요. 이래도 답답하고 저래도 컬컬하고. 뭐 막걸리 먹은 것도 아니고 맨날 사는 게 컬컬하고 답답해서 뭐 어디 부처라도 점쟁이라도 찾지 않으면 답답할 때, 그리고 길을 걸어가면서 항상 ‘잘되어야 할 텐데’라고 이러니 잘 될 턱이 있나.
그러한 어느 정도의 기대와 희망, 이것이 인간에게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아들보고 ‘야야, 오늘 꿈자리 안 좋다. 너 오늘 차 조심해라’라는 이것도 기도의 일종이에요. 그게 뭐 기독교로 바뀌었다고 해서 그게 뭐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일절 기대를 한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알아도 너무 잘 알아요.
그러면 주님은 우리에게 관심 없으면 어디에 관심 있는가. 구약에서 주님은 오직 율법에만 관심 있었습니다. 율법이 그물망처럼 쫙 깔려있었어요. 이스라엘 어떤 백성도 율법이라는 차양막 또는 덮개가 지붕같이 덮여있는 거, 율법 구조체제가 이스라엘을 덮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 이스라엘 아니고 이방인이니까 우리에게는 율법이 없지 않냐고 한다고 우리에게는 육이라는 것이 덮고 있어요.
육의 욕망이 덮고 있는데 그게 양심과 관련해서 육의 욕망이 우리로 하여금 자꾸 부추기고 우리의 심장을 건드리죠. 그래서 오늘 본문 8절에도 주께서 예레미야에게 “너는 그들을 인하여” 그다음이 중요한데 “두려워 말라”라고 하십니다. “예레미야, 네 위주 아니다”라는 말씀이죠. 내 감정 위주 아니고 내 행동 똑바로 못하면 나만 당한다고 자꾸 자기 행동에 의미를 두는데, 의미 두지 말고 자꾸 하나님 앞에 내 행위가 인정받을 생각하지 말고 너는 그냥 하나님의 율법에 계시에 시다바리입니다.
시다바리가 이렇게 좋게 써먹을 줄 몰랐습니다. 우리는 말씀의 시다바리예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도 그 현장에 말씀 나타나고 우리가 말씀에 잔뜩 까불어도 그 현장에 말씀만 나타나고. 말씀의 완성이 복음이니까 우리 덮개, 복음의 덮개, 다 이루심에 덮개 안에 우리가 놓여있습니다. 이렇게 굴러도 다 이루심이고 저렇게 까불어도 다 이루심이에요. 그것은 주께서 우리 행동에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우리 행동에 의미를 두지 않으십니까. 그것은 중보자 중심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말고 예수그리스도, 중보자 중심으로 가는 겁니다. 기도해도 그분이 하고요, 계획해도 그분이 하고요, 우리가 몇 살까지 사느냐는 그것도 우리 소망과 관계없어요. 그분이 이미 다 너는 몇 살까지 살라고 다 정해놨습니다. 전국노래자랑 몇 년까지 하고 죽으라고 다 정해놨어요. 죽고 싶다고 죽고 살고 싶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래나저래나 할 일이 없지 않냐고 할 텐데, 그 중보자를 증거 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성도 되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다 이루셨다고 하는 거죠. 항상 양손을 그분 쪽을 가리키면서 ‘그분이, 그분이, 다 이루셨다’라고 하는 거죠. 따라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뭐냐. 아직 중보자가 오시지 않았거든요. 그 시대에 중보자가 예레미야로 세워진 겁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오늘 본문에 예레미야 네가 말하는 말에 따라서 이 제국들이 망하기도 하고 흥하기도 하고 그렇게 연동되도록 같이 연결되어서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도록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이거는 언뜻 보면 상당히 신나는 일인 것 같지만 예레미야도 사람입니다. ‘거창한 일은 주님 알아서 하시고요, 저는 그냥 놔두면 안 되겠습니까?’라는 그런 기분을 예레미야가 갖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여기 나옵니다. 1장 6절에 보면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이게 겸손일까요? 절대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이 아니고 저는 감당 못 한다는 이야기예요. 이거는 할만한 사람에게 맡기소서. 내가 어떻게 그걸 감당할 수 있습니까? 이걸 이야기하려면 굉장히 이야기할 것이 많습니다.
어떤 점에서 이야기할 것이 많으냐 하면 인간이 항상 말씀을 듣게 되면 본인이 오해하는 거예요. 어떤 오해를 하느냐 하면 제가 아까 말씀드렸는데 주님은 우리 행동에 신경도 쓰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내가 내 행동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하게 파악하고 분석하는 버릇이 있어서 주께서는 거룩한 말씀을 주셨는데 내가 좀 그 말씀을 지켜 드려야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겠느냐. 중보자는 안중에도 없고요.
하나님과 일 대 일로 상대해서 만약에 내가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안 지키면 하나님이 준비한 저주가 나에게만 떨어지면 나만 작살나고 나만 저주받고 나만 인생 망가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런 오해를 하는데 우리 인생 이미 망가졌습니다. 뭘 새삼스럽게 망가질 것이 없어요. 결혼해도 망가진 거고 안 해도 망가진 거고 뭘 해도 망가졌어요. 집사 되어도 망가졌고, 목사 되어도 망가졌어요. 망가진 모습이 지금 이 모습들이에요.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새삼스럽게 겁을 내서 ‘여기서 더 망가지면’이라고 하는데 망가질 것이 뭐 더 있습니까? 그래서 결론을 내리면 이렇습니다. “예레미야야 죽어라” 그겁니다. 네가 어제부로 죽었다고 치면 이제는 두 번 다시 망가졌다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자기에게 희망을 걸고 있으니까 이거 내가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말씀 못 지키면 자칫하면 내가 죽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뒤로 주춤주춤 물러가면서 또 겸손은, 겸손하지도 않으면서, 겸손한 티는 또 낸다고 ‘하나님, 저는 아이라서 시근머리도 없고 세상 경험도 없고 아는 것이 없어서 할 줄 아는 것도 별로 없습니다’라고 하죠. 요즘 같으면 형광등도 잘 못 갈고 벽에 시멘트 못도 박지 못하고 제가 아무것도 못 한다고 하죠. 그러니 할만한 사람에게 넘기고 저는 순종만 한다고 그런 식으로 나오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올 때는 그 사람의 재주같은 것을 일체 보지를 않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슨 재주가 있어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까? 술 파는 기생라합이, 그 당시 기생은 창기였습니다, 창기가 무슨 재주 있어서 홀로 구원받았습니까? 무슨 재주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자기보다 더 크게 생각한 그 재주밖에 없어요.
내 인생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 앞에서는 내가 그것을 감당하고 자시고 할 잽도 아니고 그냥 말려 들어갈 뿐이지 내가 뭐 주의 이름을 뚝 떼서 하청받아서 한다는 그런 일은 애초에 우리 성도에게는 주께서 맡기신 적이 없습니다. 제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모든 맡길만한 일은 이미 예수님께 다 맡겼어요. 우리에게 맡기신 일은 없습니다.
성령이 찾아온 것은 주께서 너의 할 일을 이미 다 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우리에게 찾아온 겁니다. 네가 어디서 무얼 하든 어떻게 살든 간에 그게 너의 일이 아니고 주의 일입니다. 이렇게 신신당부해도 막상 일 터지면 ‘나는 죽겠다’라고 나오거든요. 그래서 방금 이야기한 것을 다시 한번 결론 내리면 이렇습니다. ‘성도란 이미 죽은 자기 죽음을 짊어지고 가는 삶’ 이게 성도의 삶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나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나라” 장례식 할 때 자기 죽고 난 뒤에 관이 있는데 성도는 희한하게 자기 관부터 먼저 챙기고 ‘나는 죽었다’라고 광고하고 질질 관을 끌고 가는 겁니다. 자기가 무슨 ‘돌아온 장고’도 아니고 그렇게 죽었다 하고 사는 거예요. 죽었다 치고. ‘나에 대한 어떤 책임이라든지 어떤 질타는 하지 마세요. 나는 이미 죽은 놈이에요’라고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래야 주님만 증거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그렇게 살았습니다. 자기의 남은 재산인 향수를 아낌없이 주님의 발 앞에 던져버렸습니다. 울면서 ‘나같은 여자를 이렇게 사랑해주시다니, 이제 더 이상 내가 나를 위해 남겨둔 삶은 없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면서요.
제가 강남강의에서 그런 예를 드렸는데 여기서 한번더 해드리겠습니다. 촌에서 살던 오빠가 출세하려고 서울에 갔어요. 가면서 나중에 성공해서 다시 돌아오겠다고 갔는데 오빠가 성공하고 돌아오면서 촌에 있는 누이동생을 위해서 비단 구두를 사서 오는 거예요. 그게 오빠 생각입니다. 비단 구두를 사가지고 왔는데 그 구두의 가치를 못 알아보고 여동생은 여전히 허름한 다 떨어진 신발 신고 있는 겁니다.
여기부터 제가 각색한 이야기인데 오빠가 하는 말이 ‘너 오늘 비단 구두 가지고 좀 맞자’라고 하는 거죠. ‘네가 이 비단 구두를 모독해도 유분수지. 내가 비단 구두 사 왔잖아. 그런데 왜 자꾸 네 발에 편하다고 옛날 허름한 구멍 난 신발을 질질 끌고 있느냐?’ 이러면 이 비단 구두의 가치를 어디서 찾느냐는 말이죠. 그 동생 비단 구두 가지고 많이 맞았어요. 주께서 성도를 십자가로 줴패는 거예요.
자꾸 자기가 행해서 나 이정도라는 그걸 자랑하는 거예요. 주께서 행한 것은 자랑 안 하고. 그거는 뒷방에 숨겨놓고 자기 행한 것만 내놓고 누가 누가 잘하나, 그 재주 자랑만 하는 거죠. 정말 그 누이동생이 오빠의 심정을 안다면 그다음부터 지가 전에 신었던 신발 버리고요, 오빠가 사준 비단 구두만 신고 돌아다닐 때 사람들이 말합니다. 저 여동생은 오빠의 증인이라고요. 주님의 입장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에게 이 말씀을 할 때 예레미야가 자기 본색을 드러냈어요. ‘저는 못 합니다’라고 나온 거예요. 여러분이 이 이야기 들어보니까 성경 좀 본 사람은 모세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4장 10절에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라고 겸손도 아니면서 책임회피를 하죠. 이건 기드온도 마찬가지죠.
예레미야가 아직까지도 뭐를 모르고 있느냐면 자기 환경이 율법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신 환경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자기가 자기 살 생각, 자기 가치같은 그런 것만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좀 어렵지만 여러분이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율법의 기능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그 기능은 이렇습니다.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이 죽었는데 자꾸 살았다고 하잖아요.
율법의 기능은 인간을 세워놓고 그 내부를 쪼갭니다. 그러면 거기서 마음이 나와요. 그 마음은 일종에 우리 속에 있는 내장이죠. 내장을 바깥으로 끄집어 당기는데 그 당기는 갈고리 역할이 뭐냐 하면 율법이에요. 율법을 가지고 잡아 당겨놓고 ‘이거 봐. 너 죽은 자 맞잖아. 너 저주받은 자 맞잖아’라고 공개시키는 기능이 율법 기능입니다. 그러니까 율법 앞에서 의롭다 할 위인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율법 기능과 반대가 뭐냐 하면 얍삽한 육의 기능이에요.
우리 안에 분명히 우리는 죽은 거 맞고, 지옥 가는 거 맞는데 육의 기능에서 악마가 작용해서 자꾸 우리 편 해주고 우리를 격려해요. ‘어떤 경우라도 너는 좌절하면 안 돼. 희망을 가져야 해. 너를 챙길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아무도 너를 도와주지 않아. 네가 살아야 네가 사는 거야. 네가 싸대야 네가 살 수 있어’라고 자꾸 이렇게 격려를 해줘요. 하면 된다는 식으로.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는 아멘 했지만, 몸의 기능을 보니 몸의 기능의 상당 부분이 평소에 우리가 편하게 내 할 일 하는 거, 그게 바로 육의 기능이에요. 조금도 쉬지 않고 작동되고 있습니다. 육의 기능이. 그래서 이걸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살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 가는 길을 이스라엘이 보고 있어요. 보고 있으면 하나님 가는 길에 합세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이스라엘이.
그런데 주님 가신 길과 인간들 가는 길이 끊어져서 연결해주는 다리 같은 것이 없어요. 오늘날 신약에 와서 십자가를 믿게 되는 성도는 주님 길이 보이면 안 됩니다. 어느 길이 보여야 하냐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길이 보여야 해요. 그래야 이쪽(같은 공간) 길에 주님과 함께 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 길이 보이면 아등바등 따라잡으려고 애를 쓰게 되어있어요.
제가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 2박 3일로 전라도 쪽을 여행할 기회가 있어서 갔거든요. 주로 전라도에 어느 쪽을 갔느냐면 절들을 찾아갔어요. 도솔암, 대흥사 그리고 다산 정약용이 있었던 글 좀 썼다는 그 동네를 쭉 다니면서 지옥 답사를 한 거예요. 그런데 달마산 쪽에 어느 절에 가니까 표어가 있는데 ‘우리도 부처님처럼’이라고 적혀있어요. 부처님처럼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부처님이 보이는 거예요.
만약 ‘예수님처럼’이 보이게 되면 안 돼요. 왜냐 하면 나와 예수님 사이는 이미 불연속성이에요. 살아있는 나가 예수님처럼 못 삽니다. 왜냐 하면 이미 우리는 자기 관을,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입장에서 죽은 상태에요. 이 관에 주님 것이 들어와야 하지 내가 살아서 열심히 예수님처럼 따라 붙이려고 하는 거, 그거는 복음에서 성립 안 되거든요. 그런데 절에는 ‘우리도 부처님처럼’이라고 적고 하얀 연꽃 그려놓고 거기에 좋다고 등산객들 올라가고 하는 거죠.
다산 정약용부터 해서 윤선도, 그리고 윤선도 있던 낙서제, 곡수당, 동천석실, 이런 이름들 외우느라 힘들었어요. 그 동네를 쭉 보면서 복음 전하라고 주께서 조선 시대에 불바다 안 만드시고 이렇게 복음이 한국까지 들어오게 하셨구나 싶었어요. 모든 곳에 전부 다 자기를 위해서만 있어요. 그리고 자기를 위해서 할 때 내가 어떤 위대한 공자, 부처, 이런 인물과 그 간격을 줄이려고 하는 거예요. 따라 붙이면 붙인다는 거예요.
우리 눈에 주님 가신 길이 보이면 안 되고요. 반대로 인간들이 지옥 가는 길이 보여야 해요. 신나지요. 아, 저렇게 해서 지옥 가는 거구나. 왜 그러냐면 이쪽은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저쪽 맞은 편에 지옥 가는 자들이 하는 종교적인 뽐새가 다 보여야 해요. 하면 된다, 목적으로 이끄는 삶, 얼마나 많아요. 복음 들고 빈들로 아골 골짝으로 가자는 이야기, ‘할렐루야’, ‘내일 일은 난 몰라요’라는 표어 같은 거, 뭐 ‘꺼진 불도 다시 보자’라는 표어처럼.
무슨 표어가 그렇게 유행을 해요. 그거는 일종에 자기를 지키는 지혜같은 겁니다. 그거는 복음이 아니고 나를 챙기고자 하는 지혜같은 겁니다. 그런 거 교회 다니면서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지혜라는 것은 ‘다 이루었다’라는 우리 자신이 보이지 않는 지혜인데. 여행 갈 때 같이 가는 일행 중에 다들 연세가 있으신데 어떤 분이 뭘 놔두고 왔느냐 하면 틀니를 두고 갔어요.
지금 사전 계획은 전복이랑 회랑 이런 거 먹기로 계획을 잡았는데 당사자는 틀니를 못 가져가서 씹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고민, 고민하다가 삶의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가위를 가지고 전복을 잘게 자르면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삶의 지혜라 하는 것은 본인이 전복과 회를 씹기 위한 지혜예요. 자기를 위한 지혜예요. 그러니까 교회에서 어떤 용어를 쓸 때 가만 생각해 보세요.
누구 좋자고 그런 용어들이 있는지. 나 좋자고 있는지 아니면 다 이루었다는 중보자는 따로 있고 나는 그냥 그분을 증거 하라고 일체 내 행동에 대해서 어떤 책임이나 어떤 것도 묻고 따지지 않는 그저 복음이 지배하는 복음의 그물망 속에 놓여있는지 이 사실을 증거 하라고 있는지 따져보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부산에 가면 벡스코가 있고 대구에 가면 엑스코가 있죠. 이걸 전시공간이라고 합니다. 전시공간에 보면 하나하나 박스들이 있지요. 똑같습니다. 어떤 누구든지 박스 크기 비슷비슷하게 다 똑같아요. 주님 보시기에, 전시공간 덮개 보시기에, 우리는 그렇고 그런 똑같은 환경이고 주님이 살려주시고 이끄시는 그 환경, 그 환경을 우리가 찬미하고 감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레미야가 오해했습니다. 자기가 감당 못 한다고 주춤했습니다. 두려워했습니다. 주여, 두려워하지 않게 하옵소서. 애시당초 우리에게 묻지 않는, 우리 행함을 탓하지도 않는 그런 새로운 환경을 찬미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