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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나무의 비유

아빠와 함께 2022. 6. 19. 19:31

살구나무

2022년 6월 19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11-14

(1:1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Moreover the word of the LORD came unto me, saying, Jeremiah, what seest thou? And I said, I see a rod of an almond tree.(KJV)  And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me saying, "What do you see, Jeremiah?" And I said, "I see a rod of an almond tree."(NASB)

(1:1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하시니라  Then said the LORD unto me, Thou hast well seen: for I will hasten my word to perform it.(KJV)   Then the LORD said to me, "You have seen well, for I am watching over My word to perform it."(NASB)

(1:13)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윗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하니

(1: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부어지리라

계시라는 것은 인간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인간사회에서 나온 정보도 아닙니다. 따라서 당연히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인간들은 무지합니다. 모든 인간들은 무지합니다. 무지한 인간들을 상대로 해서 계시를 적용시키시는 몫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몫입니다. 이 와중에서 계신 전달자는 모진 고초를 당합니다.

예레미야의 위치가 그런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계시로 인하여 사람들에게는 욕을 얻어먹는 역할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택하셨습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이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는 하나님만 만나게 되는데 그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의 천사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과 이사야 선지자 사이에 천사가 중개일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이사야의 입을 제단 불에서 핀 숯으로 지저버리는 겁니다. 직접 하나님을 만나게 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참으로 망한 자만이 참으로 하나님을 만난 자입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무서운 천사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처참한 십자가 사건을 대면하게 됩니다. 거기서 성도는 자아의 형편을 알게 됩니다. 이사야의 고백과 마찬가지로 “화로다 마땅히 망해야 될 자가 저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그 어떤 악담과 저주도 과분함을 받아들입니다.

죄인이기에 당연히 저주받는 것이 지정한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에게 있어 쓰임을 받는 자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면담을 통해서 선지자로 나서게 됩니다. 철저하게 자기 성과를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도 이 세상에서 동일한 수모를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계시 내용의 체험은 하나님 자신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가지시는 체험만이 계시가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새로 구성해내는 영역기존의 인간들의 구역이 냉정하게 결별하게 됩니다.

모든 인간들은 한통속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체험에 입각해서 진실과 지식을 얻고자 합니다. 자신의 체험한 것을 일단 말로서 내뱉게 됩니다. 따라서 아직 그들이 체험하지 못한 내용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배격하고 반대합니다. 인간들의 이런 성향을 감안해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아직 인간들이 체험하지 못한 사실을 계시로 전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으로부터 쏟아지는 비난은 온전히 선지자의 몫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자신을 발견하고 난 뒤,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해 누가 나설 수 있느냐”를 묻습니다. 선지자는 주저하지 않고 자신이 나서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예언하십니다. “아무도 너의 말을 알지 못할 것이다”고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제시하는 계시나 비유는 인간들이 미리 이해하지 못함을 염두에 두십니다.

물론 선지자 본인도 그 계시의 내용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살구나무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무엇을 보았느냐?” 여기에 대한 선지자의 답변은 단순합니다. “살구나무를 보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살구나무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습니다.

선지자는 미리 아나 모르나 상관없이 일의 실행자는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일의 실행자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살구나무의 계시를 보여주신 겁니다. 선지자가 살구나무의 취지를 미리 알 필요가 없습니다. 전도라는 방식이 이러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내가 전한 말에 현혹되어 말려드는 경우를 원하면 아니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일에 인간이 끼어든 꼴이 됩니다. 하나님의 계시란 인간 세계에서 미처 체험되지 못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내용은 하나님께서 친히 성취시키시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인간세상에서는 ‘체험되지 않더라도 인정하는 신앙’을 찾게 됩니다.

이런 신앙이 실은 인간세계의 한계가 됩니다. 인간 세계에서는 살구나무는 그냥 살구나무입니다. 이제 이 살구나무의 의의를 살리는 것은 인간이 해낼 일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가지고 이 내용을 구체화시키십니다. 그 뒤에 나오는 끊는 가마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정보량은 신약의 성도들보다 모자랍니다. 마태복음 11:11에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해서 드러난 모든 사실이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살구나무의 비유에 담긴 의미는 간단하게 다음과 같습니다. “개인 구원은 없고 이스라엘은 집단으로 시작해서 집단으로 다루어진다”입니다. 연이은 비유는 끊는 가마 비유가 이 사실을 알려줍니다. 뜨겁게 끓는 가마가 남쪽으로 기울어졌다면 그 가마 안에 담긴 뜨거운 쇳물은 사정없이 남쪽 세계를 덮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살아남을 가치자는 일체없다는 뜻이 됩니다. 끓는 가마란 특정 개인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지역을 통째로 겨냥해서 쏟아집니다. 따라서 앞서 제시된 살구나무 비유는,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의 대상체로서 하나님에게 다루어진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개인 대 개인의 비교는 의미없는 그런 시대가 들이닥친다는 뜻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이스라엘 속에 보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이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거부해서 그 결과로 이스라엘 전체가 멸망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선지자의 말을 거부하는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체험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장담할 게 없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은 개인체험은 전체 진리로 간주하면서 행동합니다. 사무엘하 13:14-15에서 암논은 이복 동생을 강간합니다. 그래놓고서는 싸늘하게 차버립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도 동생을 죽입니다. 발람 선지자도 돈을 받고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이스라엘을 저주합니다. 가룟 유다니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예수님을 팔아넘깁니다.

이처럼 사적인 이익추구는 하나님의 계시 앞에서 마땅히 저주의 대상으로 드러납니다. 그것도 집단적으로 다 그러합니다. 심판도 집단적이라면 구원도 집단적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영달에 준해서 살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강-예레미야 1장 11~14절(살구나무의 비유)220619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장 11~14절입니다. 구약성경 1050페이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거민에게 임하리라”

예레미야는 선지자죠. 이 선지자에 대해서는 왜 선지자가 생겨야 하느냐면 예수님 때문에 생겨야 합니다. 히브리서 1장 1절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어떤 그림이 있는데 그걸 퍼즐 조각처럼 자를 수가 있어요. 그러면 그 단면 단면이 각자 독자적 모양새를 가지고 있어도 그 조각들을 짜 모아보면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완성이 나옵니다.

모양이 뭉쳐서 최종 그림이 나오는데 그 그림을 히브리서 1장 2절에서는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되어있거든요. 마지막 때라 하는 것은 더이상 쪼개질 그림은 없는 때입니다. 부분 부분으로 이야기했던 것은 예수님 오실 때까지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방식이었고 이제는 뭐냐 하면 아들로 모두 통합된 채 우리에게 계시를 주셨습니다.

어느 집사님 한 부분 가지고 있고 내가 한 부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고 집사님 안에 온전한 예수님 들어있고 장로님 안에 온전한 주님 들어있고 제 안에 온전한 주님 계시고 이렇게 성도 안에 온전한 예수님의 그림이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1절에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천국에 있는 어린아이가 세례요한보다 더 많은 것을 안다는 겁니다. 왜? 선지자는 쪼가리 일부만 가지고 있으니까요. 달고나 만들 때 바늘 가지고 주변에 쪼가리 다 떼 내잖아요. 옛날에 많이들 해보셨죠?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을 우리 신약에서는 최종적으로 다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는 뭐냐 하면 선지자들로 하여금 너는 이 세상에서 출세할 생각하지 말라는 그런 운명을 갔다면 신약의 성도는 뭐냐 하면 출세같은 것은 저는 기대 안 한다는 식으로 바뀌는 거예요.

어떻게 좀 좋게 바뀐 겁니까? 다시 말씀드릴까요? 구약에서는 힘들어도 참아라, 좋은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아픔을 주는 것은 결국 내 백성의 죄 때문에 네가 고생을 좀 해라, 네가 욕본다, 하지만 내가 너를 인정해줄게, 이런 식이 구약이라면 신약에 와서는 이제는 너의 행위 자체에 대해서 신경 안 써도 된다. 네가 나쁜 짓을 하든 좋은 짓을 하든 나는 너를 보지도 않겠어. 내가 보는 것은 네 속에 박혀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다 이루심만 보겠어.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의 반응에 대해서 우리의 반응도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죠. 우리 반응은 뭡니까? 뭐 더 안 살아도 된다는 말이죠. 출세하고 부자 되고 그런 거 저는 생각 안 합니다. 저는 저에게 신경 쓸 생각이 없습니다. 그냥 살 만큼 살면 되죠. 이것이 온전한 예수님의 모양을 운반하는 운반체의 역할을 다 하고 있는 거예요. 악바리처럼 설치는 그런 것은 신약에 없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뭐냐 하면 사도바울은 그냥 팔 벌려버리고 손 놔버린 거예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냥 맘대로 같고 노세요. 그게 내게 능력 주신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자기 나름대로 자기 가치를 위한 목표나 계획 같은 것은 없단 말이죠.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면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예레미야를 볼 때 온전한 계시를 다 알지 못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라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예레미야가 훌륭하지요. 하지만 신약의 성도가 아는 양만큼 그렇게 정보가 크지는 않습니다. 그저 그 시대에 충실했습니다. 그러면 이 예레미야는 뭐냐. 그저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예수님의 모형. 모형이라는 것은 그냥 마네킹이라서 진짜 살아있는 사람은 아니죠.

그 안에 내부 속성이 들어있지만 어디까지나 모형입니다. 모형이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본인 인생을 본인 인생을 따로 추구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예레미야에서 우리가 뽑아낼 것만 뽑아내면 됩니다. 제발 예레미야가 훌륭하다는 둥 착하다는 둥 이런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착한 인간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우리보다 정보가 약한데 착하기는 뭘 착합니까. 예레미야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보면서 배후의 주님을 찾는 것이 중요하지 예레미야가 대단하다는 그런 것에 신경 쓰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물어야죠.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어떻게 사용하시는가. 주님이 예레미야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누구누구입니다’라는 그런 멘트는 아무 쓸데 없는 거예요. 주께서 어떻게 다루시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예레미야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레미야의 역할은 뭐냐.

건축물에 보면 비파괴검사가 있어요. 여러분 다 아시겠지만, 건물이 어느 정도의 상태인지를 콘크리트 안 깨봐도 비파괴적으로 측정해서 건물이 얼마나 더 사용할 수 있을지 알아보는 것이 있어요. 예레미야 역할이 바로 비파괴검사입니다. 이스라엘 몇 년 가겠느냐를 검사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비파괴검사하면서 누가 파괴되는가. 예레미야 본인이 파괴됩니다.

왜냐 하면 이스라엘에서는 예레미야의 말이 씨도 안 먹히기 때문이죠. 예레미야서를 보면서 왜 그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예레미야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정상입니다. 오늘날 성도의 말을 사람들이 안 듣는 이유는 지극히 당연하고 정상적인 상황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말이 안 먹힌다고 주위 사람 보고 화내고 그러지 마세요.

그러면 예레미야가 그 당시 계시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이 뭐냐. 결별된 구역이에요. 예레미야를 나누는 겁니다. 결별, 헤어짐이죠. 잘먹고 잘 살라는 식으로 나뉘는 거죠. 하나님께서 어떤 두 개의 구역으로 쪼개지게 만드는 데 예레미야를 투입합니다. 그렇게 투입하면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둘로 쪼개는 거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 이스라엘 땅에 남아있는 쪽과 바벨론에 포로 잡히는 쪽과 둘로 쪼개버립니다.

쪼갤 때 가나안 땅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이곳은 약속의 땅, 곧 하나님의 땅이고 하나님 땅에 여전히 살아남아 있는 자가 하나님의 진짜 백성이고 여기서 포로 잡혀가는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반했기 때문에 죄인이라서 그들은 바벨론에 포로 잡혀간다고 이렇게 남아있는 자들이 자기주장을 하게 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레미야는 극구 반대로 뒤집습니다.

쫓겨가는 자가 남은 자다. 쫓겨가는 자, 포로 잡혀가는 자가 진짜 이스라엘이고 남아있는 자가 엉터리다. 그러니까 예레미야가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잡혀가세요”라고 외치는 것이 예레미야 예언의 계시입니다. 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했습니다. 우크라이나에 예레미야같은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러시아가 쳐들어올 때 여러분은 항복하시고 땅을 러시아에 내줍시다.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다”라고 하면 이게 예레미야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이 영토를 우리가 지켜야 한다고 외치는 것은 가짜 선지자입니다.

다른 예를 한번 들어볼까요? 우리교회 어떤 분이 오셔서 이 교회 엉터리니까 이제 다 접고 각자 자기 집으로 헤어지라고 한다면 진짜 선지자입니다. 이 교회를 부흥시켜주겠다고 한다면 이거 백프로 가짜입니다. 교인들이 이걸 몰라요. 교인들이 후임자를 고를 때 부흥시키겠다고 고르면 그건 백프로 가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는 모습 보니까 교회고 나발이고 다 그만두고 이제 죽는 것이 낫다고 하면 이게 진짜 선지자예요.

교회 해서 뭐 하는 데요. 그거 다 구라로 하나님 믿는 거 뭐 하려고 그런 거 하냐고 하는 그게 진짜 선지자예요.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예레미야가 하는 것을 그들이 못 알아듣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예레미야 본인도 주님 말씀을 못 알아들었어요. 그 이유가 이사야 6장에 보면 나오는데요. 이사야가 소명 받을 때도 똑 마찬가지였어요.

이사야 6장에 보면 하루는 이사야가 성전에 갔는데 갑자기 성전에 천사가 나타났어요. 날개를 여섯 개 갖고 있는 천사가 나타나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 서로 노래하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라고 하면서 건물 지어진 그곳이 졸지에 진짜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이사야가 자기 자신을 발견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내가 진짜를 안 보고 같은 인간들끼리 보니까 내가 깨끗한 줄 알았죠. 순수한 줄 알았죠. 이렇게 추잡하고 더러울 줄을 처음 알았어요.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시키는 사람은요,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내 가치, 내 착함, 내 의미를 챙기는 식으로 절대 일 시키지 않습니다. 완전히 박살 내 버립니다. 뭘 시켜도 군말 없이 ‘이것도 황공합니다’라고 할 정도 될 때 주께서 일을 시키시는 거죠.

우리가 진짜 주님의 십자가 앞에 선 사람이라면 주님이 우리에게 악담하는 것도 참 아깝고 저주도 과분하다고 그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주여, 주께 남은 악담이 그것뿐입니까? 좀 더 퍼부어 주옵소서. 다시는 내 가치가 들썩거리지 않도록, ‘내가 이만큼 주의 일 했는데 하나님 뭐 하십니까’라는 그런 군시렁거리는 소리가 두 번 다시 나오지 않도록 밟을 때 확실히 밟아주옵소서. 이렇게 이사야에게 이런 고백을 하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사야가 준비된 지 시험했죠. “내가 내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고 싶은데 누구를 보내지”라고 하니까 이사야가 물론 짜고 치는 고스톱인지 모르겠지만 이사야가 손 번쩍 들면서 “저요!”라고 소리치니까 주께서 이사야에게 “너는 지금부터 이 백성에게 큰 수모를 당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왜냐 하면 하나님 본인이 이 백성에게 큰 수모를 당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날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지신 고통을 이미 함께 가고 있지만, 예레미야나 이사야는 구약이기 때문에 장차 오실 하나님의 고통을 앞질러서 미리 체험하는 겁니다. 그 체험 중에 제일 어려운 체험이 뭐냐 하면 본인이 경험하지 않는 내용이지만 말씀이기 때문에 전해야 하는 이 경험이 가장 아파요. 그거는 여러분들도 지금 당하고 있습니다.

만약 집사님이 전도하는데 실컷 두 시간 반 동안 전하고 나니 상대가 하는 말이 ‘천국 가봤어요? 가봤냔 말이야? 천국도 안 가보고 무슨 천국에 대해 아는 척해’라고 나오죠. 점심까지 먹여가면서 다 구워삶아 놨는데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고 가버릴 때 얼마나 허탈하겠습니까. 그러나 그걸 견뎌야 해요. 왜? 선지자가 경험하지 않은 일을 오직 앞당긴 말씀으로 전하는 거예요.

욕은 한 바가지 얻어먹죠. ‘네가 경험하지도 않은 것을 왜 전하냐’ 인간세계에서 안다는 것은 자기가 체험하고 경험한 것만 이야기해야 해요. 경험하지 않은 것을 미리 앞당겨 이야기하게 되면 그건 반칙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이나 오늘날 성도는 경험하지 않은 것을 외쳐야 해요. 왜? 말씀이고 약속이기 때문에. 전하다 보면 그들과의 대화 소통은 물 건너갔습니다.

대화 소통 안 되는 것을 당연시해야 해요. 만약 대화 잘 먹히고 내 말발이 잘 먹히면 우리는 주님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말발에 유인된 사람,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전도라는 이름으로, 내가 이렇게 잘 꼬시는 사람이라는 꼬시는 테크닉에 자기가 반해버립니다. 그게 삶의 기쁨이 되어버려요. 태권도왕, 고구마왕, 이런 것처럼 전도왕이라고 하면서. 무슨 전도왕이 있어요. 전도왕이.

개인이 체험하지 않은 것을 전할 때 왜 체험하지 않은 것을 전해야 하느냐. 그 말씀은 전하는 내가 믿지 못하는 불신 가운데서 극복되지 않으면 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된 믿음이거든요. 그러면 내 쪽에서 먼저 경험하지 않지만 주의 말씀이기에 제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립해야, 자기에게 일어난 불가능한 요소가 그대로 남들에게 불가능한 내용을 그래도 유지하면서 전할 수 있는 거예요.

세상에서는 우리가 어떤 말을 해도 그들은 이미 대기하고 있습니다. ‘네가 해 봤어?’라고 말하려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이 말씀은 오직 하나님의 택한 사람, 오직 영생 받기로 작정 된 자만 전달 되기 때문에 그런 환경을 주님께서는 북 치고 장구치고 다 조성해줘요. 그러니까 예레미야가 전하면 전할수록 이스라엘은 점점 더 안 믿는 쪽으로 환경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뭔가 장단이 맞아야 일을 할 텐데 오히려 하나님께서 반대로 나가버려요. 그중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살구나무.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잘 보았다” 이 대화가 지금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예요. 네가 지금 무엇을 보았느냐. 살구나무 보여주셔서 살구나무 보았습니다. 잘 보았다. 이런 말들이 예레미야는 지금 뭔 뜻인지 몰라요.

살구나무는 그냥 살구나무예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살구나무예요. 뭐 어쩌라고. 살구나무가 뭐 어쩌라고요. 살구나무가 어떤 의미인지 예레미야야 본인은 의미 모릅니다. 그냥 보여줬고 그냥 살구나무입니다. 그래놓고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하시니라”라는 이 말씀이 뭐냐 하면 살구나무 보여주시고 살구나무 뜻에 대해서 예레미야야 본인도 몰라요. 예레미야가 의미가 뭔지를 모르도록 만드세요. 그런데 예레미야가 의미를 모르는 가운데 그게 일이 잘 풀린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예레미야가 말을 전해도 실제적인 일은 누가 하느냐 하면 예레미야에게 계시를 전하는 하나님이 옴팍 일을 다 하시거든요. 사람들은 흔히 이런 말을 해요. ‘제가 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성경 말씀을 빨리 익히기 위해서 통신으로 신학교 가서 신학을 공부하면 어떻습니까?’라고 저에게 물어온 사람이 있었어요. 공납금만 떼이십니다. 보이스피싱이 달리 보이스피싱이 아닙니다. 그게 보이스피싱입니다.

왜냐 하면 가르친다는 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가르침에 종업원으로 만들어요. 목사가 누구를 가르치잖아요? 그 사람이 목사의 종이 안 되면 천만다행입니다. 그냥 주의 은혜입니다.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에게 발목 잡힌 거예요. 가스라이팅 당할 가능성 있어요. 돈 뺏기고 시간 다 뺏기고 가르치는 자의 자존심과 명예를 위해서 농락당할 영혼 되려고 한다면 가서 배우세요.

신앙은 어떤 이도 어떤 이에게 신앙을 준 적이 없고요, 사도바울은 단 한 사람도 구원 못 시켰습니다. 왜? 성령이 구원시키셨으니까. 예레미야는 단 한 사람도 구원 못 시켰습니다. 사람을 교회 데리고 나올 수는 있어요. 교회 데리고 나오니 뭐합니까? 그 사람이 천국 가는 것은 인간 소관이 아니고 목사 소관이 아닌데요. 중보기도요? 소용없어요. 주님이 기도하고 있는데 왜 엉뚱한 인간이 새치기합니까. 어디 주님 중보기도랑 대결 붙을 일 있습니까?

살구나무? 아무 의미 없어요. 그러니까 이 말이 뭐냐 하면 그 부분을 다시 해보면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라고 예레미야 대답하면서 속으로 ‘뭐 어쩌라고’ 하겠죠. 하나님이 “그러니까 내가 알아서 다 할게”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살구나무 왜 보여줬느냐는 겁니다. 살구나무는 예레미야가 그걸 보았어도 그 의미를 모른다는 것을 예레미야가 확실하게 정리해야 해요.

나는 몰라도 상관없는 존재입니다. 왜?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시니까. 사람들은 전도하면서 ‘아, 내가 조금만 말발이 좋았으면, 내가 조금 더 신학이 깊었으면 먹혔을 텐데. 꼬실 수 있었을 텐데’라고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어디 보험가입 시키려고 합니까? 어디 생명 보험 들라고 말발로 꼬시는 거예요? 전도는 나는 한 명도 전도할 능력이 없다고 하는 자만이 전도할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전도하시는 주님을 욕보이고 모독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이 살구나무 의미가 뭐냐. 예레미야가 모르는데 오늘날 우리가 알아야 해요? 신약이잖아요. 선지자가 알고 있는 것보다 우리가 더 많이 알고 있어요. 이것이 개인 위주의 구원은 없고 집단 위주라는 겁니다. 살구나무는 집단적이에요. 이것이 뒤에 13~14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윗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부어지리라”

살구나무의 의미가 뭐냐 하면 ‘모든’입니다. 모든. Everybody. 이스라엘 전부. 이스라엘은 개인적으로 구원받는 거 없어요. 망하면 다 망하고 구원받으면 다 구원받는 거예요. 개인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 받는 이유는 바로 이스라엘 구원이 아니고 개인 구원 위주로 나아갔기 때문에 멸망된 거예요. 여기서 예레미야가 모형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예레미야는 개인 구원 때문에 선지자가 된 것이 아니고 전체 이스라엘의 운명과 관련되어서 선지자가 된 겁니다. 따라서 예레미야 입에서 나온 것은 예레미야 개인의 생각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한 통으로 보는 주님의 생각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스라엘에 전달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레미야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리고 그게 예레미야가 갈 운명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운명이고요. 그게 예수님 제자들의 운명이었어요. 예수님의 말 알아듣는 사람은 제자들 가운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게 제자들 가는 길이에요. 그리고 오늘날 모든 인간은 어떤 말씀을 해도 못 알아듣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에요. 살구나무입니다. 너, 나 우열 가리지 마세요. 주님의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점에서는 너도 마찬가지고 나도 마찬가지예요.

누가 뛰어난 지혜를 가져서 개인 사적으로 구원받는 경우는 주님에게는 없습니다. 끓는 가마는 포항제철에 있는 용광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거대한 끓는 가마가 어떤 특정 개인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 아니에요. 이걸 부어버리면 그 앞에 있는 모든 영역, 구역 안에 사람들은 전부 다 끓는 가마에서 부어진 것에 화상 입고 다 죽어버려요. 이스라엘을 집단적으로 다루시는 겁니다.

시간 관계상 많은 말씀은 못 드리고 한 가지만 예를 드리겠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사무엘하 13장 14~15절에 보면 “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동침하니라, 그리하고 암논이 저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이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한지라 곧 저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라고 나옵니다. 배다른 누이동생을 너무 사랑한다고 강간하고 그 뒤에 아주 차갑게 꼴도 보기 싫다고 내쳤어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개인주의입니다. 이런 비슷한 상황이 가인이에요. 가인은 동생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개인주의입니다. 발람이라는 선지자도 이스라엘을 단체로 다뤄야 할 선지자가 개인적으로 목돈을 챙기면서 저주를 해버렸어요. 개인주의입니다. 가롯유다도 전체 열두 제자가 새로운 하나의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것을 모르고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개인주의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들이 잘하면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구원받습니다. 이건 개인주의예요. 개인 구원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새로운 구역 속에 우리를 넣어주는 것이지 개인적으로 복음을 내 소유화시키려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그 끓는 가마 안에 들어가듯이 주께서 주신 은혜 안에 들어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시려는 것이 뭐냐 하면 개인적으로 얼마나 선하냐 악하냐는 것은 주님의 끓는 가마 밑에서는 아무짝도 소용없는 이것이 진정한 현실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도 나중에 죽습니다. 애굽에 내려가서 죽어요. 하나님은 선지자까지 죽여버려요. 다 죽여버려요.

그 땅에 있는 자도 저주고 포로 잡혀가서 노예로 사는 것도 저주고.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은 어떤 인간이든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만한 인간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전부 다 개인주의로 나서요. 우리 아들은 항상 일등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그런 엄마가 있었는데 그 아들 이름을 그렇게 지었어요. 이름이 한상일이라고 웨딩드레스라는 노래를 불렀던 지금 나이가 80세 가까이 된 가수가 있어요. 나이 드신 분은 다 아실 거예요.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가 안다고요? 우리는 선지자입니다. 모릅니다. 모르고 그저 그 말씀을 받아들일 뿐이죠. 우리 개인적으로는 모르지만 우리 신약 성도가 아는 것은 있어요.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다니 하나도 없다는 거, 집단적으로 총체적으로 우리는 인간을 압니다. 잘난 놈 없다는 거, 멋있는 사람 없고, 출세하려고 노력해도 그건 자기 게임 하는 거고,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그게 뭐가 부러워요.

의인은 아무도 없어요. 그러나 그리스도 몸 안에서는 개인은 아니고 그리스도 몸 안에서는 서로가 똑같은 입장에서 구원받는다는 사실, 이것이 신약 성도가 예레미야보다 뛰어난 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내 것으로, 내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은혜를 나눠준 구역 안에서, 그 사랑 안에서 주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한 몸으로서 서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집단적으로 다루시는 주님 앞에 사적으로 개별적으로 자기 우수함을 내세우지 않게 하옵소서. 별난 사람 없고 대단한 사람 없음을 기뻐하면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사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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