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정리
2022년 6월 5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4-7
(1: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1:6)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선지자는, 예수님께서 줄기차게 자기쪽으로 끌어당기는 대상이 되는 자입니다. 선지자가 등장한 그 시대의 메시야 대행이라고 보면 됩니다. 선지자는 선지자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보다 하나님의 뜻이 선행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시대의 메시야로 그냥꽂아놓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런 점에 있어 오늘날 성도도 선지자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그렇다면 예레미야 시대는 어떤 시대였습니까?
예레미야 시대에 대해서는 성경은 요시야 왕을 중요한 인물로 등장시킵니다. 이 왕은 우연히 성전수리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한 그때의 왕입니다.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왕하 22:8)
요시야 왕은 그당시 이스라엘의 정국을 주변 나라의 정치적 힘의 질서체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유다가 외국으로부터 위협받는 것은 유다내부 문제로 본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특수성은 율법의 요구에 부응하느냐 여부에 달렸음을 알았던 겁니다. 요시야 왕의 조치는 즉각적으로 이루어져였습니다.
“왕이 대제사장 힐기야와 모든 버금 제사장들과 문을 지킨 자들에게 명하여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하여 만든 모든 기명을 여호와의 전에서 내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밭에서 불사르고 그 재를 벧엘로 가져가게 하고 옛적에 유다 왕들이 세워서 유다 모든 고을과 예루살렘 사면 산당에서 분향하며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을 폐하며 또 바알과 해와 달과 열두 궁성과 하늘의 모든 별에게 분향하는 자들을 폐하고”(왕하 23:4-5)
문제는 그런다고해서 유다나라 주변의 강성 침략자들이 물러갔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어떠한 신앙적인 왕이 등장해서 통치하더라도 유다나라의 운명은 이미 멸망쪽으로 기울어졌음을 도리어 유다나라 멸망직전의 왕들을 통해서 확인될 뿐입니다. 유다나라를 살리기에 인간왕들은 역부족이었던 겁니다.
요시야왕마저 므깃도에서 전사합니다. 그당시 바벨론과 앗수르-애굽나라가 연합해서 근동의 통치권을 놓고서 격돌했습니댜. 요시야는 앗수르의 쇠퇴를 의식해서 이미 기운 제국이라고 판단했고 또한 다시는 일어서지 말아야 될 악의 상징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맞상대해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왕하 23:29)
이것은 곧 약소국가인 유다가 바벨론과 애굽 사이에는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율법을 버린 이스라엘의 국운을 돌이키게 하지는 못합니다. 필연적으로 이스라엘은 망해만 합니다. 그것이 율법이 요구하는 바입니다. 특히 유다나라의 말기의 왕은 애굽나라의 괴뢰정권들이었습니다.
시대를 잘못 읽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율법이 율법의 정신을 살아나기 위해 유다나라는 필히 망해야함을 그들을 받아들이지를 않았던 겁니다. 오늘날 현실에서 성도들의 처한 형편도 동일합니다. 이 세상나라나, 자기가 속해있는 나라가 번창하기를 바라지 않고 왜 이 인간세계가 필히 망해야 하는지를 유일하는 아는 자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도 자체가 눈에 보이는 이 세상 자체가 그 어떤 희망적 기대를 가져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네가 존재하기 전에 내가 너를 알고 있다”입니다. 즉 성도는 자신의 원천에 결코 자기에게 있지 않음을 보이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이는 곧 성도는 다른 세계에 들어가 거기서 출발하는 자들이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에게는 무너져가는 유다나라를 붙여주었다면, 오늘날 성도들에게는 불타버릴 세상을 붙여주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말기의 여러 왕을 만나면서 그들을 통해서, 왜 유다가 필히 망해야만 하는지를 증명해야 할 직무를 맡았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출세하는 것을 목적으로 살면 아니됩니다. 이미 운명이 결정난 세상 속에 성도들이 등장한 겁니다. 그렇다면 개인적으로는 이 세상을 떠나기 위해 주변 정리해야 합니다. 미련없이 떠나는 겁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이 세상에서 건질만한 의미있는 것은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선지자나 오늘날 성도는 은둔생활하다가 훌쩍 떠나면 그만입니까? 아닙니다. 성도는 ㉮이 세상의 운명을 미리 자기 몸에 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4:22에 보면, “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오늘날의 성도를 축하해주고 있는 겁니다. “감히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게 된 이 사랑스러운 자들아. 너희들이 처지가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러운 입장인 것을 알아라!”라는 취지입니다. 이는 이사야 선지자의 경우와 통합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이사야가 선지자로 소명을 받는 순간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입에다가 제단의 숯불로 대게하시는데 이는 앞으로 이사야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 이 세상에 대한 맹렬한 심판으로 적용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선지자나 예레미야 선지자나 하나님편에 서서 보면, 이 세상의 형편을 옹호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이 세상의 원천과 하나님의 말씀을 연관해서 말해주면됩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는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을 비교가 나옵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어디를 집중해서 보고 계신가를 봐야 한다는 겁니다. 바닥과 뿌리가 우리의 존재 이전에 이미 알고 계시는 주님에게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안목에서 볼 때,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미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그 피 뿐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는 ㉰그 피 복음의 바탕 위에서 주변정리하면 살면됩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그런 식으로 데리고 다녔습니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마 10:9-10)
이런 태도 자체가 곧 주님께서 그 현장에 함께해 주실 때 생기는 ㉱‘죽음의 표시’로서의 마음가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굳이 지킬 필요없는 지키기 위해 신경 쓰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강-예레미야 1장 4~7절(주변정리)220605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장 4~7절입니다. 구약성경 1050페이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찌니라”
예레미야라는 선지자가 등장했을 때 어떤 사람이 등장했다고 보지 마시고, 그 시대에 주님의 활동이 여전하게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에 가려서 뒤에 주님이 하시는 일이 흐릿해지면 곤란합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의 등장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 방향성은 장차 오실 메시아까지 가는데 이제 머지않았다는 것을 알리고 메시아 오는 길을 예비하는데 이들을 선지자라고 합니다.
선지자는 보이지 않는 미래의 어떤 분이 예레미야를 줄로 당긴다고 보면 됩니다. 예레미야는 ‘어~어~’하면서 자꾸 끌려가는데 그 끌려가는 인생이 어떤 인생이냐 하면 예수님을 복제한 인생으로 예레미야는 자기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DNA가 아담의 DNA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류 조상 아담의 DNA가 그대로 유지되면서 후손으로 이어지죠.
그런데 선지자같은 경우에는 예수님의 요소가 선지자 속에 듬뿍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예레미야를 보면서 장차 오셔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의 취지가 그 이스라엘 시대에는 어떤 식으로 미리 보여주었는지, 일종의 예고편처럼, 미리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예레미야에서 미리 보여주기 때문에 그것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예언이 예수님 시대에는 성취가 됩니다.
“미리 이러할 거라고 내가 이야기했지? 경고했잖아”라고 하는 것은 선지자고 “봐, 예고한 대로 다 이루었잖아. 내 약속은 그냥 빈말로 넘어가지 않는다고 했지? 모두 성취했지?”가 예수님에게서 되는 겁니다. 미리 던져주고, 주님이 미리 던지신 예언의 말씀을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는 그 당기는 힘이 예레미야 속에 있습니다.
그러면 예레미야의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예레미야 1장 2~3절에 보면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십일 년 말까지 임하니라” 성경에 이런 것이 있으면 일반인들은 상당히 주눅이 들죠. 예레미야는 들어서 알겠는데 아몬, 요시야, 여호야김, 시드기야, 뭐 이걸 알아야 구원에 합격하는지 의문이 들죠.
성경에 이렇게 나왔으니까, 이들은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유다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있던 왕들의 뭉치라고 보시면 됩니다. 제일 망하기 직전에 끝에서 시드기야, 그 앞쪽에 여호야긴, 그 앞에 여호야김, 그 앞에 여호아하스, 그 앞에 요시야, 그리고 그 앞이 아몬이고요. 그런데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다스린 지 십삼 년에”라고 되어있는데, 저 뒤에 있는 시드기야도 “요시야 아들 유다 왕 시드기야”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요시야와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이 관련성이 있다고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요시야 왕은 이스라엘 유다 왕 중에서도 오직 하나님만 섬기기로 소문난 사람이에요. 요시야 왕 때 청소를 하다가 율법 책을 발견했는데요, 그 율법책을 발견하고 난 후에 비로소 요시야는 뭘 알았느냐 하면 왜 북쪽 형제 나라 이스라엘이 망해버리고 왜 주변의 강력한 이방 민족에게 망해야 할 운명에 처할 이유가 뭐냐, 이것은 단순한 정치적 힘의 논리로 이해했는데 그게 아니고 요시야가 알게 된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위배했기 때문에 말씀대로 벌을 받고 저주받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요시야 왕 마저 므깃도에서 전사합니다. 그 당시 바벨론과 앗수르-애굽나라가 연합해서 근동의 통치권을 놓고서 격돌했습니댜. 요시야는 앗수르의 쇠퇴를 의식해서 이미 기운 제국이라고 판단했고 또한 다시는 일어서지 말아야 될 악의 상징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맞상대해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말씀을 내가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그 전부터 이스라엘의 운명은 말씀 안에 곱게 담겨있었던 겁니다. 그걸 찾아낸 거예요. 우리를 망하게 하시는 분이 엄연히 살아계시는구나. 그게 굉장히 중요한데요, 지금 우리교회 교인이 몇 분 안 되시지만, 오늘 몇 분 오셨는지 하나, 둘, 이렇게 헤아려본다면 카운트를 할 때 무엇을 빠뜨리느냐 하면 그렇게 카운트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카운트하는 사람이 그걸 빠뜨리고 있어요.
우리는 ‘나이가 얼마냐, 이 나이가 어때서, 나이야 가라’는 식으로 나이를 계산하고 몇 년 살았는지 카운트할 자격이 안 됩니다. 왜냐 하면 지난날에 내가 몇 살이냐, 지난날이든 지금이든 미래든, 그리고 우리 모임이 어떻든 간에 여기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걸로 오케이입니다. 느낌 옵니까? 느낌 아시겠어요? 평소에 사람들을 신경 쓰다 보니까 나와 남의 관계를 가지고 자기 행동에 태도를 결정하고 조절에 나서는데 그렇게 되면 무슨 요소가 빠지느냐 하면 주님이 이 가운데 함께 있다는 사실이 빠져버려요.
마태복음 18장에도 나오지만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하셨어요. 주님이 여기 계신다는 그 앞에서 다른 문제는 문제 될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이곳이 요양병원이든지 인민군 청사 안이든지 아니면 우크라이나 전쟁터인 돈바스 현장이라 할지라도 그런 것은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주님이 함께 있기 때문에. 이걸 요새같으면 어떤 것이냐면 말씀이 말씀대로 함께 있는 현장이 지금 우리가 부여받은 이 현장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 되어질 일은 그 책대로 되는데 책대로 되는 것이 뭐냐 하면 말 안 들으면 멸망하고 말 잘 들으면 잘된다는 그 이야기잖아요. 그러니까 거기서 내가 잘 되는 쪽으로 그걸 카운트하면 안 된다니까요. 내가 잘되고 못 되고는 신경도 쓰지 마시고요, 말씀이 말씀대로 된다는 이 기이한 현상, 이 신비스러운 현상에 감동하고, 감격하면 그걸로 게임오버, 끝난 겁니다.
말씀이 함께 있는 사람, 그러니까 성도의 특징은 항상 그만 살아도 된다는 주변 정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이걸 슬퍼서 찡그리며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가볍게 내가 중요하지 않게 여긴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이걸 아주 다행스럽게 여기면서 어떤 주어진 현장은 주님께서 주님 자기에게 필요해서 제공된 현장에 나는 노가다 직원으로 끼어든 것뿐이거든요.
주님 일하시는 현장에 우리가 뭐라고 감히 끼어들었습니까. 이것을 사도행전에서는 주의 환난에 참여한 것이고 그 자체를 복이라고 합니다. 성도의 기쁨은 주님이 받으신 고통에 같이 참여하게 되었다는 이 신분이 보통 신분이 아니라는 거죠. 대단한 겁니다. 사도행전 14장 22절에 보면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그러니까 에베소에서 사도바울이 떠나면서 마지막 당부가 하나님의 환난을 말하는데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너희들이 뭔데 감히 주의 환난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느냐, 이것들아’라는 말이에요. ‘너희들이 무슨 가치가 있다고 주의 환난에 참여하는 복을 누리느냐, 이쁜 것들아’라고 하시는 거죠. 이 자랑스러운 것들, 이 놀라운 신비로운 자들아.
이런 입장에서 주님께서는 예레미야를 그 당시 예수님으로, 아직 예수님은 안 왔지만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이 미리 그들에게 오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서에 요시야, 여호야김, 그리고 마지막 시드기야, 중간에 여호야긴이랑 여호아하스랑 빠졌지만 전부 다 3개월 하다가 그만두고 3개월 10일 하다가 그만두고 했고, 중요한 것은 요시야, 여호야김, 시드기야입니다.
이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은 그냥 멸망한 것이 아니고 멸망할 이유를 보여줘야 할 역할 때문에 왕들이 있었던 겁니다. 여호야김과 시드기야, 이 두 왕의 특징은 바벨론에 잡혀가면 되는데 말씀대로 멸망하면 기쁘게 멸망 당하면 되는데, 꼴에 자기가 왕이라고 백성들에게 뭔가 보여주려고 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못 보여주고 죽은 이주일(코미디언)도 있는데 자꾸 뭔가 보여주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이 어떤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객기입니다. 우리 성도가 보여줄 것은요, 특히 가장들 주의해야 하는데, 아버지로서 보여주려고 하고 아내와 자식들에게 존경받으려고 하고, 그런데 가장으로 보여줄 것은 오직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그것만 보여주면 됩니다. 그리고 이 가정에 대해서 나도 전혀 영향력 없다는 것을, 나도 손 못 댄다는 것을 알려주면 됩니다.
그러면 자식이나 아내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당신은 너무나 무책임한 가장입니다’라고 하겠죠. 나는 원래 그랬어. 몰랐어? 주님은 나를 카운트 안 해. 나는 나를 관찰하는 거 이제 그만두고 싶어. 주께서 나를 그냥 이 자리에 꽂아 넣은 것이지 내가 나를 어떻게 잘 해보려고 하는 것은 안 돼.
이 요시야 왕이 남들은 인기 있고 훌륭하다고 하는데 요시야 왕의 잘못은 바벨론에 그냥 망하면 되는데 자기가 앗수르에게 너무 당한 것이 있어서 자기가 바벨론 편에 서서 앗수르 군대를 막으려고 중간에 나대다가 그렇게 죽었어요. 그때 앗수르가 애굽과 연합국이어서 애굽이 쳐들어 왔을 때 이집트 왕도 말했어요. “막지 마라. 이거 여호와께서 보낸 거라서 소용없다”라고 해도 요시야가 듣지 않았어요. 자꾸 내가 뭔가를 보여주려고 하는 거예요.
제발 여러분도 뭔가를 보여주지 마세요. 개코도 하나도 보여줄 것이 없습니다.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거, 내가 망해가는 거, 그거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말씀대로 살지는 않았으면서도 말씀대로 살도록 주께서 그렇게 조치하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 너희가 망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 점을 하나님이 나서서 보여주시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나대지 말고 네가 망하면 망하는 대로 그냥 무너져버려라. 선지자가 그 역할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예레미야와 나중에 수련회 때 에스겔 보겠지만 공통점이 있어요. 그들이 가리고 있는 그 위선을 선지자는 까발려버려요. 우리는 이렇게 변변치 못하고 이렇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부끄럽지만 내가 미리 다 보여준다고 하며 보여줘요. 이사야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예레미야 오늘 본문에서 다시 보면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라는 이 말이 뭐냐 하면 너의 너 됨은 네 선에서 너의 너 됨을 생각하지 말고 그걸 계산하지 말라. 내가 알아서 할게. 네가 있기 전에 내가 먼저 있었으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너를 현장에 출동시킬 게.
소방관은 산불이 일어나야 그 값을 하듯이 내가 불 지르고 너는 소방관으로 뛰어들게 할게. 얼굴 시커멓게 되어서 울진 바닥을 헤매고 밀양 바닥을 헤매게 할게. 그래야 네가 주인공이 안 되잖아.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게 최고의 선지자입니다. 오늘날의 선지자가 누구냐, 여러분, 성도 여러분이 오늘날 선지자예요. 내가 내 역할 하려고 설쳐대지 않는 그 모습을 보여주세요.
세상으로부터 자유 하지 말고 여러분 자신에게서 자유 해야 해요.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고 하지 말고 반대로 가세요. 도대체 나의 가치가 어느 정도로 떨어져야 나다운 거냐. 예수님의 고통이 기다리는 그 지점으로 더 낮은 곳으로 뚝뚝 떨어지도록 매일같이 나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실감하는 인생을 살아가셔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리가 뭐가 되느냐면 메타버스(metaverse) 자리가 됩니다.
메타버스(metaverse)라고 하는 것은 온라인상에 초월적인 가상현실입니다. 닥터스트레인지 영화에 보면 갑자기 그냥 공간인데 갑자기 공중에 동그란 공간이 등장해요. 공간 안에 공간이 구멍이 뚫리면서 주인공 닥터스트레인지가 다른 공간으로 휙 넘어가요. 그러면 세상이 전혀 엉뚱한 차원으로 도달하죠. 바로 그 엉뚱한 차원을 열어줘야 할 것이 선지자입니다.
그게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나와 있어요.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라고 나오는데 세례요한이 세례 줄 때 그때 메타버스(metaverse)같이 존재하지 않았던 초월적 이질적 다른 세상이 열립니다.
새로운 공간이 열리는 그 문지기 역할을 누가 하느냐 하면 오늘날 성도들이 현장에서 본인이 사는 현장에서 성령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그 통풍구 역할을 해주셔야 해요. 어떻게 하냐고 물으신다면 본인이 ‘나는 망했다’라는 고백만으로 충분합니다. 망할 때는 이유가 있어요. 왜 망하느냐. 말씀대로 못 사니까 망하죠. 말씀대로 못 살았다는 그것이 바로 문지기 역할을 한 거예요.
그걸 예루살렘 같으면 성전에 문지방이라고 하는 겁니다. 성전 안의 세계는 거룩한 곳이지만 그 문지방 앞은 세상이거든요. 바깥의 더러운 세상과 거룩한 성전 안의 세계에 경계선 위에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딱 세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레미야는 몸이 하나지만 한쪽은 더러운 세상을 보고 그래서 이 예루살렘과 유다가 망해야 마땅함을 외치고 또 한쪽은 자기 몸통이 이미 거룩한 세계, 하늘나라의 세계에 있어서 주님과 연락이 되는 거예요. 주님의 지시를 받는 거죠.
문지방 하니까 옛날 우리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들에게 늘 당부한 것이 있어요. 절대로 나가고 들어갈 때 문지방 밟지 말라고. 제가 왜 그런지 물었죠. 복 나간다고 하시는 거예요. 아직도 그 문지방이 왜 복이 나가는지 그 이유를 못 물어본 채 돌아가셨어요. 자기 위치를 분명히 하지 어중간하게 해서 다른 사람에게 불안정한 태도를 보이지 말라는 그런 뜻이죠.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데리고 세상의 근원, 네가 태어나기 전에 있던 근원, 네가 복중에 있기 전에 있던 근원, 그 근원적인 거, 원초적인 거,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레미야에는 선지자 오늘날에는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한 거예요. 더 근원적인 것은 오늘날 성도만이 알 수 있어요. 성령을 받았으니까요. 이 세계 말고 다른 세계가 있는데 그 세계는 이 세상과 너무나 완전히 차이나는 세상이라고 알려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걸 알리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다루는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에 또는 주님과 더불어 하는 환난에 참여하는 일을 하시는데, 참여하는 일에 마지막 핵심 부분은 죽음입니다. 이게 좀 어려운데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뭐가 있다, 별이 있다, 해가 있다, 달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근원적이 아니고 원천적이 아니에요. 그거는 있어도 없어지기 때문에 있다고 다 말을 못 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어떤 두 건물이 있다고 할 때 ‘어, 저기 건물이 있네’라고 하는 것은 원천적이 아닙니다. 홍수가 나야 해요. 홍수가 나야 하나는 바위라는 것이 등장하고 저쪽은 모래가 등장해요. 원천적인 겁니다. 주님의 시선은 뭐냐. 우리의 원천을 봅니다. 네가 어느 쪽에 속했는지 모래에 속한 집인지 바위 위에 지은 집인지 그걸 바라보게 하는 거예요. 그걸 예레미야가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는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왜? 생명의 세계에 발을 들여놨기 때문에 이제는 주변 정리해도 괜찮아요. 그만 살아도 상관없어요. 인생에서 우리가 늘 같이 고민했던 것은 어떻게 사냐 아닙니까. 어떻게 밥 먹고 살고, 인간답게 살고, 그렇게 하느냐 하는 겁니다. 공직자 처음 될 때 국민 기죽이는 방법은 이번에 선출된 공직자들의 기본 재산은? 쭉 나오죠. 평균 25억.
그러면 일반 서민들은 ‘저 인간이 도대체 뭐 해서 25억을 벌었느냐’라고 의혹을 품죠. 윤석열 가족 재산 40억, 부인이 회사 사장이니까 더 되겠죠. 도대체 그들이 월급 받아서 그렇게 벌었느냐고 하면서 기죽는다고요. 우리가 기죽는다는 자체가 우리도 그것을 흠모하고 우리도 돈을 같이 사모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화가 나니까 그런 공직자들을 향해서 저주를 퍼부어요.
사람들이 꼭 없는 인간이 남을 저주하는 그 재미로 삶의 용기를 북돋아요. 저주하지 않고는 살 희망이 없을 정도로 얼마나 세속적인지요. 예레미야는 처음부터 이 세상은 죽음밖에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과 동일하게 죽음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고 하는 거죠. 그것에 아무것도 가치 있는 것은 없고 오직 너의 죽음만이 가치 있으니까 말씀 전하고 제대로 죽어라.
이걸 선지자에게 이야기하죠. 이게 신약에 오게 되면 예수님 희생의 피 외에는 아무것도 의미 없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 외에는 아무것도 의미 없어요. 이게 예레미야 전에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가 소명 받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1절에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5~7절에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숯불을 취해서 이사야 입을 지져버립니다. 그러면 이사야 입이 벌게져서 다 탔겠죠. 심판이 와서 타버린 거예요. 그러면 이사야에 나온 입은 뭘 통과한다. 주님의 매서운, 무서운 심판을 통과하는 말씀이 그 당신 유다 나라에 이스라엘 나라에 도착함으로 말미암아 유다와 이스라엘은 심판을 받는 나라가 되는 겁니다. 이 어찌 이사야 입장에서는 즐겁지 아니합니까.
어차피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내 세계도 아닌데 망해야 할 세계를 망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그런 당당함이 오늘날 성도인 우리에게 있어야 하잖아요. 즐겁지 않습니까? 굉장히 가볍거든요. 모세 선지자의 소명과 달라요. 모세는 뭔가 아직까지 멸망할 예루살렘이 되기 전의 선지자기 때문에 뭔가 이루어야 해요. 이스라엘 만들고 건져야 하고 화나서 반석도 지팡이로 두 번씩 치면서 주님 좀 믿으라고 애를 써야 할 필요가 있지만,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같은 경우에는 그럴 필요가 없어요.
‘망하자, 자~망하자, 대충 주변정리 하시고, 하늘나라 가는데 필요 없는 그런 것 좀 놔두세요’라는 식이죠. 이게 신약시대 마태복음 10장에 가면 9~10절에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라고 나옵니다. 열두 제자 불러서 ‘어디 가서 얻어먹다가 그냥 떠나자. 나 있는 나라로 가자’라고 하시는 거죠. 제자들 아무도 안 따라갔습니다.
사도행전으로 가볼까요.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의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그들의 주변 정리는 뭐냐. 혹시 뭐 먹을 거 없으면 제가 가지고 있는 참외, 수박 좀 나눠드릴까요? 이런 식으로 같이 함께 죽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것도 기쁨으로. 그렇다고 그들이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 하면 역할이 있기 때문에. 살 때까지 악착같이 그들이 살아야 해요. 돈 한 푼 아끼고 시장에서 물건값 깎고 해야 해요. 그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하면서도 ‘아, 이것이 주님 시키신 역할이다’라고 생각하면서 100원만 깎아달라고 하고, 급행 타면 1500원인데 보통 타면 1300원이니까 주님 한 번 바라보면 ‘싼 거 타고 가. 돈 아껴야지’라고 하시면 그것도 주님 지시인데 우리는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이 자유, 여러분 놓치지 말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있기 전에 먼저 계셨던 분이 계시기에 지금도 함께 있음을 감사합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간수 할 것인가 하는 이런 우리가 감당될 수 없고 우리가 조치할 수 없는 일은 다시는 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