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강의

자리 배정

아빠와 함께 2022. 6. 6. 08:58

20220603a 울산강의-역대기상(11강) 9장 2절 : 자리배정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상 9장하겠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그 보계대로 계수되고 이스라엘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유다가 범죄함을 인하여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더니 먼저 그 본성으로 돌아와서 그 기업에 거한 자는 이스라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과 느디님 사람들이라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과 에브라임과 므낫세 자손 중에서 예루살렘에 거한 자는 유다의 아들 베레스 자손 중에 우대니“ 이렇게 돼 있지요.

어떤 분이 우리교회에 중요한 질문을 한 거예요. 여기 “온 이스라엘이 그 보계대로” 보계, 계보. 그냥 족보로 보면 돼요. 질문이 뭐냐 하면 왜 이스라엘에 족보가 많습니까? 그냥 예수 믿고 구원 받으면 되지 거기에 왜 족보가 끼어듭니까, 족보를 따져야 구원이 되는 이유가 뭡니까? 구원 되는 사람이 굳이 족보를 알아야 될 이유가 뭡니까? 같은 질문이겠지요.

족보란 자리배정이에요. 모심기 할 때 이양기로 콕콕 집어 심잖아요. 자리가 떨어져있어야 되지 같이 둘 셋이 섞이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 지정된 자리에 쏙쏙 집어넣는 거예요. 지정된 자리배정입니다. 그게 구원이에요. 여기 바탕, 이걸 신약으로 하면 처소가 예비 되면 또는 처소가 마련되면, 처소는 다른 말로 하면 지정좌석. 지정좌석이 마련되게 되면 내가 다시 와서 성령을 줘서 너로 하여금 지정좌석에 앉히게 하리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이란 굳히란 뜻인데 뭐냐 하면 네가 이 세상 자리에 있다가 하늘나라의 지정된 좌석에 자리에 앉히게 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지정좌석에 갈 때 이 세상에 ‘나’가 있어요. 이 세상의 나는 족보와는 상관없이 그걸 각자성, 다른 말로 하면 개별성, 또는 더 쉬운 말로 하면 개인주의 이게 이 세상의 특징입니다. 개별성, 각자성 자기밖에 모른다는 거죠. 그게 나에요.

이 나가 천국에 가서 지정된 처소에 있는 나이 세상의 나와 전혀 다른 나에요. 내가 달라요. 구원 받은 나를 지금 내가 몰라요. 구원 받은 나를 지금 이 세상에 있는 내가 알아보지를 못합니다. 내가 주님의 지정된 자리의 나를 발견한다면 우리는 생뚱맞지요. 내가 이런 인간이었어요?

그걸 빨간 걸로 하면, 나 아닌 것의 만남이 됨으로써 진짜 나는 하늘나라의 좌석에 앉히는 그것이 예수님이 생각했던 진짜 나고, 지금 이 좌석에 있는 나를 전혀 모르고 나의 각자성, 개별성, 개인주의 여기에 빠져있는 나는 뭐가 돼 있느냐 하면, 이것은 가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가짜부터 만들고 그 가짜를 복제해서 진짜 인간을 만드는데 그 복제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족보에요.

모는 벼가 아니에요. 벼의 모종이지 작지요. 그런데 천국 가는 나는 벼 모종이 벼가 되는 그 정도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게 아니고 전혀 다릅니다. 어느 정도로 다르냐 하면 진짜 나는 예수 안에서의 내가 진짜 나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봤습니까, 못 알아봤습니까? 아무도 못 알아봤습니다. 제자들도 못 알아봤어요. 그러니까 구원 받은 나와 나 사이는 뭐가 있느냐 하면, 크게 쓰겠습니다.

결렬, 또 결렬. 보통 회담할 중간에 누가 삐지면 결렬했다 하잖아요. 그래 잘났다, 하고 헤어지는 걸 결렬이라 하잖아요. 우린 늘 매일같이 주님을 대해도 주님은 내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면서 주님, 당신은 내가 아니야. 내가 나야, 라고 세상에 있는 내가 나라고 우기면서 늘 주님과 결렬해요. 결렬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주님의, 파란 걸로, 선지자의 예언과 주님의 예언과 주의 말씀을 거절하는 방식으로 결렬이 일어납니다.

주님이 내 인생에 대해서 아는 것 있어요? 모르면서 나한테 아는 척하지 마세요, 이런 식이에요. 이런 식으로 결렬하는 거예요.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내가 나로 사는 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다움’이라고 해요.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나다움으로 살아가는데 성경의 예언과 말씀들에 대해서 우리는 강력한 반응을 하고 거부를 하는 거예요. “성경이 뭘 안다고 나한테 잔소리질이야. 잔소리하지 마.”

내가 나다움을 유지하는데 내가 가장 잘 알고 있고 이제껏 이런 식으로 나는 나를 위해서 지사충성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성경으로 나한테 이야기하지 마세요, 그렇게 되지요. 성경말씀은, 내가 나다움 되는데 보태기 위함이 아니고 성경말씀, 예언의 말씀들은 내가 가짜라는 거예요. 진짜 나는 예수님이 따로 만들어놨어요.

결렬이란 말을 제가 하는 이유가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예언을 내 쪽에서 밀어내치기 때문에 이거는 결렬될 수밖에 없어요. 아주 쉬운 예를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신명기에도 나오는 말씀이고 마태복음 4장에도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말씀으로 산다고 하니까 우리 내부에서 하나님 자기가 뭐 안다고 나한테 말씀을 하느냐? 말씀이 돈이 되나 떡이 되나 말씀이 출세를 시켜주나. 말씀 그것 아무짝도 소용없는 걸 왜 자꾸 나한테 강요하느냐, 라는 반발심이 저절로 일어납니다.

왜 저절로 일어나야 하느냐 하면 그게 가짜인 걸 티를 내기 때문에 저절로 일어나야 돼요. 우리는 가짜가 가짜인 걸 모르고 이걸 사수하려고 해요. 이걸 목숨을 다하여 지키려고 합니다. 나를. 한 예로서 베드로가 예수님이 떠날 때 숯불 쬐면서 그날 밤에 잡혔을 때에 사람들 보는 앞에서 베드로가 공개적으로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나, 저 사람과 상관없습니다. 나, 저 사람 제자 아닙니다. 내 입으로 저 사람 제자 아닌 걸 티를 내봐요? 나, 저 사람이 저주받기를 원합니다.” 제 말 어때요, 하고 베드로가 공개적으로 이야기했어요.

여러분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사람입니다. 베드로 장모가 병에서 나은 사람이에요. 베드로가 귀신을 쫓아내고 베드로가 말씀을 전했던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오병이어를 경험했던 사람이에요. 풍랑이 잔잔해진 걸 눈으로 목격했던 사람이에요. 그러나 이 가짜 나를 지키는 데 있어서는 주님의 그 기적과 예언이 아무짝도 소용없었어요.

왜? 인간의 근원적으로 품고 있는 공포심은 아무리 자기 내부에서 말씀을 지키려고 해도 내 내부의 공포심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교회 오십 년, 육십 년 다니고 목사님 성경말씀대로 지킨다고 해서 내 안의 깊숙이 잠겨있는 이 무서움과 두려움 내 안에서 절대로 떠나지 않습니다. 자, 떠나지 않을 때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같이 폭파되면 돼요. 내 공포와 함께 폭파되면 되는 겁니다.

그 폭파되는 방식을 알려드려요? 궁금하지도 않지요. 내 공포와 함께 폭파되는 방법 알려드리겠습니다. 알려달라는 소리 안 해도 알려드리겠습니다. 이게 요셉이 경험했던 건데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주의 말씀이죠. 주의 말씀과 예언을 뭐로 보느냐 하면 창세기 37장 5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꿈으로 집어넣으면 돼요. 꿈이 밤을 대신해주니까요. 꿈이 밤을 대신해줘요. 이게 뭐냐 하면 아무리 밤이 길어도 꿈을 꾼 자한테는 그 밤은 죽은 자가 아니고 그 꿈이 살아 있는 한 그 사람은 깜깜한 밤 속에서도 살아 있습니다.

요셉이 하나님으로부터 꿈을 받았고 그 요셉의 꿈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하나님은 실습을 시키는 데 어디에 보내느냐 하면 그 당시 최고의 권력이 있는 나라, 요새는 미국이나 러시아 같은 그 막강한 권력을 집중시키는 그 나라에 그 애굽의 바로 왕까지 나서도 비록 요셉은 아무것도 아니라도 요셉을 꿈꾸게 만드는 그 꿈은 애굽의 바로 왕보다 위대했습니다.

이 꿈이 이 세상을 주님이 주신 말씀과 예언이 꿈으로 들어와 버리면 이 밤을 무엇을 뜻하느냐? 이 밤은 이 세상 자체다. 요한복음에선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두움이라고 해요. 이 세상 자체가 어두운 거예요. 이거는 서울대학 가고 안 가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한 달 수입이 이천만 원이고 삼천이고 그게 문제가 아니고 누가 대선에 국회의원에 떨어지고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에 남자나 여자나 모든 사람을 다 덮는 게 뭐냐 하면 밤이에요, 밤.

밤에는 모든 소가 어둡다고, 헤겔이란 철학자가 이야기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모든 것이 밤이 되고 태양이 잠을 자고 어둠이 내리면 그 어떤 고관대작이나 건강한 사람, 아픈 사람, 키 큰 사람, 키 작은 사람, 얼굴 늘어진 사람, 주저앉은 사람, 얼굴 당긴 사람 그것 관계없이 모조리 다 어두움을 형성하는 재료가 돼요. 원료가 된다고요. 인간들이 모여서 어두움이 되는 거예요.

어두움인데 그 어두움을 성경에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것을 제일 어려운 건데요. 어두움을 뭐라고 하느냐? 이걸 죽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 죽음은 뭐냐 하면 천국에서 자기 자리를 배정 못 받은 걸 죽음이라 해요. 천국에 자기 자리가 없는 것, 지정좌석이 없는 것, E열에 5번, 영화관에 가면 있잖아요. C열에 8번.

극장뿐만 아니고 기차 타도 8호차 13C 자리 없으면 복도에 서서 가야돼요. 자기 자리가 없는 거예요. 그 자리, 그 바탕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두움의 반대 빛이라 하고, 그걸 죽음의 반대 생명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 이야기 들을 때 성경 전체를 다 아신 게 돼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가짜를 만들어서 진짜를 보여주는 게 주의 뜻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가짜에요. 그리고 그 가짜의 재료 형성하는 것이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가 얼마를 벌든지 키가 몇 센티인지 남자냐 여자냐 얘가 몇 명인지 어느 대학 나왔는지 전부 다 모조리 가짜입니다. 왜? 주님께선 그 조건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리나 창기라도 강도라도 진짜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했거든요. 이 세상은 본인들이 어둠 속에 속해서 그 자체가 죄인 걸 모르고 죄가 따로 있다고 봤습니다. 죄가 따로 있고 의가 따로 있다고 본 거예요. 그러나 로마서 3장 10절에 보면 나오지요. “의인은 없나니” 의인, 착한 사람, 겸손한 자, 대단한 사람, 경건한 사람? 성경의 답변은 간단해요. 없다. 너희들끼리 비교할 때는 착해 보이지만 율법 앞에서 하나님의 예언과 말씀 앞에서 누가 의인 나와 보라고 그래. 누가 의인인데? 율법 앞에서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 인간은 골라요. 나보다 더 착한 사람, 나보다 더 악한 사람을 고른다고요. 가짜가 가짜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왜 그렇게 의인을 고르고 나쁜 사람을 고르느냐? 본인을 나의 나됨을 진짜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조작질을 하는 거예요. 어느 강의에서 그걸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연기한다. 배우가 연기하듯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연기하다가 볼일 다 봐요. 위선자로 살면서 볼일 다 봅니다.

그 위선자의 중심은 뭐냐 하면 나만큼은 진짜 착하고 훌륭한 사람임을 내가 대외적으로 증명하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인간의 모든 욕망은 내가 이렇게 존재할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는 욕망입니다. 그걸 성경에 로마서 10장에서 자기 의라 해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확인하는 거예요.

그 자기 의를 계발하고 기술을 익히고 자기 의를 자랑질하고 그것을 배틀, 그걸 경쟁하는 자리가 뭐냐? 교회가 되고 말았어요. 그게. 교회가 아니고 가짜지요. 가짜들이 가짜 아님을 감추고 진짜로 거짓 행세하는 동네가 교회가 되고 말았어요. 누가누가 착하나, 누가누가 경건하나, 누가누가 하나님에 영광 돌리는가? 시합 붙이는 거예요. 누가 헌금 많이 하고, 누가 전도 많이 하고, 누가 봉사 많이 하는지 시합 붙이는 데에요.

밤에는 모든 것이 어두워야 마땅한데 그래도 그 가운데 최선의 노력하는 자와 최악의 존재가 있지 않겠는가? 그래도, 란 말을 집어넣어도 어떤 나와 남과의 차이를 자꾸 부추기는 그러한 세상이고 그 세상에서 늘어진 게 교회니까 교회란 게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몰라요. 이제부터 중요하니까 잘 들어보세요.

이 꿈이 어떻게 오느냐? 꿈은 나로 시작하지 않는 경험으로 오는 거예요. 더 노골적으로 말씀드릴게요. 내가 결정하지 않은 결정을 내가 차분히 뭘 해서 어떤 결과를 내는 그런 식이 아니라 내가 원인이 되어서 성과를 얻는 결정이 아니라 이미 결정지어진 그 결정, 벌써부터 결정 난 그 결정이 꿈으로 우리에게 쑥 들어온 거예요. SUK 이것 어떻게 읽습니까? 이거 뭐 에스 하나 더 붙이지, SSUK. 쑥. 제가 어떤 선전 보니까 이런 게 있어서. 골프를 어떻게 칩니까? SUG 친다는 광고를 봤어요. 패러디 해봤습니다.

다시 말할게요. 내가 시작하지 않는 내가 거기서 기대하지도 않고 예상하지도 않는 다른 결정하고 쓱 하고 이미 침투해버린 거예요. 요셉에게 요셉이 이해 못할 이상한 꿈의 내용이 요셉을 장악했듯이 그런 식으로 나를 장악해버린 거죠. 그렇게 여기에 쓱 들어오게 되면 여기에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당황스럽다. 요셉이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심지어 아버지도 당황했고 형제들도 당황했습니다.

하필 너만 그 꿈을 꾸고 우리한텐 그 꿈이 없느냐? 그걸 요셉에게 닦달 낼 수 없어요. 왜? 요셉도 지가 꿈꾸려고 노력한 적이 없어요. 이런 요셉의 꿈꾸게 해달라고 철야 기도한 적이 없어요. 하나님께 충성봉사한 적 없습니다. 그냥 하늘의 독수리가 갓난아이를 덮치듯이 그냥 아무것도 모른 얘에게 덮쳐버린 거예요. 참 이게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어린아이의 특징은 뭐냐 하면 언어가 없어요. 언어가 없어서 이게 어떠냐 하면 이게 자연스러워요. 자연스럽기 때문에 이거는 생명의 흔적을 많이 품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같은 또래의 어린아이가 죽어가는 것에 대해서 충격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왜 자연스러운가? 어린아이는 언어를 익히지 못했어요.

언어를 익히지 못한 사람들은 자연에 가까워요. 이 세상 자연은 언어가 없기 때문에 자연이 훨씬 자연스럽고 억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겐 뭐가 있습니까? 말이 있지요. 그 말은 어디로 돌아오느냐? 나의 나됨, 나의 각자성, 개별성, 나의 이기성으로 이 언어가 되돌아와요. 그 언어에 뭐가 실리는가? 이성과 합리성이 실리거든요. 쉽게 말해서 변명이 실리는 거예요.

그래서 뭐든지 남을 만나서 입을 뗐다고 말을 하면 하는 족족 나 잘났다, 내 자랑이 계속해서 나로 귀환되는 순환구조를 형성합니다. 인간의 말은. 그래서 말을 하면 시끄러워요. 말 하면 짜증이 나요. 그래 결론이 뭐야, 결론이? 나 잘났다 이거지 뭐. 부부 싸움할 때 말 없어 보세요.

인간이 말을 하는 이유는 내가 나한테 친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나의 나됨과 현재 있는 나와 아마 같을 걸, 이러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가 아는 나를 안 만나게 해줍니다. 내가 나를 우리가 품지 못하게 말리십니다. 그 말리는 게 뭐냐 하면 바로 죽음이에요. 네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너, 빠이빠이다, 이제.

그래서 인간은 공포스럽지요. 왜 공포스러우냐 하면 내가 나를 떠나는 것이 나한테 가장 걱정거리고 공포스럽기 때문에 그게 평소에 두려운 겁니다. 인간이 죽음은 무섭지 않아요. 그러나 죽기 직전이 무섭지요. 죽고 난 다음엔 무서운지 몰라요. 죽기 직전이 제일 무서워요. 왜냐하면 그렇게 정들었고 공들였던 나를 이제는 놔줘야 되니까.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내가 그렇게 애지중지한 나를 이제는 놔줘야 되니까요. 섭섭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그동안 인생 뭐했나 하는 생각도 들고. 인생 내가 왜 살았지? 이렇게 떠나보낼 것, 도대체 나에게는 나 외에 다른 목적이 없었어? 정말 그런 거야? 평생을 모든 공부를 하고 돈을 벌었지만 그 목적이 나를 붙잡는 그것 외에 다른 목적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게 무슨 사는 겁니까? 지한테 매료된 거지요. 마약처럼 지한테 빠져있는 거지요. 그게 하나님 보시기에 제대로 살지 않는 거죠. 그래서 이런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은 기어이 주님의 예언과 주의 말씀과 주님의 모든 복음을 극구 밀어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그것도 듣기 싫습니다. 죄인이 받을 것은 저주밖에 없다. 그것도 듣기 싫어요.

그런데 꿈은 내 의식이 밤에 잠을 잘 때는 내가 자율신경, 다시 말해서 교감과 부교감, 인간의 내장을 관장하는 신경계 외에는 전부 다 스톱이 돼요. 자면서 옆 사람 패면 이거는 병원에 가야 돼요. 몽유병 환자라서. 인간의 두뇌에 근육을 움직이는 그 신경이 밤에는 스톱이 된다고요. 감각이 근육신경을 바꾸는 그게 스톱이 되고, 밤이 되면 꿈이 작용하거든요.

꿈이 작용하게 되면 이젠 내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꿈이 일방적으로 나한테 쳐들어와서 나의 세계를 휘젓고 다니지요. 여러분 꿈도 그렇지요. 가짜 꿈도 그런데 진짜 주의 말씀과 주의 복음이 에스유케이 쑥 하고 우리한테 침투해버리면 우리는 당황스럽습니다. 우리를 수갑 채우는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꿈에서 내 의지대로 못하듯이 이 세상의 삶 속에서 주님께서는 내 뜻대로 의도대로 안 되는 상황을 급작스럽게 우리에게 닥치게 해서 주님이 움직여서 우리로 하여금 나의 참된 내 모습을 만나게 하는데 그 참된 내 모습이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지정된 자석 위에 바탕 위에 내가 꽂아 앉아있는 우리의 모습을 만나게 해주는 겁니다. 가짜 내가 진짜 나를 만나는 감격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돼요.

이게 신약에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 이야기가 오늘 우리는 역대상 9장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바로 보계, 또는 계보, 족보 온 이스라엘이 그 족보대로 계수하여, 라는 역대상 9장 1절의 말씀, 이 업무를 누가 하는가? 이 업무를 제사장이 합니다. 레위 지파가 해요. 그게 바로 2절입니다. 어디서 하느냐? 그게 3절에 예루살렘.

역대상에 나오는 계보, 두 번째 레위 지파, 세 번째 예루살렘 이게 한 조를 이뤄요. 구성요소가 돼요. 하나님의 좌석배정하기에 필요한 조건들이 된다 이 말이에요. 공장에서 제품 마지막에 키트로 검사하잖아요. 진단하지요.

며칠 전에 제가 집에서 콧물이 약간 나고 감기기운이 있으니까 갑자기 아내의 모습이, 나 감기약 먹고 누워있을래, 하고 누워있으니까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아내 모습이 달라졌어요. 집에서는 아내가 마스크를 쓰질 않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얼굴 아래쪽이 하얗게 천으로 가려져있었어요. 마스크를 쓰고, 그리고 오른쪽엔 진단키트를 가지고 왔어요. 코로나 진단키트.

아하, 본인만 살려하는구나. 해서 콧구멍 쑤시는 솜 봉으로 하라는 거예요. 두 줄이면 코로나, 한 줄이면 코로나 아니다. 당장 했지요. 자기는 마스크 쓰고 대비를 하고 안전장치는 다했어요. 하니까 한 줄 나왔어요. 한 줄 나왔는데 30분 지나야 확정된다는 거예요. 아직 마스크 안 벗었어요. 30분 뒤에 보자고. 나도 배짱이다 하고 30분 있었습니다.

코로나 진단키트, 이걸 구원 진단키트로 바꿔봅시다. 한 줄이면 지옥이요, 두 줄이면 천국. 한 줄이면 괜찮고 두 줄이면 임신, 이런 거요. 구원 진단키트를 작동을 시키면 세 가지가 있어야 돼요. 하나는 족보, 하는 레위 지파, 또 하나는 예루살렘. 예루살렘이라는 반도체 판 있잖아요. 미국 대통령과 한국 대통령이 사인한 판 있잖아요. 판 그 자체가 예루살렘이라 보자 말이죠.

예루살렘을 자세히 보면 거기에 가로세로 좌석들이 끼어있어요. 거기다가 모심기하듯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 좌석배정을 누가 하느냐? 레위 지파가 하거든요. 레위 지파는 지가 뭔데 남의 좌석배정을 하느냐? 지금 구약이야기입니다. 역대상이야기에요. 신약에 오게 되면 진단키트를 오직 예수님의 피를 자랑하는 걸로 끝나요.

예수님의 피가 입에서 나오면 그런 낯선 언어가 나오면 구원 받았고 예수님의 피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게 안 나오면 십자가로 자랑하는 게 없으면 지옥 가고 그런 거예요.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편지를 압축시키면 십자가를 자랑하느냐, 니 자랑하느냐 둘로 나눠지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구약입니다.

구약에서 레위 지파가 지가 무슨 자격으로 남의 자리배정을 그렇게 하느냐? 레위 지파가 하는 일은, 레위 지파 피를 다루기 때문에 벌겋지요. 레위 지파가 하는 일은 이스라엘에서 이스라엘을 뽑아내는 일을 해요. 그러면 앞에 있는 이스라엘은 백 프로 가짜겠지요. 가짜에서 주사기로 뽑듯이 가짜에서 진짜 이스라엘을 뽑아내는 일을 하는 거예요. 레위 지파는 어디까지 갔느냐? 신약 때까지 계속 이어져요.

그걸 뭐라고 돼 있느냐? 이렇게 돼 있어요. 1절에 보면, “온 이스라엘이 그 보계대로 계수되고 이스라엘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열왕기란 왕들의 기록물, 우리나라의 조선실록이에요. 왕들 시대에 이스라엘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록한 책에 있다는 말은 그 책은 이미 역사가 완료된 채 그 책이 만들어졌다는 뜻이에요. 무슨 일이 다 끝나고 난 뒤에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역사책을 쓰듯이.

그다음에, “유다가 범죄 함을 인하여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더니” 1절에 그렇게 돼 있지요. 유다가 범죄 했으니까 유다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을 대변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그 지역을 유다 지파가 있었고 이스라엘이 뜯기고, 뜯기고, 뜯기고 다 뜯겨나갔거든요. 이스라엘 전체가 한꺼번에 다 앗수르, 바벨론에 잡힌 게 아니고 유다 나라 빼놓고 나머지는 앗수르라는 이방나라에 뜯겨나갔고, 그다음에는 바벨론 나라에 마지막 다 뜯겨나간 거예요.

그런데 뜯겨나갔다는 말은 맞는데 뜯겨나갔고 하지 말고 유다 나라에서 엑기스, 이스라엘에서 뽑은 이 엑기스가 어디로 가느냐 하면 천오백 킬로미터 떨어진 바벨론 수도에 그 당시 서울에 그 이방민족 안에 이 엑기스가 들어가 있어요. 이것을 뭐냐 하면 여호와를 이긴 마르둑 신, 이방 신을 축하하고 그걸 찬양하는 그 지점에 여호와의 새로운 이스라엘이 여기에 암적 요소처럼 드디어 박히게 된 겁니다.

제는 이걸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티눈. 티눈은 잘 안 빠집니다. 티눈에는 약이 있습니다. 그걸 몇 날 며칠 발라야 그게 쏙 빠지거든요. 티눈처럼 박인 거예요. 이 말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거룩은 어디 있느냐? 가장 더러움이 승리한 온통 더러움 밖에 없을 때 그 안에 이렇게 잠복돼 있어요.

울진의 어느 집에 남편이 아내 몰래 자기 노후 대비한다고 금괴 열 개를 자기 집에다 숨겨놨는데 아내는 그 사실도 몰랐지요. 나중에 내가 늙을 때 서프라이즈 해서 알려준다고 했는데 서프라이즈 하기 전에 늙어 죽어버렸어. 산에 불이 나서 홀라당 다 태우니까 그제야 금괴상자도 타버리고 금괴 열 개가 나왔다는 것을 제가 소설로 만들어봤습니다. 실제로 있는 이야기가 아니고.

가짜 나를 태우는 거예요. 산불 나서. 나를 철저하게 죄인이라고 알려주는 그것이 진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에요. 이제 너의 가짜에 그만 놀아가라. 이건 남들은 속아 넘어가지만 주님은 속아 넘어간 적이 없는 그 가짜 나, 남 앞에 으스대는 나, 개뿔도 없으면서 기 안 죽으려는 나, 평생을 없는 게 자존심 하나 살아서 까부는 나 그것 주께서 철저하게 주의 예언과 주의 말씀으로 거덜 내게 하시는 거예요.

신앙도 없으면 신앙 있는 척, 교회는 참 우습지요. 진단키트 하면 전부 다 한 줄밖에 안 나와 지옥 갈 사람들이 전부 다 두 줄 나온 척하고 있는 그런 동네가 교회거든요. 그래서 이것은 예수님도 그런 이야기했어요. [네가 죽어야 네가 나타난다.] 중요한 것은 좀 적으세요. 여러분은 안 적어도 돼, 다 외우니까. 외우기 싫어요? 내가 죽을 때 비로소 진짜 나가 등장하는 겁니다.

진짜 나가 뭐냐? 진짜 나는 내가 공들이지 않은 나, 다른 데서 내가 공들이지 않고 다른 분이 나의 기초가 되셔서 그 열매로서 따로 챙겨놓은 금괴 같은 귀한 보물 같은 나는 그동안 내가 나한테 신경 쓰다 보니까 그게 막혀버린 거예요. 그게 나한테 먹이질 않았던 거예요. 평생을 통해서 나한테 공들인 것이 너무나 아까워서 죽기 싫어서 공포심을 부여잡고 밀어내는 데 급급했습니다.

저 손자 내가 키웠고 저 아들 내가 다 키웠고 이 아파트는 자갈치 시장에 반티이(이남박, 함지박) 장사해가면서 어두운 골목을 누비고 헤매고 다니면서 고생했었는데 내가 번 돈이다. 청약저축해서 이십 년 만에 산. 모든 것들이 나를 붙들고 안 놔준 거예요. 자기의 공로, 자기의 피와 땀방울 그게 아까워서 어떻게 놓습니까? 못 놓지요. 그래서 우리는 내가 가진 것에 대해서 그렇게 말이 많아요. 어린애가 아니고 그렇게 말이 많아요.

오랜만에 친구가 새집에 와서 도자기 있으니까, “아, 이 도자기. 내가 이태리 갔잖아. 거기서 벼룩시장에서 샀잖아.” 말이 많아. 진도 좀 나가자 하니까, “이 이야기 들어야 돼. 유래가 있어. 루이 14세 때....” 계속 이야기하는 거예요. 소설을 써도 열 권 이상 하나하나 다 해요. “이 사진 누군데?” “이게 바로 내 손자.” 이 손자가 어떻게 태어났고 병원에 갔는데 내가 뭐 어떻게.... 그다음에 진도 나가자 하면, “진도 나가기 전에 이 이야기마저 들어야 돼.” 끝도 없어요, 끝도.

내가 가짜가 살아 있으니까 나오는 말들이 전부 다 내 말이에요. 나에게 돌아오는 내 말만 나오는 거예요. 여기에 진단키트로 마스크 쓰고 한 번 진단해볼까요? 여기서 십자가만 자랑하는지. 안 나오지요. 안 나옵니다. 또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말을 집어넣는데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말을 집어넣어요. 신앙도 없는 게 들은 풍월은 있어서 십자가 집어넣으면 그게 자기 말 됩니까? 그건 십자가 믿는 게 아니고 십자가 믿는 나를 믿는 거지요. 그런 가짜는 또 진단키트 동원하면 지옥 선만 나와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느냐? 나의 동일성이 먹히지 않는 내용, 이게 주님의 복음입니다. 나의 동일성이 중간에 절단돼야 돼요. 끊어져야 돼요. 전까지는 나다움 나를 위해서 살다가 중간에 주님 주신 말씀이 꿈처럼 들이닥쳐 버리면 내가 죄인이다, 라는 게 아니라 잘 들으셔야 돼요. 우리가 무슨 잘못했다고 죄인입니까?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 내가 속해 있는 울산 전체가 다 죄인이에요. 한국, 지구 전체가 죄인이고 인류역사 전체가 그게 음란하고 악한 세대에요.

그러니까 복음 알고 자책하지 마세요. 나만 쓰레기인가, 그 명언 있잖아요. 그것 적용시키기 바랍니다. 쓰레기 아닌 자가 없어요. 괜히 기죽지 마세요. 실수하고 실수 안 하고 그것 주의 뜻입니다. 실수 안 하고 싶어도 실수하고요 실수하려해도 실수 안 하도록 주께서 인도하십니다.

세상의 잘, 잘못은 내 탓 아니에요. 이런 좋은 소리할 때는 감격하세요. 내 인생에 내가 책임지지 마세요. 그때 실수만 안 했어도 그런 잘못 안 했어도, 지나간 나에 대해 발목 잡히지 마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새로 죽고 날마다 새로 사는데 지난날이 어디 있어요. 어제도 다 꿈이었고 오늘도 꿈인데.

주께서 우리 자신을 지정된 좌석으로 몰아붙이기 위해서 일어나야만 하는 사건과 사건의 연발, 연발이었어요. 지나온 모든 세월이. 집사님은 왜 남자에요? 본인이 남자된 걸 본인이 책임질 수 있습니까? 책임 못 지지요. 정자, 난자 오십만 대 일, 그런 이야기할 필요 없어요. 놀라운 기적이다. 백만 대 일은 왜 안 되고? 오십만 대 일에서 이십오만 대 일로 바뀐 것이 쌍둥이입니다. 그것까지 우리가 책임질 수 없지요.

왜 남자이십니까? 답변하시겠어요? 답변 못하지요. 그게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게 어린아이 마음이에요.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지 되지 아니하면 천국 못 간다 하잖아요. 방금 이러한 제 질문은 당황스러워요. 왜냐하면 평소에는 나 잘남을 위해서 말들을 사용하다보니까 배운 지식들을 동원하다보니까 당황스럽기 짝이 없지요. 왜 어린아이처럼 못 삽니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라고 왜 말을 못해요. 저분은 내 구세주라고 왜 말을 못해. 저 사람은 내 사람이다, 내 여자다 왜 말을 못해.

영화에 그런 대사 있듯이 저분이 나를 창조했고 저분이 내 천국 자리를 배정했다, 왜 말을 못해요? 워낙 우리가 남들한테 안 지려는 그런 되지 않는 체면 같은 것, 자기 의로움, 나의 나다움 이런 것들의 평소에 주님의 예언을 짓밟았고 주님의 성경말씀을 극구 그만해라 많이 먹었다, 이런 식으로 밀어내고 있었던 겁니다. 성경에서 천국 간다하니까 하와이 니가 가라하는 식으로 밀어내는데 더 이상 여러분 딴 건 다 밀어내도 우리에게 강제로 들어오는 꿈은 우리 힘으로 밀어내거나 추방할 수가 없습니다. 그걸 기뻐하셔야 돼요.


10분 쉽시다.

 

20220603b 울산강의-역대기상(11강) 9장 2절 : 자리배정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족보, 또는 좌석의 비-언어성, 이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이 정도야, 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언어, 언어란 말과 글이죠. 나를 사수하고 내 가치를 유지하고 지키기 위한 언어, 말은 이것은 일체 하늘나라 좌석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말을 할 때는 이건 상식이니까 알아두세요.

반드시 무엇을 만들어내느냐 하면 의미라는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말과 언어를 사용하고 이 의미라는 것이 도로 나의 우수함으로 돌아오는 데서 의미가 있는 거예요. 사람이 어떤 의미가, 뜻이 있다는 것은 나한테 이익이 있어야 그게 의미가 있는 거예요. 내가 손실을 줄이고 이익을 얻어야 그게 의미가 있는 거예요.

이번에 국민의 힘 정당에서 전라도 빼놓고 경상도가 벌겋게 되니 기분 좋아 했었어야 되는데 울산의 구청장 하나가 진보당이 돼 버렸지요. 다른 동네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 의미 없습니다. 충청도에 있는 사람, 강원도 사람 그것 의미 두지 않아요. 그런데 국민의 힘 당국자한테는 의미가 있는 거예요. 왜?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이렇게 된 거예요. 왜 울산도 벌겋게 됐는데 울산 동구청장에 진보당이 왜 거기서 나오느냐 말이죠.

인간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자기 의미 조합, 의미로 자기 집을 짓는 거예요. 의미의 집을 짓는 거예요. 그런다고 해서 우리의 삶의 공포가 근원적으로 사라집니까? 안 사라지지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시작하지 않은 바깥과 마주하는 경험, 내가 시작하지 않는 겁니다. 내 인생 이렇게 되었으면 하는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잖아요.

그 목적과 전혀 예상치도 못한 다른 경험이 오는 것은 나와 무관한 경험이 나한테 찾아오는 거예요. 나와 무관한 경험이 오면 우리는 더러운 육의 속성상 나한테 의미에 대해서 주님, 예수님을 만나는 게 나한테 어떤 이득을 주십니까,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본성이 그러니까. 내가 성경 백독하면 어떤 복을 주실 거예요? 이래 나온다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선 어떻게 하느냐? 주님이 하시는 방식은 이걸 해요. 빼기를 합니다. 마이너스. 주께서는 빼기를 하고 뭘 안 해주느냐? 배려를 안 해줍니다. 마이너스, 항상 우리가 갖고 있는 소박한 소망, 이걸 빼버려요. 더하기를 해주는 게 아니고 철야하면 복 주는 게 아니고 철야하게 되면 있는 복을 빼버린단 말이죠. 철야해서 더 망하면 그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어요. 지금 문제는 기도해서 안 망하는 게 오히려 저주에요. 그게 빼기하고 배려하지 않습니다.

내가 교회 다니고 착한 신자가 되기 때문에 주위의 착한 사람들이 나를 도와줄 것이라는 그런 하나님의 배려, 기대하지 마세요. 살벌하게 만들어요. 전에 좋았던 사람, 나는 그에게 진심을 다했건만 그는 나에게 상처를 주네. 이게 고맙소, 에요? 정반대지요. 왜 그렇게 하느냐? 그게 바로 레위 지파가 하는 거예요. 레위 지파는 더하기 하는 데가 아니라 빼는 겁니다. 내 갖고 있는 목숨을 주님의 제단에 바치는 그것을 누가 하느냐? 레위 지파가 해요.

그래서 여기 3절에 보면,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과 에브라임과 므낫세 자손 중에서 예루살렘에 거한 자는” 이렇게 돼 있지요. 그런데 3절의 유다 자손이 1절엔 뭐라고 돼 있습니까? 유다 자손이 범죄 해서 살던 예루살렘을 정들었던 예루살렘, 복사꽃 피는 살구꽃 피는 나의 고향 그걸 주께서는 강제로 끊어버리고 낯설고 낯선 곳에 그냥 이주가 아니에요. 노예에요, 노예. 노예로 천오백 킬로미터 떨어진 바벨론에 포로 잡혀갔다 이 말이죠.

그러면 유다 자손이 보여줄 것은 뭐냐 하면 그냥 범죄 함이에요. “유다가 범죄 함을 인하여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더니”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에 사로잡혀 갔다는 말을 다른 말로 크게 확성기 대고 외치면, 너희들 범죄 했잖아, 이거에요. 너희들 죄인 중에 괴수잖아, 너희들 지금 어디 살고 있는지 보라 이 말이죠.

어디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장소에서 쫓겨나서 이방나라가 통치하고 권세 누리는 곳에 거기서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뭐냐? 출애굽 완전 쪽 났지요. 애굽에서 빠져나와야 되는데 도로 애굽 나라에 지남철 자석 붙듯이 도로 갖다 붙은 거예요.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의 힘으로 안 나왔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주님께서 도로 딱 붙어서 사로잡혀갔으니까, 사로잡혀갔다는 말은 자기 힘으로 안 사로잡혀가려고 애를 썼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 이야기에요.

그러면 그들에게 구원이란 뭐냐? 우리 힘으로 구원될 수 없다는 정도가 아니고 우리는 아예 완전히 구원의 대상이 될 수가 없었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전에 애굽에서 나올 때는 우리는 이제 구원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약간의 희망이라도 있었는데 도로 팅하고 다시 강력한 이방나라에 그것도 포로가 되어서 들어갔으니까 전에 애굽에서는 포로 정도는 아니거든요. 그냥 살았지만 이제는 포로로 잡혀갔어요. 노예로 잡혀갔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아예 구원은 물 건너간 거죠. 그럼 구원이 물 건너갔다는 것은 세상 바벨론 그 나라와 한 통속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없는 거예요. 그들이 이제부터 생각할 것은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가 아니라 반대로 나가야 돼요. 왜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하지, 그걸 생각하게 하는 점에서 다른 민족과는 차이성을 나타나야 된다 이 말이죠. 나는 왜 구원 받지 못하지?

자,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왜 우리는 구원 받지 못하지요. 제가 질문 드린 겁니다. 질문 해봐야 답은 제가 내리겠습니다만 그래도 여러분 의견을 묻습니다. 왜 나는 구원 받지 못하지? 이 질문의 답변은 이렇게 질문하면 이해가 될 겁니다. 왜 쇠붙이는 맛이 없지? 왜 선풍기는 맛이 없어요? 선풍기는 먹으라고 있는 선풍기가 아니고 바람 나오라는 기능이지요, 역할이죠.

이스라엘 나는 구원 받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의 바람을 일으키는 원인자로서의 그 기능을 수행하는 자가 이게 바로 구원 받은 사람이에요.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구원 되는 거예요. 내 구원 받은 것을 증거하는 게 아니고. 그런 답변이 나오려면 나는 왜 구원 받지 못하느냐? 정답은 나는 구원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구원 받으려고 하기 전에 이미 창세전부터 따로 구원 받은 나를 지정했어요. 그걸 예정했다. 이제 예정론 아시겠습니까.

주님은 나를 예정했는데 그 예정한 나를 지금은 내가 알아보질 못해요. 왜? 나와 나 사이에 동질성이 차단됐기 때문에 끊어졌기 때문에 십자가로 인하여 끊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것은 지금은 나는 내 안에 있어요. 왜냐하면 모든 의미가 나한테 돌아오기 때문에 내 안에 있다고요. 나의 영유권 안에, 영유권 알지요. 독도의 영유권 있잖아요. 실효적 지배, 독도는 우리 땅.

나의 영유권 안에 있지만 구원 받은 사람은 구원될 나는 절대로 나의 영유권 안에 있는 게 아니고 신랑 되시는 예수님의 영향권 안에 있어요. 그걸 예수님의 신부라고 하는 겁니다. 들어나 봤습니까, 신부. 마태복음 25장에 여러분들이 예수님이 천국 이야기할 때 거기 나오는 다섯 명의 그 여자들 특징이 뭐냐? 문밖의 여자. 신랑이 와서 갔는데 다섯 명의 여자가 문을 두드리는 거예요. 열어달라고. 주님께서 천사에게, “좌석명단 봐라. 저 여자들 다섯 명 있는가 봐라.” “없는 데요.”

지금 문밖의 여자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마태복음 7장에도 나오는 이야기고 누가복음에도 나오는데 제가 주를 사랑했잖아요. 주를 위해서 전도하고 주를 위해서 복음을 전하고 주를 위해서 강의도 하고 주를 위해서 설교도 하고 주를 위해서 충성 교회에서 봉사했잖아요. 그런데 문 안에서 들리는 소리는 모르겠는데, 주님께서 누구세요? “너희에게 줄 사랑은 이제 나한테 없다.” 그 이야기 누가 했어요? 박강성이. <문밖에 있는 그대> 노래 가사에서.

더는 너에게 줄 사랑은 끝났어, 없어. 나는 너를 사랑한 적이 없어. 네가 날 사랑했겠지. 그거는 네가 주님을 사랑하면 이익이 있다고 생각하고 도로 자기 자신을 없앨 수 없도록 예수 믿는 착한 의미가 나한테 이익으로 돌아오는 그걸 계산하면서 교회 다닌 거예요. 한 오십 년 동안. 목사, 장로 다 하면서 집사 하면서. 그 짓하고 있었던 거예요. 시킨 대로 다하고 십일조하고 봉사하고 선교하고. 시리아까진 안 갔나, 하여튼 북한 갔다 오고. 온갖 것 다하면서 이게 나한테 이익이 된다는 생각을. 문밖의 여자에요.

그러면 문 안에 어떻게 들어갑니까? 문밖의 여자와 문 안의 여자는 문밖의 여자를 빼야 문 안의 여자가 돼요. 내가 해놓고 너무 어렵다. 지금 말이. ‘목숨-목숨=영생’이 된다 이 말이죠. 이걸 레위 지파가 하는 거예요. 레위 지파는 아무것도 안 해요. 다만 흠 없는 제물을 그냥 하나님의 뜨거운 철판, 철판구이 알지요. 거기다가 양이고 소고 염소를 얹어서 다 태워버려요. 홀라당. 그게 하나님이 흠향하시는 진짜 숯불갈비보다 맛있게 드시는 세 때 양식이라는 겁니다. 매일 양식이라는 겁니다.

왜 그게 하나님께 기쁨이 되느냐 하면 교체가 되기 때문에. 너 죽고 준비된 너 만나게 해줄게. 이게 교체가 돼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뭡니까?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씀을 했는데요, 이 말이 뭐냐 하면 내가 날마다 태어나지 아니하면 주께서 날마다 태어나지 않으면 나는 여전히 옛날 나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날마다 빼기를 당해야 돼요. 그래서 사람이 그 빼기를 해주는데 거기에 기여하는 게 시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루 살면 하루치 늙어갑니다. 점점 더 늙어가네요. 점점 더 멀어져가죠. 나의 나됨을 점점 더....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뭐냐? 매일같이 나를 몰라요. 그리고 우린 늘 느낍니다.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왜냐? 다른 힘이 개입하기 때문에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내가 열심히 자식을 서 노력한다, 라고 느껴지면 내가 왜 그 짓해야 되는데? 옛날 같으면 내가 낳은 귀한 자식 내가 키워야지. 내가 굶어죽더라도 밥 안 굶길게. 이게 어미 된 도리고 아비 된 도리거든요. 그게 나였어요.

그런데 성도 되고 난 뒤에는 지가 뭔데? 내가 왜 너 도와주지? 내가 누군데 너를 도와주세요? “도움 받는 아들아, 한 번 물어보자. 내가 누구야?” 아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엄마, 벌써 치매 왔구나. 왜 그래요.”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면서 “엄마, 병원에 가야 돼, 말아야 돼. 벌써부터 엄마 왜 그래. 엄마, 이것 기억나. 3+5, 이것 알겠어?” 갑자기 치매 환자로 간주하지요.

근데 솔직하게 자기 자신한테 물어보게 되면 갈수록 내가 누군지를 모르게 된다는 거기서 오는 이 존재의 가벼움이 있어요. 그동안 내가 날 안다는 것 때문에 내 손가락으로 내 눈을 찔렀어요. 개뿔도 모르면서 날 안다고 여기면서 그 아는 나를 지키려고 하니까 그 아는 내가 갈수록 점점 더 무게가 무거워서 내가 날 감당을 못해요. 나중에 감당 못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요? 자살해요.

본인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본인 지키기 위해 있던 지 목숨까지 바친다고요. 지 자긍심과 자존감 때문에. 진짜 그런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어요. “당신은 당신을 알아?” “알지.” “당신 내일까지 안 살았으면서 오늘까지 산 것으로 어떻게 당신을 알아?” “그럼 내일까지 살아보고요.” “일 년 뒤까지 살아봐도 당신을 알아? 그럼 일 년 뒤까지 살아봐. 지금 죽지 말고.” “그럼 일 년 뒤에 자살합니다.” “십 년 더 살아.”

살아보면 전에 내가 죽을 이유도 없으면서 괜히 죽으려고 했다는 그것을 과거 이야기로 회상하게 될 겁니다. 성급하게 내가 개뿔도 모르면서도 마치 내가 다 아는 것처럼 인생 다 산 것처럼 쓸데없이 착각하고 자존심 싸움으로 옆집과 싸우고 한 거예요.

그래서 레위 지파는 뭐냐? 레위 지파는 깜깜한 명암을 만들어내는 지파. 레위 지파가 먼저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해서 그다음에 유다, 에브라임, 므낫세 지파 유수한 지파들, 나머지는 소수니까 떼어놓고 유수한 지파에게 지정을 해요. 너는 여기 살고, 너는 여기 살고 그 지정된 자리가 이번에 수련회할 때 에스겔 하는데 에스겔 48장에 나옵니다. 미리 하려하면 딴 주제가 되어 말 안 하겠는데.

에스겔 48장 보면 레위 지파가 너는 어디에 살고, 어디에 살고 다 지정을 해요. 제일 위에 단 지파부터 해서 영역, 영토 배정을 해줘요. 이게 요한계시록에 가면 천국 배정을 해준다고요. 유다 지파, 베냐민 지파, 열두 지파, 십사만 사천 언약에 해당되는 창세전에 약속된 자에게 배정을 해주는 거예요.

십사만 사천이라고 지정하면서 이걸 ‘무수한’으로 바꿔요. 무수한 자들이 종려나무 들고 나온다. 인간의 숫자로는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자, 하나님의 예정대로 이미 예정된 자. 그러니까 이들은 여기에 있는 구원 받은 사람은, 오늘 강의에 제일 중요한 거예요. 그 사람은 내가 만들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이 만들지 않아서 구원 받은 거예요.

내가 나를 만들기를 중지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육이기 때문에 타고난 본성이 나밖에 몰라. 각자성, 개별성, 이기주의 이게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 본성을 하나님의 제단에 바친다? 그것도 안 돼요. 왜? 우리는 이익 없는 짓은 않습니다. 그냥 맹탕으로 나를 망하는 데 던질 위인이 아니에요. 죽도록 충성하란 말씀 나오지요.

요한계시록 2장 10절인가 죽도록 충성하란 말씀에 대해서 사람들은 어떻게 나오는가? 죽기 직전까지 충성해요. 절대로 죽을 때까지 충성 안 합니다. 죽음 직전까지 발을 싹 내밀고 여차하면 도로 나에게 모을 거예요. 미쳤습니까, 바봅니까 죽도록 충성하게. 사람이 그렇게 어리석지 않아요. 악마의 지혜를 갖고 있는데 무슨 어리석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레위 지파는 깜깜한 명암을 만들어내거든요. 깜깜한 명암이라 하는 것은 사진에 보면 음화(陰畵) 기법이 있는데 밝은 것을 까맣게, 어두운 것을 하얗게 하면 모든 것이 뭐가 돼요? 반대가 되지요. 악이 선이 되고, 선이 악이 되고 반대가 되잖아요. 의도적으로 주께서는 내가 온 것은 죄인의 친구로 왔다, 이렇게 이야기함으로서 세상에서 죄인이라고 여기는 쪽에 주님이 서버려요. 죄인이 의인 되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죄인이라고 자부하는 것은 맞아요.

내가 소경 돼야 마땅합니다, 내가 절뚝발이 돼야 마땅합니다, 내가 창녀 돼야 마땅합니다, 내가 강도 되는 것이 합당합니다, 라는 그 말 속에서 주님이 그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게 만들어버려요. 누가복음 18장에서 세리가 하는 말이 뭡니까? 저는 죄인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걸 제가 아까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본질 뽑아내기.

레위 지파가 하는 것은 엑기스, 우리에게 본질, 어떤 본질? 이미 제사를 통해서 우리 죽어 마땅함이 드러났지요. 제단 숯불 판에 이미 죽어 마땅함을 죽어 마땅함과 일치되도록, 우리를 그냥 건지면 우리는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어 마땅함이 없기 때문에 나는 더 살고 싶은데 뭘 죽어요. 딸내미 시집도 안 갔는데,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가만있어, 가만있어. 니 마음대로 해. 마음대로 하면 우린 마음대로 뭐 합니까? 모든 의미가 나의 이익과 관련돼 있으니까 그게 죄가 되지요. 죄 지면 만들어진 죄를 죄다 쏙쏙 뽑아내는 작업을 레위 지파가 한다 이 말입니다. 참 쉽죠, 잉. 그냥 마음대로 사세요. 죄는 죄대로 뽑아줄 테니까. 주께서는.

머리에 새치 난 걸 어쩌란 말입니까. 그런데 손자가 있잖아요. 할머니 주무실 때 하얀 머리 뽑듯이. “고만 뽑아라. 대머리 되겠다.” “할머니, 하얀 머리는 보기 싫어요.” 나중엔 전부 다 하얀 머리. 몽땅 하얀 머리. 왜냐? 원판이 하얀 머리 나오는 원판이기 때문에, 모판 자체가 하얀 머리 판이니까 전부 다 하얀 머리 나오듯이 인간에 나오는 말하는 모든 것이 자기 의미기 때문에 죄가 되지요. 옛날 나를 고수하기 때문에. 머리 하얀 사람 있잖아요. 김한길이. 대통령 인수위할 때 안철수와 같이 했던 사람, 그것 몰라도 돼요. 부인 이름이 영화배우란 것도 몰라도 돼요.

레위 지파가 와서 제사 중심으로 다른 지파, 죄 많은 유다 지파까지 심어놓은 거예요. 그렇게 되게 되면 어차피 유다 지파 이 사람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레위 지파가 레위 지파 기능이 될 만큼 협조하겠지요. 그 제사장과 더불어 일한 사람이 레위 지파고 레위 지파가 세분화되면서 그들이 이스라엘 전체에 대해서 레위 지파가 일부를 에스겔 48장에 나오는데요, 지금 설명하려 하니까 여러분들의 지식이 포화될까봐 말 못하겠는데 하여튼 중심에 레위 지파 땅을 따로 해놨어요.

이 레위 지파 중심으로 해서 열두 지파 전부 다 이것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이게 뭐냐? 의미의 방향이에요.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유다 지파 죄인이면서도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은 나로 인함이 아니고 레위 지파의 언약을 약속을 이루는 그 영향력으로 연관돼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이 판, 지정된 판 이게 새로운 새 예루살렘이에요. 이제 여러분 알 거예요.

예루살렘 중심에는 뭐가 있어요? 하나님의 성전이 있겠지요. 그 성전, 역대상 봅시다. 역대상 9장 17절 누가 읽어보세요. “문지기는 살룸과 악굽과 달몬과 아히만과 그 형제들이니 살룸은 그 두목이라” 18절요, “이 사람들은 전에 왕의 문 동편 곧 레위 자손의 영의 문지기며” 됐습니다. 여기 ‘문지기’란 말이 나오지요.

시편 84편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문지기는 그야말로 요새 말로 종이고 머슴이에요. 보조역할하는 거예요. 레위 지파 말고 문지기에요. 제사하는 기능 말고 문지기 있어요.

역대상 뒤에 보면 레위 지파에 문지기 기능도 있지만 또 여러 가지 28절에 보면, “그 중에 어떤 자는 섬기는데 쓰는 기명을 맡아서” 그릇을 관리하는 설거지하고 그릇을 관리하고 그릇을 또 간수하고. 문지기라 하는 것은 요새 같으면 경비원, 그리고 그 일 말고 요새 같으면 총무 일하는 거예요. 교회 총무는 형광등 갈아 넣어야 되고 콘센트 고장 나면 고쳐야 되고 변기 설치해야 되고. 하여튼 예배를 드리는데 여러 가지 필요한 부속적인 청소도 해야 되고 그런 것.

그러면 성전의 중심은 누굽니까? 제사장이에요. 제사장은 레위 지파에서 주요 인물이 제사장이에요. 이십 세부터 준비해서 십 년 동안 견습생으로 있으면 삼십 세 되면 제사장 돼요. 레위 지파에서 제사장 아닌 사람은 시다바리. 거의 모든 일의 중심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제사. 제사는 음양을 바꾸는 거예요. 다오, 다오, 달라고 하는 그것 말고 빼기를 하는 거예요.

기도가 뭐냐? 주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기도가 뭐냐고 하시면서 답변을 해줘요. 기도가 뭐냐, 이것이다, 라고 답변하지 않고 이런 것은 기도가 아니란 것부터 이야기해요. 어떤 게 기도가 아니냐 하면 대전강의에서도 제가 언급했는데요. 기도란 무엇이 기도가 아닌가, ①번부터 해요. ②번, 기도가 아닌 것 빼놓고 기도가 돼요. 항상 주님께선 말씀을 이렇게 해요.

주여, 내가 뭘 하면 됩니까, 할 때 네가 원한 것 빼놓고 다 하면 돼, 이런 것. 네가 나를 찾는 까닭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그건 육의 일이다. 그러면 무엇이 육의 일이 아니고 영의 일입니까? 네가 너한테 이익이 되는 일 빼놓고 다 영의 일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무엇이 기도가 아닌가? 달라고 하는 건 기도가 아니라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이거는 이방신을 믿는 이방인들 이방 종교인들이 하는 것이 뭐냐? 달라고 하는 기도에요. 금요일에 모이든지 수요일에 모이든지 달라고 하는 이런 기도 절대 하지 말라. 그 이유가 뭐냐? 네가 무엇을 달라고 하기 전에 우리가 마주해야 될 낯선 경험이 너한테 어떤 것이 필요한지 창세전부터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뭘 알고 있는 데요? 너 말고 너. 네가 생각하지 않은 너, 네가 상상도 못한 너, 네가 알아보지 못한 너, 네가 모르는 너. 그러나 내 죽음에 의해서 새로 생긴 나는 주님만 알고 너는 모르는 것, 그 나로 교체하기 위한 기도, 그 기도는 내가 달라고 한 기도 아니라고 했지요. 그러면 기도하면서 달라고 안 한 기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기도를 해도 소용없고 할 수도 없는 거죠.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대신 기도할게. 이게 무슨 기도냐 하면 그 유명한 주기도문입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예수님 따라 다니면서 주기도문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마태복음을 누가 썼습니까? 마태가 썼지요. 주기도문이 마태복음 6장에 나오거든요. 그러면 마태가 예수 따라다닐 때 주기도문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주기도문도 예언이고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인간은 본인이 살아 있으면 이 예언과 말씀을 고만해라, 많이 먹었다고 자꾸 밀어내는데 급급하기 때문에 몰랐어요.

그런데 어떻게 마태고 베드로고 간에 그 사람들 구원을 받았을까요? 누구 덕분입니까? 예수님의 기도 덕분에 구원을 받은 거예요. 그 천정, 그러니까 거대한 궁창 같은 거요. 차양막, 거대한 것들이 주님의 영향력이 그걸 덮치니까 그 안에 주님의 기도도 덮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기도할 때는 누구 이름으로 기도하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 내가 이렇게 이런 것들을 달라고 하는 것도 주님의 기도 덕분입니다, 라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된다 이 말입니다. 우리 얘가 아픈데 낫게 해주세요, 주님. 이 모든 것을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 말은 얘가 아프게 한 것도 주의 뜻이고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신 것도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이고, 그다음에 걔가 아프든 낫든 그 권한은 누구한테 이미 넘어갔다? 주님한테 넘어갔음을 우리가 흔쾌히 받아들이는 그 사실이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고백이 돼요.

그래서 주께서 늘 일어난 일은 우리로 하여금 늘 쉬지 않고 기도하게 하는 일을 일어나게 하는 거죠. 그러나 거기서 빼야 될 것은 내 이름으로 내가 하는 기도는 일체 그거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럼 하루에 기도를 몇 번해야 됩니까? 분명히 제가 아까 했잖아요. 쉬지 말고 해야 한다고요. 시도 때도 없이 한다고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늘 주님과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을 취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뜻이에요. 그런데 저는 그걸 못 느끼는데 어떻게 합니까, 라고 여러분들이 자꾸 물을 건데 그걸 할 때마다 느끼는 게 아니고 몰아서 한 6개월간 몰아서 할 때 있어요. 6개월간 다 은혜였구나. 어떤 때는 2년 동안 몰아서 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저녁때마다 몰아서 느끼는 경우도 있고. 그건 그때그때 달라요. 그거는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제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느낄 때마다 지난 것은 한꺼번에 처리합니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란 사실, 주님께서 나를 바꾸기 위한 주님의 치열한 악마의 싸움의 결과가 나로 하여금 더 이상 내가 걱정 염려 없이 살도록 내 인생 자체를 가볍게 만들기 위해서 주께서 이런 일들을 일으키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시편 84편 10절 다시 보겠어요.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다른 곳이 어디겠어요? 그리스도 밖이죠. 하나님의 예언의 밖, 하나님의 말씀세계 바깥의 세계.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악인의 장막이 어디겠습니까? 이 세상이죠.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시다바리라도 좋습니다.

예배 참석 안 하고 누가 이단 쳐들어올까봐 문지기로 있는 것과 똑같다 이 말이죠. 그런 일, 나는 주의 하시는 일에 지장 없도록 잘 되게 해주기 위해서 그냥 나를 희생타로 해줘도 저한테는 감지덕지한 직분입니다, 이런 뜻이에요.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도 좋소. 내 인생에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도. 그게 역대상 9장에서 레위 지파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역대상 뒤에 계속 보면 레위 지파가 이렇게 먼저 예루살렘에 오는 겁니다.

자, 남은 시간에 예루살렘이 뭐냐? 예루살렘은 그전에 원형이 살렘입니다. 살렘은 어떤 사람이 사는 동네냐 하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이 땅인데 이 땅에 족보가 없는 자들이 사는 동네가 살렘 땅이에요. 이게 창세기 14장 18절에 보면 나옵니다.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이 살렘 왕에 대해서 히브리서 7장에서는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1~3절) 멜기세덱이 이렇게 돼 있어요. 멜기세덱 이 동네는 이 세상에는 없는 동네에요. 존재하지 않는 동네입니다. 이 땅에 없는 동네기 때문에 여기서 있음,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이 동네는 못 갑니다.

그러면 있음이 뭐로 바뀌어야 갈 수 있습니까? 있음으로 없음으로 바뀌어야 되겠지요. 그러면 자살할까요? 안 됩니다. 자살해도 안 돼요. 그런 죽음은, 자살은 왜 안 되느냐 하면 이미 죽은 자가 죽은 티를 내는 게 자살이기 때문에 자살할 때 이 사람이 죽는 게 아니고 이미 태어날 때부터 죽은 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죽은 자가 죽은 자로 그냥 죽는 거니까 여기는 아무런 새로운 의미가 추가되지 않으니까 자살은 안 됩니다.

그렇다면 있음에서 없으려면 죽어야 되는데 있음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언약적 있음으로 바뀐 채 언약적 있음이 없음으로 사라지게 되면 이거는 없는 동네에 참여할 수가 있어요. 예루살렘, 하늘에 있는 살렘. 여러분 실력이 있으니까 어려운 것 하나 하겠습니다. 간단한 건데 갈라디아서 4장, 이게 성경에 있습니다. 제가 어렵게 하고 여러분 괴롭게 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성경에 나온 이야기에요.

갈라디아서 4장 26절, 27절 누가 읽어볼까요.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됐습니다. 여기 예루살렘이 나오지요. 나와 있는데 땅에는 없어요. 어디 있다 했습니까? 이게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에요. 교회 와서 기도하고 복 받고 지금 이런 이야기 아닙니다. 종교 이야기 아니에요. 성경은 지금 종교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여기 있는 우리를 문제 삼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천국 가느냐? 그런 이야기는 성경에 안 나옵니다. 내가 어떻게 빼기를 해서 어떻게 제로가, 다시 있음이 없음이 되느냐? 거기에서는 여기에 율법은 안 돼요. 율법 말고 율법 반대말이 약속인데 율법은 저주고 심판입니다. 율법에서 약속이 나오는데 약속은 뭐냐? 이 저주와 심판을 이기고 사랑과 생명으로 나오는 게 약속이에요. 그래서 약속은 주는 것이고 율법은 행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알아듣든 말든 내 소관 아니고 무조건 그냥 갑니다. 십일조고 주일성수고 예배참석이고 전부 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우리 육은 선악체제기 때문에 행하지 않으면 이해가 안 되는 존재에요. 왜냐하면 그 행함의 주인공은 누구였습니까? 항상 나여야 돼, 나. 내가 기도해야 응답받아요. 남이 기도해서 응답받는 것 없어요. 내가 믿어야 내가 구원 받아요.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다 육이고 이것은 아무리 믿어도 그건 행함이 돼요.

시작을 원인을 내가 출발하지 않는 것이 나에게 낯선 경험으로 마주해야 되고 나에게 꿈으로 침입해야 돼요. 어두운 세상에 꿈으로. 그게 뭐냐? 성령이 와서, 갈라디아서 4장에 성령이 와야 되거든요. 오게 되면 이 있음 안에 섞이게 돼요. 있음이 여기에 언약적 분이 같이 섞이게 되어 언약적 맹세, 약속한 분이 자기의 예정된 있음으로 같이 어디에 들어가느냐? 언약적 죽음으로 같이 참여시켜버려요.

이 작전이 물귀신 작전이라는 거예요. 너, 나와 십자가에 같이 죽자. 이제 더 이상 네가 산다고 이야기하지 마. 내가 네 속에 살게. 너는 그냥 바람 빠진 풍선 되어 내가 풍선 속에 바람 집어넣을게. 네가 뭐 아침에 김치찌개를 해먹든 저녁에 냉면을 삶아먹든 내가 너한테 냉면 먹여주고 아침에 김치찌개 해주고. 김치찌개에다 돼지고기 넣어도 되지만 오뎅 넣어도 되거든요. 오뎅 넣든 그것도 내가 결정할게.

모든 것을 주께서 같이 죽고 같이 살다가 주님의 없음, 십자가로 같이 죽습니다. 죽게 되면 이 죽음에서 사흘 만에 부활이 되지요. 그러면 있음이 없음 되면서 이 지상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없는 동네가 드디어 예루살렘이 등장하면서 여기에는 오직 레위 지파의 제사언약만이 의로움으로 인정받는 거예요. 제사언약이란 것은 죄 없는 분의 희생으로만 사는 것, 이걸 요한계시록 7장 15절에서는 너희들 누구, 하니까 어린양의 피로써 하얗게 되었어요. “저기 흰옷 입고 오신 분, 어떻게 희게 되었어요?” “어린양의 피로써 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먼저 천국 간 사람과 대화가 가능한 사람들, 주고받음이 가능한 사람들, 오직 유월절 피로서만 깔끔하게 된 사람들. 믿음으로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피로서 구원 받는 거예요. 인간의 믿음도 행함에 속하니까. 그 피로서 구원 받을 때 “네가 믿는 행위로 구원 받았느냐?” “아닙니다. 예수님의 믿음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그 예수님의 믿음, 네가 만들어낸 게 아니냐?” “아닙니다. 선물 주셨잖아요. 주신 분이 왜 이래요.”

은혜로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내가 행하지도 않았는데 어떤 결과가 나한테 들이닥친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내 힘으로 끊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끊을 수 없어요. 그러면 여러분 신앙생활 어떻게 해야 돼요?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끊어보세요. 그게 끊어지면 줄 한 개고 지옥 가고. 이게 안 끊어지면 줄 두 개입니다. 진단키트, 구원 받은 거예요.

이제부터 여러분이 해야 될 일이 있어요. 예수 안 믿기로 노력하세요.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 를 안 믿으려고 노력해보세요. 내가 믿으면 그거 끊어집니다, 없어져요. 선물로 받아버리면 아무리 부정해도 주님의 십자가 피로 더 이상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책임질 것은 손톱만큼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또 손톱 키우지 마세요. 마타 손톱 말고 조그마한 손톱, 새끼손톱만큼도 내 인생에 대해서 나한테 책임질 게 없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여러분이 태클을 걸지 마. 여러분의 인생에 여러분의 양심과 자존심이 태클 걸지 마세요. 여러분의 착함이 태클 걸지 마세요. 여러분들은 착하지 않습니다. 바꿔야 될 사람이지 착하게 될 사람은 아니에요. 여러분이 착하다고 착각하는 것은 기어이 여러분 발목 봐야 돼.

거기에 마귀 귀신이 열댓 마리 붙어서, “너 착해, 너 기도응답 받았어.” 발목에 보면 거머리 있잖아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거머리 한 열댓 마리 붙어서, “너 훌륭해, 착해, 복 받을 거야.” 이런 종교 거머리 한 250만 마리 붙어있을 거예요. 툴툴 털어내세요. 안 털리면 발목 자르든지 뭐.

우리는 이 예루살렘에 이 역대상 족보에 거주할 자격 없습니다. 없는데 예수님 요셉에게 꿈처럼 찾아와서 네가 모르는 네가 내가 이미 창세전에 준비돼 있다. 그러면 우리는 말하지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희생제물의 피로 말미암아 그 세계에 간다는 것을 네가 부정하고 싶으면 부정해라. 할 수 없지 뭐. 그러나 부정이 안 되거든 너 내 백성이다. 주의 말씀과 예언을 더 이상 우리가 밀어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모든 족보와 계보가 하나하나가 복음인 것을 이제는 받아들여서 빼기를 아무리 하더라도 그것마저 주께서 우리를 새 인간으로 교체하는 작업으로 기쁘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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