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강의

빈자리b

아빠와 함께 2022. 7. 11. 10:16

20220708b 울산강의-역대기상(12강) 10장 13절 : 빈자리
(강의:이근호 목사)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죽임으로서 이스라엘이 망하는 게 아니고, 사울 왕을 죽임으로서 원래 이스라엘로 되돌렸습니다. 왕이 없어졌으니까 왕 자리를 비어있게 되죠.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사울 왕이 왜 죽었느냐에 대해서 백성들은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었어요. 이것이 장차올 예수님의 모습과 똑같은데요.

세상이 이렇다면 예수님이 오셔서 가셨잖아요. 자, 소위 신학이라는 게 뭐냐 하면 성경을 가지고 인간의 이성으로 논리를 짜집기 한 게 신학이에요. 신학적으로 보게 되면 이렇게 돼요. 순서가 천지를 창조하셨다. 원주 특강할 때 이 그림을 그렸는데, ■천지를 창조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 하고 난 뒤에 타락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성령 안에서 예수 안에 있는 성도라 했다. 그리고 그다음에 이 성도가 나중에 ■예수님 재림하시면 영광스럽게 된다.

이게 성경을 볼 사람들, 또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자들, 교수들, 목사들 전부 다 성경에서 이걸 끄집어내서 이것을 여러분들이 이해하시고 공부하시면 구원 받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창조, 타락, 예수님 안 영광 성경 그대로입니다,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건 지식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이거는 자기를 미워하거나 자기를 부인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 오셨다가 가셨다는 거예요. 예수님 오셨다가 사라졌어요.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얼추 살만한 세계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이 왔다가 감으로서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1예수님이 없는 세계가 돼요. 이걸 강남강의에서 제가 했는데 예수님이 없는 세계를 지옥이라 합니다. 아무리 잘 먹고 잘 살고 편안하고 뜨거운 물 나오고 에어컨 잘 켜도 예수님 없는 세계가 지옥이고, 천국은 살기 좋은 나라가 아니고요 예수님 계신 곳이 바로 천국이에요.

제가 이야기하는 창조, 타락, 예수님, 영광은 이걸 누가 쳐다보고 있느냐 하면 내가 쳐다보고 있다고요. 자기 부인이 안 되고 내가 쳐다보고 있다고요. 하나라도 더 알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소실되지 않고. 이건 뭡니까? 본인들이 여기 있으면 주님이 떠남으로써 자동적으로 우리는 어디 속합니까? 지옥에 속하고 지옥에 속한 자들이 창조, 타락, 예수, 영광 이것 아는 종교놀이, 교회친목 백날 해도 주님 안 계신데 지옥이지 뭐.

그래서 주님 가시고 난 뒤에 여기 종교에서 교회에서 뭘 만드느냐 하면 구원 되지도 못할 예수를 만들어요. 어떤 예수? 이런 것 배우시면 구원 받는다고 가르치는 예수를 가짜 예수, 있지도 않은 예수를 여기다 가득 채웠단 말이죠. 있지도 않은 하나님을. 예수님 왔다 갔는데요.

사울 왕이 왕으로서 백성들의 복종을 강요했어요. 그래서 백성들은 뭐라고 생각했느냐 하면 저 사울 왕이 하는 일이 이게 다 우리 이스라엘을 위해서 사울 왕이 희생적이고 헌신적으로 왕 노릇한다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울 왕이 그 나라에 하나님의 법을 실시한다고 율법에 보니까 이스라엘은 박수무당, 신접한 여인, 점치는 것, 혼을 불러내는 초혼자 이런 자들을 모조리 다 멸절시켜버렸어요. 왜? 하나님이 그러라고 하니까 멸절시켰다고요.

사람들은 그것을 사울 왕이 하나님의 법대로 준행하는 이스라엘 왕이 왕답게 제대로 지금 하나님의 신앙적으로 했다고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 사무엘상 28장에 보니까 거기에 사울 왕이 자기가 명령해서 내쫓으라고 했던 신접한 여인을 사울 왕이 본인이 찾고 있습니다. 어디 갔노, 이 신접한 여인? 엔돌이란 지역에 신접한 여인이 있는데 사울 왕이 찾아가요.

사울 왕이 자기가 한 일이 있었거든요. 무당들은 죽여 버려요. 자기가 명령했기 때문에 지도 미안했는지 변장을 해서 사울 왕 아닌 척하면서 갔습니다. 신접한 여인이 그야말로 신접한 여인이라서 모를 리가 있습니까. 당신은 지금 나를 속이고 있습니다. 딱 보면 다 아는 거예요. 신접한 여인이 요구하는 건 그겁니다. 임금님, 제가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이스라엘이라는 그쪽 조직에서 내가 빠져나왔잖아요. 그러니까 무너진 거죠. 아까 누가 이야기했지요. 하늘에 빵꾸난 것처럼 비가 왔다고. 그게 오늘 핵심입니다. 하늘에 빵꾸가 난 거예요.

하나님의 율법대로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접한 여인을 용납하면 안 되잖아요. 빼야 되는 거예요. 빠져야 되는 거예요. 그걸 누가 명령했는가? 왕의 자리에 있는 사울 왕이 그걸 명령했잖아요. 그런데 사울 왕이 지금 누굴 따라가고 있습니까? 자기가 처분한 신접한 여인이 너무나 아쉬워서 나 그쪽 동네에서 놀래. 그쪽 동네가 내 구미에 맞아. 찾아오는 거예요.

어떤 교회에 복음대로 말씀대로 목사가 주님을 증거한다, 복음을 증거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실상 목사가 진짜 떠나간 주님이 그리우면 본인도 그 길 따라 가야지요. 주여 빨리 저를 주의 증인으로 죽게 하옵소서, 그렇게 나가야 되는데 그런 식으로 설교해야 될 텐데 빠져나간 예수님은 난 모르겠고 지금 사람들이 예수를 원하고 있으니까 그들이 원하는 예수를 전하기 위해서는 내가 예배당을 만들어서 거기서 교주 노릇해야 되겠고 목사 노릇해야 되겠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주님이 빠져나간 나머지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아, 신은 악마가 이야기한 메시아고 신이거든요. 그런데 백성들은 여기에 호응하고 있는 거예요. 그 호응을 해줘야 그들이 나를 목사로 인정해주고 거기서 생활비가 따박따박 나올 수 있단 말이죠. 이야기를 다시 합시다. 이게 어려운 이야기인데.

신접한 여인, 무당이죠. 점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억지로 들어온 겁니까, 아니면 이스라엘 자생적이에요? 어떻습니까? 점치고 궁합보고 관상보고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 그런 사람 있으면 골치 아파. 그런 사람 있으면 누가 쫓아냈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입니까? 가만히, 가만히 우리끼리 교회는 교회고 딸 시집보내는데 궁합은 봐야지. 가만히, 가만히 저희들끼리 음성적으로 노골적으로 그것을 좋아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그러나 실생활에서 앞일을 모르니까 불안하고 두려운데 뭔가 도사가 있어서 우리의 앞길을 알아서 미리 액운을 제거하면 좋겠다. 그거는 인간의 마음속에 누구든지 담겨있는 마음이에요. 인간에게는 왜 이런 행운을 찾고 점치는 것을 원하고 있고 궁합보고 장래 사주팔자를 보고 싶어 하느냐? 그거는 그거에요. 두 번 다시 내 인생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사람은 매일 지난번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모든 정력을 매일매일 다 쏟아 붓습니다. 그럼 실수를 줄이면 뭐가 남는가? 나의 가능성, 내가 어느 정도로 대단한 존재인가를 매일같이 확인하는 데서 자기의 삶의 기쁨을 얻고자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것 아니면 우리가 왜 사는 데요? 이것을 이렇게 줄일 수 있습니다.

나의 인생이 모독 받지 않는 차원을 찾아다닌다. 내 인생이 누구로부터도 모독 받지 않도록 환경, 차원, 그런 영역, 세계 그걸 찾아다니는 거예요. 그래서 블레셋이 쳐들어왔을 때 이스라엘 왕으로서 사울은 대항할 자신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왕 하는 일이 뭡니까? 백성들의 재산과 목숨을 보호하는 게 자기 책무잖아요. 그걸 해낼 자신이 없는 거예요. 왜? 블레셋이 너무 막강한 군대로 쳐들어왔기 때문에.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자기의 명예와 자기의 체면과 왕으로서 소유된 자기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딜 찾아갑니까? 전에 율법에 의해서 지가 왕이라는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 제거했던 신접한 여인의 삶의 차원, 환경에 자진해서 찾아가는 거예요. 이거는 바로 신접한 여인을 저주해서 빼버린 그 저주의 자리를 이스라엘 왕이 자진해서 그걸 원해서 자발적으로 그걸 찾아가고 있어요. 그 저주의 세계를.

그래서 역대상 10장 13절 보겠습니다. 누가 읽어보세요.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 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아멘.

그릇이 있는데 죄가 모아지는 그릇인데 그릇이 한도가 차버렸어요. 한도가 차니까 그게 독특한 특수한 죽음으로 사울이 왕이 해야 될 기능을 다 보여준 겁니다. 처음에 죄가 다 차지 않을 때는 안 죽였어요. 창세기 14장에 보면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이 고생을 해도 이게 대기상태에 있어요. 왜 대기상태냐? 약속의 땅에 있는 열 족속이 죄가 다 그릇에 차질 않았어요. 죄가 더 부풀어 올라야 돼요. 그때까지 기간이 사백삼십 년, 또는 사백 년 대기하고 있다고 저쪽에서 죄가 드디어 거품내면서 부글부글 거릴 때 애굽에서, 고! 하나님께서 모세 불러내서 내 백성으로 가서 저 약속의 땅을 차지하라고 타이밍이 그렇게 맞춰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처음에 이야기한 대리전쟁이에요. 나의 전쟁 아닙니다. 내가 힘들다고 복 주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몸 아프다고 건강해주는 게 아닙니다. 그게 때가 있어야 돼요. 나는 건강하고 싶고, 나는 부자 되고 싶어요. 하지만 “Calm down, Calm down. 가만있어, 가만있어. 아직 때가 안 됐어. 기다려, 기다려.” 강아지한테 쉿, 하는 것처럼. “가만있어. 지금 때가 아니야.”

개인적으로는 열심히 기도해서 뭔가 빨리 가정이 화목하고 돈도 많이 벌어서 예수 믿고 잘 됐다는 소릴 듣고 싶은데 이건 내 스케줄이고, 주님 스케줄은 그게 아니에요. 주님 스케줄은 우리가 몰라요. 알면 우리가 거기에 자꾸 내 가능성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끄집어내서 이게 탈인 거예요.

사울의 죄가 뭐냐 하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 이게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해야 되는데 할 수 있는 일을 했어요. 블레셋이 막강한 군대를 끌고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을 때 사울이 자기가 할 수 있는 걸로 대처하려고 나선 것, 이게 잘못이라고. 이스라엘이 자기 나라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지요.

우리가 확보한 성도란 자리, 주의 백성 자리, 이거는 내 게 아니에요. 주님의 소유입니다. 그럼 우리가 성도가 아니라면 뭐냐?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죄인이거든요. 우리는 이 땅에 죄인이고 성도의 자리는 따로 있고 성도의 자리는 누구 것이냐 하면 예수님의 것이에요. 생각해보세요. 이 땅이 있는데 예수님이 왔다가 가졌잖아요. 예수님 있는 곳이 뭡니까? 천국이죠. 내가 있으면 내가 혼자 있으면 천국 아니에요.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천국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돼요.

그런데 함께 있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이냐 하면 세상을 떠나버린 분이거든요. 세상에 누가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뭐냐? 나를 떠난 분이에요. 나를 떠난 분이 뭘 만들었느냐 하면 성도라는 자리를 만들어요. 거룩한 백성이란 자릴 만들어놨어요. 나를 떠난 분이. 이 성도 자리가 다가옴으로서 주님은 나를 떠날 수밖에 없다는 죄인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하시는 겁니다.

베드로가 고기 잡고 있을 때 예수님이 다가오셨잖아요. 베드로가 밤새 고기를 못 잡다가 예수님이 오른편에 그물 던지라 하니까 배가 침몰할 정도로 그득하게 잡았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한 말이 뭡니까? 주님 동업합시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역시 우리 주님, 우리 교회에 오세요.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 이랬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주께서 하신 말이, “네가 이제부터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 왜? 사명이 사명답게 고스란히 유지되려면 그 사명은 주님한테 매여 있어야 돼요. 사명의 끝자락이 손잡이가 주님한테 있어야지 사명의 끝자리를 내가 쥐고 있으면 안 돼요. 이거는 신앙인이 아니고 종교인입니다. 흔히 말하는 교인이에요. 교인은 주의 능력을 자기의 꿈과 포부, 세상적인 탐욕을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는 사람들이에요.

뭐 희망을 갖자, 뭐 어떻다, 하면 됩니다, 못할 것이 없느니라, 할 수 있거든 무슨 말이냐 능치 못할 게 없다. 능치 못할 게 없다는 게 뭐냐? 아까 자기를 미워하는 것, 우린 못했는데 성령 임하니까 하잖아요. “형님, 정말 그러기 있어요?” "그래 내가 밉습니다. 내가 못난 며느리야." 이게 어떻게 가능해요. 능치 못한 능력 아닙니까. 인간이 하지 못하는 것.

성령이 이스라엘이란 죄인에게 오게 되면 여기에 성도의 자리가 뭐로 만들어지느냐 하면 예수님 자기 피로 만들어집니다. 예수님의 흘린 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죄인이 죄인으로서 들어와야 비로소 뭐가 보이느냐 하면 예수님이 보이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흘린 피가 보여요. 예수님이 보이면 이건 신비주의고 미친 사람이죠. 피가 보여야 된다고요. 예수님 보기를 원합니다. 그건 기도원에 가서 찾고요.

예수님 봐서 뭐하는 데요? 보니까 키가 1미터 78쯤 되고 인물도 훤하고. 그거는 이정재지, 이정재. 참 그건 이정재라니까. 상 받은 <신세계> 주인공. 예수님은 마리아 닮았어요. 보통 인간과 똑같이 닮았다니까요. 예수님의 피입니다. 예수님 동영상 남아있는데 보자. 고고학자고 동영상 남아있어도 그것 소용없어요. 예수님의 피에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피가 우리로 하여금,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죄인임을 추동, 자극을 시키는 겁니다. 사울 왕이나 너나 똑같다. 실제로 똑같고요. 맨날 자기한테 유리한 쪽으로 선택하는 것, 사울 왕이나 우리나 똑같지 않습니까. 죄인 되게 하셔서 피와 결합하게 되면 피가 계속 피 되기 위해서 뭐가 필요하냐 하면 자원이 필요해요. 소재가 필요하다고요.

원자력발전소의 소재가 뭡니까? 우라늄235, 플로토늄이 원자력발전소의 소재가 되는 겁니다. 그게 재료가 되듯이 주님은 죄인이 필요한 거예요. 의인 필요 없고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만만치 않거든요. 지 잘난 맛에 살기 때문에 안 돼요. 그래서 율법을 줘서 위반시키는 겁니다. 십계명 줘서 어느 계명 하나 지킨 계명 없게 만들어요. 주님한테 다 계획이 있습니다. 얼마나 치밀하시고 완벽하신지.

제가 언제 그런 설교했습니다만 인간이 잘 돼서 안 망한 인간이 없다고. 사람들이 잘 되게 되면 인간은 필히 망하게 돼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힘들어서 뭘 해도 자기가 고생하고 희생해서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게 그다음 날 명예가 돼요. 내가 고생한 덕분에 하나님이 이렇게 사랑해줬다. 그게 자기가 죄인 됨에서 벗어나서 명예로운 인간 돼버립니다. 성공한 인생이 돼버려요.

그러면 이거는 뭐냐? 그런 인간은 누굴 찾는가? 사울이 찾는 신접한 여인이 주장하는 그러한 신, 신접한 여인을 찾는 백성들이 찾는 메시아, 예수, 하나님, 삼위일체 그런 것과 새로운 차원을 마련해요. 저주받은 차원이지요.

사무엘상 28장을 보겠습니다. 이걸 봐야 오늘 역대상 10장에 나오는 여호와께 범죄라는 게 뭐냐,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28장 보시면서 대략적으로 우선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하나님 주신 율법은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주셨어요. 시내 산이 있다면 구름이 있고,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만났을 때 처음에는 율법을 모세로 네가 본 대로 들은 대로 전하라, 돌 판 들고 나가라,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에는 뭐냐? 모세와 하나님이 계약해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함께 내려오는 식으로 이스라엘을 이끌게 돼 있어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율법을 못 지켰다, 언약이 깨졌다는 것이 확인됐기 때문에. 그때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고 결국은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했어요.

그 이름이 있는 곳에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잘 안 보이니까 밤에는 불기둥. 이 구름기둥, 불기둥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하면 성막이 있는데 25미터, 50미터 이 성막에 지성소 있는데 이 자리가 접점 지점이에요. 하나님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여기서 피어올라요. 그래서 이 주변에 장막, 텐트를 칩니다. 이건 회막이고, 텐트를 쳐서, 어떤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이 총 250만 된다고 하는데 그건 몰라요. 하여튼 남성만 육십 만인가 그렇지요. 애 많이 낳았으니까 250만 되지 않겠는가 하는데.

이 접점 지점에서 이게 주도적이에요. 여기서 하나님께서 모세야 가자,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구름기둥이 움직여요. 움직이면 가야 돼요. 그다음에 밤중에도 새벽 2시 46분에도 불기둥이 움직이면 자다가도 5분대기조 비상 걸려서 텐트 걷어서 따라가야 되는 겁니다. 주의 이름에 종속되지요. 종속되면서 주의 이름에서 펼쳐진 망, 이게 율법의 그물망이 쫙 펼쳐집니다.

이 율법의 특징은 처음에 준 율법으로 끝이 나지 않아요. 무슨 일거리 있고 사건 생기면 추가적인 율법이 계속 추가가 돼버려요. 그러니까 처음에 열 문제 나와서 열 문제 다 맞췄다, 그것 안 됩니다. 맞추면 스무 문제 나와요. 그것 맞추면 서른 문제 나옵니다. 못 지킵니다. 끊임없이 나와요, 끊임없이.

위반 사건이 생기면 위반 사건에 준해서 또 다시 위반 사건에 파생된 법이 거기서 새끼 치듯이 나오는 거예요. 그것 왜 그렇게 하느냐? 어떤 인간도 율법과 율법 사이는 강력한 전기가 있어서 끄트머리 작은 율법 하나 건드리게 되면 전체 율법을 다 위반한 게 돼요. 그러니까 호랑이 코털 하나 건드리면 사실은 털 하나잖아요. 우리가 양적으로 가벼운 코털 하나 뽑았을 뿐인데 덩치가 일어나서 누구야 내 코털 뽑은 사람이, 그렇게 나오지요.

부분을 건드렸는데 전체가 다 일어나요. 네가 하나를 어기면 전체 율법을 다 위반한 게 돼요. 이것은 바로 인간들로 하여금 여기서 뭐를 생산한다? 예수님의 피를 계속 생산하는 재료를 인간 쪽에서 제공하는데 그게 뭐냐? 죄입니다. 그래서 사울 왕이 지옥 갔습니까, 라는 질문은 적절치 않아요.

지옥이냐, 천국이냐 어디 갔느냐 하는 것은 사울 왕이 개인적 죽음을 죽은 게 아니고 언약적 죽음이기 때문에 사울 왕은 지옥 갔다고 하지 않고 언약을 위반하면 지옥 간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울 왕은 언약을 대변하는 거예요. 언약의 요소 가운데 뭐가 있느냐 하면 언약을 지키면 축복을 받고 언약을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 이 저주 기능을 사울이 대신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울 왕이 저주받는 것은 전체적인 언약의 명예, 주의 이름의 명예, 언약의 체면에 손상 갑니까, 손상 간 게 아니에요? 전혀 손상 간 게 없지요. 괜히 건드려서 감전당해서 죽었다는 말은, 여기 전기 흐른다는 것을 오히려 확인해주고 증명해주는 거거든요.

사무엘상 29장에 거기에 사울 왕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과 만나는 장면입니다. 이게 왜 하나님께 범죄가 되는지, 이게 왜 하나님께 묻지 않았던 일이 되는지 그것을 우리가 봅시다. 성경 중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것 중 하나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라. 진짜 이것은 애매하지도 않아요. 모호해요. 흐릿해요. 그리고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이나 무슨 뜻인지 몰라요.

이상하게 정답인 것 같은 느낌은 드는데 이걸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는 게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것인지를 몰라요. 그때는 아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이건 하나의 요령이니까 잘 보세요. 주님의 지시에 따라라. 이건 마태복음 8장에 백부장이 하는 말이,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예수님께서 이만한 믿음 처음 봤다. 아브라함 백성들 천국에서 다 나오라 해. 네가 들어가라. 대단한 믿음이죠. 네가 천국 차지할 거야. 나머진 다 나가라 해.

그러면 주님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데 주께서 언제 저보고 가라 했습니까? 그때 오후 10시 몇 분이었지요? 어디서 가라 했습니까? 주께서 가라 하셨다는 것이 내가 꾸며낸 가라, 거짓말로 내가 심리적으로 조작해냈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뭐냐? 이건 내가 조작한 게 아니야, 라고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뭐냐? 또 증명할 방법이 있다 해도 그게 먹혀들겠나, 남들한테 납득이 될 이야기냐? 계속 이거는 아주 정립하기가 곤란한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일단은 내가 내 시키는 대로 해보는 거예요. 이거는 우리 아기 참 잘해요. 이거는 뭐 너무 잘해요. 내가 나를 시키는 것, 이것 빼놓고 없잖아요. 오늘 교회 가볼까? 그래 가보자. 내가 나를 시켰잖아요. 내가 나를 시킨 것 아니고 ■이것 빼기 나머지가 주께서 시킨 겁니다. 참 쉽지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평소에 모든 행동이 내가 나한테 명령한 거예요. 내 두뇌가 팔다리에 명령하거든요.

그럼 이걸 빼기 해버리면 주님이 내게 시킨 것은 뭐가 돼요? 몇 퍼센트입니까? 0퍼센트,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다, 이게 있는 겁니다. 제가 말을 절대로 어렵게 한 것 아닙니다. 아주 쉽게 한 거예요. 성경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지요. 모든 기도는 무슨 기도냐 하면, 성도의 기도는 회개의 기도 외에는 다른 기도가 없어요.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의 기도는 무엇과 대조가 되고 비교가 되느냐 하면 지금도 아버지 우편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기도와 대조가 돼요. 죄인의 기도는 나 잘 되기 위해서 달라는 기도밖에 할 수 없어요. 내 형편이 어렵습니다, 몸이 아픕니다, 애가 어떻습니다, 우리 환경이 어떻고, 교회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도와주세요. 국가와 민족과 교회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저 사람은 구원해야 되겠습니다. 저 사람 구원되도록 도와주세요.

굉장히 건전해보이고 신앙적으로 보이고 진짜 성경대로 하는 그런 기도하면 뭐합니까? 모든 게 달라는 기도인데요. 자, 달라는 기도가 뭐냐 하면 기도하는 내가 이 지점에 있지요. 그러면 주께서 달라고 했으니까 주님의 응답이 어느 쪽으로 집합돼야 된다? 내 쪽으로 와야 되겠지요. 그러면 기도하는 내용이 응답받아서 내 쪽으로 오게 되면 나는 내가 살아야 됩니까, 죽어야 됩니까? 둘 중에 하나인데. 응답을 내가 실천 주체자가 살아 있어야 돼요, 죽어 있어야 돼요? 살아 있어야 돼요.

살아 있으면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나를 미워할 수 없고 남은 죽어도 나는 멀쩡해야 돼요. 결국 우리의 기도는 뭐냐? 살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살되 가치 있게 살게 해달라는 기도에요. 그 외에는 우리 기도의 본색이죠. 그러면 이 원리를 그대로 적용시켜보는 겁니다. 주의 지시를 어떻게 따릅니까? 일단은 기도를 해요. 그러면 기도는 뭡니까? 내 이기주의적 기도밖에 안 나오죠. 결국 그 기도는 무슨 기도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무슨 기도? 회개의 기도의 바탕을 마련하게 되지요. 참 쉽지요. 억수로 쉽지요.

자, 여러분 사무엘상 28장에서 사울 왕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물어물어 찾아갔는데 여기서 상상해봅시다. 다음 중 사울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는가? 주관식을 어려워서 안 내요. 객관식만 내요. ①참아야 하느니라. 내가 이스라엘 왕인데 비율법적 행동, 비신앙적 행동은 안 돼. 참자. 그래서 참았다. ②참다, 참다 1개월을 참다가 도저히 못 참겠다. 내려가자. ③금방 내려갔다. 몇 번입니까? 그때는 이번이죠.

이게 28장 6절에 보면 나옵니다. 핑계거리를 만들어서 내려간 거예요. 금방 내려간 게 아니고.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사울은 이미 내려가기로 결심이 났어요. 그래놓고 하나님이 뭐라 하면 뭔가 변명거리가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변명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나한테 지시를 안 했잖아요, 이게 변명이에요.

제가 지금 여러분들에게 설교합니다. 여러분 성령의 지시를 따르세요. 하나님이 지시한 대로 해야 성령의 열매를 맺고 성도입니다, 라고 설교하고 손 털고 나는 집에 갔다 이 말이죠. 남아있는 교인들이 고민이 된 거예요. 주의 지시대로 따라야 되는 것은 옳다고 전부 다 아멘 했고, 오케이 맞는 말인데 어떻게, How, 뭐 어쩌라고? 어떻게 하면 지시대로 하는 건데요?

그러면 여기서 일주일 동안 기도해봅시다. 지시에 따를지. 일주일 동안 기도하고 드디어 행동에 나섰습니다. 주의 지시입니까, 주의 지시 아닙니까? 주의 지시 아니지요. 자, 일주일 동안 기도했습니다. 주의 뜻입니까, 주의 뜻 아닙니까? 주의 뜻이지요. 왜? 일주일 동안 변명거리를 만드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피 흘리게 되는 재료가 되는 죄가 되기 때문에.

일주일 동안 기도했다는 그 의로움과 그것이 사실은 결정은 지가 다 해놓고 주님 앞에 궁시렁궁시렁 거릴 수 있는 거리를 나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내가 막 살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신앙적으로 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주께선 아시지 않습니까? 이런저런 변명거리를 만들어내는 이것 모든 인간의 주특기에요. 이것 없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막 가는 인간은 없어요. 교회 안 나와도 양심은 있거든요.

내가 어릴 때부터 사회에서 올바른 가정 같으면 엇나가지 않았습니다. 맨날 소년원, 교도소 간 인간들 이건 나의 범죄가 아니라 사회의 법이다. 이건 맨날 주장하잖아요. 변호사들 그런 주장하고. 그 사람 생각하면 차라리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 어려울 때 누가 돌봤습니까? 아무도 돌보지 않고 이제 와서 그 사람 범죄자 된 것 누가 그 사람을 욕하겠습니까.

또 요한복음 8장 동원해서 죄 없는 자가 돌을 쳐라. “판사님, 참착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청년인데 그래도 한 번 실수했다고 이렇게 교도소 가면 되겠습니까. 반성하고 있으면 한 번 봐줍시다.” 그럼 판사도 알아서, 알았습니다. 네가 음란비디오 만들어서 그렇게 유포한 것 이제 네가 반성문, 반성문을 이백 장을 쓴 게 아니고 이백 번을 썼어요. 썼으니까 내가 징역 42년 형에 처한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징역이든 무기징역이든 사형이든 진짜 회개하고 반성하는 청년 같으면 그걸 어떻게 받겠습니까? 분노로 받겠어요, 감사로 받겠습니까? 감사로 받겠지요. 이게 바로 뭐냐? 피가 내 앞에 있다는 증거에요. 주님께서 오죽 우리가 숨겨놓은 내가 모르고 있는 그 지독한 나의 이기성과 악마성이 얼마나 독했으면 주님께서 잔소리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의 고귀한 자기 생명을 버려야 이게 해결 날 문제거든요.

이게 지금 우리의 실제 사명 문제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무슨 이야기냐 하면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에요. 횡령한 사람이에요. 아주 노골적으로 횡령한 사람이에요. 사장이 나를 밉게 봐서 쫓아낸다 하니까 그전에 다른 고객들, 회사 거래처와 이야기해서 내가 장부조작해줄 테니까, “당신 우리 사장한테 얼마 있어요?” “이천만 원.” “그럼 천만 원 까줄게. 이렇게 해줄 테니까 내가 퇴직하고 난 뒤에 나한테 잘해줘.”

이렇게 횡령한 사람, 주님도 이야기했어요. 주님도 이 사람에게 앞에 이걸 붙여요. ‘불의한’ 청지기. 불의한테 이 사람이 뭐냐 하면 불의한 건 맞는데 주님께선 뭐냐? 옳게 행동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불의’하고 ‘옳다’ 의와 동급이에요(불의=의). 이퀄이에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요? 이렇게 설명해야 돼요.

불의한 건 불의한데 불의한 당사자가 옳다고 본인이 그렇게 해석하면 안 돼요. 해석은 주님이 하는 거예요. 나쁜 일은 누가 한다고요? 불의한 청지기가 하고, 옳다고 한 것은 누가 해석한다고, 누가 평가했다고요? 주님이 평가합니다. 이 방식 외에는 주님 가신 그 나라에 갈 수가 없어요. 이 방식 외에는 천국에 못 갑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주님이 나보고 옳다고 했어. 난 옳은 일 한 거야.” 어디서 주둥이를…, 어디서 건방진 말을 합니까? 아니에요. 해석은 주님 몫이에요. 우리가 주님 몫을 한다고 내가 그걸 그대로 나 잘한 짓했다고 으스대고 까불면 안 됩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죄밖에 없어요. 그러나 우리가 해내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해요. 불가능한 일은 못합니다.

사울 왕은 이미 신접한 여인을 만나기로 다른 대안이 없으니까 다른 가능성이 없으니까 자기가 왕의 자리를 차지한 게 아닌데 자기가 왕의 자리를 차지해버렸어요. 첫 번째 강의 때 분명히 했지요. 왕의 자리는 빈자리에요. 주의 자립니다. 빈자리입니다. 그건 예수님의 자리에요. 예수님의 자리는 우리 성도의 자리가 아니에요. 우리는 그에 죄인으로 다가서는 거예요.

왜? 예수님이 흘린 피에 언약의 다 이루심을 이루심답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는 죄인으로서 다가가는 거예요. 우리의 그릇에 죄가 넘쳐서 넘쳐나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5장에 보면 죄가 넘쳐나매 무엇이 넘친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침이 이 넘침입니다. 옛날 첫 아담이 망했던 것, 우리는 못 빠져나가요. 문제는 뭐냐? 새로운 아담이 옛날 아담에 속한 사람에게 뭔가 주는 겁니다.

아까 그림을 다시 그려볼게요. 이 그림, 강남강의 때 한 건데 다시 해보면, 주님 오셨다가 떠났지요. 떠나신 주님께서 여기에 성령을 통해서 주님이 여기 계셔버렸어요. 성령 안에서. 성령 안인데 바깥의 모습은 뭐냐? 십자가로 보이고 안에는 성령 안, 이게 천국 안이에요. 그렇다면 여기는 뭐냐 하면 현실이 있고 현실1, 이거는 현실2 이걸 중첩이라 해요.

누가복음 17장 22절 말씀,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너희 안에 있느니라. 그럼 천국을 어떻게 끄집어냅니까? 천국은 나의 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죄를 통해서 비로소 천국이 우리에게 발산되게 돼 있어요. 천국은 상당히 인간을 건드려야 천국이 나와요. 이게 포도원비유입니다.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 먼저 품삯을 주지요. 아침 열 시에 온 사람, 열두 시에 온 사람, 오후 세 시에 온 사람,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들에게 품삯을 줄 때 오후에 제일 나중에 온 사람에게 품삯을 줬지요. 제가 설교할 때 이렇게 했잖아요. 품삯을 받은 자가 자기 품삯을 받았어요, 아니면 주인님의 은혜를 받은 겁니까? 주님의 은혜를 받았지요. 그 사람은 알아요. 그게 은혜인줄. 내가 하루 품삯을 받을 쨉이 못 되는 걸 본인이 알아요.

예수님의 피는 예수님이 장난 친 게 아니고 정말 내가 그만큼 못 됐고, 그만큼 불가능하고 구원이 안 되기 때문에 흘린 피라는 것을 본인은 알고 있는 거예요. 그 피가 피되기 위해서 우리는 뭘 합니까? 살아가면서 주의 말씀을 통해서 사울 왕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을 대리한다는 사실을 발견해야지요. 왜? 우리는 하고 싶은 것만 하니까 이런 버릇을 못 고치니까. 우리는 아쉬우면 기도하고 안 아쉬우면 기도 안 하는 사람이고, 우린 배부르면 자기 자랑하고 어려우면 주께 엎드려 철야하고.

우리는 상당히 이기주의에요. 내 가족중심, 내 교회중심, 우리 국가중심 뭐든지 내가 박혀있는 내 중심 동심원으로 욕심이 퍼져나가는 거예요. 이거는 못 고칩니다. 아니 고치겠다는 발상 자체가 나빠요. 고치지 말라고 이 육신을 주신 거예요. 그리고 아직까지 고쳐서 더 지을 죄가 남아있다고 오늘도 주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연장시켜주었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피가 있으라고. 얼마나 감사할 일이에요.

왜냐하면 죄 지으라고 살게 해줬으니까 평소에 우리 주특기가 그것밖에, 내 위주로 살아가는 그 외에는 다른 재주가 없어요, 우리는. 남을 구제해도 지 자랑하게 돼 있고, 오른손이 하면 왼손 다 들통 나게 돼 있어요.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그 말씀을 통해서 또 다시 우리는 이게 불가능한 내가 죄에서 벗어나는 게 내 힘으로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 또 다시 감사거리가 생겨 버린 겁니다.

그리고 그게 피로써 이미 완료가 됐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욱더 죄인 되게 하신 거예요. 또 마귀한테 속아서 이제부터는 우리가 의인이기 때문에 의만 위해 삽시다. 이런 마귀한테 이제는 여러분 안 속을 거죠? 이때는 서울말 써야 돼. 두 번 다시 안 속을 거죠? 성령의 열매 맺는다고 또 되도 않은 일 안 할 거죠, 이제. 성령의 열매는 회개하는 그자체가 성령의 온유와 자비와 화평과 양선이에요.

항상 십자가를 경유해야 나는 죄인으로 드러나고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 드러날 때 나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게 없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에 같이 튀어나오게 돼 있어요. 사도 바울이 내가 율법으로 흠이 없으나 나는 죄인 중의 뭐라 했습니까? 죄인 중의 괴수로다. 뭐 자신만만하게. 주께서 잘라내시려면 잘라내 주세요. 주가 원하신다면 저 자르세요.

그렇지 않아도 우리 육신은 서서히 연세가 많은 분들은 지금 무너져내려가고 있습니다. 기억력도 안 좋고 머리도 빠지고요. 나중에 늙어서 운전도 못하고요. 모든 것이 자꾸 짜증도 나고 화가 나고 그래요. 전에는 말을 해도 공손하게 말했는데 나이가 들면 한 마디, 한 마디 전부다 가시가 돋은 것 같아. 갱년긴가? 오늘 제목을 갱년기라 할까요?

육신이 본인 마음대로 절대로 안 됩니다. 그냥 내비두세요. 원래 그러다가 쓰레기통 들어가면 되니까요. 다 이루었기 때문에 비워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역할은 이제 말씀에 입각해서 무엇이 죄인가, 내가 왜 사울인가를 아는 그것만 남아있는, 아주 즐거운 일만 남아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복음이 증거 돼야 되는데 우리가 나 잘난 것, 내 의가 증거 되지 않게 하옵소서. 의가 증거 되더라도 그것이 바로 숨겨진 나의 죄인 것을 또한 증거 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울산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험전쟁  (0) 2022.10.10
인간에서 장소로  (1) 2022.09.11
빈자리a  (1) 2022.07.11
자리 배정  (0) 2022.06.06
숨겨진 우리  (0) 2022.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