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강의

석쇠구조

아빠와 함께 2022. 4. 4. 08:26

20220401a 울산강의-역대기상(9강) 6장 1절 : 석쇠구조
(강의:이근호 목사)


역대상 6장 1절, “레위의 아들들은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요” 레위 족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레위의 아들들은 세 명인데 게르손, 그핫, 므라리로 돼 있어요. 그럼 레위의 아버지는 누구냐? 레위의 아버지는 야곱이고, 야곱의 아버지는 이삭이고, 이삭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입니다. 레위 족보가 역대상 6장에 보면 명단들이 나오면서 나타나고 있지요. 이것은 구약역사를 통해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게 있고요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겨진 게 있어요.

그럼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무슨 뜻이고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역사가 주동이 된 것 같은데 그게 아니고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레위 지파가 도리어 역사를 구성하고 형성시켜서 전개시키는 그런 힘이 있어요. 역사가 있고 그 중에 사람이 있는 게 아니고 사람이 갖고 있는 어떤 특정인의 가치를 살리기 위해서 시간을 구체 없이 그 사람에 맞추어서 전개되고 흘러가야 되는 거예요. 그게 레위 지파가 6장에 계속해서 명단이 엄청나지요. 81절까지 계속 나오지요.

역대상은 에스라가 보통 썼다고 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강제로 쫓겨나오고 쫓겨난 그들이 다시 약속의 땅에 소수지만 70년 만에 자기 땅에 돌아오게 됩니다.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지만 역사는 흐른다. 그것은 거기에 약속의 땅에 돌아와서 그 약속의 땅에는 소수지만 그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왕이 아닙니다. 왕은 그 당시에 없어졌어요. 그럼 뭐냐? 레위 지파에요. 레위 지파가 그 사람의 모든 사상을 지배하면서 그 땅에 오실 메시아를 고대하게 만들었습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을 새로 나온 필기무기, 빨간 걸로 해보겠습니다. [레위 지파가 시간을 관장한다.] 시간만 관장하는 게 아니에요. 공간도 관장한다, 공간을 지배한다. 레위 지파가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는 거예요. 레위 지파가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는 그 모습이 어디서 나타나느냐 하면 레위 지파에 아삽이란 사람이 등장해요. 아삽은 레위 아들 셋 가운데 둘째 아들 그핫 계통입니다.

헤만, 아삽이 있는데 이 두 사람이 뭘 하는 사람이냐 하면 찬양 전담반이에요. 찬양을 전답해요. 그러면 찬양이란 언제 하느냐 하면 모든 일이 완료될 때 찬양해요. 성급하게 미리 노래 부르고 샴페인 미리 터뜨리면 안 되겠지요. 제대로 된 찬양은 이제는 인간이 더는 손댈 데 없을 때 찬양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에베소서에 보면 성령 안에서 찬양하라는 이 말은, 너희들은 찬양하는 그 순간 너희들의 신분은 더는 네 자신을 관리할 필요도 없게 된 그런 신분이란 거예요. 찬양하니까.

찬양할 때 뭐 슬프게 찬양하고 찡그리고 찬양하는 것 없잖아요. 찬양할 때는 기쁨으로 찬양하고 감사함으로 찬양하지요. 감사하다는 것은 이미 모든 것이 완성단계에 돌입해서 그 확정된 신분에 변동사항이 없을 그때 마음 푹 놓으면서 이제 종을 편히 쉬게 하는 군요, 시므온 선지자가 아기 예수 만나고 난 뒤에 이제 종을 편하게 놓아준다고 했거든요. 그게 왜냐하면 자기 노선에서 아기 예수의 노선으로 이게 전입돼요. 이사를 가는 거예요. 이동한 거예요.

아담에서 내려온 그 저주의 노선에서 아기 예수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아담, 천국과 연락이 통하는 천국으로 진입하는 그러한 철도노선, 그 노선에 자기가 아기 예수와 함께 갔으니까 자기가 뭐 주를 찬양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게 없어요. 뭐 선교를 할까요, 전도를 할까요, 헌금 할까요 그런 것 필요 없어요. 찬양이란 것은 모든 것이 완료될 때 비로소 터져 나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됐어, 됐어, 이런 거예요. “됐어, 으샤. 맞아, 이거야.” 이게 찬양이에요.

그래서 시편 73편부터 해서 82편까지 전부 다 [아삽의 노래]라고 표제가 붙어있어요. 앞에는 대부분이 다윗의 노래지만 그 뒤에는 아삽의 노래. 그걸 본궤도에 올랐다, 에요. 대구에 가면 3호선에 전철 다니거든요. 그거는 궤도열차에요. 공중에 궤도 만들어놓고 달리는 전철이거든요. 타려고 하면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야 되지요.

아담의 노선의 궤도가 올라서면 거기에는 주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그 올라선 공중에 있는 궤도를 통해서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는 소리는 어떤 소리냐 하면 높은 목소리, 위를 향하여 노래하는 소리, 하이소프라노 정도보다 뛰어난 높은 목소리죠. 이 높은 목소리의 찬양의 원조가 누구냐 하면 천군천사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그 베들레헴 근처에 들판이 있었고 그 들판에 목자들의 밤늦도록 양을 치고 있을 때에 갑자기 조명이 비추면서 완전히 같은 땅인데 같은 땅이 아닌 찬란한 땅으로 달라졌어요. 그러니까 저주스런 땅에도 그 땅에 누가 임재 하느냐에 따라서 땅에서 일어나는 기능이 획기적으로 달라집니다.

그 하늘의 천군천사가 하는 일이 뭐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천국 가면 할 일 없어 뭐하고 지내느냐, 골프도 못 치고 뭐하다 영원토록 심심하지 않고 갈 수 있느냐? 그거는 천사한테 물어봐. 천사가 거기서 한 것은 노래를 한 거예요. 영원토록 노래를 하는데 그 노래가사가 적혀있습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그동안에는 원수지간이었다. 이제는 그 원수지간이 해소되고 평화롭게 된 겁니다. 그 천군천사가 하는 것이 찬양이에요. 찬양인데 어떤 위상이 바뀌면 하늘에서만 울리는 찬양이 지상에서도 울리더란 말이죠. 지상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예요. 하나님께서 완료하신 구원을 완성하신 그런 사건의 현장에서 이거는 도저히 미래까지 참을 수 없어요. 그 현장에서 찬양이 미리 앞당겨서, 그걸 선취라 하는데, 찬양이 터져 나와 버립니다.

그리고 찬양하면서 걱정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이건 모순이지요. 외나무 건너는데 겁나니까 저 원주에 있다는 흔들거리는 다리 건널 때 무서우니까 안 무서우라고 찬양하고,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그렇게 자기마음 다지려고 찬양하는 것 아니고요. 찬양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요. 뭐 찬양해야 되는데, 저는 고생 좀 했습니다, 저도 주를 위해서 많이 사랑했잖아요, 그런 되지도 않는 자기를 쳐다보면 찬양이 안 나오지요.

자기를 쳐다보면 불만이 나오지요. 내가 하는 것보다 하나님 주신 것이 적습니다, 뭐 이런 불만이 나오는데 찬양이라 하는 것은 난 아무것도 안 것도 없는데 일방적으로 다 완성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바로 찬양입니다. 그 찬양하는 전담, 이 사람이 무슨 지파냐? 이게 바로 레위 지파에 속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지우고요 요약해서 다시 쓰겠습니다.

[레위 지파의 족보는 인간을 지배한다.] 천사의 기능이 레위 족보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유다 지파는 다윗, 솔로몬은 유다 지파입니다. 유다 지파는 전쟁하는 기능이 들어와 버린 거예요. 이걸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나의 세계에 주님이 침투해버렸다, 에요. 그래서 성도라 하는 것은 이겁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멀쩡하게 사느냐? 이거는 성도의 관심사가 아니에요. 진리가 무엇입니까, 에 관심을 가져야 성도에요.

여러분들이 아침이든 저녁이든 순간순간 짜증이 확 올라오고, 기분이 안 좋고, 좀 우울하고 허둥지둥 자기의 자존심 챙길 때 특징이 뭐냐? “나 멀쩡해야 돼, 나 미치면 안 돼, 나 건재해야 돼. 나 망가지면 안 돼, 나 무너지면 안 돼, 내 단도리를 내가 해야 돼.” 이럴 때 뭐가 다 날아가느냐 하면 감사도 날아가고 찬양도 날아가고, 자기 단속이라 하지요. 자기 수비, 자기 방어체제에 돌입됩니다.

자기 방어체제의 정반대의 모습이 뭐냐 하면 바로 유월절 사건이에요. 유월절 사건은 죽이세요, 하고 자기 집의 문을 천사를 유인하는 것 같아. 양의 피를 발라서 여기 죽이세요, 우리 집에 들어오세요. 우리 집에는 이미 항복했습니다. 이미 다 우리는 죽었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 식구들은 양을 대신 잡았다는 이유는, 식구대로 양을 잡았다는 말은, 우리는 하나님의 방문하심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우리가 취할 마음태도는 단 하나밖에 없어요.

“우리는 죽어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사자여, 위에서 오신 분이여, 우린 알아서 벌써 죽어서 피를 냈습니다, 하고 문설주에다 피를 바른 거예요. 물론 자기 피는 아니에요. 자기 집에서 기른 양을 대신 죽여서 피를 바랐단 말이죠. 이게 유일하게 통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요. 이 유월절 사건의 정반대가 뭐라 했던가요? 이게 인간의 본심이기 때문에 붉은 걸로 크게 쓰겠습니다.

[제발 나는 좀 멀쩡해야 한다.] 본인이 본인한테 이야기합니다. “정신 차려, 인간아! 너는 너다워야 되고 너는 네 모습을 유지해야 돼.” 이렇게 나를 좀 멀쩡하게 만들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자존심이 돼요. 또는 같은 말로 자긍심, 또 다른 말로 하면 자존감이 돼요. 나는 멀쩡해야 된다.

그런데 여러분 이 자존심이 생기는 순간 나의 정신적인 무게가 1톤이 넘을걸요. 그 쇳덩어리를. 갑자기 자기가 자기의 무게가 너무 무겁게 느껴지면 본인이 발등 찍힙니다. 감당을 못해요. 이 자존감 안에 나는 정상적이어야 돼, 늘 멀쩡해야 돼, 라고 하는 순간 이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지나간 과거의 나의 꿈들이 지금 내가 어느 정도의 실현을 보았는지 실적을 얻었는지 빠르게 머리는 그 계산에 들어가면서 그 지금 내 모습이 나한테 유리하냐 아니면 과거의 꿈에 비해서 내가 많이 손실을 가져왔는지 따지게 돼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선악체계라 합니다. 나한테 유리하면 선, 나한테 손해가 되고 내가 다치게 되면 그건 악이라고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선악을 아는 주인공이 남이 아니고 바로 나니까. 선도 나한테 유리하게 작용해야 되고 나한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은 그건 악이라고 내가 주인이니까 내가 그렇게 결정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아까 레위 족보이야기하면 뭐라고 했습니까? 그러한 나의 세계에 누가 침투했다고 했습니까? 하늘의 천사의 기능이 침투한 거죠. 자, 천사는 지금 어디서 살고 있느냐 하면 이미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찾아오기 전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찾아오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생기지도 않았겠지요.

인간이 하나님이 찾아오면서 그 인간의 내부에는 이런 선악체제뿐이었는데 거기에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요건들이 이 안에 드디어 진입하게 되는 겁니다. 진입하게 되면서 그 작업이 완료가 되게 되면 거기서 뭐가 나온다 했지요? 하나님 앞에 뭐가 나온다? 찬양이 나온다. 찬양부대. 노래하는 찬양부대가 레위 지파 사람들이 한 거예요. 자, 전쟁은 누가 이겼고? 전쟁은 유다 지파에 속한 다윗이 이겼고, 그 다윗이 레위 지파 중에서 찬양하는 사람들을 선택했어요.

선택해서 내가 잘했다가 아니라 나로 하여금 승리케 하신 하나님과 그걸 찬양하는 천사의 기능을 미리 이스라엘 안에서 그것을 해보는 거예요. 미리 하게 된 거예요. 하나님의 작업에서. 홀로 승리하셨기에 우리는 단지 찬양만 할 따름입니다, 라는 그러한 조합이 이뤄지는 겁니다. 그 조합이 오늘날 성도한테는 우린 왕 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그것이 계속 나오는 거죠.

그렇게 되면 이미 완료가 됐기 때문에 무슨 요소가 사라져야 돼요? 자존심? 무슨 자존심이란 이런 개념도 있었어요? 자존감, 자긍심 이런 게 있었어요? 언제 적 이야기인데 우린 주님이 찾아오기 전 이야기잖아요. 아까 자존심 안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우리의 과거가 들어있다 했지요. 과거에 내가 이렇게 하기로 계획했는데 지금 어느 정도 실적 올렸는지 그것 계산하지요. 카운트하는 거예요.

자존심 날아가고 자긍심 날아가고 자존감 날아가 버리면 우리의 과거는 지금은 없다가 돼요. 우리의 과거는 없는 거예요. 그게 유명한 말이 사자성어로 ‘영구 없다’가 되는 거예요. 드라마 <여로>에 영구 나오잖아요.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설교를 하면서 아주 교회 교인들에 대해서 영구의 모습으로 가장 나는 지금까지도 제대로 설명 가능하다고 보는 거예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영구가 머리가 빠졌어요. 대충 머리를 덮고 영구 없다 되잖아요. 제가 어느 대목에서 교인들의 모습을 보느냐 하면 영구 머리가 어릴 때 깨져서 철판으로 박아놨어요. 머리 일부를. 그걸 안 보이게 머리카락이 있는데. 복음으로 보게 되면 전부 다 복음으로 무장된 것 같아, 교인들이.

부드러운 머리카락으로 이렇게 복음으로 숲을 이뤄서 좋겠습니다, 하고 제가 두드려 보겠습니다, 하면 이게 소리가 나는데 철판이니까 철거덕철거덕 철판소리 나는 거예요. 이게 부분이냐 하면 이게 자존심 부분이에요. 이게 자아부분이에요. 이게 구멍이 나야 되거든요. 구멍이 뚫려야 되는 구멍이 자존심으로 자아로 이것까지만 들어오세요. 더는 들어오지 마세요. 딱 입구에 철판으로 방어막을 형성하고 있어요.

내가 복음을 이해하고 지식으로 받아들일 테니까 하나님이여 더는 내 속으로 들어오지 마세요. 내가 감당이 안 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는 내가 멀쩡하다는 그 재미로 평생을 살겠습니다. 하나님이 나한테 호작질하는 재미는 싫어요. 내가 하나님 지식 주시고 여러 가지 주시면 내가 알아서 요리해서 내가 잘났다, 내가 잘난 맛에 그 맛에 나는 평생 내가 계속 가겠습니다. 그러한 자존심과 자긍심이 여기서 장벽을 딱 쳐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영구의 머리통 있잖아요. 그게 얼마나 적절한지. 통통 비어있어서 철거덕철거덕 이게 뭐야? 이게 왜 막혀있지? 여기까지. 더 들어오지 마세요. 이것까지만 허락합니다. 헌금하고 다 할 테니까 더는 들어오지 마세요. 교인들이 이러고 있다고.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 속에 와서 우리의 내부를 다 파내요. 다 파내서 바깥으로 다 끄집어내면 빌립보서 2장에서 그걸 배설물이라 합니다.

네 안에 아담 있다. 선악과의 유혹에 빠져서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가 신이라고 여기는 것 있어. 내가 복음으로 손 집어넣어서 빼내주는 거예요. 다 끄집어내줘요. 어느 설교에서 이 끄집어내는 장면을 애를 자궁에서 끄집어내는 예를 들었어요. 다 끄집어내요. 온갖 더러운 걸 다 끄집어내요.

그래서 성도는 매일같이 나밖에 모른다는 그 죄가 배설물로 계속 하나님의 친한 손길로 인하여 끄집어냄을 당할 때 누가복음 1장에선 그걸 복된 마리아야, 너는 복 받은 여자야. 주님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처녀가 애 낳았다는 그러한 웃음거리를 의도적으로 주님께서 일으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마리아로 하여금 지 자존심이냐 아니면 주님의 침투냐? 천사의 기능의 침투냐 아니면 내가 얼마나 정결한 처자였는데 그것 과거부터 나를 좋게 봤던 선악적으로 나를 유리하게 해석했던 그 해석을 계속 견지하느냐 아니면 그 해석 자체가 더러운 배설물이라는 것을 노출시키느냐? 그 문제에요.

사람이 피곤한 이유는 뭐냐 하면 이것 때문에 피곤해요. 기존의 시공간 안에서 한계를 느끼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시공간을 벗어날 수 없거든요. 그런데 레위 족보는 기존의 시공간을 지배해버려요. 시간의 흐름을 커버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레위 지파의 족보, 쉽게 말해서 모세언약이라 하는데 모세언약이 지배하는 데에서는 지금 몇 월, 며칠인지 여기가 어디인지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에게 집사님 어디 사세요, 하면 정답은 예수 안에 살아요. 울산에 살아요, 가 아니에요. 예수 안에 살아요. 지금 며칠입니까, 그 질문은 의미 없습니다. 영원 안에 있습니다. 이제 제가 방금 이야기한 그 질문이 과연 성경에서 타당한지 우리가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레위 족보와 관련해서. 그렇지 않으면 레위 족보의 정체를 몰라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영구 없습니다. 영구 지웠습니다. 역대상 6장에서 레위의 아들이 셋인데 게르손, 그핫, 므라리 나오잖아요. 여기에 아버지 이름이 야곱이란 말이죠. 야곱은 전쟁하는 기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물론 영적 전쟁이요. 전쟁하려면 적이 있어야 되겠지요. 적을 주적을 알아야 전쟁을 할 게 아니겠습니까.

그 적에 대해서 적이 누구냐, 이것은 레위 지파를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밝혀지게 돼 있어요. 적이 누구냐? 김정은이냐, 푸틴이냐 그렇게 하지 않아요. 적은 레위 지파의 기능을 통해서 조금씩 나타납니다. 이게 적을 찾아가봅시다.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하나가 레위 지파에요. 그러면 이거는 야곱이 했던 전쟁하는 기능을 가진 나라의 그 기능의 일부가 레위 지파에게 분배된 겁니다.

그러면 야곱이 전쟁하는 이스라엘은 이것은 무조건 하나님을 이긴 거예요. 이스라엘 자체가 사람과 하나님을 이겼다는 뜻이에요. 이겼으니까 전쟁의 승리죠. 전쟁의 승리가 열두 개의 기능으로 주어졌다는 이 말은 여러분들이 쉽게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밀가루 한 덩어리를 반죽한 거예요.

엄마가 반죽할 때 애가 세 명이다. 반죽을 네 개로 만들기 위해서 네 개로 반죽이 나눠지는 칼 틀이 있다고 칩시다. 그래서 한 개, 두 개, 세 개, 네 개로 나눴다고 칩시다. 이스라엘은 전쟁하는 기능이거든요. 이미 이기리라 했어요. 이스라엘 자체가 사람과 하나님을 이기리라. 승리한 거예요. 승리한 그 전쟁하는 기능이니까 이걸 칼로써 찍어 내리는 그 자리가 거기서 적이 등장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자존심이 셉니다. 자존심이 셀 때는 복음으로 말씀해주시면 제가 고치겠습니다, 보통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사람이 반성을 한다는 것은 정말 지킨 것을 더 깊숙한 곳으로 감추기 위해서 핑계대기 위해서 반성하는 거예요. 정말 다치기 않은 것을 따로 뒤로 빼돌리기 위해서 핑계 삼아 반성하는 거예요.

“여기까지 잘못했습니다.” “잘했지, 잘했지. 가만있어 봐. 엄마가 널 보호해줄게.” “잘못되었습니다, 잘못되었습니다.” 지켜주는 거예요. 이런 경우 아마 매일 맞이할 걸요. 요샌 못 때리지만 선생님이, “너 잘못했어, 안 했어.” 하고 회초리 들면 애들은 무조건 잘못했다고 해요. 왜? 자기 몸을 지키고 싶어서. 그런 잘못했다는 반성과 회개를 통해서 정작 자기 지키고 싶은 것은 뒤로 빼돌리는 거예요.

자존감이나 자존심은 인간의 힘으로 이거는 깨부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가? 이 사람을 눕힙니다. 눕히면 납작하게 되겠지요. 여기서 모세언약으로 칼 틀로 잘라버려요. 자존심을 못 고치는 이유가 그게 토막 나지 않아서 그래요. 이게 하나로 통합되어 그래요. 언젠가 그런 설교했는데 인간의 자아라 하는 것은 코로나 바이러스 같아요. 코로나 바이러스를 바늘로 백 번을 찔러보세요. 원상회복 금방 돼요. 그게 지독한 거예요.

거울을 실수로 깨서 거울이 산산조각 났을 때 어떤 사람은 다이소 가면 얼마 안 한다고 사면 된다 하지만 그러나 그 거울이 시집올 때 그 거울이라면 어떻게 합니까? 조각조각 다 모아서 스카치테이프로 붙여서 그걸 도로 하나로 만들잖아요. 인간의 자아성은 이처럼 응집력이 있어요. 깨진 것은 선악적으로 악에 속하고 다시 끌어 모아서 내가 신처럼 절대화되는 것은 선악체제에서 선이 되기 때문에 선악을 아는 이상은 이 선하디 선한 나를 포기할 마음은 추호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 속에 괴물이 있는 게 아니에요. 인간이 괴물입니다. 뭐 마귀야 나가라? 본인이 마귄데 마귀야 나가라 해요. 그래서 마귀 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그 의도가 뭡니까? 마귀가 나감으로 뭐는 멀쩡하다? 자기의 자존심과 자아는 멀쩡하게 되는 그러한 상황을 고대하고 있는 거예요. 이거는 자기가 망가지지 않기를 원하는 거예요. 다치기 싫은 거예요.

주님의 뜻은 뭐냐 하면 적에게 하나님의 완성으로 공격함으로 말미암아 그 적이 이스라엘에 편입돼버려요. 포로 잡힘으로 사로잡힘으로 구원을 받는 거예요. 구원은 그렇게 구원되는 거예요. 구원을 주님이 나를 강탈할 때 구원되는 거예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마태복음 12장에 나옵니다. 어느 집에 도둑이 들어왔어요. 주인을 묶어놨지요. 주인은 악마에요.

악마를 묶어놓고 그냥 왔다가 담 넘어 그냥 갑니까? 빈손으로 넘어가요? 아니지요. 악마에게 그동안 붙잡혀 종속돼 있던 그 집안의 가재도구를 냉장고 그런 것들, 아주 옛날부터 내려온 쌀뒤주, 다듬잇돌 이걸 자기의 보따리 삼고 그냥 도둑질해서 넘어가면 우리는 보쌈 안에 들어있는 게 되고, 그게 예수 안이에요. 예수님의 보쌈 안에 보쌈당해서 들어있고 우리 도둑님께서는 우리를 데리고 담 타넘어 다른 시공간으로 우리를 빼돌릴 때 그걸 구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은 스스로 힘으로 지 자존심을 바깥으로 절대로 가질 못합니다. 선악 아는 것이 최종적인 지식이기 때문에. 과학, 학문, 인류학, 언어학 이 세상의 어떤 철학, 신학, 어떤 학문도 그게 무엇과 연결돼 있느냐 하면 내가 멀쩡한 존재가 되기 위한 도구로써 그 학문이 연계돼 있어요. 영어도 마찬가지에요. 영어 되게 못하네, 하면 갑자기 누가 기분 나빠요? 영어 선생님이 기분 나쁘겠지요. 진리가 딴 게 진리가 아니라 내가 멀쩡함이 곧 진리가 돼요.

주님께서 침투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내 시공간을 떠날 수가 없어요. 그 시공간 안에 나의 추억이 가득하고 나의 과거 좋았던 시절이 가득해요. 고향의 푸른 언덕이 그 안에 가득 들어있어요. 어찌 우리가 그걸 떼놓고 거기서 벗어날 수 있어요? 그것 벗어나면 내가 없는데요.

그 안에서 구성된 자가 나에요. 기존의 시공간, 저분은 우리 어머니, 저분은 우리 할아버지고, 저분은 우리 아버지고, 내 동생이고 그런 이웃들과 그런 타인들 속의 연계망 속에 나라는 것이 구성이 되는 거거든요. 그 사람들과 나는 모른다 하면 내놓은 자식이 돼버리면 중요한 내가 없어져버리잖아요. 그래서 강제 침투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난도질해서 잘라버립니다.

자, 이 작업을 레위 지파를 통해서 실시가 되지요. 다른 지파를 통해서도 하지만 레위 지파가 굉장히 길어요. 역대상은 유다 지파와 레위 지파 그냥 두 지파가 투톱이라 보시면 돼요. 역대상 6장에 레위 지파가 엄청나게 길게 나오지요. 어떤 사람은 6장에 나오는 이름 다 외워야 됩니까? 공부나 좀 하고 그런 질문을 하면 내가 말을 안 한다. 어떤 때는 자기 아버지 이름도 모르면서 이걸 다 외우냐고 하는데 이거는 다 안 외워도 돼요. 여기다가 지금 여러분이 복음 아는 사람 집어넣으면 다 맞습니다. 오늘날 성도의 모습이 여기 지파의 모습이에요.

그들은 레위 지파의 아들이어서 그런 게 아니고 레위 지파의 기능을 받아서 그래요. 레위 지파의 기능은 야곱의 기능입니다. 전쟁에 승리한 자로써 적의 정체를 들춰내는 기능에 참여한 자, 그게 바로 레위 지파의 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어렵습니다. 아까 제가 분명히 뭐라 했느냐 하면 레위 지파가 시간과 공간을 광장하고 통제하고 지배한다 했어요.

시간이 있고 레위 지파가 끌어가는 게 아니고 레위 지파가 시간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인물조차도 만들어내요. 시간이 있고 인간이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이 먼저 계시고 주님을 위하여 주님을 향하여 시간과 공간이 있는 겁니다. 그 주님의 기능이 이제는 레위 지파 기능 안에 주님의 기능이 침투해 있는 거예요. 자, 간단하게 말해서 어려울 때는 간단하게 결론부터 먼저 하는 게 수월하겠지요.

레위 지파가 뭐냐? [레위 지파의 기능은 과연 인간이 불을 이길 수 있는가?] 이것을 레위 지파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이길 수 있다와 이 주님의 기능을 소홀히 한 자는 불을 이길 수 못한다고 레위 지파를 통해서 불의 취지를 드러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적은 뭐냐? 불을 이기지 못한 자는 하나님의 적이 되는 거예요.

성경 두 군데를 찾아보겠습니다. 하나는 레위 지파와 관련되어서 레위기 10장 보겠습니다. 보기 전에 아까 한 것, 칼날의 형태가 자존감을 잘라버리면 더 이상 우리의 자아는 토막 났기 때문에 다시 하나의 자존감, 또는 자존심, 자아로 뭉칠 수 없지요. 그게 레위 지파의 기능이에요. 그 레위 지파의 칼날이라 했는데 그 칼날을 성경용어대로 하면 제사법이에요.

제사법 하나하나에 칼날이 있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 제사법을 과연 감당할 수 있느냐, 통과할 수 있느냐를 레위 지파의 제사기능을 통해서 이스라엘 전역에 이걸 실시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칼날에 의해서 조각이 나게 되면 그 사람으로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이 되고 소위 지 자존감, 자존심 우긴다고 까불면 불을 이길 수 없어요.

여기 레위기 10장 1절에,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아론은 모세의 형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어느 계통이냐? 모세는 레위 지파 계통이에요. 어쨌든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라고 돼 있어요.

자, 여기서 하나님이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이 무슨 불이냐는 거예요. 제가 예를 들 테니까 여러분들이 무슨 문제점이 있는지 보세요. 땅콩을 볶을 때 가스레인지에 화구가 네 개 있다고 합시다. 불길이 센 게 있고 약한 게 있잖아요. 그러면 센 불에 땅콩을 볶아야 되는데 남편이 볶고 있을 때 부인이 와서, “내가 명하지 않은 다른 불에 하지 말라 했지? 이 인간아, 불에 죽어.”

그럴 수가 있을까요? 물론 불의 세기 차이는 있겠지만 불 자체가 차이가 날까요, 안 날까요? 안 나지요. 이건 산소와 결합한 화학작용인데요. 또 거기까지 열에너지 이야기해서 분자구조 이야기하지 맙시다.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 분자의 운동에너지가 열에너지로 바뀌고, 그런 이야기 안 하겠습니다.

아니 땅콩 볶으면 되지 불이 무슨 불이냐. 센 불, 약한 불 양적인 차이 있다하더라도 불에 무슨 질적인 차이가 있어요. 성경에 그게 있다는 겁니다. 출처가 어디서 나온 불이냐에 따라서 그냥 불이 아니고 태운다가 아니라 그냥 태워 죽이는 정도가 아니라 이유 있는 태워 죽임이에요.

어떤 이유? 너는 이래서 하나님의 원수야, 그것을 밝혀내는 불, 그 불이 궁금해요? 그게 이사야 6장에 나옵니다. 이사야 6장 6절에 보면, “때에 그 스랍(천사)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불이 있습니까. 용광로에 불이 있고, 포항제철에 불이 있잖아요. 인간을 태울 때 어떤 칼날로, 어떤 계명에 의해서 나온 불이어야만 우리가 그 불로써 정화가 되고 이미 불을 통과할 수 있도록 이제 심판의 불도 너끈하게 벗어날 수 있는 그런 백성이냐? 그것을 레위 지파를 통해서 찾아봐야 돼요. 10분 후에.

 

20220401b 울산강의-역대기상(9강) 6장 1절 : 석쇠구조
(강의:이근호 목사)


진리의 칼날이 오게 되면 관심사가 나 당했다가 아니라 “와, 저게 진리구나. 저게 다른 불과 불의 종류가 따로 있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불지를 때에 그 이유가 진리에 근거해서 불을 지르거든요. 주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제단에 나오는 그 불로 이사야의 입을 지지면 이사야가 신기하게 죄가 사해져요.

그러면 이사야는 평소에 자기 죄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모아놓고 얼마나 연구했습니까? 없어요. 그냥 칼날이 오게 되면 없던 죄가 그것도 새롭게 밝혀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미 구원 받아놓고 이게 뭐가 개시되느냐? 도대체 내가 어느 정도로 죄인인지를 찬양 가운데서 자기 죄가 끄집어냄을 당하는 배설물로 나오는 그 자기의 면면을 보는 즐거움이 있지요.

그래서 레위기 10장에서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했는데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이 나옵니다. 이게 뭐냐 하면 향로에요. 향로는 놋으로 만들었는데 무거워요. 이 향로에 담기는 불이란 것은 향로가 무서운 심판의 불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이 향로의 불은 누구한테 주어지느냐? 놀랍게도 이게 바로 제사장에게, 레위 지파에 속한 제사장의 고유의 몫이에요. 이거는 유다 지파 왕도 안 돼요. 레위 지파만 심판의 불을 감당할 수 있는 향로를 다루는 레위 지파뿐입니다.

그래서 레위 지파가 뭘 다루느냐? 인간 전부를 관장합니다. 레위 지파가 없는 것은 그건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니에요. 레위 지파 없으면 그냥 종교단체에요. 종교적인 바자회 열고 노닥거리는 거예요. 교인 수 불리고 부흥하고 그런 짓하고 있는 거예요. 죄 용서에 좋아하지 마세요. 먼저 하나님의 심판을 우리의 선악체제, 윤리도덕으로선 감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히 해야 됩니다.

그렇게 향로에 다른 불, 제단에서 갖고 와야 되는데 갖고 올 때에 도구가 있어요. 출애굽기 27장 3절에 보면, “재를 담는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을 만들되” 제단의 취지가 어디까지 이동해야 되느냐 하면 향로 있는 장소까지 취지가 아무 탈 없이 이동시켜야 되거든요. 이게 동쪽이라면 이렇게 돼 있어요. 여기 출입구가 있고요, 여기 장막이 있고 둘로 쪼개서 여기서 성소, 지성소.

지성소는 1년에 한 번밖에 안 들어갑니다. 속죄일에. 여기 커튼 쳐 있지요. 여기에 제단이 있어요. 이 제단에서 들어오자마자 양과 소를 잡고, 잡는 것은 바치는 자가 잡아요. 제사장이 잡지 않아요. 제사장은 피만 내요. 여기서 피 뿌리고 성소까지 불을 옮기거든요. 그러면 제단에서 처음에는 멀쩡한 양이 와요. 양이 무슨 양이 되느냐 하면 연기가 되는 양입니다. 양이나 소나 염소가 돼요.

이 연기를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흠향하신다. 향기를 흠향하시는 거예요. 이게 창세기 8장에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드릴 때 향기를 기쁘게 받았어요. 하나님은 음식을 스모키한 걸 좋아해요. 숯불구이를 좋아해요. 생회 이런 안 좋아합니다. 다 태워버려요. 다 태웠다는 말은 충분하게 네 죄에 대해서 회개 정리가 끝난 거예요.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의해서 진노와 죄의 만남이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인간이 어디 들어가야 되느냐 하면 이 진노 속에, 먼저 순서가 이렇게 돼야지요. 진노 속에 들어가서 여기서 뭘 만나느냐? 진노의 불을 만나게 되면 그때 그 인간은 자기가 죄인 습니다가 되는 거예요. 인간이 ‘진노+죄’ 이러한 요소로 구성이 돼요. 구성 composition, 작곡을 composition이라 하잖아요.

작곡할 때 음표 하나가 자기 가치를 주장하면 안 되지요. 음표, 쉼표 이런 걸 모아서 하나의 작품이 되잖아요. 악보가 되지요. 개인 구원은 없습니다. 내가 죄인과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같이 연합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양식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광이 되는 거예요. 찬양의 내용이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개인 구원이란 것은 애초부터 성경에 없어요. 왜냐하면 개인 구원일 것 같으면 주님께서 애초부터 사람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지도 않았지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아닙니다. 진노의 하나님이에요. 증오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예수님뿐이에요. 이는 내 사랑하는 자라, 예수님만 사랑해요.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될 정도로 그만큼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던 겁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신 분이 희생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결과가 우리가 사랑의 대상이 된 거예요. 예수님 빼놓고 사랑의 대상이 아니고 예수님이 품었다는 조건 하에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는 거예요. 이 세상에 사랑, 사랑보다 더 귀한 것은 없듯이 말이죠.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야 죄인답지요. 내 이야기가 요한일서 4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없어요. 그저 노래에는 나오지요.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지요. 너를 소유했지만~, 소유지요. 그걸 사랑이라 하지 않고 소유욕이라 하는 겁니다. 그걸 고상하게 말해서 사랑, 니 내 꺼다 뭐 그런 뜻이겠지요.

요한계시록 15장 2절에, 개인 구원 같은 건 없어요. 그거는 선교단체에서 간사가 백날 이야기해도 성경에 아예 없는 겁니다. 뭐 4영리 갖다놓고 하는 전부 다 그거는 성경적이 아니에요. 인간은 구원을 요구한다는 자체가 욕심이에요. 얼마나 자기 자신을 모르면 구원을 해달라는 그런 시건방진 요구를 합니까. 니가 뭔데? 죽어 지옥 가는 것이 마땅하지. 어떻게 구원을…, 그 터진 입으로 건방지게 구원을 언급합니까? 정말 그거는 자기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예요. 그건 왜냐? 종교가 장사하려고 기독교가 장사하려고 교회가 장사하려고 그것을 이천 년 동안 유포한 거예요. 거짓말을.

여기 2절에 보면,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불이 섞인 유리 바다인데 1절 끝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 나오지요. 하나님의 진노를 옛날 홍해 같은 위치에서 하나님께서 가로막아놓은 거예요. 누가 하나님의 진노를 통과할 수 있을까? 같은 말로, 누가 홍해를, 애굽 사람이 건방지게 홍해를 건너올 수 있을까? 이 홍해 자체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자기의 어린양의 피가 있는 사람, 이미 심판을 이긴 사람만 통과해주고 뒤따라오는 애굽 사람들은 그 홍해가 다시 닫혀서 다 죽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그 대목을 설명하면서 제가 자주 언급하는 중에서 “목사님, 왜 히브리 사람들은 보내고 애굽 사람들은 물에 잠기게 합니까?” 그러한 반발심 같은 게 있는데 제 답변은 간단해요. 왜 인간이 바다에 들어가려 합니까? 이것부터 잘못된 거예요. 바다는 물고기 사는 데지 인간이 사는 데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으로 코스를 그것으로 인간은 못 넘어오도록 오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인간이 살고 있지만 울산이 있으면 그 모든 둘레에 홍해를 둘러서 어떤 인간도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셨다, 일부러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구원은 애초부터 없는 겁니다. 그냥 사시다가 지옥 가세요. 그게 우리의 아담의 본성에 자연스런 현상이고 딱 맞아요. 왜 그리 욕심을 내요. 욕심낼 걸 내야지.

그래서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오지요. 그 뒤에 2절에 보면, 비로소 그 유리 바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뭐가 나오느냐? 적이 나와요. 그 적을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 그러니까 짐승과 우상, 드디어 진노의 불로 말미암아 짐승이라는 하나님의 원수가 자기 정체를 노출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개인의 구원을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성도를 낚시 미끼로 사용해서 진정 이 세상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원수를 들춰내는 노출시키는 기능으로 자기 백성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 그러니까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은 사람과 하나님을 이겼다. 개코도 재주도 없고 돈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이겼데.

베들레헴 근처에서 양치는 목자의 학력이 서울 법대를 나왔습니까, 뭐예요? 자기 부인은 옷을 많이 사 입었습니까? 뭡니까? 내세울 게 뭐가 있어요? 그런데 그들은 새로운 땅에 새로운 환경, 찬양이 가득한 그 환경 안에 완전히 포획되잖아요. 놓이게 되잖아요. 그 찬양소리를 다 듣잖아요. 하늘에서는 영광이고 땅에서는 네가 바로 하나님이 너를 기뻐했다.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목자가 뭐라 하겠어요? 이것 진짜입니까? 괜한 위로삼아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진짭니까?” “그래 증거 보여줄게. 빨리 가거라, 베들레헴에. 지시한대로.” 그래서 베들레헴로 245-7에 들어가 보니까 거기에 아기 예수가 있었던 거예요. 아기 예수가 누워있었단 말이죠. 이미 목자는 다녀갔겠지요.

1순위는 아니지만 목자가 먼저 갔는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바로 아기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아기가 왕이라는 거예요. 새로운 왕의 등장이에요. 새로운 나라의 등장입니다. 이미 승리한 나라에요. 이 세상과 전쟁하는 게 아닙니다. 시시하게. 이 세상 지배자 악마와 전쟁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레위기 10장을 봅시다. 레위기 10장에서 두 사람이 죽어요. 누가 죽느냐? 제사장이 죽잖아요. 나답과 아비후가 죽습니다. 아까 이야기했죠. 아론과 모세가 레위의 둘째 아들 그핫 계통이에요. 나답과 아비후도 아론과 모세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핫 계통인데 그런데 둘이 죽어요. 죽고 난 뒤에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등장합니다.

그렇게 보시고 그러니까 여기서 제가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레위 지파는 시간과 공간을 관장한다, 통제한다, 지배한다, 이것을 분명히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민수기 16장입니다. 여러분 힘들더라도 같이 보도록 합시다. 16장 1절에 보면,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 오십 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 자, 이렇게 돼 있어요.

고라 이 사람들 뭐하느냐 하면 제사장이 아닙니다. 제사지낼 때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 그리고 제사 장비를 분해해서 이동할 때 거기에 짐꾼으로 동원된 사람. 어쨌든 간에 하나님의 제사라는 엔진부분, 이스라엘의 엔진부분이에요. 다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기 위해서 엔진이 가동돼야 되는데 그 엔진이 뭐냐 하면 레위 지파만 할 수 있는 제사에요. 그게 제단이 있어야 되고 성소 있어야 되고 지성소 있어야 돼요.

거기서 제단에 있는 불은 성소까지 이동을 시킵니다. 제단의 불을 성소까지 이동을 시키면 여기 성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떡이 열두 개 있어요. 테이블에 떡이 여섯 개, 여섯 개 있거든요. 열두 개 떡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의 상징물이에요. 우리나라 상징이 뭡니까? 태극기죠. 태극기 걸려있다고 보면 돼요. 거기 조명기구가 있는데 이게 등불이고.

이스라엘을 등불로 비추는데 그게 기능이 계속 가동되려면 바깥에 있는 제단이 안쪽까지 들어와야 돼요. 안쪽까지 들어오면 성소 불나잖아요. 그렇지요. 맹렬한 불. 그래서 불나지 않기 위해서 향로에 담아서 향을 피워요. 향을 피우게 되면 제단 기능의 연속성이 보장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 테이블이 있는데 여섯 개씩 총 열두 개의 떡은 무엇을 받느냐 하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기쁨의 심정, 마음을 열두 지파를 둘러싼 향기로 지배를 받고 관장을 받아요.

인간 존재를 누가 지배합니까? 제사가 지배하는 거예요. 그 일을 누가 해요? 레위 지파가 하는 겁니다. 그 레위 지파가 하는 그 기능, 장차 예수님께서 홀로 하시는 거죠. 그런데 레위 지파 안에 아삽이라든지 헤만이란 사람 있지요. 그 사람들 뭐하다고 했습니까? 다윗 시대부터 전국적으로 월급 받는 찬양대에 있었어요. 찬양할 때 노래만 하는 게 아니에요. 재롱으로 악기, 관악기 동원해서 나팔까지 부르면서 찬양을 합니다.

그 기능은 사실 천사의 기능이에요. 왜냐하면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보면 예수님 재림할 때 무슨 소리가 들립니까? 나팔소리 들려요. 그리고 출애굽기 19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 올라갈 때 시내 산이 멀었다, 가까이 왔다, 멀리 있다를 뭐로 조정하느냐? 산 위에서 나오는 나팔소리가 가까이 들리면 시내 산에 가까기 간 거예요. 이천 미터 넘어요. 높아요. 나팔소리 들리면. 하늘나라 관악대에요. 거기는 하나님 계시고 그 주변에는 찬양대만 가득한 거예요.

찬양할 때 그냥 찬양하지 않고 자기 면류관을 던지면서 찬양해요. 죄가 설 쨉이 됩니까? 내가 설 깜냥이 안 돼요. 제가 서면 안 되지요. 자기가 썼던 면류관도 도로 반납해서 그냥 던지지요. 방탄소년단 공연할 때 꽃이나 들고 와서 누구 발 앞에 던집니까? 모르시는구나. 팬들이 들고 온 꽃을 자기 발 앞에 던집니까, 누구 발 앞에요? 주님 발 앞에 던지잖아요. 그럼 왜 교인들은 지 발 앞에 던지고 합니까? 주면 그만이지, 내가 얼마 냈다, 피아노 기증했다, 꽃꽂이 내가 했다 그걸 왜 자꾸 기억하고 있어요. 과거는 지나간 건 다 지나갔는데.

민수기 16장 16절 보겠습니다. “이에 고라에게 이르되 너와 너의 온 무리는 아론과 함께” 내부 반란을 한 거예요. 네가 뭔데 너희들끼리만 제사장 하느냐, 이렇게 된 거예요. 그렇게 하니까 하나님께서, “이에 고라에게 이르되 너와 너의 온 무리는 아론과 함께 내일 여호와 앞으로 나아오되 너희는 각기 향로를 잡고 그 위에 향을 두고 각 사람이 그 향로를 여호와 앞으로 가져오라“

향이 총 몇 개냐? 250개를 가져왔어요. 사람들 보기에 동일한 제품에 동일한 놋 재질의 향로입니다. 똑같아요. 인간들 보기에 동일한 인간인 것처럼 각자 향로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251개지요. 아론도 들었으니까. 고라 자손 250개에다 거기에 아론의 향로, 아론이 제사장이니까 향로 있지요.

251개 향로 가운데서 어디서 나온 불이 나머지 향로 들고 있는 모든 사람 불을 다 살라버렸겠습니까? 바로 아론의 향로에서 나온 불이(아론의 불은 물론 제단에서 나왔겠지요) 나머지 불은 불도 아니에요. 불은 의식도 없고 감정도 없는 줄 알았지요. 불이 알아서 사람을 구별합니다. 심판 받아야 될 자와 심판을 대신할 자를 구분해요. 어디에도 심판은 있어요. 있는데 너 대신, 그게 십자가거든요.

대신 심판해야 될 대상자와 그리고 향로 드렸잖아요, 교회 나와 줬잖아요, 성경공부 나와 줬잖아요, 헌금했잖아요, 이렇게 자기 향로, 자기 공로를 채워서 들이미는 것, 내가 선교했잖아요, 전도했잖아요, 설교했잖아요. 들이미는 것, 머리 홀라당 다 타버려라. 불같지도 않은 것 들고 있는 이게 불이야? 그걸 달리 말 바꾸면 인간 같지도 않는 게 성도 같지도 않는 게 성도라고 맨날 자기 행한 것 생각하는 게 무슨 성도냐.

그래서 30절에 보게 되면, 땅을 열어서 사람들을 땅에 파묻었고요 동시에 31절에 땅이 갈라지면서 땅이 입을 열어서 거기에 몇 명이 죽었느냐? 35절에 거기 참석했던 향로 들고 있던 250명 다 죽었습니다. 그러면 이게 아론의 제사가 아니고 하나님 스스로 아론 속에 침투해서 아론을 조종했던 거예요. 하나님이 친히. 그게 하나로 모아요. 인간이 민족과 다양성이 있더라도 한 지점으로 모은다고요.

그래서 38절 보면, “사람들은 범죄하여 그 생명을 스스로 해하였거니와 그들이 향로를 여호와 앞에 드렸으므로 그 향로가 거룩하게 되었나니 그 향로를 쳐서 제단을 싸는 편철을 만들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표가 되리라 하신지라” 그때는 제사장이 아론이 아니고 엘르아살입니다. “제사장 엘르아살이 불탄 자들의 드렸던 놋 향로를 취하여 쳐서 제단을 싸서”(39절) 제단을 새롭게 인테리어된 거예요. 까불면 이렇게 불타 죽는다는 것.

이 제단은 너무나, 너무나 귀한 거기 때문에 인간적인 생각으로 니가 가면 나도 간다, 이런 식으로 접근을 하는 것을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는다는 그 모습을 아예 제단 자체가 250명이 불타 죽었다는 증거들로 덕지덕지 붙여놓은 새로운 제단이 마련된 거예요. “불탄 자들의 드렸던 놋 향로를 취하여 쳐서 제단을 싸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물이 되게 하였으니 이는 아론 자손이 아닌 외인은 여호와 앞에 분향하러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함이며”

자, 이렇게 볼 때 제단 있는 곳만 하나님이 계신 장소지요. 그러면 시공간, 인간들이 계산하는 울산, 부산, 대구 이런 시공간은 가스 불로 불타버려야 될 아무 의미 없는 공간이에요. 사람들은 친구 만나 하지요. “네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 “뭐 서울 살다가 목포에도 살아보고 그것도 재미없어서 미국에도 가보고 세상 다 돌아다니면서 다시 늦게 한국에 왔다. 나 그래 살았다.”

보통 자기 공간이동을 이야기하잖아요. 그게 칼날 같은 모세 율법, 제사 율법에 의하면 불탄 데만 돌아다닌 거예요. 아무 의미 없는. 제단이 신약에서 예수 안만이 유일한 공간이지 나머지 공간은 의미 없습니다. 미국 가지 말라는 게 아니라 미국 가더라도 예수 안에 들어가 있어야 돼요.

버블, 예수라는 풍선 안에 있으면 미국에 가든 러시아, 북한을 가든 이미 심판을 벗어났기 때문에 주님 앞에 빼앗김을 당해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생은 이미 완료된 겁니다. 찬양해야 돼요. 감사해야 됩니다. 찬양하면 잘해줄 거죠, 가 아니라 이미 잘했다는 상황을 확인하는 반응이 그게 찬양이고 감사에요. 그래서 감사하라 때는 반드시 찬양이 같이 나오게 돼 있어요. 에베소서 5장에. 너희는 성령에 취해서 시와 신령한 노래로 찬양하라 하잖아요.

이 레위 지파에 관련해서 또 볼 데가 있어요. 이것만 보는 게 아닙니다. 그 다음에 17장에 보면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나오는데,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다른 지팡이를 해보니까 그중에 열두 지팡이 가운데서 싹 난 지팡이가 몇 개였어요? 하나,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그건 어디 갔느냐? 언약궤 속에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한다는 말은 언약궤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거든요. 함께 한다는 것은 너희들이 토해놓은 저질러놓은 모든 죄를 내가 품으면서 함께 게신 거예요. 착한 것, 훌륭한 것, 기특한 것 이걸 품는 게 아니고 우리가 토해놓은 그 더러운 죄들과 주와 함께 하기 때문에 주의 몰골이 뭐냐 하면 십자가에요. 주님은 인물 훤칠하게 오시는 게 아니고 그냥 냉정하게 십자가 죽으신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죠. 네 대신 내가 죽었다는 죽으신 분.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네 자아하고 나와 같이 껴안고 무너지자. 무너지게 되면 그 사람은 사는 거예요. 내 자존심과 내 자아 무너지면 그 사람은 사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이 아이고 맛있다, 하고 하나님은 숯불 좋아하시니까 탄 음식 좋아해요. 이 연기 새카맣게 타버린 몽땅 타버린 그 연기만 주께서 마십니다. 그게 율법의 칼날이에요. 율법을 지키는 게 아닙니다. 법이 와서 잘났다는 우리를, 멀쩡하고 싶은 우리를 아주 조각조각내서 이게 나다, 라고 하는 구성을 못하게 만들어요.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지 이게 납니다, 하면 안 돼요.

이게 좀 어려운데 어떤 가정주부가 애들 학교 보내는 준비하잖아요. 그 다음에 가고 난 뒤에는 애 기저귀부터 빨래도 하지요. 학교 보내는 것도 나고, 기저귀 빠는 것도 나고, 점심식사도 나다. 자꾸 나 쪽으로 오면 안 되고요 하나님이 학교 보내게 하셨고, 빨래하게 하셨고, 그 다음에 식사 준비하도록 하셨다. 주인공이 내가 아니고 주님으로 전환돼야 돼요.

왜냐하면 사는 것이 내가 아니고 주께서 살려줘서 살기 때문에 그래요. 이건 지금부터가 아니라 과거 태어난 것부터 주님께서 필요해서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태어난 것도 주의 뜻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니에요. 죽는 것도 주께서 죽여야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 죽으란다, 하지 마세요. 지가 그런 권한도 없어요.

민수기 25장에 보면 거기에 우상을 섬깁니다. 바알브올 우상을 섬기는데 이것 때문에 11절에 보면 제사장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러니까 모세 때 있었던 아론, 그 다음에 아론 죽고 난 뒤에는 엘르아살, 그 다음에 엘르아살 아들 비느하스, 이게 레위 계보가 살아 있기에 역사는 흐른다. 이스라엘 역사가 흘러가는 거예요.

레위 지파를 살리기 위해서 이스라엘 역사는 레위 지파가 유효할 때까지 계속 가는 거예요. 예수님이 유일한 마지막 제사장이기 때문에 예수님 오실 때까지는 시간이 계속 흘러가야 돼요. 말라기 선지자가 바로 그것 아닙니까. 레위 지파의 유효함이 말라기 선지자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질투심으로 우상 섬겼다고 전염병 퍼졌는데 죽은 자가 몇 명이냐 하면 9절에, 이만 사천 명 죽였어요. 그러니까 아까 레위 지파는 인간의 모든 것을 관장한다. 인간의 운명, 목숨을 관장하는 거예요. 누가? 레위 지파가. 그럼 레위 지파가 사는 동네가 어디냐? 이게 바로 역대상 6장 끝에 나옵니다. 역대상 6장 거의 다 한 거예요.

끝부분에 61절에 보면, “그핫 자손의 남은 자에게는 므낫세 반 지파 족속 중에서 제비 뽑아 열 성을 주었고 게르손 자손에게는 그 족속대로 잇사갈 지파와 아셀 지파와 납달리 지파와 바산에 있는 므낫세 지파 중에서 열 세 성을 주었고 므라리 자손에게는 그 족속대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스불론 지파 중에서 제비 뽑아 열 두 성을 주었더라”

그러니까 열두 지파에서 각출해서 그 지역마다 파견해서 레위 지파가 살도록 그렇게 한 거예요. 왜? 레위 지파가 시간과 공간을 그리고 인간의 목숨을 관장하고 주도적이고 지배하니까요. 각 지파에 각 동네마다 구청처럼 중심에 있어서 그들에게 십일조해서 그들을 먹고 살게 한다면 그거는 이스라엘에 제대로 가동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전쟁,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이길 수 없는 자와 그 진노의 불을 레위 지파를 통해서 제사에 의해서 감당해서 그 안에 들어온 사람과 구분하는 그 기능이 레위 지파가 해야 될 기능이죠. 뭐 이스라엘 안에서는 찬양소리가 일어나지요. 시편에 나오는 그게 찬양의 가사지 않습니까. 자, 그렇다면 역사대로 흘러가게 되면 마지막에 레위 지파는 어떤 땅을 얻는가? 그게 에스겔 48장에 나옵니다. 이게 아주 복잡해요.

에스겔 48장에 보면 하나님의 새로운 성전이 만들어집니다. 이번에 여름수련회를 하는데 코로나 제한조치가 풀려서 동구청에서 이백 명 모여도 됩니다, 하고 왔어요. 에스겔 할 거예요. 거기에 특별히 레위 지파의 땅을 강조해요. 왜냐하면 에스겔이 레위 지파거든요. 아버지 이름이 부시에요.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 에스겔 1장 3절에. 레위 지파가 가면 역사가 뒤따라가는 거예요. 예수님을 향하여 역사가 시간과 공간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48장에 나오는 지도에 의하면, 13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제사장의 지계를 따라 레위 사람의 분깃을 주되 장이 이만 오천척이요 광이 일만 척으로 할지니 이 구역의 장이 이만 오천척이요 광이 각기 일만 척이라 그들이 그 땅을 팔지도 못하며 바꾸지도 못하며 그 땅의 처음 익은 열매를 남에게 주지도 못하리니 이는 나 여호와에게 거룩히 구별한 것임이니라”

땅이 하늘의 요소가 있기 때문에 땅을 하나님이 그냥 준 거기 때문에 인간이 사고팔고의 대상이 안 된다, 부동산 거래가 안 되는 거예요. 땅에 하늘의 요소가 박혀버렸다. 그 박힌 장소가 뭐냐? 어느 지파다? 레위 지파가 있는 장소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오늘날 이스라엘이 자부심을 갖겠습니까, 안 갖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그들이 차지하고 있으니까 얼마나 자부심이 있겠어요.

그것뿐만 아닙니다. 그 레위 지파의 땅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과 가장 가깝고 그리고 왕도 레위 지파와 함께 있어야 돼요. 왕은 어느 지파? 유다 지파. 레위 지파와 유다 지파 투톱, 레위 지파와 유다 지파 왕이 함께 있는 거예요. 나중에 두 지파가 같이 섞여버리면 그게 바로 왕이요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겁니다.

여기 에스겔 48장에 나오는 그 이야기를 제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 가운데 성소가 있어요. 여기는 제사장이 여기 살고 있습니다. 제사장은 다윗 때는 사독 계통의 제사장. 이게 일만 큐빗, 성경에선 척이라 돼 있는데 일만 큐빗, 그 다음에 오천 큐빗 이것은 성소의 일꾼들 땅이에요. 그리고 여기에 제사장, 레위 자손들 땅이 있고, 이게 일만, 그 다음에 왕의 땅이 이만 오천 큐빗.

이게 어디까지냐? 지중해부터 사해까지 꽉 차있어요. 이만 오천 큐빗이라 하면 잘 모르겠지요. 이게 13.5킬로미터. 그래서 총 합쳐서 얼마나 하면 이게 구만 오천, 킬로미터로 한 50킬로미터. 이런 땅을 줘요. 그러면 이 땅에 여호와삼마,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고 돼 있는데 이 땅이 지금 어디 있느냐? 이게 에스겔 48장에 분명히 예언돼 있다고요. 이런 땅이 주어진다. 영원한 곳이에요.

그리고 나머지 파는 뭐냐? 나머지는 이쪽에 베냐민, 유다 해서 저 위쪽으로부터 갈릴리 바다, 사해로부터 저 남쪽 이집트까지 전부 다 나란히, 나란히 해서 레위 지파, 단, 아셀, 므낫세, 아브라함, 르우벤, 유다, 그다음에 베냐만, 시므온, 잇사갈. 스불론, 갓 해서 위에서부터 저 아래쪽까지 꽉 차는데 문제는 이 땅이 지금 어디 있느냐는 거예요. 분명히 약속돼 있거든요. 여호와삼마라 하는 것은 여호와 거기 계시다.

아까 제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레위 지파, 유다 지파 이걸 전부 완성시킨다 했지요. 예수님이 제사장이시고 선지자고 또 로마서에 의하면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우리의 주요 왕이십니다. 호산나, 왕이거든요. 그러면 시간과 공간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을 향하여 바라보게 집중하게 돼 있어요.

스파이더맨 손목에서 뭐가 나옵니까? 거미줄 나오지요. 거미줄을 회수보자 말이죠. 그러면 다시 거미줄 어디로 들어오죠? 스파이더맨 몸체 안으로 들어오잖아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체 안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모든 시간과 공간은 예수 안으로 쑥 거기에 들어와 버린 거예요. 들어와서 예수님께서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어떻게 되느냐? 지상에서 하늘로 떠서 올라갑니다.

그러면 에스겔부터 해서 약속한 모든 땅은 어디로 갑니까? 하늘로 올라가는 예수님 안에 같이 완성되어 올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빌립보서 3장 20절에 보면 우리의 시민권은 울산에 있다가 아니라 우리의 시민권은 땅에 있는지, 하늘에 있는지를 분명히 해야. 우리의 시민권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에 있는 거예요. 왜? 하늘에서 성령이란 거미줄이 우리한테 꽂혔으니까요.

제가 아까 했지요. 하늘의 요소가 우리 안에 침투했다고요. 침투했으니까 우리는 뭐냐? 내 종교적인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그리고 구원받을 권한도 없었는데 오직 십자가의 그 기능을 들춰내기 위해서 그냥 찾아오시고 그냥 강탈하시고 그냥 방문하신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울산바닥이고 늙어가는 이 몸은 뭐냐? 이거는 제한된 시공간, 우리가 육신으로서 어쩔 수 없는 시공간이죠.

뭐 예수 믿는다고 해서 산으로 들로 공중으로 날라 다니는 그런 것 없어요. 육신의 한계 때문에 예수님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도 마찬가지로 육신의 한계 때문에 먹을 것 먹어야 되고 잘 땐 자야 된다 이 말이죠. 주님도 피곤했었어요. 주님도 피곤하고 주님도 밤새 주무시고 했다 이 말이죠. 죄 있는 육신 때문에 썩어진 우리가 감당할 수가 없어요.

항상 성령의 열매해서 항상 방긋방긋 웃고, 그거는 이빨 안 아플 때나 하는 이야기지. 어금니 아프면 무슨 화평과 양선과 자비에 형제우애입니까. 이가 아픈데 뭐 그런 게 돼요. 이 뽑고 대상포진부터 해서 코로나 걸려보세요. 어떤 사람은 코로나 걸렸는데 사흘 동안 얼마나 기침을 했는지 허리가 아프데요. 쉬지 않고 감사하라가 아니고 쉬지 않고 기침하라.

주와 함께 주 안에서 풍선처럼 붕붕 떠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찬양을 하도록 지금도 성령께서 그렇게 레위 지파의 효과를 우리에게 적용시킵니다. 그런데 우리의 육은 마귀가 작동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레위 지파의 율법의 칼날 내가 중심이 아니고 나는 조각난 거예요. 토막 난 거예요. 나는 쪼가리난 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제단의 진노의 불을 감당할 수 없어요. 다 태워집니다. 다 태워지는 이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미련을 두면 안 되지요. 세상에서 돈 좀 많다, 적다 그런 시답지 않는, 이번에 홀인원 했다고 그걸 자랑질 한다고 뭐. 세상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 남들이 못 가져서 환장하는 것, 그것 다 고린도전서 3장에 의하면 불에 태워집니다. 너의 공력을 불에 태워보라 했지요. 계속 불이 나와요. 우리의 육신은 화장해도 괜찮아요. 불에 태워도 괜찮습니다. 끝으로 한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율법이란 석쇠구조로 보면 돼요. 장어구이 할 때 석쇠 있지요. 석쇠구조가 어떻습니까? 연탄불 위에 이런 식으로 돼 있지요. 고등어도 얹고 갈치도 얹잖아요. 우리 몸은 항상 하나로 통합돼 있어요. 자존감으로 똘똘 뭉쳐있다고. 그러면 석쇠구조가 위에서 우리로 내려와 버려요. 법이라 하는 것은 제사법이라 해서 중간에 숭숭 구멍이 뚫렸거든요.

구멍이 뚫렸으니까 하나하나가 칼날이라면 율법이 오면 우리를 작게 잘게, 잘게 토막 내버린다 말이죠. 그러면서도 주께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격자구조 하나하나에 마치 물리학에서 말하는 원자의 운동에너지가 작동해요. 그러니까 애를 학교 보내고 설거지 하고 이 모든 것이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이 말은 어느 것 하나 내 운동에너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다 이 말이죠. 이게 만약에 내가 돼버리면 우리는 좀 착한 일했다고 이젠 농땡이 부려도 되겠지, 이렇게 돼버리면 격자구조가 날아가 버려요. 내 말은 말씀이 위주가 돼야 되지 말씀의 기능을 발휘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게 왜냐하면 천사가 이렇게 살아요. 천사는 지 존재를 주장하는 게 아니고 주께 시킨 대로 기능대로 움직이거든요.

우리가 이 땅에 와서 십자가의 기능자로 살아야지 내가 십자가 믿고 내가 천당 간다고 우겨버리면 그러한 결심은 나중에 치매 걸리면 꽝이에요. 정신 차리자? 지가 정신 차린다고 정신 차려집니까? 나이 들면 안 되는데. 항상 십자가 말씀으로 평소에 움직이면 치매가 걸리든 노인네가 되던 정신이 있든 없든 그것조차도 주께서 하신 주의 것이니까 주의 소유를 주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렇게 인도한다는 것을 미리 앞당겨서 찬양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주신 하늘의 기능이 우리의 생존보다 더 귀하고 우선적으로 소중하다는 것을 새삼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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