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강의

숨겨진 우리

아빠와 함께 2022. 5. 9. 09:28

20220506a 울산강의-역대기상(10강) 7장 2절 : 숨겨진 우리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상 7장 1절에, “잇사갈의 아들들은 돌라와 부아와 야숩과 시므론 네 사람이며”라고 돼 있지요. 그다음에 7장 6절에 보면, “베냐민의 아들들은 벨라와 베겔과 여디아엘 세 사람이며” 그렇게 돼 있어요. 14절에 가면, “므낫세의 아들들 그 처의 소생은 아스리엘이요 그 첩 아람 여인의 소생은 길르앗의 아비 마길이니” 역대상 7장 20절에 보면, “에브라임의 아들은 수델라요 그 아들은 베렛이요” 그렇게 돼 있습니다. 30절에 보면, “아셀의 아들들은 임나와 이스와와 이스위와 브리아요 저희의 매제는 세라며” 이렇게 돼 있지요. 8장에 보면, “베냐민의 낳은 자는 맏아들 벨라와 둘째 아스벨과 세째 아하라와 네째 노하와 다섯째 라바며”

여기 7장 1절에 등장했던 잇사갈, 그리고 베냐민, 납달리. 13절에 보면 납달리 나와요. 그다음에 14절에는 므낫세, 20절에는 에브라임, 그리고 30절에는 아셀. 이런 사람들은 야곱의 열두 아들들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들이 어디에 전부 다 융합이 되느냐 하면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바뀌면서 열두 아들이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미 적재적소에 그들이 존재해야 될 이유들을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제공받은 처지에 있어요.

일본 사람들의 좋아하는 도박 쇠구슬이 위에서 내려와서 사다리 타든지 골짝마다 돌아가는 게임 있잖아요. 그 게임에 보면 인간적인 요소가 일체 들어갈 수 없어요. 그리고 서양에 악기에 보면 종이에다 점을 찍어서 돌리기만 하면 음악이 나오는 오르골이라 하지요. 점 찍힌 대로 음악이 나오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거는 굉장히 무정하고 비정한 처지, 이게 바로 이스라엘의 형편이에요. 어떤 일체의 인간적인 요소가 들어가질 않습니다. 인간의 의지도 소용없고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축복을 줌으로써 야곱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잖아요. 그거는 바로 이 세상에서 인간이 이길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는 없어요. 이 세상에는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영웅도 없고 인물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위에서 내려오는 그 계시의 집단이에요.

계시의 집단이 뭐냐 하면 제가 방금 설명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필히 이긴다. 지는 일은 없다.] 이스라엘이 필히 이기는 것은 야곱에게 내려준 하나님의 언약과 계시 때문에 반드시 이스라엘은 이깁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이긴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필히 이기고 지는 일 없고 반드시 이긴다면 누구는 지느냐 하면, 나는 반드시 지게 돼 있어요. 이 세상에서. 늘 나에서 늘 이스라엘로 바뀌게 하는 그 일을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를 통해서 실시를 하는 거예요.

자, 이게 문제 나갑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한테 질까요, 이길까요? 초장부터 어려운 문제 나왔지요. 이건 변별성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가끔 섞여줘야 돼요. 질문을 이렇게 하면 아무도 못 알아먹습니다. 수능 만점 맞으면 안 되기 때문에 아무도 못 알아먹어야 돼요. 문제를 고칠게요. 문제를 고치면 더 어려워요. 있는 또는 역사에 나타난 이스라엘은 없는 이스라엘을 이길까요, 질까요? 이게 질문이에요.

역사 속에 나타난 이스라엘은 없는 이스라엘에 이길까요, 질까요? 객관식 문제인데 굉장히 간단해요. ①이긴다, ②진다. 간단해요. 몇 번이겠습니까? 예, 역사에 나타난 이스라엘은 없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반드시 지게 돼 있어요. 결국 제가 무정하고 비정한 이스라엘만 이긴다는 말은 이게 역사에 없는 이스라엘이에요.

역사에 없는 이스라엘은 어떻게 생겼는가? 역사에 있는 이스라엘이 무너지는 가운데 없던 이스라엘이 나타납니다. 그것도 역사 마지막에 종말 때 마지막 때 등장해요. 그러면 없는 이스라엘은 어디를 이기느냐? 있는 이스라엘, 이 세상은 이렇게 돼요. 간단하게 보면 이 세상은 누구한테 지게 돼 있느냐 하면 있는 이스라엘이 이기고 세상은 지게 돼 있어요. 근데 있는 이스라엘은 누구한테 지느냐 하면 없는 이스라엘에게 반드시 지게 돼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냐? 이 세상에서는 누굴 이기느냐 하면 이 세상은 반드시 나를 이겨요. 세상은 나한테 이기고, 이 세상은 있는 이스라엘한테 지고, 없는 이스라엘은 있는 이스라엘을 이기고. 이게 성경의 흐름입니다. 그렇게 돼요. 그러면 나는 왜 이 세상에 지는가?

하나의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수십 년 복음 듣고 열심히 교회생활하지요. 그런데 그 복음이고 들었던 모든 성경 내용이 나한테는 이게 윤리도덕으로 변질이 되어서 장착이 돼요. 내가 아는 윤리도덕이 바르게 살아야 되고 착하게 살아야 되고 깨끗하게 살아야 되고 훌륭하게 살아야 된다는 나를 깨끗하게 만들고 훌륭하게 만들고 착하게 만드는 윤리도덕으로 변질되어서 나한테 딱 들어붙어요. 이게 나의 특성이에요. 그래서 이건 다 안다 치고 지우겠습니다.

[선한 사람 되겠다는 것이 십자가를 모독한다.] 이 원칙입니다. 십자가는 네가 어떤 경우라도 선한 경우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여러분들이 십자가를 받아버리면 십자가의 취지를 수용하게 되면 같은 경우에요. 어떤 경우라도 감사 안할 경우는 없다가 됩니다. 왜? 내가 몰랐던 나를 십자가가 너는 윤리도덕으로 무장하든 어떤 경우라도 처음부터 악한 자라는 것이 변동이 없어, 라는 그 사실을 내게 알려주니 감사하지 않을 순간이 없는 거예요. 모든 게 감사가 되는 거죠.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아담의 나는 누굴 이기느냐 하면 궁극적으로 하나님마저 이길 때 나가 돼요. 왜? 이 세상에 태양은 둘이 될 수 없듯이 우리가 하나님 믿는 것은 하나님을 다루려고 하는 거거든요. 하나님을 내 밑에 두려고 하나님을 믿는 거예요. 하나님보다 누가 더 가치 있다? 내가 더 가치 있는 거예요. 하나님보다 누가 더 중요하다? 내가 더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성경말씀에 자기를 미워하라가 될 수 없어요. 인간이 자기를 미워함이 될 수 없는 증거를 제가 알려드려요? 알려드릴게요.

인간은 자기를 미워할 수 없음을 주님께서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무슨 지시를 내리느냐? 원수를 사랑하라, 이런 지시를 내렸습니다. 친구를 사랑하라가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그러니까 원수 되기 전에 사랑하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성질 나쁜 사람 사랑하는 그것도 원수를 사랑하는 것 아니에요. 원수는 직접적으로 나한테 피해를 줘야 되고 나의 소중함과 나의 가치를 건드려주는 존재여야 돼요. 그 존재를 사랑하라는 거예요.

이 율법은 이 세상의 어떤 경우라도 지킬 위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자체가 절대적인 나의 집합체, 이걸 이방나라라 해요. 이방나라는 나의 절대성을 추구하는 세상입니다. 지금 여기 교회 왔으니까 성경이야기 듣지요. 하루 스물네 시간 가운데서 우리가 소중하다는 이야기 빼놓고 들려오는 것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요. 역시 울산은 잘 살아야 돼. 그 이야기 빼놓고 울산 시에서 나오는 이야기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없습니다.

KBS, MBC 뉴스 가운데 우리나라 잘 돼야 된다는 그 이야기 빼놓고 나오는 이야기 있습니까? 없지요. 회사 가 보세요. 아침에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우리 회사 살아남아야 돼, 그것과 연관 이야기 빼놓고 나오는 이야기 있습니까? 없습니다. 노동현장에서 전부 다 뒷짐 지고 손가락으로 안전제일, 안전제일 이것 하는 이유가 뭡니까? 회사가 살아야 내가 산다는 그 이야기란 말이죠. 성질 급하게 해서 39층 아파트 무너지고 그걸 다시 짓고 하면 엄청난 손해가 오니까.

우리는 내가 소중한 거예요. 내가 소중한 것을 방해하는 자를 뭐라고 하냐? 원수라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그 원수를 사랑한다고요? 이게 말이 안 되는 이유가, 원수가 있을 때 내가 정립이 돼요. 내가 규정이 된다고요. 나라는 것은 나의 대적과의 차이 남을 통해서 내가 따로 정해진다 이 말이죠. 그런데 원수를 사랑해버리면 내가 나를 규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밖에 안 되니까 그거는 내가 존재할 이유가 없어지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가 아니고 이스라엘을 내세운 이유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난제, 문제점은 뭐냐 하면 나의 가치를, 나를 망각시키는 어떤 공간을 찾지 못한 게 인간에게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거예요. 나를 없앨 수 있는 어떤 공간, 그런 자리, 그런 상황, 그런 순간, 나를 말소시키고 말살시키는 그런 자리를 인간은 찾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인간은 문제해결이 되질 않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를 느끼는 것은 남과의 비교에서 뛰어나고 잘났을 때에 인간은 뿌듯함을 느끼게 돼 있어요. 남과의 비교에서, 그리고 지금의 자신과 과거의 자신과 비교해서 자기가 더 뛰어나다면 자기는 발전했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 발전한 나를 너무 아까워서 그걸 어떻게 삭제시킵니까? 그동안 발전한다고 공들였는데.

여러분 세상에 있는 종교가요, 종교 들어봤지요. 기독교, 천주교, 불교를 종교라 합니다. 세상 종교의 목적이 있어요. 목적과 목표는 다르긴 하나 같이 보고요. 목표라 하는 것은 도달점이고 목적은 지향점이라 하는데 같다고 보고 목적과 목표가 있다는 말은 나를 망각하기 싫다는 뜻이거든요. 내가 나를 잊어버리기 싫은 거예요.

내가 나에 대해서 잊어버리지 않으면 인간은 반드시 목적과 목표를 기대를 품고, 그리고 만들어내고 그걸 계속해서 추진하려고 애를 쓸 거예요. 그럼 거기서 미흡점이 생겨버리면 인간의 행복은 날아가 버리고 행복은 없어요. 아직 자기 욕망에 도달 안 했는데 무슨 행복이 있습니까. 아등바등 애쓸 뿐이죠.

세상 종교는 나를 망각하기 싫어서 만들어낸 게 종교입니다. 천주교, 기독교 전부 다 마찬가지인데 목적과 목표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도 닦는 거고 다른 말로 하면 인격수양. 교회 다녔으면 사람이 돼야지, 이런 것 있잖아요. 인격수양이에요. 도를 닦는 거예요. 내가 내 모습을 보면서 흐뭇해하는 어떤 건더기를 내가 수집하는 거예요. 금요철야기도하든지 이렇게 해서. 그래서 이거는 <백성공주>에 나오는 계모와 마찬가지입니다. 멀쩡한 계모 또 의문의 일패 당하지만. 맨날 거울 보면서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멋있느냐, 이런 식으로.

우리는 매일 삶이 자기 거울을 들여다보는 삶이에요. 오늘은 얼마나 순수하고 깨끗하고 인격수양이 되고 어지간한 그런 시험에는 빠지지 않고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늘 나, always 항상 나, 나다운 나, 나답게 나 그게 종교의 이상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안 다니고 절에 안 다니는 사람도 무슨 인입니까? 종교인이 되죠. 왜? 종교도 나의 인격수양, 나를 받들기 위해 교회 간다면 그 교회 안 가도 일반사람들 전부 다 사는 이유가 뭡니까? 자기 자신을 떠받드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떠받들면서 근처에 붙는 게 뭐냐? 내 자식 잘 되고, 우리 가문 잘 되고, 내 회사 잘 되고. 이건 겉절이 가장 붙어있는 거거든요. 그러나 젖히고 젖히면 제일 에이스가 뭐냐? 나에요. 나의 가치와 나의 명예와 나의 자존감을 지켜주기 위해서 내가 나를 궁극적으로 사랑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 종교라는 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거는 굳이 교회 안 나오고 절에 안 가도 사람들은 평소에 다 그런 자기 인격수양, 이게 자기 수련인데 자기 수련에 연마하는 거예요. 필라테스만 하게 아닙니다. 뱃살만 빼는 게 아니게요. 자기 연마에요. 내가 어디까지 순수하고 순결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테스트하고 싶은 겁니다. 시험은 본인이 본인을 늘 시험하는 중이에요. 자기 자질과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자기가 망가질 생각을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모든 일에 범사에 뭐라 했습니까? 감사하라 돼 있지요. 감사할 건더기가 있어야 감사하지 근거가 있어야 감사하지 감사할 게 어디 있어. 감사할 시간이 없습니다. 목표에 미달됐는데 무슨 감사를 합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이 그 누구한테 지기 싫어하고 이기고 싶어 해요.

그러나 하나님이 이기게 해주는 것은 우리가 아니에요. 뭐냐? 이스라엘입니다.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시 없으면 안 되니까. 계시가 오게 되면 나는 말살되면서 나의 구원은 잘라지고요, 우리의 구원으로 이게 바뀌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한테 누가 져야 돼요? 나가 패배해야지요. 나는 망각되고 삭제되고 우리로 들어가야지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 나오지요. 탕자가 가출하기 전에는 탕자가 아닙니다. 멀쩡한 둘째 아들이지요. 아버지와 함께 살았습니다. 탕자가 언제 탕자냐 하면, 여러분한테 문제를 내야 되겠어요. 탕자가 돈 들고 아버지한테 가출해서 독립할 때 탕자입니까, 돈 다 날릴 때 탕자입니까, 어느 게 탕자입니까? 가서 성공하면 탕자 아닌 게 돼요, 어떻게 돼요?

지금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 때에 걔가 성공하고, 성공 안 하고 문제가 아니고 아버지 곁을 떠난 거예요. 아버지 곁에 있을 때 탕자가, 둘째 아들이 어떤 오해를 하느냐 하면 아버지 있고, 형 있고, 나 있고 하나, 둘, 셋 이거는 단수가 아니고 셋 사람이니까 합체하면 우리가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우리.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겁니다.

하나같으면 단수가 되고 우리는 복수니까 우리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아들이 가출해서 외지에 갔다가 다시 돌아올 때 다시 아들로 돌아왔습니까. 종으로 돌아왔습니까? 종으로 돌아왔지요. 돌아와도 우리가 돼요, 안 돼요? 우리가 안 되지요. 둘째 아들 생각에 아버지 있고 형과 자기가 있으니까 이거는 우리가 맞지요.

그런데 둘째 아들 생각에 돈 다 날리고 염치불구하고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 우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분명히 스스로 이야기하기를 자기를 아들로 여기지 말고 종으로 여기라 했지요. 종은 노예니까 남의 식구잖아요. 둘째 아들 입장에서 우리가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그런데 아버지가 우리라고 생각 안 된 그 둘째 아들을 품어줬지요. 가락지와 소 잡았지요. 잔치 벌였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일방적 우리가 되지요. 일방적 우리 안에 그 탕자는 자기는 우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완전히 자기를 상실하고 말살해버리지요. 그럴 때 아버지 중심의 새로운 우리가 등장하는 것, 그게 바로 새로운 이스라엘이에요. 이게 이스라엘이라고요. 나 구원 받고, 너 구원 받았으니까 우리는 구원 받았다. 그건 이스라엘이다. 아니에요.

구원의 주체가 되는 내가 구원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 그게 우리가 되는 거예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 때 우리가 된다 이 말이죠. 만약에 내가 살아버리면 나는 윤리도덕의 주체가 돼요. 성경에서 예수님이 십자가 자시고 어떤 복음을 이야기해도 그 복음이 나한테 올 때는 역시 나는 구원된 훌륭한 사람이라는 자각으로, 너도 그렇지? 새로운 이게 기존의 변하지 않은 우리 개념이 돼요. 숫자만 채우는 우리가 된다고.

본인이 안 망해서 그래요. 안 망한다는 말은 어떤 경우라도 뭐가 안 나온다? 감사함이 나올질 않아요. 다시 할게요. 십자가 앞에서는 이미 우리가 죽은 자요 죄인인 걸 알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서는 어떤 인간도 감사 안 할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만약에 감사를 안 해버리면 그거는 십자가에 대한 모독이 돼요. 예수님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이렇게 나온다고.

아버지 당신이 나한테 뭐 해줬다고? 이거는 가출하기 전의 이야기죠. 자기 자신을 모를 때 하는 이야기에요. 아들이 벼슬이라. 교회에서 예수 믿고 구원 받은 게 벼슬이에요. 되게 안 해도 될 일을 지가 믿어준 것처럼 행세하는 것 보면 가관이에요. 웃기지도 않아. 쓰레기 같은 것 건져줬는데 자기 주제도 파악 못하고요. 주님은 주특기가 죄 사함이니까 받아주자, 받아주자, 이런 식이야. 여전히 자기가 살아 있어요. 그래놓고 복음 안다고, 복음 좀 들었다고.

여기에 여러분,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했어요. 제목이 열두 지파 변천과정이에요. 오늘 강의가 역대상 7장이잖아요. 잇사갈 나오고 그다음에 베냐민도 나오고 납달리도 나오고 아셀도 나오고 스블론도 나오고 쭉 나옵니다. 잇사갈, 스블론, 납달리 굳이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데 꼭 알아야 됩니까, 라는 의문을 할 수 있지요. 여러분들 보기에 열두 지파 명단 나와 있지요. 사람으로 보입니까? 율법의 조각들이에요. 하나님의 계시, 언약의 계시가 떨어지면 인간은 인간이 아니고 거기에 레테르, 브랜드 딱지 붙이듯이 사람이 계시로 바뀌는 거예요.

이 사람들이 여러분 보기에는 이스라엘 사람이니 사람이지 율법의 조각들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계시의 조각들이에요. 생일케이크 자를 때 조각 있지요. 그리고 피자조각 있지요. 주님의 계시의 열두 조각들이에요. 그걸 축복 순서로 해놨어요. 창세기 29장 30절에 보면 나와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런 뜻이에요. 너희들 존재는 언약이 없고 계시가 없고 야곱에 주신 그런 축복이 없었으면 아예 생길 리도 없었어, 그런 뜻이에요.

아브라함이 없으면 이삭은 생길 길 없고요, 이삭이 없으면 야곱은 생길 수 없었어요. 정확하게 말해서 아브라함의 언약 때문에 없는 자식이 생긴 게 뭐냐? 이삭이에요. 그리고 이삭 때문에 없는 자식이 야곱이 생긴 겁니다. 그리고 열두 아들도 야곱이 있다고 열두 아들 생긴 게 아니고 야곱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줄 때 열두 아들이 생긴 거예요.

그러니까 열두 아들이 그냥 사람이 아니고 전부 다 거기에 딱지 붙여놓은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란 계시가. 그들의 운명이 바뀐 것은 곧 무엇을 확인하라? 계시가 어떤 식으로 변천하고 어떤 식으로 변해 가는 것을 과정을 보란 뜻이에요. 이게 계시의 인격화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신약에 오게 되면, 방금 한 말은 여러분 이해하시지요. 아버지 있고 아들 있고, 아들 있고 손자 있고, 이해하시지요.

신약에 오면 반대가 됩니다. 자식이 먼저 있고 아버지가 나중에 있어요. 계시의 시간은 반대로 가요. 반대로 가면서 나중에 왔던 최종 계시가 완성된 계시가 그 완성 계시의 취지를 위해서 미리 왔던 계시를 삼켜버려요. 장악해버립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예수님 오기를 기다렸다가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는 기다린 게 아니에요. 그냥 예수 안에서 구원 받은 거예요. 아브라함이. 변화산에 나타난 모세도 엘리야도.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도.

저와 여러분이란 말을 참 한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몰라요. 제가 수요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게 어떤 경우라도 우리가 생각해야 되는데.... 영화 <친구>에 나오는 한 장면이에요. 김광규가 학생 볼떼기 쥐고, “너거 아버지 뭐하시노?” 표준말이 뭐냐 하면, “너희 아버지”거든요. 부산표준말로 하면 “너거 아버지 뭐하시노?” “우리 아버지 조폭인데요.” 선생님이 기가 차서 한동안 창을 보다가 시계부터 풉니다. “오늘 너 좀 맞자.” 장난 치냐 이런 식이죠.

수요일에 그런 예를 든 이유가, 우리가 한시도 잊지 말아야 될 것은, “너거 아버지 뭐하시노?” “우리 아버지 한전에 다니는 데요.” “우리 아버지 세무서에 다녀요.” 그 따위 소리하지 말고, “우리 아버지는 태초고 근본이고 하나님인 데요.” 그럼 세상은 어떻게 해요? 오늘 좀 맞자. 불도 심한 그 집안의 아가씨가 결혼해서, “실례지만 아버지 뭐하시노?” “우리 아버지 하나님인 데요.” 시집살이가 자알 풀리겠습니다. 불도 심한 집안의 제사가 일곱 번인 데요.

왜 멀쩡한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놔두고 왜 말을 못해요. 너는 내 사람이다, 왜 말을 못해. 너는 내 여자다, 말을 못하듯이. 박신양처럼. 왜 하나님 보고 주님 보고 주님이라고 말을 못해요. 나를 너무 아껴서 그래요. 내가 나를 관리하고 내가 나를 삭제하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 있던 열두 지파가 변천이 되는 거예요. 바뀌는 거예요. 이게 역사 속에 나타난 계시 쪼가리 열두 지파가 숨어 있는 열두 지파를 위하여 자리바꿈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제가 역사에 나타난 이스라엘은 숨어 있는 이스라엘한테 지게 돼 있다. 이 말은 뭐냐? 이스라엘은 싸움하면서 새로 생겨난다. 이스라엘에다 뭘 대입하느냐 하면 교회를 대입해도 괜찮아요. 여기다가 성도를 대입해도 됩니다. 성도는 나와 나랑 싸우는 거예요. 어떤 성경말씀을 나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내 품격을 높이기 위해서 내가 인격수양을 하기 위해서 윤리도덕으로 변질된 나를 누가 이기는가? 주님 안에 계시된 나가 나의 가치를 사수하려는 나를 이기는 거예요.

“너 좀 십자가 그만 모독할래? 네가 모독하니까 네 입에서 감사가 안 나오잖아. 걱정이 되지 감사가 안 나오잖아. 그게 바로 네 모습이었었어. 복음으로 칭칭 감은 네 모습이었다고, 이 가짜야.” 주님 생각 안 했어요. 주님을 이용했지요. 스물네 시간 자기 생각만 하고. 지금 열두 지파 이 사람들이 전부 다 율법이에요. 다른 말로 쉽게 하면 말씀이에요. 전부 다 말씀들이거든요.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이 말을 어디서 했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누구 보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세상의 신, 이 세상을 관장하고 있는 신, 악마에게 이야기한 게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다, 라고 이야기했어요. 왜 이야기했느냐 하면 신 안에 누가 놀아나고 있습니까?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거기에 놀아나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행동과 태도는 바로 어디서 나왔는가? 생존본능이에요. 생존에 대한 충동과 본능과 연관되어서 말하고 행동하고 태도가 다 나오게 돼 있어요. 친절하든 양심적이든 뭐든 전부 다 그 밑바닥엔 뭐냐? 생존본능이에요. “나 죽으면 안 돼.” 이게 있다고요. 그래서 인간들이 악마를 못 이기고 세상을 못 이기거든요.

그런데 말씀이 조각들은 뭘 이기느냐? 바로 죽음을 관통하면서 이겨요. 나의 죽음으로써 나를 죽이는 세상을 무사히 용감하게 그걸 관통하는 겁니다. “나, 나한테 신경 안 써. 나는 삭제돼야 마땅해.” 그게 하나님이 내게 딱지 붙인 말씀의 위력이고 말씀의 완성이죠. 아까 이야기했지만 모든 계시의 완료는 마지막에 있잖아요. 마지막에 아브라함의 자손이 오게 되면 완료됐지요.

그러면 모든 정점은, 마지막이라 하는 게 시간이 창조로부터 마지막 종말까지 이렇게 직선으로 가는 게 마지막이 아니고 위로 가는 게 마지막이에요. 위에서 뭐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지막 남은 것은 이미 위에서 올라가는 점에서 이거는 뭐냐? 역사에서 시작해서 비행기가 막 뜨는 거예요.

그러면 너희는 이미 땅에서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어디로 올라갔습니까? 골로새서 3장 3장, 우리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어디 있다 했습니까? 골로새서 3장 3절, 여러분 다 외우지 않습니까. 생명은 어디 있어요? 하늘에 간수된바 돼 있다 했지요. 그러니까 역사가 이렇게 올라가는 게 아니고 시간도 따라서 위로 십자가로 가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시간이 재분배 되는 거예요. 공간과 시간이 재할당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여기 아브라함이 있다면 아브라함이 붕 뜨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마중을 나오니까 같이 합류를 하니까 아브라함은 이미 생명을 얻은 거죠. 오늘도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 재림 안 해도 이미 생명을 얻은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말씀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말씀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 말이나 저 말이나 똑같은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주어와 술어의 계층을 관점을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 하면 말씀부터 시작해야 돼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는 말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 말씀 있어야 된다는 말이 아니고 말씀이 말씀대로 하는데 너희가 거기에 말려들었다 이 말입니다. 왜? 말씀의 딱지가 붙어있으니까.

그래서 열두 지파가 이렇게 바뀌는 거예요. 열두 지파가 있을 때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스라엘은 그 자체로 완성됐다 하거든요. 완성된 게 아니에요. 완성된 것은 보이지 않는 이스라엘이고 이것은 완성되기 위한 밑바탕이 되어서 여기서 변천이 일어나야 될 그러한 한시적인 이스라엘이에요.

우리 성경 하나 찾아보겠습니다. 역대상 7장 2절 끝에 보게 되면, “그 아비 돌라의 집 족장이라 대대로” 그다음 단어가 뭡니까? “용사”지요. 그럼 5절에 봅시다. “그 형제 잇사갈의 모든 종족은 다 큰” 뭐라 합니까? “용사”지요. 7절에 봅시다. “다섯 사람이니 다 그 집의 족장이요 큰 용사”지요. 9절에 봅시다. “저희는 다 그 집의 족장이요 큰 용사” 11절에 봅시다. “이 여디아엘의 아들들은 그 집의 족장이요 큰 용사라” 40절에 봅시다. “이는 다 아셀의 자손으로 족장이요 뽑힌 큰 용사요” 8장 13절 봅시다. “브리아와 세마니 저희는 아얄론 거민의 족장이 되어 가드 거민을 쫓아내었더라” 쫓아냈지요. 전쟁과 관련돼 있지요. 8장 40절, 제일 마지막에, “울람의 아들은 다 큰 용사요 활을 잘 쏘는 자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조각들, 계시의 조각들의 기능은 뭐냐? 싸움하는 거예요. 용사니까. 저와 여러분은 누구와 싸웁니까? 우리가 지금 악마에 속했기 때문에 악마에 속한 특징이 뭐냐? 나의 가치를 포기 못하는 거예요.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어요. 나를 미워할 수 없습니다. 나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없어요.

그러니까 싸우는 것이 누구냐 하면 내가 나와 싸우는 거예요. 나를 없애주는 것에 감사할 거냐, 아니면 나를 인격도야하고 교양 갖추어서 괜찮은 나로 해서 내가 신으로 등극할 거야, 그 싸움이에요. 나 건드리지 마. 나는 신이야. 이것 주장할 것이냐, 아니면 내가 있으나마나 소실됨으로써 내가 품고 있던 걱정근심도 같이 다 날아가 버리는 것, 무슨 뜻이냐, 쉽게 하면 이런 거예요.

내가 나를 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누가 내 대신 내 책임, 내가 할 것, 내 인생을 대신 해줄 분은 만났다는 이야기에요. 그분이 그냥 커피숍에서 만난 게 아니고 그분이 나의 모든 것을 다 없어져야 마땅한 존재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새로운 나를 만든 거예요. 기존의 나 말고 새로운 나. 거울에 비친 나 말고 나타나지 않은 나, 주 안에서 새로 지음 받은 나, 우린 아직 부활 안 했거든요. 그러나 부활 되는 그 나, 흠도 없고 티도 없는 예수님의 신부로 부활 되는 그 나를 위해서 이 시답지 않은 너 좀 꺼져줄래, 그런 뜻이에요. 그 싸움이라니까.

이 변천과정에서, 그러니까 처음부터 바뀐다는 것, 그 바뀌는 것의 최종점이 뭐냐 하면 여기에 제일 위에, 창세기 야곱의 12아들들(창세기 29장-30), 그다음에 족보가 또 나오는데 재편되지요. 민수기 가나안 입성 전에 인구 조사했을 때에 열두 지파의 순서(민수기 13장), 그다음에 세 번째가 여호수아 가나안 땅 분배 제비뽑기할 등장했던 열두 지파의 순서(여호수아 13장-19장), 그다음에 에스겔 48장에 에스겔 땅 분배할 때 나오는 열두 지파, 그리고 최종적으로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열두 지파. **<12지파 변천과정> 첨부자료 참고

그러니까 순서가 바뀌는 정도가 아니고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지파 하나가 빠져버렸어. 단 지파가 빠져버렸다고요. 이게 왜 빠졌느냐 하는 거예요. 궁금해요? 단 지파 빠져버립니다. 단 지파 누락됐다, 빠졌다. 이게 우리에게 어떤 인상을 주냐 하면 역사 속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이 다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게 최종 모습이 아니라는 거예요. 현재 있는 우리 모습이 완성으로 가는 게 아니고 우리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으로 생각하는 나는 빠져야 될 거예요.

만약에 안 빠지면 우리 자신이 우상이 되는 거예요. 십자가를 모독하는 게 된다고. 자꾸 괜찮아 지려는 나를 이젠 젖혀버려라. 미련 같지 말라. 이래도 쓰레기고 저래도 쓰레기야. 여기서 더 개선, 발전 쫌 please제발 그런 짓 좀 하지 마. 나 잘 되고, 우리 가정 잘 되고, 자식 잘 되고, 우리 교회 잘 되고, 우리 국가 잘 되고. 제발 그런데 손 놔버리란 말이죠.

그것이 감사가 나타나지 않게 하고 그것이 주님이 주신 계시를 계속해서 모독하게 하는 작동으로 가동이 돼요. 자꾸 내가 있으니까 열심을 내는 거예요. 악바리처럼 버티는 겁니다. 자꾸 조심하고. 특히 자꾸 뭘 하느냐 하면 관찰해요. 사람이 관찰하게 되면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자식이 한 열 명 돼 보세요. 가지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 있잖아요. 이쪽 가지 조용하면 저쪽 가지 시끄럽고.

생각이 단순하지 않고 갈수록 복잡해져요. 복잡한 만큼 초조해져요. 혹시 한 구석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초조해진다고요. 그래서 현대인들은 스트레스가 많은 거예요. 아는 게 많아서. 단순하질 않아요. 단순한 분도 계시지만. 단순하지 않고 복잡해져요. 철저하게 아껴야 되고 손해 보면 안 되고 이익은 최대로 챙기고. 남 놀러가는 해외여행 다 챙겨먹어야 되고.

이 말은 뭐냐? 내가 누굴 관찰한 것처럼 저들도 나를 관찰할 것인가? 남들의 관찰에 대해서 조금도 내가 흠 잡힐만하거나 지적질 당할 일은 내가 용납하기 싫어. 그런 생각으로 사니까 감사는커녕 늘 시무룩하고 심기가 불편한 가운데 인간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바보에요. 참 바보같이 살았습니다. 10분 쉴 때만이라도 바보 멈추시길 바랍니다.






순서







창세기 야곱의 12아들들
(창세기 29장-30)
민수기(가나안 입성 전 인구조사)
민수기 13장
여호수아 가나안 땅 분배 제비뽑기
(여호수아 13장-19장)

에스겔 땅 분배
(에스겔 48장)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12지파

1
르우벤
르우벤
르우벤

유다

2
시므온
시므온

아셀
르우벤

3
레위
유다
므나셋(반)
납달리


4
유다
잇사갈
유다
므낫세
아셀

5

스불론
에브라임/므낫세(반)
에브라임
납달리

6
납달리
에브라임
베냐민
르우벤
므낫세

7

므낫세
시므온
유다
시므온

8
아셀
베냐민
스불론
베냐민
레위

9
잇사갈

잇사갈
시므온
잇사갈

10
스불론
아셀
아셀
잇사갈
스불론

11
요셉

납달리
스불론
요셉

12
베냐민
납달리


베냐민


특징






장자권이 르우벤에서 요셉으로 바뀜
레위지파(1)
요셉(1)
에브라임(+)
므낫세(+)
레위지파(-)
단지파가 첫 번째 등장
단지파(+)
레위지파(-)
요셉(-)
에브라임(+)
유다지파가 첫 번째 등장
단지파(-)
레위지파(+)
에브라임(-)
요셉지파(+)

 

20220506b 울산강의-역대기상(10강) 7장 2절 : 숨겨진 우리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이렇게 하시면서 첫 번째 나오는 것, 창세기 때 야곱의 아들들이 복을 받아서 열두 지파가 된다 할 때 열두 지파 당사자 자기들끼리 굉장히 단결을 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사 속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사사기 같은 경우에. 인간이, 그러니까 교인이 열두 명 있다면 교인들이 자기 교회를 지켜내고, 그리고 훗날까지 자손들에게 이 교회의 가치를 소멸시키지 않기 위해서 아주 애를 쓸 때에 그 교회는 필히 망하게 돼 있어요.

단결함으로 망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사사기의 마지막에 나옵니다. 바로 베냐민 지파가 날아가 버려요. 열두 지파가 되는 것이 하나님 축복의 원형입니다. 그 원형을 벌레 먹은 사과처럼 중간에 끊어져버리면 나머지 열두 지파 말고 열한 지파 오겠지, 가 아니라 열둘을 통해서 오거든요. 이게 우리란 것, 우리는 한 이스라엘이고 지금은 우리 단결해야 돼, 지금도 이스라엘 나라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단결을 꾀하면 꾀할수록 이거는 인위적인 이스라엘 되지 말씀의 이스라엘 되지를 않아요.

이스라엘의 취지를 아는 방법 중에 하나가 사도행전 1장에 보면 가룟 유다가 배신했잖아요. 그러면 열둘에서 하나 빠져서 열한 명으로 사도로서 하면 될 텐데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고 반드시 열둘을 채우라는 겁니다. 하나가 궐위되어 빠져서 채우라는 거죠. 그러면 그 열둘의 의미는 뭔 뜻이냐 하면, 역사적으로 12가 등장하는 의미는 12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온전한 12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대타로 들어갔다는 것이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12명인데 하나가 배신했으니까 11명이다 이 말이죠. 11명이니까 11+1하면 온전한 12가 12명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들어간 이 1명의 자리가 11도 부정하고 1도 부정하는 자리고, 12도 부정하는 자리에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없는 이스라엘은 어디 있는가? 예수님의 숫자 한 분, 그 안에 들어있어요. 그게 언약의 완성인데 언약의 완성은 아까 이야기했지요.

언약의 완성은 위로부터 과거로부터 차츰차츰 완성돼 나가는 게 아니고 이미 한꺼번에 마지막 때 완성이 나와서 왜 미리 왔던 것이 완성이 아니고 문제성이 있는가를 지적하는 자체가 완성이에요. 성령께서 오셔서 너는 죄인이야. 너는 너밖에 몰라, 지적하는 자체가 구원의 완성이에요. 오해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너는 기도해도 소용없어, 라고 지적받을 때 응답이에요.

기도해서 응답받는 게 아니고 응답이 먼저 있었고 왜 우리 기도는 응답이 될 수 없는 것들이냐, 없는 성질인지 깨닫게 하는 그 관계가 의의 관계에요. 죄의 관계가 아니고 의의 관계에요. 이렇게 되려면 먼저 완성이, 모든 이겼다는 완성이 있어줘야 비로소 우리는 대신하심의 의미가 생겨요. 몽땅 나의 인생을 이미 바꿔치기한 따로 주 안에서 택한 백성의 미래와 영광과 그 권능은 이미 보장되었다는 거죠. 보험 하나 들어놓으시렵니까? 보험과 관계없지요. 보험은 지 살기 위해서 하는 건데 자기 죽기 위해서 하는 보험.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돼요. 이거는 아주 억지 예지만 남편이 있는데 아내만을 사랑해요. 그리고 남편은 자기가 미워. 아내 앞에 내가 얼쩡거리는 자기 자신이 미워요. 그래서 남편이 8억의 보험을 들고 그 아내에게 부탁하는 거예요. “제발 나를 가평에 데려가서 내가 헤엄 못 치는 걸 뻔히 아니까 나를 물속에 다이빙하라고 시켜줘. 그래서 나는 죽고 너는 보험금 타서 다른 남자와 살든지, 제발 그렇게 해줘.” 미친 거죠. 어쩔 수 없이 이은해 새댁의 예를 들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런 짓을 하는 내 모습이 바로 죄라고 지적해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 인간에게는 나올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은해 씨 남편은 그렇게 해서 자기가 인정받으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은 내가 아내를 위해서 모든 걸 희생하는 그것이 나로 하여금 나한테 윤리도덕으로 나의 의로 재정리 화된다는 그것 하나 건지려고 그 짓한 거예요. 그런 식으로 심리적으로 놀아났다 이 말이죠.

제가 주일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그런 이야기했지요. 나는 복음 알고 어떤 사람도 안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내가 어떤 사람도 안 믿는 그런 방식으로 나를 지키겠다는 방식이 되는. 이러나저러나 자기 부인 못하는 꼼수는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다? 오직 말씀 위주에요. 시작을 나 부정해, 나 마음을 낮춰 백날 니가 낮추고 할 게 아니고 니는 두 번째야. 두 번째가 왜 첫째 흉내를 내. 첫 번째는 따로 있어요. 그게 말씀입니다.

열두 지파는 말씀의 조각들, 그것을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신명기 27장 잠시 보겠습니다. 참 신명기 27장을 보기 전에 신명기 33장 26절에서 29절까지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성경 찾으라 하니까 괴롭히는 느낌이 들어서 미안하려 하는데.... “여수룬(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덩어리에요. 계시 없었으면 이 땅에 등장하지 않는 그 집단, 그 지파)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탕자 이야기해드렸잖아요. 결코 탕자를 살리는 우리가 아니고 아버지를 살리는 우리가 돼요. 아버지 중심의 우리에요. 주님 중심의 우리지 내 중심의 우리가 아니에요. 그것만이 이 세상을 이깁니다. 악마를 이겨요. 주님이 함께 있겠다는 거예요. 우리가 주님을 요청한 게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요청했다는, 그게 정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주님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뭐가 됐다? 우리가 죄인, 쓰레기 취급받는 즐거움을 갖게 된 거죠.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을 이제 눈이 확 뜨이는 거예요.

거울을 볼 때 혼자 보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의 키가 155라 합시다. 조그마한 키로 거울을 볼 때 누가 나타나요? 155짜리가 등장하잖아요. 주님은 그렇게 보는 게 아니에요. 이런 이야기보다 연극을 하면 좋은데, 155 여자분 앞에 세워놓고 176 되는 주님이 관찰을 하게 해요. 자, 봐라, 봐라. 같이 거울 보자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이 빠진 상태에선 어디로 다시 되돌아옵니까? 잘난 내 인생으로 돌아오면서 모든 의미가 거기서 확정되고 마감되고 종결돼요. 이 세상사는 의미가. 빛의 반사에 의해 155로 나갔던 빛의 거울상, 이미지가 어디로 돌아온다? 155로 돌아오는 거예요. 그런데 키가 176 되는 주님께서 함께 자, 보자, 보자. 보게 되면 그 나왔다는 영상이 어디까지 도달됩니까? 155에 마감되는 게 아니고 176 주님에게 마감된다 이 말입니다.

혼자서 사는 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성도는. 이걸 성령을 안 받았으면 몰라요. 체험을 못한다고요. 내 뒤에 귀신 있다. 이게 어떻게 체험해야 되지, “너거 아버지 뭐하시노?” “우리 아버지, 하나님인데요.” 이게 어떻게 지식이에요, 체험이지. “아이고, 너는 키도 작고....” 나는 키 작은 것 맞는데 나는 키 큰 분의 쪼가리기 때문에 키 작아도 상관없는 거예요. 주님의 쪼가리 가운데 2미터 넘는 사람도 있어.

우리가 주님의 처소가 되는 거예요. 처소는 침대도 있고 피아노도 있고 의자도 있겠지요. 하나에 주님의 집에 우리가 사물이 되는 거예요. 가구. 침대, 발판, 가재도구. 마태복음 12장 28,29절에 나오는 가재도구. 자기 집에 가재도구 삼기 위해서 주님께서 도둑놈처럼 담타고 들어가서 악마를 이기고 악마에 있던 가재도구를 자기 집의 가재도구로 전환시키는 작업, 마태복음 12장에 나오는 말씀이잖아요. 누가 주인공이에요, 누가 주체입니까? 우리 아닙니다.

그리고 난 뒤에 어려운 것, 신명기 27장 봅시다. 아참 마지막 봅시다. 신명기 33장 28절, “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기에 의해서 아까 처음에 첫 번째 강의한 것은 인간은 자기를 삭제하고 말살하고 제거할 수 있는 공간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거예요. 내가 나를 잊어도 상관없는 그런 공간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 인간의 가장 큰 문제점이에요.

신명기 27장 이제 보겠습니다. 12절에서 14절, 11절부터 보게 되면, “모세가 당일에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렇게 돼 있어요.

이스라엘 예루살렘 북쪽으로 올라가게 되면 그냥 평범한 두 산이 있어요. 두 산 사이에 세겜이란 장소인데 지금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기에 안 살아요. 옛날부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지금도 살고 있어요. 지금도 이스라엘 땅이 아니고 팔레스타인 땅이에요. 차로 갈 수 있어요. 관광수입 때문에 팔레스타인 쪽은 안 막는데 이스라엘 쪽에서는 인질로 잡아서 국가로부터 돈 뜯어내고 할 과격 테러분자가 있을까 못 가게 막았어요. 우린 그냥 갔는데....

여기 에발 산, 여기에 그리심 산. 그래서 이 그리심 산에 지금 이스라엘이 일부러 정착촌을 만들고 여기다가 철조망 쳐놨어요. 여기에 에발 산, 저주 산. 이거는 축복 산. 이스라엘을 향하여 축복을 이야기하고 저주를 이야기하죠. ‘축복+저주’가 되면 이게 율법이 돼요. 이게 말씀이 된다고요. 그냥 이쪽의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뭐냐 하면 그냥 스피커에요. 이쪽에도 뭐냐? 스피커라니까요. 오르골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일본 사람들이 하는 파친코는 중력에 의해서 턱턱하면서 내려온다고요. 거기 있는 꽂혀있는 자기 주체나 자아성 없어요. 그냥 냉정하고 비정해요. 서 있기만 하면 되는데 말씀이 경유하면 나중에 결과는 말씀의 결과로 나오지 내가 뭘 했다고 나오는 게 아니에요. 이래서 자리 옮기고 하면 사단 나는 거죠, 계획이.

여기 에발 산이 저주 산인데 여기 지파가 여섯 개 들어가요. 단, 납달리, 갓, 아셀, 르우벤, 스블론. 이쪽에는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요셉, 베냐민 나가지요. 이게 특징이 있어요. 이쪽은 전부 다 하녀 출신입니다. 단과 납달리는 라헬의 종 빌하 출신이에요. 잠간 보겠습니다. 창세기 29장(30장). 갓과 아셀는 레아의 종 실바 출신이에요. 반면에 이쪽은 종의 출신이 아니고 본처 출신.

그런데 여섯 명, 여섯 명 맞추기 위해서 르우벤이 여기 있으면 숫자가 안 맞아서 저쪽으로 보내버린 거예요. 그러면 레위 지파는 어디 있느냐? 레위 지파는 여기 있어요, 중간에. 에발 산에 언약궤가 있다고요. 제가 여러분들이 복잡한 것 다 알 필요 없지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결국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뭡니까? 뭘 위해 존재합니까? 축복과 저주인데 무엇의 축복이에요? 율법이 제공하는 축복과 율법이 제공하는 저주를 위해서 이들이 존재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다음 문제는 여러분들이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이들이 율법에 위반된다면 율법의 저주에 해당되겠지요. 그런 일 없는데 그들이 율법대로 살면 어디에 해당됩니까? 율법의 축복 이 자체로 열두 지파는 변함이 없이 그걸로 완성형이 되겠지요. 그런데 아까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율법이 어떻게 됩니까? 완성형이 아니고 그들이 변천한다는 자체가 하나님께선 역사적 이스라엘은 망해도 역사적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그 말씀 자체의 완성은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예요.

그렇다면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 단 지파가 여기서 왜 빠졌느냐? 어떤 사람은 단 지파가 빠진 게 아니고 단군의 후손, 우리나라가 단 지파에 해당되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나중에 인류의 마지막 복음전파의 마지막 사명자로서 불을 지피기 위해서 한국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저의가 뭐냐 하면 돈 주세요, 에요. 그 바닥을 알아야 돼요. 모든 인간의 행동과 태도는 생존본능과 관련돼 있습니다. 마귀가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은 뭐로 산다? 떡으로 산다. “아니야. 말씀으로 사는 거야.” 말씀으로 사는 거 아니에요. 말씀을 살리기 위해서 인간이 있는 거죠. 우리는 말씀으로 사는 게 아니고. 내가 물 먹기 위해서 물 달라는 게 아니고 물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니까요.

그래서 여기에 에스겔의 땅 분배에 보면 축복의 자리에 제일 먼저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단 지파가 들어가요. 단 지파가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드릴게요. 역대상 자체가 투톱 상황이에요. 유다와 레위 지파를 부각시키는 겁니다. 왜 열두 지파가 골고루 부각되지 않고 두 지파가 우뚝 서야 되는가? 그건 이스라엘이 처음에 율법을 주면서 율법 자체가 레위 지파 중심으로 흘러가도록 시작해놓고 그 레위 지파에서 과연 이스라엘이 완성되었는지 스스로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테스트해보시고 삐이익 레위 지파로 성립이 되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레위 지파의 가치를 갈수록 이방민족의 우상 섬긴다고 바빠서 그거는 신경을 썼다 이 말이죠. 호세아에 보면 그런 경우가 많아요. 아모스도 그렇고. “네가 번제와 축제를 즐기고 속죄제를 하고 다 치워버려라. 나는 꼴도 보기 싫다. 나는 찬송도 하지 마. 비파 소리도 듣기 싫어.” 마지막 때는 말씀 자체가 우릴 덮칠 것이다. 요만큼도 인간이 행한 것은 일체 받지 않는 거예요. 우리가 행한 것을 받지 않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안 받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나오지만 역대상 쭉 흘러보면 다윗이 레위 지파가 못한 것을 왕으로서 다 해내요. 다윗은 어느 지파냐? 유다 지파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열두 지파 총괄해서 유다 지파가 대표 지파가 돼버린 거예요. 요한계시록 제일 마지막에 유다 지파가 올라가요. 그런데 그 전에 나오는 에스겔 땅 분배할 때 단 지파가 제일 축복권에 앉아있거든요.

이 단 지파에서 유다 지파가 되면서 단 지파는 요한계시록 7장에는 없어져버렸어요. 그럼 단 지파 자리에 단 지파 했던 기능을 누가 하느냐? 여기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올 때까지 12지파의 변천 가운데서 처음에 빼놓고요 민수기부터 해서 무슨 지파가 열두 지파에 안 속하느냐 하면 아까 산에 보셨지요. 열두 지파에 빠져있는 지파 있지요. 레위 지파가 빠져있습니다.

이거는 레위 지파가 12지파의 엔진부분, 심장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음지에서 일하지만 양지를 살리게 만들지요. 국정원 같아. 숨은 데서 모든 일을 다 하게 하는 거예요. 제사가 응답되지 아니하면 열두 지파가 있는 그 땅은 농사가 전혀 되지 않습니다. 저주를 받게 돼 있어요. 레위 지파는 에발 산에 있는 제단에 함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유일하게 처음에 창세기 29장에 12지파 나오는데 이 12지파가 시대를 만나면서 그때 역사를 만나면서 그들 사이에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변화조차도 처음의 12지파 순서 지날 때 그냥 순서만 한 게 아니에요. 각 지파마다 하는 말씀이 앞으로 되어질 일에 대해서 이미 야곱이 예언을 했고요. 또 모세도 예언을 해버렸어요. 그 예언한대로 이들이 겪어나갑니다. 겪어나가면서 어떤 변화가 있는가?

제가 준 자료에 보면 특징이라는 게 있지요. 특징 보면 장자권이 르우벤에서 요셉으로 바뀝니다, 해서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예언돼 있고 요셉 지파가 ‘에브라임+므낫세’로 돼 있지요. 그러니까 요셉 지파가 축복을 받아서 요셉 지파가 하나가 들어갈 게 두 개가 들어가요. 두 개가 들어가면서 실질적으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것은 율법과 가장 근접해서 일을 하는 어느 지파? 레위 지파가 받쳐주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레위 지파는 숨어서 받쳐주고 나타난 결과에 이스라엘이 현상 유지되는 모든 은혜는 나타난 12지파가 보여주고 숨어있는 레위 지파의 율법제사 기능이 받쳐주고. 그러니까 연극무대에 세트장이 그냥 있으면 넘어지잖아요. 뒤에서 보이지 않는 받침대로 밀어주는 그 밀어주는 지파가 레위 지파다 이 말이죠. 만약에 레위 지파가 사라지고 없어지면 12지파 다 무너져요. 그래서 사사기 끝에 가면 베냐민 지파가 날아가 버립니다.

일단 여러분 물어볼게요. 하나의 개인이든 집단이든 민족이 운영이 되려면 율법입니까, 힘입니까? 울산 사람들이 율법 지켜서 울산에 매일 살아갑니까, 그들의 노동의 힘이에요, 어느 쪽입니까? 노동의 힘이죠. 이스라엘은 원래 없는 데서 율법 때문에 말씀 때문에 나타난 나라라는 이것은 다른 나라 들으면 생소한 거예요. 말도 소리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의 힘을 무시한다고 아마 조롱할 걸요?

우리가 살아 있는 게 아니고 율법이 살아 있어서 우리가 살아 있다. 이런 말은, “너거 아버지 뭐하시노?” “우리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이스라엘은 레위 지파의 존재의 의미를 체험해야 되는데 그들은 이스라엘이 아까 처음에, 첫째 시간에 한 걸 다시 해보겠습니다. 써볼게요.

이스라엘의 임무는, 존재 이유는 뭘 이기느냐 하면 세상을 이기는 거예요. 세상에는 무엇의 힘이냐? 인간이 갖고 있는 노동과 지혜와 지식과 그리고 자신의 습관, 열성, 자기의 성격 이러한 열심, 그리고 의지, 결심, 결단, 선택 이런 것으로 세상이 유지되는 거예요. 사람들은 세상을 그렇게 분석하고 평합니다. 식물이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이고 산소를 내보내고, 그리고 거기서 포도당 영양분을 생산하는 이유는 식물 잎사귀가 열심히 일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 마태복음 6장에 그렇게 이야기 안 해요. 내가 하나님이 들의 백합화를 기르신다고 돼 있거든요. 기르신다. 그런데 인간은 뭐냐 하면 질산비료를 만들어서 비료 줘야 생겨난다는 거예요. 누가 말이 맞습니까? 방금 누가 말이 맞아요? 들의 백합화를 기르신다는 말은 백합화가 피었다가 지는 것 이 자체도 주께서 지게 하신다는 거예요.

그런데 온실에서 키우는 장미는 인간이 시들게 하려고 키우진 않잖아요. 장미 왜 키웁니까? 인간 자체를 즐겁게 살기 위해서 키우잖아요. 그러니까 이 장미를 가짜 장미죠, 결국. 인간의 손길을 가짜 장미에요. 장미만 가짜가 아닙니다. 인간 자체, 우리 자체도 가짜에요. 왜? 내가 날 키우니까. Paper Roses 종이장미.

생일날 남편이 4월 15일 아내 생일이라고 택배에 부탁해서 꽃다발을 선물한 거예요. 꽃다발을 선물할 때 아내 마음을 담지 않고 자기 마음을 섞어서 담았어요. 꽃다발이 굉장히 화사하고 이뻐요. 문제는 이 꽃다발이 오래간다는 거예요. 왜? 비누로 만들었어요. 이게 아내가 심정이 확 상한 거예요. 제 딸 이야기에요. 왜 좀생이도 아니고 너무 아꼈다 이 말이죠. 시들은 것도 아름다워야 되는데 안 시들어야 된다는 거예요. 왜? 돈을 아끼기 위해서. 지금 백수거든요. 자기 인생에서 모든 것에다 인간이 나의 유익과 이익을 집어넣는 거예요, 이게. 그러니 말씀과 맞질 않은 거예요.

주님의 계시는 생명을, 이 세상에는 생명이 없어요. 죽음뿐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유일하게 생명이 있는데 생명을 위해서 그들은 계속해서 변천과정을 겪어야 됩니다. 이스라엘이 무너지는 과정. 따라서 우리는 쓰레기로서 같이 무너짐으로써 생명이 나를 손댔구나. 죽어가는 나에게 손을 대니까 나보고 그냥 죽으래. 이게 생명이라는. 그냥 죽어도 상관없어. 원래 네 것은 안 받으니까. 그게 얼마나 자유고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입니까.

내가 하는 짓거리에서 내가 다시 한 번 반성하고 제대로 했는가를 그런 헛짓하지 말라는 거예요. 반성해서 뭐하는데? 누구 좋으라고? 윤리도덕 가치로 누구 잘난 척하려고 그 짓해요? 시간은 날마다 우리를 허무는데 지게 될 백합, 꼴에 백합 아이고. 백합 정도면 괜찮지. 백합도 아닌 게, 백합 되지도 못한 게.... 아깝기는 되게 아까워하지요.

에스겔 땅 분배할 때 단이 제일 위에 올라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에 단 지파가 오롯이 같이 여기 참여되고 있어요. 그런데 거기 보면 에스겔 땅 분배에 레위 지파는 12지파에서 없어요. 분명히 없지요. 레위 지파 특징은 마이너스(-) 돼 있지요. 그런데 에스겔 땅 분배 보면 레위 지파를 위해서 12지파 분배하는 것 말고 레위 지파 땅을 따로 마련해요. 이번 수련회에 에스겔 합니다. 에스겔 마지막에 레위 지파 땅을 따로 장만한다고요.

그러면 역대상은 뭐냐? 역대상은 이스라엘이 포로 잡히고 난 뒤에 썼거든요. 누가 주요 일을 했는가? 누가 이렇게 이스라엘을 여태까지 유지할 수 있는 기여한 큰 역할을 한 지파가 누구냐? 첫째 유다 지파에요. 그리고 그다음 지파가 뭐냐? 레위 지파입니다. 이걸 말로보다도 역대상 봅시다. 역대상 11장에 본격적으로 다윗 이야기 나와요. 그 바로 전에 9장에 레위 사람에 대해서 나옵니다. 9장 10절에 보면 제사장 중에서 족보가 다시 또 해요.

그러니까 앞에 있는 잇사갈 이런 것은 하나의 부록이에요. 그냥 삽화에 삽입되고 진짜 축은 유다 지파와 레위 지파에요. 왜? 역대상이 포로 하고 다시 돌아온 뒤에 쓴 역사기 때문에. 역사 다 흐르고 난 뒤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게 있더라. 뒤에서 보이지 않게 받쳐줄 레위 지파는 장차 이스라엘을 진짜 숨어 있는 이스라엘이 따로 있음을 보여주고, 실제적으로 레위 지파를 숨어 있는 이스라엘까지 이끌어냈던 그런 모든 전투, 전쟁은 누가 했는가? 그건 왕이 한 거죠. 왕이 어느 지파? 유다 지파에요.

아까 지파 이야기할 때 숫자 나오지요. 숫자가 뭐냐? 용사 숫자에요. 용사는 뭐하는 기능입니까? 전쟁이죠. 그럼 제사는 누가 합니까? 레위 지파지요. 전쟁을 한다는 말은, 오늘 몇 번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전쟁을 한다는 말은 이 세상이 넓은데 이 세상은 전부 다 육이고 몸이에요. 인간의 혈육으로 구성돼 있어요. 아브라함에 이삭 오기 전에 혈육으로 자식 있잖아요. 이스마일이죠. 이스마일이 이 세상에 속합니다.

이 세상을 지적질하고 탓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의 같은 인간들로는 안 돼요. 없는 데서 등장한 자식이 누굽니까? 이삭이 나오잖아요. 이삭이 나오는 여기가 뭐냐 하면 바로 이게 이스라엘이에요. 전쟁은 뭐냐? 없는 데서 새로 나온 이스라엘이 기존에 있는 모든 세상을 이기고 이것을 시간적으로 돋보이게 하늘나라의 생명 쪽으로 도달하도록 이스라엘 안에서 움직이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누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 계시잖아요.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가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처음에 오해한 것은 하나님 계시고 자기들 있으니까 우리가 있으니까 합쳐서 큰 우리라고 생각했잖아요. 이게 오해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이겨야 될 텐데 이들이 뒤에서 받쳐주는 레위 지파의 율법적 제사의 의미를 다른 이방민족에선 여호와의 취지는 없어요.

여호와가 없는 다른 이방신의 선호했어요. 왜? 잘 사니까, 강대국이니까 선망의 대상이 된 거예요. 우르르 다 쫓아간 거예요. 쉽게 말해서 저희끼리 동네야구하고 있는데 옆에 메이저리그가 야구하니까 동네야구 구경하던 얘들이 옆에 큰 동네 다 가는 거예요. 한국영화 보려하다가 할리우드 영화 그리로 다 가는 것처럼.

만약에 친척집 결혼식에 참석했는데 바로 그 시간에 다른 식장에서 현빈과 손예진이 결혼한다면 어디 구경 가겠어요? 거기 가수 오는데요. 예를 들어서 큰 스타가 결혼한다면 거기서 유명한 가수들 축하 공연하는데 이쪽은 찬송가 가르치고 노래 잘 못하는 아이들 특송한다면 어디 가겠습니까? 사진 찍으러 거기 갈 거예요.

이스라엘이 그렇게 살은 거예요. 너무 화려하고 우리 욕망을 거기서 다 충족시켜주니까. 말씀으로 산다? 아니야. 떡이야. 돈이 우리를 살리는 거예요. 세상이 우리를 설득해요. 지금 돈 벌려고 안 오잖아요. 세상이 우리를 설득한다고요. 거울에 내 모습만 비치는 거예요. 키 155만 비치고 주님의 얼굴은 비추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돼요? 싸워야지요. 의도적로 주님께서는 강한 것, 탐욕거리, 욕망거리를 대상으로 싸우기를 요구하는 거예요. 그 싸움은 어떤 싸움이라 했습니까? 적을 이기는 싸움이 아니고, 너는 신앙 없고 나는 신앙 있다 그 싸움이 아니고 무슨 싸움? 다 잊어버렸지요. 무슨 싸움입니까? 내가 저들 이기려고 하는 그 싸움을, 내가 소멸되고 없어져야 될 싸움을 해야 돼요.

내가 이기는 게 아니고 우리가 우리 되기 위해서는 내가 이겨서는 안 된다는, 나는 젖먹이와 어린아이처럼 돼도 상관없다는 그 자유함,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그 싸움을 해야 돼요. 지금 우리도 어려운데요,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한데 이스라엘 사람 같으면 이룰 수가 없지요.

그래서 여기에 최종 열두 지파 가운데서 그동안 숨어 있던 레위 지파가 여덟 번째 순서로 박힙니다. 박히면서 어느 지파가 빠져야 되는가? 에스겔 땅 분배에 제일 복의 일 순위가 되는 단 지파가 빠져버리지요. 그럼 단 지파는 복을 안 받습니까? 아니지요. 에스겔 땅 분배에서 모든 율법의 완성으로 축복받을 땅을 단 지파가 제일 먼저 받는다는 것은 그 단 지파 자리를 대체한 레위 지파 안에 뭐가 포함돼 있다?

단 지파가 최고로 복 받는다는 내용이 같이 합류해서 드디어 숨어 있던 것이 이제는 현실적으로 현실화 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 땅 분배에서 첫 번째로 받는 이것이 현실적이잖아요. 이렇게 나타났으니까. 그동안 단 지파 복 받을 때 레위 지파 어디 있습니까? 없지요. 열두 지파에 없지요. 숨어 있지요.

숨어 있는 것이 예수님 십자가 이후에는 본격화 되어서 이제는 레위 지파의 율법적 기능은 지금 완성 차원에 놓여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유다 지파 왕이 모든 전쟁을 용사니까 최고의 용사 중에 용사 유다 지파의 다윗 계통이 다 이루었고 그 밑에 줄줄이 혜택 입은 것이 율법의 완성의 혜택이라 해서 여섯 번째 자리에 율법과 관련돼 있는 땅도 없이 오직 율법에 관련돼 있는 레위 지파가 등장했다는 것은 율법의 완성으로서 왕 되신 유다 다윗의 후손이 모든 것을 완성했다는 증표로 열두 지파가 정리되는 거예요.

특히 유다 지파에 오신 예수님은 뭐로 이겼습니까? 활입니까, 창입니까, 말발이었어요, 기적이었어요, 뭐로 이겼습니까? 자기 죽음으로 이기죠. 인간들이 그렇게 기피하는 것, 어떤 경우에도 죽으면 안 돼, 아무도 해내지 못하는 것, 원수도 사랑하지 못하고 어떤 것도 해내지 못하는 것, 그것은 말씀대로 죽는 거예요. 그 죽음이 죽음을 이겨낸 겁니다. 우리는 그 죽음을 사랑하는 거고요.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 함께 죽음으로써 나의 삶은 예수님의 죽음을 드러내기 위한 남은 전쟁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 있는 겁니다. 이 전쟁은 우리가 이미 이긴 전쟁이죠. 왜? 더 이상 내 목숨을 내 가치와 내 의미와 내 착함과 선함을 붙들 이유가 없는 싸움이기 때문에 내가 내세울 무기가 있어요, 없어요? 성경을 많이 안다, 뭐 성경구절 많이 외우고 교회생활 이십 년, 아무 무기도 없는데 그냥 이겼다는 사실만 그 자체만 무가가 돼버린 거예요.

그게 바로 주 예수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 짧은 문장에 들어있어요. 그 짧은 문장을 더 축소해볼까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승리할 것이다. 구원이거든요. 출애굽기에는 승리입니다. 이겼다는 거예요. 우리는 세상을 이겼다. 특히 나를 이겼다. 고집스럽고 이기주의인 나를 이긴 거예요. 주님께서 숨겨놓은 내가 아직도 아등바등 사는 나를 이긴 거예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바로 완성형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이스라엘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용사였다. 용사인데 무슨 전쟁의 용사냐? 바로 세상을 이기는 용사로서 이스라엘 용사였던 겁니다. 그러나 구약 때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자칫 생각하면 역사에 나타난 이스라엘 자체를 최종적으로 남기려는 전쟁이었다고 오해할 수가 있지요. 그러나 역대상은 이미 포로 잡혀서 망하고 난 뒤에 온 이스라엘이잖아요. 이미 망했잖아요.

망했는데 하나님 은혜로 다시 만들겠다고 온 이스라엘 같으면 전에 망했던 이스라엘과 차이 남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 차이 남이 뭐냐? 전에는 이스라엘이 스스로 이 집단을 지키겠다는 전쟁이었다면 새로운 것은 그 이스라엘 되게 하시는 그 말씀 자체를 나타나기 위한 말씀 자체의 일하심을 위해서 드러내는 이스라엘로 바뀌지요. 그러면 그 말씀을 이루는 그 우리에 해당되는 핵심에 해당되는 분은 누구였습니까? 장차 예수님 오셨지요. 예수님 오심으로써 세상을 이겼습니다. 이스라엘도 이기고 세상을 이겼던 거예요.

아까 했던 것, 나는 누구한테 지고? 세상한테 지고. 세상은 누구한테 지고? 없던 나라 이스라엘한테 지고. 이스라엘은 누구냐? 숨어 있던 이스라엘한테 지고. 숨어 있는 이스라엘 여기에 왕이 누구에요? 바로 예수님이잖아요. 그러면 이 나라가 무슨 나라다? 예수님의 나라고 이 밑에 있는 전체는 뭐냐? 이게 사라질 불로 태워질 세상나라 되는 겁니다.

이것 하나 이동시키는 것, 이거는 인간들이 해내지 못한 것, 말씀을 완성하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심이 결국은 이것을 우리가 해내지 못한 것을 다 해냈습니다. 자, 그러면 여기 있는 나는 이 사실에 어떻게 참여하느냐? 우리 왕이신 주님께서 이겼기 때문에 이긴 자에게는 선물을 줄 수 있는 권한이 있어요.

그 선물이 뭐냐?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주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주님의 완성을 이 철딱서니 없는 우리에게 성령을 줘버려요. 그러면 나는 155지만 176인 주님이 우리와 함께 살면서 모든 나의 인생과 나의 모든 것을 가져가시고 책임져주시는 거예요.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가 일으킨 사건이 아니고 주님이 주님 이겼음을 통보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 가운데서 세상과 함께 있던 나는 세상에서 붙잡아도 붙잡히지 않는 이겨버린 새로운 피조물로 자인하게 돼 있고 확인하는 그러한 반복적인 생활을 성도가 자유 속에서 느끼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역대상에 나오는 의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행하지 않았음을 도리어 감사케 하옵소서. 나의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인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 주님 이야기 못하는 그 세상을 더는 부러워하지 말고 이제는 주님만 십자가만 감사하고 자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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