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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개2강-성전과 여호수아(학1;12-15)이근호130714

아빠와 함께 2013. 8. 7. 20:54

성전과 여호수아(학개 1: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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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7-14 15:34 
성전과 여호수아 

2013년 7월 14일                   본문 말씀: 학개 1:12-15

(학 1:12, 개역)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바 모든 백성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청종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을 인함이라 백성이 다 여호와를 경외하매』

(학 1:13, 개역) 『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명을 의지하여 백성에게 고하여 가로되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학 1:14, 개역)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바 모든 백성의 마음을 흥분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역사를 하였으니』

(학 1:15, 개역) 『때는 다리오 왕 이년 유월 이십사일이었더라』

“성전이라는 건물을 지어라”라는 학개 선지자의 말씀이 오늘날도 유효합니까? 유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성전이 마련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부활했다는 점을 생각해봅시다. 다른 사람은 부활하지 않았습니다. 이 부활과 성전과는 관련성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그 몸이 곧 성전입니다.

요한복음 2:19-22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부활되지도 못할 자들은 성전을 천 개를 지어도 성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미 성전이 성전으로 확정된 현실에 접어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활이 되려면 아무 장소에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전이 있었고 그 성전의 역할이 다 끝났음을 분명히 폭로되는 그 현장에서만 부활이 됩니다.

곧 성전 개념으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잡히시어 살해당하게 되는 그 현장에서 비로소 부활이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부활될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속으로 들어와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마태복음 16:24-25에 보면,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 부활되는 지점이 장소 개념에서 사건 개념으로 전환되어버립니다. 그 사건의 성질과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비록 지금 우리가 예루살렘에다 성전을 새로 짓는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은 그것을 말씀에 순종한 성전이라고 쳐주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활할 자격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활될 수도 없는 자가 짓는 성전은 우리의 실체적인 속성을 밝히는 차원에서 무너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예수님만 살리고 나머지는 다 죽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성전 지으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그 죽음의 현장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장소가 사건으로 전환되는 과도기를 만들려고 하시려 합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성전에서 열심히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제사를 드려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성전에서 제사 지내는 자들의 활동사항과 애씀과 노동에 대해서 주목했습니다. 즉 그들이 제사 행위 그 자체가 이미 죄라는 것을 드러내는 매개가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 자체가 선한 행위라고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학개에서 새로운 성전을 만들라고 하시면서 두 사람의 특별한 사람을 거론합니다. 한 사람은 스룹바벨이요 다른 사람은 여호수아입니다. 이 사람들의 존재 의미는 그들만이 새로운 성전을 구심점으로 갖추게 될 이스라엘의 대표자로서 여호와 앞에 섰다는 점입니다.

스가랴 3:1-5에 보면, “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고 되어 있고

또한 스가랴 4:14에 보면,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경우, 고소하는 자 사단과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사단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겨서 깨끗한 옷으로 입히라고 명령하시고, 사단에 대해서 “책망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러한 현장을 사건에 담아서 장래의 성전으로 삼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역사는 단선이 아니라 동심원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동심원 한 가운데는 인간 본인들이 놓여 있는 인식으로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미래에 꿈꾸는 것, 그리고 기억하는 과거의 현장에서 꼭 자기 자신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게 됩니다.

하늘의 별을 봐도 그냥 보는게 아니라 자신이 주인공이었던 그 시절의 별과 연속적으로 의미를 이어가면서 별을 헤아리게 됩니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장소와 시간에 대해서 이미 인간들은 나름대로 자신에게서 쏟아져 나온 의미로 마중에 나가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인간의 인식에 맞서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동심원을 생각하시는 겁니다.

사람은 철도 위를 걷는 식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호수 안에서 헤엄친다든지 주변을 방 둘러 산책하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 인생은 귀하게 자신이 친히 챙기고 보호하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자신이 만나는 모든 인간들이나 모든 사물은 자신의 대행체들일 뿐입니다.

본인이 원했던 인물이든지 아니면 본인이 기피하던 인물이든지 상관없이 본인의 의사가 관여해서 자기 앞에 나타났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길에서 어느 노인네를 만나서 묻게 됩니다.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할아버지의 답변은 이러합니다. “내가 곧 늙은 너니라” 이처럼 동심원 세계에서는 시간이나 공간도 멈춰졌습니다.

이는 곧 동일한 사건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현장이라는 말입니다. 자신들의 제사 행위로 죄 용서받는 곳이 성전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로부터 죄인 취급받는 분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죄용서함 사건이 일어나는 그 현장이 제대로 된 성전입니다. 사단은 분을 못참고 끊임없이 고발해댑니다.

“저 사람은 죄인이기에 용서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단적 인식이 날아갈수록 우리는 동감을 표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 성경을 대하면서 하나님이나 예수님으로부터 지적받는 자들을 같이 공박을 해주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믿음에 배신자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나라도 그렇게 나올 수가 있다”고 말입니다.

이럴 때 성도는 반복적인 용서 사건에 의해서 성전이 유지됨을 알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곧 성전임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를 다루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7-16 09:45 
2강-학1장12-15(성전과 여호수아)1307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학개 1장 12절에서 15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310페이지입니다.

학개 1:12-15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바 모든 백성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청종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을 인함이라 백성이 다 여호와를 경외하매 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명을 의지하여 백성에게 고하여 가로되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바 모든 백성의 마음을 흥분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역사를 하였으니 때는 다리오 왕 이년 유월 이십사일이었더라”

하나님께서 뭔가 지시를 할 때는 그 목적이 있습니다. 지금 학개라는 선지자를 보내서 하신 말씀이 오늘날도 유효하냐? 라는 것을 먼저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어라” 라고 지시를 했는데 그 성전 지으라는 지시가 오늘날에도 역시 하나님의 뜻으로 유효하냐? 지금 그걸 제가 다시 한 번 새겨보는 겁니다. 유효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성전이 완성이 됐기 때문에 유효하지 않습니다. 성전이 없을 것 같으면 ‘지어라’가 되는데 이미 성전이 있는데 또 뭘 더 지으라고 하시느냐 이 말이죠.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는, 그럼 이목사 당신이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는 그 확실한 증거를 대라, 라고 한다면 저는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했다는 것은 이쪽 동네 말고 저쪽 동네로 가신 거예요.

그러면 성전은 무슨 역할을 하느냐 하면 이쪽 동네에서 저쪽 동네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발판이 되는 공간이었습니다. 뭐 아무나 산소에 가서 기도하면 부활되는 게 아니고, 여기서 제가 이런 말을 자꾸 구차스럽게 하는 이유는 사람이 스스로 영적인 것을 이미 조작해 만들고 있기 때문에 그걸 긁어내기 위해서 이런 작업을 해야 되는 거예요.

배에다 도색할 때는 배의 녹을 다 긁어내야 되는데 그게 힘든 작업이라 합니다. 그걸 긁어내고 다시 도색을 해야 이게 녹이 안 슬지, 만약 그러지 않고 칠하면 슬은 녹이 자라나거든요.

지금 우리가 영적으로 녹이 슬어있어요. 소위 우리가 생각하는 영적이라는 것을 지금 긁어내야 돼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영적이라는 것은 그건 우리 한국 교회가 이미 그걸 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진 선 미 대회, 고상하고 거룩되고 경건스러운 것을 갖추면 하나님이 거기에 대해서 보상을 충분히 해준다. 이런 식이거든요. 그런데 그걸 긁어내야 돼요. 왜 긁어내야 하느냐 하면 실제로 부활의 나라에 갔던 분은 사람들 보기에 그렇게 경건스럽지 않고 그렇게 훌륭해 보이지 않아요. 오히려 죄인들과 함께 술 잡수시고 같이 금식 기도 안 하고 안식일도 위반했고 그냥 세리와 창기도 강도도, 심지어 현장에서 간통한 여인조차도 그냥 가서 ‘야, 너 천국 가.’ 그냥 어떻게 ‘회개하라.’ 이거 없이 그냥 천국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반칙으로 보였던 겁니다. 실제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이단으로 봤어요. 율법을 어긴 자라고!

그러니까 예수님을 이렇게 보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살면 율법을 어긴 자로 우리 눈앞에 보이신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그러나 율법을 어기든 지키든 간에 부활하면 됐잖아요. 그렇잖아요. 죽은 뒤에 사흘 만에 부활이 됐다는 것은 바로 부활도 되지 못한 인간들이 부활하신 분보고 이런지, 저런지 그런 소리하면 안 돼요. 부활하신 분이 이게 다 끝난 이야긴데 부활 되지도 못한 자가 ‘그렇게 사시면 안 됩니다.’ 그런 소리 하면 안 된다는 거죠.

부활의 자리가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결국은 부활 될 수 없고 구원받을 수 없는 그냥 그 나물의 그 밥, 똑같은 죄인이었더라. 는 공개하는 그 자리, 그 자리가 옛날에는 어린양을 잡는 자리, 그 자리를 한국말로 두 자로 성전이라고 한 겁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제사 드리면서 그 어린양이 죽는 건 생각 안 하고 양을 몇 마리 잡았습니다. 성전 유지비 해드렸습니다. 성전 세 내가 꼬박꼬박 일정 금액을 드렸습니다. 정기적으로 드렸습니다. 인간이 자기 행동을 성전에다 갖다 집어넣은 겁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교회 다닌 적 없고 젊을 때부터 교회 다니면서 지금 생각해보니까 목사님들도 문제 있지만 장로님들도 같이 문제가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장로님들이 젊은 사람들을 훈계할 때 예배당에 있는 모든 기구들과, 그때는 기구라 하지 않고 성물이라 해요. 거룩한 물건에 대해서 굉장히 조심을 하라 하고 어른스럽게 훈계를 해요. 옳은 이야기인데 그걸 복음적으로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계시는 곳에 니가 이러면 안 된다는 식으로, 지금 생각해 보니까 비 복음적인데 그때는 그 말이 맞다 생각했죠. 지금 생각해보니 제가 신학교 안 갔으면 지금쯤 장로가 안 됐겠나 생각해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계속 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으로 이 예배당을 세웠기 때문에 이 예배당은 너희들 젊은 사람들이 더 키울 이유가 있고 정당화가 있다는 겁니다. 참, 우리교회는 그런 소리 안 해서 감사하지만.

이 교회 역사적으로 더 키워야 되고 어떻게 후손은 어떻게 해야 되고, 이렇게 하게 되면 그걸 선형적 사고방식, 말이 어려운데 선 형식으로 돼 있는 사고방식. 이걸 단선적 사고방식, 선으로 돼 있는 사고방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동그란 동심으로 돼 있어요. 하나의 호수라고 보면 돼요. 기차라 하는 것은 한번 지나가면 이미 지나간 건 없어진 거예요. 그런데 호수는 주위를 뺑뺑 돌면 맨 그 호수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요. 천년이 지나도 백년이 지나도 맨 그대로 있어요. 우리는 호수 안에서 예수님 십자가 부활을 생각해야 되지, 단선으로 생각해 버리면 ‘에이, 그까짓 십자가 5년 전에 알았고 부활은 3년 전에 알았고.’ 단선적으로 이렇게 돼 버리면 성경 전체가 오해소지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동심원으로 되게 하느냐 하면 사실은 우리 인간 스스로가 자기를 우주의 중심으로, 세상의 중심으로 동심으로 이렇게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좀 깊이 있게 사색을 하고 연구를 하게 되면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어떤 젊은 사람들이 길을 가다가 어떤 연세 많은 사람을 만났어요. 연세 많은 사람보고 ‘할아버지 누구세요?’ 하니까 할아버지 답변이 ‘내가 너잖아. 너 늙은 게 나야.’ 참 이상스럽죠. 분명히 젊음이 지나야 늙은 내가 되고 늙은 내가 되면 젊은 내가 사라져야 되는데 젊은 내가 길에서 노인을 만났는데 그 노인이 늙은 나의 모습을 한 노인을 만났고 그 노인 하는 말이 ‘네가 나다.’라는 거예요.

제가 이 예를 드는 것은 사람은 모든 것을 동심원 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세월이 아무리 수천 년 지나도 항상 거기에 내가 있다고 여기고 내 모습을 되찾는 거예요. 내가 우주가 되고 우주가 내가 되는 겁니다. 모든 우주를 볼 때 거기다 내 모습을 집어넣어서 보는 겁니다. 별을 바라볼 때도 그냥 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젊을 때 청춘 때 저 별을 누가 같이 봤나, 아가씨 있었지, 이런 생각을 집어넣어서 그 별을 보니까 그 별을 보면서도 내 생각이 거기 있는 겁니다. 모든 게 다 그래요.

모든 게 인간 중심이기 때문에 이걸 주먹밥 세계라 하는데, 주먹밥 알죠? 주먹밥이 선이 아니고 붙어 있잖아요. 모든 것이 나와 관련되어서 나한테 전부 다 조청같이 들어붙는 거예요.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성전을 만들 때 그 중심이 될 때 예수님이 십자가 죽은 장소만이 부활의 장소가 되는 겁니다. 그걸 제가 성전이라고 했죠. 다른 장소에서는 부활이 안 됩니다. 성전이 일단 되고 난 뒤에 성전에서 도약을 해야 그게 부활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십자가에 같이 모여 있어야 십자가에서 일괄적으로 이게 부활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 바깥에 따로 부활하는 법은 없어요.

지난 대구 공부 때 했잖아요. 기도할 때 뭐가 중요하냐 하면 기도의 자리가 기도를 만든다고 했죠? 기도의 자리에서 분수가 나와요. 그 분수에 우리가 올라타면 우리는 분수 물에 둥둥 떠서 우리가 기도하는 게 아니고 우리자신이 기도의 결실물 이예요. 이게 성경에서 말하는 주의 기도입니다. ‘주님 기도 덕분에 오늘날 내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게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고, 우리의 기도는 뭐냐 하면 내가 빡세게 해야 약간의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을까 싶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부활되지도 못한 내가 기도를 하고 있는 게 문제라니까요.

진짜 기도의 응답은 부활되신 분의 자리에 합류해야 그게 제대로 기도응답이 즉각 되는데, 내 자리에다 내 자리를 따로 챙겨버리면 기도 자체도 안 되는데 무슨 응답이 있겠습니까?

개성공단 문제로 개성공단에 입주했던 사장님들은 지금 얼마나 기도를 열심히 하겠습니까? 어서 개성공단이 무난하게 해결되기를, 그런데 개성공단과 상관없는 사람은 기도를 하지를 않죠. 나름대로 기도를 하니까. 그래서 개성공단 기도 하나 안 하나 그건 인간은 응답 될 수가 없고 응답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 자리에 갈 때 이미 우리는 우리가 응답 된 채 움직이고 있는 성전인 것을 우리가 발견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전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 응답에서 따로 등장하기 때문에 성전은 세울 필요가 없다는 이 이야기를 제가 하는 거예요. 처음에 문제가 뭐라 했습니까? 학개가 성전 지으라는 학개의 예언이 오늘날에도 유효 하냐, 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오늘날에는 유효하지 않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왜냐 하면 주님의 자리에 주님의 자리가 이미 마련됐기 때문에 지금 새삼스럽게 부동산 건물 짓는 성전은 지금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예배당 모이는 곳이고 모이면 그게 예배당이 되고 모이면 교회가 되는 것이지, 교회 있고 따로 거기 모인다고 그게 교회가 생기는 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그렇게 상관이 없고 예언이 필요치 않다면 그러면 학개란 예언을 우리가 볼 이유도 없지 아니하냐? 그 이유가 나와요. 12절에 나옵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바” 여기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총독 스룹바벨과 제사장 여호수아, 요 두 사람이 등장해요.

그러면 성전은 지을 필요가 없는데 뭐는 살려야 되느냐 하면 스룹바벨이란 존재와 여호수아라는 존재 이 두 사람이 히니님의 지시에 의해서 뭔가 일을 했었어요. 그 일한 것이 스가랴 3장에 보면 나옵니다. 제가 후딱 읽어볼게요.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섰는데 거기에 사단도 하나님 옆에 섰습니다. 지어낸 게 아니고 실제 상황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너를 책망한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나타날 때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한테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라고 한 거예요.

사단은 뭐냐 하면 옷이 더럽다는 거예요. 저 여호수아의 옷이 더럽다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학개에 있어서 지금 하나님의 성전 만들라고 지시 받은 사람이 누구냐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와 그리고 많은 사람들입니다. 학개 선지자는 그 중간에 서 있어요. 그러면 여호수아는 누구를 대표하는 거냐? 그 당시의 유대나라 전체를 대표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렇게 대표자로서 여호수아가 여호와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 보고 옷이 더러워야 돼요. 옷이 더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 옷이 더럽다는 것을 아시고 “더러운 옷을 벗겨라. 새 옷을 입히리라.”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그 맞은편에 사단이 있어요. 악마가 있습니다. 악마란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할 때 그때 현장에 나타나는 것이 악마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했다는 걸 우리가 느낄 때 악마는 그 순간 하나님 앞에 책망 받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죄 용서 받는 순간이고 악마는 하나님 앞에 책망 받는 순간입니다. 왜냐 하면 악마가 평소에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내 마음을 통해서 계속해서 ‘니는 더러워, 완전치 못해. 니는 부족해.’ 계속해서 잔소리, 잔소리를 계속 해요. 계속해서 잔소리를 해왔어요. 엄청나게 잔소리를 해왔거든요.

그러니 우리가 잔소리 들을 짓을 했고 들을 만한 이유가 우리가 달리 대책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실제로 주님께서(지금 어려운 거 해봅시다.) 용서했다가 구원한 건 아니에요. 요게 어려운 이야기에요. 주께서 나를 용서했다는 것이 우리가 용서 받는 게 아니고 ‘니 용서할게.’ 이게 아니라 주님께서는 실제로 성전이 있고 성전에서 죽고 부활하신 그 어린양의 실체가 나타나야 그분에 의해서 우리가 용서받는 거예요. ‘사단아, 나 용서받고 싶어. 니가 뭐라고 해도 난 용서받을 거야.’ 이런다고 우리가 용서받는 게 아니고, 직접 우리가 사단하고 멱살을 붙들고 설친다고 우리가 사단을 이겨서 구원받는 게 아니란 말이죠. 우리는 사단을 못 이깁니다. 우리는 그냥 여호와 앞에 여호와 조치 앞에 설뿐 이예요. 사단은 뒤에서 궁시렁, 궁시렁하죠. 이걸 고소하는 자라 하죠. 이걸 검사, 계속 궁시렁거리는 거예요. 우리 같으면 ‘가만히 있어.’ 이러고 싶은데 하나님께서는 ‘니가 나서서 사단을 이길 쨉이 못 되고 사단은 대적하되 적으로 간주하되 니가 이기지를 못해요.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비로소 평소에 얼마나 우리가 사단한테 시달렸다는 것을 우리가 깊이 느끼게 돼요.

제가 지난 부산 강의 때 이야기했거든요.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숫대야에 물을 떠서 손수 베드로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는 그런 장면이 있어요. 그게 요즘 말로 번역하면 쉬운데 고급 차에서 내릴 때 예수님이 먼저 내려서 문을 열어주면서 ‘베드로님 내리십시오.’ 와 같은 거거든요. 그럼 베드로가 얼마나 미안하겠습니까? 숙녀도 아닌데. ‘아휴, 제가 예수님 문 열어드려야 되는데 주님께서 먼저 내려서 문열어주시니까, 호텔 보이도 아니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어주는 것은 예수님께서 죄를 씻어주는 게 아니고 오히려 죄를 쳐 바르는 행동 이예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에 씻는 행위 속에 뭐가 중첩돼 있느냐 하면 니는 씻을 만한 죄가 발에 붙어있다는 것을 씻는 행위를 통해서 죄가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겁니다. 신자가 돼서, 성도가 돼서 ‘주님, 제가 용서받았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제가 뭘 해도 죄 아닌 게 없습니다.‘ 그 고백 이예요.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정말 성령 받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고백 이예요. 용서를 언급할 때마다 ‘저는 매일같이 죄 짓고 있습니다.’라는 고백 이예요. 그 고백이.

자,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용서받을 때에 그것을 카메라 기자가 사진을 찍습니다. 찰칵, 찰칵, 한번 찍으면 열두 방을 연발로 찍는 거예요. 그 찍은 사건이 담겨있는 현장이 장소를 초월한 성전이 되는 겁니다. 사단 있고 여호수아 있고 하나님이 용서하고. 옛날에는 양 잡고 사단은 보이지 않고 양 드리는 사람들, 제사장 거룩한 옷 입고 설치고 안수해서 양 잡고 연기 피어오르고, 그게 성전이라면, 그 성전의 때가 지나가고 이제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여호수아와 스룹바벨, 유다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을 불러다가 스가랴 3장에서 직접 여호와께서 만나서 너 죄의 옷을 벗기고 옷을 입히는 것, 일종의 탈의실이죠. 그 탈의실을 찰칵, 찰칵 찍어버리면 그게 오늘날 우리한테 적용되는 성전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몸이 성전이다.’라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우리 몸이 성전이 아니고 주님의 용서가, 사건이 벌어지는 그런 우리의 몸이 성전 이예요. 그렇다고 한번 성전이 되면 계속 성전이 아니고요. 늘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작용하게 되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도 남들 보기에 대수롭지 않은 것도 ‘아하, 이것이 바로 죄가 되는구나.’를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성경책을 유심히 보게 되면 이것도 난해하지만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때 주님한테 책망 받던 사람들 마음을 이해하게 돼요. 무슨 뜻이냐 하면 주님한테 용서받은 사람 편에 서고 싶은데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주님한테 오히려 책망 받는 쪽에 서게 되면 전에는 ‘나쁜 사람, 당신은 주님한테 책망 받는 사람.’ 이렇게 했는데 우리가 제대로 성경을 보게 되면 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돼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잖아요. 우리는 처음 볼 때는 ‘베드로는 나쁜 사람, 나쁜 사람, 그렇게 해놓고는…’ 하는데 막상 신앙생활을 더 깊이 해보면 베드로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베드로가 총각이 아니거든요. 애 피아노는 시켜야 되지 않습니까? 애 밥은 먹여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처음 교회 나와서는 베드로는 책망 받고 닭소리 나니까 후회하고 울었다. 하지만 신앙생활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베드로 마음과 우리가 하나가 돼 있어요. ‘그렇지, 나라도 포기했겠다.’

아침에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율법을 지킬 마음도 없고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 간단한 문장으로 나와 있지만, 이게 계속 교회 다니고 말씀 듣고 하는 가운데 계속 가보면 그래, 도대체 내 힘으로 율법을 지킨다는 게 이건 소위 지켰다고 까불던 그때가 우스워요. 여러 번 예를 들어서 식상하지만 더운 6월 달에 안식일 지킨다고 겨울 양복 입고 교회 갔던 그때가 지금 생각해 보면 순박하고 순진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완전히 도 닦았어요. 누가, 누가 도를 잘 닦나? 누가 바른 생각 바른 행동 하느냐? 그거 은연중에 시합 했어요. 그러니까 내가 사단이라니까. 내가 그렇게 바르게 사니까 그렇게 바르게 못한 사람들보고 얼마나 손가락질 했습니까? 손에 돌 들고 치기 바빠요. 개 몰고 오면 때리고. 개 몰고 오면 카메라 들고 가고. 이게 뭐냐 하면 앞으로 점점 더 심해질 거예요. 노인이 돼서 그런지.

그게 주님께서 옷을 벗기는 성전이 되는 게 아니고 성전 흉내를 내고 있는 나는 거룩한 심정이고, 거룩한 성전이라는 것을 그냥 모방하고 있는 어느새 그런 식으로 가다가 한번 넘어지면 그러다가 자빠지면 다 자빠져서 주께서 용서한다는 것이 그동안 주께서 오히려 죄를 쳐 바른 작업인 것을 우리는 왜 몰랐던가 이 말이죠.

베드로가 ‘제 전심을 씻겨 달라.’고 하는데 베드로도 철도 없어요. 그 자리에 옷을 벗고 전신을 씻겨달라는지. ‘오 알았어, 옷 벗어라.’ 하고 어떻게 씻겨줍니까? “니가 발만 씻어도 이미 다 씻은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야, 나는 너를 성전으로 기어이 만들고야 말리라.“ 용서하시는 그 사건의 현장이 되고 말리라. 용서받았다는 것을 증거 하는 그 현장! 주님께서는 건축물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 몸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감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전 지어라.” 명령했고 스룹바벨 여호수아 순종했고 백성들 따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감격했습니다. 하지만 그 성전조차 무너지고 주님의 십자가 성전이 나타났고 부활되었습니다. 그 자리가 우리 마음에 이루어지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