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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개6강-성전다운 생활(학2;15-19)이근호130811

아빠와 함께 2013. 8. 11. 17:23

 

성전다운 생활(학개 2: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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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8-11 15:47 
성전다운 생활

2013년 8월 11일                                 본문 말씀: 학개 2:15-19

(학 2:15, 개역) 『이제 청컨대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 위에 첩놓이지 않았던 때를 추억하라』

(학 2:16, 개역) 『그 때에는 이십 석 곡식더미에 이른즉 십 석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그릇을 길으려 이른즉 이십 그릇뿐이었었느니라』

(학 2:17, 개역)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폭풍과 곰팡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었느니라』

(학 2:18, 개역)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을 추억하여 보라 구월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추억하여 보라』

(학 2:19, 개역) 『곡식 종자가 오히려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었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골로새서 1:18에 보면, “그의 모인 교회의 머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머리 부분이 되고 나머지 성도들은 교회의 몸통을 이룬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리고 그림을 머리 속에 그려보면 꼭 괴물같은 형체로만 그려지게 마련입니다. 또한 머리 부분에 예수님의 전신이 다 담기는지 아니면 예수님 머리부분에 그 자리에 채워지는지도 명확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기이한 그림으로 오늘날의 교회를 생각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시도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취지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구약에서 줄기차게 내려오는 성전 개념의 연속임을 감안해 볼 때, 사도 바울에 표현한, ‘머리와 몸통의 결합’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야겠습니다.

한 가지 힌트가 되는 것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를 통해서 성전의 취지가 소멸되지 않고 계속 이어지면서 그것이 곧 교회로서 열매 맺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새-이스라엘’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이스라엘 본래의 모습으로 이 신약 시대에 만개했다는 것을 보는 것이 옳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스라엘이 성전에 대해서 소홀히 하니 너희들의 땅 경작에서 예상되는 그 수확물을 축소시켜버렸다는 통보에 관한 겁니다. 성전에 무관심한 것이 다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경작물의 풍성함을 먼저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경작보다 우선되는 것이 성전임을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관심사를 꺽어버리겠답니다.

그렇다면 성전에 무관심했다는 근거는, 성전 건물이 허술해져도 수리하지 않고 제대로 유지하지 않았다는데서 찾습니다. 이를 통해서 보게 되면 구약에서의 성전 개념 속에는 여전히 특정 지점을 점유하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때에 오면 ‘특정 지점’에 서 있는 건물로서의 성전 개념은 희석됩니다.

성전 뿐만 아니라 주변의 있는 영토와 그리고 더 나아가서 전 세계가 불바다로 변해야만 하는 날이 옵니다. 예수님의 성전개념이 진정한 완전개념이라면 구약에서 건물로서 말하던 성전개념은 임시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전만 임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 성전을 유지해야 나라가 산다는 그 나라, 곧 이스라엘도 임시적 택한 민족이었습니다.

예수님 오셔서 그 모형틀을 벗겨내십니다. 실체를 말해주십니다. 특정 공간이나 특정 시간을 고집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나려 오시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도리어 그 특정 시간과 공간을 고집하는 자들로부터 배척받는 식으로 ‘교회의 머리’되시는 분은 서러운 대접을 받게 됩니다.

신약에서 건물로서의 성전 개념이 물러가면 뭐로 성전이 드러나는 겁니까? 그것은 곧 ‘사람’입니다. 몇 명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예수님 자신의 몸통으로 인정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 몸통 부위에 해당되는 사람들도 건물적 성전 개념이 와해되는 현상을 겪어야 합니다.

이 성전 와해 절차가 열왕기상 12:25-33에서 보여집니다.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그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팔월 곧 그 달 십오일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 지은 산당의 제사장은 벧엘에서 세웠더라 저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팔월 십오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둘로 만드신 이유는, 이미 그들이 성전의 진정한 취지에 대해서 마음이 멀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즉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이 있다는 생각을 갖지 않고 도리어 자신들의 야망을 위하여 하나님도, 하나님의 이름도, 성전도 있어야 한다는 본심들이 그대로 노출되어 버린 겁니다.

이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는 곧 성전 사라짐과 병행해서 같이 사라질 역사입니다. 역사가 사라진다는 것은 곧 “없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나타나게 해놓으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없애면서 건물형태의 성전도 같이 없애버리십니다. 그래서 성전의 진정한 실체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특정 시간이나 특정 공간 점유로 나타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결국은 사람입니다. 사람들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에 무관심하면 아무리 화려한 예배당을 지어놓아도 관광코스의 일부로 전락될 뿐입니다. 참된 성전은 특정한 땅이나 시간이나 제사장을 확보했다고 해서 정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남쪽 유다 나라에서는 정통적인 제사장에다 정통적인 일자에 성전에서 예배드려도 나중에 그것조차도 권태로워집니다.

이미 솔로몬 때에 예루살렘 근방에 산당을 많이 세워서 민중들의 실용적 종교 욕구에 부응한 일이 있기에 그 결과도 두 나라로 쪼개졌고 성전도 둘로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왕상 11:4-8) 나누어진 성전 중에 어느 하나가 진짜 성전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백성들 자체가 이미 성전을 떠났다는 사실을 반영해주는 사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본래의 성전 취지를 계속 이끌고 가십니까? 사람을 통해서입니다. 열왕기 13장에 보면, 남쪽에서 이름 모를 어떤 선지자가 북쪽 신전에 가서 거기서 제사하는 여로보암이라는 왕에게 예언하라는 지시를 따릅니다. 그는 여로보암 왕에게 말하기를, “장차 요시야라는 이름하는 왕이 등장해서 이 제단이 훼파할 것입니다”고 합니다.

왕은 그 예언자를 공격하기 위해 손을 폈는데 도무지 도로 거두어 들이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다시 기도를 하자 손이 거두어졌습니다. 여로보암 그 선지자가 여러 모로 쓸모 있다는 식으로 회유를 해왔지만 그 남쪽 선지자는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그 선지자는 남쪽에 있을 때부터 그 어떤 대접에 받지 말라고 하나님으로부터 당부를 받은 상태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북쪽에 다른 선지자에 의해서 이 남쪽 선지자는 회유를 당하고 하나님께서 길에서 사자를 나오게 하사 그 남쪽 선지자를 물어서 죽게 하셨습니다. 이로서 남쪽이나 불쪽이나 일반인이나 왕이나 선지자나 모두 진정 성전의 정신에서 멀어져 있던 상태라는 사실을 보여주게 됩니다.

따라서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머리 되시는 예수님께서 계속 활동이 되면 그 활동성에 의해서 구원받을 교회는 계속 생성되는 것입니다. 결코 한 번 교회 되었다고 계속해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터키에 있는 일곱 교회 모두가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구원이란 인간이나 교회가 갖는 대상이 아니라 구원작업에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관여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음을 알리는 계기들이 늘 벌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강-학2장15-19(성전다운 생활)1308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학개 2장 10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312페이지입니다. 

학개 2:15-19 

“이제 청컨대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 위에 첩놓이지 않았던 때를 추억하라 그 때에는 이십 석 곡식더미에 이른즉 십 석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그릇을 길으려 이른즉 이십 그릇뿐이었었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폭풍과 곰팡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었느니라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을 추억하여 보라 구월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추억하여 보라 곡식 종자가 오히려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었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성전 짓고 안 짓고,에 따라서 주변에 농사가 잘되느냐, 안 되느냐가 연관이 있다는 겁니다. 연관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 생각이고요. 그렇게 연관 있도록 하나님이 조치를 했다는 겁니다. 누구에게 했는가? 모든 민족에게 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나타내야 될 사명이 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하나님께서 이런 조치를 했습니다. 

아침에도 이야기했듯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의 온도계 같은 ‘하나님은 일을 이렇게 한다.’를 외부에 알려주기 위해서 측정 기구처럼 그렇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멸망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이 세상에 더 이상 미련이 없이 이 세상을 심판하겠다는 그런 뜻으로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런 기능을 하는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데요. 그렇다면 오늘날 21세기에 구약이 아니고 신약 시대에도 이런 이스라엘이 있느냐? 있습니다. 그것을 신약 성경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그걸 교회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교회를 다른 표현으로 하면 이스라엘, 또는 참 이스라엘로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교회가 이스라엘 되는 이러한 것은 교인끼리 스스로 자기를 위하여서 명칭을 갖다 붙인 건 아니고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예수님의 공생애에 보게 되면 예수님이 이스라엘에서 교회로, 이스라엘 그 요소, 그 엑기스를 계속 쥐고 있으면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시면서 이스라엘 속에서 교회를 만들어 내는 그 작업을 하시는 거죠. 

오늘 학개 같은 경우에는 성전을 벽돌로 지으면 돼요. 성전이 벽돌이 없다. 건물이 무너졌다. 그러면 수리하면 그만 이예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성전을 짓기 위해서는 그런 벽돌로 만드는 그런 가건물, 또는 부동산 그런 것 말고 다른 방식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방식이 비합리적 이예요.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수긍이 되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난해해져요. 교회라는 것이. 

특히 골로새서의 나오는 1징 18절에 나오는 이 말씀 같은 경우에 이건 신학교 때부터 주위에 소위 교회 좀 다닌 사람들은 수십 번씩, 수백 번씩 들은 이야긴데 들어도, 들어도 해도, 해도 본인도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데 그 대목을 읽어드릴게요.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렇게 돼 있어요.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랍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교회 머리고 몸통은 교회다. 도대체 우리가 이걸 보고 어떤 그림을 그려야 돼요? 우선 목 없는 미녀 하나 그려놓고 목부터 위의 부분은 텅텅 비워놓고 거기에다 목 부위를 채우는데 몸통은 교회니까 교회라 해놓고 위의 요 대목을 채워 넣는데 예수님의 몸통을 채워 넣을 것이냐. 예수님의 머리 부분을 집어넣어서 그림을 그릴 것인가, 디자인을 그렇게 할 것인가, 상당히 애매모호합니다. 

설사 몸통이 오늘날 우리 몸통이라고 구더기처럼 작은 새끼처럼 몸통에다 하나, 하나 우리를 집어넣었다 칩시다. 여기다가 벌레처럼 꼬불꼬불 수천수만의 벌레를 교인들을 집어넣고 얼굴은 주님 얼굴, 수염 난 주님 얼굴을 박아 넣었다 칩시다. 그러면 그 자체가 하나의 인격체고 하나의 사람이 되거든요. 사람이 되는데 그걸 어디다 세워놓습니까? 그걸 한국 땅에다 15일 세워놨다가 그 다음에 미국 LA 운동장에다 전시물로 세워 놓을까요? 어디 엑스포 합니까? 트로이 목마처럼 덩치 큰 그걸 이동시킬 수도 없고.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예수님의 교회의 머리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라.“ 도대체 그림이 그려지질 않아요. 어떤 괴물인지. 그리고 그런 괴물을 우리가 쳐다본다면 그런 괴물이 있음을, 그런 몸이 있고 얼굴이 예수님 얼굴이고 몸통은 일반 사람 몸통을 보고 있다면 그 보고 있는 사람은 어디서 봐야 되느냐 하면 일단 그 몸통 바깥에 나가야 그 전경이 다 보이게 돼 있거든요. 트로이 목마라는 거 알죠? 트로이 전쟁할 때 나무로 큰 목마를 만들어서 숨어서 적군한테 공격했던 전법인데 그 목마를 보려면 목마 바깥에 나와야 보이는 거예요. 큰 사료 탑이라든지 큰 창고 같은 굴뚝보다 더 큰 걸 보려면 바깥에 나가서 산 위에서 보든지 봐야 되지, 그 사료 탑 안에서 봐버리면 그냥 굴뚝 안에서 보면 굴뚝이 안 보이잖아요. 하늘에 구멍 난 것만 보이고 목욕탕 굴뚝같은 곳은 마찬가지잖아요. 

그 전경을 보려면 안에서는 못 보고 바깥에 나와야 되는데 바깥에 나와 버리면 이미 교인이 아닌데요. 우리는 다들 모르면서 ‘아유, 그냥 쉬쉬 넘어갑시다. 그런 줄 알고 넘어갑시다.’라고 하는데 우리 넘어가기 없기. 넘어가기 없기 합시다. 그런 식으로 하게 되면 트로이 목마를 끌고 와서 우리끼리 하고 그 다음에 저쪽에 쇼하고 저쪽에 쇼하고 이렇게 밖에 안 되는 겁니다. 루터 교회서 만들어 낸 베델 성경에 보면 거기 그림이 나와 있어요. 예수님 머리에다 깨알만하게 사람 그려놓고 이게 교회다. 라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저는 흉측하게 보이지, 그게 진정한 교회 모습으로 보여 지지 않습니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학개가 성전 이야기하거든요. 성전과 바깥에 있는 경작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경작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그 범위가 바로 하나님이 기대하는 이스라엘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농사를 짓는 것은 성전의 가치를 위하여 농사를 지어라. 농사가 잘되고 있거든 니가 성전을 잘 섬긴다는 뜻이고 농사가 못 되거든 성전을 소홀히 했다는 뜻으로 봐라. 하는 본문이 오늘 본문의 내용 이예요. 복잡하게 이십 석 곡식이 어떻고 남아있는 것이 열 석 뿐이고 포도즙이 오십 그릇인데 보니까 이십 그릇밖에 없고, 전부 다 이것은 그리고 19절에 “곡식 종자가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었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이렇게 하는 것은 이게 농사 잘 돼서 잘 먹고 잘 살라는 것이 아니고 성전의 가치가 니 농사 짓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성전에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이야기한 성전이 지금 궁금하다 이거거든요. 궁금하다 이건데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의 취지를 이어서 뭐로 만들었느냐 하면 이스라엘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이 어떤 건물이나 예배당처럼 있으면 우리가 이미지가 쉬운데 ‘야, 우리 어느 교회에 가면 그게 이스라엘이라고 들어가자.’ 얼마나 쉬워요? 구약에는 신앙생활하기 쉬운 거예요. 성전을 찾아가면 되는데, 예수님께서 성전을 없애버렸어요. 없애버리고 그걸 교회로 만들었다 말이죠. 

그러면 ‘교회 가자.’ 가 성립이 안 돼요. 교회가 있어야 갈 게 아닙니까? 교회가 있어야. 어디 굴뚝이 있는 데가 있습니까? 목욕탕은 있지만 어디 예배당이 어떤 특정 성전이 없잖아요. 성전이 없는데 교회가 없는데 ‘무슨 교회 가자.‘가 성립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어디 특정 장소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있어서 매주 참석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참석하면 교회라고 인정받았으면 좋겠어요. 그게 얼마나 편리한지 몰라요. 그런데 그런 방법을 사용 안 하니까 우리는 답답하고 모르고 모르면서도 또 아는 척하고 넘어가고 이러니까 문제가 생긴다 이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 교회가 성전이다. 성전이 교회고 주님이 계신다니까 우리는 어디에? 어느 장소에? 어느 좌표에? 그런 게 있습니까? 그 모임은 언제 몇 시에? 일요일 날 11시 입니까? 9시입니까? 몇 시 열립니까? 우리는 그런 식으로 물을 때는 아직도 우리 속에는 트로이 목마처럼 뭔가 바깥에서 관찰하고 봐서 거기에 참여함으로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심보가 있는 거예요. 그걸 천주교가 놓칠 리가 있습니까? 그래서 천주교는 성당을 바실리카, 번역하면 회당인데 십자가 모양으로 딱 정해놓고 그것을 동쪽으로 향하게 돼 있고 문턱을 만들어서 어느 지점까지는 영세 받은 사람만 갈 수 있고 어느 지점까지는 사진 촬영기사도 못 들어가게 만드는 특정 장소를, 지성소를 만들어 놓습니다. 

그것은 뭔가 스스로 가치를 높이려는 게 아니고 일반 대중들이 어느 특정 시간에 예배드리고 참석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자기에게 천국 가는 티켓을 주는 그런 방식을 선호하기 때문에 그들의 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자, 그것이 이제 우리는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깨져야 됩니다. 깨지기 전에 그러한 관찰 자 입장에 서서 구원받고자 하는 심보가 그것이 잘못됐다는 거,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전을 교회로 만들 때는 그 잘못된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장소와 시간과 공간을 없애버렸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됩니다. 그런 시간과 장소를 없애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장소와 시간을 성전 만들고 정해주신 거예요. 이야기 어렵죠? 

그런 장소와 시간을 오늘날 없애기 위해서 구약 때 특정 장소와 특정 시간과 그리고 성전이란 관심사에 따라서 주변의 농사가 잘 되냐. 못 되냐, 아주 초보적인 아주 그야말로 애들도 납득이 되도록 그렇게 아주 친절 봉사, 극진을 다해서 하나님 안 섬기면 농사 잘 못 된다는 식으로 그렇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지만 그 안에는 오늘날 우리가 교회냐, 아니냐를 결정짓는 중요한 단서가 거기 있기 때문에 단서를 찾기 위해서는 구약의 그런 초보적인 조치라도 우리가 놓치면 안 되겠죠. 

열왕기상 12장에 보게 되면 거기 이스라엘 나라가 둘로 나누어집니다. 성전이 있는 나라와 성전이 없는 나라로 나누어져요. 나누어지니까 북쪽에 있는 여로보암이라는 독재 자가 북쪽에 열 두 지파 가운데 열 지파를 차지해서 다수당을 차지한 여로보암이란 사람이 열왕기상 12장에서 뭘 만드느냐 하면 베델이란 곳에 베델은 북과 남, 남북 경계선 사이에 그 장소에 아주 멋들어진 하나님의 성전이랍시고 유사성전을 만들어요. 사실은 신전이죠. 신전을 만듭니다. 만들 때 28절에 보니까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거기 베델에다 신전을 지어 놓습니다. 지어놓고 이 신이 뭐냐 하면 바로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라.‘라고 하는 겁니다. 

자, 우리가 가상 좀 해봅시다. 자, 박 근혜 대통령께서 서울에다 예배당을 지어놓고 금송아지 두 개를 딱 만들어 놓고 하는 말이 ‘여러분, 예배는 지정된 자리에 예배드리면 구원 티켓 얻습니다. 천국 티켓 얻습니다. 그리고 이 금송아지는 금송아지로 보지 마세요. 이 금송아지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구세주 예수님의 모습이라 이렇게 생각하시고 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형상을 보지 마시고 그 사상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었다고 칩시다. 

그럴 때 기존에 있는 교회에서 반발을 하겠죠. 야, 여기서 오늘 설교의 핵심이 나옵니다. 그 반발을 할 때 박 근혜 대통령이 그 금송아지 신상을 광화문 한복판에다 세웠다고 칩시다. 제일 잘 지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기존의 교회에서 반발할 때 반발하는 이유가 뭐겠어요? 내 교회 나온 교인들이 주일날 돈 들고 나오는 교인들이 돈 들고 내 교회 안 나오고 광화문에 세워진 그 교회에 가버리면, 그러면 이 교회 세웠던 장사하겠다던 그 사업이 다 깨지잖아요. 그러니까 뭐라고 합니까? ‘그렇게 만든 것은 우상이며 이쪽만 우상이 아니고 진짜입니다.’ 라고 생각하겠죠. 둘 다 우상인 거예요. 

하나님께서 북쪽에다 성전을 세운 것은 남쪽에 비록 성전이 있더라도 그건 전혀 일반 대중들에게 성전 값을 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 이유가 솔로몬이 예루살렘 맞은편에다 산당을 많이 세웠어요. 대중들이 피 있는 제사가 지루하니까 실용적 신, 그게 바알인데요. 실용적으로, 초월적인, 신은 절대적이고 무한하시고, 이러면 철학적이잖아요. 철학적이니까 골치 아프고 영 가슴에 와 닿지 않잖아요. 그런데 이사 가는 날 요거 하면 이사 잘되고, 남녀 궁합 보는 신도 따로 있고 떡 할 때 떡 하는 신 따로 있고 병 낫고 싶으면 그쪽에 가면 되고 이게 얼마나 우리한테 실용적입니까? 음악도 클레식이 있는 반면에 음악에도 실용음악이 있어요. 드럼 치는 거, 기타, 베이스 기타, 이걸 ..이라 하는데 그런 걸 또 구분지어서 가르치는 실용음악이 있어요. 골치 아프게 음악에 추상적인 철학을 논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써먹을 것만 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이미 남북이 둘로 깨졌다는 말은 이미 성전인지 산당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성전이 맛이 간 거예요. 성전의 진수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뭘 허락했느냐 하면 가짜 성전을 북쪽에 세우도록 북쪽 나라를 이렇게 쪼개놓은 겁니다. 실상은 어느 쪽에 가서 예배드리면 됩니까? 라는 물음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는 겁니다. 성전을 그렇게 세워 놓고. 

그 다음에 뭐냐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레위 자손만이 레위 직을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레위 지파가 지금 어디 가 있느냐 하면 지금 남쪽에 가 있으니까 사람이 모자라잖아요. 그러니까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신학교에 가서 목사 하도록, 제사장 하도록 그렇게 조치한 겁니다. 

그리고 1월 15일이 원래 유월절인데 8월 15일로 광복절 날로 특별히 큰 제사 일로 삼아서 어쨌든 간에 저 남쪽으로 사람들이 마음 빼앗기지 않도록 여기도 괜찮은 성전 있다고 하기 위해서 그렇게 성전 만든 겁니다. 

아직도 어떤 시절이냐 하면 특정한 장소에 가서 특정한 날에 예배 드려야 하나님이 받는다고 알고 있던 그 시절에 그걸 염두에 두고 다른 장소에다 같은 시간대에 예배드림으로써 ‘애굽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장소와 상관없이 이렇게 됩니다.‘라고 했던 것이 북쪽 여로보암 정책이었습니다. 상당히 깨어있는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리.할 사람 같고 뭔가 이렇게 열린 마음 같이 느껴지지 않아요? 열린 마음이고 닫힌 마음이고 모든 것은 십자가를 거쳐야 됩니다. 열린 마음, 열린 교회 한다고 해서 교회 있는 게 아니에요. 

진짜 문제는 그거에요. 아까 이야기한 산당이 문제가 아니고 장소가 문제가 아니고 시간이 문제가 아닙니다. 열왕기상 13장에 보면 남쪽에서 온 선지자가 북쪽으로 올라가요. 북쪽에 올라가서 그 제단의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이 제단은 가짜니까 요시야 왕 때에 왕이 와서 이 제단 헐어버리고 제사장 다 죽인다.’라고 이야기할 때에 여로보암이 ‘저 놈 잡아라.’하고 손가락을 내미는데 내밀기는 내미는데 거두지는 못하네요. 쥐가 난 모양이라. ‘저 놈 잡아라.’ 하는데 이게 다시 회수가 안 되네요. 갑자기 오십 견이 왔는지. 회수가 안 되는데 아무리 빼려고 해도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로보암은 답답하니까 자기의 치욕을 무릅쓰고 하는 말이 선지자 보고 하는 말이 ‘선지자야, 이거 도로 손 좀 거두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해줄 때 기도하니까 다시 거두어졌어요. 그렇게 하니까 여로보암이 하는 말이 여로보암이 요새로 말하면 재벌 아닙니까? ‘야, 니 참 용하다. 내가 왕의 재산 절반 줄 테니까 니 나하고 영업하자. 니 같은 선지자가 남쪽에 있지 말고 북쪽에 오면 우리 여호와 종교는 커진다.’ 하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라. 나는 하나님 지시로 왔기 때문에 누굴 만나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고 말만 전하고 그냥 빨리 돌아가야 된다. 북쪽 나라는 가짜고 저주입니다. 북쪽 제단은 제단도 아니라고 말하고 나는 빨리 가야 됩니다.’ 하고 갔어요. 

그 소식을 북쪽에 선지자가 듣고 그 남쪽에 있는 용한 선지자를 만나기 위해서 사람을 보내서 만났는데 만나서 이런 소리 합니다. ‘당신만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게 아니고 나도 계시를 받았는데 당신을 대접하라고 하나님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가지 마시고 당신은 어떻게 용해서 신기한 재주가 있는지 나한테 알려주세요.’ 하고 이야기할 때에 남쪽 선지자가 ‘하나님의 지시가 누굴 만나든지 먹지도 마시지도 말라.’ 하니까 그 사람이 ‘나도 계시 받은 사람이니까 걱정하지 마라. 하나님이 당신만 계시한 게 아니고 나한테도 계시 했으니까 나한테 대접 받으세요.’ 해서 대접 받고 가다가 남쪽에 이름 모를 선지자는 라이언, 동물에서 사자가 탈출했는지 사자가 등장해서 길에서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럴 때 북쪽 선지자가 시체 거두어서 울거든요. 

여기서 성전이 뭐냐? 성전이 있는 건물은 성전이 옛날부터 아니었었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 말씀이 맞아요. 처음부터 성전은 사람이었어요. 사람이 어떤 장소, 건물 속에 들어간다고 인간이 달라지지 않아요. 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을 달라지기 위해서 성전이 있는 거예요. 

그럼 인간을 달라지기 위해서 성전이 어떻게 되느냐? 성전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가건물 이예요. 건물인데 건물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우리 추구하는 것이 틀려먹었다는 것을 고발하는 그러한 작용을 해주면 그게 바로 성전입니다. 

내가 성전이다. 그 의미 없어요. 교회가 성전이다. 아무 의미 없습니다. 성전은 나로 하여금 인간 만들기 위해서 그런 사건이, 그런 사건과 결부돼 있는 그런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마다 성전은, 교회는 발생되는 겁니다. 교회는 발생되는 거예요. 주께서 우리를 성전 되게 하는 것이죠. 우리를 성전이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매일같이 우리를 성전 되게 하는 겁니다. 

성전은 뭐냐 하면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성전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 보시기에 우리가 세상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내 중심입니까? 비록 내가 농사가 잘되고 오늘 본문에 저주와 관계없이 하는 것 쪽쪽 잘되고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잘되고 석류나무 잘되고 다 잘되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그게 의미 없다고 알면 그 사람이 주님과 함께 있는 성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자, 골로새서의 예수님은 머리고, 우리는 몸이다. 이걸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는데, 예수님 머리에다 우리는 몸통이다. 백날 그려봐야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건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럼 뭐냐, 예수님의 기능이 있어요. 예수님의 기능! 머리는 그냥 머리가 아니고 머리적인 기능이 있고, 그 머리적인 기능이 발휘될 때만 그때만 등장하는 몸통, 그때는 머리와 그 몸통은 끊어진 게 아니고 같이 붙어산다는 게 등장하는 거예요. 

예수님에게만 이야기했던 그 말씀이 이제는 나의 말씀이 될 때 나라는 인생이 말씀이 발현되고 말씀이 실현되는 어떤 운동장으로 활용될 때, 그게 바로 그 머리의 그 몸통인 겁니다. 

목사님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면? 그럼 구체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사도바울이 로마에 갈 때 역시 성전이었고, 사도바울이 고린도 가도 고린도가 성전이 아니고 사도바울이 성전이고 사도바울이 터키에 살아도 여전히 머리이신 주님과 같이 연결돼 있어요. 뭐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있어야 그게 성전이고 밖에 나가면 성전과 멀어지고 그런 게 아닙니다. 그건 구약 때고. 성지순례는 할 필요 없는데 놀러 갈 필요는 있는데 그걸 성지순례라고 붙이지 말아 달라는 겁니다. 왜냐 하면 성지라 하는 것은 사건으로만 등장할 때만 우리가 성전이 되고 성전이 되는 겁니다. 

그럼 매일같이 살아가시면서 여기 오늘 학개에서는 성전 소홀히 했더니 농사가 안 된다. 옛날 아주 초보 때는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바꿔서 이야기 할 수 있어요. 뭐냐 하면 ‘모두 돈을 버니까 예수님 생각이 안 나네.’ 요렇게 바꿀 수 있다 이 말이죠. ‘아이, 뭐 돈도 벌고 애가 공부도 잘 하니까 뭐 도무지 십자가 생각은 별로 생각이 나지를 않네.’ 그러면 성전 이예요. 그러니까 돈 잘 벌고 공부 잘하는 게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 사람은 머리에서 지시하는 사건에 휘말려 있다 이 말 이예요. 좀 그랬으면 좋겠어요. 예수님 생각 안 해도 장사 잘 됐음 좋겠어요.ㅎ 경기 좋았으면 좋겠어요. 이건 예수님도 생각 안 나고 경기도 안 좋고…. 

주께서 예수님의 성전 됨을, 예수님의 머리됨을 멀어지게 하는 그 잘 되던 못 하든 어떤 현상이든 그것은 오늘 학개에서 농사가 못 되는 동일한 취지가 있는 겁니다. 그 취지가 담겨 있으면 아직 성전은 깨져도 성전은 학개에 남아있듯이 우리가 잘되고 못 되고 관계없이 우리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 의의만 살아 있으면 강도라도 그 사람은 성전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움직이고 살게 만들고 키 크고 머리카락 자라고 하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인 것을 깨닫는 순간순간이 곧 성전인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6강-학2장15-19(성전다운 생활)130811-이 근호 목사.hwp (48.0K), Down: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