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같은 제사장
2013년 7월 21일 본문 말씀: 학개 2:4-9
(학 2:4, 개역)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 2:5, 개역)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학 2:6, 개역)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학 2:7, 개역)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 2:8, 개역)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 2:9, 개역)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성전은 그 당시에 죄를 짓음을 보장해주는 장치였습니다. 과연 내가 죄씻음을 받았는지 아니면 그냥 스스로 죄 없음으로 단정짓고 싶어서 일방적으로 결론내린 심정인지를 판가름 하기 위헤서는 실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죄 씻는 그 과정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성전의 존재입니다.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로 인하여 바깥에 포진되어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죄 용서가 성사되는 겁니다. 이렇게만 이야기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으로 큰 특혜을 입은 부러워 민족으로 간주될만 합니다. 하지만 출애굽기 19:5-6에 보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막상 제사장 나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고역입니다. 이미 사람의 몸이란 주변 환경에 익숙해져 있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현실을 지탱하는 원칙 자체에 변동이 일어나게 되면 기분의 삶의 패턴을 고집하는 자들은 견디지 못하고 다 죽게 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이나 오늘날 성도나 영원한 제사장으로부터 덕보는 것도 있는 반면에 본인들 자체가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9에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세상을 접수하신 하나님의 언약 원칙에 준해서 ‘왕 같은 제사장’ 노릇을 할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건물로 만들어진 성전이 신약에 들어와서는 인간의 신체로 전환된다는 것도 말해주는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격을 결정지은 특수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애굽에서 나올 때에’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애굽이라는 나라의 백성들과 다른 식으로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친히 다루시겠다는 겁니다.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 기준은 바로 언약입니다. 이 언약의 기능을 두 가지 기능으로 표현합니다. 그것이 바로 왕이요 제사장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스룹바벨은 왕에 해당되고 여호수아는 제사장에 해당됩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왕과 제사장이 이원화되지 않고 동일인물, 곧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왕이 곧 제사장이요, 제사장이 곧 왕으로 일치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전 자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죄 씻어’ 작업과 관련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란 성전주변에 포진해 있는 백성들의 뿜어내는 죄를 받아내고 견뎌내어야 합니다.
성전 자체를 유지하는 것은 제사장들의 활동입니다. 그들은 교대근무를 해가면서 성전에 대한 보수와 관리와 유지와 가동을 책임집니다. 그 반면에 죄 씻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되는 제물이 충당되어야 하는데 이는 죄를 지었다고 자백하는 백성들이 친히 가지고 와야 합니다.
뿐만아니라 전적으로 제사일에 복무하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생계를 담당하기 위해서 백성들은 자기 소득의 10%를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제공되어야 하고 그 말고 따로 성전세를 성인들 숫자에 준해서 바쳐야 했습니다. 백성들이 바친 제물의 제사장의 수고에 의해서 제단에서 몸통은 불태워지고 그 피는 살아남아 있어 하나님의 지상소에 있는 법궤에 뿌려져야 했습니다.
이 일련의 절차와 과정을 백성들이 보면서 자신들의 죄가 과연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약속대로 사라졌음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왕직은 왜 필요한 걸까요? 왕직은 원래 이스라엘에서 용납될 수 없는 제도였습니다. 이스라엘왕은 따로 계셨는데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왕이 된다는 것은 인간의 왕이 매개체로 따로 나설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은 통괄하는 일을 인간에게 맡기시지를 않으십니다. 이는 곧 언약이란 인간의 개입을 차단한다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자 이 자체가 죄에서 나온 호소임을 알려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전이란 인간의 죄를 씻어주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인데 죄 자체의 개념이 분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스스로 살리기 위해서 왕 제도를 채택한 것 자체가 인간들에게 보편적으로 더 숨기고 있었던 죄였던 것입니다. 다윗 때는 왕이 제사장을 지배했습니다.
이러한 제도를 전통으로 이어가면서 후기 왕들도 제사장을 자기 수하에 두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왕들이 모르는 게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왕 제도 자체가 인간의 죄를 반영하기 위해서 허락된 자리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 제도가 장착이 되면 하나님께서 백성의 모든 죄를 일괄적으로 백성의 대변자격인 왕에게 묻는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즉 왕은 백성들에게 축복과 저주가 통과하는 자리라서 왕이 제대로 율법대로 살지못하면 그 고통은 그대로 백성들의 몫으로 덮쳐지는 겁니다. 반면에 왕이 제대로 율법대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왕 한 사람의 옳음으로 인하여 그 축복이 그 사람을 왕으로 인정하는 모든 자들에게 골고루 돌아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왕이라는 자들이 율법대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백성들의 세속에 편승하고 장려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왕 자기 소유의 나라로 만들기 위한 탐욕에서 그러합니다. 거기에 비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메시아는 고통과 희생과 봉사와 대신 죽으심으로 율법을 완성시켰습니다.
왕과 제사장이 예수님으로 일원화되면서 예수님은 새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었고 나머지 벽동 한 장한장에 해당되는 모든 것은 예수님과 더불어 이 세상에 대해서 왕과 제사장 나라가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언약의 나라 그 자체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아픔과 희생에 같이 참여된 자들만이 그 성전의 그 벽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내부에 언약이 부풀어올라오게 하옵소서. 날로 언약만이 커지게 화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