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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개4강-이전 영광,나중 영광(학2;6-9)이근호130728

아빠와 함께 2013. 8. 6. 20:19

 

이전 영광, 나중영광(학개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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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7-28 15:24 
나중영광, 이전영광

2013년 7월 28일                             본문 말씀: 학개 2:6-9

(학 2:6, 개역)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학 2:7, 개역)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 2:8, 개역)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 2:9, 개역)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는 환경 자체도 관여하십니다. 그러다보니 환경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늘 조마조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조치가 어떻게 주어지느냐에 따라 인생 자체에 영향을 받고 자기 인생e고 달라질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 자체를 하나님이 벌리시는 일 앞에서 포기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 쪽에서 다가서는 식으로 인생이 바뀌어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성전이라는 아이디어 자체가 분명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것으로 나와있지만 이는 인간들도 나름대로 성전 개념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 해야 합니다. 즉 사람들은 나름대로 하나님과의 접선을 시도핡 장소를 원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성전이 존재하는 지점은 이스라엘 여러 군데가 아니라 오직 한 장소, 곧 예루살렘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이 머무르는 곳이라야 하나님과의 접선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이름이 벌리시는 일은 결국 특정 장소에서 특정 인물로 바뀌게 되는데 누가복음 2장에서 그 경유성이 일부 나옵니다.

명절날 예수님의 가족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이 움집해서 그만 소년 예수님을 가족들이 놓치게 됩니다. 무려 사흘 동안을 가족들이 찾아다니게 됩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성전에서 소년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어머니가 가 예수님을 다꾸칩니다.

“아버지와 내가 네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답변하십니다. “어찌하여 저를 찾으려 다니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몰랐습니까?”라고 도로 대꾸하십니다. 즉 요셉은 가정은 그동안 임시적으로 아버지 노릇을 해온 겁니다.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와 참된 교류가 가능한 것은 이 땅에 ‘주의 이름으로’ 오신 아들에 의해서만 성사된다는 겁니다. 이는 곧 인간들이 미리 짐작은 그 어떤 시간대나 공간성도 일체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즉 인간들이 특정 장소에 성전이 등장했다는 것은 인간들이 얼마든지 오해할 소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가져다 줄 나중에 영광으로 가득 찬 성전이란 인간들이 오해하고 있는 성전에 관한 인식에 대한 부정도 같이 담겨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 장소가 ‘야곱의 우물’입니다. 이 야곱의 우물이란 특정 지점까지 사마리아 여인을 늘 물 긷기 위해 와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건넵니다.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을 여인은 다시는 이 장소로 물길러 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여전히 특정 공간성 속에 일상을 살겠다는 겁니다. 나중에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서 버범한 선지자인 것을 알고서는 하나님과의 접촉 장소를 분명히 알고 싶어합니다.

“하나님과 접선되려면 예루살렘이야 할까요 아니면 그리심산이러야 할까요?”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답변은 이러합니다. “이 산도, 저 산도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대목의 결론에서 여인이 알게 된 상황은 인간이 특정 장소를 찾아가는 식으로 하나님과 만남이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예수님이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는 식으로 접선을 시도한다는 겁니다.

공간 뿐만 아니라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날이 올 것인데 그 날이 곧 이 때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알아챈 것은 시간이든 공간이든 예수님과 접선이 된 자는 그 자체가 곧 하나님과 만나는 산 성전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 성전 안에서는 흙에 속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하늘에 속한 인간으로 영광스럽게 변화됩니다.

마치 암행어사가 지방에 출장가면서 말을 바꿔 타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구원받은 성도는 본인의 가치나 의미나 본인 앞으로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오히려 자신이 바뀌어지는 성전 기능일 일어나는 장소가 될 뿐입니다. 이처럼 신약 때의 완성된 성전은 뭔가 바뀌어지는 결과물로서 등장합니다.

무엇이 어떻게 바뀌어지는 걸까요? 그것은 다윗을 통해서 나타나게 된 성전을 생각하고서 비교해보면 될 것입니다. 역대상 29:11-17에 보면,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려고 미리 저축한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즐거이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다윗은 말하기를, 지금 우리가 가진 모든 재산과 능력이 다 하나님에게로 나왔사오니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를 건립을 위해서 마땅히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이 옳다는 겁니다. 즉 성전 자체를 위해서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해주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반면에 인간들이 그저 잠시 세상을 다녀가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영원할 것은 오직 성전이라는 겁니다.

자, 그렇게 해서 세워진 성전이 과연 사람을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이런 성전을 바친 다윗마저 이 성전 건축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육에서 영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친히 만드신 성전이어야 합니다.

그 성전이 일방적으로 인간의 몸에 찾아들게 되면 그 인간의 모든 것은 다 예수님의 소유가 되면서 성도는 오로지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은혜와 능력으로 이 생을 살 뿐만 아니라 영생의 몸으로 전환됩니다. 바로 이 영광이 과거의 성전 영광보다 더 찬란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몸을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우기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8-03 13:14 
4강-학2장6-9(이전영광, 나중영광)1307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학개 2장 6절에서 9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311페이지입니다.

학개 2:6-9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성전이라는 것이 신약 시대에 우리 몸을 성전이라고 합니다. 미리 결론부터 내립시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지금은 우리가 흙에 속한 형상을 입어서 육신이 약합니다. 그 육신이 모든 것이 쇠퇴하고 뭉개지고 무너지고 가루가 되고 그것은 도로 흙으로 돌아가야 될 성질이 강력하기 때문에 우리라고 말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5장에서는 이런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해주네요. 현재 육신이 그런 성질을 드러낸다는 것은 곧 그 육신에 대해서 다른 성질도 동일하게 니 육신에 작용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 쉽게 말해서 한 사람이 죄 지어서 이것이 우리가 죄인 된 것처럼 한 사람이 의로워서 의롭지도 않은 다른 사람이 의인이 되는 그 일을 하는 그 중심지가 곧 우리 몸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이 몸이 두 가지의 서로 다른 결론을 내는데, 하나는 우리 몸은 우리 몸의 본성을 우리가 이길 수가 없어요. 육신은 우리가 이길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이길 수가 없어요. 육신을 이길 수가 없고 거기서 죄를 낼 수가 없는데, 그 죄를 가지고 다시 생각해보자는 이야기예요.

자, 내 몸에서 죄밖에 안 나온다. 그런데 우리 말고 다른 몸이 있는데 그 다른 몸과 우리 몸을 한번 겹치게 되면 내 몸으로는 죄가 나오지만 똑같은 몸 가지고 의를 생산해 낸 몸이 따로 있거든요. 그분이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몸에서 예수님 몸으로 옮겨 타면 되는 거죠. 암행어사가 말 바꿔 타고 자기 근무하듯이 육신은 말을 바꿔 타면 된다 말이죠. 말을 바꿔 타려면 아무데서나 바꿔 탈 수는 없고 바꿔 타는 그 장소가 있어요. 그 장소가 뭐냐 하면 성전이 되는 겁니다. 성전에서 바꿔 타는 거죠.

구약에서는 성전에서 말을 바꿔 타는데 신약에서는 우리 몸이 아예 말이 바꾸어지는 그러한 정류소 작용을 하나님께서 하게 하시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구약 백성 이스라엘에서는 자기가 성전을 찾아가야 되지만 신약에서는 아예 우리 몸이 성전 되게 하시는 작용이 되는 거예요. 안 찾아가도 되는 거예요.

구약 이야기해보면 이렇습니다. 요런 이야기가 구약 전체 핵심이 되기 때문에 잘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구약에서 성전이 세워지는 지점은 이스라엘 나라가 넓어도 한 지점에만 성전이 세워집니다. 사람들은 이 한 지점에 세워진다는 이 점을 놓치는 경우가 있는데 놓치면 안 돼요. 굉장히 중요하니까.

그 지점에 가게 되면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거기 계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하는 일이 뭐냐 제가 말 바꿔 치기라 했는데 바꿔 주는 기능을 해요. 죄인으로 왔다가 의인으로 나가는 기능이 이거는 사람 손에는 못하고 우리 이름으로는 안 되고, 주의 이름으로 가능합니다.

신약에 예수 이름을 불러야 될 이유가 예수 이름을 부르게 되면 요게 바꿔 치기 돼요. 그럼 말 그대로 바꿔 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가 갖고 있는 우리 인생관, 우리 육신은 더 이상 우리가 권한이 없어요.

좀 있다가 밤에는 전도서 강의할 건데요. 전도서를 읽어보면 거기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7가지인가 없는 게 있어요. 그걸 다 이야기할 수 없고 수련회 강의에 가서 해야 되기 때문에 여기서 못합니다마는 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전도서에는 울음이 없어요. 울기는? 이런 뜻이라니까요. 이게 어디서 울어? 니가 운다고 일이 해결돼? 이런 뜻 이예요. 전도서에는 울음이 없어요. 왜냐 하면 웃는 것도 우는 것도 다 헛되기 때문에! 쓸데없이 찔찔 짜지 마라. 인생,

전도서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뭐냐, 예루살렘의 왕 이예요. 지금 성전이 어디에만 세워지느냐 하면 예루살렘에 세워지거든요. 요거는 말 바꿔 치기, 우리 운명을, 팔자를 바꾸는 기능을 합니다. 그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는데 늘 성전에서 흘러오는 그 지시와 명령대로 따라야 될 대행자가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왕은 다른 사람과 차이점은 뭐냐 하면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주님의 지시를 수용해야 될 입장에 있는 사람이 왕이고, 백성들은 왕이 수용한 그 하나님의 지혜를 그냥 들어야 되고 받아야 될 입장에 있는 사람이 백성들 이예요. 그렇게 해서 왕과 백성이 한 축으로 이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 왕에 그 백성이란 말을 듣게 돼요. ‘역시 왕이 그렇더니만 백성도 그렇구만.’라는 소리를 듣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백성들이 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왕이 있고 성전이 있는 그 지점으로 1년에 3번씩 찾아 방문을 해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어릴 때에 부모의 속을 썩여드린 적이 있는데 그게 언제냐 하면 바로 유월절 큰 명절 때 예루살렘에 임무처럼 온 가정은 예루살렘에 갔어야 됐어요. 가는 건 딴 게 아니에요. ‘우리 몸은, 우리나라는 우리 것이 아니고 성전 세우라고 하신 우리 여호와 하나님 것입니다.’라는 뜻에서 가야 되는 겁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니까. 너희 몸을 나한테  세 번씩 보이라 했으니까. 주님이 어디 계십니까? 성전에 계시니까 자기 몸을 ‘저 여기 왔습니다.’ 하고 세 번씩 보이는 거예요.

그 행사를 할 때 자, 이제 어려운데 소년 예수님을 잃어버렸어요. 사흘 동안 찾다, 찾다 못 찾아서 속을 썩고 있을 때 누구로부터 전갈이 왔어요. ‘당신 아들이 성전에 있습디다.‘ 성전과 예수님의 만남입니다. 성전과 예수님의 만남을 통해서 사람들은 겉으로만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백날 외웠는데, 실제로 예수님 보고 나무랐거든요. 안 나무랄 수가 없잖아요. 그렇게 사흘 동안이나 속을 썩였으니까. 가슴이 새까맣게 탔을 거예요.

저는 딸을 잃어버린 적이 있는데 2시간 잃어버린 적이 있어요. 로마 가서. 콜롯세움 근처에서 얼마나 사람이 많은지 약속 장소를 잘못 잡아서 잃어버려서 속이 상했습니다. 그런데 그건 다 성인이고. 이건 소년이니까. 그래서 왜 이렇게 부모 곁을 떠났느냐, 하니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아들이 아버지 집에 있는 게 뭐가 이상합니까?” 이렇게 나온 거예요. 아들이 아버지 집에 있다.

그러면 지금 예수님을 찾아다니는 그 아버지는 뭐예요? 유사 아버지? 가짜 아버지? 아버지 값도 못하는 아버지? 어떤 아버지입니까? 임시적 아버지. 아버지를 보여주기 위한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기 전에 임시적으로 아버지의 역할을 하고 노릇을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성전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거든요. 이제 이름이 사람으로 바뀝니다. 이름이 사람으로 바뀌면서 인간에겐 희망이 있어요. 뭐냐 하면 육신이 되면서 우리 육신도 예수님에 의해서 바꿔 칠 수가 있다는 겁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너희에게 영생이 있다.” 해서 예수의 피와 살이 우리 피와 살과 바꿔 치기하는 그러한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을 이미 그 조짐을 성경 전체에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문제는 이것이 완료가 되려면 우리가 성전에서 철야하고 2시간 동안 잘한다고 기타 칠 문제가 아니고 여기서 성전이 완성이 돼야 돼요. 성전이 완성이 되면 그동안 우리가 어느 장소에 예배드린다는 이 모든 요소가 전부 다 날라 가 버립니다.

지난 광주강의 한 걸 잠시 해볼게요.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장소를 찾아왔습니다. 나는 야곱의 우물입니다. 우리 집에서 야곱의 우물로 거리가 있기 때문에 공간이동을 했어요. 이동을 할 때 그 아줌마가 늘 생각하기를 ‘더운데 매일같이 물동이 들고 왔다, 갔다하니 짜증난다.’ 이런 생각 했겠죠. 그래서 예수님이 이야기합니다. “다시는 물 길러 오지 않도록 니 속에서 물이 나오게 하면 어떠냐?” 이런 제안을 했어요.

그러면 이 장소개념이 사라지고 내 속에서 물이 나온다? 내 속에서 물이 나온다? 세포구조가 어떻게 됐기에 계속 물이 나오는 세포구조가 있습니까? 이상하거든요. 그럴 때 이 여자가 자기 나름대로 감을 잡았어요. ‘아하, 이분은 보통 분이 아니다. 물 길으러 오지 않도록 뭔가 영생하는 물을 준다 했으니까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 그 다음에 여자가 하는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한테도 중요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리면 됩니까?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면 됩니까?’ 라고 아직도 어떤 특정 장소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말 타기 해서 영생 얻을까를 생각한 거예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우리는 잠시 접어두고, 딱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여인이 물동이 버려두고 하는 말이 ‘나는 메시아를 만났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여인이 아는 해답은 예루살렘이었을까요? 그리심 산이었을까요? 둘 다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그 여인이 잘못 생각한 게 뭐냐 하면 내 쪽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어느 성소에 가면 됩니까?’라고 했는데 그 방향성이 완전히 이건 필요치 않아요. 왜,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물 길러 온 나를 예수님께서 만나러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만남이 내 쪽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만남이 저쪽에서 예수님 쪽에서 만남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이루어지니까 그동안 뭐가 깨져야 되느냐 하면 내 쪽에서 ‘어느 장소에 예배드려야 됩니까?’ 이 모든 것이 예수님 앞에서는 완전히 일소해 버리는 거예요.

또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어요. 뭐냐 하면 시간도 깨져요. 뭐냐 하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미래입니다. “곧 이때라” 방금 미래를 이야기했어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해놓고 2년 기다려라. 3년 기다려라. 이게 아니고 “곧 이때라” 그러니까 시간도 깨지고 공간도 깨지면서 주님 만남 자체가 말 타기란 사실을 안 이 여인은 물동이마저 버려두고 이미 모든 일은 끝났다. 종결됐다. 끝났다 이 말입니다.

시간에 매여 있는 인간들, 시간에 매여 있는 인간들이 평소에 모든 무심코 하는 행동들이 다 시간에 매여 있어요. 이것도 수련회 때 상세히 하겠습니다만 이것을 독립변수라고 수학에서 하는데 모든 것이 시간에, 내가 여기 있고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건 시간에 쫓겨서 살아간다니까요. 심지어 예수님 강림과 예수님 재림까지 맨날 하는 게 ‘언제 오십니까? 언제 오십니까?’ ‘알아서 뭐할 건데?’ ‘언제 오십니까?’

여러분들이 기름 준비해서 신랑 만나는 그 대목 아시죠? 마태복음 25장에. 신랑이 올 때에 그 여자 열 명인데 열 명 다 주무셨습니다. 언제 올꼬? 가 아니라 주무실 때를 기다려서 쳐들어오신 거예요. 주무실 때를! 그래서 안 자려고 그렇게 애써도 소용없어요. 마지막 여인이 잘 때 오시는 겁니다. “다 졸며 잘쌔” 신랑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다섯 명을 들어갔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모든 일상이 인간들은 시간을 기다려요. 소망이라는 게 시간을 기다리다 보니까 항상 ‘지금 이때라’를 놓치고 있습니다.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땜에 내일은 행복하겠죠. 이거 유명한 가사인데 여러분 기억나지 않습니까? ‘사랑밖에 난 몰라’ 그 심수봉 노래에 나오거든요. 전에는 울었지만 지금은 당신 땜에 내일을 행복할거야. 그러니까 이건 어떤 사람을 만날 때 신랑, 신부를 만날 때 ‘그저 내 미래가 당신이 보장해야 돼.’ 시간에 쫓기고 시간을 기다리는 겁니다.

주께서 찾아오게 되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니가 바꾸는 것이 아니고 내가 바꿀 거야.’ 다시 말해서 내가 주의 이름의 자리를 우리 교회 지묘동에 만드는 것이 아니고 아예 니 몸속에다가 주의 이름이 계시는 그 성전을 만들겠다는 이야깁니다.

그런데 만드는데 (요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 만들 때 기존에 내 것이라는 모든 것은 물동이죠. 물동이고 어떻게 물을 길으면 좋겠다는, 내 속에서 물 나오면 좋겠다는 요런 나의 이익과 이득은 전부 다 포기를 해주셔야 되는 겁니다.

부흥사들이 성전 지을 때, 예배당 지을 때 즐겨 하는 대목 중에 하나가 역대 상 29장에 나오니까 그 부흥사가 하는 이야기를 잠시 제가 해보겠습니다. 29장 11절에 보면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흥사들은 읽은 요거는 중요시 하지 않고 그 다음에 중요해요.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따라서 14절에 보면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줄 안 그어놓습니까? ‘

우리가 받은 모든 재산은 이 예배당 짓기 위해서 창세전에 예정된 것입니다.‘라는 것이 다윗의 신앙이니까 여러분들이 다윗처럼 천국에 합류하려면 여러분도 다윗 같은 신앙을 말로만 하지 말고 기도로 때울 생각하지 말고 몸으로 보여주는데 보여주는 게 뭐냐, 부귀, 재산과 재물로 바쳐서 보여주실 때 그때 다윗은 드디어 성전 준공을 다 준비를 마감하고 그 성전에서 하나님께서 흔쾌히 기쁘게 영접했습니다. 이거는 저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거는 주의 말씀입니다. 전혀 지금 감동이….

15절에 보면 우리는 그저 나그네뿐이고 없이 살아도 그만이고 세상에 있는 것은 그림자 같습니다. 15절, 우리 살아가고 머무는 것이 그림자 같은데 이 있는 재산은 성전 지으라고 있는 재산, 자식한테 재산을 물려주면 자식들 의만 상하는데 자식에게 주지 말고 자식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이 남은 재산을 하나님의 성전 짓는데 바치면 자식도 여러분의 신앙을 본받아서 자식도 돈 바치는 여부에 따라서 여러분이 살리느냐 죽이냐, 여러분 손에 달렸습니다. 학부모 여러분, 오랜만에 이 이야기하니까 내가 왜 신이 나지?

16절에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려고 미리 저축한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 미리 저축했기 때문에 여기는 작정 헌금이 정당화 되죠. 헌금 할 때 돈 없으면 작정 헌금 하게 하는데 왜, 미리 저축해 놓고 기도로 빡세게 넣으면 되니까. 적금 통장 교회 이름으로 다 바꿔서 교회서 적금 통장 다 관리 감독하겠다 이 말입니다.

그 다음에 17절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즐거이 드리는 것을 보오니” 나뿐만 아니고 백성들도 즐겁게 드리니 하나님이여 이 헌금을 받아주옵소서. 라고 역대 상 29장 거기에 나와요.

어떻게 할까요? 우리교회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하면 됩니다. 우리가 모든 재산을 바쳐서 예배당 지어서 딱 짓자마자 요 밑에 수정교회나 옆에 지묘 교회 다 갖다 주고 다 떠나면 돼요.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인생을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자기가 다 해놓고는 그것을 구원받을 사람을 위해서 몽땅 다 바치고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죽었습니다. 할 때 그 열매가 나오는데 그 열매가 오직 주님의 주되심만 드러나는 열매가 되겠죠.

여기서 깨알 같은 힌트 하나 들어갑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이렇게 기도했고 이렇게 바쳤던 다윗, 헌금해서 구원받았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죽어서 시체 됐습니다. 그러면 다윗의 이름으로 구원받았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사도바울의 이름으로 구원받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사도요한의 이름으로? 그것도 아닙니다. 부흥사 이름으로, 목사 이름으로, 그것도 아니에요. 제 이름은, 그것도 아니에요. 십자가 전쟁 없습니다.

그러면 아까 역대 상 29장에 나오는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는 거예요.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것은 현재 귀하다. 귀하다 여기는 다이아몬드, 금덩어리, 이 모든 것보다도 주님이 주시는 것이 진짜 귀한 진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그 축복이라는 것을 다윗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모든 걸 몽땅 바쳐도 갚을 길이 없는 것, 그 정도로 우리는 빚진 자가 되는 거예요.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니가 온 천하를 얻고도 니 목숨을 잃으면…” 그 장사 헛장사 한 거예요. 그 화투판에 그 화투 괜히 친 거예요. 몽땅 다 땄는데 다 잃어버린 거예요. 나중에 경찰관이 와서 다 날라 간 거예요. 벌금 내는 것.

우리 인생이 도박이라면 결국 우리는 도박을 헛짓하고 있었던 겁니다. 진짜 도박은 주께서 주신 영생, 그것만 있으면 다른 것은 잃어도 우리는 섭섭하다고 여기면 안 돼요.

예수님께서 주신 성전은 바로 이 성전을, 우리 속에 이 성전을, 다윗 성전을 우리 속에 일굼으로 말미암아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통장이라든지 금고라든지, 여러 가지 있더라도 이것이 결코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을 우리가 쥐새끼처럼 갉아먹고 있는 은혜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그걸 감사하고 즐길 때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의 몸은 이미 완공된 성전입니다. 날마다 주님께 감사하고 날마다 주께 기뻐하는. 우리가 남들이 가진 게 그렇게 부러워요. 막상 가진 것은 별로 감사할 줄 몰라요. 대전, 영천에 사는 게 남들 보기에 얼마나 좋은데 사십니까? 그런데 막상 영천 사는 사람은 딴 데 대전 가서 살까,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겠죠. 항상 자기가 받은 은혜는 생각하지 못하고 남의 떡이 점점 더 크게 보이는 것.

바로 예수님께서 그걸 바꾸는 거예요. 그렇게 남의 떡, 남의 떡 갖고 싶다고 생각하지 말고 니 것 자체가 이미 주님 것으로 바뀌고 니는 염체 없이 주님의 것을 매일같이 뜯어먹고 빈대 붙어 사는 그런 식으로 사는 거, 이게 바로 나그네 인생이고 머무름이 없습니다. 아까 다윗의 고백이 바로 우리가 성전일 때 우리 고백도 같이 동일하게 다윗과 더불어서 같은 취지로서 나와야 합당한 겁니다.

이것이 바로 그때 영광보다도 지금 영광이 더 크다는 이 학개의 말씀은 예수님에 의해서 성취된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 제대로 보게 해주시옵소서. 바치라면 바치면 복이 되는 줄 알았는데, 이미 복 받은 자로서 주께서 우리대신 하나님께 바쳤다는 그 사실을 우리는 놀랍고 감격스런 마음으로 알게 해주시고 이 앎을 통해서 우리에게는 감사와 고마움만 터져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