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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 13-08-04 15: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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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학2장10-14(거룩과 부정)1308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학개 2장 10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311페이지입니다. 학개 2:10-14 “다리오 왕 이년 구월 이십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니라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오늘 본문에 제사장하고 학개하고 대화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것은 레위기 6장 27절에 나오는 그 말씀을 가져다 놓고 그것을 적용하는데 어떻게 적용하느냐를 가지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해석을 어떻게 하겠느냐 하는 거죠. 만일 레위기 6장 27절 “무릇 그 고기에 접촉하는 자는 거룩할 것이며” 할 때 거룩한 것이 접촉했을 때는 거룩해지는 겁니다. 그런데 거룩해 졌던 것을 다른 것으로 접촉이 됐을 때 그 거룩이 이동하겠느냐, 할 때 그거는 이동되지도 않고 전달되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이 시체를 만졌다. 접촉하면 부정하죠. 그럼 시체를 만진 자 손으로 다른 걸 만지면 부정하겠는가. 거룩하겠는가. 묻습니다. 그거는 부정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뭔가 공평하지 못한 느낌이 들죠. 거룩한 것은 한번 거룩하면 죽 거룩해야 되는데 거룩한 것은 그것만 거룩하고 거룩한 것 가지고 백날 이동해봐야 그건 거룩이 전달되지 않고, 더러운 것은 한번 더럽다 싶으면 그 더러운 것이 가는 곳마다 다 더럽고, 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거룩은 제한시키고 부정, 더러운 것은 확장시키고 확대시키는 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가? 하는 그 점을 이 본문을 가지고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요. 이 율법이 사람을 깨끗하게 하려고 준 율법이 아니고 너희들은 더럽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겁니다. 사람은 율법이 더럽다 해도 사람은 그 율법 가지고 깨끗하려고 시도를 하거든요. 여기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율법에 나오는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걸 요새 말로 말하면 사도바울이 말한, 사도들이 말한 그 명령과 신약 성경의 명령과 지시를 항상 행하고 언제든지 행하고 어디서든지 행하지 아니하면 저주 아래 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저주 아래 있다. 저주 아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선 명령을 준 게 있는데 그게 뭐냐, 율법이란 이름의 명령, 사도들에 대한 지시와 명령, 그건 너희들이 율법 아래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돼 버리면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윽박지르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어떤 사람이 이런 경우를 했을 때 그게 거룩하겠는가, 그게 더럽겠는가. 라는 물음 자체가 뭔가 사상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사람을 세워놓고 ‘저 사람이 더럽겠는가. 깨끗하겠는가. 이 묻는 거 자체가 ’니는 뭐야?‘ 라는 반발을 유발할 수가 있는 겁니다. 누가 더럽다든지 깨끗하든지 나대로 살 거야, 이런 식으로 뭔가 반발하고 싶은 그런 충동이 느껴지죠. 그래서 율법과 사람의 만남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란 것을 이렇게 삭제해 버리고 그걸 지우고 율법만 도드라지게 드러낸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되는 겁니다. 아주 어릴 때 서커스를 가본 적이 있는데 그 무대 앞에서 연극하는 거, 또는 대구에 시민극장이 있어요. 지금은 없어졌습니다만 서문시장 근처, 그 동네서 놀았으니 장돌뱅이처럼 놀았죠. 그 근처에 시민극장이 있었는데 시민극장에서 뭘 했느냐 하면 영화를 한 게 아니고 여자들만 나와서 하는 국극, 여자들만 나와서 옛날 춘향전, 심청전을 하는 국극을 했어요. 그걸 하는데 사람들이 엄청 많았거든요. TV가 없으니까 그거 보러 갔는데 어린 마음에 궁금한 게 뭐냐 하면 연극 내용이고 다른 건 궁금한 게 아니고 저 설치돼 있는 저 연극 무대 세트, 세트 뒤에 뭐가 있느냐? 그게 어릴 때 그렇게 궁금했어요. 세트 뒤가. 서커스 하는 무대 그 뒤에 뭐가 있는지 그렇게 궁금했던 거예요. 하나님께서 저주 아래 있다고 저주로 세트장을 만들어버렸습니다. 제가 이번 수련회 때 인간을 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죄를 짓지 못한다 했는데 그 말은 뭐냐 하면 아는 자가 권력을 쥐게 돼 있어요. 아담에게 뱀이 찾아옵니다. 뱀은 뭐냐, 무대 뒤를 알아요. 죄가 뭔지 알아요. 요한계시록 20장에 지옥 불이 나오는데요. 원래 지옥 불이 뭐냐 하면 10절에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하나님께서 불신자를 지옥 불에 보내는 이유가 그 지옥에 원래 누굴 집어넣기 위한 지옥이냐 하면 바로 뱀, 사단을 집어넣기 위해서 지옥을 만들어 놓고 사단에 미혹 받는 인간들을 합세해서 거기 집어넣는 거예요. 무대 뒤를 아는 것이 사단인데 악마는 악을 압니다. 지가 악을 저질렀으니까 지만 알거든요. 악을 알고 자기가 악한 것이라는 것이 어디에 기준해서 악한 것을 압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앞에서 악하다는 사실을 알거든요. 그래서 귀신들린 청년이 주님 오셨을 때 ‘하나님 아들이여, 나를 아예 멸망시키려고 왔죠?’ 이렇게 인간에게 나올 수 없는 발언을 합니다. 뭘 알아요. 무대 뒤를 알아요. 인간은 무대 뒤를 몰라요. 그냥 차려놓은 무대만 알아요. 무대만 알면서 가기서 뭘 하느냐 하면 선과 악을 논합니다. 이것이 선이고 이것은 악한 것이고, 이것은 거룩한 것이고, 이것은 부정한 것이고. 그렇다면 인간이 선과 악을 자기 나름대로 알게 되면 인간이 아는 것은 뭐냐 하면 악을 버리고 선을 취하여 착한 일을 많이 하게 되면 비율 상 선한 쪽이 많기 때문에 생명나무를 따먹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율법을 보내줌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어떤 구조로 돼 있느냐 하면 선한 것은 순간이고 악한 것은 영원하고 율법 자체가 그런 구조로 하거든요. ‘니가 거룩한 것을 쌌으면 거룩하겠느냐?’ ‘거룩합니다.’ ‘그 거룩한 것을 다른 것으로 쌌으면 거룩하겠느냐?‘ ’거룩하지 않습니다. 왜 그게 거룩하지 않는데요?‘ 손수건 가지고 거룩한 것을 쌌으면 그 손수건이 다른 데 해도 거룩해야 되는데 그때만 거룩하고 거룩하지 않아요. 그런데 반대로 더럽게 되는 것은 더러운 시체를 만졌으면 이 더러운 손을 세제로 씻어도 계속해서 더럽게 된다는 구조가 율법의 불공평성을 가지고 불공평하게 율법이 이렇게 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너희들은 그걸 지키라고 한 거니까 니들은 이 율법이 불공평함 속에 갇혀 있다 이렇게 보란 말이죠. 너희들 보기는 선하면 착해지고 악하면 악해진다고 굉장히 공평하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사실은 니가 놓여 있는 자리 자체가 공평하지 않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을 구원하실 때 인간을 그냥 인간만 구원하시는 줄 알았죠? 사실은 인간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인간의 놓여 있는 그 자리를 뜯어냅니다. 자리를 뜯어내면 인간은 ‘어! 내가 이렇게 예수 믿는 건 착한 거잖아.’ 라고 생각하고 딱 와서 자기 뜯긴 자리를 보니까 그 자리가 율법의 저주가 뿜어져 나오는 자리에요. 그러니까 율법의 저주가 내가 속해 있던 자리에 가도 같이 뜯겨져서 구원받은 자로 하여금 전에 무슨 자리에 있었는가를 보게 함으로 말미암아 ‘야, 내가 예수 믿는 게 착한 일이 아니고 처음부터 율법에 의하면 착하다는 것이 이게 성립될 수 없는 조건하에서 그동안 ’나는 그동안 착한 줄로 알고 그렇게 오해하면서 살아왔다.‘ 그걸 알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율법 이야기하고 그러면 성전 이야기하고, 학개가 성전 지으란 이야기인데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지금 바로 학개서를 연관시켜버리면 너무 어려워요. 그래서 제가 성전 구절 한 구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에베소서 2장 7절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말씀이 더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시도해 봅시다. 에베소서 2장 5-7절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살릴 것이다가 아니고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앉힐 것이다가 아니라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이미 살리셨고 은혜로 구원을 얻고 함께 일으키고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앉혔다는 거예요. 이미 앉혔다는 거예요. 자, 이거하고, 이런 이야기거든요. 앉혔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학개 보면 ‘성전을 지어라’ 하라 예요.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는 하라, 하라, 하면서도 신약에서는 이미 앉히셨고. 니는 되기, 뭐 하기, 사람 되기, 성도되기, 하늘에 앉히게 되기, 그렇게 이야기해요. 그러면 하라고 할 때는 뭐고 우리는 물어보지 않고 덜렁 우리를 천국에 앉히시는 것은 뭡니까? 그것은 선악과 법칙으로 적용되는 선악과 법칙이 이제는 그것이 날라 가 버리고 성도에게는 선악과 법칙을 더 이상 적용시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선악과 법칙을 적용시키지 않고 선악과 적용과 상관없는 생명나무의 법칙에 의해서 우리를 하늘나라에 앉히게 하신 거예요. 그렇게 되려면 뭣이 돼야 되느냐 하면 학개에 있어서의 우리의 인간을 지시와 명령의 대상으로 보는 겁니다. ‘똑바로 하란 말이야, 제대로 하란 말이야.’ 그렇게 이야기해요. 예를 들어서 어떤 아들을 군에 보냈는데 군에 가고 난 뒤에 그 아들의 엄마가 대대장 찾아와서 아, 우리 아들 어떻습니까? 잘하고 있습니까?‘ 하니까 대대장 하는 말이 ’잘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잘 할 겁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군인 되기. 군인이 될 수밖에 없게 만들기. 국방부의 정책에 의해서.‘ 이거는 뭐냐 하면 군대생활 잘한다고 군인 더 되는 것도 아니고, 말뚝 박는 것도 아니고, 군대 생활 못한다고 ’아유, 니 안 되겠다. 그만 나가줘야겠다.‘ 이렇게 해주는 것도 아니에요. 많은 장병들이 꼼수를 쓰는데 농땡이 부리면 일찍 제대시켜줄 줄 아는데 택도 없는 소리입니다. 군대생활 적용 안 된다고 제대시켜주는 법이 없습니다. 군에 먼저 갔던 동네 선배가 후배한테 이런 이야기합니다. 얼마 전에 들었던 이야긴데 ‘군대생활 적응 안 되면 차라리 죽어라.’ 참 말도 심해요. 군대생활이 왜 그렇게 힘들었느냐 하면 나한테 지시하는 선배가 인간 같지가 않으니까 그게 힘든 거예요. 인간 같지도 않아요. 명령도 명령 같지도 않고. 뭔가 나한테 지시할 만한 존경심이 있어서 지시하면 힘들지 않아요. 밥이 없어서 힘들고 힘이 들어서 힘든 게 아니고 인간 같지도 않은 것이 지시와 명령하는 이게 말도 안 되거든요. 진짜 사회 같으면 때려죽이고 싶은 인간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래도 해야 되는 그것이 ‘군대 되기’는 그래야 돼요. 군대는 인간의 인격 다 접어두고 나이 몇 살이고 사회에서 선배고 다 접어두고 그냥 명령과 명령에 의해서 움직이는 기계 같은 군인이 돼야 돼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인격성 파괴를 군에서 요구하는 겁니다. 인격성 파괴, 자기가 죽는 거예요. 군에서 자기가 죽기 전에 지가 먼저 자살하고 싶은 게 그거에요. 지가 먼저 죽으면 품위는 유지하잖아요. 그런데 군대서 죽여 버리면 진짜 자기는, 나라는 것은 완전히 날라 가 버리니까 그것이 자기 과거하고 자기가 사회에 있을 때하고 견디기가 힘든 겁니다. 뭐 되기. 구약에서 성전을 만들어라. 그럴 때 사람들은 성전 만들면 하나님께서 나 인간 취급 해주겠지. 라는 어떤 은근히 기대와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성전 지어라. 해서 시키는 대로 하게 되면 나는 선악 체제에 의해서 착한 사람에 속하거든요. 의롭고 거룩한 사람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전 지어라. 고 한 이유는 학개에서 성전 지어진 성전. 그거 부숴버립니다. 아까 목사님 기도 가운데 그런 이야기했지만 물리학에서 인간을 뭐로 보느냐 하면 질점으로 봐요. 하나의 점. 사람을 인격으로 보지 않고 점으로 봐요. 너는 어느 위치에 있나. 물리학에서 사람을 그렇게 봐요. 어느 위치에 있는가.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은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져 버려요. 그런데 하나님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굳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찢어버려요. 찢어야 그 무대 뒤에 궁극 뒤에 무대 뒤에 세트장이 보이기 때문에. 세트 장 뒤에는 어둡거든요. 그 어두운 것은 그동안 악마와 하나님만 아는 거예요. 인간들은 그 앞에서 무대 앞에서 춤추면서 내 인생 잘살았다. 어떻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지가 착각하고 사는 거예요. 아까 여러분 보셨죠? 할아버지가 와서 ‘내가 이렇게 어려운데 교회라 하는 것은 예수님 정신을 발휘하는지 한번 시험해 보자. 밥 쥐.’ 그래서 내가 ‘여기가 식당인 줄 아십니까?’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진짜 그 사람이 예수님처럼 오게 되면 교회 보고 밥 달라 하지 말고 자기가 중국집에 자장면 시켜 와야 돼요. 그게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자장면 시켜주면 우리도 같이 맛있게 먹어주는 사랑을 베풀죠. 교회라 하는 것은 판단해서 예수 믿을 만해서 믿는 게 아니고 그냥 “하늘에 앉히시니.” 이게 너무 어렵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 생활 잘하세요. 신앙생활 잘하세요.’ 맨날 이러는 이유가 아직도 구약 이예요. 구약에서 명령은 모든 것을 인간을 쥐포처럼 찢어버려요. 우리가 세트장을 가리고 그 앞에서 인형처럼 까불고 있어요. 90평생 동안 까불다가 ‘비켜.’ 하고 우리가 찢어버리면 ‘오! 내가 나 되게 했던 나의 어두운 자리, 내가 누구 꾐에 놀아났는지, 진짜 아담의 꾐인지, 나오거든요. 내가 그동안 악마의 꾐에 놀아난 거예요. 선악 중에서 너는 착한 일하면 구원받고 나쁜 짓하면 지옥 간다고. 거기에 놀아난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학개에서 ‘성전 지어라.’ 하니까 ‘야, 이건 기회다. 하나님 지시 떨어졌다. 성전 지으면 우리는 착한 일 되고 우리는 하나님께 복 받고 거룩한 백성 된다.’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뭐 하라. 뭐 하라. 하라, 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께서 따로 준비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백날 해봐야 온전하게 못 행한다는 거예요. 항상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킬 수가 없어요. 저주 아래 있기 때문에. 그런데 이미 우리로 하여금 저주 바깥에 나간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을 그리스도께서 딱 준비해 놓으시고 하늘에 앉히시니, 이미 구원하시니, 그게 은혜로 된 것이니, 이 은혜는 너희들의 행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니, 이미 선물을 딱 꼬불쳐 해놓고 그 선물 값을 하신다고 ‘해봐라. 해봐라.’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날마다 쥐포 찢듯이 우리 인생에 뻥, 뻥 구멍이 뚫려야 돼요. 그 구멍을 저는 이번 수련회 하면서 변곡 선이라 했어요. y=x로 잘 나가다가 구멍이 뻥, 내 예상 밖으로 구멍이 뚫리면 다시 엉뚱한 그래프를 그리면서 이렇게 가다가 이렇게 가다가 또 이렇게 가다가 결국 인생이라 하는 것은 y=x, 그거 동일성을 자기라고 잡아서 자기라고 우기지만 그 동일성이 어떤 사건에서 이게 뻥 뚫릴지 사람은 그야말로 자기 앞길을 몰라요. 왜 주께서 쪽쪽 찢어지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아침에 이야기했듯이 얇은 천위에 그림 그리듯이 우리 인생이란 것은 나한테 흔적을 남기거든요. 이거 찢어지면 뒤에 숨어있는 실상을 보게 됩니다. 지옥 아니면 천국.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생명나무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전부 다 영원한 지옥 불에, 영원한 우물, 끝도 안 보이는 그 시커먼 우물을 우리가 늘 들여다보면서 살아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땅히 빠져야 될 우물 같은 어둠침침한 지옥이 사실은 그동안 그 위에서 놀았던 우리들인데 웬 은혠지 웬 사랑인지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로 이미 건져냄을 당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것이 생명인고로 다른 것에 빼앗기지 않도록 마음 빼앗기지 않도록 성령께서 유지시켜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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