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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개7강-스룹바벨의 위치(학2;20-23)이근호130818

아빠와 함께 2013. 8. 18. 16:53

스룹바벨의 위치(학 2: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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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8-18 15:47 
스룹바벨의 위치

2013년 8월 18일                          본문 말씀: 학개 2:20-23

(학 2:20, 개역) 『그 달 이십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학 2:21, 개역)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학 2:22, 개역) 『열국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열방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뜨리리니 말과 그 탄 자가 각각 그 동무의 칼에 엎드러지리라』

(학 2:23, 개역)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 예언을 설명하는데 있어 난감한 점은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먼 과거의 사람이다 는 점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주신 그 예언 속에서 현대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언 속에 들어가지 못하면 그 예언이 약속한 축복을 얻을 재간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냥 교훈이나 얻고 실알맹이는 버리기 일 수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예언된 심판을 취소될 수는 없습니다. 필히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가만 앉아서 당하기만 하는 게 아닐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 속한 나라만큼은 하나님의 저주에서 면제되어 축복받는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에 스룹바벨에 속했다고 여기는 유다 나라는 아주 신이 났지요.

즉 예언대로 자기 나라만 구원받는다고 우기는 겁니다. 얼마나 순진한 생각하고 너무나도 일방적 생각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자기 부인’을 하라고 하셨는데 여기에 대해 유대인들은 도무지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학개 예언을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만국은 다 저주받아도 스룹바벨에 속한 유다 나라만큼은 택함 받는다는 이 사실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단 말입니까!

물고기를 다루는 사람은 오징어 다리와 문어 다리만 놓고도 몸통을 충분히 그려낼 수 있습니다. 다리의 진위는 몸통이 진위에서 가려내어진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스룹바벨의 실체는 그냥 스룹바벨로 바로 이해하지 말고 그의 몸통을 통해서 알아가야 합니다. 야곱이 아버지에게 별미를 만들어 드렸드니 이삭이 축복했다는 내용은(창 27:7) 오늘날 우리가 타인에게 별미를 바친다고 축복받는다는 원리와 통하지 않습니다.

야곱에게 이삭은 단순한 아버지가 아니라 언약을 제공하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언약의 몸통은 누구인가를 봐야 합니다. 그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새언약을 완성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야곱의 축복은 이삭 개인의 것이 아니라 이삭을 이삭되게 하신 언약의 하나님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해석도 스룹바벨의 몸통이 무엇인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는가요? 마태복음 1:21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첫째, 자기 백성이 성립되어야 하고 둘째는 죄가 밝혀져야 하고 셋째는 구원이 성사되어야 합니다.

자칭 스룹바벨의 자손이라고 우긴 유대인들이 도리어 이 예수님을 공격하는 것은 자신들이 학개 예언에 따라 바로 구원될 백성이라고 자부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 소개 앞에서 마태복음에서 왜 예수님의 족보가 나열되어 있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12에 보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스룹바벨은 그냥 인물이 아니라 바벨론에서 나온 스룹바벨이라는 겁니다. 바벨론에서 나왔다는 말은 그 전에 바벨론으로 몰려간 왕들이 있음을 고려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6에서, “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 되어 있지요. 솔로몬과 그 이후의 모든 왕들은 결국 유다나라는 바벨론으로 집어넣은 자들로 대리자로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 언약에 의하면 유다나 이스라엘의 왕은 ‘아들’이라는 호칭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도리어 하나님의 나라를 바벨론에게 함락되는 식으로 이끌게 된 것입니다. 바벨론은 짐승의 나라입니다. 따라서 짐승의 나라로 백성들을 몰아넣은 그 왕은 곧 짐승의 앞잡이로 보면 됩니다. 왕의 자리는 아들이냐 아니면 짐승의 자리를 결정짓는 그 갈림길이 되는 위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빼놓고 그 어느 누구도 왕으로서 왕다움의 역할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달리 말해서 그 어느 왕도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져낼 위력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발휘하지 못했음은 곧 자기 백성을 짐승의 지배 하에 그냥 지내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벨론 모세 때의 애굽과도 같은 나라입니다.

자기 능력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나라, 그래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하나님만의 암호나 기호가 아니면 저주에서 놔주지 않는 그런 상황이 일어나야 되는 동네가 곧 바벨론입니다. 그래서 이 바벨론에서 빠져나왔다는 말은 본인들의 재주나 능력은 아닙니다. 제 3자의 개입이 감지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 제 3자가 누구일까요? 인간들의 현실이란 너와 나의 관계로 구성되는 현실입니다.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제 3자를 일체 허용하지 않는 세계가 이 현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오직 믿음 뿐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란 너와 나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닙니다.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내가 행하지도 않았고 네가 행하지도 않았는데 주어진 세계는 오직 예수님의 개입에 의해서 발생된 현실입니다. 그 현실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스룹바벨이 단순히 바벨론에서 나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제 3장과 연계되는 있는 오징어 다리입니다. 몸통은 따로 있습니다. 그 몸통은 곧 그의 후손을 통해서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1:16에 보면,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누가 낳으면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누가 낳게 되면 과거에 일어난 일로 인하여 발생된 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출생은 누구 낳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셨습니다. 이로서 도리어 과거의 일들은 예수님의 등장을 위해 미리 깔려져야 하는 붉은 카페트와 같은 기능을 보여주게 됩니다.

이로서 유일하게 짐승의 지배에서 벗어난 분으 예수님이시고 오늘 본문에서 스룹바벨을 ‘나의 택한 자’라고 하는 것은 그 노선을 따로 오신 예수님을 두고 말씀하신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친히 만들어내시는 분’이십니다. 다리가 몸을 따라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몸통에서 다리를 다시 만드는 식입니다. 이런 자들만 저주에서 벗어나 축복받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먼저 생각하게 하시고 예수님만이 행하시는 빼내시는 작업의 현장으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강-학2장20-23(스룹바벨의 위치)1308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학개 2장 20절에서 2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312페이지입니다. 

학개 2:20-23 

“그 달 이십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열국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열방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뜨리리니 말과 그 탄 자가 각각 그 동무의 칼에 엎드러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성경 말씀을 이렇게 해석할 때 난감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런 요소들이 오늘 본문에 가득 들어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는 한국 사람이잖아요. 한국 사람인데 여기에 나오는 이름을 보면 스룹바벨, 학개, 스알디엘, 전부 다 한국사람, 단군의 후손이 아니고 남의 백성들이다 말이죠. 우리나라 역사도 공부하기 바쁜데 언제 남의 이야기까지 신경쓰려하니까 이것도 심적으로 또 부담이 되죠.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또 이게 난감한 게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면 아쌀하게 ‘세상 심판할게. 세상 엎어버린다.’ 이러면 우리는 또 ‘아! 하나님께서 화를 내서 모조리 조지는구나.’ 이해되는데 본문 보면 이렇게 돼 있어요. '유다총독 스룹바벨에게 알려줘라.‘ 그러니까 스룹바벨 너희나라만 살리고 나머지는 다 조져버린다. 이렇게 되거든요. 하나님께서 일괄적으로 심판하면 우리가 이해하는데 굉장히 쉽다 이 말이죠. ’그래, 니하고 다 같이 망하자. 속 시원하다.‘ 이렇게 하겠는데 ’내 종 스룹바벨아, 니는 나의 택한 백성이라.‘고 해서 특별대우를 할 때 이 성경을 보는 우리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니는 뭐야? 스룹바벨 너는 뭔데, 학개 너는 뭔데 왜 너는 인삼뿌리 먹고 왜 우리는 무 뿌리 먹느냐? 도대체 사람을 차별해도 이렇게 차별할 수 있느냐?‘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 다음 과정이 뭐냐 하면 ‘그럼 내가 스룹바벨에 합류하게 되면 살짝 나도 사는 수가 생기겠다.‘라는 그런 생각이 퍼뜩 든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방금 이야기한 것 세 개를 종합해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죄 때문에 다 심판하시는데 특별히 심판하지 않고  남겨두겠다는 예고를 하셨다. 그 남겨두는 곳이 어딘가 궁금했는데 그 동네가 총독 스룹바벨만 있는 그 집단만큼은 하나님께서 빼주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스룹바벨 쪽에 속하면 살고 스룹바벨 속에 속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이게 골로 간다.‘ 이렇게 전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개해도 문제가 또 생겨요. 뭐냐 하면 우리는 2013년도에 살고 있어요. 그런데 스룹바벨은 BC600년경 5백년 경 이 동네 사람이다 말이죠. 지금부터 무려 2600년 전 이야깁니다. 그러면 어떻게 무덤을 팔까요? 타임머신 타고 그 동네로 돌아갈까요? 우리는 후에 태어났는데요. 물을 수도 없고. 

이 학개라는 이야기가 옛날 지나간 이야긴데, 이순신 장군이 좋은 건 좋지만 이순신 장군을 볼 수가 없잖아요. 독립 기념관에 가서 가짜로 그린 그림이나 볼 수 있지,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는데 이순신 장군이야 지야 죽고 그만이지만 이 스룹바벨은 하나님 말씀이잖아요. 여기에 합류되지 않으면 죽는 수가 있는데 합류는 해야 되겠고 그런데 옛날 사람이고 어떻게 우리로서는 읽어봐야 대책이 없네요. 

대책이 없는 걸 대책을 내놔야 됩니다. 설교자가 대책을 내놔야 되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대책을 내놓는가? 이렇게 되는 겁니다. 바다 고기를 만진 사람은 문어 다리하고 오징어 다리하고 구분할 수 있어요. 이건 어부가 아니라도 일반 아줌마도 다 알죠. 다리 하나를 뗐음에도 불구하고 ‘아, 이건 오징어네. 이건 문어네, 이건 게 다리네.’ 전부 다 구분되잖아요. 몸통을 안 봤는데? 몸통 안 봐도 다리 보면 다 차이 나게 돼 있습니다. 

스룹바벨을 우리가 자꾸 만나려고 하지 마시고 자꾸 스룹바벨 죽은 사람 끄집어내서 만나려고 하지 마시고 스룹바벨 몸통을 찾아가는 거예요. 스룹바벨 몸통이 어디 있느냐? 그 몸통에 합류하면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 지금 실현됩니다. 몸통 찾기를 해야 돼요. 몸통 찾기를! 하나 예를 들면 야곱이 아버지한테 별미를 바쳐서 야곱이 아버지한테 복을 받았다. 이렇게 되니까 사람들은 그 대목을 보고 ‘아! 별미 바치면 복 받는구나.’ 그러면 야곱은 아버지한테 별미를 바쳤는데 그러면 우리는 지금 누구한테 바쳐야 복을 받지? 그럼 목사한테 바치면 복 받습니까? 부흥사한테 바칠까요? 아니면 집에 있는 아버지한테 별미 갖다 바치면 복 받습니까? 집에 있는 아버지한테 별미를 바치면 문제가 돼요. 예를 들어서 이번 6월 달에 부모님 모시고 별미 드린다고 미스터 피자집에 갔어요. 80넘은 할머니가 이 맛을 알까? 조금 먹다가 ‘에이, 안 맞는다.’ 하고 젓가락 놓겠지.‘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세상에 별미는 별미인 모양이라. 그걸 잡수셨는데 우리보다 더 많이 잡수셨어요. 이건 샐러드를 왔다, 갔다, 3번 4번 하고 이건 본 피자보다 샐러드를 더 많이 먹어요. 

자,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문제냐 하면 피자를 별미로 갖다 바쳤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겨울에 행사가 있어서 간다면 이제 피자집은 가도 소용없어요. 왜, 별미가 아니에요. 별미라 하는 것은 다른 맛이거든요. 이번에는 뭘 해야 되는가? 이건 별미 찾아야 돼요. 이렇게 해서 효도 10년 해버리면 그 동네 맛있는 맛 집은 다 돌아다녔어요. 이제는 SBS KBS MBC 다 돌아다녀야 돼요. 그러면 복 받을 수가 없어요. 왜, 이미 한 번씩 다 맛보았기 때문에. 영원한 별미를 찾아야 돼요. 

몸통을 찾아야 돼요. 야곱은 누구한테 별미를 바쳤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쥐고 있는 분, 언약이 쏟아지는 그분에게 별미를 갖다 바쳤습니다. 이 시대의 별미는 누가 언약을 하느냐 하면 “내 피와 내 살을 먹고 마시라.”는 그 분이 모든 구약의 언약을 홀로 성취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 별미를 바쳐야 돼요. 

그럼 예수님께 별미를 바치는 방법이 뭐냐, 무슨 수로 예수님이 피자를 좋아하십니까? 돈 좋아하십니까? 예수님은 돈 안 좋아하거든요. 그럼 예수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뭐냐, 그것은 예수님이 기뻐하는 걸 해야 돼요. 지금 야곱에게 바친 것은 아버지를 기쁘게 했거든요. 아버지가 기쁘다고 해서 축복을 줘버렸다 말이죠. 

그럼 이 시대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방법은 뭐냐, 히브리서 12장이나 로마서 14장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라고 돼 있어요.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이 기뻐해요. 믿음만 있으면! 그러면 믿음만 있으면 기뻐하는데 그러면 믿음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분합니까? ‘지가 믿습니다.’ 하면 다 기뻐합니까? 믿음의 내용이 주님 보시기에 기뻐할 만한 합당한 내용일 경우에만 그걸 믿을 때 기뻐하는 거예요. 

그 믿음의 내용이 뭐냐 하면 오늘 이 설교부터 시작됩니다. 설교 시작해 놓고 참 그 다음에  어려워서 할 말이 안 나옵니다만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뭐냐 하면 아기 이름을 ‘예수’라 해놓고 설명하기를 “이는 내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돼 있거든요. 그렇다면 뭘 믿느냐 하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자를 믿으면 되는 겁니다. 이걸 믿으면 돼요. 

그런데 왜 목사님은 그거 다 아는 이야기를 어렵다고 그렇게 새삼스럽게 뜸을 들이듯이 왜 그렇게 허풍을 떠십니까? 이렇게 나오신다면 제가 그 어려운 이유를 설명해 드릴게요. 딱 깨놓고 인간의 현실이라 하는 것은 너와 나의 관계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너와 나의 관계에요. 거기에 예수 빠집니다. 죽은 사람 이순신 장군도 빠져요. 강감찬도 빠지고 현재 살아있는 너와 나의 관계가 현실을 이룹니다. 내가 너한테 잘해줄 테니까 너는 얼마나 나한테 잘해줄 거냐. 이걸로 끝나는 거예요. 그게 현실 이예요. 

자식이 ‘아빠’ ‘왜?’ ‘내가 이번에 공부 1등할 테니까 얼마 줄래?’ 이게 실제로 가정에서 일어나는 현실 이예요. ‘여보, 오늘 일찍 들어와.’ ‘왜?’ ‘맛있는 해물 탕 끓여놨으니까 일찍 들어와.’ 이게 전부 다 대화하는 게 너와 나의 관계에요. 그런데 너와 나의 관계에는 그것은 믿는 게 아니에요. 그냥 그것은 이용만 할뿐 이예요. 

믿는다는 것은 거기에 제 3자가 관계해야 됩니다. 너 말고, 나 말고, 너, 나 말고 너 죽음 말고 내 죽음 말고, 내 삶 말고, 너 삶 말고 너와 내가 아닌 제 3자의 개입인데 그 개입하신 그걸 믿으면 여러분 구원받습니다. 이게 안 어려울 리가 없어요.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요? 너와 나의 관계에요. 목사, 장로, 집사, 너와 나의 관계에요. 교회에서 교인들 다 버리고 거기서 그리스도를 뽑아서 믿는다는 것은 이건 교회 다니면서 이건 너무너무 어려운 이야깁니다. 왜, 지시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명령하는 사람이 너무 많고 지켜보는 시선들이 너무 많아. 그런 모든 시선들을 다 제켜야 되거든요. 

어린아이들은 주워 모은 경험들이 적어서 특징이 뭐냐, 세상을 그렇게 아름답게 봐요. 어린 시절에는 모든 게 그렇게 아름다워요. 어린 애들한테는 자기를 유괴하는 아저씨도 그렇게 훌륭해 보여요. 그래서 사탕 준다하면 따라가는 거예요. 어린 아이한테는 부정적 사고방식이라는 것이 형성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커 나가면서 점점 경험하면서 제 3, 제 4, 제5, 이런 제 삼 자들을 경험하니까 ‘야, 이거 누구 믿다가는 나만 완전히 바보 되겠다. 정신 바짝 차려야지.’ 해서 그 다음부터는 주변 사람들을 잘 안 믿게 되는 겁니다. 안 믿게 되니까 본인도 힘들지만 어떻든 세상 사람들을 알면 믿을 사람 믿고 골라잡아야 된다는 그러한 부담이 되죠.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면 구약 때는 경험이 적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요. 하나님께서 스룹바벨 남기고 나머지는 죽인다 하니까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걸 어린아이처럼 ‘그래 우리 유다나라, 이스라엘만 남고 나머지 220개 모든 나라는 다 하나님께 모두 불 심판 받는다.’ 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심지어 오늘날 성경을 교회에서 뭐라고 가르치느냐 하면 ‘예수 믿는 사람 우리 집단만 빼놓고 나머지 집단은 다 불바다 받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구 그 집단에 등록하려고 돈 들이대고 그렇게 설치는 겁니다. 

예를 들면 20년 30년 전인가 1080 몇 년도에 이 장림이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10월 28일 날 예수님이 그날에 재림한다 했거든요.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것은 성경에 있기 때문에 틀린 말은 아닌데 그들은 두 가지 조건을 들었어요. 뭐냐 하면 10월 28일 날 재림할 때 10월 28이라는 날짜도 문제였고 그 다음에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 집단만 휴거되고 나머지 집단은 다 저주받는다. 이렇게 했거든요. 그게 좋게 이야기해서 어린애 같은 사고방식 이예요. 나쁘게 이야기하면 이단이지만. 어린애 같이 자기 자신을 아름답게 보는 거예요. 

현재 지금 구약을 믿는 유대나라, 이스라엘의 가장 큰 잘못은 자기 자신을 부정할 줄을 몰라요. 자기가 죄인인 걸 몰라요. 우리는 구약 성경 학개를 읽었으니까 스룹바벨 후손이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학개 마지막 예언대로 우리나라만 살고 나머지는 다 불바다 받는다. 이렇게 순진하게 생각해요. 자기 자신을 굉장히 고상하고 괜찮은 존재로 이렇게 오해를 하는 겁니다. 자기 자신이 문제가 있는 줄 모르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뭐냐, 나 빼놓고 다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12제자도 마찬가지로 문제 있어요. 예수님 빼놓고 다 문제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그게 이 세상의 몸통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에서 나온 다리는 없어요. 주님이 난 다리는 없는데 그 오징어 다리, 문어 다리 하는 것은 이제 주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난 뒤에 학개라는 방금 읽었던 이 본문 내용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근거해서 솔솔 다시 뻗어 나와요. 뻗어 나오면 뭐냐 하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질 자라 할 때 그 자기 백성이라는 것이 당연히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해야 됩니다. 

나는 살아야 되겠는데 나는 예수를 믿으니까 난 살았다 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발상입니다. 그렇게 발상돼 버리면 우리끼리가 돼요. 그러면 그건 교주돼 버리고 그건 자기만의 집단이 돼 버립니다. 수많은 교회사를 보게 되면 그런 단체가 우리만 144.000이고 나머지는 다 저주 받고, 그런 단체가 여전히 있어요. 지금도 여호와 증인들이 144.000 숫자에 끼어들려고 자기 재산이고 자기의 모든 생업이고 전부 다 오직 그 144.000 자리 유지하는데 다 집어넣습니다. 신천지도 마찬가지지만. 그전에 이미 선배들이 많아요. 그런 선배 같으면 14세기에도 그런 게 있었어요. 교회사를 공부 안 해보니까 ‘야, 이런 일이 우리가 처음이 아니구나.’ 이러는데 몰라서 그래요. 계속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그러면 풀어야 될 것은 스룹바벨이 무엇이냐, 도대체 이 스룹바벨이라는 몸통이, 이 오징어 다리가 몸통이 어디와 연결돼 있느냐 봐야 돼요. 스룹바벨이라는 이 오징어 다리인지, 문어 다리인지, 도대체 이 인간은 어디서 나왔는데 우리는 왜 택한 백성이라 했고 왜 그들만 구원 받느냐 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장 12절에 나옵니다.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이렇게 돼 있죠. 예수님의 족보에 성경을 처음 읽는 사람은 딱 등장하는 마태복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나올 때부터 나오는 지루한 족보. 성경 좀 읽어보려다가 지루해서 포기하게 만드는 이 족보. 이 족보에 스룹바벨 나옵니다. 이 스룹바벨은 어디서 나온 사람인가, 여기 12절에 보면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이렇게 돼 있어요. 

여기에 몸통과 관련돼 있는, 몸통과 고리 부분이 나옵니다. 학개 본문에 의하면 스룹바벨 민족만 살고 나머지는 다 저주받는다 했습니다. 우리는 스룹바벨 되고 싶어요. 그런데 스룹바벨 되려면 그 스룹바벨 소리 외친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스룹바벨의 자손이라고 우겼던 자손은 지금 이스라엘인데 그들은 멸망당해요. 순진하게 해석을 순진하게 본 거예요. 자기한테 문제 있다는 걸 생각 안 한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왔을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여 버렸잖아요. 자기들 스룹바벨 자손들이 예수를 죽여 버린 거예요. 해석 잘못된 겁니다. 

그럼 스룹바벨이 뭐냐, 다시 봐야 돼요. 그게 뭐냐, “바벨론 이거한 후에”라고 돼 있습니다. 그러면 바벨론은 뭐냐, 바벨론이 남의 나라에요. 그 남의 나라가 어느 나라냐 하면 소위 하나님 믿는 백성을 몽땅 정복해 버린 나라, 그것이 스룹바벨입니다. 정복했다는 말은 이런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왕을 줬거든요. 왕이 있는 지점이 무슨 지점이냐 하면 왕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왕에서 아들이 나올 거냐. 아니면 왕이 짐승이 될 거냐. 로 갈림길 위치에 스룹바벨이 있다고 보시면 여러분들은 오늘 설교 잘 들으신 거예요. 

예수님을 왕이라 하잖아요. 예수님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이 땅의 왕들은 이게 아들에 실패해요. 아들 안 되고 싶은 것이 아니고 아들 되고 싶은데 실패하네요. 여로보암, 르호보암 모든 이스라엘 나라에서 갈라졌던 왕들, 왕들 족보, 모든 계보. 마태복음 1장 6절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다윗, 솔로몬, 르호보암, 아비야, 아사, 여호사밧, 요람, 그 다음에 아하스, 히스기아, 므낫세, 아몬, 요시야, 전부 다 이들은 자기 백성을 어디다 집어넣는가, 그 뒤에 바벨론으로 집어넣은 겁니다. 

바벨론은 기다렸던 짐승의 나라에요. 이제 여러분 성경이 눈에 들어오십니까? 이스라엘 역사 속에 등장했던 모든 인물들, ‘하나님이여 절 보시옵소서. 제가 잘해서 하나님 말씀 잘 지켜서 제가 구원 따내겠습니다.’라고 했던 사람들, 짐승입니다. 성공 못합니다. 아무도 성공 못해요. ‘하나님 제가 당회장입니다. 우리교회 하나님 말씀대로 복음대로 전해서 하나님께 합격할만한 우리교회, 진짜 우리교회만 구원받을 정도로 그런 이상적인 교회 만들겠습니다.’라고 한다면 그 인간 마귀입니다. 짐승 이예요. 그래서 제가 그런 소리 안 하잖아요. 큰일 날 소리입니다. 

인간은 십자가 질 자격도 없고 죽어 봐야 그 죽음은 지 죽음 이예요. 개죽음입니다. 인간은 지 죄 때문에 죽는 거예요. 스데반 집사가 순교했지만 스데반 집사가 죽는 것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은 거예요. 스데반 집사가 죽는 것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은 거예요. 스데반 집사가 순교했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가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구원받지, 지가 죽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게 아니거든요. 

사람은 남이 죽었다고 애도하면서 자기는 살짝 살아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어요. 주변의 사람들이 죽거든 내가 같이 죽을 인간임을 알아야 돼요. 우리가 성령 받고 사는 삶은 간단한 겁니다. 매일 만나는 사람마다 작별인사를 나누면서 사시면 돼요. 작별인사 나누면서! 

사람이 어린아이가 3살, 4살 어린아이가 되면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음란죄가 없어져요. 그리고 도둑질도 없어져요. 어린아이가 되게 되면 세상을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에 세상이 죄악 된 세상이라는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심지어 자기를 유괴하는 아저씨도 그렇게 이쁜 아저씨로 보인다니까요. 모든 게 아름다워요. 심지어 여고생은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너무 아름다워서 울잖아요. 너무 아름다워서 울고 혼자서 가을이 슬퍼서 울고 봄이 좋아서 웃기도 하고, 그러다 시집 한번 가보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그냥 예수님을 보내준 게 아니고, 그전에 가짜, 가짜, 가짜 1, 가짜 2, 가짜 3, 가짜를 전부 다 보내줌으로 말미암아 너도 가짜고 그걸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도 가짜고, 가짜가 가짜 믿고 가짜가 가짜 이용하고, everybody 우리는 가짜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는 전부 다 죽음의 작별인사 할 대상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놓고 전부 다 짐승의 나라에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마귀의 지배를 받거든요. 그 마귀의 가연체, 눈에 보이는 구체화 된 것이 바벨론입니다. 그 바벨론에 잠기는 거예요. 일종의 옛날 같으면 애굽 나라에요. 애굽 나라에서 그 다음에 끄집어내는 것은 오직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야 돼요.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져서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 가슴팍에 예수님의 피가 묻혀야 우리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이 말씀이 성립이 되는 겁니다. 스룹바벨은 본인의 능력으로 구원 못 받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마태복음 1장 13절에 보니까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엘리아김은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사람들은 마태복음 1장에서 왜 마태란 저자가 왜 읽어보지도 않을, 사람들이 눈 돌리지 않을, 지루한 족보를 왜 썼는지를 몰라요. 학자들도 몰라요. 왜 이 족보가 있는지, 산수공파, 경주이씨, 우리는 우리족보도 별로 관심 없는데 남의 족보를 왜 썼는지 몰라요. 이게 남의 족보가 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학개에서 스룹바벨 한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멸망한다 할 때 우리는 스룹바벨 족보에 뛰어들려면 바로 못 뛰어들어요. 몸통을 통해서 뛰어들어야 되는데 그 몸통은 뭐냐, 바로 이 스룹바벨이 16절에 바로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이 태어나는 게 아닙니다. 여기 본문에 보면 여기 16절에 보면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낳는 게 아니고 그 다음에 뭐라고 돼 있어요? 그냥 알아서, 본인이 알아서 “나시니라” 본인이 알아서 나신 거예요. 이게 무슨 차이가 나느냐 하면 누가 누구를 낳아버리면 물줄기가 과거에서 현재로 미래로 흘러가는데, “나시니라” 돼 버리면 앞에 있는 과거는 바로 예수님 태어나기 위해서 준비된 역사에 불과하다는 것이 여기서 증명 되는 거예요. 

준비된 역사!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나시기 위해서 미리 깔아놓은 하나의 길, 하나의 신작로에요. 그 신작로를 짐승의 나라 바벨론에서부터 시작된 거예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 세상을 뭐라고 했느냐 하면 오직 한 나라, 바벨론으로 돼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있는 대한민국, 미국이고 전부 다 바벨론 이예요. 전부 다 성경적으로 보면.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그 바벨론에서 자기 백성을 끄집어내고 그 끄집어낸 자기 백성을 위해서만 죄를 사하기 위해서 예수란 이름을 걸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 이예요. 

그래서 학개에 나오는 스룹바벨! “스룹바벨은 나의 택한 백성이요.” 할 때는 먼저 우리보고 이야기한다 하지 말고 먼저 몸통을 거치세요. 예수님이 택한 백성이고, 택한 백성에 소속됐기 때문에 우리도 택한 백성이 된다고 학개에 이미 2천5백 년 전부터 우리를 위하여 예언돼 있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날 위한 예언은 없어요. 우리! 예수님과 함께 있는 우리를 위하여! 

그래서 결론 내리면 이렇습니다. 예수를 믿는 그들이 바로 오늘날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작품은 “예수님이 나시니라”한 것처럼 지금도 우리가 마리아라면 우리를 통해서 주께서 교회 되게끔 이미 죄에서 건진 자 이도록 주께서 지금도 활동 하시니라.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하시니라. 주께서 우리를 활동하시면 우리 입에서 나오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살았다는 고백밖에 나올 게 없습니다. 세상 자랑하지 마시고 현실 알아서 예수님만 자랑하시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내 자랑하기 바쁘고 지 지식 자랑하기 바쁜 세상 속에 너와 나밖에 없는 세상 속에 제 3자의 개입을 환영하며 제 3자가 하신 그분을 믿을 수 있는 저희들 교회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7강-학2장20-23(스룹바벨의 위치)130818-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