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강
전도서 7장 29절에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람 자체에서 꾀가 수입되는 현장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정직하게 지으셨는데 거기에 꾀가 들어와 버렸어요. 하나님께서 원래 만든 것은 인간인데, 인간에 꾀가 들어 와서는 안 되는데 꾀가 들어 왔으니까, 이 꾀가 들어왔다, 죄가 들어왔다는 것을 규명하기 위해서 인간들로 하여금 뺑뺑이를 돌립니다. 이것이 전도서에서 돌고 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도느냐 하면 전도서 9장 12절을 보면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크로노스라는 것; 내가 이렇게 하면, 이런 계획을 세우면 이런 것이 된다는 절대적 동질성이 생긴다. 이것이 자아라고 했습니다. 아이온에 있는 뭐뭐 하기, 사랑하기 -아이온은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사건만 있다. 사건만 있고 그 사건이 어느 지면에 되풀이 되는고 하면 인간의 시간대, 크로노스 시간대에 되풀이 된다. 되풀이 되는 그 시점을 카이로스라 합니다. 그렇게 되풀이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이미 꾀가 인간 속에 들어왔고 죄가 들어와 있다는 것을 시간에 갇히는 형식으로 그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인간들이 인생을 살고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을 잡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y=x에요. y=x에서 어떤 변곡점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전도서에서는 인간이 무엇을 계획할지라도 결코 자기 앞일을 모른다, 어떻게 될지를 모른다. 자기가 계획 잡아서 잘된다고 했지만 전도서 9장 1절에서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여 살펴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모든 것을 미래 일로 치부해 버리고, 인간은 자체적으로 해결점이 없다는 거예요. 뺑뺑이 돌리는 겁니다. 그러니 실험대상이죠. 결국은 이것이 731부대(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이 생체 실험을 한 부대)라고 보면 됩니다. 인간은 생체 실험하는 거예요. 생체 실험할 때 실험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과수농사를 한번 지어볼까?’ 하다가 그것도 헛되고, 소용없다 했지요. 그러면 ‘공부를 해볼까?’ 공부를 해 봐도 이게 소용없고. ‘이교회 한 번 다녀볼까?’ 해도 소용없고. 이번엔 ‘십자가 마을에 한번 가볼까?’ 그것도 소용없고,
인간들이 자꾸 꾀를 냅니다. 꾀란 것은 인간이 시간 속에 갇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자기 꾀는 있고, 장래는 모르고. 그러니 이것은 마치 카드돌려막기와 같습니다. 어떻게든 이 허무로부터 벗어나서 자기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자유와 인생의 삶의 목적, 목표를 얻기 위해서 끊임없이 시도를 해보는 거예요. 하지만 이 변곡점. “네가 그 장래를 알지 못하고 네 끝을 모르느니라.” 주님께서는 ‘네가 실컷 해봐라.’ 아래 벽돌을 끄집어내어 위에 올려버리면 이것이 괴사상태, 무너지는 상태에 들어가는 겁니다.
[러브레터]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히로코의 남자친구 후지이 이츠키가 등반가서 추락사 했습니다. 남자 친구가 죽은 후 여인은 남자를 잊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여인의 y=x 좌표에 무엇이 동행을 해야 되느냐 하면 자기가 사랑했던 남자와 동행할 때 진짜y=x 다운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변곡점을 주셔서 그 남자를 눈 덮인 산에서 죽였단 말이죠. 이때 인간은 꾀를 냅니다. 어떤 꾀를 내는가 하면, 비록 내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도 나는 y=x 라는 이 고집을 포기 못하겠다는 꾀를 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 한번 뺑뺑이 돌아봐라. 모든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니 채워도 만족함이 없으니 한번 해봐라.’ 인간들은 해 보죠. 여자가 남자친구 이름으로 그가 옛날에 살았던 집으로 편지를 보냅니다. 답장이 올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남자가 죽었으니까. 그런데 답장이 와요. 그 편지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거기 잘 계십니까?” 죽은 사람, 이미 없다는 것을 알고도 본인이 본인 인생을 견딜 수 없어서 그냥 일을 저질러 보는 겁니다. 답장이 오지 않을 줄 알고도. 그런데 답장이 와요. “거기 잘 계십니까?” 라고 할 때, 죽은 남자친구와 중학교 동창 여성 후지이 이츠키가 잘 있다고 답장을 합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되죠,
이후 히로코는 남자가 등반하다 추락사한 산에 가서 “잘 지내고 있나요? 저도 잘 지내고 있어요,” 라고 외칩니다. “오깽끼데스까?” 도대체 남자를 사랑해야만 자기존재 의미가 있는 y=x라는 확정된 좌표를 이 세상 어디서 그것을 지속시키고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고, 동일성이 유지되면 그 기간만큼은 내가 나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 그것을 찾는 거예요. 그래서 전도서는 ‘해봐라. 백날 해봐라. 그것도 다 헛되고 헛된 것이다.’ 전도서가 이 내용이에요. 끊임없이 인간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뭔가 자꾸 똑같이 허무한 일을 찾고 또 찾습니다. 예를 들면, 공부하다가 치우고, 농사짓다가 그만두고, 또 다른 것을 하고. 자꾸 자기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만들고 찾아갑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 20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허무한 곳으로 집어넣었습니다. 그것은 ‘네가 꾀가 많다’는 겁니다. 네 잘못이 아니고 조상 때문에 그렇지만. 어쨌든 아담은 정직하게 지었으나, 원래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원래 그 인간이 아닌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시간이라는 구조에 인간을 가두어 놓고, 결국 너는 시간의 실험실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을 명쾌하게 보여주는 겁니다.
허무는 심판을 부르고 일괄적으로 모든 인간을 심판하는 그날이 옵니다. 이런 말씀을 들어도 인간은 바뀌지 않지요. 인간의 꾀가 어느 정도 진행되는가를 더 들어 보세요, 이런 소리 듣는다고 ‘아,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할 인간들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그렇게 쉽게 하나님께 굴복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어떤 꾀를 내는지 봅시다.
전도서는 율법입니다. 율법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사두개인들이 알고 있어요. 이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꾀가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보고 성경을 보면서도 꾀는 여전히 살아서 작동을 하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면, 전도서 가운데서 ‘헛되다’ 하는 것과 헛되지 않은 것‘ 즉 헛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절을 따로 분류시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전도서 7장16-18절입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그러면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는 상태에서 지혜서를 읽으면, 이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동의하지도 않지만, 동의하는 척하면서, ‘그렇지만 아마 하나님께서 헛되고 헛된 속에만 마냥 갇히게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분명히 헛됨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를 주셨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찾아보니 하나님을 경외하면 헛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씀을 찾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누구인가? 그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이것이 꾀부리는 현상입니다.
로마서 5장 20절에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은 믿는다고 하면서, 전도서의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는 말씀을 깡그리 무시해 버립니다. 백날 헛되다고 말씀하셔도 우린 빠져나갈 구멍이 생겼으니 헛되다고 해도 소용없어요. ‘나는 하나님을 경외할거야. 이것만 쥐고 있다면 헛되지 않아.’ 이렇게 되면 헛되다는 말씀자체가 헛소리가 되어버리죠. 이렇게 되면 아담이 스스로 꾀를 냈지만 스스로 그 꾀를 빼내는데 성공한 셈이 됩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이것은 악마적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살았고 사두개인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경외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 세부사항, 세부규칙은 자기들이 만들어 내는 거예요. 안식일에는 물건 옮기지 않기와 같은 세부사항을 지키게 되면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 헛되고 헛된 세상에서 헛되지 않을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는 겁니다. 이러한 악마적인 사고방식은 어떻게 나올까요? 하나님과 거래에 나섭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원하는 것을 내가 들어 줄 테니 내가 원하는 것을 당신이 들어주시면 쌍방에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라는 생각을 우리가 하나님을 상대로 하게 되죠.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헛되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라고 하시면, 인간들은 ‘좋습니다. 헛되다고 고백하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라고 물으면, 인간들은 ‘헛된 세상에서 빠져나올 아이디어를 주시옵소서.’ 라고 하지요. 그러면 ‘좋아. 주겠다.’가 되면 거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얘기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요. 우리들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자, 그러면 왜 이것이 잘못되었는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김기덕 감독의 ‘시간’ 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여자주인공 세희와 남자 주인공 지우는 서로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후 지우의 사랑이 변했음을 느끼면서 자꾸 무슨 생각을 하는가 하면, ‘저 남자가 진정 나를 사랑했을까? 어느 정도 사랑할 건가? 지난번에 사랑했는데 지금도 날 사랑할까?’라는 강박관념에 있습니다. ‘남자가 나보다 다른 예쁜 좋은 여자를 만나면 나를 차버리지 않을까?’ 라고 만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가 전도서 7장 26절에 나옵니다. “내가 깨달은즉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수갑)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자라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저를 피하려니와 죄인은 저에게 잡히리로다.” 여기에 죄인이 나오지요. 앞서서 전도서에서는 죄인이 없다고 했는데 여기에 나오는 죄인은 무엇입니까? 여기에 나오는 죄는 인간이 피할 수 있는 상대적인 죄를 말합니다. 절대적인 죄란 절대적인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시스템, 장치를 끌고 올 때만 절대적인, 마지막 끝까지 남아 있는 죄입니다. 그 죄를 보여주고 병행해서 뭘 보여주는가 하면, 그 죄마저 용서해 주는 어린양. 여호와의 언약이 완성될 때에만 죄가 나타나지, 그전에 나타나는 인간들이 자체적으로 해소되는 그런 죄는 죄가 아닙니다. 절대적인 여호와의 언약이 나타나지 아니하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절대적인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말의 뜻은 가능하면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이 죄마저 희석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죄입니다. 이것은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 놓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는 자기 잘 난척하는 죄밖에 안됩니다. 그러니 이것은 죄가 아닙니다. 27절 “전도자가 가로되 내가 낱낱이 살펴 그 이치를 궁구하여 이것을 깨달았노라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니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남자 중에는 독한 여자 만나면 수갑 차인다는 사실을 아는 자가 있는데 여자 중에서는 그걸 아는 여자가 없어요. 이 말은 사랑은 죽음보다 지독하다는 뜻이에요. 사랑을 하게 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거예요. 사람이 죽는 방법 중에 하나가 사랑할 대상이 등장할 때입니다. 칼 들지 않고 총 들지 않아도 죽어요. 시들시들 밥맛이 없다든지. 어느 정도 심한가 하면, 보고 있어도 보고 싶어요.
그러면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것은 현재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조금 전에 지독하게 사랑했던 내 모습을 지금 그 상대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발견하고자 하니 여기에 간극이 생기잖아요. 그 간극이 생기니 ‘너는 왜 그 때 그 사람이 아니야? 왜 네 마음이 변했어? 달라졌어? 왜 너는 나를 충족시키지 못해? 왜 그때 그 사랑을 보여주지 못해?’ 그러면서 죽어라 스토커 짓을 합니다. 인간이 꾀를 내었는데 주님께서 꾀에 빠져 살게 하시는 거예요.
김기덕 감독의 영화 ‘시간’에서 여자가 남자를 사랑해서 성형수술을 합니다. 성형수술을 해서 새로운 사람이 되면 되었는데, 성형 수술 후 걱정이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남자가 성형 수술한 자신을 못 알아봅니다. 그러면서 성형수술하기 전 자신보다 성형 수술한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됩니다.
여기에서 인간이 꾀를 내었다는 결말을 파악해야 합니다. 에드거 엘런 포의 단편소설 ‘도둑맞은 편지’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편지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단지 편지가 왕비 손에서 장관 손으로, 또 다른 사람에게로 이동합니다. 장관이 그 편지를 가져갑니다. 그런데 편지 내용과 상관없이 편지를 쥐고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 그 현장에서 권력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권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권력은 내가 권력을 쥐었다는 것이 권력이 아니라 남들이 찾고 있는 그 빈자리에 내가 놓여 있으면 그 자체로 권력이 됩니다. 이것이 세상기호, 언어의 흐름입니다.
언어라 하는 것은 뜻이 나타나지 않아요. A란 무엇인가? B, C 주변의 배치에 따라 빈자리에서 A가 생기고, B는 C, D, A,를 통해 아는 거예요. 예를 들면 미장원이 어디 있느냐? 미장원은 제과점 옆에 있고, 제과점은 미장원 옆에 있어요. 여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다만 주변에 배치된 상태에서 인간이 꾀를 냅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신이 원하고 있는 진짜 Y=X 라는 완전한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을 찾습니다. 그러면 그런 것을 어디에서 찾느냐 하면 먼저 지금까지 찾았던 것은 배제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찾지 않았던 그 자리가 뭔가 내가 진짜 자아를 찾을 수 있는 자리 일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희망과 소망을 거기에다 두는 거예요.
사람은 희망을 가지면 안돼요. 희망을 소유하면 삶에 대한 의욕이 없어집니다. 다만 희망은 자신과 뚝 떨어져서 희망으로 남아있어야 삶에 생기가 돕니다. 그러나 만일 희망이 와버리면, 소유해버리면 실망만 가득 차게 됩니다. 참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어떻겠습니까? 가령 기도 응답해 주면 ‘주여 이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러면 어쩌라고? 라고 묻는다면 ‘저에게 희망을 주옵소서’ 그러면 ‘희망을 달성해 줄까?’ ‘해 주옵소서’ 그래서 희망을 달성해 주면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이건 아닙니다.’ 라고 합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이번에 성적만 오르면 무엇이든지 다 해 줄게’ 그러면 자녀가 ‘진짜?’라고 묻지요.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어요. ‘이번 수능에서 전국 10% 안에 들면 차 사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꾀를 갖고 있는 그 아이가 Y=X의 좌표를 세우면서 차가 없는 내가 차를 얻기 위해서 동기를 부여 받았습니다. 차를 얻기 위해서 뭐든지 하는 거예요. 과연 수능 10%안에 들어갔어요. 그러나 이 아이에겐 수능은 수단일 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아빠, 차 사 주세요.’ 운전면허증도 없는 열일곱 살 먹은 아이가 차를 사달라고 했습니다. 이 때 아빠가 이렇게 말합니다. ‘차 사 준다는 말은 그냥 네 성적을 올리기 위한, 너를 너무 사랑한 나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빈자리를 봤어요. 나에게 차가 없는데 차 사 준다는 말을 아버지가 먼저 끄집어냈어요. 그 빈자리가 그 아이에게 없으니 그것이 유인책이 됩니다. 내가 사야 될 이유를 찾는 거예요. “오깽끼데스까? 거기 잘 계십니까?” 항상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답게 할 것 같은, 하지도 않지만 할 것 같은 그 빈자리를 찾아가는 갑니다. 차가 없어요. 그래서 그 아이는 성적이 오른 것은 하나도 기쁘지 않아요. 오히려 차가 없다는 절망 때문에 15층 아파트 창문을 열고 뛰어 내리려고 했습니다. 물론 협상해서 오토바이를 사 주었답니다. 그 아이의 빈자리는 자동차였고, 아빠의 빈자리는 수능 10% 안에 드는 거예요. 서로의 거래가 맞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집어넣지 않은 죄, 꾀가 꾀를 만난 겁니다. 아버지의 신임이 떨어졌습니다. 그 다음 부터는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아버지 꿈을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는 생각이 들 때 자신은 다른 Y=X를 설정합니다. L여기에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오히려 자신의 Y=X 좌표에서 방해가 됩니다.
‘도둑맞은 편지’에서 편지 내용이 없어도 편지 쥔 자가 큰소리 칠 때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보시는가 하면 가졌다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인간에게 하나님은 과정, 즉 끊임없이 흐르고 흐르는, 돌고 도는 과정이 너의 진짜 모습임을 말씀하십니다. 톰 존스라는 사람이 불렀던 노래가 있어요. 조영남이 개사해서 불렀던 노래 ‘물레방아 인생’ 돌고 도는, 이것이 전도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전도서 1장 6-7절 “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고 연하여 흐르느니라.” 여기에서 강물이 바다를 채웁니까? 채우지 못하지요. 하지만 강물은 바다가 없으면 강물일 수가 없어요. 바다로 가는 과정 자체를 자기 자신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꾀를 낸 거예요. 비록 선악과를 따먹어도 천국은 가야 되겠다는 그 천국이 악마가 깔아놓은 하나의 이벤트였어요. 속임수였던 겁니다. 악마가 노리는 것은 자리바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보고 죄인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를 의인의 자리로 바꾸는 거죠. 그러면 죄인의 자리에서 의인의 자리로 바꾸려면 자리부터 마련해야 되겠지요. 의인의 자리가 따로 있지요.
그런데 자신이 어떻게 해서 죄인 되었습니다. 즉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죄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의를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전에는 죄인으로 살았지만 지금은 의인으로 살면 그 의인의 자리가 누구의 자리가 되겠어요? 자기의 자리가 되겠지요. 그러면 무엇에 성공하는 것입니까? 자리 바꾸기를 성공하겠지요? 이것이 바로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의 한계입니다.
악마가 집어넣은 꾀를 갖고 있는 인간이 알고 있는 꾀가 없는 그 상태, 이것이 꾀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화염검으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으셨습니다. 생명나무를 따먹지 못하도록 하셨는데 왜 자꾸 그것을 넘보나요? 넘보겠다는 것은, 천국을 목표로 지금 내가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하고 성경 공부하는 것에 대해 동기부여가 되고 강력한 활력소가 되고, 유리하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꾀입니다. 이것마저 뽑아 낼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우리에겐 전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마을’에서 복음을 안다고 하고, 복음을 믿는다고 하는데 복음 돌려막기를 해요. 전도서에 의하면 이것도 헛된 짓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십자가를 알아야겠습니다. 내가 누군지를 알기 위해 십자가를 알아야겠습니다. 이것 주님이 허락한 적 없습니다.
인간은 ‘내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할 자격이 없어요. 주님께서 나를 눕혀놓고 무슨 일을 발생시키는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서 뭐합니까? 내가 누군지 알려는 것은 나의 y=x라는 좌표를 굳히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전도서를 잘 아는 유대인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선악과를 아는 사람들끼리 통용되는 세계로 들어와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선악과를 아는 사람과 전혀 통용되지 않는 선악과 밖, 생명나무에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선악세계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납득하고 수용할 수 있는 역량이 없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세력 하에 있기 때문에 지혜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지혜입니다.
금속은 금속결합으로 되어 있습니다. 금속결합은 전기가 잘 통합니다. 잘 통하는 이유는 금속결합이 촘촘하게 되어 있어도 전자 하나가 빈자리를 찾아가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자유전자라고 합니다. 자유 전자가 빈자리를 찾아가게 되면 이것을 통해 전기가 들어오는 것처럼, 인간들이 어떤 언어를 사용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지우개가 있습니다. 이것을 지우개라고 해야 될 증거가 있습니까? 증거가 없어요. 이것을 공룡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거든요, 그러면 왜 하필 공룡이 아니고 지우개냐? 이것은 지우개라고 하기로 그 공동체, 집단에서 전통적으로 관행적으로 의사소통을 하기로 그런 식으로 언어체계를 잡아 온 거예요. 만일 미국 가서 ‘지우개 주세요.’ 라고 하면 what? 라고 하겠지요. 결국 언어에 순응한다는 것은 그 집단의 약속체제에 복종하는 겁니다. 따라서 언어를 사용하는 한 인간에겐 자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언어 속에 주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영혼이라는 말, 영, 육, 혼이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아, 우리가 사용하는 영혼, 영, 육, 혼 그 뜻이구나.’ 생각했죠. 그러면 주님께서 ‘그거 아니거든.’ ‘그럼 뭐에요?’ ‘넌 몰라.’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아. 나는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고 보화는 천국이니 나는 우연히 이 천국을 얻었으니 나는 천국 백성이구나! 라고 해석하면 주님께서는 아니라고 하십니다.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 뜻을 알았다고 자부했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팔아먹고 부인하고, 저주, 맹세하면서 배반했습니다.
인간의 언어란 혼자의 뜻이라 주장하지만 이미 우리는 그 집단에서 세뇌 받은 그 위력, 그 권력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권력은 정지된 권력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이상을 향해 나가게 되어 있어요. 이상 사회, 이상 국가, 이상 교회. 그래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천국이라는 것은 지상의 천국과 연속적으로, 지상천국에서 모자란 것, 없는 것, 모순된 점을 개선시킨 것이 천국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옮겨 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악마가 제안한, 극락, 천국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꿈을 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꿈을 크게 꾸시면, 입을 크게 벌리시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입니다.” 물론 채워줍니다. 쓰레기로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쓰레기가 입을 크게 여는 우리 몸에 부합되기 때문입니다. ‘이거나 먹어라.’ 하면서 쓰레기로 가득 채워버립니다. 그 쓰레기 먹은 자들이 쓰레기는 좋다고 하면서 우리 언어체계는 한 목소리를 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라, 강도 바나바를 살려라.’ 하면서 그리스도를 죽이는데, 보이지 않는 힘에 우리가 놀아나고 있습니다. 이 육신이 있는 한.
그런데 주님께서 육신의 죄를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음껏 육신으로 살면서 누비이불처럼 통과해야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통과해야 합니다. 보일러 관으로 뜨거운 물이 통과할 때 따뜻해지듯이 매일 예수님의 피가 흘러가야 됩니다. 피가 바느질 하게 되면 그 피는 그냥 피가 아니라 절대적인 죄와 결부되어지는 용서를. 즉 용서 시스템을 언급한다는 것은 절대적인 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통과 중에 무엇이 발생하는데, 오해가 발생합니다.
나는 십자가 복음을 알아야겠습니다. 왜요? 나는 나니까. 이렇게 되면 예수님을 이용하는 셈이 됩니다. 나를 위해 예수님이 존재하는 셈이 되니까. 그러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주의 이름은 나의 이름을 위하여 존재하는 이름이 돼요. 누가 갑이고 누가 을입니까? 내가 갑이고 예수님이 을이 되어 버립니다. 사람의 자유와 사람의 삶의 목표를 위해 예수님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허무한 세상에 제발 굴복해 달라고, 주의 뜻에 의해서 굴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복음을 알고 아무리 성경을 잘 꿰뚫어도 육신이 있는 한 헛된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어요. 제발 꾀를 내어 바리새인처럼 헛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마시고 주여 헛된 생애 빨리 제대하게 해 달라고, 제대할 때까지 끝까지 헛되게 살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막살기에요. 그게 막살기입니다. 이 몸은 방치할 수 없잖아요. 하루 이틀 집에서 뒹굴며 만화책 보아도 시간이 지나면 지루해서 재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빈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하고 있는 자리를 떠나 새로운 빈자리를 찾아 꽃꽂이 하다가, 지점토 하다가, 등산하다가, 다쳐서 재미없어 사진 찍기 하다가 용량이 너무 많아 치우고, 성경 공부하다가-- 가만있지를 못해요. 꼭 애 같아요. 왔다 갔다 해요.
지금 17번 죄수 꽃꽂이 하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딴 짓 할 겁니다. 그렇죠. 네. 탈출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탈출은 없습니다. 제발 내 이름으로 십자가를 믿어서 탈출하려고 하지 마시고, 주의 이름으로 탈출되기를 부탁드립니다. 제발. 나의 시도가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전도서 7장을 봅시다. 세상이라는 것은 돌고 돌면서도 만족함이 없기 때문에 웃음보다 울음이 더 낫다고 합니다. 현대 정신분석학에서는 이점을 애도관점에서 다룹니다. 슬픔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 애도입니다. 그런데 애도를 하는데 애도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거든요. 7장에 보면 ‘네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결국 네가 이렇게 된다고 하셨는데, 그런데 전도서를 보면서 풀리지 않는 것은 세상의 일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잖아요. 과수원을 한다든가, 공부를 한다든가. 그런데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어요. 경험하는 순간 죽음이 블랙홀이 되어서 내가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죽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를 재료로 사용해 버리는 순간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나의 y=x가 구멍이 나버리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남이 죽을 때 애도할 수 있어요.
그러나 내가 죽는 것을 내가 애도할 수 있습니까? 내가 죽는 것을 내가 애도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 덜 죽은 거예요. “죽음이 무섭다. 내가 사라진다. 나는 사라지면 입을 다물고, 나는 사라지겠지, 나는 바람이니까 흔적만 남을 것이고, 흔적만 남으니, 모기약 에프킬라처럼 나는 없어졌네. 없어져 버리고 내가 없다면 그동안 나 자신을 나라고 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을 사귀었고 그런 사람에게 내가 눈도장 찍었고 그런 사람을 통해, 타인을 통해 우회해서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확인해 왔는데, 그렇게 내가 평생을 공들였는데, 촌에 살다가 서울에 가서 살려고 했는데 서울서 사라진다. 서울서 사라지면 그동안 내가 투자한 것은 어디로 날아가는가? 야 이거 정말 두렵고, 무섭고 떨린다.” 라는 것이 과연 죽음을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직도 덜 죽었으니 입을 나불거리며 이런 소리 하는 거예요.
다른 모든 것은 남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을 할 수 있지만, 진정 모르는 것은, 여전한 숙제는 내가 죽는다는 것을 우리가 살아생전에 경험할 수 없는 그런 기호, 죽음이라는 기호가 우리 주변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죽음을 미리 알아서 준비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결국 마지막을 모른다는 것은 지금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이 됩니다. 영화의 끝부분을 모르고 무슨 지금을 알아요, 끝부분에 어떤 반전이 있는지도 모르고.
조금 전에 읽었던 9장 1절을 다시 봅시다. 너무 가슴이 아픈데.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이 말씀에 대해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이렇게 허무하지만, 이 전도서에서 허무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에게 허무한데서 빠져나올 수 있는 어떤 아이디어를 깔아 놓았을 것이다. 그걸 찾다. 찾아보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잠7:18) 하니까, 그렇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마지막 탈출구다. 생각할 것 아니냔 말입니다. 우리가 실컷 전도서 공부해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벗어나겠어요? 못 벗어나는 거예요.
사람들이 아무리 잘난 척해도 ‘너희들이 바리새인보다 의가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말씀은 바리새인이 못 갔으면 어느 누구도 못 가지요. 이것이 무엇이냐?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원칙을 하나님은 포기한적 없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죽어서 오라.’ 천국은 그냥 오지 말고 죽어서 오라는 거예요. 주님은 죽지 아니하면 상대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죽음 안에서 만나는데 문제는 그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에요. 언어는 떴는데, 단어는 있는데, 지우개는 우리가 만 질수 있습니다.
보통단어는 우리가 할 수 있는데 죽음이라는 것을 경험하는 순간 죽음이 나를 잡아먹기 때문에 죽음만 남고 나는 사라지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떡하면 좋아요? 탈출구가 없는데.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 7:20)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 13:32-33)
전도서 1장에서 지혜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어느 지역의 왕이지요? 예루살렘 왕. 주님이 노렸어요. 이 전도서를. 첫째, 둘째, 셋째 다음 넷째는 없어요. 제가 심판을 말씀드릴 때 심판은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언약궤가 끝입니다. 시간의 끝이 아니고, 시간의 끝은 시간의 역할을 다했을 뿐이고, 시간을 시작했고 마지막 멈추는 그 사이 과정을 주고, 실험실에 쥐처럼 만들어 놓고 그 모든 것의 마감은 언약의 투입으로 끝나는데, 그 언약의 투입은 시간적으로 하루, 이틀, 그리고 삼일로 끝나요.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 더 이상 시간은 의미가 없습니다. 아이온,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대한 심판, 뭉갬, 끝나버립니다.
주님께서 시간을 만들어 놓고 실험실 용도로 활용했고 언약이 완성되면, 벌써 짐을 다 싸놓았지요, 마지막 되면 얼마나 행동이 빠른지, 어제 밤샘해도 짐 다 싸 놓았어요. 왜냐하면 빨리 다른 빈자리를 찾아야 하기 때문에, 그 다음 나 자신의 잘남을 증거하기 위해 빈자리를 찾아야 하기 때문에.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왜 돌고 도는가 하면, 그 빈자리가 남이 버린 빈자리거든요. 정말 기분이 더럽지요? 남이 갖다 버린 빈자리입니다.
강남스타일이 떴어요. 강남스타일을 송재원씨가 불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절대로 떠지를 않아요. 왜 그러냐 하면 같은 가수라도 잘 되는 이유가 때가 되었기 때문이고, 잘되지 않는 이유는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전도서 3장에다 우리 인생을 보충을 합시다. “천하에 범사에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강남스타일 뜰 때가 있고 젠틀맨이 식을 때가 있고” 이렇게 집어넣으세요. 마르셀 듀상이라는 사람이 재료상에서 파는 남자 소변기를 가지고, ‘샘’이라는 제목을 전시장에 옮겨놓으니 그것이 유명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제자가 전시하면 유명해지지 않아요. 이미 빈자리는 시효가 끝났어요.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요.
이것을 기업에서는 창의성 발휘라고 합니다. 기업이 살려면 창의성이 발휘되어야 됩니다. 이 말은 무서운 말입니다. ‘창의성 없는 사람은 나가라. 조직은 계속 커나가야 된다.’ 그러면 ‘사장님, 자꾸 창의성, 창의성 하시는데 우리 회사가 어디까지 나가야 합니까?’ ‘그것은 묻지 마라.’ 일단은 y=x 좌표가 있어서 첫 번째 목표, 삼성그룹입니다. 하지만 삼성그룹에 도착하면 족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지금 삼성그룹을 해체하고 신당동 떡볶이 장사를 한다면 떡볶이가 떠요. 상표가 뭐냐? 삼성 떡볶이에요. 그러면 기존 떡볶이 다 죽습니다. 빈자리 찾아가기, 그것이 창이성입니다. 고객들의 요구가 크기 때문에 텔레비전이 나오지 않아서 텔레비전을 사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고, 입체적인 것을 사지요. 이런 부담이 설교자에게도 있어요. 우리교회 교인들 성경 공부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수련회 온다고 해놓고 다 드러누워 버려요. 그러면서도 설교시간에 팔짱은 끼지 않았지만 눈을 부릅뜨고 ‘자, 오늘은 새로운 것 내 봐라. 오늘도 창의성이 있는지 보자. 나는 그 빈자리를 찾으러 왔어. 안 나오면 나는 다른 곳에 눈 돌릴 거야.’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마저 주께서 하셨다고 믿기 때문에 저는 감사함 마음으로 합니다. 갑자기 꼬리를 확 내립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생각을 갖든 간에 그렇게 맞춤, 어떻게 적절하게 맞추는지 우리는 내가 상대를 위해서, 상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 그 관계에서 뭐가 나오는가? 둘 다 헛되고 헛된 인생들, 헛된 동기로서 십자가 피 때문에 그 허구성을 마음껏 증거 하면서 살아갑시다. 그것이 우리 모임의 의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새로운 빈자리 찾아서 마치 정복이라도 한 듯이 ‘이것이 바로 나야! 이제 살 맛 난다.’ 라고 외치는 그 순간, 또 다른 나의 빈자리를 찾아가는 죽음 속에 갇혀 있는, 시간 속에 갇혀 있는 우리의 모습 속에 주께서 독수리가 호수에서 잽싸게 고기를 물어 올리듯이 올려 주셨사오니 다른 차원에서 전도서의 말씀대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녹취 정석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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