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계시의 폭설

아빠와 함께 2022. 2. 20. 10:27

서울의존강의20220217a 베드로후서1장 21절(계시의 폭설)-이 근호 목사

베드로후서 1장 17-21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오늘 여기까지 해보겠습니다. 21절에 보면 문장이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아니요 ~이다’ 21절에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이 아니요’ 할 때 ~에 ▭를 집어넣는 거예요. ‘▭이 아니요 ▭이다’ 할 때 각각 해당되는 네모에 적당한 단어를 집어넣으세요, 이런 문제를 낼 수 있죠.

‘▭이 아니다’를 모르면 ‘▭이다’가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바로 ‘▭이다’로 갈 수가 없어요. 여기 인간이 있다면 바로 ‘이다’로 갈 수 있는 길은 없어요. ‘아니다’를 경유해서 들어가야 되는 겁니다. 무엇이 아니냐? 21절에 ‘아니요’할 때 여기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사람들의 사사로운 뜻으로 된 것은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럼 ‘아니요’에 해당되는 사람들의 사사로운 뜻에 인간이 포함되나요, 안 되나요? 사사로운 뜻에 인간이 포함되죠. 본인이 인간이 아니고 개라면 포함이 안 되겠지만 자칭 자신이 인간이라고 여긴다면 인간의 사사로운 뜻 안에 우리 자신이 여기 포함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이 제3의 중립지역에 있으면서 관찰하지 말고 이 나를 ▭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럼 ‘아니요’에 해당되는 사람들의 사사로운 뜻 안에 우리를 집어넣는 겁니다. 집어넣으면, 우리 자신이 이 ▭안에 들어가게 되면 ‘아니요’라고 했으니까 이것을 가위표해보는 거예요. 찍 그어버리는 거죠.

그래서 내 구원을 위해서 성경을 보는 것은 어디에 해당됩니까? ‘아니요’에 해당되는 거예요. 구원받기 위해서 성경을 보는 것은 ‘아니요’에 해당돼요. 성경을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성경은 우리의 사사로운 어떤 의도나 기대, 목표, 목적, 노림수, 뭐 챙기는 이런 것들을 전부다 ‘아니요’라고 처리해버린다면 그럼 계시는 왜 주셨는가?

이것은 사사로운 뜻보다 더 엄청난 능력으로 주신 거예요. 그냥 덮친 거죠. 그러면 이 ‘아니요’에 해당되는 사람, ‘나는 아니요, 나의 뜻은 아니요’에 해당되는 여기에 큰 폭설이 내리듯이 하나님의 계시가 옴팍 덮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어디에 함몰되었습니까? ‘나 아니요’가 어디에 묻혀버린 거예요? 지금 일본에 눈이 며칠 동안 4m 왔다고 합니다. 며칠 동안 4m 온 거예요. 그 엄청난 폭설에 눌려버렸죠.

그럼 졸지에 ‘나는 아니요, 나의 뜻은 아니요’ 이것은 나의 죽음의 자리, 나의 무덤이 되는 거죠. 내가 있는 그 장소를 나의 무덤으로 만들어버리는 폭설같이 내리는 이 계시. 이게 계시의 능력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뭐냐 하면 ‘해석 필요 없음’. 중요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성경은 해석이 필요 없다, 계시는. 해석을 하겠다는 것은 뭔가 사사로운 노림수가 있어요. 상대방의 구미를 맞춰가지고 그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려는 의도가 강렬하죠.

그래서 ‘해석 필요 없다’와 ‘나의 죽음, 무덤’과 연관성을 맞춰보면 이건 네 자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어요. 소용없다. 뭐가 소용없는지 모르겠지만 인생 사는 것도 소용없고 해석하는 것도 소용없고 다 소용없다. 이것과 유사한 말로, 이건 유행가에 나오는 단어인데, 부질없다. 훨훨훨. 다 부질없어요. 김용님이 불렀던 노래에 나오는데 세상사 부질없다. 소용없다.

그런데 이게 불교나 세상 같으면 좀 찡그리면서 이야기해요. 막 짜증내가지고 ‘아이고, 살라고 애써보니 다 부질없는 거 내가 뭐 때문에 살았지?’ 이거 뭔가 허탈하다든지 좌절했다든지 낙담이 되는 그런 관점이라면 지금 폭설이 내린 입장에서 이 ‘부질없다. 소용없다’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상태에서 ‘소용없다’가 되는 거예요. 신난다. 앗싸! 기쁘다. 이런 거죠. 계시가 주어졌으면 폭설이 내렸으면 하얀 폭설을 그냥 받으면 되잖아요. 뭐 목마르면 흰 눈 녹여서 먹어도 괜찮고... 폭설이 내리잖아요, 폭설이.

폭설이 내리는데 아... 이걸 눈사람을 만들어, 말아? 그런 쓸데없는 고민은 할 필요 없어요. 눈사람 만들어놔도 폭설이 더 와버리면 내가 만든 눈사람조차도 더 추가적으로 온 폭설 앞에 흔적 없이 날라가 버리겠죠. 그게 뭐냐 하면 소용없는 거예요. 내가 만든 모든 것이 소용없을 정도로 내가 평생 일구어낸 그 모든 것이 하등 소용이 없는 거예요. 금메달 2개, 은메달 3개가 하등 소용없어요. 쇼트트랙 그게 아무짝도 소용없고 노벨상도 소용없는 거예요.

소용없다는 말에 대해서 두 가지의 반응을 보일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짜증이 확 난다’ 뭐 이런 반응. 다른 하나는 ‘속이 다 시원하다 이제’. 그동안 ‘인생의 해답이 뭐냐? 주여, 인생의 해답이 뭡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거 알려고 철야기도하고 산기도하고 돈도 교회에다 갖다 바치고 그렇게 애썼는데 뭐 뜻 끝났네요.

이걸 더 발전시키면 이렇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한테는 이 쌓인 폭설이 보이지 않아요. 폭설이 보이지 않고 폭설 내린 것에 대해서 계시 주신 것에 대해서 기뻐하는 이것만 보이죠. 그렇다면 사람들한테는 내린 폭설은 안보이고 그냥 ‘나는 아니요’만 보이니까 계시는 뭐냐? 계시란 내가 사는 것, 이게 계시가 되는 겁니다.

그냥 사는 것. 이게 밋밋해요? 진짜 밋밋한 겁니까? 그냥 사는데 어떻게 사느냐? 내가 누구냐 해석할 필요 없이 그냥 사는 것. 그리고 남하고 경쟁하는 것도 부질없이 그냥 사는 것. 더 확실하게 노골적으로 단적으로 말해서 내가 사는 것은 나의 무덤 안에서 내가 죽은 채로 사는 것. 나의 무덤을 짊어지고 가고 결국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라는 것이 계시로 밝혀져요.

모든 인간은 똑같은 처지에 있다는 것이 계시로 인하여 밝혀졌습니다. 성도는 이것이 반갑고 기뻐요. 왜냐하면 인간은 해석하기를 원합니다. 해석해야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똥인지 된장인지 분간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분간해서 나한테 이익이 되는 것을 채택하고 취득하고 이익이 안 되는 것은 과감하게 버리는 거예요. 왜 그런 결정을 하고 해석을 해야 되는가? 나한테 유리하기 위해서.

본인이 왜 유리해야 되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죠. 글쎄. 내가 왜 유리하게 살아야 돼? 나한테 이익이 되는 식으로 왜 살아야 돼? 가만 보니까 그게 이유가 없네요. 이유가 없는 거예요.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아주 구차한 이유인데, 지금 내가 살아있으니까. 이게 구차한 이유거든요.

그런데 제가 처음에 강의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계시가 옴팍 뒤집어씌워지면 ‘나는 아니요’ 이것이 나의 무덤이죠. 숨 끊어지기 전에 산 채로 무덤이 됐다는, 진솔하고 확실한 나의 모습을 미리 체험한 이런 기쁨과 한번 대조해보세요.

나는 지금 살아야하니까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해석을 해야 되고 해석을 하려면 여기 뭐가 필요하냐 하면 축적된 지식이 필요해요. 지식이 필요한데 지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건 뭐 다 알죠. 공부를 해야 되죠. 공부를 하는데 자기 혼자 자습해서 되겠어요? 어디를 가야 되는가? 수학 학원에 가야 돼요. 영어 학원을 다니고 학교를 다녀야죠. 어느 학교? 좋은 대학에 가야죠. 좋은 대학 가려면 부모는 돈을 더 벌어야 돼요. 좋은 대학 가고 유학까지 보내려면. 왜 그런 짓 하느냐? 지금 내가 살아있으니까.

이렇게 되면 계시가 없는 티가 확 나버려요. 그래서 해석이 되고 내가 좀 더 살아 있어버리면 무슨 성경의 원칙이 날라가느냐 하면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는 것이 무산돼요. 이게 좌절되어버린다고요. 공부한 사람은 인간답고 공부 못하고 비리비리한 것은 인간도 아니다. 이렇게 되어버린다고요, 이게. 동일한 게 아니라. 성경에 공부한 사람은 똑똑하고 안 한 사람은 뭐 비리비리하다, 인간도 아니다, 그런 게 있습니까? 없죠.

창세기 2장, 3장에 보세요. 모든 인간은 어떻습니까? 로마서 5장에 보세요.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은 똑같은 거예요. 전부다 죄가 왕 노릇해서 모든 사람은 죽음에 이른다. 계시라는 게 간단합니다. 여기서부터 죽음에 이른다 하지 말고 죽음에 이른다하거든 자리를 여기 앉아있지 말고 내가 죽는 자리에서 뒤돌아보면서 계시를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아, 맞구나. 모든 사람이 죽는 게 맞구나. 죽게 되면 그동안 내가 아등바등 살라고 애써놨던 이 땅에서의 모든 내 업적과 성과는 부질없죠. 소용없는 겁니다.

가룟 유다가 열두 제자잖아요. 열두 제자에 뽑혔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계시의 권역 안에서 가룟 유다는 인간이라는 것이 주님의 계시 앞에서 인간은 어떤 본성을 드러내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에 의해 선택된 자가 가룟 유다에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제자이지만 그가 그냥 자살한 것이 아니고 뭔가 나름대로의 갈등과 반항 짓을 했죠. 그냥 혼자서 ‘아이고, 인생 뭐 아무것도 아니네. 믿음 있다 해도 믿음 없구나.’하고 그냥 홀로 산 속에 가서 죽은 게 아니고 어떤 짓을 하고 죽었잖아요. 어떤 짓을 했습니까? 스승을 팔아넘겼죠. 스승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본인이 알았던 겁니다. 통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세계와 나의 세계는 결코 합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느끼면 느낀대로 자기 갈 길로 가면 되잖아요. 예수님의 세계와 자기 세계가 다르다고 전부다 자살해야 됩니까? 그럴 필요가 없죠. 그런데 가룟 유다가 스스로 죽었다 이 말이죠. 그것은 자체적으로 ‘예수님의 세계와 내 세계가 다르다’라고 하는 데서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이 멈춘 게 아니고 예수님의 세계와 내 세계가 다르다고 한다면 따로이 내 세계의 끝은 아무런 희망도 없고 해답도 없고 진리도 없다는 사실에 본인이 스스로 절망한 거예요.

주님 세계와 내 세계가 확실히 다른데 다르면 독자적으로 자기의 의미를 추구하면 되는데 다른 순간 내가 따로이 의미를 추구할 수 있는 어떤 대안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하고 자살해버렸습니다. 그 가룟 유다를 가지고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게 바로 사탄의 마음이다. 악마의 마음이다. 주님과 따로 놀면서도 자체적인 해답은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

그런데 가룟 유다와 일반 불신자의 차이점은 뭐냐? 차이점은 그 사실을 불신자는 모르고 있고 가룟 유다는 주님께서 이리 와. 이리 와. 내 제자 돼. 주님 앞에 강제로 호출되어서 주님의 뜻을 알고 다시 네 자리로 돌아가. 네 자리로 가버려.

주님의 뜻을 알고 가버렸을 때에 아무 낙이 없고 희망 없다고 자살했다는 말은, 그것은 가룟 유다의 개인적인 운명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예수님 밖에 있는 모든 인간의 공통적이고 그들의 보편적인 운명입니다. 그래서 열두 제자 중 하나가 가룟 유다. 그중 하나는 사탄이라고 요한복음 6장에서 그렇게 언급하신 거예요. 주님께서.

그러면 이 대목에서 해석이 필요 없다는 말은 계시 주신 분이 인간을 무덤으로 몰아세웠잖아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이 아니요’라고 했죠. 강의 처음 할 때 ‘나는 ~이 아니요’라고 했죠. 그 말은 이미 죽은 자로 확정된 상태에서 이미 죽은 것으로 결론 나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굳이 해석을 할 이유가 전혀 없죠. 죽었는데 해석 잘해서 혹시 사는 수 없습니까? 이럴 경우에는 해석을 해야 되지만 이미 결론이 났어요. 죽어버렸는데......

그리고 죽어버렸다는 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에 부합되고, 본성에 부합된다는 사실을 죽기 전에 계시에 의해서 ‘나는 죽은 게 맞습니다’라고 알아버렸을 때 인간으로서 알 수 있는 것은 다 알아버린 거예요. 인간으로서는. 해석이 필요치 않아요. 어떤 해석을 하든 그것은 동일한 결론에 도달됩니다. 그래서 너는 아니라 이 말이야, 이런 결론이죠.

어떤 성경구절을 해도 ‘그러니까 너는 아니야.’라는 해석은 나와버려요. 이건 뭐 실습을 할 수 있어요. 제가 잠시 눈 감겠습니다. 아무데나 펼치겠습니다. 아무데나 펼치겠어요. 내가 뭘 펼칠지 모르겠는데...잠시 눈 뜨겠습니다. 시편 119편 나오네요. 눈에 띄는대로 하겠어요. 시편 119편 142절,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 해석은 어떻게 되느냐. 그러니까 넌 죽어야 돼. 아멘. 그것을 듣고 싶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성경의 계시를 주신 분만이 계시의 본뜻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분이에요. 출제자가 해답을 알고 있다 이 말이에요, 출제자가. 주님께서 어떤 율법을 주고 어떤 문제를 출제해도 우리는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그것을 풀어내지 못하고 그 풀어내지 못한 결과가 우리는 죽어 마땅함을 계시를 알았기 때문에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그냥 받아들이면 굳이 연필가지고 문제 풀려고 ‘3번은 5번입니까, 3번입니까? 주여, 뜻을 이야기해주시옵소서. 주님 뜻이 무엇인지 알려주시면 주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그런 부질없는 짓 할 필요 없다 이 말이죠.

성경을 보면서 제일 잘못된 해석이 뭐냐? 그러니까 제가 그 말씀을 지키겠나이다, 이거에요. 지킬 것 같으면 주님이 왜 오셨습니까? 지킬 것 같으면. 내가 갑자기 성질나서 가만히 못 있겠네. 성질나서 가만 못 있겠어요. 글자 써야겠어요. 네 자입니다. 지키지 마! 지키지 마. 지키라고 준 말씀이 아니에요. 못 지킨다고 주신 말씀이에요, 못 지킨다고.

계시의 폭설이 내렸다는 말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최근에 일본 홋카이도에서 눈이 4m왔어요, 4m. 눈은 이렇게 쌓여있고 사진 보면 길이 요만큼 나있고 그 위에 높이가 4m라니까요. 완전 에스키모 이글루보다 더 심한 거예요, 이거는. 완전히 계시에 덮혀 버렸어요. 이 제목이 괜찮겠네. ‘계시의 폭설’. 계시의 폭설을 맞았어요.

계시의 폭설을 맞으니까 계시를 누가 보여달라 했습니까? 우리가 요청한 적 없어요. 그냥 일방적으로 덮친 거예요. 그러니까 계시가 덮쳤다는 말, 이게 놀랍게도 계시의 자체적인 실현입니다. 이게 계시의 자체적인 실현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이 되면 우리보고 가리키면서 ‘너 죽었어.’ 이런 손가락질, 이게 계시의 실현, 완성이에요.

그래서 여기 계시의 폭설 안에 자기 자리, 자기의 무덤이라 했잖아요. 죽은 무덤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가 산 채로 있는 무덤이에요. 세상 사람들은 이 폭설이 안 보이니까 계시가 안 보이니까 우리는 길에 콩나물 사러가고 차타고 자기 딴에 움직이겠죠. 움직이는 것은 마치 거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의 거북이 같은 그런 양상이죠. 거북이가 가는데 뭘 뒤집어쓰고 왔다갔다 그냥 가는 거예요. 서울 대전 부산 찍고 목포까지. 어디를 가도 주님의 계시가 함께 따라가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모든 공간에 대한 점유. 계시가 모든 공간에 대한 점유입니다.

다시 베드로후서 본문을 봅시다. 어떻게 야고보, 베드로, 요한 그 세 사람을 불러서 했던 변화산이라는 그 국소적인 어떤 특정 지역에 있던 계시가 어떻게 보편적 모든 공간을 점유하는 보편적 계시로서 확산되는가? 그걸 우리가 생각해봐야 돼요.

변화산에 계시를 줬단 말이에요. 그럼 이스라엘에 변화산 말고 다른 산들도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럼 변화산에게만 적용되고 다른 산에는 적용이 안 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럼 다른 산에는 적용이 된다고 이야기할 게 아니라 되게 되면 어떤 논리에 의해서 특정 지역에 주어진 계시가 다른 산, 에베레스트라든지 북극, 남극에도 그 변화산 계시가 동일하게 적용되는지, 그 논리적인 근거는 어디 있느냐? 그걸 생각해봐야 돼요. 이건 해석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실제 진행 상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가 이스라엘에 갔을 때는 전통적으로 천주교에서는 다볼산이 변화산이라 해서 다볼산 정상에 두 군데나 예배당을 지어놨어요. 그런데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6일 후에 산에 올라갔다 했으니까 6일 만에 굳이 다볼산까지 내려올 필요가 있느냐 라고 흔히 말하는 성경학자들이 그렇게 말해요.

서쪽에 지중해가 있고 갈릴리 바다 있고 갈릴리 바다의 남쪽에 사해있고 그 사이에 요단강이 흐르는데 그 거리가 100km입니다. 사해바다 북쪽 끝지점에 예루살렘이 있어요. 아셀 지파, 스불론 지파, 납달리 지파, 잇사갈 지파, 므낫세 서쪽 지파, 갈릴리 전체는 므낫세 동쪽 지파, 그 다음에 에브라임 있고 단 있는데 제가 가본 다볼산이 바로 여기(납달리, 스불론, 잇사갈 지파의 경계선)에 있어요. 그런데 가이샤라 빌립보라는 장소가 어디 있느냐 하면... 골란 고원(Golan Heights)이라 하는데 동 므낫세 지파(갈릴리 바다의 동북쪽) 그 위쪽에 헐몬산(Hermon Mountain)이 있어요. 골란 고원 위쪽에 헐몬산이 있는데 2814m에요. 이게 지금 시리아 국경에 있는데 2806m는 이스라엘 쪽이고 2814m쪽은 시리아에 있어요.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지역이 이 헐몬산 기슭에 있단 말이죠. 그래서 여기서 좀 쉬고 올라가서 6일 만에 변화되었다는 거예요. 6일 만에 다볼산까지 오려면 힘들어서 못 온다. 그래서 요새 기독교 개신교 학자들은 헐몬산이 변화산이다, 이런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 성경학자들이라는 말을 할 때 여러분이 생각하기에는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라 뭐 이렇게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성경을 일본말로 오모짱(장난감), 이 사람들은 성경을 장난감 취급하는 사람들이에요. 앞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세요. 성경학자라고 하면 성경을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이에요. 믿음은 물론 없고요. 믿음 있으면 개척교회하지 뭐하려고 이거 해요? 성경가지고 장난치고 있는 사람이에요. 원어, 히브리어, 헬라어가지고 장난치는 사람이에요. 시간은 남아돌지, 교회 오래있다 보니까 별 할 짓은 없지, 그냥 외국에 가가지고 유학 가서 이런 거 하는 거예요. 변화산이 어느 쪽이냐.

변화산은 모든 공간을 점유했습니다. 어느 쪽이냐, 어느 국소 지역을 의미할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요. 이 ‘변화산 계시가 어느 쪽에 왔습니까?’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 안되는 게 계시가 인격화되고 말았어요. 예수님이라는 인격으로 이것이 흡수 통합되어 버려요.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심으로써 온 지구상 온 우주에 다시 재림하십니다. 강림하십니다. 그럼 예수님의 인격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죠. 내가 올 때 어떤 자도 숨을 곳이 없다, 이 말은 모든 공간이 예수님의 권세로 이미 접수가 된 상태에요.

변화산에 나타났던 그 계시가 전 지구상을 다 덮고 있는 거예요. 다 덮고 있단 말이죠. 마치 노아 홍수가 특정 지역의 홍수가 아니고 전 지구적인 홍수인 것처럼. 이 말은 뭐냐. 내가 하나님의 계시에 해당되지 않는 어떤 특별한 중립지역, 특수한 지역을 하나님께서 남겨둔 적이 없습니다.

애굽 나라에 유월절이 있었죠. 자, 유월절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피를 바르지 않으면 너희 맏아들이 죽는다는 계시가 주어졌을 때 그 중에 교도소에 있던 그 죄수의 맏아들은 죽었을까요, 살았을까요? 애굽 나라 교도소에 갇혀있는 어떤 죄수의 나이가 한 50대면 맏아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맏아들이요. 맏아들은 자기 집에 있겠죠. 맏아들이 어린데 범죄할 리는 없고. 아버지는 교도소에 있고 아들은 자기 집에 있을 때 유월절의 어린 양의 피를 바르지 않으면 그 아들이 죽었을까요, 살았을까요?

성경에 보면 죽었다고 되어있어요 (출애굽기 12장 29절,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애굽의 왕의 아들부터해서 심지어 옥에 있는 죄수의 맏아들까지 다 죽어버렸어요.

이것은 계시의 폭설이에요. 그러니까 건드리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려버린 겁니다. 바로 왕은 바로 자신도 남자고 그리고 앞에 있는 늙수그레한 영감 모세도 하나의 인간으로 본 거예요. 그 모세가 계시의 인격화된 존재라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모세가 한 말이 모세에게만 해당되지, 나라는 바로 왕은 손톱만큼도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바로 왕이 그런 이야기를 했죠. 여호와가 누군데 내가 그 하나님을 굳이 알 필요가 뭐 있느냐. (출애굽기 5장 2절,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오늘날 전도하고 뭐 이렇게 해보면 세상 사람들이 하는 한결같은 이야기가 그거에요. 너나 믿으세요. 예수 너나 믿으세요. 내가 굳이 예수까지 믿을 필요 없다. 나 지금 다른 종교 있거든. 부처 있거든. 부처 믿고 있으니까 너나 예수 믿으세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예수라는 분이 특정 부분만 관여하지, 모든 지구를 다스리는 권세 있는 자라는 사실을 그들은 인정 못합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아까 처음에 했던 것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21절 말씀을 다시 보게 되면 예언은 언제든지 ‘~이 아니요’라고 했죠. 여러분들 이야기해보세요, 아시는 거니까.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난 게 아니라 했죠. 사사롭다는 것은 20절에 나와 있고. ‘사람의 뜻이 아니요’라고 했죠. 사람의 뜻이 아니요, 계시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그냥 일방적이다 이 말이죠. 19절에 봅시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샛별, 새벽에 떠오르는 그 금성, 샛별이 떠오를 때 여러분들이 샛별보고 ‘떠오르지 마. 떠오르지 마. 오늘은 나 바쁘니까 너하고 상대해줄 시간이 없어. 내일 떠. 내일 떠.’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인간이? 안되죠. 그냥 일방적으로 떠올라버리죠.

계시가 그런 거라 이 말이죠. 내가 요청해서 내가 필요할 때만 오는 게 아니고 일방적으로 그냥 공격하듯이 덮치듯이 오는 겁니다. 화산 밑에 있는 주민들이 화산의 용암이 터져버리면 그들은 아침 밥하다가 화산재에 그냥 뒤집어 씌이잖아요. 폼페이 유적보세요. 자다가도 화산재에 덮여 그대로 굳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사람의 뜻이 무엇이냐’ 이것부터 한번 정리해봅시다. 사람의 뜻이 아니라 했는데 ‘아니다’를 알아야 되니까. 그건 이렇게 보면 돼요. ‘세상이 나를 심사할 권한을 갖는다’ 세상이라는 것은 그냥 고요히 우리 곁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를 심사해요. ‘너는 이정도 이정도 인간이야’라고 우리 삶의 환경이 나를 조사하고 탐색을 하고 심사를 하고 있어요.

심사할 때 그 심사방법이 뭐냐? 세상이 쏘아대는, 우리를 검사하고 조사하고 평가내리고 측정하고, 너는 금메달, 너는 은메달, 너는 동메달, 너는 스케이트 타다가 노선 벗어나서 예선 탈락, 이렇게 심사를 하는 세상의 무기가 뭐냐 하면 이런 말이에요.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다’

세상 모든 것은 이성적으로, 이성적이라는 말은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합치되는 이 체계를 그들은 진리체계라 하는 겁니다. 진리라는 것을 우리말로 하면 참되다 또는 올바르다. 인간들의 뭉치, 인간들의 그 모임에서 세상을 어떻게 구성하느냐 하면 참되고 올바른 것을 모아서 그것이 나 자신을 명령하도록 하는 체제, 그게 이 세상입니다.

참되고 올바른 것. 그런데 참되고 올바른 게 이게 이성적이라 했죠, 이성적. 여기서 이성적이니까 진리체계라 하면 이성이 동의할 때만 진리가 되겠죠. 그러면 이성이 가만히 있는 게 아니고 이성이 누적되고 축적되죠. 이성이 축적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이 진리체계가 하나로 고정된 게 아니고 점점 더 흔히 말하는 발달을 하게 되는 거예요, 발달을.

고려시대에 있는 사람이 서울서 부산까지 자동차로 4시간 걸린다 하면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뭐 축지법 쓰나? 이렇게 이야기하겠죠. 그쪽 세계에서 4시간 만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축지법입니다. 그 시대에 그런 걸 또 만들어놨어요. 도인이 도법을 사용하게 되면 4시간 만에 갈 수 있어요. 그럼 요새 사람치고 도인 아닌 사람이 없겠네. 4시간 만에 다 가니까. 만약에 오늘날도 그런 이야기하면 이걸 뭐라고 합니까? 미신이죠. 김건희. 무슨 법사. 미신이죠, 미신.

미신은 잘못 믿었다는 거예요. mistake. 뭔가 오류가 일어났다는 거예요. 그 오류를 측정하는 게 이성적이다. 오늘날 이성적이에요, 오늘날. 고려시대 때 이성적인 것 말고. 고려시대 때는 얼마나 이성적이었을까요? 그러나 오늘날 이성적으로 봤을 때 이것은 미신에 해당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진리체계란 변동이 일어나요. 변하니까 이것은 진리가 아니죠. 이걸 뭐라고 하느냐? 이걸 가지고 지식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식.

방금 한 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세상은 나를 심사한다. 무엇으로 심사하는가. 얼마나 지식, 아는 게 많은가를 가지고 심사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성적으로. 그렇다면 교회에서 또는 교계나 교단에서 기독교 내에서 가장 믿음 좋다고 대우받는 사람은 누구게요? 성경가지고 오모짱 취급하는, 할 일 없어서 맨날 헬라어, 히브리어만 공부하는 인간들, 그것가지고 어떤 권위를 가지는 것, 그것가지고 남의 신앙을 심사하는 재미로 사는 사람들. 목사를 해도 그냥 지방 신학교 말고 서울대학 나온 목사, 연고대 나온 목사, 미국 유학 갔다 온 목사, 그 목사가 큰 교회 후임자로 오잖아요. 보다 잘 심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이 바로 사사로이 푸는 것이고 이 모든 것이 ‘아니요’에 해당되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이.

그래서 방금 이야기한 것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계시, 폭설 계시, 변화산의 계시는 그 앞에 뭐가 필요 없느냐 하면 직업이 필요 없다. 베드로의 직업이 뭐에요? 전에는 한때 전직 어부였죠. 지금은 직업이 뭡니까, 변화산 있을 때? 무직이죠, 무직. 의료보험 안 냈어요. 뭐 직업이 있어야 의료보험을 내죠. 직업 없어요. 놈팽이죠, 그냥.

이 세상은요. 지식의 레벨에 준해서 직업을 서열화 시킬 수 있는 세상입니다. 제일 위에 서울 법대부터 해서 쫙. 그건 인문계이고 자연계는 또 서울 의대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쭉 서열화 시킬 수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세상이 나를 심사할 권한이 있다. 세상이야 그렇게 되든 말든 예수님은 예수님 자기 일 하면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문제는 예수님이 이것을 건드렸다는 거예요. 이 속에 속한 누구, 아까 이야기한 가룟 유다를 자기 열두 제자들 가운데 집어넣은 거예요. 집어넣으니까 이 세상은 주님으로부터 이미 주님의 계시에 의해서 처벌받아야 될 대상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렇게 가룟 유다를 집어넣었을 때 가룟 유다가 한 것은 예수님을 팔아먹은 거잖아요. 제발 죽어줘. 이 말이죠. 예수여, 당신 제발 없어져줘. 죽어줘. 이것이 이 세상에서 하나같은 그들의 뜻에 대한 마음을 대변해주는 겁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예수 믿으면서도 제발 부탁인데 예수님 좀 우리 교회에서 나가달라고. 교인들도 습관화되어서 교회 올 때만 주님과 함께 있고 자기 집에 가면 주님이 없어요. 어떤 공간의 점유에 대해서는 자기가 이성적으로 구축한 나만의 공간으로 따로 챙기고 있습니다. 집에 화장실까지 와서 예수님 챙기기에는 자기가 너무 많이 신경이 쓰인다는 거죠. 명절날 시골에 갔을 때는 시아버지, 시어머니 섬기겠지만 서울에 와서 자기 아파트에 있을 때는 시아버지, 시어머니 생각 좀 안하겠습니다, 하고 자기가 스스로 다짐을 하는 거예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게 있어요. 베드로가 이것은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나왔다고 하잖아요. 21절에 사람의 뜻은 일단 아니고(X) 그다음에 O는 뭡니까? 성령을 받은 사람이 풀어준 것이라 되어있죠. 이 말을 할 때 항상 이 말을 누가 하는가를 보세요. 이 말을 누가 합니까? 베드로, 야고보, 요한 자기가 변화산에서 세 사람을 봤죠? 이 사람들도 사도니까 나중에 성령을 받을 게 아니겠어요. 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사람들을 성령 받았다 하지 말고 이 세 사람이 변화산에서 변화된 계시의 원형에 어떤 위치에 놓여있었는가, 그 본래의 자리를 찾아갈 필요가 있어요, 본래의 자리를.

계시는 하나님의 성령 받은 것이다. 끝. 이런 게 아니라 내가 받았던 계시의 산, 아까 변화산 있죠, 지극히 큰 영광 중에 그 산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가 직접 들었다 했죠. 직접 들었다 할 때 그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있었습니까? 그 현장에 또 누가 있었습니까? 예수님하고 네 사람만 있었습니까, 아니면 또 누가 있었어요? 모세, 엘리야죠. 그러면 모세, 엘리야가 이 베드로의 원형이 되는 거예요. 모세, 엘리야가.

예수님, 모세, 엘리야 세 분이잖아요. 그럼 세 분은 이렇게 묶어지는 겁니다. 세 분 다 영광스럽게. 세 분이 영광스럽다면 영광스럽지 않은 쪽은 어느 쪽입니까? 3 대 3으로 붙는 거예요, 3 대 3. 영광스러운 쪽은 세 명이죠. 다른 쪽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명 붙는 거예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계시를 봤지만 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해같이 빛났습니까? 빛났어요, 안 빛났어요? 안 빛났어요.

자, 그러면 여기서 질문은 해같이 빛나지도 않는데 과연 그들이 예수님의 계시를 전달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변화되지 않았잖아요.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만나기 전에 해같이 빛났느냐를 물어보는 거예요.

모세와 엘리야가 해같이 빛났습니까? 누더기 걸치고 돌아다녔어요. 무슨 해같이 빛나요. 모세와 엘리야가 앞에 지나가면 아이고 눈부셔. 눈부셔서 못 보겠어. 이건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 때뿐이지 내려와가지고 함께 있을 때는요, 벌써 마찬가지 똑같이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신기한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 실제로 모세와 엘리야가 우리가 보기에는 우리와 동일한 육적인 사람이다 이 말이죠. 육적인 사람인데 육적인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의 계시를 전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느냐 이 문제를 생각해봐야 됩니다, 육적인 사람이. 그게 풀어져야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해같이 빛나지도 않는데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된다, 가 정립이 되거든요. 상당히 난해한 문제죠.

지금 보았다는 게 제 말이 아니고 성경에 나오는 겁니다. 우리가 그 음성을 들었다. 18절에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실제로 듣기만 한 게 아니고 보기도 했어요. 그래서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다고 했단 말이죠. 보고 들었다는 이 자체가 과연 계시 전달자로서의 자격이 되냐 이 말입니다. 자격이 되지 않습니다, 보고 들은 걸로는. 다른 게 있어줘야 돼요. 다른 요소가 있어야 돼요.

그것은 모세와 엘리야가 그 때 그 시대에 당한 현실을 우리가 파악해줘야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잠시 미루고요. 모세와 엘리야가 그 시대 때에 그들은 어떤 초월적 계시를 받았느냐 또는 계시에 의해서 움직여나갔는가. 그걸 생각을 해봐야 돼요.

다음 시간에 본격적으로 하겠지만 미리 조금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그 계시는 어디서 왔느냐 하면 위에서 받았고요. 모세도 마찬가지죠, 시내산에서. 계시를 받았고 위에서 내려온 방향은 어디를 향했습니까? 땅으로 향했죠. 그러니까 계시의 출처가 위니까 이것은 영광스러운 거예요. 영광스러운 계시가 땅에 내려왔다는 말은 계시의 처음 출발점이 영광스럽기 때문에 이것은 영광스러운 곳으로 돌아갈 그런 계시가 되는 겁니다. 영광스러운 곳으로 돌아갈 계시가 돼요. 그러면 모세, 엘리야가 이 땅에서 초라하게 산다는 것은 한시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이 되는 거예요. 한시적이고 일시적인 현상.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전에 고기 잡던 사람이에요. 처음부터 위에서 내려온 게 없었습니다. 그러면 여기 무슨 조치가 있어야 돼요. 위에서 내려온 게 없고 그냥 주님의 영광을 봤죠. 봤는데 제가 초막 셋을 지어서 여기에 본인이 합류하려고 애를 쓴 거예요. 그러나 합류하려는 자체를 주님으로부터 거부당합니다. 너는 지금 합류하면 안 돼. 모세, 엘리야, 예수님의 영광에 지금 합류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다른 곳을 경유해야 너도 예수님처럼 모세처럼 엘리야처럼 영광스럽게 되는 겁니다. 그 다른 게 뭐냐? 그것은 10분 후에 쉬고 하겠습니다.

 

서울의존강의20220217b 베드로후서1장 21절(계시의 폭설)-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이 둘의 차이점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자연 계시와 자연이 인격화되는 계시, 둘 중 어느 쪽이 맞습니까? 자연 계시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낸다. 이게 자연 계시라 하거든요. 이 신학 나온 게 2천 년도 넘었어요. 초대교회부터 지금 신학교 다 이렇게 가르쳐요, 자연 계시. 그러나 성경에는 자연 계시란 없고요. 자연이 인격화되는 계시에요.

자연 계시가 되어버리면 이것은 인간도 자연이다. 따라서 인간 속에 하나님의 계시 들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이기 때문에 낙태하면 안 된다. 이게 천주교 이론 아닙니까? 천주교 이론이 자연 계시를 강조하는 거예요, 사람 끌어 모으려면. 뭐든지 다 끌어 모으려 하면서 불교에도 진리가 있다고 하는 거예요. 진리는 산 정상에 있다면 올라가는 길은 다양하기 때문에 올라가는 길이 다르다 해서 절대적 신, 절대적 진리, 진선미, 절대적 진리와 선과 미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는 그걸 형제라고 받아줘야 되지 기독교가 아니라도 불교 쪽으로 최고 선을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줘야 된다. 이것을 바티칸에서 주장하는 겁니다, 바티칸에서.

그러면 개신교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개신교에서는 자연 계시와 특별 계시가 있다는 거예요, 특별 계시. 특별 계시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오시고 복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고 자연 계시라 하는 것은 복음이 오기 전에, 강감찬, 이순신, 을지문덕 시대에 선덕 여왕 때 있잖아요, 선덕 여왕. 그 때 그 사람들은 양심대로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자연 계시니까.

그래서 신학자라 하는 자체가 그 사람들은 성경 가지고 자기의 사사로운 뜻에 의해서 해석을 하는데 왜 해석하는가? 다른 게 재미가 없으니까. 그게 재밌으니까. 일은 즐기면서 하라는 거 있잖아요. 즐기면서 박사 학위 받아서 자기 직업 삼는 거예요, 그게. 신학 교수해가지고.

아까 이야기했는데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이 세상은 이성의 세계. 이성의 세계에서 사람들이 진리라고 하는 것을 깨보면 진리 안에 뭐가 들어 있어요? 지식. 그런데 지식은 늘 변동이 일어난다는 사실이에요. 동네마다 지식 다 다르고 교단마다 다 다르고 변동이 일어나는 거예요.

자연이 인격화된다는 이 말은 모든 자연은 어디 속한다는 말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연은 전부다 연결되어 있어요. 마치 스파이더맨 몸에서 거미줄 나오듯이 그리스도께서 쭉쭉쭉쭉 이거 쏴가지고 이 자연 세계가 있는 겁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모든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온 거예요.

그러면 이 자연이 어떻게 인격화되는가, 이걸 규명해야지요. 주께서 주신 모든 계시는 자연이 인격화된 것이고 모든 자연은 예수님께 속했다는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신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말씀, 지금도 피조물들은 함께 고통하며 누구를 기다려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했잖아요. 썩어짐의 종노릇하면서 참아내면서. 어서 주께서 오셔서 자기들이 잘 되게 해달라고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주님이 영광스럽게 나타나기를.

(로마서 8장 19-22절,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인격이 없는, 예수님 없는 자연은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선악과도 그렇고 생명나무도 그렇고 예수님과 관련 없는 그러한 피조세계는 아무것도 없어요, 심지어 악마까지. 예수님의 공정하심과 엄위하심과 진노하심을 위해서 악마는 만들어져야했던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악마는 극히 무능해요. 악마가 너무너무 무능해요.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성도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패잔병이 아니고 승리했다는 것을 만끽하게 만들어요. 패잔병이 아니고 허무에 찌들어가지고 세상은 더럽다, 하면서 혼자 울부짖으며 한탄하는 게 아니고 다 승리한 거예요. 승리의 보너스의 혜택을 입은 자들로 성도라는 결과물이 생긴 겁니다. 에베소서 4장 8절.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승리자의 그 승리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성령을 선물로 받은 거예요. 이거 받아서 천당 가라고 하는 게 아니고 자연이 전부다 예수님에게 복속되듯이 나에게 포함된 나에서 탈피해서 나마저도 그리스도께 복속되었음을 찬양하고 그것을 감사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이 온 거예요. 그게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첫째시간부터 지금까지 이야기하면서 무슨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는지를 여러분들이 아셔야 돼요. 시간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어요. 계시는 멈춰진 시간을 유발합니다. 계시는 시간이 멈춰있어요. 이게 계시에요.

계시는요, ‘앞으로 잘할게요. 지금까지는 말씀을 위반했지만 앞으로는 잘~해서 말씀대로 지킬게요.’ 이런 게 없어요. 폭설아 폭설아 조금만 더 내리면 내가 착하게 살게, 이런 게 없어요. 그냥 폭설에 폭 파묻혀가지고 우리는 무덤 안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죽음 안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시간이 멈춰있는 거예요, 죽음 안에서는. 전/후가 성립이 안돼요, 전후(前後). 전후가 성립 안 되면 내가 뭘 하면 뭐 되고 하는 이 원인과 결과의 고리가 없습니다. 기도하면 응답받는다, 이런 게 없다고요. 기도하면 응답받는 것 없습니다. 이것은 구약적 의식이에요. 구약적 배경입니다. 무대 세팅이 구약이에요.

아까 낮에 안양 강의에서 한 것을 잠깐 하게 되면 구약적 배경의 특징이 뭐냐 하면 특정 지역이 있었다는 겁니다. 가나안 땅이라는 특정 지역. 열 족속이 살았던 그 지역을 중심으로 그것을 무대화해서 거기서 어떤 연극이 벌어지는 거예요. 지리적인 특정 지역이에요. 그때 한반도 관계없었어요. 알래스카 아무 관계없습니다. 특정 지역 중심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모든 계시가. 그리고 특정 종족,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식들 중심으로 이스라엘이 구성되었다는 거예요, 그들 중심으로. 특정 인종 중심이에요.

이것이 구약적 무대입니다. 구약이니까 구약, 두 자를 세 자로 하면 뭐가 됩니까? 옛 언약. 옛 언약적 무대에요. 옛날 방식. 옛날 방식의 계시였습니다. 그런데 옛날 방식이 지나갔다는 말은 옛날 방식의 특징은 시간이 흘렀어요. 왜냐하면 계시가 완성이 안 되었으니까. 시간이 언약을 운반하고 있었던 겁니다.

여기서 어려운 개념 하나 합시다. 인간이 움직입니까, 시간이 움직입니까, 하는 그 문제거든요. 시간이 흐르는가, 아니면 인간이 변화하는가? 어느 쪽이에요? 어느 쪽이 맞는 말인가요? 시간이 흐르는 게 아니고 인간이 변합니다. 시간이라 하는 것은 변화를 측정하는 것을 시간이라 해요. 변화가 없으면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종족이 주어진 언약이 들어와서 이게 변해요. 그들은 약속의 땅 있잖아요, 가나안 땅. 그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지나서 어디로 갑니까? 약속의 땅에 가거든요. 이 약속의 땅이 구약적 배경 무대죠. 약속의 땅이 천국입니까, 아닙니까?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그들은 돌아갈 본향이 따로 있죠. 지상에 있는 것은 천국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그리고 모세, 엘리야는 구약적 무대 안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보여준 거예요. 미래를 지향하면서. 그 미래가 뭐냐 하면 지금 언약 말고 새 언약 또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마지막 언약이 완성되는 그 때를 향하여 그들은 미래에 도달하는 계시를 이야기했어요.

구약에서는 그걸 예언이라 해요, 예언. 스가랴, 말라기라든지 학개 등 구약에 여러 가지 예언서가 있잖아요. 예언서를 볼 때 이렇게 보시면 돼요. 심지어 예수님도 구약적 배경에서 그런 이야기했는데...... 산들이 이렇게 있습니다, 겹겹이. 그만 그릴까요? 그만 그립시다. 예언자가 A이야기했다가 C이야기했다가 E,F 이야기했다가 B이야기했다가. 멀리 있는 이야기인데 일관성 있게 차근차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A→C→E→F→B,... 이런 식으로 그냥 이야기해요.

우리는 이야기하니까 겹쳐져 보이지만, 앞의 일 일어나고 뒤의 일 일어나지만 실제로 가보면 앞의 일과 뒤의 일 사이가 한참 멀다 이 말이죠. 시간적으로는 거리가 있는 거예요, 시간적으로 거리가. 시간적으로 거리가 있으니까 A일어나고 B일어나고 D이고 일어날 때, 하나님의 예언이 있을 때 예언이 일어나는 것을 가지고 사건이라 합니다. 사건이 터지는 거예요.

그 사건들을 집합해서 어떤 선지자가 이야기하려고 하면 A이야기하고 C플러스, 그다음에 F이야기했다가 B이야기했다가 이렇게 조합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왜 차근차근하게 이야기 안 하는가? 구약조차도 사건위주이기 때문에 시간 따라 소설 쓰듯이 그렇게 쓰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심지어 이 방식을 예수님께서 사용해요. 마태복음 24장, 25장 마지막 때에 대해서 제자들이 묻죠. 마지막 때에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 할 때에 그 징조 이야기하면서, F이야기하면서 G이야기하고 뭐 C이야기하고... 주께서 이렇게 이렇게 사건을 이야기해요. 사건을 이야기한다는 말은 시간은 사건을 그냥 전달하는 것뿐이지 우리가 시간을 기다려서 그때쯤 되서 기름 준비해가지고 구원받게 하는 그런 꼼수는 쓸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 꼼수는 쓸 수가 없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준비하고 대비하게 되면 구원받는 게 아니고 계시는 인간들을 구원하는 목적이 아니고 인간을 가지고 주께서 예언한 사건을 유발하기 위해서 자기 백성들을 활용하고 사용하시는 거예요. 인간 구원 이야기가 아니고 주께서 어떤 사건을 이 땅에 뿌려놓는가. 뿌려놓는 사건 자체 하나하나가 그것은 시간이 정지되었을 때 가능해요.

이렇게 정리합시다. 무대가 아무리 무대 자체적으로 (그 안에서) 시간이 흐르더라도 그 무대는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종로 5가 대학로에 연극하는 데 있죠. 연극하게 되면 연극 안에서는 시간이 흐르지만 바깥에서 보면 연극관이 막 움직입니까? 종로 5가에 있다가 저기 동대문 그쪽으로 이동해요? 아니죠. 쉽게 말해서 영화에 보면 어떤 시간적 흐름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영화관에 안 들어가고 바깥에서 보면 CGV 영화관이 막 옮겨 다닙니까? 아니죠. 그냥 그 고정된 안에서 스토리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 예언은 시간이 흐르지를 않아요. 다만 인간들이 시간을 흐른다고 쳤을 때 너희는 어떤 오류를 남기고 어떤 잘못된 생각을 남기는가를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사건은 인간을 지적하기 위함이에요. 사건은 인간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보니 하나도 이해 안 되는 표정들을 하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내가 그냥 넘어갈 수 없죠. 어떤 드라마에 아빠가 아이를 혼자 키우면서 “네가 나중에 커서 축구하고 싶다고 했지? 축구하려면 오늘 밤 잠을 잘 자야 나중에 커서 축구 잘 할 수 있는 거야.” 하고 애를 달랩니다. 남자가 애 하나 키우면서. 그럴 때 아기가 이런 말을 해요. “아빠, 그런데 잠이 안 와요.”

한번 적어볼게요. ‘잠을 잘 자야 훌륭한 축구 선수가 된다.’ 아빠가 이야기했습니다. 아이를 강제로 잠 재우기 위해서. 아이가 하는 말이 ‘아빠, 그런데 잠이 안 와요.’ 자, 뭐가 문제입니까? 아빠는 잠을 재우려하고 아이는 잠이 안 온다 할 때 뭐가 문제냐 하면 아이에게서 잠은 일이 되어버린 거예요, 일이. 잠이 자기가 해야 될 일이 되어버린 거예요.

계시 앞에서는 인간의 일을 안 받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자연을 인격화시키는 데에는 주님의 계시가 자체적으로 해나가기 때문에 인간의 일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뭐든지 내 일로서 이해하면서 일을 하게 되어있어요. 그게 왜냐하면 시간이 멈추지 않을 경우에는 내가 어떤 일을 하게 되면 어떤 결과를 낳느냐, 원인과 결과를 따내고 싶은 거예요.

‘기도 어떻게 하면 응답 받습니까?’ 그게 대표적인 거예요. 그 말은 뭔 뜻입니까? ‘목사님, 기도 이렇게 하면 응답을 어떻게 받습니까?’ 이 말은 ‘만약에 내가 이 기도를 안 하게 되면 내가 원하는 결과물은 일체 나한테 생기는 일이 없겠죠. 그렇죠?’ 라고 묻는 것과 동일한 일이에요. 그러면 당신이 지난밤에 변비된 것은 당신이 변비 되라고 기도해서 변비 되었어요?

최민정 선수가 금메달 따려고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문제는 그 사람들이 어디에 스스로 속느냐 하면 금메달을 땄기 때문에 속은 거예요. 내 기도 응답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가 기도 안 했으면 중간에 미끄러져서 노선 탈락해서 금메달 못 땄습니까? 그런 거예요, 정말? 그런 겁니까?

인간이 왜 그렇게 스스로 자기를 조작하고 자기를 꾸미느냐 하면 시간 속에 보다 나은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계시가 있는 게 아니고 자기가 계시를 만들어 가. 자기가 계시를 만들어요. 이 어찌 악하지 아니합니까, 이게!

교회에서 하는 일들이 뭐에요? 9시, 11시 예배드리고 성가대하고 주일학교하고 이 모든 일을 뭐로 봅니까? 이게 일이고 이 일은 어떤 결과를 예상하는 거예요. 그럼 이게 뭡니까? 내가 거기에 관여해야 일의 결과가 나오겠죠. 이것은 계시가 아니라 사사로운 인간의 뜻이에요. 이것은 계시가 아닌 거예요.

기도한다는 말은 초조하다는 말이에요. 초조하니까 기도하죠. 절박한 사람이 기도하는 거 아니에요? 막 심심해서 놀고 있는데 기도합니까? 절박이 기도를 만드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왜 절박하죠? 지금 결핍된 것이 완전히 보상받는 미래상을 본래 내 모습이라 여기고 그것을 내가 억지 부리면서 내 모습, 내 자아에 부합하는 나를 내가 소유하고 획득하고 싶은 거예요. 그럼 획득해서 뭐하는데? 그거 획득해서 뭐 할 건데요? 훌륭한 축구선수 되려고 합니까? 뭐하려고 그걸 획득해요?

애가 잠이 안 오면 그것은 주께서 잠이 안 오게 하신 거예요. 왜? 왜 안 오게 하셨습니까? 잠 안 오는 애를 주님을 인격화시키는 자연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께서 잠을 못 자게 했어요. 그래서 725일 동안 잠 못 자서 애 죽게 만들었어요. 그래도 그게 주의 일이에요.

인간의 일은 없습니다. 모든 게 계시로 일어난 주의 일이에요. 인간의 일은 없습니다. 제발 남한테 미안하다, 죄송하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했죠. 이게 자기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남한테 사과한다는 것은 뭔가 노리는 게 있어요. 내가 잘못한 것은 나쁘지만 사과할 정도로 인간성 하나는 괜찮잖아. 그걸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으려 하는 거예요.

술 먹고 아내 때려놓고 다음에 반지 사주고. 다이아반지 사주고. 도대체 변태 아니에요? 이거 뭡니까? 미안하다 그 말이거든요. 물론 다이아 사주면 좀 맞아도 괜찮아요. 다이아가 아니고 딴 거, 머플러 하지도 않는데 열댓 개 있어서 쓰지도 않는 머플러 사주고 대충 때우려고 하죠. 한 대 맞고 5천만 원짜리면 그건 맞을만하죠. 일부러 약 올려서 때리기를 유도하겠다.

계시의 자연의 인격화는 이거 하나에요. 유혈사태입니다, 유혈사태. 십자가 피에요. 유혈사태가 터진 거예요. 사람이 하나님을 죽인 겁니다. 그게 계시의 완성이에요. 잘 죽였다, 날. 날 잘 죽였다. 그래서 계시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버린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을 살해한 거예요. 이 세상의 어떤 종교에도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게 없어져야 또다시 인간의 머릿속에 기대라든지 희망이라는 것이 생길 근거가 날라가버리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들이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이유는 내 희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에요. 그런데 아까 했죠? 이 세상 현실은 뭐로 만든다 했습니까? 인간의 이성으로 만든 거예요, 인간의 이성. 인간의 이성이 추구하는 것은 올바르고 선하고, 선악과죠, 아름답고. 선악과 어때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아름답죠. 선악과의 테두리를 못 벗어나요. 그리고 금지한 것을 따먹어버리면 금지 자체를 넘어섰기 때문에 자기가 더 이상 금지할 것이 없이 되는 것, 그게 인간에게는 진리에요.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신이 된다. 그게 최종점입니다.

인간에게 진리란 자기와 관련되어 있어요. 자기의 자유성과 관련되어 있어요. 내가 하는 것에 누구도 토 달지 말라. 이것이 인간이 생각하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공부한다고 지식 있다고 진리가 아니에요. 심지어 두 살 먹은 아이도 진리를 가지고 있어요. 엄마, 나 젖 먹을 땐 가만히 있어. 두 살 먹은 아이도 자기가 엄마한테 이야기하는데 TV 크게 틀어놨잖아요. TV 끄라고 합니다. 내가 엄마한테 이야기하는데 어디 건방지게 TV소리가 왜 방해하느냐.

진리는 나와 관련되어 있어요. 내가 우뚝 솟구쳐 오를 때 그게 진리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자기밖에 모르는 남자와 자기밖에 모르는 여자가 만난 것을 결혼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게 결혼이에요. 결혼은 왜 인간 영역에서는 혼인이 성립되지 않는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혼인하는 거예요.

그러니 결혼들을 하셔야 돼요. 하셔서 결혼에 대한 꿈이 와장창 구겨져야 돼요. 구겨져버려야 돼요. 사람한테 기대한 내 자체가 나쁜 놈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돼요. 왜 내가 남에게 기대해야 돼요? 내가 뭔데 남이 나를 도와줘야 됩니까? 성립되지 않죠.

이 모든 의미는 어디서 나오는가. 유혈사태. 유혈사태에서 나왔어요. 유혈사태를 세 자로 줄이면 이겁니다. 망했다. 이걸 두 자로 줄이면 이게 종말이에요, 종말. 다섯 자로 하면 종말의 현상 또는 종말의 징후, 징조. 자, 내가 해와 달과 별을 전부다 불로 태워도 너희 할 말 없지? 그게 가능한 시대, 그 시대가 종말의 시대입니다. 망한 자에게 망한 자 대우를 해준 것에 대해서 네가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 내가 아예 망해버릴 테니까. 그것이 유혈사태에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유혈사태가 벌어진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이 땅에서 죽어 마땅함을 보여주기 위해 힘주어서 사람들은 이미 이쪽으로 움직여온 거예요. 그들은 자기 자신을 몰랐지만 예수님이 딱 등장하니까 자기의 희망과 기대를 예수님이 앞에서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그걸 공격해서 하나님을 죽여버리는 그것이 우리 본래의 성향이었다는 것을 노출시킵니다. 악마적 성향이죠, 악마.

그러니까 악마는 언제 나타나는가? 십자가가 나타날 때 악마가 등장해요. 예수님은 훌륭하시다, 할 때는 악마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안 그래도 본인도 훌륭한데 예수님이 훌륭하다고 하니까 그 예수님을 믿어드리는 거예요. 예수님은 얼마나 훌륭하냐? 예. 죄인을 위해서 자기 몸을 버리기까지 훌륭합니다. 그렇다면 그분을 내가 존경하지 않을 수 없지.

그렇게 존경하고 예수님이 이렇게 훌륭하다고 떠받들었던 그 자들이 누구입니까? 가룟 유다를 포함한 예수님 밴드 아닙니까?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죠. 그들이 뭘 봤다고요? 변화산에서 뭘 봤습니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바로 예수님의 영광스러움을 본 거예요. 그걸 봤어요.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움을 봤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느냐 이 질문을 첫째 시간 마지막에 던진 거예요. 첫째 시간 마지막에 던진 질문이 그거에요.

그들이 예수님의 영광스러움을 봤을 때 그들이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 없다? 없습니다. 없어요. 왜? 유혈사태를 겪어야 돼요.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것은...... 21절을 다시 봅시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라고 했죠. 아니요. 왜 하나님의 그 숭고한 일에 우리 뜻이 개입되는 것이 왜 ‘아니요’에 해당되는지 살펴봐야 됩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그리고 엘리야와 모세도 마찬가지고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 일이 있었어요. 아이가 잠을 자야 된다는 것을 자기 일로 생각했듯이 인간은 자기 일이 있어요. 그런데 자기 일의 끝 모습이 결국 하나님 앞에 나타났을 때 자기 일은 무슨 사태를 유발시킵니까? 유혈사태를 일으키고 결국 결과가 뭐냐. 우리는 이젠 조졌다 이 말이죠. 이젠 망했다.

내 일의 성향과 성격을 십자가에 부딪쳐봐야 박치기를 해봐야 이게 내가 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성향을 지니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우리가 발견할 수가 있어요. 그렇게 되면 왜 ‘아니요’가 정당한가 나타나죠. 왜 우리 뜻으로 해석하거나 우리 뜻으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왜 ‘아니요’인지 알 수 있는 거예요.

선교, 전도 이건 사람의 일이 아니에요. 이것은 누구의 일이어야 됩니까? 사람의 일이었다가 주님의 일로 바뀌어져야 돼요. 주님의 일로 바뀌어버리면 내가 전도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통해서 누가 전도합니까? 주님이 나를 통해서 전도할 때 전도가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거예요.

아나니아, 삽비라가 사도행전 5장에 보면 헌금을 했죠. 자, 아나니아, 삽비라가 부부인데 헌금을 했습니다. 만약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아예 처음부터 헌금을 안 했으면 죽을 일이 있습니까? 좀 더 살았겠어요, 안 그러면 죽었어야 되겠어요? 헌금을 안했으면 죽을 일이 없잖아요. 그렇죠? 아나니아, 삽비라가 한날에 죽는 이유가 헌금을 안 한 것이 아니고 헌금을 했기 때문에 그래요. 헌금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했을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어떻게 했느냐 하면 이 돈은 내 돈이니까 반을 내든지 전부를 내든지 결정, 선택은 나한테 달려 있다는 거예요. 그건 나의 일이거든요. 이게 나의 일이잖아요. 헌금하는 게 나의 일이 되어버린단 말이죠.

지금 두 시간쯤 계속 하는 게 어떻게 나의 일이 주의 일이 되느냐, 지금 그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엘리야와 모세는 그게 되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그게 되느냐 하는 그 문제를 제가 제시한 거예요. 어떻게 나의 일이 주의 일이 됩니까?

그것은 아까 해답 이야기했어요. 나의 일로 꾸준히 밀고 나가요. 밀고 나가면 여기 유혈사태, 피 흘리는 사태가 벌어져요. 그러면 그 결과가 나의 일은 나로 하여금 무엇을 확인시키느냐 하면 나는 일찌감치 망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나의 일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나’가 자연에 속한다면 나를 포함해서 자연이라 하는 것은 썩어질 수밖에 없고 그 썩어짐의 바탕은 주님으로 하여금 죽게 만든 십자가 사건에 근거해서 이 모든 일은 결국 주의 일로 넘어오는 겁니다. 더 이상 너는 여기서 손 떼. 너는 개입하지 마.

성도한테는 성령이 어떤 일을 하느냐 하면 이 나의 일을 계속해서 방해하는 일을 성령이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온 말씀인데 이야기하면 그리스도의 바탕이 있어요. 이것은 보혈의 피로 만든 은혜의 바탕입니다. 은혜의 바탕에 계속해서 나의 일이 여기 찌꺼기처럼 자꾸 쌓이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은혜가 은혜답게, 피 흘림이 피 흘림의 가치를 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뭐 엉뚱한 이런 게 왜 앉아있어? 하고 이걸 치워버리죠. 이걸 치워버린다 이 말입니다.

차민규 이번에 은메달 딴 사람이 시상대 올라갔을 때 그냥 올라가지 않고 시상대를 손으로 쓸면서 치웠죠. 그거 왜 치웠느냐고 하니까 너무나 경건스러워서 내가 정리정돈 한다고 치웠다. 그런데 중국 사람은 그것이 바로 중국의 편파를 공격한 것이다, 메달을 박탈해야 된다, 이렇게 또 시비 걸잖아요. 왜 쓸데없이 그런 짓 하는지. 그냥 올라서면 되고 그게 뭐 중요하다고 인간들이 그런 짓을 해요. 그냥 곱게 올라서면 되지. 무슨 모션을 취합니까.

이게 내가 했다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힘들게 훈련해서 메달 땄다. 이게 나의 일이 돼요. 나의 일이 이렇게 있으면 주님께서 이걸 치워버리는 겁니다. 치워버리는 거예요. 금메달 따서 한 달에 이제 백만 원 받겠다고 했는데 체육회에서 예산 없어서 한 푼도 못 준다, 뭐 이렇게 되면 그게 바로 성령의 일이에요. 너는 돈 백만 원 없어도 십자가 피로 구원받았으면 됐잖아. 지금 그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지금.

왜 망할 자가 망한다는 그걸 자꾸 가리워. 그걸 들추어내야 범사에 감사하고 모든 것에 항상 기뻐하고 주님이 하는 모든 일에 반응을 나타내는, 그걸 쉬지 말고 기도한다 하는데, 늘 기도로써 교류가 된다 이 말입니다. 주의 일을 감추니까 성령이 와서 치워버리고 또 감추니까 치워버리는 거예요, 계속해서.

그게 요한복음 21장 같은 건데 베드로가 “제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니까 주님이 하신 말씀이 “베드로야, 이제 내가 너를 강제로 성령을 보내서 허리끈 같이 띠 띠우고 네가 원치 않는 길로 내가 끌고 갈 것이다.” 원치 않는 길로 끌고 가신다 했어요. 그러면 베드로가 또는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자기 뜻입니까, 주의 은혜입니까?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은혜인 거예요.

‘이리 와. 오늘은 63빌딩 뷔페다. 먹어. 이리 와. 이리 와. 주식 대박 나.’ ‘주여, 이런 시련을 어떻게 주십니까?’ ‘할 수 없어. 네 뜻대로 안 될 줄 알아. 이번에는 100평짜리 아파트에 살아.’ ‘주여, 저에게 이런 고생을...’ ‘마, 내 은혜에 네가 다른 걸 하지 말라고 하는 뜻이야. 알겠어? 100평짜리 좀 좁더라도 참아. 견뎌.’

그러니까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안되게 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구한테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는 말은 뭘 의식하느냐 하면 자꾸 시간을 의식하고 내가 사과함으로써 지금보다 보다 나은 나의 일이 되기를, 괜찮은 인간이 되기를 본인이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근원적으로 유혈사태를 망각하고 그걸 무시하고 내가 망해도 마땅하다는 것을 완전히 무시하는 거예요.

로마서 7장 24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자기 몸을 무슨 몸이라고 봅니까? 사망의 몸이죠. 사망의 몸이잖아요. 사망의 몸인데 그 몸이 된 이유가 자기 속의 죄가 나의 선하려는 의지보다 우세해서 오히려 이기고 있는 거예요.

이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해봅시다. 앞으로 더 나아질 가능성이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20년이 흘러도 소용이 없어요. 죽기 10초 남았든 죽기 전 10년이 남았든 소용없어요. 시간을 따지지 말고 지금 주님이 나로 하여금 왜 죄인으로 들추어냈느냐. 이게 나의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인 것을, 주님의 폭설인 것을 깨달아주시기 바랍니다.

나로 하여금 나의 일이 주의 일로 넘어서려면 나와 주님과의 만남에서 주님은 피를 흘렸고 그로 인하여 나는 죄인 중에 괴수가 된다는 이 유혈사태가 반드시 바탕으로 딱 들어줘야 나의 일에서 주의 일로 넘어왔다고 볼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25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러니까 이 감사가 역시 시간적 요소가 없고요. 이 감사가 되려면 24절과 25절을 항상 반복하고 되풀이시키는 거예요, 성령께서. 25절 되고 그다음에 또 24절 되어야 돼요.

만약 25절이 되었다가 다시 24절로 여러분들이 안 오신다면 매직이나 가위, 칼로 이 24절을 오려버리세요. 24절은 이제 나하고 바이바이. 나하고 상관없다. 이렇게 하면 맞아요. 그러면 성경이 누더기 다 돼요. 이거 내가 지키고 빼고 지키고 빼고. 십자가 빼버리세요. 부활의 새 생명인데 십자가 왜 있어요? 십자가 잘라 내버려야 돼요.

성령께서 이걸 계속해서 반복시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는 한 나의 일에서 주의 일로 바뀌면서 그것이 주님의 계시의 고유의 방식이 되기 때문에,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계시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곤고한 사람으로서 돌아서면 늘 그걸로 가 있어줘야 돼요. 우리는 고정점이 아니고 주님이 고정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이제 엘리야, 모세를 한번 봅시다. 이렇게 보시고 엘리야, 모세 이야기하면 엘리야, 모세가 바로 방금 이야기한 로마서 7장, 이것을 반복한 사람들이에요. 그걸 그들이 반복했고 열두 제자의 가는 길도 그 반복이고 반복이에요. 모세, 엘리야의 반복을 그대로 따른 거예요.

누가복음 잠깐 보겠어요. 누가복음 9장 31절에 마태복음에는 없지만 누가복음에는 나오는 게 있어요. 모세, 엘리야,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그냥 마네킹처럼 변화, 변화 말하면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고 어떤 대화를 했어요, 대화. 그 대화 테마의 핵심이 나와요. 무슨 이야기했습니까, 31절에 보면? 무슨 이야기했죠? 예수님의 별세 이야기했죠. 유혈사태에 대해서 이야기한 거예요.

그런데 시간적으로는 예수님이 죽었어요, 안 죽었어요? 아직 안 죽었죠. 안 죽었을 때죠. 그러나 예수님 빼놓고 모세, 엘리야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세대에서 보면 이 사람들이 고인입니까, 지금 살아있는 사람이에요? 고인이죠. 그러니까 죽은 자의 그룹, 죽은 자의 사회의 특징은 뭐냐. 시간은 더 이상 흐르지 않는 사회. 그 사회에서 비로소 십자가의 취지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겁니다.

십자가가 언약의 완성이거든요. 언약이 완성되면 죽은 자의 사회를 완전하게 구성하게 되고 여기서는 시집도 장가도 아니 가고 천사와 같이 되거든요. 이 죽은 자의 사회 안에서 이것을 산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언급하면서 나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살아있고 이삭이 살아있고 야곱이 살아있다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보면 이 사람들은 이미 고인이죠. 죽은 사람이죠.

제가 지난 낮 설교엔가 그런 이야기했죠. 성령께서 하는 일은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에 십자가를 가지고 연결시킨다고 했습니다. 전부다 하나로 통합하는 거예요. 그러나 사람들은 죽은 뒤에는 모르겠고 살아있는 한 내 원대로 살아보겠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를 통해서 이 세상과 저 세상이 결합되어 있다. 한 통으로 되어 있는 거예요.

고인의 입장에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들이 진정 살아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어떤 분이 쓴 글 댓글에 이런 글을 달았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은 상당히 피곤해하는데 본격적인 삶은 아직 시작도 안했다. 아이고, 허리야. 허리야, 하면 아직 시작도 안했어. 엄살 부리지 마. 너 지옥을 한번 가봐. 본격적인 삶은 지옥이냐, 천국이냐 그게 본격적이지 이건 아직 게임하지도 않았어요. 축구 하지도 않았어요, 지금. 지금 애들 손잡고 축구장 가는 그뿐이에요, 지금. 어디서 엄살 부리고 있어. 이 땅은 그냥 서론이에요, 이 땅은.

놀라운 사실은 시작도 안했는데 성령께서 미리 나의 죽음을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서 내가 사는 이 세월은 시간이 의미가 없는 세월을 내가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해요. 왜냐하면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고 내 죄를 누가 가져가느냐가 그것이 고정적으로 확정된 사실이기 때문이에요.

앞으로 내가 10년 후에 너무 잘 될 건데 그게 너무 기쁘니까 내가 고생하면서도 참고 그때의 희망을 보고 살아야지. 이것은 자기가 자기 기쁨으로 도취되어 있는 거예요.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계시의 폭설이죠. 오늘 제목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죽은 자의 사회’에다가 ‘계시의 폭설’에다가 여러 가지 나왔습니다만.

엘리야, 모세가 지상에 왔을 때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엘리야, 모세에게 ‘제발 좀 죽어버려’하는 유혈사태가 벌어지는 겁니다. 엘리야도 늘 위기에 몰렸죠. 현상범이었고 엘리야를 체포하는 자에게 현상금을 걸었어요. 이걸 보고 엘리야가 낙심해서 나무 밑에서 죽으려고 했잖아요. 모세도 어떻게 했습니까? 내가 이 사람들을 어떻게 관리한다고.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자기한테 성질내다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모세, 엘리야는 철저하게 자기 일에서 주의 일로 넘어와야 되는데 넘어올 때 주님의 별세가 죽으심이 있어야 되거든요. 모세, 엘리야는 멀리서 이걸 본 거에요, 멀리서. 왜냐하면 구약 무대거든요. 아직 시간이 흐르고 있던 무대였단 말이죠.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가 이미 죽고 난 뒤에 보니까 소급해서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발견된 겁니다.

아까 종로 5가 대학로 연극하고 영화관 이야기했죠. 분명히 그 안에 시간은 흐르지만 바깥에서 보면 이것은 언약 안에서의 움직임이에요. 언약 안은 시간이 흐르지 않잖아요. 옛날 언약은 바깥에 더 큰 프레임인 새 언약 위에서 옛 언약이 있기 때문에 새 언약이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면 옛 언약도 안에서는 시간이 흐르지만 이것도 고정된 거예요. 시간이 흐르지 않아요.

그러니까 제가 오늘 하고 싶은 말은 뭐냐 하면 계시 앞에서는 계시가 오게 되면 그냥 아침에 눈떠보니까 온 산야가 산과 들이 하얗게 되었다. 이것이 무거운 일상, 나의 일에 찌든 우리로 하여금 엄청난, 무한한, 그보다 훨씬 큰 능력의 덩어리를 우리가 입고 받은 겁니다.

다시 베드로후서 한번 봅시다. 그렇게 여러분 아시고 17절부터 한번 천천히 읽어볼게요.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여기 시간요소 의미 없죠. 그때 그 일이 지금 그 일이에요. 그때는 하나님 아들이고 지금은 하나님 아들 아니고 그런 거 없죠? 그때도 하나님 아들이었고 주님은 지금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이잖아요. 시간의 흐름에 대해서 우리가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죠.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지금 베드로의 관심사가 어디 있습니까? 이거 알아가지고 몇 명 더 전도한다는 것에 있는 게 아니고 지금 이대로 좋다는 거예요. 이대로 오케이.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아까 이야기했죠. 샛별 떠오르는데 우리가 뭐 보태준 것 있습니까? 우리가 뭐 샛별 떠오르지 마라, 눈 감고 있으면 샛별 안 떠오릅니까? 계시는 그냥 우리한테 인정받든 관계없이 계시가 이미 확정되어버렸어요.

거기에 대한 우리의 정서적 안정감, 완성도, 평안함, 완료되었다는 데서 오는 그러한 평화로움. 나의 일의 단절이 이게 바로 화평이에요. 이게 평화에요. ‘나의 일은 없다’가 화평입니다.

알아요. 돌아서면 ‘오호라’되는 거. 오호라 하세요. ‘오호라’ 하시지만 그것은 완성된 그 사이를 이어주는 원주에 있는 흔들그네 다리, 그네다리 있잖아요. 그네다리에서 맨날 살래요? 건너와야 되잖아요, 계시와 계시, 사건과 사건 사이에 완료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 사이에 흔들리는 거예요.

그다음에 20절에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아니다 했잖아요.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엘리야, 모세 그 사람들은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서 이야기한 걸로 봐서 아, 성령을 받은 게 맞다. 성령은 십자가로 완료된 것을 알아서 우리의 일은 아예 없고 모든 것은 주의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성령의 할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일에 이성적인 일에 우리가 같이 휩쓸리거나 놀아나지 않게 하옵소서. 이성이 아니고 폭설로 내리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움직이는 세상인 것을 다시 한 번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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