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주님과 마귀사이

아빠와 함께 2022. 3. 19. 09:26

서울의존강의20220317a 베드로후서 2장 1절(주님과 마귀사이)-이 근호 목사

오늘은 베드로후서 2장 1절부터 하겠습니다.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그렇게 시작되고 있죠.

베드로가 예수님 증거 하면서 “예수님 믿으세요. 그러면 구원받습니다.” 이야기를 이렇게 간단히 하면 깔끔하게 마무리될 문제죠. 베드로전서 1장도 그렇고 예수님의 피로 거룩함을 입은 너희들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이것만 해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구원받습니다. 그러면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놔두고. 내가 그것까지 더 신경 써야 될 필요가 뭐 있느냐. 구원받을 자만 구원받고 천국 가면 되지, 지옥 갈 사람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죠.

그런데 베드로전서는 이렇게 피 뿌림을 받은 거룩한 사람들 위주로 이야기하다가 베드로후서에 들어가게 되면 깎아내야 될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를 믿는다는 사람,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난 게 문제가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진위(眞僞), 옳고 그름에 대해서 좀더 세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베드로전서에서는 예수님의 피 뿌림을 입어서 거룩한 사람이 되고 거룩한 제사장이고 그렇게 성도로서 살면 되겠죠. 안 믿는 사람들은 놔둬버리고요. 그런데 소위 믿는다고 이야기하는 사람 가운데서 ‘이거는 아닌 것 같은데. 이거는 아니야.’ 라고 믿는 사람 그룹에서 배제되어야 될 사람들을 따로 추적해서 제거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이게 베드로후서에요.

그래서 2장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났다는 말은 ‘나는 예수님 몰라. 안 믿어.’ 이런 사람 쪽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읍시다.’ 하는 쪽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났다고 베드로는 보고 있습니다. 물론 주님의 계시에 의해서 베드로에게 그런 계시를 줬지만. 거짓 선지자들이 등장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어버리면 “예수 믿는다고 한 패 먹었던 그 사람들이 다 천국 가는 성도는 아니다, 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예수 믿는 것 가지고는 조건이 모자란단 말인가? 그것으로 부족하단 말이야? 다른 조건을 또 추가시켜야 되는가? 그러면 일이 상당히 복잡하게 되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십자가 피를 흘려서 그것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 오케이. 감사합니다. 자,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최종 확정적이냐? 확정적인 유일한 조건이냐? 우리는 그러고 싶어요. 그게 최종적이고 싶어요. 그런데 2장 1절에, “민간에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들이 왜 일어나요? 이들이 안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이들이 일어나서 일이 굉장히 복잡하게 되어버린 겁니다. 복잡하게 된 거예요.

이 거짓 선지자들이 예수 믿는다는 그 집단 속에서 일어나는 이유가 있어요. 마귀가 끝까지 따라붙는다. 마귀가 끝까지 따라붙는 거예요, 끝까지. ‘나는 예수님의 피를 믿기 때문에 죄 사함 받아서 구원받았다.’ 이러면 어지간하면 떨어져 나가주는 게 예의죠. ‘아이고, 쟤는 이제 끝났어. 쟤는 천국 가는 거 못 말리겠어.’ 이러면 되는데 끝까지 따라붙는 거예요.

끝까지 뭔가 달라붙으니까 이걸 떼어 낼 필요가 있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의 피 믿고 또 다른 조건까지 하나 추가적으로 옵션으로 뭐 하나 더 얻어야 온전히 구원이 되는가? 하면서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하죠.

“거짓 선지자를 조심해라.” “그럼 예수 피 믿고 그다음 하나 더 추가해서 거짓 선지자를 추가하면 온전하게 구원은 이제 깔끔히 마무리되는 겁니까?” 물으면 “아니야. 뭐 또 있을 수 있는데.” 그러면 이게 몇 가지에요? 한 가지, 두 가지, 세 가지, 이게 백 까지 갈지 천 까지 갈지 누가 장담합니까? 혼돈스럽죠.

그런데 이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는 이야기는 앞에 있는 예수님의 피로 온전해진다는 그것에서 추가하는 게 아니고 첫 번째 조건인 예수님의 피 뿌림이 나의 구원과 연관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피 뿌림이 내 구원 용도로서 구원을 위해서 피 뿌리신 게 아니라는 겁니다.

만약에 내 구원 용도로의 피 뿌림이라면 그 뒤에 베드로후서 2장 같은 이야기는 할 필요 없어요.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그럼 안 삼가면 어쩔 건데? 안 삼가면 탈락이다. 이렇게 되니까 문제가 복잡해지는 겁니다. 사도가 이야기할 때 괜한 이야기를 한 게 아니거든요.

그럼 나의 구원에 이렇게 신경을 써버리면 예수님의 피 뿌림에다가 여기 거짓 선지자를 주의하라, 하면 이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또 추가되어야 되겠죠. 거기에 또 추가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분별하는 능력은 어디까지나 구원받고자 하는 당사자가 알아서 해야 되는 그런 문제가 되는 거예요. 당사자가 알아서 가야 된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피를 믿는 사람은 코로나 걸리지 않습니다.’ 라고 하면 깔끔하고 좋은데 ‘마스크 쓰세요.’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 피 믿고 그다음에 마스크를... 마스크 쓰지 뭐. 그걸로 끝났습니까? 마스크도 중국산 말고요. 보건소에서 나눠주는 미제 뭐 이런 거 쓰라고 한다면 여기서 또 구입해야 돼요. 그러면 됩니까? 아니야. 백신 맞아야 돼. 모더나 안되고 화이자 맞아야 돼. 이렇게 되거든요. 그럼 한번 맞을까요? 아니야. 두 번 맞아야 돼. 그럼 두 번 맞으면, 아니야. 세 번 맞아야 돼. 세 번 맞으면, 아니야. 네 번 맞아야 돼. 지금 이스라엘은 네 번 맞고 있거든요.

방법이 지금 몇 가지에요? 갑자기 구원의 조건이 점점 더 추가되어 늘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피 뿌림이 나의 구원을 향하는 피 뿌림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럼 예수님의 피 뿌림이 뭐냐? 나의 구원 자체가 거짓 선지자와 결탁되어서 나타납니다. 나의 구원들을 워낙 원하고 있으니까 거짓 선지자가 거기서 도와주겠다고 등장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피 뿌림에 의하면 이 거짓 선지자 배후에 누가 있느냐 하면 마귀가 있는 거예요. 이 마귀가 끝까지 따라붙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서 이제는 얼추 포기 할만도 한데 마귀한테는 포기란 없어요. 끝까지 따라붙으니까 베드로를 통해서 계시가 추가적으로 계속 주어지는 거예요. 이거는 우리의 구원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정말 네가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는 자라면 마귀는 너를 노린다는 거예요, 너를. 주님의 구원의 대상인 너를 악마는 노리고 바짓가랑이든 양말이든 뭔가 붙들고 계속 달라붙는 거예요. 회유하고. 구원받기 위해서 피 뿌림 말고 다른 게 또 필요해. 자꾸 달라붙는 거예요.

그러니까 피 뿌림을 받는다고 했는데 성령을 통해서 피 뿌림을 알아야 되는데 야, 피 뿌림 이거 괜찮네. 내가 제대로 이 피 뿌림만 선택해서 내가 그것만 소유할 수 있다면, 소유입니다, 소지할 수 있다면 이젠 뭐 다 됐네, 라는 사람에게 거짓 선지자가 다른 요소를 추가적으로 들이대니까 믿는 사람까지 혼돈스럽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의 피 뿌림에 대해서 한쪽은 예수님의 피 뿌림이고 마귀는 우리의 바짓가랑이를 안 놓으려 하고 결국 중간에 있는 우리는 이런 문제에 속하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마저 용납하는가, 아니면 주님은 죄는 거부하고 죄인으로 데려가느냐 하는 그런 문제.

우리의 죄까지 주께서 받아주는지, 아니면 ‘죄는 오지마라. 오직 죄인만 오라.’ 하는 식으로 죄와 죄인을 분리해서 죄는 떼어내고 죄인만 받아주는지. 어느 것이 맞는지. 주의 피 뿌림이 그 의미가 뭔지를 새롭게 벌어진 상황을 통해서 그 의미가 다시 새롭게 새롭게 여기서 더 깊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 뿌림이.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거룩함을 입었다 했잖아요, 베드로전서 1장에서. 그들을 성도라 했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이 피 뿌림 앞에 성령의 거룩하심. 성령의 거룩하신 피 뿌림으로 성도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다는 거예요. 그에 관한 편지에요. 성도에게 준 편지입니다.

주님의 성도를 만드는데 ‘나는 어떻게 하면 천국 갈 수 있습니까?’ 라는 생각은 성도에게는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피 뿌림이 나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발휘합니까?’ 이렇게 돼요. ‘나에게 어떤 현상을 유발시킵니까?’ 이렇게 되어야 돼요. 내가 뭘 가지면 됩니까, 하는 소지가 아니에요. 내가 뭘 챙기면 됩니까, 하고 챙기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날 갖고 어떻게 활용하고 사용하십니까, 하는 그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피 뿌림을 줌으로 말미암아 나는 홀로 있다고 생각하는데 피 뿌림을 받는 순간 돌아보니까 귀신 열댓 마리가 나한테 같이 붙어가지고 계속해서 유혹과 시험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피 뿌림 받는 순간 눈이 열려서 보게 되는 겁니다. 아, 나는 나 홀로 구원받겠다는 욕심으로 챙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나의 정체, 나의 실체가 드러나는구나.

내가 지은 죄까지 주께서 받아달라고 하는 이것은 피 뿌림의 취지하고는 상관없는 거예요. 죄까지 천국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돼요? 뭐 천국이 엉망이죠. 죄까지 들어갈 수는 없는 겁니다. 죄라는 것이 여기서는 인격화된 어떤 존재자입니다. 악마까지 천국에 갈수는 없지 않습니까, 악마까지.

악마에 속해서 죄지은 성도는 주께서 피 뿌림으로서 죄 사함이 되는데 떨어져나간 죄까지 천국 가져가지는 못한다 이 말이죠. 그것은 놔두고 가야 돼요. 그건 지옥으로 떨어져나가야 돼요. 그 떨어져나간 죄들, 그 죄들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마귀가 혼자 죄짓겠습니까? 누구하고 짝짜꿍이 되니까 죄가 나올 게 아닙니까? 누구하고 붙어서 죄를 지었습니까? 악마가 사주하는 대로 죄를 짓는데 가담했던 가담자가 누구죠? 바로 인간들이죠, 인간들.

전체적인 취지는 이렇습니다. 그러면 이제 거짓 선지자의 정체는 우리의 바짓가랑이에 붙어있는 피 뿌림을 받은 자만이 비로소 눈이 뜨여져서 와, 이런 게 붙어있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베드로후서 1장 19절에 보면 샛별이 떠오르는 것, 성령이 떠오르는 거죠. 성령이 떠오르게 되면 비로소 내 중심이 아니고 말씀 중심으로 보면서 내 중심이 아니란 말은 내 구원받기 위해서는 무슨 짓도 하겠다는 그러한 인식 자체가 이것은 하나님의 본래 취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겁니다.

예언이 예언대로 되기 위해서 우리는 가담되어 있는 거예요,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시계의 부속품은 부속품 자체를 위해서 시계가 있는 게 아니고 시계 전체를 위해서 부속품으로 거기에 가담되어 있는 거예요. 거기에 개입되어 있는 거예요. 부속품 됐다고 뭐 짜증내고 성질내고 그러지 마세요. 주님 일의 부속품 된 게 얼마나 영광스러운데요. 감지덕지해야 될 문제죠. 자기가 주인공 아니라고 삐치고 그러면 곤란한 겁니다.

그럼 이 거짓 선지자의 문제점, 달라붙은 거짓 선지자의 모습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부딪치는 사태들의 잘못된 연결입니다. 인간에게는 쉴 사이 없이 일들이 일어나요, 주변에. 온갖 것, 울진의 산불부터 해서 대선 투표, 이재명이냐 윤석열이냐. 온갖 일들요. 우크라이나 전쟁부터 해서 코로나부터 해서 기름 값 오른 것부터 해서 모든 것. 내 차 몰다가 차 빵꾸 나는 거나 속도위반해서 걸린 것부터 해서 끊임없이...... 또 배탈 나는 이 모든 끊임없는 사태를 어떻게 joint, 연결할 것인가 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거짓 선지자들은 바로 인간중심으로 연결시켜버려요. 인간중심으로 연결시켜버리면 인간으로 하여금 일어나는 사태에 핵심 중앙부분에 여전히 내가 우뚝 서서 있는 거예요. 아, 이번 일은 나한테 이익이 될까, 손해가 될까. 평생 동안 내가 이 일을 일구어냈는데 이번 일로 내가 낭패를 보게 되면 나는 어떻게 살지? 나는 어떻게 살지?

한번 적어볼게요. 나는 어떻게 살지? 이것도 고민이 되지만 나는 남들 앞에 어떻게 내 모습을 보이지? 이것도 고민이에요. 내가 어떻게 살지? 뭐 미국 이민 가서 세탁소 하면서 밥 먹고 살면 돼요. 밥이나 먹고 살면 되죠, 영어는 못하지만. 땡큐, 이렇게 해서 살면 되는데 문제는 이민 안가고 한국에 남아 있으면 남들이 너 사기꾼이고 저 사람은 까불다가 망했다, 그런 비난 소리를 어떻게 감당하시려고요. 내가 남들 앞에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어떻게 살지? 나는 어떻게 남들 앞에 보이지?’ 이게 뭐냐 하면 평소 거짓 선지자의 속셈이에요. 속마음이에요. 마귀의 속마음이라니까요. 마귀는 인간을 신으로 취급했잖아요. 신이 신값 해야지, 꼴값하면 되겠어? 이게 계속해서 우리에게 치고 들어오는 거예요.

신이 신답게... 너는 대단하고 잘난 존재잖아. 그런데 이번에 일어난 코로나 사태, 우크라이나 이런 사태. 그뿐만 아니죠. 그렇게 투표 네가 찍은 것이 0.7%로 떨어지고... 이 소리 듣고 어떻게 치고 들어오는데 막습니까? 장담을 했는데, 1% 이긴다고.

그러니까 모든 일어난 사태가 나는 안 그러고 싶어도 나는 주님중심이고 싶어도 그건 빈 말이고 주님중심이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이고 실제로는 이 꼴로 나 못 나간다. 심지어 백화점에서 옷 하나 샀는데 입고 나가다가 두두둑. 신상인데 이게 치수가 안 맞아가지고 뒤에 등짝이 쭉 갈라진다든지. 그렇게 해가지고 시내 나갑니까? 뒤에는 핀으로 한 열댓 개 박아놓고 앞에는 명품. 이게 되겠어요? 안되죠.

게다가 자기는 아무 문제없어요. 그런데 아들이 지금 4수했어. 부끄러워서 밖에 못 나가요. 아들마저 챙겨야 돼요. 아들이 4수했는데 이번에 또 떨어지면 군 입대 연기해가지고 또 시험 칠 판이에요. 이번 추석 때 너 들어오지 마. 집에 혼자 있어. 우사스러우니까.

부딪치는 사태에 대한 잘못된 연결. 인간은 신이니까 신값을 해야 되는데 꼴값을 했으니까 너는 꼴좋다. 따라서 이것을 (오늘 강의에 나오는 첫 번째 나오는 중요한 거예요) 만회하라. 만회하라는 말은... 오늘 중요한 개념 하나 나옵니다, 결핍.

모든 죄는 결핍을 의식해서 비롯되는 겁니다. 아쉬움 때문에 그런 거예요, 아쉬움 때문에. 피 뿌림으로 족하지 않아요. 주님의 피 뿌림으로 죄 용서로 전혀 기쁘지 않아요. 그것은 주님의 주특기고 그건 당연한 거고 그게 뭐 기뻐? 그건 당연히 예수님이 해야지, 이런 식이고 그다음에 진짜 본론에 들어가면 내가 남들 앞에 어떻게 이 꼴로 나서? 이게 본론 되어 버렸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안 믿는다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피를 거부하는 게 아니에요. 마음은 콩밭에 있다니까요. 마음이 콩밭에 있어요. 예수님 하신 일 그건 당연한 거고 벌써 25년 전에 다 알고 있었어,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 피로 구원받는 거 뭐 쥐나 개나 다 아는 이야기 나는 그걸 원하는 게 아니야. 예수 믿고 난 뒤에 남들이 와~ 할 정도로 너는 뭐 부족함이 없네, 라는 이야기를 주위에서 웅웅거리면서 나한테 쏟아놓기를, 그래서 인생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에 진짜 나는 예수 믿는 보람을 내가 느끼겠다.

이 틈새 시장을 노리고 와락 달려드는 자가 있었으니 그들이 거짓 선지자들이에요. 거짓 선지자는 뭘 노리고 들어온다? 결핍을, 아쉬움이 남는 그 틈새를 어떻게 아는지 차고 들어오는 겁니다. 왜냐하면 마귀니까요. 마귀는 모르는 게 없거든요. 우리 마음이 먹구름처럼 꾸리하게 있다는 것을 마귀가 너무나도 잘 압니다.

2절에 보면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색(色)을 좇는다는 말은 결핍에서 나오는 겁니다. 자기의 심적 불만을 성(性)적으로 만회하고 그걸 마저 채우려고 시도하는 것, 이게 바로 호색이에요. 호색(好色), 성적인 쾌락을 원하는 이것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뭐냐 하면 주님이 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이에요. 주님이 시키지 않았어요.

주님이 시킨 일은 반드시 거기서 벌어진 일이 나한테 오는 게 아니고 주님에게로 귀환되게 되어있어요. 주님에게서 나온 일이기 때문에 주님에게로 회수가 되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중간에 쑥 차고 들어오면서 결핍된 심정으로... 쉽게 말해서 불만이 늘어지는 거예요. 매사 불만이 늘어지는 거예요. 불만 가득.

불만이 가득한 자에게는 어떤 사태나 어떤 일이 있으면 그것이 주님에게로 가는 것을 아주 짜증스러워하고 어떤 괜찮은 일은 반드시 나의 결핍을 채우는 식으로 일이 벌어졌으면 좋겠다는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내가 채워야 돼요.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그 벌어진 일이 일단 나부터 채우고 그다음에 주님한테 가든지 말든지 일단 나부터 채우고 싶은 거예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죠.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받아주되 죄까지 받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4절에 보면 나옵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그다음에 뭡니까?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했죠. 아무리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도 범죄한 천사들을 위한 용도로 남겨둔 피는 없습니다. 피 뿌림은 범죄한 천사들과 결탁된 자, 그들과 한통속이 된 자들에게 들어갈 피는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용서가 새로운 심판의 기준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용서가.

자, 2절 다시 가서 보면 결핍, 불만 또는 모자람, 갈증. 이 결핍에서 욕망이 생기는데 인간의 모든 욕망은 결핍에서 나오는 거거든요. 그러면 이 결핍은 뭐냐 하면 ‘내가 만족스러운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이게 망상입니까, 망상 아닙니까? 망상이죠.

손흥민이라는 우리나라 축구선수가 토트넘이라는 축구팀에 있거든요. 이번에 영국의 프리미어 리그에서 이 토트넘이 우승했으면 좋겠다, 하고 손흥민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다 원하고 있죠. 그 응원하는 사람 중에 집사님 계시고 목사님 계시고 장로님 계시고 신학 교수들 있겠죠. 그런 사람들이 막 성경만 가르치고 말씀만 가르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말씀 강의 가운데 손흥민이 이번에 세 골 넣었대, 이러면 강의가 흥이 날까요, 아니면 아, 오늘 기분 나쁘다 이렇게 됩니까? 어느 쪽입니까? 갑자기 손흥민 때문에 자기 강의가 신바람 나요. 강의할 때는 자기가 손흥민 편애한다는 것이 들통 안 나다가 어떤 사태가 일어나게 되면 그 사태가 내 결핍을 채워주는 식으로 연결되는 것, 거짓 선지자들의 본심이죠.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세상에서 나라는 인간이 있을 때 나는 호(好)와 불호(不好),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내가 임의로 가려냅니다. 구분합니다. 괜히 준 것도 없이 나 저 탤런트 나오면 TV 안 본다, 이런 거 있잖아요. 괜한 거예요. 저 개그맨 나오면 나 안 봐, 이런다든지. 중국 쇼트트랙 금메달 따면 난 그다음부터 동계올림픽 중계방송 안 본다, 이런 거. 중국하고 우리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아무 관계없어도 나오면 싫어.

인간은 고요하지가 않아요. 부산스러워. 매일같이 호와 불호,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아침 눈만 뜨면 그거 가려내기 바빠요. 그리고 싫어하는 건 꼴도 보기 싫으니까 저리로 보내고 좋아하는 것만 받아들입니다.

이런 말도 있잖아요. 강아지 열 마리 키워도 이쁜 강아지 있고 싫은 강아지 있다고. 이건 내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런 말 없습니다만 방금 지어낸 거예요. 같은 강아지를 키워도 마음에 드는 강아지, 마음에 안 드는 강아지 구분하잖아요. 같은 자식도 마찬가지에요. 병아리는 모르겠어요. 어차피 잡아먹을 거니까 그건 관계없는데.

주님이 시켜야 되는데 우리는 주님이 시키는 것보다 성급하게 내가 이 세상을 향하여 외치고 있는 게 문제인 거예요. 내가 외치고 있는 거예요. 좀 세상은 제발... 손흥민 한 골 넣으라고 이렇게 주님 좀 해주세요. 말은 차마 못하죠. 그게 옳은 기도가 아니란 걸 자기도 뻔히 알기 때문에 그런 말은 못하지만 내가 말 안 해도 알아서 좀 넣어주면 얼마나 좋겠나. 내가 선호하는 후보, 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반대로 내가 증오하고 싫어하는 사람. 내가 증오하는 사람이 결혼하면 두 달 만에 이혼해버려라. 내가 싫어하는 사람, 이게 쉴새 없이 부산스럽게 요란스럽게 우리는 인생을 그런 식으로 내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요란스러운 가운데서 나는 부처보다는 역시 피 뿌려주시는 예수님이 좋아, 라고 할 때 그것은 부처는 안 좋아하는 게 되고 예수님은 호/불호 가운데서 좋아하는 게 되겠죠. 부처는 불호가 되고. 그건 바로 자기 챙기는 거죠. 그것은 주님의 피 뿌림하고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본인이 자율적으로 결정해서 구원받겠다는데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성경하고 무슨 관계있겠습니까? 좋아 보이는 것은 전부다 끌어 모으겠다는 것이 욕망인데요.

자, 욕망 이야기 다시 하겠습니다. 결핍은 어디서 나오는가? 환상에서 나와요, 환상. 망상에서 나온다고요. 내가 만족스러운 세상 정황을 망상 또는 환상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환상이 새로운 사태를 만나면 환상 바꾸기에 나섭니다.

변이 마려울 때는 아, 어디 화장실 없나? 화장실 갔다 온 다음에는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하고 완전히 다르죠. 완전히 다르잖아요. 소변이 마려울 때는 다른 건 보이지도 않아요. 간판, 누구 탤런트 지나가도 보이지도 않아요. 화장실만 찾는 거예요. 그러나 볼일 보고난 뒤에는 환상을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왜 바꿔요? 결핍에서 욕망이 나오는데 더 정답은 뭐냐. 욕망이 살아있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결핍을 유도하는 쪽으로 욕망이 작동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욕망 없는 사람은 시체입니다, 인간에게. 나이 90이 되어가지고 내일모레 오락가락하는 요양병원에 있는 99살 먹은 노인네도 온갖 정치 간섭 다하고요. 자기 딴에 욕망을 발휘합니다.

만약에 결핍에서 욕망이 나오면 그 결핍이 마저 채워지면 욕망이 사라져야 되잖아요. 욕망은 본인 욕망이 사라지는 것을 제일 무서워해요. 그건 시체가 되는 거예요. 내가 시체가 아니라면 계속 욕망을 개발해 내야 되는 겁니다. 새로운 욕망, 새로운 욕망. 새로운 환상과 새로운 꿈을 계속해서 자꾸 재생산해내야 돼요.

그게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는 스톱이 없어요. 돈 그만 번다는 게 없어요. 계속 의도적으로 아쉬움을 유도하고 만들어내요, 아쉬움을. 그래야 인간이 살아있는 맛이 나는 겁니다. 살맛이 나는 거예요. 새로운 목표를 자꾸 만들어야 살맛이 나는 거예요.

그렇게 해놓고 이제 2절 봅시다.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그러면 남자가 여자를 밝히고 여자가 남자를 밝힐 때 세 명이 한도입니까? 네 명이 한도에요? 사마리아 여인은 몇 명까지 했어요? 다섯 명. 그걸로 끝이었습니까? 다섯 명하고 이제 갈아치워야지. 여섯 번째 남자를 사귀었잖아요. 그러면 여섯 명이 끝이에요? 욕망은 한도가 없습니다. 마귀가 그렇게 만들기 때문에 한도가 없어요.

그러면 이쪽 복음의 세계에서는 복음으로 들어온 사람들의 욕망은 한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한도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그리스도 안 세계에서는? 악마하고 예수님하고 싸웁니다. 예수님의 모든 예언과 말씀은 악마를 향해서에요.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사탄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왔다. 그게 요한일서 3장 8절에 나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사탄의 일을 멸망시키기 위해 왔다. 사탄을 없앤다는 말이 아니고 사탄으로 하여금 이미 정해진 처소에 보내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자기 지은 죄와 더불어서. 죄는 안 받아주니까. 죄는 천국에서 안 받아줍니다. 돌려보내는 거예요.

그러면 주께서는 죄인을 받습니까, 의인을 받습니까? 죄인을 받죠. 왜냐하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러면 그 죄인에 악마가 달라붙으면 죄인과 더불어 악마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그건 안 되죠. 그럼 무슨 작용이 있어야 돼요?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죄인과 달라붙어 있는 마귀를 떼내는 작업을 주께서는 하셔야 되겠죠, 떼내는 작업을.

그 떼어내는 작업을 피 뿌림으로 하거든요. 그래서 떼내는 작업을 하려면 길을 두 갈래 길을 만들어서 하나는 천국, 하나는 지옥 가는 길을 친히 이 땅에 만들어야 돼요. 이렇게 골짜기가 있으면 골짜기 제일 바닥에 십자가 피 뿌림을 둡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 십자가는 용서할 자와 용서 못할 자를 구분 짓는 피 뿌림이 되는 거예요. 구분 짓는 피 뿌림입니다.

그럼 용서할 자와 용서 못할 자는 이미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이 ‘너 용서해줄게’ 하는 행동을 인간이 할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죠. 그러니까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네가 행동하는 거 보고 생각하는 거 보니까 너는 용서할만해, 그것은 제대로 된 용서가 아니에요. 용서가 되려면 일체 용서받을 짓을 하지 않아야 그 용서가 빛이 나요. 용서 안 받아도 될 여분의 것이 남아 있으면 안돼요.

천주교 교리의 치명적 오류가 바로 그겁니다. 완전히 하나님께 요만큼이라도 드릴만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 일체 있지 않아야 되는데 천주교는 불교가 되어가지고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뭐. 사람이 이성적으로 깨달으면 깨달았다는 그 착함으로 구원받게 아마 해주실 걸? 이러고 있어요, 자기 마음대로.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지는 척할 걸?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척을 해야 돼요. 죽으면 안돼요. 봐봐. 나 희생하는 거 보이지? 희생한다, 희생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마치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훈계하기 위해서 네가 잘못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대신 매를 맞는다. 똑바로 봐. 카메라 찍어, 찍어. 예 예. 찍어, 찍어. 맞는다, 맞는다. 아오, 피 난다. 아파, 아파. 어떻게 마음에 좀 이렇게 양심의 가책이 되냐, 돼? 안 돼? 그럼 더 때릴까? 더 때릴까? 이제 양심의 가책이 돼? 그럼 내가 멈출게. 아이고, 아파라. 그런 식으로.

양심의 가책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위인이 인간에게 과연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건 가부 물을 일이 아니에요, 이거는. 자기 양심의 가책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아이고, 너무 안됐어. 불쌍한 분 내가 믿어줘야지. 이래서 십자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너는 해라. 나는 내 할 일 한다. 이게 인간이에요.

주님께서는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자를 용서하신 거예요. 그것은 용서받고 난 뒤에 비로소 알게 되는 거예요. 용서받기 전까지는 그걸 몰라요. 용서받기 전에는 우리는 주님한테 최선의 선을 행하려고 합니다. 알고 있는 게 선악과이기 때문에 선악 지식이기 때문에 주님께 잘해주려 하고 주님 심정 상하지 않게 하려하고 부모한테 효도하듯이 주님한테 효도하고 싶은 심정이에요.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면 점점 더 이게 마지막 기준, 용서한다는 것이 가리워지겠죠. 모독 받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죽을까? 실눈 뜨고 이제 죽는다, 이게 아니라 완전히 자기 자신을 죽이고 그 죽음에다가 안 죽으려는 자기 제자들을 강제로 너 죽어, 라고 죽게 만들어요. 예수님 자신의 피를 포도주에 담아 주었죠. “이것은 내 피다.” 그러면 제자들이 “선생님이나 잡수세요. 우리를 왜 선생님 죽는데 강제로 주님 죽음으로 자꾸 잡아당기려 합니까? 난 싫습니다. 난 살고 싶습니다.” 이런 소리를 못하게 만들어버렸어요. 그런 소리 나오기 전에 강제로 먹여 버렸어요.

완전히 <장희빈>의 한 장면이에요. 입 벌려! 이 사약을... ‘사약(賜藥)’ 뜻이 뭔 줄 알아요? 죽을 사(死)자 사약이 아닙니다. 임금님의 은혜의 약이에요. 한자가 그 한자에요. 고마운 줄 알고 처먹어. 물론 영화에서는 콜라 먹이죠. 콜라도 자꾸 먹으면 배탈 나요. 강제로 먹여버립니다.

그 강제성. 강제로 죽여 버리는 것, 이게 바로 용서입니다. 먹고 난 뒤에 뭔가 출렁 출렁거려요. 뭐가 들어왔어. 보니까 주님의 용서가 다 들어왔어요. 이제 남아있는 것은 주님이 죽을 뻔해도 안 되고 내가 주님께 충성해도 안 되고 왜 완벽하게 주님께서 죽어야 할 정도로 나는 아무것도 아닌 허접스러운 존재인가를 알면 되는 거예요. 그걸 알면 되는 거예요.

그걸 알 때 그때 그 사람은 거짓 선지자가 장난치는 게 보입니다. 장난치는 게. 이미 구원은 끝났는데 새삼스럽게, 너 십자가 피가 모자라고 그다음에 또 성경 봤지? 성경말씀 이거, 이거, 이거 지켜야 돼. 그럼 이거 지키면 돼? 아니, 몇 가지 더 있어. 몇 가지라 해놓고 오백 가지인지 육백 가지인지 감당 못하게 계속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수요일에 제가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주님은 생명의 은인이 아니라 죽음의 은인. 제대로 죽게 해주시는 고마운 사람입니다. 제대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죽는 이것이 마땅한 일인 것을 기쁨으로 느끼게 해주시는 고마운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뭐든지 살려고 하니까 결핍이 생기는 거예요. 살 때 모든 사태가 살아있는 내 중심으로 움직이니까 내가 사는 게 빡빡하고 억지스럽고 꺼끌꺼끌해요. 한번 욕망을 이루었으면 그게 좀 오래 가야되는데 오래 가지도 않아요. 아파트 새로 사도 6개월만 가면 그 아파트나 그 아파트나 별로 뭐 좋은 줄도 모르고. 차 사가지고 한 1년도 너무 많다, 한 3개월만 타도 이 차가 포니인지 벤츠인지 구분이 안돼요. 타고 가는 건 마찬가지에요. 뭐 경운기하고는 좀 다르겠습니다만.

도대체 뭘 해야 결핍이 없겠느냐, 라는 생각을 하지만 이 바짓가랑이에 달라붙은 거짓 선지자가 나에게 아양을 부리네요. 이게 세상 유혹이잖아요, 세상 유혹. 이 쪼다야, 남 다 출세했잖아. 너 혼자 뭐하고 뒤떨어져 가는 거야? 그래가지고 네가 네 동창생 앞에 나서겠어, 그 꼴로?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우리를 자극하는 거예요. 2절에 보면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3절에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계속 탐심을 개발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도 종류별로.

첫째 시간에 우리가 정리하는 것은 바로 이 십자가 피로 모자람이 없어요. 완전해요. 그런데 이 십자가 피를 성질 급하게 나의 구원과 직결시켜버리니까 왜 사도가 마치 추가적인 조건까지 곁들여야 구원이 되는 것처럼 성경 자체를 오해하는 일들이 벌어진 거예요. 그것은 내 구원 위주로 성경을 해석하니까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구원받는 것도 탐심이에요.

주님의 고난도 욕심입니다. 주님 가신 고난의 길을 가는 것도 이게 욕심이에요. 거짓 선지자들이 교회에서 고난 주일날 고난을 받으라고 얼마나 부추깁니까? 어느 누구도 그게 나쁜 짓이라고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게 나쁜 짓이거든요. 제가 수요일에 했잖아요. 제발 주님 혼자 가게 만들란 말이죠. 따라가지 말고.

주님 가신 길을 주님만 가셔야 되지, 왜 우리가 따라갑니까? 보람상조 광고 문구에 이런 게 있어요. 가시는 길 곱게 가게 해드리겠습니다. 주님 가시는 길 곱게 가게, 그 귀한 몸 가게 해주시란 말이죠. 우리가 가겠다고 주님 따라가겠다고 베드로처럼 나서지 말고요. 주님 가시는 길, 제가 앞길 닦아드릴까요? 그런 오지랖 떨지 말고 배신이나 안했으면 좋겠어요.

용서라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자가 용서받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용서받을 자와 용서받지 않는 자의 구분은 누구 권한이냐 하면 주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이것은 정권 인수위원회에서도 개입 못해요, 이거는. 그냥 주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본인이 결정하는 거예요.

그러면 첫째 시간 마치면서 이 이야기를 해야 되겠어요. 악마의 욕망은 계속 악마가 영적으로 자꾸 자극했기 때문에 욕망은 끝이 없어요. 그러면 예수님의 욕망은 끝이 있느냐? 끝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첫째 열(列)이에요. 사랑의 첫째 열이라 하는 것은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리스도 보좌 앞에 이십사 장로가 이렇게 앉아있거든요. 거기서 그들은 주님의 사랑을 봅니다. 이 말은 사랑 너머에 없어요. 사랑이 욕망의 마감이고 만족의 마감이에요.

사랑이란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고 내게 무엇이 없음을 알아서 주님 자신의 것을 우리 속에 집어넣고 그 집어넣은 그것만 쳐다보는 것, 주께서 그것만 살피는 것, 이게 사랑입니다. 호색하고 다르죠? 나의 결핍을 위하여 내가 나서는 것은 호색이지만 사랑이라 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원해야 되는지 나도 모르는 것, 내가 예상 못한 것, 그런 것을 주께서는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이거 웬 떡이야. 첫째 시간의 핵심은 이겁니다. 웬 떡이야. 이게 웬 횡재야. 10분 쉬겠습니다.

 

서울의존강의20220317b 베드로후서 2장 1절(주님과 마귀사이)-이 근호 목사

아까 요한일서에 있는 구절을 말씀 못 드렸는데 요한일서 3장 8절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사람하고 상대 안합니다. 사람하고 상대 안 해요. 사람은 구원의 대상이 되지, 같이 협력의 대상이 안 됩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네가 잘 하는지에 따라서 구원이 결정된다고 자꾸 배후에서 우리보고 재촉해요. 너 요새 너무 태만하잖아. 요새는 성경도 안 보고 기도도 너무 게을렀어. 게을렀다고 자꾸 이렇게 잔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구원의 결핍을 느끼고 구원? 과연 그런 게 있었던가, 피 뿌림에 어디 빵꾸 났나, 피 뿌림 색깔의 농도가 갑자기 옅어져버렸는가. 피 뿌림은 주님이 관리하지, 우리가 관리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천국의 욕망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첫째 시간 끝에 뭐라고 했습니까? 일방적인 사랑. 일방적 사랑이에요. 왜? 죽었으니까.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죽었거든요. 죽었기 때문에 사랑할 자는 그냥 사랑해버리고 사랑할 자를 만들어버리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사랑 안 받을 자가 아니라 그냥 미워하는 자가 돼요.

여기에 대해서 인간적으로 불만을 가지면 안 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은혜 받을 자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어요 (19절,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은혜를 받는다는 건 은혜 받을 자만 건지고 그냥 너는 너대로 살아, 방치하게 되면 그냥 지옥 가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로마서 1장에 보면 “내어버려두사”.

까불고 찧고 촐랑대고 인수위원회가 어떻고 이번에 뭐 복지는 서울대학교 출신 어떻게 하고... 그래, 까불어. 까불어. 그게 막 언론을 장식하고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게 사랑입니까? 뉴스에 나오는 그 모든 것들이 그게 사랑입니까, 아니면 권세에요? 어두움의 권세입니까, 뭡니까? 어두움의 권세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그렇게 부러워해야 되겠어요? 까불고 찧고 하는 그걸 주께서 그냥 내어버려두는 거예요.

우리도 그냥 내어버림을 당했어요. 당했는데 뒤에서 귓불 잡아당겨서 너 와. 그냥 강제로 당긴 거예요. 사랑으로. 사랑이란 하나님의 아름다운 신성을 관주(灌注)하는 최고의 등급. 사랑을 등급이라 한 것은 나머지는 그냥 과정에 불과하니까 거기에 너무 마음 쓰거나 울고불고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랑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신성에 관주(물을 대고 뜻을 둠)하기 때문에 이게 사랑으로 그냥 덮치는 거예요. 용서받은 자에게 그냥 덮쳐지는 겁니다. 덮쳐지게 되면 그 사람은 혼자이겠습니까, 혼자가 아니겠습니까? 혼자가 아니죠. 주님의 사랑과 더불어 함께 있죠. 그러니까 성도의 특징은 주님으로부터 떨어져본 적이 없어요.

갓난 애 옆에 엄마 붙어있듯이 갓난 애한테 엄마가 떨어진다는 것은 그의 인생에서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6개월 된 6개월짜리 인생은 몇 개월 살았습니까? 6개월이죠. 6개월 평생 동안 엄마가 내 옆에 없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죠. 그 6개월 된 아이에게 최고의 안식처는 자아다, 아니면 엄마다, 몇 번입니까? 6개월 된 애에게 최고의 안식처는 나다, 아니면 엄마다, 어느 게 정답이에요? 나 아니고 엄마잖아요.

엄마가 있으면 6개월짜리 아기는 실패라는 것도 없고 성공이라는 것도 성립이 안돼요. 엄마와 함께 있으매 좋은 점은 기분 나쁨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그리고 더 좋은 점은 목적이나 목표가 사라져버렸다는 거예요. 내 인생에서 목적과 목표라는 것이 사라졌어요.

성도의 목표는 예수 안입니다. 체육관처럼 생긴 그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이 둥근 안에 있으면서 새삼스럽게 어느 걸 목표로 지정할 이유가 없죠. 어느 구석이라도 어떤 구석이라도 예수 안이니까요.

항상 우리는 혼자가 아니고 같이 있습니다. 같이 있어서 우리는 감쌈, 잘 안 쓰는 말인데 그냥 내가 써봅니다, 감쌈을 당했어요. 마치 쌈 싸먹듯이 우리는 돼지고기이고 주님이 상추로 이렇게 쌈 싸는 것처럼 쌈 싸는 거예요. 물론 때로는 우리 옆에 냄새나는 된장도 있지만 그러나 된장 있다고 너무 섭섭해 하지 마세요. 전체적으로는 상추쌈 안에 있잖아요. 주께서 먹기 좋으라고. 안 그러면 맛이 없으니까.

방금 사랑에 의해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고 같이 있다고 분명히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베드로후서에서 베드로가 거짓 선지자를 언급했기 때문에 그럼 거짓 선지자는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걸 알 필요가 있어요.

천국에서 예수님 십자가와 함께 있으면 십자가가 (골짜기에서 위로) 이동합니다. 십자가가 이동할 때 예수님과 우리가 같이 있기 때문에 이 십자가가 이동하게 되면 우리도 같이 이동하잖아요. 이동해서 올라가요. 올라가고 또 올라가고. 어린 양의 보좌까지 올라가죠. 하나님 우편까지 올라가죠. 하나님 보좌에 누가 있습니까? 바로 성도의 대표들, 이십 사 장로들이 천사와 함께 같이 있어요, 천사와 함께.

성경에 나와 있는 천사의 이름들이 있어요. 대표적인 것이 미가엘. 이것은 전쟁하는 천사. 그리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천사, 가브리엘. 문제는 이 이름이 이 세상에서의 이름이지, 사실 이들은 이름은 없습니다. 그냥 이름 없이 기묘한 자에요, 기묘한 자. 피조물이기는 하지만 그 이름이 있지만 그 이름은 인간세계에 작업에 참여할 때 발생되는 이름이에요.

하나님도 이 땅에 오면 이름을 가져야 돼요. 그 이름이 무슨 이름입니까? 예수이고 그 내용은 임마누엘이고. 하나님과 함께 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성도의 원형인 것을 예수님이 몸소 보여준 거예요. 나 혼자 있지 않다. 너희도 앞으로 너 혼자 있지 않을 것이다. 자꾸 혼자 있다고 생각해버리면 본인이 결정해야 되죠.

혼자 있다고 여기는 것은 악마 쪽에서 이야기합니다. 악마 쪽에서 인간은 이렇게 있습니다. 악마 쪽에서는 주체가 등장해요, 주체 또는 자아. 자아가 등장하고 이 자아 쪽을 쳐야 되는데 자꾸 악마는 자아 쪽을 키워 줘요. 잘 할 수 있어. 성공할 수 있어. 너는 포부를 가질 수 있어. 입을 벌려라. 내가 채우리라. 뭐 이런 식으로 해서 계속 자아를 부인하지 못하게 만들어요, 자아를. 자기를 미워하지 못하게 만들어요.

자기가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어요. 자신의 믿음을 사랑하고 자신의 소망과 사랑을 사랑하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예수 믿는 것도 자기가 만들어낸, 자기가 자체적으로 생산한 그 믿음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그렇게 조작해보는 거예요. 교회에서들 그렇게 하는 거예요. 주위에서 믿음 조작하잖아요. 뭐로 합니까? 믿씁니다, 믿씁니다. 쌍시옷해가지고 자꾸 반복시켜서 스스로 자기에게 최면 걸게 만듭니다. 믿씁니까? 믿씁니까? Repeat after me. 나를 따라하세요. 자, 하면 된다. 하면 된다. 따라하세요. 이런 식으로. 우리교회는 그게 없어가지고 제가 뭘 부탁해도 안 해요.

주체를 키우기 위해서 주체가 주체되려면 값을 해야 되거든요. 근사한 자아, 근사한 주체가 되기 위해서 여기에 베일이 있어요. 베일이니까 휘장이죠. 휘장을 딱 깔아놓고 그 뒤에 어떤 대상이 있다는 거예요. 대상이 있는데 네가 원하는 대상이 있다는 겁니다. 대상이 있으니까 빛을 쬐어버리면 이 대상의 흐릿한 그림자가 휘장에 얼른거리는 하나의 무늬로 생겨나겠죠. 그러면 이 나는 대상에 다가가기 위해서 휘장에 있는 무늬에 도전하겠죠, 도전. 이걸 도전하겠죠. 여기서 아까 얘기한 결핍이 생기고 욕망이 세상에 있는 것을 네가 골라잡아서 네가 노력하면 네가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어렵지만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도전되는 대상과 사물은 같지 않습니다. 대상≠사물. 사물은 A, B, C, D,... 여러 개가 있는데 내가 뭐 하나 의미 있게 관심 둘 때 이것은 사물에서 대상으로 바뀌는 거예요. 사물에서 대상으로. 그냥 있는 것은 사물이고요. 대상이란 그 대상으로 인하여 내가 조정당하고 내 쪽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냥 15평짜리 빌라 살다가 내가 어떤 고급 메이커 있는 푸르지오든지 롯데캐슬 하나 딱 지목할 때 롯데캐슬은 나한테 대상이 돼요. 그다음부터는 그 집을 사서 이사 가면 나는 전에는 그냥 나인데 지금은 저 롯데캐슬에 사는 사람이 되고 그것도 동네가 압구정동이라든지 강남이 되어버리면 나는 그다음부터는 나를 함부로 대하지마. 나를 우습게 보지 마. 나는 압구정동에 있는 롯데캐슬에 사는, 그런 게 압구정동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사람이라고 자기 변신을 시도하고 시도된 그 자아를 새로운 주체로서 등록하게 되는 겁니다.

인생 뭐 있어요. 이게 사는 거 아닙니까. 인생 사는 게 이거에요. 악마가 쳐놓은 각가지 골라 골라 골라 잡아, 해놓고 나는 그 많은 사물들 가운데서 내가 내 욕망, 마음에 드는 것을 대상으로 삼아서 삶의 목표로 해가지고 그걸 쟁취하는 것에 보람을 느끼게 만들어버려요.

그 보람 느껴가지고 몇 달 가겠어요? 얼마 못가요. 그럼 아파트만 사면 됩니까? 아무 가구도 없이요, 그냥? 그냥 방안에 대자 누워서 그게 사는 겁니까? 뭔가 1억짜리 자개농이라든지, 요즘 자개농 쓰지도 않지만, 이케아 핀란드 가구, 명품 가구, 멀쩡한 바닥을 이태리 대리석으로 새로 깔든지 대공사를 벌이든지 뭔가 해야 되지 않습니까. 멈출 수가 없어요.

그리고 이 세상은 조금만 지나버리면 이게 구닥다리가 돼요. 자본주의는 새로운 자극을 할만한 소비를 부추길만한 신상을 계속해서 만들어내어서 여전히 쓸모 있는데도 그걸 아낌없이 폐품으로 처리하게 중고로 만들어버려야 자본주의라는 자전거는 달리게 되어있어요. 멀쩡하게 쓸 수 있는데 새롭게 조금만 뭘 더 바꾸고 비용은 더 크게 해가지고 그래야 이 세상이 살만한 세상이라고 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커텐 이거 치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커텐 치우는 것은 베드로후서 1장 19절에 나옵니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이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너무 이 대상획득에 실패해가지고 살맛이 안 나는 거예요. 그래서 밤에 술 먹고 또 그냥 물에 빠질 용기는 없어가지고 술김에 한다고 술 먹고 바닷가에 가서 바다에 이제 뛰어들려고 하는데 자기가 스스로한테 격려 한마디 마지막 이별의 말을 본인이 본인한테 해야죠. 그동안 수고했다든지 그동안 네가 애쓸 만큼 애썼다. 사회가 너의 가치를 안 알아주는데 이 더러운 사회에서 더 살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 잘했어. 악마가 어깨 두드려주고요. 그래, 지금 보니까 물 때가 조용한데 지금 죽으면 덜 아프고 잘 죽겠다, 해서 이제 그 사람이 검은 바닷가에, 속초 바닷가가 적당하겠죠, 바다에 뛰어내리려고 딱 하는데 마침 거기에 등대 불빛이 환하게 비췄단 말이죠. 검은 물 안인데도 불구하고 거기서 등대의 밝은 불빛이 비추는 걸 보고 아무리 세상이 더럽고 악해도 빛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고 그 사람은 다시 발길을 돌렸다는 내가 지어낸 이야기에요. 그 순간.

베드로후서 1장에 분명히 어두워요. 모든 게 깜깜한 것 맞습니다. 인간은 악마가 쳐놓은 베일 바깥 저쪽 대상을 찾아갈 길 없고 어른거리는 것만, 이게 천이거든요, 어른거리기만 하는데 전부다 헛것이란 말이죠. 그럼 이 베일 뒤에 뭐가 있는가? 궁금하죠? 궁금합니까, 이 뒤에 뭐가 있는지? 뭐가 있느냐 하면 ‘없음’이 있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다 꿈같은 거예요.

뭔가 베일이 있어줘야 뭐 있어 보이잖아요. 부잣집 재벌이 행복합니까? 행복해보이죠. 부잣집이 여러 가지 행복의 요건들, 고급차에다가 많은 것하고 뭐 맛있는 식사에다가 뭐 이렇게 잘 해보죠. 막상 그 부잣집에 들어가서 한번 살아보세요. Nothing! 아무것도 없어요.

행복이란 자기를 잊어버릴 때 나타나는 게 행복이에요. 인간은 자기의 욕심의 엉덩이로 이걸 깔아뭉개버렸어요. 기도 안 하면 행복한데 기도해서 불행해지는 거예요. 기도도 자꾸 개발해내는 거예요, 목표와 목적을. 그냥 있어도 주는데 꼭 내가 영험한 기도해서 응답받는 식으로 이걸 갖고 싶은 거예요. 그래야 내가 신앙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자, 그렇다면 신앙 있는 것처럼 보이면 그게 마음에 만족스럽고 행복하고 편안합니까? 살림살이 나아졌어요? 그런 거 없습니다.

이 거짓된, 아무것도 없는데 베일 깔린 요근래 유명한 사람 있습니다. 성은 허요, 이름은 경영, 허경영이에요. 일단 허경영 아이큐가 430입니다. 전주 길에서 서울까지 오는데 차로 1시간밖에 안 걸렸어요. 축지법을 써가지고. 그때 네 명이 동승했는데 전부다 의식을 잃어서 나중에 와보니까 서울이라. 1시간 축지법을 써서. 그다음에 어떤 장님도 허경영 눈만 바라보면 그 장님 눈을 뜨게 되어있습니다. 내 눈을 바라봐, 하는 거 있잖아요. 허경영 눈만 보면 장님이 눈을 뜨게 되어있어요. 그다음에 허경영은 23초간 공중부양이 가능합니다. 물론 두 손 짚지만 공중부양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허경영이 대통령 되면 결혼한 사람 1억 주게 되어있어요. 그리고 허경영은 자기 재산의 99.9%를 전부다 어려운 사람에게 나눠줬습니다. 나머지 0.1%인데 그 재산이 430억. 도대체 얼마나 끌어 모은 거예요. 얼마나 끌어 모아서 그렇게 된 거예요.

그 허경영 수법을 오늘날 모든 목사가 다 하고 있습니다. 베일을 치는 거예요. 베일을 쳐서 여러분 고객님들, 교인들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하나님께 헌신하시면 여러분, 제가 드립니다. 그리고 실제로 받은 사람들 쭉 서서 간증집회 하게 합니다.

사실은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성도는. 왜냐하면 본인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구원받을 가치도 없기 때문에 그래요. 행복할 가치도 없고 천국 갈 가치도 없기 때문에. 그것은 샛별이 떠오르고 난 뒤에 비로소 발견한 거예요. 내가 빛이 아니고 빛이 따로 있었던 겁니다.

그 빛과 내가 이제는 따로 노는 게 아니고 같이 가는 겁니다. 그걸 예수 안이라 하는데 예수 안에서 함께 있습니다. 우리의 최종적인 등급은 다른 거 필요 없어요. 그냥 사랑이에요. 요한일서에서는 그 사랑을 유일한 계명으로 봅니다. 유일한 계명, 최후 계명은 그냥 사랑이에요.

그런데 이제부터 여러분들 골치 아프게 만드는 이론이 시작됩니다. 여기 민간에 거짓 선지자들이 등장했잖아요, 베드로후서 2장 1절. 그럼 선지자가 하나일까요, 하나 이상일까요? 여기 보면 하나 이상이에요. 그렇죠? 그런데 마태복음 24장 잠깐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4장을 보면 마지막 때 징조 가운데서 15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여기 가증한 것이 필히 멸망되어야 돼요. 다시 말해서 멸망이라는 운명에 완전히 고정되어버린 절대로 구원될 수 없는 자가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멸망이 가까웠다는 거예요. 그러면 거룩한 곳과 멸망은 합치될 수가 없죠. 거룩한 곳에는 멸망을 안 세우니까. 세우지 않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거룩한 곳에 멸망하는 자가 세워지는 것을 주께서는 허락을 해버려요. 허락을 해버린다고요.

이 말은 멸망의 것, 그러니까 사탄이죠, 악마, 적그리스도. 적그리스도의 모든 활동의 최종 목적이 그냥 막연하게 돈 잘 번다, 부자 된다, 행복하다 여기 있는 게 아니에요. 노리는 게 있어요. 악마가 노리는 것은 바로 유사 십자가, 유사 복음이에요. 거룩이에요, 거룩. 악마가 마지막 노리는 것은 거룩입니다. 그래서 혼돈이 일어나는 거예요.

모든 성도는 거룩하고 싶어요. 그런데 너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너만. 너만 그런 게 아니고 악마도 거룩하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악마의 운명은 이미 멸망되기로 작정된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어제 설교에 그런 말했죠. 모든 철저한 위선자들은 다 종교계에 모인다 했어요. 모든 위선자들, 거의 들킬 수가 없는 위선자들은 종교계에 다 모입니다.

독재자들의 특징은 전부다 종교적이에요. 대표적인 것이 지금 우리나라에 통일교가 있다면 휴전선 이북에는 누가 있습니까? 김정은이 있잖아요. 똑같은 종교단체에요. 북한은 종교단체가 아니면 설명이 안 되는 단체입니다.

종교라는 것, 거룩이라는 것, 그것은 근원적으로 인간의 정신을 최종적으로 장악하는 악마의 수법의 가현체에요. 심지어 모든 국가도 마찬가지고요, 짐승이니까. 인간의 마음을 휘어잡고 인간의 마음을 자기 것으로 끌어당기기 위해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못할 게 없죠. 희생, 봉사, 헌신, 충성 다 합니다. 고난 받기, 십자가 지기 다 해요.

그 많은 것을 다 하면서도 딱 못하는 게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세리가 고백했던 나는 죄인이라는 이야기는 추호도 그 입에서 나올 수가 없어요. 이렇게 희생하는데 왜 내가 죄인이야, 이렇게 봉사하는데 왜 내가 죄인이야. 그런 것은 큰 교회 권사님들이나 목사님들, 집사님들한테 한번 푹 치고 들어가 보세요. 난리 납니다. 그럴 리 없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0%이겠지만 제가 만약에 헌신예배해가지고 “여러분의 봉사와 모든 헌신과 기도와 예배는 가증스러운 것들입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어요? 장로석에서 막 뛰어올라오고 하겠죠. 난 도망가면서 맞아 죽는다 하겠죠.

그 소리를 왜 감당을 못하냔 말이죠. 그게 진리인데. 그걸 욕한다고 하지 말고 지금 제대로 내게 감추어놓은 진리를 와서 이야기해준 고마운 사람이잖아요. 아까 무슨 은인이라 했습니까? 생명의 은인이 아니고 뭡니까? 죽음의 은인. 너 죽어도 할 말 없어. 넌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게 얼마나 좋은 은인입니까.

전부다 자기 자랑 못해서 환장한 세상에서, 전부다 악마가 쳐놓은 헛된 비닐에 있는 무늬에 불과한 꿈에 불과한 것들을 쥐고 서로 내것이라고 잡아당기면서 그것도 권력이라고 청와대 안하고 어디 가냐...... 아휴, 어디 가든 화장실 하나만 있으면 됐잖아요. 그것 때문에 그게 문제가 되고...... 이명박이라는 사람은 장로라면서요. 그러면 마태복음 18장 말씀을 알 게 아니겠습니까. 내가 어디에 있든지 주와 함께 있다. 그럼 뭐 교도소 있으나 사면하나 관계없이 천국이잖아요. 장로라며? 장로라서 그런가.

내가 어디 있든지 주와 함께 있으면 천국 아닙니까? 성령이 함께 있으면. 북한에 있는 사람이 남한에 내려오는 것도 이해 안 돼요. 그냥 북한에서 신앙생활 하다가 조기에 죽으면 되잖아요. 그게 왜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까? 신앙을 빙자한 돈이 탐나서 그런 것 아니에요? 돈이 탐나서 그럴 가능성이 있어요. 자기 욕망대로 하고 설치고 싶은 것. 이제는 만나러 갑니다, 줄여서 이만갑. 나는 담배 이만갑인 줄 알았어요.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 식으로 빠져나올 것인가가 아니에요. 예수님을 어떻게 증거할 것인가입니다. 내가 어떻게 빠져나오는 게 아니에요. 사면되는 게 아니고. 나를 위한 용서는 없어요. 주를 위한 용서죠. 주님을 증거 하라는 거예요. 주께서 일방적으로 용서했음을 증거 하라고 우리를 구원한 거예요. 나 구원받았다는 자기 자랑하라고 한 게 아니고요.

지금 뭐가 어려우냐 하면 거짓 선지자가 하나냐 둘이냐 하는 겁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4절에 보면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이게 악한 사탄의 역사라고 되어 있거든요. 진리는 포함되지 않은 채 기적만 있는 게 사탄의 역사라 되어 있어요. 진리는 없어요. 복음의 진리는 없고 진리보다도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을 제공하면 그게 사탄이든 뭐 절에 가든 천주교 가든 뭐 자기 원하는 것 챙기면 그만 아니냐, 라는 것이 마지막 때에 눈에 보이지 않는 악마가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거예요.

악마는 눈에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활동을 제대로 잘하고 있습니다. 잘한다는 말이 옳은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악마는 말릴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허락했기 때문에. 악마가 무슨 짓 하느냐 하면 거룩을 빙자해서 이렇게 기적을 베푸니까 이것은 할 수만 있거든 믿는 자라도 유혹하게 만드는 거예요, 우는 사자와 같이.

우는 사자가 결핍 돼서 울어요. 배고프다 우어어~ 킬리만자로의 헤매는 하이에나가 좋은 고기, 나쁜 고기 가리지 않고 배고프니까 다 먹잖아요. 하지만 나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되가지고 썩은 고기는 안 먹겠다는 거예요. 배부르구나. 눈 덮인 킬리만자로에 올라가가지고 좋은 고기만 먹겠다.

여기(데살로니가후서)는 적그리스도가 하나라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일서에 보면 2장 18절에 “아이들아” 아이들이라 하는 것은 자기들이 후배니까 나이 많은 사도 요한이 아이들이라 한 거예요.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적그리스도가 일어났는데 앞에 무슨 말이 있죠. 무슨 적그리스도입니까? ‘많은’ 적그리스도. 어? 갑자기 하나가 아니고 적그리스도가 왜 많아졌습니까? 하나같으면 아직 적그리스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최종적인 적그리스도가 안 나타났으니까. 그런데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버리면 우리의 마지막 때 기다림 자체가 소용없게 되어버렸어요. 하나를 기다렸는데 다수가 나타난 겁니다.

이것을 이렇게 설명해야 돼요. 현재 지금 악마 쪽에는 다수가 등장한 거예요. 그럼 보조 맞춰서 예수님 쪽에도 여럿 예수님이 등장해야 됩니까? 악마 쪽에 다수 등장했으니까. 축구 11명 등장했는데 여기는 손흥민 혼자 뛸까요? 여기도 11명 되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에서는 예수님 혼자서 아무리 많은 적그리스도가 온다 할지라도...... 적그리스도가 북한 미사일 한 500개라 합시다. 그러면 여기 대응하려면 우리 남한에도 미사일 한 1000개는 준비해야겠죠.

그런데 그게 아니고 예수님 쪽에서는 한분만으로 충분합니다. 요한일서에서는 그 한분을 셋으로 나누었어요. 피와 물과 성령이 오직 한분만을 증거 합니다. 피와 물과 성령이. 그 대목을 한번 봅시다. 요한일서 5장 5-8절 읽어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과 피라 하는 것은 바로 물세례, 십자가 세례를 불세례라 하죠, 심판 세례. 그다음에 또 무슨 세례가 있습니까? 성령 세례죠.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이 셋은 합하였는데 이 셋은 방향이 뭡니까? 셋이 셋으로 되는 게 아니고 방향이 하나로 꽂히죠.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랬죠. 믿음, 소망, 사랑은 분명히 셋이라 해놓고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했잖아요. 그럼 이 말은 뭐냐 하면 소망도 사랑으로 귀환되어야 되고 믿음도 사랑으로 귀환되어야 돼요. 사랑으로 통합되지 않는 사랑에서 나오지 않는 믿음과 소망은 믿음과 소망이 아닙니다.

이것을 아까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나의 결핍과 나의 모자람을 채워주는 식의 믿음, 소망, 사랑은 아예 그런 믿음, 소망, 사랑 없습니다. 나는 죽어야 되지, 채워야 될 대상이 아니에요. 날마다 죽어있음을 확인할 뿐이죠. 그냥 믿음, 소망, 사랑이 주님 쪽으로 그냥 가게 만들어요.

잘 이해가 안 되시죠? 그럼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말합니다. 실제로 그런 일 있었다는 게 아니고 예니까 또 오해하지 마시고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난 그냥 스쳐지나갔습니다.’는 말을 어떤 분이 한다면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스쳐지나가세요.’

이 세상의 사랑은 반드시 한쪽이 사랑을 하게 되면 거기에 대해서 나도 사랑한다고 주고받는 게 있을 때 성사되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 사랑이에요. 사랑의 보람을 느끼잖아요. 내가 만약에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께서 나도 너 사랑한다고 응답해주면 그것은 바로 악마가 만든 가짜 사랑이에요.

사랑은 다시 주님께로 최종 돌아가게 되어있지, 죽은 나의 것으로 되돌아오지 않아요. 나를 가져가는 거예요. 나를 가져가면서 그 요한일서에 나오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나와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벌써 우리의 사랑은 주께서는 안 받죠. 우리의 주님에 대한 사랑을 안 받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천주교 교리의 대가.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천주교가 그 사람 이론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는 천주교의 모태가 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이론을 한 사람이 토마스 아퀴나스에요, 신학대전. 그 사람이 이런 소리를 했어요. ‘주님이 나 토마스 아퀴나스를 사랑한다면 내가 주님이 되고 주님이 토마스 아퀴나스가 됐다고 칠 때 그때 그 사랑을 해주시옵소서.’ 라고 이야기했어요.

굉장히 복잡하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주님이여, 주님이 저를 일방적으로 사랑할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것도 주님 사랑 못지않음을 주께서도 좀 알아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런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 이유는 이 세상의 남녀 간에 사랑과 하나님의 인간 사랑이 동일한 속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런 생각을 왜 합니까? 교인들 끌어 모으려고 하는 거예요.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 사랑입니다. 특히 어미의 사랑은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천주교가 어미의 사랑 대신에 거기에 박아 넣은 사람이 누구죠? 예수님께 직접 부끄러워서 못하는 사람은 우회해서 그걸 엄마찬스라 하거든요, 엄마찬스. 누구한테 하란 말입니까? 성모 마리아한테 빽 써가지고 사랑해달라고 하면 사랑한다는 거예요. 이거 뭐 장난도 아니고요.

그러니까 남의 말 할 것도 없이 기독교도 비슷하죠. 성모 마리아 없다 뿐이지 비슷해요, 뭐든지. 여기 성모 마리아대신에 기독교에서 나온 게 중보기도 아닙니까? 애들아, 아버지 믿음 좋으니까 내 빽 써서 아빠찬스 해서 구원 받아라, 이게 중보기도 아닙니까. 여보, 당신은 지금 돈 번다고 바빠서 교회 못 갔지만 내가 그동안 교회 다녔으니까 아내 찬스 써서 당신도 구원 받아, 내가 중보기도 해줄게. 이거거든요.

이 천주교나 모든 이단들의 원인은 여기에 있어요. ‘있음’. 있음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나 있음. 아까 적그리스도가 어떻게 해석한다고 했습니까? 일어나는 모든 사태를 누구 중심으로 해석한다? 나 여기 있음 중심으로 이걸 끌어 모으는 거예요. 그게 나한테 뭐가 이익이고 손해냐, 그걸 따지면서 이익 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손해 되면 하나님께 기도하겠다는 거예요. 더 달라고.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들이 있겠습니까? 인간의 욕망이 있는데.

그래서 요한일서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옵니다. 적그리스도가 뭐냐? 2장 18절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났다. 그러면 이 적그리스도가 뭐냐가 나와요. 4장 1절,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거짓 선지자들이 왜 그리 많이 범람하고 있느냐?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피 하나만 해도 충분히 그걸로 대체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훌륭한 예수님으로 대체되는 게 아닙니다. 거룩하신 예수님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남긴 증거가 뭡니까? 훌륭하신 예수님, 거룩하신 예수님이 아니에요. 뭡니까? 예수님의 뭐에요? 예수님이 흘린 피와 물과 성령이에요. 예수님의 피라니까요, 예수님의 피!

이것이 요한일서 1장에 나옵니다. 그의 피 흘림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된다는 이야기에요. (요한일서 1장 7절,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모든 죄는 피 흘림으로 끝났어요. 거짓 선지자가 어떤 경우라도 거짓 선지자는 이 말을 못해요.

왜 그런 말을 못하는 줄 알아요? 궁금해요? 왜 거짓 선지자가 피 흘림으로 죄가 끝났다는 말을 못하는 줄 알아요? 거짓 선지자는 내가 여기 있잖아. 있다면 꿈을 꾸어야지. 항상 너는 행복해야 돼. 너 천국가야지. 너의 그 결핍은 하나님에 의해서 만족스럽게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자꾸 현재 있다고 여기는 나, 죽지 않고 있다는 나를 자꾸 자극시키는 거예요, 나를.

나는 개코도 아무것도 아닌데 우쌰우쌰 와가지고 이렇게 어깨동무하고 격려하고 하는 거예요. 너는 여기서 주저앉을 위인이 아니야. 성경 몰라? 일곱 번 자빠져도 몇 번째 일어난다고요? 여덟 번째 일어나자. 이 성경말씀 보이잖아. 하여튼 욥의 친구가 성경말씀 인용하는 데에는 도사에요. 악마도 마찬가지고요.

하여튼 모든 성경말씀을 ‘예수님이 죽어야만 했다. 왜? 우리는 워낙 죄인이라서.’ 거기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고 성령이 없는 사람은 사람은 있는데 성경말씀이 부족해가지고 이것만 채우면 너는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네비게이토나 여호와 증인들, 그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역량을 총동원해서 구원에 이르고자 합니다. 그럼 그들이 누구한테 배웠겠습니까? 네비게이토가 초대교회에 있었어요? 아니면 중세에 있었습니까? 누구한테 배운 거예요? 바로 개신교에서 배운 거잖아요. 개신교가 그들의 모토가 된 겁니다.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봅시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그다음에 뭡니까?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았잖아요.

그러니까 택하지 않으면 무엇과 만남이 안 된다는 거예요? 택하지 아니하면 피 뿌림이 그 사람에게 연결이 안 되죠. 피 뿌림을 증거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오직 한 가지 일로 모든 것을 끝내버렸다는 것을 증거 하시기 위해서 택하심이 있는 거예요.

베드로후서 다시 봅시다. 여러분 지금까지 강의 들으면서 거짓 선지자가 그리고 적그리스도가 어디를 노리는가 보세요. 그들이 성전에 섰다는 것은 거룩한 곳에 섰잖아요. 그러면 이미 거룩한 곳은 거짓 선지자에게 점령된 거예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거룩한 곳. 그러니까 교회는 마귀 손에 다 넘어가요. 그런데 그걸 누가 허락했습니까? 주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미끼 던진 거예요.

아무리 미끼 던져도 피 뿌림으로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된 이 사실은 그들이 어떤 점령군이 된다 할지라도 점령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은 성령을 통해서만 갈수 있기 때문에. 그걸 제가 주일 오후 설교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지도가 없는 대지. 그리고 하나 더 썼어요. 지도에 없는 대지.

같은 말이 아니에요. ‘지도에 없는 대지’라 하는 것은 예수 안은 인간이 만든 지도에는 구글 지도에는 예수 안이 표시가 안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예수 안이 엄연히 있어요. 성령으로만 여기에 들어갈 수 있는 중첩된 새로운 공간이기 때문에.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어요. 그 예수 안.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같이 있어요.

문제는 지도에 안 나온다는 거예요, 구글 지도에. 구글 지도에는 평양도 나오는데 예수 안은 나오지를 않아요.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한곳에 모이든 안 모이든 상관없어요. 어느 자리에 있더라도 그것은 이미 교회 안에 있게 돼요. 바빠서 못 나와도 할 수 없어요. 그것도 교회 안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 입장에서는 없는 나라, 지도에 나오지 않는 나라. 세상에 없다고 여기고 없으니까 답답하니까 교회를 세워가지고 뭔가 모여야 성이 차잖아요. 모여 봤자인데. 동창회 모여 봤자 그게 하늘나라 안 되잖아요. 이 세상에는 없는데 있어요. ‘지도가 없는 대지’라 하는 것은 예수 안에서는 미국에 있든 북극에 있든 관계없이 전부다 같은 장소라는 뜻이에요. 지도가 없는, 지도가 필요치 않은 영토.

그러면 하나님이 준비해놓은 지도에 없는 대지, 예수 안.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바깥을 보면 돼요. 투명한 튜브 있잖아요, 투명한. 놀이기구인데 투명해요. 높은 데서 굴러 떨어지게 되어있는데 굴러 떨어지게 되면 좀 어지럽기는 하지만 재밌답니다. 그런데 40이상은 타면 안 된대요, 너무 어지러워서. 이 안에서 보면 투명해요, 투명하고 여기 물도 들어있답니다. 너무 굴러가지고 마찰력 때문에 나중에 다칠 수 있으니까 물도 있어서 타고 나오면 나중에 물에 흠뻑 젖어 나온답니다. 안 타봤지만.

이 투명한 예수 안에 있으면 바깥에 부르스 난리가 다 보이는 거예요. 이럴 때 이 사람이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에요. 해도 소용없는 짓을 종교란 이름으로 교회란 이름으로 미친 짓을 다 하고 있는 거예요. 베드로가 여기서 보고 있는 겁니다. 샛별이 떠오른 베드로가 해라, 해라, 해라. 마음대로 해라.

여기 바깥은 온갖 적그리스도 나와가지고 온갖 좋다는 신상 다 이야기해요. 뭐 거룩하고 성화되고 어떻고. 칼빈주의가 어떻고 구속사가 어떻고 언약이 어떻고 십자가까지 이야기하고요. 온갖 이야기 다 하고 있어요, 여기서. 사람들을 현혹하죠. 이걸 보고, 아이고 참 주님과 함께 있는 게 아니고 홀로 천국 뚫으려고 어지간히도 발악을 하는구나. 종교적으로 발악을 하는구나.

그런 차원에서 베드로후서를 보시면 이해 안 될 것이 하나도 없이 깔끔하게 이해가 다 됩니다. 그것도 초조함이 없이. 벌벌 떪이 없이. 까불어라. 아, 이렇게 까부는구나. 실컷 까불어라. 까불 땐 놀이동산 가서 까불어라, 실컷. 바로 베드로후서 1장 피 뿌림을 위해서 택하심 받은 그것, 이것이 수천 수만 명의 적그리스도를 이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주께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용서해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이 용서로 주님의 주되심을 증거케 하기 위해서 받은 용서이오니 이 용서가 나를 위한 용서가 되지 않고 주를 위한 용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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