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211111a 베드로후서1장 13절(망상처리)-이 근호 목사
베드로후서 1장 8절-9절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8절에서 9절까지, 베드로가 1장 1절부터 지금까지 계속 일관되게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성도되기’입니다, 성도되기. ‘성도되기’와 반대되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성도이다’입니다, 성도이다. ‘나는 성도이다’ 하고 ‘나는 성도되기’가 같은 말이 아니고 정반대말이에요.
사람들은 ‘나는 ~이다’로 그냥 이어집니다. 나는 ~이다. 내가 되기 위해서 안에 뭔가 내용물이 채워지고 그것이 ‘~이다’로 규정이 되고 확정되는 겁니다. 그러나 ‘성도되기’라 하는 것은 이 안에 있는 그 내용물과 내가 충돌되게 되어 있어요.
아주 더 쉽게 이야기할게요. ‘성도되기’란 뜻은 ‘나 안 되기’에요. ‘나처럼 안 되기’에요, 나처럼. 어쨌든 간에 내가 원하는 나는 기어이 온 혼신을 다하여 절대로 너는 너 같은 인간되면 안 돼. 이 말은 나는 ‘~이다’로 고집하기 때문에 내 마음에 드는 내용들이 이 안에 다 꽉 차있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것.
이건 예를 들면 알기 쉽죠. ‘나는 재벌이다’의 반대말은 ‘나는 재벌되기’, 쉽죠? ‘나는 재벌되기’니까 지금 자기는 과장이나 부장쯤 된 거예요. 안 그러면 신입사원이든가. 재벌이 안 되었기 때문에 목표가 재벌되기가 되는 거예요. 그러나 재벌은 재벌되기가 아니에요. 나는 재벌인데 뭐. 이미 도착해버렸는데.
그러면 ‘나는 재벌이다’ 할 때 재벌이 되는 내용과 나는 일치가 되는 겁니다. 내가 곧 재벌이다. 일치가 되죠. ‘나는 재벌되기’는 아직 미완인 거예요, 미완. 도중의 존재, 가고 있는 존재에요. 그럼 이 안의 내용은 ‘나는 재벌이다’가 아니고 ‘나는 과장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과장이지만 언젠간 재벌할 거야. 이사되가지고 재벌할 거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후서에서 베드로가 이야기하는 것은 ‘나는 그리스도이다’가 절대로 되면 안 되고 ‘나는 그리스도의 열매되기’에요, 열매되기. ‘나는 그리스도의 열매다’도 아니고 ‘열매되기’에요. 그러면 열매되기는 나는 그리스도의 열매되기에 방해하는 요소가 있을 거예요. 방해하는 요소가 뭐냐 하면 ‘나는 내가 되기’, 이게 방해하는 거예요. 나는 내가 되기가 방해하는 거예요.
초반부터 굉장히 중요한 거 해가지고, 다 오시지도 않았는데 중요한 거 해서 미안할 때는 다시 한 번 더 하는 거예요. 베드로후서 1장 8절-9절하고 있는데 여기서 베드로 사도가 부탁하는 것은 ‘나는 성도다’ 이거 용납 안한다 했죠. 이거 용납 안 됩니다. 인간에게 성도라는 건 없기 때문이에요. 인간은 그냥 인간답게 그냥 지옥가야 돼요.
무슨 뜻이냐 하면 다음과 같은 질문은 성립 안 된다는 거예요. 다음과 같은 질문은 성립 안돼요. “나는 지옥가면 안돼요.” 이런 거. 또는 “내가 천국에서 탈락되면 어쩐대유?” 갑자기 충청도 방언이 튀어나와버렸네. 어쩐대유? 내가 천국에서 탈락되면 어쩐대유? 그러면 나 안 되는데요. 이런 질문. 나 지옥가면 안돼요. 나는 천국에서 탈락하면 어쩐대유? 이거 큰일나는대유? 제가 충청도말을 하는 이유는 다 백종원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죽어서 지옥가면 나 어쩐대유?” 이런 거. 이런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이런 질문 자체가.
왜냐하면 앞에 ‘나’ 붙잖아요, 나. 충청도로 하든 전라도로 하든 서울로 하든 ‘나’는 반드시 지옥가야 됩니다. 인간이 지옥을 안 가게 되면 천국은 없어요. 꼭 지옥 가는 쪽이 있어줘야 천국이 빛이 납니다. 만인 구원설이라 해서 모든 인간이 천국 가면 그럼 지옥은 누가 간대유? 천국은 지옥 가는 자가 있음을 전제로 해서 천국이 만들어집니다.
지옥은 마귀가 가게 되어있어요. 마귀가 가거든요. 마귀가 가기 때문에 마귀하고 한통속이 된 자들, 마귀하고 합세된 자들, 말이나 행동에서 거침없이 마귀가 집어넣은 그것이 계속해서 모든 행동과 삶을 통해서 끊임없이 나오는 자들, 그 사람 인생은 ‘나’라는 인생이 아니고 마귀가 만들어낸 인생이겠죠.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없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성경적으로 봐서 이미 아담은 악마의 권세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여기서 권세라는 것, 권세 또는 권력. 권세와 권력은 같은 말인데 여기에 담긴 뜻은 간단해요. 갇혀있다는 거예요. ‘갇혀있다’ 달리 말하면 ‘닫혀있다’. 그 테두리를 권력, 권세라고 하는 겁니다. 만약에 갇혀있지 않고 탈출이 되어버리면 권세, 권력이 아무 의미 없어요. 지 마음대로 왔다갔다 하는데 거기에 무슨 권세가 있겠어요? 권세가 있다, 권력이 있다는 것은 갇혀있다는 겁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그다음에 나오는 말이 뭡니까?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인데 세상을 주관하는 “세상 주관자들과” 그다음에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고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을 향하여 권세를 유감없이 신나게 발휘하고 있는 그 자에 대해서 지금 성도는 싸우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싸울까요? 아니요. 성도가 싸우는 거예요. 참, 이런 말이 어려워요. 내가 싸우는 게 아니고 성도되게 하신 그 됨, 성도됨은 인간이 아니고 인간을 인간되게 했던 그 배후의 주님에 의해서, 주님의 권세로 인하여 세상에 있는 악한 악마의 권세와 싸우게 되어있다 이 말이에요.
이것은 사람 대 사람, 너 어디가노? 지옥. 난 천국. 싸울까? 하는 인간 대 인간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이거 뭐 어벤져스도 아니에요. 영웅들의 이야기도 아니에요. 영웅 같으면 본인이 영웅이잖아요. ‘영웅되기’이지 ‘영웅이다’라는 건 성립이 안 됩니다. 하여튼 인간에게서는 인간이 ‘~이다’할 때 그 내용물은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다른 데서 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나는 나다’에요. 이거는 뭐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누구냐? 나는 나다. 그러니까 내가 나가 되는 그 내용물은 내 안에서 오는 겁니다. 나는 나다. 그런데 성도는 없죠. 나는 나인데 무슨 성도가 있어요? 성도는 ‘나는 성도되기’할 때 성도되기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에요. 성도의 내용물을 제공하신 어떤 분이에요. 그 분이 예수님이고 나는 예수님의 열매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열매. 파생된 것.
이거 뭐 어려운 거 아니에요. 요한복음 15장에 나오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죠. 그러니까 가지의 내용을 채우는 것은 포도나무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에요. 지금 제가 난해한 이야기를 계속 하는 이유는 인간의 본성이 나는 나이고 싶은 거예요. 나를 규정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요한복음 15장 1절) 해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한복음 15장 4절)
이 말은 과실을 맺는 중간 매개체로서 우리를 사용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내 일이 없어요. 주의 일에 매개체가 되는 거예요, 주의 일에. 나는 뭐 주인공도 아니죠, 결국. 나는 주인공이 아니고 그냥 주의 일에 참여할 뿐이에요.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마태복음 25장에서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 한 달란트 있죠. 그 한 달란트 있는 사람이 지옥 불에 들어갑니다, 거기 보게 되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나는 나다’를 고집한 사람이에요. 다섯 달란트, 열 달란트는 ‘이건 주님 것입니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한 달란트는 주인이 멀리 타국에 가니까 ‘아, 나도 이제 숨 좀 쉬자. 나도 나답게 살고 싶다.’ 이래가지고 걸려든 거예요.
주인이 나한테 줬으면 달란트를 받은 나는 주인의 소유가 되는 겁니다. 여기 물컵을 드리면 보통 사람은 목사님이 나한테 뭐 줬다 하잖아요. 그게 아니고 받은 순간 당사자는 내 소유가 되는 거예요, 이걸 받게 되면. 인간이 주는 것과 주님이 주는 것의 차이점이 이거예요. 주님이 주게 되면 이건 주님의 열매가 되는 거예요.
주님의 열매가 없는 자는 지옥 갑니다. 잘린다고 되어 있으니까요, 요한복음 15장에. 그럼 주님의 열매가 있으면 내가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천국 가는데 거기에 일꾼으로 덩달아 합류해서 가게 되는 거예요. 어쨌거나 저쨌거나 나라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요. 나라는 자체를 주께서는 인정을 안 해준다고요, 나라는 건.
이걸 오늘날 여러분의 생활에 한번 적용시켜봅시다. 그럼 여러분의 하는 일은 여러분 자신의 일입니까, 주의 일입니까? 지금 이 질문이 성립돼요. 내 일이 아니고 누구의 일이냐 하면 이게 주님의 일이죠. 심지어 직장에서 잘려도 주의 일이죠. 이게 주님의 일인 거예요.
그럴 때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어떻게 사람으로서 자기가 분명히 있는데...... 이건 내 인생이고 내가 가진 것부터 해서 내 것이 아니라고 하는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느냐 할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후서 1장 1절부터 너희는 어떤 보배로운 믿음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 건 아닌데 주님에게 있던 믿음이 확장되어서 내가 받은 거예요.
오늘 강의에서 아직 핵심 부분 나오지도 않았어요, 지금. 거기까지 안 가고 있습니다. 거기까지 미리 한번 가볼까요? 이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다 아는 이야기이고요. 다 아는 이야기? 다 아는 이야기이고 핵심 부분은 인간의 ‘되기’에서는 존재가 사라지고 오직 생성이에요. 되기는 무한 변신입니다. 무한 병신 아니고 무한 변신. 계속 바뀌는 거예요. 어제 나하고 오늘 내가 작업복이 바뀌어지는 겁니다.
주께서 오늘의 상황을 만들어놓고 오늘의 상황에 맞는 작업복, 유니폼을 또 입혀가지고 오늘 주의 일을 또 하게 하시는 거예요. 나는 나로 고정된 게 아니라는 거예요. 계속해서 끊임없이 무한 변신되는데 이게 예상이 안돼요. 내가 어떻게 달라질지, 어디서 무엇을 하게 될지 예상 자체가 되지를 않습니다. 이게 한마디로 become, 되기에요, 되기.
내가 되는 게 아니고 ‘되기’가, 곧 현재의 내 모습이 무엇 무엇이 된 거예요. 나는 주부가 되고 싶어. 아니에요. 주부 되게 하신 거예요, 주부 되게 하신 것. 주부 되게 하신 거예요. 누가? 주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주부로서 변장된 겁니다. 변신이 매일같이 되는데 본인도 어지러워요. 다음에 어떻게 될지 몰라가지고.
만약에 고정이 되어버리면 악마의 표적이 되어서 내가 나에게 우상이 되어버립니다. 주께서 그 현장에 있게 하신 것은 우상이 안돼요. 내가 그 자리를 탐낸다. 이러면 이게 우상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나를 고정시키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면 처음에 아담이 선악과 따먹을 때 호기심으로 따먹었어요, 호기심.
그래서 ‘나는 나다’할 때 그 내용물을 인간들은 호기심으로 계속해서 내 욕망에 충족되도록 다른 걸로 바꾸는 거예요, 다른 걸로. 이 교회 갔다가 저 교회 갔다가 뭐 이 직업 하다가 다른 직업 하다가. 사업 때려치우고 뭐 딴 거하고. 계속해서 내가 되고 싶은 호기심이, 나의 욕망에서 나온 호기심이 계속 발휘되는 겁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보고 탐내는 것과 똑같은 현상이에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아담을 처음 만들 때 아담은 몰랐어요. 이게 ‘아담 되기’하신 거예요, 아담 되기. 그런데 아담은 악마가 와가지고 ‘내가 아담이다. 내가 인간이다.’ 이렇게 우긴 겁니다. 범죄하고 난 뒤에 나는 인간이라는 거예요. 그러니 주님께서는 ‘너는 인간이 아니고 너는 흙이야’라고 규정을 시켜버린 겁니다. 우상된 것을 소멸시키기 위해 흙이라는 무기물질, 하나의 물질이 되는 거예요. 나중에 흙 부스러기가 되게 만드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95세까지 살았다. 지금 송해가 95세거든요. 송해가 95세에 전국 노래자랑하면서 있다 이 말이죠. 만약에 송해가 앞으로 25분 뒤에 죽는다면 24분까지 나는 나다. 나다. 하다가 그다음에 뭐로 변합니까? 무기물, 흙으로 변하죠. ‘나는 나다’ 보다 무기물로 변하게 하는 주님이 더 세거든요. 어느 게 현실입니까? 나는 나라고 우기는 그게 현실입니까? 그건 환타지죠. 환상이죠. 인간은 내가 나라고 하는 순간 자기 자신은 환타지가 되어 있어요. 환타지가. 환상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 꿈에 여러분이 나타날 때 여러분이 보통 몇 살 때로 나타나던가요? 그건 뭐 나이따라 다르겠죠. 일곱 살 먹은 아이가 40살 모습으로 등장하지는 않을 거고. 살아온 가운데서 한 테마를 그 상황에 맞도록 그 때 그 체험이 있었던 나이로 스톱이 돼서 그 나이로 온다 이 말이죠. 그게 바로 환상이죠, 환상. 망상입니다.
인간은 나를 생각하면 순간적으로 망상이 돼요. 흔히 자기가 꿈속에 놓여있는 거예요, 꿈속에. 제가 설교시간에 어떤 노래가사 얘기했잖아요. 꿈속에서만이라도 혼자 좀 쉬고 싶다. 그 쉬고 싶다는 게 뭐냐 하면 나는 영원하고 싶다. 나는 영원한 고정적인 그런 본질을 나는 즐기고 싶다. 나는 나이고 싶다. 그게 바로 범죄한 아담의 흔적입니다. 후유증이에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만든 적이 없어요. 인간이 인간을 자기가 그런 식으로 만들어낸 겁니다. 환상을 통해서 망상을 통해서 만들어 낸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전부다 정신병자들이에요. 망상가에요, 망상가.
고흐라는 유명한 화가의 작품들을 보세요. 작품마다 다 달라요. 그 때 그 기분을 본인이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작가뿐만 아니라 음악가도 마찬가지고. 매 순간 본인이 다르니까 본인이 정신을 못 차려요. 어떤 때는 기분 좋았다가 어떤 때는 기분 나빴다가. 기분 좋을 때가 본인이에요, 기분 나쁠 때가 본인이에요? 몰라요. 그걸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에서는 이렇게 합니다. 미리 한번 볼게요. 10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다시 말해서 너희들의 출처, 너희들의 원형, 그것은 내가 있는 이상은 한자로 써서 무(無) 또는 영어로 하면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라는 것은 근거도 없고 원천도 없고 뿌리도 없고 바탕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나는 망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망상이기 때문에. 나라는 것은 공중에 뭔가 푹 튀어나온 거예요.
그래서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 가운데 이런 거 있잖아요. 본인은~ 전두환 대통령이요. 본인은~. 이 “본인은~” 하고 이야기할 때하고 자기 부인하고 있을 때하고 완전히 말이 다르죠. “할렐루야” 이런 인간하고 자기들끼리 까불고 있을 때 인간하고는 달라요. 나의 내용을 일단 인간은 나는 이렇다고 해놓고 내 마음에 드는 것을 억지로 그냥 계속해서 내 마음에 들 때까지 억지로 내용물을 자꾸 채우는 거예요.
채우니까, 망상이 망상으로 끝나야 되는데 망상이 망상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마치 실제로 내가 그것인 양 행세를 하니까 정신병이 더욱더 도지고 갈수록 깊어만 가네요, 정신병이. 마치 가을밤처럼. 깊고 푸른밤인지 제주도의 깊고 푸른 밤인지... 갈수록 점점 그 바닥을 모를 정도로 계속 내 것으로 내 것으로 채우는 거예요. 자기가 일기 써놓고 일기 쓴 걸 나중에 읽어보세요. 가관입니다, 가관. 뭔가 억지로 노력하는 게 보여요, 일기는. 나를 다른 멋있는 다른 나로 억지로... 이거 뭐 망상인데 억지로 바꾸어보려고 하는 거예요. 진정한 나는 찾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처음에 강의한 게 뭐냐 하면 성도의 반대말은 뭐라고 했습니까? 나라고 했죠. 성도는 실제인데 나는 환상입니다. 그러니까 적대적이에요. 서로 원수가 되는 거예요. 나는 물론 망상이니까 이건 마귀에 속한 거고요. 성도는 물론 부르심이 성도 안에 채워져 있고 그다음에 결정적인 것은 선택하심이 이 안에 있는 거예요, 선택하심이.
그러니까 나라는 육체 안에 주님이 계시고 주님이 아주 파이프를 박아놨어요. 박아놔서 주님이 이룬 공적과 실적을 여기서 흘려보내는 겁니다. 계속해서 흘려보내는 거예요. 그럼 흘려보내면 비누 방울 할 때 훅 불면 파이프 끝에 비누 방울 올라오는 것처럼 주님의 것이 볼록 올라오면 이게 바로 열매라는 거예요, 열매.
그 열매가 어떤 종류의 열매냐 하면 여기 5절에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 이 모든 게 주님의 열매라는 겁니다, 주님의 열매. 그러니까 지식도 신의 성품이니까 주의 것이고 덕도 주의 것이고 지식도 주의 것이고 절제도 주의 것이고 인내도 주의 것이죠. 그건 이해되겠죠?
이게 주의 것이라는 말은 무엇과 싸운다는 말입니까? 내가 환상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 내가 채운 나의 것과 싸우게 되는 거예요. 싸우는 거예요. 안 싸울 거 같으면 성경을 통해서 이런 지시를 안 내립니다. ‘너네 그냥 살아, 성도야.’ 이렇게 하지. 치열하게 싸워야 될 이유가 있어요. 끊임없이 내가 하는 나의 망상도 만만치 않습니다. 육이 있는 한 죽을 때까지 계속 ‘나는 예수는 모르겠고 평생 나는 나다우면 됐어.’ 이런 식으로 내 내부에서 굉장히 박차고 올라오는 거예요.
11절 봅시다.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되어 있죠. 그러니까 주님께서 성도에게는 다 주님의 계획이 있어요. 목표가 있다고요. 그 목표를 짧게 보는 것, 그러니까 순간 순간 세상 것을 목표로 보는 것을 가지고 여기 9절에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멀리 보지 못한다. 흔히 하는 말로 큰 그림을 볼 줄 모르고 코 앞에 있는 자기 자존감, 자기 위신, 명예, 남한테 안 꿀리고 싶은 그러한 자의식, 이 모든 것을 구성해서 나답게 되고 싶은 거예요.
자, 이런 이야기를 한마디로 하면 말이 어렵지만 이 한마디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게 뭐냐 하면 ‘의식’이에요, 의식. 이제부터 의식 이야기합니다. 의식의 반대말은 의식이 없는 것, 무의식이 되겠죠. 지금 인간들은 나를 의식하고 있어요. 나를 의식하고 있다고요. 이게 사람 인생을 참 힘들게 합니다. 나를 의식하는 것.
누구한테 지시받으면 되는데 명령을 내가 내려요. 내리면서 꼭 갖다 붙는 게 있어요. 네가 이래야 너 다운거야. 그럼 나답다는 게 뭐냐. 나답다는 게 뭐냐. 어떤 사람이 일을 잘 하면 ‘참 너답게 했다.’ 뭐 그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예를 들어서 그런 가수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J1이라는 가수가 있다고 합시다. 이 가수가 공연을 잘 했어요. 그때 최고의 칭찬이 뭐냐. J1이 J1답게 했다. 이게 최고의 칭찬이에요. 그런 칭찬을 받아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네가 너답게 했다. 이 말은 남 흉내 내지 않고 네가 추구하는 가장 너다운 것으로 빛을 내었다. 그래, 바로 그거지. 그래야 내가 네 팬이 되는 거야. 너는 누구 닮았다든지 누구와 유사하다는 것보다도 너는 너다울 때 가장 빛이 나는 거야. 내가 지금 오랜만에 칭찬하는 거예요, 지금. 지금 모든 연예인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가 그 이야기 아니에요?
아들이 공부를 갑자기 잘해서 오랜만에 100점 맞았다. 그래, 그래야 내 아들이지. 이런다고요. 바로 그거야. 엄마가 잔소리하는 게 바로 거기에 있는 거야. 이 이야기를 안 들어보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혹시 들어봤습니까? 이 이야기를 안 들어본 사람 있어요? 다 들어요. 다 듣기 때문에 인간은 인생이 이렇게 힘들고 괴로운 거예요.
남들이 나한테 요구조건이 너무 많아요. 심지어 어른 돼서 누가 잔소리 안 해도 어릴 때 들었던 그 모습 있잖아요. 누구의 딸답게 누구의 아들답게 처신하라는 게 누가 잔소리를 안 해도 이제는 타인의 지시가 내 안에 작동이 돼요. 자동적으로 작동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의식은 무의식의 지시, 명령대로 해가지고 반복하게 되어 있어요. 의식은 반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쉬운 거고 이제부터 어려운 거 하는데 어려운 거 할 때는 좀 주무셔도 괜찮아요, 너무 어렵기 때문에. 제가 질문을 던지면 이게 왜 어려운가를 알 수 있죠. ‘성도가 도중에 열매가 사라지면 지옥 갑니까?’ 하는 이 질문.
9절 봅시다.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제대로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라고 했을 때 이 본문을 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베드로 사도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묻고 싶어요.
지금껏 잘해왔는데 만약에 한 30, 40년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그리스도 알기를 게으르고요. 여기 8절에 봅시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렇게 되어 있죠.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을 그동안 많이 알았는데 도중에 힘이 들어가지고 어떤 일이 벌어져가지고 예수님 알기에 게으르고 열매 없는 자가 되었다 했을 때 지옥 갑니까, 베드로 사도님? 이라고 묻고 싶겠어요, 안 묻고 싶겠어요?
전에 저쪽 교회 있을 때 열심히 나왔다 이 말이죠. 그런데 지금은 안 나온다 할 때 그 사람 지옥 갑니까? 너무 질문다운 질문해서...... 어떻습니까? 이게 어려운 질문이에요, 쉬운 질문이에요? 누구나 그런 궁금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마 못했던 질문을 제가 대신 해드리는 겁니다.
같은 건데 그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게요. ‘무의식적으로 성도 맞는데 내가 의식을 못하면 지옥 갑니까?’ 하고 같은 질문이에요.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면에 성령이 있는 것 같은데 여기 8절, 9절의 말씀처럼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을렀다 이 말이죠. 게으르다 보니까 열매가 없어요. 열매 없는 자가 되고 또 원래는 소경이 아닌데 이제는 소경이 되어가지고 우리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어버릴 경우에 이 사람은 결국 탈락이냐, 아니면 합격이냐?
그 질문을 베드로후서 1장 11절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11절에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그러면 ‘열매 있고 게으르지 않는 사람만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면 결국 사도 베드로의 이야기가 율법밖에 더 되냐? 율법이잖아. 분명히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났는데 또 율법 지켜야 됩니까, 목사님?’ 하고 질문할 때 여러분 어떻게 답변해야 됩니까? 이게 지금 하고 싶은데 못했던 질문을 제가 다 끄집어내고 있는 거예요. 집 청소 좀 하고 싶어요. 간만에 다락방 청소 좀 하고 싶습니다, 우리 의식 창고를.
자, 고린도전서 6장 한번 봅시다. 고린도전서 6장 9절-11절까지 보겠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절,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그다음에 12절 들어가지 말고 11-1절, 지어내는 거예요. 11-1절, 지어낸 겁니다. ‘이와 같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는데 받아놓고 난 뒤에 음란과 우상 숭배와 간음과 탐색하고 남색하고 도적질, 탐람하고 술 취하고 후욕하고 토색하면 하늘나라 들어갑니까, 못 들어갑니까?’ 이게 질문이에요. 오늘 신이 났다, 신이 났어. 지금 이런 예상되는 질문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답변을 가지고 평소에 살아가셨습니까? 평소에 어떤 답변을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또 한군데 더 찾아봅시다. 요한계시록 22장 15절, 성경 찾을 것도 없이 제일 마지막 찾으면 됩니다. 요한 계시록 22장 15절에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 그래놓고 17절 봅시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그럼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로 값없이 생명수를 받을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라는 질문도 성립이 되겠죠.
아까 질문하고 좀 비슷한 것 같지만 비슷하지는 않아요. 이미 성령으로 부르심 받아놓고 죄 지었을 때 구원 받느냐 하는 것은 아까 고린도전서 6장 이야기이고 요한계시록은 값을 치른 게 아니에요. 뭐 개과천선 한 게 아니고 값없이 그냥 받는데 그 받는 자격자가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이런 사람들도 하나님의 생명수를 17절에 의해서 목마른 자가 오면 값없이 생명수를 받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요. 만약에 생명수를 받으면 행음자, 살인자, 우상 숭배자 이런 사람들은 성 밖에 있는 게 아니고 생명수 받아가지고 이제는 천국 안에 들어오게 되겠죠.
자, 여러 가지 질문들을 했는데요. 여러분들이 듣기를 원하는 것은 그 여러 가지 질문들을 하나하나 답변하지 말고 하나로 묶어서 깔끔하게 한방에 쭉 어떻게 처리하는 방법이 있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이미 구원받았다, 무의식적으로. 하지만 의식적으로 열매가 없고 게을렀다. 그리고 자기의 죄 씻음을 잊었다. 할 때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게 의식 이야기에요, 의식. 나와 결부된 나의 의식 이야기에요, 나의 의식.
그런데 아까 나는 뭐라고 했습니까? 환상이죠. 망상이에요. 나는 예수님의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나라는 것을 따로 떼어 낼 수가 없게 되어있다 이 말이죠. 가지가 포도나무를 떠나버리면 그것은 더 이상 진짜 가지가 아니고 그림이죠, 그림. 벽에다 그린 그림이죠. 붙어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도권이 나한테 있습니까, 없습니까? 주도권이 없어요. 왜 붙어 있습니까? 주님이 주도권 쥐고 있기 때문에 붙어있는 거예요. 내가 주도권을 쥐어버리면 나는 이미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요.
그런데 육이 있는 한 끊임없이 나라는 망상이 계속 올라오는 거예요. 이게 망상이지만 의식할 때는 이게 망상이 아니고 이게 실제 ‘나’가 돼요. 의식에서는 나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내 의식이기 때문에 절대로 ‘나는 여기 있다’를 망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의식이 그렇게 느끼기 때문에. feeling 있잖아요, feeling. feeling이 누구의 feeling이냐. 내 감정. 내 감정이 있는 이상 ‘나’가 분명히 느껴지는 거예요.
다시 베드로전서 1장 봅시다. 1장 2절,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그다음에 뭡니까?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 그냥 택한 게 아니고 너를 택했으니까 앞으로 똑바로 해라가 아니고 거기에 뭐가 가미됩니까? 피가 뿌려지는 거예요. 피가 뿌려지는 거예요.
이 가지에, 가지보다 파이프가 더 낫다, 파이프에 피가 흘러들어오게 되면 여기서 ‘나’라는 의식이 발생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구원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이렇게 되어버리면 여전히 이건 나로 모든 것이 끊어진 상태에요. 주님이 뭐 되게 하십니까? 이렇게 되어야 돼요. 주님이 나로 하여금 나라는 자체가 이게 망상에 불과하고 그 의식이 나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피 뿌림의 효과, 실제적인 능력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망상이 튀어나오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라는 의식이 안 나올 수 없는데 주님의 능력이 되면 나에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분이다, 일부이다, 접붙임 받았다, 주님의 가지다’ 이런 식으로 계속 되돌아오도록 내 의식보다 주님의 의식이 더 강렬한 거예요.
안 되돌아오면 어떻게 합니까? 내 의식이 더 세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은 피 뿌림 받고 탈락된 자가 아니고 애초부터 그것은 피 뿌림 받았다는 것을 지식으로 나는 나답게 멀쩡하게 만들고 베드로후서, 전서를 몽땅 다 내 지식으로 끌어 모은 거예요, 그것은. 어디 가짜가 흉내를 내. 흉내 내기에요, 흉내 내기. 모방하기에요, 이것은. 성령이 없죠.
성령이 없으니까 신앙인 티는 내고 싶고 그럼 노력을 누가 해야 돼요? 내가 주인공이니까 내가 노력해야 되는 거예요. 베드로전서, 후서보고 요한계시록까지 뭐 성경 전체 가지고 괜찮은 것 다 끌어 모아가지고 내가 성도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의식에다가 집어넣는 거예요, 의식에다가. 그럼 묻습니다. 이게 예수님의 열매일까요? 자기 열매일까요? 누구의 열매입니까? 나의 열매죠. 그러니까 이것은 나 되기이고 나는 무엇이다가 되어버려요.
놀랍게도 이런 경우가 한국 교회의 대부분이라는 사실이에요. 분명히 성경대로 이야기하고 복음 다 이야기하고 구속사에다가 언약 이야기 다 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불.신.자. 목사가 돼서 강단에서 복음만 이야기해. 그런데 들어보면 그 목사가 불신자에요. 옛날에 MBC 마에스트로, 아주 엄격한 지휘자가 나오는 드라마가 있거든요. 그 지휘자가 자기 단원들 보고 뭐라고 했는 줄 압니까? 똥.덩.어.리. 했다고요, 드라마 안에서. 똥덩어리. 이 바보 등신들아. 똥.덩.어.리. 저는 그걸 불.신.자. 비록 네 자하고 세 자하고 차이가 있지만 불신자에요. 강단에서 복음만 이야기해. 불신자. 그게 뭔 뜻이에요? 복음만 전해서 나를 뭐 되게 만든다? 나는 신자이고 싶은 거예요. 성도이고 싶은 거예요. 뭐 피 뿌림까지 이야기 다 해요. 뭐 웃기지도 않아, 하여튼.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아까 에베소서 6장 12절. 우리의 싸움은 공중 권세 잡은 자들과의 싸움이죠. 그럼 인간하고의 싸움은 아니죠. 혈과 육은 아니죠.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자의식이 있기 때문에 항상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재료가 돼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을 그대로 따라가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 엄마가 나에게 뭘 요구하고 아빠가 뭘 요구하고 내 가족이 뭘 요구하는가. 내가 그거 다 들어줬어. 가족들, 주위 사람들로부터 내가 인정받고 싶은 거예요. 내가 성도가 아니고 그들이 성도라 해줄 때 나는 안심해가지고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은 거예요.
여러분 정말 성도라면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서 성도 아니라 해도 그냥 ‘아, 너희들 보기에 성도 아니구나. 그러면 가짜가 성도 아니라고 하니까 난 진짜네.’ 마음을 이렇게 태평하게 먹을 수가 있어요. 이게 시편에 나옵니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칠지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시편 3편 6절) 그러면 내가 성도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천만인이 둘러싸가지고 전부다 ‘너는 성도 아니다 성도 아니다’ 할 수밖에 없죠.
미가야 선지자가 몇 대 몇이었습니까? 미가야 선지자는 그 때 같은 선지자가 몇 명이었습니까? 400명이었죠. 미가야는 한 명이었죠.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가 몇 명이었습니까? 850명이었죠. 그 때 엘리야는 본인 한 명이죠. 850대 1. 숫자가 이러니까 실감 안 나죠? 그림 한번 그려볼까요? 1명을 3중, 4중, 10중이 둘러싸고 있어요. 400명 한번 그려볼까요? 여기 미가야 1명 있고 주위에 400명 한번 그려볼까요? 여기 총회, 목사, 장로, 전도사해서 400명 한번 그려볼까요?
보통 사람 같으면 음메 기죽어. 하겠죠. 그런데 미가야는 음메 기살아. 했다고요. 왜? 자기는 천상회의를 봤거든요. 하나님의 신이 임했거든요. 신이 임하니까 악령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첫째 시간 결론 내립니다. 성도라면 악마의 통치방식에 민감해야 돼요.
이게 혈과 육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너는 지옥 가’ 하는 사람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그 사람의 배후에 있는 악마의 인간을 다스리는 통치방법에 대해서 눈이 열린 거예요. 그게 바로 소경이 아닌 거예요. 맹인이 아닌 겁니다. 이게 큰 그림 그린 거예요. 세상을 넓게 보는 거예요.
돈 몇 푼 벌고 안 벌고 어디 뭐 콩나물 깎았다. 뭐 돈 안내고 공짜로 들어갔다. 이런 시시한 이야기. 몇 푼 되지도 않는 이익, 이런 거 하는 게 아니고 큰 그림. 차기 대통령 누가 되나, 그런 시시한 이야기 말고 중국이든 중공이든 북한이든 한국이든 일본 관계없이 이 우주 전체를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한 영. 악마가 어떤 식으로 지금 일하고 있는지 그 전체를 파악하는 겁니다. 그것은 10분 쉬고 합시다.
서울의존강의20211111b 베드로후서1장 13절(망상처리)-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 끝에 얘기한 것, 악마의 통치방법은 창세기 3장에 잘 나와 있어요.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해 살라고 촉구하는 거예요. 악마를 위해 살라 하는 것은 악마가 이야기한 적 없어요. 악마는 아담 편입니다.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자체로, 하나님이 하는 계획에 차질을 입혔다는 그 자체로 악마는 신바람 났어요. 그러니까 ‘너는 너를 위하여 살라’ 이게 악마의 통치방법이에요.
그래서 이 악마의 통치방법에 걸려든 사람은 항상 점검하고 항상 측정하는데 이 측정을 하기 위해서 내가 나다우냐를 세상을 통해 늘 실험합니다. 설교에서도 한 적 있는데 ‘실험한다’. 성경적 용어를 쓰면 ‘시험한다’. 내가 신자 맞는지 안 맞는지를 계속 시험하는 거예요. 십일조 한 20년 냈다가 십일조 이거 안 내면 어떻게 될까? 시험하고 점검하고 측정하는 거예요. 그 목적이 있어요. 나는 신자인가? 나는 성도 맞는가? 시험하는 거예요.
나 자체가 망상인데. 이 시험 자체가 성립될 리가 없죠. 나 자체가 망상인데요. 우리는 주님의 파이프라니까요. 주님의 몸체에 붙어있는 파이프에요. 나라고 따로 뽑아낼 자격도 없고 그럴 권한도 우리한테 없습니다. 그런데 악마가 자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는 너를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너 그러다가 천국에서 잘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악마가 통치하는 방법, 이걸 요한계시록에서는 ‘참소하는 자’라 해요. 고자질하는 자. 끊임없이 내 속에서 나를 고자질하는 거예요. 너 몰랐나? 베드로후서에 보면 ‘이런 것, 열매가 없는 자는 소경이라.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그러니까 잊지 말아야지. ‘잊었느니라’의 성취는 잊지 않는 것이 성취가 아니에요. 나 자신을 없애버리는 것이 성취에요.
아, 이거 너무 쉬운 건데...... 왜 그러느냐 하면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부르심과 택하심의 시발점, 시작점이 뭡니까? 나입니까? 나 아니죠. 적어야 되겠다, 이건 중요한 거니까. 나의 시작점과 나의 도착지점은 무(無)입니다, 무. nothing이에요. 없어요. 내 자체가 망상이기 때문에 나의 시작점과 도착점이 없어요.
시작은 나 말고 나 없음인데 다른 있음, 주님께서 시작하시고 주님께서 마감하시고 나는 그 안에 있어서 항상 변신하는 거예요. 매일같이 이게 달라져요. 계속 다른 나가 되는 거예요. 그건 주님 마음대로에요. 내가 비-고정되었다니까요. 고정이 되지 않아야 내가 우상이 안 되죠.
영화나 드라마가 실제 상황을 반영해주니까 거기에 보게 되면 소위 의리 있잖아요, 의리. 꼭 주먹을 왼쪽 가슴팍에 대고 의리. 의리 한다고 주식 거래 말아먹고. 이렇게 나의 나다움, 나의 개성을 내가 지켜내는 것, 이게 필생의 나의 과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거 우상 숭배자입니다. 사람은 ‘상황따라 변할 수 있다’가 아니라 안 변한 적이 없어요. 변할 수도 있는 게 아니고 안 변한 적이 없습니다.
어제는 어제따라 나였고 오늘은 오늘따라 나에요. 내일되면 내일따라 또 다른 나가 될 거예요. 나를 특정모습으로 붙잡으려고 하지 마세요. 그거 자칫하면 우울증 걸려서 정신병자 됩니다. 그냥 제발 여러분 자신을, 유명한 용어, 내비두세요, 그냥. 여러분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세요. 자꾸 나다움이 있어버리면 그게 우상화 된다고요. 마치 그래야 되는 것처럼.
지금 상황이 바뀌었잖아요, 상황이. 모든 환경이 바뀌었잖아요. 그 환경을 누가 바뀌게 했습니까? 주님이 바뀌게 하신 거예요. 너는 너를 위해 살지 말라고. 주님께서 악마의 통치방법을 아시거든요. 인간으로 하여금 예수님 믿는 것보다 누구를 믿는 게 의식적으로 더 확 와닿습니까? 역시 믿을 놈은 나밖에 없다. 이게 의식적으로 확 와닿는 거예요. 그러면 부르심도 날라가버리고 택하심도 날라가버리고 피 뿌림의 은혜도 날라가버리고.
여기 베드로후서 1장 1절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엇을 힘입어? “의를 힘입어” 그 의를 어떻게?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1장 1절만 봐도 베드로부터 우리 모두가 결코 나 하나를 우상시할 수 없는 그런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을 1장 1절만 봐도 알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귀는 ‘이게 바로 나야’라고 뒤에 나를 집어넣는다고요. 나야 나. 아이고 참. 이걸 집어넣으니까 매순간 망상이 없이 지나간 순간이 없어요, 망상이 없이. 봄 되면 봄 왔다고 낭만적이고 여름 되면 여름 왔다고 하고 가을 되면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 지금도 기억하고 있죠 10월의 마지막 밤을’ 이거 뭐 10월 31일은 매일 돌아오는데 돌아오면 그 노래 들어야 돼. 늘 돌아오는데...... 자기한테 홀렸어요. 다른 말로 하면 자기한테 반했어. 너 나한테 반했나? 하잖아요. 인간은 자기한테 반해버렸어요, 평생을. 천상천하 나보다 더 귀한 것은 없어요.
귀하기는 뭐 개뿔이 귀해. 하나도 안 귀해요. 그 귀한 거 돈 몇 푼 준다고 하면 대번 고개 숙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제 수요일에 작심하고 이야기했어요. 수요일에 했던 문장을, 멘트를 한번 적어볼게요. ‘비참하고 비굴하게 꾸역꾸역 돈 버는 외에’ 그다음이 중요해요. 다른 대안이 있습니까, 우리 인생 사는 게? 다른 대안이 있어요? 꾸역꾸역 돈 버는 외에 다른 대안이 있습니까? 어디 기도원 들어가서 도 닦을까요? 비굴하게, 비굴하게. 그리고 비참하게. 비참하고 비굴하게 꾸역꾸역 돈 버는 외에 다른 대안이 없어요.
마귀는 말합니다. 너도 돈 벌어가지고 남을 지배해서 비참하고 비굴함에서 빨리 졸업하라고 이야기하죠.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한 것이 바로 나라고. 주님이 그렇게 했어요. 주님이 그렇게 했어요. 왜? 나를 우상화 안 되게. 네가 보기에 볼품없이 만들기 위해서. 이게 얼마나 행복합니까? 내가 보기에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것. 이거 출애굽하신 거예요. 해방한 거예요.
무슨 나에게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수요일에 멘트 하나 이런 게 나올 거예요. 나의 의미와 가치를 설사해라, 설사. 설사하면 뭡니까? 낮에 먹은 맛있는 거 전부다 쫙 내려가죠. 나의 의미와 가치를 매순간 설사해야 돼요. 왜? 나는 nothing,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이게 자유고요. 이게 11절에 의하면 넉넉하게 천국에 가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누구한테 간섭받았습니까? 간섭 안 받았죠. 왜냐하면 성령이 함께 해서 그래요. 성령은 자유하는 영이에요. 성경대로 합시다. 성령은 예수님에게로 온, 자유로운 예수님의 영이 성령이에요. 그럼 예수님이 자유롭게 되면 성령 받은 사람은 자유롭게 안 되어도 이미 자유롭게 만들어요. 자유, 해방. 그러면 자유롭게 해방되면 ‘나는 해방이다’하는 내가 있는 게 아니고 나는 원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원래.
제가 묻겠어요. 솔로몬 재판에서 여자 둘이 애 하나 잃어가지고 재판하는 경우 기억나죠? 그 때 둘 중에서 누가 자유로운 사람입니까? 애를 죽인 자가 자유로워요, 애를 그 범인에게 내준 그 여자가 자유롭습니까? 애를 그냥 내준 여자가 자유로워요. 솔로몬의 재판은 그 범인이 아닌 여자에게 자유를 허락한 거예요. 자유를 제공한 그러한 판정이었습니다.
판정이 뭐였던가요? 여러분 아시잖아요. 둘 다 내 애라고 하니까 짜증난다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애를 두 토막 내서 한 토막씩 나눠줘라 이 말 아닙니까. 그 말은 뭐냐 하면 애가 있으니까 그 애에 대한 집착이 있는 거예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성도의 시작과 끝 지점은 없어요. 없는데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지금 내가 사람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내가 사람 된 것은 주님 때문이지 우리 부모님의 DNA가 나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 아니란 말이죠. 형제 때문에 사는 게 아니고 내 아내 때문에 남편 때문에 사는 게 아니에요. 주님 때문에 사는 겁니다. 아이고, 오랜만에 바른 소리하니까 기분이 좋네. 내가 자식보고 사는 게 아니고 남편보고 아내보고 사는 게 아니고 주님이 그렇게 나를 거기다가 집어넣은 겁니다. 주님이 자유로운 것처럼 너도 자유로워라. 남편, 아내 노릇 하지 말라가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느 정도로? 비굴할 때는 비굴해야 되고 비참할 때는 비참해야 되고.
아니 돈 버는 재미도 없으면 어째 삽니까? 꾸역꾸역 돈 버는 재미, 저축하는 재미 있잖아요. 세금 속이고 덜 내는 그런 재미. 재해 지원금 받을 자격도 안 되는데 서류 꾸며가지고 20만원 받을 때 얻는 인생 승리감 있잖아요. 그게 얼마나 비참하고 지가 보기에는 한심스럽습니까? 그런데 다른 대안이 없어요. 죄인이 죄인처럼 더럽게 사는 게 그게 전부지, 무슨 천사도 아닌 게 천사 짓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8절 다시 보겠습니다. 이제 서서히 정답에 가까이 되겠죠. “게으르지 않고” 할 때는 제가 바로 게으른 사람입니다. “열매 없는 자 되지 않고” 제가 열매 없습니다. 왜? 내가 열매 없잖아요. 그러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가 되는 거예요. 열매 없음 앞에 ‘나’가 붙었잖아요. 망상인 나가 붙었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열매 없는 자로써 망상 처리해주시라 이 말입니다, 망상 처리. 오늘 제목을 <망상처리>로 해야겠다, 갑자기 떠올랐다.
여러분이 이 정답을 알아요. 모든 것은 말씀이 말씀대로 처리해나가는 거예요. 내가 노력하는 게 아니고 말씀대로 처리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안 살아있지만 나 살아있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있는 게 주의 말씀이에요. 주의 말씀이 살아있습니다, 주의 말씀이요. 주의 말씀이 살아있어요. 그래서 지금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가 너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거예요.
9절에 “이런 자는 소경이라” 내가 소경입니다. “원시치 못하고” 나는 큰 것도 몰라요. 아니 큰 걸 안다 해서 어느 정도까지 여러분 아십니까? ‘저는 큰 거 알아요.’ ‘어느 정도까지?’ ‘난 마귀에 대해서 압니다. 그 정도면 크잖아요.’ ‘그럼 마귀의 어느 정도까지?’ 이렇게 물으면 크기에 크기, 그보다 더 큰 크기. 이건 한도 끝도 없어요. 도대체 어디까지 몇 단계까지 알아야 됩니까? 주님한테 묻지 마세요. 주님은 내가 지금 처해있는 상황이 주님 보시기에 가장 적절한 상황이에요. 말씀에 입각해서.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
그러니까 결국 제가 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내 기대한대로 뭘 행할 거냐가 아니라 지금 주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어떤 일을 벌이시는가, 베드로후서의 말씀 가지고 어떻게 그 상황을 만들어내시는가에 여러분들이 감탄하시기 바랍니다. 야, 내가 살아있다 했는데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고 주님이 살아계시는구나. 그걸 매일같이 감탄하시기 바랍니다.
매일매일 우리는 달라지니까. 종잡을 수 없으니까 어느 걸 잡아서 이걸 나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한결같은 것은 내가 어떤 인간이 되든, 내가 소경이 되든 옛 죄를 깨닫지 못하게 되든 살아있는 것은 말씀이 살아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나를 인정치 않는다는 점에서 신자에요. 불신자가 아니고 이게 바로 신자입니다.
자, 정리해봅시다. 지금까지 한 것 정리해봅시다. 이거 아셔야 되죠. 불신자는 나 중심, 신자는 나 중심 아님. 됐죠? 또 말씀 중심 하지 마세요. 그럼 또 불신자도 말씀 중심 다 이야기하기 때문에. 나 중심 아님. 내가 깨지든 망하든 비굴하든 상관없어. 신자는 나 중심 아님. 누구 중심? 예수님 또는 예수님의 말씀 중심.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 가지를 열매 맺게 하시는 예수님 일 중심. 이렇게 우리끼리지만 깔끔하게 정리합시다. 우리끼리입니다. 저기 다른 사람 말고 우리끼리 깔끔하게 정리됐죠?
나 중심 아닙니다. 나 중심이 아니에요. 지금 내가 이런 형편에 있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제일 적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되는 거예요. 그다음에 11절 넘어갑니다. 아이고, 8,9,10절 하는데 이렇게 힘듭니다. 아까 요한계시록, 고린도전서 이야기 전부다...... 그러니까 또 또 잊을까봐 당부하는데 고린도전서에 불의, 간음하면 어떻게 되느냐. 불의, 간음이 바로 납니다. 그럼 끝나는 문제에요. 내가 간음한 자이고 내가 불의한 자 맞습니다.
나라는 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성령으로 씻음 받은 사람이 아는 거거든요. 다른 사람은 몰라요. 그러니까 내가 환상인데 나 중심 될 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고린도전서 6장 중심이죠. 말씀 중심이죠. 그럼 그 말씀이 어떻게 되느냐. 반복이죠. 반복해서 내 의식에 계속 반복해서 주어지는 거예요. 너 중심 되지 말고 말씀 중심이다. 또 반복.
그것을 십자가의 반복이다. 십자가의 단회선의 반복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갈라디아 3장 1절에서 이미 15년 전에 십자가 다 끝났는데 사도 바울은 십자가가 네 눈앞에 보이지, 그치? 그러고 있다고요. 이미 지나간 십자가를 왜 거론합니까? 반복되거든요. 피 뿌림이 반복돼요. 우리는 달라지지만 피 뿌림은 한결같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정서적으로 안정적이에요, 성도는. 안정적. 나 중심이 아니니까 안정적이죠. 하여튼 내 중심을 들어보면 이건 난리도 아니에요. 아이고 나 우짜노, 우짜노. 난리도 아니다가 주님 생각하게 되면 갑자기 안정이 되어버려요.
자, 그다음에 13절 봅시다. 12절 빼놓고 13절을 보는 이유가 있어요. 거기에 단어 하나 나옵니다. 장막.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이 장막이라는 말이 여기서도 나오지만 고린도후서 5장에도 나와요. 1절,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장막 또는 초막, 하우스. 우리의 몸을, 우리의 육신을 집으로 사용하는 이유가 뭐냐.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3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절에,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육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걸 장막이라 하지만 다른 말로 하면 육, 육체에 대해서에요. 여러분들이 성경에서 육체가 나오거든 현재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아주 간편해져요. 육체는 물질, 물체, 사물 덩어리에요. 또는 ‘아이고, 그거 물건이네’ 할 때 물건. 우리의 육신을 물질, 물건, 사물 덩어리 이렇게 보는 것, 이게 바로 과학 정신입니다.
과학정신은 해부해요. 안에 뭐가 들었지? 쪼개면 전자 현미경 가지고 더 뭐가 들었지? 계속해서 쪼개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성요소를 찾기 위해서 분석하고 분석하고 또 분석하고 분석합니다. 우리의 물질의 근원을 찾는데 인간들은 근원을 정신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물질 안에 어떤 요소들이 하나의 조직 체계를 이루게 되면 우리가 말한 정신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정신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정신은 없다고 보고 물질의 모아진 하나의 효능 또는 효과로 보는 거예요. 효능, 효과. 예를 들면 우리의 두뇌를 쪼개면 거기서 사랑이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두뇌를 쪼개면 신경세포 나오죠. 신경세포 쪼개면 화학구성분이 나오죠. 분자, 원자 나오죠. 사랑이 안 나오는 겁니다. 그럼 사랑은 뭐냐? 사랑은 그냥 그들이 만들어낸 조합의 어떤 효과 같은 것. 그게 사랑이죠.
사랑, 미움. 사랑, 미움이 나오는데 미움도 사랑도 없어요. 없으니까 미움은 어디서 찾는가? 이걸 사랑이라 했을 때, 사랑과 대비되는 것을 미움이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의미체계는 변별체계에서 나온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의미라 하는 것은 이게 의미다, 가 아니라 이게 아닌 다른 것과 비교해서 이건 이리로 분류하고 저건 저리로 분류해서 인간은 의미를 갖는다는 거예요.
문제는 인간의 그 의미 때문에 자살하고 목숨도 버린다는 사실이에요. 나 약 먹고 죽을래. 왜? 나 그 사람한테 버림받았어. 버림이라는 게 없는데요. 버림이 없잖아요. 어떤 사람이 나한테 욕을 한다. 욕을 하는 것하고 야구공 던지는 것하고 달라요. 야구공 던지면 몸에 멍들잖아요. 그런데 욕을 하게 되면 육신에 아무 멍이 안 들어요. 그런데 마음에 멍이 들거든요. 마음이 있어야 멍이 들죠. 마음에 무슨 멍이 들어요, 마음이 없는데.
그러니까 결국은 과학적으로 말하는 인간의 육신은 귀신 씌였어요. 그냥 분자구조인데 나는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든지, 나는 내 마음에 총 맞은 것처럼. 그리고 누가 보고 싶다. 같은 하늘 어느 곳에 있더라도. 막 괴로워서 잠을 못자. 잠이라 하는 것은 피곤하게 되면 물질의 에너지, 호르몬 작용에 의해 잠이 오게 되어 있는데 누가 보고 싶어서 못 자고 그리워서 못 자고 만나고 싶어서 못 자고.
두뇌가 너의 말을 왜 안 들어? 하면 글쎄, 두뇌가 내 말을 듣지 않네. 이건 과학적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나’가 없어요. 신경세포에 내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두뇌가 내 말을 안 들어. 내가 없는데 없는 게 왜 말을 듣죠? 이것도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인간의 과학은 대혼란입니다, 이게.
얼굴이, 턱이 너무 내려왔다. 그럼 수술합니다. 양악수술, 턱 수술하죠. 턱 수술을 하게 되면 정상적인 턱이 된다. 여기까지는 과학이에요. 그런데 기분 좋다. 기분 좋다는 것은 무슨 과학입니까? 기분 안 좋을 거 같으면 수술 하지도 않죠. 기분 좋음을 내다보면서 수술할 거잖아요. 그럼 이건 과학으로 하면서도 과학이 아닌 다른 귀신 씌인 거, 정신적인 문제, 마음적인 문제 가지고 과학을 이용한다면 그 과학을 지배하는 정신은 과학을 분석해보면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게 아니고 아예 없다니까요.
바로 성경은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인간의 모든 숨 쉬는 것, 행동하는 것, 밥 먹는 것 일어난 모든 일은 우리 주님이 개입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 주님이 개입하고 있는데 주님이 어떻게 개입하느냐 하면 언약적으로 개입합니다.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 저 불신자들이 자기 애인한테 욕 얻어먹는 것, 이게 따지고 보면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 있는 거예요. 너무 논리가 비약되어버렸죠? 어떤 불교의 중이 자기 절에 있는 화초에 물 주는 것이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 물 준다 이 말입니다. 논리가 누락된 것이 너무 많아 보이죠.
이 정사각형이 우주라 한다면 우주에 있는 이 촘촘한 그물 같은 모든 구조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거예요. 이 세상 모든 만물의 움직임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명하기 위해서 모든 게 있다고요. 골로새서 1장 16절(“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모든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되심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성도가 알아야 될 것은 절에 있는 중이 자기 화초에 무심코 물 주는 것이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다는 관련성을 알아내는 거예요. 이게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다 의도에 의해서 신자든 불신자든 가리지 않고 이 땅에 그들이 태어나야만 했다는 겁니다. 태어나야만 했다.
어제 수요일 설교할 때 이런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오지게도 재수 없는 일이라고요. 왜냐하면 이 자체가 심판받는 곳에 태어났거든요. 잘못 태어났어요. 심판, 장차 여호와의 날에 불구덩이 될 곳에 우리가 태어난 겁니다. 태어날 때 불로 심판받기 위해 태어난 거예요. 심판받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심판받는 기준이 뭐냐. 여호와의 날에 의하면 십자가에요.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꼭 심판받아야 돼요.
그거하고 오늘 본문 10절 봅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한다는 말은 우리가 어떤 근거에 의해서 구원받기로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았는가. 십자가에 의해서 부르심과 구원을 받았거든요. 십자가 열매를 위해서. 또 내가 구원받았다고 이야기하지 마세요. 한 시간 동안 이야기했는데 또 반복하게 하지 마세요.
주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은 주님께서 자기가 자기 열매를 생산하기 위해서 불러줬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려면 불신자가 지옥 가야되는 그 사실도 확정되어야 되고 굳게 되어야 돼요. 그럼 그 기준은 내 기준이 되지 못하고 주님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주님의 기준.
14절 봅시다.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자, 장막이 뭐냐. 이제 말할 시점이 왔죠. 장막이 뭐냐. 예수님께서 주가 되시기 위해서 이 땅에 마련하신 것이 장막이에요. 그게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된 거예요. 말씀이 육신이 된 것.
장막은 장막만 있으면 안 되겠죠. 장막 그 자체만 있다면 장막의 의미가 충족되지 못합니다. 장막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어야 되고 말씀이 있어야 되고 언약이 있어줘야 되죠. 그럼 베드로는 자신을 뭐로 봅니까? 장막인데 하나님의 굳은 약속이 들어있는 장막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런 장막이라고. 그러나 불신자의 장막은 장막만 있을 뿐이지, 안에 보면 헛방.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대들고 반항하는 그런 비(非)언약적인 요소가 작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니까 아까 처음에 인간이, 나라는 게 왜 망상인지 아시겠죠? 인간이, 나라는 것이 왜 망상이냐 하면 안에 내용이 아무것도 없어요. 내 안에 누가 들어있냐 하면 나 있다. 그 나 안에 누가 들어있냐 하면 나 있다. 또 그 안에 나 있다. 나나나나 나나나나나~ 내 안에 계속 내가 있어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뭡니까? 우리는 장막이고 우리의 육은 장막이고 그 안에 십자가 복음, 언약이 들어있는 거예요. 불신자는 그 언약에 대드는 요소가 들어있고. 그렇게 설명해야 세상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복음으로 어느 하나 빠짐없이 촘촘히 다 연계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거예요.
자, 이쯤 와서 베드로후서 1장부터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베드로의 사고방식이 뭐냐? 베드로의 의식상태, 베드로의 세상관, 사고방식은 뭐냐? 예수 그리스도의 피 중심이죠. 얼마나 간단해요. 흔한 목사들도 이 정도는 얘기할 수 있어요. 이 세상은 예수님의 피 중심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몰라. 이런다고요. 성경에 나오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이게 지식이 아니에요. 그야말로 옴팡 자기 삶을 통해서 그대로 지금 발산하고 있어요. divergence. 그냥 확장하고 있어요. 발산하고 있어요. 그래서 베드로는 하루하루 사는 것이 자기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에요. 주님이 그 안에서 베드로가 품고 있는 언약을 계속해서 확산시켜 나가고 퍼뜨려나가기 때문에. 민들레 홑씨처럼. 어느 강의에서 그랬죠. 민들레 홑씨에서 특이성이 부풀어 오른다고, 특이성. 그 언약의 특이성이요.
마태복음 13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13장 14절-15절을 제가 읽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이게 특이성이에요, 특이성. 갑자기 제목을 또 바꾸고 싶은 생각이 확 드네. 아까 제목을 잊어버렸어요. 무슨 처리인데... <망상처리>, 그게 더 낫네요.
신자가 불신자와 다른 점은 거기서 특이성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 특이성에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불신자들은 아무리 듣기는 들어도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해요. 세상 보는 사고방식 자체가 완전히 예수님 십자가 중심이에요. 예수님 중심이에요. 누구 중심은 아니다? 나 중심은 아니에요.
그런데 세상은 누구 중심입니까? 악마의 통치방법은 나를 위하여서. 나를 위해 사니까 여기서 과학정신이 나와요, 과학정신. 분석정신.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계속해서 실험하는 정신. 내가 과연 믿을만한지를 세상을 향하여 계속해서 도전하고 또 도전하고 실험하는 거예요.
세상에 있는 8000m 봉우리를 15개 등정했으면 이제는 그만 산에 안 올라가도 되거든요. 산에 왜 올라갑니까? 산이 있으매 올라간다. 이 있는 산 다 올라갔는데? 이제 안 올라가야 될 것 아닙니까? 또 올라갔다가 내려오다 얼어 죽고 그런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잖아요. 이 등산가들은 본인이 망상이에요. 망상에 본인이 있어요. 나의 나다움의 내용을 채우려고 하니까 이게 다 안 채워지는 거예요. 이게 어디 등산가뿐입니까? 모든 불신자가 다 그러는데요.
월드컵 4강 올라갔으면 됐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배고프다고? 빵 줘라. 응원 입어서 4강 올라갔으면 잘했지. 박지성 때문에 올라가서 잘했지. 뭐 또 결승까지 올라가려고 그리 욕심을 냅니까? 뭐 결승 올라가면 욕심이 멈춥니까? 안 멈춰지죠. 참고하시려면 안양 강의에서 했던 금 물고기 이야기 들어보세요. 금 물고기 이야기했어요. 물고기를 잡았는데 금물고기라. 풀어주면 소원 들어준다고 하니까 할머니가 소원 이야기를 하는데 소원이 점점 커져요. 나중에 소원을 너무 이야기해서 오바해서 원상태로 돌아갔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라는 망상은 악마의 통치방법이기 때문에 계속 채우고 채우고 채워도 한도 끝도 없어요. 사마리아 여인처럼 남자 5명 사귀면 됐는데 벌써 5번째 싫증나가지고 6번째 사귀고 있어요. 이게 목마른 여인이에요, 목마른 여인. 그러나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가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이제 배부르다가 아니에요. 나 자체가 망상이니까. 주께서 나를 그냥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됐잖아요. 그 주님께서 나를 순간순간 사용하면 됐지, 무슨 더 욕심을 내겠습니까? 주스나 마실란다.
자, 여기서 진도 나가봅시다. 진도 나가면서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질문할게요. 장막은 같은가, 다른가? 1번, 모든 장막은 같다. 2번, 모든 장막은 다르다. 몇 번입니까? 둘 중에 하나니까 뭐 아무거나 하나 집으세요. 모든 장막은 같다. 모든 장막은 다르다. ‘같다’가 정답이죠. 모든 장막은 같아요. 재벌 부러워하지 마시고요. 과장 됐다고 슬퍼하지 마시고. 어차피 장막이에요. 어차피 육입니다. 어차피 나중에 흙이 되어 사라지고 장막이라는 의미를 가져야 새 장막을 고대하는 사람이 되죠.
장막이라는 것은요. 육이지만 이게 언약적 관점에서 장막이거든요. 장막이란 뭘 보호할 용도에요. 뭘 담을 용도라고요. 집은 지어놓고 아무도 안 살면 개집 되는 게 되잖아요. 안에 들어가 있는 내용에 따라서 장막이 빛이 나잖아요. 장막이 동일한 이유가 언약이 완성되면 모든 장막은 그게 코가 되든 눈이 되든 귀가 되든 간에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점에서 모든 지체는 다 같아요. 다 성령을 받았으니까요.
어떤 사람은 전도 50명 했다. 다른 사람은 한 명도 못했다. 그래도 똑같아요. 어떤 사람은 50명을 전도한 장막이 있고 어떤 사람은 한 명도 못했다. 똑같습니다. 그러나 이건 달라요. 어떤 사람은 50명을 전도하려고 애썼다, 본인이. 자기가. 어떤 사람은 난 한 명도 안 해도 된다고 했다. 이건 틀려요. 둘 다 ‘나’가 있기 때문에 둘 다 망상이에요. 이제 이해되셨죠? 50명 전도하는 것, 그건 주께서 하셨겠죠. 그러나 내가 하고자 하는 것과 그건 달라요. 내가 전도를 하나도 못한 것도 주의 뜻이죠. 그러나 나 안 해도 된다 하고는 달라요.
이 질문은 어디서 나온 질문이냐 하면 흔한 질문이죠. ‘목사님, 예수 십자가 피로 구원 받았으면 십일조 해야 돼요, 안 해도 돼요?’ 이 질문하고 똑같은 거예요. 십일조 하고 안 하고 간에 그 문제는 주님 소관이지, 지 돈도 없으면서 지가 내고 말고를 왜 본인이 결정하려고 합니까? 그게 바로 악마의 통치 방법이죠. 아무리 주님의 지시지만 일단 내 허락, 내 검증과 내 측정과 내 시험을 내가 결정하겠다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이런 질문한다고요. ‘목사님 그때 내가 망상인 줄 알아야 되는데 수시로 난 내 생각밖에 안 해요.’ 하면, 그냥 당신 생각만 하세요! 그것도 망상인 줄 알면 돼요. 지금 되어지는 일이 여러분들이 만들어낸 게 아니고 주님이 만들어냈어요. 여러분이 살아있는 게 아니고 주님이 살아 계시다고요.
하여튼 공장 주인이 아니고 직원 같으면 직원대로 열심히 하면 되지. 지가 주인노릇 다 해가지고 지가 할라 하니 얼마나 바쁜지. 바쁘고 또 그것도 제대로 못해가지고 지 혼자 공포에 휩싸여가지고 나 벌 받을 거야. 나 전도 안 해서 저주 받을 거야. 아이고, 저주받기 전에 미리 자살할까? 온갖 되지도 않는 걱정, 근심 다하고 있어요. 장막 주인은 따로 있는데 지가 장막 주인인 줄 알고.
그래서 14절 다시 보겠습니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보세요. 베드로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나, 내 중심 아니야.’ 지금 그 소리를 크게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베드로가 1절부터 14절까지 왔는데 베드로를 다시 한번 보세요. ‘이 일, 내가 한 게 아닙니다.’를 일관되게 하고 있어요, 일관되게.
14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임박한 줄 알라 하니까 또 뭐 후대에 나온 신학자들이 베드로는 착각했다. 자기는 금방 재림할 줄 알았지만 어림도 없지. 재림은 아직 이천 년이 지나도 안 했는데.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다고요. 임박이라 하는 것은 이천 년이 되든 삼천 년이 되든 모든 성도는 오늘이 최후의 날이에요. 오늘이 최후의 날. 내일을 보장할 수가 없어요.
나중에 저를 차 태워 광명 가다가 도중에 음주운전에 박혀서 집사님은 살고 난 죽으면 난 최후의 날이에요. 그것은 내 소관이 아니고 주님이 그러시겠다면 그런 거니까요. 나는 망상이니까요. 지금껏 살아온 것도 주의 은혜니까요. 최후의 날이에요. 이것을 요엘서 수요설교에서는 무슨 날이라고 했습니까? 여호와가 직접 오시는 여호와의 날이에요.
그러니까 성경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내가 이미 죽었다 치고 해석하면 해석이 다 돼요, 내가 이미 죽었다 치고. 그래야 나 중심이 아니니까. 이것을 전에 광주강의에서 단어 하나, 부사로 이걸 썼어요. 기억납니까? ‘빼꼼히’. 인생 어떻게 사느냐? 일단 관이 있고요. 관 뚜껑을 한번 열어보는 거예요. 빼꼼히 열어가지고 이왕 죽었는데,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잖아요, 죽었는데 어디 바깥 세상 서울 구경이나 해볼까 해서 빼꼼히 나와가지고 취직이나 해볼까, 결혼이나 해볼까 해서 아이 둘 놓고.
이게 전부다 어디 해당됩니까? 빼꼼히 관 문 열고 빼꼼히 내다보는 거예요. 그래서 급하면 다시 쏙 들어가서 죽으면 되니까. 손해 볼 것 하나도 없어요. 그림이나 그려볼까, 빼꼼히. 그림 마음에 안 드는데 가위표 칠하고 다른 그림이나 그려볼까, 빼꼼히. 빼꼼히만 다 집어넣으면 돼요.
그냥 살아보는 거지 뭐. 그냥 재미로 한번 살아보는 거예요. 물론 재미 치고는 너무 비굴하고 비참하고...... 돈 번다고 밤 12시에 들어와서...... 그러니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은 어차피 내 세상이 아니고 주님이 만들어낸 세상에서 주님이 어떤 어떤 어떤 것을 만들었는가. 주님의 놀이동산 구경이나 해보세. 물론 제가 말은 구경이라 하지만 고생은 직싸게 해요, 사실은. 코로나 백신 주사 2번 맞아야 되고요. 고생은 하는데 그것도 뭐 주께서 만든 상황이면 하죠 뭐.
그러니까 베드로의 사고방식이 이미 죽었다고 치고 살아보는 거예요. 이미 죽었다고 치고. 그럼 집에 있는 아내나 남편에게 평소에 안 들던 생각, 갑자기 고마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 사람이 상당히 고마울 수도 있네. 애는 먹이지만 돈은 벌어주잖아. 중요한 건 돈이니까요. 부부는 동업자거든요. 애는 먹이지만 내 마음대로 안 되지만 돈은 벌어줬잖아. 챙길 거 챙겼으면 좀 내 말 안 들어도 본전 찾았으면 됐지 뭐. 갑자기 마음이 낮아지면서 ‘고맙다, 여보.’ 뭐 이런 식으로 나올 수 있죠.
이게 베드로 같은 정신, 망상처리, 망상을 처리하는 겁니다. 이 땅에 이왕 사는 거 개나 세 마리 키워볼까,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이 모든 것에 망상인 내가 개입되고 들어가면 나는 내 몸, 내 것이 되고 내가 개입 안 되면 이건 장막이 되는 거예요. 제목을 또 <장막>으로 하고 싶은데......
자, 16절 보고 마치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자, 묻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예수님의 강림하심을 인간이 지어낸 겁니까? 어느 소설가가 창작한 겁니까? 아니죠.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안 나왔죠? 그러면 우리는 내 중심되면 안 돼요. 왜냐하면 내 중심이 되어버리면 내가 해낼 수 있는 것만 수집하거든요. 그런데 강림은 내가 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강림에 대해서만 주님께 맡기지 마시고요. 여러분 태어난 것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것 다 그냥 주님께 일임하세요. 앞으로도 일임하세요. 어차피 강림은 우리 소관 아니니까. 큰 덩어리 안에 나를 그냥 여기 다 맡기세요.
그 뒤에 나오잖아요. 이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이게 바로 증인이에요. 베드로가 사도가 되는 거예요, 증인. 증인되는 겁니다. 증인의 특징은 내 중심이 아니에요. 그냥 나는 어떤 사건을, 우연히 그 현장을 목격한 거예요. 그러니까 내 잘못일 수 없죠, 그냥 본대로 이야기하는데.
물론 세상에서는 예수님에 관한 것을 발설하면 죽인다는 협박, 공갈이 있겠죠. 협박, 공갈이 있든 말든. 협박, 공갈을 누가 하라 했습니까?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우리 주변에 깔아놓은 거예요. 넌 남들 다 자기 중심으로 사는데 너 혼자 그리스도 중심으로 산다 하면 회사 잘린다. 그 잘린다는 협박, 공갈도 누가 하시는 거예요?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죠.
물론 유난 떨어가면서 아침에 출근하면 벌써 기독교 회사도 아닌데 두 손 들고 할렐루야! 이러고 오게 되면 그거는 회사 사기 문제에 지장이 되고 그건 백번 잘려도 마땅한데 그게 아니고 의도적으로 막 전도 티내고 이게 아니고 저쪽에서 일부러 건드리는 경우들이 있어요. 술 한 잔 해라. 교회 다니는 거 아는데 술 한 잔 정도는 해도 괜찮다. 너도 회사 다니면서 회사의 분위기가 협조되어야 회사의 생산성이 오르고 너도 월급 오르는 걸로 한 몫 보잖아. 너도 돈 값해야지. 부정할 수 없는, 반박할 수 없는 이유를 대면서 술 한 잔만 해라. 내가 뭐 술 취하라 하나. 한 잔만 해라. 한 잔에 한 잔에 한 잔에. 한잔이 두 잔 되고. 나중에 취해가지고 큰 잔에 한 잔 되고. 나중에는 다른 사람한테 이 사람 교회 다니면서 술 마신다고 딴 소리할 거예요. 분명히 한 잔만 하고 용납해준다 해놓고 딴 데 가서는 완전히 술꾼으로 포장해버리죠. 너 같은 게 교회 다닌다고, 술 먹는 주제에? 어디서 들은 소리는 있어가지고.
그러니까 그런 경우가 있더라도 그럴 때는 빼꼼히, 아이고 빨리 죽자. 이런 수모를 당하느니 죽는 게 낫다. 그런 편안한 해방된 마음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 내가 망상인 것을 따져보기 전에도 우리가 알아야 되는데 우리가 말씀을 모르다 보니 나만큼은 확실하게 나다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나다운 경우가 존재하지 않고 나답다면 그게 우상이 된다는 그 위험한 지경에 놓인다는 사실을 베드로의 마음을 본받아서 그저 그리스도 중심으로 다 맡기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