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회수되는 자기 의

아빠와 함께 2022. 4. 16. 09:59

서울의존강의20220414a 베드로후서 2장 4절(회수되는 자기 의)-이 근호 목사

베드로후서 2장 4절,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그렇게 되어있죠. 천사가 범죄했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기와 관련된 일인지 아닌지 그것을 본인이 결정할 권한이 없습니다.

어떤 천사가 왔는데 저게 범죄한 천사인지 아니면 진짜 좋은 천사인지 인간 선에서 판정할 수 있는 근거나 기준이 없습니다. 그 한 예가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금식기도하고 있었을 때 어떤 천사가 나타났어요. 예수님께서 광야에 있을 때에 두 종류의 천사가 다 나타나요. 마태복음 4장에서 하나는 마귀가 여기에 나타나죠. 그다음 11절에 보면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두 종류의 천사가 예수님 있는 곳에 다 나타납니다.

그러면 이것이 범죄한 천사인지 범죄하지 않은 천사인지 하는 것은 누가 현장에 있을 때나 가능하냐 하면 예수님이 계실 때 서로 상반되는 두 천사가 다 오죠. 그런데 그 두 천사를 어떻게 구분하느냐. 그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나쁜 천사도 무슨 의견을 제사하고 좋은 천사도 어떤 의견을 제시하는데 마태복음 4장 입장에 의하면 이 나쁜 천사, 범죄한 천사인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한다는 점에서 그 정체를 폭로합니다. 시험한다는 것.

강의를 다시 한다면 인간에게는 나쁜 천사, 좋은 천사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없습니다. 없고 예수님이 계실 때 천사가 나쁘다, 좋다고 할 수가 있어요. 나쁜 천사는 예수님을 시험하는 거예요. 하나의 공식이니까 적어보겠어요. 나쁜 천사(범죄한 천사) 다른 말로 악마죠. 악마의 공식은 예수님을 시험한다. 시험을 유혹이라 할 수 있고 테스트라 할 수 있어요.

시험과 테스트는 같은 말인데 예수님을 시험하는 이유가 예수님이 다른 가능성을 시도하도록 부추기는 거예요. 악마가 악마다운 이유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다른 가능성을 시도하도록 부추기는 겁니다. 악마가 하나님을 시험할 수 있을까요? 시험할 수 없습니다. 악마는 하나님을 안 건드려요.

그런데 악마가 광야에서 예수님에게 시도하는 것도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의도적으로 붙어라, 붙어라, 의도적으로 조성한 거예요. 만남의 기회를 의도적으로 조성해준 겁니다. 악마가 시도하고 노리고 있는 바를 들추어주기 위해서 예수님 있는 곳에 악마가 같이 붙도록 조성한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다른 가능성을 시도하도록 한다는 말은 이미 악마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다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지 마라‘ 이것이 하나님 뜻인 걸 알고 있어요. 그럼 악마는 하나님 뜻의 다른 가능성을 시도하는 거예요. 좀 따먹으면 어때.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다시 정리하게 되면 악마의 관심사는 오직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훼방하는데 거기에 악마는 전력을 다합니다. 악마를 느끼고 악마의 존재를 확인하려면 예수님이 계신 곳에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비로소 우리는 악마를 느낄 수 있어요,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그러면 예수님과 함께 있으려면 우리는 죄인이 되잖아요. 그렇죠?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예수님이 죄인을 부름으로써 주님의 의가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불렀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려면 우리는 죄인이다 이 말이죠.

자, 강의에서 첫 번째로 제일 중요한 것은 이거에요.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남아있는 주의 일은 없다’가 됩니다. ‘남아있는’을 괄호에 넣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주의 일은 없다. 더 간단히 해서 우리의 할 일은 없다. 더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주의 일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언제 악마를 느끼느냐 하면 ‘우리가 주의 일을 해야지’ 할 때 그게 어떤 종류의 일이건 100% 악마가 시키는 일, 부추기는 거예요, 주의 일을 해라. 더 쉽게 말해서 악마는 우리에게 무슨 요구를 하느냐 하면 ‘잘해야지!’ 간단하죠? 길지도 않아요. 딱 네 자에요. 제대로 살아. 제대로 잘해야지.

악마를 느끼고 싶습니까? 잘해야지! 이게 악마가 우리한테 부추기는 거예요. 잘살아야지. 잘해야지. 남편 같으면 남편 잘하고 아내 같으면 아내로 잘하고. 목사면 목사 잘하고 교인은 교인답게 잘해야지. ~답게 잘해야지, ~답게. 너는 너답게 잘해야지. 너 주의 일해야지. 이게 마귀 일이에요, 마귀 일.

평생을 살아도 우리는 할 수 있는 나의 일이나 주의 일은 지금 남아있지 않습니다. 없습니다. 사람이 내가 주의 일을 하는 순간 이미 홀라당 악마의 꾐에 빠졌어요. ‘내가 주의 일을 하는데 제대로 해야 될 텐데. 아이고, 제대로 수행 못하면 나 어떡해. 바르게 못하면 나 어떡해.’ 그래서 나온 유명한 노래가 나 어떡해. 갑자기. 나 어떡해. 나 어쩌면 좋아, 이런 거. 뭘 어쩌면 좋아요.

주께서 우리에게 주의 일하라고 주님 쪽에서 시킨 일도 없어요. 본인이 홀라당 다 해버렸으니까 우리에게 시키는 주의 일이 없는 거예요. 그걸 증인이라 합니다. 내가 주의 증인되는 거예요. 내가 할 일이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인간은 평생에 악마의 밥이 되어 사는 거예요. 눈만 뜨면 악마가 ‘안녕~ 우리 반가운 친구야!’ 부터 해가지고 그다음부터 일시키는 거예요. 설거지 제대로 해야지. 청소 제대로 못하면 안 되지. 다음엔 더 잘해야지. 돈 열심히 벌어야지. 안녕, 친구야. 뽀로로 친구야~ 하는 것처럼.

주께서 우리 성도에게 보여준 것은 동사가 아닙니다. ‘~하라’가 아닙니다. 접속사에요. 그리고 그래서 그리고 그러므로.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이렇게 했고 그리고 이렇게 했고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했고. 모든 것이 주께서 하신 일만 그냥 병렬로 나열될 뿐이에요. 네가 이거 하라,는 그런 동사는 없습니다.

심지어 백부장에게도 없어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그 자체가 주께서 그렇게 만드신 거예요. 주가 만드신 거예요. 백부장이, 이거하면 주님이 저한테 뭐 해줄 겁니까? 이런 협약이나 관계는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왜 이렇게 악마한테 쉽게 넘어가느냐? 그것은 우리 인간이 자기의 육신을 가졌고 육신적으로 뭘 해내는 것에 아직도 미련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을 육신으로 바라보는 거예요.

이것은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 다 같이 한번 찾아보도록 합시다. 고린도후서 5장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예수님 관점에서 예수님 중심으로 볼 때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영의 사람이에요. 성령의 사람이에요. 거듭난 사람입니다. 주님의 성령을 공급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 안에 주의 성령이 들어있으면 그리스도의 사람, 영적인 사람이 돼요.

그것은 안 찾아봐도 알아요. 고린도전서 2장에 육의 사람이 있고 영의 사람이 있잖아요.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했다고요. 그 특징이 뭐냐 하면 육의 사람은 영의 사람하고 대화가 안돼요. 영의 사람은 육의 사람과 대화를 할 수가 없죠. 육이 뭔지 알면서도 말을 하면 육의 사람이 자꾸 오해하고 곡해해서 다른 식으로 의미를 이해하니까 대화가 이어질 수가 없는 겁니다.

육의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를 육으로 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볼 때 똑같은 관점으로 상대방을 육으로 보는 거예요. 어떻게 보느냐 하면 나 이만큼 열심히 살았는데 너는 얼마나 어떻게 열심히 살았느냐. 이게 어떤 관점이냐 하면 육의 관점이에요, 육의 관점. 여전히 내 할 일이 남아 있어요, 내 할 일이.

예를 들면 성령 받아서 영의 사람인데 어느 집에 시집을 갔다.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이제 군기 잡죠. 시집이 자기 나와바리니까 자기의 영역이니까 며느리 새로 왔을 때 “네가 친정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시집와서 우리 사람 됐으니까 우리 집안과 가문의 법도와 도리를 따라라.”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엄중하게 이야기하죠. 물론 그냥 엄중하게 이야기하면 말 안 들을까 싶어서 낙지볶음하고 피자 사서 잘 대접해서 잘 먹여놓고 2차 순서로 커피하면서 무게 잡아가지고 “우리 집안이 이런 집안이다. 그러니까 네가 이 집안 사람 되었으니까 이 집안의 법도를 따라주면 내가 네 시아버지, 시어머니로서 참 고맙겠다.”

그렇게 할 때 그 며느리가 “저 영의 사람인데요? 저 예수의 영, 성령 받은 사람인데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남아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요.” 대화가 될까요, 안 될까요? 대화가 될 수가 없어요. 대화가 안 됩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인간이 인간답게 하려면 거기에 맞는 행위를 보여라. 이게 마귀의 말이거든요. 악마가 그런 말을 해요, 악마가. 그럴 땐 이렇게 얘기하면 돼요. “악마야, 아직도 너는 내가 육으로 보이냐?” 내가 아직 네 똘마니로 보이냐? 그런 뜻이에요.

악마는 네가 주의 사람이면 주의 사람답게 주의 일을 하라는 거예요, 악마의 주장은. 이게 광야에서 악마가 예수님보고 그렇게 하라 한 거예요. 악마가 얼마나 시건방진지...... 이건 피조물이 창조자보고 한 수 가르치겠다는 것밖에 안되거든요.

하지만 성령이 그 현장을 주선해서 예수님과 악마를 만나게 한 것은 모든 인간이 영의 사람이 되지 못하고 육의 사람으로서 악마의 종노릇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금식하시는 데에 악마를 들여보내가지고 둘이 만남의 기회를 갖게 하신 거예요.

창세기 6장을 보겠습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6장 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사람이 그럼 육체지 육체 말고 뭐 다른 사람이 있느냐. 인간이 육체가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할 수 없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자꾸 불러대면서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고 하나님하고 함께하고 싶어 해요. 본인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본인이 이미 코로나 걸렸는데 자꾸 이야기하면서 우리 오랜만에 보는데 마스크 벗고 손잡고 하자. 본인이 지금 코로나 양성인데...... 상대방은 음성이에요. 영의 사람이라고요. 음성 된다고 영의 사람 되는 건 아니고요. 예를 들면 그렇습니다. 코로나가 음성이 되려면 일단 양성이 되어서 자아가 죽고 난 뒤에 거듭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처럼 한번 걸려서 면역이 생기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인간 자체가 육체인 걸 모르고 육체가 시건방지게 천당을 가려고 천국을 가려고...... 자기 분수를 알아야죠. 육체라는 말은 이미 악신과 악마의 노리개가 되어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성신이 거기 함께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악신이 걸린 사람들 그리고 마귀의 사주를 받고 배후의 지시를 따르는 자들은 충동이라는 것이 돌발 사태가 항상 잠재되어 있어요. 언제 확 일어날지 모릅니다. 안데르센 동화집에 이런 동화가 있어요. <분홍신>이라는 동화가 있는데 신발을 신으면 그 신체의 부분대상, 신체 중 일부가 스스로 자율화되어서 미친 듯이 춤을 추는 거예요. 그러니까 발 빼놓고 나머지 신체부위가 그 발의 충동을 통제 못해요. 어쩔 수 없이 따라가죠. 발이 막 탭댄스 추는데 어쩔 수 없이 팔과 다리는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발이 가는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통제할 수 없는 광기(狂氣). 크레이지(crazy), 그 광기. 육이 된다는 말은 악마가 인간을 육으로 본다는 것은 충동이라는 공격에 대해서 방어능력이 인간에게 상실되었다는 거예요. 이미 자신의 정신은 접수 당했기 때문에 악마가 부리는 대로 부려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게 미친 짓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결국 발목잡혀가지고 악마의 힘으로부터 권세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마태복음 12장에 나와요. 여러분 잘 아는 이야기이고 여러 번 한 이야기지만 그 점을 다시 한번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에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그러니까 성령이 인간하고 상대하지 않고 인간을 붙잡고 있는 악마와 상대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광야에서 성령께서는 예수님과 악마가 서로 만나도록 주선을 해준 겁니다.

악마가 예수님께 도전한 것은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은 이미 내가 접수했다는 자기의 성과를 예수님 앞에 당당하게 보이는 거예요. 악마가 예수님께 테스트한 그 테스트에 어떤 인간도 굴복될 수밖에 없고 악마의 지시에 놀아날 수밖에 없는 현 시국, 현 형편을 그대로 악마가 예수님 앞에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은 떡 없이는 못산다. 이건 뭐 지극히 당연한 거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나왔을 때에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기본적인 떡이 없었고 물이 없었잖아요. 떡이 없고 물이 없으니까 이것은 정말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원망할만한 조건이다, 라고 악마가 그렇게 그 조건을 가지고 인간들을 부추겼죠. 부추긴 거예요.

인간의 머리로서는 아이큐 뭐 200이 되든 관계없어요. 인간이 떡이 없고 물이 없는데 그게 어떻게 생존이 되냐?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게 바로 네가 마귀에 사로잡힌 증거야. 그게 육이야.” 그렇게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그 이후에 모세가 시내산에 40일 동안 있을 때 모세가 시내산 올라가면서 햇반 들고 갔습니까, 컵라면 들고 갔습니까, 생수 짊어지고 갔습니까? 아니면 전투식량 가지고 갔어요? 파카 입고 갔습니까? 뭘 들고 갔어요? 자기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들고 간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어떤 사람은 생각할 거예요. 시내산 가면 다 있다. 어디 뭐 시내산 꼭대기에 매점 있습니까? 지금은 매점이 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시내산 중간에 보면 매점이 있어요. 거기에 필요한 생수 사들고 가면 됩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시내산 위에 가면 먹을 거 다 있다. 아니 시내산 꼭대기에 먹을 거 없어요.

그것은 육적인 방식이에요. 육입니다. 인간을 육으로 볼 때는 먹을 게 기본이고 그다음에 하나님 말씀을 듣는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육적인 의식이에요. 육적인 거예요. 거기에 하나님의 성령이 먹힐 리가 없죠. 하나님의 신은 인간이 육체가 되기 때문에 함께 할 수가 없다. 사고방식이 틀려서 함께 대화가 되지 않아요.

아까도 고린도후서 이야기했죠. 나는 이제 사람을 볼 때 영의 관점으로 보지, 육으로 보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이고 예수님을 볼 때 영으로 보지, 육으로 보지 않겠다. 이런 사도 바울의 이야기들은 이미 인간들은 완전히 마귀의 권세에 갇혀있고 포로 잡혀있고 거기서 빼도박도 못하고 자꾸 뭘 끊임없이 해야 돼요. 아침에 일어나면 뭘 해야 돼요. 세수부터 해서 뭘 자꾸 해야 된다고요.

모세가 시내산 올라가서 세수했습니까? 샤워했습니까? 크림 들고 가서 아침에 샤워하고 이렇게 했습니까? 40일 동안에는 먹지도 않고 아무것도 마시지 않았어요. 다시 말해서 모세가 갖고 있던 위와 소화기능이 아무짝도 소용이 없어요. 육의 기능이 더는 필요치 않는 상태, 그 상태가 하나님과 모세의 관계입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아들, 성자 예수님과의 관계를 그가 맛봤던 거예요.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인간의 죄 있는 육신의 몸이죠. 그냥 육신이 아니고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왔기 때문에 예수님도 이 땅에서 피곤을 느끼고 먹어야 되고 마셔야 되고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먹고 마시고 피곤해한다고 해서 뭐 이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반드시 필수적인 요소라 생각하시면 안돼요. 필수적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모세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상당히 간단한 말씀인데요.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기 위해서 자연물이 필요치 않아요. 양식이라든지 생수라든지 그런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스스로 계신 거예요.

바로 이런 자만이 천국에서의 삶이 보장되는 사람이에요. 이것을 인간으로 하면 영적 인간이에요. 다른 것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햇반 많은 데가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에 골프장 잘 만들고 그런 게 아니에요. 그건 여호와의 증인이나 이슬람교에서 그런 소리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갔을 때 거기서 자기가 하루 세끼 뭘 먹었습니까? 아니, 세끼라는 것도 없어요. 세끼는 삼식이한테 이야기하세요. 세끼라는 것조차 없어요, 거기는. 여기 내가 있는지 누가 있는지 분간도 안 될 정도에요, 삼층천은. 거기 무슨 짜장면, 짬뽕, 팔보채 그런 게 왜 필요합니까? 처갓집 치킨 이런 게 필요해요?

우리가 이 땅에서 양식 먹는 것을 정당화하면 안돼요. 냉면 먹고 고기 먹고 뭐 잘되면 소고기 사먹겠지 해서 소고기 사먹고.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얻을 것을 얻었다, 이렇게 나오면 안돼요. 아침에 온갖 영양제 오메가3, 종합 비타민 다 먹잖아요. 어서 그걸 안 먹어도 되는 그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아무것도 안 먹고 먹을 게 아예 없는 거. 또 우리나라에서는 천만 내지 천오백만이 불면증에 걸려 있답니다, 인구 오천만 명 중에서. 네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밤에 잠을 못 자요. 그만큼 육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준 것은 제발 그 육이 떨어지는 날을 고대하라! 이런 뜻이에요. 육의 욕심을 채우려 하지 말고 육만 떨어지게 되면 그 분홍신의 광기도 떨어지고요. 잘사니 뭐 하겠노. 그거 아무 소용없는 거라. 돈 벌고 잘사는 것도 육이 떨어지게 되면 돈도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뭐 신상? 로렉스? 전부다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뭐 취직? 아니 영의 사람이 무슨 일을 합니까, 남아 있는 일이 없는데. 주께서 일 다 했는데 우리가 할 일이 없어요, 이 땅에. 우리 자신이 마귀한테 속아서 오늘도 뭘 해야 되느냐 하는데 그냥 할 일이 없어요, 할 일이. 야구선수가 만약에 성령 받았다면 그 사람은 아무 할 일이 없고 농부가 아침에 일어나면 성령 받은 사람은 아무 할 일이 없어요. 밭에 나가서 호미질만 하죠. 호미질은 할 일이 아니에요. 그냥 심심해서 해보는 거예요. 야구선수가 성령 받으면 타석 나가서 치는 거, 이거 심심해서 하는 거예요. 이거 안 해도 괜찮아요. 해서 안타치고 석 점 나고 뭐 이런 거. 또 홈런 때리고.

항상 이래요. 안 해도 되는데 이 죄 있는 육신의 몸이 있기에 안 해도 되지만 육이 심심하다니까 한번 해볼까?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안 해도 되지만. 그래야 우리가 이 나쁜 천사, 범죄한 천사의 시험으로부터 벗어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준다는 것은 더 이상 우리가 악마에 놀아나지 않는 대상이라는 뜻이에요. 그것을 주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자꾸만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악마의 일은 예수님의 일을 방해하고 예수님의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나쁜 천사의 시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일은 다 이루었거든요. 다 이루어졌단 말이에요. 악마가 제일 싫어하는 게 일이 이미 파장되어 끝나버린 거예요. 끝났다는 이 의식을 악마는 가장 싫어합니다.

더 이상 우리가 보탤 일이 남아있지 않아요. 뭐 일을 해야 잘했다 못했다가 되는데 일 자체가 없으니까 잘한 일, 못한 일을 평가할 건덕지, 평가할 대상조차도 없는 거예요. 내가 한평생 잘 살았나, 그걸 왜 평가합니까? 떨어져나갈 그런 옷인데요.

고린도후서에 보면 이 세상 우리 인생은 우리가 벗어던져버릴 옛날 옷이거든요. 옛날 옷은 더럽든 깨끗하든 우리가 관여할 바 아니고 그냥 떼어내고 던지고 버리고 가면 된단 말이죠. 이 육신은 버리고 알맹이만 가면 되거든요. 우리 육신을 버리면......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정말 냄새나고 다 떨어져서 옷을 새로 샀는데 헌옷을 마땅히 버릴 데가 없어가지고 길거리에 그냥 툭하고 버리고 갔어요. 그런데 마귀가 와서 내가 버린 옷을 “죽어, 죽어!” 하고 막 밟는다면 마귀가 쓸데없이 그런 짓하는 거 보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장난치면 되죠. 아야, 아야~ 이러면 되죠. 내가 포기하고 버리기로 작정한 그 옷에다가 악마가 “네가 이래도 마음의 고통이 없어? 아프지? 너 지금 괴롭지? 근심이 많지? 걱정 많지? 네가 인생사는 게 힘들지? 그러니까 내 말 들으란 말이야. 힘들지 않아?” 하고 내가 벗어놓은 옷에다가 궁시렁궁시렁 엉뚱한 옷보고 협박과 공갈을 하면서 “너 인생 망하는 거야. 너는 끝장났어, 내 말 안 들으면.”

그러면 우리는 그런 짓하는 악마보고 “뭐라고요? 지금 누구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에요? 무슨 부질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것에 왜 당신은 협박과 공갈을 하십니까? 뭐 내 인생 망친다고? 너 저주받는다고?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

악마는 우리가 바르게 살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가 완전히 뭉개진다고 그렇게 합리적 근거를 가지고 제시하는 거예요. 그렇게 악마의 말에 충실히 따르면서 그 하수인으로서 그 일을 매주 또는 늘 매일같이 해대는 자들이 바로 목사들입니다. 목사 뒤에 악마 있어요. 이 사람들은 교인들에게 할 일을 제시합니다. 제공합니다, 할 일을. 그냥 제시하는 게 아니에요. 이거 안하면 당신은 당신 가족이고 집안이고 미래고 나중에 구원받는 것까지 몽땅 다 실패한다고, 악마 시키는 대로 협박 공갈하라고 목사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악마가 보고 싶다 하면 교회 나가면 돼요. 여기 있잖아요, 목사. 큰 목사 큰 마귀, 부하마귀 부목사. 늙은 마귀 장로. 늙은 마귀 부인은 권사. 매주 할 일 주고요. 설교할 때 할 일 한보따리 주고 끝나고 난 뒤에 광고시간 20분 동안 할 일 다 주고. 교회를 섬기는 자의 집안이 망하는 걸 못 봤다, 이런 식으로 협박 공갈하고. 그게 협박 공갈이거든요.

악마가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분의 육신이 잘 되려면 주의 일에 충성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성도는 그게 생뚱맞은 이야기에요. 고린도후서 5장에 의하면 이 옷을 주께서는 벗으라고 하는 거예요. 결혼해서 살림 사는, 돈 버는 사람 말고, 살림 사는 부인이 남편보고 늘 잔소리하는 거예요. 양말 좀 벗어내라는 거예요, 양말. 양말 벗을 때 거꾸로 뒤집어 벗지 말고 바로 벗어내고. 살림하는 경우에만 그렇습니다. 살림 안하면 반대가 되니까. 남편이 아내보고 잔소리해요. 옷 좀 갈아입으라고. 오늘 빨래하는데 잊어버리겠다 이런 식으로 하는데. 그러니까 아내가 집안 살림하고 남편이 돈 벌 경우에는 그렇습니다.

계속 옷 벗어내라는 거예요. 옷 벗어주죠. 더러운 옷은 벗고 속옷도 다 빨라고 내놓죠. 이게 고린도후서에서 우리가 옷을 벗는 것처럼 이제는 옷을 껴입으려고 하지 말고 그냥 미련 없이 옛 우리의 육신을 가볍게 날려버리고 벗어버려라. 만약에 그걸 계속 입는다면 동네귀신 다 달려들어요, 동네귀신. 동네귀신들 있잖아요. 동네 목사들, 동네 집사들 다 달려든다고요.

애가 성적이 나쁜데 뭐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고 자기 담임목사한테 이야기했는데 친구 목사 한 열댓 명 와가지고 이렇게 해야 됩니다, 이렇게 해야 됩니다. 나름대로의 처방전을 내려서 식후 30분에 약 드세요, 이런 거 비슷하게 일단은 기도에 열중해야 되고 그동안 말씀 안 본적 있는지 되돌아보고 특히 십일조 몇 번 빼먹었는지 그것도 계산해야 되고 선교헌금 서약해놓고 두세 번 후딱 지나간 그거 마저 다 챙겨가지고 하셔야 되고. 이렇게 처방전을 내려주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그 결과가 뭡니까? 자식 공부 잘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어차피 모든 여자는 할머니가 되고 남자는 할아버지가 돼요. 그야말로 남자도 귀신 몰골 되고 여자도 귀신 몰골 돼요. 이건 기도를 안 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기도를 해도 마찬가지에요. 헌금 안해서가 아니라 헌금해도 마찬가지에요. 어차피 낡을 옷은 낡아가는 겁니다.

영의 사람은 그걸 보고 오히려 즐거워하죠. 야, 이제 새 옷으로 갈아입을 날이 가까이 왔네. 이렇게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마귀가 재미가 없어서 어디 뭐 협박 공갈하겠어요? 공갈을 쳐도 반응을 나타내야 재미가 있는데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게 돼요. 하나님은 선악과를 알지 말라 했습니다. 선악과 아는 일은 주님의 담당이지 인간이 할 일이 아니에요. 선악과 알고 난 뒤에는 자체적으로 일이 생겨버렸어요. 나쁜 것을 멀리하고 좋은 것만 하자. 그 일을 왜 굳이 했냐는 말이에요. 왜 굳이 했느냐.

따먹었으면 이제는 그 선악과 따먹은 자체가 ‘정녕 죽으리라’ 한다면 죽어주는 그 일만 하면 돼요. 자꾸 일해서 자기 목숨 부지하려하지 말고 죽어 가면 되는 거예요. 심심하거든 농사짓고요. 안 그러면 바다낚시하든지. 그냥 죽어가는 거예요. 일없이 사는 것도 죽을 노릇이거든요. 심심하기 때문에 일하는 거예요. 일 안 한다고 해서 편한 게 아닙니다. 노는 것도 기술이거든요. 노는 것도 노하우가 있어야 놀지 어지간한 사람은 못 놉니다, 힘들어서. 뭐라도 해야 돼요.

그런데 뭐라도 하는데 거기다가 아무런 의미를 두지 마세요. 이미 모든 의미는 주님이 압수해서 가버렸어요. 우리가 만약에 내 인생의 의미, 가치를 컵에 담았다면 좋은 천사가 와서 컵을 쥐고 있는 이 못된 손!, 탁 때리면서 ‘너는 아예 의미 없음!’ 하고 가져갔어요.

주께서 대신해서 죽으시니까 가져간 거예요. 선악과 내가 처리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다 가져간 거예요. 선악과를 주님 쪽에서 이미 완성시켜버렸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스스로 있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체가 스스로 있음 자체로 이미 완결되고 그게 완전히 완성되는 존재가 되어버려요. 이게 영의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봐야 돼요.

다시 오늘 본문 베드로후서 한번 봅시다. 2장 4절에,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되어있죠. 그러면 범죄한 천사를 용서치 않으면 범죄한 천사의 협박과 공갈에 말려들어서 거기에 종속되어있는 모든 자들을 용서한다, 안 한다? 용서하지 않죠. 그리고 범죄한 천사와 함께 포로 잡혀 있는 모든 인간은 결국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그러니까 지옥이라는 장소, 그쪽이 바로 악마에 속한 인간들이 가야될 장소에요.

요한계시록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자는 모조리 악마가 가는 지옥 불구덩이에 같이 참여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얼마나 판결이 깔끔합니까. 정말 깔끔해요.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어요. 오늘 제목을 ‘군더더기 없음’으로 할까.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어요.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그러니까 영적인 사람이 아니면 나머지는 육적인 사람이 되고 육적인 사람이 가야될 방향성은 지옥입니다.

따라서 가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대화가 안돼요. 부부사이라도 대화가 안돼요. 한쪽은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예쁘게 봐가지고 하늘나라 가는 것은 기본이지만 또 상급까지 주지 않겠는가, 라고 말을 하지만 그 속에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거예요. 바들바들 떨고 있어요.

자기의 해야 될 일이 있다는 자체가 이것이 완성되지 않을 경우의 처벌을 겁낼 수밖에 없어요. 뭔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은 평가가 있다는 말이고 평가가 있으면 마저 못했을 때의 처벌을 어쩔 수 없이 받는다는 두려움은 어떻게 해소될 수 없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해소되지 인간적인 이성과 논리, 윤리 가지고는 이 공포와 두려움이 해소될 수가 없어요.

제가 아직도 성령이 왔다는 것을 설명 안했는데 미리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에 보면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하고 상대 안 해요. 우리를 그동안 강하게 붙잡아두었던 집주인이 있죠. 마태복음 12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집주인이 나와 있어요. 12장 28절에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너희에게 임했다고 되어있죠. 그러니까 장애요소를 뚫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성공한 거예요. 적진에 있는 라이언 일병을 형이 와서 구출한 거예요. 이 영화 맞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치 않고서는” 그러니까 인간을 약한 자로 보고 악마를 강한 존재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약한 자는 강한 존재에게서 자력으로 탈출이 불가능합니다. 탈출 안돼요. 그냥 종교적 감수성으로 몸부림칠 뿐이지, 몸부림친다고 마귀가 놔주고 ‘아이고, 네가 대견하구나.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네가 그렇게 생각이 깊구나. 놔줄게. 나는 너의 사랑에 놀랐다.’ 마귀가 그럴 리가 있어요, 마귀가? ‘이럴 줄 알았지?’ 이렇게 나오죠. 마귀가 오히려 약을 올리죠.

우리는 마귀하고 싸워서 마귀를 돌파할 수가 없습니다. 마귀를 상대하실 분은 여기 나오잖아요. 하나님의 성령, 주님이 성령을 가지고 마귀를 상대하는 거예요. 우리는 상대하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마귀를 상대한다면 우리가 마귀를 상대할 필요가 없죠, 이미 영의 사람 같으면. 마귀에게서 빼내줬잖아요. 마귀에게서 빼내줬다 이 말이죠.

어떤 대위가 제대를 합니다. 사단장에게 경례, 충성. ‘그동안 사단장님 덕분에 군대생활 잘 마치고 제대합니다.’ 이렇게 하니까 그 평소에 악감정 있는 사단장이 ‘네가 나 있을 때 도전했지?’ 해가지고 그 여자 사단장이 팍 때리려 할 때 법무관이 장갑 낀 손을 딱 잡으면서 ‘전 이제 사단장님 부하 아닙니다. 민간인입니다.’ 이게 <군검사 도베르만>이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거예요.

악마가 협박 공갈을 할 때 나는 더 이상 너의 종이 아니라 주님의 종이다. 주님의 신부다. 딱 커버가 되어야 되죠. 커버를 딱 하고 그다음에 뭐할 거냐. 그건 10분 뒤에.

 

서울의존강의20220414b 베드로후서 2장 4절(회수되는 자기 의)-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범죄한 천사, 악마 그리고 그 악마의 설침, 악마의 활동. 여기에 대해서 벌벌 떨고 겁을 낸다는 것은 여전히 육적인 것, 성령 받았음의 가치를 아직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군을 제대하고 난 뒤에 못된 선임하사가 뭘 하든 말든 자기는 이미 빠져나왔잖아요. 저 군대 때 어떤 사람은 소대장이 자기를 괴롭히니까 제대하고 난 뒤에 복수한다고 찾아갔어요. 너 나 있을 때 괴롭혔지? 괴롭혔잖아. 이제 더 이상 부하가 아니니까요. 따라서 하나님의 천사가 활동하는 데에 대해서 나는 무관한 상태에서 그들 악마를 느긋하게 즐기면서 볼 수 있는 그런 마음가짐이 되어 있어야 돼요. 벌벌 떨면서 보게 되면 이것은 도리어 악마가 원하는 바죠.

예를 들면 어떤 집이 있는데 깊은 산중에 자살한 사람이 서너 명 있어가지고 밤마다 귀신 나온다 하면 일부러 거기에 한번 자본다든지... 뭐 자볼 필요까지는 없죠. 이것만 알면 돼요. 말씀이 뭔가. 말씀전파는 순전히 예수님의 일이에요. 말씀전파가 나의 일이 아니고 예수님의 일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은 알아서 스스로 말씀전파를 하는 겁니다.

전파를 해버리면 이 말씀전파에 대해서 우리 인간이 나설 이유가 없는 것은 악마가 주님께 직접 강력하게 반발하고 대항하거든요. 대항할 때 악마가 그냥 대항하는 게 아니고 자기 편에 속한 인간들을 총동원해서 예수님의 말씀전파를 저지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소위 구원 받은 자가 5절, 6절, 그다음에 7절 나오죠. 5절에 노아 나오죠. 6절, 7절에 롯이 나오죠. 노아, 롯 이런 사람의 특징은 본인이 믿음 좋아서 구원 받은 게 아니고 말씀에 의해서 생산된 사람이에요. 주님께서 일방적인 말씀을 줌으로써 등장된 인물이에요.

노아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삽입되는 겁니다. 언약은 노아가 만든 게 아니에요. 노아 속에 그냥 쳐들어와 꽂힌 거예요. 노아가 있는데 말씀이 와서 노아의 중심부를 후벼파서 말씀을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면 노아가 움직인다는 말은 찰랑찰랑~ 말씀이 움직이는 거예요. 입만 떼면 자꾸 노래가...... 또 말씀이 넘치면 찬찬찬 되겠죠. 소돔과 고모라에 롯도 마찬가지죠. 아브라함의 언약이 들어온 거예요. 아브라함의 언약이.

이 세상 악마에 속한 인간들은 자기가 열심히 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역량을 총동원해서 멸망, 저주를 대비하고 방어하고 그것을 어떻게든 극복하려고 애를 쓰는 반면에 하나님의 사람은 그냥 말씀이 그 인간을 잠식해버려요. 장악해버렸습니다. 무언가 낯선 것이 쑥 들어와버린 거예요.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말씀이 주인공이 된 겁니다.

신약에 오면 그런 사람 중 또 한사람이 세례 요한 같은 경우에요. 세례 요한은 출생부터가 말씀에 의해 출생해요. 그 세례 요한의 모습이 마지막 때의 성도의 원형이에요. 네가 구원받은 것은 창세 전에 아버지하고 아들이 생각한 대로 사랑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그 사랑이라는 말씀의 위력이 너하고 사전에 아무런 상의도 없이 그냥 너에게 쳐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그게 성도에요.

수요일 말씀처럼 우리가 주님을 찾기 전에 주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는 거예요. 구원하려고? 아니요. 말씀이 이렇게 실제로 살아서 움직인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한 증거용으로 우리에게 온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 하는 게 아니고 그건 말씀이 약속대로 약속이 약속대로 했을 뿐이에요. 그래서 내가 구원받은 것이지 내가 뭘 했다고 구원받겠습니까? 그냥 약속이 쑥 들어온 거죠, 쑥. 쑥 들어온 거예요.

그리고 그 들어온 노아로 하여금 뭐를 목격케 하느냐. 악마와 이 세상의 육적인 것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있는가를 목격하게 만들죠. 그 목격되는 저주받는 현장에 노아로 하여금 말씀을 전파하고 외치고 그렇게 하게 하신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 있는 말씀이 그렇게 노아를 시켰기 때문에 그냥 외치는 거죠.

구약에는 말씀, 신약에는 성령. 성령께서 우리를 이 육의 현장에다 두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복음이 터져나오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우리가 안 느긋할래야 안 느긋할 수 없어요. 느긋해요. 내 일이 아니니까요. 내가 혼신을 다하여 뭘 해야 획득할 수 있는 나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내 일이 아니고 남의 일, 주의 일이기 때문에 느긋하게 언제든지 거기에 동참할 수 있고 참여할 수 있는 겁니다.

5절 보겠습니다.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이게 무슨 이야기냐면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세상에 홍수를 내렸다는 말은 이 세상 실정을 홍수라는 언약 체계가 동원되어야 세상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걸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홍수 심판을 내린 거예요. 소위 경상도 말로 디벼버린 거예요. 썩어빠진 것들이 안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뒤집어버려요. 확 뒤집어버리죠.

그런데 거기서 구원받은 사람이 몇 명입니까? 그 많은 사람들이 아무 일없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그렇게 살아왔어요. 이게 평온한 일상이죠. 사람들은 자기 빼놓고 남들은 다 행복한 줄 알아요. 자기만 힘들고 남들은 다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이게 평온한 일상이거든요.

이 평온한 일상에 갑자기 뭐가 닥쳤습니까? 홍수가 내렸는데 그냥 홍수가 아니고 홍수 심판이에요, 홍수 심판. 심판을 하는 거예요. 이 평온한 일상이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의 대상인 거예요. 심판 받는 자들이 평온하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이렇게 해왔던 겁니다.

같은 육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거죠. 영의 사람이라야 이 평온한 일상이 망할 세상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죠. 그렇지 않고 육의 사람들은 알 수가 없어요. 영의 사람들이 일상 속에 들어가 보면 각자 각자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불행하게 사는지를 다 느낄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욕심 때문에 그래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 이 욕심은 아까 분홍신 동화처럼 본인이 감당이 되지 않아요. 통제가 되질 않아요, 욕심은. 욕심은 몇 억 가졌다고 욕심이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또 건강하다고 욕심이 멈추는 법이 없어요.

남자 여자들 필라테스 한다고 완전히 몸 가꾸는 것에 중독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김종국인가 가수도 있잖아요, 모기소리 내는 가수. 나는 장가보다 몸. 그 자체가 마약 같아요. 중독됐어요, 자기 몸 가꾸는 것에. 여자들도 몸 가꾼다고 몇날 며칠 굶고 닭가슴살 먹고 고구마 먹고. 그렇게 몸 가꿔놓고는 기껏 사진 몇 장 찍고 난 뒤에는 그다음 걱정거리가 도대체 이 아름답고 우아한 몸매가 며칠 만에 와르르 무너지는가, 그게 또 걱정이네요.

자기가 자기의 노예가 된 겁니다. 내 욕심에 내가 노예 된 이상은 인간에게 행복은 없습니다. 어느 집구석 어느 집안에도 행복은 없습니다. 어디에도 인간에게는 행복이란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욕심 없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기 때문에.

욕심은 탐심을 낳기 때문에 탐심은 계속 더 끌어 모아야 돼요. 멈추지를 못합니다. 악마가 계속 뒤에서 채찍질하고 있어요. 더 당깁니다. 네가 그래서 만족하겠어? 늘 결핍을 느끼고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그 사마리아 여인처럼 남자 다섯 명 사귀어도 먹어도 먹어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갈증이 계속 일어나고 있어요. 그래서 거기서 나오는 공포와 두려움이라는 것은 이 결핍을 내가 못 채우면 지금보다 내가 더 불행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것으로 인해 바들바들 떨고 있어요. 왜 떱니까? 내가 망할까 싶어서.

나라는 것은 없어요. 나라는 것은 아예 없고 제대로 이야기해야죠. 육이 망해질까봐 그러는 거예요. 육은 이미 망했거든요. 악마는 뭐라고 거짓말하느냐 하면 잘하면 안 망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인간 스스로 계속 이런 덫에 빠지게 만드는 거예요. 자신의 야망으로 인해 스스로 덫에 빠지게 만들었어요.

유튜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유튜브 만들어가지고 구독자가 7명이라면 와, 세상에. 내가 이렇게 관심을 많이 받는 거야? 좋아했죠. 구독자. 그런데 ‘좋아요’가 왜 하나도 없어. 그런데 ‘좋아요’가 2명이면 아, 정말 이 세상은 살만한 세상이야. 어떻게 생각이 같을 수가 있어. 좋아요. 나중에 구독자가 한 9명 되면 언제 마지막 하나 차서 두 자리가 되느냐. 나중에 99명 되면 언제 세 자리 되느냐. 그러니까 인간이 자기 육에 스스로 자기가 노리개 감이 되는 겁니다. 늘 결핍을 느끼고 행복은 없는 거죠. 성립되지 않습니다. 지옥가기 전부터 이미 지옥생활을 벌써 시작한 겁니다.

5절에 보면 “이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라고 되어 있죠. 이 이야기는 어렵지 않아요. 아주 쉽습니다. 인간을 통해서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모든 인간은 아담에 속했기 때문에 이것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마땅히 저주에요. 그런데 말씀이, 약속이 어떤 사람에게 오게 되면 이 사람 빼놓고 다 저주에요. 이 사람 빼놓고는. 이게 하나님의 의거든요.

그러면 말씀에 뭐가 있느냐 하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나오잖아요. 후손을 떼어버리면 여자 남고 뱀이 남습니다. 뱀은 여자를 상대하고 여자는 뱀을 상대해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여자가 나타나야 뱀의 정체가 노출되고 뱀은 여자가 나타날까봐 늘 의식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자는 이 세상에 있느냐, 없느냐? 여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옛 세상에는 여자가 없어요. 여성은 어디에 종속되느냐 하면 남성에 포함이 되어버려요. 여성은 없고 남성의 비-남성화라 해요. 남성과 비-남성화만 있어요. 남자와 관계없는 여성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성이 등장하려면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이 들어와야 되는데 그 다른 세상이 오는 것이 바로 여성이에요. 여자의 후손이에요. 이 세상은 이미 선악과 따먹고 저주 받아요. 죄밖에 없어요. 그런데 다른 세상은 뭐가 있느냐? 이 의가 있습니다.

따라서 노아나 롯이나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을 통해서 무슨 이야기가 들려지느냐 하면 이 옛 세상과 다른 새 세상이 그들을 통해서 소개되었다는 이 사실,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을 통해서 서로 대비되는 두 개의 세상을 비쳐 나타내 보이는 역할을 하나님의 성도들이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이 이 일을 해야 돼요.

이 일을 한다는 말은 우리가 일을 한다는 게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세요. 옛 세상과 새 세상의 차이점을 분간할 수 있는 안목을 성도는 간직하고 있어야 됩니다. 옛 세상 사람은 어떤 누구도 용서치 아니하고 새 세상에서는 어떤 사람도 다 하나님의 의가 되는 그러한 결정이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제공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노아 때 홍수가 뭐냐? 분류죠, 분류. 영원히 같이 할 수 없음을 알려주는 분류. 이 분류를 율법에 보면 거룩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분류되는 사건 중 하나가 출-애굽 사건. 애굽에서 탈출함으로 말미암아 홍해를 중심으로 애굽 사람들, 군사들은 홍해에 빠져 죽죠.

애굽 사람들이 바다에 빠지는 이유가 뭡니까? 전에 이야기했는데요. 애굽 사람이 바다에 빠지는 이유는? 사람은 물에서 살 수 없기 때문이에요. 너무 간단한 문제죠. 너무 간단한 문제에요. 물인데 왜 기어들어가? 해녀도 아닌 게 왜 들어가요. 물에 들어온 본인들이 주제넘은 거예요. 어딜 감히 인간이 땅에 살지, 물에는 왜 기어들어가요. 죽는 게 마땅하죠.

그때 애굽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쟤는요?’ 손가락 가리키면서 이렇게 하겠죠. 저들은 왜 물에서 살았느냐. 하나님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뭐가 물에서 살았어? 그때 바다가 갈라져서 물이 양쪽에서 스톱이 돼서 안에 길이 났어요. 전부다 박태환도 아니고 물 헤엄쳐서 건넌 게 아니고 그냥 평소에 하던 대로 땅을 건너갔죠. 바다 속에 길이 나 있어가지고 간 거예요.

그럼 애굽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왜 우리 건널 때는 길이 없느냐? 그건 내 마음대로다. 그건 하나님 마음대로죠. 네가 뭔데 길을 내줘야 돼? 이 길은 그들이 말씀의 증인이기 때문에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서 길을 열은 것이고 인간에게는 그런 게 없어요. 그냥 너희 살던 대로 살아. 용서 안 해줄 테니까 그냥 살아. 먹고 마시고 잘하잖아, 그거. 시집가고 장가가고. 그냥 살아. 살아서 지옥이나 가, 그냥. 이게 옛 세상입니다.

부러워할 거 없어요.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뿐이라고 하잖아요, 사도 바울이. 십자가가 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부러 허락한 길이에요, 그 십자가 길이. 십자가 피가 우리를 용서했으니까. 우리가 십자가를 믿음으로 용서받는 게 아니고 십자가 자체적인 효과를 증명하기 위해서 임상 실험용으로 우리를 자기의 택한 백성에게 찾아온 거예요. 실험 정도가 아니죠. 확실한 거죠.

십자가가 십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일방적으로 용서를 해주신 것. 피와 우리의 죄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그 시스템에 우리를 집어넣은 거예요. 누구를? 노아, 롯 그리고 택한 백성들을. 그렇게 하게 하신 겁니다. 활동하신 주체는 주님 쪽이에요. 우리는 그냥 주님 하신 일에 증인으로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 증거하는 용도로 그냥 채택될 뿐이에요. 주님이 하는 일의 실습용이죠, 실습용.

의과 대학이나 생물학에서 실험할 때 실험용 흰 쥐를 키우잖아요. 한 열댓 마리 중에서 누구 하나를 딱 선택해서 데려갈 때 나머지가 왜 저는 안 뽑혀갑니까? 그걸 뽑혀가는 자보고 물으면 안돼요. 나도 내 마음대로 안 돼. 왜이래? 내가 손 들어서 뽑아달라고 한 게 아니야. 교수님이 나를 그냥 뽑았어. 그게 노아에요. 그걸 택함이라고 하는 거예요, 택함. 너는 내 십자가 증거하라고 그냥 채택한 거예요. 채택당한 거예요, 그냥.

그러니까 이거는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뛰어나다든지 성질이 좋다든지 하는 것과 아무 상관도 없는 거예요. 예수 믿었으니까 성질 좋아야 된다. 그게 바로 마귀적인 거예요. 채택된 그 자체로 종결되어버렸는데 채택된 걸로 모자라고 성격이 온화한 성격으로 바뀌어야 구원받는다는 이게 바로 악마가 발목 잡는 거예요. 무슨 할 일이 남아있는 것처럼.

6절에 봅시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여기에 음란, 무법의 기준이 뭐냐 하면 이 기준은 육의 선악기준이 아니에요. 이 기준을 인간이 아는 그 기준으로 생각해버리면 그것은 구원되지 않는 육적인 한계에 그냥 머물러 있는 거예요.

이 기준은 언약에서 나온 거예요. 음란이라든지 불법은 언약이 기준 되어서 언약이 나왔을 때 음란과 불법이라는 것이 비로소 성립되는 겁니다. 그럼 언약의 최종 주인공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죠. 그래서 요한복음 3장 36절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어요?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 아들을 순종치 않는 자들에게는 저주. 맞죠? 얼마나 깔끔합니까? 얼마나 깔끔해요.

뭐 맛있는 빵 그거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깔끔합니다. 빵 한번 안 먹으면 어때요. 지금 그게 구원하고 관계없어요. 하나님의 일은 내가 살을 빼느냐 안 빼느냐, 뭐 관절이 아프다, 언제 병원 가느냐 안 가느냐 지금 그게 문젯거리가 되지 않아요. 그래서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을 때 여기서 행함책이 동원됩니다. 행함책은 하나님이 남긴 모든 율법과 선악체계에 의해서 처벌받게 되어 있어요. 선이라는 것은 단 하나도 없고 모조리 악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최종 기준은 예수님이 하신 일이 기준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일이 의가 된다면 예수님이 하시지 않은 일은 뭐가 되겠습니까? 이게 악이 되고 음란이 되고 불법이 되는 거예요.

인간이 있는데 ‘나는 음란하지 않았다. 나는 불법 안했다.’ 가 되어버리면 그 가치가 주님께 갑니까? 본인의 의로 되돌아옵니까? 본인의 의로 되돌아오는 거예요. 이게 선악체제의 딜레마에요, 딜레마. 악을 저지르지 아니하면 선한 자가 누구입니까? 악을 저지르지 않은 자가 선한 자가 돼요. 그러니까 자기 한계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요. 내 잘남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자, 그게 바로 악한 천사가 하는 짓이에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보고 평가하지 말라, 심사하지 말라는 거예요. 나는 선악체제를 알아서 내가 심사하고 내가 심판내리고 내가 평가하겠다는 겁니다. 자기 혼자 야구하고 자기 혼자 세이프하고 자기 혼자 야구하고 자기 혼자 안타하고. 자기가 출제하고 자기가 정답이고. 이거 미친 거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 미친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이에요, 이 세상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를 내세우는데 보면 미쳤어. 모든 평가가 자기 정당성에서 멈추고 말았어요. 그게 최종 종착점이 되고 말았어요. 나의 의. 이게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이 자기 의에 미쳐가지고 그리스도의 의를 배격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저주받게 하는 거예요.

악마가 지배하는 옛 세상의 치명적인 약점은 모든 가치와 판단이 악마에게 또는 인간 자체적으로 거기에서 스톱이 된다는 그 점이에요. 제3의 심판자를 인간들은 용납 안하고 그것을 강력하게 반발합니다.

언젠가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인간이 제일 기분 나쁜 것은 누가 나에게 지적질 하는 거예요. 제일 기분 나쁜 게 지적질 하는 거예요. 부부싸움의 99.9%가 지적질 때문에 싸우죠. 네가 나한테 뭐했다고 지적질 하느냐. 너 돈 얼마 벌어온다고 나한테 지적질 해? 결국은 돈 문제가 나오죠. 너한테 시집와서 고생한 거밖에 없는데 그것도 남편이라고 나한테 지적질 하나? 이런 식으로. 반대도 마찬가지죠.

깔끔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순종치 않는 자에게는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다. 더 이야기할 게 뭐가 있어요? 없죠. 이 악한 마귀를 언급하는 것은...... 다시 하겠습니다. 마귀가 왜 자꾸 등장하느냐 하면 인간이 옛 세상, 새 세상이 뭔지를 전혀 감 잡지 못하고 그냥 있는 이 세상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마와 함께 있는 옛 세상이라는 규정을 인간들은 이해를 못하고 있는 거예요.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고 착실하게 살면 되잖아요. 앞으로 잘할게요. 잘할게요. 맨날 이런 식이에요.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어요. 사람이 회개하고 반성한다는 것은 자기 의를 감추기 위한 어설픈 연출이고 속임수에 불과한 거예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사실은 그 뒤에 말이 있어요. 이것만은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자꾸 뭐 앞으로는 잘할게요. 그러니까 나의 자존심과 나의 가치만큼은 좀 훼손되지 않게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거예요.

이 선악체계가 그만큼 독소요소로 우리의 뼛속까지 완전히 박혀서 이것을 못 빼냅니다. 차라리 옷을 벗으세요. 우리 옛 생활, 우리가 우리하고 헤어지세요. 바이바이. 안녕. 야곱과 에서가 쌍둥이죠. 우리는 우리와 쌍둥이 되었어요. 우리가 하나 더 생겨버리면 옛 쌍둥이는 잘 가, 인간아. 이 옛 세상에 속한 나야. 하고 좀 이제 보내주세요. 그 옛 세상에 속한 내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질책하고 벌 내리고 나무라고 꾸중하고. 너 그 따위 식으로 살아가지고 네 인생 성공하는가 보자. 너 정신 좀 안 차리나? 이런 식으로 계속 잔소리하고 있어요.

아무 상관도 없는데. 악마가 선악을 들먹여가면서 그런 식으로 우리를 온전케 하라고 보다 더 진전된 모습을 보이라고 계속해서 우리를 나무라고 촉구하고 있죠. 우리에게 할 일을 자꾸 만들어줄려고 하는 거예요. 끝났는데.

성령이 와야 지금 제 말을 이해합니다. 성령이 안 오면 이런 소리해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성령 받습니까?” 아이고 참내. 주시는 분은 내가 아닌데 왜 저보고 이야기해요. 성령은 선물로 그냥 주시는 분인데 그분한테 이야기해야죠, 그분한테. 그러면 그 사람이, “예수님 저에게도 성령을 주시옵소서.” 그러면 예수님께서 “너 안 받았나?” “안 받았습니다.” “안 받은 주제에 왜 나한테 달라고 해? 안 받았으면 그걸로 끝났지.” “언제쯤 옵니까?” “네가 뭔데 내가 줘야 되는데. 나의 신은 나의 성령은 육과 함께 할 수 없는 거야. 성령을 달라하는 그게 바로 육이야. 너는 선악과처럼 그냥 망하면 되지 왜 그걸 네가 너를 살리겠다고 그런 노력을 하느냐. 그게 바로 육이야. 나는 너와 함께 할 수 없다.” 이런 판정을 받죠. 물론 그런 시나리오까지는 상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런 음성조차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악하고 불법이고 음란하다면 성도는 뭐냐. 성도에게는 감사가 나옵니다. 감사가 나오지 않는 것은 전부다 음란이고 불법입니다. 어려운 사람 도와주면서 속으로 씩씩거리면 감사가 아니고 짜증을 내는 거예요. 남들 보기에는 막 기도 열심히 하는데... 또 어떤 사람은 금식하면서 일부러 인상 찡그려가면서 금식해요. 나 벌써 일주일째 굶었다는 티를 다 내는 것. 어떤 사람은 오른 손이 한 것을 왼손이 아는 식으로 구제하는 거. 어떤 사람은 기도하면서 기도 티 내는 거.

이게 뭐냐 하면 느긋함도 아니고 완료성도 아니고 그냥 아주 애를 쓰는 거예요. 막 힘 주어서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감사와 기쁨과 고마움과 느긋함이 있어줘야 되고 이 일은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 나를 덮친 것이라는 사실을 본인이 기꺼이 수용해야 돼요. 집안에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일조차도 주께서 일으킨 일이라고 느긋하게 받아들여야 돼요. 옛 세상에 속한 것들은 고민과 걱정이 늘어지죠.

8절에 봅시다.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롯의 특징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에 속한 사람이에요. 그게 창세기 19장에 보면 나옵니다. 창세기 19장 29절에 보게 되면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아브라함에게 준 언약을 돋보이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조카가 있는 소돔과 고모라를 불바다로 만든 거예요. 하나님은 그만한 권한이 있습니다. 자기 언약을 언약대로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거칠 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내가 이때쯤 태어나게 하시고 살게 하시고 왜 이 지역에서 서울이면 서울, 대구면 대구에서 왜 살게 하시는가. 그것은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하신 것처럼 주님을 생각해서 그들의 멸망하는 모습과 대비되는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아서 말씀전파의 일원으로서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9절에 보겠습니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이렇게 되어있죠. 여기 4절도 그렇고요.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형벌 가운데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까지’라는 말은 그때부터 나온다는 뜻이 아니고 이미 형벌 속에 있고 이미 지옥 속에 있고 이미 심판 속에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이에요. ~까지. 주욱- 끝까지 간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을 시간의 흐름이라 하지 않고 이걸 ‘시간의 공간화’라 하는 거예요, 시간의 공간화. 시간이 어떤 공간 속에 이미 잠식되어 있는 거예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이 공간 밖을 못 벗어나는 거예요.

지옥 안에서 시간은 흐르고 천국 안에서 시간이 흐르는 것은 이 세상의 경우에 아직까지 모든 것이 세상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미 시작된 천국과 이미 시작된 지옥 사이에서 나름대로 시간이 흘러가는 거예요. 흘러가지만 이미 속성은 지옥은 지옥까지, 천국은 천국까지라는 말로 해서 이 속성은 달라지지 않고 그 안에서 진행되는 천국의 속성, 지옥의 속성인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롯의 경우에는 이렇게 보시면 제일 쉬워요. 롯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너희들이 마음껏 하나님 없이 살고 자기 욕심과 탐욕대로 해도 너희의 끝은 지금 하는 행세를 봐서 끝까지 그 행세를 유지할 것이고 ‘끝났다, 애들아. 끝났어. 너희들의 운명은 끝난 거야.’ 이런 뜻이에요.

어떤 남자가 그냥 그림을 그린 게 아니고 문신을 새겼다고 봅시다. 몸에 문신을. 그냥 그려버리면 목욕탕에서 목욕할 때 이게 지워져버리잖아요. 그게 아니고 몸에다가 이미지를 완전히 박아 넣은 거예요, 먹물로. 그러면 그 몸 가는 곳에 문신은 자동적으로 같이 합세해서 가게 되어있죠. 이게 지옥 가는 운명이고 이게 천국 가는 운명 같은 거예요. 나에게 천국 가는 요소가 주어졌기 때문에 이것을 내 힘으로 뽑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목사님, 제가 성도입니까, 성도 아닙니까?” 일부러 한번 해보세요. 그게 뽑히는가. 십자가의 고마움이 여러분의 힘으로 뽑히거든 그건 그림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내 뜻이 아니고 문신처럼 내 몸에 아예 자리 잡고 박혀버렸으면 이 십자가 은혜가 주님의 용서가 뽑히는 게 아니에요. 성령도 마찬가지에요. 성령이 와버리면 ‘성령, 나가. 훠이 훠이.’ 나가라고 한다고 ‘알겠습니다.’ 나가면 그건 장난치는 거죠. 그런 성령은 없어요.

인간이 여기 지옥 가는 문신이 있는데 아무리 교회 가서 말씀 듣고 성령 받았다고 아무리 행세해도 결국 그 사람은 자기의 문신따라 자기 운명이 확정됩니다. 바뀌지를 않아요. 바뀔 수가 없어요, 그것은.

나쁜 짓을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깔끔하지가 않다는 거예요. 항상 뭐 예수 믿고 다 해놓고 늘 지저분해. 뭔가 깔끔해야 되는데. ‘아들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치 않는 자에게는 진노가 있다.’ 얼마나 깔끔합니까? ‘예수의 십자가 피로 용서받았다.’ 얼마나 깔끔해요. 뭐 군더더기가 필요합니까? 군더더기가 필요치 않잖아요.

정리가 되잖아요. 성도는 정리가 된다고요. 온갖 복잡한 일이 있지만 마지막 깔끔하게 한다는 것은 내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피 흘림으로 유월절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가듯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넘어간다. 이것을 여러분 힘으로 ‘아니야. 이건 낭설이야. 이건 착각이야. 그건 기독교 교리에 불과한 거야. 그건 내가 배운 거야.’ 라고 스스로 자신을 의심해보세요. 의심해서 ‘내가 미쳤지. 내가 현실을 봐야지. 내가 왜 복음에 빠져가지고... 지금이라도 발 빼자.’ 빼세요. 그게 빠질 수 있거든 그동안 지식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꾸 마귀를 통해서 흔들기를 하는 거예요. 몸에 새긴 문신이 내 힘으로 지우개로 지운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사랑은 연필로 써야 돼요. 빨리 바꿔야 되니까. 후딱 지우고. 하지만 성령은 우리가 지울 수 없도록 아주 박아놓은 거예요. 말씀이 우리보다 세니까. 옛 사람은 악마가 더 세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리 교회 다니고 성령 달라고 아무리 해도 마귀가 놔주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그게 10절에 나옵니다.

9절에 보면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까지’라는 말은 계속 간다는 뜻이에요. 그때부터 거기서 그만, 이 아니고 반대말이에요. 심판 때까지 계속 간다는 뜻이에요. 10절에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육체가 있는데 정욕이 없을 수가 없죠. 육체가 있는데. 육체만 있어요. 성령은 없어요. 영은 없고 육체만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보고 뭐라고 나무랄 수가 없죠. 지옥 갈 행세를 하면서 지옥 가지 말라는 게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육체밖에 없는데 그럼 지옥 가야지요. 어디 가는데요.

선악을 아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면 자기가 선을 행해도 악이 돼요. 왜? 감사와 고마움이 없어요. 나올 수가 없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 감사와 고마움은 대상이 있어요. 내가 하지 않았는데도 이게 웬 떡입니까? 한다면 이 감사와 고마움은 누구한테 나아가느냐 하면 주님이 하신 십자가 다 이루었다, 거기에 하잖아요.

그런데 인간의 선악은 이 종착점이 누구입니까? 선을 행하고 악을 안 행하는 그걸 누가 했어요? 육신의 공로로 나의 잘남으로 결국 이게 귀속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자기 가치만 챙기고 있어요, 자기 가치만.

불신자들이 지금 이 시대에 위로받는 것이 주로 어디냐 하면 개와 고양이에요. 자기도 고양이 흉내 막 냅니다. 야옹~ 해가지고. 거기에 돈을 엄청 투자하고 하죠. 누가 나를 위로해줍니까? 여러분입니까? 누가 나를 위로해줘요? 내 공로, 내 성과의 업적과 실적은 내가 키운 개와 고양이가 가장 확실하잖아요. 내 작품이에요, 내 작품. 내가 공들인 것으로 나 스스로 내 가치를 확정짓겠다는 거예요. 나는 존재의 이유를 거기서 찾겠다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잘났으니까 나는 지금 죽기 싫다는 겁니다. 더 살아야겠다는 거예요. 그게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사는 거예요.

10절 끝에 보면 결국 그 결과가 누구를 훼방한다고 했습니까?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한다고 했죠. 우리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 누구로부터 훼방당하거나 손해당하는 일은 없습니다.

11절에 봅시다.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주 앞에서 저희를 거스려 훼방하는 송사를 하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은 악마가 설치는 것에 대해서 힘센 천사도 그냥 놔둬버리죠. 계획이 뭐냐 하면 끝까지 심판 가야되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들에게 이게 없어요. 구원이 없어요. 구원을 안 줍니다. 그들을 구원하지 않아요. 그게 주의 뜻이에요. 구원 받지 못할 자는 구원하지 않습니다. 생명책에 이름 없는 사람한테는 그걸 악마에게 위탁해서 악마의 손에 운명을 같이 하게 하셨어요. 구원이 없는 자에요. 나밖에 모르는 자와 구원이 없는 자는 같은 말입니다.

연세 많은 부모님 교회 데려가려고 얼마나 애를 많이 썼습니까? “어머니, 이제 나이도 많은데 마지막에 천국 지옥이 있어요. 자식 소원이니 교회 한번 가주세요.” “내가 거길 왜 가는데? 내가 평생 뭐 나쁜 짓 한 거 있다고? 내가 너 잘 키운 죄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 하죠. 그럼 자식 된 도리에서 그게 안타까워서 그렇게 하는데 사실은 그걸 안타까워하면 안돼요.

자기는 구원받은 것이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교회에서 애써서 간절히 기도해서 구원받았습니까? 그건 마귀들이 하는 짓이고요. 구원받은 이유가 없어요. 결정을 내가 한 게 아니고 사전에 협의한 게 아니고 일방적인 결정에 의해서 십자가로 용서받는다는 사실을 알았고 유월절 피로 말미암아 넘어감으로써 일체 정죄가 없고 있는 것은 천국의 복락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내가 알았기 때문에 이것이 너무나 기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 부모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부모한테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나한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교회 가서 열심히 기도하시면 어머니 구원받으실 수 있습니다, 가 아니라 교회 안가고 가고가 중요한 게 아니고 나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났었습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믿든지 안 믿든지 좋을 대로 하세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노아의 이웃집에 사는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 이유를 알겠죠? 노아가 당대의 뭐라 했습니까? 당대의 의인이죠. 의인이 어떻게 이웃집 한 사람도 구원 못 했어요? 그래놓고도 의인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습니까? 이렇게 막 달려들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노아 가정만 구원되는 것이 뜻이기 때문에 그 뜻에 노아는 충실한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일은 하자가 없고 잘못이 없기 때문에 몇 명이 구원받든 주님한테는 퍼펙트한 겁니다. 완벽한 겁니다.

그러니까 괜히 오지랖 부려가지고 자기 좋아하는 사람만 이뻐하는 사람만 천당 보내려고 노력하지 마시고요. 그러지 마시고. 꼭 자기 싫어하는 사람은 전도 안 하고 좋아하는 사람한테 가가지고 이게 작업 거는 건지 전도하는 것인지 분간도 안 되는 그런 짓할 게 아니고 주께서 마주치게 하실 때가 있을 거예요.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주께서 마주치게 하시는 상황 속에서 ‘내가 아는 복음은 주께서 살아계셔서 이런 식으로 자기 백성을 일방적으로 건지십니다.’라고 함으로써 악마가 인간한테 시키는 모든 일 있잖아요. 열심히 해야 구원받고 교회 다녀야 구원받는다는 이 모든 악마의 그 거짓을 폭로시켜버리는 그 일에 여러분들이 주저하지 말고 달려드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일한 게 아니고 주께서 살아 일하심을 우리는 자주자주 잊어버립니다. 마치 내가 설치지 않으면 아무 일이 안 되는 것처럼 자주자주 오해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제는 육신에 속한 마귀의 일이고 마귀의 유혹인 것을 깨달았사오니 주님이 주신 기쁨으로 세상에 나설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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