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211216a 베드로후서1장 19절(실패다)-이 근호 목사
베드로후서 1장 16절부터 하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그렇게 되어 있죠.
16절의 내용을 한 마디로 생각하게 되면 이 이야기는 정리가 됩니다. 어떻게 정리하느냐 하면 ‘나에게 일어난 일은 내가 꾸민 것이 아니다’. 나에게 일어난 일은 내가 꾸민 것이 아니에요. 공교하게 만든 게 아니에요. 그래서 베드로가 베드로후서 이 이야기를 하면서 ‘나에게 일어난 일은 내가 꾸민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가지고 이걸 확장시킵니다. 크게 키워나가요. 전(全)우주로 다 키워나갑니다.
그럼 내가 꾸민 것이 아니라고 할 때는 인간은 나름대로 내가 꾸민 것이 있다,를 전제로 하는 거예요. 내가 꼼지락거리는 게 있는 거예요, 나를 위해서. 쉬지 않고 뭔가 조작을 해내는 겁니다. 그래서 꾸민 것이 아니라 할 때는 나는 가만히 있고 주님께서 다 주신다는 게 아니라 내가 나름대로 꾸미면서 나를 조작하면서 속이면서 내가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나간다’라는 이 원칙에 대해서 내가 스스로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나간다. 남이 만들어주는 게 아니고 내 인생은 내가 만드는 거야,라는 사실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16절에,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니요, 이 이야기를 베드로가 하는 거예요. 인간은 어떤 결과든지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면 내가 그 일에 어떤 영향력을 얼마나 줬는가를 먼저 따지기 마련입니다. 따지는 것은 평소에 내가 살아가는 것이 내가 예상하는 일에 대해서 꼭 내가 시발점이 되고 내가 거기에 대해 시도를 하게 되어있다는 그런 인간의 본성을 본인이 속일 수가 없어요. 내 일을 내가 벌여야지, 남이 벌여줍니까? 그게 아니라고 철석같이 믿습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1장 16절, 17절, 큰 영광 중에 우리가 변화산에서 하늘에서 오는 음성을 들었다 하는 이야기, 나중에 샛별이 떠오른다는 이 모든 이야기는 ‘베드로, 나 자신의 변화와 연계해서 주님을 증거한다’는 거예요. 나 자신의 변화와 연계해서, 연결 지어서 주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필연적 조건이 뭐냐. 나 자신의 변화가 필히 여기에 관여한다. 내 자신의 변화가 관여한다는 말은, 내 자신의 변화가 일어나지 아니하면 주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이 내용 속에 들어가 있어요. 그리고 이것은 또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인간은 한시도 쉬지 않고 내 자신의 변화를 내가 시도한다,를 전제로 하는 겁니다.
내 자신의 변화를 내가 시도하면서 교회에서 흔히 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믿어야 구원받습니까?” 이게 바로 시도하는 거예요. 내 자신을 위해 내 변화를 내가 시도하는 거예요. ‘내가 어떤 체험을 하면 구원받은 자의 체험일까?’ 이걸 시도하는 겁니다. 자신은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고 하지만 이게 기만이고 하나님 앞에 속인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한 거예요.
왜냐하면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가 꾸민 것이 아니어야 하는 원칙을 내 쪽에서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이 세상에서 내가 시도한 일은 하나도 없고 다 내 바깥에서 일어난 일과 결부되어서 나에게 이런 파도가 밀려오고 물결이 밀려온 거예요. 그 사실을 베드로 자신의 변화 속에서 베드로가 발견하고 체험하는 겁니다.
여기 19절에 보면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이렇게 되어 있죠. 샛별 이야기 언급하죠. 언급하는데 여기 18절에 보면,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무슨 소리가? 17절, 하늘에서 구름에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게 마태복음 17장이나 누가복음 9장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변화산 이야기잖아요.
이 변화산 이야기를 할 때에 그때는 샛별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말입니다. 그때는 샛별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그냥 봤죠. 그냥 본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이 자기 변화된 몸을 그들에게 보여줬잖아요. 몸을 보여줬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못 본 거예요. 보여줬는데 못 본 거예요.
주님 쪽에서 하자가 있는 게 아니고 자기 속에 샛별이 떠오르기 전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샛별이. 샛별은 우리가 가만히 있는데 우리에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게 아니고 내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아울러 포함한 변화가 일어나는 게 샛별이에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봤습니까? 예수님 십자가 지고 난 뒤에 베드로하고 일곱 제자가 고기 잡으러 갔잖아요. 그때 예수님 봤을 때 예수님을 처음 봤습니까? 아니죠. 3년 동안 같이 본 사람이잖아요. 왜 전에도 봤고 나중에 십자가 지고도 봤는데 그분이 그분인 걸 그들이 알면서도 왜 그들은 예수님을 배신합니까? 그것은 본인이 본인을 배신하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본인이. 신앙이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배신해줘야 돼요.
마태복음 17장, 누가복음 9장을 보게 되면 9장 28절에 여러분 다 아시는 말씀인데 한번 읽어볼게요.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이렇게 되어 있죠. 그때 왜 예수님을 안 믿었어요? 예수님이 변화된 걸 보고 좋다고 베드로가 함께 뭐라고 하냐 하면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초막 셋을 짓겠다는 얘기는 했지, 왜 그때 예수님은 안 믿었냐 이 말입니다. 예수님을 보기만 봤지, 왜 예수님을 안 믿었냐 이 말이죠.
그것은 베드로가 베드로 본인을 배신하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본인이 본인을 떠나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이 자기를 전혀 달라지게 하지 않았어요. 기존에 알던 나를 그대로 유지한 채 자기는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그냥 본 겁니다. 그래서 뭐? 그게 뭔데? 결국 그것이 예수님의 배신으로까지 이어졌잖아요. 변화산 봤는데 배신했잖아요.
예수님이 변화 됐다. 해같이 변했다. 아무리 예수님이 해같이 변해도 예수님이 해처럼 태양처럼 변한 것이 중요합니까, 베드로 본인이 중요해요? 어느 쪽이 중요합니까? 답변해보세요. 어느 쪽이 중요해요? 말하기 난처하십니까? 해같이 광채 난 예수님의 모습, 예수님의 몸 이것이 중요할까요, 베드로의 몸이 중요할까요? 어느 쪽이 중요합니까, 그 당시에? 누가복음 9장, 마태복음 17장에서 어느 쪽이 중요했습니까?
베드로의 몸이 중요하죠. 예수님은 버릴지라도 베드로 본인은 버릴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 본인이 상상 이상으로 악독하다는 사실을 베드로가 몰랐던 겁니다. 인간은 본인이 예수님을 밀칠 정도로, 예수님이 어떠한 호사스러운 모습과 유혹할 만한 것으로 온다 할지라도 인간은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멋진 광경을 보더라도 인간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부부가 크루즈 여행가서 지중해의 아름다운 광경 있잖아요, 지중해 연안에. 하얀 색깔로 칠한 동화마을처럼 생긴 거기서 빠라바라바라바라~ 포카리스웨트 음료수 들고 하잖아요. 그렇게 아름다운 걸 보면 뭐합니까? 그거 보고 여행 내내 부부싸움 하는데. 아무리 아름다운 걸 보고 캐나다의 화려한 단풍을 보고 멋진 설산을 봐도 호텔 들어가서 둘이 싸우는데. 그거 한다고 인간성이 달라져요? 인간성이 변합니까? 인간성이란 것이 그렇게 연약한 거예요? 쉽게 달라지는 거예요? 사랑은 그렇게 변하지 않아요! 사랑이라는 것은.
그래서 두 번째 찾아왔을 때, 주께서 부활하셔서 베드로에게 찾아왔을 때, 베드로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딱 이거 하나입니다. 모든 것은 너의 문제가 아니고 나의 문제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를 나무라지 않은 거예요. 너 이리 와. 너 오늘 좀 맞고 시작하자. 이러시지 않은 거예요. 내가 네 장모까지 고쳐줬잖아. 너 물 위도 걷게 했잖아. 이리 와. 귓불 잡아당기면서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이렇게 하지 않았어요.
이 모든 문제가 너의 개인에게 속한 문제는 일체 하나님께서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악마가 베드로에게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 내 문제는 내 문제라고 철석같이 우상처럼 종교처럼 그렇게 확고해지게 한 거예요. 딱딱해진 거예요, 인간에게는. 마귀가 그렇게 만든 거예요.
인간은 자기에게서 자기가 떠나갈 생각을 안 합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우예수가 와도 부처가 오더라도 인간은 절대 자기를 포기할 마음이 일체 없어요. 선악과 따먹은 그 약 효과가 대단합니다. 나 말고 더 중요한 존재는 더는 없는 식으로 모든 사고방식과 의식이 전부다 굳어져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설득하지 않아요, 우리를. 달래지도 않습니다. “그래, 너는 네 길로 가라. 나는 내 할 일 할 테니까.” 이래서 구원된 거예요. 그 딱딱한 벽돌을 부드러운 스티로폼으로 바꾸지를 않습니다. 우리 몸은 너무나 딱딱하고 짱돌 같아요. 주님의 방법은 뭐냐. “쳐라! 내가 네 짱돌에 얻어맞을게.” 이래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너의 그 딱딱함, 너의 완고함, 너의 마귀적인 것, 내가 그 모든 일을 구원하는 데에 천국 백성 만드는 데에 효과적으로 내가 써먹을 거야, 그거. 네 심성을 내가 써먹을 거야. 그렇게 해서 찾아온 거예요.
그럴 때 베드로는 유구무언,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아이고, 주님 잘못되었습니다. 인간인 이상 실수할 수도 있으니까 한번 봐주소.” 이런 게 성립이 안돼요. 베드로가 이야기할 것은 이거였습니다. “주님은 나를 알아도 나는 주님을 몰랐습니다.” 그 이야기죠.
주님을 보고 주님과 식사하고 주님과 온갖 말 주고받고 고난을 따르겠습니다, 백날 대화 대화, 요새 같으면 문자 보내고 이모티콘 좋아요, 사랑해요, 얼굴 벌겋게 해서 뭐 백날 해도 그것은 베드로가 내가 뭔가 되고자 하는, 꿍치고 싶은 자기 의도로 예수님을 이용한 것이지, 예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겁니다.
내가 어떤 노래가사를 쓸 테니 이게 어떤 노래인지 알아 맞춰보세요~ 제목 알아 맞춰보세요.
그 사람 나를 알아도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 합니다
이문세의 ‘사랑이 훅 지나가면’. ‘훅’ 빼고 <사랑이 지나가면>.
우리가 주님을 알아봐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알아본 거예요, 주님이. 쉬는 시간에 이 노래 재원씨가 한번 불러도 괜찮아요, 감미로운 발라드. 이 가사내용이 상당히 어려워요. ‘그 사람 나를 알아도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이 말은 내 안에 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내 안에. 한때 너를 알았고 한때 내가 너를 좋아했다는 건 다 아는데 지금은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은.
그런데 베드로는 이 이야기를 두 번째 주님이 찾아왔을 때, 부활하고 난 뒤에 찾아왔을 때 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주님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 본인이 본인 들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당신을 3년 동안 따라다녀도 몰랐더랬습니다.’ 라는 이야기.
이게 바로 구원받은 사람 아닙니까? 이게 구원이잖아요. ‘내게 일어난 모든 신앙, 내게 일어난 모든 천국, 이것은 내가 알아서 처신한 게 아니고 그냥 나는 주님을 버렸지만 주님이 나를 찾아와서 비로소 알게 된 것들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거예요.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것은 내 문제가 아니었었습니다. 내게 일어난 모든 일, 예수님을 배신한 그 일까지, 주님 자신의 문제인 것을 알았습니다. 대신 다 가져갔습니다. 이제 더 이상 내가 처리할 내 문제는 일체 없습니다.
주님은 말합니다, 베드로에게 요한복음 21장에서 “내가 너를 띠 띠고 네가 원치 않는 곳으로 갈 것이다.” 그전에 베드로가 이야기했죠. 주님 사랑하는지를 저한테 왜 묻습니까? 저는 주님의 질문에 답할 잽도 못되고 그럴 인간도 못됩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건 주님 쪽에서 알 문제이지,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지, 이제 저는 압니다, 이제는. 본인을 알게 된 거예요. 주님을 모르고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을, 주께서는 나는 나만 알고 주님은 몰랐다는 인간으로 변화시켜서 베드로를 구원하는 겁니다.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환경이, 모든 되어지는 일이 나로 인하여 만들어지는 게 아니죠. 그 사실을 우리가 나의 변화와 동반해서 알려면 부지런히 내 일은 내가 챙겨야 돼요. 부지런히 열심히. 이건 뭐 부탁할 사항이 아니고 지금 평소에 하시는 일이 그 일이니까. 내 인생 내가 알아서 내가 한다. 부지런히 하세요.
주님 찾아오게 되면 바로 그 이야기하세요. 나는 나밖에 몰랐습니다. 그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구원이에요. 그 이야기할 때 무슨 의미가 강하게 솟구쳐 올라오느냐 하면 샛별이 떠오른다는 말이 비로소 의미 있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샛별이 떠오르는 거예요.
이 샛별의 특징은 나의 어둠을 밝히 드러내기 위해서 외부적으로 다가오게 되어있어요. 베드로후서 1장 19절에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이” 오는 거예요, 어두운데 비취는. 어느 인간이 자기 어둡다고 자기가 만든 등불 가지고 자기를 비췹니까? 그럼 등불 자체가 어둡죠. 왜? 내가 제조했으니까. 내가 만들어냈으니까.
내가 만들어내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나의 어둠을 결코 밝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변명으로 일관되죠.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신앙생활 잘하려고 온갖 노력을 하고 있다고 변명을 늘어놓는 거예요. 베드로는 말합니다. 그런 변명 하지 말고 나는 나밖에 모른다고 이야기를 하라. 그게 합당한 구원의 신앙고백이에요.
다시 16절로 돌아와 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라고 되어있죠. 뭔가 뒤에 ‘아니요’라고 되어있죠. ~이 ‘아니요’입니다. 이 이야기를 베드로가 하죠. ~이 아니요,라고 하면서 앞에 ▭에 ‘공교히 만든 것,이 아니요’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주 예수님의 능력과 강림의 효과다 이 말이거든요. 예수님 오심으로.
아까 불쑥 어려운 이야기를 했는데, 봤기 때문에 보지 못한다 했죠. 예수님 몸의 영광된 광채를 봤잖아요. 아, 예수님에게는 이렇게 영광된 모습이 있구나. 그래서 뭐? 우리가 달라졌습니까? 그거 본다고 우리가 달라집니까? 내가 어둠인 것을 깨닫게 됩니까? 아니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보다 내가 더 중요하니까요.
그러면 이 말씀은 “예수님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 자체를 구원받은 사람은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요한복음 21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21장 12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어요. 주님이 누구냐고 묻지 않는다는 말은 이제는 본인에게서 내가 주님에게 묻는다는 그 자격이 박탈당하고 탈락되었음을 인정하는 거예요. 뭐든지 사람이 묻는다는 것은 자기 향상과 자기 발전을 도모하기 때문에 묻는 거예요.
“목사님, 이 성경본문이 무슨 뜻입니까?” 묻는다는 것은 그걸 알게 되었을 때 안만큼 내가 진보한다는 뜻이거든요. 더 나아졌다는 뜻이에요. 더 나아지게 되면 더 나아진 나를 버리기가 더 힘들어져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그림을 그리는데 국전에 입선했다. 한번 해봤는데 입선했다. 그 다음에 하니까 특선했다. 특선하고 난 뒤에 나 이제 화가 안할래, 이럽니까? 아니죠. 잘했으니까 더 발전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버리기가 포기하기가 힘든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베드로가 오늘 본문에 샛별이라 하는 거예요, 샛별. 샛별은 소유용이 아니고 저쪽에서 나를 비추는 용도에요. 샛별이 뭐로 구성되었나 보자, 이게 아니고 그냥 나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신경 쓰라고 비추는 게 샛별이에요.
요새는 그런 아버지 없지만 옛날엔 아버지가 애가 말 안 들으니까 “저기 회초리 가져와. 걷어. 종아리 걷어. 회초리 가져와.” 할 때 애가 하는 말이 “아버님 질문 있습니다.” “뭔데?” “그 회초리 재질이 어떻게 됐습니까?” 맞기만 하면 되지, 그걸 왜 묻냐 이 말이죠. Just moment. 아버지, 잠깐만 잠깐만. 우선 이 회초리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한번 휘어보겠습니다. 이걸 맞는 쪽에서 왜 검토해요, 맞는 쪽에서.
아니, 예수님이 누구신가 그걸 왜 공부를 합니까? 공부를 한다는 것은 뭔 뜻이에요? 내 마음에 들 때만 믿겠다는 뜻이잖아요. 그걸 누가 했습니까? 그걸 열두 제자가 한 거예요. 십자가 지기 전까지 그 짓 한 거예요. 그때 베드로도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샛별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어둠을 비취는 등불 기능으로 보지 않았어요.
그냥 예수님에 대해서 주고받는, 예수님에 대해서 모든 걸 알려주면 나는 그걸 받아가지고 예수님 가는 나라에 내가 합격해서 그냥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했지, 주님이 나를 비취고 새삼스럽게 나를 탐색하고 검토하고 조사대상으로 삼는다는 것, 이것은 열두 제자에게는 없었습니다. 아무리 예수지만 내 검토는 내 선에서 이미 끝냈다 하는 거예요, 내 선에서. 인간이 지금 보통 문제가 아니죠?
아까 요한복음 21장 12절 말씀처럼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다음에 감히 묻지 못하는 이러한 상황을 15절에 그냥 그대로 예수님이 밀어붙여버립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께서 “네가 보기에, 네가 생각하기에 나하고 여기 네 친구들하고 둘 중에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할 때 베드로의 답변은 “주님, 저는 저조차 사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답변이 이렇게 나온 거예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사랑하심을, 주님의 주님 되심을 저항하고 밀쳐내는 그런 속성인 것을 이제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라는 고백이에요. 나에게서 나오는 것은 주님을 밀어내는 그 힘밖에는 안 나옵니다. 주님의 그에 대한 답변은 이거에요.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네가 나를 밀어내는 그 힘이, 그 작용이 네 문제가 아니고 바로 예수 내 문제이다.”
이 문제를 점점 더 심도 있게 생각해봅시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심도 있다기보다 아주 알기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편지나 메시지가 왔는데 ‘나는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해놓고 보내는 사람이 ‘-송혜교-’ 이렇게 왔다고 칩시다. 받는 사람은 송혜교인 줄 알고 그 카페 현장에 나갔죠. 그러나 우리나라에 있는 수천 명 가운데 하나의 송혜교였어요, 그 유명한 송혜교가 아니고. 왜냐하면 송혜교란 이름은 혼자가 아니잖아요. 얼마나 많습니까, 송혜교가? 이순자씨가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 이순자는 우리 고모 이름이에요. 그런데 고모 이름이면서도 또 누구 이름이냐하면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 이름이 이순자 여사에요. 그쪽만 여사가 되고 우리 고모는 여사가 안돼요.
베드로와 열두 제자는 예수님의 몸을 봤어요, 십자가 지기 전에. 이 예수님의 몸을 보고 본인이 어둡지 않다고 오해를 했기 때문에 내가 아는 그 메시아 예수님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난 진짜 송혜교는 모르고 내가 생각하는 송혜교가 그 송혜교인 줄로 받아들이듯이, 여기 진짜 이순자는 모르고 내가 아는 이순자만 알듯이 예수님을 일방적으로 내가, 우리들이 해석을 해버린 거예요. 그리고 해석 당사자인 나는 하등 문제 없고 하자가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와 같은 일이 오늘날 교회에서 똑같이 반복해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입니다, 똑같이. 샛별이 떠오르지도 않으면서 계속 샛별 없이 예수 믿는 거예요, 샛별 없이. 샛별이 뭐야? 이러고. 새벽을 깨우는 샛별. 드디어 밤이 끝나고 아침이 되는 샛별. 금성.
베드로의 입장에서 이 샛별이라는 말은 자기 인생, 자기가 예수님을 배신했고 그때 고기 잡을 때 다시 찾아왔던 그 절차,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설정하신 그 절차를 딱 샛별로 해서 준 겁니다. 샛별로 줬을 때, 어둠을 밝히는 이 샛별이 지금 베드로에게는 아주 감동적이고 감격스러운 거예요.
예를 들면 어릴 때 가장 좋은 사과를 나 혼자 몰래 먹는 기분. 가장 좋은 사과를, 이건 먹지 말라고 어른들 손님 대접할 거니까 먹지 말라고 부모가 이야기했는데 어릴 때 몰래 사과 하나를 먹을 때의 기분. 그것도 자기가 찾아서 먹은 게 아니고 낮잠 자고 있는데 사과 쟁반이 기울어져서 지가 알아서 도르륵 사과가 굴러 와서 입가에 딱 들어올 때, 이건 먹으라는 하나님의 신의 계시다, 해가지고 아작아작 먹었을 때 그때 그 맛. 그걸 먹을 때 그 뒤에 일은 수습할 생각이 안 나죠.
내가 내 일, 인생에 대해서 정리하거나 수습할 생각을 완전히 가시게 만드는 그런 상태, 그것이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샛별입니다. 더 이상 인생의 고민이라든지 염려라든지 걱정, 이런 게 완전히 가시는 거예요. 걱정이 뭐에요? 공포가 뭐에요? 두렵다는 게 뭐에요? 불확실성이 뭐에요? 나는 다 잊어버렸어요. 뭐가 떠오르면? 샛별이 떠오르면.
그래서 이것은 결국 샛별로 재편성하는 겁니다. 나의 세계가 샛별로 재편성돼요. 샛별로 재편성되면 나는 지독한 어둠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지독한 어둠의 역할. 이게 난해합니까? 이게 난해한 거예요?
아침에 하는 막장 드라마에서 대본이 왔는데 그 대본에 5번째 장면에서 나의 어머니가 내 남편을 싫어한다. 내 어머니는 내 남편을 싫어한다. 따라서 내 남편이 왔을 때 어머니는 남편에게 김치 싸대기를 날린다. 이런 대목이 있다 칩시다. 그럼 연출자가 큐사인 하면 카메라가 돌아가잖아요. 막장이니까 막 가는 거죠. 그럼 시어머니 역할을 하는 그 연세 든 여자 연기자는 옆에 조연출이 준비한 소품 있잖아요, 김장김치 막 해놓은 거 있잖아요, 그걸 들고 처음에는 스윙 연습을 해보는 거예요. 연습을 해보다가 드디어 큐 들어가면 실감나게 김치를 가지고 “너는 사위도 아니야! 집에서 나가!” 하고 때릴 때 이걸 어설프게 때리면 또 맞아요. 그러니까 한 번에 잘 들어가야 돼요.
때릴 때 그 시어머니는 악한 역할을 하죠. 그렇죠? 그럼 악한 역할을 했다고 그 시어머니는 그 다음부터 출연료 안 줍니까? 그럼 연기적으로 뺨을 얻어맞은 남자 주인공의 가족들이 시어머니 역할을 한 선배를 찾아가서 죽인다고 문자 보내고 어디 하늘같은 내 아들을 때리냐고 달려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감독 입장에서는 “오케이~ 잘 때렸어.” 이렇게 되잖아요. 그 역할을 맡아야 생활비가 나오잖아요, 연기자들은.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그 역할을 우리에게 맡긴 거예요. 무슨 역할을 한다고요? 김치 싸대기까지 멀리 갔습니다만, 결국 우리가 무슨 역할을 한단 말입니까? 지독한 어둠의 역할을 해줘야 되는 거예요. 지독한 어둠의 역할. 내가 이정도로 악한 역할이었을까? 본인도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로. 놀라면서 한쪽에선 기분 좋은 거예요. 그 기분 알아요? 악한 역할은 누구보다 지지 않는 악한 역할을 하면서 속으로 ‘다행이다. 주여 이런 역할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역할도 없어서 지옥 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이런 악한 역할을 하면서 “주님, 악해도 이건 너무 심한 역할인데......” 하면 주님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모든 것은 네 문제가 아니고 내 문제다.” 나의 나됨을 위해서, 내가 너에게 찾아간 그 취지를 위해서 너는 그 역할을 감당해야 되고 담당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참 하기 싫은데 주님이 시키니까 주의 영광을 위해서 이 일을 해야지.’ 하면서 악한 일을 할까~요? 아닙니다. 아주 신났어. 신났어. 평소에 악하고 싶어서 환장했는데 좋은 구실 있잖아요. 잘됐다 싶어가지고 뭐 신나게 하죠, 신나게. 내가 너무 막 가는 게 아닌가. 역할인데 너무 신난다. 이거 너무 신나면 안 되는데...... 이런 생각이 또 들 겁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악한 역할 하지 않고 수제자로서 선한 역할로 주님 앞에 잘 보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했습니까? 그런데 잘 보이기 위한 그 노력으로 인하여 배신감이라 하는 것은 오히려 강도가 더 셌고 어둠은 더욱더 짙은 어둠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친구가 나를 배신한다는 시편에 그런 말씀 나와요 (시편 41편, 55편).
시편보다도 누가복음 9장 한번 봅시다. 아까 변화산 이야기에요. 9장 35절에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절에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이렇게 되어 있죠. 그다음에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왜 그들은 자기가 본 것을 동네방네 나발 불지 않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이것이 해석이 되질 않았던 거예요. 보기는 봤는데 뭔가 중간 과정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빠져버렸어요. 주님의 영광스러움이 다가 아니라 그전에 무슨 과정이 있는데 그 과정에 대해서 제자들이 납득이 안 되는 겁니다.
그 과정에 대해서 제가 설명 드리면, 누가복음 9장 31절, 이건 다른 분이 한번 읽어보세요.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자, 그때 같이 있었던 엘리야와 모세와 더불어서 별세하실 것을 이야기했죠. 그런데 별세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이 영광스러웠습니까, 초라했습니까? 영광스럽죠.
그러면 무엇과 무엇이 격이 안 맞는 거예요? 영광스러움과 졸지에 별세하는 것과. 죽음은 처참하게 망가진 거잖아요. 처참하게 망가진 것과 영광스러움과는 조화가 안 되잖아요, 이게.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연결이. 영광스럽다는 말은 어떤 힘도 물리칠 수 있는 강력한 방어력을 갖고 있거든요. 공격력도 갖고 있고. 죽으신다는 말은 허약성, 방어할 것이 전혀 없음이 돼요. 자기가 자기를 지킬 어떤 여력이 없다는 뜻이 되거든요, 죽었다는 말은.
예를 들면 배트맨이 고담시를 장악하고 있는 가장 악한 악당을 물리치고 어두운 밤하늘에 조명기를 비춰서 하늘에 박쥐 문양을 딱 만들 때 사람들이 얼마나 이걸 신화화, 영웅화시키겠습니까? 야, 역시 배트맨은 무소불능(無所不能)하게 못하는 일이 없고 모든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이 영화 볼 때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서 화장실 갔다 오니까 배트맨이 죽어있어요. 그럼 어떻게 된 거예요, 도대체? 잠시 5분 동안 갔다 오니까 배트맨이 죽어있어요. 도대체 논리의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조커를 박살내버렸는데 나중에 보니까 배트맨이 감옥에 갇혀 있고 배트맨이 초라하게 되어 있고 거의 반 죽게 되어있고 보니까 조커가 이겼어. 그럼 배트맨을 이긴 조커는 도대체 무슨 수를 썼기에 배트맨을 사로잡았느냐, 이런 논리가 되잖아요. 나중에 돌아서서 복수는 하겠지만. 화장실에 갔다 온 사이에 상당히 섭섭한 마음을 지울 길이 없는 거예요.
우리의 영웅, 우리 편, 든든한 분. 이게 열두 제자의 예수님에 대한 인상이었던 겁니다. 물 위를 걸었죠, 오병이어 했죠. 사람이 하지 못하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때 열두 제자는 얼마나 든든하게 주님을 믿었습니까? 그들은 그걸 믿음이라고 한 거예요. 자신에게 문제 있다는 건 생각 안하고 그냥 보호해주고 지켜주면 얼마든지 주님을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이러고 나온 거예요. 그게 구원입니까? 그게 구원받은 상태에요? 그게 복이에요?
열두 제자가 경험했던 것은 오늘날 모든 인간들이 예수님이라는 그분의 이미지를 대할 때 열두 제자가 오해한 그 오해를 모든 인간은 전부다 같이 다 체험하고 있다는 겁니다. 다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나한테 이익이 되고 유리할 것 같아서 예수를 믿는 겁니다.
내 힘으로 내 인생을 못 살아가니까 힘드니까 주님의 힘으로 도와주시면 주께 영광이 되는 인생 되겠다고 주님에게 접근한 거예요. 기술이나 하나 더 익히고 주님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재주라도 뭐 묘기라도 하나 더 얻어 챙길까 싶어가지고. 이렇게요? 저렇게요? 이렇게 새벽기도 할까요? 이렇게 헌금할까요? 이렇게 봉사할까요? 그러면 주님은 저를 안 버리겠죠.
이렇게 자기가 제시한 자기 조건을 냈을 때 그것은 샛별이 필요치 않은 상황이에요, 샛별이. 샛별 없어도 내가 요령껏 주님과 하나가 되겠다는 집념 같은 것. 자기 편익 중심으로 그러한 인식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 주님, 랍비여 랍비여, 하지만 그들이 만나는 것은 진짜 돈 많은 송혜교가 아니고 이제 연세 팔십이 다 된 어떤 송혜교. 요양병원에 가서 지금 치매 걸린 송혜교일 수도 있어요. 내가 그 사람 갑자기 욕한 게 되어가지고......
예수님의 변화됨과 엘리야와 모세, 세 분이 별세에 대해서 죽으심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열두 제자들은 감히 별세에 대해서 이야기에 끼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잘되는 쪽으로 생각해야지, 왜 망해서 죽어버리는 그런 부정적인 쪽으로 주님을 그렇게 생각할 이유에 대해서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 말도 못하는 거예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느냐?” “말 안 해.” 본인들이 그 논리에 대해서 끼어들 자리가 없었어요. 그렇게 좋은 자리에서 죽음 이야기를 왜 하느냐 이 말이죠. 우리는 희망이 있었는데, 주님은 영원히 하나님은 메시아이기 때문에 죽지 않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는데 죽는 이야기를 하니까 그들에게는 결정적인 걸림돌이 된 겁니다.
자기 자신을 몰랐기 때문에 생긴 걸림돌이 본인이 어둡다는 사실, 깜깜하다는 사실, 본인이 시작하고 시도하는 모든 것은 주께서 받지 않는 것들만 내놓는다는 사실이에요. 그걸로 인하여 예수님은 죽었고 그 죽음 자체를 예수님은 ‘제자야, 그건 네 문제가 아니고 이건 나의 문제다.’ 라고 간주하셔서 주께서는 외롭게 다 떨쳐버리고 누구의 후원도 없이 도움도 마다하시고 홀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게 바로 이 세상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는 이름이 없고 송혜교의 이름 외에는 다른 이름으로 구원 못 받는다는 이야기였어요. 하도 많은 예수, 하도 많은 삼위일체, 하도 하나님이 많아서 전부다 우상들이에요. 전부다 우상적인 예수에요.
진짜 예수님은, 진짜 송혜교는, 진짜 예수님은, 오늘 잘못하면 제목이 송혜교 되겠다, 내가 어둡다는 그런 역할을 제공하신 분이 진짜 주님이에요. 나를 죄인 되게 하신 주님. 나에게 죄인 역할을 제공하신 주님. 이 대목에서 여러분, 신나야 됩니다. 그 죄인 역할, 그건 안 배워도 잘 해요. 타고났으니까. 나는 내 것만 챙기는 그 속성을 누가 가르쳐준 적도 없어요.
남매 간에 보세요. 누가 가르쳐줬습니까? 누나가 먹는 것을 뺐고 안 주니까 때리는 것. 그거 누가 가르쳐줬어요? 마귀가 가르쳐줬지, 누가 가르쳐줬겠어요. 타고난 거예요, 이것은. 부모가 가르쳐준 게 아니에요. 네가 너 먹는 거 누나가 안 주거든 때려라, 뭐 이런 걸 엄마가 가르쳐줬어요? 아니죠. 상대방에 대한 폭력을 누가 가르쳐줬겠습니까? 이것은 네가 폭력해라. 폭력해라. 엄마가 아빠가 가르쳐준 게 아니에요.
사람이 달라고 울부짖는 것을 누가 가르쳐줬습니까? 그건 타고난 거예요. 젖 달라고 하는 것. 생물에서는 그것을 좋게 보지만 복음에서는 인간은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난 거예요. 나만 챙기는 그 죄, 그 죄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샛별이 떠오르면 이제는 샛별 중심으로 모든 것이 재편됩니다. 재편될 때 일어나는 변화는 어떤 변화냐. 그것은 10분 뒤에 합시다.
서울의존강의20211216b 베드로후서1장 19절(실패다)-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샛별이 떠오를 때에 그때 일어난 변화는 이 세상 전체가 한꺼번에 샛별과 더불어서 이 세상 주변의 어둡던 것이 한꺼번에 다 밝혀져요. 그러면 인간이 기존에 알던 대자연의 세계가 아니라 말씀의 세계에요, 말씀의 세계.
여러분들은 서울에 사십니까? 서울에 살아요? 나는 서울에 산다, 이거 아니거든요. 나는 말씀 세계에 살아요. 서울에 살게 되면 남의 눈치를 봐야 돼요. 그런데 말씀의 세계에서는 눈치보고 사는 입장이 아니라 이미 주께서 다 알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눈치 볼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말씀의 세계에 살아요.
서울에 살아버리면 여기에 선악체계가 작용해요. 윤리도덕이 여기에 작용합니다. 흔히 이걸 가지고 우리는 더불어 살아야지, 나 혼자 살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럼 더불어 살면 죄 안 짓습니까? 뭐 열두 제자가 혼자였습니까? 더불어 살았죠. 아니 더불어 산다고 해서 죄가 분배됩니까? 작은 몫의 할당으로 분배돼요?
더불어 사는 이유는 자기 죄를 묻히게 하기 위해서 더불어 산다고 이렇게 핑계를 대는데 말씀 세계는 선악체계를 뛰어넘은 세계에요. 윤리도덕을 뛰어넘은 세계라고요. 더 이상 우리를 닦달 내는 세계가 아니에요, 이 말씀 세계가. 어떤 세계냐 하면 로마서 4장에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의롭게 만드는 세계가 이 말씀의 세계입니다. 언약의 세계이고. 아무 한 것도 없는데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거예요.
그 세계가 말씀의 세계. 그 세계 안에 누가 놓여있는가. 우리가 놓여있었다는 겁니다. 샛별이 떠오르니까, 아침 햇살이 떠오르는 것처럼 점점 더 사방이 밝아오기 시작하니까 모든 것이 말씀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음이 드러나는 거예요, 모든 것이.
그 말씀의 세계의 핵심은 예수님 살해사건이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살인당하는 사건.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서 아까 했죠? 누가복음 9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서 누가 언급했습니까? 제자들이 언급했습니까? 아니죠.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에 대해서 언급한 거예요.
예수님이 이루고자 하는,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해같이 빛나는 그 세계를 위해서 예수님이 미리 엘리야와 모세,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살해사건에 대해서 미리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이야기를 그 세 분이 하신 거예요,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
그러면 지금 우리는 무슨 이야기하고 있어요? 백신 맞았어요, 세 번째? 뭐 이런 얘기. 예수님 이야기 안하고 자기 살 궁리 챙기고 있는 거예요, 살 궁리를. 그러니까 이 말은 관심사가 말씀의 세계에 있지 않고 서울에 살고 있다, 왜 자꾸 여기에 관심을 두느냐 하면 서울에 산다는 이 말은 시간과 공간을 우리가 못 벗어나서 그래요. 서울이라는 공간, 지금 나라는 현재, 이것을 벗어나지 못해서 그래요.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시간과 공간이란 이미 죽은 나를 둘러싸는 삼베옷이다. 시체를 둘둘 싸는 삼베옷이 시간과 공간이에요. 시간과 공간은 이미 우리를 죽은 자로 보는 거예요.
죽은 자로 본다할 때 이걸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 죽은 자야! 하면 기분 나쁘지만, 이 죽은 엘리야야! 안경 쓴 엘리야야! 하면 기분 나빠요? 마스크 쓴 모세야! 하면 소리는 약간 좀 세다 싶지만 가만 들어보니... 어디서 아브라함이 웃고 있어? 하면 이게 지금 기분 좋아야 될 타이밍인지......
아브라함이 예수님 오시기를 기다렸다가 보고 기뻐했다 했죠. 그때 아브라함은 이미 죽은 아브라함이에요. 세상에서는 아브라함이 죽었다 하잖아요. 세상의 시간과 공간에서는 아브라함이 이 공간에는 없고 아브라함은 옛날 과거 인물이라고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아브라함에게 적용시키잖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말하기를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했어요. 그럼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은 곧 무엇을 의미합니까? 살아있는 아브라함의 살아있는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둘 다 살아있는 거예요, 천사와 같이.
그리고 아브라함의 하나님도 되지만 그다음에 이삭의 하나님도 되죠? 이삭이 죽었단 말입니까, 살았단 말입니까? 하나님에게 있어서. 멀쩡하게 살아있는 거예요. 어디에? 말씀의 세계에. 그다음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다음에 뭡니까? 야곱의 하나님. 야곱도 말씀의 세계에서 살아있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엘리야의 하나님,... 그 뒤에 누가 나옵니까? 열두 제자 나오죠, 가룟 유다는 빠지지만. 열두 제자의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려면 시간과 공간이 완전히 바뀌어져야 되겠죠. 시간과 공간을 바꾼다는 말은 무엇을 바꾼다고 했던가요? 시간과 공간에 얽매인다는 것은 선악체제에 얽매인다. 선과 악, 내가 선할까, 악할까 맨날 점검하는 그 환경에 빠져버린 겁니다. 자, 선과 악의 환경에 빠져있는 데에서 그걸 하나님께서 빼내는 방법은 주님께서 죽여 버리는 거예요, 우리를.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해서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우리를 아예 시체로 간주해버리는 겁니다.
오늘 강의 진도를 나가기 위해서 제가 중요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다음 중 어느 것이 여러분들을 기분 좋게 합니까? 첫째, 나는 용서받았다. 두 번째, 나는 죽었다. 어느 쪽이 기분 좋습니까? 이거 뭐 항이 세 개, 네 개도 아니고 수능 다섯 개도 아닌데. 달랑 두 개밖에 없어요. 나는 용서 받아서 기분 좋다. 나는 죽어서 기분 좋다. 어느 쪽입니까?
내가 용서받아버리면 용서받은 내가 멀쩡하게 살아있어요. 그다음에 또 죄 짓게 되면 이 죄도 용서할까, 고민에 빠지게 돼요. 용서라 하는 것은 내가 죽었을 때 나오는 효과가 용서에요. 용서한다는 것은 주님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서 주님 자신이 해석한 것이 용서에요.
주님이 죽었을 때 우리도 함께 죽게 하거든요.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할 때 우리도 같이 죽게 해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나니. 죽었을 때에 그 죽은 자를 죽었다고 이야기해도 되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같이 죽는 나의 효과로 인하여 너의 죄는 용서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용서받은 인간은 기존의 내가 아니고 내가 생각지도 못한, 주님의 죽으심에서 그것도 새로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에 대해서 주님의 용서하심의 내용이 거기에 같이 결합되어있는 상태. 그게 용서에요.
그러니까 주님은 자기 용서를 사랑해요. 자기가 벌였던 용서하심을 사랑한다 이 말입니다. 거기에 말려든 것이 성도이기 때문에 성도를 사랑하죠. 베드로는 그것도 모르고 자기 쪽에서 남을 용서한다고 내가 일곱 번 용서하면 어지간히도 참 지독하게 용서한 건 맞는데 이 정도하면 용서의 값에, 극한치에 도달 되겠습니까? 물었거든요. 주님께서는 그 숫자를 늘여버렸어요. 일곱 번이 아니고 일흔 번에 일곱 번. 산술에 밝은 사람은 그게 490번이라는 것을 알잖아요, 490번. 그러나 동시에 그게 소용없다는 것도 알아요. 490번 해봐가지고 다 하고 난 뒤에 헥헥거리면서 일흔 번에 일곱 번 숙제 다 했습니다, 하면 또 숙제 줘버려요.
왜 그러느냐 하면 베드로가 죽어야 될 이유가 뭐냐. 베드로가 나쁜 짓, 악한 짓을 해서가 아니라 단지 선악과 따먹은 그것이 작동하기 때문에 베드로는 어떤 일을 해도 죽어야 되는 거예요.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으니까. 주님께서는 자기의 취지를 취소시킨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기의 원칙인 우리를 죽이는 원칙을 빼낸 적이 없어요. 사랑하기 때문에 죽여버리는 겁니다. 그래야 새로운 피조물이 나올 게 아니겠습니까? 아담으로 죽고, 언약으로 새로 살고. 그러잖아요.
만약에 아빠가 치과의사이고 아들이 이빨이 아플 때 아들이 아빠한테 “아빠, 나 이 아파. 아빠, 나 사랑하지? 사랑하지?” “그래, 사랑해.” “그럼 아빠한테 치료 받을게.” “알았어. 뺀찌 가져오세요.” 사랑하기 때문에 빼는 거예요, 그걸.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를 죽여버리는 겁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기대하는 그것이 가짜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이 원치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죽여버리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고자 노력하는 그것은 가짜이기 때문에 죽여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보니까 신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적대적인지 아시겠죠? 복음에 반대적인지 아시겠죠, 신학이라는 게. 신학을 왜 그렇게 구차하게 많이들 알려주려고 애씁니까? 주께서 지옥 보내려고 하는 거죠, 뭐. 지옥 갈 사람 지옥 보내려고 신학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빨 뽑는 대신 그 아픈 이빨에다가 삼위일체 가르치고 십자가가 뭔지 가르쳐주는 거예요. 이게 안 뽑히려고. 이거 알면 뽑는 거 대신 될까 싶어가지고. 꼼수를 부리는 거예요. ‘주님, 복음 알면 인생 안 망하겠죠?’ 이러한 의도가 뭔 뜻이에요? 주님이 좋다는 게 아니고 바로 베드로 내가 좋다는 거예요, 주님보다. 베드로가 겪었던 그 일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덮쳐야 됩니다. 샛별이라는, 몰고 온 새로운 환경, 시간과 공간 자체가 없이 그게 말씀으로써 덮쳐야 돼요. 비가 어느 때 오느냐 하면 따뜻한 공기가 차가운 공기 위에 덮칠 때 비가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한랭전선 있잖아요, 전선. 우리나라는 북반구이기 때문에 바람 불어오는 쪽으로 이름을 붙여서 남동풍이라 해요. 보통 기상도 볼 때 그렇게 하거든요. 반드시 따뜻한 공기는 위로 올라가니까 차가운 공기는 내려오면서 이게 비가 돼서 내립니다.
비가 내리니까 결국 사람들이 맞는 것은 비만 온 몸에 맞죠. 그래서 ‘비가 오도다’ 이러고 있다고요. 비가 오는구나. 그러나 사실은 비라 하는 것은 하나의 효과이고 원인은 따뜻한 공기가 차가운 공기 위에 올라탄 거예요. 비는 나중 문제라니까요. 우리가 구원의 비를 맞는 것은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주님 자신의 일에 그것을 펼치기 때문이에요.
주님 자신의 일이거든요. 서로 대비가 되는 자신의 일. 위에서 내려올 때는 죄인으로 오셨다가 올라갈 때는 의인으로 올라가시는, 본인 안에서 내부적으로 상반된 그 일의 효과가 우리에게 용서와 구원과 천국 백성 되게 하는 모든 사랑이 여기서 다 나오는 겁니다. 주로부터 시작하여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가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을 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 선과 악을 아는 것 자체를 자기는 이미 선으로 규정해놓았어요. 그러니 자기에게는 하자가 없는 거예요. 선도 알고 악도 알았으니까. 이건 하나님만 아는 것을 우리도 같이 알아버렸으니까 더 이상 하나님이 나한테 지적할 건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내가 알아서 내가 나쁜 사람 안 되기 위해서 내가 지적하면 끝날 문제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유대나라에 외부 헬라의 문화가 들어왔을 때 그들은 목숨 바쳐가면서 싸웠던 사람들이에요. 마카비 전쟁부터 해가지고 수천 명이 희생당해가면서 유대나라의 율법을 지키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도 아끼지 않고 내놓았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민중들이 굉장히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 바리새인보고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요한복음 8장에서? 독사의 자식들아 (요한복음 8장 44절, 마태복음 12장 34절, 마태복음 23장 33절). 이 말은 바리새인에 대해서 좋게 우호적으로 생각했던 사람들도 독사의 자식들에게 동조한 공범자가 돼버려요. 그리고 마태복음 5장에도 그런 말씀 나오죠.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 못 간다 (마태복음 5장 20절). 그런데 그 최전선에 있다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 최전선에 있는 그 바리새인들이 악마의 자식, 독사의 자식, 뱀의 자식이라면 나머지야 뭐 말할 것도 없죠. 그걸 선망의 대상으로 보고 아, 나도 하나님께만 충성하면 좋겠다, 다 그걸 하나의 모델로 삼았는데 모델 자체가 악마의 마스크, 졸개로 전락해버리면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죠.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은 본인이 노력한다고 해서 말씀을 배운다고 해서 자기가 죄에서 선악체제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선악체제에서 못 빠져나가면 주님께서 하시는 방법은 뭐냐?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철저하게 선악체제를 답습하게 만드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주님께서. 그래서 이 성경 전체가 율법적으로 기록된 거예요, 사도 바울의 명령이나 지시가.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했죠? 그럼 제가 문제를 하나 낼게요.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할 때 정말 아무것도 없어가지고 끼니도 겨우 때우는, 정부 보조금 40만원 가지고 그냥 여름에 선풍기도 없이 살아가는 그 사람은 저절로 구원받습니까, 어떻습니까? 선풍기 없다는 이유 때문에 구원받는 그런 현상이 생깁니까, 안 생깁니까? 안 생기죠.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아는데 왜 구원 못 받아요? 누가 답변해보세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는 것이 디모데전서 6장에 나오는 말씀이잖아요 (디모데전서 6장 8절). 그 사람은 말씀대로 사네요, 본인의 의사든 아니든 간에. 매일같이 하루 한 끼 겨우 입에 풀칠하고 사는데 그 사람은 그 말씀을 그대로 성취한 것으로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은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구원받는 것, 그걸 아니라 할 수 있겠어요? 무슨 근거에 의해서 그 사람은 구원 못 받는다 할 수 있습니까? 말씀대로 사는데요.
할 말이 없으면 제가 이야기하겠습니다. 갑자기 이렇게 하니까 성경에 나오는 대목 같다. 모든 말씀, 모든 성경 구절 내부에 십자가 살인사건이 들어있어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성경 구절 밑에는 말씀의 세계가 담겨 있습니다. 말씀의 세계가 담겨 있기 때문에 말씀의 세계가 드러날 때는 필히 예수님이 피해자의 모습으로 드러나요. 이것이 십자가 살인사건이에요.
바리새인이 죽인 것 맞아요. 사두개인이 합세해서 죽인 것 맞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합세해서 죽인 것 맞습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안 됩니다, 하고 나선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없었죠. 목자를 치니 양들은 어떻게 해야 돼요? 목자를 치니 양들도 같이 순교했더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 것은 바리새인이나 하라 하세요. 바리새인의 대장이 죽으니까 우리도 같이 죽겠습니다, 결사항전 하겠습니다, 이건 바리새인들이나 하라 하세요. 예수님 방식은 아니에요. 너 죽으면 우리도 같이 죽겠습니다, 이것은 선악체계에요. 일종의 오기이고 객기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명체계에서는 한 분이 값을 치름으로서 모든 사람은 값없이 의롭게 되는 법칙만 통하게 되어있어요. 우리로서는 의외의 횡재처럼 느껴지지만 뭐 횡재처럼 느껴진다고 이게 진리가 아닌 게 아니거든요. 일단 기분 좋은 것은 접수하고요. 왜 너무 기분 좋아서 접수 못 하겠습니까? 그건 아직도 선악체계에 있는 거죠. 그건 아직까지 한랭전선이 연결이 안 돼서 비가 안 와서 그런 거예요.
비가 올 때 우리가 비를 뿌리는 게 아니잖아요. 비가 올 때는 어떻게 옵니까? 비가 오는 의태어, ‘주룩주룩’ 비가 오죠. 주룩주룩 오죠, 주룩주룩. 끊어짐이 없이 주룩주룩 오잖아요. 성령의 비가 주룩주룩 오잖아요. 우리는 주룩주룩 오는 비에 파묻히죠. 선악체제에 주님의 생명의 은혜가 완전히 비 오듯이 쏟아지는 겁니다. 덮치는 거예요, 이게. 샛별이 떠오르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베드로가.
베드로후서 1장 5절을 한번 봅시다. 1장 4절부터 지난 시간에 했는데 또 이쯤 되면 다 잊어버리니까 다시 하겠습니다. 1장 4절-5절,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되어 있잖아요.
이걸 보면서 인간은 이미 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선악체제가 있죠. 선악체제를 따먹은 당사자가 있잖아요. 선악체제를 따먹은 자가 아담이죠. 그럼 아담의 후손은 선악체제를 인수인계 받습니다. 인수인계 받으면 선악체제를 행하는 당사자가 누구에요? 본인이죠, 본인. 이 본인이 선악체제의 주인공이잖아요, 주인공. 그러니까 이 주인공 앞에 말씀이 등장하게 되면 어떤 지시와 명령이 떨어지게 되면 누가 마중 나와서 누가 그걸 지키려고 하겠어요? 본인이 나서죠. 본인이 나서는 거예요. 이 짓을 누가 했느냐? 이 짓을 바로 베드로가 한 거예요.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이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1장 2절에,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 했죠. 분명히 이거 할 때 했는데 다시 해봅시다.
여기 1장 2절에 ‘성령’ 나오죠. 성령은 우리 아니죠. 선악과 따먹은 나, 아니죠? 성령은 선악과 따먹은 내가 아니잖아요. 외부인이잖아요. 나 아닌 외부인이죠. 그럼 외부인이 내 운명에 관여해요, 관여 안 해요? 이 말씀에 의하면. 관여하잖아요. 성령이 나한테 관여한 결과와 내가 나를 손질한 결과를 한번 비교해보시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이라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그다음에 뭡니까? ‘피 뿌림’ 나오죠. 우리가 피 뿌렸습니까? 흔히 말하는 경상도 사투리로 정지칼, 부엌칼이죠, 부엌칼 가지고 내 가슴 찔러서 내 피 내가지고 막 뿌렸습니까? 바리새인처럼 뭐 순교한다고 피 뿌렸습니까? 안 그러면 안중근처럼 손가락 잘라가지고 대한국인 도장 팍 찍어가지고 벌건 도장 찍어가지고 자동차 뒤에 붙이고 다니고 그랬습니까? 피 뿌린 자가 누구에요? 예수님 빼놓고 다른 사람 있습니까? 없죠. 또 외부인이죠. 나, 우리들 아니잖아요. 우리 인간들 아니죠.
그다음 보세요. ‘택했다’ 누가 누구를 택했습니까? 우리가 우리를 택했습니까? 아니죠. 택한 분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성령, 예수님의 피 뿌림, 택함 이 모든 외부인의 활동에 대해서 우리 쪽에서 손 댈 수 있어요, 없어요, 이 외부적인 활동을? 그냥 받기만 하지, 못하잖아요. 그러면 외부적인 활동을 외부적인 활동으로 계속 누락이 없이 그걸 드러내야 될 필요가 있죠. 그걸 끊임없이.
주께서 피 흘려주셨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주께서 피 흘리심을 ‘날 위해 피 흘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감사합니다. 끝.’ 그러면 나는, 여기서 나는 내가 선악과 따먹었다는 티가 나요, 안 나요? 안 나잖아요. 그냥 주시는 것 받았습니다. 왜 주시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고맙습니다. 받겠습니다. 그러면 뭐가 여전히 남아있어요? 선악체제의 그 문제점이 여전히 남아있죠.
말씀세계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낚시놀이하시는 게 아니잖아요. 야, 올라와. 이러지 않았잖아요. 누가 왔잖아요. 하늘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왔죠. 내려오셨죠. 내려오셔서 선악체제의 피해를 직접 체험하셨잖아요.
바리새인들이 그거 잘 하잖아요. 안식일 안 지켰다고 해서 예수님 욕하고 제자들이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으니까 너는 왜 안식일을 왜 어기느냐 했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돌 던지려고 했고 그런 것을 몸소 체험했고 예수님이 죽었던 이유가 율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죽은 거예요. 성전을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돌아가신 거예요. 자신이 구름 타고 온다고 했기 때문에 돌아가신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 내부에 인간들의 선악체제에서 나온 이 화근, 문제점이 예수님 몸에 그대로 담겨있죠. 담겨있는 그것을 그대로 우리에게 말씀으로, 말씀세계이니까 쏟아내어 버리는 겁니다. 너희들 이거 지킨다고 그렇게 내 복음을 안 믿었잖아, 하고 쏟아내는 거예요. 그게 모든 말씀 안에 다 들어 있는 겁니다.
주님이 용서한다고 하니까 용서받고 싶어요. 죽인다 하니까 아니, 그건 하지 말고. 다시 할게요. 선악체제의 주인공인 따먹은 내가 영원한 주인공 행세를 하게 만드는 게 선악체제입니다. 남 좋으라고 착한 일 하는 게 아니고 착한 일한 당사자, 나 좋으라고 착한 일 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구제에 대해서, 금식에 대해서, 기도에 대해서 언급했잖아요. 왜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구제하고 금식하고 기도했습니까? 누구 좋으라고 한 거예요? 그 구제하고 금식하고 기도하는 본인 유리하라고 본인 구원에 도움 되라고 본인이 한 거예요. 이게 문제 있다는 것이 주님의 뜻이고, 그게 뭐가 문제냐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뜻이고. 이제 그 차이점을 아시겠죠?
헌금할 때 내가 헌금했고 기도할 때 내가 기도했다. 이게 뭐가 문제입니까? 주님께서는 그게 문제라는 거예요. 여기 베드로후서 1장 5절에,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거 누구 좋으라고 이거 합니까, 누구 좋으라고? 이렇게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보태고자 노력하는 그 사람이 누구 좋으라고 그 짓을 하느냔 말이죠. 죽 쒀서 개 주려고 합니까? 당사자 본인 좋으라고 이 짓 할 거 아니냔 말이죠.
그게 바로 모든 덕이나 지식, 절제 밑에 깔려있는 십자가 살인사건을 고려치 않고 그 짓 하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인간을 말씀을 보게 되면 주님께서 이 말씀을 가져가서 다 이룬다는 생각을 못하고 구원 받았으니까 바르게 살아야 된다고 이거 하는 거예요.
갑자기 사라졌다고 여겼던 선악체계가 갑자기 나를 주인공 만들어가지고 내가 지금보다 더 멋있는, 지금보다 더 나은 나의 자아상을 내가 보고 싶은 거예요. 개망나니처럼 살다가 예수 믿고 성화된 그 모습을 누가 그리워하냐? 내가 그리운 거예요. 그걸 왜 그리워합니까? 지금 자기의 모습이 마땅치 않아서 그렇죠, 뭐. 눈에 보이는 것이 자기 모습밖에 안 보이니까 그런 겁니다.
이제부터는 진짜 어려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기초는 되었어요. 말씀의 세계이지, 결코 시간과 공간의 세계가 아니라는 거예요. 20절 봅시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이 대목이에요. 자, 이 대목, “사사로이 풀 것이” 그다음에 뭡니까? 뭐라고 되어있죠? “아니니”라고 되어있죠. 그럼 이 뜻을 알려면 사사로이 풀었던 경험이 인간세계에 있단 말입니까, 없단 말입니까?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신학입니다. 이게 바로 철학이고 이게 성경해석이에요. 사사로이 풀 수밖에 없어요, 인간은. 사사로이 사적인 어떤 이익을 고려해서, 내 구원에 도움 되라고 전부다 성경해석을 이런 식으로 푸는 거예요. 히브리어, 헬라어 원어 따져가면서. 무슨 원어가 있어요?
원어 이야기 다시 할게요. 인간의 언어는 어떤 사물에 대해서 동일한 표시를 해요, 글자로. 이게 매직이죠. 매직 맞죠? 이게 뭘까요? 하면 이름을 붙입니다, 매직으로. 그럼 매직은 이렇게 생긴 거, 이게 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안 맞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제가 부산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다시 해야겠어요. 사과를 놓고 여기 10명이 있다면 사과에 대해서 이게 뭐냐고 할 때 ‘사과’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사과에 담긴 의미가 다 달라요. 과학자 같으면 뉴턴의 법칙을 생각하면서 사과를 이야기하고 어떤 시집 간 여인은 상견례 할 때 사과한테 얻어맞은 거 생각하고. 니가 우리 집에 오다니. 근본도 없는 것들이 어디서 이 재벌 집을 넘봐? 하면서 던진 사과에 얻어맞은 그 사과. 잊을 수 없는 사과. 그리고 어떤 사람은 개한테 사과 던져주면서 사과한다고 했던 그 사과. 윤석열 계통은 전부다 이거 생각해요. 사과라 하면 그 악몽 사과.
말은 ㅅ,ㅏ,ㄱ,ㅗ,ㅏ인데... 이걸 기표라 해요, 어려운 말 안하려고 했는데 할 수 없어요, 이걸 표현하는 ㅅ,ㅏ, 이것을 아무리 인간끼리 주고받아도 받는 쪽에서 사과에 대한 이미지와 선입감은 자기가 살아온 인생을 통해서 재해석하게 되어 있어요. 동일한 의미가 없습니다.
부부 간에도 마찬가지에요. “당신 나 사랑해?” “사랑해.” 이 사랑이 같은 말이 아닙니다. 같은 말이 아니에요. 오늘 낮에 안양강의에서도 했지만 부부가 살면서 서로 외롭지 않은 것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외롭지 않은 거예요.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면 외롭게 되어있어요. 더욱 보고 싶어서 결핍을 느끼면서 외롭게 되어있는데 부부는 보고 싶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사는 겁니다. 이게 의미가 달라서 그래요, 각자의 의미가.
‘우리 1년만 사귀다가 헤어지자.’라고 이야기했는데 여자가 1년 사귀는 날 헤어지면 되는데 아니, 약을 먹네? 약을 먹어가지고 회사 전무라는 인간이 쪼르르 따라와가지고 다시 살려내니까 그 본처가 되는 송윤아가 나중에 알아버렸잖아요. 그러니까 이 말은 당신이 말하는 의미를 내 쪽에서 받아들이면 내가 재해석하는데, 재해석이 사사로이 푸는 건데요, 사적으로 푸는데 여기에 선악체계가 작용한다니까요, 선악체계.
나는 내가 주인공이에요. 누가 뭐래도 내가 주인공이에요. 죽어도 내가 알아서 자살할 거야. 남은 간섭할 게 없다 이 말이죠. 그 유명한 말 있잖아요. 어떤 여자가 바람 피운다고 경찰이 잡아가니까 그 여자가 하는 말이 언제부터 국가가 내 몸 관리했냐고. 언제부터 국가가 내 몸 관리했냐?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하는데 국가가 뭔데 내 몸 관리하냐 이 말이죠.
아까 덮친다는 이야기했죠. 동물원에 보면 원숭이 무리가 있어요, 동물원에. 원숭이는 저희들끼리 서열이 생겨요, 권력 서열이 있다고요. 어떤 원숭이가 왕이라 칩시다. 그 동물원에 있는 원숭이가 왕인데 그 동물원 직원들이 그 원숭이를 왕으로 모시겠습니까? 원숭이들이 어떤 주제에요? 갇힌 주제 아닙니까? 갇힌 동네에서 지들끼리 왕이라 해서 동물원 원장부터 해서 전부다 “아이고, 대왕님 납셨습니까?” 이렇게 대우할까요? 짐승 주제에. 지들끼리 왕이죠. 갇혀있는데.
선악체계에 갇힌 인간들은 자기들끼리 아무리 대통령이고 왕이라 해도 하늘나라에서는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내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않으면 죽여버리라 해요. 인간들은 자기들이 갇혀있다는 생각을 못 하고 선악체계에서 못 빠져나와요. 내가 주인공인데 내가 주인공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본 적도 없어요.
그러면 방법은 뭐냐? 주님께서 그냥 오셔가지고 그 동물원에 갇힌, 자기가 스스로 왕이라고 생각하는 것한테 그냥 그저 스쳐지나면 되죠. 그걸 패스라 합니다, 패스. 그냥 도외시하고 스쳐지나가는 거예요. 예수님 홀로 지나가면 돼요, 제자들 놔둬버리고. 목자를 치니 양이 흩어진다. 그냥 주님 혼자 가버려요. 자기들끼리 예수 잘 믿었다, 뭐 나는 베드로다, 백날 해도 주님이, 주인공 된 주님이 빠져버렸잖아요. 백신 패스인가? 그냥 스쳐지나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님 십자가 지기 전까지 베드로와 제자들의 입장이었고 주님의 입장이었어요. 스쳐지나가고 그다음에 다시 찾아오는 거예요. 그때 베드로는 샛별이 떠올랐다. 내가 나를 해석해왔었다, 그동안. 마치 나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착각했다. 그래서 나는 헌신을 다하여 노력했다.
성경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죠. ‘예수님이여,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재산과 처자식을 다 버렸나이다.’ 이런 이야기해요. 우리는 바칠 것 바쳤으니까 이제 주님 차례입니다, 그런 뜻인 거예요.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읍시다, 그런 뜻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이게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하나님하고 우리하고 거래하려고 했던 거예요. 선악체계에 갇혀있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용서를 구하지 말고 죽여달라고 하셔야 돼요. 용서는 용서받은 걸 유지한다고 또 힘들어져요. 아휴, 나 20년 전에 용서받았는데 죄 지으면 안 되는데. 이게 악마의 참소에 걸려들 수가 있어요, 악마의 고자질에. 꼬라지 좋다. 성령 받아놓고 하는 꼬라지 보니 너 지옥가겠다. 얼마나 악마가 우리를 놀리고 갖고 놀겠습니까? 용서받을 생각하지 말고 죽여달라고 해야 되죠. 뭐 죽여달라고 죽이는 건 아닙니다만.
그래서 사사로이 한다는 것은 나의 모든 해석과 내가 구원받기 위한 어떤 목적과 의도를 갖고 있는, 내가 바라보는 모든 나의 시선은 파묻히는 그러한 해석이 되어야 돼요. 그럼 그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인간들로 하여금 일단 인간들이 자기가 구원받을 수 있는 방안을 인간 쪽에서 하도록 주께서 허락하죠.
그게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통해 내려오는 전통적인 성경해석이에요. 놀라운 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만큼 더 정확한 성경해석이 없다는 사실이에요. 왜냐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성경해석 안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했다,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했다, 그것도 은혜로.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선택했다. 따라서 우리는 찬송과 바른 생활로 거룩한 생활로 보답해야 된다. 이게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몇백 년 동안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다지고 또 다져가지고 하자나 오류 없이 그런 것들을 다 제하고 엑기스만 남아있는, 정말 이것은 천사나 하나님 누가 와도 그것은 정답이라 할 만한 신학을 이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체계 속에, 사두개인은 좀 나가고요, 바리새인의 체계 속에 이미 확립되어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직접 독대해서 주신 거예요. 이 말씀을 우리가 만든 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부정할 수 없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하나님이 지키라고 줬기 때문에 그 말씀을 지키기만 하면 된다. 어떻게 지키는가. 바른 해석을 통해서 실천에 옮기면 된다. 이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의 주장입니다. 그중에 가장 기본된 것이 하나님은 이 많은 민족 가운데 우리를 선택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우리가 부정할 수 없잖아요, 출애굽기 19장. 좀 귀찮지만 19장을 한번 봅시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같이 보고 있고 지금 우리가, 소위 교인들이 보고 있는 것도 그 당시의 예수님 죽였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도 같이 보고 있었던 거예요. 그들이 예수님을 그냥 막 죽인 게 아닙니다.
출애굽기 19장 5절에 보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이걸 믿는다니까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유대인들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우리가 믿는 여호와께 속했다 이 말이죠.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악마의 자식이라고 하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요. 뱀의 자식이라 하는 것은 세례 요한도 이야기한 거예요. 도저히 납득이 안 돼요. 그럴 수가 없는 거예요.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이것은 인간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이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냥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여기에 우리 인간들의 해석을 가미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바로 그 해석이 네 해석이라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이고 우리는 어떠한 것도 가미하지 않았다는 그 해석이 바로 너의 해석이 되는 거예요. 왜? 너희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했다 할 때에 그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놓치고 있는 겁니다. 그들은 왜 자기를 죄인으로 생각 못 했을까요? 왜냐하면 거룩한 하나님이 죄인을 선택할 리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깨끗한 사람만 뽑아 올라가지, 더러운 세리와 창기를 구원할 그럴 이유가 없고 그럴 리가 없다는 거예요. 더 나아가서, 더 깊이 있게 얘기해서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죽는 그분을 자신의 메시아로 보낼 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해석의 핵심은 십자가죠. 십자가로 다시 돌아가야 돼요. 십자가를 경유해야 돼요. 성경해석을 할 때 우리는 우리를 경유할 필요가 없죠. 나는 나부터 시작하니까. 나 잘났다, 부터 시작하니까. 성경을 해석하는 이것은 나쁜 일이 아니고 성경을 해석하는 이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준비단계에서 필수적인 착한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 착한 일을 내가 지금 시작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를 죄인으로 간주하지 않아요. 하나님 잘 믿겠다는데 이게 왜 죄냐,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뭐를 빠뜨린 거예요? 시작이 뭡니까? 자기로부터 시작한 거예요. 왜 자기부터 시작하죠? 그게 선악체계이기 때문에. 선악체계는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나잖아요. 내가 시작한 일이 내가 어떤 열매를 거두면 나한테 이익이 된다는 계산이 선 겁니다.
시작은 예수님 십자가부터 시작해야 돼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부터 시작해야 돼요. 그렇다면 죄인은 ‘죄인이 용서받는다’가 아니라 ‘죄인은 죽어야 된다’부터 시작해야 돼요. 죽고 난 뒤에 비로소 용서가 주어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죽은 자를 하나님은 자기 자녀로 삼기 때문에. 그게 어제 수요 설교한, 죽은 자를 살게 하고 없던 것에서 있게 하죠. 있는 것을 있게 하는 게 아니고 없던 데서 있게 하고 살아서 구원하는 게 아니고 죽게 해서 살게 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언약체계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아브람이 있는 동안에 아브라함은 없어요. 아브람이 죽을 때 그 죽은 자리에서 아브라함이 나오는 겁니다. 자기 아들이 대신 죽었으니까요. 야곱은 있을 때 이스라엘은 없어요. 그러나 야곱으로 인하여 싸움해야 됐던 그 천사의 희생을 근거로 해서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을 이겼다. 이겼다, 와! 하고 보니까 이긴 자가 자기를 축복해야 될 하나님을 야곱이 이겨버린 거예요. 야곱은 하나님의 적이 된 겁니다. 하나님을 싸워서 이기는 순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하나님의 적이 되게 만들어가지고 살 자격도 없게 만들어버렸죠.
자기 아들, 죄 없는 자기 아들을 하나님은 뭐로 만들었습니까? 죄 있는 죄인으로 만들어서 그다음에 어떻게 했어요? 말로 때웠습니까, 십자가에 실제로 죽게 했습니까? 실제로 십자가에 죽게 했죠. 그로 인하여 살아있는 채로 살고자 하는 모든 인간의 꼼수는 다 실패로 끝나게 만들었어요, 십자가 앞에서. 살아있는 자가 복음 알고 살아있는 자가 어떻게 기도해서 구원받겠다는 꼼수는 십자가 앞에서 전부다 허상이 헛짓한 거예요. 소용없어요.
그런데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성령은 죽었다가 산 분의 영이기 때문에 어떤 능력이냐 하면 죽은 자도 살려내는 능력이 있거든요. 그 능력이, 성령이 임해버리니까 그다음부터 우리는 능력에 의해서 깨보니까, 뾰로롱~ 하고 깨보니까 값없이 구원받아버려요, 값없이. 뭐 이런 게 다 있어. 왜 값없이 구원받지? 행한 것도 없이 의롭게 되어 버렸어요. 뭐 이런 수가 다 있어?
그러고 난 뒤에 우리 자신의 일과 앞으로 남은 우리의 육신으로 해야 될 모든 것을 이미 구원받은 십자가와 대조하면서 살게 만들어 버려요. 대조하면서 어떻게 사느냐. 성경 말씀을 주는 겁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절제를, 이렇게 하니까 우리는 본능적으로 선악체계의 육신으로 해보려고 하면서 그게 전부다 실패로 끝난다는 사실을, 심지어 내가 예수 믿는 것도 실패다, 하는 실패로 끝나게 하시는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그냥 싱긋이 웃고 감사하죠. 내 믿음이 실패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만약에 내 믿음에 내가 성공해보세요. 믿음에 성공한 내가 나한테 우상이 될 게 아니겠습니까? 너는 실패했지? 나는 성공했다! 하면서 외칠 것 아니겠습니까? 뭘 해도 실패할 수 있는 이 자유. 성령이 아니면 누가 알겠어요?
주님은 베드로에게 얘기했어요. 베드로야,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다.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성경은 사사로이 푸는 게 아니에요. 신학 같은 것 백날해도 소용없습니다. 신학은 하지 마라,가 아니라 해봤자 그게 구원의 능력이 아니에요. 신학은 구원의 능력이 아닙니다. 구원의 능력은 십자가에요. 나를 덮치는 십자가에요. 내가 아는 십자가가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십자가가 아니라 나에게 매일같이 소용없는 짓을 했다고 덮치는 그 십자가. 성령이 이끄는 그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에요. 따라서 구원의 능력을 받은 자로서 우리에게 일어난 어떤 일도 우리는 나의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베드로에게 한 말씀이 있죠. “베드로야, 네가 원치 않는 길로 내가 너를 이끌 것이다.” 네가 원치 않는 길. 그러니까 구원받은 자가 나라는 것이 개입될 때가 언제인가 하면 내가 원치 않는 일을 해야 될 때 내가 거기에 끼어드는 거예요. 뭐든지 내 뜻대로 안 되게 하는 그 일에 우리가 끼어드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베드로가 이의 달고 막 달려들었습니까? 아니죠. 주께서 원하는 대로 하시는 그것으로 저는 족합니다, 그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그게 뭐냐. 아가서에 보면 사과나무 밑에서 신랑 신부가 그 사과나무 향기 밑에서 사랑을 즐기는 그런 일들이 있어요. 아가서 2장 3절(“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에도 나오고 8장 5절(“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곳 사과나무 아래서 너를 깨웠노라”)에도 나오는데 그 사과나무 향기를, 외부적인 향기를 그냥 맛보듯이 선악체계에서 벗어난 사람은 그냥 주님이 주시는 그것을 사과나무 향기로써 만끽하면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의 실패를 보면서 나의 실패를 흐뭇한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나의 실패를. 그런데 실패를 미리 하면 안돼요. 실패를 미리 예상하는 것도 나의 뜻이 되기 때문에 주께서는 내가 원하는 실패를 그것도 내 뜻대로 안 해주고 다른 실패로 대체해주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실패할 수 있는 자유를 저희들에게, 기쁨과 감사를 저희들에게 허락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