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부재의 온전함1

아빠와 함께 2021. 3. 16. 07:34

강남-누가복음 5장 35절 (부재의 온전함) 210302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5장 27절부터 보겠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그렇게 시작이 되지요. 그 다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있습니다. 불러냈어요.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을 왜 계속 이어가지 않느냐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고 그 부름 받은 12제자와 함께 있고 그 12제자도 예수님이 자기들을 부를 때는 생각을 했지요. 이대로 쭉 간다. 이 상태, 이 관계 변함없을 것이다. 예수님 12제자와 예수님까지 포함해서 13명이죠. 이 충족된 숫자 변함이 없을 것이다. 여기에 모자람이 더 없을 것이다라고 그렇게 생각을 했겠지요.


그런데 이게 그 뒤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오늘의 강의의 핵심이 뭐가 핵심이 되느냐 하면은 35절입니다.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함께 제자들과 함께 즐겁게 있으니까 바리새인들이 너희들 금식 안하고 왜 자꾸 먹고 마시느냐 이렇게 할 때에 34절에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같이 기뻐하고 금식이라는 것은 어림도 없다. 같이 기뻐한다.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여기서 바리새인들도 오해를 하지만 제자들도 오해가 시작이 되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여기 계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를 예수님 쪽으로 불러냈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아니한가. 예수님께서 불러내서 예수님 제자 되었다. 이걸로 오케이 싸인 나고 아무 문제 없는 거죠. 왜? 예수님이 계시고 나도 있기 때문에.


그런데 35절에 신랑이 어떻게 된다고요? 신랑이 빼앗긴다. 신랑이 빼앗긴다 이것은 뭐냐 하면은 이렇게 보면 되겠지요. 신랑의 부재, 신랑이 없다 이 말이죠. 왜 신랑이 없는 이 사태가 왜 벌어져야 되냐 하는 겁니다. 예수님 계시고 제자 있는데 사람들 보기에는 이 관계가 대단히 온전하게 보는 거에요. 완벽하게 보는 겁니다.


주님이 부재한다는 생각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도 없을뿐더러 제자들에게도 그런 생각이 애초에 없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고집합니다. 신랑이 반드시 부재해야 된다는 거에요. 그럼 여기서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각이 이게 안 맞아요. 그럼 먼저 사람들의 생각이 뭔지 알아야 되겠지요.


사람들의 생각, 사람들의 생각은 자기가 상상한 것=현실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상상한 것과 현실이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은 현실을 볼 때 그냥 보지 않고 자기가 상상한 것과 맞춘 그 현실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 맞춘 현실이라고.


여기 이 상상에서는 현실이 일치됐기 때문에 이거는 뭐가 없느냐 하면은 결핍이 없지요. 결핍이 없는데 이 현실이 가만히 있는 현실이 아니고 요동을 친다 이 말이죠. 요동을 치게 되면 뭐가 깨지느냐 하면은 이 상상이 깨지겠지요. ‘어?! 아니네. 세상을 내 뜻대로 안 움직이네.’


그 때 내가 상상한 것이 현실이 아니고 이건 현실을 반영하는 일종의 임시적 상징이었다라는 겁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나의 욕망은 그 임시적이지만 한시적으로도 완벽과 완전의 맛을 보는 재미로 살고 싶은 거에요. 인간은.


내가 상상한 것과 현실이 일시적이지만 완벽하다고 여길 때 이것은 뭐로 이어지느냐 하면은 나의 완벽, 나의 완전으로 내가 자족, 만족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여기서 신이기 때문에. 절대자이기 때문에. 나는 절대자이기 때문에. 세상이 어떤 세상이든 그 세상을 상상한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내가 해석한다는 거에요.


내가 해석을 할 때 그 해석의 의도가 뭐냐? 나는 완전하고 완벽한 존재이고 싶다는 인간의 그 근원적인 욕망을 뿌리칠 수 없어요. 인간은. 그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불러주니까 예수님이 부른다는 이 현실에 대해서 제자들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기뻐하느냐 하면은 나는 이제 됐다. 나는 온전하게 되었다.


아주 교회에서 좋게 생각하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 하는데.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그런데 그게 나의 일방적인 상상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주께서 뭐라고 하시냐면 네가 현실을 알아? 네가 내일을 알아? 모레를 알아? 한 달 뒤를 아느냐 이 말이죠.


코로나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는 마스크를 안 썼지요. 마스크를 안 쓴 그 상태가 뭐냐? 그걸 당연할 걸로 보고 살았죠. 환자도 아닌데 왜 마스크를 쓰고 다녀. 코로나 이전에 길에서 마스크 쓰고 다니면 사람들은 기피했지요. 감기 걸렸구나. 몸살이구나. 피해가자. 그때 “아 나도 저 사람처럼 마스크 쓰고 싶어요.” 이런 사람 없어요.


왜? 내가 상상하기에는 마스크 안 쓰는 그것이 그 당시의 나의 온전함을 충분하게 반영해주는 일이기 때문에. 그 당시 마스크 안 쓸 때 마스크를 썼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결핍된 존재로 비치는 거에요. 아프구나. 사람이 좀 모자라는구나. 빨리 나처럼 건강했으면 좋겠네. 쓴 만큼 비정상 뭐 이런 식으로 했단 말이죠.


그러나 현실은 요동을 치거든요. 마스크 쓰라고 할 때 마스크 안 쓰고 처음에 많이 버텼지요. 왜? 옛날에 얼마 전까지 안 쓰는 것이 나 다우니까. 그게 내가 상상한 완전한 내 모습이었으니까. 그런데 마스크 안 쓰면 10만원. 그놈의 10만원이 쎄요. 1인당 10만원. 교인들 마스크 안 쓰면 10만원 때립니다. 교회는 300만원. 10만원 딱 때리니까 아이고 더럽지만 써주자 이게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10만원.


그렇게 함으로써 뭐라고 자기가 상상으로 해석합니까? 뭐라고 해석하느냐 하면은 마스크 썼기 때문에 아직 나는 안 걸리고 있다는 역시 나는 안 걸려야 마땅해. 왜? 나의 완전은 내가 조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우기는 거에요. 그래서 신랑 되신 예수님이 부재한 것은 이런 뜻입니다. 과연 우리의 만남이 어떤 만남인가? 다시 보게 하는 거에요.


예수님의 부재함으로써 인간 쪽에서 예수님께 기대한 그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지게 만들어 버려요. 이제 예수님 만나서 나는 구원됐다 땡 잡았다 그 모든 기대가 정작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내가 은근히 노렸던 거에요. 절대자, 절대적인 존재. 내 힘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내 힘으로 갈수 없는 천국을 누가 나를 위하여 천국에 좀 넣어줬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은근히 노린 게 있어요.


그럼 주님이 묻지요. “네가 왜 천국 왜 가야되는데?” “저는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저는 가야 됩니다. 지옥에서 불구덩이에서 뜨거워서 못 사는 것은 내게 절대 어울리지 않습니다. 나는 복을 받아야 마땅하고 나는 영생을 누려야 합당한 그런 권리와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그럼 주님이 “어딜 봐서?” “그런 거 묻지 마시고요. 그런 거 묻지 마시고요.”


참 이게 오늘 본문에 병든 자라야 의사가 필요하다는데 이 병이 보통 병이 아니에요. 이 병이. 네가 왜 천국가야 되는데? 물으면 그런 거 묻지 마시고요 이게 보통 인간의 힘으로 못 고쳐요. 못 고친다고요. 이게. 서머싯 몸이라는 유명한 영국의 작가가 있어요. 노벨상 받았는지 모르겠는데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라는 책이 있어요. 1000페이지가 넘는 소설책인데.


거기에 빌립이라는 사람이 어릴 때부터 성장을 기록한 거에요. 스물 몇 살 때가지 쭉 기록한 건데. 그 소설에서 어릴 때 자기가 어떤 누구의 양자로 들어갔어요. 영국의 성공회 목사 부부의 양자로 들어갔습니다. 양자로 들어가가지고 있는데 자기 부모님은 상당히 훌륭하게 자기를 키워가지고 자기 다리는 하나는 절고 그렇지만 마음씨 착한 백부 아저씨죠.


큰삼촌이 데려다가 자기를 키워놨는데 주인공 빌립이 아주 총기가 총명해요. 총명해서 철저하게 그 아저씨는 자기를 양자로 들이면서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살라고 철저한 신앙 교육을 시킨 거에요. 그럴 때 신앙교육을 받게 된 잘 들어보세요. 신앙교육을 받게 된 인간이 자기를 키우신 그 백부, 백모 그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가지면서 정신적 성장기를 겪는지를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자, 아버지 어머니는 신앙을 원해요. 하나님을 위해서 오직 하나님만 살아계시고 하나님만을 위해서. 그럼 자기 정신 내부에 그게 그득하니 흡수가 되겠지요. 흡수가 되어서 어떤 식으로 생각하느냐 하면은 자기가 딴 건 다 괜찮은데 공부도 잘하고 다 좋은데 다리가 하나 저니까 성경말씀 마태복음 17장 20절에 이런 말씀 있어요.


어떤 말씀이냐 하면은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래서 소설책에 보면 주인공 빌립이 아버지한테 물어요. 아버지한테 아버지 이게 무슨 뜻입니까? 과연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정말 산이 옮겨집니까? 라고 하니까 그 성공회 목사 그 사람은 인간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충분히 가능하다 이렇게 해요.


그러면 산을 옮기는 그 놀라운 힘이 필요한 기적보다도 약간 모자란 것을 기도하면 되겠다 싶어서 자기가 믿음 있다고 치고 방학 동안에 방학 끝날 때까지 자기가 기한을 정해가지고 기도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 제가 주님 앞에 제물이 되겠습니다. 기도제물이 되겠습니다. 기도할 때도 일부러 힘들게 기도하는 거에요.


힘들게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 불쌍히 여겨줄까 싶어서 이 불구의 다리 저는 이것이 내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니까 성경 말씀대로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니까 이 기도 방학 끝날 때까지 걷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를 해요. 일부러 악조건을 만들어가지고. 시간도 자기가 정했어요. 방학 끝날 때까지.


그런데 방학 끝날 때도 다리가 안 나았거든요. 자기가 시간을 또 정해요. 그럼 다음 부활절 때까지. 그래도 기도가 안 되니까 소설 주인공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자기는 믿음 없다고 포기를 해버립니다. 자기가 믿음이 없다고. 겨자씨만한 믿음이 없다고. 지금 이 주인공의 잘못은 소설 쓴 사람도 모르고 거기 등장한 목사도 몰라요.


우리가 지금 이 본문을 보면서 뭐를 우리가 놓치고 있느냐 하면은 주님의 부재가 주님이 계시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온전함을 부족함으로 전부 다 전환시킨다는 거에요. 주님의 부재가 모든 온전함을 불완전한 것으로 이것을 불완전함을 공급하는 겁니다. 주님의 뜻은 우리가 그냥 있어버리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태어난 어린애처럼 자동적으로 우리는 완전을 추구합니다. 나의 완전을 추구해요.


완전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어떠한 악조건도 우리는 마다하지 않습니다. 십일조하라면 십일조하고 예배 참석하고 성경공부하고 모든 악조건을 하더라도 목표가 아주 거룩한 목표가 있어요. 내가 정할 수 없는 목표, 내가 존재하는 한 결코 지워지지 않는 목표가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절대적이고 완전한 존재인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거리를 이 현실 속에서 뽑아낼려는 시도를 하는 거에요. 이렇게 이렇기 때문에 나는 구원받아 마땅함을 뽑아낼려고 하는 거에요. 출발점이 뭐냐 하면은 이미 완전을 추구한다는 그것을 인간은 어느 인간도 스스로 그걸 거역할 수 있는 재주가 없어요. 인간에게는.


여기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제자들. 제자들 집단 어떤 무리도 주님이 나타나신 것은 내가 완전을 추구하는 그 자체가 추잡하고 더러운 구원 값도 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라요 그걸. 구원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사람이 그동안 살아가면서 모든 시도한 것은 노력한 것은 뭔가 노림수가 있어요. 노림수 없는 행동이나 생각이 없어요. 전부 다 뭔가 뒤에 담아놓는 게 실려놓는 게 있다고요. 나의 행동 속에.


다시 말씀드릴게요. 나는 상상하고 상상이 멈출 수가 없습니다. 상상. 인간이 상상하면서 발생 되는 게 자아입니다. 상상하면서 발생되는 게 자아에요. 자아의 특징은 뭐냐? 동일시한다는 거에요. 동일시. 뭔가 괜찮은 게 있으면 그걸 자기 것이라고 자기가 필요한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이렇게 해석을 해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동일시’.


사춘기 소녀가 꽃을 보면서 왜 너는 나를 닮았어? 이 꽃은 꼭 나를 닮은 것 같애. 자기가 꽃이다 이 말이거든요. 그리고 꽃이 시들게 되면 그 꽃잎을 탁 다림질해가지고 펴가지고 교과서 725페이지에다가 그냥 넣으면 부서지기 때문에 문방구가면 해줘요. 100원주면 코팅해주거든요. 해가지고 특히 네잎 크로바. 그래 나는 행운아야. 왜? 세상에 3잎밖에 없는데 4잎 나왔으니까. 요즘 4잎 생산하고 있거든요. 공장에서.


네잎 클로바 옛날에는 생산 안 됐으니까 소풍가서 그것만 찾고 있어요. 소풍가서. 토끼 먹을 거 자기가 다 찾고 있어. 해가지고 자기의 완전성을 자기가 증명하는 것에 모든 것에 매진하는 겁니다. 대기업 한 열대번 떨어지니까 한 백번 떨어지니까 중소기업 가면서 절대로 그 중소기업에 거기에 몸 담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대기업에 가고 말거야. 가면 6개월도 못가서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사업합니다. 아버지 밑천 좀 주세요 이런 식으로 뛰쳐나오겠지만.


인간의 모든 상상이라고 하는 것은 동일시에요. 내 마음에 드는 것과 동일시. 자기 마음에 안 드는 것과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에 드는 것과 동일시.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걸 아시고 신랑과 함께 있을 때 실컷 기뻐해라. 금식같은 거 하지 말고 실컷 좋아해라. 그런데 그 기쁨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거에요. 예수님이 좋아할 때 이거는 분명히 주님 보시기에 기쁨의 소지가 여지가 있어요.


뭔가 예수님에 대해서 잘못 오해해서 좋아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 인간이란 존재는 모든 것이 오해로부터 시작해서 오해로 끝나기 때문에. 특히 인간은 자기가 사는 것을 하나님이 나한테 주는 어떤 보상이라고 보는 거에요. 사는 것이 보상이 되기 때문에 죽으면 벌 받는 것으로 여기는 겁니다.


사는 것이 보상이다. 내가 착하기 때문에 오늘 하루도 연장되었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하루를 살면 살수록 그게 다 죄가 돼요. 무슨 보상이 죄 지으란 보상이 어디 있습니까? 안 살았으면 안 질 죄를 하루 더 살았기 때문에 죄를 더 확대, 확산된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함께 있다고 주님 때문에 저는 사는 보람이 있어요 주님 때문에 삽니다 할 때 그럼 내가 너희들 허락도 없이 오히려 그렇게 나를 좋아하는 너 자신에 대해서 내가 배척을 받거나 잃어버림을 당할 때, 신랑을 빼앗긴다고 되어 있거든요. 신랑이 빼앗기게 될 때 너희들은 신랑이 없는 그 상태를 가지고도 너희들은 너 자신의 완전을 추구할 그런 위인들이다 라는 겁니다. 신랑이 없을 때에도 야 고기 잡으러 가자. 신랑이 없어도 야 고기 잡으러 가자.


뭔가 결국 예수님께서 그냥 처음부터 같이 쭉 있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같이 있어가지고 잃어버림이 없다면 인간은 자기가 얼마나 예수님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는 것 내가 표준이 되어서 나 잘해주는 예수님이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께서 내 생각이 같이 때문에 주님은 나와 함께 한다는 그 말도 안 되는 오해, 그 오해가 진실인 줄 알고 계속 붙잡게 되는 거에요 그게.


예수님께서 부재, 안 계심으로써 무엇이 온전인가 무엇이 완전인가를 보게 하십니다. 도대체 무엇이 온전함인가. 무엇이 온전함인가. 어떤 사태를 온전한 사태라고 너희들은 이야기를 하느냐 묻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뭐 코로나 물러나고요 날씨는 봄이 되고 벚꽃피고요 그런걸 염두해두겠지요. 그런 것은 네가 그걸 원했던 거고 네가 원하는 현실이 되어버리면 내가 당최 문제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밝혀낼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걸 밝혀낼 수가 없어요.


분명히 예수님께서 그 뒤에 나오는 말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주님께서 지금 원하는 목표가 뭐냐 하면은 신랑 붙들고 좋다고 잔치하는 네가 죄인이야 라는 것을 그걸 네 능력으로 그걸 알아낼 재주가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저는 예수님만 사랑해요. 예수님만 믿어요. 예수님만 좋아해요 그게 죄가 된다는 사실을 네 실력으로 그걸 알아낼 수가 있어? 못 알아내지요. 인간은 다 끌어 모으니까. 아는 지식 다 끌어 모으니까. 많이 아는 것이 많이 나를 발전시키고 많이 발전하는 것이 온전함에 접근할 수 있다고 여기거든요. 더욱 더 온전하고 더욱 더 온전하고.


왜 그러느냐 하면은 왜 인간은 왜 주님께 방해되느냐 하면은 인간은 뭐하고 있느냐 하면은 지금 자기 존재를 알고 있거든요.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겁니다. 오늘 강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나는 존재한다 다른 말로 지금 나는 살아있다. 나는 살아있다고 보는 거에요. 살아있다고 보기 때문에 어떻게 해도 살아있는 것은 기본으로 먹어주잖아. 기본으로.


다만 살아있는데 좋게 살아있느냐 좀 모자라게 살아있느냐. 모자라면 채우면 되니까. 살아있는 것은 이것은 기본으로 있고 피자판에 밀가루는 있고 토핑을 뭐로 하느냐에 따라 어떤 피자가 되느냐. 어떤 피자가 되느냐 그런 것처럼 일단은 나는 무조건 나는 살아있고 살아있는 여기에다가 어떤 정보를 여기에다가 지식을 담는 것에 따라 살아있다는 거에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부재, 부재정도가 아니고 아예 죽어버립니다. 죽어버려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꾸 살아있는 자들과 교류를 합니다.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자가 계속 친구 바꾸고 애인 바꾸고 사람 바꾸고 다 바꿔요. 진짜 못 바꾸는 것은 아버지 엄마 형제. 마누라는 바꿀 수 있으니까. 남자도 바꾸고. 타고난 건 못 바꿔서 속이 천불나지요. 호적판다해도 안 파져요 이게.


계속 살아있는 것과 계속 바꾸거든요. 그런데 그 본인은 안 바꿔요. 기본은 넣어주니까 내가 일단 살아있는 이것은 변경 대상이 안돼요 이것은. 이렇든 저렇든 가난하든 힘들든 무조건 나는 살아있어야 돼요. 살아있는 내가 다만 좀 다리가 절룩거린다. 그럴 땐 방학 끝날 때까지 뭐해야 돼요? 힘들게 악바리 기도할 때 아버지한테 들은 거 있잖아요. 신앙적인 것. 겨자씨만한 믿음 있으면 산도 옮긴다. 산 옮기는 것까지 욕심 안내겠습니다. 그냥 다리만 좀 펴게 해달라 그걸 요구했지만 결국은 방학 끝날 때까지 안 고쳐졌거든요.


그러니까 자기는 믿음이 없다고 한 거에요. 결국 믿음이 없다는 것은 여기에 피자판에 토핑을 한 거에요. 믿음을. 믿음, 소망, 사랑 좋은 거 다 토핑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판단은 누가해요? 피자판이 판단한 거에요. 내가 판단한 거에요. 내가. 판단하고 다른 걸로 다른 지식으로 교체해요. 인간의 굴레라는 책을 보면 다른 걸로 미술도 하다가 어떤 여자도 사귀다가 계속 다른 길로 살아있는 인간들은 살아있는 것만 붙드는 겁니다.


보다 더 행복해 보이는 경우를 가진 사람과 사귄다든지 돈이 있다든지 멋있게 보인다든지 40대 되가지고 뱃살이 나온다. 필라테스 가가지고 보면 전부 다 필라테스 보면 모델 나오잖아요. 6개월만 하면 됩니다. 이렇게 폼 잡고 해가지고. 허리 개미허리처럼 되는 것 보고 자기가 자기를 노력해서 바꾸는 거에요. 토핑하는 거에요. 피자판에다가 계속 토마토소스 하다가 다른 거 하다가 계속 바꾸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리고 구약성경에서 요구하는 것은 너는 죽은 자와 바꿔야 된다. 너는 죽은 자와 바꿔야 된다. 산 자와 상대하지 말고 죽어버린 자와 상대하라. 그것도 그냥 죽은 게 아니고 너 때문에 죽은 자와 너 때문에 너의 고집 센 절대성 때문에 죽어버린 자와 바꿔치기 해야 돼요.


이렇게 보게 되면 예수님 앞에서 산 자나 죽은 자나 마찬가지에요. 산 자나 죽은 자나 둘 다 죽은 자에요. 어차피 죽을 거니까. 나이 들면 죽을 거니까. 주님 앞에서는 어떤 인간도 출발점이 뭐냐 하면은 살아 있다가 아니라 죽어 있다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관심사는 저 살아있다고 착각하는 인간을 어떻게 자기의 바닥, 나는 죽었다는 것을 인식시킬 수 있느냐. 인간이 죽게 되면 인간의 뭐가 죽어요? 상상력이 죽게 되지요. 인간이 죽으면 상상을 할 수 없잖아요. 상상력이 죽게 되게 되면 동일시할게 없잖아요. 동일시. 나 저 사람처럼 될래. 저 부자처럼 될래. 동일시할 게 없지요. 할 게 없으면 이 현실 자체가 일방적으로 나를 위한 현실의 관계가 다 끊어지는 겁니다.


더 쉽게 말씀드리면 죽음이란 인간이 되는 조건이 붕괴되는 것. 이게 죽음이에요. 내가 산 인간이 되는 조건. 산 인간이 되는 조건이 붕괴되는 것이 죽음입니다. 자살은 그 결과죠. 내가 나로 사는 거에요. 내가 나로 사는 것이 지장이 되가지고 더 살 이유가 없는 것, 그게 바로 죽음입니다. 그럼 살아있는 사람은 다 기쁘게 살지 않느냐?


살아 있는 사람은 다 기쁘게 산다고요? 그것은 현실이 자기 상상력과 아직은 일치된다고 착각할 수 있는 여건들이 있기 때문에 골라 골라 아이스크림 31가지 골라 골라. 만약에 베스킨라빈스에 31가지 있잖아요. 만약에 31가지만 내놓고 32번째 33번째 안내놓으면 그 가게 안 갑니다. 왜? 맛을 한 번씩 다 봤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을 아직 골라 먹을 게 남아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거에요. 토핑할 게 남아있기 때문에. 그래서 새로운 조건으로 바꿀게 남아있기 때문에. 지금 있는 내 조건 다시 말해서 나는 미남이다 몸이 건강하다 이렇게 하는데 갑자기 사고나가지고 갑자기 식물인간이 되었다.


그런데 식물인간인데 의식이 있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식물인간이 골치 아픈 거죠. 정신도 나갔으면 좋았을텐데. 정신은 멀쩡한데 자기 신체 보니까 자기가 상상한 신체가 아니잖아요. 나이 들면 다 그래요. 나이 들면 생각도 단어도 안 떠오르고요. 말도 요한복음인데 나는 로마서 이야기하고 그런 실수.


그러니까 이게 기력이 쇠하고 하게 되면 엉망진창 사는 게 엉망진창이에요. 아침에 오이비누로 세수하고 나와도 할아버지 냄새나. 할아버지 냄새난다고 손자, 손녀가 밀어낼 때 내가 왜 사나 싶은데 아직까지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냥 상상해본 거에요. 할머니 냄새나는 거 같애요. 미나리에 나오는 윤여정 대사 그런 게 있어요. 밀어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노인네들은 뭐냐? 뭐와 동일시하느냐 하면은 자기의 과거와 동일시해요. 내가 소녀 때 잘 나갔고 내가 젊을 때 잘 나갔다고. 맨날 과거 이야기해요. 노래도 흘러간 노래. 틀어놓고 팝송. 창이 넓은 카페에 앉아가지고. 겨울의 찻집. 조용필 노래 들으면서 지금 노래는 하나도 몰라. 옛날의 내가 나로서 행복했던 그 시절을 계속 우려먹는 겁니다. 우려먹어요.


CD도 아니고 LP판 틀어놓고. 치칙 그 소리가 좋다는 겁니다. 그 때 대학로에서 잘 나가다 데모하다가 맞고 계속해서 되새기는 것은 붕괴되기 싫어서예요. 붕괴. 나의 나 다움이 싫은 거에요. 그런데 구약 율법에 뭡니까? 율법에서 나로 하여금 모든 인간 조건은 나를 버티게 하는 인간 조건이 저주에요. 이래서 너는 저주 받아야 돼. 죽는 정도가 아니고 저주받아야 돼요. 곱게 죽어서는 안 된다는 거에요. 율법에는 뭐가 있다? 저주가 있어요. 심판이 있다고요. 징벌이 있어요. 너는 그 징벌 대상이라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죽음은 곧 부정함이다. 부정한 것. 더럽다는 거에요. 너는 더럽다. 구약입니다. 구약의 율법이기 때문에 너는 더럽다. 신약의 오늘 본문에서는 너는 병 들었다. 너는 병 들었다에요. 네가 병 안 들었다면 그럼 내가 필요 없겠네. 그런 뜻이에요. 나는 병든 자를 위해서 왔다. 그런데 네가 병이 안 들었다고? 그럼 나는 필요 없겠네. 네가 병 들었다는 증거를 대볼까? 네가 나를 배신할거다. 네가 나를 싫어할거다.


그게 인간은 하늘의 태양이 둘이 없듯이 나야? 너야? 분명히 하자는 겁니다. 인간은 나로부터 출발하거든요. 그 지시대명사를 잘못 사용한 거에요. 인간은 나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인간이 너라고 하는 것은 뭐냐? 저기 누가 있다고 너가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관계가 무관한 관계가 될 수 있거든요. 저기 있는 사람이 나와 관계있을려면 관계있는 너가 될려면 내말을 들을 수 있는 관계가 너라고 하는 겁니다. ‘너’.


‘너’라는 것은 내 말을 들을 준비가 된 사람이 너에요. 이 세상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다 ‘너’가 아니에요. 내 말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사람만이 ‘너’가 되는 겁니다. 그래야 내가 내 말빨이 성립이 돼요. 내 말빨이. 만약에 내 말 안 들을 거 같으면 갈라서 헤어지는 겁니다. 더 이상 ‘너’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면 이 ‘너’라고 하는 것은 누가 생산한다? 나의 절대성이 생산하는 겁니다. 나의 절대성이.


그러니까 이것은 ‘너’가 있다 할지라도 내가 쏘아댄 내 말에 대해서 그걸 되돌려 줄 수 있는 사람이 너이기 때문에 사실은 나1이라면 너는 뭐냐? 나2가 되는 거에요. 집안에 4식구가 있으면 4식구가 모두 다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아버지를 뭐로 보느냐 하면은 나의 아버지로 봐요. 이게 오해 아닙니까? 이게 오해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내 뜻을 들어주지 않는다. 어느 그림에 그런 거 있잖아요. 아버지가 내 뜻을 들어주지 않으니까 어린애가 기도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아버지 지옥가지 않게 하옵소서 기도하는 거. 이 말은 지옥 보내달라는 거에요. 내말 듣지 않는 아버지 같으면 지옥가도 마땅하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겁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나와 너의 경계 바깥에 있는 것을 경멸이라고 합니다. ‘경멸’. 아주 얕잡아 보는 겁니다. 인간은 항상 경멸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나의 세계에 포함된 너 빼놓고는 항상 경멸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저쪽을 경멸해야 상대적으로 내 기분이 up 돼요. 기분이 좋아진다고요.


그래서 연예계에 있는 어떤 유명인사들은 꼭 이렇게 집구석 망해야 돼. 그래야 기분이 좋아. 기분이 좋아요. 기성용 망해야 돼. 그래야 기분이 좋아. 기성용 초등학교 학폭해야 돼. 나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있으면 안돼요. 나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가 절대 있으면 안돼요. 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찬송이 나와야 돼요. 이 찬송이. 나보다 더 귀한 것은 없어야 돼요. 이게 인간의 본성이에요. 이건 못 고칩니다. 고칠 수 없어요. 어떤 노력을 해도 못 고칩니다.


그 고치는 방법은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내가 죽을게. 이 방법 외에는 없어요. 네가 그렇게 존재 붙들고 있다면 내가 존재하지 않으마. 내가 꺼져줄게. 그냥 꺼져주는 게 아니고 결국 사람들은 예수님을 꺼지라고 할 거에요. 죽으라고 할 거에요. 그게 신랑이 스스로 은퇴하는 게 아닙니다. 빼앗기는 거에요. 지금 이 사태를 제자들은 예수님이 무슨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순서를 이야기하지요. 신랑 있을 때 좋다. 왜 좋으냐 하면 지금 세리 레위가 기분 좋았어요. 기분 좋아서 잔치를 벌렸거든요. 예수님이란 유명한 분이 자기를 알아줬다는 것에 대해 기분이 좋아 잔치를 벌리니까 예수님이 신랑과 함께 있는 신부와 함께 있는 혼인식이라고 이야기해놓고 빠지는 게 있다. 결정적이죠.


지금 기분 좋지? 그런데 기분이 왜 좋을까? 기분 좋은 네가 이유를 알아? 신랑과 함께 있는 사태가 제대로 된 사태냐? 아니면 신랑이 빼앗기는 없는 부재하는 사태가 제대로 된 현실인가? 이 현실은 어떤 사태로 중심으로 돌아가는지를 이제 너희들은 지켜봐야 되는 거에요. 그걸. 너희들은 뭘 하느냐? 상실의 일반화를 그들은 겪어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바로 구약 때문에 그래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줬잖아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네가 너답게 되는 조건은 네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내가 전한다. 뭘로? 그 조건이 뭐냐? 율법이에요. 네가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그냥 죽는 정도가 아니고 너는 더럽다는 겁니다. 더러운 자에게는 하나님이 가만히 두지 않아요. 더러운 자에게는 더러운 값을 해요.


그게 뭐냐? 저주에요. 저주를 퍼붓는 거에요. 반면에 네가 율법대로 살면 율법의 너의 존재의 조건이 된다면 너 존재는 그냥 산다가 아니라 복 받는 상태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게 바로 율법이 제시한 겁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뭐냐? 나 하나 있고 율법이 주어진 거죠. 그러면 그 찾아온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요청한 거에요? 아니면 하나님이 알아서 이스라엘에게 율법 가지고 앞장 세워서 덮친 거에요? 덮쳤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에서 누가 ‘나’가 되는 거에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가 될 수 없지요. 누가 ‘나’에요? 여호와 하나님이 ‘나’지요. 그게 주의 이름으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움직이는 이름이에요. 너 말고 여호와의 이름이 주인이 되지요. 그럼 우상을 섬긴다는 말은 뭐냐? 우상을 누가 선택했느냐? 우상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선택했지요? 우상을 선택했다는 말은 결정권은 누구한테 있다? 나한테 있고 그럼 우상을 믿는다는 것은 누구를 위하여 우상 앞에 반드시 누구를 위하여 자기를 위해서 우상을 섬기잖아요.


그럼 자기를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 자기를 위해서 삼위일체 하는 것 이게 다 뭐에요? 그게 바로 우상 아닙니까? 그게 저주받기 위해서 그 짓하고 있는 거에요. 지금 저주를 받기 위해서 그 짓하고 있는 거에요. 주님께서 환자 위해 왔는데 본인은 환자 될 생각이 전혀 없는 거에요. 환자 될 생각이.


이 모든 원인이 어디 있느냐 하면은 상상과 상징을 이게 동일시해서 그래요. 이 현실을. 이게 잘못된, 어긋난 만남이에요. 어긋난 만남이에요. 인간의 자아 뒤엔 악마가 있고 악마가 손을 내밀 때 악마가 만들어낸 인간이 손을 내밀 때 주님이 손잡는 게 아니고 악마와 손잡았는데 자기들은 나를 위해줬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내가 나를 위한 ‘너’가 할 때 ‘너’가 반응을 보였다는 이유 때문에 그 자기 손을 잡아준 걸 예수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나의 구세주라 생각하는 거에요.


실은 내가 내 방식대로 나를 구원했는데. 성경 핑계대면서 성경에 어느 아는 지식 있어 가지고 주께서 창세전부터 택해서 예정해서 온갖 들은 풍월 다 이야기해가지고 주께서 나를 구원했다는 거에요. 자기는 멀쩡하게 있으면서. 자기는 내가 되는 조건을 붕괴당하지 않고 있으면서 무슨 엉터리같은, 그게 예수가 되겠어요?


예수님은 좁은 길을 언급했지요. 좁은 길. 좁은 길이 어떤 길이냐 하면 좁은 길이 파멸의 길이에요. 파멸. 파멸의 길입니다. 아무도 고대하거나 기대하거나 상상하지 않는 길이 좁은 길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좁은 길이 있다? 없다? 아예 없어요. 아예 좁은 길이라는 아예 없어요. 좁은 길로 가면 영생 있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좁은 길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아까 빌립이 맨땅에 차가운 바닥에서 기도하면서 그 순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되겠다고 다짐을 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보고 하나님 이제부터 내가 부르는 ‘너’가 되세요 라고 제 기도를 받아주고 제 믿음을 받아달라고 내 쪽에서 부탁하는 거에요.


참 이게 구약 이야기 다시 합니다. 구약에서 시체는 부정하다. 시체는 부정한 거에요. 시체는 왜 부정하느냐 하면은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죽을만해서 죽은 거에요. 더럽기 때문에 죽은 거에요. 하나님은 그 점에 대해서는 일체 양보 없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거에요. 더럽기 때문에 죽은 거에요.


그러면 우리가 늙어 죽지요. 평생 살아온 게 무슨 짓했다? 죽을 짓을 했다는 거에요. 더러운 짓만 했다는 거에요. 여기 토달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인간들은 한술 더 떠서 죽으면 되는데 더러우면 되는데 자기가 붕괴되지 않기 위해서 온갖 짓을 다 하니까 더러운데다 더 더러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처럼.


곱게 죽으세요. 이게 안돼. 우리는 이게 안 된다고요. 그럼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죽은 자니까 그냥 죽으세요 해서 돌아가라는 사태가 현실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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