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문둥병2

아빠와 함께 2021. 2. 15. 19:31

강남-누가복음 5장 13절 (문둥병) 210202b-이근호 목사



첫째시간에 여러 가지 중요한 게 많지만 그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바로 탕수육 소스 중요하다는 것, 개인은 항상 그냥 가만 있지를 못하고 새로운 더 가치 있고 더 좋아 보이는 나에 대해서 변신을 시도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 중에서 자기가 원하는 모델을 찾아요. 마음에 드는 이상형. 그런데 그 중에서 문둥병자가 들어갈 가능성은 없어요, 문둥병자를 부러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 본인은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될 수가 없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어야 하는 거에요. 중보자의 요소가 듬뿍 담겨있는 새로운 피조물. 그런데 세상에 보게 되면 나는 멀쩡하고 나의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면서 내 죄를 위해서 죽었다는 예수님을 끌어당겨요.


그러면 예수님과 문둥병 사이가 없어지고 멀쩡한 나와 더 훌륭한 것을 사모하는 나와 예수님이 결합이 된다고 우기는 겁니다. 이거는 말도 안 되는 사기에요 이거는.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거든요. 그러면 내가 죄 짓고 있으면 주님이 찾아오시겠네 이렇게 하는데 인간은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왜? 율법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목숨같이 사랑한다 할 때에 목숨같이 사랑한지를 인간은 몰라요. 예수님이 율법을 앞장세운 것은 어느 누구도 문둥병보다 더 나은 존재는 인간은 이 세상에 전혀 없다는 거에요. 문둥병자, 저주 받을 존재 그걸로 모든 인간의 규정을 끝났어요. 다 끝나버렸어요. 덜 아픈 문둥병 뭐 약간 아픈 거 그런 거 없어요.


문둥병 자체가 저주받은 존재의 표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찾아올 때에 바로 하늘에서 하나님 됨이 지상에서는 문둥병자 된 모세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함께 있는 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모델이에요. 출애굽기 4장 5절 한번 봅시다.


4장 5절부터 보면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나타난 거에요. 누구한테? 모세에게. 그러면 모세는 일단은 구약적 입장에서 중보자적인 기능이 있지요. 하나님 요소와 인간 요소가 안에서 같이 융합되어 있다 이 말이죠.


오늘날 우리가 바로 그 중보자적인 위치에 있어요. 죄인이 우리와 하나님의 십자가와 함께 있는. 있어서 우리가 자랑할건 오직 뭐 밖에 없습니까? 십자가 밖에 없다는 식으로 새로운 피조물 됨을 우리가 표현하게 되는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게 없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우리가 추구한 게 아니에요. 내가 자진해서 저주를 추구하고 율법에서 저주받는 자 추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저주가 너한테 딱이야. 진짜 딱이야. 정말 저주가 우리 앞에 딱 맞춤이에요. 맞춤. 율법을 준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인간이 율법을 어떻게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인간이 영광에 이르지 못하면 그거는 뭐 저주받아야 되지요. 지옥 갈 자가 누구냐? 네가 딱이야 네가.


그걸 안다는 것은 자랑이 전에는 보다 내가 천국 가는 사람 되었습니다 자랑질하다가 이제는 자랑이 뭘로 바뀌어요? 그런 나는 내가 십자가에 같이 저주받았습니다를 자랑한다는 말은 곧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말이고 그런 사람만이 새로 지음 받은 사람이에요. 이것은 다시 이야기한다면 인간의 예상 밖이에요. 예상 밖이에요.


그렇다면 첫째 시간에 중요한 것 탕수육 소스. 이 세상은 개별자가 있고 또 개인이 시공간을 관리하잖아요. 카운트. 내가 오후 2시에는 뭘 하고 오후 3시에는 뭘 하고 왜 그렇게 오후 3시 2시 잘라야 되느냐 하면은 그렇게 되어야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니까. 지금 보다 더 나은 나. 우리가 일하고 한다는 것은 지금보다 더 못한 내가 되기 위한 것 아니죠?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 초조하게 또는 아주 애간장을 다 녹이면서 이걸 이제 애가 타. 매일같이 애가 타요. 애가 타가지고 뭘 하는데 애가 탑니까?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 애가 타는 거에요. 애가 박사가 되야 될텐데. 아주 애가 타. 기도제목이 절로 나오고 말이죠. 율법은 안중에도 없어요 지금. 내가 중요해 내가. 율법은 안중에도 없고.


하나님 믿으니까 나를 좋은 길로 인도해주겠지. 이게 나의 연속성이 계속 가하면 나의 변화 추구이기 때문에 결국 여기서 터져 나오는 것은 누구 자랑입니까? 내 자랑이죠 내 자랑. 나의 증인 자랑. 내 증인 자랑. 그러면 여기서 나의 증인 자랑이면 끊어줘야 되겠지요. 끊어주는 게 뭐냐 하면은 십자가가 오는 겁니다. 그 십자가가 출애굽기 4장에서는 기적으로 오지요. 기적으로 어떻게 오는가 봅시다.


4장 6절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넣었어요. 자, 뒤의 변화에 대해서 뒤의 변화는 모세가 원했던 변화입니까? 주님이 기대했던 변화 입니까? 주님이 기대했던 변화지요. 그러면 모세 개인의 기대는 아니에요. 그럼 이미 모세 속에 뭐가 들어왔다? 주님의 뜻이 이미 모세 속에 들어온 거에요.


모세가 손을 품에 넣어라 해서 손을 품에 넣었다 이 말이죠. 품에 넣을 때에 인간의 모든 행동은요 인간의 모든 자아의 행동은 그냥 행동한 법이 없어요. 반드시 예측하게 되어 있고 기대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과학이라는 것이 관찰하면 관찰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관찰할 때는 뭔가 의도해서 관찰하는 거에요. 그걸 편향적 선택이고 하는 거에요. 편향적, 편애중계 있잖아요. 한쪽으로 쏠려서 평하듯이 편향적인 시각을 가지고 인간은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전부 다를 못 사고 백화점에 물건 살 때 전부 다를 못하고 필요한 것만 사듯이 자꾸 백화점 이야기하니까 우리와 관계없는 것 이야기해서 미안합니다. 시장에서 물건 살 때 어떤 색깔은 싫어. 편향적이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을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하게 되어 있어요. 기대한다 이 말이죠. 그럼 모세가 손을 넣을 때 기대했겠어요? 기대 안 했겠어요? 기대했겠지요.


자, 모세 손 넣어라 한 것이 오후 2시 46분이라고 봅시다. 손 뺄 때 오후 2시 47분이라고 봅시다. 뭘 기대했겠어요? 넣고 빼는 것. 사전에 서너번 준비해도 괜찮아요. 어?! 멀쩡하네. 멀쩡하네. 자 됐지. 들어간다. 들어갔어요. 들어갔는데 문둥병 됐잖아요. 사전에 준비 하나 관계없이 손을 넣고 빼보니까 품속에 넣고 빼버리니까 뭐가 됐어요? 문둥병 됐지요?


그러면 내 품은 무슨 세계에요? 문둥병의 세계. 이게 하나님 앞에 있는 인간의 본모습입니다. 인간의 본모습이에요. 이게 중보적 기능이에요. 예수님이 물 위를 걷고 예수님이 오병이어 할 때는 신났지. 임금 삼을려고 했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본모습은 뭐 산상설교 할 때 설교 잘한다 권세 있는 자 같다 했는데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진짜 예수다움, 주 되실려면 뭘 해야 됩니까? 아버지한테 버림받아야 돼요.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아야 돼요. 그것 때문에 기도했다 했지요. 겟세마네 기도했지요.


누가 할 수 있어요? 못하지요. 예수님 빼놓고 못한다는 말은 아무도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형이 아니었던 거에요.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도 아니면서 우리는 뭡니까? 나의 연속성을 계속 고집하고 있었던 겁니다. 나 천국 넣어주세요. 나 천국 넣어주세요. 주님의 뜻은 이거에요.


하나님은 구원하지 않습니다. 이거에요. 하나님은 현재의 나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어떤 인간도 구원하지 않습니다. 구원할 인간은 예수님을 보내가지고 구원할 인간으로 만들고 그 만들어진 인간만 구원하지요. 갈라디아서 6장 15절에 우리를 구원할거 같으면 애초부터 에덴동산에서 추방할 이유가 없어요.


하나님 제가 악마한테 꾀어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마 떼찌! 아이고 내 새끼. 그거 뭐 내가 또 심어줄게. 그런 것 가지고 고민하지 마. 심어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선악과 근처에다가 전기철조망해서 못 가게 만들게. 아이고 내가 관리 소홀했으니까 다 내 탓이요. 걱정하지 마 아이고 내 새끼. 그래그래. 내가 다 눈 감아줄 테니까 생명나무 따먹고 영생하라.


그게 우리가 아는 사랑의 하나님 아니에요? 내 중심으로 봤을 때 그게 사랑이죠. 사랑은 도닥거려주고 무마해주고 그게 사랑이잖아요. 괴로운 나를 천국 보내주는 게 사랑이잖아요. 그게 사랑이라고 알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나를 구원하지 않아요. 구원할 거 같으면 이렇게 나이 늙겠어요?


벤쟈민 버튼은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듯이 더 젊어져야 되지요. 더 젊어져야지 왜 죽음에 더 가까이 갑니까? 안 봐준다는 뜻입니다. 죽이겠다는 거에요. 저주하겠다는 겁니다. 눈치 채야죠. 눈치가 있어야 눈치 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성령 와야 채지만. 눈치 채야 됩니다.


아 구원 안 해주는 하나님이고 나는 거기에 따라서 나는 구원 안 받는 것이 나한테는 합당하니이다. 나한테는 정상입니다. 구원되는 게 이상하고요 지옥 가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내 분수에 맞는 딱 그 조치에요. 합당한 조치라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모세를 구원하시는가? 그것은 쓰시기 위해서. 쓰임받기 위해서 모세가 구원된 겁니다. 쓰임받기 위해서. 여호와가 누구냐를 증거 하기 위해서 바로 왕 앞에 서야 돼요. 바로 왕 앞에. 모세 이름으로 서면 안돼요. 모세 자기가 갖고 있던 지팡이로 서면 안 되고 하나님이 함께 서 있다는 증표로 있는 그 지팡이로 서야 되는 거에요.


그 지팡이는 모세로 하여금 자기를 문둥병 되게 하는 지팡이. 자기가 싸워야 될 애굽으로 하여금 뱀이 되게 하는 지팡이에요. 여기에 보면 출애굽기 4장에 보면 제일 먼저 손을 품에 넣는 건 두 번째고 첫 번째는 뭐냐 하면은 네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물었지요.


그러니까 가로되 지팡이입니다. 그 질문을 누가 했어요? 하나님이 먼저 질문했지요. 네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묻지요. 질문을 하나님이 했다는 말은 이미 모세 지팡이는 더 이상 모세 지팡이가 아니에요. 이미 하나님께 빼앗겨버린 거에요. 질문이 왔다는 것은.


율법은 일종의 질문이에요. 네가 안식일을 지켰느냐? 부모를 공경했느냐? 거짓말했느냐? 이 자체가 질문이거든요. 질문이 들어왔다는 자체가 더 이상 나에게는 내 것이 날라가버렸다는 겁니다. 이제 주님의 질문만 가득 여기 꽂힌 거에요. 화살이 되어서 날라온 거에요. 질문이. 주님의 것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 말이죠. ‘나’라는 인간이. 쓰임받고 있는 거에요.


성도의 특징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라 본인이 원하든지 안 원하든지 간에 사명자에요. 사명자는 탕수육 소스같애. 사명 앞에서 뭐 지금은 잠 잘 시간인데 이런 게 필요 없어요. 지금 여기는 북한이니까 입 다물고 있자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시공간 전체가 주님의 사명으로 다 덮어버립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네가 어디에 있든지” 마태복음 28장 20절 말씀처럼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네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네 안에 존재하는 방식으로만 네가 존재하고 있는 거에요. 그냥 내가 존재하는 것은 무가치하고 아무 의미 없어요. 허무해요. 허무합니다. 요새 나는 비전이 없어. 비전이 없어. 주님이 비전이 없을 경우에는 비전이 없어야 돼요.


그러나 주님에게 꿈이 있고 일이 있다면 본인은 뭐해야 돼요? 주님의 말을 이야기해야죠. 나는 주님 주신 꿈이 있고 주님이 주신 계획이 있어요. 이렇게 이야기해야죠.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조금만 틈만 나면 자기의 변신을 시도해요. 지금보다 더 나은 ‘나’.


하나님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헌금하고 어떻게 봉사하면 지금보다 훨씬 남 보기에 그럴싸해 보이는 신앙인처럼 더 향상된 내가 될 수 있습니까? 더 진화된 더 개선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까? 맨날 자기 변신만 시도하고 있는 거에요.


이미 지팡이가 모세를 쥐고 있는 게 아니고 모세가 지팡이를 쥐고 있는 셈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은 사실은 모세를 겨냥해서 공격하는 일이 아니고 지팡이를 겨냥해서 공격해서 들어오는 거에요. 출애굽기에 17장 한번 봅시다.


출애굽기 17장 8절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할 때 모세가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서가지고 왜 서는가 그때는 몰랐지요. 보니까 사람들이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가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죠.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아말렉이 모세를 공격하는 이유를 이스라엘이 알아야 된다는 이야기에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적은 원수는 뭐냐? 하나님의 적은 뭐냐? 지팡이 없는 민족이 적이 되는 거에요. 지팡이 없는 민족. 중보자의 요소가 들어있지 않은 민족이 하나님의 적이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저주받을 나 말고 내가 저주 안 받겠다고 버티는 그것이 내 속에 들어 있는 마귀의 자식의 모습이에요. 저주 안 받겠다고. 문둥병자는 나와 무관하다고 하는 그게 하나님의 적이 돼요.


모세가 문둥병자인데 모세는 문둥병자에요. 손에 뭐 들고 있습니까? 지팡이 그냥 지팡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팡이 들고 있으니까 모세 문둥병자는 무능해요. 저주 받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할 수 없기 때문에 무엇이 빛이나요? 지팡이가 빛이 난다고요. 지팡이가.


홍해를 가를 때도 사람들은 모세 보고 원망했어요. “모세야 지도자 노릇 똑바로 해라. 우리가 죽을 데가 없어서 단체로 죽일려고 이 광야로 우리를 끌어오느냐” 라고 할 때 모세 입장에서 뭐냐 하면은 “왜 나만 가지고 그래. 왜 나보고 그래 나보고. 나는 무능자인데 왜 나보고 그래.”


모세가 자기 손가락 대가지고 홍해 열었습니까? 아니면 지팡이였어요? 지팡이를 대니까 홍해가 갈라졌잖아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이 홍해 건너가는 이 길은 way 코스는 너희들이 백성들이 갈 길이 아니고 앞장서는 하나님이 가시는 자기 길을 그렇게 열어 제치는 거에요. 자기 길을. 너희는 뒤따라오면 돼. 뒤따라올 때에 하나님의 적, 애굽 군사가 어떻게 작살나는가 홍해에서 작살나는 것 봐라는 거에요.


이 우주의 임금님이 가시는데 홍해의 물이 H2O가 안 열어주고 됩니까? 옆에 H2O H2O 열어드려. 전부다 H2O 화학공식을 가지고 있는 물이 쫘악 열어주는 거에요. 수소 하나에 산소 두 원자 붙어있는 물분자가 쫙 갈라지는 겁니다. 과학자는 이걸 몰라요. 물이 어떤 원소로 되어 있는가 이건 아는데 이걸 알아야 수소 자동차를 만들게 아닙니까. 아는데 왜 수소인지 왜 이게 산소인지 물은 누구 말을 듣는지 그걸 몰라요.


그걸 대구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대구에서는 “뿌리를 모른다 근원을 모른다.” 자식 공부 시켜놓고선 근원도 뿌리도 몰라요. 누가누가 출세하고 변신을 잘하나 그 시합뿐이에요. 다 저주 받은 모습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네가 문둥병 네가 때깔이 좋으냐? 내 문둥병 때깔이 좋으냐? 둘 다 해골바가지인데 무슨 때깔 좋으냐 무슨 비교 대상이 됩니까?


우리가 증거한 것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증거하지 않아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 지팡이밖에 없으니까 십자가가 없으니까 기껏 자랑할 것은 자아의 연속체, 자기 자신이 이렇게 살아왔고 이렇게 잘났고 이렇게 출세했고 이렇게 맨날 생각하는 것이 그것 연속체니까 나는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 속도로 가속도를 붙여가지고 나이 60 넘어서 나 이렇게 살 거야 맨날 이것 허세와 허풍.


떠벌리면서 또 아닌 척 하면서 겸손을 떨기는 아주 못 봐준다니까 또 배운 가락은 있어가지고. 맨날 안중근 책이나 보고 있고. 겸손 떨면 문둥병 아닌 거에요? 문둥병 아닌 게 겸손 떨어보세요. 그걸 가지고 가관이라고 해요. 가관이에요 ‘가관’.


결국 모세가 싸우는 것은 모세가 절대로 싸우지 않습니다. 싸우는 것은 지팡이 대 나무 막대기하고 바로왕하고 싸웁니다. 누가 바로왕 맏이를 죽이는가? 지팡이가 작살내버리죠. 애굽에 있는 모든 장자는 다 죽습니다.


이스라엘을 죽이는 이유가 너희 속에 이스라엘 있다 그것 알리기 위해서. 너희 속에 애굽 사람들만 있는 줄 알았지. 바로 왕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만 애굽 나라의 거주하는 줄 네가 알았지? 이 나라에 네가 모르는 하나님 내 백성이 있어. 내 백성과 너의 백성을 가려내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약속이라는 것을 줬습니다. 유월절 피를 발라서 모세에게 나오게 했지요.


그런데 그 나왔던 이스라엘은 뭘 잊었느냐 하면은 바로 본인이 문둥병자라는 것을 잊어버렸어요. 문둥병자라는 것을. 문둥병자를 아는 자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자’. 민수기 12장에 보면 문둥병에 걸린 여자가 나오지요. 자기가 문둥병자임을 아는 자를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온유함을 아는 자’라는 겁니다.


왜? 저주받은 문둥병자이지만 하나님께서 계속 쓰신다는 게 이게 얼마나 하나님의 온유하심이냐 이렇게 보는 거에요. 여기 문둥병자 여자 이름이 나오는데 여자 이름이 뭐냐 하면은 모세의 누나죠. 그렇죠? 미리암입니까? 미리암 이 사람은 출애굽기에 15장에 보면 1절에 보면 찬양하는 사람이에요.


15장 20절에 보면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하고” 찬양했지요? 그렇죠? 출애굽기 15장 20절 21절 보게 되면 그 찬양했던 사람이 민수기 12장에서는 자기 남동생 결혼 문제에 개입해가지고 그 여자와 결혼하지 말라고 했어요.


모세가 누구하고 결혼할려고 했느냐 하면은 구스 여인하고 결혼할려고 했다 이 말이죠. 구스여인은 그러면 히브리인이겠습니까? 아니겠지요? 지금의 이디오피아 사람입니다. 흑인여자에요. 흑인여자인데 어떻게 이스라엘 됐습니까? 바로 유월절날 어린양의 유월절 피에 같이 유대인 옆집에 있다 같이 합류한 거에요. 이 피 안 바르면 오늘 작살난다. 아?!그래요? 나도 합류하겠습니다. 이렇게 합류한 거죠.


양 찾아서 양 잡고 안에 들어가 있다 이 말이죠. 빈자리 남으니까 옆집사람 토치간에 들어가가지고 바깥에 폭탄 터지기 전에 살아남는 거에요. 유월절 피를 보고 넘어가니까 유월절 양의 숫자의 맞는 숫자, 숫자가 좀 여분이 있으면 이방 사람이든 원하는 사람 있으면 같이 한조가 되어서 그 죽음의 밤을 무사히 넘길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들어온 사람이에요.


그렇다고 다시 집에 가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이 되었으니까 따라가는 거죠. 이미 자기는 죽은 존재니까. 유월절 피를 발랐다는 말은 이미 우리는 산 자가 아니고 한번 죽은 자가 된 거에요. 자아의 연속성, 나의 연속성이 끊어진 겁니다. 십자가 믿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속에 들어온 사람이 돼요. 십자가 속에 들어온 사람은 이미 자아가 끊어진 거에요.


전에는 내가 나를 사용해서 보다 나은 개선된 나를 추구한 그런 인생이라면 이제는 주께서 나를 쓰시는 거에요. 우리를 어떻게 쓰시느냐? 우리를 무능한 자로 보고 저주받은 자로 보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맨날 우리 내부에서 싸우는 것은 뭐냐? 자신의 유능함을 내세울 때마다 주께서는 우리의 예상대로 안 되게 만듭니다. 자신의 유능함.


나의 원인이 되어서 어떤 결과를 도출한다면 이 결과가 되지 않게 하게 하셔요. 항상 우리 예상불가, 예상하지 않는 것을 주시는 거에요. 그럴 때 감사하고 그 다음에 뭡니까? 고마움이 나오는 겁니다. 그럼 실제로 예를 들게 되면 물이 있는데 저는 이 물을 볼 때마다 마시고 있다는 예측을 해요. 그럼 예측대로 됐네요. 주께서 뭐 우리 예측대로 안 되게 해주신다면서.


예측대로 된 게 뭐냐 하면은 내가 물을 들고 마셨다는 이 생각이 나의 죄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함으로써 이 물 마시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알려주는 거에요. 똑같은 어떤 외부적으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감사와 고마움이 일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순간순간을 나를 다시 제로 지점으로 문둥병 지점으로 죽을 지점으로 돌려보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 마시는 것도 고마운 일이 되는 거에요. 물 마신다 해놓고 아! 심장마비. 그럼 심장마비로 죽어야죠. 물론 물을 못 마시는 거죠. 우리의 호흡은 코에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휴지조각으로 코 막아버리면 그 순간 우리는 호흡은 끊어지는 거에요. 내일 불쏘시개로 들어가는 풀을 오늘 키우는 것처럼 우리가 똑같은 신세입니다. 오늘 내가 있다고 해서 내일 있다는 보장은 없어요.


그래서 주일 낮 설교할 때 상당히 어려운 말을 했어요. 참 어려운 말을 했는데 무슨 말이냐 하면은 살아생전에 나의 죽음을 목격하게 하시는 거에요. 나의 마지막 장, 마지막 커튼 이걸 목격하게 살아생전에 이걸 목격하게 하시는 거에요. 어떻게 목격하게 하시는가? 바로 십자가가 딱 와버리면 지금까지는 살아생전이니까 주인공이 누구냐? 주인이 누구야?


내가 살아있다가 되는데 내가 살아있으니까 더 살고 싶어 하는데 여기 주인공이 뭐로 바뀌냐 하면은 주인이 바뀌어 버립니다. 주인이 바뀌면 주님에 의해서 내가 살아있다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용도로 지금 내가 살아있는 거에요. 주님이 살아있다는 걸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했잖아. 아까 마태복음 28장 20절.


세상 끝날까지 예수님이 살아있는지 아니면 내가 살아있는지 맨날 경쟁, 경쟁이 일어나는 거에요. 내가 살아있으면 내 식대로 내가 살고자 하는 옛사람이 나올 것이고 주님이 살아계시면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를 발로서 나 하는 모든 것을 입 다물어 꽉 밟아버리겠지요.


그렇다면 아까 아말렉 같은 민족 히브리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은 모세의 자기 실력 자랑할려고 아말렉이 쳐들어왔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하기 위해서 아말렉이 쳐들어 온 거에요? 하나님이 함께 쳐들어온 거죠. 그걸 어떻게 아느냐? 여호수아는 지금 뭐하고 있습니까? 여호수아 장군은 밑에서 지금 칼질하고 있지요.


그러나 막상 전쟁 이기고 패배는 밑에서 혼자 설치고 있는 여호수아 장군은 아무 의미가 없는 보탬이 없는 거에요. 왜? 위에서 손 내려가면 이스라엘 지고 손 올라가면 이스라엘 이기잖아요.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일부러 모세의 손을 맨날 올리고 있는 게 아니고 어떻게 합니까? 가끔은 내려보는 거에요. 마치 오늘날 우리의 일상처럼.


주님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데 어느날 주님 믿는 나를 믿어버려요. 이거는 손 내려가는 순간이죠. 그래서 어떤 분의 글에 제가 이렇게 했지요. 십자가 밖에 가끔은 나와 봐라 이 말이죠. 가끔은 나와 봐야 십자가 믿는지 십자가 믿는 나를 믿는지가 판단된다고요. 그래도 끊어지지 않는 것은 그 십자가의 관계는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것을 감사해야 되지요. 이게 돈가스 소스니까.


우리는 맨날 믿었다 안 믿었다 하지만 그런데 구애받지 마세요. 축축하게 엿가락처럼 덮고 있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어느 곳이나 어떤 때든지 주님의 은혜는 한결같기 때문에 그걸 새삼스럽게 느끼는 겁니다. 탕수육에서 돼지고기 튀긴 게 A, B가 서로 이야기한다고 칩시다. 탕수육 튀긴 거 그 짧은 것 하나가 말하기를 야! 내가 덮힌 소스가 더 맛있어 하면은 B가 아니야 내가 덮힌 소스가 더 맛있어 하면 둘 다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왜? 동일한 소스를 받듯이 오늘 십자가가 더 은혜로울거야 아니야 내일이 더 은혜로울거야 이게 필요가 없어요. 왜? 언제 어디서나 같은 십자가, 이미 완료된 십자가이기 때문에. 다만 우리가 그걸 우리가 얼마나 내가 문둥병자 무능한 자라는 것을 많이 알게 되면 그걸 많이 느끼고 사랑을 많이 하면 많이 느끼고 갑자기 또 나 잘났다 나오면 그거 다 없어지고.


그렇게 들락날락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돼지고기 튀김 하나의 작은 조각에 불과하고요 평생 덮고 있는 소스는 어떤 순간도 이 순간만 십자가가 아니라 애초부터 덮었구나 하는 것을 한꺼번에 어떤 순간에 한 순간에 알게 되는 거에요.


민수기 12장 다시 들어가서 민수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야기하기를 “모세만큼 온유한 사람이 없다”고 되어 있어요. 이게 민수기 12장 3절에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8절에 보면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려 눈과 같더라.” 하얗게 되었어요. 피부병 걸려가지고.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나병에 걸렸는지라 아론이 이에 모세에게 이르되 슬프도다 내 주여 우리가 어리석은 일을 하여 죄를 지었으나 청하건대 그 벌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그가 살이 반이나 썩어 모태로부터 죽어서 나온 자 같이 되지 않게 하소서.”


아론이 이렇게 할 때 성경에 나오는 것과 사극에 나오는 것과 좀 반대에요. 우리나라 사극에. 신하가 그러니까 내시 같은 신하가 임금에게 잘 보이자 할 때 뭐라고 합니까? “전하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뭐에요? “죽여주옵소서” 하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보게 되면 왜 그런 소리하느냐 하면은 내가 이렇게 먼저 기고 들어갈 테니까 당신도 인간 같으면 봐주세요 이런 뜻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그게 안통해요. 뭐냐 하면 주여 우리가 죄를 지었사오니 살려주시옵소서. 전과 같이 갓난아이같이 하얗게 되게 하옵소서. 피부 좋게 하옵소서. 하나님 앞에서 이런 꼼수가 통하지를 않아요.


“내가 네 자식 키우는게 부끄럽구나, 회초리를 들고 나를 때려라. 이 아버지를 때려라.” 그런 꼼수가 하나님 앞에서는 안통해요. 요새 자식한테도 안 통하지만. 15절에 이에 미리암이 진밖에 7일 동안 갇혔고 이렇게 되어있어요. 자, 모세를 비방했는데 가장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친족, 누나 미리암이 문둥병 들렸다 이 말은 결국은 여기서 모세가 무슨 기능을 하고 있느냐 하면은 중보자적 기능을 하고 있었던 거에요.


그런데 미리암이 모세를 통해서 중보자적 기능을 깜빡했어요. 내 남동생 혼인문제 만큼은 누나가 관여해도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관여하는 것은 좋은데 너무 오바했어요. 구스여인은 안 된다. 흑인여자는 안 된다 이렇게 나온 거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은 무엇과 무엇의 비교냐 하면은 미리암이라는 모세의 가족, 모세의 누나죠. 미리암의 온유함과 하나님의 온유함을 비교하는 이 계기가 된 겁니다. 흑인여자 이방인 여자를 모세 아내로 할 때 이 미리암이 내가 양보하다 양보해도 그것만큼은 양보 못한다고 자기의 온유함의 한계를 드러내겠지요.


네가 하나님의 종인걸 알고 참고 참았는데 이번 혼사에서 그냥 못 넘기겠다. 어디 이방여자 네가 이 나라 지도자에게 보란 듯이 그 우리나라 이스라엘 중에서도 젊고 이쁜 여자가 많잖아. 누가 봐도 야~ 참 모세도 지도자급이지만 그 여자도 지도자급이다라고 할 수 있는 짝이 맞는 그런 후보감 많이 있다 이 말이죠. 그중에서 간택해가지고 아내 얻으면 되잖아. 그게 미리암이 보일 수 있는 온유함의 한계지요.


그러나 미리암은 본인이 문둥병자라는 것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미리암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때는요 문둥병 안 걸립니다. 같은 문둥병자끼리 뭐라고 하겠어요. 그런데 잘못 건드렸어요. 건들지 말아야할 자를 건드렸어요. 모세를 건드리는 건 괜찮은데 모세를 아우르고 있는 그 중보자적 기능, 그 기능을 건드린 거에요.


다시 말해서 같이 계시는 하나님을 건드린 거에요. 중보자 되신 예수님을 건드린 것이나 마찬가지란 말이죠. 교인들이 제일 나쁜 짓이 뭐냐 하면은 교회나 신앙이 교인들이 뭘로 보느냐 하면 이게 장난으로 놀이로 오락으로 보는 거에요. 오락으로. 오락이에요. 교회 다니고 하는 게.


자, 오락이나 놀이 이 공통점이 뭐냐 하면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에요. 꼭 해야되는 게 아니란 말이죠. 절박감이 없어요. 종교 이런 것은 교회 놀이는 절박감이 없어요. 날 알아주면 그냥 히히덕 거리면서 놀아주고 안 그러면 가정의 문제가 절박감이지 교회 문제는 절박하지 않아요.


다시 말해서 자기의 영혼 상태, 자기의 신앙상태 자기 자신의 본모습 그게 그렇게 절박하지 않아요. 왜? 건강하고 잘 먹고 잘 살고 애 공부 잘 하고 아쉬운 게 없거든요. 내가 되고 싶은 그 비전, 내가 지금보다 향상되고 있는 그 모델에 약간은 미흡하지만 견딜만하다는 겁니다.


내 능력으로 내 인간성으로 얼추 견디고 꾹 참고 지나갈만하기 때문에 내가 알아서 내가 인생 내가 알아서 잘 관리하겠습니다. 이런 투로 이런 마음가짐으로 교회 오기 때문에 교회 와서 빌면 복 받으면 좋고 안 받으면 이 정도면 견디고 이런 식이란 말이죠. 그게 무슨 단체입니까? 그건 친목단체지요. 여기처럼. 그냥 친목단체에요. ‘친목단체’.


어제 대구강의에서 상당히 대구강의가 좀 쉬워 보이지만 상당히 어려운 구석들이 많았어요. 어떤 점이 어려우냐 하면은 바로 나와 너가 ‘나’가 있어버리면 나머지는 ‘너’가 되어버리고 그리고 ‘나’ 앞에서는 ‘너’ 뿐이에요. 너 뿐. 왜? ‘나’가 이미 정립되어 있기 때문에. ‘나’ 아닌 것은 ‘너’가 되는 거에요.


그래서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 늘 너와 딜하고 거래하고 탐색하고 흥정하고 하는 겁니다. 누굴 지키기 위해서? 나를 지키기 위해서거든요. 그런데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5장 15절에 보면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되어 있지요.


너는 어떤 경우냐 하면은 나를 먼저 지킬게. 1번 나를 지킬 수 있을 경우에만 보이는 게 ‘너’가 돼요. 그래서 ‘너’가 들어올 때 누구 허락 맡아야 되느냐 하면은 ‘나’의 허락을 맡아야 돼요. 그럼 뭐가 어려우냐? 문제는 ‘나’가 이렇게 구축이 되면 하나님이 누가 되어버리느냐 하면은 하나님이 ‘너’가 되어버려요. 하나님이. 예수님이 ‘너’가 된다고요.


예수님이고 하나님이고 나에게 말할 때 들어오고 자시고 이 모든건 누구 허락 맡아야 돼요? 나의 허락을 맡아야 돼요. 인간들은. 그래서 믿어줘요. 믿어주는 거에요. 어떤 경우에? 내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내가 살아있다는 조건하에 당신을 당신 예수를 하나님을 내가 여전히 나답게 살려주는 조건하에 그 조건에 입각해서 좋은 것으로 내 인생을 내 능력으로 받아주기로 내가 결심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걸 사람들은 뭐냐? 그걸 ‘믿습니다’라고 하지요. 믿습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믿습니다. 뭘 지켜줬기 때문에? 내가 정작 내가 지키고 싶은 나를 지켜줬다는 그에 대한 대가를 찬양을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만약에요 우리 한목사님 집에 내가 들어간다 칩시다. 딱 집에 가니까 목사님이 여기서 우리 인사합시다. 왜요? 집안 청소가 안 되어있다는 거에요. 그럼 청소 안 되어있어도 들어갈랍니다. 그러면 신발장에서 인사합시다. 아 진짜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들어가면 안방은 안 되고 화장실은 됩니다. 자꾸 그렇게 멈칫하고 머뭇거리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계산하는 거에요.


주일날도 했지요. 계산한다. 뭐를 계산합니까? 아직도 내 것이 남아있는가 자꾸 뒤돌아보는 거에요. 내 것이. 당신 교회 간다면 나도 교회 가줄게. 예수 믿어줄게. 그럼 내가 어디까지 믿어야 돼? 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은 아직도 무엇에 미련이 있습니까? 그동안 나로 인하여 살았던 그 ‘나’를 못 놓겠다 이 말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그게 바로 종교에요 ‘종교’. 종교는 취미생활이에요. 절박하지 않습니다. 걸쳐놓는 거에요. 이게 바로 한국교회거든요 이게.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이런 인간을 구원해요? 구원 안합니다 이거. 완전히 쳐들어와요. 쳐들어와서 내 것이 없네 없다는 정도가 아니고 에게 나는 문둥병이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여 내게 손대지 마소서” 하잖아요. 타인이 왔을 때. 손대지 마소서. 그럼 하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내가 너를 받아주는 것을 고마운줄 영광인줄 알아라 이것들아 이런다고요. 하나님이 문둥병인줄 알아야 그 문둥병을 거두어주시는 그 은혜를 하나님과 공감할게 아니겠습니까.


자기가 멀쩡한데 자기가 멀쩡하기 때문에 만약에 믿게 되면 하나님 내가 멀쩡하기 때문에 내가 쓸모 있기 때문에 거둬준 게 되잖아요. 따라서 그거는 취미생활이에요. 그거는 자기 자랑거리죠. 내가 하나님마저 예수님마저 믿어준다는 자랑거리를 늘어놓는 거에요. 자기자랑을 늘어놓는 거에요. 자기자랑을.


몽땅 다 접수할 때 우리를 문둥병으로 만드는 이유는 그래야 중보자 기능이 우리 안에 살아 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죄인이 되어야 돼요. 그냥 죄인이 아니고 율법에 의해서 죄인된 자의 전형적인 마지막 모습은 문둥병. 모세 같은 누나인데 모세 비방했다고 졸지에 뭐 됐다? 문둥병. 너무 과하다 심하다 욕할 필요 없어요.


왜? 모세가 누구와 함께 있는 자를 모세의 누나를 문둥병 걸리게 함으로서 모세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그 다루심이 더 세밀한 부분까지 드러났잖아요. 아 모세 누나라도 건드리면 문둥병 될 정도로 모세는 지금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구나. 그렇다면 그 모세를 비방하면 어! 우리도 문둥병 되잖아. 그렇다면 이 모습이 하나님 앞에 우리는 저주받은 자, 이것이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우리에게 실상을 보이고자 하는 그 기능이 제대로 가동되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게.


그래서 십자가를 바로 보라 이 말이죠. 십자가 보면 예수님이 형편없이 달려 죽잖아요. 형편없이. 모든 사람으로 다 배척받죠. 외면당하지요. 이사야 53장에 보면 예수님은 귀히 여기지 않잖아요. 전부다 눈 돌리게 만들지요. 그 가는 길을. 어느 누구도 예수님처럼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그게 예수님처럼 되기 싫어서 우리는 나란 인간은 주님처럼 문둥병처럼 되기 싫다 하는 이게 진짜 찐찐찐찐 그게 진짜 내 모습이라고 내가 발각당하는 이 모습이 우리가 구원된 모습입니다. 이 모습이. 그래서 이 모습은 나의 소원이 아니고 누구 소원이냐? 주님의 소원이 내 속에 뜻이 이루어진 거에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문둥병 만나는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자신의 중보자 기능을 발휘한 것처럼 똑같이 저희들에게도 율법으로 십자가 복음으로 찾아오셔서 우리가 자랑할 것은 문둥병자, 죄인이라는 그 십자가만 자랑할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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