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선과 악의 비례a

아빠와 함께 2021. 3. 2. 06:37

강남-누가복음 5장 23절 (선과 악의 비례) 210215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5장 17절부터 봅니다.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 대목이죠. 등장인물을 한번 정리해 봅시다.


예수님 계시고 그 맞은편에 바리새인과 율법사 있고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이 중풍병자와 그 일행 등장합니다. 이게 전부라고 생각되지요.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 뭐를 첨가해야 되느냐 하면은 병 고치는 주의 능력, 병 고치는 주의 능력을 여기에다가 첨가를 해주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눈에 보이고 바리새인도 눈에 보이고 중풍병자도 눈에 보이는데 이 중에서 병 고치는 주의 능력만은 이것은 인간들 선에서 보이지 않는 외부적 능력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외부적 능력에서 뭐가 도출되느냐 하면은 죄사함의 능력으로 이어졌지요.


분명히 병 고치는 능력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라고 되어있지요. 능력이 주와 함께 있지요. 주님과 함께 있는데, 주님과 함께 있는데 이 외부적 능력인데 병 고치는 능력이 뭐로 변했다고요? 죄사함의 능력으로 변했지요.


그러면 이 예수님께는 이 현장에서 예수님의 자기 자신의 변신, 예수님의 자신의 변신, 변화를 시도하셨다 이렇게 보시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의 변신을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오셔야 될 그 이유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내가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 하는 그것을 드러내는 마당놀이 또는 한마당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필요조건 요소가 무엇이 있느냐 하면은 마법사와 율법사가 있지요. 일종의 이것은 ‘재판하는 자’ 또는 ‘판단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렇게 보면 재판하는 자, 판단하는 자, 바리새인 모두 다 이걸 한 묶음해서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은 이걸 이렇게 설명하면 오늘 중풍병자 병 고치는 내용이 확실하게 다 드러나요. 그래서 좀 시작이 중요한 거에요. 이 시작한 게 중요하다고요.


이게 뭐냐 하면은 있음 또는 있다 또는 무언가를 갖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 뭔가 갖고 있다고 자부하는 거에요. 그런데 여기 병 고치는 주의 능력같은 것은 예수님은 뭐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주님의 능력의 하나님의 능력이죠. 주님의 능력이 첨가될 때 예수님은 자기의 이 땅에 오신 자신의 일을 시도가 가능해요. 변신이 가능해요.


그러면 예수님 자신의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것은 없음이 됩니다. 없음이 되고 또 없음에 해당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은 이 중풍병자 그 일행, 그 중풍병자를 그 일행의 대표로 보고 중풍병자가 없음에 해당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은 지금 자기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은 중풍병이 들어 있지요? 중풍병이 들어 있는데 이 중풍병을 본인이 갖고 싶어 합니까? 내보내고 싶어 하는 거에요? 병들은 것을. 극구 내보내고 싶어 하지요? 나한테 없어져야 좋겠다 내가 이런 것 원치 않아요. 원치 않습니다라는 게 이게 들어왔잖아요. 적극적으로 중풍병 있음을 없이하고 싶은 거에요. 내보내고 싶은 거에요. 중풍병자는 이걸 병고침으로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게 되면 지금 중풍병자가 그 일행과 여기에 바리새인과 율법사의 차이가 뭐냐 하면은 이 사람들은 판단하고 재판하니까 이것은 자기의 이성이라든지 율법이라는 지식이라든지 이것은 본인이 내보내고 싶어 합니까? 확보하고 싶어 해요? 확보하고 싶죠. 확보를 해야 제대로 된 재판과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눈에 보이는 예수님이나 누구든 눈에 띄는 모든 인간에 대해서 그들은 항상 판단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어요. 판단할 때 어떻게 판단하느냐 하면 내가 현재 갖고 있는 지식과 경험과 노련미와 인생 경륜과 경험 이런 것을 통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만반의 자세가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만반의 자세가 되어있는 이들에게 예수님을 판단해야 되는데 여기 몇 절에 나오느냐 하면은 21절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님 실컷 보고 있으면서 갑자기 누구냐? 도대체 저 사람의 정체가 뭐냐? 쉽게 말해서 너 뭐야? 왜 시건방져? 이런 뜻이죠. 참담이란 정도는 시건방 정도가 아니고 신을 모독하는 겁니다. 하나님 자체를 모독하는 거에요.


하나님의 말씀의 율법사들이니까 서기관들이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재판하는 사람들은 어떤 기준이 있어요. 재판이기 때문에 재판은 옳고 그름을 가려내잖아요. 그럼 그르다의 쪽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은 죄사함은 인간이 못한다. 어떤 인간도 죄사함을 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모독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면 저주받게 되어있죠. 십계명에 보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경계를 넘어서서 했기 때문에 뭔가 있음,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의 우리들이 해야 될 사명같은 것 그리고 책무같은 게 뭐냐 하면은 인간이 해야 될 거리에 머무는 것과 그걸 넘어서는 것과 그걸 판단해서 하나님의 영역까지 침범하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정죄하는 것, 판단하는 일을 그들은 사명감을 갖고 지켜보고 있는 중에 있어요.


그걸 지금 이야기한 이것을 재판하는 사람은 한마디로 뭐라고 했습니까? 뭐가 있는 거에요. 뭐가 있어요. 그들은 절대로 이러한 자신의 해야 될 일을 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걸 굳게 꽉 잡고 있어요. 굳게 잡고 있다고요. 그러면 이번에는 중풍병자 봅시다. 중풍병자가 그 일행이 왔을 때에 이 중풍병자 일행은 지금 바리새인과 율법사 이쪽 입장에서 보면 이 사람은 뭐냐 하면은 병이 있는 사람이에요.


병이 있는 사람이죠. 병이 있는 사람. 있음, 병이 있죠. 병이 있는 사람이라고요. 이 중풍병 들린 것을 지금 자랑스러워합니까? 후딱 내보내고 싶지요. 후딱. 몸이 아파서도 그렇지만 나는 병을 갖고 있으면서 나는 하나님 앞에 정말 잘 살고 있고 의로 살고 있습니다라고 주장 할 자신감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 중풍병자 일행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느냐 하면은 이 재판하고 있음의 세계, 현재 재판받고 판단하는 이 바리새인의 율법의 이 권세 안에 이들이 놓여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놓여있다. 자기가 싫어하는 병이 들어온 거에요. 그래서 이 중풍병자 일행의 그 한계가 뭐냐 하면은 병 낫고 싶어요 또는 병을 내보내고 싶어요. 이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강렬한지요. 엄청나게 강렬했어요. 강렬해가지고 여기에 예수님이 병 고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사해 준다는 소문을 들었습니까? 그거는 있을 수 없지요. 현재 이 중풍병은 어디 소속이에요? 지금 바리새인 율법사가 가르친 그 체제 안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딴 생각 못해요. 체제 바깥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바리새인 유대 사회에서는 모든 체제는 이들이 꽉 잡고 있어요. 왜? 재판하는 거니까. 최종적인 안목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미 그들은 율법이 있어요. 율법이 있다는 말은 판단할 수 있는 율법을 그들이 갖고 있고 그 왜 갖고 있겠어요? 판단할려고 재판할려고 있는 거에요. 재판장에서 중풍병자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졸지에 중풍병자가 나아야 이 동네에서 이 바리새인 동네에서 제대로 정상인 취급받는 그런 처지에 놓여있다는 것을 본인들이 압니다.


그래서 소원은 딱 한가지에요. 이 중풍병을 어떻게 내보낼 것인가? 소위 병 나을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소문이 예수님이 병 고친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 앞에 왔는데 여기 장애가 일어났어요. 순서표가 너무 번호가 뒷번호라 들어갈 수가 없어요. 했는데 길을 얻지 못한지라.


길을 얻지 못했을 때에 남의 집의 지붕에 올라가서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 내려놓았습니다. 새치기한 거에요. 싸가지 없지요. 상당히 과격하지요. 과격합니다. 아무리 아파도 지킬 건 지켜야 되는데 굉장히 과격해요. 과격하다는 이 말은 결국은 뭐냐 하면은 상당히 이질적이다. 이질적이다 할 수 있어요.


평소에 보지 못한 평소에 이 사람이 지붕 뚫는 것이 주특기가 된 건 아니에요. 어떤 의미에서는 일탈하고 있는 거에요. 상식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상식이 과격하고 이질적이고 상식에 벗어나는 행동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먼저 평을 해줬어요. 어떤 평을 해줬느냐 하면은 “저의 믿음을 보시고.” 믿음을 보시고.


자, 여기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쉬운 겁니다.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게 아니라 의외로 쉬워요. 믿음을 보신다는 것은 어떤 사람의 행위의 방향이 어디와 연결되어 있는가? 어디와 어디에 꽂혀 있는가? 방향이. 최종 방향이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 그걸 주님께서는 믿음으로 본거에요.


자, 여기서 이제 어려운거 해 봅시다. 평을 누가 했어요? 믿음 있다는 평을 누가 했습니까? 이들이 했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안했지요. 예수님이 했지요. 믿음이 있다고 예수님이 평했지요. 이 믿음 있다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점을 먼저 생각해야 돼요.


이 두 개의 차이를 한번 보세요. 내가 말한다와 보통 인간에서 인간들이 내가 말한다. 말이 나에게 말을 시킨다. 인간들은 주로 말을 할 때에 어느 쪽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인간들은 말하는 주체를 본인으로 설정하고 말을 할 때 내가 말한다고 되어 있지요. ‘내가 말한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서 인간들이 말하는 그 모든 언어 내용은 자기가 지어낸 것이 아니고 이미 자기를 둘러싼 타자 또는 타인들이 공감하고 타인들이 유통하고 있는 소통되고 있는 그 사회의 통하는 말 중에 자기가 골라잡은 거죠. 어떤 말을 할 때는 자기가 세종대왕도 아닌 게 자기가 말을 지어냈습니까? 세종대왕도 말을 지어낸 게 아니고 글을 지어냈지.


하여튼 말을 누가 지어냅니까? 말을 본인이 지어낸 것이 아니고 필요한 적절한 그 용어를 뽑아서 자기 의사를 담아서 남한테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러면 자기가 하는 내가 하는 그 말에 뭐가 들었느냐 하면은 남이 뭐라 하더라. ‘남이 뭐라 하더라’가 들어 있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이점을 이러한 점을 제가 언급하는 이유가 평소에 우리가 남한테 이야기할 때 내가 이야기한다고 편하게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내가 갖고 있는 감정을 지금 남들이 사는 말 중에서 단어 용어 중에서 내 감정과 어떤 것이 적절한가를 내가 임의로 골라내는 거에요.


골라내서 나는 네가 미워라고 할 때 상대방이 상대방도 내가 쓰는 단어가 무슨 뜻인가를 미리 다 알게 되어서 저 사람이 나한테 미워라고 하는 말이 벌써 아 안 좋은 거구나 하는 것을 감을 잡아야 말한 사람이 보람이 있잖아요.


그래서 이미 이 세상은 뭐냐 하면은 그 내 감정조차도 내가 너를 미워하는 그것도 남들이 나를 미워했기 때문에 그 원인이 너한테 있기 때문에 미워해 그렇게 하지요. 그래서 이 세상은 말과 말이 내 감정을 부추기고요. 의도적으로 없는 감정을 유발시켜내요. 이 세상은 말들이 나의 정체성을 계속해서 형성시키고 요동치게 만들고 밤잠 못 자게 만들고 또는 기뻐서 신나게 만들고.


이 세상은 고요한 세상이 아니고 끊임없이 으쌰으쌰 하는 그런 세상 속에 우리가 이 세상을 표현하는 하나의 일개의 표현자로 이 땅에 여기 있는 거에요. 자리 잡고 있다 이 말이죠. 이 사회가 내가 지금 하는 말을 상식적으로 용납이 된다는 전제 하에 지금 말을 하고 있는 거에요.


우쭈쭈쭈쭈. 이게 무슨 말인데? 이건 용납이 안돼요. 이건. 우쭈쭈쭈는 무슨 말인가 아프리카 말이에요 뭐에요? 쭈쭈바 달라는 뜻이에요? 이 세상 언어가 말하지 내가 말하는 게 아니에요. 언어가 하는 이야기를 듣지 네가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에요. 너는 언어에 놀아나고 있는 거에요. 우리 모두는. 우리의 사소한 감정 작은 감정 하나도. 말에 놀아나는 겁니다.


그 말의 세계가 뭐냐? ‘타자의 세계’. 이미 내가 있기 전에 이미 존재하는 세계. 그리고 그 존재하는 세계가 나를 키워냈어. 지금까지. 나를 그 세계에 부합되도록 합당하도록 키워낸 겁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이유가 우리의 두뇌에 보면 그런 게 있어요.


개한테 음식줄 때 마다 종소리를 딸랑딸랑 치는 실험이 있어요. 파블로프의 실험인가. 그 심리의 실험에 의하면 개의 청각 있잖아요. 그 다음에 음식을 준다 후각 있잖아요. 후각과 청각이 서로 다른 감각이지만 개의 그 두뇌 안에서는 같이 association, 연합되어 있어요. 그 다음부터는 냄새나는 음식 치우고 종소리만 들어도 입에서 침이 나는 겁니다.


그걸 조건반사 실험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두뇌적으로 두뇌에서 association, 연합되어 있는 모든 두뇌세포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에요. 다발로 있다고요 다발로. 다발로 있어가지고 서로 영향을 주게 되어있어가지고 후각과 청각이 그런 기관에서는 두 개가 아니고 하나의 감각으로 서로 소통하게 되어있도록 훈련이 되어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모든 개념이나 의미나 용어 선정 이것은 인간 두뇌 안에 언어가 하나가 아니고 association, 전부다 연합되어있는 겁니다 전부 다. 말의 글자뿐만 아니고 말한 사람의 톤이라든지. 같은 말인데 기분 나쁘다 이상하게. 톤이라든지 음성이라든지 이런 미묘한 차이들이 하나의 대뇌피질 속에서 다발 속에서 판단을 하게 되어있어요.


스스로 판단을 해서 지금까지는 이것은 나보고 칭찬하는 일이라고 일단 저장을 해놔요. 해마라는 곳에 저장한다든지 저장하는 데는 여러 가지 있습니다. 저장해 놓고 그 다음에 비슷한 어떤 말을 할 때는 전에 저장했던 그 기억과 대조를 해가지고 이거이거 전에 보니까 기분 나쁜데 그때는 화를 내는 거에요. 자동적으로.


누가 시키는냐? 누가 시키는 사람 없어요. 인간은 기계이기 때문에. 인간의 세포는 기계입니다. 분자적 기계거든요. 기계의 특징은 주인이 없어요. 우리는 알지요. 주인이 마귀라는 것을 알지요. 그러나 그들에게는 과학에서는 관찰자가 한계에요. 내가 보고 내가 분류한 게 한계이기 때문에 본인 말고는 판단자가 없어요. 이제 판단자 나왔지요. 여기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사두개인 또는 율법사들 이들의 한계 속에서 이 싸가지 없는 이 행동이 그들의 믿음이라는 이야기할 때 그들에게 있는 대뇌피질 속에 있는 그 기억 속에는 옳고 그른 지혜가 판단할 수 있는 사전 자료가 하나도 구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도서관에 이게 어째서 믿음인지 이게 몰라요.


그런데 주님께서 믿음으로 봤다는 것은 뭘로 봤습니까? 그 행위 또는 언어, 말, 행위의 방향을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뭘 봤다고 합니까? 이게 누구보고 이야기하느냐? 나의 존재 예수님 존재를 향하여 연결되도록 했던 행위라고 누가 판단해버려요? 예수님이 판단해버리는 거에요. 그게 믿음이에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이 중풍병자의 모든 행위는 그 사적인 어떤 행위와 상관없이 이게 누구의 행위가 되느냐 하면은 장차 앞으로 예수님이 하실 예수님의 행위가 되어버립니다. 중풍병자의 행위가. 이게 성경에서 놀라운 사실이에요. 이게 어느 정도 놀라우냐 하면은 여러분들 제가 말할 테니까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인지를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는 네가 없으면 내가 없다. 약간 놀랍지요? 그 정도로 나를 좋아했었어? 이렇게 되지요. 이것도 약간 놀랍지요? 더 세게 놀래볼까요? 네가 나다. 이거는 미친, 그게 말이 돼? 키하고 몸무게도 차이 나고 모든 게 다 다른데 어떻게 네가 나고 내가 너가 돼?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요 우리를 구원하러 온 게 아니고 내가 예수님 되기 위해서 온 거에요. 나는 날라가 버리고. 내가 예수라고 하면 안 되고 그건 이상한 사람이고. 주님이 와서 ‘나’라는 것을 없애는 이유가 내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없애는 거에요.


값을 주고 사는 이유가 평소에 내가 내 몸이 내 거라고 우기기 때문에 그게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어디서 온 능력이냐 하면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율법사 저 영역에서 속하는 거에요. 저 영역 어떤 식이냐 하면은 처음에 이 세계를 뭐라고 했습니까? 있음이죠 있음. 있음의 세계죠.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있음의 세계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진작에 없애야 될 세계로 보는 거에요. 없애야 될 세계를 예수님이 투입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합당한 새로운 있음의 세계를 만드는 거에요. 그중에 하나 누가 걸렸느냐 하면은 중풍병자가 걸린 겁니다. 중풍병자가 자기한테 중풍병을 내보내겠다는 말은 전에 중풍병 걸리지 않은 그 상태에 있음을 그냥 나의 있음으로 계속 유지하고 싶다는 뜻이에요 이게.


아까 놀라는 이야기했지요. 다시 물어봅니다. 네가 없으면 내가 없다. 우리는 그냥 나 있음을 근거로 한다면 아 나를 되게 좋아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지요. 그런데 주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내가 없다면 내가 굳이 너한테 올 이유가 없다. 이렇게 보면 이건 내가 좋아할 일이 아니고 주님께서 나를 아예 없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에요. 없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너무 어처구니 없어서 놀라지도 않는다. 예수님이 오시기를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나는 이 예수는 너 보기에 남이다. 그럼 우리는 남이지만 좋게 지내겠습니다. 우리는 흔쾌히 그 관계를 수긍하지요. 그러나 주님이 이제부터 너를 ‘나’라고 지칭하겠다. 이거는 뭐 우리가 감당이 안돼요. 그럼 저는 어쩌란 말입니까?


그러면 그동안 내가 ‘나’라고 여긴 것은 뭐가 돼요? 허구에요? 허상이에요? 이렇게 되겠지요. 그리스 나라 사환들에게 옛날에 어떻게 했느냐 왕이 누구한테 중요한 메시지를 보내려면 그 사환의 이마에다가 메시지를 써버린답니다. 물론 거울은 안주고. 거울에 못 비치고 만들고. 이마에 메시지를 써가지고 자기가 꼭 전해야 할 사람에게 보내버리면 그 메시지는 언제쯤 공개되고 노출됩니까? 메시지가. 언제 나옵니까? 언제 나와요?


자기 전령이죠 이마에 메시지를 써서 보내버리면 그 메시지는 본인이 알아요? 몰라요? 안보이잖아요. 그럼 누가 봐요? 메시지 받을 사람이 해석이 가능하지요. 지금 주님은 주님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거에요. 모든 성경은 누구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너희를 경유해서 예수님 자신이 자기가 성취할 내용이에요.


성취한다는 말은 그 메시지는 누구를 겨냥한다? 예수님 자신을 겨냥해서 보낸 메시지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중풍병자나 주님의 백성은 허구는 아니에요. 허구는 아니고 사환이고 종이죠. 그러나 일반사람들은 자기의 고집이 있고 자기의 자아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잘해줄 생각은 하지만 잘해주더라도 나는 나고 예수님은 나는 이미 나이기 때문에 나 외에는 들어올 사람 없고 그럼 예수님은 뭐냐? 내가 그냥 좋아하고 믿는 타인, 남이 된다 이 말이죠.


그렇게 되면 나는 뭐냐? 계속 있음이 되어버리죠. 있음인데 내가 만약에 중풍병에 걸렸다. 그럼 누구한테 부탁해요? 예수님한테 부탁해가지고 뭘 요청합니까? 어쨌든 간에 이 중풍병을 내보내가지고 지붕을 뚫던 무슨 수를 쓰던 낼 테니까 제발 병 고친다는 분이여 이 병을 내 있음에는 무관한 엉뚱한 게 들어왔으니까 내쫓아달라고 요청하겠지요.


만약에 이 중풍병이 하나님 앞에 저주받아서 죄 지어서 있는 거라면 병 쫓아내는 그걸로 인하여 내 죄도 없고 나는 착한 사람이다 이러고 싶어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 사람은 뭐냐? 병 고쳐진 사람이 돼요. ‘병 고쳐진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은 다시 자기 고유의 것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예수님 오실 이유 없지요.


예수님의 메시지를 이마에 붙일 이유가 없다 이 말이죠. 그 사람은.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나는 나고 예수님에게 좋게 보이면 나 천당 보내주겠지 이런 식이란 말이죠. 오늘날 한국교회의 교인들처럼. “내가 너다” 하는 이야기는 그것은 여러분도 처음 들어보시죠? 지금 할 이야기가 굉장히 많아요 여기서.


외형은 내용물이 밀어낸 밖의 형체다. 밖의 형체물이 외형물이 밖에서 밀어낸 거에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안에 있는 것이 밀어내서 바깥에 굳어진 게 외형물이다 이 말이죠. 인간은 왜 있느냐? 우리 성도는 왜 있습니까? 목자가 양을 찾아옵니까? 양이 목자를 찾아갑니까? 요한복음 10장에서 어떻게 되어있어요? 목자는 양을 알지요.


그럼 양이 구원받을 양 될려면 그 안에 뭐 들어야 됩니까? 자꾸 묻는 것이 여러분에게 실례되기 때문에 그냥 내가 나한테 묻는다고 생각하세요. 여러분들 답변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양을 구원할 때 나는 목자다 나한테 와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면 목자가 하는 무슨 행위가 있어요.


그 행위가 뭐냐 하면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해서 다시 버림이라.” 여기에 보면 14절에 보면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뭐를 버려요. 목숨을 버리죠. 그러면 그 내용물이죠. 목숨을 버리는 내용물이죠.


그 사건이 유발한 바깥의 결과물이 뭐냐? 이게 성도가 되는 거에요. 지금 중풍병하고 예수님은 그냥 스쳐 지나가면 영 못 만날 사람이에요. 그런데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찾아오게 된 계기가 중풍병을 걸렸기 때문이에요. 서로 모르는 사이거든요. 인간의 입장에서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사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중풍병이 들었고 예수님이 잘 고친다는 소문 듣고 이거는 아주 객기를 부려서 지붕 뚫고 들어왔다 이 말이죠. 예수님 알고 온 거에요? 자기 병 고치러 온 거에요? 자기 병 고치러 온 거에요. 지금 중풍병자가 잘한 짓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요 지금. 남의 멀쩡한 지붕 다 뜯어놨지요. 새치기했지요.


그것보다 더 나쁜 것은 중풍병의 특징은 경직된 정신구조. 경직된 정신구조를 갖고 있다는 게 이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죄인이면 죽어가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왜 중풍병을 낫겠다고 친구들까지 그렇게 부추겨 가지고 사람들 많으니까 안 되니까 지붕 뚫어라. 이게 다 누구 좋아라고? 자기 병 고치고 살기 위해서 하는 짓이잖아요.


이 사고방식 이 정신구조가 굉장히 경직된 거에요. 그래서 중풍병자의 특징은 이쪽 세계, 바리새인과 서기관 세계에 그 세계의 인물이란 것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은 ‘내가 나를 안 지키면 누가 나를 지켜주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재판한다고 하지만 개인도 인간도 본인이 재판, 늘 재판해요.


내가 중풍병 갖고 있으면 그건 나한테 내 자아에 전혀 어울리지 않아. 이거 쫓아내야 돼. 상당히 경직되거든요. 인간 내부는 늘 계엄령입니다. 인간 내부는. 늘 바짝 긴장 완전히 미얀마에요. 우리 내부는. 철저하게 자기 방어 체제가 완고하고 견고하게 항상 어떤 경우라도 나의 의로움이 손상되지 않기 위해서 바짝 긴장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말 하나 주의하고 행동 하나 주의하는 거에요.


주의해야 될 행동을 과하게 하는 것은 비록 내가 과격하게 행동하더라도 더 얻을 것이 있다고 기대를 하기 때문에 과격한 행동을 한 겁니다. 주님 믿고 싶어서 온 게 아니에요. 주님 제 믿음 어때요 이 거 할려고 온 게 아니고 자기 병을 고치러 왔다고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뭐라고 합니까? 네가 믿음이 있다고 이야기해버린 거에요.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란 또는 어떤 행동이란, 말이란 어디와 연결된다고 했지요? 믿음이란? 행동이란? 묻는 실례를 자제하겠습니다. 그 방향이 예수님 나로 겨냥한다고 했을 경우에는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는 거에요. 그러나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겨냥한 것은 예수님을 죄 사함을 얻고자 믿은 게 아니고 자기 살고자 예수님 이용할려고 덤벼든 거에요. 자기 살고자.


여전히 예수님의 없음을 이해 못하고 자신의 기존 인간세계의 있음에 그냥 눌려있는 것이 바로 중풍병자와 그 일행들이에요. 그런데 그걸 일방적으로 주께서 네가 하는 것은 나의 나 됨을 내가 해야 될 일을 겨냥하기 위해서 한 행동이라고 일방적으로 거두어들이신 거에요. 네가 중풍병 안 걸렸으면 언제 우리가 만났겠는가 이렇게 하면서 거두어들인 겁니다.


거두어들이면 결국은 예수님의 없음의 자리에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은 중풍병 들린 환자가 들어오게 되지요. 그러면 이것은 없는 예수님 자리에 새로운 예수님의 있음이 되어버려요. 양이 되어버려요. 목자를 목자 되게 만드는 양이 되는 겁니다. 믿음이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중풍병자는 자신의 자존심이고 뭐고 상황들 전부 다 과격하게 헤치고 그저 병 낫겠다고 모든 것을 쏟아부었잖아요. 그렇지요?


그 모습이 예수님 자신의 모습이라면 결국은 예수님은 뭐냐 하면은 이 땅에서 자기 양에게 죄 사함을 주기 위해서 이러한 중풍병자가 보여준 그 과격한 행동보다 더 과격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고 그 일부를 중풍병자가 보여 줬으니까 중풍병자 너하고 나하고 통하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그게 믿음이 아니고 뭐냐 이 말입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예수님 일방적인 해석이에요. 중풍병자는 “뭐야? 행동 내가 해놓고 해석은 주님이 왜 해석하지?”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도에게 주어질 것은 성도의 있음은 뭐로 바뀌어야 됩니까? ‘나’ 있음은 ‘나’ 없음으로 바뀌고 있음은 없음으로 바뀌고 성도의 주어질 것은 뭐냐 하면은 성도의 개인적인 여망이나 희망이 아니고 어떤 자기 개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뭐가 주어지냐 하면은 주님의 일방적인 해석이 주어져야 이게 성도의 내용물이 된다 이 말입니다.


주님의 해석,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주님은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그게 성도의 유일한 내용물이여야 돼요. 원형질이에요 ‘원형질’. 세포핵이 되야 돼요. 요새 생물공부 좀 한다고 단어가 좀 그쪽 단어가. 이걸 주일 낮 설교 때 이야기했고 대구 공부하면서 이야기했고 이제 지금까지 하면 세 번 한다고 이제 지루하게 느낄까 봐 말을 아끼겠습니다만은 이게 주님의 기억이에요. ‘주님의 기억’.


나의 기억이 아니고. 나의 기억은 이 세상 사람과 닮아가지고 어쨌든 간에 근사한 내 모습을 갖고 싶지만 그 근사한 내 모습은 어디서 주느냐 하면은 이 있음의 세계에서 이야기한 언어의 세계에서 온 거에요. 언어의 세계. 언어의 세계 그걸 다른 말로 뭐냐? 나의 세계가 아니고 타인이 나에게 욕망으로 강요하는 세계, 그게 언어의 세계에요.


그들의 비위 맞춰줄 때 나는 ‘나’ 다움이 된다 이 말이죠. 내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는 내가 지어낸 언어가 아니라 남들이 쓰고 있는 언어를 사용한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 오셔가지고 없음의 세계에서 오신 예수님이 있음의 내용을 다 뜯어내어버린 겁니다. “예수님 병고치고 싶습니다. 지붕 뜯습니다.” “아니야 너는 죄사함을 받아야 돼.” “아이고 주님 그런 건 애초에 생각도 안했습니다.” “네가 생각한걸 내가 왜 줘야 되느냐? 그럼 내가 너한테 온 이유가 없지 않느냐.”


이 땅에 양은 없어요. 목자가 와서 양 자리에 가서 양으로서의 자기 역할을 다 할 때 비로소 그 양의 기능을 했던 예수님의 그 내용이 들어오면 그게 양이 되는 거에요. 목자가 목자, 양 다 되는 거에요. 왜? 양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양과 목자는 어떤 경우에 발생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죽었을 때 양쪽에 다 발생되는 게 목자와 양이 되는 거에요. 십자가 죽을 때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목자가 되고 십자가 죽으심의 혜택을 입은 것이 새삼스럽게 등장하는 것이 양이다 이 말이죠. 그 현장에. 없는 양이 있는 양으로 새로 생긴 거죠.


이러한 점을 우리가 어디서 확실한 것을 알 수 있느냐 하면은 예수님 십자가 지시고 난 뒤에 사도 바울이 했잖아요. 고쳐달라고 기도했지요. 사탄의 가시 있다고. 그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뭐였습니까? 됐네~~됐어 그만. 네 병 나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병이 있어 줘야 주님의 은혜됨이 너를 통해서 주께서 하실 내용물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정말 성도라면 내가 했습니다 할 수 있는데 자꾸 나를 집어넣는 그 버릇이 그게 병적이다. 내 있음의 세계에서 들었던 아직도 잠재되어 있는 쓰레기 같은 흔적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만약에 여러분들 주님께서 차에 태워서 운전할려고 하시는데 운전해가지고 나 있는 곳에 오라 하면 예 가겠습니다 하고 브레이크를 밟는데 브레이크가 안 되네. 엑셀을 밟았는데 엑셀이 먹혔네. 운전대가 돌아가지고 않아. 뭐 어쩌라고. 운전해서 오라 해놓고 운전대도 안 돌아가고 브레이크도 안 밟히고 엑셀도 그것도 안 되고 뭐 어쩌라고.


주여 못합니다. 주여 못합니다. 차가 있을 뿐이지 나는 이 차가 있음에 대해서 나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입니다. 마치 없음과 같은 존재입니다 라고 고백할 때 네가 그래야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 차를 몰고 가지 않기 때문에 온전하게 주께서 온전하게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이끌 수가 있어요. 날마다 우리를 중풍병자로 만들어서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애시당초 없어야 마땅한 존재로 바꾸어주는 겁니다.


지금 중풍병자 보세요. 중풍병자가 자기는 여기에 있는데 뭐가 잘못된 게 들어왔죠? 무슨 병이 들어왔어요? 중풍병이 들어왔지요. 그럼 온전한 있음이 될려면 뭐만 나으면 된다? 중풍병만 주님의 뜻으로 나가버리면 다시 온전한 ‘나’로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다가 중풍병이란 말도 안 꺼내고 뭘 집어넣습니까? 죄사함을 집어넣었지요. 그러면 중풍병에서 낫겠다 하는 병에서 낫겠다 하는 이 시도가 뭐가 된단 말입니까? 이게 바로 죄가 되는 거에요 이게. 비록 죄가 되지만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일방적입니다. 일방적인 해석으로 항상 해석은 주님의 일방적인 해석이에요.


일방적인 해석으로 그깟 병 낫겠다고 나를 겨냥한 자체를 뭐로 본다?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주어진 믿음의 하나의 모델로 보겠다는 거에요. 나를 바라볼 때에 아무것도 못해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나를 바라볼 때. 나를 바라볼 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럴 때 이렇게 생각하세요. 주여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할 때 주님께서 죄인 주제에 말이 많구나. 죄인이 되었으면 아무것도 안한 정도가 아니고 마땅히 저주받아 어디가야 돼요? 지옥 가야지요.


지옥 갈 마음 준비 안하고 네가 뭘 하겠다고. 병이 나가나? 뭐 병 고쳐주세요? 너는 너를 정녕 모르는구나. 내가 너 될게. 나는 죄가 없는데도 죄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너 될게. 그래서 주님은 우리 안에 죄에 들어와버립니다. 합류를 해버렸어요.


합류를 함으로써 그저 서로 인사하고 믿습니다 하는 이런 사이가 아니고 아예 나 있음을 없는 존재, 주님의 자신의 방식으로 없는 존재를 만들어버려요. 없는 존재로 만들어놓고 예수님 자신의 하는 일을 이 없는 나에게 만들어버리면 거기서 붕어빵 찍어내듯이 찍어내는 게 뭐냐 하면은 ‘성도’라는 겁니다.


주님의 종, 그리스도의 사환. 뭔가 이마에 뭐 쓰였는데 이거는 주님의 하신 공로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렇게 봐도 안 보이죠. 이마에 하나님의 복음의 메시지가 적혀있는 거에요. 십자가의 문신이 그어져있는 그러면 그 내용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기뻐하는 사람으로 전환시키는 일을 그런 식으로 주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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