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선과 악의 비례b

아빠와 함께 2021. 3. 2. 06:39

강남-누가복음 5장 23절 (선과 악의 비례) 210215b-이근호 목사



인간이 인간을 판단한다는 것, 내가 나를 판단한다는 것은 전제가 내가 있다는 뜻이에요. ‘내가 여기 있다’. 중풍병자가 자기 병 고치려는 것도 현재 있는 내가 나 관리 안하면 누가 관리하겠느냐. 굉장히 너무나 인간적이죠. 너무나 자연스럽고 상식에 부합되지요.


지금이라도 만약에 우리 귀에 예수님 병 고친다고 소문나게 되면 우리는 내 죄 사할려고 하는게 아니고 내 병 고치러 가는 거에요. 내 죄를 사할 거 같으면 그것은 성령 받고 난 뒤의 현상이에요. 왜냐하면은 정말 죄를 안다면 심판받는 것만 남아있지 죄 사해달라 지옥 안가게 해달라 그런 소리는 정말 자기가 죄인이란 것을 아는 사람 입에서는 나올 수가 없어요.


그러면 죄 사함 받는다는 것은 뭐냐? 중풍병자가 요청했습니까? 요청 안했지요. 그럼 뭐냐? 일방적인 주님의 자기 해석이에요. 중풍병자가 바리새인 앞에서 당하는 것, 서기관 앞에서 당하는 그 당함을 이제는 중풍병자 일이 아니고 누구 일이다? 예수님 자신이 지금 겪어야 될 뛰어들어야 될 자기 일이 된 거에요. 그게. 중풍병자.


다만 중풍병자는 자기가 병 들었다고 생각했지 죄인이라는 생각 안하잖아요. 주님 보시기에 모든 인류가 환자에요. 내가 병든 자를 위해 왔다는 다 구원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병든 자 중에서 스스로 병 고칠 수 없는 자 중에서 내가 그 사람 된다 하는 조건하에 그 사람은 구원받는 거에요. 예수님의 내용이 들어있을 때 그 사람은 외형적으로 성도가 된다 이 말입니다. 손 들고 구원해달라고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목사님 복음 아시잖아요. 제가 질문할 테니까 제가 복음 모른다 치고 복음 아시니까 제가 질문 하나 던져볼게요. 내가 복음 모르는 목사인데 그냥 시비 걸라고 하는 거에요. 목소리도 변조해야 돼요. 목사님 말라기에 십일조 하라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것만 답변하세요.


그러면 목사님이 말라기에 십일조 있지요?! 십일조 있습니다. 그럼 십일조 있으니까 십일조 해야지요? 왜 딴소리가 많습니까? 제가 성경에 없는 소리했습니까? 십일조 있으면 십일조 하라 하면 해라 창고에 넘치도록 채워준다 하면 십일조 해야지요.


그런데 십일조의 의미가 뭐냐? 해석이 뭐냐? 왜 그게 필요합니까? 하라면 하면 되지. 목사님 답변해보세요. 이렇게 나오면 뭐라고 답변하겠어요. 성경에 나오잖아요. 십일조 하라고요. 하나님이 도와주나 안 도와주나 시험해보라고 했잖아요.


자, 여러분 같으면 꽤나 복음 안다는데 답변해보세요. 거기에 뭐라고 답변해야 되겠습니까? 오늘 첫째시간 강의 듣고 난 뒤에. 강의 백날 들으면 뭐하나? 응용이 하나도 안 되는데. 적용이 하나도 안 되는데. 이래서 수학책에 연습문제 필요합니다.


십일조 하라. 누구보고 이야기했느냐. 예수님 자신보고 이야기한 거에요. 누가? 예수님 자신이. 아까 나왔던 이야기에요. 그리스도 사환 이야기 아닙니까. 성경말씀은 누가 누구보고 명령하는 거에요? 예수님 본인이 예수님 본인 보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님과 함께 있던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언약한 그것을 예수님 본인 너가 실천하라고 하신 말씀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십일조 다 이루었잖아요. 십자가에서. 사람들은 그걸 누가 한다고 봤어요? 성경말씀을 내가 지켜야 된다고 생각한 거에요. 내가. 신약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말씀은 성령 받은 성도들한테 이야기한 거에요.


그러면 성도 안에 누가 들어 있습니까? 성도 안에 내용물이 누구에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잖아요. 그럼 성도한테 이야기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예수님 자신의 성과를 남기는 결과물로 그렇게 생각하고 그 말씀을 준거에요. 고함 안 질러도 여러분 다 알아듣지요?


이게 어려운 일입니까? 낯선 이야기에요? 낯설지요? 병 고치는 사람에게 만약 제가 흰 가운 입고 떡 앉아있는데 선생님 제가 속이 쓰린데 어떻게 병 낫겠습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띵~~할 거에요. 그러면 환자가 내가 전적으로 내 죄도 관리 못하는 내 죄도 내가 처리할 수 없는 전적인 남이 와야 죄 씻어줘야 처리하는 하나님의 자비가 없이는 영 희망이 없고 감흥이 없는 그런 저주받을 인간입니까? 그래.


결국 그 이야기잖아요. 네 죄 사함을 받아라. 병 고치는 것도 병 고쳐놓고 지옥 간다 이 이야기와 똑같은 거거든요. 근원적인 거에요. 근원적인 것 같으면 네가 너 해석 말고 네가 너를 재판하는 것 말고 내가 너에게 해석을 유의미적 해석을 내리는 그것이 너로 하여금 새 사함을 받는 새로운 사람이 되도록 그 다음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창조하시는 일.


이 일을 누가 하느냐? 오직 아버지께서만 하신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만 하시는 일을 아들이 하시는 거에요. 이 땅에 창조하는 거에요. 창조라는 것은 반드시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창조가 되는 겁니다. 신나지 않습니까? 나는 내가 성경보고 내가 지켜서 천당 가야 되는지 알고 했는데 지킬만한 말씀은 하나도 없고 내가 믿을 수 있는 말도 하나도 없고 맨날 믿고 지킨다 해봐야 이건 뭐냐?


나의 과거에 내 기억 속에 있는 있음을 내 잘남을 잘남으로 참기름 치듯이 맨날 나의 존재할 이유와 내 정당함과 의로움을 우리는 매일같이 짜내고 있어요. 매일같이 짜내고 있다고요. 오늘 늦게 온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 늘 이렇게 자기 정당함과 변명거리를 짜내고 있는 거에요. 우리가 매일 하는 일은 그것밖에 없어요.


코로나 걸린 사람이 저는 코로나 걸려도 마땅합니다 이런 사람이 없어요. 아이고 저 나보다 못난 나쁜 사람도 있는데 왜 나한테 재수 없이. 맨날 재수 없대. 맨날 재수 없대. 이미 자기 있음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믿음이라는 것도 예수님 나을 줄 믿습니다! 믿음이 아니라 그건 자기 해석이에요. 그건 자기 열성이죠.


이정도로 열성 보였는데 주께서는 다 보는 눈 있으면 열성 있는 나부터 먼저 고치겠지 해서 지붕 뚫은 거에요. 이거는 자기가 자기 재판하는 겁니다. 자기 잘남을 그런 식으로 지금 과시하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그게 믿음이라는 말은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주께서 사도 바울에 나오는 십자가 이후에 나오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유일한 믿음을 이미 예수님 십자가 지기 이전부터 그 자기 백성과 예수님 사이에 관계성을 그렇게 놓은 거에요. 다리를 놓은 거에요.


네가 하는 모든 것은 너를 위함이 아니고 누굴 위함이다? 그 겨냥이? 나의 해야 될 이 땅에 왔어야 될 십자가를 위해서 너는 필요한 존재로서 했을 뿐이다 그 관계를 믿음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면 십자가 성령을 받은 우리는 오늘날도 우리도 중풍병자와 똑같은 입장이에요.


내가 어떤 공부를 한다 밥을 먹는다 조차도 먹든지 마시던지 무엇을 위하여? 주의 복음을 위해서 이것은 주님의 기억 속에 있는 스케줄 속에 있는 일을 그냥 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럼 결과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결과적으로서는 뭐냐?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전부 다 뭐다? 욕망 덩어리에요. ‘욕망 덩어리’.


자, 욕망덩어리에서 조금 더 진도 나가 봅시다. 23절 봅시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예수께서 그걸 보고 바리새인 보는데서 그렇게 하니까 발칵 했지요.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사하겠느냐. 누가 능히 사하겠느냐 할 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뭐라고 하십니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어느 것이 쉽겠느냐.


쉽다의 반대말은 어렵다죠. 어렵다. 그렇죠? 쉽다라는 말이 나올려면 뭐가 나와야 되느냐 하면은 어떤 노림수를 가지고 노림수를 띈 행동을 하는 게 전제가 되겠지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하는 행동이죠. 의도를 가진 행동이죠. 이 행동을 할 때 쉽게 하고 싶은 거에요. 어렵게 하고 싶지 않은 거죠.


예수님께서 그 바리새인과 그리고 서기관과 그리고 중풍병자와 거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 이야기하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야기하는데 어느 것이 쉬우냐? 죄 사하는 것과 어느 것이 쉬우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바리새인들 말이 하나님이 죄를 사할 수 있다 권한이 있다 이 자체가 너희들 보기에 순순한 믿음으로 보이지만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은 이걸 노림수로 보는 거에요.


의도를 보고 나의 있음을 더욱더 있음 하게 가져가게 한 하나의 욕망으로 보는 겁니다. 하나의 욕망으로. 왜? 이 바리새인들은 인간들은 모든 게 선과 악 사이에 재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선과 악 사이를 분별하는 그러한 체제 속에 그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인간의 왜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아까 했잖아요. 모든 인간은 환자라고. 모든 인간은 환자입니다. 죄 사함이 중풍병자의 소원이었다? 아니였다? 중풍병자의 욕망 가운데서는 죄 사함이라는 욕망은 없었어요. 왜냐하면 중풍병자는 알고 있어요. 죄 사해달라고 할 수 없다는 것. 왜? 죄 사함은 누구의 몫이다? 하나님 하시는 몫이기 때문에. 이것은 엄두도 내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병만 나았어도 대충 건질 건 건졌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죄 사함은 하나님께 있고 병 고치겠다는 그 의도가 이게 선악체제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오르고 있는데 100m를 올랐어요. 100m 올랐는데 도착했습니다. 그 다음에 100m 올라가 놓고 뭐가 궁금하냐 하면은 지금 자기가 헉헉 거리면서 친히 노동했지요. 일 했잖아요. 인간의 행위를 했잖아요.


선악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노동과 일과 행위. 중풍병 같으면 지붕 뚫는 것. 어떤 행위에 있어서 어떤 대가가 선한 결과로 이어지기를 요청할 때 이 사람은 뭔가 선악체제 속에 있어요. 포도원비유 알지요. 아침 9시부터 해가지고 오후 5시에 온 사람들. 그때 누가 화를 냈습니까? 아침에 일찍 온 사람이 화를 냈지요. 우리 상식으로서는 화낼 만 하잖아요. 한 시간 일하고 10만원 받고 자기는 9시간 일하고 10만원 받고 이거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요.


주님께서 천국을 설명하면서 무엇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천국을 설명할 수밖에 없어요? 이 땅에서. 선악체계, 인간의 행함이나 노동 이 사이에서 인간이 노리고 있는 게 있어요. 이 정도 노력했으면 나는 악한 쪽이 아니고 선한 결과를 내가 했다 하는 체제가 선악체제입니다. 그럼 한번 물어봅시다. 인간이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은 평소에 어떤 공식에 따라서 살아가는지 그걸 제가 한번 설명할게요. 선악체계에 있는 인간이 어떤 공식으로 살아가는지.


선악체계 아니고 복음 알아도 우리는 평생토록 이렇게 살아가요. 그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100m 올라갔다. 그럼 뭐가 궁금 하느냐 하면은 100m 걸어서 올라가는데 이 높이는 얼마쯤 올라갔을까? 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이 각도가 30도 각도라면 이 높이가 50m가 되는 겁니다.


이게 왜냐하면 S자가 이렇게 된다고요. 직각상태에 있어서 빗변분의 30도 각도라면 sine 30도는 2분의 1이다. 갑자기 수학시간 됐네. 2분의 1이다 따라서 밑의 빗변의 100m 올라갔으면 높이는 얼마 나옵니까? 딱 50 나와요. 딱 50m 올라간 거에요. 왜 이렇게 이게 딱 나오느냐 하면은요 이게 비율이기 때문에. ‘비율’.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이거에요.


인간들은 선악체계 안에서 악마가 심어놓은 선악체계는 뭐냐 하면은 선과 악 사이에 비율로 자기의 욕망을 조절하고 있는 식으로 살아간다 그걸 말씀드리고 싶은 거에요. 지붕 뚫는 열성은 나에게 내 소원을 쉽게 달성한다고 생각하겠지요. 쉽게.


그러니까 지금 일어나서 걸어라 하는 그것은 자기가 그만큼 성과를 지붕 뚫는 행위를 했기 때문에 일어나서 걸어가는 것도 그만한 내 쪽에서 보탬이 되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빠른 속도로 중풍병이 나을 수 있다는 인식이 이 체제, 중풍병에서 인간체제 모두에게 이미 그게 확 지배적으로 퍼져있다고 보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하는 겁니다.


사실은 병 고치는 것 불가능하죠.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들어간 정성이 있잖아요. 지붕 뚫는 것. 뭔가 노력하게 되면 가상히 여겨서 봐주는 거 있잖아요. 인간은 인간이 할 도리하고 하나님은 하나님 도리 하면 된다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둘 다를 다 가져옵니다. 일어나서 걸어가는 게 쉬우냐? 그냥 그것만 물으면 되는데 일어나서 걸어가는 게 쉬우냐? 어렵지만 그래도 노력한 만큼 있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을 하고 싶지요.


그렇다면 범주를 한번 정해보자. 일어나서 병 나아서 걸어가는 것과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는 죄 사함과 어느 것이 쉬우냐? 답변해보라. 그렇게 할 때 일부러 주님께서 범주의 오류를 범해버려요. 하나님이 하는 일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고 우리는 손대면 안 되고 인간이 할 도리는 열심히 해야 된다. 이렇게 되야 되는데 주님께서 이 범주를 섞어버렸어요. 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왔기 때문에.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데 인간은 뭐로 오해합니까? 자꾸 인간의 일로 자꾸 오해하는 거에요. 주님 저 중풍병 낫게 해 달라. 중풍병자가 그렇게 요청했지 주님이여 죄 사함 해달라 이렇게 요청했겠습니까?


왜 중풍병자는 자기 죄 용서해 달라고 오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범주에 의하면요 어려운 정도가 아니에요 이거는. 이것은 있을 수도 없는 거에요 이거는. 있을 수도 없는 거에요. 지금 주님께서 병자한테 환자한테 한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을 준겁니다. 지금 오늘날 우리한테 해준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을 한 거에요.


내가 뭘 요구한다는 것은요 내가 어떤 요구를 하고 기대를 하고 욕망을 한다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한계 내에서 뿜어낼 수 있는 나의 내용물이에요. 그러나 정작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를 완전히 개무시한 거에요. 우리를 완전히. ‘나’라는 오류 범주, ‘나’라는 범주를 박살 찢어버린 거에요. 거기서 유명한 사자성어 나오지요. ‘영구 없다’.


내가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만들어버려요. 내가 있으나마나. 주님, 주님 이거 하는 거 어렵겠지요. 이 따위 소리하는 나를 없애버리는 거에요. 내가 예상도 못한걸 주시는 겁니다. 죄 사함이. 그게 죄 사함이에요. 만약에 우리가 죄 사함을 얻겠다는 것은 나의 욕망이에요. 죄 사함을 원해서 주는 죄 사함은 없어요. 그것은 나의 있음의 범주 안에서 주님이 놀아나는 것 밖에 안돼요. 그건 우상입니다.


삼각함수 그래프를 그리라고 할 때는 1을 반점으로 해서 원을 그려버립니다. 어떤 모든 지점은 전부 다 1이 돼요. 길이가 1이 돼요. 1이 된다고요. 그러면 sine이라고 하는 것은 삼각형에 세변. 빗변, 높이, 밑변 이 세가지 직각 삼각형에 있어서의 이 비율을 구해요. ‘비율’. 비율입니다. 절대값 아닙니다. 비율이에요. 비율이니까 인간은 항상 절대값을 찾는다 하지만 그건 아니에요.


구원받는 게 나한테 욕망적으로 나한테 원하고 낫고 내가 병 낫는 것이 내가 선하다는 욕망인거에요. 따라서 그 비율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내가 열심히 헉헉 거리면서 달려가야 되는 겁니다. 내가 달려간 그 양만큼 그만한 성과가 비율적으로 주어진다고 보는 거에요. 이게 sine이거든요. cosine은 뭐냐? 빗변에다가 밑변을 보탠 거에요. cosine.


탄젠트가 있는데 탄젠트 이게 재미있어요. 탄젠트는 뭐냐 하면은 밑에다가 밑변분의 높이가 되는 겁니다. 밑변분의 높이가 되니까 이게 자기가 인간이 비율로 따져서 내가 노력한 만큼 어떤 성과를 얻겠다는 것은 이것은 sine이나 cosine이 되어 버려요. cosine, sine 되는 겁니다. 그런데 터무니없이 올라간 것도 없고 밑에서 올라가지도 않아. 나는 출세하고 싶다. 이재용 같은 삼성그룹 되고 싶다.


바라볼 때 욕망의 그래프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무한대로 시작해요. 무한대. 무한대로 가요. 무한대로 이어져요. 무한대로 간다고요. 이게 1이라는 한계점을 가지고 내가 노력한 그 한계 내에서 나도 양심이 있으니까 노력한 만큼 어떤 성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수능 할 때 기도제목이 뭡니까? ‘하나님이여 아는 것만 나오게 하옵소서’. 이게 뭐냐 하면은 공부 안했으면 틀려도 좋은데 공부한 것은 다 기억나게 하옵소서.


되게 자기가 선한 존재라고 자부하지요. 내가 선한 존재니까 선한 존재는 뭘 받아야 마땅하다? 상을 받아야 돼요. 내가 만약에 농땡이라면 벌을 받아도 마땅하지만 농땡이라는 것을 아는 이상 상으로 어떻게? 회개하니까 반성하니까 좀 주옵소서 이런 식이다. 모든 것이 나하기 나름에 내 미래가 결정되는 거에요.


내가 한다는 것은 선을 행하면 뭘 받고? 선을 행할 때 상을 받는다는 것은 상에 대한 욕망 때문에 내가 내 행동을 내가 일방적으로 재단해서 판단해서 선하다고 내가 그렇게 일방적으로 내 해석을 나에게 가미해버리는 거에요. 지붕을 뚫어서라도 성의를 보인다면 주님께서 병 고치는 당사자께서 얼마나 나를 이뻐하겠느냐? 당장 걷는 것까지는 기대 안하지만 약간 호전되어서 간다면 그것도 내 노력에 헛되지 않는다. 100m 올라가는 것 헛되지 않다 이런 식이에요.


왜? 모든 것은 이 세상 선과 악의 비율 구조니까. 선과 악의 비율 구조에요. 이거 못 고칩니다. 욕망의 구조에요. 욕망의 구조. 선악 욕망을 상 받고 악한 욕망은 벌 받는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은 노력한 만큼 대가 주는 것은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원칙과 우리의 원칙이 공통점이라고 본거에요.


쉽게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아니고 이미 알고 있다. 선한만큼 상 받고 악한 놈은 벌 받는다. 알고 있다는 거에요. 이게 우리의 예상입니다. 있음의 예상입니다. 그 있음을 주께서 없애버립니다. 중풍병자를 죄 사해주는 게 아니고 아예 중풍병자를 없애버리고 거기에다가 죄 용서받지 못할 자에게 죄를 사해주는 예수님의 자기 기능을 중풍병자에다가 담아버리는 거에요.


아까 그리스도 사환 이야기 있잖아요. 그걸 여러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걸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중풍병자가 죄 사함 받았으니까 기분 좋다고 집에 가겠지요. 기분 좋다고 집에 가서 소고기 사먹겠지. 그런게 아니고 중풍병자는 이질적인 것이 자기 속에 박혀버린 거죠.


네게 속하지 않은 것이 내게 있다는 것. 이게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나’가 된 거에요. 나는 죽고 내 안에서 십자가가 산다는 이게 애시 당초 내가 유치원 다닐 때 소망이 아니에요. 이것은 내가 원했던 게 아니에요. 이건 나의 기억도 아니고 주님의 기억이고 나의 추억이 주님의 추억이에요.


여러분들이 늦은 겨울이나 봄 되면 어릴 때 시골 철로길에 보면 그 딱딱하고 차가운 금속성 차가운 그 물질 사이사이에 파릇파릇 쑥 같은 것 피지요. 쑥갓이라던지 봄나물. 얼마나 낭만적입니까? 어릴 때 보면 세상에 그 딱딱한 뗏목 냄새 있잖아요. 그 냄새 가운데서도 생명은 살아있다. 쑥갓. 그래서 내가 나중에 크면 철도에 아무도 안 뜯은 쑥갓 뜯어서 먹어야지. 쑥갓 해 먹어야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여자들은. 얼마나 그게 순박하고 아름다운 시절입니까.


그런데 그 아는 지식이 뭔지. 그 아름다운 소박한 꿈마저 앗아가요. 왜냐하면 그 쑥갓에 중금속이 그렇게 많데요. 아는게 병이라. 아름다운 소녀 때 꿈 다 날라 가버리고 중금속. 크롬이 어떠니 암 발생물질 이런 거 연구한다고요. 우리가 결국 그렇게 자연을 보고 아름답다할 때는 그 순간 누구를 잊어버려요? 자연에 비해서 아무것도 아닌 나를 잊어버리잖아요. 그게 얼마나 행복한 순간이었었습니까?


그러나 중금속 생각하고 몸에 우리한테 해로운 것 멀리하고 좋은 것만 찾는 이것 자체가 결국 가면 갈수록 무엇에 굳어집니까? 나를 더욱더 굳어지게 하는 게 이게 얼마나 자기가 자기를 재단하고 판단하고 재판하는 그러한 흉한 모습이에요. 분명히 아는 게 행복해야 할 텐데 아는 게 나를 더욱더 잊어버리게 하는 게 아니고 나를 더욱 더 붙잡는 그런 무거운 쇳덩이를 만드는 그런 일이 되어버렸어요. 내가 안다는 게.


옛날처럼 옛날에 남녀들은 20대에 뭣 모르고 결혼했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결혼했어요. 그저 숟가락만 하나 있어도 그냥 붙어있으면 이게 어떤 방인지 불 땐 방인지 그런 거 관계하지 않고 붙어있으면 이미 그걸로 결혼은 시작된 거에요.


그런데 지금은 집 사줘야 되지 집도 전세할 데도 없지 뭐 또 조건해야 되지. 시아버지는 결혼부터 할 때부터 시아버지는 입 다물고 아무소리 하지 말아야 돼요. 괜히 시아버지 입 벌리면 고기하고 깻잎하고 이혼한다고 해요. 우리 이혼했어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괜히 시아버지 때문에 삐져가지고 시아버지 때문에 이혼하는 수가 있어요.


조건이 그렇게 많아요 조건이. 너무 깔끔 떨어도 안되고 너무 어지럽혀도 안되고 개 두 마리는 기본으로 키워야 되고 아이고. 제가 한 예를 들 테니까 예수님의 이질성이 이게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아까 제가 놀라운 이야기했지요? 뭐 했습니까? ‘너 없이 나 없다’ 그것도 놀라운 것이지만 ‘네가 나다’ 라는 것은 더 놀라운 사실이죠. 그게 왜 놀라운 사실인지를 제가 어디에서 예를 들은 것 같은데 다시 한번 예를 들어볼게요.


사극을 한다. 사극. 예를 들면 천인왕후 사극을 한다. 사극을 할 때 거기 철종이 나오고 철종 부인이 나오잖아요. 중전마마. 대왕대비마마 나오고 간신배 나와요. 그런데 이 출연하는 사람들이 전부다 마스크를 쓰고 출연했다면 보는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마스크를 쓰고 출연했다면? 이게 만약 휴대폰을 들고 나온다면 코미디에요. 그건 우리 이해돼요.


사극을 빙자해서 완전히 퓨젼 만들었구나 하겠는데 그게 아니고 마스크를 쓰고 촬영을 임해가지고 철종이라는 사람이 여봐라 거기 누구 있느냐 하고 마스크 닫는다면 그걸 여러분 현실감이 더 날까요? 현실감이 더 떨어질까요? 보세요. 지금의 촬영하는 기사나 감독이나 배우들이나 코로나가 중요하잖아요.


그러면 대사할 때 침 튀기면 안 되니까 마스크를 쓰는 것이 계산적으로 실제적으로 진짜 현실감 있지요? 그런데 만약에 마스크를 써버리면 극중에 뭐가 떨어집니까? 그 극중에서 그 극 자체 안에 고유의 현실감이 다 떨어져 버리잖아요. 그렇죠? 마스크 쓰고 사극하는 사람 없지요. 옥의 티처럼 뭔가 나온 경우는 있어요. 옥의 티처럼. 여봐라 앞으로 전진 공격하라 하는데 막 시계 차고 있고. 그건 감독이 소홀해가지고 시계 찬 거 모르고 촬영하는 그런 건 있지만.


현실이라는 것 우리가 보는 현실과 밖에 있는 현실이 완전 다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완전히 다른데 주님께서 완전히 통합했다고 보세요.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이에요. 우리는 상식대로 살아갑니다. 코로나면 마스크 쓰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만약에 주님이 그냥 하늘에 계시는 게 아니고 현재 있다면 코로나19의 그 창궐함은 결국 누구의 일이에요? 누가 벌린 일입니까? 보이지 않는 주님이 벌린 일 맞지요? 벌린 일 맞지요?


그러면 그 코로나의 걸린 사람은 불교신자만 걸립니까? 믿음 없는 사람만 걸립니까? 아니지요? 믿음 있다는 사람들도 진짜 성령 받은 사람들도 걸릴 수가 있지요. 성령 받은 사람이 걸린 거 나 아직 못 봤지만. 교회 다니는 사람이 많이 걸렸지만 성령 받은 사람이 걸린 사람은 모르겠어요. 성령 받은 사람이 걸렸다 칩시다.


그러면 그 일이 결국은 오늘 강의에 의하면 누가 걸린 게 돼요? 주님 자신이 자신에게 병 걸리게 한 일이 되지요. 그 일이 오늘 중풍병 이야기다 이 말입니다. 그 이야기가. 이게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인지요 이게. 그러니까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화낼 만하다니까요 이게. 우리가 예수님 알고 예수님은 그럴 일 없다 이렇게 쉽게 가지 마세요.


인간은 상식이다가 아니라 인간은 욕망의 경사로로 올라가고 있어요. 경사로. 어떤 사람은 올라가는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농땡이 부리다가 출세하기만 기다리는 이런 탄젠트같은 인간 있고 보통 그런 인간도 있지만 대부분 사람은 뭐냐? 코사인이나 사인 곡선 그리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어느 정도 욕망 올라가면 아이고 욕망 올라가면 안돼. 주의해야 돼.


그런데 탄젠트는 뭡니까? 무한대로 욕망이 무한대로. 집에서 할 짓이 없으니까 이거나 무한대로. 무한대로 하는데 그 무한대 중에 하나가 욕망의 경사로 중 하나가 뭐냐 하면은 자기의 성화론이에요. 나는 지금 어디까지 왔나? 천로역정 보면 계단 나오지요? 천로역정. 나오지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자 이 말입니다. 바닥에서 신앙생활 한 5년 했습니다. 부릉부릉 시동 걸어서 올라갑니다. 10년 했습니다. 20년 했습니다. 30년 했습니다. 40년 했습니다. 그러면 지금 여기에 매달려있지요. 처음에 바닥에 있을 때는요 쉽게 바닥에 떨어져도 대단한 충격이 아니에요. 두 달만에 한 번씩 갔다가 여섯 달만에 갔다가 가는데 꼬박꼬박 다녔는데 여기 코로나 걸렸다. 그러면 삐졌다. 그러면 어디로 갑니까?


이 지점 가서 뒤를 한번 돌아보세요. 아주 현기증 날정도로 높은 자리라니까 높은 자리. 이게 성화로 가는 사람은 이게 겁나는 거에요. 올라온 공로가 있잖아요. 아까 100m 이야기 한 번 더 할까요? 100m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자기는 완만하지만 이미 높이는 몇 미터 올라갔다? 사인30도 올라갔으면 이미 50m는 올라온 거에요. 여기서 떨어지나 빗면에서 떨어지나 높이에서 떨어지나 50m에서 떨어지나 떨어지는 겁니다. 참을 수가 없지요. 지금 여기서.


그러면 여기서 참을 수 없으면 뭐라고 욕 합니까. why me. 주여 왜 하필이면 접니까? 왜 이런 소리가 왜 나오는 거에요? 왜 하필이면 접니까 이런 소리 왜 하는 거에요. 지금 떨어질려고 하니까 바닥까지 가려고 하니까 너무 무서운 거에요 지금. 지금까지 올라온 공로가 어딘데. 이게 평신도 같으면 괜찮아 그런데 이게 만약에 목사다. 목사인데 바닥 떨어져 보세요. 이거 사인 한번 그려볼까 몇 미터인지? 이렇게 떨어져도 마찬가지거든요.


이것 보세요. 이게 얼마나 가면 갈수록 성화하면 성화할수록 예수님이 하는 세상 모든 조치를 뭐로 봅니까? 나의 적으로 보는 거에요. 그럼 누가 적이 된다? 예수님이 적이 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 믿는 사람의 의해서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돌아가신 이유를 알겠지요. 선악구조, 율법을 지키는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그들은 이미 그 당시 유대계층이 일곱 계층이었어요.


그럼 제일 밑의 계층이 뭐냐 하면은 바닥이 세리와 창기입니다. 강도입니다. 그들은 뭐냐 하면은 최고가 사두개인, 그 밑이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들. 오늘 말씀대로 하면 교법사들. 법을 가르치는 사람들. 이만큼 올라가 있기 때문에 주님 보시기에 바닥이 있는 인간이지만 자기는 그렇게 하지 않고 뭐를 자청합니까?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나는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이만큼 했다는 거에요.


이게 오늘날 제가 교인들에게만 하는 게 아니고 오늘날 모든 사람보고 하는 거에요. 모든 사람보고. 자기의 과거를 알잖아요. 이만큼 본다는 게. 지금까지 파출소 한 번 안가고 경찰소 부름 한번 안 받은 게 그게 얼마나 조심스럽고 자기 절제와 자제를 총 동원했던 소중한 결과가 뭐냐? 이 정도까지 남한테 칭송받는 존경받는 그런 사람이 된 거에요.


그런 식으로 그런 사람이 되어가지고 또 교회 와서 성경 펴고 예배드리고 찬송가 부르고 앉아 있다 이 말이죠. 이게 중풍병 이야기가 그 현장에 단순히 중풍병 환자만 있는 게 아니고 누가 있다고 했습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교법사 있다 했지요.


그러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한테 잘 배울 생각하지 말고 출발점을 어디서 해야 됩니까? 소위 잘났다고 여기는 자기 의를 짜내는 일에 모든 일을 몰두하는 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우리는 뭐로 봐야 돼요? 우리 자신으로 봐야죠. 왜? 주님께서 그 현장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그 중풍병자 그 바리새인 전부다 우리가 그쪽에 서 있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 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아까 중풍병자가 뭐라고 했습니까? 뭐라고 합니까?


20절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누가 누구 보고 이야기한 거에요. 주님이 자기가 한 성과에 결과물 보고 이야기한 거에요. 목자가 양보고 이야기한 거라니까요. 목자가 양 될 때 앞에 연결된 통로가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나는 너를 위해서 네 자리에서 죽었다. 죄인의 자리에서 죽었어요. 이 자리가 내 자리인줄 아시죠? 아니에요.


주님이 들어와서 내가 받을 저주를 대신 받은 그 자리에 우리가 그 살던 자리가 주님의 자리가 되도록 하는 게 이게 얼마나 이질적이냐 이게 놀라운 이야기란 말이죠 이게. 대구강의할 때 초반에 이야기했습니다. 로마서 4장 2절 “아브라함이 행위로 할 거 같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자기 행위로 할 것 같으면 있으려니와” 이게 무슨 말이에요?


아브라함이 의롭게 되는 데는 무엇이 의도적으로 주께서 배제했다? 아브라함에게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제해버린 거에요. 그러면 아브라함 바깥에 뭐가 있느냐? 없는 아기가 생긴 거죠. 없는 아기가 있는 아브라함을 대신 차고 들어오는 거에요. 아브라함의 인생의 내용을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그건 마치 예수님께서 오셔서 죽었다가 살아난 그것이 우리와 무관한 일이 아니에요. 우리를 새롭게 우리를 해석할려는 주님의 토대고 근거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 있다면 내 행동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를 봐야지요. 죽었다가 부활했잖아요. 그게 우리의 삶 아닙니까. 우리는 바리새인으로 죽고 우리는 서기관으로 죽고 중풍병자로 죽고 죽게 하시는 그분의 해석이 나를 살리는 해석이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주님은 목자가 되고 우리는 양이 되고 한통속이 된 거에요.


양이라는 것은 없어요. 목자도 없어요. 다만 주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의 일을 벌려버리면 성경에 나오는 개념 있잖아요. 용어. 양, 목자, 이스라엘 그게 새롭게 만들어지는 거에요. 새롭게. 오늘 이야기는 중풍병 이야기지만 결국 선행된 십자가입니다. 선행된. 따라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내 안에 내가 예상 못한 다른 게 들어와야 돼요.


그게 바로 지난 낮 설교에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것, 내 안에 그리스도 일하고 있다는 것. 이거는 슥 들어온 거에요. 사도 바울 허락도 없이. 마구 들어온 거에요. 주님이 내 허락도 없이 주님이 내 것이라 여기고 주님이 내 안에 들어와버린 거에요. 완전히 무당 귀신 들어온 거랑 똑같아요. 그냥 들어와버린 거에요. 무당은 원래 그 안에 귀신이 들어있지만. 이질적인 분이 슥 들어와버린 거에요.


자, 그렇다면 우리가 아까 그 욕망 인간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뭐냐? 내게 속하지 않은 것이 내 안에 들어오게 되게 되면 그 분이 바로 나로 하여금 네가 욕망 따라 선악과 따라 살았던 인간인 것을 지적질하시면서 나에 대한 의미와 자랑거리와 가치는 깡그리 용납하지 않는 방식으로 나를 없애버립니다. 나를 없애요.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세월이라는 것은 세월은 내가 왜 나는 부정당해야 되는 그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서 주께서 허락한 시간들이에요. 주께서 허락한 시간들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아침에 눈뜨면 운전대 고장 났고 아무것도 안되고 그냥 아무것도 안되니까 우리가 할 말은 뭡니까? 주여 오늘 또 뭘 해야 내 죄가 또 드러나십니까. 이미 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아까 했잖아요.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죄 사함을 받았잖아요. 다시 한번 정리할까요? 죄 사함을 받았죠? 죄 사함은 나의 욕망 속에 없는 거죠? 없는 거였다. 나는 사인 곡선이에요. 내 행함만큼 이익을 얻는 행한 만큼 선한 열매를 얻는 게 내 방식이에요. 죄 사함은 없는 거에요. 없는 게 들어왔기 때문에 나는 어떤 식으로 살아간다?


나는 내 행한 대로 상을 받겠다는 시도가 얼마나 이게 사함을 받아야 될 죄가 된다는 사실을 그걸 드러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환이 되는 겁니다. 이게 내가 볼 수 없는 볼 수 없는데 이미 메시지의 운반체가 되어있는 거에요. 내 인생이 내 인생이 아니에요. 내 몸이 내 몸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다루어지는 몸이에요. 십자가를 위해서.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것. 그러면 성도는 대외적으로 어떤 대우를 받습니까? 그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당했던 오해 있잖아요. 오해와 비난을 이제는 누구 몫이냐 하면은 우리에요. 중풍병자 된 성도의 몫입니다.


성도가 그 고난을 똑같이 받게 되는 체험을 받게 된 것에 대해서 감축드리옵나이다. 축하합니다. 예수님을 회임한 것을 축하드립니다. 감축합니다. 축하할 일이에요. 네가 내 사람이기 때문에 고난 받지 세상은 너를 미워해서 미워하는 게 아니고 나를 미워해서 네 속에 내가 있기 때문에 너는 미움 받도록 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럼 미움 받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이러면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에요. 질문 자체가. 미움 받기 위해서 뭘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럼 주도권은 누구한테 있어요? 본인이 주도권 본인이. 내가 미움 받기 위해서 이렇게 노력하면 주께서는 선악체제에 의해서 상 줄 거죠? 그것은 사인 곡선이에요. 사인 곡선. 코사인 탄젠트에서 사인 곡선 탄젠트에요 탄젠트 또 욕망이에요.


내가 하는 것이고 가만있어버리면 “그 나이에 아픈데 없습니까?” “아픈데 없는데요.” “아이고 시건방지네. 뭐야 싸가지 없는 거야 저거 뭐야 자랑질이야 뭐야. 남편이 애를 먹입니까?” “남편 말 잘 들어요.” “뭐야 그럼. 나만 엉터리야. 은근히 약 올리네. 은근히 질투 나네.” 그냥 평소대로 살아가시는 것이 주께서 고장 난 차를 직접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알아서 가는 거에요. 왜? 우리 몸이 주님 자신의 몸이기 때문에. 자신의 양이기 때문에 목자가 우리를 놓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0장 한번 봅시다. 10잘 28절 누가 한번 크게 읽어 보세요.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 이 말은 나에게 영생을 빼앗는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 양에게 영생을 빼앗지 않게 지켜준다 이 말이죠. 내가 아니고 자기 양에게.


그러면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영생을 안 뺏게 해줘요. 왜? 어느 인간도 전적인 죄인이 될 수 없거든요. 왜? 선악체계가 남아 있으니까. 내가 나쁜 짓을 했지만 아주 나쁜지는 않다고요. 선한 게 있으니까 바리새인처럼. 그런데 죄사함을 받아버리면 이미 우리는 뭘로 규정되어 있습니까? 네가 하는 모든 짓거리가 지옥 갈 짓거리라고 이미 규정을 받았잖아요. 그렇지요?


병 고치러 갔다가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병 고치러 왔다는 자체도 지붕 뚫는 자체도 뭐다? 이게 그 지붕 뚫는 것으로 나의 죄를 사할 수 있다? 없다? 내 행동으로 죄사할 수 없다는 게 분명해졌잖아요. 그 분이 나를 죄 사해주게 되면 이것은 그 누구도 처리되지 않아. 이미 용서받은 용서가 처리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기대하지 않는 죄 사함이 올 때에 주께서 일방적으로 나에게 죄 사함을 줘버리면 내가 예상하거나 기대한 죄 사함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악마가 와도 빼앗기지 않는다 이 말이죠.


이런 고백이 될려면 우리는 나 자신을 볼 때 뭐로 봅니까? 그냥 죄 덩어리로 보고 살면 돼요. “니가 그래 옷 하나 해 입었나?” “죄인도 옷 해 입지 뭐. 죄인도 옷 해 입지 뭐.” “그 옷 입고 어디 갈려고?” “지옥가면 지옥가는 거지 뭐.” 내 형제 구원하기 위해서 “나는 기꺼이 그리스도와 끊어질지라”. 로마서 9장. 왜 이런 자신감 어디서 나옵니까?


주께서 지시하는 게 네가 바로 중풍병자고 네가 정신적으로 경직되어 있고 네가 바리새인이고 너만 잘났다 하고 그 모습을 다른 사람은 안 보이지만 나는 비로소 주님에 의해서 보여지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바로 위에 있는 메시지 믿고 우리는 죄 사함 믿고 우리는 평소에 우리가 살던 그 모습처럼 죄인으로 ‘죄인 중에 괴수’로 살아가는 그것이 예수님의 증인의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안다는 것이 그냥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깜짝 놀랄만한 소식으로 다가오게 하옵소서. 예상도 못한 정말로 예상도 못한 생각도 못한 죄 사함으로 다가올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죄 사함의 증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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