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부재의 온전함2

아빠와 함께 2021. 3. 16. 07:35

강남-누가복음 5장 35절 (부재의 온전함) 210302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처음부터 혼자 십자가 지고 나 십자가 졌다. 내 피 믿으면 구원 받는다 이렇게 하지 않고 함께 있는 거에요. 처음에 함께 있어요, 함께 있을 때 함께 있는 그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의 그 죽게 된 그 사태 안에 그들의 존재가 어떤 식으로 관련되어 있는가 십자가를 통해 다 까발립니다.


십자가 지셨다 하는 것이 우리 보기에는 예수님의 사적인 개인적인 일로 보이지만 십자가가 터짐으로서 세상 모든 일이 모든 인간들이 하나같이 무관한 인간들이 아무도 없었다를 계속 십자가가 전하는 현장에서 계속 터져 나오게 되어있어요. 예수님이 그냥 자살한 게 아니고 맞아죽었다고 했잖아요. 맞아죽었다고. 그냥 맞아죽은 게 아니에요. 경멸당하죠. 모욕을 당한 거에요. 조롱을 당한 거에요.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우리 자신이 영적 세계를 모욕한다고요. 돈도 안 되는거 내가 왜 믿었나 미쳤지 이런 식으로요. 끊임없이 올라와요. 끊임없이. 돈도 안 되는 것. 남이 알아주지 않는 것 그 복음 알아서 내가 그거 괜히 알았어 왜 알았지 라고 남이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내가 수시로 쉬지도 않고 올라오고 있어요. 쉬지도 않고.


그렇게 해서 뭐가 구성되느냐 하면은 내가 아는 나와 십자가의 분란한 사태를 통해서 새롭게 발견한 나. 이 ‘나’가 두 종류의 ‘나’로 이게 분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전에 성경해석은 분류다. 내가 만약에 성경해석을 분류하게 되면 나는 필히 천국 가는 사람으로 기정사실화시켜서 분류해요. 그러나 예수님의 성경해석은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분류를 시킵니다. 천국과 지옥으로. 분류를 시켜버려요.


여기에 인간은 어떤 인간도 끼어들지 못하는 이유가 내 운명은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또는 내 뜻을 반영해주세요라고 끼어들지 못하는 이유가 그 사전에 철저하게 나에 의해서 예수님이 경멸당하는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나에 의해서. 내가 조금도 원하지 않는 인물상. 조금도 원하지 않는 분. 내가 너라고 지목하고 싶지 않은 대상이에요. 예수님은.


그걸 성령 받아서 예수님한테 지목당할 때 비로소 그 사실을 알아요. 나는 주님을 지목한 적이 없다는 사실. 나는 주님을 원한 적도 없어요. 그걸 쉽게 말해서 내 타입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내 타입이 아니다. 당신은 내 타입이 아니다. 나 같으면 당신 지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을 지목하는 것은 내가 구상하고 있던 나의 절대성에 당신은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이 잔치에 같이 합류하고 있습니다. 제자들 좀 나아보이지요. 바리새인보다 좀 나아 보이지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제자들이나 둘 다 부재의 사태가 현실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이 없는 세상이 바로 현실을 설명하고 현실을 해석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감 잡지 못하고 있어요. 예수님 없는 세상이.


베드로가 인간됐다 하는 것은 예수님이 없이 그들끼리 모였을 때 그 때 예수님이 다시 찾아올 때. 그래서 베드로가 자기 이야기를 안 해요. 베드로 네가 날 사랑하잖아.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야 네가 나를 필요로 해봐라. 아닙니다. 주님이 나를 필요로 했잖아요. 주께서 나를 사랑했잖아요. 주님이 나를 필요로 했잖아요.


주님이 ‘나’가 되고 나는 주님 앞에 ‘너’가 됐잖아요. 그전까지는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저주했잖아요. 저주했지요.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님의 수제자를 통해서 예수님을 나는 저주하기를 원한다는 하는 그 발언이 꼭 필요한 거에요. 그게 베드로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도록 주께서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우리의 본성상, 우리의 본성상이라고 하면 에베소서 2장에 진노의 자식, 본성상 우리는 진노의 자녀죠. 우리의 본성상 파멸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제일 겁나는 게 있다면 우리의 몰락이에요. 우리의 몰락. 나의 몰락. 달의 몰락이 아닙니다. 나의 몰락이에요. 내가 몰락되는 것. 아무도 원하지 않고 아무도 손들고 그렇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기쁨은 뭐냐 하면은 자기 몰락한 것을 잊어볼라고 아니야 아니야 나는 절대 몰락한 게 아니야 라는 방법 중에 하나가 타인을 나에게 ‘너’가 될 수 없는 그 대상자를 경멸함으로서 상대적인 기쁨을 얻고자 하는 거에요. 상대적인 기쁨을. 지금 그런 심보는 바로 예수님께서 그 당시 세리라는 것은 지옥 갈 인간들이거든요. 돈만 챙긴다고.


돈만 챙긴 그 세리, 레위를 주께서 자기 사람으로 삼을 때 뽑았을 때 제자 삼았을 때 이것은 제자나 바리새인이나 양쪽 다 오해의 소지가 진짜 새롭게 시작되는 거에요. 오해가 시작되기 시작하는 거에요. 주님이 나를 알아준다는 것과 주님은 우리로부터 경멸받을 지금 그러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바리새인들이 지적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으로 완전무장 했거든요. 율법으로 왜 완전무장했느냐. 율법으로 사람의 말씀으로 율법으로 특히 그 네비게이토 맨날 성경 공부하는 이유가 아무리 성경을 봐도 자기가 몰락했다는 것을 증명해 내지를 못하고 있어요. 그게 문제에요. 그게 문제라고요. 성경 공부하면 할수록 점점 바리새인 되는 거에요. 분류를 할 때 자기는 먼저 챙기고 천국으로 챙겨놓고 하는 거에요. 천국부터 먼저 챙기고.


여러분들이 애 있는 아주머니들 화투칠 때 보세요. 화투칠 때 여러분들은 신자니까 화투 못 치잖아요. 화투칠 때 보세요. 아주머니들끼리 화투치고 있으면 아이가 와가지고 엄마 돈 하면 자기 판돈 먼저 챙기고 애 주고 이 판돈으로 치죠. 일단 판돈부터 챙기고 보는 거에요. 내 것부터 먼저 챙기는 겁니다. 손해 보는 장사 안 하잖아요 인간은.


교회 나가는 노동만큼 예배드리는 노동만큼 그러한 보상으로 내 인생이 더 길어지기를 그것도 윤택해지기를 건강하기를 은근히 고대한다고요. 이것은 결코 자신의 몰락이나 자신의 파멸이나 자신의 부재를 고려하지 않는 인생 태도입니다.


자, 그렇다면 문제가 아직도 왜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십자가 안 지시고 신랑 죽었다 이렇게 죽은 신랑 믿어라 하지 않고 왜 같이 기뻐한다고 해 놓고는 잘 기뻐하면 되는데 계속 모여서 기뻐하면 되잖아요. 왜 신랑 빼앗기는 사태가 왜 일어나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제가 이 자리에서도 이야기한 것 같아요. 이 자리에서도. 그게 뭐냐 하면은 수건돌리기 게임입니다.


나의 자리가 술래가 된 내 자리가 빙 둘러서 수건돌리기 할 때 수건 돌리고 난 뒤에 내 자리가 어디가 되겠습니까? 내가 수건을 던져놓은 그 사람의 자리. 이 빈자리잖아요. 내 자리는 없어요. 천국에 내 자리는 없습니다. 주께서 자기 자리를 빼주는 거에요. 빼줘 가지고 자기는 저주의 자리로 와버려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자꾸 산 사람은 그 인간이에요 그 인간. 똑같은 인간을 바꿔치기하는 거에요.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남자를 7인가 바꿨다고 해요. 계속. 계속 바꿔치기 하지요. 그런데 어느 인간이 죽은 자와 바꿔치기하는 게 없어요. 왜? 죽음은 내가 없어지잖아요. 내가. 내가 없어진다면 내가 없는데 무슨 의미가 있어요. 내가 없는데.


모든 인간의 활동은 의미를 나의 잘남을 증명해줄 의미를 얻기 위해서 돈을 번다든지 무슨 돈을 안 벌면 봉사를 한다든지 희생을 한다든지 예수 믿는다든지 이 모든 것은 그 주체가 되는 나에게 의미가 되기 때문에 하거든요. 그런데 나한테 의미가 없다고 한다면 그 짓을 할 위인은 없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리를 부른 거에요. 세리를.


역시 세리도 기존의 인간이기 때문에 좋다고 하지요. 세리를 불러놓고 그 12제자, 12제자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이 땅에서 만들어지고 그 다음에 그들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 사랑을 받고 결국은 어떻게 망해버리느냐. 그 절차를 구약 이스라엘이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신명기 26장 6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자, 오늘 강의 들은 것을 여기에다가 대입하고 적용시켜 봅시다. 애굽 사람들이 우리를 학대하며 히브리인들이죠. 히브리인들 학대했죠. 학대할 이유는 히브리인들이 어떻게 제시한 게 없어요. 그냥 학대당했어요 그냥. 그냥 학대한 것은 너는 죽어도 싸다 이런 겁니다. 실제로 애굽 히브리인들의 아들들은 다 죽었고요. 딸 낳으면 살려주고 아들 낳으면 죽였잖아요. 학대당했다 이 말이죠.


일 시킬 때 살라고 일 시키는 게 아니고 죽으라고 일 시키는 거죠. 마치 러시아혁명 이후에 중국의 대문화혁명 때 부르주아들은 일 시키는 것이 개 같은 사람 일 시키는 게 아니고 죽일 때 그냥 죽여 버리면 노동력이 아까워서 일시키고 죽이겠다고 노동시키는 거에요. 그 당시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의 소위 여호와의 백성 히브리인들이 당한 수모가 어떻게 좋게 해보겠다는게 아니에요. 소모시키기 위해서 학대를 당한 겁니다.


그럴 때 그 히브리인들은 교체할 인간이 없어요. 교체할 인간 같으면 인간한테 부탁하지요. 청와대에 부탁한다든지. 아는 사람한테 부탁한다든지. 아무 부탁할게 없어요. 살아있는 인간에게는 ‘너’라고 이야기할 게 없습니다. 그러면 누구한테 이야기했는가?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부르짖었지요.


이제 어렵습니다. 이게 어려운 거에요. 히브리인이 있는데 히브리인들이 멀쩡할 때 여호와 불렀습니까? 안 불렀습니까? 안 부르지요. 뭔가 쪼아대는 게 있는 거에요. 쪼아대는 게. 압박이 있는 거에요. 압박이. 억압이. 억압을 한 거에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을 억압을 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기 위함이에요.


왜?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중개매체 아니면 일을 안 해요. 언약적 이야기를 안 한다고요.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기 때문에 약속을 주고 그 약속을 이루는 방법으로 일체 인간의 공로가 여기 스며들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 다 아는 이야기지만 귀찮더라도 한군데 보고 넘어가봅시다. 신명기 9장 5절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의로움이 아니죠. 그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해줌은 너의 의로움이다? 아니다? 분명히 너의 의로움이 아니죠. 그럼 의로움 빠져야겠죠. 주께서 이끄는 과정 속에서 뭐가 빠져야 돼요? 자기 의로움이 빠져야 되겠지요. 나는 노렸다 이런 게 빠져야 된다고요. 네 의로움이 아니요. 너의 마음의 정직함도 아니요.


그러니까 정직함이 아니라는 증거를 광야 40년 동안 충분하게 충실하게 이게 드러나야 되는 거에요. 이런 게 어렵다니까요. 이게. 하나님이 구원했기에 나는 하나님께 반항한다는 이 모순적인 멘트가 문장이 성립되야 돼요.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했기에 나는 하나님의 발 정강이를 찼다 이런 거. 앙탈부렸다. 땡깡부렸다 이게 돼야 된다고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어린아이가 죽어야 돼요. 어린아이가. 어린아이 죽지요. 어린아이가 죽어야 됩니까? 어린아이라는 단지 그 특권상 안 죽어야 되는 겁니까? 죽지요. 문제는 인간들이 어린아이 죽는 이유를 그들의 살아온 사고방식에 의해서는 찾아낼 수가 없어요. 왜?


죽는다는 것은 죄를 지은 벌에 의해서 죽어야 되는데 어린아이가 죽으니까 어린아이는 죄 지을 시간이 없어요. 그 말은 어린아이의 죽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말은 평소에 그들은 본인이 죽었다는 사실을 지금 인정 못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뭐 인간에게 어린아이 따로 어른 따로 어디 있습니까. 다 죽을 인간들인데.


인간들은 자기가 죽어야 된다는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죽을 때 죽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의로움이 없어서 죽고요 맘이 정직 안해서 죽어요. 아까 살아있는 게 보상이라고 했지요. 살아있는 만큼 죄를 지으니까.


그러니까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인생 사는 것이고요, 내가 이래서 의롭지 않고 의롭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날 살려줄 하등의 천국 보내줄 하등의 이유가 없음을 증명한다는 그 마음 자세가 하나님의 언약이 된다니까. 그게 언약 안에서 일어난 일이에요.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그리고 5절 끝에 보면은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자,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다시 신명기 26장 봅시다. 보세요. 얼마나 신기합니까.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학대를 당하게 했다는 말은 누가 쪼아댔다는 말이에요? 누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그들을 밀어부친 거에요. 학대당하라고.


학대가 없으면 그들은 자기 잘남을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짖을 거에요. 그러나 그게 아니고 학대당할 때에 그들은 이 세상의 같은 인간들에 의해서 주변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에 대해서 더 이상 일체 기대를 안하게 되는 겁니다. 왜? 그들은 날 학대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내가 의지할 곳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궁지로 몰아넣지요. 이게 뭐냐? 나의 파멸이고 나의 붕괴에요.


다시 죽음이라는 것은 뭐라고요? 내가 나답게 되는 모든 조건이 다 붕괴되는 것이 죽음이에요. 살아있어도 사는 게 아닌 인간이 뭐 살 재미도 없고 뭐 살 목적도 모르겠고 왜 사는지 모르겠다 이미 그건 죽은 거에요. 다시 말해서 내가 되고 싶은 모델을 자기 주변에서 못 찾아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애들은 그러잖아요. 나 엄마한테 실망했어!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제부터 친구 만나겠다 이런 뜻이죠. 가족에서 존경대상이 없어 질 때는 서서히 이제는 친구 찾아다닙니다. 친구도 모자라면 이제 채팅하는 거에요. 인터넷에서 채팅하는 겁니다. 엄마하고는 단절, 문 잠궈 버려요. 안에서 게임하고 있어요.


왜? 몰락하지 않기 위해서. 승리잖아요. 빈체로~~~승리하리라. 내가 기어이 승리하리라. 펜트하우스인가? 기어이 승리하리라. 승리하는 거에요. 얼마나 승리할게 내세울게 없으면 게임에서 성취감을 얻겠습니까? 사는 보람을 이유를 찾겠습니까. 얼마나 다른 면으로 성취감이 경쟁성이 있는 것, 생산성은 승리가 안 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하고 그것도 안 되면 도박하고 나중에 마약하고 하는 거에요.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여기 주셨다고 되어있지요. 그러면 그 땅은 히브리인들에게서의 존재하는 것을 아는 땅일까요. 부재한 땅입니까? 없는 땅입니까? 없는 땅이죠. 그래서 천국은 인간에게는, 인간 세계에는 천국이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와 동일시되는 천국은 그걸 조작해낸 거에요. 교회가 조작해냈지요. 교회가. 잘난 나를 들어갈 나라를 인간들은 성경말씀을 구절들을 동원해가지고 상상한 거에요. 상상한 겁니다.


뭐 이리와 소가 함께 있고 그게 전부 다 상상한 거지요. 이사야에 그 대목이 나온다 하지만 모든 언어는 해석자에 의해서 조작이 되어버려요. 해석한 순간 조작이 되어버린다고요. 나한테 유리한 쪽으로 조작이 된다니까요. 동일한 언어, 천국이라는 언어를 인간이 그걸 채용하느냐 바리새인이 채용하느냐 아니면 예수님이 그 천국을 이해하느냐 완전히 다르지요.


세례 요한은 이 천국을 어떻게 봤습니까?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을 뭐로 현실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이 현실에 없는 세계가 다가온다는 뜻이에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자, 현실은 뭡니까? 다 잊어버렸지요. 현실은 내가 내 절대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구상한 그 세계가 현실세계에요.


나는 북한 김정은 안 좋아. 그건 재끼고. 나는 서울 시장 누구가 좋아. 이렇게 이야기할 때 이미 서울시장 후보감 누가 있다는 것이 그 사람한테는 현실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내가 싫어하는 김정은도 현실의 일부에요. 왜? 본인이 분류를 하니까. 내가 맘에 드는 사람과 맘에 안 드는 사람을 분류체제 내가 아는 현실체제에요.


아빠 엄마가 서울시장 후보감 나는 누구 좋다 누구 좋다 할 때 그 어린애들도 너는 이번에 투표권 없지만 서울시장 나오면 누가 좋겠어? 물으면 애들은 엄마 나 몰라 아빠 나 몰라 나 관심 없어 이렇게 하잖아요. 아주 뛰어난 두뇌를 갖고 있는 지구의 공전을 생각하는 애 같으면 모르지만. 보통 애들은 그거 생각안하지요.


쟤는 뭐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관심도 없고 자기 현실이 뭔지도 모르겠어 하면서 우연히 가다가 강아지를 툭 발로 찼어요. 엄마 뭔데 왜 내 강아지 차! 이렇게 나온 거에요. 그러니까 그 강아지가 아이들의 범주 내에 그 지평 내에 지형적인 자기 영역이었어. 그 애가. 서울시장이 누구냐가 아니라 나는 어느 개가 좋아. 어느 강아지가 좋아. 그게 자기 영역이에요. 그게 자기 현실이에요.


왜? 내 개는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해. 그 분류에요. 그 분류. 그 개한테 그 아이는 너라고 불러. 너라고 부를래. 누나라 부르지 않고 너라고 부를래. 이제는 누나가 아니고 너라고 부를래. 이승기가 그랬나. 그게 자기 아는 세계 전부에요. 자기 아는 세계 전부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공부한 만큼 영역은 넓어지고 좁아지고 있지만 그 지평은 뭐냐? 다 어디서 일궈낸 거에요? 주님이 자기의 부재를 증명하면서 일궈낸 그러한 일거리들을 가지고 인간들은 자기 것, 이건 네 것, 이건 내 것이라고 긁어 모아놓고 현실이라고 우기고 있는 거에요.


주님이 나는 제자로 받았어. 아~ 신나. 나는 주님 있으면 최고야. 나 같은 죄인을 세리를 자기 제자로 받겠다는 주님은 나한테 최고. 이게 바로 레위, 제자들의 한계지요. 그 기쁨이 수상한 기쁨이다 이 말이죠. 뭔가 이상해. 아까 수건돌리기 이야기했지요. 수건돌리기 이렇게 할 때 자리가 꽉 찼어요. 꽉 찼는데 예수님께서 이 자리를 없애줬습니다.


그럼 이 자리에 아무도 안 앉지요. 자리만 있을 뿐이지 아무도 앉아있지 않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자리를 빼고 이 자리에다가 성령을 주셔서 자기 제자를 여기 꽂아놓습니다. 꽂아놓으면 이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 자리에요. 부재하는 자리에요. 없는 자리란 말이죠. 없는 자리니까 소위 살았다는 사람이 볼 때에 이 인간은 뭐냐? 이미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이 자리를 없는 자리라고 방금 이야기했잖아요. 그 없는 자리를 없는 자리라고 하지 않고 사도 바울은 이 없는 자리를 없다고 하지 않고 이게 십자가 자리라고 보는 겁니다. 전에는 내가 예수님을 몰랐을 때는 성령을 안 받았을 때는 내가 예수님을 믿잖아요.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요. 내가 십자가를 믿는다고요.


그런데 성령 받고난 뒤에는 십자가가 내 자아가 있던 그 자리에 십자가가 대체해서 들어가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 안이라고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내가 십자가 안에 있다고 하는 거에요. ‘십자가 안’.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죽으심 안에 있다는 거에요. 예수님의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사건 안에 있다는 거에요. 왜 사건이냐? 존재하지 않으니까 사건이죠.


인간들이 인간 세계에서 가장 큰 오해가 뭐냐? 내가 존재한다는 게 오해입니다. 존재라는 말을 그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도 몰라요. 살아있을려면 존재할려면 한결같이 있어야 돼요. 우리 자신은요 현실에 요동침에 따라서 우리가 그때그때 달라져요.


왜냐하면 현실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은 그 다음부터는 내가 골라잡는 내가 동일시하는 대상들이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바뀐 내가 어제 내가 내가 아니라 오늘 내가 붙잡지만 오늘 내가 시효가 오늘까지 내일 되면 또 달라져요. 내가 좋아하는 게 또 바뀌기 때문에.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를 몰라요. 술 먹은 거 같애.


개라고 욕하지 말라고 해놓고 술 먹어보세요. 개처럼 길에다 오줌 싸지요. 그래놓고 그때는 술김에 했다. 술김에 했다는 거에요. 잠시 정신 돌았어 그때는. 너는 정신 멀쩡한 적이 없었어. 무슨 정신 온전한 게 어디 있어요. 왜냐하면 온전한 정신이 될려면 한결같은 ‘나’가 구축될 때 온전한 부사가 붙어야 되는데 수시로 달라지는데요. 이게 무슨 온전합니까. 수시로 달라지는데.


사람이 50이 되면 뭐 인간이 안정적이 된다고요? 북한에 김정은한테 비벼대는 인간 전부 50 다 넘었어요. 아이고 뭐 사람이 사회생활할려면 환경에 따라 적응해야지. 적응해야 된다는 거에요. 적응하는 자가 누군데요? 적응하는 자가 누굽니까? ‘나’가 아니에요. 현실의 압박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만드는 거에요.


주님께서 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악마의 자식들 너는 살아있다고 착각하는 자들이어야 한다고 주께서 일부러 그렇게 만드신 거고 제자들은 너는 이들과 같지 않고 여기서 네 자리가 죽은 자리로 내 자리를 대체해서 들어가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죽게 된 그 사건의 반복성에 의해서 사건의 무한루프, 되풀이됨으로서 그 사건이 되풀이됨으로서 내가 자아가 아니라 십자가가 내 자리를 꿰차는 겁니다. 십자가가.


나는 어떤 존재가 아니고 어떤 기능이에요. ‘십자가 기능’.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음을 십자가라는 형태로 드러내기 위해서 ‘나’라는 육신을 사용하시고 그걸 활용하고 있는 거에요. 내 육체를. 그래서 늙어 죽어가면서도 기뻐요. 왜? 마땅한 일이니까. 아니 뭘 해도 마땅해요. 뭘 해도. 뭘 해도 마땅하고 뭘 해도 당연해요.


늦게 와도 마땅하고 당연하고. 뭘 해도. 어쩔 수가 없어요. 두 살 먹은 애가 갑자기 차사고로 죽었다. 죽은 애 보고 곧 숨넘어가는 애 붙잡고 너는 네 죄를 알렸다. 네 죄가 죽을 죄인 것을 자고해라 하면 그럼 애가 나 죽는 것이 마땅해요 이러면 뭐 그게 정답이죠. 왜 우리는 그 애처럼 왜 순수하지 못하냐 말이죠. 뭐 순수하다고 천당가는 건 아니지만.


주님께서는 본인이 그 사람을 자기 제자를 선택해 놓고 그 뒤에 일어나는 모든 줄거리는 뭐냐 하면은 오히려 우리의 조치로 대체시킵니다. 네가 하나를 선택하면 나머지 어떤 선택을 해도 다 봐줄게. 기억지 아니한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제자들이 처음에는 역시 우리가 예수 잘 믿었어 이렇게 되잖아요. 나중에 십자가 지고 난 뒤에는 내가 잘 믿은 게 아니고 내 자리가 주님의 자기 고백이 터져 나오는 자리로 우리를 기능화시켰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신은 누가 선택한 겁니까? 주께서 아까 봤지요. 주께서 압박한다는 신명기 26장에 압박했잖아요.


주님께서 이스라엘 압박하는 그 압박이 구약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압박하고 나중에 신약되면 예수님의 압박으로 아버지가 나를 압박하는 것으로 보지만 우리는 신약시대이기 때문에 주님이 압박당하고 그 다음에 구약하고 동일하게 주님이 압박당한 것을 내가 압박당한 것으로 대체해서 주님 자신을 증인으로 증거자로 사용해주시는 겁니다. 이게 바로 제자들이 가야할 길이죠. 따라서 우리의 삶이란 것은 예수님이 부재하면서 당했던 그 슬픔을 공유하는 겁니다. 슬픔이란 공유지요.


자, 오늘 본문에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오늘 결혼식을 보면서 신랑 이야기하면서 여러분들이 뭘 느꼈습니까? 보통 신랑에 대해서 신부가 몇 명이에요? 결혼식 때? 신부가 이렇게 5명 나오면 4명은 들러리 아니야? 오해할 정도로 신부 5명 그런 거 없지요? 나중에 부주낼려고 하면 5명 중에 어디에 낼지 복잡해져버려요. 오늘 보면 신랑은 하나라고 부각을 하는데 신부가 한명이 아닌 거 같아요. 신부가 한명이 아니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공동체험을 하게 하는 겁니다. 주님이 부재한 그 슬픔, 아픔을 그리스도가 십자가달릴 때 그 때 그 당시의 그 슬픈 체험, 신랑을 잃어버린 그 체험을 공유할 때 이것이 바로 제자군이 되는 겁니다. ‘제자군’. 이게 교회가 되는 겁니다. 성도들이 되는 거에요.


성도와 성도 만나면은 예수님의 부재했던 그 슬픔과 아픔이 기반이 된 채 성도가 만나야 되고 성도가 교제가 되야 됩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이게 뭐냐 하면은 “누가 내 형제며 누가 내 모친이냐?”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애 9명 낳았다고 그게 식구가 아니거든요. 애 9명 낳았다고. 생판 몰랐던 사람들도 복음가지고 이렇게 하게 되면 혈육의 가족은 족히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거기에 그리스도가 교류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의 혈육을 능가한 성령의 본드, 성령의 이음새가 교통하고 있어요. 특징은 뭐냐 하면은 바로 나의 절대성 때문에 주님께서 당했다는 것. 인간의 본능상 내가 안 뭉개질려고 붕괴되지 않고 내가 몰락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내가 원하는 신을 찾다보니까 주님은 내가 찾는 대상에서 누락이 되는 거에요. 자꾸만 누락이 되는 거에요.


나의 동일시할 수 없는 잘못된 만남, 어긋난 그걸 전문용어로 ‘삑사리’. 모든 언어가 정확하게 지적할 수 없어요. 지적하는 내가 다른 ‘나’가 되니까. 매일같이 흔들리니까. 우리는 그때그때 변명과 핑계만 있을 뿐이지 진리는 없어요. 다 나를 잘난 체하기 위한 그러한 핑계들만 구실들만 모아 모아서 하루하루를 지내고 보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형제들끼리 자리가 뭐냐 하면은 주님이 빠져버린 그 자리, 이 세상에 없는 자리에 같이 한 식구가 되는 거에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자리. 나를 위한 현실화가 될 수 없는 현실화 대상이 되지 않는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우리의 자리에요. 따라서 나는 이 세상에 있지만 천국에 나는 없어요. 그러나 천국에서 나는 있지만 천국에서는 지옥 갈 사람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천국에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이 말은 나를 위한 공간은 이 세상에 주님께서 허용해 주지를 않는다는 거에요. 그래서 성도한테는 주께서 자꾸 어떻게 조용히 살 수 없게 만들어요. 내 잘난 맛에 내 기쁨으로 살지 않도록 끊임없이 어떤 변화같은 게 자꾸 일어나요. 아까 그 이스라엘이 될 때 학대받는다고 했지요. 사람이 나를 잊지 못하면 세상에 일어나는 어떤 일도 나를 힘들게 하는 일들만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 원인이 세상이 그렇게 각박한 세상이 되는 게 아니고 없어야 될 내가 주께서 치워버린 내 자리를 내가 꾸역꾸역 나 다움의 내 자리를 억지로 만들려고 하니까 세상만사 내 뜻대로 되는게 아무것도 없는 거에요. 또 뜻대로 됐다고 좋다고 까불다가. 좋다고 까불다고 그 좋다고 까부는 그 기쁨 그 행복 그거 지킬려고 하니까 또 공포와 불안이 또 찾아오네요. 내가 어제만큼 참 좋았던 시절이 어디 있어나 하는 순간 점점 불행해지는 거에요. 어제만큼 기쁨이 채워지지 않을까봐 벌벌 떨고 있는 거에요.


자,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한마디로 말해서 ‘주님의 부재’, 주님이 안 계신 그 자리가 결국 나중에 누구의 자리? 제자들의 자리가 된다. 내가 이 세상에서 추방되어서 나는 세상에서 버린 자가 되었다. 따라서 너희가 정말 나를 기뻐한다면 나의 부르심을 받는다면 그냥 세리로서 부름 받았다는 이 현장에서 자책할 게 아니고 내가 사라진 그 나라에서 같이 만나자. 거기서 기뻐하자.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죽는 게 몸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겠다는 그걸 소망이라고 여겼잖아요. 주님이 빠져나가서 만들어진 그 나라, 주의 나라. 성령이 와서 나로 하여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그 나라 사람 되게 하는 거에요. 그럼 제가 이렇게 하게 되면 그렇다면 목사님 거울에 내 모습이 왜 비칩니까? 머리가 자꾸 빠지는 모습이 왜 비칩니까?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의 모습으로 왔으되 이 세상에 자기 거처가 없는 것처럼 똑같은 운명을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거울 봐도 내 모습 보이고 오늘 무슨 옷 입을까? 긴 거 입을까? 짧은 거 입을까? 온갖 신경 다 쓰지만 결국 결정은 누가 하느냐 하면은 주님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결정하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무슨 옷을 입을까 하는 그것이 너의 정직함도 아니요 목이 곧은 거에요 그게. 우리가 살면 살수록 점점 내가 목이 곧고 정직함이 없고 나는 의로움이 없다는 것을 그걸 확인해주는 기쁨을 우리에게 제공하지요. 성도에게.


무슨 말이냐 하면은 내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에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거에요. 모든 일을 다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의미가 없기 때문에. 어떤 것도 나는 의로움이 아니고 정직함도 아니고 선함도 아니기 때문에 내가 골라잡아 일을 안 하고 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어떤 일도 오라. 내가 죄져줄게. 죄로 만들어 줄게. 그런 자신감. 어떤 일. 기도를 해도 뭐 고아원 방문하고 어떤 일을 해도 이게 죄가 되거든요.


뭘 해도 무슨 일을 맡겨도 그건 언약을 위해서 맡겨진 일이기 때문에 어떤 일을 맡겨도 내 손에 거쳤다하면 그것이 정직함이 아니요 의로움이 아니요 선함이 아님을 언약이 와서 우리에게 그걸 확인시켜 주니 세상에 이것보다 더 행복한 삶이 어디 있습니까. 이게 얼마나 복된 삶인지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걸 우리보고 시도하라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재함, 예수님의 없음. 예수님이 이 땅에서 그냥 없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하늘에 계신 아예 없는 거 말고 이 땅에 오셨다가 없는 것, 오셨다가 없음으로서 없음이 유일하게 있는 현실이고요. 현실이라는 것은 전부 다 결국은 이 땅에 저주받을 없어져야 될 세상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사실을 알게 된 성령 받은 성도 그걸 무슨 체험? 공동 체험.


공동 체험 한 사람한테는 없는 이유를 대야 돼요. 내가 없는 이유는 내가 정직하지 의롭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있어도 없는 살아도 사는 인생이 아니에요. 의미가 없다니까 의미가. 소용없다 정도가 아닙니다. 나는 못하다 그 정도가 아니고 의미가 없어요. 뭘 해도 의미가 없어요. 의미가 있을려면 거기 반드시 선과 악이란 윤리 도덕이 결합이 됩니다.


이건 마귀가 그런 짓 하지요. 너 잘못했어? 잘했어? 자꾸 따지는데 이미 우리는 언약에 의해서 규정되었어요. 의로움도 아니요 선함도 아니요. 네가 아무리 선해도 그건 선이 아니야. 정직이 아니야. 그건 네가 너 해석한 거야. 네가 너 위주로 해석한 거야. 언약 위주로 해석해버리면 이미 결정난 겁니다. 확정된 겁니다. 그게 누구냐? 확정난 그 관계가 바로 제자들이에요.


끝으로 이제 오늘 이야기 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 인간은 이상스럽게도 본인도 몰라요. 이상스럽게도 분명히 부모로부터 태어났는데 신체로. 홀로 태어납니다. 신체상 부모로부터 태어나지만 자아성은 홀로 태어나요. 왜냐하면 5살 먹은 아기 ‘나’가 엄마 ‘나’하고 같지를 않아요. 안 같애요. 자아가. 얼굴은 닮았지만 자아는 같은 구석이 없습니다. 성격은 닮았지만 성격을 통일하는 자아의 최종적인 자아 지점은 이 세상에 어느 누구와도 같지 않아요. 지문처럼.


악마가 악마새끼를 계속 까는 것 같습니다. 오죽했으면 주님께서 네 애비는 악마다. 악마가 새끼쳐가지고 악마 새끼들이 쫙 깔린 거에요. 이 악마는 홀로 태어나는 거에요. 홀로 태어났으니까 모든 의미는 뭐냐 하면은 어떤 의미 같이 같이 결합해서 뭐 의논하고 마음과 뜻을 합하여 뭘 해도 항상 그 의미는 최종적으로 이 성격 본래적인 성격 있잖아요. 홀로 태어남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어쩌면 좋아요? 대구강의 같다. 실컷해놓고 어쩌면 좋아요. 이거 어쩌면 좋아요 이 사태를. 예수 믿고 백날 해도 전부 다 돌아온다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고맙게도 홀로가 아니고 관계로 왔어요. ‘관계’. 홀로가 아니고 관계. 관계가 될려면 하나 있어야 되고 둘이 있어야 돼요. 아령처럼. 두 개 있어야 중간에 관계성이 연결됩니다.


제가 주일 낮 설교에 성도를 ‘하나님의 전선’이라고 했지요. 전선이 까불락대면 안돼요. 전선은 가만히 있어야 되고 그래야 전선은 죽어 있어야 되고 죽어 있는 곳에 전류가 살아 있어야 되지요. 전기가. 전자의 흐름이 살아있어야 되죠. 관계가 될려면 양쪽 다 예수님의 한쪽이 예수님께서 자기가 죽고 자기가 부활하면 끝이 아니고 자기가 죽고 자기가 살아난 그것을 관계를 통해서 이 주님의 자리에 자기 백성을 새롭게 만들어줬어요.


새로운 자아인데 이 자아는 내 자아가 아니고 주님의 자아를 집어넣어요. 그럼 우리는 뭐만 빌려줬어요? 우리의 신체만 빌려준 거에요. 신체만. 육신을 빌려준 거에요. 육신을 빌려주고 주님의 자아가 들어왔단 말이죠. 그러면 이 방법은 우리가 언제 육신을 빌려줬느냐? 그거는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오실 때 하늘에서 일하시지 않았어요. 말씀이 뭐 됐습니까? 육신이 된 거죠.


예수님이 육신이 될 때 이미 예수님이라는 조건 자체 속에 뭐가 필요하느냐? 육신이 필요했던 겁니다. 예수님의 몸은 몸 없던 시절이 아니고 영광된 육체에요. ‘영광된 육체’. 부활의 영광이 있던 육신이란 말이죠. 육체 없는 예수님은 없어요. 그건 영지주의가 주장하는데 영지주의라는 말은 인간이 만들어냈는지 하여튼 예수님은 육신을 갖고 있어요.


요한일서에서 육신이 없는 그리스도는 적그리스도라고 했잖아요. 육신이 있는데 그 육신을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예수님의 육신을 부활의 육신으로 만들었잖아요. 그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성령을 통해서 성령은 예수님의 하는 일밖에 몰라요. 예수님이 하는 성과를 우리의 그 지저분한 육신에다가 이걸 집어넣은 겁니다.


집어넣으면 우리가 산다가 아니라 이 관계가 살아요. 이 관계가. 우리가 사는 게 아니고요. 이 관계가 살아요. 이 관계가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주님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천국을 가야만 되는 거에요.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허접스러운 인간이지만 오늘 본문에 그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왜? 죄인 없는 의사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의사가 의사되기 위해서 우리를 죄인 되게 하시는 이 관계, 이 의로운 관계, 그 관계가 피조물로서의 최고의 영광의 상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원하시는 그러한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전부 다 내가 잘났다로 일관된 우리지만 주께서 성령 주셔서 너 그 못난 그것조차도 천국의 가치 있는 주님에게 가치 있는 주님의 몸이 됨을 우리가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강남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속성과 불연속성2  (0) 2021.03.29
연속성과 불연속성1  (0) 2021.03.29
부재의 온전함1  (0) 2021.03.16
선과 악의 비례b  (0) 2021.03.02
선과 악의 비례a  (0) 2021.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