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속아넘어간 자

아빠와 함께 2021. 3. 1. 09:13

속아넘어간 자 

2021년 2월 28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2:4-5

(2:4)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4.  And this I say, lest any man should beguile you with enticing words.

4.  I tell you this so that no one may deceive you by fine-sounding arguments.

4.  I say this in order that no one may delude you with persuasive argument.


(2:5)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

5.  For though I be absent in the flesh, yet am I with you in the spirit, joying and beholding your order, and the stedfastness of your faith in Christ.(KJV)

‘속임’이라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은 이 세상에 온전히 못하다는 말입니다. 간교한 자들이 엄연히 활동 중이라는 말입니다. 이 속이는 자들이 단순히 내가 아닌 타인이라면 밀어내면 그만일 겁니다. 하지만 이 속이는 세력이 이미 내 속까지 접수하고 점령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렇게 되면 ‘안 속아넘어가려는 것’ 자체가 곧 속아넘어간 꼴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인간들은 안 속아넘어가려고 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미 인간은 처음 창조 때의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존재가 아닙니다. 도리어 죽어야 될 존재입니다. 죽음이라는 처벌이 합당한 대상자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자체적인 지식과 지성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본인이 원하는 삶의 이유나 목적은 이미 상실되어 있습니다. 즉 ‘도대체 내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 지’를 본인이 모르고 삽니다. 이것은 인간 자체가 이미 창조 전의 혼돈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혼돈은 ‘무질서’입니다. 하루하루 삶이 막연하고 답답합니다. 뭔가를 도모하고 꾸미고 계획잡지만 그래서 뭐? 그래서 무엇을 얻으려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자체적으로 질서잡기 위해서 부지런히 확실하고 명백한 것을 수집하려 합니다. 정답만 챙기려고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심적으로 비참합니다. 인간 세계와 인간이 ‘혼돈’의 무한 반복체계을 되풀이해서 보여주는 식으로 생을 삽니다. 그 와중에서 인간은 나름대로 ‘혼돈’을 벗어나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허무하지 않기 위해 발악을 해봅니다. 이 방법은 자신이 자기를 끊임없이 채찍질 하는 방법 외에는 없을 겁니다.

혼돈에서 질서를 뽑아내는 식으로 매사 움직입니다. 그렇게 해서 얻어낸 질서체가 곧 ‘나’라고 말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세례 요한이 하는 말을 들어보세요. “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 3:7)

이 세례요한의 발언은 고용하고 평화로운 인간세계에서 들으면 참으로 어이없고 황당한 주장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임박한 진노’라는 표현은 세상에서 제시된 말이 아니라 세례요한 본인이 주장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즉 세례요한 인간 세계에서 대해서 일방적인 폭언을 해놓고서는 그 주장을 들을 가치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너희에게는 없다는 겁니다.

즉 “왜 맞을 짓을 하면서 피하려하느냐?”는 겁니다. 듣고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례 요한 태도와 자세가 곧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고 있는 태도라는 겁니다. 이사야 1:9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 인간 현실을 보고 “끝!”라고 단정내렸습니다. 이미 혼돈이라는 겁니다. 매일매일 인간들은 세상의 끝과 혼돈만 경험하게 된다는 겁니다. 구원받을 위인들은 없지만 하나님쪽에서 ‘조금 남겨 두신’ 덕택에 여전히 이 혼돈의 세상은 이어져가고 있다는 겁니다.

‘조금 남겨 두셨다’는 말은 인간은 자신의 처지와 형편을 알 길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안 속아가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말씀을 주신 이유는, “제발 속고 다시 오라”는 겁니다. 만화영화 겨울왕국에 나오는 눈 사람 ‘올라프’는 주인공을 살리기 위해 맹활약을 했지만 겨울이 되고 여름이 되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즉 내가 속고 아니 속고가 문제가 아닌 겁니다. 인간이 범죄한 이후에 진정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것은, 속지 말라고 금지하신 것이 아니라 속아넘어가지 않으려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생명을 놓고 거래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거래 상대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저 주시는 분이십니다. 진정 속지 말라의 반대말은 정리정돈하는 겁니다. 자기 인생을 곱게 간직하려는 시도입니다. 나름대로 ‘자아’를 질서체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 ‘속지 말라’는 주님의 취지에 반대되는 태도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주시고 또 주시는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5:45에 보면, “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이 대목에서 하나님께서 악인과 선인에도,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도 햇빛을 주시고 단비를 주십니다.

이 ‘주심’의 의미는 이미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바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내려준 ‘만나’는 결코 저장할 용도가 아닙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출 16:19-20)

말씀을 많이 암기한다고 해서 구원이 도움되는 게 아닙니다. 모든 말씀은 기억하지 않더라도 주님께서 성도의 일상을 말씀이 적용되는 일상으로 전환시켜 놓았기에 이제부터 성도는 말씀이 아니라 일상개념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나는 이래서 하나님에게 이렇게 자아가 깨어졌다”는 것으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방식은 ‘혼돈’이었습니다. 즉 ‘잉태치 못한 여인’으로 태어나는 겁니다. 이 세상의 질서체에 통용되는 언어와 의미는, 아기 출산에 있는 남녀의 동침이 필수적입니다. 이 필수적인 것을 깨어버리시는 겁니다. 개에게 사람 옷 입혔다고 해서 사람되는 것 아니듯이 인간들이 말씀을 많이 말한다고 해서 천국에서 받아주는 자가 되는게 아닙니다.

히브리서 10:16에 보면,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만의 질서를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그것을 엎어버리는 혼돈이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옵니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해 기획했던 모든 것이 무산됩니다.

성도는 늘 근본으로 돌아가는 자입니다. 그저 주신 것을 그저 주신 것으로 아는 겁니다. 자기를 잊고 사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성질을 못이겨 주님이 거저 주신 이 자아를 못살게 굴지 않게 하옵고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7강-골 2장 4-5절(속아 넘어간 자)210228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2장 4-5절입니다.

골로새서 2:4-5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

인간에게 속인다는 것, 처음 인간을 창조할 때는 그러한 경우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인간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존재로 만들었을 때는 속고 속지 않는다는 그러한 상황조차도 일어날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누군가 너희를 속이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처음에 창조한 인간형편에서 모든 것이 변질되었다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속이는 세력이 있고 속아 넘어가야 될 자들이 있고.

이 형편에 대해서 너희는 어떤 입장에 있느냐 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있기 때문에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나님이 조치하신다. 너는 그 안에 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에 대해서 속아 넘어가지 않았는지를 알려면 무엇이 우리를 속이고 있고 그 속이는 것은 무슨 목적으로, 왜 속이려고 하는지를 우리가 알아야 되겠지요.

그래야 그 속임이라는 개념자체가 의미 있게 성립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같은 취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6-8절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다른 복음은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다른 복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논리적으로 복잡해져 버리지요. 다른 복음이 없으면 다른 복음이라는 말 자체도 끄집어낼 이유도 없는데 “다른 복음은 없다. 그런데 다른 복음을 주의하라.” 없다며? 다른 복음이 없다면서 뭘 주의를 하란 말입니까?

그리고 8절 같은 경우에는 성경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요.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복음을 전하는 내가, 복음을 전하는 사도바울이 다른 복음을 전하면 내가 저주받는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니 여기 ‘내가’가 두 번 들어간 거예요. 나라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내가 저주받는다는 내용을 가진 이 복음을 너희들이 전하지 않으면 너희들이 저주 받는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가 이래야 이해가 되거든요. “나는 복음을 바로 알고 내가 전하는 복음만을 받아야 여러분이 저주 안 받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나를 믿어야 됩니다.” 이러면 우리가 이해가 되지요. ‘아, 사도바울은 진짜구나. 사도바울이 전하는 말만 들으면 우리가 구원 받겠구나.’ 이건 우리가 쉽게 이해가 되는데 사도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바른 복음을 전하는 를 믿으면 저주 받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말이지요.

“바른 복음을 전하는 목사를 믿으면 저주 받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사도바울 본인이. 바른 복음 내용에서 나 빼달라는 이야기에요.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사람은 어떻게 사람을 자꾸 바라보게 되거든요. 그런데 이 복음은 사람을 바라봐서 알아낼 내용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직접 성령이 와야 알아낼 내용이지 어떤 사람이 바른 복음 전한다고 그 사람 믿다가 같이 지옥갈 일 있나, 그렇게 된다 그 말이지요. 그 이유가, 인간이 인간보기에 그럴싸한 인간이 있어 보이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똑같아요. 인간들이 본인이 뭐가 문제고 왜 엉망이냐를 모르는 것은 같은 인간들하고 비교하며 살다보니 자기한테 그다지 큰 하자가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제가 몇 년 전에 <겨울왕국>이라는 만화영화를 본적이 있는데 큰 은혜를 받았어요. 안 봤으면 큰일날 뻔 했어요. 그 <겨울왕국> 영화에 처음부터 끝부분까지 큰 활약을 한 인물이 나옵니다. 올라프, 이 올라프가 눈사람이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올라프는 참 착하고 훌륭하고 정말 눈송이처럼 착한 맘을 가졌구나, 했는데 마지막 끝 대목에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되니까 그 올라프가 다 녹아버려요.

올라프가 눈사람이거든요. 주황색 코를 하고 있는 눈사람이라고요. 눈사람이니까 그 올라프가 얼나마 착하냐, 선하냐, 나쁜 짓한 것과 관계없이 여름 되니까 모든 눈은 다 녹아버립니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때 어떤 인간도 죄인 아닌 인간이 없는 거예요. 여름 되니까 올라프든 어떤 눈도 다 녹아버리는 겁니다.

새벽부터 오는 눈이 무릎까지 쌓여봤자 안동 역에 가보세요. 지금 눈 쌓여 있는가. 다 녹고 없어요. 없다고요. 오늘 본문에서 어려운 점은 바로 속인다는 것, 복음이 너희들을 속지 않게 지켜줄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4절에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해서 너희를 속이는 존재의 출현을 사도바울과 주님께서 인정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이것은 처음에 만들어진 그 아름다운, 보기에 심히 좋았던 그 세계가 아니에요. 아주 수상하기 짝이 없는 위험한 세계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 세계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창세기 2장과 3장의 이야기지요. 하나님께서 처음에 악마가 아담을 속였습니다.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네가 신이 된다. 그게 속임수거든요.

그런데 이미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그걸 따먹었어요. 따먹었으면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속지 않으려는 그것이 속아 넘어가는 일이 되는 거예요. 속지 않으려고 하니까 길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금지한 것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고 금지했지만 지금 하나님이 금지한 것은 뭐냐? 안 속아 넘어가려는 것을 금지시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충분히 속아 넘어가서 다시 오라는 거예요. 사람이 안 속아 넘어가려고 한다면 ……, 이것은 처음에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좋게 지었던 그 세계가 이미 아닌 세계거든요. 떠났잖아요. 겨울이 아니고 여름왕국이에요. 이미 전부다 죄인입니다. 죄인 입장에서는 안속아 넘어가고 정답만 골라서 알고자 하는 그 시도가 이것은 악마한테 완전히 속아 넘어간 그 짓이 되는 겁니다. 자기가 멀쩡하다고 여기는 것, 자기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목사님, 제가 어떤 것을 알아야 구원받습니까?” 어떤 정답을 알려고 하는 거예요. “목사님, 내가 어떤 말에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까?” 이걸 알려고 오는 것이 아니고, 속으려고 교회 오는 것이 아니고 안 속으려고 교회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다, everybody, 다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시작이 잘못되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는 인간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카오스, 혼돈으로 되돌아가요. 주님께서는 혼돈으로 새로 시작하자는 겁니다. 인간은 혼돈의 시간루프에 빠졌어요. 계속 되풀이해서 혼돈스러워요 그 혼돈이 뭐냐? 다른 말로 하면 끊임없이 안속아 넘어가려고 하면서 길을 잃어버리고, 안 속아 넘어가려고 애쓰면서 속아 넘어가고, 또 속고, 또 속고, 안 속아 넘어가려고 하기 때문에 또 속고 또 속는 거예요.

성경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또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성경말씀 정확하게 이해해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요? 그 의도가 뭔데요? 성경을 바로 알려고 하는 의도가 뭡니까? 저 구원받으려고요. 구원받고자 하는 그 자체가 당신이 주제파악을 못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당신이 지금 어떤 입장인지, 구원받을 권리나 그런 대상이 아닌 것을 본인이 지금 모르고 있는 거예요. 정답을 늘 이야기하면서 사는 꼬라지는 비참하게 살아가고요.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은 이제부터 성경개념 이야기하지 말고 그 성경개념을 생활개념으로 다 바꾸세요. 나 이렇게 지난주에 또 속아 넘어갔습니다. 생활개념으로 다 바꿔야 돼요. 여호와의 증인처럼 성경에 나오는 단어들 줄줄 외우지 마시고요. 마치 그런 것을 앎으로서 자기가 뭐가 된 양 여긴다니까요.

왜 생활 개념으로 바꿔야 되느냐? 인간이 사는 것 자체가 혼돈스럽습니다. 인간이 사는 것 자체가. 그래서 사도바울이 속임을 언급하는 것은, 원래의 것이라는 논쟁을 시작하는 거예요. 원래의 것, 그야말로 카오스가 우리의 원래의 자리냐, 아니면 질서 코스모스, 질서가 인간이 질서체제를 갖춘 이것이 시작점이냐?

세상의 학문들은 질서를 시작점으로 본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혼돈입니다. 혼돈의 특징은 막연하고 답답해요. 그래서 우리가 하루하루 사는 것이, 아무리 성경알고 복음알고 정답 알아도 하루 사는 게 답답하고 막연합니다. 뭔가 성취를 해도 돌아서면 또 배고파요. 히딩크 닮았어요. 4강해도 배고파. 그래서 제가 제안하는 건데요. 성도라면 마귀가 하고자 하는 말을 우리 입에서 계속 내뱉어야 됩니다.

이게 좀 어려운건데요. 자꾸 내뱉게 되면 그게 말이 되거든요. 언어가 된다고요. 언어가 어떤 개념이나 단어를 내뱉게 되면 그 순간 그것은 하나의 고정점이 되고 정박지가 돼요. 딱 정박, 배를 대는 정박지, 또는 고정점이 돼요. 고정점이 돼버리면 우연으로 엮여 있는 모든 변수를 다 삭제해버리고 이게 정답이라고 자기가 자기 맘대로 이걸 정해버린다고요.

그러면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어 준 거예요. 말을 한다는 자체가. 필연으로 바꾸게 되면 왜 바꾸느냐 하면, 나는 정답을 안다는 것을 자랑질하고 싶어서 바꾸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 그러면 상대방이 “사랑이 뭔데?” 사랑이라는 말을 해놓고 내가 아는 사랑과 상대방이 받은 사랑이 이게 고정적 의미가 동일하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살아온 모든 환경에서 온 체험들, 변수들이 내 쪽에서는 갖춰졌지만 저쪽에는 내 체험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다를 주고받으면서도 자기가 자기 맘대로 각자 해석해 버리는 겁니다. “생명을 받으세요.” “생명이 뭔데요?” “이거 생명이요.”

성경에 나오는 생명, 그리고 구원, 천국, 이 모든 단어가 이게 우연에서, 주님이 개입해서 규정이 되어야 되는데, 주님이 매일같이 일으키는 사건으로 규정이 되어야 될 텐데 내가 그 말을 사용하는 순간 나의 의로움과 나의 잘남과 내 구원받았음을 자랑질 하는 용도로 이미 용도변경이 되어버린 거예요. 나 이정도 아니까, 예수 아니까 나 믿는 사람이라고 쳐달라는 겁니다.

기도원에 가면 기도 빨 시작하기 전에 먼저 시동 거는 대목이 있지요. 삼위일체 하나님이니까 처음에 주의 이름 부를 때 세 번 불러요. 쭈여~, 쭈여~, ㅈ(지읏)이 아니고 ㅉ(쌍지읏)이지요. 쭈여~ 쭈여~ 쭈여~! 그 다음에 랄라라라라……, 시작되는 겁니다.

그러면 쭈여~, 할 때 그 주의 의미가 뭐냐고 주께서 물으신다면 그냥 자기 한 맺혀서 주여 부른 거예요. 자기 인생이 비참하니까, 서글프니까, 허망하니까 어떻게 이거 괜찮은 것으로 바꿔달라는 거예요. 주께서 이야기하지요.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너는 혼돈의 루프야. 혼돈의 되풀이가 되어야 해.” 그게 마땅한 거예요.

혼돈이에요. 정답이 없어야 되는데 자꾸 정답을 찾으려고 하니까 자꾸 우리는 마귀한테 속고 또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남편이 아내보고 이야기합니다. “고등어찌개 한번 해도!” 남편이 그게 먹고 싶어서. 그러자 아내가 하는 말이 “해줄게” 이렇게 된 겁니다.

그 아내의 표정과 말투를 듣고 남편이 하는 말이 “때려 차라. 내가 거지가?” 아내가 하는 말이 “해 달라 매?” “억지로 하는 그거 그 고등어찌개 나 안 묵고 싶다. 내가 걸뱅이가!” 이렇게 된다고요. 무슨 말이냐 하면, 어렵게 표현하면 이렇게 돼요. 왜 내가 미처 모르는 욕망을 아내 너는 왜 나에게 안 가르쳐 주느냐, 그 말이에요.

진짜 어렵다. 내가 뭘 원하는지 아내라면 ‘남편아, 너 이거 원하잖아.’라고 왜 진즉 안 가르쳐 주느냐 그 말이지요. “내가 고등어찌개 먹고 싶다는 것을 꼭 내 입에서 이야기해야 돼? 먼저 알아서 ‘고구마튀김 해줄게’ 뭐 이렇게 알아서 해주면 좀 좋아.” 그러면 아내가 하는 말이 “내가 니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너 가 아닌데 네가 뭘 원하는지 너도 모르는 너의 욕망을 내가 미쳤다고 그걸 내가 왜 알아야 되는데? 협상하자. 햄버거 사줄게. 그러면 됐나?” 이런 식으로 대충 협상과 타협에 들어갑니다. 이 성경말씀을 가지고 전에부터 있었던 우리의 선배들, 이스라엘 사람들은 실제적으로 일상생활에서 성경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몰라요.

그들이 안식일에 준수해야 할 것도 많이 만들어놓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런 게 있어요. 안식일에는 당나귀에 방울 달고 산책시키지 말라, 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BC1-4세기까지 만들어진 랍비들의 모음집이 있어요. 그걸 <탈무드>라 하는데 거기에 나와요. 그러면 사람들은 ‘아하, 안식일 날 당나귀가지고 뭔가 장사하려 했는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런 뜻이 아니에요.

당나귀가 문제가 아니고 당나귀 목에 달린 그 종이 문제에요. 왜 종이 문제냐? 유대인들이 옛날에 짐승을 시장에 내다 팔 때는 목에다 종을 다는 관습이 있었어요. 그런데 종을 딸랑딸랑 움직이면서 시장에 가는 게 아니고요. 안식일에 장사하면 안 되니까요.

안식일에 당나귀를 산책을 시키게 되면 당나귀 목에 달린 종소리를 듣게 되는 이웃집 사람들이 ‘저 사람은 왜 안식일에 당나귀를 시장에 가서 팔려고 하느냐? 그러면 안 되지.’라고 은연중에 그들이 속아 넘어가게 되는 동기를 제공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듣는 이웃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키려 하는데 누구 하나 안식일을 위반했다는 인식이 들어와 버리면 내 안식일 지키는데 불편해 지니까 너희들은 안식일 날 당나귀 목에 방울 달고 산책을 시키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 유대집단은, 우리 하나님이 택한 집단은 안식일을 위반하지 않는 집단이다, 라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안식일을 어기라는 악마의 속임수에 절대로 안 넘어가려고 그들은 발악을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거예요. 율법으로 다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나라 고려신학교 교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로 일요일에 TV틀지 마라. 거리가 멀어서 버스 타고 교회 올 것 같으면 아예 토요일에 그 근처 여관에서 자고 오라. 버스 타면 그것이 하나의 노동이 되니까. 그 정도로 지켰습니다. 안식일을 지켜라. 하나님이 지키라고 하면 지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뭔가 지키라는 말은, “제발 좀 네가 너 자신을 속이는, 네가 너한테 속아 넘어가는 그것을 나한테 노출시켜라.” 그 말입니다. 거룩하지도 않은 존재가 거룩하려고 애쓰는 네 속임수, 네 속임수가 바로 나다. 그것을 털어놓으라고 율법을 준 거예요. 구원될 수도 없는 인간이 교회 왔다고 구원된다고 착각하는 그 착각된 나를 보여줘라. 그 말이지요. 말씀을 통해서.

그런 대목이 이러한 유대인들의 지독한 자기구원, 자기 의로움, 살아보겠다는 그 의지, 그것을 고발하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마태복음 3장에 나오는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이 하는 말을 여러분이 들어보시면 이 세례요한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7절에 보면,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푸는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치면서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이들은 율법을 준수해서 의롭게 되어서 구원받는다는 그 주장들이지요. 이들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요 이야기를 했다고요. 독사의 자식들이 사람인데 사람으로 보지 않고 그냥 뱀으로 보는 거예요. “이 뱀의 자식들아! 악마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라고 이야기해요. 이 말을 여러분이 들으시면, 그냥 흘려듣게 되면 아, 세례요한이, ‘너희들은 독사의 자식이고 율법이 하는 일도 모른다.’ 하고 그냥 나무라는 정도로 생각하는데 가만히 들어보게 되면 이게 아주 엄청난 말이 되는 겁니다.

어떤 말이 되느냐 하면, 내가 어떤 사람을 주먹으로 때려놓고 맞은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느냐 하면, 왜 너는 나한테 맞는 것을 피하려 하느냐, 이런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지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아주 평화롭게 구축된 유대사회라는 조용한 어느 집단, 마을을 구성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것을 호작질하고 그것을 완전히 뒤집어놓는 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아니고 누구냐? 세례요한이 와가지고 분란을 자초한 거예요. 공격하는 쪽이 누구냐 하면, 세례요한 쪽이 말씀을 가지고 유대사회를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때린 자가 누구냐? 세례요한이 때리는 거예요.

때리면서 하는 말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보고 하는 말이, 내가 때리는데 네가 왜 피하려 하느냐, 이 말밖에 안된다고요. “내가 때리면 맞아야지. 내가 진노를 이야기하면 너는 곱게 진노, 저주 받아.” 그 것을 지금 우기고 있는 거예요. 세례요한이!

여러분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에요. 그들은 가만히 있었어요. 예를 들어서 세례요한이 만든 집단이 있는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이 오게 되면 “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넘보느냐? 저리가!” 이러면 우리가 이해가 되는데 그게 아닙니다.

지금 조용하고 평화롭게 되어 있는 유대사회는 누구 세계냐 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통치하는 그 세계라 그 말이에요. 누가 이동했어요? 세례요한이 엉뚱한 남의 동네로 이동한 거예요. 그걸 침노라 이야기하는데 침노, 이동했다 그 말이에요. 침노한 거예요.

침노해놓고 “왜 너희들은 내 주먹을 피하려고 애쓰느냐?” 이것은 횡포지요. 이것은 횡포입니다. 지금 여러분 얼굴이, 인상이, 이게 왜 횡포인지……. 이것은 어이가 없는 짓이에요. 어처구니없는 짓이에요. 교회에 있는데 중들이 와가지고 예배 방해하면 “나가거라. 이곳은 절이 아니고 교회다.” 이러면 우리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지금 동화사에서 법회를 하고 있는데 세례요한이 가서는 “왜 우리 세계를 너희가 건드리느냐?”라고 하게 되면 중들이 “우리가 뭐 어쨌게? 네가 들어왔어, 네가! 네가 들어왔다고!” “임박한 진노를 왜 피하려 하더냐?” “임박한 진노는 네가 먼저 이야기했잖아, 네가! 우리는 임박한 진노 없어. 임박한 진노를 네가 집어넣어놓고 왜 피하려 하느냐고 네가 억지 부리면 되겠어?”

복음은요, 억지도 세상에 이런 억지가 없어요. 복음만큼 심한 억지가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거예요. 안 믿는 게 당연한 거예요 이거는. 지금 전혀 얼굴 표정에 동의가 전혀 안 되고 있는데 그러면 하나 더 합시다.

이사야 1장 10절에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찌어다.” 10절에 그렇게 되어 있고 9절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라고 했어요.

잘 한 번 들어보세요. 9절에 이사야가 예언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하면, 이 현실은 끝이라는 거예요. 이 현실은 카오스, 혼돈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각자 안 속아 넘어가려고 하다보니까 이 세상에서 자기가 근사할 만한 권한과 자격이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밥 먹고 사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평화로우니까. 자기가 끝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자기가 혼돈이라고 해본 적이 없어요. 자기가 완벽한 질서체제를 갖추는 거예요.

그런데 이사야 1장 10절에 하는 말이, 하나님 말씀에 “딱 보니 너희들은 소돔과 고모라다. 그런데 왜 지금 당장 불 심판 내리지 않는가? 내가 조금 남겨준 사람, 내가 약간 남겨준 사람이 있기 때문에, 지금 너희들이 그 덕분에 그냥 혼돈이고 끝이면서도 그럭저럭 유지되고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 발상, 이 하나님의 자세와 태도, 이 발상을 아……, 우리가 동조가 되고 갖춰져야 돼요. 이 발상이!

안 속아 넘어가려고 애쓰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정답을 아는 자고,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살만한 권한이 있다고 여기는 그 사고방식, 그게 바로 혼돈이에요. 그게 마귀한테 속아 넘어간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님은 속인다, 안 속인다, 가 아니라 주님께서 ‘속지 말라’ 할 때 그 속음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속어 넘어가지 않는다, 그게 아니고 그 반대말은 정리정돈이에요.

‘속지 말라’에서 속음의 반대말이 안 속아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속음’의 반대말이 ‘안 속아 넘어감’이 아니고 정리 정돈하는 것, 이게 속아 넘어간 확실한 증거입니다. 정리정돈, 자꾸 김 일우가 생각나네요. 뭐든지 정리정돈 하는 거예요.

주어진 모든 것을 다 깔끔하게 정리정돈 하는 사람, 그 사람은 그것이 자기세계에요.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하나의 질서체제입니다. 이게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속지 말라’에서 속음과 속지 않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은 이거예요. 그냥 계속 주시는 거예요. 오늘 소통 안 되네 정말…….

마태복음 5장 45절에 보겠습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뭐냐? 계속, 마귀 들렸던 지옥가든 천국가든 묻지도 않고 계속 주시는 거예요. 주시고 또 주시고, 또 주시고, 또 주시는 거예요.

출애굽기 16장 19절에 만나를 주시는데 하나님께서 만나 주실 때 주의사항을 줬습니다. 그게 뭐냐? 절대로 모으지 말라는 거예요. 만나는 내 소유가 아니고 소비용이에요. 왜? 주시고 주시고 또 주시기 때문에. 여러분, 말씀을 기억하지 마세요. 말씀을 들었거든 버리세요. 제가 그동안 계속 들어온 이야기가 뭐냐 하면, 설교 들을 때 그뿐이고 다 잊어버렸다는 거예요.

바로 그겁니다! 바로 그것이에요. 사람이 말씀을 잊어도 괜찮아요. 계속 주시기 때문에 그래요. 말씀을 자꾸 기억하고 간직하려고 하는 것은 그것 가지고 뭐 해보겠다는 거거든요. 안 속아 넘어가 보려고 하는 거예요. 어떤 혼돈에서 질서를 뽑아내려고 하는 겁니다. 우연에서 필연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거예요. 나를 위한 필연.

그걸 보면 참 우리 교인들처럼 신앙생활 잘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뭘 알아야지 돌아서면 다 까먹는데. 햇빛과 공기를 계속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뭐냐 하면, 계속 주시는 하나님을 감사히 여기는 거예요. 이만큼 얻었다, 하지 마세요. 만나는 이만큼 얻는 게 안돼요. 썩어버립니다. 간직하지 마세요. 썩어버립니다. 끊임없이 주시는 거예요.

따라서 끊임없이 주시기 때문에 어떤 질서 갖추기가 필요치 않습니다. 내 것이라는, 안정적인 나의 것을 만들 이유가 없어요. 그러나 이 세상 보세요. ‘여기서 여기까지는 네 것, 여기까지는 내 것. 너는 네 질서 잡아. 나는 내 질서 잡을래. 나는 내 인생 살래. 나는 어릴 때부터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어서 이게 내 인생이야. 내 인생은 이렇게 살아왔어.’ 딱 질서체제를 갖추는 순간 그게 속지 않으려고 애쓰는 거예요.

그 안에는 내가 진실이라고 여겼던 것만 계속해서 모아놓은 겁니다. 여러분, 그것이 얼마나 인생을 스트레스 받고, 비참하게 만들고, 힘들게 만들고, 주눅 들게 만들고, 자기 인생을, 자기발목을 도끼로 찍는 짓입니다.

사람이 윤리도덕을 찾는 이유가 그만큼 불안하기 때문이에요. 뭔가 내세울 것이 없으니까 자꾸 윤리도덕을 가지고 내세워서 내 것이라고 유지해보려고 자식 잘 키웠습니다, 나쁜 짓 한 적 없습니다, 자꾸 그렇게 하는 이유가, 내 것이라도 뭔가 건사해서 남기려고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제가 이야기했듯이 혼돈입니다. 비참하게 이 땅 자체가 혼돈과 혼돈의 반복, 끝과 끝의 반복, 하루를 살아도 끝을 이야기하고 그 다음날 살아도 끝을 이야기하고, 그 끝에서, 타임루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지요.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목적은, 이유는 뭐냐? 왜 인간이 자꾸 속지 않으려고 하는 금지된 것을 왜 자꾸 좋아하는가? 안 속아 넘어가려고 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어떻게 오셨는가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주님이 인간세계에 들어오는 방식은 뭐냐? 딱 물으면 신학자가 되었든 목사님이 되었든 일반교인이 되었든, 처음교회에 온 사람도 들어온 기독교 풍월이라도 읊는 사람들은 이야기해요. “주님이 인간세계에 들어오는 방식은 뭐지요?” 딱 물으면 나오는 답변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육신으로 태어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 들어오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더 근원적인 게 뭐냐? 그것은 바로 주님이 혼돈, 이 땅에 카오스, 질서 잡힌 이 세상에 혼돈, 원래적인 카오스, 혼돈의 입장, 자리를 이 땅에 심는 방식으로 주께서 이 땅에 오셨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잉태치 못한 자가 아기를 낳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세계에서 남녀가 결합해야 아기 낳는 다는 그 질서체제를 완전히 일거에 무너뜨리는 겁니다. 일거에 무너뜨리는 거예요.

개한테 사람 옷 입힌다고 해서 그게 사람 되는 것 아니지요. 사람에게 복음 전하고 성경지식 전한다고 이것이 의인되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본인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몰라요. 천국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르고, 구원받는 것은 내가 불가능한 존재라는 것을 본인이 인정을 안 하고 있습니다. 안 속아 넘어가려고 악마에게 속아 넘어가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을 다 동원해서, 지식을 다 동원해서, 옳은 것만 챙겨서 낚아채서 그것으로 천국가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그냥 자기 분수대로 속아 넘어가면 되는데 그러면 나한테 손해가 될 것 같아서 버티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 땅에 카오스, 혼돈을 심어놓았습니다. 잉태치 못하는 여인의 몸에서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욕 얻어먹고요, 마리아 욕 얻어먹었어요. 왜? 이미 정혼한 사람이 있었거든요. 이미 정혼한 사람 요셉이 있어서 그가 마리아와 관계를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네가 나 몰래 어떤 남자하고 동침해서 아기를 배었으니까 내가 다른 남자 같으면 길길이 뛰었겠지만……”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 수준이 뭐냐 하면, “……우리 여기서 청산하자.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애 배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위반된다.” 그러니까 요셉은 그 당시의 코스모스, 이 질서체제에서 안 속아 넘어가려고 한 겁니다.

불결한 여성과 결혼 안함으로서 이미 남성을 아는 여성, 처녀성을 잃은 여성과 결혼하지 않음으로서 하나님께 거룩한 결혼이 되고자 하는 그러한 기대에 요셉이 이미 속아 넘어간 거예요. 본인이 누군지를 모르고, 본인이 죄인인지를 모르고 어쨌든 간에 의로운 쪽으로 살아남으려고 했던 겁니다. 카오스가 아니고, 혼돈이 아니고 질서체제에 있으려고 한 거예요.

그 때 천사가 요셉에게 언질을 줬지요. “저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네가 군소리 하지 마. 가만있어. 네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야.” 요셉은 자기 평생을 살아온 자기 스토리, 자기인생, 에피소드의 연결체, 나만의 인생에서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요셉의 입장에서 어느 누구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진짜 혼란스러운 이야기에요. 처녀가 남성 없이 홀로 아기를 가진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걸 광주강의에서 깨진 유리파편이라고 한 거예요. 자아라는 유리잔이 와장창 깨져버린 거예요. 나를 나답게, 곱게, 그동안 일평생 곱게 키워온 내 자아가 생각하지도 못한 혼돈에서부터 나오는 원래적인 원초적인 말씀으로 한방 맞고 난 뒤에 저 사람 욕하고 저 사람 비판하다가 본인이 본인을 속여 왔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악마가 한 성질 하거든요. 악마가 자기성질을 못 이기듯이 모든 인간의 공통점은 자기가 자기 성질을 못 이겨서 자기가 자기를 그렇게 엎어놓고 자빠트리고 괴롭히는 겁니다. 자아가 자기를 괴롭혀요.

저는 이것을 뭐로 표현하느냐 하면, 개가 이사한다고 주인이 빠트리고 간 버려진 인형을 개가 자기 성질을 못 이겨서 이리 물어뜯고 저리 물어뜯듯이 ‘너는 왜 나의 요구사항을 못 들어줘? 왜 너는 내가 원하는 내가 될 수 없는 거야? 나는 나에게 실망했어.’ 이런 식이에요. ‘그런 실수는 안해야지 옳았지 않았을까?’ 이런 식으로.

내가 나에게 닦달내고, 나한테 원망하고, 그러면서도 또 나를 위로한다고 ‘탕수육이나 한 그릇 먹으러 갈까.’ 이런 식으로 달래고, 달래고, 어르고, 물어뜯고, 쥐어뜯고, 집어던지고, 그러다 완전히 더럽히고 더러워진 인형 같아요, 우리가.

평소에 우리 자신은 교회 오면서 얼마나 생명이라는 복음을 가지고 마치 그게 거래대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겼습니까? 주님께서는 겨울이 지나면 여름철이 오듯이 모든 올라프, 모든 눈사람은 다 여름 앞에서 “너 어디 있느냐?” 눈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녹아버렸지요.

그렇게 없는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이 질서체제, 강력한 법적체제에 이걸 다 녹여버립니다. 전부 다 혼돈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카오스로 만들어버려요. 그래서 인간이 소통하고 있고 사용하고 있는 그 어떤 언어에 대한 개념, 이해가 성경 어느 한 문자도 해석이 안 되게 만들어버렸어요. 어떤 구절도 해석이 안 되게 만들었어요.

해석이 된다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왔을 때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네가 임박한 하나님의 저주를 피하려고, 네가 조금 안다고 네가 안 속아 넘어가려고 왔냐? 그게 바로 너희들에게 저주가 임한거야.”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거예요. 우리가 아는 이 질서체제 가지고는 어떤 성경말씀도 감당이 안 됩니다. 신학박사도 감당 안돼요. 감당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아는 성경개념을 전부 다 일상개념으로 바꾸세요. 하루하루가 자아라는 유리잔이 깨지는 그 무한 루프에 빠져 있습니다. 남이 못살게 굴지 않으면 내가 나를 못살게 굴어요.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낮에 실수한 것이 있어가지고 잠을 못자요.

주님은 계속 주시는데, 주님은 은혜로 주시는데 그 은혜가 자아한테 다 막혀버렸어요. 나의 잘남에 다 막혀 버렸습니다. 그냥 거지한테 주면 고맙다고 하면 되는데 내 인생은 저 사람처럼 되지 않아야 되고, 내 인생은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아야 되고, 그게 나한테 합당한 것이니이다. 그게 바로 안속아 넘어가려고 애쓰는 겁니다. 안 속아 넘어가려고! 그건 발악하는 거예요. 악마의 특징은 발악하는데 있어요.

자, 그러면 예수님께서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잉태치 못하는 자에게서 잉태했다는 그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를 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는 옛날 지나간 이야기고 오늘날 우리에게는 해당되는 게 없지 않느냐?” 이렇게 이야기 할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6절에 보게 되면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나님의 완성된 율법이 나의 허락도 없이, 자아의 허락도 없이 그냥 쑥 들어옵니다. 혼돈이, 카오스가 이 코스모스, 질서체제 안에 쑥 들어와 버려요. 그러면 이 나의 몸은, 내 자아 소유가 아니고, 내가 나에게 닦달 낼 내 자아 소유가 아니고 주님 주시는 햇빛과 같고 주님이 주시는 단비와 같아서 이 몸 신체가 주님이 거저 주신 거예요.

거저 주신 것은 정리정돈 하지 마세요. ‘이제 바르게 살아야지. 이제는 예수 믿었으니까 빛과 소금이 되어야지.’ 어디 잡지 이름 같아요. <빛과 소금> 그런 식으로 자기를 자꾸 챙기려고 하지 마세요. ‘이제 그리스도의 성도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나쁜 짓은 안해야지.’ 제발~, 영어 나와야 돼, 제발, please~, 제발, 그렇게 살지 마세요. 전혀 그렇게 살지 마세요.

내가 나를 뜯어 먹더라도 그것조차 주님의 뜻인지 알아야 돼요. 우리 육신은 이미 버려진 더러운, 전에 살던 아기가 갖고 놀던 인형이에요. 이사 가면서 놔두고 간 거예요. 이 세상에 속한 육신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준비한 것은 뭐냐? 고린도후서 1장 5절에 보면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주님께서 영원한 영광스러운 옷을 우리에게 입힙니다. 그게 뭐냐? 하늘나라 양복점이에요. 하늘나라 양복점. 양복점에 옛날 가다마이 입고 가지 마세요. 우리는 어차피 찢어져야 되고 꿰매거나 수리도 하지 마세요. 그냥 포기해야 돼요. 우리 몸은,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그냥 포기하라고 주는 겁니다.

왜? 계속 주니까. 주의 말씀을 계속 주잖아요. 안 받았다고요? 안 받았다면 정말 할 말 없고요. 안 받았으면 할 말 없는 거예요. 햇빛, 공기, 안 받았어요? 그러면 햇빛 공기는 에디슨이 발명한 거예요? 신앙생활 오래 했다고, 성경신학 많이 안다고 그거 자랑하지 마세요.

기본으로 돌아가세요. 기본. 혼돈 속에 주께서 그냥 주시더라. 뭘? 은혜를, 긍휼하심을, 불쌍히 여기심을. 그것만 있어도 천국 가는데 아무 지장 없어요. 지장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뿐이에요. 주님이 불쌍히 여겨주심, 그것뿐이에요. 아무것도 아닌 진짜 지저분한 인간에게 그렇게 긍휼, 사랑을 베풀어주는 것, 그것뿐입니다.

지난 시간에 숙제를 분명히 드렸는데 우리교회 계단 올라올 때 자물쇠 잠겨 있거든요. 문 한번 닫아놓고 열어보세요. 그게 열리는지. 그거 안 열리면 지옥 갑니다. 자물쇠만 덜렁 저 혼자 채워놨기 때문에 그냥 문 열면 열리게 되어 있어요.

자기 자신을 시시하게 보면 누구나 천국 문 다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왜 시시하냐? 거저 주시는 몸으로 살고 거저 주시는 목숨으로 호흡을 하기 때문에 내 것이 없으니까, 내 것이 없으니까 그냥 천국도 내 것이 아니에요. 그냥 거저 주신 거잖아요. 거저 주신 것으로 거저 가는 게 이게 뭐가 어려워요? 이게 뭐가 어렵습니까?

이것은 결국 무슨 고백이냐 하면, “주님, 제가 저를 생각하지 않게 하옵소서. 저는 없어도 상관없어요.” 이거예요. “제가 없어져도 그만이에요, 주님.” 남들 보기에는 완전히 미친 거지요. 이게 반대가 되고, 성령을 받지 않고 주님이 주시는 것을, 악마가 그걸 거부한다면 이 복음마저도 라면 스프보다 못한 거예요.

라면 스프는 라면 끓일 때 필요하기나 하지 평소에 우리가 이 말씀 듣고 유리문……, 저 유리문이 문제라. 유리문 열고 나가면 그 다음부터는 복음? 잊어버렸어요. 아무 쓸모가 없거든요. 내가 근사하게 되고 내가 잘난 존재가 되는데 복음은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가 장사하기 위해서 뭐냐 하면, “여러분이 여러분답게 되고 싶습니까? 여러분, 욕망을 채우고 싶습니까? 기도하세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하실 줄 믿씁니다. 할렐루야!” 이런 식으로. 거기에 반응해서 “아멘!” 아멘인지 라면인지 구분도 안가요.

우리는, 주님의 육체는 그냥 주신 것이고 우리의 목숨도, 하루 생명도 그냥 주신 거예요. 햇빛과 공기도 그냥 주신 거예요. 그냥 만나같이 받아 챙겨서 하루치는 하루 소비하고 내일 되면 또 주시면 받고 없으면 죽고, 그러면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도는 하나님의 전선입니다. 전류가 흐르는 전선이에요.

전선을 소유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냥 연결로 생각해야 돼요. 우리는 운반체지 운반체를 살아 있다고 하면 안돼요. 운반체는 그 전류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운반체 자체는 죽어 있어야 돼요. 죽은 자에게 하나님의 원래적인 카오스가, 카오스로 오셨던 그 하나님의 주심이, 성도됨이, 하나님의 다 이루심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양복점, 옷 입히는, 새로운 성도를 하나님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좀 맡기세요. 좀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 맡기는 즐거움.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잊어버리시고, 생각하지 않고 가볍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속지 않으려고 하는 그 악바리정신, 진리만 골라서 내 것으로 만들려는, 그래서 질서체제를 이루어서 나 여기 있다고 외치고 싶은 그 품성이 바로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 악마의 저돌적인 발악인 것을 저희들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주여, 이제 악마와 헤어지게 해주시고 모든 것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거저주심, 불쌍히 여기심으로 남아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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