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철학과 복음

아빠와 함께 2021. 3. 14. 23:27

철학과 복음

2021년 3월 14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2:8-10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2: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사도 바울 시대에도 철학이 있었습니다. 사도는 당연히 그것을 의식하지요. 그런 이론들에게는 계속적인 감사가 없다고 말합니다. 철학은 인간이 자신을 살려내기 위해 자기에게 이해가 되는 지혜를 계속 끄집어 내어놓은 지식의 집합입니다. 이러한 지식들은 어떻게든 자연에 적응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인간들에게 너무나도 혼란스럽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혼돈 속에 질서를 잡아내어 그것으로 자기 삶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했습니다. 철학이란 눈에 보이는 것들을 분류해서, 그 분류한 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으로 내 것으로 사용하기 위한 시도입니다. 이 시도에 필연적으로 헤아림을 시행됩니다.

‘헤아림’ 그것은 곧 수(數)입니다. 수는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과 대응되는 조건 하에 진리라고 간주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들을 변화해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수(數)라고 믿었습니다. 이 세계를 ‘형상의 세계’라고 간주했습니다. 이 수는 항상 눈에 보이는 것과 대응이 되어야 하기에 1, 2, 3, 4처럼 정수이어야 했습니다.

예를 들면, 나침반에는 동,서,남,북 네 개의 방향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4’가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왜 방향은 네 개로 정해지느냐에 대해서 그들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어쨌던 수라는 것은 정수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점차 자연에 대해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로만 되어 있어야 한다는 실재 세계에 ‘-’를 도입한 겁니다. 이는 소위 ‘거짓된’ 조차 이제는 인간들이 감당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빼앗긴 것’, ‘뒤로 후퇴하는 것’들이 있더라도 하지만 앞으로 다시 그런 부정한 사태를 일으키지 않고 부정적인 징벌과 처벌(-)를 가하면 (-)×(-)가 (+)가 되어 후딱 실재세계에 돌아올 수있다고 믿었던 겁니다.

이제는 철학은 자연을 정복하려고 합니다. 이 정복을 통해서 자연에게 혼돈을 야기하는 미실재적으로 간주되는 어둠의 힘까지 인간의 지식 범위 안으로 잡아당기려고 합니다. ‘허수’이 바로 그것입니다. ‘허수’란 같은 수를 곱해도 마이너스가 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는 곧 이 자연세계는 대응할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눈에 보이지 않는 힘까지 포함시켜서 미지의 부정적 힘까지 인간이 다룰 수 있는 대상 범위에 포함된다고 본 겁니다. 즉 존재하지 않는 세계마저 곱을 하면 거짓, 곧 ‘마이너스’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미 인간의 지식의 범위 안에 들어와 있다고 보는 겁니다. 자연적 관찰에 의해 진리를 찾는 작업을 과학에게 빼앗긴 철학은 따른 다른 분야에 눈 돌립니다.

그것은 윤리와 도덕분야입니다. 윤리와 도덕은 개인 윤리 뿐만 아니라 국가 윤리와 사회 공동체 윤리를 탐구하여 상호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교훈적 자문을 주려고 시도합니다. 하지만 이미 과학 발달로 인해 이 세상은 인격 위주가 아니라 사물 위주로 바뀌어졌습니다. 무엇이 선한 것일까요?

바로 사물의 생산체제에 도움이 되는 것이 선한 것이라는 사실로 윤리가 굳어졌습니다. 경제적 생산체제가 국가를 안정적으로 지탱할 수 있기에 공연한 관념에 불과한 윤리는 뒷전으로 밀리게 되었습니다. 힘의 체제를 미래에 까지 보장하기 위해서 시간을 돈으로 환산해서 현재에 비축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그게 바로 ‘자본’이며 세상의 윤리는 이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보탬이 될 경우에만 선한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 자아의 가치는 어떻게 될까요? 인간 자아마저 이미 뇌과학 소관으로 넘겨졌습니다. 태양에너지가 동물 세포 내에서는 전기에너화 되었습니다.

인간의 감정과 정서와 양심과 관념을 관장한다고 여겨진 그 실체적 바탕은 실은 전압적 펄스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관여하는 세포내의 단백질들이 알 수 없는 지시자의 지시를 따르면서 자아를 지탱하고 사수하는 일에 분주합니다. 자아는 지금까지의 기억의 다발이었던 겁니다.

윤리적 훈계가 아니라 분자체인 신경 전달물질에 의해서 인간은 정상인으로 되돌옴이 가능해진 겁니다. 그러면서도 뇌과학은 이런 일을 시킨 궁극적인 지휘자의 실체를 두뇌 안에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늘 모자람과 미흡함이 발생되고 여기에 대해서 자아는 성공/실패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감사가 나올 수 없지요. 자신의 껴안은 지혜로 자신을 구원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복음은 자기 사람을 살해하시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으로 통하는 언약 안에는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동행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언약에는 하나님 이름 외에는 그 누구도 통과하지 못합니다.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 15:10,17) 자신의 이름을 살리기 위해 몸부림치는 인간은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버지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잡습니다. 우리는 이삭의 입장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아버지는 분명 칼을 들고 자신을 죽이려했고 그 행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았습니다. 따라서 분명 죽어야 될 이삭 본인은 살아있게 되면서부터 ‘누가 나를 살렸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근처 수풀에 잡혀 있는 수양 덕분입니다. 바로 이 수양이 에수님이십니다. 이삭이 스스로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용납될 수 없고 도리어 자신을 지켜주리라고 믿던 그 하나님으로부터 살해당하는 바로 그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요 언약의 완성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신성함 안으로 들어오게 된 자들은 십자가 능력으로 살해당하고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성공/실패의 인생은 끝났고 이제 남은 것은 예수님을 위한 삶을 살게 됩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이런 자만이 영원히 감사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각가지 요령과 약은 수가 신학의 이름으로 덮쳐도 십자가 안에서 우리 자신이 이미 죽은 자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9강-골 2장 8-10절(철학과 복음)210314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2장 8-10절입니다.

골로새서 2:8-10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2장 7절 끝에 보면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했는데 이 감사함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바로 복음에서 나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신성의 충만함에서 감사가 나옵니다. 그런데 세상 살면서 감사가 안 나온다는 것은 8절에 가보면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우리가 말려들었기 때문에 감사가 나오지 않는 겁니다.

정리하면 감사가 나오는 것은 본인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 지키기 위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 안에 있으면 저절로 감사가 나오지요.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특징은 성공과 실패가 아예 없다는 겁니다. 성공과 실패만 없어도 뭐 절로 감사가 나올 수밖에 없지요. 사람이 힘든 것은 실패 안하고 싶고 성공하고 싶어서 안달 나다 보니까 몸도 피곤하고 세상만사가 서글프고 짜증나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주신 신성과 거룩 충만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안’ 속에서 자기가 지금 몸부림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대단한 사람 되려고 하다 보니까 감사는커녕 불평, 원망만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원인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명쾌하게 이야기합니다. 속고 있다. 뭔가 너희가 세상풍조에 속아 넘어가고 있다.

그것을 철학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도바울 당시에도 철학이 있었어요. 그런데 철학이라는 것이 인간이 고안해 낸 거지요. 인간이 만들어낸 거예요. 인간의 지혜의 시작과 끝이 철학입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누구 집에서 태어나요? 자기 집에서 태어나겠지요. 태어나면서 듣고 보고 느끼고 하는 모든 것이 철학입니다. 부모의 철학을 자식이 고스란히 물려받지요.

그 철학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감사가 나오지 않는다는 뜻에서 그걸 속임수라고 본 겁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뭔가 속고 사는 세상 속에 출생한 겁니다. 따라서 속지 말라,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더 똑똑하라, 해도 문제가 해결 안돼요.

중요한 것은 철학의 반대말이 복음이라는 겁니다. 복음이 딱 주어지게 되면 ‘아, 속았구나. 아, 내가 알고 있던 것이 이게 철학이구나.’ 꼭 철학과를 졸업해야 철학을 아는 게 아니에요. 철학에 관련된 문과계통의 공부를 했다고 해서 비로소 철학을 접수하는 게 아닙니다.

복음이 빠져버린 모든 세계가 철학의 물결로서 휘감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이 시간에 좀 지루하시더라도, 성경에 이렇게 철학이 나오니까 우리를 태어날 때부터 휘감고 있던 철학이 도대체 뭔지를 거기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좀 소개를 하고 싶어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철학이 나왔고요. 철학이라 하는 것은 문자로 구체적으로 이론이 형성되어 있었고, 세상은 이렇다고 이야기가 되어 있고, 그것이 나중에 17세기에 들어와서 철학이 뭘 로 인수인계되었느냐, 바통을 이어받았느냐? 과학이 바통을 이어받은 거예요. 그래서 과학이 철학이에요.

그러면 철학은 무엇이냐? 철학은 눈에 보이는 것을 내 것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설명하는 게 철학입니다. 못들은 분을 위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철학이란 눈에 보이는 것을 질서를 잡아서, 규칙을 세워서 그것을 내 것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론이 철학입니다.

그 철학을 위해서 제일먼저 그리스철학에서 한 것은 뭐냐 하면, 헤아림이었습니다. 하나, 둘, 셋……, 헤아리는 거예요. 그 헤아리는 것이 뭐냐? 숫자입니다. 숫자를 뭔가 헤아린다는 것은 눈에 뭔가 보인다는 거예요. 보여야 헤아릴 것이 아니겠습니까?

보이면서 그냥 보이는 것이 아니고 구분을 짓습니다. 보이는 것 중에서 서로 다르니까 그 다른 것을 가지고 구분해놓고 그 다른 것 사이에 숫자로 헤아리는 겁니다. 1, 2, 3, 4, 5, 6……, 이렇게 숫자를 헤아리는 거예요. 그 숫자가 발전해서 상업거래, 금전거래, 영수증, 이런 것으로 발달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인간은 눈에 보이는 그 실체 보이는 게 그게 전부에요. 그걸 분류하면서 내 것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분류하기 편리하도록 철학이 들어간 겁니다. 분류하면서 여기서 그 숫자로 만들어진 지식을 기점으로 해서 모든 지식들이 확대가 되는 거예요. 확산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실재, 실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헤아리는 그 숫자 1, 2, 3, 4……, 그것은 어디에 해당되는가?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없지만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이성이라는 데서 생긴 형상의 세계에 있다는 겁니다. 숫자는 형상의 세계에 있다.

방금 제가 추상적으로 예를 들었는데 실제 예를 들면 동서남북, 나침반에는 동서남북이라고 네 방향이 있잖아요. 동서남북, 네 개, 이게 철학입니다. 이게 과학이고 철학이에요. 하여튼 여러분들이 듣고 알았던 것은 모두 다 철학이에요. 거기서는 감사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동서남북, 이거 왜 생겼어요? 우리는 그것을 ‘왜?’라고 묻지 않지요. 그러나 철학자는 그것을 물어요. 왜 이것을 정했느냐? 사는데 편리하도록 동서남북을 정한 거예요. 그러면 나침반의 방향이 몇 개냐? 네 개라는 겁니다. 4가 나와요. 4, 네 개, 5가 아니고 3이 아니고 2가 아니고 방향이 네 개라는 겁니다.

이 방향이 네 개라는 이것은 확실하고 참이고 객관적이다. 필연적이고 참이고 확실하니까. 이걸 그들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진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철학은 뭐냐 하면,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을 유용한 것으로 이미 진리라는 것을 확정지은 겁니다.

진리라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유익이 되고 도움이 되는 그 지식이 진리다. 그래서 진리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토 달면 안 된다. 그것으로 밀어붙이자. 이게 확대고 확산이지요. 지식의 확산입니다. 동서남북, 그 지식을 모르는 자는 무식한 자가 되어서 배를 탈 자격이 없습니다.

사회적 직업 구하는데도 지식이 이렇게 유용한 거예요. 어릴 때는 근육질의 깽패 들, 학폭, 이게 힘이 되지만 커서는 아는 것이 힘이 돼요. 동서남북도 모르고 무슨 배를 타고 선원이 될 수 있느냐. 나침반 볼 줄 모르면 타지 말라. 이것이 하나의 테크닉, 기술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술을 발휘해도 왜 우리는 동서남북을 정했는지 도대체 그 이유에 대해서는 본인이 까마득히 모르고 있어요. 알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철학의 처음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 숫자로 맺어주기, 연결 짓기, 그게 수학의 처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이 자연에 적응하고 싶어서 자연의 원칙, 방향은 네 개밖에 없으니 그 원칙을 정해서 우리 사는데 보다 편리하도록 그렇게 시도를 한 겁니다. 그 전에, 그리스철학 이 전에 이미 바벨론에서 농사짓기 위해서 달을 관측했거든요. 그것도 눈에 보이는 거예요.

관측을 해서 달이 어떻게 커지고 작아지는 것을 숫자로 계산한 겁니다. 숫자로 계산해서 자연에 잘 적응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그걸로 봐서 철학의 진리가 뭐냐? 내가 사는 게 진리라는 겁니다. 지금 전혀 어렵지 않지요. 왜 우리가 평소에 사는 거니까.

그런데 여기서부터 좀 어렵게 시작합니다. 사과가 하나 있으면 1, 두 개가 있으면 2, 그래서 1, 2, 3, 4……, 이걸 정수라 하는데 이건 전부 다 앞에 있는 눈에 보이는 것과 일대 일 대응이 돼요. 연결이 된다고요. 그런데 갑자기 마이너스가 나와요. 아, 이것은 반칙이지요.

왜? 마이너스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없는 거잖아요. 진리라 하는 것은 있는 게 진리인데 마이너스, 빼기(-), 빼기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없는 거예요. 그것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이 눈에 보이는 것, 옳은 것, 바른 것 그것만 인간은 추구한다고 생각했는데 사회생활하면서 나쁜 짓, 못된 짓, 빼앗는 짓, 그런 것들도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따라서 인간은 나쁜 짓을 하더라도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을 알기 때문에 후딱 선한 쪽으로 빨리 돌이킬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그 선한 쪽은 눈에 보이는 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나도 진실 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것과 대응되기 위해서 나쁜 것이 있다면 ‘나쁜 것은 안 돼’라는 나쁜 것, 부정적인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것을 곱하기 해버리면 이게 다시 양의 수, 눈에 보이는 정수로 되돌아올 수가 있어요.

이게 바로 ‘마이너스(-) × 마이너스(-)’가 ‘+(플러스)’가 된다는 원리입니다. 마이너스는 그렇게 만들어진 거예요 항상 되돌아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다, 눈에 보이는 것이 진실이다, 눈에 보이는 것 말고 진실은 없다. 이게 인간의 철학이에요. 인간의 지혜의 한계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이제는 인간이 자연에 적응하기가 싫은 거예요. 자연을 이제 빼앗어 먹고 싶어요. 정복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나온 수가 뭐냐? 허수가 나옵니다. 허수라는 것은 뭐냐 하면, 같은 수를 곱했는데 마이너스가 되는 경우, 이런 희한한 수를 발명했어요.

이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것은 왜 만들었느냐 하면, 인간이 거짓되지만 인간은 마이너스(-)에 대해서 마이너스(-)로, 부정적인 것은 처벌을 함으로서 다시 플러스(+)가 된다는, 사회를 눈에 보이는 진실에 계속 붙잡아 두기 위한 방법으로 그렇게 했는데 인간의 그 관념적이고 추상적이고 종교적인 그 본능은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 다시 말해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나도 이미 알았지롱, 할 수 있는 방법은 뭐냐? 플러스(+)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마이너스의 영역자체, 그 지역자체도 인간 손에서 다룰 수 있도록 같은 수를 곱해서 마이너스(-)가 되는 허수를 만든 거예요. 같은 수를 곱해서 마이너스가 되는 수, ‘-2 × -3 = +6’ 이 되잖아요. 뭘 곱해도 플러스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마이너스에 마이너스를 곱했는데 이게 마이너스가 나왔어요. 이런 허수(i)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신감을 표현합니다. "악마야, 나와라. 우리는 악마의 존재마저 안다.“ 다시 말해서 악마라는 존재마저도 나라는 우리 인간의 세계에서 그 포착의 범위 내에서는 꼼짝 마라, 못 벗어난다. 그렇게 장악하기 위해서 허수라는 것을 만든 거예요.

이게 뭐냐? 인간의 형상입니다. 인간의 형상. 이것이 인간의 이름으로 가능한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은 정확하게 눈에 보이는 모든 것 그것만이 진실 되다. 보이지 않는 악마마저 허수라는 것을 발명해서 그걸 자기사람으로 탁 끄집어 당긴 거예요. 그림자가 있는데 높이가 궁금하다. 그것은 삼각함수를 만들어서 딱 해결되는 겁니다. 사인, 코사인 법칙으로.

정지된 이것이 나중에 어떤 속도로 몇 미터 갈 것인가? 이것은 미분, 적분이라는 수학으로 만드는 거예요. 미분은 속도에요. 적분은 거리. 꼬부라진 이것을 어떻게 면적을 구하지? 그 때 꼬부라진 그것을 자세히 보는 것을 미분, 그 미분된 것을 다 합치는 것을 적분, 면적 구하기 성공.

우주에서, 자연에서 이뤄지는 모든 변화를 신체가 다 못 따라가는 거예요. 소리를 백배로 키워도 청각이 다 못 따라가거든요. 아파도 아픈 느낌의 그만큼을 인체가 다 못 따라가요. 그럴 때 필요한 것은 지수함수, 로그함수를 상수화시켜서 계산하는 겁니다.

그리고 흩어져 있는 것을 어떻게 모으지? 이것은 분산, 산포도(散布度)라는 통계, 데이터를 처리하는 숫자가 따로 있어요. 컴퓨터 게임에서 캐릭터의 자리를 공간적으로 이동할 때 어떤 수단이 필요하냐? 이것은 매트릭스, 행렬을 가지고 좌표를 뽑아서 하게 되면 그대로 옮겨가요.

그리고 앞으로 어떤 함수를 가지고 사용할 수 있느냐? 그것은 미분방정식. 앞으로 어떻게 예측될 것이냐? 그것은 함수 그래프. 모든 것은 전에 어줍지 않게 대충 짜맞추던 그 철학을 그대로 과학이 인수해서 과학이 모든 것을 가져갔어요. 철학은 붕 떴지요. 철학은 자기가 진리, 진리 하다가 확실한 실체, 확실하게 눈에 보이는 것, 그것에 다가가려면 누구한테 물어야 되느냐 하면 과학자에게 물어야 될 판이에요.

우주는 어떻게 되고, 사과는 사과나무에서 왜 떨어지는지, 그것은 과학자에게 묻게 될 판이 되었습니다. 거리를 두고 있는 자석은 서로 왜 끌어당기는지, 그래서 맥스웰 방정식이 튀어나와버렸어요. 그래서 이제는 철학도 과학한테 기 팍 죽어가지고 철학이 뒤처리 하는 거예요.

철학과 인기 없어요. 과학이 뜨니까 철학과는 뒤처리나 하는 거예요. 인간은 두 종류가 있다. 경험되어서 진리를 아는 것, 종합적 분석, 경험하지 않는 것은 선험적 분석, 그리고 이것은 분석명제, 나중에 종합하는 것은 종합명제, 그런 식으로 철학에서 이야기하면서 그러나 궁극적인 진리자체는 우리는 겸손하게 모른다고 하자.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과학에서 “쳇!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모른다 하자’가 뭐야, 모른다 하자가. 다 아는데. 우리는 모든 것을 알아. 과학은 모른다는 것이 있을 수가 없어. 과학의 자존심이 상해.” 과학은 모든 것을 알아야 돼요. 철학자가 말합니다. “너희는 그냥 물건이나 다뤄라. 우리는 인간을 다루겠다.” 하니까 과학에서 “너희가 인간을 다뤄? 인간을 과학에서 못 다룰 줄 알아? 인간을 한번 다 다뤄봐?”

철학이 과학에 모든 것을 다 주고 난 뒤에 철학에 남은 것은 윤리와 도덕으로 잡았어요. “윤리적으로 하자. 윤리는 우리 철학의 몫이다.” 과학에서 하는 말이 “윤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윤리라는 게 뭔데? 윤리라는 것이 돈 없이 윤리가 되느냐?” 이렇게 묻는 거예요.

돈이라 하는 것은 숫자로 계산해서 함수관계에서 나온 거예요 시간과 공간을 접수했습니다. 그러면 돈, 자본은 뭐냐? 미래의 시간을 돈으로 환산해서 미리 축적하는 것이 자본이에요. 그게 자본이라고요. 따라서 윤리라는 것은 이 세상에는 따로 없고 돈 있는 것이 윤리에요. 돈 없으면 그것은 악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노래에 보면 돈보다 친구가 좋다는 내용의 노래가 있어요. 돈보다 친구가 좋아요. 돈보다 친구가 좋은데 친구보다 더 좋은 게 뭐냐? 돈 있는 친구에요. 돈보다 자식이 귀하다. 맞아요. 돈보다 자식이 귀한데 자식보다 귀한 게 돈 있는 자식이에요. 돈 없는 자식은 원수입니다.

그거 짐스러워요. 언제까지 자식 뒷바라지를……, 아이고, 이거 말하면 안 되겠다, 언제까지 자식 도와줘야 돼요? 이게 짐스러워요. 다시 돈이라 하는 것은요, 그게 그냥 ‘종이’지만 이게 시간을 산거예요. 미래의 시간을, 앞으로 내가 장래에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많이 모아놓은 것을 부자라고 합니다. 부자 되고 싶어요. 그걸 부자라고 하는 거예요.

과학은 인간마저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인간을 조사를 해봤습니다. 지구상에서는 식물과 동물로 나눠요. 식물은 태양에너지를 가지고 화학에너지로 바꾼 그것이 식물이고, 동물이라 하는 것은 태양에너지를 전압펄스로 바꾼 것이다. 인간의 세포는 밧데리다. 끝.

모든 인간의 세포 사이에 결정하는 것은 전기 작용으로 다 풀이가 되는 거예요. 그 전기 작용하는 밧데리의 부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분자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있고, 그리고 원자수준으로 들어가는 것이 있고, 그 다음에 분자뭉치로 들어가는 게 있다. 그게 바로 세포고 인간의 자아라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DNA, 유전정보를 갖고 있는 물질이 바로 인간의 자아가 된다는 거예요. 과학에서는, 생물학에서는.

DNA라 해봐야 다 펼치면 1.8미터 길이밖에 안돼요. 그 중에서 1퍼센트만 코딩과 단백질 합성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과학이 자아를 다루는 거예요. 인간의 신체를 다루는 겁니다. 외부에서 케미컬, 어떤 화학물질이 왔다 하면 인간의 세포내에서 총동원령을 내립니다. ‘바이오틱엔자임’이라는 상태를 말하는데 세포내에 만개의 단백질이 있어요.

처음에 철학이 무엇인가, 라고 했지요. 인간의 눈에 보이는 실체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그리고 분류하기 위해서 거기다 이름을 다 붙여놓는 거예요. 만개를 다 발견하지 못했지만 중요한 단백질에 대해서 이름을 다 붙여가지고 그 이름 붙였다 하는 것은 그 잃어버린 단백질의 기능 하나를 세미한 바늘로 전부 다 제켜놓는 거예요. 그 단백질만 조사하게 되면 내가 원하는 건강상태를 인간이 창조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건 맹탕이고 뭐 아무것도 없지요. 인간의 자아를 분석하기 위해서 몸에서부터 시작해서 어디까지 올라가느냐 하면, 머리에 집중공략을 했어요. 두뇌지요. 두뇌세포를 공략합니다. 공략하는 방법은 간단해요. 밧데리니까, 전기신호의 연결체니까 이미 물리학에서 발달한 원리원칙을 그대로 적용시키면 되는 거예요.

조사를 해보니까 두뇌세포와 두뇌세포 간에 약간 간격이 떨어져 있어요. 그런데 인간의 신체의 70퍼센트는 인간의 세포 안에 있고 나머지 30퍼센트는 세포 간 떨어져 있는 거기에 수분이 있어요. 떨어진 그 사이에서 어떤 변화가 계속 일어나는 겁니다.

자아의 저항력, 인간의 자아라 하는 것은 DNA를 지키기 위한 거예요. DAN를 지키는 것을 가지고 진핵세포라 합니다. DAN를 안 지키는 것을 가지고 원핵세포라 해서 또 분리를 해서 이름을 지어요. 그러니까 과학이라 하는 것은, 어떤 학문도 마찬가지지만 모든 것을 분류하고 이름 짓고, 분류하고 이름 짓고, 분류하고 이름 짓고, 끊임없이 이름 짓고, 이름 지으면 이름의 고유기능을 뽑아내고, 그 일을 하는 거예요. 철학이!

감사 안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이 어디에 나와요? 내가 진리인데, 분석하는 내가 진리인데요. 내가 나를 알기 위해서, 내가 나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 자기 조절하기 위해서 계속 정확하게, 진리는 정확이니까, 정확하게 진리를 알아보겠다는 거예요.

알아보니까 인간의 두뇌에 의식세계가 있고 의식세계는 뭐냐 하면, 노르에피네프린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물질들이 있어요. 도파민도 있고. 이런 것들은 의식세계를 관장하는 신경전달물질이라 하는 겁니다. 이것은 단백질이 아니고 그냥 분자덩어리로 되어 있어요.

세로토닌이 약하게 되면 우울증이 생기고 더 없어버리면 자살하고, 도파민이 생기면 흥분하고요. 그 다음에 아드레날린이 있으면 집중력이 가해지고 뭐 그런 것들을 알아내는 거예요. 이런 것들은 속도가 좀 느려요. 그래서 좀 센 것 없나? 센 것이 있어요. 글루타메이트, 가바, 이런 것은 더 센 효과가 있거든요. 이걸 가지고 기억장치에 저장을 해줘요. 일단 기억된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아라고 합니다.

자아는 기억이에요. 자아는 기억입니다. ‘글루타메이트’라는 기억을 증강시키고 ‘가바’는 기억을 억제시키는 그런 작용을 하는 거예요. 가바가 뭡니까, 하면 그것은 이름 정하기는 마음대로지요. 저희끼리 이름 다 정하는 거예요. 여기에 도입되는 것이 뭐냐? 수학적인 모든 지식과 물리적인 과학적인 지식이 거기에 총동원하는 겁니다. 다 집어넣는 거예요.

그 다음에 그것을 어떻게 전달하느냐? 어떻게 조절하느냐? 조절을 제대로 못하면 이제 정신병에 걸리는 거지요. 조절을 적당하게 잘 하면 되는 거지요. 여기에 관여하는 단백질이 바로 암페 단백질, 또는 N매틸D, 에스틸메이트, 자기 맘대로 막 이름 짓지요. 이것은 원자인데 나트륨 이온과 칼륨이온이 어떤 채널에 의해서 들어가고 나가고 하는지 그걸 조절해서 인간의 자아자체를 괜찮은 자아로 전환시키는 노력, 이게 오늘날 철학의 진수 철학의 정수입니다.

요새 철학은 이 앞에서 기가 팍 죽어요. “형님, 잘못 됐습니다.” 과학이 모든 것을 차지했어요. 숫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거예요. 이러한 분류, 숫자, 그 자체에 이름을 적용을 시키는데 그렇게 하면서도 그들은 무엇을 발견했느냐? 모든 세상이 연결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세분하는 것, 미분 또 미분, 쪼개고 쪼개서 세분하면 연결이 된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양자역학이라는 물리학에서 보니까 이 세상은 연결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20세기 중반부터 드디어 과학자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연결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1과 2와 3사이에 연결되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1과 2, 2와 3 사이에 어떤 것도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원인을 물리학자들은 스스로 고백합니다. “왜 우리가 그 사이에 있는 것을 모르느냐? 그 이유는 단지 내가, 우리가 슬그머니 관찰했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본다는 그것이, 내가 봄을 내가, 우리가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알 수 없는 것 미지를 ‘0’이라 하고 우리가 이미 아는 것을 ‘1’로 잡아서 1과 0의 디지털의 시뮬레이션 세계가 우주다. 끝. 이게 인간들이 내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아에 대해서 알아도 결국 철학과 과학이 내놓는 정답은 ‘모르겠다’가 정답이라는 거예요. 모르겠다. 멀리서 보면 1과 2, 그 두 물체가 붙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이 보면 벌어져 있는 거예요. 벌어진 그 사이가 너무나 어두워서 연결이 안 되니까 모르겠다는 거예요.

신경전달물질이 너무 과도하게 나와 가지고 간질이 생겼다. 그러면 그 다음문제는 뭐냐? 왜 그게 많이 생겼는지 조사해보자. 칼슘창고에서 단백질이 조절을 잘못했는가? 그러니까 세포내 단백질의 70퍼센트가 불량품이에요.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불량품을 줄여서 상품화 시키느냐? 그 지시를 누가 하느냐?

내가, 인간의 자아가 해야 되는데 자아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계속 뭔가 시키는 게 있어요. 보이지도 않으면서 인간의 두뇌에 뭔가 시키는 게 있어요. 그게 뭔가 또 찾아보니까 이미 기억된 그것이 우리보고 시키더라 그 말입니다. 그런데 시킬 때 제대로 시켜야 되는데 제대로 시키지도 않아.

인간의 두뇌 안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같이 죽자는 자폭특공대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 그동안 살려고 애를 썼던 내가 왜, 스스로 또 죽으려는 발작을 하는 이 괴물 같은 단백질이 왜 또 등장하느냐 그 말이지요. 그걸 죽음의 충동이라 하는데 도대체 이건 왜 생겼느냐?

결국은 아무리 눈에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까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연결하듯 잡아당겨서 뭘 해보겠다고 애쓰는 그 모든 것이 결론은 모르겠다. 뭐냐 하면,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모르겠다고 말하지 말라. 너는 뭘 모르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해야 된다. 네가 지금 ‘아는 것은 아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모르겠다.’ 그렇게 하는데 네가 안다는 그것도 모르겠다, 의 통치를 받는다는 사실을 네가 왜 모르느냐?” 그 말이지요.

성경에서 예수님을 보내서 인간의 지혜 말고 하나님의 지혜, 감사가 나오는 지혜를 보내신 이유는 인간의 출발점부터 잘못되었습니다. 아까 이야기한 철학 이야기 다시 하겠습니다. 철학이란 무엇이냐?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을 분류해서 이름 짓고 헤아려서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 내가 보다 더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이것이 철학입니다. 그게 윤리고 도덕이에요.

철학자들이 윤리를 주장하지만 성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살인한 적도 없는 자를 살인한자로 몰아붙이는 것이 율법이거든요. 이걸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살인한 적도 없는데 살인자로 몰아붙입니다. 그리고 간음한 적도 없는데 간음자로 덤터기를 씌워버립니다. 더 무서운 이야기는, 부자 아닌데 부자 되기를 은근히 원했다는 것 때문에 천국은 막혀 있다는 겁니다. 이건, 성경은 미칠 지경이에요.

성경의 출발은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것 그것으로 내 것 만들어서 내가 살겠다, 할 때 근본적으로 잘못된 게 뭐냐? 네가 무엇이 진리냐 안 진리냐를 논할 권한도 자격도 없고 네가 살겠다는 그 자체가 네가 잘못이라, 살겠다는 자체가 벌써 잘못된 거예요. 철학은 그 살겠다는 자체가 감사가 없는 거예요.

어제 토요일에 부산 역 앞에 결혼식 하는 어떤 교회에 갔었어요. 자세한 이름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말하지 않겠다고 하고 말하곤 했는데 진짜 말하지 않겠습니다. 목사가 주례설교를 하는데 자기 교회라고, 자기 나와바리라고 설교를 오래 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신랑에게 권고합니다. “신랑은 하나님이 책임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신랑은 경건한 사람이어야 하고, 신랑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어야 하고, 신랑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사는 사람이어야 하고, 신랑은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고백하고 의지하는 사람이어야 신랑입니다.”

제가 속으로 했어요. ‘네가 철학을 논하는 구나.’ 철학은 살고자 하는 게 철학이에요. 그러면 복음은 뭐냐? 하나님이 책임지는 사람을 권총으로 쏴 죽이는 게 복음이고, 복음은 경건한 사람을 권총으로 쏴 죽이는 게 복음이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권총으로 쏴 죽이는 것이 복음이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사는 사람을 권총으로 현장에서 즉사시키는 것이 복음이고,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고백하고 의지하는 사람을 현장에서 권총으로 쏴 죽이는 것이 복음이에요.

왜냐하면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은 아들을, 물론 그 당시에는 권총이 없었으니까, 칼로 죽여 버려요.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어서 아들을 칼로 죽이는 거예요. 이게 복음이에요. 왜 교회가 속임수 철학을 논하고 있느냐 그 말이지요. 교회 와서 살려고 하니까 목사 입에서 성경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 철학밖에 안 나오는 거예요.

사도바울시대에 철학이 있었다 했지요. 사도바울 시대에 철학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는 이 이야기입니다. 내가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했어요.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저주를 받아요.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이것은 사람에게서 나온 지혜가 아니다. 그러면 사람에게서 나온 지혜가 뭐냐? 철학이지요. 속임수에요. 감사가 나오지를 않는 겁니다. 인간이 살고자 하는 욕망이 끝이 있습니까? 없잖아요. 그러면 감사는 계속해서 뒤로 미뤄지는 거예요. 아직도 배고프다 그 말이지요. 히딩크처럼 아직도 배고프다는 거예요. 끝도 없어요.

한 가지 예를 들면, 하이힐을 신고 가던 여자가 보도블럭에서 넘어졌어요. 그러면 세상법정에서 어떻게 처리하느냐? 첫 번째, 시당국이 보도블럭을 제대로 깔았느냐. 두 번째 보도블럭 주위의 상점이나 이웃이나 또는 구청에서 주의사항을 제대로 알리는 책임을 다 했느냐.

세 번째, 하이힐을 신고 가던 그 여자 분이 휴대폰을 본다든지 딴 생각을 하면서 걷지는 않았는지. 그 다음에, 넘어져 다칠 때 평소에 지병이 있었는지, 그런 것까지 재판할 때 고려대상이 돼요. 손해배상을 청구하려면 그런 것이 다 계산이 돼야 된다고요. 보도블록 손질을 언제 했는지 경고판이 제대로 서 있었는지 등등.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솔로몬 재판은 그렇게 하지 않아요. 솔로몬재판은 죽음부터 시작합니다. 두 여자가 한 날 한 시에 애를 낳았는데 한 여자가 자기 아들을 자다가 깔아뭉개서 죽였지요. 여자가 생각하는 것은 갓난아이니까 표시 안 난다 싶어 멀쩡한 애와 얼른 바꿔치기해서 죽은 애를 옆에 있는 여자에게 밀어버리고 남의 애를 자기 아기인 것처럼 속였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친모가 딱 보니 옆에 있는 아기가 자기 아기가 아닌 거예요. 문제는 그 현장에 CCTV가 없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나 억울해서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고 소문난 솔로몬 왕에게 그걸 고소를 해서 재판을 하게 된 거예요. 진짜 범인인 그 여자는 아주 코웃음을 쳤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 현장에 솔로몬은 없었으니까 자신만만한 겁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그게 진리에요. 눈에 보이는 것, CCTV 관찰하는 것, 그게 진리라고요. 그 외에는 믿지를 않습니다. 인간의 한계지요. 눈에 보이는 것 중 가장 눈에 보이는 것이 나거든요. 나가 절대적이고 나가 진리에요. 이러한 철학, 윤리의 한계는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결점은 보지 못하고 싫어하는 사람의 장점은 보지 못해요.

이게 인간의 자기의 기억이 한계가 있어요. 내 기억이 자아거든요. 자아는 실체가 없어요. 기억하는 해마라는 그 장치는 있지만 자아는 눈에 보이지 않아요. 눈에 보이지 않는 요물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사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철학적 과학적 방식으로 악마를 따라잡으려고 허수까지 만들었지만 결국은 모르겠다는 거예요. 못 따라 잡겠다는 겁니다.

그 범죄 한 여자가 재판하는데 있어서 자신만만했어요. 그 현장에 솔로몬이 없었다는 거예요.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자기와 자기 친구 둘밖에 없었으니까 재판을 누가 합니까? 진리라 하는 것은 있음이 있음을 재판해야 되는데 거기에 없는 위인, 없는 인물 솔로몬이 자기가 뭐 안다고 우리를 재판해요? ‘해보자. 됐다. 하자.’

재판받으러 갔지요. 솔로몬은 그 현장에 없다고 여기는 것을 발굴해 냅니다. 그게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그게 죽음이었어요. 이게 신의 지혜입니다. 복음의 지혜에요. 나는 죽어도 좋으니 내 아이는 살려달라고 할 때 그게 친엄마였어요. 나는 자식 없는 존재, 다시 말해서 자식 낳지 않은 여자, 자식 낳고 나는 없던 여자, 죽어 마땅한 것, 바로 이것이 솔로몬에게 하나님이 주신 지혜였습니다.

권총으로 즉사시킨다고 섭섭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애초부터 우리는 죽어 없어져도 상관없는 존재, 이것이 바로 믿음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복음 안에는 성공/실패가 없어요. 하나님의 진실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형식으로 주어집니다. 창세기 15장 10절에서 17절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과 언약을 맺었는지, 언약을 맺어놓고 그 언약에서 인간이 어떻게 배제되는지를 보여줍니다.

10. 11절에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9절에 보면,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아브라함은 제물을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이렇게 마련해놓고요. 이걸 둘로 쪼갭니다.

쪼갰다는 것은 이미 죽었다는 거지요. 하나님이 제물을 쪼갰다는 뜻은, 나는 죽지 아니하면 안 받겠다는 뜻입니다. 죽은 자와의 계약이 하나님과의 계약이에요. 산자하고는 계약이 안 됩니다. 계약될 수가 없어요. 죽여 놓고 계약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언약하는 겁니다. 딱 죽여 놨는데 그 죽음에 대해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자연물은 거기에 끼어들 수가 없어요.

“아브라함이 솔개가 그 사체위에 내릴 때 쫓았더라.”라고 되어 있지요. 너는 접촉하지 마, 접근하지 마라, 딱 쫓아버리고 밤중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15장 17절에 보니까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누가 지나가는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지나갑니다. 주의 이름이 지나갑니다. 그 사이를 하나님이 홀로 가요. 횃불로서 지나갑니다. 천국은 산 인간은 따라갈 수가 없어요.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주의 이름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철학은 뭐라고 했던가요? 자기 이름을 계속 되살리고, 되살리고, 되살리기 위해서 모으고, 모으고, 모으고, 시간으로 비축하고, 돈이라는 이름으로 시간을 비축하고, 장래를 비축하고, 불안한 미래를 비축해서 나를 살리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는 모든 이론들, 철학적 학문적 모든 이론, 과학의 모든 이론이 나 살리기 위해서 집중되어 있거든요.

그런 자기 이름, 그 자기이름은 산채로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죽이라 할 때에 아버지는 나를 죽였어요. 그런데 끝나고 난 뒤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았어요. 누가 살렸겠습니까? 누가 살렸겠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살린다는 거예요.

우리가 이삭 입장이 되어보세요. 아버지는 분명히 나를 죽였어요. 그때는 권총이 없고 칼로 했으니 칼로 분명히 날 죽였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죽이는 자였어요. 그러면 내가 죽어야 돼요. 죽었는데 나중에 눈 떠 보니 살아 있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누가 살렸겠는가? 숲에 있던 수양이 살린 거예요.

이 지상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은 희생제물의 모습으로, 죽음으로 중간이 쪼개진 모습입니다. 그 쪼개진 모습의 가운데를 지나가는 것은 바로 그 제물의 속성을 말함이고, 그 속성은 누구 이름, 주의 이름이 지나가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가득 찬 그 제물의 속성이 바로 이 땅에 등장한 주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 사이에 우리 이름은 낄 자리가 없지요.

그래서 사랑이라는 것은 우리를 죽이는 것이 사랑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우리를 죽인다는 것. 저 뒤에 십자가가 꽂혀 있지요. 십자가 끝이 날카롭거든요. 톡톡 하고 치는 거예요. 때리는 겁니다. 죽여 버리는 거지요. 계속 매일같이 우리를 죽이는 겁니다. “성공/실패는 없다. 성공/실패는 없다. 성공/실패는 없어. 성공/실패는 없어.” 계속 쪼아대는 거예요.

인간의 철학은 타인하고 비례합니다. 그 비례하는 것, 그 비례가 숫자가 되거든요. 그게 기하학이에요. 눈에 보이는 것, 비례하는 것. 그래서 피타고라스라는 그 사람은 숫자만 참이고 정수로 1, 2, 3, 4……, 딱 떨어지지 않는 이것은 악마의 숫자로 봤습니다.

그런데 밑변 과 높이가 각 1센티인 삼각형의 빗변의 길이가 뭐냐? √2(루트2)에요. ‘2의 근호’라. 이게 무리수에요. 딱 떨어지지 않아요. 악마라! 그 다음부터는 피타고라스의 그 종교조직 이 무너졌습니다. 참된 진실을 추구해야 되는데 이 세상에 악마가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실재와 일대 일로 대응이 안 되는 것이 등장했다는 그 자체 이것은 뭐냐? 악마의 모습이다.

그래서 그 조직, 컬트(cult) 조직은 완전히 붕괴했습니다. 지금 과학이 컬트 조직이에요. 숫자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컬트조직입니다. 우주는 정보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수로서 모든 계산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미지의 암흑에너지에 대해서는 모르겠다는 거예요. 모르지만 아는 것은 안다는 겁니다.

이 무슨 이런 자존심, 이런 고집이 다 있어요. 다시 말해서 기어이 살겠다는 겁니다. 이러한 과학에 모든 진실을 내어주니까 철학자들은 거기다가 부스러기로 떨어지는 윤리, 도덕이라도 챙겼는데 그 윤리, 도덕 중에 하나가 신학이라는 거예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라는 겁니다.

아까 말씀드렸지요. 하나님께서 책임지는 사람, 경건한 사람, 믿음으로 사는 사람, 무릎 꿇는 사람,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고백하고 의지하는 사람, 그게 바로 철학입니다. 이런데서 어떤 눈에 보이는 실적과 증거를 얻고자 하는 거예요. 교회가 부흥된다든지, 뭔가 부자가 된다든지, 뭔가 내 욕망이 원하는 것을 실제로 예수 믿음으로서 얻고자 하는 거예요.

어떤 경우라도 안 죽고 싶은 겁니다. 어떤 경우라도 나는 나를 위해서 사는 경우만 나는 감사하고 신에게 고마워하겠다고 아예 자기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고 그런 식으로 정리정돈 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보면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복음 한 30년 연구하고 교회 한 50년 다녔는데 50년 지나고 난 뒤에 ‘하나님이 나에게 해준 것 뭐가 있습니까?’라는 마음이 절로, 절로, 자기가 눌러도 절로 튀어나와요. 그 때 뭐가 문제가 되었느냐 하면, 고린도후서 5장 15절과 안 맞다는 겁니다.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다는데도 불구하고 성경을 백독 했니, 천독 했니, 성경말씀을 다 암기 했니, 그렇게 하면서도 그 모든 집중력, 중심은 내가 살려고, 성경보고 살려고 교회 오고, 살려고 예수 믿고, 천당 가려고 하나님 믿고, 전부 다 자기 자신을 죽이지를 않았어요.

본인이 이 진리를 알기 위해서 쫓아갔는데 힘들게 체포한 범인이 누구냐? 나에요. 내가 탐정이고 내가 범인이었어요. 이 순환구조의 인생에 갇혀 있는 겁니다. 인생살이가 뭐냐? 자기 잘남을 증명하는 게 인생살이였어요. 내 잘남을 증명하는 것. 너는 침례교 신학이지만 우리 장로교신학이 정통이고 진리라는 거예요. 철학입니다.

철학은 자기 자신을 점점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고상하고 발전한다고, 진화한다고 여기게 만들어서 자기 자신을 못 버리게 만드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철학이 뭐냐? 내가 저주받아야 될 이유를 찾아내지 못하는 게 철학이에요. 내가 지옥가야 될 이유를 못 찾아내는 것이 철학입니다.

그렇다면 신학도 철학이에요. 교회 가르침도 철학이에요. 교회는 사기꾼이에요. 전부 다 사기단체에요. 살아야 될 이유가 없는데 왜 살지요? 정말 주님께서 오셔서 권총을 머리에 대고 그냥 즉사시켰으면 좋겠어요. 쏴죽였으면 좋겠어요. 나 자신을. 왜? 내가 나를 못 죽이니까.

죽는다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선교하고 온갖 별짓을 다해도 쌩쌩해요. 자기의 해마에 있는 자기 과거기억, 내가 이만큼 주의 일을 했다는 그 기억이 자아기 때문에 자기의 잘남은 전에 있던 기억과 대조하고 비교하고 그걸 비례해서 자기가 모든 결론을 내리거든요. ‘나는 참이다. 왜? 내 기억이 그렇게 이야기 한다.’ 끝이에요.

아, 정말……. 성경 신명기 32장 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이 말씀은 뭐냐? 자기 이스라엘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일률적으로 다뤄줘야 돼요. “너는 악 그 자체야. 악!” 인간의 세포를 연구해서 과학으로 자기를 알겠다고 해봐야, 신경전달물질을 연구해서 새로운 단백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붙어 있는 단백질결합체를 만들어봐야 조사해보니 10분밖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효리가 불렀던 노래 <10Minute>, 모든 것은 10분 내에 감정이 전부 다 고갈되는 모양이라. <십분 내로> 오라고 김 연자가 노래했는가? 인간의 두뇌는 자아가 자기의 두뇌를 지키기 위해서 전사조절인자가 분주하게 TF(transcriptional regulatory factor)라 하는데 분주하게 움직여서 계속 나를 지키는 단백질을 만들어내지요. 단백질은 아미노산의 집합입니다. 아미노산이 되기 위해서는 RNA가 그걸 전사, 코딩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의 70퍼센트가 불량품이에요. 자기 자신이 엉망이라 이게. 태양에너지가 들어와서 전기적 에너지로 바뀌는데 우리 몸이 밧데리에요. ‘나는 ⃞ 다.’ 나는 밧데리다. 그게 인생입니다. 나중에 단백질 불량품이 더 늘어나고 모든 단백질 작용이 무너질 때 그걸 사람들은 흔히 죽는다, 하거든요.

죽음은 그게 아니에요. 죽음은 율법 앞에서 우리가 악 자체인 것을, 다시 말해서 천국에는 주님이름으로 홀로 간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게 죽음입니다. 바로 내 이름을 죽일 때 주의 이름으로 죽이거든요 십자가로 죽인다고요.

그럴 때 그 사람은 주의 이름 속에 합류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오늘 본문에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신성, 거룩한 신적인 몸 안에 합류된 자, 이 사람만이 영원히 성공과 실패 없이 영원히 감사, 감사만 나온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원인을 십자가에서 찾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마저 이 땅에 와서 죽었는데 우리는 무슨 배짱으로 계속 살려고 합니까? 진리에 맞지도 않으면서도 진리라고 우기는 이 고집은 또 어느 요물에서, 악마에서 나온 겁니까? 우리 자신을 악이라고 규정하면서도 그 악을 위해서 피를 흘려주신 그 사랑의 그 고마움에 계속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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