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 박힘
2021년 3월 7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2:6-7
(2: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2: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주님 안에 ‘인간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천사만 사는 세계에 인간이 끼어들 수 있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성령을 받았기에 비로소 알 수 있는 안목입니다. 일반인들은 그냥 혼자 삽니다. 거울을 봐도 자기가 있는 공간에 자기 홀로 있습니다.
주님 앞에 자신이 박혀 있는 공간 감지 능력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그것은 기존의 공간에서 자신이 이미 배제된 대상임을 아는 사람에게나 해당됩니다. 이렇게 되면 두 개의 이질적 공간이 발생하는 겁니다. 하나의 공간은 너무나도 상식선으로 당연해 보이는 공간인, 나만이 홀로 있는 공간감이 그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여기 주님이 계심’을 표현하기 위해서 ‘내가 있는 공간감’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듯 상호 다른 공간이 발생한 이유와 그 확실한 증거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드러납니다. 인간들은 태어나면서 자기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부터 배제된 자리가 그 자리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언약을 앞장 세우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그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만들어지고 운영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배제된 자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언약의 본래 작용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언약에 부합되지 않는 자를 버리시는 겁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버림을 받는 자들은 ‘홀로 살기’에 나섭니다. 이 홀로 산다는 공간감에서 인간의 자아는 그 본색이 시작됩니다. 홀로 살기는 타인에 대한 질문부터 시작이 됩니다. 자꾸 붙들고 누구든 남이 되고 묻기 시작합니다. 이럴 때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저럴 때는 어떻게 하면됩니까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묻는 것은 소기의 성과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노력의 생산물을 획득하기 위해서입니다. 처음에는 다소의 성과물에 만족합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 성과물에 대해서 실망과 좌절과 분노를 갖습니다. 이것은 자아보다 더 큰 자아로부터 ‘추궁’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즉 “네 인생 그것밖에 못살아?” “똑바로 못해?” “똑바로 했는데…” “똑바로 했는게 그 모양 그 꼴이야?” 끊임없는 자책에 휩싸이게 됩니다. 즉 인간의 자아는 보이지 않는 더 큰 자아인 요물(악귀) 안에 심겨져 있기에 지속적으로 책임추궁당합니다. 악마는 하나님의 언약을 배격합니다.
그 대신이 자아에게 철저함과 완벽함과 만족감을 촉구합니다. 결국은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에게 부르짖게 되어 있습니다. 구약 여호수아에서 다윗왕 사이에 이런 ‘언약 불안정적 시기’가 찾아옵니다.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여호수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다 접수하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고마움을 품었고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몰랐습니다. 당연히 이 약속의 땅을 은혜로 받아도 되는 대상인 줄 알았던 겁니다. 즉 자신이 얼마나 죄인 인줄도 모르고 천국 확보로 여유를 가지는 자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여호수아와 다윗왕 시대 사이의 이스라엘은 이방민족의 삶에 동화되어 갔습니다.
언약이 불안정적이다는 말은 그 안에 허용된 백성의 자리가 가리워졌다는 말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조치는 바로 막강한 이방민족으로 하여금 자기 백성들에게 압박을 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때 하나님께 부르짖게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호소하게 됩니다. 예전처럼 살게 해달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그들 침략자들을 물러가게 하시는 식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자신들이 어떤 자들이었느냐를 사사들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많은 사사들 중에서 기드온, 입다, 삼손을 골라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사사 일을 하는 와중에 자신들의 허물을 노출시킨 자들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될 수 있으면 사사 일을 안 하겠다고 빼는 노력을 했습니다. 양털을 새벽에 땅에 놓고 이슬이 맺히는지 아니맺히는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께서 주신 머리카락의 힘으로 사적인 욕망달성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특히 입다 사사의 경우는 사사 본인의 잘못을 제대로 보여줍니다.
암몬 족속에 대해서 그는 힘 가진 자로서의 위상을 나타내어 이스라엘 민족의 호응을 얻어내고자 했습니다. 더욱 그는 객기를 부리면서, 승리를 장담했고, 승리 후에 자기집에서 제일 먼저 자기를 환영하는 것을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겠다고 맹세합니다. 거짓말처럼 전쟁을 승리했는데, 자신을 제일 먼저 마중하는 자는 그의 딸이었습니다.
시집도 못가본 딸입니다. 즉 더러운 세상 체험을 하지 못한 딸입니다. 정결의 표상으로서의 딸입니다. 그 딸이 자진해서 아버지의 맹세를 위해 희생제물이 됩니다. 이것은 바로 언약 달성은 살아있는 자의 힘이나 지략의 몫이 아니라 ‘우리 이스라엘은 언약 없이는 죽은 자’라는 인식이 관건이었던 겁니다.
즉 언약에 의해서 죽은 자가 언약을 살려내는 겁니다. 그 언약 안에서 언약에 동참한 자들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자아는 묻고 ⟶답을 듣고⟶성과내고⟶실망하고를 반복하지만 언약 안에는 이미 인간에 대해서 최종적 평가가 확정되어져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악귀같은 초자아에게 휘둘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이라는 자리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배척한 자리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는 성도를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성도의 자리는 주님과 더불어 배척당한 바로 그 자리가 영원한 자리가 됩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이 언약적 안목에서 볼 때, 거대하고 폐쇄된 장례식장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냉혹한 하나님의 심판 소식을 거부하고 자신이 자기에게 너무 과하지 않게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밖에 있는 자들은, 복음에서 말하는 죄 용서 방법이 너무 유난스럽게 과격하다고 평가하게 됩니다. 그러나 참으로 성도라면 요나의 멸망소식을 듣고 즉각 회개한 니느웨사람들처럼 이것거것 따지지 않고 그냥 하나님의 언약과 조치에 즐기이 굴복하는 자입니다.
이로서 성도의 자아만이 유일하고 확정난 자아를 갖게 됩니다. 죄인의 괴수로서의 자아만입니다. 그 자리에게만 십자가 은혜를 영원토록 감사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핍박받은 분이 핍박자를 품에 안아주시는 그 관대함 안에서 모든 방황을 그만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8강-골 2장 6-7절(주님께 박힘)210307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2장 6-7절입니다.
골로새서 2:6-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사도바울은 특이한 공간지각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가 어디 있느냐, 자기가 어느 공간에 있느냐, 라는 것은 내가 있는 바 그 공간에 내가 서 있다, 여기 서 있는 여기는 나만 서 있다, 보통 그게 상식적인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그렇게 되어 있어요.
도대체 사도바울이 갖고 있는 공간감지능력, 그 지각은 도대체 어디서 얻은 것일까요? 자기가 어디에 박혀있다고 보는 거예요. 상당히 특이하지 않습니까? 거울에 비춰보세요. 우리가 누구한테 박혀 있습니까? 나는 나 혼자 서 있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자기가 주 안이라는 곳에 박혀 있다. 마치 화분에 식물이 박혀 있듯이, 거기에 뿌리를 박고 있듯이 나를 구성하는 것은나 단독적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박혀 있는 그 공간, 그 현장성을 그냥 바깥으로 배출하는 식으로, 자기가 그런 식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것은 절대로 홀로서기가 될 수가 없지요. 홀로서기가 되지 않는다면 홀로생존하고 홀로 밥 먹고 살려고 홀로 애쓴다는 것은 사도바울의 공간개념하고는 완전히 딴판입니다. 그것은 다른 세계에요. 내가 박혀 있는 그 공간을, 그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서 나를 혼자 두지 않았다는 것, 주님께서 나를 자기 안에 심어버리고 박아 놨다는 것, 그것은 인간의 지혜로서는 결코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뒤에 나오는 말,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그 뒤에 나오는 말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이것은 따로따로 떼놓을 것이 아니고 통으로 봐야 돼요. 주 안에 박아놓으면 이것은 자기가 안하려야 안할 수가 없도록 교훈을 행하게 되어 있고, 그리고 믿음에 굳게 서게 되어 있고, 그리고 감사함이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골라잡아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있는 이 자리, 이 자리가 나의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주님의 자리기 때문에 주님의 자기 교훈과 모든 말씀과 계시는 나를 통해서 토하듯이 그냥 방출하게 되어 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거지요. 새로 열심을 다해서 지킬 것도 없어요. 딱 박아놓으면 그냥 그 자양분에 의해서 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특이한 이 공간지각능력과 감지능력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주민센터에서 나눠주는 것인가요? 이게 국가에서 주는 것인가요? 어디서 얻을 수 있지요? 이거에 대해서는 성경전체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에서 온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자리, 특이하게 인간의 박힘을 허용하는 그 자리가 언약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인데 거기에 인간의 자리를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해 주신 거예요. 여기 와서 박히라는 겁니다. 네 자리 버리고, 네가 살았던 그 자리 버리고 이 자리, 언약이라는 화분 안에 네 자리를 하나님이 친히 마련했기 때문에 거기다가 집어넣고 박아버립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만이 계시는 자리가 아니고 하나님이 불러내시는 사람과 같이 공유하고 있는 자리라는 것을 여기서 알 수가 있습니다.
주 안에 박혀 있으니까, 뿌리를 내렸으니까 하나님만이 아니고 하나님이 받아주는 사람과 함께 있는 그 자리, 태풍이 오더라도, 허리케인이 오더라도 더 이상 걱정할 몫은 우리에게는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 자리라는 것이 사라졌기 때문에 내가 천당 갈까, 지옥 갈까, 그런 걱정 염려도 우리는 옛날 다 지나간 과거지사가 되는 거예요.
다 한때, 처음 교회 나올 때 벌벌 떨면서 “목사님, 저 구원받을 수 있어요?”라는 것은 목사에게 물을 것이 아니고 나중에 성령을 받아버리니까 이게 지극히 당연한 것인데, 성령 받고 난 뒤에는 나 구원받습니까, 천당 갑니까, 그런 질문을 굳이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주여, 언약이 어떤 식으로 저를 통해서 펼쳐낼 것입니까?’ 그것만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저는 언약의 안정화라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언약의 안정화가 되어버리면 언약안의 내용, 하나님과 플러스, 자기 백성과 함께 있는 언약의 안정화, 그렇게 되면 언약 안에 있는 사람과 언약바깥에 있는 사람이 둘로 세상이 분류가 되어버려요. 언약 안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 주 안에 뿌리를 박지 못한 사람 따로 있고 주 안에 뿌리를 박은 사람 따로 있고, 이렇게 인류는 두 종류로 나누게 되는 겁니다.
그게 실제로 나눠졌느냐? 그 증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바로 구약이스라엘 역사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밖에, 지옥 갈 사람이지요, 저주에 있는 사람 또는 언약밖에 있는 사람, 어떻게 해서 그런 사람들이 생겨나는가? 지옥 갈 사람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지요, 라는 것에 대해서 구약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엄마 아빠보고 묻기를 “엄마 아빠, 나는 어디서 생겼어요?”라는 그런 질문, 답답하게 난처한 질문을 어릴 때 철없이 해대잖아요. 우리는 그런 질문 말고 “지옥 가는 사람은 왜 지옥 갑니까?”라는 질문, 그 질문을 이제는 받아들여서 우리가 하면서 정답을 알고 있어야 됩니다.
흔히 제가 많이 듣는 답변은 이거였어요. 성령 안 받아서 그렇다. 지옥 가는 사람은 성령 안 받아서 그렇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그러면 구약성경은 왜 있는데요? 또 비슷한 답변은 이런 거예요. “왜 지옥갑니까?” “창세전에 예정되지 못해서 지옥 갑니다.” 그러면 그 다음 나오는 질문 “왜 나는 예정 안 되었습니까?” “몰라” 그렇게 되지요.
마지막은 결국 몰라, 로 끝나버리는데 구약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 내부에서, 이방나라 말고요, 하나님의 언약의 본성을 이스라엘 자체 안에서 찾아야 돼요. 언약밖에 있는 사람, 지 옥가는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께 버리운 자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 버리운 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그 중에 하나님께 버리운 자들이 있어요.
새 도로가 생겨버리면 옛날 아스팔트 도로는 그냥 버려진 도로지요. 그 버려진 도로에서 저는 매일같이 산책을 하고 운동을 합니다만 그 버려진 아스팔트 조용한 도로 거기 가면 뭐가 많으냐 하면, 버려진 가구들이나 쓰레기가 많이 있어요. 쓰레기 버릴 데 없으면 밤중에 거기다 버리고 가는 모양이에요. 그 길을 가면서 ‘아, 하나님에게서 버려진 자가 주 안에 뿌리를 못 박는 거구나.’
“나 주안에 뿌리를 박고 싶어요.” 아무리 손들고 나와도 하나님의 언약자체가 하나님께 버리운 자들을 양산해 냅니다. 내보내요. 그리고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받아준 사람이에요. 그것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냥 성령 안 받아서 구원 못 받는다, 할 때 그 성령이라 하는 것은 구약의 성신에서 나왔고요, 언약에서 나왔거든요. 간단한 답변 말고 좀 더 긴 답변을 앞으로는 제시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왜 있느냐? 이스라엘은 언약의 내막과 그 본질을 그냥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 역사적으로 증거를 해준 게 이스라엘 역사에요. 이스라엘 역사에 여호수아가 있고 그 다음에 몇 백 년이 지나서 다윗이 나오는데 여호수아는 안정화에요. 언약이 안정되어 있어요. 그리고 다윗에 가면 이스라엘이 안정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다윗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 하나님의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안정권에 있지만 그 안정권이라는 그 내막을 알기 위해서 언약의 불안정한 시기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허락을 하십니다. 그게 사사기입니다. 여호수아, 사사기, 그 다음에 사울, 다윗, 이렇게 되거든요.
여호수아가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약속의 땅을 전부 접수를 했어요. 접수를 하고 그 혜택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으니까 사람들은 여호수아한테 굉장히 고마워하고 하나님께 굉장히 고마워했습니다. 문제는 본인이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혜택은 입었지만 본인이 누군지를 모르는 겁니다.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성령 받아서 구원 받습니다.” “좋겠네.” 문제는 성령 받아서 구원받는 것은 좋은데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창세전에 예정 받아서 구원받았습니다.” “좋겠다.” 너는 좋지요. 예정되어서 구원받았는데 나는 누구냐에 대해서 정작 할 이야기가 아무것도 없어요.
뭐냐 하면, 뭔가 언약의 불안정기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받아 챙기는 것만 급급해서 교회 와서 “복음 들어서 기뻐. 나 천당 가게 되었어. 끝.” “본인이 누군데요? 본인이 어떤 사람인데요?” “몰라요. 받아 챙기면 되지 내가 누군지 굳이 알 필요가 뭐가 있느냐?”
여호수아가 역사의 끝이 아닙니다. 역사의 종결이 아니에요. 다윗 때까지 와야 됩니다. 그 사이에 이스라엘이 얼마나 무너졌는지,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버림받았는지 그 경과, 그 과정이 꼭 필요해요. 이스라엘 본인이 이스라엘이 누군지를 알아야 됩니다.
여호수아 때 모든 약속의 땅을 접수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이 자신의 자리라고 여겼던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어서 복 받은 자리,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언약 안에 과연 인간이 뿌리박힌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감히 인간이 하나님나라에 같이 다리 하나 걸친다……, 아니 다리 하나 걸치는 것이 아니지요.
온 몸이 하나님만 사는 천사들만 사는 세계에 인간이 감히 거기에 끼어들 수 있는 존재인지,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그것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은혜가 은혜답지 못했어요. 공짜니까 공짜로 받는 것만 급급했고 이게 왜 은혜인지, 이게 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지를 몰랐던 겁니다.
사사기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나오는 게 그 이야기에요. 그들은 여호수아를 몰랐다. 벌써 분위기가 싸해져요. 그들은 여호수아를 몰랐다. ‘이 약속의 땅이 내 땅인데 굳이 옛날 조상 알 필요가 뭐가 있느냐. 우리는 내 것, 내 땅만 챙기면 그만이지.’라는 뜻인 거예요.
그들은 여호수아를 잊어버린 거예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서 은혜 준 그 시기를 잊어버렸습니다. 잊을 때 나오는 그 현상은 언약의 안정화가 아니라 비안정화가 된 겁니다. 다시 말해서 언약의 땅에서 하나님, 주 안에 뿌리를 박아야 되는데, 주님이라는 화분에 핀 꽃이 되어야 되는데 그 흙이 뭐로 점령이 되느냐 하면, 언약이 없는, 언약이 전혀 없는 이방민족으로 화분의 흙이 가득 채워지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그들과 한통속이 된 채 ‘내가 살면 그만 아니냐. 밥 먹고 돈 벌고 살면 그만이잖아. 인생 뭐 있어? 밥 먹고 사는 게 인생이지.’ 그걸로 완전히 한통속이 되어버린 거예요. 언약이 없는 거예요. 이제는 주님 안에 박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고 그런 같은 또래, 또는 같은 인간류, 같은 인간들끼리 섞여 사는 이게 세상이지 뭐, 이런 식으로 그만 모든 사고방식이 달라졌습니다.
누구 안에 박혀 있다는 의식은 사라지고요. 자기 실력껏, 능력껏, 소신껏 열심히 일해서, 돈 벌고 살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취소한 적이 없어요. 그 땅은 언약의 땅이지 인간들이 살라고 준 땅이 아니에요. 그런 이방나라적인 땅이 아닙니다. 언약이 언약대로 제대로 나타나야 될 필요성이 있는 땅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비록 못난 백성이지만 그래도 언약백성이라고 하나님께서 그 언약이 없는 이방민족에게 자기 백성이 눌리는 것을 그냥 지켜보고 있지는 않았어요. 실제로 이스라엘은 이유도 없이 이방민족에 그렇게 학대와 압제를 받으니까 구원자를 보내달라고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부르짖는다는 것, 고통 중에 부르짖는다. 이것이 바로 내 뜻대로 안된 거거든요.
내 뜻대로 안될 때 거기 뭐가 등장하느냐? 나가 등장합니다. 나, 내 뜻대로 안될 때 앞에 나가 등장하는 거예요. 내 맘대로 안 될 때 나가 등장하는 겁니다. 비로소 그 이스라엘 사람들은 약속의 땅을 접수했음에도 불구하고 뭘 놓쳤는가? 내가 누군지를 몰랐던 거예요. 내가 누군지 몰랐던 그것을 나라는 것이 어떤 입장인가, 어떤 처지에 있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이방민족으로 완전히 압제 당하게 하신 겁니다.
어제 토요일에 영화를 하나 봤어요. <미나리>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외국에서 골든 글로브 상을 받은 좋은 작품이라고 해서 유명한 영화지요. 그걸 보면서 인간의 자아, 인간의 나, 라는 것은 누구한테 뿌리박히지 않고 홀로 살아가는 나, 나는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너무나 적나라하게 잘 나와 있었습니다.
제가 그 <미나리> 영화 이야기를 할 텐데요. 제 이야기 들으면 <미나리> 영화 볼 마음 없어질 거예요. 스포일러, 영화 내용 다 이야기 해버릴 테니까요. 영화 보는 흥미가 감할 거예요. 거기서 인간의 자아라는 것,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면, 내가 누구한테 물어요.
순서가 있어요. 내가 누구한테 묻게 되어 있고, 그 물음만큼 어떤 성과, 생산물이 나타나고, 그 성과를 쥐고 잠시 좋아하다가 다시 돌아가서 거기서 좌절하고, 좌절하고 난 뒤에 다시 좌절하는 가운데 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느낌 가지고, 그 느낌 가지고 또 타인에게 묻는 거예요.
나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나는 가만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나는 누굴 붙들고 물어요. 묻는 것을 나라고 하고, 답변해야 될 사람을 남이라고 이야기하고, 거기서 나오는 결과물을 생산물이라고 하고, 그 생산물은 다시 어디로 돌아오느냐? 그 생산물을 쥐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실망하고, 분노하고, 다시 거기서 딛고 이걸 만회하기 위해서 또 나는 남을 붙들고 또 묻고, 나는 세상을 그렇게 살아갑니다.
누굴 붙들고 묻는 거예요. 자꾸 묻는 겁니다. 한국에 있던 사람이 미국으로 이민 갑니다. 왜? 한국에 있다가 실망했거든요. 실망했으니까 누군가에게 묻는 겁니다. 누구한테? 미국한테 묻는 거예요. ‘미국, 너희들은 잘 살지?’ 묻는 거예요.
한국에 있던 가족이, 애 둘 합쳐서 네 식구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병아리 감별사한다고 갑니다. 1980년대 이야기에요. 이민이야기. 병아리 감별사 하면 평생 먹고 산다는 허황된 한국 브로커의 말만 듣고 병아리 감별하는 것 배워서 캘리포니아에 가서 살다가 10년을 살다보니 돈은 좀 있는데 ‘이건 사는 게 아니다. 병아리 궁둥이만 보고는 못산다.’ 그래서 아칸소 주에 농장하겠다고 가요.
계속 묻는 거예요. 아칸소에서 농장 하면 성공한다는 그 소리를 듣고 거기 가는데 그게 묻는 거지요. 지금 이 상태를 내 외부에 묻는 겁니다. 아, 아칸소 주에서 농장을 하게 되면 살 수 있다. 아내한테는 정원 가꾼다 해놓고 거기 갔지요. 그래서 거기서 50에이커의 농장을 얻습니다.
아내도 병아리 감별사 기술 배워서 남편과 함께 일하면서 농장일은 일대로 하고. 거기서 정신이 좀 이상한 미국 일군 데리고 농장을 합니다. 처음에 50에이커의 넓은 농장에 트랙터 빌리고 대출받아서 농사지을 때 어떤 성과를 얻는 것 같았지요.
그런데 물이 없어서 농산물이 완전히 썩어버립니다. 좌절이지요. 내가 어떤 환상을 보고 물었고, 환상은 잠시 나에게 성과를 주었고, 하지만 잠시 뒤에는 그 성과가 나에게 좌절되고 실망스러운 거예요. 인간은 왜 실망하는가? 자기가 자기를 추궁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자아의 핵심입니다.
오늘 설교의 핵심은 뭐냐? 인간은 끊임없이 자리를 추궁한다는 거예요. 책임 추궁한다는 거예요. “네 인생 왜 그것 밖에 안 돼? 왜 그것밖에 못살아? 똑바로 못해? 똑바로 했었어? 똑바로 했는데 그 꼴이야?” 이게 누가 누굴 추궁하느냐? 내가 나를 추궁하는 거예요. “뭘 했어 그동안? 네 인생 어떻게 살았어? 기껏 그거야?”
주 안에 절대로 뿌리를 박지 못한 인간들, 주안에 심기지 않는 인간들, 뿌리가 없는 인간들은 계속 남을 붙들고 무슨 기회가 있으면 붙들고 물어요. 평생 묻는 게 할 일이에요. 묻고 성과 얻고, 성과 쥐고 그 다음에 그것 다 좌절되고 실망스럽고, 내가 나에게 추궁당하고, 다시 거기서 일어서서 두리번거리면서 도움 될 사람에게 또 묻고. 인생 뭐 있습니까? 그게 인생이고 그게 인간 아닙니까? 언약밖에 있는 인간.
아내는 한국에 있다가 남편이 미국 간다 하니까 같이 허황된 꿈을 꾸고 누구한테 묻느냐? 남편한테 물어요. “당신은 내가 당신한테 시집온 보람을 다오. 내가 당신 믿고 시집온 보람을 당신은 나에게 제공할 책임이 있어. 당신 일에 내가 협조할 용의가 있으니까 당신은 나를 실망시키지 마.” 남편이 남이 되는 겁니다. 남편에 모든 것을 다 미루고 자기는 남편이 하는 그 일의 결과를 같이 공유할 날만 기다리고 있지요.
남편과 결혼해서 애 둘 낳았는데 밑에 있는 남자애가 심장이 안 좋아요. 아내는 붙들 길이 오직 주 예수밖에 없어가지고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살면서 매일같이, 부부싸움은 매일같이 하고 있어요.
“나 이럴 거면 못산다. 나 한국 들어갈래.” 남편은 “들어가지 마라.” 아내는 “난 한국 들어가련다. 사는 꼬라지를 봐라. 바퀴 달린 이 집에서 이게 사는 거야? 나 이런 꼴 보려고 온 것 아니다.” 남편 하는 말이 “남자가 자기 꿈 이룰 때까지 좀 지켜주면 안 되겠어?” 이런 식으로 매일같이 싸우는 거예요.
부부가 싸우니까 애들은 종이에 편지 써서 비행기 만들어서 영어로 “싸우지 마”라고 써서 막 날리고. 실망스러운 거예요. 좌절된 거예요. 이런 희망 없는 형편, 농작물은 완전히 말라죽었지요. 이런 형편에서 아내는 또다시 묻습니다. ‘한국에 있는 엄마를 데려오겠다.’ 엄마에게 묻습니다. 좌절되니까 뭘 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 남에게 물어야 될 것 아닙니까? 엄마를 데려오는 것에 희망을 품지요.
엄마, 엄마를 데려옵니다. 엄마가 와서 애를 키워줍니다. 엄마가 미국에 올 때 미나리 씨앗을 갖고 옵니다. 다시 아내는 친정엄마의 품 안에서 약간의 만족감을 얻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나이 많으니 점점 치매가 옵니다. 가족들이 외출한 사이 엄마가 바깥에서 쓰레기를 태우다가 바람이 불어서 일주일 후에 아칸소 한국식품에 납품할 농산물 창고를 다 태워버렸습니다.
믿었던 엄마가 치매가 걸려서 내가 믿었던 이 가족과 이 재산이 하루아침에 완전히 재가 되어서 다 날라 가버렸습니다. 아내의 친정엄마는 한국에 있다가 손자 손녀 보고 싶어서 아내라는 타인에게 묻는 거예요. ‘나의 앞으로 남은 희망이 어떤 것이 있을까? 손자 손녀 키워야지.’ 새로운 희망을 얻고 타인에게 기대고 처음에 재미나게 살 때 어떤 성과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병으로, 치매로 집이 홀라당 다 날라 갔을 때 그 멍한 낭패감, 여우조연상 받을만한 연기를 보여줘요. 멍한 상태, ‘뭐야? 나라는 존재가 대체 뭐야?’ 도대체 나라는 존재가 이 가정에서 뭐가 되었어요? 그들의 꿈을 좌절시키는 그런 존재이면서 그 존재감에서 발을 못 빼는 거예요.
알 수 없이, 희망 없이, 전혀 무작정 돌아가는 나위주의 이 세상에서 발을 못 빼고 있는 겁니다. 어떤 해답도 대책도 없고, 대책이 없으니까 남 붙들고 계속 묻는 거예요. “나 어떻게 살면 돼요? 뭘 하면 되겠어요? 어떤 게 나에게 희망을 줘요? 어떻게 사는 게 나에게 삶의 성과를 제공합니까?” 계속 붙들고, 붙들고, 뺑뺑이 도는 생활, 그것밖에 없어요.
재산 홀라당 다 태우고, 영화 마지막은 ‘냇가의 미나리, 아무데나 던져져도 잘 크는 미나리처럼 이민사회는 그런 좌절을 겪으면서도, 흩어져도 그 나름대로 살잖아.’ 이게 영화의 끝이에요. 약간의 희망이라도 주겠다고. 그래서 미나리, 아무데나 흩어져도 그래도 나름대로 산다고.
그게 언약 밖의 실상입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이 그것밖에 안돼요. 계속 자기를 추궁하는 괴물 같은, 자기보다 더 큰 자기 손에 잡히지 않는 무형의 자기, 그 자기 안에 자기가 농락당하고 있는 거예요. 당하고 있는 거예요. 그 괴물은 내 손에 잡히지 않는 나, 그 나에 역사적으로, 실제적으로 생활하는 신체를 가진 작은 나가 농락당하고 있는 겁니다. 책임추궁 당하고.
“사는 꼬라지하고는!” 맨 날 이런 잔소리나 듣게 돼요. 그러면 거기에 부응해서 보란 듯이 “나도 잘살 수 있단 말이야. 나도 성공할 수 있단 말이야.” 하고 뭐든지 열심히, 이민가든지 해보겠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 끝은, 결국 인간은 어디 가느냐? 모든 인간은 뺑뺑이 돌다가 마지막 가는 곳은 어디냐? 장례식장이에요.
거기에 왔다 갔다 하는 조문객들이 있지만 사실은 그 조문객 있으나 마나 자기는 표정 없는 정지된 그 사진 한 장안에 그냥 담겨 있습니다. 모든 것은 정지되어 있었어요. 처음부터 인간은 죽어 있었고, 언약밖에 있는 존재는 무조건 죽어 있었고, 이 세상에 싸대는 것은 내가 죽음이 뭐냐를, 죽음의 이유가 뭐냐 추궁당하면서 죽어가는 가련한 신세에 불과한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평생을 60, 70, 80, 90, 100세까지 평생을 그 짓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아무 대책도 없고 어디 뿌리박힐 데가 없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여호수아 당시에 은혜로 약속의 땅을 줬습니다. 그 때는 자기 자신을 몰랐지요. 마땅히 받아 챙겨도 되는 줄 알았지요. 내가 누군지를 몰랐던 겁니다. 그 여호수아와 다윗 왕 시대 사이에 언약의 불안정화, 다시 말해서 언약 안에 박혀야 될 인간들은 박혀야 되는데 박히지를 않았어요.
여호수아를 잊어버리는 순간 언약을 잊어버렸으니까, 이방민족이 쳐들어왔으니까 그들을 본받은 거예요. 그들이 하나의 환상이 된 겁니다. 그들이, 이방민족이 미국이었던 거예요. 나도 저 이방민족처럼 힘세고 경제적으로 부요하고 잘 먹고 잘살 수 있다, 성공할 수 있다, 그 유행병이 다 들어버린 겁니다. 언약은 팽개친 겁니다.
다시 언약의 순간순간 안정화를 주기 위해서 여러 사사들이 많이 나옵니다. 16명의 사사들이 나오지만 그중 대표적인 사사가 기드온, 그리고 입다, 그리고 삼손. 기드온은 사사기 6장, 입다 사사기 11장, 삼손 사사기 16장. 초장기 사사의 특징은 죽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후반기 사사의 특징은, 죽지 않는 사사에서 점점 죽어버려요. 삼손은 죽습니다.
주님 안에 박힌다는 말은 뭐냐 하면, 너는 지금 너를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너 자신이 네가 죽어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사사가 대신해서 이렇게 죽어 있는 것,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박히더라도 죽어야 생명 안에 박혀 있는, 생명에 뿌리를 내리는 사람이 되도록 들어올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체가 주는 그 죽음 안에 합류가 되어야 되지요. 그렇게 같이 들어가 줘야 이제는 상상도 못한, 엄두도 안 되던 그 영생의 나라, 천국, 하나님과 천사만 사는 그 나라에 우리가 이 땅에서 언약에 의해서 죽음의 형식으로 올 때 그 죽음의 형식 속에 같이 담기게 되는 거예요.
그 자리가 무슨 자리냐 하면 이 땅에서 추방된 자리에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자리에서 추방된 예수님이 비로소 하나님의 영생의 자리를 만드신 겁니다. 히브리서 13장 12절에 보면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죽어서)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성문 밖에 나가는 거예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종교가 아니라 성문밖에 나가는 겁니다.
오늘날 기도회라는 것도 마찬가지지요. 기도회라는 것이 결국은 이민 간 사람이 미국에게 물었듯이 “미국은 어떻게 살아요?” 하고 묻듯이 교회 와서 자기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 묻는 거예요. 성과 달라고, 내가 기도한 보상 달라고. 성과 받아놓고 처음에는 좋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또 실망스러워요. 그러면 또 더 심한 기도를 더하게 되고요.
교회 와도 주님 안에 들어갈 수가 없는 거예요. 그 영화 작가, 또는 감독이 의도한 것이 계속 삽입되어 있어요. 1980년대 미국의 남부지방에는 기독교가 아직도 성행했거든요. 그럴 때 하나님의 도움으로 농사 잘되기 위해서 어떤 짓거리를 하느냐? 나무 십자가를 메고 주일날 마다 먼 거리를 고행의 길을 걷는 사람이 있어요. 농사 잘되라고. 내 자아가 잘되라고.
“아저씨, 그 무거운 것을 왜 짊어지고 다닙니까?” “이게 내 교회입니다.” 그 사람이 퇴마사로서 귀신도 쫓아내는 일도 해요. 친정엄마(윤 여정)가 치매 걸리니까 귀신아 물러가라, 하고 중얼거리기도 하는 그 모습들을 영화에 깔아놓는 이유는, 인간이 이 환상 같은 세계 속에서 자기가 죽은 것도 모르고 살아보려고 애쓰는 그 인간들의 처절한 몸부림, 그 몸부림에 누가 말려드는가? 기독교라는 종교가 말려든 거예요. 교회가 말려들고 예수가 말려든 거예요.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은 이사야 53장 3절에 보면 싫어버린바 되었거든요.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인간의 자아와 예수님의 자아가 어울릴 수가 없습니다. 싫어버린바 된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수아 이후에 이방민족이 부러워서 여호와 버리고 그들을 따라가다가 도리어 그들 나라에 압제를 당하지요.
그들은 자기가 뭐가 잘못되었는지는 모르고 압제를 당하니까 그냥 부르짖는 겁니다. 그렇게 부르짖을 때 사사중 하나가 입다라는 사람이 있는데 입다 이 사람이 구원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깽패거든요.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기 위해서, 그들의 동조를 얻기 위해서 “내 힘 가지면 저 암몬 자손 이길 수 있다. 여호와께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힘 주셨다.” 하고 객기를 부리면서 자기는 승리를 장담하지요.
사사기 11장 31절에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이런 식입니다. 승리를 하니까 제일먼저 누가 마중 나왔느냐? 입다의 딸이 마중 나옵니다.
입다의 딸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세상살이를 경험해보지 못한 자에요. 그 처녀가 아버지의 객기와 그 과실로 인하여 하나님께 맹세한대로 죽어요. 시집도 못가보고 죽습니다. 주위에서 말렸지요. 말리니까 “아닙니다. 아버지의 승리는, 이것은 하나님께 약속한 것이니까 내가 하나님의 승리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서 내가 결혼은 안했지만 그냥 죽겠습니다.” 하고 자기를 제물로 바치지요.
누가 사사에요? 진정한 사사 바로 입다의 딸이 사사에요. 이게 진수에요. 언약의 진수! 언약 안에 인간을 허용하는 그 자리는 이 땅에 우리가 죽어도 마땅함을 아는 자의 자리에요.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있을 자리가 없음을 아는 사람들의 자리, 이 땅은 영원한 곳이 없다는, 나라는 자아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죽어 마땅한 나라는 것을, 충족되지 못하는 나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그 자리, 그 자리가 천국에 있는 우리의 자리입니다.
사사가 그걸 보여줍니다. 삼손이 또 힘이 세요. 사사들이 힘이 세다, 지략이 있다는 말은 바로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수준을 말해주는 겁니다. ‘우리교회 돈 좀 많은 교인이 왔으면 좋겠다. 십일조 한 2천만 원……’, 2천만 원은 너무 심하다만 ‘……2백만 원 하는 사람이 왔으면 좋겠다.’ 이게 뭐냐 하면, 내 자아의 환상이에요. 이게 환상에서 배웠던 내 자아에요.
나는 묻습니다. 우리교회에 돈 많은 사람이 왔으면 좋겠다. 돈 많은 사람이 타인이 되지요. 그러면 그 사람이 일시적으로 와가지고 복음 있다고 헌금 좀 하겠지요. 나는 그 사람에게 묻고, 묻는 사람은 호응에 의해서 약간의 헌금을 하지요. 하는데 얼마 안가서 복음 내 마음에 안 든다고 삐져서 서울 가버렸다. 그러면 저나 우리 교인들은 괴물한테 책임추궁 당한다고요.
“너 기도 그것밖에 안했지? 왜 열심히 더 안했어? 부자교인 왜 못 붙들었어? 너 인생 그래 살래? 인생 그 따위로 살래? 제대로 못살아?” 또 추궁당하는 겁니다. “살아도 왜 모든 게 어설프냐?” 내가 나한테 추궁당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그 전에 남들이 날 추궁하겠지만.
인간은 추궁당하기 싫어서 윤리도덕으로 하는데 윤리도덕이라 하는 것은요, 이것은 여름철에 방역차가 모기약 뿌리고 가는 것 그뿐이에요. 그것 뿌리게 되면 잠간 사라졌다 원래대로 돌아와요. 내가 나를 못 버리는 괴물 같은 나, 이게 언약 없는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무쏘의 뿔로 너 혼자 가라는 거예요 너 혼자.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게 아니에요. 주 안에 뿌리가 박혔다. 주안에 뿌리가 박혔다, 그것하고 너 혼자 열심히 무쏘의 뿔로 받아가면서 살아가라, 이게 얼마나 다릅니까? 언약 있는 쪽과 언약 없는 쪽이. 내 선에서 내 안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것은 악마적이지요. 마귀적입니다.
인간이 혼자 산다고 열심히 변화를 추구하고 직업을 바꿔봤자 이것은 피자 판에 토핑하는 것과 똑같아요. 토핑을 뭘 하던 간에 그 피자 판은 변한 적이 없어요. 달라진 적 없습니다. 그 밀가루 판은. 온갖 아름다운 채색, 소시지 넣고, 햄 넣고……, 갑자기 피자가 먹고 싶어진다만, 백날 해봐야 바뀌는 것도 없어요. 원판은 바뀐 적이 없습니다.
제가 지난 목요일에 서울 장례식에 갔었어요. 조문객이 제로에요. 제로입니다. 돌아가신 분 그 아들 그리고 우리 내외까지 달랑 네 명이었어요. 한명 더 있었구나. 5촌 고모. 그래서 네 명, 돌아가신 분까지 합하면 다섯 명. 얼마나 은혜가 되던 지요. 이게 세상이다. 우리 떠나면 사진만 남았어요. 그게 세상이에요.
쓰잘 데 없이 위로받겠다고 설치지 마세요. 그래서 울산강의에서 했지요. 이 세상은 장례식의 확장이라고. 어디도 장례식장이 아닌 곳이 없어요. 성경 전도서에 보면 잔치 집에 가지 말고 초상집에 가라. 거기 네 원형이고 네 본질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전 7:2)
죽어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돈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고, 잘나고 못나고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본인이 누군지를 몰라요. 언약이 없으니까 본인이 누군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요나서 3장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4절에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너희 세상 완전히 멸망당한다. 이 말에 어떤 협상이나 타협이나 흥정의 요소는 일체 없습니다. 너무나 차갑고 냉철하고 냉혹해요. 봐주는 것 일체 없습니다. “네 주제에 멸망뿐이야. 지옥 가는 것뿐이야.”라고 요나가 그냥 사심 없이 그대로 이야기했더니만 요나는 망할 줄 알았어요.
왜? 인간 사회는 좋은 게 좋잖아요. 그런데 세상에, 예상 밖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는데 5절에 보니까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이러한 일은요, 말씀을 전한 요나가 전혀 예상 못했어요. 왜? 자기는 차갑게 전했거든요. 봐주기 없기로 전했거든요. 있는 그대로, 하나님 말씀 있는 그대로 전했다고요. 우리가, 성도가 해야 될 일이 그 일이에요. 세상을 보는 안목은 그래야 됩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안하고는 내가 어떻게 말을 부드럽게 하고, 봐주면서 하고, 점잖게 하고, 그것하고는 전혀 관계없어요. 하나님이 은혜 주니까 그들은 회개한 겁니다.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게 그런 거예요. 지난 시간도 이야기했지만 세례요한이 하나님 말씀 전할 때 보세요. 얼마나 차갑습니까? “인간들아, 지옥이나 가거라.” 바리새인보고 하는 이야기잖아요. “너희가 임박한 진노를 피하려 하느냐? 웃기지 마. 지옥이나 가! 지옥이나 가!”
그 이야기 했더니만 바리새인들은 모르지만 백성들은 요단강에서 세례 받았어요. 무슨 협상과 타협이 가능합니까? 성경을 안보는, 또 보면서도 불신자들의 특징이 있어요. 중들도 성경을 보거든요. 종교뿐만 아니고 소위 교양 있다 하는 사람들도 성경 보면서 들은 풍얼 이야기하고 또 기독교 학교에서 채플시간에 목사를 통해서 들은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그러면서도 복음 안 받아들이는 그 특징이 뭐냐 하면, 죄용서가 그렇게 유난스럽고 과도하다는 거예요. 죄 사함의 방식이 너무 과격하다는 겁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뭐 있느냐, 하나님의 아들이 채찍 맞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고, 그 피가 흥건하고. 왜 그렇게 과격한 방식이 굳이 필요하냐. 그걸 도대체 나는 못 믿겠다. 이게 불신자의 특징입니다.
그 말은 뭐냐? 본인들이 본인에 대해서 너무 과하지 않게 다루고 있어요. 너무 좋게, 좋게 봅니다. 그것은 바로 언약적 안목이 없기 때문에. 입다의 딸이 죽고, 삼손이 마지막에 죽어서 사사 일 한 것을 몰라요. 이 세상 전부가 장례식장이라는, 화려하고 좋은 옷을 입어도 전부다 시커먼 옷 입고 다녀야 될 그런 시신들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성도를, 그 뿌리를 주 안에 박아놓고 성도라 하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면, 성도를 임상용 해부용 시체로 간주해가지고 성령이라는 고고학발굴단을 조직해서 천사와 성령을 통해서 낱낱이 우리 성도 안에서 인간은 왜 죽어야 되느냐를 끄집어내는 작업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교훈이고 율법이고 그게 말씀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라는 말씀을 가지고 우리 구원받은 성도를 눕혀놓고 이미 이 육체는 가버린 육체, 죽은 육체니까 그 육체로 하여금 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지, 왜 말씀이 말씀대로 시행하는 게 옳은 이야기인지, 성도를 통해서 그걸 찾아내는 거예요. 네가 스무 살 때, 네가 서른 살 때, 네가 예수 믿고 38년 동안 무슨 짓을 했는지를 낱낱이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너는 네가 스스로 살기 위해서 교회 붙들고, 하나님 붙들고, 예수님 붙들고 네가 물었잖아. 왜 물었는가? 살아보려고, 내 자아를 산 자아로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그런 부질없는 짓거리를, 좌절과 책망과 추궁당하는 그리고 결핍만 생겨버리는 실망스러운 자아지만 그걸 못 놓고 안 놓치려고 애썼던 그런 부질없는 짓거리를 계속 반복해 온 거예요.
다시금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자녀들 한 번 보세요. 어떻게 살아가는지. 여러분의 과거 모습이거든요. 우리의 옛날 모습 아닙니까? “엄마, 오늘 보너스 탔어.” 뭘 어쩌라고! 보너스 탄 거 그거 어쩌라고? 그게 왜 좋은데요?
사도바울, 이 사람이 사울되기 전에 바울이었습니다. 그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하는 대화가 나와요. 사도행전 9장 5절에 나옵니다. 4절에 보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절에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제는 우리가 알아야 돼요. 왜냐하면 우리가 주 안에 뿌리가 박혀있기 때문에, 뿌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이 누군지 알아야 돼요.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너와 나 사이는 핍박관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 핍박하는 자를 거두어주신 겁니다.
“너는 나를 핍박했기에 너는 이미 죽은 자야. 네 안에 있는 거대한 자아, 악마라는 자아, 요물같은 자아가 나밖에 모르는 너를 앞장세워서 너로 하여금 악마 짓 하게 하는, 하나님 버리고, 언약 버리고,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그 요물에 의해서 내가, 핍박받은 자가 바로 나야. 네가 핍박한 자가 나라고!” 내가 너를 거두어주는 거예요. 핍박받은 내 자리에 핍박한 네 자리를 꽂아서 천국백성 되게 하시는 겁니다.
기존 자리가 없으면 새 자리도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와서 유난스럽게 살았어요. 따라서 성도도 예수님 따라서 이 땅에서 유난스럽게, 과도하게 세상을 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과도하게 보면 과도하게 볼수록 세상에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래서 제가 마지막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이 땅에 유일하게 확정된 자아를 갖고 있는 사람은 오직 성도밖에 없습니다. 어떤 자아냐? 죄인 중에 괴수라는 자아로 확정 났고 고정되었습니다. 이미 구원되었기 때문에, 이미 주안이 나를 포위하고 있기 때문에, 주 안에 있는 존재기 때문에, 나는 죄인을 받아들여서 언약을 완성시키는 하나님의 그 일에 참여된 자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 있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죽을죄밖에 없습니다." 그 이야기를 죽기 전에 맘껏 하라고 아직도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용해 주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얼마나 하루에 수백 번, 너는 어떻게 사느냐고 추궁당하는 그런 가련한 신세로 머물고 있지나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내가 나를 책망하고, 남이 나를 꾸중하고, 세상이 나를 얕잡아 볼 때 자존심 상해서 다시 한 번 불굴의 의지로 일어서는 이 악마의 자리의 되풀이, 죽은 자가 산자처럼 흉내 내는 그 거짓된 환상의 되풀이를 이제는 멈추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