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비밀
2021년 2월 21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2:1-3
(2:1)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자꾸만 세상을 둘로 나누어서 보려고 합니다. 신자/불신자, 교회/세상, 실상(비밀)/가상,으로 말입니다. 구분짓는 이런 인식 자체가 세상사람들에게는 짜증나는 일입니다. 세상사람들은 그저 마음 편하고 조용히 이 세상을 살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사도가 보기에 이 세상을 실상이 아니라 허상입니다. 가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제시한 ‘비밀’에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비밀을 제켜놓고 세상의 진실을 논하자는 것은 결국 가상일 뿐입니다. 쉬운 예로 인간이 세상과 자기 자신에게 아무리 탐구하고 연구해도 자신이 병들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의 모든 노력은 도리어 자기 자신을 정상적인 존재로 설득시켜 줄 뿐입니다.
마태복음 9:1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즉 사람들의 예수님의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은 근본적으로 병든 자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라오디게아 교회가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3:14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창조의 근본’이라는 단어가 나오지요. 이 ‘창조의 근본’되시는 분이 교회를 나무라고 계십니다.
이는 교회의 촛대를 옮기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란 천상의 요소와 지상의 요소가 결합되어 있는 체제입니다. 어느 한쪽이 사라지면 다른 한쪽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창조의 근본’이라는 말씀은, 나중에 올 천국과 지옥과의 구분이 이미 이 세상에 있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그 성질을 설명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천상의 요소는 7별과 7촛대입니다. 거기에 계시는 분이 곧 아멘이시오 충성이시오 창조의 근원이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들은 잠간 보이다가 사라지는 허상이요 가상입니다. 이 가상인 인간이 실상처럼 보이는 것은 자꾸만 자체 연출을 기획하고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생이란 실은 ‘자기 연출’을 의미합니다. ‘나를 위한 나의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겁니다. 결국 죄라는 것은, 자신이 원인이 되는 그런 결과를 탐내는 것을 말합니다. 가상체가 만들어낸 모든 것은 가상일 뿐이지 결코 실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의 숱한 교회들을 일곱 별과 일곱 촛대와 견주어 제거하십니다.
일곱 별이란 인간이 지상에 창조되기 전에 나타난 하늘을 대표하는 붙박이 별들입니다. 촛대란, 사람의 능이나 힘으로 되어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만 가능하다는 그 성전 안에 있는 촛대입니다. 따라서 별과 촛대의 공통점을 이미 확보되어 있고 고정적으로 완성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완성된 교회를 알리기 위해 지상의 쇠퇴해야만 교회들을 유발시키신 겁니다. 곧 가상이 사라짐과 동시에 가상에 가리워져 있는 실상이 드러나게 하는 방식입니다. 이 가상체 인물들은 개인적으로 확정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맨 처음 부활하시어 여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여자들은 손으로 예수님의 부활체를 만지고자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요 2:17)
즉 “만지지 말라”는 겁니다. 감히 가상체인 인간의 몸이 실상체이며 온전한 주님의 부활체를 만지지 못합니다. 다만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경우에만 만질 수 있습니다. “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이는 예수님의 부활체 자체가 인간의 몸을 부정하는 기능으로 작용하는 몸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부정이 구약 때 줄곧 내려온 율법의 기능입니다. 율법에 의해서 이스라엘 나라가 생겨났습니다. 그 이스라엘이 망하는 현장에 ‘사람 손으로 짓지 않는 성전’이 나옵니다.(숙 4:6)
그리고 그 뒤에 교회가 나옵니다. 따라서 율법이 없으면 인간들은 자신을 정상인으로 자처하고 싶어합니다. 율법이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면, 인간은 자기 내부 사정이 들통납니다. 그 안에 ‘뱀 안의 뱀’의 정체가 탄로납니다. 즉 나와 너를 긍정하면서 율법의 부정 기능을 극구 기피하는 속성을 보입니다.
사람이 ‘너의 세계’ 곧 이 세상에 등장하고 싶은 이유는 나의 잘남과 나의 긍정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즉 나는 그 누구로부터 보호받아야 마땅하고 당연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가상의 주체에 실상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의 활동 취지가 무의미하게 됩니다.
율법 정신에 의할 것 같으면 인간, 곧 가상 존재는 그 누구로부터 보호받거나 대접받은 대상이 못됩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연법 사상’을 악마에 의해서 토해놓게 됩니다. 이 인간 세상 전부가 ‘자연법 사상’의 깃발 아래 놓이게 됩니다. 자연법이란, ‘인간에게는 자유권, 소유권, 생존권, 저항권’이 있다는 주의입니다.
오늘날의 세계를 다스리는 실정법 바탕에는 이 자연법 사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비밀의 세계는 인간이 굳지 자아에 대해서 관심둘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뭘하나 안 하나 관계없이 ‘시시한 존재’입니다. 이 시시한 존재가 지상 최고의 희열의 순간은, 자신의 육 안에 성령이 들어와버리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자기 안에 자기 것이라는고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가벼움과 즐거움을 갖게 됩니다. 성도의 삶이란 잊기 위한 삶입니다. 오직 예수님 이야기만 해야 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시시하게 보면 안목을 계속 고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6강-골 2장 1-3절(현실과 비밀)210221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2장 1-3절입니다.
골로새서 2:1-3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교회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 그것을 가지고 3절에서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다고 했고, 이것을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2절에 나와 있어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것이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 그리고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 속에는 하나님의 비밀이 들어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자꾸 어떤 의도가 있느냐 하면, 신자와 불신자, 교회와 교회 바깥에 있는 세계, 그리고 비밀과 비밀이 포함되지 않은 것, 자꾸 하나님께서 애써 구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이러한 구분은 결국 뭘 로 등장하느냐 하면, 천국 만들기와 지옥 만들기에 있어서 하나님이 적극 나서고 있다는 겁니다.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 죽어봐야 아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는 자가 따로 있고 깨닫지 못하는 자가 따로 있다. 깨닫는 자를 교회라고 하고 깨닫지 못하는 자를 교회 아니라고 보는 거지요. 불신자로 본다 이 말이에요. 우리 인간들은 그냥 하나로 살고 싶은데 하나님 쪽에서 하나로 만들지를 않고 둘로 구분하는 이유는, 결국에는 천국과 지옥이 구분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천국과 지옥 만들기, 그 일에 하나님께서 적극 나서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관심 두는 것은 지옥 가는 사람은 누구냐, 그것보다도 천국 가는 사람은 누구냐, 그게 궁금하겠지요. 그래서 1절에 보면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 해서 요한계시록 3장 14절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14절 계속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를 하는데 그 천사를 보낸 자가 누구냐?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그분이 ‘아멘’이라는 말은 모든 것이 하자가 없이 진실로 그렇게 되었다는 뜻이고요, 처음과 끝이 일관되게 일했다는 뜻이고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그분이 그리스도인데 그가 창조의 근본인 겁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다시 정리하면,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게 창조의 근본이라는 겁니다. 그 창조의 근본이 비밀인데요. 이 비밀이 누구한테 알려졌는가? 교회에 알려졌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교회중의 하나가 뭐냐? 라오디게아에 있는 그 지역에 있는 사람들, 그 교회에게 알려졌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일곱 교회에 알려주셨는데, 요한계시록 3장 16절부터 죽 보게 되면 책망을 많이 하셔요.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창조의근본이 담겨 있는 교회, 그게 라오디게아 교회, 그 라오디게아 교회가 지금의 터키에 있었는데, 터키 바닷가에 있는 교회가 에베소 교회고 거기서 180킬로미터 내륙으로 더 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한국의 지도를 두고 한번 그어봤어요. 전라도 무안에서 경상도 하동까지가 거리가 180킬로쯤 돼요. 에베소교회가 전라도 무안이라면 하동의 라오디게아 교회가 있다고 보면 돼요. 이건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느 곳에 있느냐는 중요한 것은 아니고요. 그 교회가 창조의 근본을 품고 있다는 점이 중요한데요. 그 창조의 근본을 품고 있는 그 교회가 칭찬을 받아야 될 텐데 칭찬 받지 못하고 책망을 받습니다.
그 이유가, 창조의 근본이 되려면 이 교회에 책망부터 시작되어야 된다, 라는 뜻입니다. 책망부터 시작되면서 교회에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터키 해변가에서 180킬로미터 떨어졌으니까, 사람들은 그걸 현실로 이야기하지요. 지금도 라오디게아가 있으니까요. 에베소도 있고요. 현실에 있는 그 현실성과 그리고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비밀, 그리스도의 그 비밀성, 현실성과 비밀성이 같이 연합해서 융합체로 되어 있는 것이 바로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가 온전한 하나님의 비밀, 그리스도의 비밀을 드러내려면 이 현실성이 책망으로서 제거되고 삭제되어야 되지요. 그래야 하나님께서 교회와 세계, 신자와 불신자, 천국과 지옥, 실상과 가상, 이렇게 구분하는 하나님의 구분의, 창조의 근본의 의지가 살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가 다 망했지요. 교회 망했는데, 현실적 교회는 망했는데 그게 망함으로서 일곱 교회가 살아나는 방식을 하나님이 채택하신 거예요. 현실에 있는 사람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들어요. 사라졌는데 사라짐으로서 생겼다는 말은 현실적으로 가려진 그것을 제켜버리면 속에 들어 있는 창조의 근본이 드러나는 겁니다.
자,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창조의 근본은 뭐냐? 천국과 지옥, 그 천국과 지옥이라는 창조의 근본, 그 원래계획이 지상에서는 교회와 세상 또는 가상과 현실, 이런 식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가상과 현실을 같이 갖고 있는, 겸해서 갖고 있는 것이 바로 교회인데 교회가 책망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네가, 눈에 보이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이와 같은 원리가 예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마태복음 9장 1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 하셨어요.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라야 쓸데 있다. 13절에 보면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그렇게 되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를 하려면 우리가 뭘 생각해야 되고 무엇을 목표로 해야 되느냐 하면, 자신이 병들었다는 사실을 발췌해서 그걸 인정해줘야 돼요. 그게 주님의 이 선언에 호응하는 방법입니다. 나 병들었다는 겁니다. 이가 아프면 치과에 가면 되잖아요. 아, 참 이거 정말 너무나, 너무나 쉽고 쉬운 이야기, easy, 쉬운 이야기에요. 이 아프면 치과 가시면 되는 겁니다. 참 쉽죠. 정말 쉬워요
사람이십니까? 교회 오시면 돼요. 참 쉽죠. 왜? 인간자체가 병들었으니까. 병든 인간들이 자기 병든 것을 모르니까 주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겁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예수님이 살아서 일하십니다. 교회부터 조집니다. 너희 병든 것 맞다고. 왜? 융합체니까요. 가상과 현실, 지옥과 천국이 그 안에 같이 들어 있거든요.
신자인 듯 신자 아닌 신자 같은 교회. 전부 다 이게 융합체로 들어 있는 거예요. 교회보고 책망하는 것은 곧 세상에 대한 책망이고, 그 책망을 인정하는 쪽은 이미 그건 천국백성이고. 얼마나 쉽습니까? 주님은 이 땅에 와서 “너희는 인간도 아니야. 너희는 병든 자야. 날 때부터 병들어서 이단이야.”라고 책망해줄 때 “주님, 왜 그런 섭섭한 이야기를 하십니까?”라고 한다면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는 처음 날 때부터 정상이 아니거든. 병들었잖아.” 이 아프면 치과에 가듯이 “아파? 나에게 와.” “맞습니다. 제가 아픕니다.” 이러면 천국이잖아요 얼마나 쉬운 이야기입니까?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옆에 강도 둘이 있었지요. 강도 값을 해서 죽게 된 거예요. 그 두 사람은 나쁜 짓을 해서, 죽을 만 해서 죽은 거예요. 그래서 한 강도는 “죽을 만 해서 제가 죽습니다.” 하고 인정하고 “이것조차도 하나님 뜻입니다.” 하고 인정하니까 “네가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고 다른 한 강도는 “나를 빼내주면 믿습니다.”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왜 빼내줘야 되는데요? 아니 그걸 왜 빼내줘야 돼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했는데 왜 갑자기 졸지에 의인 노릇 하느냐 그 말입니다. 그것은 창조의 근본을 몰라서 그래요. 그리스도의 비밀을 몰라서 그래요. 이 현실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비밀이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어요. 그래서 교회가 특이한 거예요.
교회는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 교회의 뿌리는 구약 이스라엘부터 출발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뿌리는 뭐냐? 이스라엘의 뿌리는 율법에서부터 시작되는 거지요. 율법이 주어져서, 하나님의 법이 주어져서 이스라엘 되었고 이스라엘이 이어져서 교회가 된 겁니다. 그러니까 이 이스라엘 자체도 오늘날 교회하고 동일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이스라엘 되게 했을 때 이스라엘은 율법에 의해서 망했습니다. 망한 자리에 등장한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성전이 등장해요. 이것은 너희들의 힘이나 너희들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신약으로 하면 성령이지요, 오직 성령으로 내가 친히 만드는 성전이다. 그렇게 스가랴 4장 6절에서 예언해놓고, 그것은 스가랴에 의한 예언이니까, 그 뒤에 신약에 와서 그 이루어진 성전이 바로 교회가 되는 겁니다.
사람의 힘으로, 능으로 하는 것은 이 현실이지요. 그리고 주님의 성령으로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비밀, 이게 실상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게 다기 때문에 인간의 눈에 보이는 이것이 가상이 아니고, 허상이 아니고 실상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친절한지요. 너희들 자체가 가상이고 허상인 것을 알려주는 사건을 야기 시켰습니다.
그게 요한복음 20장 17절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했을 때에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먼저 봤습니다. 그 때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결정적이에요. 나를 만지지 말라. 너희들이, 가상이 만질 몸이 아니다. 내 몸, 이 부활의 몸은 너희가 감히 ‘나는 실상이다. 나는 팔이 있고 손이 있다. 나는 뭐든지 만질 수 있다.’라고 여겼던 그 몸으로 만질 수 있는 몸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의 부활의 내 몸은.
“너희들이 만지지 않음으로서 너희들 거울에 비췬 네 몸이 진짜 실상인지 아니면 부활한 내 몸이 실상인지 구분하는 계기를 가져라.” 그런 기회를 가져라 그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너희들 신앙생활 어떻게 했느냐, 이 말이지요. 따지는 거예요. “신앙생활 뭘 어떻게 했어?”
이 가상, 허상 같은 네 몸 갖고 네 몸 살리려고 그렇게 신앙생활 해대는데 그거 다 가짜고 헛수고, 다 소용없는 짓이에요. 왜냐하면 실상은 이 가상적인 몸이 만지지를 못해요. 오히려 우리의 가상적인 몸이 사라져야 나타나는 겁니다. 그게 교회에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이야기한 사마리아 여인도 마찬가지지요. 내가 이 몸 가지고 물을 길어서 맛있게 먹겠다고 할 때 이것은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라고 여겼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예 그 여인의 몸을 성령이 나오는 우물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 나오는 샘터로 만들 때 그동안 그러면 그 여인이 남자 다섯 명 사귀고, 자기 목마름으로 인생의 목마름, 갈증을 채우고자 했던 그 모든 것은 그냥 껍데기에 불과하고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만지지 말라는 거예요. 네 몸하고 내 몸하고 같은 질이 지금 아니라는 겁니다.
네 몸은 죽어야 될 몸이고 나는 이미 영생 얻은 몸인데 어딜 겁 없이 감히 썩어질 몸이, 허상이고 사라질 몸이 내 몸을 만지느냐, 그 말입니다. 참 성도가 되어서 이 세상을 산다는 게 힘들지요. 그러나 나를 시시하게만 보면요, 이 지옥 같은 세상도 견딜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자기 자신이 육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본인이 인정을 해줘야 돼요. 이 땅에서.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충격적이고, 가장 희열을 느끼고, 환희, 진짜 소리치고 싶은 기쁨의 순간은 뭐냐 하면, 영이 육속에 확 들어와 버린 거예요. 그러면 나는 영을 가진 게 아니고 반대로 생각해야 돼요.
나의 나됨, 나의 모든 것을 그분에게 다 빼앗긴 거거든요. 다 빼앗겨버린 겁니다. 사람이 빼앗기는 기쁨이 보통 기쁨이 아닙니다. 얼마나 기쁘다고요. 빼앗긴 기쁨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해야 돼요. “주여, 아직도 내안에 내 것이 남아 있지는 않겠지요?” 내 안에 내 것이 남아 있지 않기를 원하는 그 마음. 왜? 나는 시시하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그냥 가상이니까.
나만을 위한 안전지역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면서 나를 잊어버리기 위해서 살아야 돼요. 인간 자체가 결국은 가상이고 서서히 은퇴한다 하지요, 사라지고 있습니다. 연세 한 80넘어서 요양병원에 가 있는 어머님 찾아뵙지요. 물론 요새는 찾아가지도 못하겠지만 5월 8일 어버이날 자식들이 우르르 와서는 요양병원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눈물콧물 찔찔 흘리면서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막 울먹이지요.
그런데 그 어머니가 하는 말이 ‘시끄럽다! 너는 너의 감정을 사랑하고 너의 기억을 사랑해. 나는 너희들 출산할 때 아픔만 잊은 것이 아니고 너희들 키워줄 때 살아온 모든 것도 다 잊어버렸다. 아저씨 누구세요?’ 결국 치매라는 게 그겁니다. 점점 더 내가 사라져요. 그렇게 평생토록, 젊을 때 그렇게 지키려고 애썼던 내가 내 힘에 부쳐서 그런지, 내 정신의 힘에 부쳐서 그런지 어느 때가 되면 나라는 것도 없어져요. 인생이나 그 모든 경험이라는 것은 기억 속에만 담기기 때문에.
기억 속에만 담긴 거예요. 해마라는 곳에 담깁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없어지고 천국 만드는 주님의 계획과 지옥 만드는 주님의 계획, 그 둘을 구분하기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우리를 이 땅에 그냥 잠시 나타나게 한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자꾸 자기 자신을 이 땅에, 이게 가상인데 이걸 현실로 여기고 하는 짓이 뭐냐 하면, 자꾸 연출을 해요. 연출, 조작을 한다고요.
모든 경험은 우리 속에 환상으로 기억하기 때문에 자기가 연출을 해놓고 자기가 연출한 것에 대해서 굉장히 감동 먹고 자기 스스로 만족하고 살아갑니다. 이게 망상인데. 망상을 다른 말로 허풍, 다른 말로 하면 소꿉놀이에요. 돌 지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요. 돌 지난 지 4개월 된 애가 소꿉놀이 한 상 차려놨어요.
저 멀리서 한국에서 화상통화로 전화를 하니까 돌 지나고 4개월 된 애가 막 엄마를 부르는 거예요. 원시인처럼 말은 제대로 못하고 어어~ 막 불러요. 화상통화를 하는데 멀리 있는 할머니한테 보이는 겁니다. 이거 보라고. 내가 차려놓은 이 상을 보라는 거지요. 거창하게 상을 차려 놨어요. 온갖 것 다 차려놨어요. 막 좋아서 한번 보라는 거예요.
저게 인간이다. 저게 얼마나 조작된 연출이냐 말이지요. 그러니까 자기 딴에는 애를 쓴 거예요. 만 한 살 때. 만약에 그 소꿉놀이 안 좋아한다면 그 한 살 먹은 애가 자기 인생 고비를 느끼는 겁니다. 10대의 고비, 20대의 고비, 30대의 고비, 40대 고비, 50대 고비, 전부 다 이것은 연출한 겁니다. 내가 실상이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 자기 증명하고 싶고 자기를 두둔하고 싶은 거예요.
비밀, 그런 소리도 모르고, 천국과 지옥도 모르고, 하여튼 나는 나를 증명하고 싶은 것, 그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스물다섯 살 먹은 아가씨가 남자를 두 번 사귀었어요. 첫 번째 남자를 사귀었는데 그 남자를 사귀면서 사랑하니까 진실 되게 다 이야기한다고 다 했어요. 그렇게 다 이야기한 그것이 잘못이었지요.
뭐라고 했느냐 하면, 스물다섯 살 먹었는데 병원에 가보니까 폐경이 되었다는 겁니다. 아기를 못 낳는다는 거지요. 그 소리 듣고는 남자는 휘~익 곧장 떠나고 말았어요. 그래가지고 그 스물다섯 살의 폐경 된 여자가 어린이집 교사인데 32세 되어서 또 진실 된, 나름대로 진실 된, 진실 된 남자를 만나서 너무 그리워서 사랑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상담을 하는데 상담내용이 뭐냐 하면, 저 남자만큼은 놓치기 싫고 저 남자를 내가 너무너무 좋아하는데 내가 25세에 이미 폐경된 것을 이야기해야 될까요, 말까요? 그것 때문에 상담을 하는 거예요. 상담자들 한 세 명이 죽 이야기를 해요. 다른 사람들은, “가정에 아기 없어도 사랑만 있으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힘내세요. 응원합니다.” 그런 조로 상담해요.
그런데 제 맘에 드는 상담 하나가 있었어요. 정신과 여의사가 상담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남자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고백해도 남자는 당신 사랑할 겁니다.” 그런 식으로 “좋은 관계로 해주세요.” 했는데 그 정신과 의사는 상담 이렇게 했습니다.
“난자 keeping 했어요?” 못했지요. 폐경되기 전에 난자를 키핑했냐는 거예요. 커피 마시고 다음날 또 마시겠다고 키핑 하는 것 있잖아요. “난자 키핑 했어요? 안했다면 이제부터 우유마시고 영양제 먹어서 난자를 다시 키우도록 하세요. 끝.” 이게 상담내용이에요. 남자고 뭐고 관계없어요. 네 몸이나 잘 추스르고 챙기세요. 이게 상담이에요
엄지척이에요. 최고에요. 최고라고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챙기는 그게 전부라고요. 자기도 못 챙기면서 어딜 남 생각을 합니까? 무슨 남자친구를 생각해요? 바로 이 세상은 자기밖에 몰라요. 그래서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 안에 그리스도의 비밀이 없어요. 창조의 근원도 없어요. 따라서 천국과 지옥이라는 것도 그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나 성경에 나오는 주님이나 하여튼 세상을 둘로 구분하는 그 자체가 정말 짜증날 이야기에요. 사람들이 교회 안 오고 복음 안 들으려고 하는 이유가, 둘로 구분한다는 그 자체에 있어요. 더불어 살면 되지 왜 둘로 구분하느냐는 말이지요. ‘누구 지시받고 누구 뜻대로 둘로 구분해요? 나는 둘로 구분하기 싫은데.’ 지금 그 생각이 자꾸 나오기 때문에 둘로 구분하기 싫은 겁니다.
그런데 성경도 참 엔간히 고집 세요. 로마서 3장 13절에 보면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부터 시작해서 굉장히 도발적입니다. 성경전체가 굉장히 도발적이에요. 너무 과격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성경을 안보는 거예요. 너무 과격해서 본인들이 감당할 수 없어서 안보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의 죽은 시체 내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것은 그 속에 시체내장을 파먹고 있는 뱀, 뱀밖에 없어요. 뱀은 살아 있어요. 그러면 뱀이 인간의 썩은 시체 속에 살아있다면 그 시체의 뱀을 또 조사해 보는 겁니다. 뱀의 목을 벌리겠지요. 그 목을 벌리면 목구멍에서 독이 나오지요. 바로 뱀 속에 뱀이 있는 거예요. 뱀 속의 뱀, 그게 너라는 거예요.
뱀 속의 뱀, 뱀, 분명히 눈에 보입니다. 눈에 보이기 때문에 이게 가상이에요. 실상은 악마입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실상이 되는 거예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실상이 된다고요. 내가 몸이 있고 내 몸에 의해서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관찰하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허상인 것을 아무리 공부를 하고 또 연구해도 내가 허상인 것을 알 길이 없습니다.
왜? 내가 시작한 일이기 때문에 나는 가상이 아닐 것이라고 간주하고 들어가는 거예요. 이걸 제가 아까 설교초반에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애써도 자기가 병든 것을, 자기가 연구해서 탐구해서는 모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근원적으로 내가 병든 것을 몰라요. 근원적으로.
그것은 모든 경험은 항상 환상으로, 나를 실상으로 여기는 그런 환상으로 기억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에게 죄라는 것은, 인간의 모든 추구하는 것은 자기가 모델이 되어서 어떤 결과를 기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교회의 결과는, 교회가 있다가도 없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그 창조의 근본이신 주님의 손댐, 이 어떤 실재적인 감추어진 비밀이 등장하는 겁니다. 뱀 속의 뱀이기 때문에.
이 뱀 속의 뱀을 드러내는 방식이 뭐냐? 그것이 바로 율법이라고 로마서 3장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 이게 오늘 설교의 초점인데요. 율법부터 시작한 이스라엘, 그 율법이 신약에 와서 우리 인간 내부까지 들어오게 되면 우리의 몸, 거울에 비친 내 몸은, 언제든지 살아 있는 내 몸은 지금 말하고 있는 내 몸이 가상이라는 사실이 오직 율법에 의해서만 이게 노출되고 드러나고 확인되게 된다는 거예요. 율법에 의해서만.
그러면 뱀 속의 뱀, 악마지요, 악마의 독, 독사의 독은 무엇을 극구 밀어내느냐 하면, 이 율법, 이 말씀이, 복음이 못 들어오도록 전력을 다해서,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이걸 밀어내는데 사정 봐주지 않고 밀어냅니다. 나 복음 없어도 밥 먹고 잘 산다, 나는 성경 안 봐도 돈 잘만 번다, 나는 이 말씀 없어도 우리 가정 행복하다. 이런 식으로 계속 밀어내는 거예요.
여러분 보기에는 별난 사람 한둘이나 그런 줄 알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 전부가 그래요. 그로티우스라는 16세기의 율법학자, 철학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최조로 실정법에다 자연법을 도입한 사람이에요. 현재 실정적이라 하는 것은 법철학이지요. 현재 국회에서 법을 만들 때, 법학자들이 법을 만들 때 그 기초가 되는 것이 자연법이에요
자연법이라는 것이 성경에 없어요. 없는데 인간은 자연법을 기초로 해서 지금의 실정법을 만든 겁니다. 그러면 자연법은 뭐로 되어 있는가? 자유권, 생존권, 소유권, 저항권,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게 자연법이에요. 칸트는 그걸 양심이라고 이야기했어요. 복음을 거부하고 적대시하는 것이 어떤 성격이 유별난 사람뿐만이 아니고 온 세상 전부가 복음을 거부하고 있어요. 율법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왜? 본인이 가상인 것을 안 들키려고, 내가 살다 죽으면 그만이라는 것을 안 들키려고, 사는 것이 허무하다는 것을 애써서 감추려고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프랑스 혁명정신이 자유와 평등과 박애지요. 이게 자연법이에요. 자유와 평등과 박애. 박애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프랑스 국기를 보면 파랑색, 하얀색, 빨간색, 샌드위치처럼 세로로 그어져 있는 거예요.
그게 프랑스 국기에요. 이 정신도 미국의 독립정신과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덕으로서 이 세상을 인간답게, 인간에 맞춰서 좋은 세상 만들겠다. 이게 뭐가 나쁘냐. 이런 정신이 지금 온 세상에 누구하나 할 것이 다 덮여 있어요. 민주주의라는 것도 거기서 나온 겁니다. 삼권분립도 거기서 나온 거예요. 이건 자연법에 기초한 거예요.
자연법에서 좀 더 설명하게 되면 bc 5세기경에 공자라는 사람이 있어요. 중국의 공자, 공자 가라사대, 하잖아요. 공자 왈. 그 공자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논어라는 책에서, 남이 싫어하는 것을 네가 안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게 윤리고 도덕이고 그게 인간도리라는 거예요. 시비걸 게 없어 보이지요. 그거 당연하고 맞는 이야기 같은데 가만 들어보니까 어, 교회 다니면서 얼추 성경에서 배운 것 같은데…….
마태복음 7장 12절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오, 예수님 말씀하고 공자 말이 똑같네. 그러면 공자가 예수님 수준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공자수준 되는구나. 예수님도 상식에 속한 그냥 인간일 뿐이네. 그리스도의 비밀? 뭐 비밀 갖다 붙일 것도 없네.
공자가 이미 눈치 채서 예수님 오시기전에 다 해버렸잖아요. 예수님 오시기 5백 년 전에 공자가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남이 싫어하는 것을 안 하는 이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다. 이거나,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는 이것이 선지자와 율법의 정신이다. 이것하고 차이점이 뭐냐? 똑같잖아.” 이렇게 나온다고요. 이스라엘 멸망이라는 것은 전혀 고려 못하고. 이 세상이 환상이라는 것은 고려 못하고.
열왕기하 6장 15절에 보게 되면 거기에 엘리사가 나옵니다. 그리고 거기 짝이 되어서, 비서지요 게하시가 나옵니다. 게하시가 나오는데 여기에 아람나라가 엘리사하나 잡겠다고 수많은, 엄청나게 많은 군대를 동원했어요. “엘리사가 있으면 안 된다. 저걸 뽑아내야 돼. 그래야 우리가 승리한다.” 그래서 그 엘리사 잡겠다고 완전포위를 해버렸어요.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게하시죠)가 일찌기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벌써 이 게하시, 이 선지자의 사환의 태도 자체가 자연법적이에요. 자연법, 다시 말씀드립니다. 자유권 소유권, 생존권, 내 것 지키겠다는 저항권. 우리는 이미 초등학교 교육받을 때부터 이런 교육 받았어요. 내 것 내가 지키는데 뭐가 나쁘냐. 지금 게하시도 마찬가지에요.
내 몸을 지켜야 되는데 아람군대가 포위한 것을 보고 하는 말이 탄식을 합니다. “아하,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그러니 게하시가, 그냥 인간으로 산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율법 성경말씀에 입각해서 보면 자신의 본 모습을, 가상적인 본 모습을 가상이 아니고 실상이라고 여기는 그 거짓된 본 모습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스라엘은 무엇과 함께 있다? 율법과 함께 있다. 율법과 함께 있을 때 율법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 엘리사를 이스라엘의 율법을 모르는 이방나라가 완전 포위했다. 그럴 때 이스라엘 내부에서 그 포위한 적들이 무서워서 발발발, 떠는 그런 게하시같은 사람이 등장함으로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율법과 함께 있는 이스라엘이 어떤 경우로 실상이 드러나는가를 보게 하시는 겁니다.
그게 뭐냐 16, 17절에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이게 바로 실상이에요. 율법과 함께 있다. 창조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법과 함께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있다. 그게 실상입니다. 문제는 허상 같은 이 세상에서, 허상 같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실상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율법의 작용이 아니면 실상이 보이지 않아요. 게하시가 못 봤습니다. 엘리사는 보고. 게하시와 엘리사 사이가 구분돼요. 게하시는 못보고 엘리사는 보고.
엘리사는 실상을 보고 게하시는 허상을 실상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고요. 이게 율법의 기능입니다. 율법의 기능은 뭐냐? 마태복음 7장 12절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할 때 그 뜻이 뭐냐?
“누가 너희를 도와준다고 네가 생각하지 마라. 남이 나를 도와줘야 된다는 그런 근거도 없고 이유도 없다. 왜냐? 너는 가상이기 때문에.” 율법은 너의 껍데기를 확 벗겨버리는 거예요. 아무도 너희를 안 도와줍니다. 사람의 고민과 걱정이요? 남이 꼭 나를 도와줘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뭔가 잘못되어 있어요.
설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 분명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의사는 병든자를 위해서 있는 것이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다. 너희 눈에 내가 의사로 보이냐? 그러면 너희는 병든 거야.” 어떻게 병들었는가? 가상을 실상으로 여기고 실상을 가상으로 여기고, 함부로 부활하신 예수님 몸을 만질 수 있다고 여기는 그것이 병든 거예요. 이게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이에요. 정상이 아닙니다.
사람은 남한테 뭔가 나를 보여줄 거리가 없으면 안 만나요. 잘난 자기를 증명할게 없으면 사람은 만나지를 않습니다. 뭐 색소폰이라도 불어야 돼요. 그래야 동네사람이라도 만나준다고. 뭔 뜻인지 아시겠지요? 그저 가상, 헛된 것들만 추구하는 그들과 함께 못 사귀어서 환장했다면 그러면 우리는 방향이 어느 쪽입니까?
천국/지옥이에요, 안 그러면 그냥 노닥거리다가 “나실제 괴로움~” 눈물 찔찔 흘리면서 그 노래나 뒤늦게 듣겠습니까? 다시 합니다. 자꾸 되풀이 하는데 교회와 세상, 신자와 불신자, 실상과 가상, 그걸 나누는 그 자체가 소위 그냥 조용하게 살고 싶은 우리한테 짜증 제대로입니다. “자식아, 돈 벌고 출세해라.” 이게 얼마나 수월합니까? 그러나 “자식아, 복음 받아들이라.” 자식은 멀리 있어도 그게 굉장히 부담이 돼요.
뭐 ‘돈 벌까 복음 알까.’ ‘복음 알아라.’ 그것은 정말 무리한 요구 아니에요? 이 자연법 세상에서, 누구나 생존권, 자유권, 소유권, 저항권 누리고 있는 이 세상에서, 민주주의가 최고라고 여기는 이 세상에서 그 자체를 가상으로 여긴다니. 이게 율법이, 말씀이 확 들어오게 되면 눈이 확 뒤집어지는 거예요. 십자가가 율법의 완성이거든요. 확 뒤집어진다고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느 누구도 나를 도와줄 의무는 없습니다. 왜? 나는 가상이기 때문에. 그런데 뱀 속의 뱀이, 우리 안에 있는 뱀이 ‘너는 실상이야. 세상은 망해도 너는 보호받아야 돼. 너의 잘남과 의로움은 지켜져야 돼.’ 내 속의 뱀이 계속해서 그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의식적으로 살아가지만 사실은 90퍼센트 이상이 무의식에서 나오거든요. 그 무의식을 가지고 두자로 감정이라 해요.
인간의 성깔, 감정, 그 감정이 우리로 하여금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계속해서 우리를 몰아세웁니다. 사람이 남한테 보호받을 생각을 하고 결혼을 했기 때문에 뭔가 자기 맘이 편치 않으면 전부 다 남편 탓이에요 시가 탓이고, 친정 탓이고, 자식 탓이고. 왜 탓을 합니까? 나는 그들에게 해줄 만큼 해줬는데 그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안 해주더라는 거예요. 왜 해줬어요? 그러면 왜 해줬어요? 왜 해줬는데!
“나는 25세에 폐경이 되어가지고 서른 두 살 되어서 진짜 맘에 드는 남자 만나가지고 이걸 이야기 할까요, 말까요?” 왜 그걸 주저합니까? 나를 지켜주고 보호해줄 괜찮은 남자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면 문제를 더 던집니다. 왜 당신을 보호하려고 합니까? 당신 안에 뭐가 있기에 당신은 보호 받고 싶어 해요? 그 이유가 뭐냐고요.
나는 정상이니까. 정상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마태복음 9장에서 병든 자에요. 당신은 병들었어요. 병든 것도 모르는 병든 자에요. 이 아프면 치과에 가야 되는데 우리의 근원적인 의사를 찾지를 않습니다. 자기는 정상이라고 우기면서. 다들 그렇게 우기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이 비밀 앞에서, 주님의 비밀 앞에서 나를 아는 근거를 허락받아 본 적이 없어요.
내가 나에 대해서 관심을 끊고 주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돼요. 주님에 대해서. 주님께서 나의 껍데기를 벗겨가지고 실상인지 알았던 내가 다 그냥 가상이고 내가 그동안 실상이었다고 한 것은 내가 억지춘향으로 연출, 쉬지 않고 연출하고 조작한 그 결과로서 ‘내가 실제로 살아 있는 것 맞지.’ 이런 식으로 스스로 자기가 자기에게 강요한 사고방식 때문에 실상인줄 알았다. 그러나 주님의 그 십자가 앞에서, 주님의 지옥과 천국을 움직이는 이 실상, 비밀 앞에서 나를 보여줄 어떠한 사상이나 그런 것은 나에게는 없었다는 겁니다.
나를 지켜줄 어떤 것도 나에게는 없습니다. 이게 바로 율법이에요. 다시 말해서……, 이제부터 좀 어려운데요. 율법이 들어오게 되면 이 가상이 발작을 해가지고 가상의 본 모습이 드러나는데 어떻게 드러나느냐? 있지도 않은 나, 그리고 있지도 않은 너를 상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와 너. 그래서 아까도 말했지만 남에게 가상적인 너에게 보여줄 것이 없으면 너를 안 만나요. 그러나 보여줄 것이 있으면 사람들 앞에 나를 등장시킵니다. 나도 가짜면서도 동시에 너도 가짜에요.
그러면 내가 너를 만나는 이유는 그쪽이 나를 지켜주고 보호하고 내 맛에 으샤으샤, 해줌으로서 나의 의가 고스란히 보존이 돼요. 나의 의, 나의 잘남이. 그러면 나의 잘남이 세상에서는 통해요. 왜? 잘난 맛에 사람이 살아가거든요. 그런데 그게 율법 앞에 통합니까? 십자가 앞에 통합니까? 부활하신 예수님 몸을 만질 수 있는 그런 몸으로서의 자격이 있습니까? 없어요.
이 모든 일은 처음부터 내가 병들었다는 것부터 시작을 해야 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일곱 교회가 있는데 그 일곱 교회에 뭐라고 했느냐?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16절에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주님께서 이렇게 일곱별 이야기를 하고 그 다음에 2장 1절에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자, 일곱별은 뭐고 일곱 촛대는 뭐냐? 별과 일곱 촛대의 공통점이 있어요. 붙박이에요. 하늘의 별, 붙박이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빨리 달려도 별은 그 자리에 있어요. 아무리 산을 넘어도 달은 그 자리에 있듯이 별이라는 것은 붙박이에요. 창조의 근원, 인간보다 먼저 창조된 그 근원, 별, 그 별을 고정적인 지점, 확고한 지점, 최종적인 지점에 대한 제시어가 별입니다. 촛대도 마찬가지고요.
이스라엘이 성전으로 될 때, 사람의 힘이 아니고 하나님 신의 능으로 될 때 그 촛대는 어디에 있는 촛대냐? 성전 안에 있는 촛대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미 완성단계의 완전을 주님께서 이미 확보하고 있다는 뜻이 뭐냐 하면, 일곱별이고 일곱 촛대에요. 촛대가 일곱 개의 가지로 되어 있으니까요. 그게 일곱 교회입니다.
확고한 겁니다. 그 확고함이 지상의 일곱 교회, 지상이니까 가상이지요, 가상의 일곱 교회를 하늘에 있는, 천상에 있는 일곱별과 대비시키고 사라지게 하고, 또 대비시키고 사라지게 하는 거예요. 일곱 교회가 교회인줄 알았더니만 사라지면서 그동안 감춰놓았던 일곱별과 일곱 촛대가 드러나게 하는 겁니다.
교회는 변함이 없는데 이 변함이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라져야 될 교회, 나타났다가 없어져야 될 교회가 한 두 교회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교회도 포함되지요. 그러면 교회는 뭐냐? 성도가 뭐냐? 하나님께서 신자와 불신자, 교회와 세계, 실상과 가상을 구분하는데 그러면 그게 구분되어야 나중에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이 구분되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참된 교회됨이 뭐냐? 바로 융합체, 복합체지요. 내가 육신도 있고 그 안에 성령이 확 들어와 버리니까 이 성령이 들어온 기쁨 때문에 이 육신을 버릴 육신으로, 사라질 육신으로 인정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누구도 굳이 나를 보호할 생각하지 마세요, 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면, 나를 보호할 생각하지 마세요, 라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면 어떻게 구체적으로 평소에 살아가는가? 남들이 원하는 행동을 절대로 안 해주는 겁니다. 남들이 원하는 행동을. 시가집에 시어머니 혼자 있는데 밥해주라고 하면 절대로 안 해주는 거예요.
왜? 그래야 내가 나 자신을 시시하게 본다는 것이 확인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교회 목사가 헌금하라고, 하라고, 하라고 그렇게 지적해도 일부러 헌금 안하는 거예요. 왜? 나는 헌금도 할 줄 모르는 시시한 자이기 때문에, 없어질 몸이기 때문에. 성령이 확 들어와 버렸으니까, 영이 확 들어왔으니까 굳이 내가 나를 지키거나 남들이 타인이 나를 지킬 이유가 없어요. 게다가 헌금도 안 나오는데 잘 됐다.
자유권, 생존권, 소유권, 저항권, 그런 되도 않는 소리, 민주주의, 공산주의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사라질 사람에게. 교인이 왜 정치에 관심을 둡니까? 그거 아무것도 아닌데, 그거 실정법인데.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 교회 올라올 때 철문 있잖아요. 제가 주일 아침에 운동할 때는 자물쇠를 잠가버려요. 자물쇠 잠그고 문을 닫아버린다고요. 자물쇠와 문을 걸어서 잠그는 것이 아니고 자물쇠만 따로 잠가놓고 문은 따로 닫아버려요.
그러면 불신자, 안 믿는 사람들이 저 문이 잠긴 것으로 알고 있을 거예요. 그러나 나는 알지요. 문이 열려 있다는 사실을. 자물쇠 잠겨 있어요. 불신자 입장에서는, 교회가 아닌 사람은 이 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문을 못 연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물쇠가 잠겨 있으니까 못 열잖아요.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이 잠가놨어요. 왜? 내 힘으로 구원받지 못하기 때문에. 내 힘으로 율법을 통과하지 못해요. 내 힘으로 독사의 독을 제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열면 천국 문이 열리는 거예요. 왜? 열렸으니까. 그걸 아는 사람은, 내 힘으로 내 능으로 안 되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언제든지 천국 문을 열면 활짝 열립니다. 나중에 실험해보세요. 지금도 자물쇠만 저 혼자 잠겨 있어요. 열어보세요. 문 잘 열려요.
스르륵, “자전거 여기 놔두지 마세요. 조치하겠습니다.” 이거 하나 붙어 있고 잘 열린다고요. 천국 문은요, 이렇게 하나님의 영이 온 사람들은 뭘, 나쁜 짓했습니다, 내가 실수를 했습니다, 그런 악독한 짓을 나는 강도입니다, 세리입니다, 다 필요 없어요. 그냥 열면 다 열리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천국 가는 방법은 일 대지……, 이 대지……, 무슨 돼지가 그렇게 많은지.
이거는 뭐냐? 이것은 전부 다 가짜입니다. 가짜교회에요. 내 힘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세상에 나가서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만방에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 잘났다, 하거든요. 이렇게 나 시시하다고 이야기하면서 아무도 나를 보호할 필요도 없고, 나도 나를 보호할 생각도 없고요, 나 하고 싶은 대로, 사실은 속에서 주님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예요.
집에 밥그릇 뚜껑이 혼자서 막 기어가거든 그 안에 쥐 한 마리 들었다고 생각하면 되지요. 우리 안에 성령이 들어 있으면 남들 보기에는 자기 맘대로 사는 것 같지만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 지시하는 대로……, 잘했느니 못했느니 따지지 마세요. 그냥 이미 율법에 의해서 죽은 자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 주의 비밀을 운반하는 교회가 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히 허상이 실상을 장악할 수 없음을 저희들 깨닫게 해주옵소서. 주님을 장악할 수 없고, 성령을 소유할 수 없고, 성령께서 일방적으로 부릴 수밖에 없는 그러한 신세가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최고의 행운으로, 감사에 감사만 할 거리로 생각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