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완전
2021년 2월 14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1:28-29
(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1: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28. Whom we preach, warning every man, and teaching every man in all wisdom; that we may present every man perfect in Christ Jesus:
29. Whereunto I also labour, striving according to his working, which worketh in me mightily.(KJV)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어떤 분이 들어와 계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하늘에서 멍뚱하게 인간들의 예물만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아예 자기 백성 안에서 전을 차리시고 자신의 활동을 멈추지 않고 계십니다. 그 활동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기대하고 받아들일만한 ‘완전’을 이루어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완전’은 인간들이 추구하는 ‘완전’과 경쟁하고 방해받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완전이란 ‘자기 절대성’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평소의 행동들은 이 ‘자기 절대성’과 관련되는 태도들을 나타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들은 자신들이 끌리는 것과 호응하고 싶은 것들에 참여하는데 그 노림은 곧 자신의 완전함입니다.
자신의 선함, 자신의 완전함, 자신의 절대성 같은 것은 편향된 이기심입니다. 자기 도취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최종적으로 지킬 알갱이로 간주해서 ‘세상’이라는 ‘알갱이 pool장’에 빠져 있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되면 나라는 알갱이는 너라는 알갱이와 끊임없이 경쟁관계에 돌입하게 됩니다.
이러다보니 매사가 자기 우수함을 증명하는 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즉 “나는 이러하기는 아직 죽지 말고 사라지지 말아야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외부적으로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에게는 ‘죽음’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죽음’이란 율법의 개입이 없이는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만이 완전하고 선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제시된 것이기에 그냥 율법제공으로 그만인 것이 아니라 끝까지 그 책임을 묻게 됩니다. 즉 ‘율법의 정신에 부합되지 않는 것들은 다 저주받아라’에 충실하시겠다는 겁니다. “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롬 7:11-14)
쉽게 말해서, 우리가 죽는 이유는 율법의 완전함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저주받아 지옥가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에게는 정당한 조치임을 분명히 증명하기 위해 우리 인간이 필요했던 겁니다. 이런 식으로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율법으로 만들어진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 이스라엘은 그 율법으로 폭파, 소멸되고 그 현장은 남은 것은 율법 뿐이었습니다. 율법의 저주성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완전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율법을 모르기에 자체적으로 완전을 추구합니다. 이러니 그들은 자신이 죽는 이유도 모릅니다. 자신이 죽는 이유도 모른다면 이는 곧 영생도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저주 안에서 완전한 생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4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 곧 율법을 담는 그릇으로서 육신이 되신 예수님의 결말은 이 땅에서 저주였습니다.(갈 3:13)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 율법이 저주 속으로 끌어당기실 때에는 평소에 인간들이 어떤 태도로 나름대로의 구원과 완전을 생각하고 있었는가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평소대로 우물에 물길으러 왔습니다. 그것 뿐입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이 곧 생명의 물이 나오는 우물이 되리라는 것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공간성을 점유하는 식으로 삶을 도모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할 때도 특정 산에 가서 예배드리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녀의 과거를 말씀해주었습니다. 즉 그녀의 과거는 그녀의 과거가 아니라 그녀가 주님으로부터 구원이 되기 위한 절차로서 인생을 살아왔던 겁니다.
즉 ‘나의 것’에서 ‘주님의 것’이 되는 겁니다. 두뇌에 있는 두뇌세포에는 축삭돌기라는 길게 한 줄로 튀어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곳은 감각으로 들어온 것은 전기에너지 형식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돌기입니다. 이 돌기에 슈반세포라는 세포가 수초로 감듯이 이 돌기를 여러 번 감아버리는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포는, 자신도 세포이면서도 두뇌세포를 위해 자진해서 알갱이 아니라 표면이 되기로 마음먹었었습니다. 집에서 칼국수하기 위해 밀가루반죽으로 막으로 넓게 펴듯이 이 세포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감을 세포를 위해서 스스로 막이 되기로 한 겁니다. 이 세포가 축삭돌기를 심지어 백번 씩으로 감으로써 전기에너지로 전달된 정보가 누수가 되지 않은채 빠른 속도로 다음 신경세포에 전달됩니다.
이처럼 성도란 율법에 의해서 더 이상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율법을 주신 분을 위해 살게 됩니다. 세포 내에서 단백질이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우연에 의해서 그 기능에 참여되는 것처럼, 성도가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도 ‘조건없는 사랑’에 의해서입니다.
이 ‘이유 없는 사랑’은 구약 아가에 잘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 ‘완전한 자’라고 서로를 호칭하고 있습니다.(아 5:2/6:9) 이 남녀는 상대를 자기 위해서 노력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가 되기 위해서 만납니다. 이 ‘하나됨’이 하나님의 완전의 구현체입니다. “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이 ‘하나’를 위해 성도 안으로 율법에 준한 하나님의 희생제물이 담기게 됩니다. 레위기 14:2-7에 보면, 문둥병자가 우연히 병에 걸렸다고 우연히 다시 멀쩡하게 되면 필히 율법에서 명한 제물을 대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나의 구원’이 완전이 아니라 삽입된 율법 완성, 곧 십자가의 희생이 완전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은 바로 이 완전함을 방해하기에 늘 우리 성도는 우리 등짝에 ‘나를 스스로 배신하는 복음의 칼’이 꽂혀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명령하지 말게 하옵소서. 십자가가 명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5강-골 1장 28-29절(하나님의 완전)210214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1장 28-29절입니다.
골로새서 1:28-29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목표가 하나님의 ‘완전한 자’를 목표로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완전한 자를 목표로 한다면 우리한테 완전한 말씀만 주시면, 그저 잔소리만 하시면 우리가 그것에 호응해서 실천에 옮겨서 완전한 자가 되면 될 텐데, 여기서 우리에게 완전한 자로 세운다 할 때에 단독으로 우리를 따로 놔두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겁니다.
그걸 29절에서 “내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그리스도라는 분이 내 안에까지 들어오셔서 일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완전한 자가 될 수 없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라 하는 이분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하고 다릅니다. 인간들의 하나님은 그냥 존재하는 하나님이지만 그리스도라는 분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에요.
그냥 멀뚱멀뚱하게 하늘의 별처럼 박혀 있는 분이 아니고, 그냥 계셔서 우리 음식이나 바치고 돈이나 바쳐서 경배하면 넙죽 받으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보다 더 바쁘게 쉬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졸지도 않으면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분, 그 하나님이 그리스도 하나님이에요.
그 그리스도 하나님의 원칙이 있습니다. 완전한자의 원칙이 뭐냐 하면, 바로 죽으시고 부활한 능력, 사람을 만나면 죽여 버리고, 그리고 다시 부활하는 능력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들 때 완전한 자로 만드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예수님 본인이 아버지로부터 이 땅에서 살면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기 때문에 그 방식을 그대로 우리한테 반복해서 적용시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는 죽은 이유가 있어요. 그건 뭐냐? 율법의 저주를 받아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죽어가면서도 죽는 이유를 몰라요. 살다보면 뭐 세포가 늙어서 죽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누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어디에 근거해서 나를 죽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죽어가면서도 죽음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요. 정확하게 죽음이 뭐냐를 알아놔야 되고, 죽는다는 것은 사건이거든요. 그 죽은 사건이 일어나는 이유 그 배경에는 이렇고 이런 조건 때문에 죽는다는 것을 정확히 알아야 비로소 삶이 보장이 됩니다. 영생이 주어지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는 정확하게 죽었어요. 율법의 저주를 받아 죽었어요. 내가 죽는데 율법의 저주 받아 죽는다는 그 율법의 기능을 제대로 알 때 율법의 저주를 받아서 죽는다는 그러한 인식하에 그 사람은 율법의 완성이 들어오기 때문에, 율법의 완성자가 우리한테 알려줬기 때문에 알려준 분의 능력으로 그 사람은 영생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제대로 알 때 그 사람이 생명을 제대로 얻는다. 또는 생명을 안다.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율법의 세상이 되지요. 사람이 죽는 이유는 율법의 저주로 인하여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율법이 왜 멀쩡한 우리를 죽이느냐? 로마서 7장 12절에 보면, 율법이 선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너무나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율법이 너무나 선하기 때문에 악한 자, 선하지 않은 자, 율법에 부합되지 못한 자는 다 저주해서 죽여 버리는 기능을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해내시는 겁니다. 율법에서 이야기하는 그 선함의 위치, 선함의 레벨과 자꾸 견주고 비교하시는 거예요.
견주고 비교해서 율법, 법을 법대로 해서 온전치 못할 때는 죄인이라고 규정해서 처벌을 해버리는 겁니다. 쉬운 예를 들면 이래요. 나라에서 “교회는 20명 이상 모이지 말고 모일 때는 마스크 써라.”라는 율법 법이 주어졌잖아요. 법이 주어졌다면 그 법을 아는 사람은 이제는 ‘코파라치’라 해서 교회 마다 돌아다니면서 고발할 교회를 전부 다 찾아내는 거예요.
그런 사람 지금도 있어요. 그 사람 취미가 뭐냐? 교회 고발하는 취미를 새롭게 갖게 되었습니다. 예배당 사진 찍고 하면서. 왜 그 사람은 고발을 하고 싶으냐 하면, 법대로 안하니까 교회를 고발하고 싶은 거예요. 법은 선한데 교회는 악하니까 악한 것을 묵과해 율법의 취지가 살아나지를 못하잖아요. 법은 처벌하라고 주는 것인데 처벌을 안 해버리면 법이 무의미하게 되니까 법을 유의미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처벌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율법을 준 것은, 이 율법의 취지에 합하냐 부당하냐 하는 것을 계속 측정해 가는 겁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5장 29, 30절에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오른 눈을 빼버리라. 그리고 또 오른 손을 찍어버리라. 이게 주님께서 산에서 이야기한 법이에요. 완전한 법입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완전이잖아요. 완전에 대해서 법은 완전해요. 법대로 완전히 실시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이 땅에서 소원이에요. 하나님께서 법을 괜히 만든 게 아니기 때문에 법대로 해야 돼요.
법대로 하게 되면 이 법은 오른 눈이 범죄 했는데 그냥 박혀 있는 사람들이나 오른 손이 범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자르지 않은 사람은 가차 없이 지옥에 보낸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대로 하시는 조치입니다. 이걸 통해서 우리는 “우짜꼬~!” 하고 벌벌 떨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찬미해야 돼요.
왜 찬미해야 되느냐 하면, 과연 하나님은 법대로, 그냥 법대로 밀어붙이는 분인 것을 이제는 알았습니다, 하고 찬미해야 돼요. 본인이 지옥 가더라도 본인을 지옥 보내시는 하나님께 찬미해야 된다 그 말이죠. 하나님은 허풍선이 말만 하시는 분이 아니고 그걸 그대로 현실화시키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그 점에 대해서 완전하고 완벽한 선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지옥가든 천당 가든 그것은 나중 문제고.
완전함이 드러난다는 것, 그리고 완전하다는 그 사실을 내가 살아생전에 그 완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그것만 해도 죽어도 여한이 없어야 돼요. 인생을 살면서 완전한 진리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밍기적거리고, 죽도 밥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세월 보내다가 “이거야! 그래, 이거였었어! 예, 이거지. 그래, 이거야! 심봤다~!” 하는 것처럼, 유레카, 나는 발견했다, 목욕탕에서 뛰쳐나온 그 철학자처럼.
‘그래, 이거였었어. 이 세상 사람 죽는 이유는 있었어. 율법에 의해서 부당하니까 그것은 저주받아 죽는 거야. 하나님은 인간을 율법을 가지고 저주하시는 하나님. 왜 그런 하나님을 진즉에 몰랐을까?’ 그것은 교회가 사기를 쳐서 그렇지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사람들 좋아하는 종교 만들어가지고 오냐 오냐, 해주고 그러면 교회에 사람들 모이고, 사람들은 목사가 그렇게 하니 그런 줄 알았지요.
그러나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사람을 우대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되 그냥 죽이지 않고 법을 들이대서 저주해서 죽여 버리는 그 하나님만이 완전한 하나님이고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하나님 찾지 마세요. 다른 하나님은 없습니다.
완전이라는 이 말, 완전한 자로 세운다는 이 말씀을 할 때 사도바울이 무엇을 의식하느냐 하면, 안에, 속에 그리스도께서 활동하는 그 활동성이 없는 사람, 활동성이 없는 사람이 생각하는 완전과 그리고 사도바울처럼 활동성이 있는, 사도바울이 “나도……” 라고 하니까 “나도 이를 위하여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내 안에 어떤 분이 들어와서, 주님이 들어와서 활동하시면서 드러나는 그 완전함과, 주님이 없는 사람의 완전함이 경쟁하는 시대라, 이 시대가. 율법을 개무시하는 이 시대와 율법을 인정하는 사람들 사이에 경쟁이 이루어지고, 다툼이 이루어지고, 비교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만약에 율법이 없이 우리 인간들이 끄집어낸 지어낸 그 완전함이라는 것은 뭐냐? 그것은 자기절대성이에요. 자기의 완전함이에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자기의 완전함을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더 점점 더 느끼게 됩니다.
나름대로 정직하고, 순수하고, 진리를 믿고, 순수를 지키고, 순결하고, 남에게 희생하고, 자비를 베푸는 감정, 이 모든 이것이, 그런 생각이, 내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로 인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운 거예요. 내가 그런 생각을 갖는다는 이유 때문에 더러운 거예요. 저주받아야 될 인간, 저주받아야 될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모든 아이디어는 나에게서, 저주받아야 될 당사자 나에게서 나왔다는 그 이유만으로 주님 앞에서는 더러운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더러움과, 세속과, 음란과, 거짓과, 탐욕과, 저질과, 안일함, 이런 것들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막 방출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이스라엘에게만 하나님의 율법이 쑥 들어왔기 때문에 그래요. 율법이 들어오니까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애썼던 모든 것은 음란이 되고, 거짓이 되고, 가짜가 되고, 엉터리가 되고, 욕망이 되고, 욕심이 되고, 탐욕이 되고, 세속이 되는 거예요.
그것은 다른 민족에서는 상상을 못하는 거예요. 특수함, singularity, 이게 이스라엘이 특이성이에요. 독특함. 둘 도 없이 오직 유일한 민족, 하나님이 만들어서 하나님이 같이 기거하고 하나님이 동행했던 그 유일한 민족 이스라엘만이 자체파괴, 자체 폭발해버립니다. 파괴되어 버려요. 파괴될 때 율법은 살아남고 이스라엘은 날라 가버렸어요. 뭔가 뻥, 하고 깨졌는데 깨진 현장에 가보니까 율법은 생생하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날라 가버렸어요.
지금의 터키에 일곱 교회가 있었거든요. 요한계시록의 그 일곱 교회가 있었는데 그 일곱 교회에 복음이 들어오니까 나중에 복음만 남고 일곱 교회는 뻥, 하고 터져버렸어요. 지금 일곱 교회가 없어요. 없습니다. 교회는 폭발하라고 있는 거예요. 교회가 복음이나 율법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제도나 형식으로 종교가 하나님의 살아 있음을,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활동을 다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못돼요.
유일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거룩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라면 그 그릇은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는 것도 하나님의 일로 찬미 드립니다, 라는 그런 고백을 하는 사람에게만 그래요. 주님 앞에 저주받은 사람에게만 율법이 율법답게 도드라지게 드러나게 되어 있지요. 그렇지 않으면 될 수가 없습니다.
제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있어요. 요한복음 1장 14절에 나오지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 율법, 정신, 아버지의 뜻을 예수님은 자기 육신에 담았어요. 담았는데 결과는 뭐냐? 저주였습니다. 말씀이 육신 속에 결합이 되었는데 그 육신은 이 땅에서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저주 받았어요
제자들은 졸고 자고 있을 때 이 저주를 감당할 수 있도록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땀이 핏방울처럼 되도록 기도했습니다. 저주가 새지 않도록, 온전히 저주가 내 몸에 그대로 다 담길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한 덕분에 제자들이 구원받은 겁니다. 다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율법을 율법대로, 완전체로 드러낼 수 없는 자를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율법의 완전체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율법에 준해서 제자들은 구원받은 겁니다.
이것은 바로 수요일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창세기 3장 24절에서 하나님께서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서 에덴동산의 동쪽의 길을 막아놨는데 이것은 인간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에요. 생명나무를 보호하기 위함이에요. 인간을 사랑하기 위함이 아니고 생명나무를 사랑하기 위함이에요. 하나님의 원리와 원칙을 보호하려는 것이지 선악과 따먹고 악마편이 된 인간을 보호할 의지는 하나님에게 추호도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인간 편에서 서는 것을 우상이라 하거든요. 그거 가짜 신이에요. 명칭이 뭐 여호와가 되었든 삼위일체가 되었든 그것은 상관없어요. 하여튼 그 내용이 인간을 보호 한다, 인간을 지켜준다. 그것은 전부 다 가짜입니다. 인간을 지켜주는 하나님은, 애초에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지켜줄 것 같으면 죽이지도 말지 왜 죽입니까? 죽인다는 자체가, 영생주지 않겠다는 자체가 너는 아니야, 이건 내가 만든 그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예수님께서 자기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그 다음에 자기 백성을 건집니다. 자기 백성을 건지는 차원은 뭐냐?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한다는 율법을 실행하기 위해서 예수님 자기가 이루었던 성과 속에 쑥 들여보내기 위해서 자기백성을 찾아갑니다. 자기백성을 찾아가는데 그 자기백성이라는 인간됨됨이가 뭐 지옥 가는 사람 천국 가는 사람이 따로 없잖아요. 전부 다 그냥 태어난 대로 그저 살 뿐이지요.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나오는데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접근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어디서 만나느냐? 우물에서 만나요. 우물에서 만날 때 사마리아 여인의 입장이 되어봅시다. 항상 구원의 시작은 예수님이 접근할 때 예수님께서 접근했던 그 인간이 그 어프로치로 말미암아 어떻게 지옥 가는 내가 천국가게 되었는가, 그 과정은 예수님이 던지시는 계속되는 질문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던진 질문은 뭐냐? “물 좀 다오” 그 때부터 대화가 시작됩니다. 사마리아여인이 하는 말이 쉽게 하면, 이 야곱의 우물에 물 길러 온다고 애를 썼는데 우리 민족을 이단시 하는 유대사람 당신이 내가 누군지 알고 이렇게 물 달라고 하느냐, 라고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14절에 하는 말이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지금 이 여자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들어요. 일종의 환상 같은 느낌이 들 거예요. 왜냐하면 전혀 비현실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현실은 뭐냐 하면, 지금 우물이 여기 있다는 겁니다. 그 우물에 정기적으로 내가 물 길러 와서 그 물을 길어가서 우리 가족이 먹어야 내가 산다는 것, 나라는 것이 유지가 된다는 사실, 그것이 우리가 알 고 있는 현실성이에요. 이것은 저나 여러분이나 그 당시 사마리아여인이나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 딱 듣고 기분은 좀 좋았어요. 그 여인이. 왜냐하면 물 길러 오지 않아도 되게 되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우물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대꾸를 하지요. 그런 우물이 어디 있습니까.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과 사마리아여인이 우선적으로 대화가 성립이 안 됩니다. 여자는 시간과 공간의 존재고, 예수님은 지금 그 뿌리가 하늘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계시는 분과 땅에 있는 사마리아여인과 대화가 안 되지요.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이 하신 성경말씀과 우리가 평소에 딛고 있는 이 시간과 공간속에서 우리가 적응하면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그 우리는 대화가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셔요. 주님께서는 되게 하신다 그 말이지요. 우물은 여기 있는 겁니다. 우물은 공간적으로 있고 나는 물 길러 오고.
‘이게 뭐가, 물 길러 오는 이 상태가 왜 구원이 되지 못하는 상태야?’ 이게 왜 구원이 안 되는 상태의 증거로 보느냐? 이게 우리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는 겁니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물 마셔야 살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물 마셔야 사는 이것이 왜 구원이 안 되는 상태인가, 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이 말이 안 되는 것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6절에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대뜸 엉뚱한 남편 이야기를 끄집어 내오고 여자가 17절에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이야기하는데 주님께서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줍니다. 마치 자기 과거처럼.
“그래. 네가 남편 없다는 것이 말은 맞는데 잠시 없었지.” 잠간 없었던 거예요. 왜냐하면 다섯 명이나 있었으니까. 지금까지 정식으로 결혼한 것만 다섯 명이에요. 엘리자베스 테일러 같아요. “다섯 명이나 남편이 있었는데 그 다섯 번째 남자와 이혼하고 지금 사귀는 남자는 여섯 번째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딱 하니까 여자가 자기의 감추고 있던 것을 들켰으니까 놀라버렸지요
그러니까 후딱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이렇게 살아도 그동안 예배는 드렸습니다.” 어떻게 드렸느냐? “장소적으로 예배 드렸습니다.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심 산에서 예배 드려야 된다고 이야기했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데 어디서 예배드리는 것이 맞습니까?”
우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예배이야기로 쫙 빠지는 거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종교이야기, 자기 종교, 나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께 뭔가 해야 된다는 그 정도는 남편 다섯 명이 있지만 압니다, 하는 식으로 이야기한 겁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야기합니다. “우물에 네가 물 길러 오는 그것이 구원이 아니라 네 자체가 움직이는 우물 되게 하겠다.” 네 속에서 계속해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물이 나오게 하는 그 상태가 구원의 상태라는 거예요.
“너는 지금 이 땅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면서 나는 우물에 물 길러 오는 우물이 있는 공간이 나라는 공간과 거리가 있으니까 물 길러 오고, 나라는 공간에 남편 다섯 명이 있었지만 지금 헤어지고 여섯 번째 남자 사귀는 그 공간, 내 공간, 그냥 내 공간에서 내가 목숨 부지하면 그걸 가지고 살아 있다, 구원받았다고 여기는데, 예배드리니까 구원받을 수 있겠지, 라고 하는데 그것은 구원이 아니야. 그것은 종교야.” 그것은 네가 너의 절대성, 너의 완전성을 추구하는 거지요.
주님이 오시는 그것은 그 여자 안에다가 뭘 꽂아 넣느냐 하면, 예수님 자신이 친히 우물이 되어서 여자 안에다가 예수님 자신을 꽂아 넣는 거예요.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여자 몸에서 예수님의 영이, 한없이 목마르지 않은 성령이 계속 나오게 하는 그러한 시스템, 그게 구원이에요. 시공간 아닙니다.
시공간으로 착각했던 유명한 사람이 나와요. 베드로지요 베드로. 마태복음 17장에 변화산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베드로가 변화산에 올라가니까, 그 산 이름이 다볼산인가 그렇다는데 그 산에 올라가 봤습니다만 저는 변화되지도 않았고 그냥 멀쩡하게 올라갔다가 내려왔습니다만, 변화산에 올라가니 모세와 엘리야하고 예수님하고 해같이 빛났습니다.
그럴 때 베드로 입에서 뭐가 나왔느냐? 이런 이야기가 나왔어요.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기 있는 것, 공간성이에요. 너무 좋으니까, 해같이 빛나니까 여기에 합류하고, 베드로 자신의 존재도 여기 합류하고, 엘리야도 합류하고, 모세도 합류하고, 예수님도 합류해서 이 변화산 이 자체가 천국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왜? 나는 이 공간을 점유하고 있으니까, 이 공간적으로 이해가 되는 나니까, 나는 이 공간에 살고 있던 나라는 것을 이 공간이 증명해주니까 이 곳에서 주님과 같이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라고 언급을 했어요.
그런데 그 환상의 공간은 다 날라 가버렸습니다. 날라 가고 5절에 보니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이제는 모세도 날라 가버리고 엘리야도 없어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구름위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나오는데 그 음성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주의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그 공간, 말씀이 들어오는 그 공간이 예수님이 활동하는 공간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구원상태에요. 내가 평소에 어릴 때부터 죽 살아왔던 이 대구라는 곳, 어떤 서울이라는 공간, 그 공간에서 내가 얼마나 행복하고 잘 되냐. 이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대구 지묘동에 있다. 지묘동의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니에요, 그것은.
그건 공간성이 점유되고 있기 때문에 구원이 아닙니다. 공간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친히 만들어낸 공간은 우리와 합류가 될 수 있어요. 왜냐하면 말씀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말씀이 육신 속에 들어올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가 된 것이 가능한 것처럼 보잘 것 없는 저주받은 우리 속이라도 주의 성령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가 주와 함께 하나가 될 수가 있어요.
요한복음 14장 20절에도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 날이 무슨 날이냐 하면, 요한복음 17장 21, 22절에 보니까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된 것 같이 이 제자들, 이 백성들도,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리고 23절에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이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이라는 겁니다. 꽂아 넣는 거예요. 하나님의 자신의 성과, 십자가의 저주성을 우리한테 꽂아 넣는 겁니다.
이렇게 꽂아 넣게 되면 우리의 개체는, 자아는 없어지지 않느냐, 라고 ‘내가 없어지다니. 나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예수가 뭔데? 왜 예수를 위해서 내가 없어져야 돼?’ 굉장히 그걸 기분 나쁘게 생각하겠지요. 누구나 그렇게 기분 나쁘게 생각합니다. 허락도 없이 내 속에 들어와서 예수님 자신의 성과를 드러내 버리면 구원받는 것은 기분 좋지만 내가 사라지는 그것은 기분이 좀 더럽게 느껴지잖아요.
제가 생물책을 보다가 그 기분 나쁜 것이 싹 가셨어요. 어떤 세포가 있는데요. 그 세포의 이름이 ‘슈반세포’라는 거예요. 그 세포가 어디 있느냐 하면, 인간의 신경세포, 뉴런이라는 신경세포에서 돌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 돌기중 하나가 축삭돌기라는 뾰족한 것이 나옵니다. 수 만개의 돌기가 나오는데, 그중에 축삭돌기가 나오는데 그 축삭돌기가 나올 때 축삭돌기에서 뭐가 흐르는가?
자극이 전기적 신호로 바뀌어서 마디를 거쳐서 디지털적으로 도약하듯이 전기신호를 전달, 연속적으로 전달하는 겁니다. 우리가 밉다, 사랑한다, 좋아한다, 기뻐한다, 이런 것을 따져보면 전부 다 전기에너지에요. 전기에너지를 두뇌가 해석하는 거예요.
축삭돌기는 뉴런세포 속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걸 뭐로 감싸고 있느냐 하면, 슈반세포, 그걸 메를린 수초라 해서 수초처럼 있어 가지고 그 전기에너지로 자극을 전달하는 그 정보가 흐르는 축삭돌기를 밀착해서 감습니다. 어떤 경우는 백번을 감는데요.
보통 세포라 하는 것은 덩어리인데 세포가 스스로 자기를 비워서 납작한 막이 되어버려요 세포 스스로가. 저는 그 생물에서 겸손을 배운 거예요. 칼국수 할 때 밀가루 반죽이 있잖아요. 밀가루 반죽이 있을 때 거기에 정신이 있다면 나는 도톰한 밀가루 반죽이라고 자랑하는데 그걸 사정없이 홍두깨로 바짝 밀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납작하게 되지요. <톰과 제리>라는 만화에서 맨 날 당하기만 하는 그 고양이가 15톤 트럭이 지나가면서 깔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아스팔트에 납작하게 붙어버리지요. 나중에 희한하게 다시 본 형태로 돌아와요. 하여튼 안 죽어요. <톰과 제리> 여러분 기억나요? 납작하게 된다고요.
나는 나다, 라고 하는 게 아니고 스스로 자기가 완전히 칼국수 할 때 밀어내는 그 밀가루반죽처럼 납작하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멤브레인(membrane)이라 해서 막인데 그냥 막처럼 퍼져버려요. 막이 되어서 축삭돌기를 바짝 감아요. 스키니 바지처럼 뺑뺑 감습니다.
많이 감을수록 이게 절연체가 되어서 전기에너지가 소실되지 않고 정보가 빨리 흘러요. 바짝 감아서 딱 들러붙어 버리면. 이것은 뭐냐? 완전히 자기희생이에요. 하나의 막이 되어서 바짝 감음으로서 온전하게 전기신호로 전달되는 감각의 정보를 보호하려는 이 정신, 그 정신을 보면서 지난 낮 설교에 했듯이 이번시간에도 아가서를 보지 않을 수가 없어요.
아가서에 보면 완전한 자가 나옵니다. 아가 5장 2절에 보면 “내가 잘찌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아가서가 어렵다, 어렵다, 하는데 이 아가를 어떻게 풀 것인가? 신약에서 풀리게 되는 겁니다. “완전한 자여 문 열어다고.” 그 완전한자여, 하기 전에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다고.”
아가의 특징을 보면 두 사람이 서로가 서로를 꽉 껴안고 있어요. 다리는 다리대로 팔은 팔대로, 상당히 에로틱하지요. 그러면서 하나가 되기 위해서……, 아까 제가 하나 된다 했잖아요. 주님이 자기 백성과 하나 됨, 딱 들러붙어 있을 때 하나의 완전이에요. 우리의 완전이 아니고, 단독적으로 나 혼자 사는 것은 자아의 절대성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이 아닙니다.
율법을 줌으로서 알갱이, 풀에 빠져있는 하나의 알갱이를 뭐로 만드느냐? 표면으로 만들어요. 막으로 만들어요. 막으로 만들어서 무엇인가의 주위를 뺑뺑 돌아가면서 밀착해서 바짝 감아버리는 그것을 예수님의 증인이라 하는 거예요. 그것을 아가서에서는 이렇게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사랑하고 있으면, 얼마나 밀착하고 있으면 8절에 보니까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사랑을 할 줄 알아야 병을 느끼지요. 내가 얼마나 사랑하면 병이 나버린 거예요. 나를 지키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막이 되어버린, 엿 같은 인간이 아니라 막 같은 인간, 어느 누구를 바짝 쪼이듯이 전선에 감는 고무테이프처럼 전선을 바짝 쪼아 감듯이 “나는 어느 누구를 바짝 감을 하나의 막이 되어도 족합니다.”
그러니까 “나에게 필요한 것은 감길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 그 내용을 채우기 위해서 내가 병이 났습니다.” 아가에 나오는 그 병이 났다, 그 뒤에 보면 “네가 그 남자가 뭐가 그렇게 좋아서 병이 낫느냐?” 할 때 11절에서 16절에 보니까 자기 남자 자랑을 합니다.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파마를 해야 되나, 눈은 시냇가 비둘기 같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 뛰어난다 머리는 정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같이 검구나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젖으로 씻은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언덕과도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듯하구나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고 형상은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입은 심히 다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일다.”
그런데 이것은 여자가 자기 남자를 다른 여자 친구한테 자랑질 하는 거고요. 6장에 보면 이번에는 남자가 자기 여자를 자랑합니다. 2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우리끼리 아는 동산, 우리만 아는 동산. 6장 3절에 보니까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
백합화 가운데서. 백합화 하니 경북여고 생각나요. 그 학교 꽃이 백합입니다. 진선미. 백합화 중의 백합, “꽃밭에 꽃들이 많지만 너는 나한테 하나의 백합화다. 백합이야.” 그래놓고 그 뒤에 4-6절에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염소떼 같고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떼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고……”
그러니까 이것은 남자가 여자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더 예뻐할게 없는가 하고 막 찾아다니는 거예요. 서로가 서로에게 감기는 겁니다. 밀착되는 거예요. 뭐 구실 달아서 더 예쁜 것 없나 하고. 여러분들이 결혼하기 전에 연애할 때 그런 마음 없었습니까?
딸이고 아들이고 결혼이라는 것은 가정을 떠나야 되잖아요. 정들었던 가정, 정들었던 가정을 떠나기 위해서는 그동안 30여 년 동안 정을 주었던 그 정보다 더 센, 더 센, 그것을 능가하는 그런 어떤 미친 사랑 같은 것, 크레이지 러브, 그걸 능가하는, 가정에서 주는 부모의 정이라도 가감 없이 떨쳐버리고 거기서 탈출이 가능한, 이 세상에서 주는 어떠한 사랑, 발목 잡은 어떤 사랑보다 더 센 짜릿한 사랑이 없으면요, 우리는 이 땅과 함께 지옥 갑니다.
종교나 교회, 교회 등록, 그건 문제도 아니에요.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진해서 막이 되겠다는데. 하나의 알맹이 고체가 아니고 그냥 표면이에요. 표면보다 더 세게 나가면 액체가 됩니다. 마치 자궁 속에 있는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액체 속에 애가 있는 것처럼 주님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보호액체로서 우리가 존재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죽으면, 소멸되면 그만이지요.
주의 증인이 된다는 게 이런 상태에요. 내 자아성이 있으면 안돼요. 자기의 완전을 추구하면 안 돼요. 주님의 율법이잖아요. 주님의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는다면 기꺼이 저주 받아야지요. 그게 주님의 손길이거든요. 주님이 내 다리를 감아서 저주받게 된다면 감긴 그 넝쿨은 사랑의 넝쿨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저주받는 거예요.
단독적으로 내가 천당 가려고 복음 배우고 알고, 뭐 성경 달달 외우고, 성경 천 독하고, 기도하고, 헌금, 전도 다 해가지고 ‘주여, 저는 율법도 알고요. 그동안 착하게 살아왔고요. 양심대로 살아왔고, 남에게 죄지은 것도 없고, 바르게 살아왔고, 정직하게 살아왔습니다. 이만하면 천국 가겠지요? 얼마나 조심조심 하면서 살아왔는데요. 철저한 자기관리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나는 절제할 줄도 압니다.’
이런 사람 있으면요. 이제부터는 기도의 내용을 바꾸세요. ‘주님이여, 내 등짝에 배신의 칼날을 꽂아주소서.’ 내가 나를 지키려고, 내가 나를 귀하다 여기는 이 나의 도취에 주님의 율법이 내 등짝에 배신의 칼날을 꽂아버려야 돼요. “죽어라, 이놈아! 너는 나를 방해하는 자여.” 뭐 교회 몇 년 다니고, 성경에 도사고, 신학박사가 어떻고, 목사가 되었는데 어느 신학교를 나오고…….
막의 입장에서는요. 바퀴 큰 거, 도로 포장할 때 그 롤러 있잖아요. 아스팔트 깔 때 미는 그 롤러에 완전히 쥐포처럼 깔려야 돼요. 아주 아작이 나야 돼요. 그 나라는 게. 성도가 성경 보는 것은 내가 자진해서 나를 배신하라고 성경 보는 거예요. 너무나 곱게 키워온, 공들였던 자아의 멋진 모습, 좋은 교회 다녀서 멋들어진 성도된 그 성도됨을 내가 아작을 낼 줄 알아야 됩니다. 내가 완전히 박살을 낼 줄 알아야 돼요.
막의 존재는 막 자체를 겨냥해서 막이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휘감는 봉사하라고 막이 된 거예요. 원래 생물학에서 인간의 생명활동이라는 것은 그냥 이중 막밖에 없고 그 안에서 단백질의 자기공정, 그것이 움직일 때 그걸 생물학에서는 생명이라고 해요. 단백질이 계속 자기공정을 스스로 만들고 또 스스로 없애버리고 하는 그런 공정이 계속 되는 겁니다. 단백질 공정이.
왜 누구는 병에 걸리고 누구는 병에 안걸리는 거예요? activity dependence, 액티비티 디펜던스라 하거든요. 이것은 뭐냐 하면 activity는 활동성, dependence는 종속됨, 종속된 활동성, 더 쉽게 말하면 우연히 단백질에 걸려서 필연이 되게 되면 생명입니다. 안 걸리면 그것은 자체소멸해요. 폐기처분해요. 폐기되고 말아요. 그냥 모든 게 우연이에요, 우연.
경상도 말로 대대낀다, 하지요. 그냥 태어난 것부터 해서 죽는 것까지 모든 것이 사건, 사건, 우리가 예상 못한 사건에 의해서 움직이는 겁니다. 우연이에요 전부 우연. 필연은, 우리 인간의 세계에서는 필연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필연은 어디에 존재하느냐? 이스라엘에만 존재해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거기에 율법이 주어졌거든요. 완전한 율법이 주어졌기 때문에 율법에 의해서 어떤 특수한 사건들이 터지는데 그 특수한 사건 하나하나가 완전에서 나오는 완전체의 모습을, 모양을 띄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떨기나무에요. 출애굽기 3장에서 불이 붙었는데 타지를 않아요. 이게 이스라엘이고 이게 성도에요.
율법이 주어졌을 때 우리가 어떤 모습이냐 하는 것은 레위기 14장에 보면 거기에 문둥병이 나옵니다. 문둥병이라 하는 것은 얼굴이 뭉개졌지요. 흉측하지요. 몸도 망가지고. 문둥병이라 할 때 이것은 알갱이에요. 입자에요. 하나의 고체라는 말이지요. 고체인데 거기에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니까 고체가 뭐로 변하느냐 하면, 막으로 변하고, 막이 액체로 변해서, 허물어져서 완전히 형체가 뭉개져버리는 거예요.
우리가 전에 봤던 골로새서 1장 15절을 보게 되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 보이는 식으로 나타난 것은, 보이지 않는 아버지가 보이는 아들 예수님으로 나타난 것처럼 이제는 보이지 않는 아드님의 보이는 형식이, 바로 오늘날 성도 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작용이, activity가, 활동성이 주어지는 겁니다.
발현체, 선함의, 완전함의 발현체에요. 생명의 발현체, 생명력이 있다, 라고 보여주는 그 발현체에요. 그게 뭐냐 하면, 레위기 14장에서 문둥병이 걸린 거예요. 사건이지요. 우연한 사건. 우연한 사건인데 그 우연한 사건이 필연이 되기 위해서는 뭐와 접촉이, 연결이 되느냐 하면, 율법으로 연결이 되어버려요.
율법으로 연결되어 버리면 문둥병이 하나님의 저주에 의해서, 완전한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았다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에 의해서 저주에서 낫게 돼요. 낫게 되면서 나는 나았다, 하면 안 되고요. 뭘 이야기하느냐? 네가 저주받은 데서 낫게 한 그 중간에 개입된 하나님의 제물, 율법에 지정한 제물에 대해서 낫게 된 문둥병자는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되어 있어요.
2절에 “문둥 환자의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그리고 3-7절에 “제사장은 진에서 나가서 진찰할찌니 그 환자에게 있던 문둥병 환처가 나았으면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명하여 정한 산 새 두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제사장은 또 명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다른 새는 산대로 취하여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 피를 찍어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번 뿌려 정하다 하고……”
이렇게 길게 지루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오늘날로 쉽게 이야기하면, 그 사람 안에 십자가,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그 생명의 능력이 그 안에 담겨 있다는 거예요. 그 담겨 있는 것을 성도는 막이 되어가지고 그걸 밀착해서 감는 겁니다. 백번이라도 감는 거예요. 행여나 십자가의 공로가 누수 될까봐.
완전한 율법에 의해서 죽는 것도 완전한 일이에요. 율법에 의해서 죽은 인간을 예수님처럼 사흘 만에 부활하는 것처럼 죽은 인간이 부활되어서 영생을 얻는 그것도 완전한 일에 속하는 겁니다. 완전한 일이 두 개 있어요. 하나는 완전히 지옥 보내는 일과 완전히 지옥 간 인간을 완전히 천국 간 인간으로 바꾸는 그 두 가지 작업이 바로 우리 속에 집어넣은 하나님의 일, 제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제물로 인하여 두 가지 현상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우리는 그걸 막으로 싸는 겁니다. 주님이 하신 그것을 막으로 뺑뺑 둘러싸는 거예요. 막이 되기 위해서는 나의 개체, 나의 자아를 주장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자아가 두 개가 되기 때문에 이게 다툼이 되는 거거든요. 우리는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 저주받을 이유가 있어요. 저주받는 이유는 뭐냐 하면,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것은 나의 도취거든요. 나의 도취, 나의 격려고 나의 독려입니다.
그걸 성경에서는 교만이라고 하는데 교만은 자만을 의미하고, 자만은 생명 없는 것이고, 자만은 곧 자기설득이에요. 그리고 자만은 자기에게 용기를 부여하는 것이고, 변명하는 것이고, 자만의 가장 나쁜 점은, 내가 나에게 명령을 내린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내가 법을 또 하나 만든 게 돼요.
따먹지 말라 하는 선악과를 따먹어가지고 내가 나를 명령을 내려요. 명령을 내리는 이유는 뭐냐 하면, 내가 최고다, 내가 신이라는 것을 자가 증명하기 위해서 명령을 내리는 겁니다. 철학이고, 신학이고, 과학이고, 이게 왜 마귀적 학문이냐 하면, 관찰자가 의도를 가지고 이 관찰 하는 자의 의도를 증명하기 위해서 자연의 일부를 내가 편리한대로 일방적으로 채택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걸 가지고 욕구라 하고 그걸 욕망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의 욕망은 의도가 있어요. 목적 없는 욕망은 없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뭐냐 하면, 그러니까 나는 잘났잖아, 그러니까 나는 훌륭하잖아, 이걸 증명하고 싶어서 인간은 어떤 것도 일방적으로 선택을 하고 결정을 자기 자신이 내리는 겁니다.
인간생활이라는 것은 별거 없어요. 자기완전을 한시도 쉬지 않고 추구한다는 게 인생살이입니다. 남에게 자비를 베풀고, 희생을 하고, 나라에 충성을 하고, 부부의 도리를 다 지키고, 자식을 사랑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교회에 충성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
그러면 묻지요. “당신은 왜 그런 짓을 하십니까?” 그러면 그 쪽에서 “짓? 짓? 그게 ‘짓’이 되는 겁니까? 그게 몹쓸 짓이 되는 거지요?” “그렇지요 그게 몹쓸 짓이 되지요. 왜 그런 짓을 합니까? 누가 하라고 했어요?” “내가 내 인생 그렇게 하는 거지요 뭐” “당신은 왜 그런 짓을 합니까? 그건 완전을 추구하기 위해서, 그 당신의 완전 때문에 누가 죽은지 알아요? 제대로 완전추구 하시는 분이 죽었어요. 살해당했어요.”
완전이라 하는 것은 이 땅에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선악과를 따먹어서 이 세상 세속적이지 않고, 음란하지 않고, 거짓되지 않고, 탐욕적이지 않고, 저질적이지 않고, 자기가 훌륭한 존재이고 싶지요. 하지만 이러한 세속과, 음란과, 거짓과, 탐욕과, 저질과, 안일함의 반대말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왜? 전부다 한통속이니까. 모두 다 똑같은 인간들이에요. 아침에 밥 먹는것도 저질이고 음란이에요. 왜? 내가 하기 때문에.
내가 하기 때문에 무조건 더러운 거예요. 밥 먹고 뭔가 노림수가 있어요. 나는 완전하다, 나는 관대하다,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러니까 사람은 완전하기 때문에 살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와서 죽었어요. 이 땅에 와서 죽었다고요. 모든 인간은 전부 다 살고 싶어 하지만 예수님은 저주를 몸에 감당하고 유일하게 죽으려고 하신 분이었습니다. 서로의 완전이 달라요.
그 죽으신 분이 살아난 거예요. 지금 물에 빠져 죽었다고 소문난 철종이 살아났어요. 성경 이야기가 아니고 <철인왕후>라는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살아났어요. 죽었다가 살아났다고요. 신혜성하고 만났어요. 마차에 누워서 둘이 사랑의 자세를 취하면서 왕궁까지 들어가는 겁니다. 19회째 이야기. 이건 알 필요도 없어요.
이게 픽션, 허구기 때문에 알 필요 없잖아요. 그런데 우리 자신이 그런 허구를 매일같이, 그 환상을 매일같이 만들어내는 겁니다. ‘나는 우물에 가서 물 길을래.’ 이게 자기가 허구인지를 사마리아 여인이 상상인들 했겠습니까? ‘나는 물길어서 힘내서 이제 여섯 번째 남자하고 결혼할거야. 이게 내 인생이야.’
그 내 인생, 이게 헛방이고, 허구고, 이게 저질이고, 음란이고, 이게 간음이고, 탐욕이고, 이게 비완전이라는 것이라는 사실, 율법의 저주받을 짓거리라는 사실을 본인이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거기다가 교회까지 잘 다니면…….
여러분, 상식 뒤에 숨지 마세요. 상식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상식은 미친 인간을 정상이라고 거짓 되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일방적으로 지나가는 우연을 잡아서 필연으로 만들 듯이 율법이 와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찾아올 때는 그냥 일방적이기 때문에 모든 조건이 탈락됩니다.
그 사람이 왜 좋으냐? 조건 달지 마시고 이유 달지 마세요. ‘그 사람에게 저주받는 것도 나는 영광입니다.’라고 생각한다면 이건 진짜 미친 거다. 이건 진짜 미친 건데……. 나는 그 사람 앞에 저주 받아서 내 육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에 칭칭 감기다가 나중에 나이 많아서 치매 걸려 늙어 죽는다 할지라도 그게 바로 내 할 일인 것을 기꺼이 감사하시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임해야 가능한 거예요. 성령이 임해야! 인간이 할 수 없는 거예요. 성령이 임하게 되면 너희가 땅 끝까지 나의 증인이 되리라. 너의 고유의 것은, 너의 개성은 애초부터 있어서도 안 되고 있으면 내가 박살낼 거야. 그런 거예요. 나만의 개성, 나만의 개성은 없기 때문에 성도의 삶이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족합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누구를 만났는데 여러분보고 “눈 깔아!” 하거든요. 그냥 눈 깔아주세요. 눈 깔아, 하면 예, 하고 눈 까세요. 물론 강한 자에게만 눈 깔지 말고 약한 자에게도 눈 깔아, 하면 눈 깔아주세요. 엄지 척입니다. 승부욕, 그 승부욕에 우리는 미쳐 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나의 증인이 되지 나 외에 누구의 증인이 안 되려고 버티고 있는 겁니다. 이게 악마가 우리한테 이렇게 만들었어요.
제가 지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에 관심을 두고 탐구하는 그것조차 이 복음계에서, 이 복음계가 있잖아요, 무술의 고수들이 있는 복음계에서 남에게 안 지려는 승부욕에 미쳐서 그럴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복음의 도사, 십자가에 대해서 나에게 물어봐, 이런 거지요.
그냥 눈 까세요. 왜 우리는 membrane, 막이니까, 그리고 소멸된 액체니까. 그것 때문에 주께서는 율법으로 먼저 우리에게 저주를 하신 겁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싸울 필요도 없고, 다툴 필요도 없고, 주님의 몸에 칭칭 감긴 하나의 사랑하는 여인으로서, 신부로서 살게 하옵소서. 우리 입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주님 자랑질 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