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
2006년 8월 6일 설교 본문; 전도서 4:7-8
(전 4:7) 『내가 또 돌이켜 해 아래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전 4:8)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아무도 없이 홀로 있으나 수고하기를 마지 아니하며 부를 눈에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도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 수고하고 내 심령으로 낙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고 하나니 이것도 헛되어 무익한 노고로다』
오늘 본문은, 자신이 수고한 것을 그냥 감사히 받아줄 가까운 인척이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인생을 살면서 헛된 일 중의 하나라고 탄식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에는 이런 경우가 생기지 않는 방향으로 일 하실 게 분명합니다.
즉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수고는 그 수고를 받아 줄 자를 겨냥해서 일하시게 됩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이 인간 세계에서 통용되는 사고방식과 질적으로 정반대 원리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 인간 세상에서의 통하는 원리는, 자기가 수고한 것은 수고한 자가 먹는 것이 당연하고 의로운 결과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와 의란 다음과 같이 구분됩니다. 사람이 자기가 행한 노동의 가치 외에 더 큰 것을 바란다면 그것은 죄가 되고 만약 사람이 자기가 행한 노동의 양만큼 얻겠다고 나선다면 그것은 죄가 아니라 도리어 의로운 태도라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는 곧 다음과 같은 논리로 이어집니다.
사람이 자기가 행하지 않는 일에는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저질러 놓은 죄가 아닌데 자기가 그 죄에 대해서 책임질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 세상에서는 이런 자기 노동 중심주의 사고방식에 따라서 선과 악을 구분짓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들의 이런 의식으로 인하여 자기에게 ‘허무’가 찾아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의 움직임은 이런 인간들의 생각에 호응해주는 식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다시피 이 세상은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에 대해서 감히 우리 인간들이 ‘지기 노동중심주의적 의식’으로서 덤벼들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어떤 부자 청년은 예수님 앞에서 영생을 얻어보겠노라고 나섭니다. 자신이 그동안 어릴 적부터 완벽하게 하나님의 말씀이고 언약인 십계명을 지켜왔노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그러한 자기 노동 위주의 생각이 영생을 가로막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말씀을 지키는 노동으로 인해 그 본인이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경우는 도리어 자신의 수고와 애씀의 결과가 터무니없는 인간들에게 홀라당 빼앗겨 버림을 당할 때, 비로소 “다 이루었다”고 말씀 하실 수 있었습니다. 자기 노동의 열매에 집착하는 인간들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까지나 인간은 배제되고 오로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처리할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떤 인간이 이 말씀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10장에서 보면 어떤 율법사가 자기의 견해가 옳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이웃 사랑하기’ 율법에 도전합니다. 그 사람의 입장으로서는 ‘이웃’이 누구냐만 제대로 알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짐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터무니없는 오산이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생각은 이 세상을 헛된 세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자신의 노동중심주의를 가지고서는 아무리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한 가지 비유를 가지고 그의 터무니없는 생각을 지적해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마침 제사장이 지나갔지만 그를 피하여 갔습니다. 그리고 레위인도 그곳을 지나갔지만 그도 없어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 강도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겨 그가 가진 귀한 기름과 포도주로서 원기를 북돋아주고서는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에다 모시고, 안정을 취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여관주인에게 당부하기를 치료비용이 더 들더라도 자신이 다 댈테니 염려하지 말고 그 강도 만남 사람이 건강을 회복하는데 도와달라고 당부를 합니다. 그래놓고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되묻습니다. 이 세 사람 중에서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 강도 사건을 보면서, 세상적인 자기 노동중심의 가치관을 한 번 적용해보면,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을 결코 강도들보다 더 나쁘다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람을 다치게 한 것이 아니라 강도는 엄연히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즉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신이 행한 일이 아닌 일에 대해서 구태어 책임지고 나설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은 결코 강도가 아닌 것입니다. 강도는 따로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보시기에 그렇게 되면 ‘이웃’이라는 것이 이 상황에서 발생될 수 없다고 보는 겁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에 비해서 제 3의 인물인 사마리아인은 마치 강도 만난 자에게 자신의 노동의 대가인 비용을 다 집어넣으므로서 이웃을 만난 보람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그동안 노동해서 얻은 것을 빼앗가는 인물이 있다는 사태를 도리어 즐거워하고 반기고 기뻐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태도는 이 인간 세계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저질은 놓은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이 담당해야만 하는 일로 여긴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새로운 죄관으로 다가옵니다.
즉 무엇이 죄인가요? 그것은 자신이 노동한 것을 아무런 노동도 하지 않는 자에게 홀라당 빼앗기는 사태를 즐거워하고 기쁘하지 않는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정말 희한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말씀 성취를 보여주시는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여 있는 그 말씀의 성취자가 결코 인간이 될 수 없고, 오로지 예수님만이 가능함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 5: 21-22에 보면,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이미 독자적인 구원사역에 나설 수 있는 자격자인데 이는 홀로 모든 말씀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독생자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요한복음 3:16을 우리가 아무리 믿고 싶어도 우리 힘으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조차 예수님이 믿음 주셔야 비로소 우리가 믿고 영생 얻게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죄를 모르고 일이 순탄치 않을 때, 자기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헤아려 달라고 주님께 대들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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