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우매자와 지혜자(전2'12-17)이근호060611

아빠와 함께 2013. 6. 30. 14:39

 

우매자와 지혜자

2006년 6월 11일                                  설교 본문: 전도서 2:12-17


(전 2:12)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왕의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꼬 행한지 오랜 일일 뿐이리라』


(전 2:13) 『내가 보건대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두움보다 뛰어남 같도다』


(전 2:14) 『지혜자는 눈이 밝고 우매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이들의 당하는 일이 일반인 줄을 내가 깨닫고』


(전 2:15) 『심중에 이르기를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전 2:16)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전 2:17)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한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


이 세상에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곧장 사회적인 차별로 확장하려는 의도는 누구에게나 가질 수 있는 성향입니다. 오늘날의 민주 사회가 되기 전의 고대 사람들은 사회 내에서 죄를 짓는 것은 어디까지나 무식해서 죄짓는다고 보았습니다. 무식한 만큼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는 것은 누가 생각해도 합당한 말이라고 간주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에서 허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많이 알고 똑똑하면 그만큼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공식이 수립됩니다. 즉 사람이란 무엇이 옳고 그른지만 안다면 항상 나쁜 짓을 선택하기보다는 착한 일 하기에 매진하기 마련이다 는 겁니다. 사실 이런 식으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흔히들 있지만 이런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바는, 자신들의 착함에 대한 합당한 사회적 권위나 인기나 칭찬이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는 점에 대해서 이유 없이 화가 나고 허무를 느낀다는 점입니다.


전도자는 인생의 이러한 난제를 죽음이라는 것을 통해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운명이라는 믿습니다. 하지만 그 운명은 어디까지나 자기하기 나름이요 자기 마음먹기 나름이다 는 겁니다. 즉 운명의 주인을 자기 자신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방식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죽음이라는 세력 앞에서 다 헛되게 허물어져버린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비극이 아니라 엄연히 이 자연의 이치요 도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남이나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대단히 억울하게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끝’이 자기를 맞이하면서 자신을 아예 애초에 없었던 존재로 뭉개버린다는 것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우매하지 않기 위해 애썼고, 착하기 위해 자기 절제하면서 인내했던 모든 것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고 만 것입니다.


이것이 육의 한계입니다. 육으로서 육을 아는 바의 경계선입니다. 곧 ‘죽음으로 끝난다’는 말이 ‘헛되게 끝난다’ 말과 같이 해석되는 이유는, 죽음이 지니고 있는 내용을 구약 때는 미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인간은 자신의 죽음의 내막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겁니까? 그것은 그들과 함께 살고 있는 모든 주위의 사람들과 조상들이 다 그렇고 그런 죽을 운명 안에 놓여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하지만 신약 성경에 오게 되면 하늘에 사시던 분이 이 땅에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3:31-34에 보면,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늘에서 누군가가 오셨습니다. 인간은 다같이 땅이라는 지평선 안목에 머물기 때문에 지평선의 끝을 무한정 늘이면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저 지평선 끝에서 다른 일이 벌어지면 지금까지 생각해 놓은 모든 것을 수정할 판입니다. 항상 오류로 마감할 가능성을 품고 무작정 갈 데까지 가보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하늘에서 사시던 분이십니다. 시작도 그분이 하셨고 끝도 그분이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분을 믿습니다. 처음이요 과정이요 끝이심을 믿습니다. 그 예수님에 의해서 죽음이 품고 있는 본질이 드러납니다. 이런 것을 위하여 마태, 마가, 누가, 복음 복음이 있고 또한 그 뒤로 사도들의 편지들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11:24-26에 보면,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 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전도서에서의 인생이란 늘 죽음을 품고 결국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으로 이야기가 되지만, 신약 성경에 와서는 그 죽음은 ‘악마 들림’, ‘귀신 들림’으로 표현될 수가 있습니다. 즉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 인간 마음대로 받아들이고 추방하고 할 수 없듯이 귀신이나 악마에 대해서 그러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 우리 인간들입니다.


에베소서 2:1-3에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귀신을 추방한다든지, 악마를 추방한다든지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치 우리가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어떤 조치가 내려집니까? 갈라디아서 6:8에 보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육체를 위하여 심어서는 아니 된다’는 겁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육체에 대한 과도한 기대성과 투자성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성도에게는 이미 육체에 투자하고 기대하는 그런 시기는 넘어섰다는 말입니다. 만약 여전히 육체에 신경쓴다면 그것은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다음과 같은 악령의 열매가 맺이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19-21에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의 육체성이 늘 이런 본성을 감출 길 없이 드러내지만 이러한 정과 육체성을 십자가에 늘 못 박아 버리시는 일을 하시는 분이 또한 성령님이십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육체로서는 도저히 나타날 수 없는 열매들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허무하지만 성령의 열매는 영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죽음 위에 놓여 있지 않고 십자가 위에 놓여 있음을 분명히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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