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70이레 논문(틈)130404-17강b -이 근호 목사
제 17강b
첫째 시간에 70이레 더하기 주체부터 먼저 다뤘다 했습니다. 그러면 그 주체가, 아주 쉽게 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니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했죠. 그걸 요번 수련회에서 두 자로 ‘호명’이라 했죠. 지난 시간에 한 것 같은데요. “사울아, 사울아” 호명하는 거예요. 또는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여러분, 창세기 보면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늘 부른 게 아니고 아브라함이 그냥 양을 쳤죠.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아, 여기다 단을 세워라” 하죠. 그래서 아브라함이 단을 세웠다 이 말이죠. 또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께서 “야곱아, 야곱아” 하고 꿈에 또 나타나죠. 자, 그러면 그걸 보고 어때요? ‘아유, 왜 하나님은 나한테는 안 나타나지?’ 이런 생각 안 듭니까? ‘아이 씨, 아브라함은 되게 좋겠다.’ 길 가면 ‘아브라함’ 하면 ‘하나님 살아계시는구나.’ ‘이삭아’ 하고, 그러면 왜 우린 안 불러주는데? ‘섭섭하네요.’ 안 불러주니까 혹시 내가 구원 못 받은 게 아닌가? 또 이런 걱정도 되고, 불러주면 좋겠는데. 그런 의문점 들죠. 그렇죠?
그럼 질문하겠습니다. 불러주면 확신 생깁니까? 하루에 몇 번 불러줘야 돼요? 3번? 4번 불러줄까? 하루에 4번 불러주고 안 불러주는 그 시간은 믿음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 방법은 불러주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계속 상주하는 게 중요해요. 아예 같이 계신 게 중요해요. 거덜 내는 거예요. 우리 신체를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 되었어요. 아예 들어와 사시는 거예요. 성령께서.
그 다음 문제 봅시다. 들어와 사신다면 어이 합니까?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성경에 들어온다 하니까 나도 흉내 내려고 ‘주여, 목사님 들어왔습니다.’ 백날 해도 자기 속이는 셈 밖에 안 되잖아요.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이 찾아왔죠. 물 길러 왔는데 하나님께서 아예 그 여인을 우물로 만들었죠. 우물은 물을 떠가는 건데 주님께서는 니 속에 영원 하도록 하는 생명이 나오도록 한다 하니까 그 여자가 움직이는 우물 돼 버린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날 신약의 모든 성도가 움직이는 우물 이예요. 그런데 움직이는 우물이다, 아니다,를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판단 기준이 뭐냐 하면 그 여인에게 아무도 남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비밀이 있었어요. 과거 있는 여자였습니다. 남자가 다섯 명 있었어요. 영식이, 병국이, 호철이, 권영이, 정식이, 다섯 명이고 여섯 번째가 이 을수, 이거 자랑거리입니까? 아닙니까? 자랑거리 아니죠. 보통 잘난 여자 아닌 것 같아요. 엘리자베스 테일러처럼 7번 간 줄 모르겠는데, 어쨌든 이걸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는 없는 입장 아닙니까?
성령이 샘솟게 나온다는 말은 우리가 하루 일상을 살았으면 그 일상 가운데서 얼마나 우리 자존심, 우리 체면, 나 잘났다. 를 까발려 줄 때 우물입니다. 성령이 계신 성전입니다. 아시겠어요? 굉장히 간단하죠. 주님이 동거하기 때문에 얼마나 성경 말씀 내용을 니가 돈 좋아하는 인간의 뿌린데 세상에 천하 돈 좋아하는 것이 나라는 것이 하루 일상 살아가면서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라. 발걸음을 세신다.’는 백날 해도 파출소 가게 이끄시는 것도 누가 하셨다? 태양을 만드신 분이. 세상에 태양을 보고 하나님이 움직인다는 걸 24시간 늘 느끼지는 않잖아요. 누구 우리에게 물으면 ‘태양을 누가 움직여요?’ 성경에 보면 ‘아, 하나님’ 누가 물으면 그때서 정답 아는 지식 끄집어내면 되지만 평소에 온 몸으로 ‘지금 하나님께서 태양을 움직이는구나.’ 이렇게 느껴지지는 않잖아요.
그런 것들이 육적인 생각, 육을 위해서 심는 것은 썩어진 것을 거둔다잖아요. 만날 썩어질 것을 생각하는 나로 하여금 그걸 까발려서 봄 되면 농부가 쟁기로 흙을 뒤집죠. 어떤 전을 굽는 가게 이름이 뒤집기 전, 늘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육을 심는 것을 뒤집어 주시는 그 능력, 우물입니다. 무슨 우물? 하나님이 동거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세상에, 이런 은혜! 이거 돈 얼마 주고 얻었습니까? 세상에 이런 은혜가 없습니다. 나는 인간도 아니야, 나는 주님 사랑한다 하면서 잘못 되면 주님 원망이 먼저 튀어나오는 이런 짓하고 천국 가서 사탄 짓 할 게 바로 나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 이걸 뒤집기 하는, 이게 성령이 동거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 다니고 주의 말씀 듣는다는 것은 ‘뒤집어 주옵소서. 그럴싸하게 믿는 척 하는 걸 완전히 까발려서 뒤집어 주옵소서.’ 그런 겁니다. 자, 예를 들면 ‘나는 평소에 주님만 생각합니다.’ 하잖아요. 특히 목사님들이 말씀만 생각하는데. 야구선수 류 현진이란 사람이 있거든요. LA다저스 요번에 제 2 선발로 간사람, 한국 남자 그거 모르면 간첩입니다. 그가 요번에 첫 번째로 패전했다고요. 이상하게 기분 나쁜 거예요. 목사가 되든지 장로가 되든지 집사가 되든 상관없이, 그러면 결국 뭡니까? 주님 사랑, 주의 뜻, 해놓고 결국 마음속에는 류 현진, 한국을 대표하는 투수가 보란 듯이 해고시켰다. 또 한일 축구, 이런 거 결국 이런 것들이 은근히 졌다 하면 기분 나쁜 거예요. 그리고 북한의 개성공단, 은근히 기분 나쁜 것, 이게 뭐예요? 우리가 누굴 사랑한다 했어요? 주님 사랑한다 했어요? 이걸 또 다시 한 번 뒤집어 주시네요. ‘니가 나를 사랑해?’ 개성공단 사랑했다고 뒤집어 주시는, 늘 누가 계시기 때문에 항상 썩어질 것을 거두는 우리를 ‘니는 그런 인간이 아니야, 영을 위해 심는 자야.’라고 뒤집어 주시는 은혜, 이것이 바로 호명만 할 뿐이 아니라 앞으로 하나님 모든 수케줄, 시나리오를 그 사람 속에 집어넣습니다. 들어올 때 하나 섞여져 들어온 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공부하려는 70이레도 같이 섞여 들어온 거예요. 이제 이해 하시겠습니까?
70이레라 하는 것은 우리가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쳐들어 온 거예요. 쳐들어 와서 뭘 한다? 뒤집어 주는 거예요. 우리가 나 위해서 ‘나 구원받아야 돼.’ 까부는 것, 이걸 뒤집어 주는 거예요. ‘니는 니가 구원 못 받아. 다만 주님의 구원을 위해서 너는 쓰여 질 뿐이야. 그래서 너는 구원 받는 거야.’ 주의 몸에 붙어있다는 부분으로서 구원받기 위해서 70이레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슬슬 풀리죠. 70이레를 두고 우리가 해석하는 해석이 필요할까요? 안 필요할까요? 꼭 필요하죠. 꼭 필요해야 뒤집죠. 70이레에 대해서 우리 해석이 꼭 있어야 되죠. 그 다음에 이쪽에서 주님이 주체가 되는 70이레 또 필요하죠. 이 두 개의 만남 속에서 70이레는 뭐냐 하면 우리의 잘못된 해석으로 우리 바리새인 같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곡해하고 왜곡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받습니다. 이쪽에서 오는 것은 죄인 쪽에서 오는 것이고, 이쪽에서 오는 것은 유일한 의인 예수님 쪽에서 오기 때문에 그 틈 사이에 십자가라는 경계선이 깔려 있는 겁니다. 우리는 뭐냐, 이쪽에서 다가가는데 어떻게 다가가느냐, 바로 상징으로 다가갑니다. 이걸 라캉은 상징계라 합니다.
상징계라 하는 것은 어떤 규칙을 지키기 위해서 행동에 나서는 걸 상징이라 합니다. 이 말, 상징이란 말을 갑자기 괜히 끄집어냈다 싶은데 이왕 끄집어 낸 걸 수습하면 상징이란 말을 왜 집어넣느냐 하고 싶은 것은 이 컵을 우리가 컵이라 하잖아요. 이게 상징이 아니잖아요. 컵을 컵이라 했지, 이 컵은 조그만 것, 이러면 상징인데 컵을 컵이라 하는 것은 상징이 아니잖아요. 나는 이 근호다. 이는 상징이 아니고 이 근호를 이 근호라 하지 이게 뭐가 상징입니까? 나는 안경을 꼈다. 이건 상징이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나는 나다. 하면 상징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상징이란 말을 왜 쓰느냐 지금 이게 무슨 상징이야, 실제 그대로지, 보통 그렇게 생각하는데.
상징이란 말은 실재는 감춰져 있는 걸 염두에 둘 때 거기에 감춰져 있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실재는 아니기 때문에 상징이란 말을 쓰는 거예요. 아직 이해가 안 되실 거예요. 상상계가 있고 상징계가 있고 실재계가 있는데 실재계라 하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접근되지 않는 겁니다. 그럼 상상계란 뭐냐 하면 항상 나는 무엇이다. 이것은 무엇이다. 일치시키는 걸 상상이라 합니다. 저거는 뭐냐? 카메라다. 이걸 상상계라 해요. 저건 카메라다 하는 걸 상상계라 하는데 그런데 저 사람은 저게 카메라가 아니고 저건 책상이다. 라고 왜 말을 못하느냐 하면 나 혼자 있으면 ‘저거 책상이네.’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책상이라 하는 것은 이런 걸 책상이라고 이미 기존의 세계에서 규칙이 있어요.
“이것은 이다. 밥.” 무슨 뜻인지 모르죠. 이것은 밥이다. 하면 말이 되는데 이것은 밥, 이다. 가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에 나 혼자 밖에 없으면 이게 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내가 “이다. 밥“ 하든지 뭐라 할 게 없잖아요. 하지만 이 세상에는 이미 사람들의 규칙이 있어요. 그 규칙이 있어서 나는 ”음~“ 이렇게 하지만 다른 사람한테는 뭔데? 하면 ”음~“ 하지 못한다 말이죠. 우리가 알아듣는 소통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봐. 하면 우리는 단어를 탁자? 탁자는 이거고, 아니, 그러면 거울? 거울은 보는 게 거울이고, 뭐지? 그렇지 카메라. 그렇지 카메라. 이렇게 되죠. 저 사람과 이제는 소통이 됐죠. 그렇게 정해놓은 그것을 상징이라 합니다.
애들이 엄마한테 ‘맘마’ 하죠. 그럴 때 맘마, 라 하지 말고 ‘엄마’라고 해야지, 요건 커서 하는 것이고, 애들이 갓난 아이 때는 ‘맘마’ 해도 그걸 용납하는 거예요. 왜, 그게 상상이기 때문에. 지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기 때문에. 하지만 크면 어떻게 되느냐, 지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면 사람 사이에 소통이 못 되잖아요. ‘카메라 주세요.’ 하는데 책상 주면 안 되잖아요. 카메라, 한다고 기억(ㄱ) 쓰고 이러면 안 되고, 카메라를 줘야지, 글자를 주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아하, 카메라, 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것을 내가 고개 숙이고 복종할 수밖에 없어요. 그걸 상징계라 합니다. 상징 계는 교육 받아야 돼요. 교육을 안 받으면 상징 계에서 낙후가 돼요.
이빨이 아플 때 병균이 들어왔을 때 치료는 뭐냐, 일반인들은 모릅니다. 전문적인 6년 동안 치과의사와 전문의를 거쳐야 알 수 있어요. 그러니 교육을 받아야 돼요. 왜, 치과라는 그 상징 계는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래요. ‘선생님 이빨 때워주세요.’ 하면 ‘예’ 하고 뻰치 들고 하면, 이건 아니거든요. 뻰치라 하는 것은 못을 뺄 때 쓰는 거지 아니잖아요. 다른 특수한 기계가 있을 게 아닙니까? 그 기계를 사용하려면 배워야 되잖아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은 인간은 무엇으로 산다? 상징 계에서 이렇게 되니까 그걸 상징에서 말하는 뭐가 돼요? 주체가 되죠. 이제 슬슬 현실이 눈에 들어옵니까? 아! 나라는 주체는 나는 여기 있다 해서 누가 알아주는 사람 없는 거예요. 그럼 내가 나답기 위해서는 누구에 호응해야 됩니까? 내 이전에 이미 형성된 그 세계, 그 현실에 내가 고개 숙이고 교육 받고 ‘저 좀 써주세요. 저 좀 취직시켜 주세요.’ 이렇게 할 때 나는 그들에 의해서 나는 나가 되는 거예요.
그럼 나를 나라 하는 것은 ‘내가 나다’ 하는 것은 상상계고 실제로 사회에 나와서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은 누굽니까? 주변 사람들! 타인, 그걸 남이라 하는 거예요. 남이 나를 안 알아주면 우리는 상징계인 주체가 없어지기 때문에 자살하는 거예요. 왜, 아무도 날 써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애들은 자살합니까? 자살 안 합니까? 애들은 굶어죽지, 자살은 안 하거든요. 내가 나기 때문에 지가 죽을 이유가 없는 거예요. 죽을 이유가 있다는 말은 상상 계 있는 게 아니고 어디 있기 때문에 죽는다? 상징 계 있기 때문에. 상징 계에서 내가 없으면 상상한 나는 있으나 마나 소용없는 거예요. 그래서 자살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 실재계는 뭐냐, ‘누가 너로 하여금 그렇게 힘들게 했게.‘ 라고 나타나 줄 때만 나타나 주는 분, 실재계입니다. 나타나 준다는 말은 내 쪽에서 찾아가면 만나진다? 안 만나진다? 안 만나져요. 안 만나지니까 인간들이 약이 올라서 다른 상징 가지고 안 만났는데 만난 척을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한 자로 신, 바로 예수, 성령. 이게 뭐냐 언어를 가지고 표현을 하는 거예요. 예수(jesus christ), 성령(holy spirit), 삼위일체, 온갖 것 다 하는데 실제로 그 사람은 주님을 만나 본 적도 없고 이미 아는 종교계에서 통하는, 교회에서 통하는 걸 사용할 뿐 이예요.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용어를 사용했을 뿐 이예요.
그러나 사울은 어떻습니까? 직접 누굴 만났습니까? 사울은 직접 만났죠. 그게 실재계입니다. 실제로 만나 보니까 어떤 상징에서도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것을 여기 주님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은,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은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아는 척을 하는 게 뭐냐 하면 기존의 다른 신학들과 성령의 용어를 채용해서 지 나름대로 안 들키게 안 들키는 거예요.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직접 만났죠. 자기는 뭐라 합니까? 나는 메시아를 만났다 하죠. 물 길러 와서 물동이를 버려두죠. 이거 상징 계에서 얻어맞을 이야기예요. 시어머니한테 욕 얻어먹습니다. 아니 며느리가 물 길러 갔으면 물 길러 와야지, 그게 무슨 계? 상징 계에서 물 길러 와야 돼요. 며느리가 말 안 들어서 쫓겨나면 안 되잖아요.
상징 계인데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뭘 버려뒀다? 물 동이를 버려두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치과에서 하다가 주님 만났습니다. 에이, 다 버려. 하면 어떡하겠다는 말 이예요? 고발 들어와요. 이빨 반 쯤 뽑았는데 나둬 버리면 고발 들어온다니까요. 그러니까 주님 만난 건 미친 거예요. 주님 만난 건 미친 짓이라니까요. 그런데 미친 짓인데 특징이 뭐라 했습니까? 나는 오직 썩어질 육만 위해서 사는 인간인 것을 자각하죠. 그거 누가 들어왔기 때문에? 성령이! 진짜 이건 말이 아니고 말로 표현도 안 돼, 내 눈 달린 것은 보지 못하게 달렸다. 이건 말은 그렇게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몰라요. 보라고 눈 달렸지, 보지 않기 위해서 눈 달렸다. 이걸 누가 믿겠습니까? 그럼 우리는 믿든지, 말든지. 사도바울은 말했잖아요. 영생 받는 자 외에는 내 말을 믿을 사람이 없다.
주님 오게 되면 말씀대로 우리가 얼마나 나만 섬기고 주님을 얼마나 천대하는지를 깨달아요. 그래서 하늘나라는 회개함으로 들어간다. 하늘나라는 회개함으로. 방금 제가 이야기했죠. 요거 상징입니까? 실재입니까? 또 상징 이예요. 우리가 어떤 말을 해도 상징 짓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말을 한 순간 또 이 말 단어가 또 말 분석에 들어가요. 분석해봐야 소용없어요. 그냥 상징이라.
상징에서 실재로 나아가는데 라캉은 뭐라 하느냐 하면 그걸 향락이라 해요. 즐기는 것. 박 근혜 대통령이 대통령 출마한 이유는 뭡니까? 딱 하나,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아니에요. 즐기기 위해서. 모든 인간의 행동은 즐기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러면 즐기는데 목적이 있느냐? 목적이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의 육의 욕구 기대, 인간이 이걸 무시해요.
인간의 몸은 즐기고 싶어 해요. 이건 말릴 수도 없어요. 그래서 인간은 사업을 했잖아요. 사업에 만족하느냐? 만족 안 합니다. 사업을 통해서 더 어떤 즐거움, 크게 한다든지 해서 즐기기를 원해요. 이건희 보세요. 지금 아직도 고민 이예요. 다음엔 또 무슨 사업을, 뭘 팔아먹어야 할지, 현대도 마찬가지고 , 왜 하느냐, 있는데? 다 소용없어요. 그냥 즐기는 거예요. 계속 즐기는 것. 즐기기 위해서는 참신한 것, 새로운 것 이예요.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 남자는 달라요. 여자는 계속 지루한 일상적인 데서 뭔가 즐길 걸 찾는 게 뭐냐, 계속 더 많은 사랑을 원하는 겁니다. 남자는 일을 벌리면서 즐겨요. 그래서 내가 그걸 알기 때문에 한 직장에서 오래 근무하든지 교사 오래 하게 되면 존경스럽습니다. ‘아유, 매일 똑같은 일을 어떻게 했습니까? 어떻게 똑같은 일을 어이 했어요? 존경스럽습니다.’ 하면 사장님은 ‘딱히 할 게 있어야죠.’ 이 말은 다른 즐길 거리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가끔은 등산이 재밌나 해봐야 그렇고, 암벽 타봐야 미끄러져봐야 그만이고, 하여튼 계속해서 나이가 70이든 80이든 계속해서 즐길 거리를 하는 거예요.
시골에 가면 다방이 많아요. 다방이 왜 많으냐, 다방이 없으면 남자들이 일을 안 해요. 밭에 일을 하는 것은 빨리 일하고 다방 가서 화장 짙게 한 마담 손잡고 쌍화차 한잔 먹는 그 바람으로 갔다가 다시 밭에 일하는 겁니다. 그러면 같은 밭에 일하는 아줌마, 할머니들은 무슨 보람으로 일합니까? 서울에 간 자식들에게 공납금, 저축하는 그 재미. 여자들은 자식이고, 남자한테는 향락, 둘 다 향락이지만. 자기 자유를 만끽하는 것.
그래서 상징 계에서 실재계로 나가는 걸 향락이라 했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왜 신을 믿습니까? 답 딱 나왔죠. 자기 즐기기 위해서. 이건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그 신남을 아직 우리는 멈출 줄을 모릅니다. 언제까지? 내가 신이 될 때까지. 그런데 어느 경지? 그건 필요 없어요. 그 즐기는 게 중요하지, 향락이 중요하지, 목표가 오면 안 돼요. 큰 일 나요. 목표가 오면 향락이 중지가 되니까 큰 일 나는 거예요. 그래서 목표가 생기면 다시 목표를 뒤로 밀어버려요. 회사에서 그래프 할 때 계속 그래프가 자꾸 증가합니다. 이 정도 했으면 안 되고 그 다음에 목표가 또 올라갑니다. 왜, 즐겨야 되니까. 이거는 누구도 말릴 수가 없어요. 끊임없이 목표 정하고 끊임없이 희망 제시해서 그걸 따라 붙이는 그 자체가 생의 즐거움 이예요.
만약에 그게 꺾일 때 인간은 살 의미가 날라 가 버립니다. 그래서 노인들이 힘든 거예요. 놀 때 일자리 구하는 게 새로운 희망을 찾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모습 이예요. 결국 이 실재가 정신분석학에서는 그냥 신이예요. 절대적인 절대자. 무한 절대자. 그럼 예수님? 예수님은 아니에요. 예수란 이름의 상징이겠지. 예수는 없어요.
이게 바로 인간의 주체라는 것은 결국은 향락이, 인간의 즐거움이 인간의 주체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인간은 그때, 그때 주체가 같다. 다르다? 달라진다. 오후 3시의 나와 오후 4시의 나와 오후 4시 때 조마조마한 나와 오후 9시 찾았을 때 나와 다 달라요. 그렇게 주체가 다른 것에서 성경을 본다는 것은 이건 정말 내가 나를 해석한다는 것은 이건 말도 안 되는 엉터리 해석이죠.
그래서 주께서 어떻게 하시느냐, 우리를 죄인 만드는 식으로 해석을 시작합니다. 틈!! 이거 중요하니까 오늘 강의 제목을 ‘틈’이라고 해야겠네요. 죄인과 의인 사이의 틈에서 누가 나온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오는 거예요. 주님이 나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삼위일체가 나오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가 나와요. 니 때문에 내가 죽었다. 십자가 사건이 나와요.
이제 뭔가 윤곽이 잡히죠? 70이레 하는 것이 뭐냐 하는 게 아니라 70이레는 나의 주체를 해석하고 분해하는 능력으로 우리에게 지시하고 찾아오죠. 그냥 덥석 물다가는 이건 지 잘난 게 되니까 그걸 무는 순간, 70이레 무는 순간 거기서 뭐가 터져 나와야 돼요? 십자가 피가 얼굴에 온 몸에 터져 나와야 되죠. ‘주여, 내가 해석한다고 깝죽 된 나 때문에 돌아가셨군요.’
그럼 모든 목사의 설교 해석은 오직 뭐로 해야 됩니까? 십자가 피! 교인들도 십자가 피 때문에 우리는 살았군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지금 살아가는 것도 십자가 피를 증거 하라고 우리를 계속 살게 하시는군요. 맘껏 향유하고, 조이너스, 즐기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모든 것을 하는 이유가 결국 십자가에 왜 죽었느냐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런 일을, 이런 사건들을 일으키게 되는 겁니다. 간단한 문제예요. 따지고 보면 너무나 간단한 문제예요. 맘껏 하고 싶은 대로 사시고 막 사시고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그런 썩어질 것들을 위해서 우리 육이, 내가 아니고 육의 욕구예요. 육은 편한 게 최고라. 즐기는 게 최고고. 술 끊었다. 5년 뒤에 술 마실 수도 있어요. 왜, 속상하니까. 술 마시면 왜 즐거운데요. 술 취하면 얼마나 기쁜데. 그건 본인이 억지를 부린다고 끊을 문제가 아닙니다. 억지로 통제될 문제가 아니에요. 통제되지 않음을 믿읍시다.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것이 우리 몸이라고 깨닫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아니고 성령이 와야 비로소 우리는 통제되지 않는 몸을 지금 평생 사랑하고 지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죠. 이게 회개인데 이 회개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회개가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죽어 천국 가게 되면 우리는 누구 자랑이 나옵니까? 우리 자랑이 나올 수가 없죠. 그렇게 당했는데. 그렇게 매일같이 당했는데. 수시로 당했는데 어디 가서 ‘나 참 잘났죠? 이뻐? 2+2=4, 귀요미’ 이게 될 수가 없죠. 그게 호명입니다.
그 다음에 217 페이지 중간에 보면 『이는 곧 세상 해석에 있어 이미 주도권이 상실되었으며』주도권이 상실되었습니다. 『실제적인 언약 실행자』이게 뭐냐 하면 이겁니다. 여러분이 이제는 아시는 것 같아서 기쁜데요. 기쁘기 때문에 다 내용을 아니까 아까 십자가라 했죠? 십자가는 구약에서 이게 공백입니다. 십자가는 신약에서 일어났잖아요. 구약은 공백 이예요. 공백이 블랙홀이라는 주변의 강렬한 힘 때문에 소용돌이가 치겠죠. 그러면 여기는 인간은 죄인으로서 들어갑니다. 죄인 아닌 자가 없어요. 아담의 자손 죄인 아닌 자가 없어요. 빨려 들어가죠. 주님께서 여기 같이 빨려 들어갑니다. 희생자로서! 결국 여기는 구약에서 뭐가 되느냐 언약이죠. 그러면 주도권 자가 누굽니까? 이 언약이 주도권 자가 되어서 하나님도 여기에 몰두하고 우리는 여기 그냥 빨려들어 가고, 구약에서 언약 하나 터질 때마다 휙휙 소용돌이치면서 빨려 들어가는 사람들이 나오죠.
목사님 예를 들면 좋겠네요. 예를 들죠. 요셉입니다. 요셉이 꿈을 꾸는데 지가 꿈을 꾸려고 애쓴 게 아니죠. 볏단이 일어나 자기한테 절을 하더라. 상당히 주제넘고 건방진 거죠. 형들도 약이 오를 만하단 말이죠. 12명 같으면 그 중에 서열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특히 아버지가 요셉만 사랑하니까 그것도 문제인데 거기다 요셉까지 꿈까지 꿔서 자랑 질을 하니까 진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죠.
그런데 요셉이 가는 곳마다 어떻게 됩니까? 주변에서 일이 잘되죠. 요셉의 주변의 일은 잘되는데 그 잘되는 효과를 요셉이 받지를 못합니다. 요셉은 점점 더 나락에 떨어져서 희망이 없어요. 애굽에서 보디발의 감옥에 동기생이 있었어요. 술 맡은 관원과 떡 맡은 관원이 함께 잡혀 있었는데 그때 거기에 같은 죄수지만 사무장으로 누가 있었느냐 하면 요셉이 있었어요. 영화 쇼생크 탈출‘이란 거와 비슷한 것 같아요. 하도 일을 잘하니까 요셉에게 모든 걸 맡긴 것 같아요. 그들이 꿈을 꾸고 난 뒤에 요셉이 해석을 해주고 난 뒤에 분명히 감옥에서 나갔거든요. 그래서 요셉이 ’아저씨, 내가 억울하게 들어와 있으니까 당신이 여기서 나가면 제발 내가 억울하다고 이야기 좀 해주세요.‘ 라고 당부를 했는데 성경에 뭐라 돼 있느냐 하면 그 사람이 잊어버렸어요. 그래서 또 요셉의 마지막 희망도 좌절됐죠. 그럼 그 다음부터 요셉은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죠.
그런데 어느 날 밤 애굽의 바로 왕이 꿈을 꾼다 이 말이죠. 바로 왕이 꿈을 꾸다 보니까 그 꿈을 해석하다 보니까 꿈 해석 잘하는 요셉을 그 신하가 ‘아차, 잊었습니다.’ 지금 보디발의 감옥에 꿈 해석 잘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것도 위기가 있어요. 이야기가 그렇게 잘 풀리는 게 아니에요. 해석 했으면 해석자 불러서 요셉이 했다 말이죠. 요셉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임금님, 제가 꿈 해석 다 했죠. 그러니까 저를 풀어달라.’고 그렇게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안 했어요. ‘임금님, 그렇다면 7년 대 흉년 다음에 대 가뭄인데 행정적으로 잘 처리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요셉이 이야기를 했어요. 임금님이 ‘니 말이 맞다.’ 요셉이 ‘그럼 그런 사람들을 천거 하세요.’ 하고 자기는 빠졌어요. 다시 갔다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니가 해볼래?’ 한 거예요. ‘니가 해볼래’가 요셉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예요. 그런데 요셉은 아직까지 내용을 몰라요. ‘내가 해볼래’ 함으로서 요셉은 감옥소에서 회복된 것만 알았잖아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요셉이 뭘 아느냐 하면 7년 흉년과 7년 가뭄이 애굽을 살리기 위함이 아니고 과거의 기원, 용어가 어려울 수밖에 없어요. 기원, 다른 말로 하면 근원. 처음에 야곱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줬죠. 맞죠. 야곱에게 은혜를 준 효과가 뭐냐 하면 요셉이 꿈을 꿨잖아요. 그럼 요셉의 꿈과 뭐가 관련돼 있다? 야곱에게 떨어진 언약과 관련 있죠.
아까 언약하니까 또 잊어버렸으니까 다시 합시다. 언약은 공백이고 위에는 의인 떨어지고 밑에는 죄가 올라오고, 하나님이 이거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했죠. 요 언약이 신약에 가면 새 언약, 십자가지만 구약에서는 빈 공백, 누구든 들어갔다 빠져 나가야 돼요. 아브라함이든 이삭이든 야곱이든 빠져나가야 돼요. 이 자리는 예수님 자리지 인간이 들어갈 자리가 아닙니다. 다만 빨려 들어간 사람은 그냥 장차 올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냥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면 돼요. 제가 요 이야기를 요셉의 예를 듭니다.
요셉이 꿈을 왜 꿨느냐 하는 문제가 비로소 근원으로 돌아가니까 소급해서 알게 된 거예요. 요셉이 꿈을 꾼 것은 야곱의 언약을 위해서 한 겁니다. 그런데 어린 요셉은 그걸 몰랐어요. 시편 105편에 나옵니다. 요셉이 갇히게 된 것은 말씀이 응하게 함이라고 나중에 후대에서는 그렇게 해석하지만 정작 요셉 본인을 그걸 모른다니까요. 요셉을 ‘나는 억울합니다.’ 이 소리밖에 안 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요셉이 창세기 42장에서 이야기합니다. ‘형이여, 나를 보낸 것은 형이 아니고 형이 배신하고 나를 고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나를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나를 먼저 보내었습니다.’라는 고백을 요셉이 먼저 알게 돼요.
바로에게 꾸어진 7년 대 흉년, 7년 대 가뭄이 요셉을 그게 애굽의 재정상태 때문에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이 애굽의 나라는 아무것도 아니고 진짜 언약을 이룰 이스라엘 나라의 야곱 언약이 장차 이스라엘 나라에 어떻게 구성되는가 그 핵심 부품을 장착하기 위해서 배신 받은 자가 배신한 자를 도로 그 죄까지 감당하고 구원해 낸다는 이 언약의 원리! 십자가의 원리! 요셉은 예수님처럼 당했는데 그것이 요셉의 모습이 장차 오실 예수의 모습인 것을 그리스도 오기 전에 이미 1600년 전에 그것을 예견한 겁니다. 해석을 그렇게 해야 돼요. 요셉도 몰랐어요. 지금 우리에게 신상에 일이 왜 일어납니까?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주여, 괴롭습니다.’ 우리는 지 괴로운 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지 신상의 어려움이 풀리는 것만 생각하고 빨리 벗어나고 빨리 부자 되는 것만 생각한다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썩어질 것을 거두고 반대로 뒤집어서 예수님이 이미 다 구원 했다는 사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십자가 피 밖에 없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신상에, 이런 신상 털기가 일어나요. 이런 신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꼬라지는 이래도 구원받았다는 이야기를 하라고. 꼬라지는 이래도 이건희 못지않게 우리는 구원 받았다고. 요셉 꼬라지가 국무총리 되고 안 되고 관계없어요. 그 고생한 거 생각하면 국무총리도 서러워요. 병주고 약주고.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얼 증거 하느냐? 우리 안에 누가 살아 계신가, 그게 중요한 겁니다. 그걸 증거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이 언약을 한 거예요.
그래서 여기 70이레 하면서 217 페이지 보게 되면 그 주도권이 이미 언약에 왔잖아요. 그럼 주도권이 언약에 왔다. 요 시점에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이게 발전하면 뭡니까? 라고 저보고 물으신다면 지금까지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노아, 이렇게 개인 아닙니까? 그 다음에는 국가가 돼요. 여기서 논문이 국가로 뜁니다. 70이레 나오기 전에 이게 국가로 뛰어 버려요. 이 논문이 성경 전체를 이야기한 건 아니니까 분량이 차야 되니까 아브라함, 이삭, 노아, 이 이야기에서 갑자기 국가로 나가요. 전에는 아브라함, 전에는 노아, 개인 요셉, 개인이 뭔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앞으로 어떻게 된다? 국가가 되는 거예요.
그 국가가 되면서 국가를 하나로 모으는 그 지점이 뭐냐 하면 그게 지금부터 공부할 ‘성전’입니다. 슬슬 성경 전체가 풀리죠? 개인, 개인에서 성전이 언제 나타난다? 처음부터 성전 없어요. 그냥 날을 세웠지 성전 아닙니다. 개인이다가 성전이 언제 등장한다고요? 국가 개념이 등장하면서 드디어 제사법이 모세가 시내 산에서 이렇게 제사 드리고 이렇게 유월절 드리고, 맥추절 드리고 수장절 드리라는 거죠. 이거는 개인이다? 아니 집단이다.
왜 집단인가? 구원받을 사람, 너, 너, 너, 구원받으라 하면 되지, 왜 갑자기 개인에서 집단이 왜 나오는 겁니까? 그걸 70이레 논문 서론에 어려운 이야긴데 이렇게 써놨습니다. 장차 올 짐승의 모습이 분명히 숨어있는 것은 짐승은 개인이거든요. 용, 옛 뱀, 개인인데, 인간들의 상징, 인간의 현실, 다른 말로 상징 계. 눈에 보이는 거, 눈과 귀로 들은 것만의 집합, 들리는 소리 이런 건 다 떼어버리고 보이는 언어도 이런 건 다 버려버리고 다만 우리끼리 눈으로 보고 듣는, 육을 가진 인간끼리 다 납득이 되는 끼리 모이는 그걸 상징 계, 아시겠죠? 다른 말로 하면 현실! 현실에 올 때는 이것이 짐승이 국가의 모습으로 설치는 겁니다. 누구든지 도장 맞지 못한 자는 매매를 못하게 한다. 그 이름은 뭐라? 666이라.
‘요한계시록에서 숫자가 무엇을 의미합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요한계시록의 숫자는 평소에 인간이 숫자를 다루고 있다는 걸 감안한 조치입니다. 144.000은 144.001과는 다르죠? 666은 667과 다르죠? 이게 달라야 포카를 치든지 화투를 치면, 구땡하고 장땡하고 달라야 따먹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666, 777, 144.000, 숫자로 짜여 진 상징 질서를 이미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사용하면서 주께서는 그들의 숫자의 해석으로서 도저히 해석이 안 되게 막는 역할이 바로 숫자예요. 왜 그렇게 막아야 되느냐, 그렇게 막아야 누구든지 자력으로 십자가를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만들어요. 십자가 지신 예수를 믿지 못해야 피가 올게 아니에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 십자가 피를 믿어버리면 그 사람한테는 예수님의 피가 필요 없어요. 그냥 예수 믿으면 되잖아요. 예수의 피를 믿지 않고 구원받는 법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피가 유효하려면 모든 인간도 자력으로 예수님 믿는다? 못 믿는다? 믿지 못하게 돼야 돼요.
그걸 믿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상징 세계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게 자연적으로 나오죠. 갇혀 있는 세계에서 끄집어내는 방법은 그들이 있던 그 자리를 그대로 고수하면서 그들 힘으로 못 온다는 것을 분명히 해줘야 돼요. 생명나무 가는 길은 선악과 따먹은 자가 못 오게 한다는 걸 그 취지를 살려야 돼요. 그걸 안 살려 줘버리면 주님께서 이랬다. 저랬다 돼 버려요. ‘아이고, 내가 과거에 너희들 생명나무 못 따먹게 만들었어. 아이고, 내가 미안하다. 미안하다. 내가 왜 그때 그런 발언을 했나. 취소, 취소. 철회, 철회. 다시, 무효, 무효, 내가 구원해 줄게.’ 이게 오늘날 한국교회 가르침 아닙니까? 옛날에는 했지만 그때는 화내려고 일부러 쾍! 했지만 지금은 사랑의 하나님이라서 터뜨려서 주님이 생명이라 너희에게 맘대로 주신다는 거예요. 갑자기 주님의 취지가 바뀌었어요. 주님의 취지는 바뀌지 않습니다.
아까 이야기한 요한복음 5장처럼 오직 모든 권한을 예수님께 일임한 것은 어떤 인간도 예수 권한을 알리라. 어떤 인간도 예수가 될 수 없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누구를 안 믿고? 나를 안 믿고. 나를 믿는 놈 죽습니다. 저주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 믿는 걸 저주 받는 걸 아는 사람만이 예수 믿는 사람 이예요. 참 말도 어려워요. 그냥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러면 쉬울 텐데, 그건 상징 계 속한 것이기 때문에 흉내 낼 수 있어요. 상징 계가 이 땅에 거쳐서 갔던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건 뭐냐 하면 ‘내가 아니요, 자기 목숨을 사랑한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그걸 집어넣는 이유는 주님께서 그런 식으로 그런 것을 경과했기 때문에 그걸 그대로 우리한테 올 때도 그걸 그대로 되풀이 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아니요.’라는 말을 반드시 해야 돼요. ‘나는 이미 죽었고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 나는 이미 죽었고, 를 여기다 반드시 집어넣는 이유가 우리가 조작해 내는 존재기 때문에 그래요. 뭐든지 흉내 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기존 교단이나 교회는 이게 안 돼요. 신천지고 구천지는 이게 안 된다 이 말이죠. 그저 한 수 배워서 흉내나 내고 구원받으려고 한다 이 말이죠.
제가 분명히 이야기하면 ‘그럼 이 많은 사람들 어떻게 하겠느냐’ 이렇게 나올 거예요. 쓰레기 많이 모아놓았다고 그게 신제품 됩니까? 여러분, 쓰레기는 모아놓으면 쓰레기예요. 신제품 안 나옵니다. 쓰레기 모아놓으면 신제품이 펑! 하고 나온다 안합니까? 그냥 쓰레기 더미에 불과한 거예요. 같은 쓰레기이기 때문에 자기가 쓰레기인 줄 모를 뿐이지.
예수님만 쓰레기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만 믿습니다. 쓰레기인 내가 예수 믿어서 우리는 천국 가는 거예요. 쓰레기 같은 강도, 쓰레기 같은 세리,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부러 세리, 강도, 창녀 이야기한 것은 ‘너희들도 보기에 쓰레기지? 내가 천당 가게 한다.’
어쨌든 간에 주님께서 이 땅에 왔다는 게 중요해요. 안 왔으면 구원 없습니다. 오셔서 분명히 사흘 만에 부활했어요. 부활해서 또 찾아왔어요. 성령을 통해서 또 찾아왔을 때, 그때 예수님 누가 죽였는가, 국가의 단위로, 개인이 죽인 게 아니고, 본디오 빌라도가 죽인 게 아니고, 안디바란 제사장이 죽인 게 아니고, 국가가 죽여요. 요한계시록에 나오죠. 국가,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짐승, 다니엘에서는 짐승이 바벨론, 그 다음 짐승은 메대 바사, 그 다음은 헬리 마케도니아. 헬라라 하는 것은 국가 이름이 아니고 헬라문명을 이야기해요. 마케도니아 국가예요. 그리스 북쪽이 마케도니아, 밑에는 아가야라 하거든요. 실제로 마케도니아가 그리스 북쪽에 있어요. 나라는 요만한데 전부 다 서로, 서로 지 땅이라고 지금도 싸우고 있어요. 크로아티아, 나라가 많아서 너무 복잡해요. 그 다음에 헬라 마케도니아 다음에 로마, 이 짐승을 무슨 짐승? 네 짐승, 네 짐승이 끝 이예요.
우리 다니엘에서 했잖아요. 마지막으로 로마는 특징이 뭐냐 하면 7머리, 10뿔, 7머리 10뿔이 뭔 뜻이라 했습니까? 자체적으로 아무리 경쟁해도 덩어리는 무슨 덩어리다? 로마다. 네 번째 짐승의 테두리를 벗어난다? 못 벗어난다? 못 벗어난다.
그럼 짐승의 역할은 뭐냐? 짐승의 역할은 바로 예수님을 어린양 되게 하는 역할입니다.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요거 아까 두 번째 동영상 할 때 했죠? ‘진노의 얼음장’ 할 때 했죠. 국가라는 이름으로 예수님께 대들 때 아까 했잖아요. 매매를 못하게 한다. 그만큼 국가력이죠.
그러면 국가는 어느 국가? 북한? 중국? 한국? 어느 국가? 이 세상은 어느 국가가 아니고 전부 다 로마라니까요. 로마! 예수님은 어느 나라에 죽었어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어느 나라에 죽었어요? 네 번째 죽었어요. 네 번째 죽은 짐승을 세상 끝까지 밀어붙임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주님께서 십자가 가지고 추궁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 겁니다. ‘니가 나 죽였잖아.’ 그러니까 그 뒤에 나오는 국가는 전부 다 로마 국가의 같은 속성을 지닌 거예요. 그 속성이 뭐냐 하면 짐승의 속성! 뭐냐 그리스도 복음을 훼방하는. 훼방한다는 말은 그게 음녀거든요.
음란의 포도주가 뭐냐 음란이라 하는 것은 만국의 음란의 포도주라고 요한계시록에 있다고요. 이게 뭐냐 하면 아름다움이 뭐로 바뀌었다는 거죠? 추함으로 바뀌었다는 거죠. 그러면 해를 입은 여자는 약한 것이 해를 입었으니까 약한 것이 묵시에서는 강하다. 두 증인이 순교 당한 장소가 십자가, 또는 소돔과 애굽이라 돼 있죠. 질문한 내용이 그거에요.
질문한 것이 예수님 십자가가 가지고 있는 속성 있잖아요. 그 속성을 이 상징적인 세계에 나타났을 때는 사람들한테 얼마나 무시당하느냐, 그 이야기라 말이죠. 그런데 그 무시 안 당하려고 사람 끌어 모아 보세요. 그게 악마 아닙니까? 주님은 소외되고 약하고 무시당하고, 그런데 종교란 이름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국가적인 형태를 갖춘다면, 그럼 적그리스도가 뭐예요? 짐승이 딴 게 아니고 뭐가 짐승입니까? 예수의 십자가 지신 그 속성과 그 취지와 대비가 되고 그걸 모독할 때, 그것이 이 땅에 나타난 가짜들입니다. 적그리스도! 마치 이 땅의 짐승, 양의 모습을 한 땅의 짐승, 결국은 요한계시록은 십자가를 내밀게 되면 해석은 안 풀리는 게 아니고, 전부 다 해석은 다 풀린 겁니다.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그 주체가 마귀적인 사고방식으로 무너뜨려요. 우리는 그걸 물을 주체가 없어요. 왜 그걸 묻는다 했죠? 이거 알면 혹시 천국 보내줄까 해서. 내가 천국 갈 사람이냐고 묻지도 않고 ‘무조건 나는 천국 가야 돼.’라는 사고방식으로 들이대다가는 어디 들어간다? 십자가 앞에 당하는 그런 마지막 넷 째 짐승의 시절에 이미 놓여있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해석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참 우리 자신의 욕구와 육의 욕구를 무슨 수로 이깁니까? 주께서 그런 육을 주시면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은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인 것을 깨우쳐서 십자가 죽었던 이유를 증거 하라고 하신 뜻인 줄 아오니, 범사에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이렇게 되어 진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희생으로 공로로 주어진 혜택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