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족하는 유혹
2020년 10월 4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4:10-12
(4: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사도의 발언은 상당히 위험스럽게 여겨질 겁니다. 어지럼증이 들 정도입니다. 자기 생을 자포자기했다는 느낌처럼 받아들여집니다. 모험을 즐기려는 사람 외에는 기피하고 싶을 지경입니다. 인생은 장난이 아닙니다. 정신 차리고 침착하게 앞 뒤 형편을 철두철미하게 살펴도 온갖 변수가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사도에 의하면 이런 생각은 ‘일체 비결’이 빠진 모습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신 비결이 빠지면 불신자들의 삶과 다를 바가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의 특징은 자꾸만 ‘살다’입니다. 이랬든 저랬든 살아남으면 그만이 아닌가 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의 모습은 ‘산다’가 아니라 ‘한다’입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남았다’가 아니라 ‘나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하게 하신다’입니다. 풍부에 처하라고 시키시고 빈곤에 처하라고 주님께서 시키시니 나 사도는 시키시는 대로 ‘한다’입니다. 일체 비결을 아는 자에게만 해당 될 이야기입니다. 일체의 비결 앞에서는 ‘내가 산다’가 용납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 자체가 창세기 3장에 들어와서 이미 문제거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작동된 능력은 오직 ‘유혹’뿐이었습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나 꽃과 짐승들은 그저 물체요 사물일 뿐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능력으로 작용하지를 않습니다. 하지만 ‘따먹지 말라’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었을 때에, 아담과 하와는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유혹의 능력’만이 그 동네에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이 아담과 하와 마음에 쑥 들어왔을 때, 이제는 아담과 하와 자체가 그들에게 유혹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궁극적으로 마음을 끄는 유혹체는 본인 자신들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및 성도들에게 각가지 일을 발생시키시는 이유는, ‘내가 나를 밀어내어야 함’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세상의 모든 게임들은 타인하고 하는 게임이 아니라 실은 본인이 본인의 명예를 걸고 하는 게임들입니다. 본인이 본인을 제대로 못 지켜준 것에 대해 미안해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인에게만은 실망을 끼쳐드리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대한 사명감으로 투철해 있으니 주님에 대한 생각이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인간들이 타인에게 말을 건네는 것도 실은 자기 자신에게 만족시켜드리기 위해 타인을 이용하기 위한 수법입니다. 나에게 충성하기 위해 뭐라도 해보는 겁니다. 그러나 말씀은 이러한 말의 세계를 노출시킵니다. 즉 말씀의 세계에서 볼 때, 인간의 세계는 ‘있음’의 세계입니다. ‘있음’이 ‘있음’을 우상시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에 보면 사형제도가 있습니다. 율법대로 살지 아니하면 죽여버립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 나무하면 죽이고, 부모를 저주하면 죽이고, 고의로 사람 죽이면 죽여버리고 부모의 말을 안듣는 자녀는 동네사람에게 내어주어서 그들로 인하여 죽이게 하라고 하십니다. (신 21:18)
‘있음’보다 더 우선되는 ‘있음’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 곧 ‘말씀’의 있음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즉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나의 있음’에 너무 투철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아예 없는 것으로 혹은 없이 살아도 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빈 무덤’을 남겼습니다. 무덤이란 원래 죽은 당사자가 있어야 하는데 ‘없음’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모든 이들은 이미 세상 안에 산다는 것 자체가 ‘무덤 안에서’ 살고 있는 겁니다. 죽은 겁니다. 자크 손잡이를 빼고자 한다면 레일의 끝에 가서 빼는 것처럼, 인간의 정체는 그가 본인의 인생을 다 살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없는 존재’로 이 땅에 잠시 나타나 있을 뿐입니다.
즉 본인 안에 죽음이 주인공으로 자리잡고 있는 겁니다. 이 ‘없음’을 감추기 위해 사람들은 말을 건넵니다. 예를 들면, 백설공주 동화에서 계모는 거울을 향해 말합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쁜가?” 반면에 말씀은 아예 그 거울을 깨어버립니다. 말씀이 먼저 나타나고서야 비로소 인간들은 말을 말씀에게 건넬 수가 있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우리 성도가 할 수 있는 질문은 오직 이것 뿐입니다. 답변도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행 9:5) 사람들은 자기 속에 사망이 있음을 모르고, 십자가 달려죽으시는 예수님을 동정을 하며 울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 우는 자들을 향하여 도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 딸들을 위하여 울어라”(눅 23:27-28) 사람들에게 동정하고 사람들에 대해서 미안하는 것은 이미 자기 자신을 유일한 유혹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모습니다. 마태복음 14:28-30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대담한 제안을 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베드로는 자신이 제대로 예수님을 믿는지 시험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과감한 제안을 할 정도로 자신은 예수님의 능력을 신뢰하고 있음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싶었습니다. 이것조차 자신에 대한 유혹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얼마 못가서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천국 자체가 자신에 대해 여전히 유혹을 가진 자들은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아무 것도 부러운 것 없되 자기 자신마저 유혹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의 삶’이 아니라 ‘주님의 행하심’만이 본인에게 남겨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일체 비결이 나옵니다. 그것은 즉 ‘군말없이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토달지 않는 겁니다. 비록 굶어 죽을 정도로 가난하다고 할지라도 지금 ‘내가 무엇을 할 것이냐’만 생각하고 그 가치에 대해서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믿음, 소망, 사랑마저 나를 향한 것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3강-빌 4장 10-12절(자족하는 유혹)20010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4장 10-12절입니다. 신약성경 321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4:10-12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사도의 말을 들으면 어지럼증이 생깁니다. 지금 모험인지 상당히 위험한 발언을 하고 있어요. 궁핍해도 괜찮고 가끔 풍부해도 그것 신경 쓸 필요 없이 그런데 구애받지 않고 인생을 살아간다.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방식하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이러한 사고방식으로부터 사실은 도피하고 그 근처에 가지 않으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풍부하게 가져야 사는 즐거움과 재미가 있다. 이것이 우리의 평소에 사는 태도인데 사도바울은 우리가 안심 놓고 살아가는 방법을 의도적으로 기피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쯤해서 사도바울이 헤어질 사람인지 계속 같이 마음을 나누고 사도바울의 말을 계속 들어야 될 사람인지 마음의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에게는 일체의 비결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부럽지? 안 부러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나는 너희들이 상황 따라서, 형편 따라서 흔들리고 좌절하고, 그런 것이 안타깝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일체의 비결을 갖고 있으니까. 이 일체의 비결을 배우고 싶지 않느냐는 거예요. 일체의 비결을 가졌으면 ‘이것은 위험하고 이것은 모험이야. 절대로 가서는 안 돼.’라고 기피하는 그 인생을, 나는 그 속을 지금 즐기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비법, 비결이 있는데 너희는 이 비법을 놓치고 그저 다른 사람 흉내 내기로 인생을 그렇게 헛되이 보내려고 하느냐? 이런 비결만 있다면 여러분, 나처럼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옛날 전유성이라는 개그맨이 책을 냈어요. 나처럼만 하면 컴퓨터도 일주일 만에 뗀다는 식으로 낸 거거든요.
사도바울이 이렇게 풍부해도 또는 궁핍해도 거기에 마음 두지 않는 비결을 자기가 갖고 있으니까 그것을 일찌감치 전했고 그것을 생활에 충분히 응용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비결이 무엇인가? 그 비결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13절에 나오는데 능력에 관한 겁니다. 이 능력이라는 것은 이 세상의 사물이 아니에요. 물체가 아닙니다. 능력이라는 것은 어떤 특정물체가 없어요.
여러분이 에덴동산을 생각해 보세요. 창세기 3장의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 여러 가지 나무, 꽃, 짐승들을 만들었어요. 그것은 다 하나의 사물이고 물체지요. 거기다가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도 물체로 만들었고 선악과나무도 물체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거기다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따먹지 말라, 라고 했을 때 물체밖에 없는데서 그런 말씀이 들어올 때 아담과 하와는 악마의 시험에 빠져서 선악과에 대해서 유혹을 느낀 거예요. 유혹거리로서 선악과가 존재하는 겁니다.
그러면 유혹이라는 것은 물체가 아니에요. 사물이 아닌데 그게 아담과 하와를 변화시키는, 다른 사람으로, 다른 존재로 바꾸는 능력으로 작용한 겁니다. 과수원에 사과나무를 꽂아놓았다 칩시다. 그 자체는 아무런 우리에게 유혹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 자체가 사물이기 때문에 어떤 능력이 아니에요.
그런데 농협에서 연락이 오기를 “좀 일찍 따시면 좋은 값 받습니다.” 할 때 그 소리가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능력이 된 거예요. 물체밖에 없는 에덴동산에 아담이 범죄하게 된 그 능력은 악마가 제시한 유혹이라는 겁니다. 악마가 아담에게 부추기기를, 따먹으라고 유혹한 순간 그 선악을 아는 지식은 유혹이 되었고 그 유혹이 아담과 하와에게 쑥 하고 들어왔을 때에 아담과 하와는 본인 자체가 본인에게 유혹거리가 되고 유혹체가 된 겁니다.
이게 옛날이야기가 아니에요. 지금 그 사태 그 사건을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하나님의 복음대로 뜻대로 움직이는 현실로 계속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있었던 그 유혹이 인간에게는 지배적인 능력이 되었고 힘이 되었다는 이 사실을 현실화시켜서 그걸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뜻을 충분히 구현해내는 밑바탕, 밑거름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집에 돈이 있다, 나는 가난하다, 궁핍하다, 혹은 부자다, 그것은 문제가 안돼요. 바로 내가 그 돈을 가졌다, 나는 가난하게 되었다, 나는 부자가 되었다, 하는 그 나 자신이 이미 나에게 유혹대상이 된 겁니다. 유혹체가 된 거예요. 그래서 일체 비결은 뭐냐 하면, 내가 나를 밀어내는 겁니다. 이게 필요해요.
세상은 타인하고 게임한다고 하지만 정확하게 말해서 나하고 나의 게임입니다. 사람의 모든 범죄와 죄라는 것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내가 나를 제대로 못 지켜줘서 나한테 미안한 거예요. 모든 범죄가 그래요. “미안하다. 나야. 내가 되어서 너를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나는 어디를 가고 싶은데 성적이 안 되어서, 내가 다른 과를 선택해서, 내가 누구한테 미안한 것이 아니고 내가 나한테 미안해.”
이것은 이미 우리 자신이 유혹거리가 되었고 그 유혹이 요구한대로 맞춰주지를 못하는 그 미안함에서 그 다음부터는 과잉이 나옵니다. 과도한 행위를 자기한테 부여하는 거예요. 남을 속이고 사기 쳐서 빼먹고 하는 그런 범죄가 어디서부터 비롯되느냐 하면, 내가 나를 지켜주려고 하다 보니 그런 범죄가 생기는 겁니다.
그런 범죄의 시작은 뭐냐? ‘말’이에요. 말하는 것, 글자 쓰고 말하는 것, 다 같은 겁니다. 사람이 말을 한다는 것은, 내가 나한테 미안해서 남의 것을 빼앗아서 내가 내 유혹에 부합되는 나로 만들기 위해서 상대방 것을 어떻게 속여서든지 간에 이용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말하기입니다.
목사의 설교부터 해서 모든 것이 뭐냐 하면, 나 자신이 초라하게 되지 않기 위해서, 나 자신이 비참하게 되지 않기 위해서, 내가 나에게 충실하기 위해서 말을 건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주변에 자기에게 주목을 해주는 사람들로 배치되기를 우리는 기대합니다.
애가 돌 지나서 어느새 일어섰다. 전에는 짚고 일어서다가 이제는 그냥 일어섰어요. 그러니까 주위 식구들이 와, 하고 박수 쳐주지요. 어쩌다 보니까 또 한 발자국 내딛었어요. 또 와, 하고 그 때 준비된 사료가 있어요. 준비된 맛있는 것 주니까 맛있는 것 먹고 또 박수를 쳐주니까 일단은 힘이 없어서 주저앉았다가 다시 힘을 내서 일어서고, 또 걸음을 내 딛으니까 와, 하는 겁니다.
애가 기분이 좋아요. 입이 쫙 벌어지고. 아빠 엄마는 동영상 찍어서 보내고. 내가 “축제로구나” 하고 답장을 했습니다만 어릴 때부터 벌써 주목받는 거예요. 맛있는 것 주지요, 박수쳐주지요, 걷는 것이 신바람 났어요. 외손자가 드디어 걸었다는 것을 이렇게 광고하는 중입니다. 인간이란 뭐냐 하면, 이렇게 벌써 행동, 행위 자체가 말하는 행위와 동일합니다.
오다가 보니까 교회 근처 카페가 있는데 뭔가 써서 붙여놨어요. “가재도구나 비품 있거든 연락주시면 인수할 용의가 있습니다.” 전화번호도 적어놓았어요. 그런 것이 바로 말하기에요. 남에게 말을 건네서 내가 나에게 충성을 다하고 싶은데 필요한 것들을 말을 통해서 상대방에게 가져오는 겁니다.
왜? 이 세상에 나보다 더 유혹거리가, 유혹체가 없기 때문에. 나는 나만 만족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인간은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보면서 “목사님,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해야 됩니까?”라고 하는데 이 본문 해석할 때 주의해야 됩니다.
11, 12절을 다시 읽어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 본문 말씀을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고 이렇게 생각해야 돼요. 뭐라고 생각하면 안 되느냐? 내가 이렇게 살련다. 산다, 로 하게 되면 해석 잘못한 겁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내가 잘 산다가 아니라, 산다, 자체가 되어버리면 어떤 핑계와 변명의 여지없이 이것은 여전히 내가 나에게 유혹거리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능력은 유혹을 이기는 능력이거든요. 유혹을 이기는 능력이 오게 되면 그 능력은 그렇게 살아라, 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내가 그렇게 하게 만든다. 네가 어려움을 처할 줄도 알게 만들고 내가 풍부함에 처할 줄도 알게 내가 만든다. 그게 에덴동산 식으로 살았던 그 시절이거든요.
그 때는 능력이 필요가 없어요. 모든 과실과 모든 좋은 것들을 그냥 먹기만 하면 되니까 구태여 능력이 필요가 없는데 에덴동산에 딱 선악과나무를 심어둔 순간 그리고 그걸 따먹는 순간 나 자신이 유혹이 되었고, 에덴동산에 널려 있는 모든 과실들과 모든 소유는 내 것이 되어야 자족하고 만족하는 수상한, 이것은 하나님이 만든 그 존재가 아닌 다른 존재로 변질되고 만 겁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계속 살고자 하는 것을 고집하고 있어요. 나는 이렇게 인간으로 살고 싶다.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으면 주께서 더 살려주려고 오신 것이 되는데 그런 것이 아니거든요. 주님께서 우리 더 살라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앞에 아들은 이렇게 산다. 이게 아들답다. 이게 아들의 나라다.” 그겁니다
아버지의 능력에 의해서 아들 된 나는 이렇게 살아간다, 입니다. 나는 이렇게 행한다, 이 말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겁니다. 예수님 수명이 몇 살이었어요? 서른 세 살이었어요. 가수 김 광석도 서른세 살에 죽었습니다. 서른 세 살이에요, 서른세 살. 일찍 죽었다고 사람들이 많이 슬퍼했지요.
누가복음 23장 27절에서 28절에 보면 예루살렘의 아주머니들이 예수님이 이른 나이에 죽는다고 막 슬피 울었어요.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그 때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해서 울지 마라.” 울어야 될 대상도 이분들이 못 찾고 있는 거예요. “아줌마들! 나를 위해서 지금 울 형편이 아닙니다. 울려면 당신을 위해서 울어야지. 당신 집안, 당신 딸들 위해서 울라.” 그 말이지요. “당신을 보고 울라고 내가 십자가지고 있는데 엉뚱한 나를 동정해서 나를 측은하게여기고 나를 보고 울어요? 그동안 내가 한 말을 전혀 못 알아듣고 있는 겁니다.”
“아이고, 우리는 버젓이 사는데 예수님은 이런 좋은 세상에 살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서 너무 안됐다. 하이고, 너무 슬프고 애절하다. 눈물밖에 안 나온다. 아이고, 그저 좋은데 가소. 이양반아!” 이러는데 예수님께서 기가 차가지고 “그 눈물 있거든 당신과 당신 집구석, 당신 집안을 위해서 울어라.” 그 말이지요. 누가 누구보고 동정하고 있는 겁니까? 사태파악이 안 되는 거예요.
본인이 유혹이 되었으면 이 유혹자체를 밀어내야 된다고요 우리는 매번 행동이 자기 자신한테 미안해서 ‘걱정하지 마. 내가 사기를 쳐서라도 밥 먹여 살릴게.’ 우리는 나한테 충성하는 겁니다. 그걸 나에 대한 사명감에 충실하다는 뜻이에요. 주님의 사명감은 손톱만큼도 없어요. 주님에 대한 사명감은 없고 내가 나한테 있는 사명으로 충실하니 주님의 사명감이 먹힐 여지가 없지요.
자기한테 충성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출애굽기나 신명기나 레위기 민수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율법을 보세요. 율법에 무슨 벌칙이 있느냐 하면 사형이 있습니다. “돌로 쳐 죽여라.” 죽여 버리는 겁니다. 율법에. 안식일에 나무하면 죽여 버리라, 부모한테 욕하는 것은 죽여 버리라, 무당 짓 하고 점치는 자 죽여 버려라, 죽여 버려라, 가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죽인다는 말, 제 2자 처벌은 있지만 제 3자 처벌……, 이 말은 참 어려운데요. 어떤 사회성을 구성할 때 처벌을 할 때 옛날에는 2자 처벌이었어요. 피해당사자가 피해를 준 사람에게 복수하는 것을 두고 두 사람 사이의 처벌이라 해서 2자처벌이에요.
그런데 국가가 발전하고 법이 생기게 되면 피해자 당사자가 처벌하는 것이 아니고 경찰이 나서서, 경찰력 동원해서 처벌하는 것을 제 3자가 개입한다 해서 그걸 3자처벌이라고 합니다. 3자 처벌. 주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죽인다는 말은 너를 없애버린다는 거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네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이 이스라엘 나라, 이스라엘 나라에 국한되는 겁니다. 율법이 주어진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법을 살리기 위해서 너는 좀 없어줘, 없어달라는 거예요. 그게 사형제도에요. 죽음제도에요. 법이 우선이지 네가 우선이 아니다. 너, 유혹대상이 되는 ‘너’가 우선이 아니고 저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네가 약속의 땅의 이스라엘 백성된 것은, 법을 법대로 살리기 위해서 너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법이라는 것은 ‘말’이잖아요. 말은 내가 남을 이용하기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말이라면 ‘말씀’은 우리를 있음이라는 유혹자체를 없애버리고 말씀이 나의 있음보다 우선해서 있음이 뭐냐, 말씀이 있음이고, 율법이 있음이고, 주님의 있음이 우선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 아니라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말씀대로 살면 내가 잘 먹고 잘산다가 아니라 말씀대로 살면 없음이 우리 있음을 공격하는 식으로 아예 유혹거리를 없애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의 일체의 비결은 뭐냐? 유혹거리가 없는 세계가 온다는 겁니다. 유혹거리 자체가.
여러분, 지옥이라고 생각해보세요. 유혹할 것이 있습니까? 자기형편, 꼬라지가 끝났는데 무슨 유혹거리가 있겠어요? 천국가도 유혹거리가 없어요. 모든 것이 예상 밖에 너무 좋으니까 무슨 유혹이 있어요?
그러니까 일체의 비결이 뭐냐 하면, 군말 없이 주는 환경대로 그냥 순순히 받아들이면 된다는 겁니다. 토 달지 말고, 토 달지 말고, 내 인생 왜 이 꼬라지냐, 토 달지 말고, 사는 것도 이유 없고, 죽는 것도 이유 없어요. 그냥 내가 죽어야 될 이유를 찾지 마세요. 내가 나한테 미안해하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일찍 병들어죽더라도 내가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세요.
제가 언제 이야기했던가, 기억이 안 나는데요. 중앙일보에 어떤 기사가 나왔느냐 하면, 아내는 판사고 남편은 의사인데 추석 일직 쇤다고 친정인 속초에 갔어요. 친정조카하고 바닷가에 놀러갔는데 그곳이 고성군 용천리에요. 여러분한테는 용천리라는데가 별 의미 없지만 거기가 제가 군대생활 한 곳입니다.
그 해변 가, 제가 보초 서던 그 동네가 용천리에요. 거기 해변에서 애들이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너울이 일어서 조카하고 하나밖에 없는 자기애가 바다로 쓸려 들어가는 것을 봤어요. 판사인 엄마가 애 잡으려고 하다가 엄마도 휩쓸려서 죽고 말았어요. 엄마 죽고, 조카 죽고, 자기 아들까지 죽었어요.
남편은 병원에서 돈 번다고 합류를 안했어요. 아내인 그 판사가 죽고 난 뒤에 대법원장이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중앙일보에 기사가나와 있어요. 그 장례식에 참석하게 된 어떤 분이 저에게 물었어요. “그 장례식에 참석하는데 그 남편이 내 후배인데 어떤 말을 해줘야 됩니까? 신앙인으로서 복음으로서”
그래서 제가 이 이야기 하나 했어요. 아내 죽고 자식 죽은 것에 대해서 절대로 미안해하지 말라고. 왜? 사람이 죽는 것도 이유가 없어요. 사는 것도 이유가 없는 겁니다. 이유가 없고 의미도 없는데 인간이 살아가면서 자꾸 억지로 내가 살 이유를 만들어내는 이것이 나한테 화근입니다. 인생이 불행하고 인생이 비극적이고 슬픈 이유는, 억지로 내가 살아갈 이유를 자기가 자꾸 만들어내서 문제에요.
이유가 없어요. 모든 것이 주는 대로 군말 없이 받으면 됩니다. 그 환경을. 내가 너 같은 남자 만나서 내 인생 조졌다고 자꾸 억지로 남편보고 잔소리할 필요 없어요. 남편도 마찬가지고요. 내 돈 벌어준 것 다 날리고 너 때문에 빚만 졌다는 식으로. 갈라서자, 이런 식으로요. 갈라서면 갈라서는 것이고 그 남 탓 할 이유가 없다 이 말입니다.
왜? 태어날 때 이유가 없고, 태어날 때 이유가 없으면요, 죽는데도 이유가 없어요. 욥이 처음에는 그걸 자기가 안다고 여겼거든요. 주신자도 하나님이고 거두시는 자도 하나님이라고 내 목숨조차 내 것이 아닙니다, 하다가 막상 나중에 아프니까 다 잊어버리고 왜 내가 아픕니까, 하는데 하나님 뜻은 뭐냐? 내가 너를 아프게 한들 그것의 이유를 찾지 말라는 겁니다.
네가 그 이유를 찾고 왜 아픕니까, 질문자체도 안 된다는 겁니다. 신앙의 일체 비결은 뭐냐? 하나님이 주신대로 그냥 곱게 받으면 그게 사는 것이다. 그게 바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일하심이다. 그 일하심을 드러내는 증거가 바로 사도바울이 일체 비결이에요.
그런데 왜 우리가 그렇게 못 삽니까? 그것은 우리가요, 안 속아 넘어가려고 하는 거예요. 내 판단과 선택을 제대로 하려고 제대로 할 때 인생 제대로 산다고. 이것은 마귀가 그렇게 가르쳤거든요. 마귀가. 사는 이유도 없고 의미도 없는데 뭘 제대로가 있어요? 무슨 제대로가 성립 됩니까? 자꾸 반듯하게 살아보려고, 반듯하게 정신 차리고 살려고. 제발 정신 차리지 마세요. 여러분!
정신 차렸다고 해가지고 이 유혹거리가 사라지는 것 아닙니다. 정신차려봐야 달랑 남는 것은 나 잘났다, 그 외에는 남는 것이 없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지옥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자아를 그동안 살아생전에 자기에게서 밀어내지 못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 지옥이에요.
누가복음 16장의 부자가 그런 사람이에요. “살아 있을 동안에 기회를 줬잖아. 네가 너를 밀어내라고. 네가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런데 밀어내기는커녕 계속 그걸 껴안고 있는 거예요. 내가 나한테 미안해가지고. ‘내가 인생 이렇게 살아서 미안하다.’
세상의 모든 학문과 과학과 철학이 어리석은 겁니다. 지혜 없는 거예요. 십자가 앞에 다 사기입니다. 악마의 사기입니다. 그중 하나가 백설공주에 나오지요. 백설공주의 그 계모가 하는 말이 뭐냐? “거울아, 거울아! 이 성안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인간이 말을 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인간의 모든 말은 자기가 자기한테 미안하니까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상대방을 이용하려고 말을 건네는 거예요.
“혹시 좋은 카페 있으면 소개해 달라.” 이 말이 뭐냐 하면 너로 인하여 내가 살겠다. 최종적으로, 최종적으로 내가 사는 게 되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이게 말하기에요. 목사의 설교도 마찬가지고. 모든 말하기는 뭐냐? 네 덕에 내가 잘 먹고 잘살자는 뜻이지요. “거울아, 거울아! 이 나라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그러면 말씀은 뭐냐? 거울을 부숴버립니다. 거울 부숴버려요. 부순 자리가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 십자가자리에요. 십자가에게 질문을 할 수가 없잖아요. 망한 자리인데 망한 분 보고 무슨 질문을 합니까? 기어이 자기가 살아남아야 되거든요. 요즘 세상, 별의별 세상 다 되었습니다. 말로 하려면 눈에 보여야 말을 하지요. 그러니까 나는 세월의 모가지를 비틀어가지고 “이 세월을 내가 주도해서 끌고 가겠습니다.”
죄는 없지만 파출소에 가서 미안합니다, 하고 캔 커피 하나 들이밀고 하는 그 일. 참, 그런 일이 천지삐까리 있는 거거든요. 천지 삐까리……, 안 웃는 것 보니 나 훈아 쇼를 안보신 모양입니다. 안보셨구나. 그런 일이 천지 삐까리라니까요. 그런 일이. “세월 모가지 비틀어서 청춘을 돌려다오, 한번 가봅시다. 내 젖 먹는 힘까지 해서 내가 함 가볼랍니더.” 노래가 뭐냐? 말이거든요
세상의 모든 것이 나로부터 와서 나로 돌아가는 어떤 영원한 불멸의 순환구조를 사람들은 원하고 있어요. 영구적인 순환구조. 아주 좋은 예가 갓바위에 있습니다. 갓바위에 가면 불자들이 쌀을 가지고 가요. 갓바위 그 암자에 쌀이 엄청나게 들어오지요. 쌀이 들어오면 와촌 쪽에 가면 파이프가 있어서 저 위에서 쌀을 중력의 법칙에 의해서 내려 보내요.
그러면 밑에서 상인들에게 그 쌀을 헐값에 줍니다. 주면 그 쌀을 갖고 있다가 와촌 쪽에서 암자에 올라가는 불자들이 미륵상에 쌀을 바치기 위해서 돈 주고 그 쌀을 사요. 그러면 위에서 파이프로 내려온 쌀을 돈 주고 사서 다시 그 쌀을 불자들이 갓바위에 올려다 바칩니다. 그러면 그 쌀이 다시 내려오는 거예요. 영구순환구조, 서클구조가 성립되는 거예요.
인생이라는 것이 자아의 순환구조 그게 전부에요. 그러니까 율법은 뭐냐? 죽여 버리거든요. 율법은 뭐냐? 너는 원래시작을 없음부터 시작해야 돼요. 없음. 유혹이 아니고. 율법자체가 네가 없음이거든요. 율법자체가 인간에게는 ‘말’이 아니고 ‘말씀’이기 때문에 위에서 주시지 않으면 이 땅에 말씀이라는 것이 없어요. 없으면 뭐 없음이지요.
오늘 본문 보면서, 교회 다니면서, 소위 신자 값 하려고 사도바울도 이렇게 살아서 천국 갔으니까 나도 내가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궁핍에 처할 줄도 알아서 이렇게 하려는 사람들, 그 사람은 이게 이 말씀을 완전히 반대로 오독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살아가는데 나를 제대로 살게 만드는 말씀이 아니에요. 우리를 없애버리는 말씀이에요.
다시 말씀드려서 산다가 아니라, 한다, 입니다. 너는 이렇게 해야 돼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주님이 주신 환경이 그러하다면 주께서 다 뜻이 있어서 주신 환경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면 되지요. 그게 가난하다 해서 나한테 미안하지 말고 또 내가 사기를 쳤는지 뭘 했는지 모르지만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 해서 가난한 사람한테 미안해하지 마세요.
성도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남에게, 타인에게 미안해하지 않는 사람이 성도의 삶이에요. “나 때문에 고생 많이 했지?”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내가 너 도와 주마.” 그런 짓 하지 마세요. 남에게 미안한 마음 요만큼도 갖지 마세요. 주께서 이렇게 만든 것 왜 누구한테 미안해 합니까? 참, 그게 어려워요.
아내 죽었지요, 딸 죽었지요, 남편이 아예 막 통곡을 한답니다. “내가 병원이 뭐라고, 돈 한 푼 벌려고……, 내가 따라갔어야 되는데, 내가 따라갔어야 너도 살리고 애도 살리고 조카도 살리고 다 살리는데, 내가 돈 보고 추석명절에 돈 벌려고 안가서……. 이제 나는 어째 사나……!” 통곡을 하는데 그 모습에 대해서 성도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제야 네 본색이 드러났구나, 너는 너밖에 모르는구나.
그 너울을, 파도를 누가 보낸 겁니까? 하나님이 보낸 겁니다. 남편 그 때 안 가게 만든 것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죽이시는 이유는 애초부터 인간은 없음이었습니다. 선악과 따먹는 순간 이미 인간은 죽은 자에요. 이미 죽은 자입니다.
제가 설교할 때 사람들 반응이 제일 이해 안 되는 대목이, 우리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사람이 납득을 못하고 있는데요. 이런 예를 들면 쉽게 될까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지퍼가 있지요. 지퍼를 손잡이를 끄집어 낼 때는 그냥 안 빠져요. 손잡이는 레일의 마지막 끝에 가서야 이게 빠진다고요.
인간이 지퍼의 손잡이라면 인간의 본질은 살아 있는 데서는 나의 본질을 내가 몰라요. 내가 죽어 없어질 때 ‘아하, 애초부터 죽어 없어질 존재가 잠시 잠간 출몰했구나.’ 잠시 출몰한 거예요. 그러면 누가 출몰케 했습니까? 주님께서 잠시 출몰하게 하신 거예요.
출몰한 이유가 뭐냐? 이유가 없지만 이유를 든다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나보다, 내 존재보다 우선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이 나보다 우선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이 나보다 우선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출몰된 거예요.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은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여러분이 다시 아시잖아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태초에 말이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있음으로 모든 생명은 만들어졌느니라. 말씀이 없으면 생명이라는 것도 하나도 없느니라.
그렇다면 말씀이 우선이고 생겨난 우리는 그 다음 차례잖아요. 왜 걱정을, 시작을, 내 걱정을 나부터 억지로 하려고 합니까? 뭐가 나보고 미안하고 남보고 왜 미안해요. 너나 나나 다 죽어가는 입장에서 미안해 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자기 안에 죽음이 있고 자기 안에 나밖에 없다는 사실, 나 있음을 지키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을 여러 경우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요. 군대 가면 유격훈련을 받습니다. 유격훈련장에 가기 전에 미리 앉아서 이론교육 받을 때 군인들이 다 졸면서도 ‘그거 뭐 다 아는 이야기 뭘 저런 것을 가르치는지 모르겠다. 그냥 현장에 가서 뛰어내리라고 하면 뛰어내리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막상 현장에 갑니다. “자, 뛰어내려!” 하니까 안 됩니다. “저는 4대독자입니다.” 이런 식으로 거부하는 거예요.
뭐냐 하면, 실제로 우리 현실은 없음이에요. 없음이 있음보다 더 강하다, 그 말이지요. 살려고 하다 보니까 죽음에 쫓기는 인생을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나 내 안에 없음이 있는 줄은 몰랐지요. 내 안에 죽음이 있는지는 몰랐지요. 나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내 안에 있는 진짜 주인공은 죽음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몰랐던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와서 인간이 가는 길대로 죽으시고 그리고 부활하실 때 그 무덤이 빈 무덤이 되었거든요. 예수님께서 빈 무덤을 남겨야 될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빈 무덤이 되어서 이 땅에서 없어짐으로 모든 세상 사람들, 전부다 이미 무덤 안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빈 무덤을 남긴 겁니다.
이 땅 자체가 무덤이에요. 어떤 인간도 죽음이라는 무덤에서 못 벗어납니다. 이게 형편입니다. 이게 우리의 환경이에요. 이게 일체의 비결을 아는 사람의 넉넉함입니다. 집안에 어떤 사람은 지금 새 아파트 샀다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새 아파트 분양받아서 이제 깨끗한 새집에서 꿈에 그리던 새 아파트에서 산다.
새 아파트에서 산다. 이게 ‘산다’가 되거든요. 내가 나한테 하는 말은, 그동안 새 아파트 못살아서 내가 나한테 되게 미안한 거예요. 그런데 복음도 받아들이고, 몇 달 만에 교회도 나오고, 이래서 복음을 알아들으니까 주께서 새 아파트 주는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만 그것은 그저 내가 하는 말이고, 나한테 내가 위로하는 말이고, 주의 하는 말씀은 그 아파트 부숴버립니다. 뜯어버립니다. 내가 껍데기로 있는 나 있음을 뜯어버리면 내 안에 뭐냐? 죽음이 내 자리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을 쉽게 하려면 궁핍이라는 말을 가난하다, 어렵게 산다, 이렇게 보지 마시고 그냥 죽었다고 보세요. 궁핍했다. 개코나 먹을 것이 있어야 살지. 그러니까 궁핍하다는 말은 가난한 정도가 아니고, 먹고 살려 해도 살 수가 없는 상태, 그런 상태가 우리에게 맞아요. 내가 가난하게 되고 굶어죽을 입장에 되었을 때 그제야 우리는 나를 놔버립니다.
‘그동안 참 산다고 수고했다. 이 험한 세상에서. 자 때가 되었다. 가자. 그래, 이제 먹을 것 다 떨어졌지?’ 그 때 만약에 사도바울 같으면 ‘주여, 그동안 살아온 것도 감사합니다.’ 이게 일체의 비결이에요. 왜? 죽음이 죽음답게 그대로 말이 아니라 말씀으로 뜯어주는 환경을 줬으니까 그걸 군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주어진 환경을 어쩌라고요. 코로나바이러스, 뭐 어쩌라고! 마스크 쓴다고 안 걸립니까? 좀 더 오래 산다고 해서 별로 좋은 것 없어요. 어떤 사람이 인테리어 작업하다가 선반에다 휴대폰이 거슬리니까 주머니에서 빼서 그 위에 두고 작업에 몰두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휴대폰을 절도해서 가져갔어요. 그런데 그 인테리어 하는 사람은 휴대폰 몇 십만 원이 아까운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사랑하는 딸의 사진이 들어 있었던 겁니다. 그것 보는 낙으로 사는데 딸 사진을 못 보게 되어서 그것 때문에 경찰에 신고했지요.
그 도둑이 나이가 96세입니다. 구십 여섯이에요. 보니까 갖고 싶었던 모양이지요. 정신도 오락가락했겠지요. 그 사람이 구십 여섯까지 살아야 될 이유가 생겼습니다. 저걸 훔치면 내가 자족하지 싶어서. 내가 나에게 덜 미안하고 싶어서. 그래서 경찰에서 그 사진을 복구시켜 놓았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산다는 것은 주님의 오심과 어떤 점에서 대충돌을 일으키는가? 다시 말해서 유혹이라는 것이 뭐냐? 유혹이라는 것의 이 땅의 유일한 능력이 뭐냐? 내가 나를 유혹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 그게 능력이에요. 그게 이 세상을 지배하는 어두운 능력이에요. 우리를 지옥 보내는 능력이 뭐냐? 내가 나를 포기 못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신 능력은 뭐냐? 내가 나에게 집착하는 그 능력으로부터 우리를 떼 내주는 능력, 그 능력이 바로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는 능력으로 오시는 거예요. 잘 먹고 잘 살거든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들이면 돼요. 내가 열심히 공들여서 이만큼 살았다고 하지 말고, 기도 많이 해서 이 아파트 얻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복음 알아서 주셨다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온 거예요. 의미 없는 거예요.
마태복음 14장 28절에 아주 적절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 앞뒤로 25절부터 30절까지 봅니다. “밤 사경에(새벽 4시에서 6시 사이입니다)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28절,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이것은 베드로가 자기 자신에게 유혹거리지요. 내가 수제자 티를 내겠다는 겁니다. 다른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나 이정도로 믿음 좋아. 예수님 이정도로 나는 믿습니다. 예수님이 못할 것이 없는 줄 믿습니다. 주여, 한 번 솜씨 발휘해 주소서. 솜씨 발휘해 주소서. 주님은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은 날 물위로 걷게 할 능력이 있음을 제가 감히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정도 믿음입니다. 남들 보기에 좀 티 나도록, 과시하도록 한번 기회를 주소서.”
주께서 허락했어요. 걸어오라 했습니다. 했는데 그 다음에 29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절에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물에 빠졌어요. 주께서 손을 내 밀어서 건져냈습니다. 까불지 말라, 그 말이지요.
“너 신앙 좋다는 것을 위해서 내가 온 것이 아니다. 너는 신앙이고 개코고 그 자체를 하늘나라에서 안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온 것이다.” 네 신앙이든 믿음이든 소망이든 하늘나라에서 안 받아주는 거예요. 왜? 하늘나라에서는 더 이상, 내가 더 이상 유혹거리가 안 되는 세계이기 때문에. 나를 쳐다볼 이유도 없어요.
내가 믿음 좋다는 것을 구성할 하등의 추가적인 조치가 더 필요치 않은 나라가 천국입니다. 천국이 어떤 세계인지 개뿔도 모르면서 지금 베드로가 상상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믿음 좋아야 가는 나라인줄 알고 착각하고 있어요. 예수님을 거울아, 거울아, 에 비교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한테 질문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성경에서의 구원은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에게 질문하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는 거예요. 그 때 우리는 질문할 수 있어요. “주여, 누구십니까?”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 때 질문할 수 있어요. ‘나 자신이 내가 살기 위해서 주님을 피해자로 만들어버렸구나.’
이것은 율법에 의하면 사형감입니다. 내가 나를 주의 은혜를 가지고 가리는 그런 물체가 된 거예요. 왜? 선악과를 따먹어서 쑥 들어왔으니까. 왜? 선악과는 밖에 있을 때는 유혹이지만 내 안에 들어오면 선악과를 포함한 내가 나에게 이제부터 유혹거리에요. 선악을 아는 지식이 이게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그런 지식을 갖고 있다는 나 자신이 나에게 우상이 되어버린 겁니다.
내가 복음을 알고 십자가를 안다. 이게 자기한테 우상이 된 거예요. ‘너는 모르지? 나는 십자가 안다. 너는 모르지? 나는 복음 안다.’ 이래서 구원 받겠어요? 지옥가지요. 내가 아는 것 내가 갖는 것, 그것은 우리로 도리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있음이 없음을 가리는 마귀 짓인 것을 노출시킵니다.
우리는 없는데 지금 숨을 쉬고 있고, 없는데 오늘 아침 먹었어요. 이게 뭐냐 하면, 거저 주신 거예요. 하나님이 거저 주신 거예요. 내가 필요로 할 때 먹이고 살리는 겁니다. 자식, 그동안 주께서 키웠다가 이제는 주께서 남편감 주셔서 오는 토요일에 시집가게 하시잖아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저희끼리 좋아서 결혼하는 줄 아는데 그것은 나중에 다 파토 나요.
절대로 상대를 사랑한 적이 없고 나는 나만 사랑했다고. 살아보면 알겠지 살아보면 알아요. 나는 나밖에 모른다는 것. 이것이 꼭 지퍼가 레일 끝에 가야만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까? 성령, 말씀을 통해서 이미 죽기 전에라도 일체의 비결을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 계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족한다는 것이 그 자체가 유혹인지를 이제 알았습니다. 내가 자족할 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시는 것으로 자족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주일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과 밖 (0) | 2020.11.11 |
---|---|
사랑의 인사(빌립보서 4:21-23)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fDEaIsELLXA, (0) | 2020.11.02 |
내가 없음(빌립보서 4:18-20)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FLwoNPcHXdo, (0) | 2020.10.25 |
결정된 삶(빌립보서 4:14-17)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0HNS1e2h8iE, (0) | 2020.10.20 |
작별하는 능력(빌립보서 4:13)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wj06biVhs-s, (0) | 2020.1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