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안과 밖

아빠와 함께 2020. 11. 11. 05:39

안과 밖 

2020년 11월 8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1:1-2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1: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사도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에서, 서로 알고 지내기만 하면 줄곧 좋은 관계가 유지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그동안 사도 바울과 잘 지냈던 어떤 사람과 달리 비교해볼 수가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14-15에 보면,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19-20에 봐도,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도 나옵니다. 이들과 디모데의 차이점을 사도 바울은 ‘예수 안’에서 찾습니다.

‘예수 안’이란 예수님으로 인하여 최종적으로 확정된 ‘안’과 ‘밖’입니다. 이점까지 인간들은 나름대로 ‘자기 안과 밖’을 스스로 규정했습니다. 즉 ‘여기서 여기까지나 나의 것, 저기서 저기까지는 너의 것’이라는 식으로 규정지었습니다. 자기 안에 담겨 있는 본질을 가지고 세상 살아가면서 나름대로 선택을 하고 결정하겠다는 겁니다.

심지어 예수 믿고 천국가는 것도 ‘나 안’에 있는 마음으로 결정하겠다는 식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결코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합니다. 자기 부인도 할 수가 없습니다. 천국이든 하나님 나라든 그 모든 것도 본인이 가야만 하는 나라로 여깁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세상은 다 무너져도 나만은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는 정당성은 없습니다.

이 마음씨는 악마가 심어준 마음씨입니다. 독자적으로 자신의 ‘안’을 고집하고 있는 겁니다. 알렉산더는 ‘자기 안’을 끝까지 고집하면서 계속해서 사도 바울과 관계맺으면서 사도의 말씀을 조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식입니다. 지식은 영생이 되지를 못합니다. 따로 ‘내 안’을 갖고 있는 자는 천국에서 거부합니다.

구약을 보게 되면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와 같이 ‘자기 안’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광야에서 그들은 ‘사적인 결정과 선택’ 발휘는 아무짝도 쓸데없었습니다. 만나 내림이 그들의 ‘안’ 역할을 하고 그들은 철저히 종속되어야 했습니다. 안식일에 만나 가지지 말라고 당부했건만 몇몇은 안식일에 만나 줏으려 가서 아무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만나를 주워 먹되 다음날까지 저축하지 말하고 했건만 오래 비축해둔 만나는 벌레가 일고 썩어버렸습니다. 이처럼 ‘자기 안’의 결정을 따로 고집하는 자들은 광야에 맞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처음 시작했을 때, 죽음의 사자를 맞이하러 간 것은 1년 된 어린양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집에서 양고기를 먹고 있었습니다. 심판의 천사를 마중한 것은 어린양의 피였습니다. 이 어린양의 피가 그 당시의 ‘안’이었습니다. 이 안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계시는 곳입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홍해를 가를 때나 아말렉과의 전쟁 때에는 지팡이가 ‘안’ 역할을 하였고 이스라엘 전체는 이 ‘인’에 종속되어야 했습니다.

여리고성 전쟁에서는 이스라엘의 밖이라고 할 수 있는 여리고성 안에 이스라엘 ‘안’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기생 라합’입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에는 ‘언약궤’가 이스라엘 안 역할을 하였습니다. 사무엘하 24:22에서는, 다윗이 제단을 쌓은 아라우나 타작마당이 이스라엘의 운명을 결정한 ‘안’이 됩니다. 그 제사로 전염병이 끊어졌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나라의 속성은 맨 처음 아브라함의 경우에 일어난 일의 반복이었습니다. 아브람과 아브라함 시절을 구분지어보세요. 도저히 얻지 못할 아들을 가지고서는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하나님께서 도로 바치라고 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모든 혈육조차 ‘안’이 될 수 없고 바깥이라는 겁니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출애굽기 4:24-25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할례 언약이라는 ‘안’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만약이 이스라엘이 이 할례언약의 피가 없다면 이는 여호와 하나님 밖에 거하는 자들이 되는 겁니다. 즉 혈육을 배제하고 ‘피’ 우선입니다. 혈육이 ‘안’의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레위기 15에서는 남자의 사정과 여자의 월경까지 모조리 이 약속의 땅을 더럽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육신 안의 것이 바깥으로 나온다면 도로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음을 뜻합니다.

안에 것이 나와서 바깥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것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안의 것이 땅을 더럽게 한다는 것은 곧 나오지 않더라도 인간은 이미 죽은 자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피나 짐승의 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요한복음 6:53에서는,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그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죄냐 의냐’가 중요합니다. 인간의 몸은 통오징어처럼 작은 공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통오징어를 가위로 손대어 손질하면 통오징어의 몸통은 좌우로 펼쳐진 평면이 됩니다. 즉 그 어떤 안도 밖에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기대를 거부합니다. 인간이 생각하고 있는 천국은 아에 없는 세계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천국 간다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목숨을 내놓고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했지만(요 13:37) 주님은 따라 올 수 없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위한 처소가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처소가 마련된다는 말은, 인간들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생각대로입니다. 인간들 입장에서 초과적인 공간이 따로 생기는 겁니다. 없던 공간이 새로 생기는 겁니다. 이 여분의 공간이 곧 ‘예수 안’입니다. 그곳은 인간들 입장에서 아에 없는 공간이나 예수님의 일방적 선택으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돈이나 값을 주고 살 수도 없는 영생을 참으로 얻을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의 목숨조차도 아깝지 않습니다. 복이라는 것은 내가 무엇을 더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복 앞에서는 주님의 손질에 의해 내가 제거되는 겁니다. 제거되지 아니하면 자꾸만 ‘나 본연의 것’을 고집하면서 선택하고 결정하려고 하게 됩니다.

천국은 피만 남기도 다 제거됩니다. 나를 축복하는 자는 지옥갑니다. 복 앞에서 제거당하고 손질당하는 자만이 천국백성입니다. 나를 지켜주지 않는 쪽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신 영생을 제대로 보면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는 즐거운 외침만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강-골 1장 1-2절(안과 밖)2011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1장 1-2절까지입니다.

골로새서 1:1-2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여기 사도바울이 나오고 그 다음에 형제 디모데도 나오지요. 바울과 디모데가 무척 친근한 사이, 형제라 말할 정도로 하나 된 사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도는 어떤 사도냐? 하나님의 뜻으로 된 사도에요. 사람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사도, 하나님의 뜻으로 된 사도인데 그 사도가 해야 될 일은 그리스도 예수가 하신 일, 하신 사역을 증거 하는 그것, 그렇게 될 때 이 디모데라는 사람은 놀라운 신분적인 혜택을 입은 겁니다.

이 디모데 입장에서 볼 때 바울과 디모데가 하나가 되었을 때 디모데는 어떤 입장인가? 그냥 나는 사도바울과 형제라고 할 게 아니라 비교되는 대상이 있어야 그게 분명해집니다. 디모데와 비교가 되는 인물은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나오는 인물이 있어요. 4장 14, 15절에 “구리 장색(세공업자지요)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구리세공업자 알렉산더에 대해서 디모데전서 1장 19절 20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알렉산더라는 이 사람하고 사도바울하고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잘 아는 사람인데 디모데는 이렇게 사도의 형제라고 되어 있고, 알렉산더라는 사람은 사탄으로 넘어간 사람으로 되어 있어요. 사도바울하고 모르는 사람이 아니고 잘 아는 사이인데 그렇게 되고 말았어요. 서로 갈 길이 달랐던 겁니다. 가룟유다도 예수님을 잘 알았던 사람이고 그 나머지 제자들도 예수님이 잘 아는 사람이지요. 선택했으니까.

그러나 그 마지막은 가룟유다는 지옥으로 갔고 다른 제자들은 천국으로 간 겁니다. 사도바울과 잘 안다고 해서 또는 예수님을 잘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운명이 동일하게 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바로 그 점을 유념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골로새, 지금의 터키의 서부지역이 골로새인데 거기 있는 성도라고 해놓고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 그러니까 이것은 사람의 정으로서, 인간관계에서 아는, 인간 속에서의 형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형제에게 편지한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그리스도 안’이라는 그러한 인간세계에 없는 새로운 단어가 등장합니다. 이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은 일종의 예수님의 사역이 마감되고 난 뒤에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던 여분의 공간이 ‘예수 그리스도 안’입니다. 여분의 공간이라 해도 되고 저는 가끔은 초과적이라고 합니다. 넘치는 것.

없다고 여겼는데 난데없이 생긴 그 무엇, 그 공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이에요. ‘예수 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바울이나 다른 성도들 오늘날 우리들도 디모데한테 물을 때는 디모데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렇게 물으면 안 되고요 디모데 당신은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물어야 돼요.

이런 질문은 디모데가 우리한테 똑같은 질문을 할 수 있어요. 너 누구야, 라고 묻는 것이 아니고 너 어디 안에 있어, 이렇게 묻는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이 어떻게 해서 영생을 보장하는 공간인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어떻게 영생을 보장하는가? 이것이 오늘 설교의 핵심이 되는 겁니다.

오징어 잡아서 요리할 때 손질을 해야 되잖아요. 통오징어입니다. 통오징어를 가위로 잘라요. 잘라버리면 오징어가 좌우로 퍼져버립니다. 마른 오징어 구울 때 퍼져 있는 오징어거든요. 그러면 통오징어가 되면 나름대로 어떤 ‘안’이라는 공간이 있기 마련인데 그걸 가위로 잘라버리니까 이게 ‘안’이 없고 통오징어 같으면 그 오징어 안이라면 안이고, 바깥이면 바깥 안과 밖이 있다고 생각이 되는데 가위로 잘라버리니까 평면이에요.

전부 다 바깥입니다. 안이 없어요. 우리가 구약성경을 볼 때에 구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잖아요. 사람들이 등장할 때 오해가 뭐냐 하면, 나라는 것은 내 안에 뭔가 있기 때문에 나는 어떤 결정을 할 수 있고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나는 나 나름대로 내 안쪽에 들어 있는 것이 있고 내 바깥쪽에 들어 있는 것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바운더리 친다고 하지요. 울타리 쳐버리면 ‘이것까지는 내 것이고 내 바깥에는 남의 것이다. 여기까지는 내 육체고 저 바깥은 남의 육체다.’ 이렇게 생각을, 구약의 사람들이나 오늘날 사람들이 자기 몸을 그렇게 생각해요. 안과 밖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갔을 때 나는 내 안에 따로 있고 내 바깥이 따로 있다는 것이 광야생활에 그게 무슨 소용이 있었던가요? 아무짝도 소용없었던 거예요. 왜냐하면 만나 없이는 그들은 다 죽었어요. 농사를 지을 것 같으면 내 안에 있는 힘 가지고 농사를 지어서 내가 벌어먹겠다, 되지만 광야는 농사지을 땅도 없고, 물도 없고, 양식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달리 말해서 내 결정과 내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일체 허용하지 않았던 그 시절이 광야입니다.

광야에 만나를 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 선택의 여지가 없지요. 안과 밖에 있으면 나는 선택하겠다, 또는 선택 안 하겠다, 되는데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우르르 만나 오게 되면 그것 먹어야 사니까 새벽에 나가서 줍습니다. 만나 덕분에 사는 거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안식일에는 절대로 나가지 말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참 어디도 말 안 듣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디도 가봐야 만나 없다. 출애굽기 16장 24-26절에 나오는데 안식일에는 만나가 없다, 라고 당부했지만 아무리 당부해도 꼭 나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가 보니 거기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백성은 안식 안에서만 이스라엘이지 안식 밖에서는 나는 너희를 죽은 자로 간주하는 거예요. 구약에서 어려운 점은 뭐냐? 우리 인간이 사적으로 안과 밖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구약에서는 그것이 허용되지 않고 안은 항상 내 밖에 안이 있어요. 나의 진짜 안, 나의 진짜 본질은 다른 분이꽉 쥐고 있는 거예요.

만나 없이는 못산다. 다른 말로 하면 안식일 없이는 못 산다, 에 종속되어라 그 말입니다. 네가 따로 네 선택 네 결정하지 말고. 만나를 먹을 만큼만 가져가서 먹으라 하니까 어떤 사람은 욕심이 나서 출애굽기 16장 20절에 보면 너무 많이 끌어 모아요.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그래서 벌레가 생기고 썩어버려서 먹지를 못한다는 거예요. 내일 것을 내일 아침 것은 줄 테니까 이것 많이 모아서 내일 아침까지 먹을 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당부를 했는데 꼭 말 안 듣는 사람이 있어요. 종속되기 싫은 거예요. 나는 나의 선택에 의해서 인생을 끌고 가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구약은 철저하게 종속이에요. 하나님이 애굽나라 모든 장자를 다 죽이려고 오실 때도 마찬가지에요. 모든 인간들은 그날 밤이나 오늘밤이나 내일 밤이나 똑같겠지, 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그날 밤도 잠을 자려고 했지요. 그런데 이스라엘백성에게는 하나님께서 당부했습니다. “일 년 된 수컷의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내서 문설주에 바르고 너는 잠자지 말고 그 안에서 양고기 먹어라” 당부를 했거든요.

그러면 그 결정은 외부에서 온 결정이에요. 이스라엘백성이 통오징어같은 자기 내부에서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온 결정입니다. 그래서 양고기를 먹으라는 말은 네가 죽음의 사자에게 나갈 때는 네가 뜯어먹은 양의 입장에서 나가야 된다. 네가 먹은 고기 그 양의 피로서 죽음의 사자에 마중을 나가니까 죽음의 사자가 그 집안의 장자는 그냥 안 죽이고 넘어갔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무엇이 안이 되느냐 하면, 어린양이 안이 돼요. 어린양이 안이 된다고요. 그리고 애굽에 있는 사람들은 뭐냐? 어린양의 바깥이 되는 겁니다. 이러한 출애굽기 12장, 방금 유월절을 언급했습니다만 유월절 이전에 이스라엘 자체가, 여러분이 잘 아시지만 이스라엘 자체가 피라는 것에 종속되어 있어요.

출애굽기 4장 26절에 보게 되면, 모세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만들 때 애굽에 내려갈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여 버립니다. 모세를 죽이니까 모세의 부인이 얼른 할례언약을 취해서 양피를 베어서 모세 발 앞에 던지니까 모세가 다시 회복되었어요. 그렇게 할 때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말하기를,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남편이라. 피남편이라.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이것은 뭐냐 하면, 장차 하나님께서 만들고자 하는 그 이스라엘은 할례언약, 언약이거든요, 할례율법, 할례율법 안에 철저하게 종속된 자만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할례언약을 뭐라고 하느냐? 할례언약의 남편을 피남편이라 했으니까,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피로 상대하겠다는 거예요.

피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그러한 본질이고 그 외에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어린양의 피가 바로 그것이지요. 그러고 난 뒤에 그 모세가 이스라엘을 건지는데 모세가 들고 온 그 지팡이 그 지팡이 안에 모든 이스라엘이 다 들어 있어요. 홍해를 건너갈 때도 지팡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도 지팡이를 높이 드니까 승리했고 지팡이를 낮추니까 패배했고, 물이 없을 때 반석을 치는 것도 지팡이가 했고, 모세의 지팡이 안에 모든 이스라엘이 다 종속되어 있는 거예요.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적으로 통오징어처럼 나는 내 안과 밖이 있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보면 안 된다 그 말입니다. 여기까지는 나고 여기까지는 너라고 그렇게 세상을 이해하면 안돼요. 너 나 까지 모두 다 포함하고 있는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 입장에 의하면 그것이 바깥입니다. 안에 못 들어온 거예요. 이 바깥에 있는 사고방식 가지고는 천국이라는 것은 애당초 없습니다.

천국자체가 없어요. 이 인간세계에서는 천국 가겠다는 것이 구라입니다. 거짓말이에요. 이 땅에 천국은 없어요. 주님이 손질해서 가위로 잘라내지 않은 인간에게 있어서 천국은 내 마음속에 들어 있는 내 마음이 원하는 천국이에요 내 마음이 원하는 천국은 내 안에 들어 있는 내 요구와 내 선택에 의해서 천국 가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안과 밖에 있다고 하는 이 나를 그대로 유지한 채 갈 수 있는 천국은 이것은 애당초 없는 천국입니다. 주께서 가위로 손질을 해줘야 돼요. 너는 바깥이야, 라고 분명히 언급돼야 돼요. 창세기 3장 24절에, 모든 인간은 에덴동산 바깥이에요. 너는 바깥이라는 생각을 아, 왜 우리는 그런 생각을 안 가질까요?

천국 안, 예수님 안, 그것은 우리하고 상관없는 세계입니다. 인간이 자기를 못 벗어나는 이유는 본인이 본인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선택에 대해서 자기가 자꾸 책임지려고 하는 겁니다. 그걸 알고리즘이라 하는데 알고리즘은 선택된 그 과정의 순서도를 알고리즘이라 해요. 이것 다음에 이것, 이것 다음에 이것, 이것 다음에 이것 선택하고, 이것 다음에 선택하고, 이것 다음에 이것 선택하고……, 그걸 알고리즘이라 하거든요.

컴퓨터 프로그램에 그게 다 들어가는 겁니다. 컴퓨터 프로그램에 들어가서 어떤 결과를 기대하고 자기가 거기에 선택으로 들어가서 스타트를 해서 output, 어떤 결과를 기대 하는데요. 이 알고리즘이 가만 보면 이게 우리 인생사에요. 나의 인생사입니다. ‘지금 내가 이 짓 하면 나중에 천국 가겠지.’ 이렇게 나오는 것 알고리즘이 내 선택인 거예요.

그러다 내 선택이 뭐가 잘못되면 후다닥 아주 호들갑을 떨어요. 자기위로와 자기격려가 아주 대단합니다. ‘걱정하지 마. 다시 일어날 거야.’ 여러분, 이사야 6장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 앞에서 우리 태도가 뭐냐하면,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입니다. ‘내가 바깥에 있다는 이 자체가 저주다. 바깥에 있다는 이 자체가 천국과는 별개인 지옥에 왔습니다.’ 하는 뜻이에요.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8장 10-12절에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는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바깥 어두운데,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바깥 어두운데’ 여기에 바깥이 나와요. 오늘 본문 골로새서에 보면 ‘예수 안’이 나오지요. ‘그리스도 안’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사도바울이 ‘예수 안에서 너희가 형제’라는 말은 영원한 안과 영원한 밖을 주님이 확정짓기 위해서 오셨다는 거예요. 영원한 안과 영원한 밖을 주님이 확정지었어요. 이 안과 밖을 확정짓기 위해서 구약성경에서 줄곧 하나님께서는 안과 밖을 나름대로 계속해서 반복시켜 왔었습니다.

좀 어렵게 이해되겠지만 기생라합은 여리고 안에 있는 안이에요. 이게 여리고성 자체가 이스라엘 바깥인데 그 바깥 안에 안이 들어 있어요. 기생라합은 진짜 구원받은 이스라엘의 본질이, 이스라엘 바깥에 이스라엘 본질이 들어 있는 것이 기생라합입니다. “네가 기생라합같은 사고방식 아니면 너는 이스라엘 아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에요. ‘아브람’시절 때와 ‘아브라함’ 시절이 달라요. 아브람 때에는 아브라함이 약속 바깥에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뭐냐 하면, 아들 이삭 때문에 비로소 하나님이 하시는 그 안과 밖이 이삭이 제물로서 갈라지고 확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자가 아브라함이에요. 아브라함은 백세가 되도록 자식이 없어요. 자식이 없다고 여기는 이것이 바깥 사고방식이에요.

‘나는 자식이 없어.’ 자식이 없는데 약속이 오니까 자식을 잉태치 못하는데 낳아버렸어요. 이것은 바깥에 있는 우리 인간들과 인간들 사고방식에서는,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이질적인 것을 안이라는 본질이라는 이름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겁니다. 그 와중에서 아브라함은 아브람, 육적인 본인은 바깥에 놓여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러면 창세기 12장 3절에서 아브라함,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아브라함처럼 복을 받으라는 말이 아니고 아브라함처럼 복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아브람에 관한 모든 것은 제거당하는, 제거당하는 그 자체가 복이에요.

이미 복이 있는, 복을 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을 준 사람은 바깥에 있는 것들이 어떤 것들이 어떤 것인가를 노출시켜서, 제거대상이 되어야 될 것이 어떤 것인가를 낱낱이 들춰지는 그 자체가 복이에요. 복이라는 것은 없는 것을 채우는 것이 복이 아니고 이미 주어진 것을 가리지 말고 방해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를 축복하는 자는 지옥 갑니다. 이 소리 하려고 지금껏 살아왔어요. 자기를 축복하는 자는 지옥가요. 그것은 자기를 지키는 자에요. 나는 제거대상입니다. 진짜 우리는 통오징어 같아요. 우리는 나름대로 안과 밖이 있어가지고 여기까지는 내거니까 내 것 지키고, 여기는 내 것 아니니까 나는 모르겠고, 이런 통오징어인데 그거 가위손질 당해야 돼요. 그 가위손질 당하는 그것이 복이에요.

안에 뭐 복이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직접 만나서 주님의 칼질 당하는 것이 복이라 그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동네에 마트가 있는데 마트 가서 “영생 줄 테니 한 5백 쓰시기 바랍니다.” 하면 안살 사람 없어요. 5백만 원 주고 값 주고도 못사는 영생을 5백만 원에 준다면 5백만 원 아깝겠습니까?

우리가 듣고 있는 것은 지식으로 다 돼버려요. 왜 우리는 안과 밖이 있기 때문에 우리 안에 있는 지식으로 다 들어와 버려요. 지식은 백날 해봤자 자기를 강화시키는 것밖에 안돼요. 자기를 더욱 더 강하게 만들어요. 강하게 만들면 어디로 가느냐 하면, 지옥 가는 거예요. 자기를 제거할 기회를 자꾸 놓치니까.

정말 마음 같아서는 오늘 설교제목을 어……, 어……, 이러고 싶어요. 왜? “어? 저거 어디가지?” 교회 5십년 다녀서 지식 얻고 신학 배워서 목사까지 되어가지고 온갖 것 다 알아요. 알아봤자 기도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선교하고, 개척교회 하고, 할 것은 다 하는데 하면 할수록 자기가 점점 더 강화된다니까요. 아까워서 못 버려요, 아까워서. 그동안 기도한 것, 그동안 헌금한 것, 성경공부 한 것, 이게 아까워서 못 버린다고요.

그러면 사도바울보기에 뭡니까? “알렉산더! 어디로 가?” 내가 믿는지 안 믿는지 알렉산더는 자꾸 시험한 겁니다. 중요한 것은 나니까, 내가 중요하니까 내가 가야할 곳이 천국이라는 거예요. 천국은 나를 지키는 사람은 절대로 넣어주지 않아요. 천국 가려면 나를 지켜주지 않는 곳으로 가세요. 나를 제거하는 곳으로.

돈 몇백만 원 들여서 영생 얻는다고 하면 저도 돈 냅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 이것은 헛방이거든요. 지식이 아니고 실제로 영생을 얻기 위해서 그까짓 거 돈 몇 백만 원 그게 뭐가 아까워요? 돈 주고 영생 산 셈이 되었는데. 돈 몇 푼 주고 영생 샀잖아요. 이거 수지맞는 장사잖소! 정말! 그동안 지식이었어요. 지식 지식이었다고요. 나를 지키기 위한 복음이었고 나를 지키기 십자가였습니다. 나를 위한 천국이었어요.

그래서 주님이 뭐라고 하느냐? 피 빼고 다 뺀다. 피만 남겨두고 나머지기는 다 빼버려요. 천국은! 쓰잘때기 없는 통오징어 주님께서는 피만 놔두고 다 버리기 위해서 레위기가 있습니다. 19금에 해당 안 되는 분들도 여기에 있겠지만 성경이니까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나오니까요.

레위기 15장 16절에 “설정한 자는 전신을 물로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인간이 나름대로 안과 밖이 있거든요. 하나님은 그걸 충분히 이용합니다. 옛날 노아 때 방주 안에서 나왔던 것은 절대로 방주 안에 들어가는 법이 없어요. 인간에게 나오는 것은 도로 인간에게 들어가면 안돼요.

인간의 안과 밖에 왜 천국에서 소용없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안에서 나오는 것이 도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안과 밖이 영원히 확정되고 고정이 되었어요.

레위기 15장에서 남자가 설정한다든지 여자가 월경을 하는 것은 이 땅을 더럽게 한다는 겁니다. 레위기 15장 19절에 “어떤 여인이 유출을 하되 그 유출이 피면 칠일 동안 불결하니”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밖으로 나오는 피가 더럽다. 이 땅을 더럽게 했다는 말은 네 안에 들어 있어도 더럽다는 말이에요. 사람 자체가 더럽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째 인간들은 그렇게 자기를 긍정하는지요? 백일되었다고 백일잔치, 돌 되었다고 돌잔치, 우리 만난지 백일 되었다고 또 무슨 선물 해줘야 되고. 왜 우리 자신을 그렇게 좋게만 봅니까? 진짜 여러분에게 묻고 싶어요. 이 세상은 다 망해도 나는 안 망해야 된다는 사고방식의 정당성, 그 정당성 누가 심어줬습니까? 성경 어디에 그런 것이 있어요?

이 세상 다 망해도, 다 망해도 나만은 안 망해야 되는 그 정당성을 여러분 가져와보세요. 그거 누가 심어준 거예요? 악마가 심어준 거예요. 악마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생긴 악마의 자아성이에요. 더럽다는 겁니다. 이것은 원래 만든 인간의 모습이 아니고 이것은 괴물이 뭔가 잘못된 것, 더러운 것을 집어넣었다는 거예요. 혼자 지옥가기 안되겠으니까 같이 가려고.

레위기 15장 2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몸에 유출병이 있으면 그 유출병을 인하여 부정한 자라.” 여기에 유출병 걸린 사람들이 땅을 더럽게 하지요. 그리고 레위기 15장 25절에 보면, 참 이거 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세밀하게 보시는지. “여인의 피의 유출이 그 불결기 외에 있어서 여러 날이 간다든지 그 유출이 불결기를 지나든지 하면 그 부정을 유출하는 날 동안은 무릇 그 불결한 때와 같이 부정한즉……”

이렇게 길게 나와 있어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29, 30절에 “그는 제 팔일에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자기를 위하여 취하여 회막문 앞 제사장에게로 가져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 하나는 속죄제로, 하나는 번제로 드려 유출로 부정한 여인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할찌니라.” 월경 한 번 했다고 해서 이런 유난을 떤다는 것, 이 정도로 더러워요.

레위기 12장에 보게 되면 산혈도 더럽대요. 아기 낳았다고 더럽답니다. 2-5절에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칠일 동안 부정하리니 곧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제 팔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 것이요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 삼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여자를 낳으면 그는 이 칠일 동안 부정하리니 경도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 륙일을 지나야 하리라.”

아들 낳았을 때에는 33일 동안 더럽고 딸을 낳았을 때에는 66일 동안 더럽답니다. 아들 낳아도 더럽고 딸을 낳아도 더럽고. 왜 여자는 곱빼기로 그렇게 더러우냐? 여자가 먼저 선악과 따먹었거든요. 그러니까 선악과 따먹었다는 그 사실을 주께서 잊지 않고 계속해서 역사 속에 흔적을 남겨가는 겁니다. 너희에게 너 자신을 중심으로 안과 밖은 주님께서 허락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나, 나 같은 소리 하지 마라. 나, 너, 없다는 거예요. ‘I’도 없고 ‘You’도 없고 모든 것은 ‘It’에요. ‘그것’이에요. ‘그것’ 하나의 사물이라니까요. 사물, 그냥 흙, 진흙이에요. ‘I’는 예수님만 ‘I’고 ‘You’는 예수님이 말하는 아버지가 ‘You’고요. 그 세계가 천국이고요.

이 내력에 대해서 레위기 17장에 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여기 레위기 17장 10절에 보면 “무릇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 중에 어떤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 먹는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여기 피 먹지 말라고 되어 있어요. 피 먹지 말라는 말은 인간이 한번 밖에 나왔던 것은 도로 집어넣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왜냐? 밖에 나왔다는 그 자체가 원래 더러운 것이 밖에 나왔기 때문에 더러운 것이 밖에 나왔을 때 이 땅에서는 그것을 뭐라고 땅, 땅, 땅, 규정하느냐? 그게 바로 죽음이에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거든요.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죄냐 의냐, 그것이 문제로다. 죄냐 의냐, 그것이 문제로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내 피를 마시라고 했어요. 그러나 레위기에서는 ‘짐승의 피든지 사람의 피든지 절대로 피 먹지 마라.’ 다시 돌아갈 수 있는 피 외에는 일체 먹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이 피 중심으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어린양의 피, 새로운 안이 우리 안을 대체해서 새로운 안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양 같아서 다 도망갔지만 주님께서는 채찍에 맞고 피를 흘림으로서 도망간 네 안에 있는 피는 더러워서 주께서 인정을 안 하니까 새로운 피가 마련되어야 되지요. 인간은 유교의 도덕 이런데 보면, 불교도 마찬가지고, 죄가 나오면 닦아라, 닦아라, 하는데 백날 닦아도 죄는 죄대로 나오기 마련입니다.

‘나 저 사람처럼 왜 못사느냐, 나 저 가정처럼 왜 행복하지 못하느냐, 나는 왜 저 사람처럼 건강하지 못하는가, 항상 여기서 여기까지는 나고 저기서 저기까지는 너인데, 너는 건강한데 왜 나는 이 모양 이 꼴이냐?’ 항상 나와 너, 나라는 안과 너라는 안과 비교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걸 없애버립니다. 새로운 나가 준비되어 있어요.

나중에 이스라엘 후대에 점점 가게 되면 언약궤가 안이에요. 그리고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온 이스라엘은 어디에 종속되어 있느냐?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다윗 왕이 제사를 지내니까 전염병이 그쳤어요. 이스라엘 전염병이라는 것이 마스크 쓴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마스크 쓴다고 전염병이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다윗이 대표해서, 이게 나중에 모리아산이에요, 지금 성전이 있는 그 산인데 그 모리아산에서 제사를 드리니까 전염병이 그쳤습니다.

지금 코로나 걸려도 지옥이고 안 걸려도 지옥이에요. 어떻게 사느냐, 죽느냐, 그것은 이미 이야기가 끝난 거예요. 인간은 이미 날 때부터 죽은 것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어떻게 하면 사느냐, 죽느냐, 그런 걱정을 하는 것은 우리 안에 괴물이 부추겨서 걱정하지 이미 죽은자가 왜 쓸데없이 그런 식으로 합니까?

의의 종이냐, 의를 보여줄 종이냐, 아니면 죄를 보여줄 종이냐, 이게 중요하거든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으면요. 아무리 죄를 지어도 피가 또 나오고요. 그것을 저는 피의 무한리필이라고 하는데 피가 계속 리필을 해요. 마음씨 좋은 주인이 있는 카페에 가면 커피 무한리필 해주잖아요. 네가 어디까지 커피 마시다 죽는가 보자, 하고 계속 주듯이.

피가 있으면 그 피가 계속 나온다는 말은 죄가 계속 나오는 거예요. 죄가 나온다는 것이 뭐냐 하면, 피를 방해 놓는 거예요. 피 없이 독자적으로 나만의 인생 살겠다, 하는 그것이 모조리 전부 다 죄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알고, 지식으로 알고 많이 배웠고, 40년, 50년, 60년 교회 다녀서 십자가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압니다, 하는 사람에게 제가 묻고 싶은 거예요.

뭘 묻고 싶으냐 하면, 제가 문제를 낼 테니 알아 맞춰 보세요. ‘설악산의 공룡능선과 십자가의 관계를 논하세요.’ ‘고대건축물에 관한 학술세미나와 십자가를 논하세요.’ ‘닭요리의 비법과 십자가의 연관성을 지어보시오.’ ‘원의 접선의방정식 구하기와 십자가하고 연관성을 지어보시오.’ 즉 ‘원 x²+y²=r² 일 때 점 (a, b)에서의 접선의 방정은 ax+by=r², 이거 하고 십자가와 부활하고 어떤 연관성이 있습니까?’ ‘개방형회사채투자신탁하고 십자가와의 관련성을 지어보세요.’

십자가를 그렇게 많이 알았다면서요? 복음에 대해서 안다면서요? 설악산 올라가는 것과 십자가와 관련성을 지어보세요. 관련성이 있어야 돼요. 설악산 공룡능선 단풍구경 한다고 가는 것은, 우리 몸이, 성도가 설악산 등산가는 것은 이 몸을 제거하기 위함이에요. 기발한 닭요리 비법을 개발한 것은 이 몸을 제거하기 위함이에요. 원의 접선의 방정식 구하는 것은 이 몸을 없애기 위함입니다.

펀드 가입하는 것, 사실은 다 망했지만요, 반 토막 난 것만도 다행이에요, 그 정도로 개방형 펀드에 가입한 그것은 네가 그렇게 해서 죽어라, 이 죽을 인간아, 그 뜻이에요. 그 짓하다 죽어라. 왜 세상은 도박판이니까.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도박판이에요. 오직 죽느냐 사느냐, 그것만 있어요. 이 세상은 그것 외에는 없어요.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진리에요. 이 세상에는.

왜? 내 안이 있으니까. 여러분, 이래도 주님 앞에 십자가 앞에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소리 안할 겁니까? 세상에서 공부한 것, 책에 나오는 것, 뉴스에 나오는 것, 바이든이 뭐고, 트럼프가 뭐고, 그 모든 것, 세상은 전부 다 도박꾼들이에요. 도박꾼이고 노름꾼들이고 도박판이고. 돈 놓고 돈 먹기에요. 왼손으로 물건 받고 오른손으로 현찰 주는 곳입니다. <도굴>이라는 영화의 대사에 나와요.

외상없어요. 외상은 없습니다.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자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렇게 영생 주지 않고 먼저 영생 줘요. 영생 주고 난 뒤에 슬슬 이제 내가 네 목숨 가져간다. 왜? 내가 안이니까. 이 주님의 ‘피 안’이 안이에요. 예수님의 피 밖은 전부다 밖이 되는 겁니다. “슬피 욺이 있으리라. 영원토록.” 왜? 안과 밖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미 확정 났기 때문에. 확정난 거예요. 확정, 완전히 고정화 되어버렸어요.

따라서 예수님만 천국이고 이 땅 어떤 인간도 천국 없습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천국은 다 거짓말이니까 그것은 속지 마세요. 천국 간다고 미혹되어서 돈 날리지 마시고. 천국은 없어요. 지옥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신약에 오게 되면 여분의 것이 생겨요. 이걸 일종의 담낭이라고 보는데 새로운 공간 주머니가 생겨요.

베드로보고 오지 말라고 했거든요. 베드로가 자기 목숨 바쳐서 주님한테 가겠다고 하니까 네 목숨 주고도 못사는 것이 영생이다, 오지 말라고 했어요. 영생이라는 것이 우리한테 아예 없습니다. 기대하지 마세요. 천국도 없어요. 천국은 하나님 자기나라지 우리나라가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끝났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처소가 없는데 내가 처소를 마련할 것이다. 이게 뭐냐 하면, 초과적인 것이고 여분의 것이에요. 없는데, 천국은 없습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 인간이 갈 천국은 없어요. 천국은 없는데 여분의 것이 마련됩니다. 누구 쪽에서 마련되느냐? 예수님의 행하심에 의해서 여분의 것이 생겼어요. 처소가 마련되었어요. 마련되니 뭐합니까?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는데요.

성령이 옵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은 구약 때 예언한 여분의 것, 구약 때 있었던 그 ‘안’이라는 그것을 그대로 실현 시키지요. 구약 때 여분의 것, 초과적인 것 또는 ‘안’이라 하는 것은 거기에 누구만 계셨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만 계셨던 곳이에요. 만나 안에 하나님의 이름 계시고, 지팡이 안에 하나님의 이름계시고, 언약궤 안에 하나님이름 계십니다. 언약궤 있으니까 요단강 건넜거든요.

이스라엘을 심판한 것도 주 여호와에요. 여호와께서 하신 거예요. 여호와만 계신 그 세계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개방된 겁니다. 열린 거예요. 이 여분의 것, 추가적인 담낭 주머니가 열린 거예요. 원래는 이걸 인간에게는 안주는데 예수님 본인의 선택에 의해서 주의 이름으로 그냥 주는 거예요. 주고, 그 영생부터 먼저 주고, 오른손으로 주시고 왼손으로는 우리 목숨회수하시고.

왜 목숨을 회수하느냐? 자꾸 사니까 방해되어서 그래요. 자꾸 살아가니까 호들갑을 떨어서 그래요. 몸이 아파서, 애가 공부를 못해서, 교회 부흥이 안 되고, 헌금이 안 나오고 ……, 주께서는 돈 주고 못사는 영생을 주었건만 인간들은 요새 뭐 코로나 때문에 장사가 안 됩니다, 마스크 때문에 우울증 걸리겠습니다…….

“우울증 걸리면 그냥 우울증 걸려서 죽어버려.” 죽어도 괜찮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지요. 도박판에 가서 돈 벌고 죽으나 돈 잃고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라는 거지요. 이미 영생을 얻고 난 뒤에 세상 도박판에 나가서 좀 져도 괜찮아요. 몸 아파도 괜찮아요. 상관없어요. 그거 주께서 문제 삼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5장 25-2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행했는지 나옵니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하혈 하는 여인, 12년 동안 피가 흐르는 여자가 있었어요. 그 여자의 몸에서 피가 흐르지요. 그런데 그렇게 몸에서 피가 흐르는 여자가 한두 명이 아닙니다.

그 여인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다시 말해서 죽어야 될 우리 안에 내 안을 빼버리고, 내 안을 바깥으로 내쳐버리고 그 비어있는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피의 근원으로서, 바로 생명의 근원으로서 우리에게 와버린 거예요. 그게 뭐냐? 하나님의 의가 와버린 겁니다. 우리가 죽는 것은 죄 때문에 죽거든요. 의가 왔으면 바깥에 죄는 나오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당연한 거예요.

도박판에서 나라는 통오징어하고, 오늘 제목을 통오징어로 해야겠다, 나라는 통오징어와 너라는 통오징어하고 둘이 누가 잘 먹고 잘 사는가, 섰다, 화투치고 세상 것이 전부 다 놀음이라니까요. 타이밍이거든요. 돈 놓고 돈 먹기 아닙니까. 놀음판이라는 말이지요. 운 없으면 실패하고 운 되면 돈 벌고. 사업도 그렇게 모든 것이 타이밍이거든요. 때에 딱딱 들어올 때 딴다 그 말이지요.

따건 뭐건 간에 전부다 이 세상 자체가 그게 죄악판입니다. 죄악판에서 돈 좀 잃었다고, 또는 돈 좀 땄다고, 죄악판에서 공부 좀 한다고, 장학생 되었다고, 아이고 참, 그거 어느 도박판에서 써먹으려고 장학생 돼요? 교인 좀 불었다고, 혹은 교인 좀 줄었다고. 돈 주고도 못사는 영생을 얻었건만.

그 영생 얻고 그 십자가 앞에서 “제 안은 저쪽입니다. 십자가 안은 저쪽입니다. 저는 이미 가위질해서 좌우로 벌렸습니다. 제 안 공개되었습니다. 저에게서 나올 것은 오직 죄밖에 없습니다. 내가 죄의 오야붕, 죄의 괴수입니다. 죄의 오야붕 찾으려면 저를 찾으세요. 제가 모든 죄의 최고입니다.” 왜 그런 자신감이 없습니까? 안에 뭐가 없는데! 안에 뭐가 있어야 벌벌 떨지 안에 개뿔도 없는데 왜 벌벌 떨어요! 개뿔도 없는데!

탤런트 송 재호가 어제 죽었다고 나왔잖아요. 송 재호가 82세로. 저도 그 나이로 가요. 지금 가고 있어요. 가고 있는데 송 재호 생각하면 잊을 수가 없는 것이, 처음에 나올 때 그 못돼먹은 형사역할 했거든요. 나는 그가 영원한 젊은 형사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늙어죽어요.

송 재호가 그렇게 멋있어 보였다는 것은 내 안에 송 재호가 들어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 송 재호가 늙어 죽어버렸는데? 내 안에 있는 기억들이 다 죽어나가요. 내가 부러웠던 것, 탐내는 것이 다 죽어나가요. 그렇게 제거가 돼요. 복 받은 줄 아시기 바랍니다. 나의 추억과 기억, 망상에 불과한 것, 나는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것이 복이잖아요.

언제까지 아브라함으로 살지 않고 아브람으로 살겠어요? 이삭 때문에 아브라함 된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제가 말씀드릴 것은 고린도전서 13장 7절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이유가 기뻐서 그래요. 사랑이 기뻐서.

억지가 아니고, 배워서가 아니라 친히 주님이 한 가위질이 내 뱃가죽을 찢었다는 거예요. 내 안은 전혀 ‘안’이 아니고 평면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가위질 당함, 이거 진짜 영구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어제까지 산 것만 해도 이게 봐주기였어요. 어제까지 산 것만 해도. 참, 돈 주고 못사는 영생을 주께서 실습하신다고.

여러분, 헌금은 소용없습니다. 헌금하면 생색내기 때문에 그것은 아니고 빼앗겨야 돼요. 빼앗겨야 되지, 강제조치 당해야 되지 내가 자발적으로 내는 것은 나의 선택입니다. 또, 또 통오징어가 돼요. 그건 통오징어가 헌금한 거예요. 통오징어는 소용없습니다. 주님에 의해서 가위질, 난도질당해야 돼요. 주의 말씀으로 말의 세계, 사기꾼 세계에서 말씀으로 난도질당할 때 그 자체가 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갈수록 우리의 죄가 뭐라 하는 것이 더 한없이 깊어지니 더욱 더 감사합니다. 잘난체 한다고 좋아했던 시절을 이제는 떨쳐버리고 너무나 못났고, 강도 같고, 세리 같고, 창기와 다를 바 없음을 도리어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