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인사
2020년 11월 1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4:21-23
(4:2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4:22)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4: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알고 지낸다는 것은 참 위험한 일입니다. 인간은 태생이 자신의 영향력 안에 다른 사람을 사로잡아서 자신이 부리기 쉬운 대로 부리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교회 내에서도 자신의 신앙의 연조나 도덕성이나 착함으로 상대보다 우월함을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사적인 영향력 발휘에 많이들 걸려든 자들은 타인에 대해 경계하는 마음이 싹트게 마련입니다. 함부로 타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어놓지 않을뿐더러 아예 배타시하고 싶어합니다. “왜 나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는데?” 반문하는 태도를 가지고 상대를 대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만남은 위선적인 겉치례 인사나 나눌 뿐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말합니다. ‘주 안에서’는 서로를 인사를 나누어야 합니다. 참으로 주 안에 있는 자들은 주님을 드러내는 식의 만남이 형성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사람만남은 먼저 주님과 성도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도와의 만남 이 전에 아버지와 먼저 의미있는 만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버림’입니다. 인간은 결코 자신을 버리지 않습니다. 끝까지 아끼고 붙잡고 갑니다. 비록 지옥에 가더라도 자신을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죽음’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이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죽음’에서 나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는 ‘죄사함의 능력’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죄가 있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 예를 들면, 구약 홍해바다는 두 종류의 인간을 나타냅니다. 하나는 바다를 건너가고자 하는 인간과 또 하나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곳을 건너와 버린 인간입니다.
죄란 바로 자신이 자기를 지켜내려고 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이런 자들은 홍해바다에 다 빠질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자신이 자기를 구원코자 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겁니다. 그들은 방법은 자신이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능력만 찾게 됩니다. ‘스스로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자들입니다.
본인이 본인을 지켜낸 도덕적이고 의로운 영향력으로 천국나라까지 도전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성도와 성도의 만남은 ‘예수님의, 자기 버리심’ 곧 ‘죄사함’의 능력입니다. 주님께서 성도를 죽이는 것은 죄를 죽이는 것이고 주님께서 성도를 살리는 것은 의를 살림입니다. 따라서 죄와 의에 대해서 인간은 사적으로 그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9장에서, 중풍병을 낫겠다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은 개인적인 희망을 품고 예수님을 찾아온 겁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여전히 사적인 입장을 고수합니다. 다시는 병들지 않는 자기 신체가 그리웠던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을 선언해버립니다.
이는 온 우주를 하나님과 예수님 자신과의 수립된 관계성 안에 놓이게 되는 프로그램 차원에서 일을 하신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에 대해서 영원한 형벌을 준비해놓으셨습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46) 따라서 ‘죄사함’이 없다면 마땅히 영벌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땅에 ‘죄사함’이라는 원칙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영원토록 발휘되는 이 원칙은 마치 인간 세계에서 1m라는 개념이 그 어디에도 다 들어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르셀 뒤샹이라는 프랑스 예술가는 [세 개의 표준 정지 장치]라는 작품을 남겼는데 이 작품은 1m라는 표준에다 땅을 임의로 던져 그 던져진 형태대로 나무재질로 옮겨서 표현한 작품입니다. 성도와 성도의 만남은 결코 ‘나와 너’의 만남이 아닙니다. 죄사함과 죄사함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의 영구히 고정된 작품입니다.
이런 만남에는 상대를 치하하는 상투적인 만남이 아니라 치열한 싸움이 있습니다. 곧 상대의 옛사람을 사정없이 공격하고, 상대도 또한 나의 옛사람을 사정없이 공격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옛사람’이란 자신의 도덕성과 자기 의로움을 무장하여 자신을 독자적으로 가치있는 존재자가 되려는 자아‘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만남은 참 즐거운 만남입니다. 왜냐하면 결핍과 모자람을 느끼지 않는 가운데 상호 교환하는 죄사함의 선물교환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양자 물리학에서 입자란 저항을 갖는 가운데 등장합니다. 파동이란 저항이 없는 가운데 있는 겁니다. 저항이란 움직임을 말합니다.
따라서 스스로 자신을 살려내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입자는 더욱 딴딴해집니다. 자기 안에 있는 결핍을 채우거나 스스로 뽑아낼 재간이 없습니다. 세상이 모두 아버지와 예수님의 관계로 프로그램화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곧 시간의 전과 후가 이미 완료된 상태라는 겁니다. 스스로 입자가 된다면 이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죄와 의의 관계로 형성된 흐름 안에 들어올 때만 이것을 알게 됩니다. 성도와 성도의 만남에서 우리는 상대가 어디서 왔는지를 물어야 할 겁니다. 죄사함에서 나온 파동인지 아니하면 이 하나님의 프로그램에 격렬한 저항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나만의 입자‘인지를 보여야 할 겁니다.
만약에 상호 파동이라면 다음과 같은 현상을 나타내게 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눅 1:41-42)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생각지 않고 행동하면 매사가 위험하다고 인식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우리 인간의 입에서 ‘위험’이라는 말은 합당치 않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자체가 이미 위험한 일이고 위험에 노출된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표준치’ 곧 더러운 옷을 악마가 보는 앞에서 갈아입힌 그 조치(슥 3:1-4)’가 영원히 들어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영벌과 영생의 프로그램에 전적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죄사함을 최우선적으로 내세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7강-빌 4장 21-23절(사랑의 인사)2011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4장 21-23절입니다. 신약성경 321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4:21-23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집 사람 중 몇이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찌어다.”
성도끼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사랑의 인사를 해야 된다는 겁니다. 같은 하늘에서 따로 떨어져 있어도 잊지 말아요, 하는 말도 있잖아요. 우리가 비록 모르는 사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결국은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해야 될 관계기 때문에 이 관계가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겁니다.
이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23절에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 찌어다” 이것은 “너희마음이 너희들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은혜가 너희 마음속까지 파고들어 있다. 따라서 내가 이 사도가 서로 인사하고 문안하라는 말을 하는 순간 충분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관계가 끊어질 수 있겠느냐? 끊어질 수 없는 이유가 있어요. 끊어질 수 없습니다. 21절에 보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하는데 이 말이 너무나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들리기 마련입니다. 2011년도의 미국 드라마가 있는데 <언더 더 돔>이라는 게 있어요. ‘돔(dome)밑에’ 이런 뜻입니다. 어느 마을에 갑자기 투명한 돔이 발생해 버렸어요.
외부에서 미사일을 쏘아도 돔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자체적으로 완전히 갇혀버린 거지요. 그 드라마의 줄거리를 보는데 복음에 대해서 나름대로 소설로 표현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줄거리가 상당히 심오해요. 돔 안에 있으니까 예수 안에 있는 거예요. 예수 안, 사람들은 그 안에 못 들어오고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바깥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차가 와서 들이대면 차가 거기서 스톱이 되고 충돌을 일으켜요. 그러면 그 안에서 산소도 희박하고 양식도 없다면 어떻게 할까? 희한하게도 그 돔 안에서 그게 투명한데도 불구하고 비가 내리고 양식이 자라고 햇빛이 비추고 하는데 도대체 이런 일이 왜 있는가 보니 그 안에 메시아 같은 사람이 등장했다는 말이지요.
예수 안의 새로운 현실이 기존의 인간현실 속에 새로 발생해버린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그동안 살고자 하는 모든 생존문제가 그 마을 안에 새롭게 등장한 메시아에 철저하게 종속되는 겁니다. 드라마가 그걸 이야기해요. 저도 상당히 신기했습니다. 복음이 안 먹히니까 이제는 드라마로 만들어서 그렇게 하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요.
성경에서 예수 안이라는 것,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요, 사람들은 눈에 보인다, 이 말이지요. 사람들은 사람들끼리 좋은 관계 유지하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서로 인사하라. 서로 얼굴도 못 본 사람들에게 서로 인사하라고 하는데 사실 우리가 이 땅 살아가면서 굳이 상대를 꼭 알아야 됩니까?
상대가 만약에 나에게 와서 인사하고 안녕하십니까, 하면 그 사람이 “목사님, 저 아세요?” 하면 굳이 내가 꼭 알아야 됩니까? 사람하고 사람과 엮인다는 것은 돈 문제 빼놓고는 엮이면 안돼요. 위험해요. 우선 그 사람이 나에 대해서 조사하고 탐색하는 자체가 위험하고요. 그리고 어떤 식으로 뒤에서 칼로 찌를지 모르는 이런 위험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최대한 사전조사가 되고 점검이 끝나고 난 뒤에 저 사람이 나에게 돈 된다 싶을 경우에만 약간 받아들이고 항상 내칠 준비를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게 오늘날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좀 피곤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런데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는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무조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인사하라. 사랑의 인사를 나누는 거지요.
사랑의 인사 하니까 엘가의 노래가 생각납니다. 따~ 라라 라라~, 그런 노래가 있어요. 정경화가 바이올린으로 연주한 곡인데요. 그 사랑의 인사라고 할 때는 흔히들 말하기를 서로 마음이 열렸을 경우에 사랑의 인사가 되는 겁니다. 이 사랑의 인사가 되려면 오늘 조건에서 단 하나의 조건만 있으면 돼요. ‘그리스도 예수 안’입니다. 그것이 충분하게 네 마음을 열어놔도 괜찮아, 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끼리는 충분하게 마음을 열고 모든 것을 다 말해도 상관없어. 괜찮아. 위험하지 않아.”라고 지금 사도바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사람 대 사람의 만남에서 예수 안이라는 환경 속에 들어가 버리면 그 사람이나 나나 서로가 먼저 예수님과 만났다는 조건이 활성화되는 상황 속에서 예수 안이 성립되는 거예요.
사람을 만나기 전에 먼저 예수님하고 만난 사람끼리는 그 사람에게는 어떤 만남도 위험하지 않고 괜찮다는 거예요. 먼저 예수님하고 만난 관계는. 그러면 예수님과의 만남, 그게 예수 안 인데요. 예수님과의 만남이 우리 자신에 대해서 어떤 변화를 주느냐? 이 건희 회장이 죽고 난 뒤에 그가 유명한 말을 했다는 게 나오는데 “마누라하고 자식 빼놓고 다 바꿔라” 했다는데 주님은 말합니다. “너나 바꿔라.”
너부터 바꿔 너부터. 성경에서는 죄사함을 언급하고 있어요. 죄사함이 어떤 거냐 하면, 함박눈 쏟아지는데 우산도 없이 하루 종일 들판을 어슬렁거리면서 함박눈을 옴팍 다 뒤집어쓴 상태, 그게 죄사함의 상태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진짜 죄사함을 얻어버리면 이게 어떤 지경에 빠지느냐 하면, 더 이상 모자람이나 결핍이 전혀 없는 상태, 이게 죄사함이에요.
우리가 인간 대 인간이 만나면 내게 부족한 것 저 사람 이용해서 채우려고 하거든요. 이것은 우리가 결핍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사람 대 사람의 만남, 교인 대 교인의 만남에서 서로 만나게 될 때 죄사함이 없다고 한다면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사적인 정의로움과 사적인 도덕성을 상대에게 강압하고 강요하는 영향을 제공하게 돼요.
나는 담배 안 피우는데 만나보니까 저 사람한테서 담배냄새가 난다. 그러면 이 관계는 예수 안에서의 만남이 아니라 나의 도덕성 안에서의 만남이에요. 왜냐하면 자기가 나는 담배 안 피운다, 를 상대적인 도덕적인 우위를 상대에게 강요하는 바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성경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 처음 교회 와서 성경에 뭐가 어디 있는지, 창세기가 어디 있는지, 요한계시록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냥 쓱 만나게 되면 죄사함 없이 만나게 되면 깔 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해요. ‘저 사람 성경 빌립보서도 못 찾아가지고 설교 진작 시작했는데 이제 찾고 있네.’
모든 인간의 만남은 그냥 빈 마음으로 만나는 경우가 없어요. ‘난 이정도로 도덕적이고 선하다. 너는 어느 정도로 의롭고 선하냐.’ 그걸 내놓게 돼요. 그러면 만남 자체가 하나의 배틀이 되고 마는 겁니다. 자존심과 체면과 자기 잘남의 경쟁이 되어버려요.
인사치레로 안녕하세요, 해놓고는 돌아서는 뒷담화하고 욕하고 그러지요. 잘난 체하기는, 이런 식으로 된다는 말이지요. 자기가 평생 동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조심스럽게 나쁜 짓 하지 않고 오직 선한 일, 선한 일, 착함을 쌓고, 쌓고, 쌓아온 나의 의로움, 이것은 내가 구축한 거예요. 함박눈을 흠뻑 뒤집어 쓴 것이 아니라 그 말입니다.
내 것만 남기고 사적으로 내가 가치를 높일 것만 계속해서 저축하듯이 쌓아온 거예요. 모든 인간의 만남에서. 그냥 무심코 이야기하다가 “나는, 우리 집안에서는 이런 것은 용납 못해요.” 이런 식으로. “목사님은 개고기 드십니까?” “못 먹습니다.” “왜 목사가 되어서 개고기도 못 먹나? 우리 노회 목사들은 다 먹는데. 왜 개고기를 못 먹는가? 아이고 까다로워라. 입맛도 까다로워.” 안 먹히는데 어쩝니까, 안 먹히는데. 토하고 싶은데 어쩌라고!
인간의 만남이 결국은 겉치레고 전부 형식뿐이에요. 그래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계속 만남을 유지하는 것은 돈이 생긴다는 어떤 가능성 보고 만날 뿐이지 더 빼낼 것 없다 싶으면 그냥 돌아서게 되어 있어요. 모든 인간의 만남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죄사함의 만남이라는 것은, 이것은 먼저 예수님과 그 개인이 만남의 과정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예수님 앞에서 발각당하는 거예요.
뭐가 죄인이냐 하면, 그동안 나의 의로움으로 구축해서 그것이 나답다고 유지했던 그 자체가 죄가 된다는 사실이에요. 내가 바르게 살고자 애쓰는 이것이 죄고, 내가 바르게 살아서 과거를 지켜낸다는 이것이 바로 죄가 된다는 것을 주님 만났을 때 발견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내가 보기에 훌륭하고 장하기 때문에 결코 나는 나를 버릴 수가 없어요. 포기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보여준 것은 뭐냐?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포기한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버려버린 거예요. 그게 십자가거든요. 십자가는 뭐냐?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죽여 버린 사건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 하나님을 죽여 버린 사건이 십자가사건이에요. 버려버린 거예요. 나는 버릴 수 없는데, 너무 아까워서 못 버리는데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자기가 버려버린 거예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는 것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닙니다. 죽은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이에요. 죽은 하나님. 하나님이 죽지 아니하면 그것은 가짜 하나님이에요. 죽은 하나님이에요. 우리는 살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꾸 사는데 기여가 되고 보탬이 되면 그걸 능력이라고 묘사하잖아요.
하나님은 뭐냐? 죽는 게 능력이라는 거예요. 죽을 수 있는 그 능력이 능력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아까워서 못 죽어요. 그동안 살아온 이 세월, 60넘어 까지 사는 이게 아까워죽는데. 음식도 가려먹고, 조심하고, 조금만 추우면 또 난로 피우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어컨 켰다가 이제는 난로 피우고, 전부 다 이것은 살려고 하는 짓이에요.
사람들이 교회 올 때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고 오는 거예요. 살려주세요, 가 아니라 예수님을 만났으면 우리가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이것을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서는 모르고 죽은 하나님 만났을 때 비로소 아는 겁니다. ‘아, 죽는 것이 진리구나.’ 사는 것이 진리가 아니고 죽는 것이 진리라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홍해 이야기 했지만 다시 하게 되면 홍해는 건너고자 하는 나는 건널 수 없는 것이 홍해에요. 건너서 살아보려는 나는 절대로 건널 수 없는 바다가 홍해바다에요. 예수 믿고 천당 가려는 사람은 절대로 넣어주지 않는 바다가 홍해바다에요. 그러면 홍해바다 건너온 사람은? 내가 봐도 내가 너무 낯설어요. 내가 봐도 내가 너무 낯설다고요. 내가 살고자 했을 때는 이 걱정 저 걱정, 저 걱정 이 걱정, 온통 근심걱정이에요.
그런데 죄 사함을 딱 받아버리면 걱정하는 나는 사라지고 황당하게도 걱정할 필요 없는 내가 주님 옆에 살아 있는 거예요. 뭐 이런 일이 다 있어요? 이런 일이 걱정근심 할 이유도 없는 그 나가 살아 있다고요. 이게 주님이 내 인생에 개입해야 가능해요. 내 힘으로는 될 수가 없는 일입니다.
마태복음 25장 46절을 봅니다. 제가 늘 아는 이야기였지만 어느 날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여기에 영벌이 나오고 영생이 나와요. 이걸 보고 깜짝 놀란 이유는, 인간은 결국 영벌, 영원한 지옥벌이지요, 영벌 아니면 영생, 그 둘로 확정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확정되었다는 사실이 놀랍게 느껴지는 겁니다. 영벌 아니면 영생. 그러니까 이 땅에 살면서 얼마나 내가 잘나갔고, 착하고, 권세가 많고, 누구하고 아는 사이고, 통장이 3백 개가 넘고, 집이 열채가 넘고, 차도 좋은 차타고, 내가 아는 사람이 유명한 사람이 많고, 백날 이야기해도, 교회를 몇 년 다니고 해도 소용없어요. 영벌과 영생은 이런 조건을 일체 묻지를 않는 겁니다. 영벌과 영생.
여러분이 잘 생각이 안 나는 모양인데 실험을 해 봅시다. 뼈다귀 두 개를 놓는 거예요. 두 개를 여러분 앞에 놓고 이 뼈다귀는 영벌에 이 뼈다귀는 영생에, 여러분이 한번 가려보세요. 가릴 재주가 있는가. 성경은 말하기를 모든 결정은 이미 프로그램화 되어서 결론 났다는 거예요. 한쪽은 영벌에 한쪽은 영생에.
영생과 관련 없는 사람은 영벌에, 영벌과 관련 없는 사람은 영생으로 운명이 확정 났다는 겁니다. 확정! 그런데 영벌은 어떤 식으로 활동하느냐 하면, 영생을 가리는, 감추고 자꾸 영생을 핍박하는 쪽으로 이 세상이 활동하고 있는 거예요. 이걸 양자물리학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 근원적인 물질의 근본은 파동과 입자인데 입자의 경우에는 저항이 있을 때는 입자가 되고 저항마저 없을 때는 파동으로 환원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파동을 입자되게 하는 그 저항은 어디서 생기는가? 인간의 움직임에서 나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움직이잖아요. 움직이니까 구체적으로 누가 움직이는가? 내가 움직인다고 자기가 입자가 개체화 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 가 이게 영벌이 되는 거예요. 내가 있을 때 그냥 있습니까? 잘난체 하면서 있잖아요.
모든 움직임이 저항, 원래 계획적인 영벌에 갈 사람은 영벌, 영생에 갈 사람은 영생으로 확정되었는데 그 확정된 결론이 못마땅해서 나름대로의 천국가려고 내가 애를 쓴다는 말이지요. 애를 쓰니까 입자, 나라는 개체성이 점점 더 강화되는 겁니다. ‘나 건드리면 가만 안두겠어.’ 이러고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입자 같으면 똑바로 입자처럼 살아라. 나처럼 살아라. 아버지에게 버림받는 것이 입자의 기능이고 해야 될 일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뭐냐 입자를 입자로 살려내려고 하잖아. 그러니까 너는 영벌이지.” 주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님의 죽으심에서만 나와요. 가려진 입자를 없애버리고 모든 것이 프로그램화 확정되었음이 확정된 채로 그대로 나타는 것, 이게 아버지의 뜻이에요.
거기에 내가 끼어들어서 내가 구원받으려고 설친다면 그걸 가지고 한글자로 ‘육’이라고 하는데 그 육은 백 프로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는 거예요. 영벌에. 이 프로그램이라는 것은 시간의 전과 후가 확정된 상태가 프로그램화 된거 거든요. 프로그램화 된 그쪽 노선에 들어가 버리면 더 이상 근심걱정 할 그러한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어요. 왜? 자동이니까. 우리 자신이 입자가 아니니까 파동이니까요.
주께서 태어나게 하고 살게 한 것이 다 주안에서 언더 더 돔(under the dome), 주안에서 주께서 주님 증거 하게 하려고 태어났다는 그 말이지요. 이걸 죄사함에 연결시키면 이렇습니다. 죄사함을 받는다는 말은 서로가 서로를 만났을 때에……, 크리스마스 때 선물교환 하잖아요. 서로 내놓는 것이 뭐냐? 죄사함을 내놓는 거예요. 저쪽도 죄사함 내놓고 이쪽도 죄사함을 내놓는 거예요.
완료된 것을 내놓아요. 근심걱정 할 필요 없는 것들을 내놓을 때 그게 바로 성도끼리의 사랑의 인사, 문안 인사하는 거예요. 우리가 육의 세계 영벌에 가는 자들이 자꾸 영생을 가리는데 육의 세계에서 평화로움, 평온함이라 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가 있어요. 아름답고 감미로운 음악을 깔아놓고, 습도는 약 40퍼센트로 맞춰놓고, 온도는 난로든지 에어컨을 켜서 적당하게 14.5도 정도로 하고, 편안한 베개 베고 물리치료 할 때 쓰는 저주파 속에 앉아 있으면 갑자기 없는 평화가 오지요. 육적인 평화입니다. 심신이 육이 편안할 때 그걸 평화로움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평온하게 하고 있는데 “계십니까? 택배입니다.” 하게 되면 그 평온함이 깨지겠지요. 짜증 제대로 확 나는 겁니다. ‘내 고요한 시간을 네가 함부로 방해하다니.’ 그래서 인간은 누가 우리집에 오면 이것은 내쫓아버리는 거예요. 항상 내 육신은 고요함과 평온함을 지키는 그것으로 돌아오는 것, 환원되는 것. 우리는 그것을 원하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에 누구하고 인사하기도 싫어. 혼자 있고 싶어. 뭐든지 항상 혼자 있고 싶은데 누가 와서 성도끼리 서로 문안한다는 말, 이건 뭐냐 하면, 성도의 교제는 사실은 죄사함을 내놓는다는 말은 사실은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겁니다. 어떻게 벌이느냐? 상대는 나의 옛사람을 공격하고 나는 상대의 옛사람을 공격합니다.
“너 찌질이였잖아.” 그건 일단 콜, 받고 “너도 만만치 않았어. 너도 개판이었어.”라고 서로의 옛사람을, 지금은 다 옛날이야기가 된 그것을 공격할 때 아주 즐거운 시간입니다. 그 시간이. 즐거운 시간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사적인 요소가지고 상대를 압박할 어떤 요소가 성도의 만남에서는 생겨날 수 없기 때문에. 사적인 영향력을 제거하는 거예요. 사적인 영향력.
내 의로움과 내 잘남이 상대방에게 조금이라도 영향력을 주지 못하도록 상대를 통해서 공격받도록 허용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9장 2절에 보면, 거기 중풍병자가 나오는데 자기는 중풍 병, 건강 때문에 주님에게 왔다 이 말이지요. 건강 때문에 왔기 때문에 이 사람은 파동이 아니고 입자에요. 내가 아프다. 나라는 입자가 아프다는 거예요.
입자가 아프니까 다시 원래 회복되어서 괜찮은 입자가 되기를 원해서 예수님 찾아온 겁니다. 병 낫게 해달라고. 그런데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는 것이 아니고 그 인간을 바꿔버려요.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으니라.” 네가 죄사함을 받았다. 죄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너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너의 죄를 죽이는 거예요
그리고 너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를 살리는 겁니다. 죄사함 자체를 살리는 거예요. 따라서 성도와 성도의 만남에서는, 지금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 듣습니까? 알아듣기를 원하는데, 성도와 성도의 만남에서는 내가 잘났다, 네가 잘났다가 아니라 그 만남 속에서 죄사함의 여전함을 살려내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태어나는 것 자체가 위험해요. “목사님, 자기가 의로움도 없고 선한 것도 없으면 위험하지 않습니까?” 하는데 여러분, 내 인생 이렇게 살다가는 꼴아 박고 위험하다, 하는데 이 사고방식 자체가 바뀌어야 돼요. 도대체 우리가 위험하다 할 군번입니까?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게 위험해요. 태어난 게 위험하다고요.
위험하다 할 때는요. 괜찮았는데 아찔하다, 뭐 그런 것이 있어야 하는데 처음부터 괜찮은 적이 없었는데 뭘 위험해요? 괜찮은 적이 없었는데. 아, 애들 키울 때 저도 손자 손녀 있지만 유심히 관찰합니다. 애들 얼마나 예뻐요. 귀엽지요. 그거 얼마 안가요. 그 시효가 아, 그 다음부터는 따지기 시작하는데 내 맘대로 못하게 왜 엄마 아빠가 막느냐, 하는 거예요.
그 것 때문에 자기 똥꼬가 아프다는 거예요. 어떤 애가. 애인데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되는 거예요. 희한해요. 병원에 가보니 안 아파. 안 아픈데 똥꼬가 아프다는 거예요. 다섯 살 먹은 애가. 심리적으로. 자기가 맘대로 설치고 싶은데 장애요소가 있어서 벌써 어릴 때부터 이게 파동이 아니고 입자가 된 거예요.
하나님의 죄사함이라 하는 것, 마태복음 9장 만 가지고는 여러분이 잘 모르실거예요. 골로새서 1장 13절, 14절 보겠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죄사함을 얻었다고 되어 있어요. 과거완료형 이미 죄사함을 얻었다고 되어 있다고요.
주님께서 오신 것이 죄사함, 자기 백성에게 죄사함, 예수 안에 있는 언더 더 돔, 돔 안에 있어야 될 사람에게는 죄사함을 주는 겁니다. 죄사함에는 어떤 결핍도 없고 모자람도 없어요. 영원히. 이전에도 마찬가지고. 이미 죄사함을 받아야 될 사람을 우리는 몰랐었던 거예요. 입자가 되어서 그 입자를 부수고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순간, 파동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이미 죄사함받은 상태인 것을 알게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같이 관여함으로서.
이 죄사함이라는 게 어떤 내용이냐?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마르셀 뒤샹이라는 프랑스 미술가가 무슨 작품을 만들었느냐 하면, <세 개의 표준정지장치>라는 작품을 만들었어요. 그 작품을 어떻게 완성했느냐 하면, 1미터의 실을 공중에서 들고 있다가 그냥 탁 놔버려요. 그러면 그 1미터의 실이 땅에 떨어집니다. 떨어지면서 한번 놓고 두 번째 놓고 세 번째 놓고 백번을 해도 땅에 떨어질 때는 동일한 형태가 안돼요.
이렇게도 되고 또 다르게 이렇게도 되고. 그걸 그대로 나무형태로 만들어버려요. 그걸 세 개를 만드는 거예요. 1미터라는 그 규정된 1미터가 현실 속에 떨어져서 나무라는 재질과 결합이 되면 그 1미터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모든 형태 안에 다 들어 있다는 거예요. 모든 형태 안에. 그런데 인간은 어떤 형태도 표준적인 1미터를 뽑아내는 눈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 안목이 없다는 겁니다.
1미터가 똑바르다는 그런 선입견은 버리라는 거예요. 줄자가 1미터가 아니에요. 그것은 1미터의 형식중 하나일 뿐이고 1미터는 책상, 걸상, 옷, 모든 것, 구부러지든, 어떻게 생겼든 그 안에 1미터라는 표준적인 기준은 다 들어 있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모르는 사람과 만날 때 성도와 성도의 만남 속에는 그 사람 속에 주님께서 집어넣어준 죄사함 요소가 다 들어 있는 거예요. 담배를 피우나 술을 먹으나.
담배 피우고 술 먹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지난 수요일에 술 먹고 담배피우는 사람하고는 결혼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사람이 어떻든지,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관계없이 주님께서 뽑아내고자 하는 것은 네 속에 더는 근심과 걱정을 할 이유가 없는 죄사함, 하나님 의, 인간의 의가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네 안에 들어가 있다는 거예요. 성도에게만.
그걸 성령이 와서 알려주지요. 너에게 1미터가 들어 있는데, 하나님이 확정한 죄사함이 들어 있는데 왜 너는 남들처럼 못된다고, 남들처럼 돈 못 번다고, 남들처럼 건강하지 못하다고 왜 그걸 짜증을 내느냐 그 말입니다. 아까 다시 말씀드릴게요. 영벌 갈 사람과 영생 갈 사람, 나중에 둘 다 뼈가 돼요. 그 뼈다귀를 놓고 이 사람은 영벌, 이 사람은 영생 얻는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눈을 가리고 펩시콜라냐 코카콜라냐, 그거 가려내는 것은 할 수 있어요. 먹어본 사람은 대번 가려내요. 포크레인으로 도로 공사 하다가 공동묘지 잘못 건드렸는데 뼈가 섞여버릴 것 아니에요? 뼈를 보면서 ‘아, 이 사람은 천국 갔네. 이 사람은 지옥 갔네.’ 그걸 어떻게 판정내립니까? 어떻게 알 수 있어요? 모르잖아요. 우리는 모르는 거예요.
모르는데 어떻게 아느냐? 바로 성도와 성도의 만남에서 죄사함 요소가 나오면 그 사람은 영벌에서 영생으로 이미 옮겨진 사람이에요. 죄사함이 나온다면, 죄사함이 우선적으로 나온다면, 그걸 자기의 보물로, 가장 귀한 것으로 앞장세운다면 그 사람은 골로새서 1장의 말씀처럼 이미 흑암에서 사랑의 아들로 옮긴 사람입니다.
참, 제가 이런 사람 만나면 진짜 같이 뛰어야 돼요. 같이 팔짝팔짝 뛰어야 됩니다. 윤리, 도덕, 그런 것 따지지 말고 펄쩍펄쩍 뛰어야 돼요. 누가복음 1장 41-44절 보게 되면 이상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엘리사벳이 임신을 했거든요. 6개월 늦게 임신한 마리아가 세례요한을 임신한 엘리사벳의 집에 가서 인사를 했어요. 오늘 본문에 문안인사를 하는데 둘이 아이고 반갑다, 반갑다, 둘이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둘 다 배안에 들어 있는 생명체가 둘이 다 뛰놀고 있어요. 한쪽은 아기예수님, 한쪽은 아기 세례요한, 아직 배에서 튀어나오지도 않은 태안의 세례요한.
우리 교인들의 만남도 그래야 되는 것 아니에요? 다 그러고 있을 거예요. 아마 복중에 뛰놀 겁니다. 성령께서 41, 42절에 “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기 ‘성령의 충만’이 나오는데 그 충만이라는 표현을 아까 달리 했어요. 충만이라는 것은 함박눈을 온종일 옴팍 맞고 있는 거예요.
사람이 왔는데 눈사람이 들어온 것 같아요. 왜? 본인은 안보이고 함박눈을 뒤집어 쓴 것, 그게 충만 입니다. 근심이나 걱정이 있을 이유가 없지요. 모자람이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결핍이 있을 이유가 없어요. 완료되었는데요. 이미 완료된 존재가 움직이고 있는데. 주님의 프로그램이 움직이고 있는데 그게 왜 걱정근심이지요?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냥 성령께서 양쪽의 성령께서 팔짝팔짝 뛰고 있어요. 죄사함을 내놓는다 그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성도끼리 만났을 때 결국 그 사람의 근원, 출처를 물을 수밖에 없어요. “어느 별에서 왔니? 너 어디서 왔니?” “죄사함에서 왔어요.” 그러면 되는 거예요.
“너 어디서 왔는데?” “우리 집안 아주 빵빵한 집안입니다. 대단한 집안입니다.” 이렇게 나오면 한쪽은 죄사함을 이야기하는데 한쪽은 자기의를, 자기 도덕성을 내놓는다고요. “이 정도 나는 착하니까 나를 해코지 하지 마.” 이런 식으로. 그게 무슨 마음이 열리고 만남이 됩니까? 전부다 사람을 개인적인, 사적인 영향력을 줌으로서 내가 그 사람을 지배하려는, 정신적 지배를 노리고 들어오면 안 되지요.
소지섭이라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나랑 밥 먹을래, 사귈래? 나랑 사귈래, 죽을래?” 이런 연애가 어디 있어요? 그것은 좀 희화적으로 이야기했지만 실은 인간의 육과 육의 만남, 영벌, 영원히 지옥 가는 사람들의 만남은 다 이런 만남입니다. 다 이런 만남이에요. 자기자존심은 중요하고 타인의 자존심은 나보다 못하고.
사람이 사는 이유는 남에게 이기는 맛으로 살거든요. 지기 싫어하는 맛에 산다고요. 지기 싫어하는 맛이 아니고 아예 이기는 맛으로 살아가요. 내가 더 가치 있다, 내가 더 고귀하다를 뽐내는 재미로 사는 거예요. 인생이라는 것이. 그게 파동이 아니고 입자에요.
입자라 하는 것은 세상 모든 포로그램화에 대해서 도전하고 내가 나로서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다 보니 갈수록 그 입자는 돌멩이처럼 딱딱해지는 거예요. 딱딱한 그 몸을 가지고 수십 년 같이 교회 나왔다고 인사해봐야 그건 사랑의 인사가 아닙니다.
프로그램화의 다른 예를 들면 여러분이 만약에 차를 타고 가는데 가다 보니 길가에 만 원짜리가 있더라는 말이지요. 길가에 차를 세우고 차 오는가 보면서 만 원짜리를 얼른 허겁지겁 줍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와서 주우면 안 되니까. 내가 그렇게 주웠다는 말은 아니고요.
예를 드는 겁니다. 다섯 장 줍는데 그 사이에 다른 다섯 장이 바람에 날려서 휙 가버렸어요. 그것은 6, 7, 8, 9, 10은 내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다섯 장만 내 것이 된 거예요. 그러면 우리 인생이라 하는 것은 그냥 길가에 주운 돈 그게 우리 인생입니다.
그런데 자꾸 살아가면서 내가 놓쳐버린 6, 7, 8, 9, 자꾸 이게 아까워서 ‘그 때 바람이 안 불었어야 돼.’ 그걸 자꾸 욕심내고 있는 거예요. 그 6, 7, 8, 9를. ‘참, 너 같은 인간은 안 만났으면 좋을 뻔 했다.’ 그게 6, 7, 8, 9에요. 그냥 5로서 만족하라, 그 말이지요. 우리자신에 대해서 어떤 결핍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입자입니다.
이것은 영벌에 갈 인간이에요. 어떤 코미디 프로에 이런 것이 있어요. 손님이 온다고 접시를 잔뜩 빌려줬는데 들고 가다가 와장창 다 깼어요. 그러니까 옆집에서 그릇 빌려간 사람이 “어이고, 미안허유, 미안허유!” 하니까 빌려준 아저씨가 “괜찮아유~ 뭐.” 하고 그 다음 나온 말이 정말 멋있는 말이에요. “이게 던져서 깨지니까 접시지유. 던져서 이게 튀어나오면 공이지유. 괜찮아유!”
그런데 돌아서서는 “아이고, 너무 잘게 깨졌네.” 최 양락이가 그런 이야기 했는데요. 우리 인생은 용도입니다. 접시가 무엇인가, 내가 무엇인가를 자꾸 땅에 던지지 마세요. 우리는 그냥 주님께서 만 원짜리 네 장을 주면 그 네 장이 나고, 다섯 장 주면 다섯 장이 나고, 여섯 장 주면 여섯 장이 나지 내 손에 없는 6, 7, 8, 9 자꾸 그걸 기대하는 것은 그것은 자기 자신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살아가는 것밖에 안됩니다.
그것은 육이에요. 거기에 무슨 죄사함이 나오고 거기서 무슨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죽으심이 거기서 왜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오늘 본문에서 서로 예수 안에서 인사하라, 할 때 그 예수 안에 대해서는 아직 제가 설명 안했습니다. 서로 인사하라, 할 때 요즘 사람한테는 터무니없지요.
“사도님, 그렇게 안 하겠습니다. 일단 만나보고, 식사도 같이 해보고, 그 사람이 현재 재산 얼마 있는지, 무엇 때문에 나를 만나려고 하는지, 왜 나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지 먼저 내가 분석해서 내게 필요한지 아닌지를 내가 검증해서 만나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도 당신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고 내가 결정할 문제고 사도가 결정할 문제 아닙니다.”라고 나온다면 그 사람은 하나의 입자에요.
예수 안이라는 것을 완전히 빼버리고 나는 내 안에서 살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참 그런 식으로 사는 것도 참 피곤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 안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가? 스가랴 3장 1-4절에 이런 말씀 나와요. 1315페이지.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죄사함이 이루어지는 광경을 여기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프로그램이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에게 있었던 그 일을 예수그리스도께서 먼저 오셔서 우리를 만나서, 예수님과 우리의 만남이 된 관계를 이 지상에 있는 교회 안에서 같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끼리의 그 관계를 현실화시키는 겁니다.
악마한테 지적받는데 하나님이 나서서 그 지적을 소멸시키는 일, 옷을 벗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그게 1미터, 그게 표준적인 1미터, 천국 가는 1미터, 눈에 보이지 않지만 1미터에요. 그 1미터 옷을 갈아입혀서 모든 죄가 어떤 죄도 없어지고 하나님의 깨끗한 의를 장착시켜서 네가 천국 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준 하나님의 의와 죄사함이 천국 오도록 그런 조치를 내리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시간이라는 나무 재질 안에 우리를 박아 넣는 거예요.
1미터짜리의 그 보편성, 기준을 각자 살아온 인생이라는 그 나무재질에다가 삽입을 시켜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사람을 만나면서, 누굴 만나면서 나올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나 죄인입니다 죠. 왜? 죄사함이라는 것은 죄를 지적받아 마땅함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죄사함이 의미가 없어요. 중풍병자가 몸 낫겠다고 오는 것, 그것도 입자로서의 자기의 죄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죄가 죄로 오는 것을 주님이 마중 나와서 맞이하셨어요. 거기다가 뭘 심어놓느냐 하면, 죄사함이라는 1미터짜리 절대적 개념, 그 기준을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집어넣으니까 다른 사람이 놀라버리는 겁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언제 여러분이 평화롭던가요? 그것은 결핍이 없을 때 평화로워요. 결핍이 없을 때는 염려와 근심도 없어요.
언제 결핍이 없던가요? 그것은 주께서 다 이루시는 그 현상자체가 지금의 내 모습이 이 다섯 장, 여섯 장, 일곱 장, 이 자체로서 완결될 때, 이게 바로 완성일 때 더 이상 육체를 욕심낼 필요가 없는 이 자체로서 완벽할 때 그 때 그게 주님이 주신 평화입니다. 지옥가면 어떻게 될까,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세상 교회는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를 주는 데입니다. 플라시보 효과란 위약효과라고 아무 효과도 없는 걸 사람들 위로하기 위해서 가짜 약을 남발해버려요. “여러분, 힘들지요? 몸 아프지요? 이렇게 기도하시고……” 처방전을 내리는 거예요. “일주일동안 기도한번 해보세요. 새벽기도 한번 나와보세요. 봉사해 보세요. 십일조 한번 해보시면 여러분 가정이 화평할 겁니다.”
이것은 계속 결핍에 대해서 아직도 이 자의식 속에 결핍이 있다는 것을 점점 더 그걸 새겨 넣는 거예요. 애초에 결핍과 근심이 없어져야 되는데 그게 더 심각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해소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하면서 그 사람은 교회에 발목 잡히지요. 국가의 안녕에 발목 잡히지요. 자기존재에 발목 잡히지요. 자기가 자기한테 시달리지요. 맨 날 자기한테 책망당하고, 본인이 본인한테 벌 받고. 이 무슨 바보 같은 짓이 있습니까?
정신질환이라는 게 딴 게 아닙니다. 자기 안에 여전히 저항을 갖고 있는 게 정신질환이에요. 자기 현상태가 맘에 안 드는 것, 이것은 뭐 정신과 의사가 여기 있지만, 병원에 안가도 인간 태어난 것 자체가 전부다 정신병자에요. 결핍을 느끼니까요. 따라서 우리는 그냥 길가에 떨어진 만 원짜리 다섯 장이다. 그런데 그 자체로서 전혀 모자람이 없다. 전혀 모자람이 없어요.
그러면 이 조시로 계속 가느냐? 그것이 아니지요. 다음에 바람 불면 여섯 장이 올수도 있고 또 일곱 장 올수도 있고. 그것은 프로그램화 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노력하고 선택해서 오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선택하거나 노릴 이유가 없어요. 하루하루가 또 어떠한 나무재질이 준비될지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바로 성경말씀이 확정된 성경말씀이 이미 우리 안에 계속 작렬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죄사함이고 그것이 바로 영생이라는 겁니다. 성도가 인사하는 것은 뭐냐? 서로가 원인이 아니고 결과물들끼리 서로 모이면서 그 현장에서 우리가 이렇게 된 원인되시는 분을 높이는 것, 이게 바로 주 안, 예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서로가 결과물일 뿐입니다, 라는 것을 그리스도를 증거 하라고 우리는 사랑의 인사를 나누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우리가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너무 몰랐습니다. 내가 그냥 열심히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면 그냥 일이 잘 풀리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근원적인 불평과 두려움은 해소할 길이 없음을 깨닫게 해주시고 영벌 갈 자와 영생 얻을 자가 확정되었음이 죄사함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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