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작별하는 능력(빌립보서 4:13)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wj06biVhs-s,

아빠와 함께 2020. 10. 11. 21:28

작별 능력

2020년 10월 11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4:13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능력을 주신다는 말은 인간 자체적인 능력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오기 전에 인간들은 자체적인 능력으로 자기를 살려내는 방식으로 살아왔습니다. 성령이 오기 전에 인간이 사용하는 능력은 그 목표가 자기에게로 마감이 됩니다. 모든 가치가 자기에게로 집결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으로 몰리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평소에 인간이 스스로 사는 방식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예 중의 하나가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재판받는 장소에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지금이라고 풀어줄 권세가 자신에게 있다고 예수님에게 제안하는 중이었습니다. 이 본디오 빌라도와 같은 사고방식이 바로 성령받기 전에 인간들이 속해있는 세계에서의 사는 방식입니다. 사람들은 권세에 주눅들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성공과 출세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권세’를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의 구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권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유일한 권세 말입니다. 이 권세를 받은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주님께서 아들됨을 위해서 지녔던 바로 그 권세를 받은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경험하셨던 세상 권세의 압박을 같이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받았던 능력은 이 권세를 뚫고 지나가는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곧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세상에 통용되는 이 권세를 뚫고 나갈 위인은 없다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인간들이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서 아무리 노력해도 그 능력은 기껏 악마의 제공된 능력에 영혼마저 벌써 악마에게 넘어간 영혼을 구출할 수가 없습니다. 철저하게 고개숙일 뿐입니다.

왜 인간들은 이렇게 악마에게 조종당하는 신세가 된 겁니까? 그것은 자신의 뿌리, 자신의 근원, 자신의 바탕과 기원, 자신의 원천을 자기 밖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자신의 원천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원천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악마의 밥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사람이 근심과 걱정을 한다는 것은 본인이 자신에 대해서 잘못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원이 빠져버린 채 자신이 지키려고 하고 이해하려고 한 것이 문제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없다는 것은 가짜 나를 철저하게 지키고 보호하려고 애쓰고 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받게 되면, 그동안 나를 덮친 모든 권세를 뚫게 됩니다.

그 뚫어가면서 보이는 풍경은 이미 예수님께서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삭개오가 나옵니다. 평판이 나쁜 삭개오에 대해서 주님께서 “너희 집에 가자”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은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즉 인간에게 집이란 가장 중심부입니다. 집은 인간들이 그 험한 외부 환경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것들로 모아놓은 최후의 곳입니다.

바로 그곳을 예수님께서는 공격하십니다. 그 한가운데 구원, 곧 십자가를 꽂아버립니다. 더는 ‘내’가 살아나지 못하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세상 살아가는 보람은 각자 지니고 있다는 그 ‘나’ 한가운데 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 와서 십자가 소식을 듣고서는 자기 마음 한가운데 꽂는 것이 아니라 변두리에도 꽂아버립니다.

그래놓고 그 십자가로 날 살려내라고 시험합니다. 이는 끝까지 절망하지 않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자기가 작별하는 기회를 자꾸만 상실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능력이란 구약 때부터 자기 안에 성령이 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

예수님께서 어느날 회당장 야이로의 집을 가셨습니다. 그 딸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많은 일가 친척들이 와서 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쎄서는 그 우는 자들을 내어쫓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운다는 것은 지금껏 그들이 살아온 그들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는 부모와 함께 죽은 회당장의 딸 방에 들어갔습니다. 이는 “지금 여기 누가 있느냐”를 붇는 겁니다. 울던 사람들 자리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녀의 팔을 잡고 일으켰습니다. “소녀야 내가 네가 말하노니 일어나라”(막 5:41)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세상 보기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들이 알고 있는 구역에 벗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즉 인간들이 사는 방식말고 다른 방식을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이 넘어올 수 없는 구역,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용하시는 구역으로 데려가기 위함입니다. 여기에는 인간들이 전에 자신이 살던 방식으로 다시 재현하지 못하게 하는 곳입니다.

“여기까지가 네가 살아 있었던 곳이요 이제 바이바이해야지”하십니다. 성도가 주님으로 능력받게 되면 이때부터 예수님을 공격하게 된 이 세상의 본질을 예수님과 같이 뚫어가게 됩니다. 그 방식이 바로 기도함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재판관을 번거럽게 하는 과부가 나옵니다. 재판장은 시시한 존재인 과부의 청원을 곧잘 거부했지만 지독하게 되풀이 해서 재판을 요청하니 어쩔 수 없이 응하게 됩니다.

이는 곧 성도의 기도 자체가 곧 기도의 응답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새삼스럽게 세상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없습니다. 단지 세상의 악질성향을 추궁하는 일에 종사하게 됩니다. 끝까지 이 세상의 허망함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것을 인간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되면, 진정한 재판관으로서 성도가 등장해서 불의한 재판관을 대신합니다. 즉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행한 것을 받아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령을 모르게 되면 오는 세상에서도 영원히 죄사함을 받지 못합니다.(마 12:32)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이제 그만 놔주게 하옵소서. 미련두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4강-빌 4장 13절(작별하는 능력)20010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4장 13절입니다. 신약성경 321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주시는 자’라는 말씀이 있지요. 주지 않으면 기존의 내 식대로 내 방식대로 살아온 그 능력은 하나님나라에서 안 받아주는 능력입니다. 주시는 것이 없다면 기존의 것에만 머물러 있을 것이고 그러면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성령이 없을 때 나는 누굴 위해서 살았고, 어떤 식으로 살았고, 무엇을 지키며 살았는가를 주시는 능력 앞에서 살펴보는 기회를 갖는 겁니다.

주님이 능력 안줘도 세상 사람들 잘 먹고 잘 삽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께서 노아 때를 평가하면서 이렇게 했거든요. 마태복음 24장 37-39절에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그런데 그들이 홍수의 때를 알지 못해서 한꺼번에 다 몰살당했다.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세례요한이 물세례를 준 것은 하나님이 받지 않는다는 것, 나는 너희들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할 때 물청소만 한 것이 없어요. 싹쓸이 해버려요. 시집가든 장가가든 사고팔든 뭐 강원도로 신혼여행 가든 관계없이 전부 다 싹쓸이 해버리는 거예요. 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세례요한이 그 표현을 한 겁니다. “물에 들어가자. 일단 죽자.” 요새 하는 말로 일단 맞자, 하는 것처럼 “일단 죽자. 세례 주라 한 주의 약속이 꺼내줄게. 주의 약속이.” 그래서 경계선이지요. 한쪽은 세상, 한쪽은 하늘 쪽에 있어서 “일단 죽자. 걱정하지 마. 나 믿고 죽어. 내가 꺼내줄게.” 물 심판이지요. 물이 아니고 불세례는 누가 하느냐? 주님께서 불로서 청소해버리지요. 그게 세례지요. 완전히 싹쓸이 해버립니다. “일단 불에 들어가자. 내가 꺼내줄게.”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능력이라는 것, 인간의 능력은 인간 선에서 끝나요, 인간 너머의 영역 그것은 주의 능력이 임해야 됩니다. 그것은 주의 능력의 권한이에요. 태어난 나를 내가 살리는 방식은 이것은 어디서에 멈추느냐 하면 내가 살 때까지만 멈춰요. 그리고 죽고 난 뒤에는 내가 내 능력으로 밀어붙이지를 못합니다. 고집부릴 수는 있는데 고집 부린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주신다는 내용이 나와요. 내게 능력 주신다는 것, 내가 생산하지 않은 것, 내게 없는 것, 그동안 내 식대로 내 방식대로 살았던 그 능력은 하나님 쪽에서 거부한다는 그걸 전제로 하는 겁니다. 주신 능력으로 이제는 내 한계를 벗어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일을 내 한계에 머물지 않고 한계 바깥까지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이러한 모델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고요. 그 예수님은 성령을 받았지요. 그래서 여러분이 오늘 본문을 보면서 “내게 능력 주신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교회 좀 다닌 사람 치고 이 본문 안 들어본 사람 없을 거예요.

유명한 구절입니다. 조폭에도 그런 구호가 있잖아요. 하면 된다는 것. I can do it! 나는 그것을 할 수 있다. 세상에서도 유명한 구절인데 성경에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하니까 앞에 ‘주신 자’ 그것은 떼 내 버리고 뒤의 그것이 확 구미가 당기는 거예요.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대요. 모든 것을.

세상에서 끄집어낸 아이디어는 뭐냐 하면, 현실은 내가 생각한대로 되어 진다. 이게 세상에서 끄집어낸 거예요. 양자물리학입니까? 내가 생각되어진 그대로 모든 것이 현실이 된다. 세상은 파동으로 되어 있고 내가 파동에 의해서 생각이 되면 그 파동은 내게 이루어질 새로운 파동을 유발하게 되고 그러면 내 생각은 곧 현실이 된다. 이런 논리로 가는데 이 성경구절이 멋지지 않습니까?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런 구절은 어디에 적절하냐 하면, 다단계신입사원들 훈련할 때 앞에 갖다 붙이는 거예요. 또는 교회 신축하려고 할 때 예배당 앞에 붙이는 겁니다. “못한다 하지 말자. 인간은 못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긍정적으로, 좀 낙관적으로 이 땅에 살면서 희망적으로 살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목사가 선창하고 교인들은 후창해서 교회 할 일을 풀어놓는 멋진 구호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가 구약에 예언되어 있느냐 하는 겁니다. 구약에 예언되어 있는가? 하나님의 일치고 하나님의 예언 바깥에 던져진 채 예언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구약은 괜히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구약은 나는 이렇게 일을 할 거야, 라는 것을 미리 제시한 거예요.

그리고 신약에 와서 그 제시한 것이 성취를 보았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 신약성경입니다. 그래서 내 소원대로, 내 꿈대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마시고요. 그것은 다단계회사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실제로 하나님께서 뭘 시작했는가를 보자는 것, 어떤 일을 시작했는가를 보자는 겁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어떤 일을 시작했기에 왜 이스라엘은 나자빠져 버리고 굳이 하나님께서 “너희 안 되지? 너희 못했지? 그지? 분명히 확인했지? 네가 스스로 증명했잖아. 네가 계획한 것은 네가 할지 몰라도 하나님이 계획한 것은 인간이 못한다는 것을 구약을 통해서 긴긴 역사를 통해서 증명했지? 이젠 내가 나설 거야.”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뭘 약속했습니까, 라는 것부터 알아야 돼요. 구약보기 전에 마태복음 5장 10-12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예수님을 인하여 네가 욕 얻어먹고 핍박받고 거짓으로 고소당하는 학한 일을 당할 때에 우리는 이걸 우리 능력으로 버틸 수가 없어요. 구약에서 이야기한 것이 어디에 전부 다 쏠리고 그게 함축이 되느냐 하면, ‘나를 인하여’ 모든 것이 예수님을 겨냥해서 구약의 모든 예언들이 다 향하고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에게 전부다 마감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있기 때문에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신바람 납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할 때 어떤 의도로 보느냐 하면, 내가 여기 있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서 기도하면 응답해서 내 소원 들어준다. 이렇게 그만 성급하게 매치시켜 버린다고요.

그러나 막상 성경에 보게 되면,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것은 내 뜻을 빼는 거예요. 내 뜻을 빼고 구약에 하나님께서 약속한 것은 전부 다 예수님께 모여 있다. 이제 우리가 할 것은 그 예수님께 모여 있음을 인정하는데 여기에 막강한 핍박과 욕설이 들어오고 거짓으로 고소당하는 일이 있을 때 네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능력은 뭐냐?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사실을 버틸 수 있는 그 능력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거예요.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 자가 이미 확보된, 확정 난 그 결과, 그 결론을 유일한 기쁜 소식으로 네가 버틸 수 있는가? 우리 힘으로 못 버티지요. 버틸 수 있도록 내가 능력 줄게. 이게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우리를 빼고 예수님을 집어넣느냐? 예수님은 우리의 존재의 근원이고 기원이기 때문에 그래요. 원천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몸이 이 땅에 태어나면서도 천 구백 몇 년, 이렇게 생년월일이 나오지요. 그러면서도 도대체 태어나게 된 그 원천, 기원, 아르케, 그 본래를 우리 바깥에 세워놔요.

원래 우리를 우리 되게 하신 분을 바깥에 세워놓고, 나 몰라라 해놓고 내 안에서 내 소망대로 이루려 하니까 이게 갈수록 근심과 걱정 그리고 대책도 없고요 그리고 평생을 살아도 해결점이 없어요. 그래놓고 교회 와서 “하나님, 이렇게 걱정과 근심이 많습니다.” 이렇게 하거든요. 하나님의 뜻은 이거예요.

네가 걱정과 근심이 있다는 것은 너에 대해서 네가 잘못해석하고 있다는 거예요. 너 자신에 대한 해석이 잘못되니까 엉터리 가짜 나를 붙들고 있으니까 해결책이 없는 거예요. 아무리 해 봐야 해답이 없는 거예요. 어떤 분은 전화해서 말씀하기를 숨이 막힌다는 겁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전화에 대고 그런 이야기를 했겠어요. 숨이 막힌다.

숨이 막힐 때 하는 행동은 머리를 벽에다 찧는 거예요. 기도할 때 그냥 기도하는 것으로는 모자라요. 머리를 벽에다 꽉 찧으면서 기도해서 나중에 기도 끝나고 보면 벽이 피로 벌겋게 되었어요. 얼마나 답답했으면. 저는 이걸 ‘무한한 구걸’이라고 하는데 무한한 구걸, 끝없이 벽에다 찧는 거예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기도할 때 자기 몸을 자학했듯이 “이래도 내 소원 안 들어줍니까? 주여, 벌써 밥 굶은 지 일주일이 넘었습니다. 아직 4십일까지는 안되었습니다만 지금 7일째입니다. 이래도 내 소원 안 들어줄 거예요? 주여, 이래도 정권 안 바뀔 거예요? 주여, 이래도 남북통일 안 해줄 거예요? 주여!”

머리를 찧듯이 밥 굶는 것은 기본이고, 밤 잠 못자는 것은 기본이고,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고요. 숨이 막혀서 못살겠다는 거예요. 주님은 이렇게 말씀 합니다. “막혀도 내가 막히지 네가 왜 막히냐? 네 몸은 내꺼야.” 본인이 주인이 안 바뀌고 있어요. 네가 왜 막혀 있느냐는 말이지요. “네가 왜 막혀 있어?”

도대체 교회 올 때 무슨 맘으로 오는지 알 수가 없어요. 답답하다고 오는지. “네가 왜 답답해, 네가!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네가 왜 답답하냐는 말이지요. 네 원천과 뿌리가 바깥에 있는데. 바깥에서 못 들어오고 있다고요. 왜 그렇습니까? 시작점을 마귀가 바꿔놔서 그런 거예요. 요즘 교인들이 영특해서 교회가 사기 친다는 것을 교회 안다니는 사람만 아는 것이 아니라 다니는 사람도 알아요.

교회가 사기치고, 가정이 사기치고, 회사가 사기치고, 국가가 사기 치는 것, 모든 것. 사회 가짜의 삼종세트. 직장, 교회, 가정, 전부 다 가짜입니다. 국가도 마찬가지고요. 정 숨 막히거든 이민 가시면 되는 거예요. 문제해결은 뭐냐? 그 교회도 문제, 가정도 문제, 국가도 문제, 사회도 문제라면 정작 내가 가짜, 내가 나에게 사기 치는 것은 왜 몰라요?

남 사기 치는 것은 그렇게 잘 보이면서 내가 나에게 사기치고 있다는 것은 본인이 정작 모르는 거예요. 왜냐? 주님이, 원천이 되는 분이 능력을 안주셨기 때문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라고 했는데 그분이 능력을 안줘버리면 내게 악마가 집어넣어준 능력가지고 이 몸을 살리려고 하니까 본인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이 교회 다녀도 만족 없고, 저 교회 다녀도 만족 없고. 만족 없을 수밖에 없지요. 본인이 가짜인데요. 본인자체가 가짜인데 무슨 만족이 있겠습니까? 주님의 능력은 뭐냐 하면 이거예요. 주님의 능력은 나에게서 나를 떼 내는 능력이에요.

“그동안 너를 위해서 많이 살았잖아. 고마해라 마이 무으따.” 이제 손잡고 데려가서 “자, 여기서 네 구역은 끝났다. 네 구역은 끝났고 여기서부터는 내구역이다. 천국구역이다. 인사해야지. 그동안 가짜 섬기고 봉양한다고 했는데 이제 빠이빠이 해야지. 미련두지 마 이제는.” 너와 네가 작별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능력은 뭐냐? 내가 나와 작별할 수 있는 능력이 주께서 주신 능력입니다. 나와 작별하는 능력, 나와 작별하게 되면 우리는 너무 아파요. 하지만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김 광석이 그렇게 이야기해도 몰라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어요. 집착이었어요. 집착! 내가 등산가고 싶으면 나를 등산 보내주고, 낚시 간다 하면 낚시 보내주고, 온갖 것 나에게 다 했어요.

그런데 그 나와 이제는 작별해야 돼요. 가을 새와 작별하듯이, 그대 떠나고 나면 가을 새와 작별하듯이. 이제는 빠이빠이, 너는 네 갈길 나는 내 갈길. 내 바깥에 근원이었고 뿌리였고 진짜 내 바탕인 주님의 손에 잡힌바 되어야지 왜 자꾸 내가 나를 관리하십니까? 언제까지 나한테 속아 넘어 갈 거예요, 나한테! 나한테 속지 않으려 하니까 더욱더 악마한테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동안 십자가 꽤나 들었고, 복음 들었는데.” 이렇게 하거든요.

제가 지난 설교에서 십자가철심을 꽂으라고 했는데 꽂기는 꽂았는데 변두리에 꽂았어요. 주변에 꽂아버린 거예요. 십자가를 꽂았는데, 십자가 믿습니다, 하고 꽂기는 했는데 정말 내가 있던 이 심장 한복판에 피가 터지도록 꽂아야 되는데 엉뚱한데다 꽂아놓고 “십자가여, 날 도와 달라.” 또 이런 식이라.

십자가가 뭘 도와주는데요? 뭘 도와줘요? 널 작살내는 것이 십자가인데 뭘 또 나를 도와줘요? 전부다 이게 엉터리에요. 주님의 능력은 나로 하여금 죽음 그 너머까지, 죽음 뒤까지 데려가주는 능력이에요. 그러면 그 능력가운데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뭐냐? 주님이 경험했던 것 그대로 경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주님께서 데려갈 때 주님께서 성령으로 이 세상을 뚫었거든요. 뚫으면서 그동안 내가 평소에 내가 나를 살리려고 했던 그 요령들과 꼼수들 그리고 삶의 방식, 마이 웨이, 그 삶의 방식들이 다 엉터리였다는 것을 그 풍경 광경을 보여주면서 뚫고 지나간다고요.

그동안 나를 막았던 것이 뭐냐? 사회체제와 사회질서와 그리고 윤리와 도덕이에요. 윤리와 도덕을 정면으로 뚫고 나가야 돼요. 윤리적으로 살면 안돼요. 도덕적으로 살면 안돼요. 그것 때문에 숨이 막히는 겁니다. 혹시 착하게 살면 복줄 줄 알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윤리도덕에 열중할 때 그 성과가, 그 보상이 결국은 어디로 마감되느냐 하면 나에게로 소환되거든요.

그러면 나는 나를 버릴 수가 없어요. 그 아까운 것을. 그동안 나 천당 보내려고 교회 얼마나 충성하고 얼마나 말씀에 순종했습니까? 내 창고에 있는 그동안 순종한 그 성과들 그걸 아까워서 못 버리는 거예요. 나는 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다고. 기도한 그것 아까워서 어떻게 버려요 못 버리지요.

예수님께서 그 당시 이 세상 체제, 종교, 도덕, 윤리,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모든 체제를 주님께서 뚫고 나가는데 그 능력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주께서 주신 능력이 ‘아, 주님이 이 길로 이렇게 뚫고 가셨구나.’ 하는 것을 같이 목격하게 만들어요.

‘아, 주님께서 교회를 이렇게 박살냈구나. 주님께서 국가를 이렇게 박살냈구나.’ 더 나아가 마지막 십자가에서, 그렇게 다 왔는데도 유턴해버리는 사건이 있잖아요. 다 왔는데, 주님하고 한 가지만 넘어가면 되는데. 베드로가 결국은 예수님을 부인했잖아요. 이건 뭐냐? “세상 욕하는 것도 좋고, 유대인 욕하는 것 좋고, 예수님 팔아먹는 것 욕하는 것도 좋은데 주여, 제발 저보고는 욕하지 마세요.” 이 마지막 허들 이 마지막 장벽을 뚫지 못했어요.

기껏 베드로가 제안한 것은 뭐냐? “제가 목숨 바치겠습니다.” 주님의 답변은 “안 받는다. 더러워서 안 받아. 네 목숨 바쳐도 안 받아. 돈 바치고 하면 받을 줄 알았지? 안 받아. 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안 받아.” 그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구약 보기 전에 주님께서 무엇을 경험했는지, 이제는 우리 경험이지요, 경험했는지 제가 몇 군데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18장 36-37절에 보면 예수님을 체포했을 때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 섰습니다. 빌라도를 그냥 빌라도라 생각하지 마시고 빌라도는 나름대로 사는 자기 방식이 갖추어진 사람 빌라도,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빌라도가 예수님에 대해서 딱하게 생각해서 다시 한 번 마지막 기회를 줘요.

“나에게 잘못했다 하면 살려 줄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에게는 너를 풀어줄 권세도 있고 네가 너를 잡아넣을 권세도 있다.” 이렇게 할 때 예수님 하신 말씀이, 참 같잖아서 웃기지요. “네가 권세 이야기를 하는데 주의 뜻이면 지금이라도 아버지께서 천사를 보내서 나를 풀어줄 수 있다. 네가 가진 권세로 내 앞에서 지금 권세 값하고 있는가? 감량도 안 되는 것이 어디서 내 앞에서 권세 이야기를 하느냐?”

이 본문 보면서 “와, 예수님 대단해. 엄지 척. 대단해.” 이렇게 하시지요. 지금 그 이야기가 아니고 저와 여러분 이야기에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지금 이이야기가. 누구한테 고개 숙입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까요? 여러분 누구입니까? 여러분 누구에요? 그렇다고 또 여기서 답변하지는 마시고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요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자녀가 되는 것은요, 주께서 권세를 주셔야 자녀가 돼요. 13절에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예수님이 경험했던 것 동일하게 겪게 해주는 대상이 되는 자,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능력 받은 자에요.

따라서 능력이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능력이 아니라 주께서 경험했던 능력이라는 것은 무엇을 바깥 환경으로 노출시키고 발각시키는데 필요한 능력이었던가? 도대체 우리를 어떤 악한 권세가 꽉 숨 막히도록 둘러쌌던가? 그것이 성도 아니면 누가 그것을 밝혀내겠습니까? 아들이 되는 권세자가 아니면 누가 그 눈을 열어서 그걸 파악할 수 있겠어요?

구원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요. 이 땅은, 이 세상은 이렇다고 외칠 수 있는 그런 기능인을 위해서 주께서는 권세를 주신 거예요. 사도바울이 권세 받고 당장 자살하거나 죽지는 않았잖아요. 뭔가 일을 했다고요. 그 일을 할 때 권세가 뭐냐? “예수님이 봤던 안목과 동일한 안목으로 세상을 나는 지금 통과중이다. 내가 지금 뚫고 지나가고 있다. 그동안 이 세상 사람들을 숨 막히게 만들었고 근심걱정하게 한 권세여 오라. 내 뚫어줄게.”

그리고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5장 40절에 보면, 이것도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목이에요. 장례식에서 많이 들어보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습니다. 죽으니까 유대인들 일가친척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요. 예수님께서 한숨 쉬시면서 “저 우는 사람들 다 집에 보내라. 다 비키라 해라. 내가 여기 문상하러 온 줄로 아나? 칠칠맞게 우는 사람들 다 나가라 해.”

그리고 자기 따르는 사람들도 다 보내고 세 사람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사람 있는 자리에서 “이 애는 죽은 것이 아니고 잔다.” 이 애는 죽은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지금 너희와 함께 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사람이 되어서 오셨어요.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그냥 같은 동질성으로 으샤으샤, 후원해주려고 오신 겁니까? 아닙니다. 인간이 건너갈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을 하나님 쪽에서 먼저 이 땅에 와서 거기다가 꽂아버린 거예요. 십자가 우리 중심에 꽂히듯이 꽂아버린 겁니다. 그러면 야이로 회당장 딸 죽었다고 “아이고, 애가 벌써 세상 떠다다니. 안됐다.” 울고불고 한 사람들을 어떻게 하느냐?

그건 내 보내라는 말이지요. “내가 있는 곳에서 내보내 버려.” 그들은 자기가 살아가는 방식 외에는 아무것도 몰라요. 내가 어떻게 하면 밥 먹고 사느냐, 이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보내 보내고 난 뒤에 주님께서 “이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고 잔다. 달리다 쿰! 소녀야, 이 잠꾸러기야, 그만 자 일어나!” 하고 손을 잡아 당기니까 애가 살아났잖아요.

이게 기뻐할 일입니까, 당황해야 될 입니까? 당황해야 될 일이에요. 우리 성도가 삶을 살면서 예수 믿는다고, ‘하나님이 지켜주니까 뭔가 큰 재앙은 나타나지 않겠지.’ 반은 근심 반은 어떤 기대 이래가지고 아슬아슬하게 살아가잖아요.

그런데 정말 하나님의 능력이 왔을 때 이런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어요. 갑자기 젊은 딸애가 죽는 이런 사태가 벌어질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알다시피 마리아 마르다가 오빠하고 같이 예수님을 잘 섬겼는데 졸지에 죽지 않아야 될 기둥 같은 오빠가 죽었을 때의 마리아와 마르다의 그 태도 보세요. 아주 막 극렬하게 저항하잖아요. 우리 오빠 뭐가 잘못되어서 죽였느냐고. “왜 죽입니까?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죽이십니까?” 나오고 있잖아요.

그럴 때 우리가 이런 말을 해야 돼요. “대체 이게 뭐야? 이게, 이런 낭패가?” 주님의 능력이 오게 되면 우리는 큰 낭패감을 느낍니다. 수습이 안돼요. 수습이 안 된다는 말은 다시 내가 살던 식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어떠한 방식이 다 날라 갔어요. 다시 옛날 방식으로 못 돌아갑니다. 당황스럽지요. 내가 이러려고 예수 믿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날 겁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옆으로 빠지는 것 말고, 옆에 꽂히는 것 말고 한가운데 꽂힐 때는요, 다시 옛날 나로 못 돌아간다는 그 절망감에, 낭패감에 휩싸이게 돼요. 그럴 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정확하게 꽂힙니다. “그러니까 네가 평소에 감사가 없지.” 그러니까 감사가 없는 거예요. 내 것 지키려고 악바리 애를 쓰는 것은 있는데, 용을 쓰는 것은 있는데 감사가 없는 거예요. 고마움이 없는 거예요. 고맙소, 고맙소, 가 없어요.

‘고마울 것 있으면 내가 고맙다고 이야기해줄게.’ 생색내는 그 고맙다, 그것밖에 없어요. 그 고맙다, 도 결국은 내 것을 못 놓겠다, 내 것 흠집 내기 싫다, 하는 고집 같은 거예요. 주님이 주신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주님께서 이 땅에 악마가 맘대로 설쳐대는 것을 허락했어요. 그게 이 세상 실정에 맞는 상황이니까. 악마가 권세잡고 설쳐대는 거예요. 너 내 말 들으면 살려주고 말 안 들으면 죽여 버린다, 이런 것 있잖아요.

제가 어느 강의인지 그런 이야기했다고요. 정의로운 형사가 범인을 잡으려고 하는데 마지막 체포과정에서 지독한 범인이 전화를 해서 “어이 정의로운 형사 날 잡으려고? 그래? 이 전화 좀 받아보지?” 받아보니까 아빠 목소리 들어보니 딸이라. “네가 나를 체포하는 순간 네 딸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 때 드라마에서 형사가 갈등을 일으킵니다. 결국은 그 인간의 정의라는 것도 혈육적인 정 앞에서 맥을 못 추네요. 갑자기 화면에 어릴 때 애하고 놀던 장면이 확 뜨면서 “걱정하지 마. 아빠가 너 지켜줄게.” 이런 소리 한 것도 막 기억이 나면서 “분하다. 그래. 다음에 보자. 내 딸한테 손대면 내가 가만두지 않는다.” 그걸로 또 한 회가 넘어가요.

시청자는 화딱지가 나서 ‘이게 언제 끝나나……’ 그래서 드라마는 마지막 회만 봐야 된다고요. 속에서 천불만 나니까. 무슨 정의가 딸도 못이기는 정의가 있어요. 또 제가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손자가 할아버지를 그렇게 좋아해요. 할아버지만 밖에 나가면 자기가 알아서 신발을 막 신고 따라나섭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가짜라면? 할아버지가 살아온 진짜 모습을 안다면? 사람이 사람한테 정을 줄 수가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판단하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범주, 인간의 구역 안에서나 통용되는 것인데 그것은 영원한 제대로 된 감사가 나올 수가 없어요. 그냥 발발발, 떠는 거예요. ‘여기서 망치면 안 되는데. 이거 망치면 다시 옛날로 못 돌아와.’

옛날 삶의 방식으로 못 돌아와요. 못 돌아오면 못 돌아오는 것이지 뭐. 못 돌아오라고 십자가 꽂았잖아요. 십자가를 엉뚱한 자리에 꽂아놓고 다시 옛날 내 방식, 내 노선 그대로 고수하려고 하니까 이게 전부 다, 교회가 가짜가 아니라 너 자신이 가짜에요. 너 자신이 신자가 아니고 가짜 신자지요. 예수님 이용해서 나잘되려고 하는데 그게 뭐 신자에요? 그게 나쁜 존재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만만합니까?

그러면 진짜 신자는 뭡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에스겔 3장에 보면 죽 나와 있습니다. 거기 에스겔이 권능을 받아요. 하나님의 능력을 받습니다. 능력 받았으니까 우리 보기에 신나 보이겠지만 에스겔이 능력 받은 것이 에스겔 3장에 보면 “하나님의 예언된 약속된 그것을, 네가 그 말씀을 먹고 만약에 안 전하면 책임을 너한테 묻고, 네가 만약 전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기 죄를 모르면 그 책임은 너에게 묻지 않으마.”라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능력을 받아요.

17-19절에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요즘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데 뭐 능력 받아서 일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제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악마를 풀어놨어요. 악마를 풀어서 자기 맘대로 설치게 만들어요.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도 쫒아내고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너희가 해석을 잘못하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악마를 쫒아내고 귀신 쫒아낸다고 너희들이 지금 잘못 해석하고 있는데 우리도 잘못 해석하면 그렇게 돼요. 그러나 마태복음 12장 31, 32절에 보면 해석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인자를 욕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용납해준다.” 성경 그대로 읽어볼게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예수님 하는 일이 그 당시 사람들 눈에 보기에 목수가 하는 일로 보였거든요. “내가 그거 이해해줄게. 너희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은 충분히 받아주는데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될 것은 이것은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그렇게 한다는 것을 놓쳐버리면 오는 세대, 이 세상뿐만 아니고 오는 세대도 내가 영원히 용서하심을 받지 못해서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간다.” 그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주님이 주시는 능력이 없으면 인간은 영원히 악마의 밥으로 살아간다는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이 성령을 능력을 받게 되면 비로 그렇게 친하고 정들었던 집안 식구들이 악마라는 사실을 압니다. 집안 식구가.

자, 그러면 주님께서 이렇게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오는 세대에도 구원 받지 못한다.” 이렇게 주님께서 밀어붙이면 우리보고 뭘 어쩌란 말인가? 그 점에 대해서 누가복음 19장 5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삭개오가 나와요. 삭개오에게 이런 말을 했거든요.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내가 오늘 너희 집에 갈게. 그러면 네가 구원에 이른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간다는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냥 길에서 “네가 나를 믿으라. 그러면 구원해줄게.” 이럴 수도 있는데 네 집에 들어가겠다는 말, 원래 집이라는 것은 집에 있던 모든 가구나 액세서리 장난감, 책상, 그 모든 것은 내가 나를 위해서 모아둔 거예요. 내 영역, 나의 세계에요.

그 누구에게도 노출시키지 않고 싶은 거예요. 나만 즐기는 세계, 오직 나의 모든 비밀을 나만 간직하고 그 간직한 그것으로 인하여 세상 어떤 불상사가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 집안에만 있으면 자기만족이 성립이 되는 그런 것들, 최소한 나를 잊어버리지 않고 나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최소한의 것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내 집이고 내 방이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그곳에 들어가겠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제대로 꽂을 데 꽂겠다는 거예요. 내 자리에 꽂아버리지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하면, 그곳이 내 곳이 아니고 내가 갑자기 이방인 같고 손님 같아요. 이 말은, 내 몸이 주님의 구원이 이루어지게 되면, 성령을 받게 되면 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내가 관리하는 내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는 겁니다.

나는 그냥 덤으로, 그냥 하나님의 은혜로 남의 몸 가지고 혜택은 즐기는 것은 그냥 내 것인 양 여기고 잘못 즐겨왔던 거예요. 주님이 관리했는데 우리는 착각하기를, 내 몸을 지금까지 내가 관리해 온 나의 것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엄마, 나 이제 남자친구하고 친구사이는 끝나고 부부사이가 되기로 했어요. 결혼하기로 했어요.” 라고 누구나 무심코 이야기할 수 있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말을 좀 쪼개서 세밀하게 해야 돼요. “엄마, 주님께서 나보고 저 남자와 결혼하래.” 라고 주어를 바꿔야 돼요. 왜? 지금 결혼할 때까지 누가 키웠는데? 주님이 키웠거든요. 그게 주님주시는 능력으로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능력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이 그냥 이 본문가지고 수퍼맨처럼 큰 일 하려고 하지 마시고, 차에 깔린 애 들어내기 위해서 무거운 차를 으라차차, 하면서 들어 올리는 대단한 일 하려고 하지 마시고 평소에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일하는 것인 것을 이제는 새롭게 다가서는 겁니다.

나는 주님의 집에 있는 손님이었고 초대받은 객이었습니다. 내가 나의 객이었고. 주님께서 이 객을 받아준 거예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삭개오야, 내가 네 집에 유하겠다. 그러면 너는 이렇게 이야기해라. 우리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우리 집 주인이 바뀌었다.” 내 몸의 주인이 바뀐 거예요.

그동안 기도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시키는 대로 다 하면서 백날 해봤자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내가 내 주인에요. 갈수록 영원한 오는 세대에 사함을 받지 못하도록 악마가 그렇게 계속해서 나를 갖고 논 겁니다. 주님의 구약 예언에 의하면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있는 겁니다.

에스겔 36장 26절에 보면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우리의 한가운데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자체가 바뀌는 거예요. 그렇게 예언된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바꾸느냐? 또는 이렇게 하면 돼요. 어떻게 바뀐 상태에서 세상을 어떻게 달리 볼 수 있고 달리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느냐?

예수님께서는 우리 손을 잡고 자기가 다녔던 이 세상, 자기가 겪었던 이 세상을 우리로 보게 합니다. 왜? 빡빡한 권세를 뚫고 나가는 것은 주님이 주신 성령의 힘이 아니면 우리가 못 뚫고 나가요. 자기하고 못 헤어진다고요. 그동안 우리가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한 몸같이 지냈던 자매사이처럼 우리가 우리자신과 얼마나 친하게 지냈습니까?

만약에 어떤 친하게 지낸 자매가 있는데 언니가 부잣집에 팔려간다고 하면 좀 뭣하지만 부잣집 양자로 들어간다면 동생이 얼마나 울고불고 하겠어요. “언니, 나도 따라 갈래.” “안 돼. 새 아빠가 너는 말고 나만 데려간대” 할 때 얼마나 가슴 아프겠어요. 얼마나 울고불고 하겠습니까? 바로 그 심정이 오늘날 성령 받은 우리 심정이에요.

그동안 우리가 우리자신을 위해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렇게 힘들게 인생을 버티고 왔잖아요. 날 섬기는 보람으로, 그 낙으로 살았잖아요. 그런데 나를 주님한테 빼앗기면 무슨 낙으로 삽니까? 살 이유가 없어졌다고요. 나 잘났다, 그 자랑질 하려고 살았는데. 나 기도 잘하고, 헌금 잘하고, 봉사 잘하고, 충성 잘하고, 그 재미로 살았는데 그 재미를 빼앗긴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사느냐? 주님의 기능으로 삽니다. 그 기능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누가복음 18장에 나옵니다. 이것 설명하고 설교 마치겠습니다. 1절에서 5절에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어떤 과부가 있는데 그 과부에게 원수가 있었고 그 동네에는 재판관이 있는데 그 재판관에게 계속해서 원수 갚아 달라고 재판청원을 했어요. 그런데 시시한 과부기 때문에 재판관이 짜증내면서 무시한 거예요. 그런데 끈질기게 그 과부가 가서 재판해달라고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절에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비유로 이렇게 이야기했거든요. 이 내용이 뭐냐 하면, 성도가 주님의 성령 주님이 주신 능력을 받아서 세상을 뚫고 나갈 때 세상자체가 얼마나 불의하냐 하는 점은 성도가 아니면 밝힐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성도가 아니면.

기도의 응답받자, 하지 말고 성도는 기도 자체가 응답이에요. 기도하는 것 자체가 응답이라고요. 기도가 뭡니까? 세상을 번거롭게 만드는 것이 기도에요. “주여, 이 세상 지옥입니다. 그리고 너희들은 악마야.”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들에게 원수져서가 아니라 주의 능력이 임하니까, 세상은 처음부터 주님이 왔을 때 주님의 적이었으니까 이제는 주님의 원수가 우리의 원수로 기능적으로 변한 거예요.

주님을 힘들게 하고, 독하게 하고, 주님을 미워했던 그 세계에 우리가 태어났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어떤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보느냐 하면, 주님 괴롭힌 원수들이 이제는 나의 원수들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거냐? 우리는 동작해야지요. 움직여야지요.

그 움직이는데 뭐가 필요합니까? 주님 주시는 능력으로 움직이는 거예요. 그게 사도바울의 전도능력입니다. 내가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못할 것이 없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예수님 증거 하는데,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을 지적하고 뚫고 지나가는데 발악하면서 달려들었던 그 발악, 악마의 정체를 우리를 통해서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 주의 뜻이다 이 말이에요.

기도하는 자체가 세상을 파고 들어가는 거예요. 번거롭게 하는 거예요. 추궁하는 겁니다. 세상에 대해서. 계속 추궁하는 거예요. 그래놓고 죽 하시는 말씀이 8절에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 말은 지금 내 말 알아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나 마지막 때가 되면, 오는 세상이 되면 성령을 주시게 되어 있어요.

성령은 오는 세상에서 거꾸로 이 세상으로 오거든요. 오는 세상이 되게 되면 성령으로 인하여, 성령 받은 자들이 예수님께 가해하고 예수님을 추방했던 이 세상의 근원적인 속성, 악마적 속성을 주님의 성도들이 이제 추궁하고, 번거롭게 하고, 밝혀내면서 뚫고 지나가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뿌리를 박으려고 해요. 뿌리를 박으려고 하는데 우리는 이 땅에 뿌리박힐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뿌리가 아예 없어요. 그래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거예요. 모든 일, 이 세상은 윤리도덕으로 우리를 평가하려고 준비되어 있는데 거기에 뿌리가 박힐 이유가 없지요.

너는 잘했다느니 못했다느니. “쓸데 없는소리 하지 마. 잘했다 못했다 하지 마. 나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하게 하셨어. 어딜, 네가 나를 알아? 네가 어딜 나를 평가해?” 잘했다 못했다, 없어요. 주께서 하게 하신 거예요. 잘했다 못했다, 를 뚫어버린다니까. 그 법을 뚫어버려요. 그 법을, 질서와 체제를.

또 주님께서 이야기합니다. “이 일 누가 할래? 이거 누가 할래?” “그거 제가 할게요. 느낌 아니까.” 무슨 느낌을 알아요? 가짜를 다루는 느낌을 아니까. 가짜를 다루는 느낌을 알아요. 세상은 우리를 다루려고 합니다. 예. 마귀가 우리에 대해서 너무 잘 압니다. 그동안 우리를 다뤄왔어요. 마음대로 조롱해왔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안 그러면 너 죽는다고 해 왔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바들바들 떨었어요. 나의 가치와 의미가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되돌아 올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망가질까봐, 해체될까봐 벌벌 떨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성령이 오니까 애초부터 해체되어야 되고, 애초부터 전부다 옅어져야 되고 엷어져야 되는 거예요.

가질 필요도 없는 거예요. 내 것도 아닌데 내 것이 있다고 망상 속에 있었던 거예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가지고 그 망상을 뚫고 주께서는 이 세상을 추궁하는 거예요. 나를 지적하는 그 세상을 추궁해 나갑니다.

때로는 ‘이게 뭐야?’ 하고 진저리날 정도로 ‘나는 끝났어. 나는 끝났어.’ 하겠지요. 바로 그 지점, 그 지점이 여러분이 성령을 받은 순간 여러분이 내 식대로 살다가 주님 식대로 살아가는, 그 바뀌는 길목인줄을 여러분이 기뻐하고 그것마저 감사로 바뀌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예언된 대로 이루어지는 능력인 줄 모르고, 교회 다녔다고 보상으로 주는 능력인줄 알았습니다. 내 소원대로, 내 뜻대로 이루어지는 능력인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이 속임수에서 벗어나서, 나의 노선에서 벗어나서 탈피하여 주님의 노선에 함께 참여한 그 감사와 기쁨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