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난 삶
2010년 10월 18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4:14-17
(4: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4: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4: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4: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사도 바울을 도와준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사도는 지금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을 도와준다는 것은 한 통속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잘 하였도다”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뒷 의미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했다는 겁니다.
도대체 빌립보 성도들은 사도 바울에 대해 무엇을 보고 도와주었을까요? 빌립보서 1:20-23에 보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소망은 죽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육신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런 사도를 도와준다는 것은 빌립보 성도도 같은 마음이라는 겁니다.
사는 것보다 죽은 것이 복음이 통하는 성도들끼리의 한결같은 마음이라는 이는 그들이 보는 세상관이 다른 사람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나 사도들이나 신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 때, 하나님께서 내린 약속이 지금 이 시대에 완성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단순히 사도라는 자가 고생한다고 동정을 표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좋다고 해서 목숨까지 내놓지는 않습니다. 목숨을 걸만한 것이 성도들에게도 생긴 겁니다. 성령께서는 인간에게서 자아라는 껍질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자아라는 껍질에서 도저히 빠져나오지 못함도 압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이란 인간이 하지 못하는 일을 두고 말합니다.
인간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 곧 자기 몸에 갇힌 자아와 분리하는 일을 성령께서 해내십니다. 자아를 ‘죽은 자아’로 만들어서 뽑아내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 곧 예수님의 자아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기존의 자아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은 사도나 빌립보 성도들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빌립보서 4:13에서 사도는 말하기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만큼 이 세상에 대해서 미련없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불신자들은 신자들이 외치는 복음에 대해서 무서워합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자기 것이 없는데 이 세상을 살 재미가 있느냐>’라고 반문하면서 무서워합니다,
그들 불신자들은 이 세상에 살 생각을 합니다. 반면에 사도는 성도들의 소원은 이 세상에서 뜨는 겁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성령의 자아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훌쩍 떠나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천국으로 가는 코스를 열어놓았습니다. 구약에 나온 그 약속들이 신약에 예수님으로 인하여 성취된 이 사실에 대해서 성령받은 자만이 주목합니다.
레위기 16:8-10에 보면, 아사셀 염소가 나옵니다.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이러한 이벤트는 대속죄일에만 합니다.
대속죄일이란 유대인 달력으로 7월 10일 단 하루입니다. 이날만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으로 하여금 지성소에 들어오시는 것을 허락합니다. 이 날의 속죄제사로 인하여 온 이스라엘의 1년치 모든 죄가 다 용서받습니다. 여기에 근거해서 또 거룩한 하나님께서 한 해를 속된 자기 백성과 동행할 바탕이 마련됩니다.
두 마리의 염소를 제비 봅아 각자 다른 역할이 주어집니다. 한 마리의 염소는 즉각 죽음을 맞이합니다. 반면에 다른 염소는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에 나가서 버려집니다. 이렇듯 한 마리의 염소는 죽는 모습을 통해 죄의 결과를 보여주고, 다른 광야에서 외로이 사라져야 될 염소는 잠시 살아있는 모습을 통해 죄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이렇듯 저렇듯 이 세상은 광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버려져야 마땅할 정도로 죄만 넘쳐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렇듯 염소가 버려주는 그 순간에도 지성소에서는 하나님께서 수송아지의 피를 받아들입니다. 곧 지옥같은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용납해주는 백성이 있었으니 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7:50-51에 보면,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일년에 한 차례만 대제사장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엄중하게 막혀 있는 이 지성소 장막에서 위에서부터 찢어졌습니다.
이로소 그 찢겨진 막 사이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엿보이게 됩니다. 히브리서 10:19-20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담력’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대담하고 당당하게 천국으로 가는 길에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천국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을 열어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히브리서 9:12에 보면,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죄란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를 본인이 정한다고 여기게 되면 자꾸만 ‘나의 것을 제대로 못 지켜서 그게 죄다’라고 여길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용서하고 용납하시는 죄는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을 제대로 못지켰다는 사실과 더불어 찾아옵니다.
이렇게 되면 그 어떤 인간도 자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주님에게 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는 성도를 모두 한 곳에 집결시키십니다.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이요(사 2:2/미 4:1-2) 새성전입니다. 이곳은 세상의 중앙입니다.(겔 38:12) 에베소서 2:18-21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찌 성령받은 성도끼리 복음으로 교제하지 않을 수 있으리요! 모두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겁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서 눈 앞에 밝히 보이는 천국, 그 곳으로 가는 길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이로소 세상 일로 인해 성도의 관심사는 분산되지 않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것으로 인해 복음이 막히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5강-빌 4장 14-17절(결정된 삶)20010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4장 14-17절입니다. 신약성경 321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4:14-17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지금의 그리스 지역입니다. 사도바울이 지금의 그리스지역에 성령에 의해서 복음을 전할 때 빌립보교회가 제일 먼저 만들어졌고 그 다음에 데살로니가 교회가 만들어질 때도 처음 만들어진 빌립보교회 사람들이 많이 도와줘서 14절에 잘하였도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잘하였도다, 하는 그 14절에 보니까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복음전파가 곧 괴로움이다. 그런데 그 괴로움에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너희가 나서서 도와줘서 잘하였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또는 선지자들이 이 세상을 광야로 봤듯이 이스라엘도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를 거쳤습니다.
지금 광야의 기능을 이 세상에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인간의 본성이 다 드러나고 인간이 광야가 아닌 애굽에서 얼마나 안일하게 살아왔던가를 들춰내는 것이 바로 광야지요. 따라서 이 세상을 광야로 바라보고 있는 사도바울의 인식과 관점에 대해서 어느 누가 여기에 동조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빌립보서 4장을 보고 있습니다만 빌립보서 1장 23절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리고 24절에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사는 것과 죽는 것 사이에서 어느 쪽을 하라고 한다면 나는 죽는 쪽을 택하겠다. 왜? 개인적으로 이것이 더 나으니까 편하니까 고생을 덜 하는 곳이니까. 그래서 나의 지금 욕망이 있다면 마지막 욕망은 뭐냐 죽는 것이다.” 내가 죽는 것, 이 땅 살아가면서 점점 더 강렬하게 느끼고 있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자기가 죽는 것을 욕망하고 있는데 그러면 사도바울을 도와줬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같이 죽읍시다, 하는 이야기거든요. “우리 놔두고 어떻게 혼자 죽으려고 합니까? 같이 죽읍시다. 당신만 이 세상이 지긋지긋한 것으로 아십니까? 우리도 지긋지긋 합니다.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뭐 볼 것이 있다고. 뭐 기대할 것이 있다고 뭐 미련이 있다고.”
사도바울이 죽는 것이 소망이에요. “취미가 똑같네. 저도 죽는 게 소망입니다.”라는 사람만 사도바울을 도와줄 수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교회 세운다 하니까 괜찮은 교회 만드는 일에 협조해서 거기서 자기 이름 내려고 도와주는 것은 이것은 사도바울을 도와주는 입장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여전히 살고자 하는 마음이 강렬해요.
죽고자 하는 사도바울의 이 심성이 우리가 지난 시간에 보았듯이 이것이 뭘 로 다른 식으로 표현되느냐 하면, 빌립보서 4장 13절입니다. 내가 일체의 비결을 배웠는데 그게 뭐냐? “내게 능력 주시는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죽겠다는데 뭐, 죽겠다는데, 이 세상에 대해서 미련 없다는데 뭘 못합니까?
세상 사람들이 말을 하거나 어떤 행동을 할 때 여러분은 그런 것을 간파해야 돼요. 세상 사람들이 불신자들이 행동할 때는 무엇 때문에 행동하느냐? 무서움 때문에 행동해요. 오늘 14절에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 괴로움에 참예하였다는 말은,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주위 사람들이 괴로움을 준 거예요.
그 사람들이 왜 사도바울을 그렇게 미워하고 괴로움을 줬느냐 하면 그들이 편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듣는 순간 복음의 내용이 너무나 겁나 무서운 거예요. 무서워도 너무 무서운 거예요. 우리가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빌립보 교인들은 뭐예요? 그렇게 겁나고 무서운 이야기만 하는 사도바울이 그렇게 좋다는데 좋다는 이유가 뭡니까?
같이 죽읍시다, 하는 마음이에요. 저도 같은 뜻입니다 하는 뜻이에요. 이 땅, 이 딴 것, 이 세상 것 미련 없습니다, 하는 뜻입니다. 이 말은, 성경을 한 구절을 봐도 살겠다고 보는 사람과 곧 죽는 것이 소원입니다, 하고 보는 사람이 해석이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교회 나와도 한 번 살아볼까, 하고 교회 나온 사람과 오늘로 인생 끝냅시다, 하는 사람들이 설교나 말씀을 보는 태도가 완연하게 다르지요. 예배 마치고 예식장 가야 되고, 이러면 전혀 사도바울의 지금 본심하고 다르지요. 빌립보교인들 태도에 대해서 지금 사도바울이 참 잘했다고 하는 것은 어떤 투냐 하면, 이것은 기적이다, 어떻게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너희들이 보여주는구나, 그런 뜻입니다.
복음 때문에 괴로움 받는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인들보고 잘했다는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너희들이 이 사도의 말을 신뢰하고 주님 말을 진짜 신뢰한다면 이런 마음을 가져야 가능하다는 겁니다. 어떤 마음이냐 하면, 우리 마음을 하나의 밥그릇이라 한다면 그 가운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끄집어내보세요.
밥그릇 바깥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끄집어내도 그래도 밥그릇에 뭐가 남아 있거든 성도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인생을 하나의 그릇에 다 담아보세요. 아까 솥 커다란 것 하나 사왔는데 그 큰 솥에다 내가 인생 평생 했던 것을 다 담아보라고요 자식 키우고, 돈 번다고 애쓴 것 다 집어넣으세요.
일단 다 집어넣으시고 그 다음에 다 끄집어내보세요. 내가 한 것, 내가 노력한 것, 내가 기도한 것, 헌금한 것, 전도한 것, 다 끄집어내세요. 이웃사랑 한 것, 고아원 방문해서 구제한 것, 길거리에서 거지한테 동냥준 것, 다 끄집어내세요. 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니까. 표절이 가능하고, 모방이 가능하고, 흉내가 가능한 것이니까 다 끄집어내보라는 말이지요.
다 끄집어내놓고 그릇을 보세요. 그래도 뭐가 남아 있는지. 남아 있다면 뭐가 남아 있겠어요? 그것은 바로 평생 내 인생 내가 살아온 것이 아니고 주께서 살렸다, 라는 사실이 그 바닥에 내가 끄집어낼 수 없는 것이 그거예요. 주께서 주신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이야기하기를, “지금 너희들이 내 말을 알아들어 알아먹는다 그 말이야. 주께서 주신 것이 있어야 알아먹어.” 네가 할 수 있는 것, 모방하는 것, 종교 흉내 내는 것, 교회 다니는 것, 그 딴 것 아무 소용없어요. 내가 할 수 없는 것 그게 있어야 돼요.
그러면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뭐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든 내가 살아남으려고 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내가 못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나 그만 살래, 이것은 못해요. 그 못하는 것이 있어야 사도바울의 복음을 이해한다고 할 수 있는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으려고 교회 오는 거예요. 죽으려고. 살려고 교회 오는 것이 아니고 죽으려고 교회 오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쉽게 말해서 빌립보교인들이 자기를 도와주니까 속으로 ‘이 사람들이 미쳤나? 왜 그래? 나 지금 너희들 가는 길하고 달라. 주님한테 가는 길이야. 주님한테 가는 길. 나 죽는 것이 소원이야.’
고린도후서 5장에 나와요. “내가 빨리 죽어서 주와 함께 합세하려 하는데 너희는 더 살지. 이 땅 좋은데, 가을인데, 가을단풍 구경도 더 하고 더 살지 뭐 때문에 날 따라와? 뭐가 부족해서 날 따라와? 뭐가 깝깝해서 날 따라와? 나 그냥 갈래. 그런데 날 도와줘?” 그리고 하는 말이 “너희들은 나의 괴로움에 동참했다.” 참예했다, 한통속이 되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인간으로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사도바울은 이 편지를 쓸 때 교도소,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을 도와줬다는 말은 이것은 사도의 감옥을 확대시키는 거예요. 주보에 정리한 것 제일 마지막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도만 옥에 갇힌 것이 아니다. 다 같이 갇힌 것이다.”
사도는 옥에 갇혔지만 옥에 갇히지 않은 빌립보교인들도 이 세상을 감옥이라고 여기면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그 말입니다. 감옥을 누가 좋아하겠어요? 벗어나는 것이 기쁨이겠지요. 그래서 빌립보서 4장 4절에서 “내가 말하노니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 말은 “빠져나갈 구멍을 너희들은 이제 눈치 챘어. 너희들은 그걸 알게 되었어. 이 세상에서 그만 살고 또 딴 데 가서 살 수 있는 그 비결을 너희들은 챙겼으니까 너희들이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이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는 거지요. 최상의 기쁨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4장 3절에 보면 너희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다고 했어요. 하늘의 생명책에.
이렇게 하다가는 빌립보서 처음부터 다시 하겠다. 빌립보서를 죽 해오면서 사도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소위 멀쩡하다고 우기는 인간들에게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사도의 이런 복음을 듣고 겁나 무서워하지요. 무서워서 바들바들 떨어요. 인간은 무서울 때는 본능적으로 밀치기 마련입니다. 귀를 막으려고 해요. 안 들으려고 해요. 무섭기 때문에.
그리고 복음을 아는 사람들을 마구 공격을 해댑니다. 왜? 겁나 무섭기 때문에. 그들이 그런 식으로 사는 게 너무 무섭기 때문에. 그러면 그 말은 뭐냐? 복음 근처에도 안 간다는 말은, 안 듣겠다는 말은 그들은 지금 스스로 복음을 피해서 도피생활 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행여나 십자가 복음이 혹시 쳐들어올까봐 뛰어들어 올까봐 문 닫고 아예 그 시간에 딴 것에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의 말이 어떻게 그들에게 무서움과 두려움을 줄 수밖에 없었던가? 4장 12절에 보면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어떤 형편이든지 내가 주님나라에 가는데 발목 잡을 것이 없다.”라고 12절에서 이야기한 겁니다. 그 내용을 제가 쉽게 말씀드린다면.
발목 잡을 것이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 것이 있는 한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이 세상에 발목 잡혀 사는 거예요. 내 것이 있는 이상은. 그래서 4장 12절에서, “가난하든 부하든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것은, 이 환경은 어차피 내 소유가 아니잖아,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그야말로 세상사는 성도의 일체의 비결이 아니고 뭐냐?” 그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빌립보 교인들이 본인도 사도바울처럼 그렇게 살면 되는데 왜 사도바울에 대해서 그렇게 관심을 갖고 도와주려고 하고, 사도가 복음 전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보태주고 도와주려고 애를 썼는가? 그것은 사도가 전하는 복음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느냐 하면, 구약에 있던 하나님의 약속이 완성되어 있다는 사실이 거기에 담겨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의 열성은 세상 사람이 보기에는 하나의 객기지요. 나는 자유다, 나는 죄용서 받았다, 나는 어떤 일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할 때 그 신남, 그 자유성, 그것이 탐이 나서,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 그것은 맹탕입니다. 그것은 아무 내용이 없어요. 그것이 바로 사람이 사람을 따르는 거예요.
사도바울 보고 ‘아, 저 사람 괜찮은 사람이네. 내가 오늘부터 당신의 팬이 되겠습니다.’ 이래가지고 따르는 것은 사도의 고난에, 괴로움에 참예하는 자가 아니에요. 사도가 알고 있는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 공히 같은 내용이 본인에게 접수가 되어 있어야 됩니다. 사도든 누구든 간에 사람을 따르면 결국은 아주 실망으로 끝나요.
사람의 기력이라는 것, 정신력이라는 것이 한계가 있어서 젊을 때 그렇게 잘해도 나이 들게 되면 어설프기 짝이 없습니다. 실수투성이고 실수를 줄줄 흘리고 다녀요. 사도바울이 말하는 이 성령이라는 것은 구약 때 하나님의 약속된 것이 신약에 실제로 나타났습니다. 실제로.
약속이 약속으로, 그냥 빈말로 끝난 것이 아니고 구약에 있던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자아라는 껍질에서 못 벗어나는데 우리 속에 있는 영으로 말미암아 악마가 뒤집어씌운 자아라는 것, 나라는 것에서 영이 거기서 기어 나오게 되었다는 사실이에요. 이게 성령의 일이거든요.
성령의 일은 뭐냐? 내가 나를 탈피 못해요. 천하보다 귀한 게 나거든요. 절대로 나는 죽을 때까지 나를 껴안고 같이 가야 돼요. 같이 가야 되는데 성령이 와서 나라는 껍질에서 못 벗어난다고 믿어졌던 거기서 성령이 죽은 나의 시체를 들고 성령이 나에게서 빠져나오는 현상, 이게 성령을 받은 현상이거든요. 그러니까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에요.
왜? 내 인생 아니니까, 주님이 만들어준 인생이니까, 옛날에 내가 하는 방식은 아직 내 몸의 껍데기가 남아 있으니까 이제 그것은 나하고는 빠이빠이, 하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거예요. 그걸 로마서 7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전에는 네가 율법의 법 지키려고 살았는데 이제는 성령에 이끌림을 받아서 살아간다는 거예요.
성경은 매정하게도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전에는 네가 양심상 양심대로 살려고 했잖아. 지금은 누가 와가지고 너를 거기서 빼내 줬잖아.” 이게 성령 받은 거예요. 양심이든 윤리든 도덕이든 그 딴 것 구애받지 말고 살아라, 그 말이거든요.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너는 더 이상 너에게 구애받지 말라. 그 전까지는 네가 너를 신뢰했잖아. 이제는 너를 신뢰하지 마. 네가 너를 신뢰할 때 지독하게 신뢰했지. 이제는 주님의 약속만 지독하게 신뢰해. 하나님의 약속만 신뢰해. 성령만 신뢰하고 주님만 신뢰해. 그게 바로 새로운 삶이야.”
미친 사람 아니고 이걸 누가 알아봅니까? 누가 이걸 알아듣습니까? 인생 한번 잘 살아보려고, 내 인생 잘 한번 꾸며보려고 교회들 나오시는데 쓰레기 같은 네 인생 거기서 벗어나라고 한다면 무슨 그런 황당한 일이 있겠습니까, 라고 하겠지요. 그래서 제가 아까 했잖아요. 황당한 일을 당한 사람만 사도바울을 도와줄 수 있어요.
“사도바울님, 당신 만 성령 받았어요? 나도 성령 받아서 지금 당신과 같이 미친 사람 소리 듣게 되었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황당합니다.” 곱게곱게 장만했던 나의 모든 계획과 목적과 의미가 이제는 내가 설치한 그 소프트웨어, 내 미래의 계획, 그것조차도 성령께서 거기서 나를 뽑아내 버렸어요.
그동안 여러분들 짓눌렀던 그 모양새는 마치 거북이의 등에 있는 두꺼운 등껍데기가 말랑말랑한 몸체, 모가지만 내놓은 그 몸체, 거북이의 그 내장부분을 짓눌러왔거든요. 껍데기에서 못 빼내요. 그런데 주님께서 발가벗겨서 내장만 홀라당 자아라는 껍데기는 놔두고 이걸 뽑아내서 “가자. 우리 집으로. 너 대신 내가 있는 집으로 가자. 네가 너를 주장하는 그곳 말고 내가 너를 주장하는 그 세계로 가자.”
그곳이 바로 생명책에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된다면 “너는 지금 생명이 아니고 목숨이야.” 목숨 버리고 생명 얻자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려도 너무나 황당하기 짝이 없어요. 그래서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다시 말해서 내가 나를 지킬 수 있는 모든 역량은 그동안 우리에게 다 쏟아 부었습니다. 그것을 그릇에 담고 다 빼내는 거예요.
내가 나 잘되려고 했던 모든 것을 끄집어내보자. 혹시 뭐 남아 있는가 보자. 남아 있는 것이 없다면 그 사람은 성도 아닙니다. 그러나 남아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고 성령이라면 여러분은 횡재하신 겁니다. 그 다음문제가 뭐냐 하면,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와서 내 것을 버리고 주님의 것으로 우리를 삼아서 가져갈 때 그 원칙이 뭐냐?
그 원칙은 구약에서 나왔듯이 거룩하지 않은 자를 거룩하게 해주는 것, 그것을 죄사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죄가 있다는 이야기에요. 죄사함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너 자체가 죄였다는 겁니다. 네가 죄 지었다는 것이 아니고 너 자체가 죄인데 그 죄를 사해준다, 용서해준다는 겁니다. 구약에서 그렇게 약속을 했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서 나 자체가 죄가 되느냐 하면, 나 자신을 내 것을 내가 지키려고 하니까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용서해주는 그 용서는 뭐냐 하면, 주님의 것을 지키지 못한 죄를 용서해준다는 겁니다.
그러면 평소에 주님의 용서라는 말을 할 때는 내가 내 것 지키는데 실수투성이고 내 것 제대로 못 지켜서 미안합니다, 하는 식으로 죄를 인식했다면 그 자체를 어디에 집어넣느냐 하면, 내 것 내가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제대로 주님의 몸, 주님이 주신 것을 못 지킨 죄가 되었다는 사실을 용서와 같이 우리 속에 집어넣어줘요.
네가 너를 지키고자 한다면 심지어 네가 지키고자 하는 성령, 네가 지키고자 하는 십자가 복음, 그것조차도 스스로 지키겠다면 그게 바로 주님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가 된다는 겁니다. 너 자체에서 빠져나와야 되는데 자꾸 내 믿음으로 내가 천국가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그게 죄인데. 그게 죄거든요.
내가 기도해서 응답받으려고 하는 것, 그게 바로 죄에요. 왜 여전히 내 것이 남아 있으니까. 내 것이 남아 있다는 말은 신앙생활이 전혀 안 된다는 뜻이고 그것은 달리 말해서 말만 신자지 진짜로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내가 안 죽었다는 티를 내고 있는 거예요. 안 죽은 거예요, 그것은. 내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은. 날 때부터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이걸 소급해서 이해를 해야 돼요. 그런데 스무 살 때 예수 믿고 그 다음부터는 내가 착하게 되었다. 그 착한 나가 빠져나와야 돼요. 그 착한 나가. 구원이라 하는 것은 착한 내가 내 껍질 속에서 빠져나오는 거예요. 사람이 착한 나가 들어 있으면 그 다음부터는 매사가 무섭고 두려워요. 자칫하면 이 착한 나가 나쁜 나가 될까봐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겁니다. 자기 안에서.
착한 나고 나쁜 나고 좋은 나고 간에 그 자체가, 이제는 그게 의미가 없는 거예요. 왜? 주님께서 죽은 자로 간주하는데, 죽은 놈이 죄로 말미암아 죽었는데 거기다가 뭐 새삼스럽게 착함을 끄집어 냅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요. 그러면 우리를 끄집어내서 어디로 가느냐?
구약에 보면 구약을 큰 스케일로 봐야 돼요. 큰 스케일로 보게 되면 구약 이사야 2장 2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많은 백성들이 그쪽으로 간다는 말이지요. 집중된 한 곳으로 가요. 에스겔 38장 12절에 보면 그곳이 예루살렘으로 되어 있는데 에스겔 38장 12절에서는 그것을 중심이라고 해요. “세상 중앙”이라고 되어 있어요.
옴팔로스지요. 세상 배꼽. 이 세상 중앙이 예루살렘이고 미가 4장 1, 2절에 보면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주님께서 우리 껍데기에서 우리를 죽은 자아로 만들어서 성령께서 끄집어내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방향이 한곳으로 집결되게 만들어요. 한 곳입니다. 에베소서 2장 20-21절에 보게 되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지금 빌립보 교인들이 옥에 갇힌 사도바울을 도와주는 것은 바로 성령께서 이제는 너, 나, 가 아니라 ‘우리’가 되는 거예요. 부산강의에서 제가 했지요. 이제는 너, 나, 가 아니고 우리가 되는 거예요. 하나로 숫자 1로 대변되는 우리가 되는 겁니다. 그 성령 안에서 교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와 성도끼리는 주님이 개입하는데 어떻게 개입하느냐? “손잡고 같이 갑시다.” 같이 가자는 거예요.
저쪽을 향하여 같이 가자는 겁니다. 같이 가는데 사도바울은 뭐냐? 괴로움에 처하면서 같이 갈 때 빌립보 교인들이 “그 괴로움 제가 할게요.” 괴로움을 당하는 사도바울에 같이 참여해서 “어차피 가는 방향이 같은 방향이니까 사도님, 같이 갑시다.” 할 때 사도가 하는 말이 “참 잘했다. 내 일에 참여 했으니, 주의 일에 참여했으니 참 잘했다.” 그렇게 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놀랐지요. 뭐 이런 기적이 다 있나, 하고. 성도가 예수 믿고 난 뒤에 어떻게 살 것이냐에 대해서는 바로 지금도 유대인들이 축제를 벌이는데 대 속죄일이라는 축제가 있어요. 유대력으로 7월 10일, 현대달력으로 9월 14일, 대속죄일에 관한 것이 레위기 16장 8절에서 16절에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대제사장이 염소를 두 마리 잡아요.
염소를 두 마리 잡고 그 다음에 제비를 뽑아서 한 염소는 산채로 피를 내요.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다른 한 염소는 제비를 뽑는데 두 마리 중에서 제비를 뽑았다는 말은 한쪽도 사실은 뽑힌 셈이고 또 다른 한쪽도 제비를 뽑힌 셈이에요. 제비라 하는 것은 일방적 선택이지요. 하나님께 일임한 선택에 의해서 더 이상 아사셀 염소를 바친 사람들의 권한은 빠집니다.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요.
한 염소는 죽여요. 죽이고 또 한 염소는 안 죽입니다. 안 죽이고 한 사람이 그 염소를 데리고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더는 사람이 살지 않는 그 곳에 가서 염소를 놓아버립니다. 이게 대속죄일에 할 일이에요. 대속죄일 7월 10일, 그 날은 단 하루만 있어요. 다른 날에는 제사장이 지성소에는 못 들어가요. 들어갔다가는 죽여 버립니다.
단 하루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데 그 지성소에 들어가는 날이 유대인월력으로 7월 10일이고 그 날에는 제사장은 소의 피를 바르고 바깥에서는 그 이벤트를 벌이고 있는 겁니다. 염소 한 마리는 잡고 다른 한 마리는 광야로 보내고. 광야로 보낼 때 그 염소는 옆에 짝을 이루거든요. 두 마리니까. 죽었던 염소의 대행체가 됩니다.
죽었던 염소는 살았다가 죽음으로서 하나님의 죄에 대한 엄중함을 보였다면 지금 이 한 마리의 염소……,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것은 맨 시간이 지연될 뿐 사람이 먹을 것이 없으면 죽으니까 죽기는 마찬가지에요. 그 제비 뽑힌 염소는 인간의 생존능력의 한계에 이르는 그곳까지 넘어가버려요.
그러니까 이 아사셀 염소는 이렇게 죽으나 사람 없는데서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인데 아사셀 염소거든요. 아사셀이라는 것은 버림받는 것, 내어주는 것. 아사셀 염소가 제사장이 내어줌으로 말미암아 터덕터덕 외롭게 가면서 그게 뭐냐 하면, 죄가 있는 염소의 그 몰골 그 모습을 살아 있으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목격하게 하는 거예요.
한쪽은 즉각적으로 죽음으로서 죄 값은 이렇게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고, 한쪽은 즉각적으로 안 죽이지만 꾸역꾸역 살아 있으면서도 이게 산 것이 아니고 죽어가는 모습인데 그 모습이 뭐냐? 광야, 사람이 살지 않는 허허벌판에 그냥 던져버려요. 그게 아사셀의 뜻이에요 내어줌, 버려진 염소.
이게 대속죄일에 일어난 일이에요. 아사셀. 단 하루입니다. 다른 날에는 이런 일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죄야, 이 악한 죄야, 훨훨 이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라.” 그런 말도 되고 똑같은 말로 “인간아, 인간자체가 죄니까 인간아, 오지 말라. 이 예루살렘에 오지 마라. 가버려라.” 훨훨 내보내는 거예요. 밀어내는 겁니다.
인간이 단독으로 인간의 자기 선함으로, 착함으로 절대로 예루살렘, 그 한곳에 집결할 수가 없어요. 성령이 아니면 마지막 날 예루살렘 한곳에, 성전이 될 수 없고 집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 한 장소에요.
히브리서 10장 19,20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히브리서를 보기 전에 먼저 마태복음 27장 50, 51절에 보면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성소의 휘장, 지성소 휘장이 아무도 못 들어가는 곳, 대속죄일이 아니면 못가는 그곳의 휘장이 찢어져버렸습니다.
찢어지게 되면 저쪽, 휘장 커튼 저쪽 세계가 찢어진 그 틈새로 보이게 되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히브리서 10장 19절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담력, 대담한 마음을 얻었다, 담력, 능력을 얻었다는 거예요.
이 담력이 뭐냐?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그 담력을 말하는 겁니다. 보인다는 그 말이지요. 전에는 가리워진 그 천국이 눈앞에 보이는 거예요. 세상의 이런 저런 것들이 다 시시하고 사소한 일들이에요. 그런 것들이 내 신경과 관심을 분산시킬 수 없어요. 코로나 그런 것 신경 쓸 필요 없다고요.
지금 가려졌던 휘장이 예수님 죽을 때 찢어져서 비로소 천국이 보이는 거예요. 여러분, 안보여요? 천국이 보이는데 코로나 19인지 뭔지, 우리 식구인지 남의 식구인지는 모르겠다만 코로나 19가 뭐라고 그게 발목을 잡습니까? 교인 몇 명 나오고 안 나오고, 그게 왜 발목을 잡아요? 애가 아프고 뭐고 그게 왜 발목을 잡아요? 천국이 보이는데. 세상 것에 발목을 잡혔다는 말은 세상 것에 미혹이 되었다. 시험든 거예요.
세상에 왜 시험드는가? 본인이 세상에 더 살려고 하니까 시험든 거예요. 죽으려고 하지 않고 더 살고 싶은데 세상이 만만치 않으니까 겁나 무서운 거예요. 어떤 가수가 요 근래 이런 노래를 불렀어요. “먼저 가본 저 세상 어떤 가요 테스 형~” 이렇게 부른다고요. “가보니까 천국은 있던가요, 테스형, 테스형~” 소크라테스 보고 부르짖는데 “먼저 가본 저 세상 어떤가요~”
이런 노래 부를 때 겁나 무서운 거예요. 나 훈아가. “가보니까 천국은 있던가요, 테스형~” 소크라테스 보고 하는 거예요. 이 노래 할 때 겁나 무서운 겁니다. 얼마나 무서운지 아, 테스형~, 누가복음, 여러분 잘 알다시피 나 훈아하고 비슷한 사람이 있어요. 누가복음 16장 28절에. 지옥에 간 부자가 자기가 지옥에 와보니 겁나 무섭거든요. 그러니까 동생 다섯 명 생각이 난 거에요.
안타까워 미쳐요. 왜 부자가 미처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미리 몰랐는가? 커튼이 찢어지지 않아서 그래요. 휘장이 안 찢어졌으니까 나는 부자, 당신은 출세한 사람, 그런 것들만 눈에 보이는 거예요. 그런 것들에 모든 관심사가 분산되었어요. 그래가지고 동생 다섯 명 지옥 갈까 겁나서 “아브라함님, 어떻게 동생 살릴 방도가 없겠습니까?” 하는데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성령께서는, 혈육조차도 주님께서는 관심이 없어요.
우리가 평생 끈끈하게 엮여 있던 그 혈육이라는 것,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식, 이것조차도 주님께서는 고려대상 아닙니다. “성령이 오면 오고 말면 마는 것이지 네 동생이라고, 네 혈육이라고, 네 부모라고 해서 내가 넣어주는 그런 법은 없다. 그것은 평소에 네 자아가 구성한 허망한 망상 같은 세상살이였다. 네가 죽을 때 그 혈육도 같이 죽어야지.”
주께서 주신 자식이고 주께서 주신 남편 아내, 그렇게 생각해야지 이것은 내 자식이고, 내 남편이고, 내 아내고, 왜 거기에 얽매이느냐? 네가 안 죽어서 그런 거예요. 네 것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 것이라는 것.
고린도후서 4장 8절에 보게 되면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그런 대목이 나와요.
이게 우리가 아까 봤던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바울이 수퍼 맨 아닙니다. 이거 만들어보라 하면 못 만들어요. 어떤 것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나 어떤 환경에서도 휘장 밖에 있는 그 세계에 눈 돌리는 일은 없다는 그 말입니다.
히브리서 9장 11, 12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그 다음에 단번에 단번에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단번에, 그 단번, 1이거든요. 하나의 집결지, 예루살렘, 1이거든요. 그리고 사도가 가고자 하는 방향도 1이라는 말이지요. 나 훈아가 말하기를 먼저 죽은 소크라테스를 형이라 부르면서 먼저 가신 저 세상 어떤가요, 묻는 것은 지금 관점의 방향이 잘못되었어요. 이걸 누가 이야기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과 계신 분이, 천국에 계신 분이 와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휘장이 찢어지게 되면, 성령이 와서 보여준 그 천국을 바라보면 되지 내 쪽에서 억지 쓰면서 누구한테 물어본다고 해서 그걸 누가 알려줍니까? 알려줘도 믿지도 않지요. 본인이 본인 것을 유지하면서 그 나라 가려고 하니까 안 되잖아요. 마태복음에서 주께서 죽을 때 휘장이 찢어졌지요. 그러면 예수님마저도 죽지 아니하면 휘장이 안 찢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라는 이 껍질, 이 나라는 껍질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천국 이야기 백날해도 남의 이야기에요 소용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자아를 죽은 자아로 만들어서 끄집어낼 때 비로소 성령은 누구의 영이냐? 예수님의 영이에요. 예수님의 영은 담력이 있어요. 예수님이 담대하게 세상 살 듯이 성령 받은 사람도 담대해요.
담을 넘어서 담대한 것이 아니고, 나쁜 짓 하는데 담대한 것이 아니고, 휘장사이 벌이진 그 사이로 천국을 보는데 있어서는 이것은 양보가 없는 겁니다. 어떤 분이 설교하기를, 예배라 하는 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기 때문에 꼭 예배당에서 안 해도 주께서는 우리 마음보시고 생활태도 보시고 그것이 진정한 영적예배기 때문에 꼭 예배당에 모일 필요가 뭐가 있느냐, 그럴 필요 없다, 라는 식으로 올려놨어요.
아주 우리나라에서 존경의 존경 곱하기, 또 제곱을 한 목사가 그런 이야기를 해요. 어떤 목사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이야기하고 싶지만 참고 있습니다. 삶이 중요하지 예배 참석하는 것이 뭐가 중요하냐는 겁니다. 그 사람 생각이 왜 잘못되었느냐 하면, 평소에 신종코로나 없을 때 그런 소리 하면 그것은 옳은 소리에요.
그러나 코로나가 터지고 난 뒤에 그런 소리 한다는 것 이것은 표절입니다. 신앙도 없으면서 자아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한 변명 어설픈 변명에 지나지 않아요. 반대로 해야 돼요. 코로나 없을 때 교회 열심히 모이고 찬송하고 그것 예배 아닙니다.
“예배는 삶입니다. 여러분 집구석이라도 성령이 와서 삽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다가 만약 코로나가 와서 나라에서 모이지 말라고 할 때 그 때는 죽기 살기로 교회에 모여야 돼요. 왜 세상과 반대로 가야 되니까. 그래야 그것이 담대하기 때문에. 자기 구원위주가 아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식으로 알았어요.
어떤 할아버지가 버스 요금 통에 돈을 넣어야 될 텐데 동전이 떨어졌어요. 그래서 기사가 “돈 없으면 스마트 폰으로도 결재가 가능합니다.” 하니까 그 할아버지가 스마트 폰을 요금 통에 집어넣었어요. 중국에서 그랬다고요.
십자가는 우리 구원하는 결재수단이 아니에요. 십자가는 풍덩 아예 우리 몸 자체가 쑥 들어가야 돼요. 십자가를 관찰하지 말고, 분석하지 말고, 연구하지 말고. 십자가 앞에서 자기 휴대폰으로 결재하지 말고 아예 십자가에 들어와서 자기가 없어지는 그것이 십자가에 맞아요. 사방을 둘러봐도 십자가밖에 없어요. 예수님의 피로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그 염소의 혈액형은 아사셀형이에요. a형 b형, rh 플러스나 마이너스 아닙니다. 아사셀 피에요. 사도바울이 내 괴로움에 참여했다고 한 그 괴로움이 뭐냐? 사도바울은 지금 성도로서 광야 같은 이 세상에 아사셀 양으로서, 염소로서 온 세상을 누비고 있습니다. “괴로워해라. 그래 너 무섭지? 그 무서움을 나에게 퍼부어. 내가 너희 무섭게 하려고 이야기하는 거야. 너희는 너희밖에 모르지? 겁나지? 겁나 겁나지?”
이 세상에는 전부다 겁내는 사람밖에 없어요. 왜 부질없이 거기에 합세하려고 합니까? 어떤 사람 말하기를, 인생이라 하는 것은 결정적 순간이 있다고. 인생은 결정적 순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결정 난 것을 결정적으로 확인하는 순간이 있지요. 우리는 이미 망한 거예요. 그동안 우리가 몰랐지요.
망했다는 사실을 어느 결정적 순간에 ‘아, 망했구나. 죄 덩어리구나. 내가 나를 지키고자 내가 내 인생 살고자 하는 자체가 망한 거구나.’ 왜? 안보이니까. 지성소휘장에 가려진 이 세상 안에 미혹되어 살아가는 그 자체기 때문에 이미 망한 거예요. 천국이 안 보이는데 그게 어떻게 인생 삶이라 할 수 있습니까? 망한 건데.
오늘 본문 내용 핵심은 아사셀 양입니다. 우리는 아사셀 염소고 양이에요. 그냥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돌아다니는 겁니다. 우리가 전하는 이야기 아무도 안 듣습니다. 너무 무서워서 안 들어요. 나에서 나를 빼고 무슨 낙으로 사나, 이런 식이에요.
제가 어떤 사람 글에 댓글 달았습니다. “인간이 자기한테 속는 이유는 자기한테 지킬 것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속고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사건은 뭐냐? 내가 나를 지킬 것이 아예 없다는 것을 까발려준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러니까 지킬 것이 없으면 두렵거나 무서워할 것도 당연히 없지요.
지난 시간에 했듯이 숨이 막힌다고. 왜 숨이 막힐까? 제가 마사지 해 드려요? 왜 인생에서 숨이 막힙니까? 내 것인데 왜 자꾸 다치냐, 그 말이거든요. 본인 것이 어디 있어요? 본인 것이 없는데 다칠 것도 없지요. 왜 본인 것이 있어야 되지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기의 죽은 장례식을 앞장세워서 우리에게 밀어붙인 거예요.
자기장례식이에요. “너희가 죽였잖아.” 이 장례식을 앞장세웁니다. 너희가 날 죽였어요. 하지만 결과는 휘장이 찢어지고 하늘나라가 비로소 보인 겁니다. 지상에서는 난리 났지요. 옵션인지 뭔지 모르겠습니다만 마태복음 27장 50, 51절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아까 이야기했고요.
그 다음에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이럴 때 여기 있는 중대장 백부장이 하는 말이 54절에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하지요.
“당신은 진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 땅에서 내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주여, 이 땅에서 꾸겨지든지, 뭉개지든지, 뭐든지, 없어지든지, 아프든지, 죽든지 나의 신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주여 신경 쓰지 마세요. 원래 쓰레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누구십니까? 당신은 어디서 왔습니까?”
십자가사건에 우리 자체가 스마트 폰이 되어서 거기에 풍덩 빠져야 비로소 그게 보이고 그렇게 보인다면 우리 옆에 사도가 그쪽으로, 그리고 모든 성도가 그쪽으로 집결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찌 그런 사람을 안도와주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믿음도 아닌데 장난 쳤습니다. 나 살려고 믿은 믿음은, 이것은 모방이었고 표절이었습니다. 이제 나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안에 풍덩 빠져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식으로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할 도리를 다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