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윤리
2020년 6월 21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2:25-30
(2: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2:26)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2:27)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2:28)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2:29)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2:30)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에바브로디도라는 사람은 사도를 돕되 자신의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돕습니다. 자신이 죽을 병ㄷ에 들린 것까지 주위 사람들이 걱정한다고 알리려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사도를 돕는 것이 곧 주의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곧 ‘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하는 일이다’는 마태복음 25장의 원칙이 지속되는 것 같습니다.(마 25:40)
모두들 자신에게 목숨이 붙어 있다는 것은 인식합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그 목숨을 바칠 곳을 찾지 못해서입니다. 에바브로디도에게 있어 그의 목숨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한 목숨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를 잊었습니다. 따라서 자기 목숨도 잊었습니다. 다같이 아담노선에서 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에바브로디도는 특이한 현상을 보입니다.
일반인으로서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에 에바브로디에게 일가 친척들이 있다면 사도 바울을 탓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꼬드겨서 내 집안의 사람의 인생을 망쳤다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원형은 예수님으로부터 이미 굳어져 있습니다. 이 땅에 죽기 위해 오셨던 예수님은 성령님이 달라붙어있기에 부활에 이르신 겁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으로 이해될 수 있는 현상이 아닙니다. 도리어 반대로 육으로 이해되지 못하는 식으로 성도로 살게 됩니다. ‘육으로 이해 가능하다’는 말은 율법이나 성경을 신(하나님)이 ‘살아 있는 인간’을 향하여 실천하라고 주신 말씀으로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신이 요구한 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주님의 윤리’는 이 원칙과 다릅니다. ‘주님의 윤리’는 사람을 ‘죽게 하시는 윤리’입니다.예를 들면,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들을 홍해가까지 이끄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대드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아무리 모세가 ‘가나안 땅의 복된 땅’을 제시하지만 당장 죽게 된 백성들에게는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이처럼 ‘주의 일’이란 인간은 죽음으로 몰아세우십니다. ‘장차 늙어 죽게 된다’는 식이 아니라 ‘이미 죽었음’을 통고해주는 쪽으로 몰아세우십니다. 즉 가나안 복지는, 지금 그것을 기대하는 지금의 네 자신이 죽고 난 뒤에 주어질 곳이라는 겁니다. 산 자가 상상하는 그런 세계가 아님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소위 지금 ‘그 약속을 믿는 채로 살아 있다’고 여기는 자들에게 의해서 방해받고 있는 겁니다. 자기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인간들은 계속해서 자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기를 잊지 않고 자기 생각을 하게 되면 여기는 필히 ‘신의 윤리’가 작동합니다.
신의 윤리란 신과 자기 사이에 말씀이 있어 그 말씀을 지켜내면 지금 살아있는 내가 죽어서도 천국갈 수 있다는 생각이 출발선이 되는 윤리입니다. 즉 ‘내가 나를 살려내는 방식’입니다. 이로 인해 자기에게 보다 철저하게 조사하고 분석에 들어가게 됩니다. 장차 하나님께서 지신을 심사한다 할지라도 하자가 보이지 않도록 사전에 자기에게 철저를 기하겠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납치당함’입니다. 시험쳐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해서 들어가는 곳이 천국이 아닙니다. 그런 내가 ‘이미 죽어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겁니다. 실력 발휘해서 들어갈 자들은 지옥에 가서 그 실력 발휘하라고 해야 합니다. 일반들이 생각하듯이 천국은 ‘저 세상’ 아닙니다. ‘천국’은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사람들로부터 무모해 보이는 것은 ‘없는 것’으로 ‘있는 것’들을 상대로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5절에서도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나와 함께 군사된 자’라고 칭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숫자로 헤아림의 대상에서 빠져 있다는 말입니다.
마가복음 5:13에 보면,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이 나옵니다. 여기에 나오는 ‘2000마리 돼지’라는 표현은, 기존의 인간들이 얼마나 숫자의 과다에 예민하게 여기면서 삶을 영위하는지 부각하기 위해서입니다.
거라사 지방의 어떤 자가 예수님에 의해서 귀신에 풀려나왔다는 점에 대해서 그 지역 사람들은 중요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재산인 돼지가 미쳐서 갈릴리 바다로 빠져졌다는 점을 더 심각하게 여겨서 예수님을 자기 동네에서 나가라고 간청하게 되는 겁니다. 이는 곧 귀신이나 예수님은 일반인들에게 숫자로 헤아릴 대상이 아닌 겁니다.
이 세상에서 움직이는 것은 악귀와 예수님뿐이라는 겁니다. 나머지 인간들은 결코 스스로 힘으로 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는 정지된 물체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악마에 의해서 ‘살아 있는 나를 더 살게 하는 식’으로 매사가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귀신이 돼지에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귀신이 얼마든지 인간에게 들어가서 상주할 수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그동안 귀신에 의해 움직이던 자를 성령에 의해 움직이게 하시는데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활동은 악마가 인간으로 하여금 왜곡된 세계관 속에서 움직이게 했다는데 있습니다. 이미 천국이 와 있습니다. 골로새서 1:13에 보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이미 죽은 자가 세상 즐거움을 제대로 맛보지 못하고 죽었다고 안타까워합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나사로의 여동생인 마리아입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요 11:32)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계시기에 오빠는 꼭, 필히 죽어야만 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만이 ‘신의 윤리의 골판지 장벽’을 넘어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하여 이미 내가 죽었음을 아는 것이 복음입니다.
성도는 앞으로 ‘죽기 전’에 뭘 하느냐가 아니라 ‘이미 죽은 자가’가 뭘거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윤리’입니다. 이미 죽었기에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세례 요한처럼 이 세상을 광야로 환원시키는 일에 종사하게 됩니다. 세상을 ‘새로 보기’하는 겁니다. 헤롯처럼 군림하는 권세에 속하지 않는 ‘양말의 빵구 자국’처럼 새로운 세상에 등장했음을 알리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새로움으로 인하여 더 이상 자기 자신에 집착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8강-빌 2장 25-30절(주님의 윤리)20060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2장 25-30절입니다. 신약성경 319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2:25-30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오늘 본문에 어떤 인물 하나 등장하지요. 에바브로디도, 이 사람은 30절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서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눈에 보이지 않잖아요.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지 자기 일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사도, 나를 위하여 죽기를 각오하면서 나 사도를 섬기고 나 사도가 하는 일을 도와주는 것, 사도는 30절에서 그것을 그리스도의 일로 그렇게 봅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절)라는 그 말씀 마태복음 25장의 원칙이 그대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제 3자 입장에서 에바브로디도라는 이 사람이 하는 일을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겠지요. 세상에서 얼마나 할 일이 많고, 나름대로 출세하고 싶고, 돈 벌고 싶고, 성공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타고난 것인데, 태생인데 이 사람은 사도의 일이 곧 그리스도의 일이고, 그리스도의 일이 곧 사도의 일인 것을 알아서 자기의 목숨까지 내놓으면서 사도의 일을 도와줬습니다.
그야말로 미친 것이 아닌지, 정신병자인지, 사람이 뭔가 일을 할 때는 얻는 것이 있어야 되는데 이 사람은 일을 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그것 외에 그 일로 인하여 얻어지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어떤 대가 같은 것이 없어요. 이것을 통해서 에바브로디도라는 사람이 이 본문에 등장함으로서 도대체 인간이라고 해서 동일한 인간으로, 동일성으로 일방적으로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모든 태어난 인간은 동일하게 태어났지요. 아담의 본성을 가지고, 죄성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그러나 에바브로디도 이런 사람의 경우에는 그 요건에 부합되지 않아요.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굉장히 칭찬을 받는다는 말은, 사람은 목숨을 갖고 있다고, 얻었다고 해서 그냥 갖고 있으면 안 되는 거예요. 이걸 써야 된다 이 말이지요.
어디에 써야 되느냐 하면, 목숨을 바쳐도 상관없을 정도로 의미 있는 일에 쓰라고 이 목숨을 부여받은 겁니다.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외로운 것은 목숨 바칠 데가 없어서 외로운 거예요. 목숨 바칠 데가 있으면 정신을 못 차립니다. 사람이 목숨 바칠 곳이 정해지고 발견이 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잊어버리게 돼요. 행복이 따로 있겠습니까? 그게 행복이지요.
나 자신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 내가 지금 아픈지 돈이 있는지 없는지도 생각나지 않고 자기 하는 일에 정신이 빠져서 자기 자신의 가치가 뭐냐, 쓸데없는 그런 것까지 계산할 필요 없다 이 말이지요. 이처럼 에바브로디도라는 사람은 분명히 육을 갖고 있으면서도 거기서 영이 발산됩니다.
이러한 분의 대표적인 모델이 누구냐 하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에요. 예수님께서는 육을 가지고 이 땅에 죽음을 맛보면서도 나중에 부활의 길로 가십니다. 거기에 누가 달라붙어 있느냐 하면, 성령께서 달라붙어 있어요. 이것이 하나의 모델이고 하나의 시범이 되지요. 육으로 난 것은 모든 인간의 공통점입니다. 어느 인간도 육의 본성을 극복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누가 달라붙어야 돼요. 성령이 달라붙는다. 귀신이 달라붙듯이 성령께서, 거룩한 영께서 달라붙는다, 라고 제가 이 말씀을 하는 이유는, 천국 가는데 사람들이 실력발휘해서는 천국 못가요. 천국은 시험 쳐서 가는 게 아니라 그 말이지요.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 그거 확인해서 그거 가지고 천국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납치되어야 돼요. 납치당해야 돼요. 일종의 휴거의 속성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휴거라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지요. 죽은 자가 하늘의 에너지에 의해서 천군천사가 내려올 때 그게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4절 이하에 나옵니다. 천군천사 내려올 때 죽은 자들의 몸이 부활의 세계로 부활의 몸으로서 딸려 올라가는 것.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그것이 마지막 때는 육체로 보이지만 사실은 성령 안에서는 이미 우리가 그 지경에 그런 관계에 있어야 돼요. 제가 여러 번 이야기하지만 성경을 아무리 봐도 두 가지가 안돼요. 첫째는 뭐냐, 이미 우리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게 되고 두 번째가 뭐냐, 이미 천국이 왔다는 사실, 이 두 가지가 안돼요. 자꾸 실력발휘를 하려 합니다.
교회가 천국 보내주는 보습학원이 아닙니다. 지금 에바브로디도가 우리가 보기에는 역사적 존재니까 어떤 신체가 있겠지요. 신체가 있겠지만 에바브로디도가 목숨을 다하여 주의 일을 했을 때에 바보 같다는 생각을 물론 다른 사람도 하지만 그 일가친척 같으면 얼마나 속이 타들어가겠습니까?
“이 바보등신아, 그게 뭐라고, 그게 뭐라고, 예수의 일이 뭐라고 네 아까운 목숨을 바치냐? 내가 그러려고 너를 낳았느냐 이 인간아!” 하고 부모 같으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세상에서는요, 없는 것 가지고 있는 것과 싸우는 이것은 무모함이에요, 무모함.
빌립보서 2장 25절에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군사 된 자요” 군사는 싸우는 군인이지요. 군인인데 사도바울이나 에바브로디도나 뭐 가진 게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돈키호테도 아니고요. 아무것도 없으면서 세상에 있는 것들과 싸우겠다고 나서니 이런 무모함이 어디 있습니까? 아마 에바브로디도의 부모님이 계신데 사도바울을 만난다면, 자기자식을 때리지 않아요. 만약에 부모라면 사도바울 가슴을 막 치면서, “네가 내 자식 인간 완전히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고, 네가 뭔데 내 자식을 속여서 아무 실적도 없는, 아무 결과물도 없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허구와 허상밖에 없는 이 일에 왜 내 자식을 끌어들여서 내 자식 인생을 네가 망쳤느냐? 물어내! 물어내!” 이렇게 달려들었을 거예요.
여러분도 사도바울 보면 그럴 수 있겠지요. 그러면 사도바울도 말 잘해야 돼요. 에바브로디도의 부모님 보고 “제가 잘못했습니다.” “잘못했다고 하면, 그렇게 말로만 하면 되나?” 잘못했다고 말하면 안돼요. 잘못한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나는 가만있는데 자기가 좋다고 따라온 것 뭐 어쩌겠습니까?” 이러면 또 일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성경을 보고 있는 우리 입장을 어느 선에 둬야 하느냐? 일단은 이 에바브로디도가 자기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아무 대가도 없는 허구적인 일에 목숨까지 바친다는 이 점에 있어서 이게 평범한 일은 아니잖아요. 보통일이 아니에요.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원하는 일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본인이 요구하는 일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것을 통해서 이미 예수님은 이 땅에 살아서 하늘로 가셨으니까 예수님 떠나고 난 뒤에 이 땅에 무슨 일이, 계속해서 무슨 이상한 일이 반복되는지를 우리가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안됐다. 측은하다. 바보 되었구나. 사도바울 말 듣는 게 아닌데. 그 말에 현혹되었구나. 사도바울의 정체가 수상하다. 의심해보자.” 그런 식으로 세상은 계속해서 밀어붙일 거예요.
그런데 에바브로디도가 우리 이야기를 들었다 칩시다. “당신 정신 차려라. 당신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당신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뭘 얻겠다고 하는가? 사도바울이 했잖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당신도 믿고 조용하게 네 할 일이나 하고 지내면 되잖아. 그렇게 네가 나댄다고 세상이 뭘 달라지고 하는 것이 아닌데 네가 왜 열 내서 정신을 거기에 다 팔고 있는가? 네가 뭔가에 현혹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라.”라고 충분히 우리가 추문할 수 있고 조언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아까 말한 그 두 가지, 우리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한테는 이론이지만 에바브로디도나 사도바울에게는 이것이 실재라는 사실. 두 번째 이미 천국이 왔다는 겁니다. 천국이 이미 와버렸을 때 천국가기 위해서 내가 뭘 준비해야 될 그 일과 이미 천국에 왔기 때문에 천국이 온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사도바울과 에바브로디도는, 그 차이점을 이미 안다는 겁니다. 알고 있어요.
이걸 제가 쉽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윤리 신의 윤리지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그 윤리, 정의로움, 사랑, 이 모든 경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윤리와 주님이 우리에게 말하는 윤리가 서로 대조적이고 서로 반대됩니다. 이게 같지를 않아요.
천국은 시험 치지 않는다 했지요. 그것은 어느 누구도 실력으로 천국 간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예수님을 통해서 알기에 그렇습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이 주신 윤리는 율법으로, 말씀으로 줬다 이 말이지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과 말씀을 줌으로서 ‘우리보고 뭐 어쩌라고?’ “그대로 살아라.” “알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주신 윤리를 가지고 내 쪽에서 그걸 실천에 옮기는 그런 방식으로 단 한명도 천국 간 사람이 없어요.
단 한명도 주를 위해서 목숨 바칠 위인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주를 위해서 순교한다고 해봤자 이것은 자기 일이 돼요. 가지도 못할 천국을 내 힘으로 가겠다는 하나의 방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수행하고 실천하는 겁니다. 그만큼 자기가 안 죽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부활 할 때 성령께서 달라붙었다 했지요. 그러면 예수님 죽으심과 부활과 다시 오심, 재림이라 합니다. ‘파루시아’라 하는데 재림, 그 모든 것이 이 인간세계에서는 그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요. 사람은 자기가 들어가지 못하는 세계는 없는 세계입니다. 재림이라는 것은 인간의 머리에는 없는 분이 나타나는 것이 재림이에요.
참, 이런 이야기가 무척 어려운데 어려워도 할 수 없이 해야 되겠습니다. 저 세상과 천국이 달라요. 저 세상이라 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고 죽으면 가는 세계, 더 노골적으로 해서 내가 여기에 있는데, 내가 여기 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여기 있는데 저 세상은 뭐냐, 저 세상은 죽고 난 뒤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한데 모인 곳이 천국이다, 라고 생각하신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이라든지 그게 별 의미 없어요.
이것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윤리입니다. 신의 윤리에요. 자기 구원이지요. 이것은 저 세상에 해당됩니다. 천국이 아니에요. 천국은 이 세상에 없어요. 천국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인간이 간파하는 것은, 인간이 감지하는 것은 자기 목숨이 붙어 있다는 것을 감지해요.
그래서 이 목숨이 붙어 있을 때 이 붙어 있는 목숨을 가장 귀한 것과 바꿔치기 하기 위해서 인간은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겁니다. 가장 귀한 것이 있을 때는 이 목숨을 그 때 내놓겠다는 겁니다. 바꿔치기 해도 손해가 되지 않는, 손실이 되지 않는,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뭘 까를 목숨 자체에서 계속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출애굽기에서 홍해를 건너지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홍해 건너고 난 뒤에 가나안 복지가 있다. 가나안 복된 땅이 있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막상 홍해 앞에 섰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모독적인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홍해는 죽으라고 있는 바다에요. 아무도 홍해에 멀쩡하게 산채로 갈 자가 없습니다.
실제로 애굽군사들은 홍해에 다 빠져죽었어요. 만만한데가 아니에요. 홍해깊이가 한 20센티 아니에요. 무릎팍까지 오는 그런 깊이가 아닙니다. 빠져죽는 데에요. 따라서 내가 죽는 마당에 가나안복지는 없는 겁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저 세상도 내가 죽는 마당에는 없는 세계에요. 천국은 없는 거예요.
성경을 천 독 만 독해도 천국이 없다는 생각을 사람들은 정말, 성경을 안보는 사람 말고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우기면서 천국 없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어요.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는 예수로 생각하지 나를 없애는 예수님으로 아무도 생각 안하고 있어요. 그러니 40년, 50년 교회 다녀도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천국은 이미 왔는데 온 천국이 안 믿어지니 죽고 난 뒤에 가는 세계를 자꾸 염두에 두는 겁니다. 내가 생각한 그것이 나를 살릴 수 있는 그게 자기 한계기 때문에 그래요.
예를 들면 요한복음 11장 3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게 누구 말인지를 좀 있다 말씀드릴게요. “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게 누구 이야기냐 하면 바로 마리아가 한 이야기에요. 마리아, 참, 천주교에서 얼마나 유명한 사람입니까? 그 마리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말고 또 있어요.
이 마리아가 하는 말이 “주님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빠가 죽지 아니하였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 마리아의 말에 토 달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이런 자세, 이런 모습이기 때문에. “마리아야, 그것은 틀린 말이야. 주께서 여기 계셔도 오빠가 죽을 수 있어.” 그 정도 해서는 이 말을 뒤집을 수가 없어요.
이렇게 해야 돼요. “주께서 여기 오신 이유는 우리를 죽이기 위함이다.” 이렇게 해야 돼요. 이 정도까지 나가줘야 돼요. 지금 천국을 누가 막느냐? 내가 막거든요. 천국 가려는 내가 천국을 막아요. 예수님의 재림을 누가 안 믿느냐? 내가 안 믿어요. 내가 여기 있음으로서 재림이 아무 의미도 없어졌어요.
따라서 천국이 방해되지 않기 위해서는 주님이, 저 세상, 자꾸 저 세상, 좋은 세상, 살아서는 이 땅에서 고생하지만 죽어서는 좋은 세상, 저 세상, 그것부터 없애기 위해서는 그것을 생각하고 있는 이 땅에 있는 나를 없애는 방향으로 주께서 일해주심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걸 고마워할 줄 알아야 돼요. 자꾸 엉뚱한 생각을 하니까.
인간은 환자에요. 치매환자가 따로 없어요. 인간은 환자에요. 모세가 “여러분, 이것만 건너면 저기에 가나안 땅 있습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지금 남자만 6십만이 되는 그 숱한 사람들이 선 곳은 죽음의 바다에요. 빠져죽는 거예요 그냥. 내가 죽는 마당에 그 가나안 복지가 무슨 의미가 있어요? 앞에 홍해바다의 파도가, 검푸른 파도가 출렁거리고 있는데요.
사람들이 교회오고 있다는 말은 안 죽겠다는 말이거든요. 그것은 교회 자체가 천국을 방해하고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11장 32절에서 마리아의 말 다시 말씀드릴게요.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했습니다.” 마리아가 진심을 이야기했어요. 그러나 진심은 진리가 아닙니다. 나 본심이 이렇다. 본심은 진리가 아니에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겠습니다.”
주께서 오지 않았어요. 오빠는 죽었습니다. 끝입니다. 안녕히 돌아가십니다. 별 볼일 없습니다. ‘당신의 실력이 그 정도밖에 안됩니까? 나를 살릴 수 없는 실력자라면 내가 당신하고 굳이 관계 맺을 이유 없습니다.’ 이게 우리 마음 아닙니까? 이게 우리 마음이잖아요. 오늘 에바브로디도 보세요. 미친 거 아니에요? 예수 왜 믿었습니까? 뭔가 얻을 게 있다고 자기 목숨 바치잖아요.
그게 아니라니까요. 에바브로디도는 그게 아니에요. 이미 그는 죽었고 이미 그는 천국에 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윤리가 아니고 주님과 함께 있을 때 윤리가 뭐냐? 본인의 윤리가 아니고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에요. 단순하게 이야기해서 제가 여기서 한 10미터 걷는다 해 봅시다. 누가 걸으라고 지시했습니까? 누가 걸으라고 지시했지요?
우리는 지시한 사람도 없이 그냥 걸어요. 그런데 10미터 끝이 절벽이다. 누가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거기서 스톱하게 했는가? 몰라요. 그냥 내가 스톱한 거예요. 인간은 누가 그렇게 했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기껏 생각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생각해서, 이것은 내가 걷게 해서 걸었고 내가 중지해서 중지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늙어죽는 것은 누가 중지시킵니까? 아무도 중지시킬 사람이 없어요. 인간은 해답이 없으니까 모든 일을 내가 내 의지로 했다고 자꾸 우기고 있어요. 그러나 어느 인간도 자기 뜻대로 살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이 울어요. 보통 장례식에서 우는 것은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이 안타까워서 울지요. “아이고, 더 살아야 되는데 왜 그냥 가십니까? 살아서 이 좋은 낙을 봐야 되는데, 이 좋은 것, 맛있는 것, 홍시도 곶감도 못 먹고 그냥 가시고, 아이고!” 하지요. 제사지내면서 맛있는 것 상에 올려서 많이 드시라고, 한 품지 말고 죽어서라도 많이 드시라고 올리잖아요. 풍성하게.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보고 우느냐 하면, 지금 살아 있다고 우기는 사람보고 울어요. 오빠는 울지도 않는데 살아 있는 사람들이 본인이, 오빠가 살았고 마리아 마르다가 본인이 죽어 있다는 사실을 몰라요. 다시 말해서 홍해 건너고 난 뒤에 다시 홍해를 바라보자, 이 말이지요.
어떤 사람, 남자만 60만 되는 이스라엘 중에서 한 사람만 모세 눈을 몰래 피해서, 꼭 그런 장난꾸러기가 있잖아요, 모세 눈을 몰래 피해서 그냥 홍해를 살아서 이미 건너왔다고 칩시다. 지금 이스라엘이 모세한테 삿대질 해가면서 막 달려들어요. “우리가 죽을 데가 없어서 이 홍해바다, 이 공동묘지에 죽이려고 왔느냐?” 하고 막 모세보고 닦달내고 있지요.
지금 모세는 주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 일을 하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혜로서 죽음의 날에 장자가 무사해서 그렇게 왔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으로부터 혜택을 받은 그들이 지금 그 다음차례에 준비된 주의 일에 대해서 강력하게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반대하고 있는 거예요. 뒤에는 애굽군사들의 마차소리, 함성소리가 막 들려요. 모세보고는 우리가 납득이 되는 대책을 세우라고 난리고요.
그런데 홍해를 이미 몰래 건너온, 물론 그런 사람은 없지만, 몰래 미리 건너간 사람의 말을 들어보게 되면, 울어야 될 대상이 누구냐? 지금 모세보고 닦달 낼 것이 아니고 본인이 뭘 모르냐? 본인이 누군지를 몰라요. 홍해 없는 본인은 본인을 몰라요. 홍해 없이는 본인의 인식론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그들을 홍해 앞까지 데려오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본인이 누군지를 몰라요. 본인이 누군지 모르니 모든 것이 곡해가 됩니다. 죽은 사람보고 죽었다고 하고, 산 사람보고 살았다고 하고, 이게 말이 맞는 이야기에요? 자기는 살았고 돌아가신 분은 죽었다고 하니까 울기는 본인을 보고 울어야 될 상황을 죽은 사람보고 안타깝다고 우는 거예요.
이것은 교회 바깥뿐 아니고 교회 내부도 마찬가지에요. 신학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왕 어렵게 하는 것 더 어렵게 해버립시다. 마태복음 2장의 동방박사이야기. 동방박사가 왔을 때 별이 의도적으로 깜빡 사라져버렸어요. 그래서 동방박사가 물을 데가 없는데 예루살렘에 가서 헤롯대왕을 만나게 되었어요. 이것은 하나님이 의도한 거예요. 별이 있으면 바로 직행할 것인데 별이 사라져서 중간에 차가 정차를 해버렸어요.
예루살렘에 가서 헤롯왕을 만났습니다. 헤롯왕은 이 사람의 족보가 유대인이 아니고 에돔사람, 이스라엘계통이 아니고 이스라엘 형인 에서계통의 에돔사람이에요. 에돔사람인데 로마에서, 일방적으로 네가 이스라엘 왕 해라, 해서 왕이 되니까 통치는 해야 되겠고 유대인이 아니라고 족보는 따지고 들고, ‘에라, 내가 잘 보이자.’ 해서 70년 동안 거대한 헤롯성전을 지어주면서 민심을 달래려고 했던 사람이에요.
억지로, 억지로, 백성들의 구미를 맞춰가면서 그냥 근근이 왕질 하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권력에 누수가 있으면 굉장히 민감해져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동방박사가 와서 하는 말이 “여기에 이스라엘 왕이 새로 태어났다면서요?”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미쳐버리는 거예요. 헤롯왕은 권력에 누수가 없어야 돼요.
그래서 이 땅에서 일어나는 어떤 위인들도 나의 권력에 예속되어야 되고, 귀속되어야 되는 겁니다. 속해야 돼요 전부 다. 내 밑에 속해야 된다고요. 그 자리가 최고의 자리가 헤롯왕이고 나머지 자리는 헤롯왕에 의해서 권력으로 장악되는 자리입니다. 동방박사가 하는 말이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습니다.” 왕이 등장하면 라이벌이 되거든요.
그러면 거짓말로, “그 자리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세요. 나도 차기 왕을 경배하겠습니다.” 그렇게 나왔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동방박사가 그렇게 한 뒤에 다시 예루살렘을 떠나 나오니까 사라졌던 별이 다시 등장했어요. 별이 등장하면서 동방박사는 정말 아기예수가 있는 점에서 스톱이 되고 말았어요. 그 자리에 예수님이 태어났습니다.
동방박사는 그 아기 예수에게 경배를 했지요. 그러면 이것은 뭐냐? 그 기가 센 권력의 헤롯, 요새말로 김 정은이라고 보면 돼요. 그 김 정은 같은 헤롯세계에 속하지 않은 다른 자리가 따로 있는 거예요. 헤롯의 자리를 펑크 내는 다른 자리가 따로 만들어질 때 그 자리가 천국입니다. 천국은 저 세상이 아니고 이 세상을 빵꾸내는 자리에요. 양말 빵꾸난 것 알지요.
세상에 섞이지 않고, 속하지 않는 자리가 새로 마련되는 거예요. 그러니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 사람들이 미쳤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의미가 그게 모든 의미의 총체고 그것이 세상이에요.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는 사람들보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주의 일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니까 그게 얼마나 어리석게 보이고, ‘너 지금 뭐해? 너 지금 뭐하고 세월 보내느냐? 너 그 일 한다고 천당 가?’ 이렇게 자꾸 천당 가고 안 가고를 따지는 거예요. 천당 가고 안가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에바브로디도는 지금 주님의 나라에 이미 도착했어요. 그 나라의 일꾼이고 일종의 직원이에요. 영업사원, 대리. 그 나라, 주님의 나라에 소속된 거예요.
골로새서 1장 13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 말씀하면서 참 답답했을 거예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이미 그 나라로 옮겼다는 거예요. 죽어서 가는 저 세상 아닙니다. 이미 옮겼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말합니다. “거기가 어딘데? 번지수, 내비게이션 주소 찍어라.”
주소가 찍힙니까? 복음을 외치는 목사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고 듣는 사람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에요. 양말 빵꾸나야 돼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내 의미와 내 목표와 비전 꿈 그것이 먹혀들지 않는 세계가 있어요. 왜냐하면 천국은 시험 쳐서 가고 준비해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냥 납치당한다니까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을 때, 그리고 죽고 부활 할 때 뒤에 성령이 달라붙었다 했잖아요. 성령이, 주의 영이 달라붙은 거예요. 사도행전에 보면 오순절에 성령이 왔는데 한 두 사람에게 온 것이 아니에요. 수천 명한테 성령이 달라붙었어요. 그 사람들이 앞으로 죽죽 가면서 사는 것은, 성령세례 받은 사람들이 사는 것은 이 땅에서 기이한 소리를 외치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도저히, 뭔가 절대적구별, 차이, 단절, 그런 것을 유지하면서 외치고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인데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 보지 못한다는 그 말도 그대로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신의 윤리밖에 없었거든요. 신의 윤리 율법이었어요. 율법이니까 그 율법대로 시험 쳐서 합격한다.
이렇게 생각해서 자기가 윤리적으로 대비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돌로 쳐라, 해서 자기 신앙 좋다는 것을 과시하는 겁니다. 사람이 육에서 영으로 가지 못한 사람은 과도한 윤리를 가지고 방어책을 동원시킵니다. 과도한 윤리지요.
자기의 과거를 촘촘히 따져가면서 이렇게 착실히 살았으니까 설마 재림하시고 주께서 오시더라도 나한테는 뭔가 흠집 낼 것이 없을 거야, 계속해서 자기 자신의 윤리와 행동에 대해서 굉장히 본인이 철저하게 돋보기로 심사를 해나가는 거예요.
그러니 자기 자신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거 마귀 들린 거예요. 마가복음 5장 13절에 돼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귀신들린 사람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귀신보고 나가라, 해서 귀신이 나갔거든요. 귀신이 나오면서 예수님과 이야기하는데 예수님이 귀신보고 돼지 떼에 들어가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여기에 2천이라는 숫자가 나와 있어요. 숫자라는 것은 육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기호요 언어입니다. 영의 세계에서는 숫자라는 것이 1만 있을 뿐이고 그것이 숫자가 통용되는 육의 세계에서는 제로, 공백이 돼요. 빈자리가 돼요. 양말 빵꾸난 거예요. 없어요. 숫자로 헤아릴 대상 자체가 없다 이 말이지요.
2천 마리가 된다는 말은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 오신 것을 환호하는 것이 아니고 돼지 키우는 사람들이 돼지 2천 마리 날린 그것이 안타까운 거예요. 그 돼지가 있어야 살아 있는 내가 더 살거든요. 자기가 죽은지도 모르고.
이 본문에서 귀신이 예수님하고 이야기가 된다는 말은 이 세상에 예수님과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은 악마밖에 없어요. 모든 것은 주님 보시기에 얼음 땡, 정지되어 있거든요. 아까 제가 인간이 10미터 걷는다, 백 미터 걷는다 할 때에 주께서 장기 알 손가락으로 밀듯이 그냥 가게 하신 거예요.
이 세상에 움직이는 것은 예수님만 움직이고 악마만 움직이지 다른 인간들은 움직일 수 없어요. 주께서 발걸음을 인도하지 않으면 한발자국도 나설 수 없는 겁니다. 왜? 죽었기 때문에, 인간은 죽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죽었기 때문에 언약을 언약대로 이루기 위해서 미는 겁니다. 오늘 라면 끓일까, 저녁에는 시원한 냉면 해볼까, “여보, 뭐할까? 냉면 할까?” 이 모든 것이 주께서 허락하심 하에 움직이는 거예요.
실제로 노래 가사에도 그런 것이 나와요. “빗방울 떨어지는 그 거리에 서서 / 그대 숨소리 살아있는 듯 느껴지며 / 깨끗한 붓 하나를 숨기듯 지니고 나와 / 거리에 투명하게 색칠을 하지 / 음악이 흐르는 그 카페에 쵸코렛색 물감으로 / 빗방울 그려진 그 가로등불 아래 보라색 물감으로 / 세상사람 모두다 도화지속에 그려진 / 풍경처럼 행복하면 좋겠네…….”
김 현식의 <비 오는 날의 수채화> 라는 노래에요. 색깔을 줄 때 화사한 행복을 느끼듯이 이 세상은 전부 다 죽어 있어요. 전부 다 시체가 되어있다고요. 이게 주님의 세계, 이미 온 천국에서 빵꾸난 양말 그 지점 그 자리에서, 동방박사가 봤던 그 아기예수의 지점에서 봤을 때 헤롯의 모든 자리는 죽은 자리에요.
악령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살아 있는 것은 악령밖에 없으니까 악령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하나의 물체, 기계 같은 존재. 성경 그렇게 보셔야 돼요. 반대로 보셔야 돼요. 이미 죽은 거예요. 입을 벌리고 뭘 주장하는 것도 마귀가 자기 정체를 감추기 위한 수법입니다. 모든 것이 다 그래요.
예를 들면 “신종코로나 끝난 것이 아니고 재 확장 됩니다. 그러니까 손 씻으세요.”라고 질병관리본부에서 이야기할 때 누가 그 이야기를 하게하고, 그 이야기를 하는 취지가 뭐냐? “우리가 살아 있으니까 살아 있는 우리가 이 역병을 이겨내고 더 행복하게 삽시다.”라고 주장하는 그 배후의 주장자가 누구입니까? 이미 복음을, 이미 천국이 왔음을, 이미 죽었다는 사실과 천국 왔음을 감추기 위한 악마의 수작에 불과한 거예요.
나보고 욕하세요. 같이 미치라고 끌어당기지 말라고, 너나 미치라고 하세요. 그러면 나만 미치면 좋겠는데 에바브로디도하고 사도바울도 같이 미쳤거든요. 제가 다시 이야기합니다. 그 모든 생각이, “나는 성경 싫어. 복음 싫어. 나는 나 하는 대로 살게 그냥 놔둬. 그게 편해.” 편한 것은 좋은데 자기 생각한다는 것은 그만큼 이 땅에서 행복은 끝났습니다.
인간은 자기 생각하는 순간 행복은 없습니다. 여러분, 군중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태어나서는 부모가 옆에서 말 걸어주고 다 키워주니까 이 세상도 그런 줄 알지요. 커보세요. “공부 다 시켰다. 대학 보내 줬으면 되었지. 이제 네가 알아서 취직해서 밥벌이해라. 나가라. 나이가 서른이나 되었으면 나가 이제. 나가서 신천지에 가든 뭘 하든지 나가.”
이렇게 쫓아냈을 때 젊은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 누구에게 말을 건넵니다. 저기요, 해보면 “저 도 안 믿습니다.” “저기요, 실례지만 말씀 좀 드릴 수 있습니까?” 하면 “물건 안삽니다.” 무슨 말인지 들어보지도 않아요. “물건 안 삽니다.” 세상과 같은 말이 뭐냐? ‘세상 = 시장’입니다. 시장은 영업해야 돼요. 영업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재간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교회마저 영업이에요. 모든 것이 영업입니다. 줄 것 주고받을 것 더 받아내겠다는 것이 영업의 시장 그게 세상입니다. 이 땅 천국 아니에요. 정어리 떼가 확 몰려오니까 아무나 손 벌리면 다 받을 것 같지요. 정어리 떼 속에 들어가서 그 중에서 한 마리 한번 잡아보세요. 한 마리라도 잡히는가? 그 많은 군중 그 어느 것도 내 것 하나 없어요.
내가 헤롯의 자리 악마의 자리에 굴종해야 돼요. 고개 숙여야 됩니다. 기죽어야 돼요. 그래야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을 수 있어요. 이거 실제이야기입니다. 대학 4년 내내 붙어 다니던 친구 있다 합시다. 교수가 와서 “여기 석유공사 취직자리 났는데 둘 중 누가 갈래? 둘이 성적 비슷한데 너하고 네 친구하고 둘이 의논해서 골라서 와라.” 했을 때 먼저 들은 사람이 의논 안합니다. “교수님! 제가 가겠습니다.”
친구? 의리? 의리? 친구? 우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결국 친구도 취직자리 앞에서 양보가 없어요. 또 하나, 두 친구가 붙어 다녔는데 거기에 예쁜 아가씨가 생겼네요. 그 예쁜 아가씨를 누가 차지하나 했는데 어떤 한쪽이 차지했을 때 한쪽은, 자기가 흠모했던 아가씨가 내 친구에게 갔을 때 그 애는 동해바다에 뛰어들어서 자살했어요. 영화입니다. <바보들의 행진>이라는.
철학과 친구인데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가 자기 친구에게 가니까 자살해버렸어요. 왜? 자리거든요. 내 몸 하나로 사는지 알았더니만 자리가 있어야 산다는 사실을 세상에 나가보니 아는 거예요. 그리고 그 자리는 헤롯에게 굴복해야 자리가 주어지는 거예요. 정의라는 것이 이 땅에 없습니다. 사랑도 없을뿐더러 정의도 없어요.
사람들이 거기 그 자리에서 더 큰 자리, 더 좋은 자리, 더 편한 자리, 쉽게 일하고, 짧게 일하고, 월급 많이 받는, 그래서 사람구실하고 사람처럼 살아보겠다고 애를 쓰는데 그 모든 일을 할 때 결국은 주어지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장벽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누가 설치했느냐 하면,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설치했어요.
악마의 세계, 신의 윤리가 작동하는 세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되면 이 땅에서 복 받고 죽어서 천국 간다고 그렇게 사기를 쳐서 인간들을 완전히 옭아 맨 그 세계, 그 세계하고 천국하고, 예수님 계신 세계하고 바로 통하는지 알았지요. 그러나 자기가 갖고 있던 그 모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실천을 하니까 골판지 장벽에 막히는 거예요.
그 장벽은 뭐냐 하면, 착하고, 어질고, 신앙대로 살아도 결국 악마나 주님이나 양쪽 다 요구하는 것은 뭐냐 하면, 죽으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홍해바다를 주께서 설치했을 때에 아무리 가나안 복지가 젖과 꿀이 흐른다고 해도 일단은 그게 너의 세계, 네가 구상하고 상상한 세계, 살아 있는 내가 상상한 세계는 아닌 거예요.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그토록 잘 대접하고 말씀 들었지만, 마르다는 요리를 해서 예수님께 바치는 그것이 주특기고, 마리아는 요리는 못하지만 앞에 딱 앉아서 싸가지 없이 말씀 듣는 것이 주특기였고, 그렇게 한다 할지라도 현재 지금 살아 있는 나를 죽어서도 더 멋있게, 행복하게 사는 나로 연속해서 이어지게 하는 수단으로서 예수님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만든 골판지 장벽에 다 막히는 겁니다. 합판에 다 막혀서 갈 수가 없어요.
주께서 그렇게 사람들을 악마에게 맡긴 이유는 악마로 하여금 결국 인간의 한계는 여기까지다, 끝.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성령께서는 악마에 의해서 예수님이 돌아가게 만들었어요.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스톱이 되는 겁니다. 사람이, 아까도 2천 마리 돼지 이야기를 했지만, 죽은 자처럼 살라,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죽은 자처럼 사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죽은 자 입장에서 봐야 돼요. 홀로 홍해를 건너온 입장에서 다시 봐야 돼요. 이 말은, 죽는다는 것이 새삼스러운 문제가 아니고 주의 뜻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죽는다는 것.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그래서 새로움이 오게 되면, 전에는 새로움이 오기 전까지는 ‘내가 죽으면 안 된다. 내가 아프면 안 돼. 나는 이 땅에서 인생 실패하면 안 돼.’라고 했는데 새로운 것이 딱 오게 되면 그런 생각이 없어져 버려요.
그런 생각이 없어지고 “주께서 데려가기 전에 저보고 뭘 하란 말입니까?”라는 지시를 받게 됩니다. 성령이 달라붙은 인간은. 그러면 다른 사람이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거야?” ‘나 지금 기도중이니까 가만있어. ‘주님, 저 오늘 왜 살려주고, 저는 오늘 뭐할까요?’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거 하면 나한테 무슨 이득이 옵니까, 그런 생각이 없어요.
열왕기하 2장 1절에 보게 되면 “여호와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로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엘리사가 길갈 - 벧엘 - 여리고, 나중에는 요단강물을 헤치고 가는데 왜 엘리야로 하여금 다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오기 전 상태로 되돌리는 이유가 뭐냐?
천국은 다시 시작하는 데기 때문에 그래요. 엘리야 당시에. 그게 마태복음 3장1, 2절에도 나오는데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세례요한도 마찬가지에요. “현재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살고 있지만 그것은 말소의 효과로서 없애버리자. 네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든지,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든지, 갈릴리사람으로 25번지에 태어났든지 관계없이 처음으로, 너는 요단강 이전으로 돌아가자. 광야로 돌아가자. 광야로 돌아가서 거기서부터 ‘주님, 제 할 일이 무엇입니까?’라고 시작해라.”
그게 성령 받은 세례요한이 할 일이에요. 성령 받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느긋 하자, 이 말입니다. 느긋 하자. 죽기 전에 뭘 할까요, 하지 말고 이미 죽은 자가 뭘 할까만 생각하면 돼요. 이미 죽었는데 뭘 할 꺼냐? 에어컨 고장 났는데 그거나 바꾸면 되겠지요. 이미 죽었는데 뭐 할거냐? 죽었기 때문에 내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은 골판지에 막힙니다.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착하게 반듯하게 살아왔는데, 뭐 내가 믿음대로 살아왔는데 앞으로 내 인생을 주께서 어떻게 이끄시는가? 주께서 안 이끄세요. 주께서 그냥 죽어버린 인간에 대해서 그 뜻과 희망과 목적은 아예 말소해 버린다니까요. 말소, delete, 그것은 듣지도 않아요.
매일매일 주께서 할 일은 주께서 우리에게 하실 거예요. 에어컨이 고장 난다든지 그런 것. 그냥 더 해도 의미 없고, 안 해도 의미 없고, 시험 잘 쳐도 소용없고, 안쳐도 괜찮은 것, 이게 주님 앞에 납치된, 이미 양말 빵꾸난데서 손이 와서, 성령이 와서 나를 빵꾸난 쪽으로 집어넣었을 때 그 여유, 그럴 때 정작 이 땅에서 움직이는 것은 성령으로 사는 사람만 움직입니다. 다른 사람은 전부 다 정지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무서워하지 마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에바브로디도가 죽도록 충성할 때에 참, 사람들은 걱정하고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우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바로 그 우리 자신이 뭐가 문제가 있는지, 아직도 우리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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