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예수의 일

아빠와 함께 2020. 6. 14. 17:57
 
 이근호

 

20-06-14 13:36 
 

예수의 일

2020년 6월 14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2:19-24

(2:19)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2:20)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2:21)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 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2:23)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2:24) 나도 속히 가기를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사도가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을 빌립보 교회에 소개합니다. 사도 바울만을 듣기를 원했던 사람들에게 다소 혼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과 디모데와의 관계를 보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숱한 집합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합체마다 자체적으로 결속을 다집니다.

뿐만 양적 팽창을 노립니다. 빌립보교회도 그런 집합의 생리에 놀아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강조하는 것은 양에서 오는 힘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즉 교회 성도는 어떤 식으로 서로와 관계 맺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디모데를 보냅니다. 사도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는 근원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관계는, 곧 예수님과 사도 바울과의 관계가 되고, 이 관계는 곧 사도 바울과 디모데와의 관계가 되고 이는 곧 성도와 성도끼리의 관계로 확장됩니다. 이 관계의 전달과 수송을 위해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보냅니다. 이 관계 전달에서 비로소 평소의 이 인간 세계의 본성이 드러납니다.

세상 사람들은 각지 ‘자기 일’이 곧 최종 일입니다. 모두들 ‘자기 일’을 위하여 ‘예수님’을 찾았던 겁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디모데들을 그들에게 보내므로서 빌립보 교인들이 ‘예수의 일’을 하지 않음을 적나라하고 폭로시키고자 합니다. 그 표준적 인물이 디모데입니다. 디모데에게는 사도가 그동안 수모가 공유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왜 고생해야했고 사도가 왜 욕을 얻어먹어야 하지는 사도와 함께 했던 디모데의 인생여정에 그대로 녹아져 있습니다. 소위 복음을 반대하는 이들이 무엇 때문에 복음을 반대하는지 사도와 디모데가 같이 겪여 온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디모데는 세상을 보는 안목이 사도 바울과 동일한 안목을 장착한 셈이 됩니다.

히브리서 10:16-17에 보면,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동안 인간들에게는 ‘자기 일’에 집중했는데 그 자기 일의 성향은 ‘나의 구원마저 내 손으로!’라는 모토를 나타내게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요구사항인 율법을 눈 앞에 두고서 그것을 자력으로 지키고 순종하고 실천하므로서 자기 몫의 복을 따내겠다는 의지로 가득찼습니다. ‘내가 나답다는 것’은 ‘나의 미래나 운명마저 내 손으로 해결하는데서 증명된다’고 보았던 겁니다. 반면에 ‘주의 일’의 운송과정은, 인간들의 ‘나의 위한 나의 일’을 배제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새언약 작업입니다. 말씀이 코앞에 멈춰선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까지 오셔서 마무리 짓게 된 것입니다. 쑥 들어온 겁니다. 물론 여기에 악마의 강력한 반발이 작용했지만 “이미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는 그 능력으로 자기 백성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의 마음 속은 ‘아버지와 아들’의 마음이 순정한 상태로 들어온 바가 됩니다. 이는 마치 구약에서 언약상자 안에 있는 언약이 이동현장과 같습니다. 사무엘상 6장에서 사무엘하 6장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언약궤는 이스라엘을 떠나 블레셋 나라에서, 다시 이스라엘로 되돌아오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 과정에서 언약궤 있는 장소에서 큰 소동이 일어납니다. 그만큼 이 인간 세계의 현실이 언약궤의 내용과 다른 방식의 삶을 고집한 것입니다. 주님의 일방적인 약속 진행을 인간의 의식으로서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실로에 있었던 언약궤가 블레셋과의 전쟁터로 불러나가게 되었고 그 와중에서 언약궤가 블레셋 나라에 포로잡히게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군대가 해내지 못한 블레셋에 대한 징벌을 언약궤 홀로 다 이루어내십니다. 언약궤의 존재 자체가 너무 무서워했던 블레셋 사람들은 벧세메스로 보냅니다. 그 다음으로 기럇여아람 아비나답 집으로 옮겨지는데 거기서 20년을 보내게 됩니다. 그다음 아비나답 집에서 나곤의 타자마당을 나갈 때 언약궤가 움직였습니다.

이를 보고 보호하려고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붙들었지만 이로 인해 웃사는 하나님에게 침을 당해 죽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손떼를 거부합니다. 오로지 하나님 스스로이 힘으로 달성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이미 죄로 인하여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 복음으로 연단을 받는다는 말은 복음의 순수성에 본인의 노력과 희생이 끼지 않게 제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이 세상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모두 언약을 위해 벌어지는 일이기에 인간의 사적인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는 것이 곧 연단, 즉 단단히 연마된 상태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아를 형상화하려고 시도합니다. 평생을 두고 하는 일이 ‘자기 꾸미기’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언약완성 작업을 방해하는 바가 됩니다.

애초에 주어진 진리는 인간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질 내용들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 8-9에 보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입니다.

언약의 순수함이 지나가는 곳에는 인간들의 나름대로 구원시도가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애초부터 의도하신 ‘대신 하심’의 취지와 너무나도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신 하심’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죽은데서 건져주시는 관계를 확정지었습니다. 이 ‘대신 하심’의 취지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성도는 이 세상에서 온갖 수모와 밉상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의 주장은 ‘나로 인해 내가 구원됨’을 표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마지막에 보면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입니다.(행 28:26) 사도들이 성도가 외치는 것은 이 복음의 원형, 복음적 침묵을 지키기 위한 외침입니다.

성도들의 이런 외침으로 통해서 천국은 수시로 이 세상에 외출하십니다. 목회에 관한 편지를 마지막에게 디모데에서 부탁하는데, 목회가 바로 복음 현상을 감지하는 겁니다. 즉 누가 예수의 마음인지 아닌지를 식별해내는 겁니다.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는 자들이 예수의 마음을 가진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구조화를 이겨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7강-빌 2장 19-24절(예수의 일)20060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2장 19-24절입니다. 신약성경 319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2:19-24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기를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보통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만났던 사도로서 성경에 나오게 되면 우리는 그 권위를 인정해 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바울 말고 디모데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디모데가 등장하니까 우리는, 그 당시 빌립보 교회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고, 사도바울의 말을 들어야 될지, 디모데 말을 들어야 될지, 아니면 예수님의 말을 들어야 될지, 아니면 하나님 말을 들어야 될지, 누구 말을 들어야 될지 당황하는 마음이 들 수가 있어요.

약간은 마음의 정돈이 필요한 거예요. 사도바울을 존경한다 해서, 사도바울 말에 완전히 신임해서 그의 뜻만 따르기로 했는데 디모데가 딱 등장할 때 그 당시 빌립보교회교인들이 “너 뭐야?” 이렇게 될 수가 있거든요. “너 말고 사도바울 오라고 해.” 이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등장한다는 것은 상당히 그 구조에 의해서 안정성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어요. 그런데 왜 성경에서는 디모데를 추천하느냐? 22절에 보면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디모데를 보낸다고 해서 사도바울이 퇴직해서 은퇴해서 자기는 놀려고 뒤로 빠지는 것이 아니에요. 디모데를 보내면서 뭘 보내느냐 하면, 사도바울이 알게 되었던 그 복음에 대해서 ‘나와 함께 수고한 사람만이 나는 관계 맺는다. 그 사람을 성도라 인정한다.’ 그런 의도가 아주 강렬합니다.

나처럼 같이 고생 안한 사람은 십자가 백날 외쳐도 나는 못 믿겠다. 나는 그 사람을 하나님의 성도라고 인정하기 곤란하다. 그러나 디모데 같은 사람을 보라. 그 사람은 나와 함께 수고한 사람이고, 그 사람은 고생 되게 많이 한 사람이다.’

오늘 본문에서 디모데가 연단을 받았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 사도바울에 있어서 디모데는 표준적인 인물이 되는 거예요. 진짜 성도라면 사도바울이 인정하는 진짜 성도, 찐 성도, 완전 찐, 진짜 성도라면 디모데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

왜? 디모데와 사도바울 본인의 관계가 이런 정도의 관계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빌립보교회라고 너희들이 있지만 내가 그걸 믿을 성 싶으냐? 나대신 디모데 보내줄 때 보내심을 받은 디모데와 보낸 바울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너희가 파악하고 그 디모데와 바울의 관계처럼 너희도 그런 관계가 진짜 지속되는지 스스로 확인하고 점검하라는 거예요.

십자가, 십자가, 들은풍월이 있어서 그런 소리는 누가 못합니까? 그러나 십자가를 면제시키는 십자가는 이 세상에 없어요.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보면, 나를 따라오려거든 그냥 털렁털렁 빈손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이지요.

십자가는 지나가는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돼요. 십자가를 영구화시키고 지금 현재화시키는 겁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지를 묻는 거예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만 모든 자랑거리가 다 배제되고 오직 뭐만 자랑하느냐? 십자가만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 안에 현재 살고 있는 사람에게만 십자가만 자랑하는 겁니다.

그러면 바울이 디모데를 추천할 때 대표인물로, 대표성도로 추천할 때는 이것도 하나의 계시가 돼요. 하나님의 뜻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계시라는 말이 뭐냐 하면, 그 뜻을 역사 내내, 이 지구가 종말 할 때까지 확정된 계시는 되풀이할만한 질,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에요.

한번 관계 맺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진리기 때문에 그 계시는 계속해서 반복해서 적용시키겠다는 것이 계시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거든요. 그러면 디모데의 등장과 사도바울의 관계 또한 하나님의 예수님의 계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관계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가 다냐? 다가 아니에요.

첫 번째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관계가 있어요.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과의 관계가 있고, 아버지와 예수님의 관계를 그대로 사도에게 주지요. 그러면 예수님과 바울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그대로 인수받는 겁니다. 관계입니다. 양이 아니에요. 분량이 아니고 관계입니다. 어떤 집단이 있을 때 숫자 몇 명 모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관계에요.

이 세상에는 다수의 집단이 아무리 있어도 서로 호환이 안 됩니다. 서로 바뀐다는 것이, 서로 섞인다는 것이 별 의미 없어요. 숫자의 이동 그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 관계는 항상성이 있어요. 관계는 동일해요 아버지와 아들관계가 그대로 예수님과 바울관계가 되고, 그게 두 번째거든요.

세 번째로, 예수님과 바울의 관계가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가 되는 그것이 세 번째. 네 번째가 뭐냐 하면, 사도바울과 디모데의 관계가 바로 성도끼리의 관계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관계 속에서 방해되는 관계가 뭐냐? 기존의 자기영역을 구조화하면서 얼기설기 걸쳐놓았던 모든 관계는 아버지와 예수님 관계에 방해물로 등장하는 겁니다.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에서는 십자가만 자랑하게 되어 있는데 제일 밑바닥 인간 세상에 들어오게 되면 자기 친구를 자랑하고 자식을 자랑하는 거예요. 자기교인들을 자랑하는 겁니다. 아는 사람을 자랑해요. 그래서 1, 2, 3, 4번 이 관계가 죽 내려오면서 그 관계가 내려오는 그 관계를 형성시킨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마음까지 수송되고 운반되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교회 백년 다녀도 성도 아닙니다. 천국 못갑니다. 예수님 마음이 우리 마음까지 들어와야 됩니다. 그 예수의 마음이 우리마음까지 들어온다는 약속이 히브리서 1장 16절에 나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어디까지 와서 스톱이 되느냐 하면, 인간 앞에서 스톱이 됩니다. 인간 앞에서 스톱이 된다는 말을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학생들이 교과서 읽는다. 시험 준비할 때 책 읽고 참고서 읽을 때 모든 참고서의 문자 그것이 참고서 그 자체에서 스톱이 돼요.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악바리로 박카스를 세병 먹든지 어쨌든 간에 정신 바짝 차려서 그 안에 있는 내용을 억지로 끄집어내서 내 머릿속으로, 내 마음속으로 뽑아내야 된다는 말이지요. 잘 뽑아내는 사람은 시험 잘치고, 못 뽑아내는 사람은 시험 망치고 그런 거거든요.

그래서 구약 때 보면 하나님의 돌판과 율법을 주니까 사람들이 이걸 시험 치듯이 하는 거예요. ‘이 말씀을 내가 순종해서 실천에 옮기면 합격이고 실천에 못 옮기면 불합격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천국도 시험보고 들어간다는 거예요. 실력보고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동안 네가 얼마나 노력했는가, 그 노력여하를 보고 합격 불합격을 시킨다는 거예요.

그들이 누구냐? 그들이 율법의 선배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후배는 선배 닮기 마련이지요.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교회가 학원이에요. 무슨 학원? 천국 가는 보습학원이에요. 미리 하나님에게서 출제할 시험문제 받아서 그걸 열심히 성경공부 하는 거지요. 우리도 내일 아침에 대구성경공부 있습니다.

성경공부를 하면 잊지 않고 달달 잊지 않고 외워서 구원받겠다고 시도하는데 그 모든 것이 단 하나의 장벽에 와르르 무너져요. 그 장벽이 뭐냐? 치매. 유명한 목사,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목사가 치매 걸렸어요. 이름은 밝히지는 않겠습니다만. “한 경직 목사님!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가 누군데?” 몰라요. 두뇌 세포의 시냅스가 다 끊어졌습니다.

“존경하는 목사님!” “그런데 아줌마는 누구세요?” 전혀 몰라요. 자식도 못 알아봐요. 자식도 못 알아보는데 무슨 예수님을 알아요? 그렇게 입만 떼면 나오던 찬송가가 나중에 80넘으면 도대체 어디서 들었는지 트로트가 유행가가 나오는데, 네가 왜 거기서 나와? 희한해요, 희한해. 정말 희한해요. 찬송가밖에 모를 줄 알았던 사람이 생뚱맞게 유행가가 나오는데. 성악해도 필요 없어요. 성악했어도 유행가 나와요.

이상해. 이것은 강력하게 반대로 밀어붙이는 힘이 있음, 내 안에 태어날 때부터 나도 감당 못할 강력한 반 복음적인 힘이, 육신이 살아 있는 한 이게 들끓고 있다는 사실이 치매 걸리니까 노골화 된 거예요.

치매 걸리기 전에는 그것을 애써 자기가 억누르고 있다 생각한 겁니다. 다른 사람한테는 안 들키면 되니까.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겉으로 손 씻는다고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야. 네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러워.” 나오는 것을 무슨 수로 씻습니까? 나오는데.

나온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불러내는 것이 아니에요. 나온다는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어떤 상황에 부딪히게 되면 우리 자신도 놀라요. ‘내가 이 정도로 성질이 더러웠나?’ 본인도 본인에 대해서 몰랐어요. 그런 상황이 올 때 욱하는 성질나올지 몰랐지요.

그래서 우리 내부에 침투하는 것은, 율법으로 하는 것은 다 실패로 끝났어요.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언약을 수정해 버렸어요. 언약을 바꿔버렸습니다. 어떤 언약이냐? “네가 순종해서 구원받는 것 말고 내가 직접 네 속까지 하나님의 법을 수송해줄게 운반해줄게. 택배로 네 안에까지 네 속까지 들어올게.”

그러면 네 속의 귀신의 저항이 만만치 않게 대단하지요. 강력한 저항이 있지요. 그러나 이 마지막 계약, 하나님의 언약은 무엇까지 이기느냐 하면, 강력하게 밀어내는 우리의 저항까지, 악마의 저항까지 주께서 거뜬하게 이겨내시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법을 장착시키고, 안착시키는 그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그게 제가 말하는 첫째, 둘째, 셋째, 넷째의 관계, 예수님과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 안까지 전부다 전달시키는데 성공시키는 거예요. 왜 그렇게 주님의 마음을 우리한테 정착시키느냐 하면,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대신 처리하지 않으면 천국 갈 자기 백성이 한 명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서 대신 대리하는 겁니다. 너 말고 나, 너 말고 나.

히브리서 10장에서는 모든 율법을 지켜서 대신하시는 분을 히브리서 10장 7절에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시편 40편 6절에서 8절을 인용하면서 모든 법은 하나의 인물을 겨냥하는데 그 인물은 어떤 지령을 받고 어떤 작업을 하느냐?

모든 율법을 오직 홀로 지켜서 홀로 지킨 그 율법을 우리 안까지 밀어 넣고, 집어넣을 때 그것이 언약은 완성이 되는 겁니다. 자기백성 건지기 성공! 작업성공!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러한 마음 옮기는 작업을 구약에서는 어떻게 보여주느냐? 언약궤 수송작전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원래 언약궤가 요단강을 건너왔거든요. 요단강 건너왔을 때 길갈이라는 곳에 있다가 그 다음에 실로라는 곳에 안치를 했어요. 사무엘 때까지 실로에 있다가 하나님께서 엘리에서 사무엘을 제사장으로 바꿀 필요가 있었어요. 그런데 바꿀 때는 그냥 바꾸는 것이 아니고, 그냥 있는 것을 바꾸는 것이 아니고 얼마나 추잡하고, 더럽고, 불결하다는 것을 낱낱이 들춰내면서 바꿔요.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질 때는 그냥 추가적으로 숟가락 하나 더 얹듯이 오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만한 환경이 못 된다는 것을 처참하게, 비참하게, 우세스럽게 그 수치성을 그대로 폭로하면서 바꿔줘요.

세리와 창기가 그리고 강도가 천국 가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저질스러운 그들 인간을 두고 주변의 잘났다는 인간들이 얼마나 손가락질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은 어디를 경유하느냐 하면 세리와 강도를 경유하는 거예요. 소위 잘났다, 하는 인간들은 너희들 보기에 잘났지.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전혀 잘나지를 않았어요.

왜? 인간은 자기를 날마다 조작하니까. 날마다 속이니까. 인간이 살아가면서 배우는 요령, 노하우는 하나밖에 없어요. 어떻게 하면 타인 앞에서 나를 속이느냐? 신자도 아니면서 신자라고 속이는 것.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바울이 그걸 낱낱이 지적합니다.

21절에 보면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내가 너희에게 속을 줄 아느냐, 그런 뜻이거든요. “너희가 교회 다닌다고 성도라고 자처하는 모양인데 나는 안속아. 너희들은 자기 일만 구해.” 자기 일만 구한다고요.

자기 일만 구하는 이것을 가지고 요즘 말로 하면 교육의 지표가 되는 거예요. 현대국가의 교육지표.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모든 교육의 지표는 뭐냐? “네 일 네가 해라.” 이게 목표에요. “남에게 기대지 말고 네 일 네가 알아서 해라.” 이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교육의 지표입니다. 방향성이에요.

이것은 학교 교육만 그런 것이 아니고 가정교육도 마찬가지에요. “네가 반드시 네 일 알아서 하면 내가 자식 잘 키웠다는 소리 들으니까 네가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라.” 그게 교육의 마감입니다. “자식 내가 키운다고 애먹었으니까 나이 들면 자식 덕 좀 보자.”

자식들이 젊을 때는 아빠 엄마에게 잘 보이려고 “아버지 어머니 염려마세요. 제가 끝까지 돌봐주겠습니다.” 엄마아빠는 흐뭇해서 ‘세상에, 내가 널 잘 키웠어.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귀한 자식이 어디 있느냐?’ 그 귀한 자식 시집가고 장가가면 끝. 애 봐준다고 관절 다 나가지요. 어딜 봐서 뭘 봐서 잘 키웠어요? ‘나는 나뿐이다.’ 그 점에 대해서 잘 키웠지요. ‘나는 나뿐이다. 나는 내가 제일귀하다.’ 그 점에 철저한데서 잘 키웠어요.

참, 비비 꼬아서 이야기하지만 자식 참, 자~알, 고개 한 세 번 끄덕이면서 자~알 키워놓았어요. 자기일밖에 몰라요. 자기일밖에 모르는 인간이 교회 왔다고 주의 일을 해요? 천만의 말씀 자기 일 하는 인간 교회와도 자기 일밖에 모르고 교회 예배 마쳐도 자기 일밖에 몰라요.

그러니까 여기서 하는 말이, “저희가 다 자기일밖에 구하지 아니하니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내가 추천하는 디모데를 봐라. 내가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줄게. 혼 좀 나봐라. 디모데가 어떻게 살았는지 봐라. 데모데 속에 뭐가 들었는지. 너희들 속에는 뭐가 들어있고 디모데 속에는 뭐가 들었는지 한 번 비교해 봐라. 너희들은 사도바울 내 말을 그냥 말로 들었지?” 말로 들은 거예요.

디모데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나와 함께 수고하고, 나와 함께 복음에 의해서 연단을 받았다는 겁니다. 연단이라는 말은, 자기라는 형식을 갖추지 않았다. 그런 뜻이에요. 자기라는 형식, 나라는 형식을 갖춰버리면 그 갖춰진 형식이 나에게는 우상이 되고, 기도를 하든지, 헌금을 하든지, 봉사를 하든지, 예수를 믿든지 전부 다 마지막 목표점이 형식화된, 우상화된 나를 위해서 내가 충성 봉사하는 식으로 모든 것이 움직여 나가요.

이게 고체화되었기 때문에, 자아가 고체화되어서 그래요. 이게 액체화되어야 돼요. 이것은 뭐, 만지면 주물럭거려도 되고, 세워놓으면 다시 주저앉게 되고, 내 것이 없어야 돼요. 주의 일이라는 것은 뭐냐? 나 때문에 내가 사는 일을 뽑아내는 것이 주의 일입니다. 나 때문에 내가 사는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 언약의 완성, 예수님의 마음이 안 들어왔을 때의 마음이에요.

딱딱하기 짝이 없는 내 마음, 내가 나를 지키겠다고 하는 이게 뭐가 문제냐? 예. 문제없어요. 이 세상에서 문제없는데 천국에 못가는 것이, 뜨거운 지옥 불에 들어간다는 것이 문제겠지요. 딴 문제는 없어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에서 이야기하기를, “어떤 손실을 보더라도 제발 지옥일랑 가지 말라. 네 육을 협박하고 공갈치는 그런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

김 여정이지요. 김 정은 여동생. “협박하고 공갈하는 그런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라.” 이 말은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버릴 패…… 너희들이 구원받을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하면, 주께서 지옥으로 몰아넣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포기한 멸망의 도시에 너희들을 살게 했다는 거예요.

의도적이에요. 하나님의, 예수님의 마음, 언약이 통과하는 그 모든 길목에는 주께서는 포기해야 될, 하나님께서 버리기로 작정한 것들의 환경 속에 언약궤를 이동하는 겁니다. 그래서 길갈에 있었던 언약궤를 실로에, 그 다음에 에벤에셀, 그 다음에 아벡, 아스돗, 가드, 에글론, 벧세메스, 기럇여아림, 예루살렘, 이런 식으로 언약궤를 순환을 시키는데 그 방식이 뭐냐?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신을 믿는 민족, 그게 우상이라는 겁니다. 우상을 믿는 블레셋 나라에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빼앗기는 사태를 의도적으로 유발합니다. 언약궤를 빼앗겨요. 원래 언약궤는, 이스라엘사람들이 언약궤 있음으로서 이스라엘을 지켜주고 언약궤와 우리는 한패라고 안일하게 생각했지요.

그런데 언약궤가 스스로 이스라엘을 포기하고 블레셋으로 그 품에 안겨버립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 없을 때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과 무관한 자인가를, 언약이 없는 인간, 예수님의 마음이 없는 인간은 얼마나 천국과 일치되지 않는 모습인 것을 구약에서 보여주거든요.

그렇게 보여주면서 사무엘상 6장에 보면 블레셋 땅에 언약궤가 일곱 달 있었거든요. 언약궤가 벧세메스로 갔는데 거기서 70명이 죽음을 당했어요. 벳세메스로 암소 네 마리로 끌고 가는데 ‘언약궤에 뭐 들었지?’ 하고 들여다보다가 70명 죽었습니다.

그 다음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해서 언약궤는 기럇여아림이라는 곳에 왔는데 그곳에 아비나답이라는 사람이 있었고 거기에 20년 동안 일종의 방치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보호받는 거예요. 너무나 위험한 물건이라서,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해서, 또 그 때는 아직까지 예루살렘이 정복되기 전이니까 실로에 오지 못하고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사무엘하 6장에 보면 아비나답의 집에 있던 언약궤를,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난 뒤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영원히 고정시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다윗성에 모셔오려고 했어요. 사무엘상 6장의 끝에 아비나답의 집에서 시작을 하는데 웃사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이 있어요. 웃사라는 사람이 있는데 다윗이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나곤의 타작마당까지 끌고 왔는데 언약궤가 흔들릴 때 웃사가 그걸 붙들었다가 죽었어요.

그래서 그 지명 이름이 베레스 웃사, 웃사를 하나님께서 쳐버렸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인간 쪽에서 언약을 지키려고 나가는 모든 것은 언약궤에 의해서 저주를 받는다는 겁니다. 언약은 인간의 행함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달성되는 그 원칙을 고수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언약궤가 진행되면서 블레셋나라는 난리도 아니에요. 전염병에 사람이 막 죽어나가고 난리도 아니지요. 언약궤가 인간세계에 죽 지나가면서 인간세계의 원리원칙이 뭐냐? 내 미래와 내 운명은 내 손으로 결정하겠다는 그것인데 그것이 얼마나 지옥갈 수밖에 없는 저주스러운 세상의 모습이라는 것이 언약이 와야 드러나요.

어떤 교회에 만약 진짜 십자가를 안다면 그 교회는 십자가만 자랑하게 돼요. 그 교회 헌금, 예배, 성경공부, 예배당, 이런 것 전혀 자랑하지 않아요. 물론 십자가 들어오기 전에 목사가 와서 십자가 빼내버리지요. 교회 부흥 안 된다고. 장사 안 된다고. 언약궤의 특징은, 만지지 말라는 말은 언약궤의 그 갈길, 방향은 하나님이 알아서 저절로 하는 거예요.

저절로 하니까 인간의 손은 배제되는 겁니다. 저절로 하니까 사람들이 너무 신기한 거예요. 신기한 동시에 무섭지요. 왜? 그 순수함, 사람이 기존의 자신의 순수함으로 근처도 안가거든요. 자기 딴에 순수한 믿음이 있다 해도 십자가를 자랑하는데 그 순수한 믿음조차 방해물이 되는 겁니다. 인간에게 어떠한 순수한 것도 없어요.

그러면 이 사도바울과 디모데는 왜 고생하고, 왜 사람들에게 밉상 받고 설움 받는지 그 이유가 드러나지요.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바울이 디모데를 루스드라 라는 곳에서 1차 전도여행 때 알았고 그 디모데를 뽑아서 현재 그리스 쪽, 유럽 쪽으로, 터키에서 유럽 쪽으로 보내게 됩니다.

그럴 때 그 사도바울이 디모데를 어떤 점에서 뽑았느냐? 그 전에 디모데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있는데 바나바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2절부터 보면,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쌔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줄 다 앎이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전에 바나바와 사도바울이 같이 다녔는데 바나바와 의견이 안 맞았어요. 그러니까 아, 사도바울의 입장에서 의견이 맞지 않는, 의견이 하나가 되지 않는 바나바와 전도여행을 다시 한다는 자체가 상당히 모험이 되기에 바나바를 거절했습니다.

여기서 그 전에 바울과 바나바 그 두 사람이 가는 길을 누가 방해 놓았느냐 하면, 율법주의자들이 방해를 놓았어요. 그 율법주의자들이 어디서 왔느냐 하면, 소위 고참들, 예루살렘에 있는 선배사도들과 장로들이 사도바울과 바나바가 저들이 예상했던 방식 말고 다른 방식으로 전도하는 것이 가하냐는 이것 때문에 고발이 들어온 거지요. 왜 우리식대로 전도 안하느냐, 하는 식으로.

그래서 디모데전서나 후서에 보게 되면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하는 것이 있어요. “제발 옛날식으로 하지 말라.” 이것은 파격적입니다. “쓸데없는 전통이나 율법가지고 논쟁하거나 변론하지 말라.” 복음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말이지요. 파격적입니다 이단소리 들을 만 하지요.

어떤 점에서 파격적이냐 하면, 이거예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준 취지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기존의 전통주의자들이에요. 기존에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천국 보내기 위해서 율법을 줬는데 율법 가지고 미흡하니까 추가해서 복음을 줬다는 것이 전통주의의 주장들입니다.

사람으로서 할 도리 다 하고, 짐승이 아니고 인간답게 살고, 인간답게 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혜택으로 복음을 줘서 기존에 ‘바르게 산 것 + 십자가 복음’까지 하면 온당한 구원이 된다. 이것이 바로 그 당시의 전통주의자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사도들은 그렇게 주장안하지만 전통주의자들, 예루살렘의 전통주의자들이.

그런데 이 사람들은 뭘 경험 안했느냐 하면, 사도바울이 이방인들과 접촉하면서 세운 예수님과 함께 있던 경험을 해본 적이 없어요. 사도바울이 어떤 자기방식을 전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게 오해에요. ‘우리는 이런 방식이지만 사도바울은 상당히 위험한 방식을 사용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구나. 그러면 안 될 것 같은데.’라고 현재 전통주의자들은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사도바울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나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함께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나보고 닦달내지 말라는 거예요. 주께서 그런 일을 시켰다는 거예요. 이방인은 이렇게 구원받아야 된다고, 율법 없는 이방인들은 이렇게 구원되는 것이 맞다고. 사도바울이 그렇게 전한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함께 있는 예수님은 안보이고 사도바울을 그냥 전통에 끼어드는 막둥이로 여기는 거예요. 인간의 전통이라 하는 것은 기존의 조직에서 나왔거든요. 조직이라는 것이 이렇게 인간을 망치게 합니다. 전통에서 그렇게 압박을 가하니까 바나바가 좀 주춤거린 모양이에요. 주춤거려서 마가라는 사람을 데려가게 되면 선배들이 안심하지 않겠느냐, 한 거예요.

그런데 마가는 자꾸 예루살렘에서 써먹던 그 방식, 다시 말해서 주와 함께 있지 않는 그 방식, 인위적인 방식을 자꾸 동원하다가 그게 문제가 되었는지 도중에 가버린 적이 있었거든요. 왔다가 도중에 가버린 그런 사람을 다시 데려오자고 바나바가 압력을 넣으니까 사도바울은, “당신이 마가를, 요한이라는 이름의 마가에요, 그 마가를 데려가고자 한다면 난 당신과도 안가겠다.” 하고 그냥 싸운 것이 아니고 심히 싸웠다고 사도행전에 되어 있어요.

요즘 말로 하면 대판 싸운 거예요. 엄청나게 싸운 것이 돼요. 이게 사도행전 15장 37-41절에 나옵니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그러니까 바울은 실라를 대신 데려가고, 가면서 유스드라에 가서 디모데라는 청년 아주 젊었지요, 그 청년에게 세례를 주고 같이 가자, 라고 된 겁니다. 왜냐하면 이 청년의 아버지는 헬라인, 이방인이거든요. 어머니는 유대인이지만 아버지가 헬라인이라 이방인이에요.

그러니까 디모데는 두 개의 노선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어요. 이방인과 유대인. 지금 이방인, 유대인, 흑인, 백인, 그러한 종족, 혈통 그것과 관련된 하나님의 약속은 옛날로 끝나버렸다. 그런 약속은 폐해졌다. 새로운 약속은 뭐냐? 네가 흑인이든, 백인이든, 헬라인이든, 이방인이든 관계없이 성령께서 새언약으로 네 마음속까지 예수의 마음을 집어넣고 정착시키면 끝.

그게 끝나는 거예요. 마치 언약궤가 사람의 노력 없이 그냥 운송하는 것처럼 우리 마음속까지 예수의 마음이 들어오면 끝나버리는 거예요. 그럴 때 예수의 마음이 들어온 사람의 고백은 너 나 없이 한결같이 하나밖에 안 나옵니다. 뭐냐 하면, “네가 잘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내가 잘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전부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공로다.”

그게 교회 아니겠어요? 그게 교회거든요. 교회란 조직, 전통 같은 그것은 개나 줘버리세요. 그거 살라 먹어도 배도 안부를 것, 그것 왜 있느냐 그 말이지요.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만, 어떤 오래된 교회의 당회실을 보면, 내가 진짜 그 것보고 깜짝 놀랐어요. 당회실에 역대 당회장 사진이 죽 걸려 있어요. 나 진짜 검찰청에 왔는지 알았어요. 그거 확 떼버려야 돼요.

여러분 가정이 교회입니다. 오늘 동영상 보는 사람들 좋~다! 여러분의 가정이 교회에요. 왜냐하면 여러분 몸이 성전이거든요. 성령이 함께 있으면. 교인 수 모아서 뭐할 거예요? 자기 허영심만 늘어날 뿐이지요. 목사의 허영심만 늘 뿐이지요. 몰라, 목사 노후대책은 좀 되는지는 모르겠어요.

사도와 디모데가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사도행전 마지막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도행전을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는데 그 마지막까지 봐야 돼요. 그 마지막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26, 27절에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그들의 방식, 행함의 어떤 방식도 이 복음을 소유할 수 없다,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방식은 내가 나를 살리고자 하는 그 일관된 방식의 연장이기 때문에. 그러면 사도바울은 복음을 왜 그렇게 외치는가?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외치는 거예요. 이것은 성령 받은 사람 외에는 못 알아듣도록 외치는 거예요.

침묵을 지키는 겁니다. 침묵을 지키기 위해서 큰소리로 외치는 거예요. 인간이 인간끼리 말을 한다는 것은 반드시 그 말에 무엇이 개입되느냐 하면, 내 자랑이 개입되게 되어 있어요. 자기의 실력이 개입되어 있고 자기의 믿음 좋다는 그 자랑질이 개입되어 있어요. 인간은 그것들로 조직을 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빵꾸난 통일성입니다. 허점이 있는 통일성이에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조직을 해보니까 뻥뻥 빵꾸가 나거든요. 그래서 그 빵꾸를 메우기 위해서 도입된 것이 유대인의 바리새인법이고, 오늘날 신천지의 법이고, 지방교회 법이고, 전부 다 교회법이라는 것이 그런 겁니다.

교회법이라는 것은 탈출자 관리하는 거예요. 인간 관리하는 거예요. 일종의 쉼터인가? 전부 다 자기조직관리에요 내 사람 만드는 그런 거예요. ‘연단(鍊鍛)’이라 하는 것은 애초에 순수함을 지키는 것이 연단이에요. 애초의 순수함. 내가 그동안 행위로 발산했던 그 모든 지저분한 것이 내 인생의 하나의 지지대로 활용하던 그 지지대를 다 빼버리는 하나님의 조치가 연단의 조치입니다.

나는 이렇게 해서 은혜 받았고, 이렇게 헌금해서 복 받았다, 하는 그 모든 지지대를 다 뽑아버리는 거예요. 주저앉도록. “입 다물고 주는 밥이나 잘 먹어라.” 하는 식으로 주께서는 그렇게 성도를 인도합니다. 그걸 가지고 순정품이라 해요. 순정품. 순수한 순정품. 가라가 아니에요. 순전한 순정품. 이 순정품이 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자기가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을 안 하기 때문에 순정품은 발악하지를 않지요.

그동안 발악한 것을 주님께서 더 센 환경을 가지고 그 발악하는 것이 헛수고임을 알게 하시는 겁니다. 몸 아플 때 건강해보려고 얼마나 발악을 합니까? 누구 좋으라고 건강해야 됩니까? 불행할 때는 행복해보려고 발악을 하지요. 새벽제단에 나와서 기도하고. 그것을 다 빼버리는 겁니다.

그럴 때 남는 것이 그 순전함, 순수함인데 그 순수함이 복음의 순수함이거든요. 데살로니가 후서 1장 8절에서 9절에 보면,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이게 바로 순수복음입니다. 순정품이거든요. 애초부터 인간은 안 죽어야 되는데 억울하게 죽는 것이 아니에요. 애초부터 우리는 멸망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 유지되는 것이 순수한 복음이에요. “멸망되어야 되는데 내가 와서 너를 예수의 마음으로 건진다.” 이렇게 되어야지 그게 대신 죽으심이거든요.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나는 잘났기 때문에 구원되어야지.’ 이것은요, 순수한 것 아니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어딜 봐서 잘났어?” 해서 독한 환경들을 찾아오게 하지요. 인생 꼬이게 만들어버리지요. 자기 것, 자랑거리를 내세울 것이 없게 만들어버려요.

그렇게 되면 자기는 ‘무너졌다. 나는 더 안 살래. 이렇게 살려면 죽는 것이 낫다.’ 이런 식으로 성도라 할지라도 몸부림치거든요. 그게 뭐냐? 연단의 과정이에요. 연단이라 하면 유명한 구절이 로마서 5장의 구절이에요. 2절-3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을 벗어나서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고 환난 중에, 환난이 벌어지는 중에 즐거워한다는 말입니다. 신종코로나 가운데 즐거워한다, 그 말이거든요.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발악하지 말라. 네 발악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네 애씀도 소용없다는 겁니다.

주접떠는 거예요. 네가 어떻게 애쓰는 것은 네 행복을 위한 네 몸부림자체가 추잡스러운 거예요. 애초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이지요. 그 애초부터의 상태를 유지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너는 개코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개가 또 웃겠다. 개코도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 김장 할 때 배추에 소금 뿌리지요. 왜 뿌립니까? 숨죽이기 위해서 뿌리잖아요. “입 다물고 가만있어. 그냥 나라에서 주는 재해보상금으로 살아. 네 식구 8십만 원 주면 그걸로 살아. 그냥 숨죽이고 가만있어.” 그게 연단이에요.

그 다음부터는 디모데와 사도바울에게 어떤 수모와, 부끄러운 일과, 그리고 수치스러운 일과, 고난과, 심지어 모가지 달아나는 죽음의 순간이 올지라도 그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액체니까, 본인이 액체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액체는 이 그릇에 담기면 이 그릇, 저 그릇에 담기면 저 그릇.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율법 좋아하면 율법 지켜줄게. 율법 없는 곳에는 율법 없는 사람으로 살게.” 중요한 것은 주께서 언약을 이뤘다는 사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뤘다는 사실이 중요하거든요. 그게 중요하지, 내가 얼마나 괜찮은 솜씨를 갖고 있다, 내가 얼마나 신앙의 능력이 있는가, 내가 간증집회 하면서 얼마나 기도발이 있느냐,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근원을 감추고 그야말로 주의 일을 빙자한 자기일이에요.

그래서 이 복음을 통해서는 하늘나라가 외출하는 겁니다. 하늘나라가 잠시 외출하는 겁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자기를 잠시 보여주는 거예요. 디모데한테 나중에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목회서신입니다. 디모데전서와 후서가 나와 있어요.

디모데전후서 보면서 목회가 뭐냐? 목회란 복음적 현상을 감지하는 것이 목회에요. 복음적 현상, “복음이 아닌 것과 복음인 것을 구분하는 일을 하라. 이 디모데야.” 이게 목회하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가정에 네 식구가 있다면 아버지가 복음을 알면 아버지가 그 가정의 목회자에요. 여러분 가정의 목회자입니다.

네 식구 가운데서 자기 일, 내 일에 미쳐 움직이는 자와 주의 일을 하는 자를 구분하는 눈을 갖는 것, 그 안목이 아버지와 아들의 안목이고, 그리고 사도바울의 안목이고, 디모데의 안목이고, 오늘 날 교회 가운데 계시는 성령님의 안목이고, 오늘날 성도들의 안목이다, 그 말입니다.

오늘 본문 보게 되면 상당히 가벼운 말이 아니에요. 상당히 무서운 말이에요. 21, 22절에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디모데도 너희와 마찬가지 사람이겠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디모데와 사도바울일행과 함께 있으면서 온갖 수모를 다 당했어요.

빌레몬서 1장 1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옥에도 같이 갔어요. 가족은 빼고 디모데의 친척들이 얼마나 디모데에 대해서 측은해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람 잘 만나야 돼. 뭣도 아닌 그 바울이라는 사람, 사도바울인가 뭐 그 사람 만나서 돌아다니더니 세상에 고생을 사서 한다.” 얼마나 측은해 하겠습니까? 그런데 디모데 본인에게는 이미 나의 일을 접은 거예요. 나의 일이 없어요. 내가 하루하루 사는 것도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하루하루 연장시켜 준 것이니 나 좋으라고 하루하루 살아간 것이 아니잖아요.

말씀을 맺고자합니다. 로마서 6장에 이런 말씀 나와요. 2절에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는 말씀이 나오거든요.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이 말은,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의에 대해서도 죽은 자에요. 따라서 죄나 의에 대해서 이러나저러나 우리는 죽은자가 되는 겁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안목, 예수님의 마음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이 이미 들어온 사람은 하나님의 안목, 예수님의 안목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보고 세상을 보고 다 보게 되는데, 그렇게 보게 되면 이미 우리는 애초부터 죽은자였습니다.

세상 사람도 죽은 자고, 나도 죽은 자인데 세상 사람은 죄를 위해서 그들은 움직이고 우리는 의를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으로 식별하는, 구분이 가능한 안목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령 받은 사도, 그리고 디모데, 그리고 참된 빌립보 성도, 오늘날 우리들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벌이시는 일을 어떻게 우리 인간이 흉내라도 내 보겠습니까? 다 부질없는 것으로, 나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했고 예수님을 내 일에 불러왔던 오류와 편법과 망나니짓을 이제는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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