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개같은 인생

아빠와 함께 2020. 6. 29. 10:15

개 같은 인생 

2020년 6월 28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3:1-3

(3:1)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3: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빌립보에 있는 성도에게 당부하기를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충분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생겨날 수 없는 현상이 그들에게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요한복음 1:12-13을 가지고 말씀드립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해 낼 수 없는 신분을 얻었다는 말은, 사람들은 가만 있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구원을 시도한다는 말입니다. 즉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서 초월적인 것을 끄집어내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고상하고 경건하고 거룩해보이는 것들을 반복해서 시행하다보면 영적인 은혜를 얻는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초월 세계에 사시던 주님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제자들이나 사람들에게 충분한 경험적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이 ‘경험대 경험’에서 도리어 인간들의 완악함을 충분히 노출되었습니다. 인간쪽의 거부로 인해 예수님은 다른 세계로 가셨는데 그 세계가 바로 진짜 초월적 세계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지상에서의 행위는, 인간이 반복적인 체험에서는 결코 초월세계에 진입할 수 없음을 확실하게 단정지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기뻐하라’는 것은 바로 성령에 의한 결과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면서 직접 복음 강의를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으로 인해 파급된 배경을 설명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즉 가운데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고 주변 사람들이 겁에 질려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공포영화처럼, 성령이 활동하면서 새삼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손할례당’입니다. 이들은 떠돌이 스승들입니다.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할례언약 준수’가 필수임을 말하면서 그것으로 이미 구원되었음을 말하는 집단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그들을 향하여 ‘개’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인간은 율법을 직접 다루게 되면 필연적으로 파생되는 규정입니다. 인간은 평생을 알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립니다. 이를 해소하고자 인간들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방안을 취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성스럽고 착하고 선한 많은 업적들이 공포를 커버해 줄 것이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처럼 ‘소유 가능한 의로움’은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증강시킵니다. ‘개’라는 말은 ‘주인없는 상태에서 거리를 떠도는 존재’를 표현한 겁니다. 즉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가치를 지켜내려고 시도하는 것이 곧 개의 속성입니다. 특정인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인 호칭입니다.

인간의 형편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소유된 의가 계속 능력이 발휘되면서 필히 본인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자라고 우겨야 합니다.

그러나 율법이란 그것을 지켜내므로서 율법의 취지가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위반하므로서 살게 되는 겁니다. 즉 모든 인간이 죽는 것은 율법에 입각해서 위반자이기에 죽는다는 사실을 율법이 주어지므로서 분명해지는 겁니다. 그것도 저주받아서 말입니다. 따라서 ‘개’라는 표현은 ‘죽음보다 못한 존재’을 합니다.

죽는 것으로 모든 계산이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 뒤에 저주받을 일이 남아 있는 처지가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의 형편입니다. 도중에 율법에서 벗어나는 일이 발생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에 의해서 일찍 죽음을 당하는 일입니다. 이 일은 오직 예수님만이 할 수가 있습니다.

손할례당에 해당되는 자들은 사람들에게 선전하기를, 자신의 신체에다 할례를 시행하는 바로 그것이 ‘율법을 준수한 자’라는 평을 하나님께 받을 수 있다고 우깁니다. 그러나 할례 율법의 완성자는 따로 계십니다. 골로새서 2:11-12에 보면,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할례란 예수님과 더불어 장례식 치른 일에서 완성이 된다는 겁니다. 장례식은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가족의 죽음을 고지하는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장례식은 방금 죽은 자들에게는 이 죽음을 고지(告知)하는 기능을 주기 위함입니다. 즉 “이제 돌아가섰으니 더는 우리 집에 귀신되어 어슬렁거리지 마세요”라고 통보하기 위함입니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은 사적으로 개인 구원을 위하여 말씀을 지킬 의무나 책임을 갖지 말라는 겁니다. 성령님이 오시게 되면, 십자가 안에 성도의 위치를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면서 남긴 손자국이나 창자국은 곧 자기 백성들이 소유할 그 어떤 의로움도 소용없음을 알리는 자국입니다.

성도에게는 이 십자가의 흉터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노력으로 얻어낸 윤리적, 도덕적 성과로서 알 수 없는 공포를 극복하려는 그 어떤 개같은 시도가 날마다 자신에게서 배설물로 빠져나감을 알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게 즐겁고 기쁨일이 됩니다. 이런 현상이 성도에게 발생되는 것은 성도는 일반인과는 달리 소유성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성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죽음이란 곧 자기 이름이 영원책에서 지워진 것을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10:20에 보면,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관계가 끊어진 자는, 자기 소유성으로 사는 자를 결코 모른다는 평을 주님으로 받게 됩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사도도 과거에 개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다 배설물로 빠져나옴을 고백합니다. 이런 능력이 바로 기쁨이 발생시킵니다. 성도의 삶이란 예수님이 이끄시는 대로 사는 삶입니다. 개 몸통이 꼬리는 흔드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면 성도의 삶이란 꼬리를 개 몸통을 흔들게 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찾아드는 공포에 대해서 더 이상 자기 선함으로 방어에 나서지 않는 삶입니다. 이미 장례치뤘으니까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에게 소유된 자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9강-빌 3장 1-3절(개 같은 인생)20060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3장 1-3절입니다. 신약성경 319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3:1-3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종말이라는 말은 ‘끝으로’라는 뜻인데요. 편지를 쓸 때, 시대의 끝을 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그런 뜻입니다. 당부하는데 기뻐하라는 거예요. 너의 처지가 보통처지가 아닌 겁니다. 세상에서 얻고자 해도 얻을 수 없는 처지, 세상이 기대하고 원해도 가질 수 없는 처지, 신분, 그 신분됨에 대해서, 이 기적에 대해서 감사해야 된다는 거지요.

그게 왜 그런가 하면, 3절에, 성령으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성령의 하나님으로 인해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사람 중에서, 그 사람에 자기도 포함돼요, 내 의지에 의해서, 내 뜻에 의해서 주어진 신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요한복음 1장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사람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권세로 아들이 될 수 있어요.

하나님의 아들이냐 아니냐는, 내가 아들이라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우긴다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같이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에요. “네가 한 시도가 어떻게 실패했느냐를 나에게 이야기하라. 네가 하나님의 백성 되기 위해서, 천국가기 위해서, 네가 교회나 사람들 앞에서 어떤 치열한 노력을 했는가? 그리고 그 노력이 무용지물인 것을 네가 나에게 고하라. 구원받기 위해서 시도한 그 모든 것이 다 엉터리였음을 네가 나에게 고하라.” 그 말이에요.

시키는 대로 한다고 구원될 것 같으면 누가 천국 못가겠습니까? 시키는 대로 하면 할수록 ‘아하, 이게 아니구나.’ 하는 것을. 사람이 내리 3대째 믿는 가정이라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다른 힘이 작용했던 겁니다.

그걸 가지고 3절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너의 너 됨을 나타내라 하는 뜻이에요. 그렇게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면서 기뻐하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상된 기쁨이 아니고 내가 예상 못한 기쁨이 주어졌지요. 그러니 이것은 세상적으로 성도가 되기 전, 성령받기 전의 기쁨과 경쟁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기쁨은 당구 치고 뭐 그런 것, 그런 것과 족히 비교가 되지 않아요. 엄청난 기쁨입니다. 세상기쁨은 욕망에서 나오기 때문에 늘 결핍을 낳는데 이 ‘기뻐하라’ 하는 것, 성도된 기쁨은 내가 조작한 기쁨이 아니고 속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지요. 일종의 딸국질같은 겁니다. 멈출 수가 없어요. 내가 나 자신을 뭔가 소화할 수 없는, 다 없애버릴 수 없는 남아 있는 그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계속 기쁨을 유발하는 겁니다.

코로나 19, 19가 아니라 20이 오고 21이 와도 이 구원받은 기쁨을 훼방할 수가 없습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어떤 사람은 이렇게 걱정해요. 모든 것이, 무역이 중단되게 되면 우리나라같이 식량자급이 15퍼센트밖에 안 되는 나라에서 식량에 대해서 걱정할 단계가 온다. 식량비축이 너무 모자란다. 그것 때문에 걱정하는 사람이 있는데요.

걱정을 제가 여러분에게 제시해보겠습니다. “신종코로나가 오래 지속하게 되면 식량자급률이 떨어져서 식량 값이 오르게 된다면 난리도 아닐 것이다. 폭동이 일어나고 마트가 다 털릴 것이다.” 그 걱정과 요한복음 5장 35절의 그 말씀과 제가 비교시키기 위해서 말씀 드립니다.

요한복음 5장 35절에 보면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라는 대목입니다. 세례요한이 와서 예수님을 증거 했다는 요한복음 5장 35절의 말씀에 대해서, 너희는 잠시 기뻐했구나. 그 기쁨하고, 식량을 비축해야 된다는 그 이야기하고 둘 중에 우리가 어느 것이 신경 쓰이는 일일까요?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증거 하는 일이 시급한 일입니까, 아니면 식량 비축하는 일이 시급한 일이냐를 제가 여러분에게 묻는 겁니다. 성령 받았다는 것은 이처럼 어떤 사태가 터져야 돼요. 사건이 터져야 티가 나게 되어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탁류에 정신도 없이 그냥 좍좍 쓸려 내려갑니다. 관심사가 엉뚱한데 있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기뻐하라고 이야기하면서 직접적으로 “복음이 이것이다.” 라고 교리적으로 설명하거나 해설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직접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으로 인하여 파급된 그 배경을 설명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이 과연 복음에 의한 영향력 안에서, 세력권 안에서 새로 지음 받은 사람인가를 사도바울이 본인에게도 묻고, 너 스스로 그것을 확인하고, 사도바울 본인도 확인하고 싶어하는 거예요.

마치 이런 거예요. 공포영화에서 공포를 주는 그 주인공은 나타나지 않는데 옆에 겁에 질려 벌벌 떠는 주변 인물들의 화면을 키우는 거예요. 그러면 관객들은 궁금한 거예요. 도대체 뭐가 등장해서 사람들이 벌벌 떠는가? 신종코로나 19는 공포의 실체가 아닙니다. 공포의 실체는 감추어져 있는 거예요. 코로나 19는 그중 일부고요.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그걸 ‘코로나 blue’라고 합니다. 코로나 블루, 코로나 우울증이라 하는데 이것도 지쳤어요. 이제는 벌벌 떠는 그것도. 아직도 공포에 떤다는 것은, 영어로 blue, 푸른색, 공포에 떤다는 것은 뭔가 자기 나름대로의 대책을 세우고 있다는 거예요. 그 대책이 오늘 본문에서 뭐냐? 그게 바로 할례라는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대책을 세우는 자들이 등장했던 거예요. 떠돌이 개처럼.

교회 와서 말씀을 지키고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이 존재를 위협하는 공포가 찾아왔다는 거예요. 근원적으로. 그런데 그게 신종코로나 같은 실체가 있으면 마스크나 백신, 이런 대비가 되는데 인간은 근원적으로 공포를 느끼면서 그 공포가 어디서 오는 공포인지를 평생이 다가도록 알 길이 없네요.

결혼하지 않은 20대 아가씨들이 결혼하게 되면 ‘불행 끝 행복시작’으로 생각하지요. 그 때는 결혼한 뒤에 공포를 아직 맛보지 못한 상태거든요. 처녀 생활이 끝나고 결혼하게 되어서 ‘나 이제 시집간다. 자랑질 하고 싶고, 결혼식에 오라고 초청하면서 축의금 받아내려고 하는데 결혼하고 난 뒤에는 몰랐던 공포가 거기에 있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언제까지 남편이 내 말을 들을지 알 수가 없어서 오는 공포, 알 수 없는 공포, 도대체 공포의 실체를 알 수가 없어요. 이 개 같은……, 지금 욕하는 것 아닙니다, 이 개 같은 할례당들이……, 성경에 나오니까,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욕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 같기도 한데, 이 개 같은 할례당들이 경험을 통해서 초월성을 뽑아내려고 하는 거예요.

반복적인 성경읽기, 반복적인 헌금하기, 반복적인 예배참석, 반복적인 기도하기, 반복적인 금식, 반복적인 목사 말 듣기, 교회 충성하기, 시키는 대로 다 하기, 반복을 하게 되면 거기서 어떤 영적인 초월적인 세계에 입성이 가능하다고 그렇게 본인이 믿고 싶은 거예요. 왜? 율법에서 내게 오는 알 수 없는 공포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50년 60년 교회 다니고, 목사나 장로라는 그 직분, 충성되었다는 소식 듣는 것, 순종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집결해서 그 경험한 것이 나를 천국으로 밀어 넣을 것이라고 고객들이, 오는 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목사야 고객만족이지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반복된 행위로 영적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하고 그렇게 희망들을 불어넣습니다.

구원받고 싶어 환장한 사람들끼리 구원받는 비법을 알려주는 것이 목사나 교회의 책무라고 여기는 거예요. 말씀으로 안 되면 기도하라, 하고 그것도 안 되면 손뼉치고 찬양하라, 하고 그것도 안 되면 봉사하라고 하고, 그것도 안 되면 집 팔아서 교회에 바치라고 하고, 어떤 수단으로 하든지 간에 경험세계로부터 초월세계로 입성이 가능한 어떤 희망 같은 것을 주려고 하는 거예요.

그중 하나가 오늘 본문에 개 같은 손할례당이라는 사람들입니다. 손할례당(損割禮黨)에서 ‘손’이라는 것은 왼손 오른손 그 손이 아니고, 손님의 그 손도 아니고 손상시키는 할례, 자기 몸을 손상시킴으로서 할례언약을, 할례율법을 실천에 옮길 수 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자기 몸을 손상하면서 할례를 지키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에게는 그것이 할례언약을 손상시키는 짓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경험된 데서 초월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실상이거든요. 주님께서, 초월하신 분이 놀랍게도 경험하신 분으로 오셨습니다. “너희가 그렇게 경험을 중시하는데 좋다. 내가 너희들의 경험대로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 맡고, 3년 동안 같이 잠을 자고, 너희들 보기에 어떤 인간이 움직이는 모습으로 내가 올게. 내가 오지. 자 충분히 봤어? 내가 키가 몇 센티이며, 내가 몸무게가 얼마가 나가며, 내 가족은 몇 명이며, 어느 동네 사는 사람이고, 어디 출신이며, 내가 어떻게 인생을 마감했는지 충분히 봤지? 경험했지? 따라오려면 따라와 봐.”

못 따라가요. 초월하신 분이 경험세계에 왔지만 경험세계에서 빠져나간 주님은 인간의 경험에 의지하는 자들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본인 나름대로의 초월세계로 만들어서 그 세계로 들어가 버립니다. 왜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가 하면, 어떤 경험한 것도, 어떤 경험의 반복도 한계에 이른다. 초월세계에 갈 수가 없다. 그 격차를 간격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인간의 경험에서는 나올 수가 없다는 그것을 분명히 하시는 겁니다.

결국 인간은 할 수가 없는 거예요. 할 수가 없는데 오늘 욕하는 장면을 다시 봅시다. 2절에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여기에 사람보고 개라고 이야기했어요. 사도바울이 사람보고 개라고 이야기했을 때에 평소에 욕을 입에 달고 싶어 환장한 사람은 좋은 핑계거리를 제공했다고 여겨서 ‘아, 성령 받은 사람도 욕할 수 있구나. 욕 안해야 천당가는 줄 알았는데 욕해도 갈 수 있네.’ 우리가 그 점을 생각해 봐야 돼요.

사도바울이 평소에 뭐라고 이야기했는지를 생각해 봐야 됩니다. 제가 대충 뽑아봤어요. 로마서 12장 18, 19절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누구 말도 아니고 사도바울 본인의 말이에요.

고린도전서 13장 5절에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사람한테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함부로 규정하지 말고, 무례히 행치 않는 이것이 사랑이다.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디도서 1장 7절에는 감독된 자는,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감독된 사람은 급하게 분내지 아니한다. 성질 다 내면 안 된다.

갈라디아서 5장 20절에 보면,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사도바울이 스스로 손상을 주는 손할례당이라고 규정하는 자체가 사도바울이 따로 또 규정되는 것이 아닌가를 생각할 수 있거든요. 저쪽은 이런 단체다, 라고 규정하는 그 본인이 따로 어떤 집단을 형성하는 방식이 되고 절차가 되는 거지요. 그 점을 생각해야 됩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성질내지 말라. 그 다음 31절에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그리고 29절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그러면 사도바울 본인이 손할례당이 개라고 하는 그것은 깨끗한 말인가요?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도록 하라는 거지요. 그런데 “너는 개다.” 이러면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리도 아니고. 이 말이 되게 은혜 되겠네요? 이게 굉장히 은혜가 되는 겁니까?

에베소서 5장 4절에 “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남을 조롱하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어요. 이것은 베드로 사도가 말한 것인데 베드로전서 3장 9절에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10절에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이것은 베드로 이야기가 아니고 야고보사도가 이야기한 것인데 아주 결정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20절에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데살로니가 5장 14-18절에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방금 언급했던 베드로 사도의 말씀과 그리고 야고보 사도의 말씀과 사도 바울 본인의 말씀 그걸 전제로 깔고요 개 같은, 아니죠, ‘개 같은’ 이 아니고 ‘개들’이지요,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할 때는 이러한 규정과 무관하게 거기서 빠져나와서 하는 말씀이거든요.

이런 규정에 전혀 충돌되거나 마찰을 일으키지 않고, 그것에 위반되는 차원이 아니고 다른 차원에서 개들을 삼가고 행악자들을 삼가라, 그들은 손할례당이다, 라고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야, 사도바울은 참 좋겠다. 사도라는 명목을 가지고 자기 성질나는 대로 욕 다 해도 하나님의 계시가 되고, 우리가 조금이라도 섭섭한 이야기를 하게 되거나 화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데 적당치 않다고 이렇게 비난을 받고. 누구는 욕해도 되고 우리는 욕 못하는가?’

그렇게 섭섭한 생각을 할 수가 있는데 사도바울이 말하는 것은 이러한 인간들이 알고 있는 차원과 충돌되지 않습니다. 다른 차원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무슨 차원이냐 하면, 인간이 율법, 그 중에 있는 할례지요, 인간이 율법을 직접 지키려고 다룰 때 개로 드러난다는 겁니다. 인간이 율법을 내가 지킬 수 있다고 여길 때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걸 달리 표현하면 율법이라는 것은 지킴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고 어김으로서 지켜지는 겁니다. 율법을 어길 때 율법의 가치가 드러내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도 그런 거예요. 어딜 감히 율법을 지키느냐, 그 말이지요. 사도바울이 개라고 하는 그것은 뭐냐? 죽음보다 못한 존재라는 뜻이에요.

이 세상 모든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욕은 다 가져오라고 해. 모든 욕을 다 가져와도 가장 극한의 욕은 뭐냐? 죽음보다 못한 존재. 이게 최고에요. 살아 있다는 것이 죽음의 대기조라는 뜻이지요. 죽음, 지옥의 대기조. 지옥에 가기 위해서는 앞에 대기하고 있잖아요. 발 구르면서. “그 다음 분!” 할 때 부르기 전에, 호출하기 전에 발 구르면서 있는 그것, 이게 지옥의 대기조라.

국회의원 누구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지옥가기 위해 대기하면서 그냥 심심하니 국회의원하고 있는 거예요. 할 짓 없어서 농사짓고 있는 거예요. 지옥에 가고 있으면서. 그러면 사도바울은 그 당시에 내가 할례를 행함으로서 율법을 지켰다고 여기는 그 사람을 개라고 이야기했지만 그 개념을 확장시키면 이겁니다.

내가 나를 구원시키기 위해서 성경의 모든 윤리도덕을 다 뽑아서 그것을 내가 양적으로 비축하는 그런 짓거리를 하는 자들은 개가 되는 거예요. 줄곧 유대인이라는 선배들이 해왔던 짓이거든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말씀이 있다. 그 말씀은 지키라고 있다. 지키는데 어떻게 지키는가? 지키게 되면 그것이 양(量)으로 늘어난다. 양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 양이 남의 것이 아니고 내 것이 된다. 내가 지켰으니까, 내가 애써서 지켰으니까 나의 소유양이 되겠지요.

그 비축된 소유양이 나를 구원시킨다는 거예요. 이 논리 아닙니까? 그 논리거든요. 적금 붓듯이. 자기 의를 적금 붓는 거예요. 가끔 곁눈질해서 저쪽은 얼마나 적금을 해놨는지 보면서. 저쪽은 얼마나 하나님께 충성하는가 보면서. 카레이서 하는 것과 똑같은 거지요. 앞서 나가면 성질나서 따라붙지요.

아무리 사람이 점잖아도 차 몰고 거리에 나가서 앞차가 빨리 치고 나가면 곱게 못 따라가요. 어딜 감히 하면서 치고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차 추월하려 하지 않고 자기 속도로 그냥 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것은 딴생각하고 있는 사람이지요. 엉뚱한 생각, 생각이 딴 데 가 있으니까 경쟁상대가 없지요.

인간은 자기의 소유된 것, 윤리적 도덕적 소유의 비축된 양에 의해서 그것이 나를 죄에서, 저주에서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왜 그런가 하면 알 수 없는 공포가 내 맘을 휘젓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공포가 위협이 되고 찾아오게 되면 우리가 기껏 대비할 수 있는 것은 윤리적 도덕적 그런 의로움으로 대비하는 그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도대체 생각나지 않아요.

지금 이것은 가르치지 않아도 타고났어요. 인간이 타고난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개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일괄적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떤 특정인간이 더 나빠서가 아니라 일괄적으로, 일괄성 있게 너 나 따질 필요 없이 다 그렇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율법을 직접 그걸 내가 행함으로 다뤄서 나의 의로 뽑아내겠다는 그 사고방식은 하나님 보시기에 바로 그게 개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본문에서 복음이란 뭐냐, 라고 직접 브리핑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복음이 있다고 한다면 거기에 대한 파급적인 현상들이, 그 배경에 어떤 현상들이 나타나는가 보는데 그 중에 개가 개답게 나타나는 현상도 보이더라.

그런데 빌립보 교인들아, 너희는 기뻐하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너희는 그런 짓으로 구원된 것이 아니잖아, 라고 다시 한 번 다짐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 인간이라 하는 것은 빌립보 교인들, 성도지요, 성도와 그렇지 않은 개 같은, 개 같은 것이 아니고 그냥 개지요, 그 개, 손할례당,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말씀을 대하는 방식이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가?

제가 방금 이야기했습니다. 세상 모든 인간이 타고난 것은 비축된 자기 의로움과, 윤리와, 도덕의 착함이지요. 지난 과거가 이만큼 까지 살기 위해서 얼마나 공들여왔는지 그 공들여온 조심스럽게 살아온 나의 가치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이 그렇게 아픈 겁니다. 사람은 내 것을 지키고 싶어요. 남의 것을 지키고 싶은 것이 아니고.

내 것 중에서 고귀하고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지키고 싶은 거예요. 어떤 사람 노래에 이런 것이 있어요.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 만 같다고 하는데 인간은 손대면 톡 하고 터지는 것이 아니고 손대면 오그라들게 되어 있어요. 확 오그라들게 되어 있습니다. ‘뭐지? 저 인간’ 하고 자기 수세와 방어에 본능적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자기 소유를 안 빼앗기고 누수가 없도록 고이고이 지키는 거예요. 이거 지키려고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게 소유인 반면에 성경에서 빌립보 교회, 교회가 아니고 빌립보 성도들은 뭐냐? 이것은 관계입니다. 관계는 주님만으로 사는 세계입니다. 내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관계에 속하고 관계에서 사는 사람들은 뭐냐? 내 것이 있으면 안돼요. 그런데 주님이 안 들어온 사람은 내 것이 없으면 안돼요. 주님으로 사는 사람은, 관계로 사는 사람은 내 것이 있으면 주의 것을 훼방하기 때문에, 그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날마다 내 것을 배설물로 내 놓는데 그 내 것이라는 것이 뭐냐?

2절에 나오는 내용, 남들보고 저 개 같은 인간, ‘개인간’, 율법을 지키려는 인간, 윤리도덕으로 자기를 꽁꽁 무장하는 인간, ‘저 개’라고 손가락질 하지만 그것이 바로 주님 오기 전에 내 안에 내장되어 있는, 내 안에 잠복되어 있던 모습이에요.

주님이 오니까 바깥에 뭐가 빠져나온 현상이 있는데 그 현상이 뭐냐? 개라고 지적하는 그것이 내 속에서 배설물로 빠져나오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남 욕할 것 뭐 있어요? 우리만 잘하지.” 그게 아니에요. 남 욕하는 것 같지만 이것이 ‘개인간’, 그 인생은 바로 사도바울의 과거인생을 말합니다. 자기가 이렇게 살아온 거예요. 주님 만나기 전에.

이제 그 뒤에 배설물이 8절에 나오거든요. 사도바울이 내놓는 것을 획일화시켜서, 보편화시켜서 지금 바깥에 따로 미리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개같이 살았다, 라는 것을 어떻게 외친다? 기쁨으로 외치는 거예요.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외치는 거예요. “내가 너보고 개라고 하지만 나도 개였어.”라고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무슨 흉터를 갖고 있는가? 개의 흉터를 가지는 겁니다. 개의 흉터를 갖고 있다고요. 나에게 상처가 있어요. 개같이 살던 그 때 생활의 상처, 이걸 보여주는 겁니다. 그 상처가 요한복음에서는 주님이 보여줬던 창 자국과 못 자국. 따라서 주님께 속한 성도라면 누구나 필히 가져야 될 상처. 못 자국 창 자국, 내 밖의 십자가가 아니라 내 몸 안에 있는 십자가, 그걸 가지고 오늘 본문에 할례언약의 완성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할례언약의 완성 율법의 완성은 인간으로서는 위반자가 되고 오직 그 성취자는 예수님밖에 없어요. 할례언약은 예수님이 이루는데 이 손할례당, 개같은 인간들은 뭐냐 하면, 자기가 자기 몸을 손상함으로서 주께서 주신 자기의 율법의 의무를 다 했다고 여기는 겁니다. 흉내 내기에요. 모방이지요. 경험의 모방의 집결이 결코 초월세계를 영적세계로 돌파할 수가 없습니다.

참, 이걸 보면요, 천주교, 그리고 그리스도 정교회, 오늘날 개신교도 마찬가지고요, 독일목사들, 복장 보면 저게 개신교인지 천주교인지 분간이 안가요. 루터교라 하면서도 천주교의 온갖 요소를 다 집어넣고 있어요. 왜냐하면 고객들이 “나도 따라할 수 있는 것을 알려주세요.”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고상함과, 거룩함과, 경건함을 복장으로 대체해서 보여주고, 시간과 공간의 거룩함을 따로 챙기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자꾸 제공함으로서 교회가 유지비를, 경영비를 받아 챙기는 그런 장사를 하고 있어요.

윤리도덕으로 살아가는 이 개인간들은요, 자기 것으로 감사해요. 그런데 관계 지어진 사람은, 하나님의 관계에 의해서 구원된 성도들은 바로 주님 것으로 감사하지요. 주님 것이 내가 아끼는 그것을 가차 없이 발로 찼다는 그 사건에 대해서 감사하는 거예요. 내가 나를, 어떻게 나를 내쫓을 수가 있습니까? 인간이.

그래서 이번 시간이 좀 어렵지만 이 할례언약이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우리가 지금 모르고 지나갈 수가 없어요. 골로새서 2장 11절, 12절, 성경말씀 참 무척 어렵습니다. 함축되어 있어요.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이거 뭐, 조선일보에 이 기사나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사람 별로 없을걸요. 이게 무슨 말인지요. 할례는 뭐냐 하면, 너의 장례식을 네가 치르지 못하기에 내가 치렀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너의 장례식을. 여러분, 장례식이라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사람을 위해서만 장례식을 하는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죽은 자들을 향해서도 장례식을 치르게 되어 있어요.

장례식을 치를 때는, “여러분이 잘 아시던 우리 아버님이 돌아갔습니다.” 혹은 “여러분이 친하게 지내던 우리 가족 누가 돌아갔습니다. 여러분에게 알립니다. 이제는 그분이 산자가 아니고 고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도 장례식이지만 귀신한테도 같은 식으로 알리는 거예요. “저, 귀신님! 이제는 우리 세계에 들어오지 마세요. 당신에게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장례 치렀잖아요. 장례 치렀는데 꿈속에 나타나고 그런 짓 하면 안 됩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가세요. 제발 얼쩡거리지 마시고.”

이렇게 죽은 자, 사자에게 분명히 통보하는 것이 장례식이에요. 오지 말라고 이제는. 죽어놓고 산자 앞에 얼쩡거리지 말라고. 재래시장에 와서 튀김 사먹고 그러지 말라고. 죽은 자와의 결별이지요. 깔끔한 결별입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답게 행동하고 우리는 산자답게 행동하겠습니다. 그게 장례식이라는 말이지요.

유대인들, 개 같은 인간들은 율법을, 자꾸 살아 있는 내가 살아 있을 기회동안에 율법을 지켰다는 어떤 결실물을 내야 된다. 율법을 줬을 때는 살아 있는 네가 몇 가지를 지키고, 양적으로 얼마나 많이 지켰느냐를 지금 측정하기 때문에 양을 측정하는 거기에 부응해서 율법, 할례언약을 내 몸에 새겨줘야 나중에 언제 죽더라도 나는 천국 간다, 주님의 백성이 된다는 이것이 개 같은 인간들이 하는 짓거리라는 말이지요.

이게 개 같다고 욕 얻어먹는 유대인들만 하는 짓이겠습니까? 모든 인간이 타고나서 다 그런 거지요. 그런데 주님께서의 할례언약은 뭐냐 하면, 통째로, 할례는 잘라내는 거거든요, 혈육자체를 통째로 잘라나는 거예요. 제가 아까도 했는데요. 요한복음 1장 13절에 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했다고 되어 있거든요.

이 방식. 정말 주님의 권세가 왔다면 혈통을 할례언약이라는, 세례지요, 할례언약의 완성이라는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주님의 장례식만 말고 주님의 장례식과 더불어 나의 장례식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엄마, 아빠! 저 죽었어요. 저 죽은 자로 간주하세요.”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엄마, 아빠! 나 성령 받았어요. 그러니까 나는 이미 죽은 자에요. 죽은 자기 때문에 죽은 자가 따로 행할 것은 남아 있지 않아요. 엄마, 아빠!” 그런 뜻이에요.

지난 강남강의에서 누가복음 2장을 언급했는데요. 예수님가족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갔는데 오는 길에 12살 먹은 예수님을 잃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아빠 엄마가 얼굴이 새파래져서 사흘 동안 찾아다니다가 사흘 만에 찾았는데 어디서 찾았느냐? 하나님의 성전에서 랍비들, 율법선생들과 토론하고 있는 예수님 자기 아들을 발견하고 막 나무랐어요.

나무랄 만 하지요. 혈통적으로 아버지니까요. 네가 부모 생각 안하고 왜 여기 있느냐, 라고 했을 때 예수님말씀은 참 섭섭하게 들렸을 거예요. “누가 내 아버지십니까?” 여러분이 부모가 되어서 자식한테 어느 정도 크거든 이런 이야기 해보세요. “네가 아직도 내가 엄마로 보이냐?”

성도라는 것은 계모 떠나서 친모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섭섭한 이야기지만 이 땅에 있는 부모들은 계모 계부에요. 졸지에 계모 다 되었네요. 친모 아닙니다. 혈육관계를 해결해야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구원받은 자라면 깔끔하게 혈육관계가 해소되었어요.

말썽꾸러기 아들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켜서 구치소에 가보세요. 누가 찾아갑니까? 너는 내 자식이 아니라고 5년 전에 이야기했어도 역시 찾아가고 위로하는 것은 가족밖에 없어요. 그 정도로 혈육은 강렬합니다. 강해요. 혈육의 정하고 주님의 구원받은 것을 자꾸 비교하는 이유는, 구원되는 것도 인간의 능력으로 안 되지만 혈육 끊는 것도 내 맘대로 안돼요.

아들 낳을지 딸 낳을지, 그것도 내 맘대로 안될 뿐더러 키우면서 이게 안 끊어지는데 안 끊어지는 그것을 가지고 관계라 합니다. 관계! 관계성! 아들이 부자 되었다고 아들이고, 거지 되었다고 아들 아닌 것이 아니에요. 아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느냐, 소유의 양에 의해서 관계가 서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못나도 내 아들 잘나도 내 아들이에요. 이게 혈육관계에요. 아주 지긋지긋해요.

그러나 그것보다 더 지긋지긋한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걸 보여주는 것이 할례언약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찾아오면 내가 너의 고추를 자를 거야. 네 혈육을 자를 거야. 네 부모를 계모로 만들 거야.” 강력하게 밀어붙입니다. 왜? 우리에게 찾아오는 공포는 바로 내가 혈육적인 존재라는 이유 때문에 악마로부터 온 공포기 때문에 그래요. 악마는 “네 몸 죽는다. 네 몸 죽는다. 네 몸 죽으면 소용없잖아.” 맨 날 이런 식이에요. “네 몸은 네가 간수해야지 누가 간수하겠어? 아쉽거든 가족 찾아가고.” 맨 날 이런 식이에요.

경험세계에 계속 악마는 우리를 갇히게 만듭니다. 경험한 것으로 경험한 것을 뛰어넘어라. 이게 무슨……, 이건 가당치도 않는 이야기거든요. 율법을 물게 되면, 율법을 지키게 되면 율법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율법을 벗어나지 못하면 갈라디아서 3장의 말씀처럼 계속해서 저주가 뿜어져 나오는 출구가 돼요.

다시 말해서 율법을 지키는 순간, 이 성경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순간 못 지킴에서 오는 그 섬뜩한 공포, 두려움 같은 것이 나오는 출구노릇이 돼요. 우리 자신이. 교회 안다니다가 교회 나와서 발목을 더 잡혔어요. 남들은 중보기도해서 가족들 잘도 교회 나오는데 너는 얼마나 중보기도를 안했으면 너만 달랑 교회 나오느냐, 하고 꾸중할 때, 지적질 할 때 얼마나 평소에 공포로 다가오겠습니까?

사람들 눈에는 경험한 것들만 보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70인의 제자들에게 경험하지 못한 경험, 경험되지 못한 초월점을 순간순간 보여줬습니다. 누가복음10장 17-20절에 보면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그러나, but,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너희 이름이, 죽음이라는 것은 몸이 사라지는 것이 죽음이 아니고, 이름이 주님의 책에서 지워지는 것이 죽음이에요. ‘함께’가 되지 못하고 주님과의 관계가 떨어진 것이 죽음이에요. 자식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부모가 나중에 치매 걸려서 “어머니, 제가 부자가 되었습니다. 호강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는데 어머니가 “아저씨 누구에요?” 이럴 때 섬뜩한 공포가 다가오는 거예요. 관계가 끊어진 거예요. 이것은 수억을 벌었어도 회생할 수가 없어요. 회복시킬 수가 없어요.

이걸 반대로 해서 이 세상에 어떤, 신종코로나 아니라도 어떤 재난과 어떤 환난이 들이닥친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의 마음에서 우리 이름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감사하고, 기뻐하고, 기뻐할 일이 되는 겁니다.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가요, 환난 중에, 극심한 환난 중에 보낸 편지에요.

마태복음 7장 23절, 유명한 말씀인데 들어보면 어느 정도 유명한지 여러분이 아실 거예요. 22절부터 보면,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현상적이고 경험적이지요.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도무지 알지 못한다. “뉘지? 누구세요?” 도무지 알지 못하는 거예요. 왜? 자기는 기적 행하고, 권능을 행하고, 큰 목회하고, 사람들 구원한 그것이 자기의 소유될 비축량으로 자기 안에 담아놓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행한 것으로 자기가 기뻐하고 감사했어요. 자기 실적으로 감사한 거예요. 자기가 말씀 지킨 그것을 감사한 거예요. 그게 자기의 윤리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죽은 귀신이 장례식이 또 찾아온 거예요. 장례식 치렀는데 나흘 만에 죽은 귀신이 또 집에 돌아온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이미 죽었으면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은 주님이 살아 있잖아요. 주님 죽으심과 우리 산자를 같이 묶어서 죽으신 그것이 바로 할례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아까 읽은 골로새서 2장을 설명하려면 되게 어렵지만 사도바울은 어려운 것을 아시고 “영적인 사람이나 알아들어라.” 하고 우리에게 던져준 거예요. 골로새서 2장 11절에 보면,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통째로 죽이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의 할례의 완성은 너로 인함이 아니라 나로 내가 죽음으로서 너의 할례가 완성된다는 거예요. 그리 되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포섭되어야 합니다. 할례가 뭐냐? 12절에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장례식 치렀다. 이것이 할례언약의 완성이다. 그런데 뭘 가지고 칼 들고 포경수술하고 할례 행했다고, 자기 몸에 할례의 흔적이 있다고, 율법을 지켰다고 왜 그걸 비축하느냐, 왜 그걸 쌓아놓느냐, 그 말입니다. “이 개 같은 인간들아.”

다시 이야기합니다. 개라는 것은 바로 죽음보다 못한 존재,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자기 죽음에 이르지 못한 존재. 아, 이건 정말 심한 욕을 했습니다. “자기 죽음에 이르지 못한 자야! 지옥이나 가라.” 그런 이야기거든요. 자기 죽음에 이르지 못했어요. 자기 죽음에 이르지 못하니까 맨 날 자기 소유만 자랑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요.

“저게 나를 죽였어요.”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못자국이 나를 죽였다, 창자국이 나를 죽였다고 보지 않고 나는 나사는 것으로, 내 행함과 윤리와 도덕으로 나는 지금 이만큼 산다, 그걸 자랑질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이야기는, 바로 세상 교회가면 오늘 이 시간도 외치고 있을걸요.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개불변의 법칙’ 개는 타고난 거예요. 여러분, 할머니는 젊을 때도, 아가씨 때도 할머니였어요. 할머니가 할머니 되는 거예요. 할머니 요소가 잠복되어 있는 겁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으라고 태어난 거예요. 그걸 성령 받아서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사오니 이 어찌 감사하지 않으리오. ‘왜 이제야 나를 알아.’

그동안 철학공부 백날 해도 모르던 나를 이제 내가 누군지 아는 거예요. 그래서 소유는 날마다 플러스(+)를 생각하면서 벌벌 떨지만 관계는 소유를 빼는 겁니다. 마이너스(-) 인생이에요. 관계는 마이너스인생, 주의 이름으로 맺어진 인생.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맺어진 인생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나의 이름을 거뜬하게 외치지 않아도 돼요.

뭐냐? 주의 이름이 내 이름을 대신하기 때문에 이제는 주의 이름으로 밥을 먹고, 주의 이름으로 tv를 보고. 광주강의 갔더니 “이제 목사님 자칫하면 설교시간에 노래하시겠어요.” 하는데 갑자기 진짜 노래가 나와 버렸네요. 이걸 그냥 노래라고 보지 마시고 딸국질로 보시기 바랍니다. 주의 이름으로 잠을 자고, 주의 이름으로 잠도 안 오고. 모든 하는 것이 주의 이름으로 하는 거예요. 나라는 흉터를 가지고.

이처럼 주께서 성령을 주셔서 빌립보 성도들처럼 주님만 바라보면서 기뻐하는 사람을 생산했다. 만들어냈다는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그 자체가 이 세상을 심판하는 기준이 되고 징조가 되기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끝났어. 이 세상은 멸망당해도 마땅해.” 그러면 사람들은 뭐라 하겠어요? “뭘 보고 당신이 그렇게 장담하느냐?”

자기는 죽고 주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 이 관계성, 이러한 새로운 종족, 이러한 새로운 종족이 등장했다는 그 자체가 코로나로 당해도, 환난을 당해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게 사는 사람, 내 것 없어도 주의 것으로 감사하는 사람의 등장 자체가 주님의 활용도가 높아요.

이 세상이 어떻게 살아도 지옥이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증거로서 우리를 활용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집구석에 가만있어도 그게 이미 선교고 전도에요. 선교사 왜 갑니까? 도대체 이해가 안가요. 전도, 선교, 가만히 살아도 그게 전도고 선교에요. 가만히 살아도요. 네가 개인 이유가 내가 있음에 그렇게 된다, 이 말이지요. “너는 네 눈에 개로 안보이지?” 내가 있음에 개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저쪽에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 맞아 죽을래?” 이렇게 나오겠지요. 개들은 알 수 없는 공포가 있습니다. 공포가 들어오면 “예, 착한일 더 하겠어요. 예, 기도할게요. 금식할게요. 철야할게요. 제발 우리가정만 살려주세요. 우리 가정만 안 아프게 해주세요.” 발발 비는 거예요.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자기의 소유성은 더욱더 강렬해지는 겁니다. 여러분이 방청소나 집 청소, 교회청소나 해보세요. 청소를 하면 할수록 그 공간에 대한 소유성이 더욱 강렬해져요. 교회 부숴버려라, 이런 사람들은 청소할 생각도 안하지요.

제가 개 같은 고백을 하겠습니다. 아침에 산책을 하게 되면 조그마한 공원이 있는데 누가 담배를 피우고 꽁초를 버리고 갔어요. 그러면 제가 장갑을 끼고 담배꽁초를 다 줍습니다. 주우면서 무슨 생각하느냐 하면, 이게 공공지인데, 내 토지도 아닌데 내가 이걸 줍는 순간 집착이 강렬해져요. 이곳에는 담배꽁초를 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 다시 말해서 내 소유성이 증가해요. 이것이 저의 개 같은 소유성을 고백하는 겁니다.

뭔가 관심이 있으면 그 다음부터는 나의 소유로 전환되어 버려요. 누구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법무부장관 되지 말고 집에서 살림이나 하고 있으면, 그냥 국회의원하고 있었으면 검찰이 어떻게 돌아가나 관심도 없을 것인데 법무부장관이 되니까 검찰을 손보려고 하는 거예요. 왜? 내 것이니까. 어느새 내 것이 되었어요.

그 정도로 소유성은 인간은, 개는 타고났어요. 그 개가 아주 극단적으로 나가면 뭐가 되느냐? 이제는 오고 갈 데가 없어요. 뭐든지 무서워해요. 그걸 가지고 맹지(盲地)라 합니다. 맹지라 하는 것은 길이 없어서 오도 갈 데가 없는 것을 맹지라 해요. 땅을 샀는데 사기를 당해서 잘못 샀어요. 도로를 못 내서 오고 갈 데가 없어요. 그걸 맹지라 하거든요.

맹지 같은 인간, 현대인의 모습이에요. 그러면 개나 고양이나 키우는 거지요. 오고 갈 데가 없어서 그래요. 주께서 우리를 다루십니다. 우리 개 맞습니다. 하지만 꼬리가 몸체를 흔드는 이 놀라운 초월적인 모습, 보이지 않는 그 꼬리가, 시시해 보이는 그 주님이 우리를 흔듭니다. 우리는 주님 욕해도 가만있으면서 누가 내 욕하면 미동하잖아요.

주님께서 우리가 시시하게 보는 그 주님께서 우리를 중요시 여겨서 오늘도 그리스도만 증거 하라고 바로 개 같은 세상에서, 지옥 같은 세상에서 나도 동일하게 개라는 것을 밝혀내는 그런 배설물을 보이면서 주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주님이 전도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살아계신 주님, 보이지 않지만 혈통을 끊고 천국 백성 만드는 그 주님, 성령으로 활동하게 하는 그 주님, 이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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