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제사에 합류(빌2;17-18) 20060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6. 8. 15:19

제사에 합류
                   
2020년 6월 7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2:17-18

(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2: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여기 사도 바울이 나오고 ‘너희’라고 불리는 자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공통점은 ‘기쁨’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기존의 몸을 지키고 살려고 하면 아무리 해도 기쁨을 오래 유지 못합니다. 평범하게 살려고 해도 그것조차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따라서 사도와 성도들끼리 고유가 되는 기쁨은 기존의 몸을 지키겠다는 의지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사도는 자신의 몸을 관제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관제’란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붓는 의식을 말합니다. “번제나 다른 제사로 드리는 제물이 어린 양이면 전제로 포도주 한 힌의 사분 일을 예비할 것이요”(민 15:5) 즉 사도는 자신의 입장을 희생되는 제물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랍게도 기쁨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도 함께 느끼는 기쁨이요 새로움에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이 새로움은 기존의 몸을 도리어 과감하게 포기하게 만듭니다. 즉 하나님께서 천국에 넣어주는 몸은 인간들이 애지중지하는 기존의 몸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직접 만들어내시는 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기존의 몸을 받지 않을까요? 그것은 이미 인간의 몸은 죽은 몸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19에 보면,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므로서 이미 이 세상은 몽땅 죽어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다시 와서 데려갈 때는, ‘이미 죽은 몸’으로서 데려가는 겁니다. 여기서 윤리와 도덕이라는 곁가지는 다 탈락입니다.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악한 자를 선한 자로 만들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인간들은, 왜 자신이 죽은 자인 것을 하나님의 일로 인해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신앙인의 선배격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간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어느 정도인가를 미리 보여주게 됩니다. 출애굽기 32:8에 보면,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들은 나름대로 이미 ‘신’이라는 개념을 구상하고 있었고 그들 모두에게 동의가 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불러서 시내산 위로 호출당했습니다. 산 밑에 백성들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애굽에 살면서 ‘애굽화’되었음이 뭔지를 몰랐던 겁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신은 우리를 위하는 신”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들은 이 ‘애굽화’에서 ‘출-애굽화’되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리어 그들이 산밑에서 ‘애굽화’라는 것이 어떤 신을 내세울 수 있는 충실히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를 위한 신’이었습니다. 참된 하나님께서는 모세 손에 두 돌판을 들고 내려오게 했습니다. 곧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에 합류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조차 모르는 자가 됩니다. 율법 안에 있으면 살고 율법 밖에 있으면 죽는다고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버렸습니다. 인간의 팔자와 운명은 인간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보내신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집니다. 이스라엘은 나름대로 율법에 일치된 삶이 되고자 노력했지만 그들은 그럴수록 자신의 한계와 죄가 노출되었습니다.

즉 기존의 자신의 몸을 살리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방식은 도리어 율법에 의해서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신약 때 와서, 히브리서 10:6-7에 보면,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은 ‘첫째 것’과 ‘둘째 것’으로 구분 지어 놓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첫째 것은 인간들이 시도하는 겁니다. 그러나 둘째 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시도하는 겁니다. 율법 자체가 어떤 인격과 몸을 이 세상에 나타내게 합니다. 법과 몸의 결합입니다. ‘몸 →율법→새 몸’이 되는 겁니다.

그 와중에서 기존의 몸은 필히 죽어야 합니다. 원래 제사란 ‘흠없는’ 지정된 제물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신체는 제물에 합류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민수기 6장에 보면, 예외가 나옵니다. ‘나실인’입니다.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은 다음의 세 가지 요건으로 갖추어져야 합니다.

하나는 포도주나 포도 초를 마시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서원한 기간 동안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지 말고 자라나는 대로 버려두어야 합니다. 셋째는 일가 친척을 막론하고 일체 장례식에 참석하거나 죽은 시신을 만져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이 땅에 들어온 것은 이스라엘 당연히 축복을 받을 만해서 아닙니다.

따라서 ‘나실인’은 복을 원천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은 겁니다. 자동적으로 포도가 번창하는 게 아니었던 겁니다. 나실인으로서 보여주는 그 희생의 모습에서, 아무 생각없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은혜인 것을 알게 하게 하는 겁니다. 나실인도 뽑히기 전에서 일반인입니다. 그도 다른 일반인들처럼 조상으로부터 혈육을 받은 겁니다.

하지만 그 혈육한 불결한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나실인을 통해서 장차 ‘율법 제물과 어떤 지정된 인물’의 만남을 미리 보여주시는 겁니다. 시간 내에 이러한 세 가지 조건을 충실하면, 기간이 끝나는 날, 그동안 길렸던 머리카락을 잘라서 제물의 일부로 합류시켜 줍니다.

이렇게 해서 제사법이라는 율법조차 인물화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전에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고부터 새이름을 부여받는데 그것이 바울입니다. 이 바울이라는 사람은 이 새 이름의 취지를 보여주기 위해 기어이 ‘관제’형식으로 최후를 마쳐야 합니다.

즉 새 이름을 완성하시는 분은 사도 바울 본인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던 겁니다. 이처럼 참된 하나님은 율법 완성을 통해 이 세상에서 빠져나갈 소실점으로 이끕니다. 십자가라는 소실점이 나타났다는 말은, 그동안 보이지 않던 이 세상이 천국 사이에 거대한 벽채가 있고 그 벽채로 인해 이 우주가 갇혀있음을 알려줍니다.

이 우주는 일종의 저주내리기 위한 세트장인 것입니다. 인간이 기존의 몸으로 천국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야 합니다. 사랑이란 죽음 후에 주어집니다. 광야에서 아스라엘의 아버지대가 다 죽어야 비로소 아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처럼, 기존의 녹물 나오는 수관에서 생수가 나오는 수도관으로 바뀌는 그 접합지점을 사도 바울은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울’이라는 이름의 완성입니다. 사도 본인의 힘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기존의 목숨이 실은 죽어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죽음의 신호’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6강-빌 2장 17-18절(제사에 합류)2006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2장 17-18절입니다. 신약성경 318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2:17-18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사도가 지시하는 자기 인생은 실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인생입니다. 누구든지 ‘살고보자’ 하는데 오늘 본문 17절에 자신을 관제로 드린다, 그것도 기쁨으로 기꺼이 드린다, 라고 되어 있어요. 관제라는 것은 주보 뒤에 나옵니다.

【‘관제’란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붓는 의식을 말합니다. “번제나 다른 제사로 드리는 제물이 어린 양이면 전제로 포도주 한 힌의 사분 일을 예비할 것이요”(민 15:5)‘관제’란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붓는 의식을 말합니다. “번제나 다른 제사로 드리는 제물이 어린 양이면 전제로 포도주 한 힌의 사분 일을 예비할 것이요”(민 15:5).】

제물위에 마지막 붓는 포도주를 관제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관제로 기꺼이 자신을 드린다는 말은, 이 땅에 육으로 태어난 인간에게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생각을 사도바울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경우에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17절 끝에서부터 보면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이렇게 기쁨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공식을 만들 수 있는데 어떤 공식이냐?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자를 하나님께서 친히 만들 때는 기쁨이 동반된다는 공식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이 땅에 우리가 익히 아는 나 자신을 생각하는 이상은 절대로 기쁨은 나올 수가 없다, 그 말이에요.

‘나는 나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내가 이 땅에서 줄곧 살아온 그 나가 맞다고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이 제작하고 하나님이 만드시는 그 나가 아니기 때문에 걱정근심이 늘어나지 기쁨이라는 것은 기대하지 마세요. 왜 그렇게 교회 다니고 복음 안다고 하면서 기쁨이 없는가? 뭔가 내가 나를 꽉 잡고 있어요. 쥐고 있습니다. 놓치지 않으려고 해요.

그러니까 기쁨보다도 걱정이 늘어집니다. 벌 있는데서 꿀단지 뚜 껑 열고 가보세요. “저리가, 저리가!” 해도 소용없지요. 온 벌이 다 달려들 듯이 내가 내 인생을 구원하려고, 내가 내 인생을 건져보려고 달려가게 되면 거기에 온갖 걱정근심이 파리처럼, 벌레처럼 다 달려듭니다.

‘평범하게 살고 싶다’ 혹은 ‘평범한 것 외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평범하다는 그것이 얼마나 두려움을 동반하는지 몰라요. 평범하게 사는 것도 참 엄청나게 힘들어요. 그리고 평범하게 사니 뭐합니까? 언제 깨질까 싶어 두려운데요. 기쁨은 진짜 생각도 못하지요.

기쁨? 그런 것이 다 있어요? 그거 어디서 팔지요? 기쁨을 느껴보지 않은 세월이 너무 오래 되었어요. 기쁨이 뭔지도 몰라요. 경험해 보지 않은 세월이 벌써 수십 년이 흘렀어요. 하나님께서 구원한다는 것은 이 땅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는 겁니다. 참, 이게 기본적인데요. 참 기본적인데 이걸 사람들이 성경 보면서도 몰라요.

사람들이 기존에 있는 나를 자꾸 구원하려 하는데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런 말 믿지 마세요. 없는 인간을 구원하는 거예요. 없는 인간,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인간을. 내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구원하느냐? 주께서 친히 만들어내요. 이 땅에 구원받을 인간은 없어요. 아담계통은 없습니다. 없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서 이 땅에 없는 인간 만들어서 그 만들어진 인간만 천국에 넣어 주는 겁니다.

요한복음 14장 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떠나가는 거예요. 떠나가면서 하는 말이, 이 세상은 두 번 다시 나를 보지 못한다. 하지만 세상가운데서 내가 다시 오게 되면 너희는 나를 볼 것인데 그 관계가 어떤 관계냐 하면, 나는 살아 있고, 그러니까 주님이 떠남으로서 주님은 살았어요, 살았고 그 때 주님이 다시 제자들에게 찾아오게 되면 너희는 살겠다.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주님이 떠나버리면 이것은 제자고 세상이고 전부 다 죽은 상태가 되는 겁니다. 주님이 떠남으로서 세상은 산 사람이 없고 다 죽은 자가 됩니다. 죽은 자가 되는데 살았다는 주님이 다시 찾아오게 되면 비로소 그 때서야 제자들이 산자가 되는 겁니다. 인간들이 자기 자신에게 윤리나 도덕으로 완전무장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받아주지를 않아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악한 사람을 착한 사람 만들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죽은 자임을 인정 못하지요. 그런데 진짜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가 인간세계를 떠남으로 말미암아 그 순간 우리는 ‘아, 내가 산자가 아니고 주님과 결별했기에 죽은 자구나.’ 그래서 안다는 거예요. 그걸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이 떠나시는 거예요.

그리고 떠나시고 난 뒤에 다시 제자들에게 오게 되면 비로소 제자들은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이 이래서 차이난다는 것을, 비로소 제자들은 사도들은 아는 겁니다. 세상에서는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꾸 사랑을 찾는데 여러분, 사랑이라는 것은 죽고 난 뒤에 오는 게 사랑이에요. 자기가 살아있다고 여기면서 사랑을 요청할 권리나 권한은 없습니다.

사랑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우리에게 아가페 사랑이 오는 것처럼 진정한 영원한 사랑은 나를 인간취급하지 않고 나를 죽은 자로 취급할 때 비로소 우리 눈에 보이는 겁니다. 비로소 느껴지는 거예요.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에게 왜 사랑을 주십니까?” 그럴 때 사랑이라는 것이 진정 사랑으로 느껴지는 거예요.

그런데 사랑받고 난 뒤에 갑자기 ‘이것은 내가 받은 사랑이야.’ 사랑을 쥐어버리면 이것은 또 다시 내가 살아난 것이 되어가지고 그 사랑도 기쁨으로 이어지지를 못해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아무리 결혼을 해도 이 땅에는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가, 둘 다 살았다고 우기기 때문에, 둘 다 살았다고 큰 소리 치기 때문에 양쪽 다 마찬가지에요.

“네가 먼저 사랑해라. 네가 먼저 사랑하면 내가 사랑해줄게. 결혼하고 30년 동안 너는 나한테 사랑한다는 말 한 번도 한 적도 없다.” 이렇게 나오고 “그걸 꼭 말로 해야 되냐?” 그렇게 해서 사랑해주면 그게 사랑이 되겠어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해도 자식은 그 사랑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내가 예쁘니까 부모가 날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자식이, ‘나는 이 땅에 없었는데 생겼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누가 낳아달라고 했습니까?’ 이런 식으로 나오면 부모 사랑이 사랑일 수가 없지요. 지금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게 말씀드립니다. 사도바울 이름이 처음부터 바울이 아니에요. 사울이에요. 사울 속에 바울이 들어 있었던 겁니다.

사울본인은 그것을 모르고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했지요. 사도행전 9장에 보게 되면. 원래 유대인의 이름이라는 것은 7일이 지나고 8일 만에 부모가 이름을 지어줘요. 새로운 창조라고. 이름을 지어주는 자체가, 이것은 없는데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어서 없는 네가 태어났기에 너라는 그 몸뚱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법이 시작된다는 의미에서 유대인들은 난지 8일째에 이름을 지어준 겁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면 사울이라는 이름밖에 모르는, ‘작은 자’라는 뜻의 이름밖에 모르는 이 사울이 자기는 태어났기 때문에 살았다고 여겼던 거예요. 그런데 그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예수 믿는 사람을 이단이라고 잡아 죽이려고 했을 그 때 주님께서 찾아와서 이름을 뭘 로 바꾸는가 하면 사울에서 바울로 바꿔줘요.

바울이라는 새 이름으로 바꿔 타는 순간 사울은 산자가 아니고 사울이라는 그 몸은 죽은자였음을 주님을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그러면 살아 있는 이 바울은 바울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사울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바울 안에 주님이 살아 있는 거예요.

주님이 살아 있을 때 살아 있는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주님의 몸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바울이라는 사람은 그 소실점, 사울의 소실점까지 가는 거예요. 그게 뭐냐? 관제의 순간이에요. 마지막 죽는 순간에 바울로서 죽는 거예요.

이것은 예수라는 이름의 재현입니다. 이것은 바울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모든 성도에게 다 주어지는 거예요. 바울은 지금 하나의 주님의 몸으로서 계시의 도구역할을 하는데 뭘 보여주느냐 하면, 죽은 인간이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어떤 지점을 통과해야 되는데 그게 소실점이지요.

소멸점, 소실점 소실 포인트 어떤 점이 있는데 그 점을 여기서 통과해야 된다. 그 천국, 법의 완성을 통해서만 천국에 갈 수 있거든요. 그 율법의 완성지점을 바울 본인의 인생을 통해서 날 따라와, 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관제가 된다. 마지막 제사. 제사를 드릴 때 원래 인간의 요소는 들어가면 안돼요. 시꺼멓고 불결하고 더러운 인간의 요소는 제사에 들어가면 안돼요.

그런데 신약시대의 바울은 제사라는 이 거룩한 자리에 바울의 자격으로 합세를 해버려요. 그 합세하는 모양새가 죽는 모습입니다. 거기서 ‘봐라. 이렇게 통과하는 거야. 인간들아! 나처럼 통과하는 거야.’ 사도란 죽음의 이름이거든요. 사도 자체가 죽음의 사도에요. 통과하는 사도, 소실점 남기고 그냥 가는 거예요.

사도가 이쯤에서 죽었을까, 사도의 무덤은 어디일까, 그렇게 찾아봐도 그것은 소실점이 보이지 않아요. 왜냐하면 소실점이 드러나면서 그동안 보이지 않던 벽이 드러납니다. 벽, 그동안 인간 세상은 하늘을 볼 때 벽이 없었어요. 이 세상은 자연세계, 물리학적인 과학적인 세계, 그게 전부입니다. 이 세상은 벽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어요. 저 너머 별들이 있는 세계, 그것뿐이지 벽이 없어요. 천국과 이 우주와는 벽이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 우주라는 것, 그 넓은 우주가 하나의 세팅된 무대였습니다. 트루먼 쇼, 하는 거지요. 하나의 세트장이에요. 콘크리트보다 더 두꺼운 벽이 인간을 가둬놓은 겁니다. ‘그 벽이 어디 있어? 어디 있어?’ 하는 것은 소실점을 따라가게 되면 ‘아 있구나.’ 갈라디아서 3장의 말씀처럼 모든 인간은 율법 안에 갇혀 있고 죄 안에 갇혀 있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 23절에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모든 것이 갇혀 있었던 거예요.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니까 갇혀 있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예수님 빠져나갔지요. 그 다음에 예수님이 찾아와서 바울 손잡고 데리고 빠져나가버렸지요. 빠져나가면서 그 포인트, 점 하나로 딱 빠져나가버리지요.

“따라가 봤는데 뭐가 없어. 어디로 갔지? 어디로 갔지?” 찾고 있다고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은 그렇게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겁니다. 그런데 소리 없이 사라지면서, 뒤돌아보면서 사도바울이 없어지면서 마구마구 남긴 것이 있어요. 기쁨,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라는 소설이 있는데 고양이 웃음소리가 막 나요. 고양이가 먼저 있고 웃음소리가 그 고양이에서 나온다는 것이 상식인데 나중에 그 소녀가 가 보니까 고양이는 없는데 고양이 웃음소리만 그 지점에서 날리고 있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떠나간 그 지점에 기쁨, 기쁨, 기쁨, 기쁨만 막 날리고 있습니다. 희한한 현상이지요.

‘그 사람 어디 갔지?’ 사람들은 그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한 거예요. 마치 엘리야 제자들이 “우리 스승 엘리야 어디 갔지?” 엘리야는 지금 불말 불 수레 타고 하늘로 갔는데 밑에 있는 제자들은 엘리야 찾는다고 사흘 동안이나 찾아다니는데 시체가 있습니까? 있을 리가 없지요. 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예수님이 무덤에 있을 때 옷 벗어놓았지요. 그 벗어놓은 옷이 예수님은 아니지요. 옷은 있는데 예수님은 간곳이 없어요. 천사가 청년 모양을 해서 그 무덤에 앉아서 “누구 찾는데?” “주님 찾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안계시잖아.” ‘그러면 다른 세상?’ “그렇지 다른 세상.” ‘어찌 갔지?’ “어찌 가기는. 주님만 갈 있지. 너는 못가.” 못가는 순간 우리는 갇혀 있는 겁니다.

금요일에 제가 집에 없을 때 전화가 왔고, 이튿날 아침에 전화가 또 왔었어요. 그래서 받아놓은 전화번호로 아침 9시에 전화를 했거든요. 서울에 계신 어떤 분에게. “전화를 왜 하셨습니까? 뭐 궁금한 것이 있습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다 죽어가는 소리를 해요. 자기가 2009년도에 우리교회에 5개월 동안 다녔대요. 그러면서 “기억하시겠습니까?” “기억 못합니다.” 기억을 할 수가 있습니까? 벌써 세월이 10년이 갔는데요. 성경말씀도 못 외우는데.


“전화를 왜 하셨습니까?” 하니까 그분이 우는 소리를 하면서 “내가 5개월 동안 그 교회 다니다가 서울로 이사를 갔는데 남편과 아들이 차사고로 죽었어요.”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그래서 뭐 어쨌단 말입니까?” 그렇게 하니까 자기 딴에 말이 잘 안 먹힌다 싶거든요.

“남편과 아들이 차사고로 죽고 난 뒤에 우울증이 걸려서 이제는 혈액암에 걸렸습니다.” “그래서요?” 암 걸려서 병원에 다녀야 되는데, 딸 월급으로 생활하는데, 3개 월동안 병원에 다녀야 되는데 세상에 그 딸이 며칠 전에 지하철 타고 출퇴근하는데 어떤 남자가 치는 바람에 넘어져서 고관절이 다 나갔다는 겁니다.

“그래서요? 그게 뭐 어째서요?” 그러니까 그쪽에서 상당히 불쾌한 반응을 나타내요. 10분 동안 계속 자기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 딸이 아팠으니 3개월 다녀야 되는 병원도 못하고 죽게 되었다는 거지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지금 전화하시는 분은 자꾸 내 남편, 내 아들, 내 딸, 이렇게 하시는데 몸이 주님의 몸입니다. 주님 몸이니까 먼저 주님과의 관계를 설정을 해주셔야 돼요. 관계를 유지해야 됩니다.”

제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끄집어냈어요. 그런데 그분이 불쾌한 마음이 격분, 분노가 되어버렸어요. 전화를 끊고 난 뒤에 다시 전화를 해서는 드디어 욕을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당신은 목사도 아니다, 당신 자식이 아파도 그런 소리 하겠느냐 부터 시작을 해서 양이 이렇게 아프면 뭘 도와줄까, 목사가 그렇게 나와야지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그런 소리를 해요. 핵심은 수술비 30만원 도와달라는 그 이야기에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그냥 죽으세요. 다른 사람은 못 죽어서 난리인데 지금 좋은 찬스가 왔잖아요.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이참에 딸 붙들고 굶어죽으시면 되는 겁니다. 그 좋은 기회를 받은 것을 가지고 그 좋은 기회를 왜 놓치십니까?” 나도 화가 좀 나는 거예요.

도대체 왜 주님이 오셨느냐 하면, 끊어진 지점을 소개하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우리가 자꾸 교회 안 나오고, 성경 안 보게 되면 본인이 살았다고 여기는 거예요. 죽음의 세계에서 죽어가고 있거든요. 죽는 게 무서워요, 지옥 가는 게 무서워요? 죽는 것 보다 지옥 가는 것이 더 무서워요. 지금 이 땅은 지옥으로 완전히 밀어붙일 판이거든요. 왜 주님이 이 땅을 포기하고 떠났기 때문에 이 땅에 남아 있다는 것은 지옥 가기 위한 남은자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하신 역할은, “다시 올게.” 했으니까 사도바울의 경우처럼 다시 오셔서 손 잡고 데려가는 겁니다. 데려갈 때 어디를 주목해야 되느냐? 도대체 갇혀 있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인간의 윤리 도덕 해봐야 그것은 곁가지 다 잘라내야 되고요. 갇혀 있는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일은 뭐냐? 죽은 자를 살리는 겁니다.

죽은 자를 살린다, 할 때 정말 죽은 자가 살아난 사람 같으면 어떤 모습을 보이면서 천국을 가고 있는가? 그 모습을 사도바울은 관제라는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기쁨이라 하는 것은 이 땅을 떠나는 기쁨이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랑이라는 것은요, 내가 죽을 때 비로소 사랑이 보이지 내가 살아있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소유가 되는 겁니다.

소유는 십자가 외곽에 있어요. 십자가와 관계가 없어요. ‘내가 저 사람을 가져야지.’ 이게 뭐예요? 본인은 관제가 될 마음이 없다, 그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서 사랑해보세요. 사랑을 해보면 사랑이 괴로움이 돼요. 사랑했나봐, 그 다음에 나오는 현상은 잊을 수 없나봐, 자꾸 생각나, 견딜 수가 없어, 후회하나봐, 그 다음에 널 기다리나봐, 나도 몰래 가슴 설레어와, 애태우고, 바보가 되고. 윤 도현 밴드가 불렀던 “사랑했나 봐”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사랑했나봐, 잊을 수 없나봐, 자꾸 생각나, 견딜 수가 없어. 이게 뭐냐 하면 아무리 사랑을 받고, 아무리 사랑을 해도 나를 관제로 넘길 마음은 하나도 없게 돼요. 오히려 붙들게 되고 붙들게 되면 기쁨이라는 것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습니다. 기쁨은 없어요. 가진 것 지키려고 하면 더 자의식이 강렬해져요. 이 가사 내용, 정말 바보 같은 짓입니다. 늘 아파해야 돼요.

사랑은 죽고 난 뒤에 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받더라도 사랑받은 것은 뭐냐? 날마다 죽으라, 그 말이지요. 그 사랑이 그렇게 귀하고, 사랑받은 그 기쁨은 이제는 소유화시키지 말고 날마다 ‘나 죽었는데 왜 또 주께서 사랑하시지?’ 그런 것이 계속 유지돼야 되는 겁니다.

이 관제, 주님께서 끊어진 지점을 찾아주고 끊어진 지점을 소개하는 이 모습은 왜 그러냐 하면, 이게 참 어려운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에 죽음으로 보내시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살아 있는 인간이 더 살기 위해서는 바로 무엇과 연계시키느냐 하면 신을 찾아요.

살려달라고, 죽고 난 뒤에는 천국 보내달라고 자꾸 신을 찾는데 그 신은 무엇이 빠진 신이냐 하면 주님이 빠진 신이에요. 지상에서 인간들이 찾는 그 신은 주님이 빠졌어요. 사람들은 주님이 꼭 필요한 이유를 모르고 있어요. 주님이 빠져버리면 그것은 진정한 하나님이 아니에요. 가짜하나님이에요. 이걸 소개하려고 구약 때 이스라엘 역사가 우리 대신 고생 참 많이 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거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도착했어요. 모세는 산위에 올라갔고 백성들은 산 밑에서 뭘 했느냐 금송아지를 섬겼거든요. 그리고 금송아지를 보면서 여호와라 했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애굽화,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적으로 완전히 애굽화 되어 있어요.

애굽화 되어 있는 것, 그래가지고는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앞에 ‘출(出)’을 붙여야 돼요. 애굽화 되어 있는데 ‘출’ 애굽이 되어야 돼요. 그러면 뭐부터 순서가 되어야 되느냐? 애굽이 알고 있는 신, 애굽화된 인간들이 신을 찾을 때 어떤 식으로 신을 찾는가가 먼저 형성되어 있어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없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고려하지 못하고, 십자가 죽어버린 신을 제키고 내가 하나님을 대할 때 아까 대표기도 하신 분도 했지만, 내가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할 것인가가 먼저 형성이 되어줘야 돼요. 그럴 때 그 형성을 선배가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이미 보여줬습니다.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 모세는 빠져버렸어요. 모세가 빠지니까 자기 속에 있는 내면의 신들이 쏟아져 나와서 어떤 형체를 만드는데 그게 뭐냐? 출애굽기 32장 8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

그러니까 그 송아지 이름이 여호와인데 ‘여호와’라고 하면서 섬기는 그들의 신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살아 있는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보탬이 되고, 내 목적에 부합되는 하나님을 우리는 고대하고 원하고 있습니다.’를, 모세가 빠진 상태에서 그들은 애굽화된 신을 그대로 노출시킨 거예요.

그리고 그런 인간들은 약속의 땅에 넣어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아주지를 않아요. 막상 모세가 40일 동안 있다가 내려왔을 때 두 개의 대결이 있어요. 하나는 애굽화 된 신이고, 애굽화가 지속되는 것은 금송아지의 연속이지요. 또 하나는 출애굽, 애굽에서 ‘출(出)’, 빠져나오는 애굽화가 뭐냐 하면 십계명이라는 율법입니다.

율법이라는 그 말씀과 인간의 내면에서 형상화시킨 금송아지의 대결, 그러면 금송아지는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한 신과 말씀대로 모든 것을 실시하시는 나타나신 하나님과의 대결구조에서 이스라엘역사가 진행되는 겁니다.

어떻게 진행되는가? 20세 이상은 다 죽여 버립니다. 아버지를 다 죽여요. 아버지를 다 죽이지 아니하면 아들도 약속의 땅에 못갑니다. 하나님의 뜻은 40년 동안 뺑뺑이 돌려서 아버지를 다 죽임으로서 죽은 아버지 아래서 아들이 나온 그 아들만 약속의 땅에 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에요. ‘죽어 없음’에서 새롭게 만들어져야 돼요. 현재 있는, 살려고 하는 나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그 나라는 것이 죽어 없어져야 돼요. 그냥 죽어 없어지면 지옥 갑니다.

어떻게 하느냐? 죽어 있는 이 내몸을 어디에 섞어 넣어서 죽이느냐 하면 율법에 섞어 넣어서 죽이는 거예요. 율법에. 그래서 율법을 준 거예요. 그냥 자살한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주어진 율법은 우리한테 호소합니다. “관제가 되어라. 이 제사에 합류해라.”

물론 우리가 합류하는 대신 어린양이 합류하지만 어쨌든 간에 어린양을 내놓든지, 어떻게 하든지 간에 이 내 몸은 죽어야 마땅한 몸이라는 것을 율법에 준해서 네가 인정하고, 더 이상 살아 있는 네 몸에서 어떤 기대나 목표나 희망이나 그런 것을 찾지 말라는 뜻이에요. 내 남편, 내 아들, 내 딸, 그것 찾지 말라는 거예요.

나를 살려주는 신, 그 신은 주님이 빠진 신이에요. 십자가가 빠진 신이에요. 그것은 가짜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애굽화에요. 출애굽이 안 돼요 그게. 현재 태어난 나를 사랑해 달라. 그래서 “교회 다니고 시키는 대로 다 했으니까 죽어가는 나를 수술해서 살려주세요.”

아, 참, 지금 주님께서는 복 주신 거예요 정말. 심하게 말해서. 고관절 날라 간 것 복 주신 거예요. 그 사람이 전화통에 대고 고함질러가면서 나에게 이야기한 것이, 당신 자식이라면 나에게 그렇게 매정하게 안한다는 거지요. 역지사지 하는 것 있잖아요. 입장 바꿔서 생각하라고. 당신 딸이라면 당신이 그렇게 생각 안할 것이라고.

지금 내 생각하기도 짜증나는데 내 딸까지 생각할게 뭐가 있어요. 나도 지금 근근이 살아가는데. 나도 주께서 살려줘서 사는 건데 내가 내 딸 살립니까? 그 사람이 주장하는 것은 뭐냐? 부모가 되었으면, 엄마가 되었으면 딸을 책임져야 된다는 거예요. 나도 내 몸도 책임을 못 지는데 누굴 또 책임을 져요? 딸은 주님이 알아서 책임지겠지요. 외손녀 외손자 책임지겠지요. 내가 왜 관여합니까? 내가 얼마나 무능한데요. 내가 나에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는데요.

주님께서 법을 주신 이유가 법에다 우리 자신을 섞어 넣어 버리는 거예요. 법이 마중 나와서 우리를 죽이는 겁니다. 그래서 죽고 난 뒤에 법이 소실점을 통과할 때, 법이 완성의 이름으로 천국 갈 때 우리가 그 법의 완성에 섞여 들어갔기에 빨려 들어서 같이 통과되는 거예요. 부드럽게 넘어가는 겁니다. 그게 관제에요.

주보에 보면, 히브리서 10장 6, 7절에도 나오지요.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백성에게 율법을 줬는데 그들은 율법에 참여하기 위해서 제사장 비롯해서 총동원해서 백성들이 양 바치고 했어요. 그래가지고 자기들 딴에 율법의 노선에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다 실패로 끝나요. 율법에 합류해서 천국에 가게 되면 우리는 따라갈 수 있다는 계산이 섰는데 문제는 내 이 육신 몸뚱이, 죄가 얼마나 강렬한지 내가 율법을 소유할 생각하고 지킬 생각을 했지, 율법 앞에서 내가 죽을 생각을 어느 인간도 안하고 있어요.

교회 오는 것은 죽으려고 와야 되거든요. 그런데 어느 인간이 교회 올 때 죽으려고 옵니까? 살려고 왔지요. 그러니까 그 당시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에요. 법을 지키면 살아 있는 내가 더 산다고 생각했지 이 법이 나를 죽일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한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했는가? 주님께서 마지막 인물을 투입시켜 버리지요. “너희들의 제사장은 백날 해도 소용없다. 내가 한 방에 모든 율법대로 죽을게.” 지금 주춤주춤 하고 있는 거거든요. ‘율법아 나를 살려라.’ 그러니까 율법 가지고 기존의 몸, 아담의 몸을, 그 노선을 자꾸 유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몸이 있고, 애굽에서 나오고 난 지 430년 후에 율법이 추가됩니다. 몸이 있고, 율법 있고, 그 몸이 율법에 결합이 되고, 몸은 죽고 율법은 빠져나와서 그 율법이 새로운 몸 예수님과 만나서, 율법화된 예수님이 천국에 들어가서, 아까 요한복음 14장의 말씀처럼 다시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는 이미 율법완성의 의로운 몸으로서 하나님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아서 천국 가는 겁니다.

그 과정이 꽤나 복잡해요. 그냥 신에게 빈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에요. 중간에 주님이 있어야 돼요. 중보자가, 중재자가 있어야 됩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에게 그냥 빌면 안 되고,왜 예수님이 고생고생 해야 되는지를, 이제는 그것을 알 때가 되었잖아요.

아까 제가 말할 때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제사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분명히 선언을 했다 이 말이죠. 선언을 하게 되면, 그렇다면, 어떤 인간도 제사에 참여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의 죄 된 몸과 율법이 한 덩어리가 될 수 있겠느냐, 라고 생각의 깊이 있는 사람은 생각을 해 볼 겁니다.

그런데 민수기 6장에 보게 되면 거기에 제사에 인체의 일부가 포함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민수기 6장에 나실인이 있어요. ‘나실 제 괴로움’ 의 그 ‘나실’ 말고 ‘나실인’은 구별되었다는 뜻이에요. 이 나실인은 세 가지의 조건을 갖추 놓고 그 조건이 어떤 특정기간 내에 완료가 되면 그 나실인 자기 몸에서 난 머리털을 제사에 합류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게 됩니다. 민수기 6장 19절에.

그러면 조건이 뭐냐 하면, 세 가지에요. 첫째는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라. 6장 3, 4절,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찌니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찌며.”

두 번째 조건은 6장 5절에 머리카락을 자르지 말라.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 언제까지? 하나님께 서원한 그 기한이 될 때까지는 절대로 머리카락을 깎아서는 안 된다는 것.

그렇다면 그 서원한 기한의 시계역할을 째깍째깍 하는 것이 뭐냐? 머리카락이에요. 머리카락을 계속 길음으로 말미암아, 너는 지금 제대로 서원대로 특별한 인간으로서 보통 인간 말고 다른 노선을 걷고 있다. 제사에 합류하는 특이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머리카락으로 설명하는 겁니다.

그 머리카락대로 이스라엘을 구원한자가 있었으니 삼손입니다. 그 머리카락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거예요. 세 번째 조건이 뭐냐 하면,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며 부모 형제가 죽을 때라도 그를 위하여 몸을 더럽히지 말라는 것.

민수기 6장 6-8절,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 그 부모 형제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인하여 몸을 더럽히지 말 것이니 이는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 머리에 있음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그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니라.”

첫 번째, 포도주와 독주 그리고 포도주와 독주의 초, 식초를 마시지 말라고 되어 있어요. 이 땅에서 나오는, 그 가나안 땅에서 나오는 귀한 산물에 대해서는 일단 여기서 네가 손을 떼라. 젖과 꿀이 있으면 그 땅의 백성들은 자기가 살았다고 착각들을 해요. 이렇게 풍족한 게 많지요. 긴급생계자금까지 받아놨으니까 나는 살았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의도적으로 거기서 벗어나라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이 땅은 너희들보기에 잠시 빵이 있고 마실 물이 있으니까 살만해서 주는 줄 알았지. 그것은 착각이다. 진정한 것은 진짜 하나님의 택한 자가 너희들에게 와서 차별화된 삶을 살게 되는데 그쪽에 집중해라. 그쪽을 주목하라.” 지금 밥 먹고 맛있는 것 먹고 자기 인생 즐기는데 집중하지 말고 너희들과 차별화된 특수한 인생을 사는 그 나실인에 집중하라는 말이지요.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예수님에게 집중하라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일반인의 평범한 삶 말고 특별한 삶을 사는 주님께 집중하라. 그분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서 완성되었는지. 나실인이 포도주를 끊어버리고 머리카락을 키우면서 하나님께 결합될 요소를 사람들에게 보이게 됩니다. 머리카락을 깎지 않아요. 수더분하지요. 계속 그냥 놔두는 거예요.

머리카락이 사람의 손에서 가위로 깎일 수 없다는 말이지요. 사람의 의도에 의해서는. 너무 길다고 위생상 그럴 수 없는 거예요. 주님께서 끊을 때 끊어야 돼요. 왜? “끊을 때 끊어진 그 머리카락의 끊어진 부분이 차이 나는 특별한 다른 인간만이 하나님의 제사에, 하나님의 율법에 통합이 될 수 있는 특수한 몸으로서 너희들의 코앞에, 눈앞에 똑똑히 보이겠다.” 그것이 바로 구별된 사람 나실인입니다. 나실인의 임무에요.

평소에 우리가 인생 살면서 그런 사람에 흥미 있습니까? 관심 없지요. 그리고 나실인은 일가친척이 죽더라도 가지 말라. 왜냐하면 이 사람이 새로운 노선이거든요. 율법의 완성노선이기 때문에 혈육적인 노선이 아니에요. 그러면 대대로 내려오는 아버지 어머니 일가친척과는 거리를 둬야 되는 겁니다. 일가친척 누가 죽더라도 그 장례식에 참석하면 안돼요.

아담의 족속은 자꾸 인간을 죽게 만들어요. 그런데 나실인의 삶은 어떻게 죽음가운데서 생명이 되느냐, 하는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이 나실인 기능을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어떤 수도파이프에서 녹물이 나오는 거예요. 수도꼭지에서 늘 녹물이 나오니까 하나님께서 그 수도꼭지에다 특별조치로서 생수가 나오는 파이프를 연결시켜버린 겁니다.

일반사람들은 그냥 녹물이 나오는데 이 파이프가 연결된 사람만큼은 신선한 물이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실인을 준 겁니다. 그 나실인은 어디에 근거하느냐? 바로 율법에 근거해서 주어진 거예요. 원칙은 그거예요. 어떤 인간도 더러워서, 절대로 율법에 하나님의 지시한 제물 외에는 인간의 이름으로는 가담될 수 없습니다.

왜? 인간의 내려오는 몸 자체가 더러운 몸이기 때문에. 그러나 특별조치에 의해서 하나님께 구별된 몸은 하나님의 율법에 합류가 되는, 제사드릴 때 자기의 신체일부가 섞여서 합류가 되어서 그걸로 하나님께서 받아주셔서, 그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것은 그 나실인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것이지 너 때문에, 네가 노동해서가 아님을 새삼스럽게 알려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율법에 따라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그리고 율법 따라 죽으신 거예요. 주님은 녹물이 나오는 파이프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은 예수님과 함께 섞여 살 때는 몰랐어요. 제자들조차 몰랐어요. 자기가 녹물이 나온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죄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니까, 득세 하니까 자기는 이러다가 천국 가겠지,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주님께서 베드로보고 오지 말라고 할 때 낌새도 못 느꼈어요. ‘왜 오지 말라고 했을까?’ 네가 지금 하나님을 인정하기 때문에 오지 말라는 거예요. 주님이 빠져버린 하나님이기 때문에 오지 말라는 말이지요. 주가 없는 하나님, 그것은 참 신이 아니에요. 진짜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지 우리가 찾고자 하는 나를 위한, 기존의 내 몸을 살리고자 하는 하나님은 우상, 귀신한테 제사하는 겁니다. 귀신한테 예배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기독교를 변증한다 하는데 그거 변증하지 마세요. 그거 지옥 갑니다. 기독교변증하려고 지금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자기를 관제로 드린다고 하지 않았어요. 복음을 변증해야 되지요. 기독교가 아니고 복음, 복음은 반드시 나를 이미 죽은자로 간주합니다. 이미 죽은자로. 죽은 자일 경우에만 우리가 살아 있을 때 기대했던 희망, 소망, 사랑, 기대, 주님, 천국, 이 모든 것도 다 주님께서는 없애버릴 수가 있습니다. 제발 그 망상, 그만 두라고 하면서 제거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죽어야 아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처럼 우리는 기존의 녹물 아버지 같은 조상에서 관계가 끊어져야 돼요. 일부러 관계 끊으면 그것은 신천지입니다. 일부러 가출 막 하고 그런 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찾아오셔서 그렇게 하게 하셔요.

어떤 TV 프로 보니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전화를 걸어서 트롯 가수한테 듣고 싶은 곡을 신청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남편을 사별하고 혼자 애 셋 키우는 아주머니가 전화를 걸어서 당첨되었습니다. 전화하는 가운데서 김 성주 아나운서인가 하고 통화를 해요.

“지금 전화주신 분께서는 누굴 좋아합니까?” 하니까 “나는 누구를 좋아합니다.” 전화기 뒤에서 나는 누구 좋아하는데……, 그런 소리가 들리니까 아나운서가 묻지요. “아들은 누구 좋아하는데?” “장 민호 좋아합니다.” 또 다른 아들이 있는데 그 애는 “임 영웅이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그 MC 보는 아나운서가 정말 멋진 말을 했어요. 그런 멋진 복음적 이야기를 처음 들었어요. 그러니까 TV볼 때 유심히 들어야 돼요. 복음적인 멘트나 내용이 나올 수가 있어요. “미스터 트롯이 아버지네요.” 했어요.

아들들이 있는데 하나는 임 영웅이 좋아하고 다른 하나는 장 민호 좋아하니까 하나는 임 영웅이 아들이고, 또 다른 애는 이찬원이 아들이고, 이런 식으로 전부다 미스터트롯에 나오는 가수들 아들들이에요. 지금 전화 거는 그 아주머지 집에는 아버지가 없어요. 아버지가 없는데 자식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누구 자식인가? 장 민호 자식이고 임 영웅이 자식이고 그 트롯 가수들 자식이지요.

그래야 돼요 우리가. 기존의 인간은 안 받습니다. 기존의 인간들은 주께서 받지를 않아요. 네가 어디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목사를 어떻게 섬기고, 그런 것은 일체 받지를 않아요. 녹물이기 때문에, 썩은 녹물만 나오기 때문에 받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는 끊어졌다. 그리고 어떤 콘크리트 벽에 갇혀 있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뭔가 관제로, 율법에 의하면 마지막 제사에 포도주로 합류하는 그 포도주 역할을 사울을 제키고 바울로 완성시키는 거예요. 바울의 완성은, 주께서 친히 십자가에 죽기까지 합류하는 데까지 주께서 계속 이어나가다가 죽으면 그게 완성되는 거예요.

사울의 완성이 아니고 바울의 완성입니다. 기존의 내 몸의 완성이 아니고 새롭게 주어진 주님의 생각한 그 나의 완성이에요. 나는 그 소유를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소유하십니다. 남편이 죽든, 아들이 죽든, 딸이 죽든, 단체로 죽든 관계없어요. 나도 마찬가지고요.

그럴 때 그 방향성이 중요하거든요. 죽는 내내, 살아 있는 내내 무엇이 사는 기쁨이었느냐를 오늘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빠져나감이 기쁨이지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주께서 새로운 인간으로 탈바꿈 시켜서, 손잡고, 나를 데리고 이 땅에서 살다가 주님 가는 곳으로 가자, 하고 빠져나오는 기쁨, 그래서 이 땅에서 죽을 때의 그 기쁨, 그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없어서 오늘 본문에 기뻐하다, 기뻐하다, 기뻐하다, 기쁨을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나에게 주는 고통은 고통도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것은 간질이는 것이고 신종코로나 이것은 고난도 아니에요. 빠져나오면 그만이지 신종코로나 있는 곳에 계속 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바이러스야, 나는 간다. 빠이빠이, 하면 끝나는 거지요.

구약전도서 7장 1, 2절에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왜냐하면 “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결혼식에 가는 것보다 나은 거예요. 사람들은 기존의 몸을 포기 못하기 때문에 제일 좋아하는 것이 뭐냐 하면 돌잔치나 백일잔치에요. 그 포동포동한 어린애 살결, 애 보면서 예쁘기도 하지만 예쁘다고 하는 것은 부럽다는 뜻이에요. ‘한 때 나도 저렇게 포동포동했는데 아이고 쭈그리 영감이 되었구나.’

기존의 몸은 버리라고 주는 거예요. 바꿔치기 하라고 주는 겁니다. 녹물이다, 하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는 아직 못 떠나고 있는 거예요. 아직 차 사고 안 나고 있는 겁니다. 세상에 있으면서 그동안 나로 인해서 기존의 이 몸이 잘되는 것, 자식 잘되는 것, 그걸 기쁨으로 삼았는데 그것도 녹물이라, 그것도 죄에요.

우리는 홀로 갈 수 없어요. 말씀, 율법 완성, 십자가는 율법의 완성이거든요, 그 율법 완성에 합류되어야 돼요. 합류될 때 나오는 그 기쁨은, 버릴 수 없는 내가 십자가로 인하여 기꺼이 아낌없이 쉽게 포기가 되는 이런 데서 오는 존재의 가벼움, 이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이 기쁨을 같이 누려야 된다고 해서 오늘 본문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이렇게 되어 있어요. 17절에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여기 너희에 해당되는 사람 누구겠습니까?

사도바울처럼 동일하게 성령 받은 사람, 주님이 찾아와서 사랑받을 자격이 없음을 너무나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나 같은 것은 사랑하지 마세요. 그냥 죽이세요. 그게 사랑입니다.” 하고 외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 앞에는 18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하면서 사도바울은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7, 8절에 보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생명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사도바울이 착해서가 아니라 율법의 완성, 십자가의 효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가는 길이, 방향이 있음을 깨닫게 해주옵소서. 이 땅에 눌러 살고 남에게 칭송받는 것이 삶의 목표가 아닌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떠나야 될 세상 주께서 먼저 떠나서 우리를 그쪽으로 불러낸다는 이 기쁨이 계속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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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름(빌2;9-11) 200517 이근호  (0) 2020.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