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율법의 관

아빠와 함께 2020. 7. 10. 11:06

율법의 관

2020년 7월 5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3:4-6


(3: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3: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복음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사도는 자신의 과거 이야기합니다. 이 원리는, 사도와 주님 사이에서 이미 형성된 겁니다. 즉 사도의 현재는 예수님의 과거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과거사를 무한히 반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이 땅에 세계를 다녀가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특수한 나라를 지목해서 그 나라에 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로서 ‘하나님이 오셨다가 포기하시고 가신 나라’가 됩니다. 그래서 남겨진 것이 바로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한 인간의 본색’입니다. 왜 인간들은 법을 요청합니까? 그것은 자신의 자랑거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대인관계에 있어 내놓을 자랑거리가 없으면 풀이 죽습니다.

반대로 자랑거리가 있으면 소진할 때까지 사방팔방에 자랑합니다. 율법은 바로 인간들이 선호하고자 하는 바라 마치 경품처럼 소개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28:1-6에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의 욕망을 자극할만한 것들이 가득합니다. 이 사실을 안 이상, 인간들은 이 경품을 마다하지 못합니다. 율법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런 오해를 하는 이유는, 율법보다 자신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제거하고 난 뒤, ‘자기를 위한 율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로마서 7장에서는 그 반대입니다.

율법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인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도,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의 자식입니다. 인간의 마음이나 욕망은 자체적으로 개시점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의해서 새로 생겨나는 겁니다. 율법에 반응을 나타내면서 말입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그러나 이미 율법에 들어섰다면 그 안에는 촘촘한 미로입니다. 약간의 공간이 생긴다 싶으면 벌써 새로운 선악을 요구하는 법이 기존의 법에서 분화되어 잡고 있습니다. 피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눈 앞에서 율법이 제공하는 복과 천국이라는 것을 마다할 수 없어 중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중독은 이미 인간이 악마의 독약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즉 “말씀보다 네가 더 중요하다”고 세뇌받고 있었던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기꺼이 자기 과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미 그는 주님을 만나서 ‘나 잃어버림’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잃어버린 나’나 율법에서 태어난 ‘나’이고, 새로 생겨나 ‘나’ 복음으로 생긴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두 과정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죽는 이유와 인간이 생명을 얻게 되는 이유를 말입니다. 율법으로 사는 것이 지옥 갈 이유요, 복음으로 인해 거기서 빠져 나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도나 성도는 이 ‘잃어버린 육’으로서 예수님의 과거사를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삶의 궁지에 빠지는 것은 ‘의리’ 때문입니다. 자신이 우선인 마당에 자기로 인한 자랑거리를 계속 모으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나 교인으로서 의리, 곧 책임감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왔다가 도로 빠져 나갔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처사입니다.

사도에게나 성도에게도 구원받지 않았던 시절이 주님에게 중요합니다. 우주의 무게가 담겨 있는 율법을 기어이 지켜서 자신을 복받게 하겠다는 집념같은 것이 결국에는 사도 바울처럼 교회를 핍박하게 만든 결과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즉 ‘흠없는 자신’을 더욱 ‘더 흠이 없게’ 하고 싶었던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사야 35장에 나오는 히스기야왕이 15년 수명이 연장된 대목을 눈 여겨봅시다. 39세가 되었던 히스기야가 죽게 되자 더 살려달라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15년을 연장해주는데 이 수명 연장의 의미를 위해 해시계 그림자가 10  〫    물러갑니다. 곧 시간이 뒤로 물러나는 겁니다.

이것은 히스기에 덤으로 붙어 있는 그 15년이 곧 그동안 자신이 몰랐던 과거사의 성질을 대변해줍니다. 그는 자기자랑으로 일관했던 겁니다. 그 결과로 15년 동안 있었던 일로 인해 나라를 바벨론에 포로 잡히게 했습니다. 성도의 일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복음 안에서 구원받은 자들은 이 현생의 생애가 율법으로 살았던 저주의 이유를 몸소 경험케 합니다.

말씀보다 자기 우선으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인해 율법의 수풀 속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던 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어버려야 합니다. 율법으로 복을 따내려는 그 ‘나’를 잃어버려야 합니다. 이는 곧 ‘우리의 육적 자랑거리’가 잃어버려야 합니다. 물이 포도주 될 때, 물 속에서 그 누구도 포도주를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없는데서 무엇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믿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을 옛 인간은 내놓을 능력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외칩니다.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따가운 저주를 한 몸을 다 받고 서 있는 자가 선지자입니다.

선지자 보기 위해 사막으로 나가는 겁니다. 아무 것도 없어도 말씀으로만 사는 그 자들이 선지자입니다. 이들은 이미 율법의 밀림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알고 있는 자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율법에 의해 죽은 자임을 압니다. 마치 서부극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무법자가 자신이 이미 죽었음을 알리는 관을 질질 끌고 자신의 원수들 앞에 등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관 속에서 기관총이 들어 있습니다. 이처럼 나를 죽이신 죽음의 십자가가 우리 안에서 되살아 나는 것이 곧 성령의 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이미 이 소돔과 고모라 같은 세상에서 잃어버렸음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강-빌 3장 4-6절(율법의 관)20070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3장 4-6절입니다. 신약성경 320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3:4-6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율법으로 산 그 결과가 교회를 핍박한다고 사도바울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주님을 핍박하는 것이지요. 사도바울이 열심히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족치니까 그 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사도행전 9장 4절에서 “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이러한 자기과거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의 현재의 이야기이고 또 우리의 과거사라고 일체감을 가질 수 있어야 됩니다. 사도바울이 율법으로 살다가 복음으로 사는 이 전환은 바로 예수님의 과거가 사도바울의 현재를 통해서 재현하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바울의 관계가 사도바울 개인의 관계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 성령 받은 우리에게 그것이 반복이 되거든요. 무한루프입니다. 계속해서 돌고, 또 돌고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의 이 논리에 의하면 교회라는 것은 이 땅에서 없는데 자기의 육체의 행함, 율법을 지켰다는 육체의 행함에 있는 자로부터 핍박을 받는 경우에만 그 현장에 교회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난다. 같은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교회 핍박하는 사람 한 번 찾아보자.’ 이렇게 나올 수가 있는데 멀리에서까지 찾을 필요는 없고 우리 자신이 우리자신을 구박한다는 생각을 하셔야 돼요. 시내 나갔다가 돌아오면서 401번 탔는데 갑자기 앞에 있는 아주머니가 “으이그, 등신아, 등신아! 등신아!” 이러고 있는 거예요. 자책하면서.

왜냐하면 이 동네에 다 왔거든요. 지묘동에 다 왔는데 “아저씨, 이거 동대구역에 가요?” 이렇게 된 거예요. 반대로 탔어요, 반대로. 반대로 타서는 “이 등신아, 등신아!” 하고 자책하고 있어요. 점점 더 멀어지는 거예요. 교회 나오고, 교회 법 지키고, 목사 말대로 다 시키는 대로 했는데 이게 노선을 반대로 탔어요. 구원하고 점점 더 멀어지는 거예요.

성경말씀을 율법으로 본 겁니다. 내가 지켜야 될 용도로 본 거예요. 근원적으로 뭐가 잘못되었느냐 하면, 내가 있고 내가 말씀을 어떻게 한다든지, 내가 먼저 여기에 있고 성경이 여기에 있어서 지킨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 자체가 잘못되었는데 성경에 보게 되면 말씀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나를 낳았어요. 나보다 말씀이 먼저 있어요.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그 말을 잡아먹었으니까 이제는 내가 먼저 있고 선악과나 말씀은 뒷전이 되어버린 겁니다. 내가 먼저 있고, 내가 우선이고 말씀은 뒷전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5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런 말을 해요.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라고 되어 있어요.

전에 율법에 속한 사울 같으면, 사도바울의 전의 이름이 사울이었습니다, 사울 같으면, 낳은지 8일 만에 할례를 지키라는 율법대로 부모가 나를 낳은 뒤에 행했다, 부모가 먼저 있고 나중에 율법을 실천에 옮겨서 난 할례 받았다, 이렇게 해석이 될 텐데 이제 복음을 알고 난 뒤에 사도바울은 그렇게 해석하지 않고, “나는 율법이 나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요. “율법이 나를 만들었습니다.”

복음적인 내가 있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먼저 선행해서 해야 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율법 속에 율법이 낳은 자식으로 살아가야 된다는 의무입니다. 그래서 율법에서 태어나지 않은 자는 복음을 몰라요. 율법을 경유를 해야 됩니다. 율법 거쳐서 복음입니다. 율법은 내가 죽어야 될 과정을 보여주고 복음은 율법으로 죽은 나를 가지고 생명을 얻는 과정을 보여주는 거예요.

이 두 가지의 과정을 사도바울은 다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율법으로 태어난 사람 속에 속성이 있는데 그 속성은 반드시 교회를 핍박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구원받지 않은 내가 구원받은 나를 핍박하는 거예요. 멀리서 찾을 필요 없어요. 우리교회 누가 핍박하느냐, 그거 찾을 필요 없어요. 매일같이 내가 나를 핍박해요.

율법으로 산 그게 등신인데 지금 내가 복음으로 산다는 것은 너무나 내가 나에게 낯설어요. 내가 나에게 낯설다는 말이지요. 사도행전 17장 24, 2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당 같은 것은 의미 없고, 인간이 갖다 바치는 헌금도 의미 없다는 거예요. 왜? 친히 주시는 분이니까, 사람이 만든 부동산에는 안계시니까.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보통 24시간가운데 늘 있는 이야기냐, 아니면 색다르냐 하는 겁니다. 나는 내 힘으로 이만큼 살아왔다는 이것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도 몸에 배어있고 평소에 그런 것에 준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런데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햇빛과 공기와 주시는 목숨대로 산다는 것이 늘 상 나오는 생각일까요? 아니면 내가 생각지도 못하는데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입니까? 어느 쪽이 익숙해진 생각일까요? ‘나는 내 힘으로 산다. 내가 이만큼 고생해서 이만큼 살아왔다.’ 이게 다수겠어요, 아니면 내 힘으로 산 것은 없어서 주께서 이만큼 살려주셔서 살았다는 생각이 내 인생을 크게 차지하느냐,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아놓고도 낯설어요. 구원받아놓고도 낯설어. 구원 안 받은 내가 나를 핍박해. ‘입 다물어. 가만있어, 가만있어. 그래서는 사회생활 못해.’ 구원받은 내가 핍박을 당하고 있어요. 참 정상이 아니지요. 이게 비정상이지요. 사도바울이, 말씀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내가 여기 있었다, 하는 그 증거를 로마서 7장에서 율법을 통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말씀이 먼저 나에게 자극하게 되면, 율법이 자극하게 되면 나는 거기서 율법이 제시하는, 유인되는 그 경품에 매료되어서 끝까지 율법대로 살아서 경품으로 내건 그 복을 따내고야 말리라, 하는 쪽으로 우리는 매진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 그것을 알리고 자백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왜 우리가 율법으로 사는 것이 편하냐 하면, 율법으로 살게 되면 오늘 본문에도 나와 있지만 그렇게 자랑할 것이 많아요. 여러분 자녀나, 자녀 할 것도 없이 우리 자신도 그렇고 모든 것이, 여러분이 누굴 만났을 때 뭐가 제일 편하던가요? 친구를 만날 때 사흘 밤을 떠들어도 피곤하지 않은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 자랑하는 거지요.

그런데 전화 한 시간 반, 두 시간 동안을 하다가도 언제 전화를 끊고, 언제 카페에서 친구와 헤어지느냐 하면, 자랑거리가 소진되었을 때, 다 떨어졌을 때 “집에 가자. 나 밥해야 된다.” 그렇게 되지요. 그래서 우리 교인들은 만나면 말이 없어요. 그동안 자랑거리를 다 털어 놔서서 더 내놓을 것이 없어요.

어떤 분들은 제 설교나 강의를 하면 적는 사람이 있어요. 또 죽어라 안 적는 사람도 있습니다. 특히 우리 교인들 거의 안 적어요. 왜 그러냐 하면, 복음을 알았기 때문에 적어 놓아도 못 지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너무 알아서 변명을 해주는지 모르겠습니다. 해봐야, 적어 놔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 어차피 못 지킬 것인데요.

왜냐하면 이 말씀은 내 자랑거리가 아니에요. 자랑거리는 내가 애써서 얻은 것이 자랑거리가 돼요. 행함이 있을 때 자랑거리가 돼요. 그 행함을 누가 부추겨주느냐? 말씀이, 율법이 부추겨 주는 거예요. 신명기 28장, 우리 교회로 오기 전에 심방 많이 받아봤잖아요. 목사들이 심방가면 많이 펴는 구절이에요. 심방할 때면 목사들이 이 구절 가지고 온 구역 다 돌아다녀도 에너지가 소진하지 않아요.

신명기 28장, “김 집사님! 잠시 심방예배 보겠습니다. 애들도 오라 하세요. 마리아처럼 식사나 차리고 있지 말고 마르다처럼 앉아서 목사 설교 듣게 다 참석하세요. 이 말씀에 순종하면 네가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아무리 교회 안가고 또 성경 안 봐도 이 말씀은 새록새록 기억이 나요.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6절)

성읍도 복을 받고, 동성로 가도 복을 받고 집에 있어도 복을 받는다, 그 말이지요. 특히 유난히 가슴에 확 다가오는 것이 뭐냐?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4절) 네 몸의 소생이 복을 받고. 자식이 잘돼. 손자도 잘되고요. 네 토지의 소산과 부동산 값이 팍팍 올라요. 집 사놓은 것이 오른다고요.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이 복을 받고. 네 광주리, 떡 반죽이 복을 받고.

이것까지는 욕심을 안냈잖아요. 그런데 주께서는 이것까지도 복을 준대요. 이런 이야기할 때 교회 나오기 잘했다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네가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이걸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게 경품이에요. 말씀대로 산다는 조건은 잊어버렸어요. 그것은 잊어버리고 이 경품이 탐이 나는 겁니다. 유인거리가 충분해요. 말씀대로 살 유인거리.

그런데 어떻게 이 말씀 지키는 것을 포기하겠습니까? 지금 주께서 주신 약속이 있는데요. 어린아이 같은 믿음으로 약속을 받아들이면 복을 받는다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교인들이 오전설교에서 밍기적밍기적, ‘이게 과연 그럴까? 현실에서는 아닐 것 같은데.’ 이렇게 나오면 오후예배에서 친구목사 불러다 헌신예배로 드려서 간증집회로 때워버립니다.

어떤 장로 돈 아끼고 헌금 안하다가 사업 망하고 난 뒤에 기도원에서 회개하고 십일조 했더니 열배나 받았다. 그런 레퍼토리 있잖아요. 주께서는 복을 주려고 하는데 여러분이 믿음이 없어서 순종을 안 해서 복을 못 받으니 여러분 책임이다. 손가락질 막 해가면서 여러분 책임이라고, 기도도 안하고, 말씀도 안보고, 교회 오는 것도 게을리 하고, 헌금도 안하니 복을 받을 리가 있나, 이런 식으로 협박 공갈을 해대는 겁니다.

이 말은 이거예요. 인간은 악마로부터 타고 났는데 뭘 타고났나? 자랑거리를 누적시키고 비축하는 그 재미로 인생을 산다는 속성을 가지고 인간은 태어난 거예요. 자랑거리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이제부터는 내가 먼저 있고 말씀이 있으니까 나 잘되기 위해서 말씀을 주무르겠다, 요리하겠다는 타락한 아담의 속성을 물려받은 거예요.

혹시 여러분이 밤에 주무실 때 푹신한 베개라고 여기고 잘 잤다, 하고 아침에 눈 떠보세요. 그게 푹신한 베개가 아니고 뱀의 몸통입니다. 독사의 이빨이 급소를 물고 있어요. 꽉 물면서 독사가 내게 이야기해준 것은 뭐냐? 네가 하기에 따라서 너에게 선할 수 있다는 의식을 프로포필 마약처럼 계속 투입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표현이 과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에요. 이 몸은 남한테 자랑 못해서 환장한 거예요. 자랑거리가 없어서 환장하고, 자랑거리만 있으면 내가 너한테만 이야기한다, 이런 식으로 전화 붙들고 두 시간 동안 이야기합니다. 전화 받는 사람도 만만치 않아요. 완전히 자랑거리의 배틀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자랑거리가 소진이 되었을 경우에는, 살아온 경력을 자랑하고 싶어 환장하는 이 독사의 독이 우리 몸에 완전히 퍼졌으니까, 말씀위주가 아니고, 말씀 우선이 아니고 나 우선이니까, 나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 있고 나 잘되기 위해서 말씀이 있다는 거니까, 그러니까 자랑거리가 없으면 답답한 거예요.

답답하니까 여기서 뭐가 되느냐 하면, 인간들은 말씀에 입각해서 뭔가 선한 쪽으로 자기를 변경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교리를 가공을 해요. 교회 오래 다니다보니 더 이상 자랑거리 없으면 말씀하고 자기하고 자꾸 괴리가 일어나니까, 벌어지니까 남에게 그걸 들킬까 싶어서 지식으로 교리를 가공합니다. 이 가공기술이 점점 더 견고해져요.

‘이런 이야기하면 이렇게 받아쳐야지, 이렇게 들어오면 이렇게 받아쳐야지.’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은 뭐냐 하면, 교리신학, 이런 지식 나부랭이가 잔뜩 들어 있어요. 그런 것으로 자기를 커버하지요. 그런 것을 가지고 있을 때 드디어 그 사람은 주님을 핍박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대로.

오늘본문에서 율법에 완전한자라고 했습니다. 율법에 완전하게 되면, 경품이 있으니까 내가 완전하게 되면 내가 원하는 욕망, 율법이, 말씀이, 로마서 7장에 보면 우리를 자극하는 거예요. 말씀이 먼저 있으니까 성경에서는 나를 자극해서 나로 하여금 점점 더 하나님이 내세운 복의 경품을 따내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따지고 보면 점점 더 멀어져 있어요.

왜? 율법의 세계는 밀림 같아서 공간이 있는데 저는 이걸 스펀지라고 보거든요, 스펀지 안같이 율법 안이 숭숭 구멍이 나 있어요. 그런데 율법안의 그 구멍이 새로운 율법에 의해서 계속해서 분화되어서 생산되는 새로운 선악의 요소로서 어느새 꽉 차 있어요. 세세한, 더 세밀해지는 선악의 논리가 나를 압박을 하는 거예요.

숨통을 틀어막고 제대로 숨도 못 쉬게 해요. 마귀가 독이빨로 계속 독을 퍼뜨리고 압박해요. 오늘 기도 했다, 하면 마귀가 “기도를 꿇어앉아서 했어, 그냥 앉아서 했어? 꿇어 앉아서 해야지. 그래야 더 아프지.” “이번에는 꿇어앉아서 했는데요.” “기도할 때 네가 몇 시간 했어? 30분 동안 했어? 적어도 두 시간 정도는 해야지.” “두 시간 했습니다.” “밥 굶고 해야지. 그냥 해서 되겠어? 그래가지고 네가 원하는 복을 주겠어?”

이미 우리에게 말씀이 오게 되면 우리에게 욕망이 생기고 법적인 욕망에 후달리거든요. 왜? 율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율법이 다루는 데로 다뤄질 수밖에 없어요. 어떤 욕망이 있느냐 하면, 더 완벽하게 흠이 없는 가운데 더 없게, 흠이 없는 가운데, 없는 가운데 더 흠이 없게,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 철저함 속의 철저함속의 철저함,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순수함 속의 순수함 속의 순수함 속의 순수함. 순결함 속의 순결함.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그 안을 헤매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거기에 길들여져 있어요. 다른 삶의 방식을 모릅니다. 그 결과가 뭐냐? 그 결과가 의리입니다. 의리! 의리! 자식을 키우는 엄마는 자식에 대한 의리, 남편이 있는 아내는 남편에 대한 의리, 남편은 아내에 대한 의리, 의리를 지키면 복주겠지,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의리,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나에 대한 나의 의리, 책임감, 그 의리로 똘똘 뭉쳐져 있습니다.

이게 율법에서 못 빠져나온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인간이 율법에서 못 빠져나오거든요. 그러면 빠져나오게 하는 방법은 뭐냐? 하나님이 하셨는데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찾아왔어요. 찾아와놓고 이스라엘이 빠져나오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찾아올 때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줬거든요. 율법을 줘놓고 주신 율법 속에서 빠져나와버렸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 홀로 빠져나왔다는 것은, 나머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냥 율법 속에 남겨둔 거예요. 신명기 28장에 복 받는다는 것은 몇 구절이 안돼요. 나머지 세배가 넘는 구절들이 다 저주를 받는다는 구절들이에요. 못 지키면 저주를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 던져놓고, 폭탄이에요 폭탄, 폭탄 던져놓고 주님 혼자 빠져나왔어요.

나머지기는 뭐냐 하면, 어떤 인간도 율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다시 말해서 율법에서 못 벗어난다면 천국이라는 것은 없는 거예요. 이스라엘에게 천국은 없는 거예요. 이스라엘에게 천국이 없다면 인간에게도 천국은 없는 겁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포도주를 만들 때 포도주가 없는 곳에서 포도주가 나오게 한 것이 아니에요.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요. 왜 중요한 문제이냐 하면, 인간에게 있어서 없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안 됩니다. 없는 것은 아예 없기 때문에 없는 것을 어떻게 믿어요? 뭔가 있는 것을 믿어요.

인간에게 현재 있는 것이 뭐냐? 본인이 있어요. 있는 것 가운데 가장 확실하게 있는 것은 본인이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없는데서 포도주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있는데서 포도주를 만들어요. 있는 게 뭐냐? 물이에요. 물을 여섯 항아리에 담게 했습니다. 하인들보고 가져가라 했어요. 하인들은 알아요. 이게 물이었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이 물속에 뭐가 없느냐 하면, 물은 물이기 때문에 물속에는 포도주가 없습니다. 이 말은 내 속에 구원받을 내가 없어요. 나는 물이에요. 나는 육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어도 육으로서 율법을 지키는 그것만 있을 뿐 천국 가는 나는 내 속에 없어요. 내가 믿는다 하는 것은 내가 말씀 지킨 나를 믿지 어떻게 없는 나를 믿을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속에 포도주가 없는데 그 없는 포도주를 만들어낸 거예요. 그러니까 없는 것을 만들었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인간의 믿음으로서는 따라갈 수가 없지요. 예수님을 못 따라가지요. 결국 예수님은 혼자서 빠져나가야지요. 모든 인간들을 놔두고 제자들을 놔두고 혼자서 빠져나간 거예요.

베드로보고 “따라오지 마. 네가 갈 곳이 아니야, 그곳은. 네가 못 따라와. 어딜 따라와, 어디를! 네가 네 주제를 알아야지.” 바로 이랬던 사람이 누구냐 사울이었던 사람입니다. 율법에 흠이 없어요.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가 자기가 율법에 흠이 없고 완전에 완전, 흠이 없는데서 멈추지 않고 더욱더 흠이 없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예수 믿는 사람에 대해서 공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 공격도 자기 자랑의 일부기 때문에. 아까 말씀드렸지요. 인간은 자랑거리 모으는데 집중한다고요. 그걸로 세월 다 보낸다고요. 그 자랑거리에 자랑을 더 추가시키기 위해서 예수 믿는 사람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칠 때 나는 율법에, 완전한 율법 안에 있는 사람이고 저 사람은 율법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율법 안에 있는 개인으로 봤고 저 사람은 율법이 없는 개인으로 본거예요.

그러니까 사도바울 되기 전의 사울은 개인구원을 추구한 거예요. 나만 구원받으면 되니까. 그런데 막상 저 사람들을 체포하니까 누가 나서느냐 하면, 예수님이 나서서 하는 말이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되어 있어요. 사울은 나처럼 생겨먹은 하나의 물체, 고체, 그런 인간을 건드렸는데 없는데서 나사렛 예수라는 분이 등장하니까, 그래서 “누구세요?” 라고 물으니까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그렇게 된 겁니다.

없는데서 나온 거예요. 믿음이 성립이 될 리가 없지요. 인간은 있는 것만 믿는데 없는데서 나왔으니까 사도바울이 언제 예수를 믿었어요? 안 믿었어요. 그냥 찾아온 거지요. 핍박했다는 것으로. 이게 뭐냐 하면, 핍박했다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말을 건넬 때, 이 말씀이 사울로 하여금 창세전부터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던 그 예언이 너는 나를 핍박했다는 그 말씀 속에 그게 담겨 있었던 거예요.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까? 내가 있기 전에 율법이 먼저 있듯이 이제는 율법 속에서 주께서 빠져나와서 복음 속에 계신 주님이, 복의 완성 속에 계신 주님이 찾아온 거예요. 율법 안에 있는 것처럼, 율법이 먼저 있고 사울이 나중인 것처럼 복음도 마찬가지에요. 복음이 먼저 있고, 창세전에 누구는 구원되고 안 되고, 그게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사울이 구원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주님이 사울을 친히 찾아오신 겁니다. 뭘? 율법으로 지켰던 나를 개무시해 버린 겁니다. 신경 쓰지 말라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그런데 사울은 뭐냐 율법 지키다 보니까 의리에요 의리, 내 책임감, 내가 아내로서, 엄마로서, 아빠로서, 교인으로서 어떤 책임감, 의리, 의리, 만날 의리 찾다 부도나라.

이 의리, 책임감, 여기에 한 번 빠져버리면 율법이 때리는데 ……, 여러분이 인도하고 중국하고 국경분쟁 있었을 때 중국의 격투기하는 병사들 뽑아서 배치했다는데 그들의 그 무기를 본적이 있습니까? 쇠막대에 숭숭 못을 용접해서, 핫도그라면 맛있기나 하지, 그 흉기로 인도병사들을 패서 20명이 죽었다고 하잖아요. 흉기 아닙니까, 흉기. 여러분이 그 흉기로 한 번 맞아볼래요? 정신 잃을 겁니다.

그런데 율법 한 말씀 안에는 뭐냐? 온 우주의 무기가 다 들어 있습니다. 중공군의 흉기 정도가 아닙니다. 날 눕혀놓고 도리깨질 한다고요. 도리깨질로 패면 율법에 있는 사람은 “의무를 다 할게요. 예, 예, 내가 잘못됐습니다. 내 의무를 다할게요.” 이런 식으로 발발 비는 거예요. 빌면 더 때리지요. 더 타작하듯 치는 거예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 내가 사서 짐을 불러 모읍니다. 이 흠 없다는 자의식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아무것도 아닌데 나의 육 보퉁이 이것은 그냥 버려야 되거든요. 그런데 버리려면 새로운 것이 와야 버리는데 새로운 것이 안 오니까 ‘마지막 남은 나인데 이걸 버리면, 이게 죽으면 어떻게 되지?’

그러니까 자신감이 없어서 의리를 못 버리고, 책임감을 못 버리는 이유가 뭐냐? 이것 버리면 다른 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걸 아주 알기 쉽게 말씀드려서 믿음이 없는 거예요. 아까 쉬는 시간에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어떤 분이 질문했어요. “목사님, 겨자 씨 만한 믿음이 뭡니까? 또 겨자씨가 나중에 자라서 큰 나무가 된다는 뜻이 뭡니까?” 겨자씨라는 뜻은, 없다는 것, 천국은 없다는 거예요. ‘없다, 있다’를 그 경계선에서 가장 작게 표현한 것이 겨자씨입니다. 겨자씨가 커서 나무가 된다는 것은, “이 제자들아, 너희들은 내가 백날 이야기해도 못 알아들어.”

물속에 무슨 포도주가 들어 있습니까? 없는데,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알아 들어요? 그래서 겨자씨 비유할 때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성령으로 봉사한다는 말이 3절에 나오지만, 성령을 받게 되면 뭘 아느냐 하면, 나의 이 몸체는 주님의 과거사가 내 몸을 통해서 재현하는 거예요.

내가 버려져도 되는데 안 버리고 주께서는 재활용해 주시는 겁니다. “이미 너는 이미 구원받았고, 이미 천국에 있고, 너는 죽은 자인데 네 몸을, 네 인생을 내가 좀 활용해야 되겠다. 사도바울아.” 어떻게 활용하느냐? 인간의 책임감과 의리가 얼마나 독사가 이빨로 씹어 넣은 독약이라는 것을.

그 책임과 의무를 지는 이유는 또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말씀이 우선이 아니고 내가 먼저 있고 하나님 말씀은 나를 구원시켜줘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우선이니까. 악마가 독사로 그런 독을 집어넣었거든요. 천당 가려고 교회 온 거예요. 이게 독이에요 독, 무서운 독입니다.

구약의 히스기야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 히스기야라는 사람이 유대 왕인데 25세에 왕위에 올라서 14년 동안 정치를 했어요. 39세가 되었습니다. 김 정은보다 나이 한 살이 많아요. 병이 걸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40세도 못되어서 죽게 된 거예요. 자기는 정치를 잘할 거라고 자신만만해서 장기집권하려고 하나님께 싹싹 빕니다. 하나님 부르면서 온갖 것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잘못했다고.

이게 뭐냐? 율법대로에요. 자기에게 나라를 지키는 어떤 의리, 책임감, 이게 있어야 내가 있다는 거예요. 자아 속에는 의리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15년을 목숨연장을 시켜줍니다. 54세가 되면 끝나는 거예요. 15년을 연장을 시키면서 그 15년의 의미가 뭐냐를 알려주는데 그게 뭐냐? 히스기야는 15년을 추가해서 39세에 더해서 15년이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사람들 다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나 그게 아니고 해시계가 거꾸로 가는 거예요. 거꾸로 간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추가시킨 15년 안에 그것을 소급해서 지난 인생과 같은 성질인 것을 되돌아보게 하는 거예요. 되돌아가는 거예요. 너의 과거모습, 네가 몰랐던 과거모습을 해시계의 그림자가 거꾸로 가듯이 다시 재현시키는 겁니다. 네 과거를 재현시키되 하나님의 시간의 관점에서 네 과거를 보게 하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나라 팔아먹은 자에요. 15년 동안 한 짓이 자랑한 겁니다. 내가 믿음 좋아서 앗수르 군대를 물리쳤다, 하고 다음 차기 제국인 바벨론이 어떤 제국인지도 모르고 창고를 열어서 “우리 이 정도의 무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군사가 이정도고 우리나라가 이정도 발달했습니다.” 하고 자랑질 했더니만 주님께서 15년 동안 히스기야가 한 그 짓으로 인하여 나라를 홀라당 바벨론 제국에 팔아먹게 했습니다.

이게 아직도 율법이,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 유효한 이유입니다. 우리가 왜 이 땅에 더 살아야 됩니까? 구원받았는데 그만 천국가지 왜 이 땅에 더 살아야 됩니까? 중공군 흉기의 도리깨질이 아직 남아 있어요. 자랑거리를 못 다 채워서 환장한 우리, 그래서 이야기합니다. 그 의리와 의무,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그 저주받은 존재, 자기가 뭔가 긴가 싶어서 그렇게 다 사는 거예요.

맨 날 하는 소리가 “정신 차려야 돼. 정신 차려야 돼!” 그런다고요. 여러분, 정신 차리지 마세요. 그냥 정신 줄 놓고 사세요. 정신 차리니까 문제가 된 거예요. 정신 안차려도 돼요. 주께서 다 해주셨습니다. 이미 구원시켜줬어요 예수님의 피로. 이미 포도주라니까요. 자꾸 물의 기억을 되새기지 마세요. 정신 차리지 마세요, 그냥.

사실 우리가 젊을 때 정신 차리지 늙게 되면 정신 차려도 정신 못 차려요. “여보, 버섯 어디 있노?” “버섯 안 가져왔다.” 정신없어요. 우리는 날이 갈수록 정신없다니까요. 젊을 때야 아옹다옹 신혼 초에 좋지요. 오빵~, 해가면서 전화 걸고 하지요. 나이 들면요. 진짜 헤어지고 싶어도 못 헤어지는 이유가 딴 거 아니에요. 비용문제 때문에 못 헤어지는 거예요. 같이 사는 것이 비용이 싸게 먹히니까.

내 책임감은 이만한데 내 능력은 갈수록 멀어져요. 부모로서 딸이나 아들한테 잘해주고 싶지요. 자식은 해줘도 소용없어요. 그것도 몰라요. 하지만 내리사랑이라고 해주고 싶은데 능력이 안 되네요, 능력이. 어떤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 “전화기 충전은 잘하면서 내 삶의 충전은 못하고 사네.” 무슨 노래인지 알려줘야지요. 정동원이 불렀던 <여백>이라는 노래입니다. 열두 살 먹은 애가 부른 노래에요.

자, 그렇다면 이 율법에서 빠져나온 사람도 있지 않겠습니까? 있어요. 그 사람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선지자라고 합니다, 선지자. 선지자가 가니까 그 율법의 밀림이 보이는 거예요. ‘아이고, 인간들아, 내가 저 속에 있었구나.’ 율법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서 노선이 두 노선입니다. 한 율법의 노선은 폐기처분하기 위해서 율법을 줬고요. 죄를 더하기 위해서 율법을 줬고요. 이게 폐기처분하기 위한 용도에요.

선지자는 뭐냐? 그 율법 지킨다고 하는 자로부터 핍박을 받는 자가 선지자에요. 이것은 다른 노선이거든요. 미래에서 온 사람이기 때문에. 선지자는 미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 일찌감치 그 시대에 박혔기 때문에, 시대적 차이성 때문에, 격차 때문에 오해를 받아서 핍박을 받게 되는 거예요.

마지막 때 율법이 완성된 사랑의 차원에서 이미 사랑받고 온 그 영이 예수님 오시기전에 먼저 저쪽 구약의 끝에 오니까 그 사람들, 율법 지켜서 내 욕망, 하나님의 경품, 축복받자, 하는 사람들한테는 그야말로 미친 사람 취급을 받고 핍박을 받은 겁니다. 예수님도 그 중복된 겹쳐진 시대상의 차이성 때문에 주님께서 살해당하신 거지요.

마태복음 11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7절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광야부터 시작하자. 광야는 사막이니까, “얘들아, 사막부터 시작하자.” 왜 사막부터 시작해야 되는지, 창세기 19장에 유명한 소돔과 고모라가 있지요.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의 가족이 천사 둘을 만나서 탈출을 하는데 자기가 나온 곳을 돌아봐서는 안돼요. 그런데 어디서 돌아봐야 되느냐 하면, 소알이라는 곳에서 돌아봐야 돼요. 사해끝부분 보다 약간 북쪽에 있는 것이 소돔과 고모라인데 지금 물속에 잠겼고요. 그 사해의 제일 끝 남단에 소알이라는 곳이 있어요.

28절에 보니까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들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치밀음을 보았더라.” 그 화려했던 최고의 경작지가 있던 그리고 제일 사람들이 선호하는 부동산이 있던 그곳이 소돔과 고모라였어요. 아브라함이 조카와 함께 있을 때 조카보고 “너 어느 땅으로 갈래?” 하니까 “소돔 땅에 가렵니다.” 대번 답할 만큼 거기가 생산물이 많이 나는 곳이에요. 사람들이 제일 탐을 내는 지역이라는 말이지요.

가장 탐을 내서 네 왕국의 연합군과 다섯 왕국의 연합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해서 그걸 차지하려고 했던 지역인데 그 지역이 창세기 19장 28절에 보면 “옹기점 연기같이 치밀음을 보았더라.” 몰살당했지요. 유황불에. 자 여기서 제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한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그 성에서 탈출해서 오면서 누구를 잃어버렸는가를 봐야 돼요. 롯의 아내를 잃어버렸지요. 롯의 아내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다시 돌아와서, 내가 율법에 흠이 없다, 또는 나는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이다, 나는 배울 만큼 배웠다, 육적인 것을 자랑하느냐, 한번 자랑해볼까, 누가 더 자랑거리가 많은지, 라고 나서는 것은 바로 이러한 나를 사도바울은 넉넉하게, 여유롭게 그런 나를 잃어버린 나로 볼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겁니다. 그런 여유를 가져야 돼요.

율법대로 지켜서 복을 따내고, 천당 가려고 하는, 어떤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시도, 심지어 더 나아가서 “내가 예수를 믿습니다.” 하는 그 믿음조차도 이게 다 어떤 의무감, 책임감, 하나님이 심판주니 알아서 기어야 된다는 그것, 그런 소리 하지만 결국 내가 우선이고 말씀은 나중이라는 것, 그런 사고방식을 이제 우리는 뭘 로 봐야 되느냐? 멸망 속에 잠긴 나, 잃어버린 나로 봐야 돼요. 소알, 거기에 아무것도 없어요. 괜찮아요, 그래도.

그게 마태복음 11장에서 뭐냐? 광야입니다. 사막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사막에 나갔더냐?” “선지자입니다.” “옳다, 선지자다.” 선지자의 눈을 가져야 세상은 율법에 법의 밀림이라는 것이 발견돼요. 그래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밀림을 쳐다볼 수가 있는 겁니다. 사막은 아무것도 없어요. 허름하기 짝이 없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요, 사막은. 난감해요. 내일을 보장 못합니다. 한 달 뒤를 보장 못해요.

주께서는 우리를 모든 무거운 짐을 없애면서 우리 처지를 사막에다 둡니다. “무엇을 보느냐?” “선지자입니다.” “옳다. 바로 내가 사막에서 기다릴게. 세례요한이 사막에서 너희를 기다릴 것이다.” 이게 집단구원이에요. 개인이 아닙니다. 한 사람 앞에 모든 것이 헐벗어도 괜찮다는 그러한 기쁨, 이게 빌립보서의 기쁨이에요.

그냥 살아도 우리는 사막에서 저쪽을 보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부드러운 옷입은 사람이냐?” 그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지금 청와대에 있지 않아요. 지금 검찰청에 있습니다. 하여간 그런 데에 있어요. 그것이 삶의 의미고 목적이었던가? 왜? 자랑거리 만들려고. 내가 나에게 자랑스러워하려고. 중공군 한번 등장해야 돼요. 흉기 들고 나와야 돼요. 개 패듯이 패야 돼요. 그 의무감과 책임감. 나를 재촉하는 그것이 얼마나 우주의 무게인 것을.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살았는가? 광야에서, 사막에서 예수님은 어떤 모습인가? 끝으로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영화 <장고>의 그 장고에요. 젊은 사람들은 장고가 뭔지 몰라요. 장고~, 그 더운데 한 여름에 망토 걸치고, 남루한 망토 걸치고, 모자도 다 떨어진 모자 눈도 안보이게 눌러 쓰고, 뒤에 관을 질질 끌고 다니는 사람이에요. 장고입니다.

밤빠빠바밤~, 음악 좍 깔리지요. 그 관이 이미 사람들 앞에는 장고는 죽었다가 그 안에 담겨 있어요. 장고는 무법자인데 그 무법자 세계에서 장고라는 총잡이는 이미 죽은 거예요. 그 때 너무 심하게 맞아서 죽은 거예요. 자신의 죽음을 관에 담고 오는 겁니다. 사람들에게는 장고는 이미 죽은 자지요.

그런데 원수를 만났을 때 그 죽음 자체가 세상에 관을 열고 살아 있습니다. 거기서 기관총 나옵니다. 보복이고 복수지요. 주님께서 율법에 의한 복수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냥 세상 살지 말고 장고처럼, 오늘 제목은 장고입니다, 장고처럼 네가 죽은 그 관을 네 속에 담고 질질 끌고 다니라는 말이지요.

“나 너처럼 의무감, 책임감, 출세, 자랑거리, 자식자랑, 손자자랑, 그거 했던 나다. 율법에 흠이 없어. 기도도 한 기도 해. 헌금도 얼추 했어. 십일조 한 것 복리로 계산하면 엄청 나. 다 했어 다 해봤어 그거. 그거 다 이 관속에 있어. 그것으로 나는 예수님을 핍박했어.”

주님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 나를 핍박했다. 나랑 죽자.” 율법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왜 죽어야 되는가, 독사가 물어서 우리는 어떤 인간으로 되었는가를 이야기해 준다면 복음은, 이미 죽은자에서 생명을 얻게 된 거예요. 생명을! 이미 자기가 죽은 것을 아는 자만이 생명입니다. 광야를, 사막을 헤매는 선지자지요.

예수님께서 다시 묻습니다. “네가 광야에 왜 나갔더냐? 누굴 보러 나갔더냐?” 똑같은 질문을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 교회 누구 보려고 나왔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보시기 바랍니다. 새로워진 나, 어떤 환난도 기뻐하는 나, 이거 미친 거예요. 집안에 돈도 없고, 자기 몸도 아픈데, 이게 미친 거지 말이 안 되거든요.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8일 만에 태어난 사람, 그걸 할례라고 하지 않고 세례라고 이야기합니다. 옛날에는 낳은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지만 우리는 십자가와 함께 세례 받았기 때문에 그 증거가 어디 있느냐? 내 뒤에 뭐 있나? 내가 죽은 관을 끌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 복수하는, 이 세상을 심판할 수 있는 근거로서 그냥 구원받은 자를 주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는 기준으로서 사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쟤처럼 되지 않아서 너는 지옥 간다.” 그런 이야기할 수 있도록 귀신들도 놀랄 정도로 우리는 자신의 무거운 의무감에서 책임감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 잘난 체하는 것으로 계속 꾸역꾸역 적금 붓듯이, 은행통장 돈 모으듯이 가득 모아놨습니다. 주여, 그것이 우리를 힘들게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것이 또한 이미 우리가 죽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인 것을 성령을 통해서 되돌아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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