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예언과 면역체계 20031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3. 31. 07:03


2020-03-17 12:50:18조회 : 164         
예언과 면역체계 누가복음 1:32 200317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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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 (IP:59.♡.122.247)20-03-30 23:59 
강남-누가복음 1장 32절 (예언과 면역체계) 200317a-이근호 목사



강남강의 누가복음 1장 32절부터 보겠습니다. 31절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아멘.


마리아에게 천사가 와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마리아 몸에 임신케 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마리아의 무너짐. 마리아 자기 인생의 무너짐을 의미하는 겁니다. 마리아는 인간이죠. 하나의 인간. 여자. 인간.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면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 역사라는게 있습니다. 자기의 스토리.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은 그 하루하루 자기 역사를 이어져나가는데 열중하고 있다. 그게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이죠.


그 열중하는 자기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되면 이게 되돌아보면서 그게 형성이 되고 정립이 되는데 이것이 무엇으로 작용하느냐 하면 자기의 자존감으로 작용합니다. 자존감으로. 그래서 사람이 죽을 수는 있어도 자기가 스스로 죽겠다고 결심은 할 수 있어도 자진해서 남한테 욕 얻어먹겠다는 그런 결심은 안하게 되지요.


죽을 때에도 포기 못 하는게 뭐냐 하면 자존감이에요. 자존심이에요. 그리고 그것은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인간은 자기 모든 하루하루가 자기 역사 위에 형성되고 구축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종의 그 인생 자체가 고고학적이다 이렇게 보면 돼요.


퇴적물이 쌓이고 또 쌓이고 자꾸 여기에다가 또 집을 짓고 세월 지나면 무너지고 그 위에 후손들이 또 집을 짓고 고고학으로 발굴하게 되면 이 터에 옛날에 층마다 어떤 집이 있었고 어떤 역사가 있었다는게 나오잖아요. 역사 발굴 아닙니까.


인간은 자기가 지금 살아가고 힘들지만 버티는 버팀목이 뭐냐? 나에게도 역사가 있다는 거에요. 힘들게 살아온 역사가 있고 그 역사는 지금의 나의 자존감을 형성하기 때문에 여기서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 나는 좌절 못하는 이유는 과거의 내 역사가 아까워서라도 내가 여기서 무너지면 안되겠다.


그런걸로 자존감을 삼고 이게 남들 앞에 이게 내가 존재하는 의미가 되고 뜻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상대를 만나고 누구를 만나고 심지어 어떤 목사를 만나서 복음을 듣겠다 하는 그 의도도 목사 좋아라 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 좋아라 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의 역사를 괜찮은 역사로 만들어서 천국까지 계속 이끌고 가겠다는 자기 의미, 포기 못 할 자기 의미와 자존감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괜찮은 사람 만나면 자기 인생이 괜찮아진다. 참으로 상식적이고 당연해 보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훌륭하다는 소리를 들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건 훌륭한게 아니고 이기주의죠. 자기중심주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 훌륭하게 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나열하는게 성경책이 아닙니다.


성경책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에 의해서 무너진 사람입니다. 모든 자기 역사가 붕괴된 사람. 자기 과거의 축적되고 누적해온 그 찬란한 역사가 헛된 것, 빈 것 그리고 무의미한 것으로 드러나는 사람들의 나열. 이것이 하나님이 생각하는 신앙인입니다. ‘신앙인’.


자기 역사를 유지하는 자가 아니라 그게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고 본능이라는 것은 이것은 누구나 인정합니다. 우리 인간세계에서 누구나 인정하는데 인간들이 인정하는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인정하는 것을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을 안 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에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역사 이끌어가는 그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내가 나 붙드는 겁니다. 내 자존감 붙들고 살아가는 것, 의미 붙들고 살아가는 것. 인간이 할 수 있는게 그것밖에 없지만 그러나 문제는 할 수 있는게 그것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신앙이 아니고 저주 받을 짓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하늘나라에서 성경에서 천국 가는 사람 신앙인은 뭐냐? 하나님에 의해서 무너진 것. 뭘 무너지느냐? 자기 역사 자체가 다 무너진 거에요. 이게 다 무너진 거에요. 인간은 자기 역사를 이렇게 쭉 이어간다면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이렇게 와서 역사라는 이 철로, KTX 열차를 완전히 폭파시켜버리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종말’. ‘최후의 날’. 종말 혹은 최후의 날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한 것은 마리아 개인적인 입장에서 자기 자신의 최후의 날을 맞이한 거에요. 모든게 마리아 혼자 했던 모든 꼼수들이 다 박살난 겁니다.


마리아에게 개인적으로 일어났던 일이 사도행전에 2장에 보면 오순절 날 집단적으로 일어나죠. 그 집단적으로 일어난 결과로서의 만들어진 그 단체를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자꾸 이 세상에서 인간이 만들어낸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에서의 교회라고 하는 것은 머리되신 주님이 만들어내는 걸 가지고 교회라고 해요.


인간의 교회는 무너질 수 있고 문 닫을 수 있지만 주님의 교회는 어떤 경우라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다만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님의 그리스도의 몸을 교회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만만스럽게 간판 걸어서 대한예수교장로회 간판 걸어서 만들었던 그 교회가 문 닫는 것.


그러니까 그것이 교인수도 없고 헌금이 없어서 이렇게 다시 흩어지는 것 그걸 가지고 사람들은 아쉬워하고 있는데 따지고 보면 그것조차도 교회라는 것 조차도 어디에 포함되느냐 하면은 자기의 자존감과 의미를 챙기기 위한 자기 역사의 일부가 되어버리죠. 그거는 신앙이 아니죠.


흔히 이단들 특히 요새 유행하는 신천지 이단들은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우리 진리를 알고 난 뒤에는 새로운 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기존의 육적인 가족을 버리세요. 되게 믿음처럼 보이지요. 마태복음 10장에 나온 것처럼 천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 되게 신앙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그렇게 그런 논리를 주장해서 다시 뭉치는 데가 있어요. 그게 뭐냐? 바로 신천지라는 교단이잖아요. 신천지.


요즘 와서 뉴스 시간에 신천지 전에는 신천지 교회라고 이야기했는데 교인이라고 뉴스에 나왔는데 어느날부터 교인이라는 소리를 안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교도라고 이야기해요. 신천지 교도. 그러니까 옛날에 마치 동학교도. 동학교인이라고 하지 않지요. 동학교도라고 하지요. 조선후기 정부에게 대들은 그런 폭도 같은 뉘앙스를 합류하고 있지요. 교도들. 신천지 교도들.


진짜 신천지가 진리를 알게 되면 신천지 자기 집단자체도 부정해야 돼요. 신천지 교단이 자기를 구원하는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할 몫이 아니고 그것은 주님이 스스로 하실 몫이 되는 겁니다.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야 되지. 내게 어떤 이익이 된다고 해서 내가 어떤 노림수를 가지고 예수님을 이용할 생각은 하지 말아야 돼요.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을 이용하게 되면 결국 남는 것은 뭐냐 하면 구원받은 나 자신이 되어 버렸어요. 구원받은 나.


예수님으로 가야될 길이 이 길이 두 가지 길이 있다면 진짜 천국에서 온 길은 주님이 오신 길은 하늘로부터 시작해서 하늘로 가는데 인간이 이걸 포기를 못하고 이게 안 무너지니까 예수님 십자가 복음 이용해가지고 자기가 천당가려고 하는 거에요. 이 노선이 그대로 유지되는 겁니다. 이건 자기 역사고 자기 자존감이고 자기 의미가 되는 거에요.


복음을 이야기하고 십자가 이야기해놓고 결국 가만히 보게 되면 예수님 것으로 가는게 아니고 시작을 예수님부터 시작했으면 예수님으로 가야되는데 그렇지 않고 나도 구원받았으니까 구원받은 것을 인정해 달라. 본인이 자존감을 남한테 남이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쪽으로 자꾸 이게 빠져버려요.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나는 구원받았다 해가지고 새로운 교회라는 단체를 또 만들어요. 자기역사의 일부로서. 무너져야 된다니까요. 왜? 종말이니까. 그래서 여기 누가복음에 보게 되면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에 항상 강조되는게 성령께서 오신다 했는데 성령께서는 언제 오시느냐 하면은 마지막 때 오시는 거에요.


구약에서 성신과 신약에 성령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은 구약의 성령은 마지막 때 나타나시는 분이 성령이고 마지막 때가 되기 전에 이 땅을 주도하시고 이 땅에 오셔서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나님의 언약대로 일하시는 분은 성신이고 마지막 때 오시는 분은 성신이 아니고 성령이 되는 겁니다. 성신이라는 분은 없어요. 성령이에요.


성령이라는 분은 실제로 인격적으로 오시는 분이에요. 성신은 언약의 신으로서 활동하는 그 활동하는 그 주체자, 인격적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구체적으로 자기 인격을 드러내지 않고 주도적이지 않고 시키는 대로 하시는 어떤 신. 하나님의 신이라고 하죠. 하나님께 종속된 신이죠.


그러나 신약에 보게 되면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예수그리스도에게 주도적으로 지시하고 이끄시고 명령하시는 겁니다. 성령께서는. 성신의 존재와 성령의 존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시는 일이 보다 구체적이냐 드디어 모든 것이 완료적이냐 미완료적이냐에 따라서 성신과 성령이 구분되는 거에요. 누가복음에서는 성령부터 해서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여기 누가복음 1장 15절에 보면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라고 세례 요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 포도주를 먹지 않는다 해서 구약의 나실인. 술을 대지 않는 나실인. 나실이라는 뜻은 ‘바쳐진 자’ 뜻입니다. 민수기 6장에 나오는 이 나실인.


구약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삼손이죠. 이 나실인같은 기능을 세례 요한이 하기 위해서 세례 요한의 어머니가 임신치 못하다가 드디어 하나님의 천사에 의해서 사명을 부여받고 태어난 아들이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의 하는 기능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기능을 미리 보여주기 때문에 예수님의 출생과 유사하게 임신치 못하는 여인에게 임신이 되면서 태어납니다. 임신을 못한다라는 것은 인간이 임신을 못한다 하는 이게 인간의 육의 노선, 아까 제가 처음에 이야기 한 인간의 역사가 도중에 끊어졌다 이 말이에요.


끊어져버린 거에요. 임신을 못하니까. 자식을 못 낳으니까. 끊어졌는데 끊어진 지점을 하늘나라에서 오셔가지고 이어져나가는 거에요. 개입하셔서 이어져나가는 거에요. 그냥 애기만 놓고 돌아가시는게 아니고 여기 어떤 내용이 실리게 되는 겁니다.


그 내용을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여기에 32절에 보면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 다윗, 다윗이란 구약의 개념이 나오고 또 야곱의 집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야곱의 집. 야곱의 집이란 개념 나오고 구약 개념이죠. 또 왕 노릇이라는 개념. 왕 노릇. 그다음에 33절에 마지막에 보면 그 나라가 나와요. 그 나라. 이러한 네 가지 용어가 용어에 담긴 예언의 취지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두 담기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께 담겼다는 이 말은 세례 요한에게도 관련 있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간에 임신치 못한 분에게 임신하는 경우는 사무엘상 장에서도 한나에게도 그런 경우 있지만 마지막 때에는 직접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것을 완료시키기 위해서 마지막 때 나오는 거에요.


이 마지막 때냐 아니냐 하는 그 결정이나 그걸 파악하는 것은 인간이 갖고 있던 인간의 역사적 자존감, 의미, 이런 안목을 가진 사람한테는 종말이라는 것은 이게 알려지지 않습니다. 본인이 종말 되기 싫은데 무슨 종말을 원하겠어요. 본인은 계속 자기가 영원무궁하기를 바라지요.


마리아에게 마리아가 무너진다는 말은 마리아는 결코 영원무궁한 왕 나라에 또는 왕 노릇, 야곱의 집, 다윗의 그러한 기능을 할 수 있는 능력자가 아니다 라는 뜻을 의미하는 겁니다. 마리아 개인적 입장에서는 자기가 계속 살고 싶고 자기 역사를 유지하고 싶고 구축하고 싶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이룰 수 있는 성취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런 고집부리면 안되지요. 하나님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예언의 성취에 있지 우리가 사적으로 나는 죽기 싫어요. 나는 천국가고 싶어요. 그 소원 들어줄려고 하나님이 예언하신게 아니거든요.


마리아의 무너짐 또는 마리아에게 종말이 왔다 이 말은 평소에 인간들은 자기 역사구축에 온 신경과 다 쓰기 때문에 사실은 하나님께서 급작적으로 습격하듯이 일방적으로 임신을 해서 망정이지 마리아 만약에 임신 전에 마리아 불러놓고 천사가 중매쟁이 불러 가지고 너 요셉하고 임신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하고 성령으로 임신해볼래? 뭐 의논하고 이런게 필요치 않아요.


그거 필요했으면 마리아는 이미 마리아도 포함해서 모든 인간도 마찬가지지만 자기 역사가 자존심이라고 했지요. 자기 자존심이 있고 역사구축에 대한 사명감같은 게 있는 이상은 극구 이러한 하나님의 재앙을 배격하고 밀어내기 위해서 아주 안달이 날 겁니다. 안달이 나요.


이 점이 굉장히 중요한데요. 사람이 태어나서 본성적으로 자기 자존심과 자기 의미와 자기 역사를 꼭 쥐려고 하는 순간부터 우리 인간은 극구 복음적인 내용, 복음의 말씀, 성경말씀을 비롯해서 복음 십자가 내용 이것은 아주 뭐 온 힘을 다하여 밀어내기에 급급해요. 밀어내기에.


요즘 같으면 좋지 않습니까. 신종 코로나 걸렸다 핑계대고 그래서 교회 안가는 것은 정당하다. 뭐 이런 식으로. 관심사가 복음이나 이런데 관심 있는게 아니고 나 어떻게 이 난리 속에서 버텨내는가? 버텨내야 내 역사가 계속 유지되니까요. 내 의미가 존속되니까. 안 망가지고. 안 망가지고 안 무너지고 계속 버텨낼 것인가. 그런 식으로 자기 변명, 핑계 얼마나 좋습니까.


병원에 있어서 교회 못나왔습니다 할 핑계 좋지요. 그런데 그 핑계가 있다는 말은 뭘 뜻하느냐 하면은 평소에 내가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본능이 내 것 지키는데 극구 거부하고 싶다는 뜻이에요. 저는 이것을 오늘 제목으로 삼고 싶은데요. 이게 뭐냐 하면은 면역체계에요. 면역체계. 자기를 위한 면역체계가 자동적으로 발동하는 겁니다. 발동하는 거에요.


자, 마리아는 무너짐 보통 모든 인간들은 면역체계 가동. 작동. 면역체계라고 하는 것은 내가 ‘나’라고 형성되는 이 바운더리에 외부 것이 왔을 때에 일단은 적이라고 간주하고 강력하게 밀어내는 본능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백혈구가 이런 역할을 한다고 하지요.


세포가 왔을 때 백혈구가 마중 나와서 잡아 먹어버리면 고름이 된다 하잖아요. 생물학적인 체계 자체가 자기 방어체제가 되어 있어요. 이거 안 되어 있으면 인간은 못 사니까. 이 병균 많은 세균덩어리 공간에서 못 사니까 면역체계로서 자기 자신의 몸을 자연적으로 지탱해왔지요. 자연적으로 지탱해왔다는 겁니다. 지탱해왔다.


오늘날 과학에서는 이걸 지탱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 오늘날 생물학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게 진화의 결과다. 갑자기 진회가 튀어나오고 이렇게 하는데. 인간에게 진화라고 하는 것은 생물학에서 진화라고 하는 것은 내용을 뜯어보면 진화내용이 하나도 없어요.


그냥 변화했다 뿐이에요. 몰라요.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렇게 변화되었습니다. 왜 변화되었는데? 몰라요. 그냥 그렇게 변화되었습니다. 그걸 사람들은 그냥 변화되었다 하니까 자기 무식함이 드러날까 싶어서 진화되었다. 진화라는 용어를 그럴 때 사용하는 겁니다.


사실은 변화되었다는 내용인데 이걸 진화되었다고 하니까 자연도태에 의해서 스스로 그렇게 뭔가 발전된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러한 의식 자체가 바로 나의 우리의 인류의 역사를 중요한걸로 가장 중요한걸로 여기자 이렇게 그러한 태도에서의 반응을 그렇게 반영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예를 들어서 다니엘 5장 같은 경우를 보게 되면 인간이 자기 역사 구축하기, 자기 역사 방어하기, 이런 태도가 한꺼번에 아주 얼마나 헛된 짓인가 드러나요.


다니엘 5장 5절에 제가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6절에 “이에 왕의 즐기던 얼굴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친지라.”


갑자기 사람 손가락이 나타났어요. 사람 몸체는 안 나타나고 사람 손가락이 나타나가지고 글씨를 쓴다 이 말이죠.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이라는 글씨를 쓴거에요. 나중에 다니엘이 그걸 해석을 했지요.


“부족하다 부족하다 다음 나라는 바빌론이다” 라는 뜻으로 이렇게 그러한 해석을 내렸는데 이게 그 벨사살 왕의 입장에서는 이 자체가 무너짐이고 그 무너짐 못지않은 무너짐이 바로 마리아가 아무 혐의도 없이 사전에 아무 없이 자기 몸을 그냥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월세나 전세 내지도 않고 자기 몸을 그냥 메시야 마지막 종말에 모든 것을 말씀대로 예언대로 완성하실 분을 잉태케하는 자궁으로 일방적으로 사용했다는 자체가 마리아 입장에서는 이게 무너짐이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자기 나름대로의 곱게 간직하고 싶은 자기 자존감이나 자기 나름대로의 살아온 역사라는게 있어요. 그게 묵살당했잖아요. 완전히 개무시 당했다고요. 이러한 상황을 가지고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오순절 성령오심’이라고 했지요.


인간이 뭐든지 예상한다는 것은 자기 역사를 좀 더 멋들어진 역사, 옳고 정당하고 바르게 살았다. 제대로 인생 완전하지는 않지만 나름 착하게 살려고 애썼다를 증명해줄 근거로서의 자기 역사. 그 역사를 꽁꽁 쥐고있었던 것이 인간이거든요.


자기 역사가 손실된다고 하면 그곳에 안 갈려고 하고 빠지고 피하고 이게 아까 말한 인간이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자기를 위한 면역체계거든요. 그런데 그 면역체계를 뚫어버렸어요. 마치 허공에 손가락이 나타나가지고 글씨를 쓰는 것처럼. 누가 글씨를 쓰라고 했습니까? 예상했습니까? 예상 못했지요. 그냥 일방적으로 손가락이 글씨 쓴 거에요. 충격이고 쇼크죠.


그 글씨가 바로 성경 우리가 오늘날 보고 문자로 되어 있으니까 기독교 서점 가가지고 돈 한 몇 만원 주고 사니까 흔해 빠진 것이 말씀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 말씀을 책에다가 놓을 것이 아니고 허공에다가 던져가지고 허공에다가 ㄱㄴㄷㄹ글자가 전부 날라다녀야 돼요. 세종대왕이 만든 한자가 공중에 날라다니면서 거기에다가 손가락까지 나타나가지고 글씨를 이렇게 공중에다가 쓰던지 벽에다 쓰던지 쓴다고 해보세요. 기절초풍할 일이죠.


그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몸 면역체계 나의 역사를 와르르 다 붕괴되고 무너지는 겁니다. 인간의 면역체계는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의 면역체계란 내 살 길 내가 알아서 하겠다 이 말입니다. 내 살 길 내가 알아서 하겠다.


그러니까 이 말은 나는 어떤 경우라도 안 무너지리라. 안 무너지리라. 어떤 경우라도 무너지지 않으리라. 나는 망하지 않으리라. 나는 나를 지키는데 혼신의 노력을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이리라. 그래서 나의 역사 나의 이 가치는 궁극적으로 가치 있는 절대적 가치 이것밖에 없는 내 가치를 내가 안 지키면 누가 지키느냐? 이게 바로 인간의 고집, 인생 사는 인간의 고집이에요.


고집을 공중의 손가락 가지고 한방에 확 다 보내버렸잖아요. 그게 ‘성령오심’이에요. 인간의 이 속내에 이건 아주 강력해요. 말씀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지레 겁을 먹고 강력하게 밀어내는 겁니다. 어쨌든간에 복음을 안 들을려고 애쓰고 어떤 경우는 말씀을 안 들을려고 애쓰고 요령 피우면서 그냥 피해다니는 것, 그게 인간의 본성이죠.


그런데 마리아의 무너짐이란 하나님께서 훅 들어온거에요. 그냥 훅 들어왔어요. 훅. 오늘 제목을 ‘훅’. 훅 들어온거에요. 그냥 임신을 한 거에요. 아니되옵니다 이런 말 할 새도 없었어요. 그냥 몸이 자기 배가 불러오는 겁니다. 안에 뭐가 들었는 모양이라. 예수님이 들었겠지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은 예언이 부풀어오른거죠. 흔히 인간 몸에 독사의 독이나 어떤 안 좋은 요소가 들어오게 되면 피부가 부풀어오르지요. 인간은 죽기 전에도 이렇게 죽고 난 뒤에 몇 시간 안지나면 세균에 의해서 혓바닥부터 해서 모든게 부풀어 오른다고 되어 있어요.


그 마리아가 원래 마리아의 몸은요 전부다 누가 통제하고 누가 관리하고 마리아 본인의 마음과 의식이 자기 몸을 통제하는 겁니다. 어떤 행동을 결정한다든지 선택한다든지 이걸 이제 아까도 말한 것처럼 마리아의 기억에 준해서 현재의 결정을 내리는 거에요.


그런데 자기 몸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자기가 관리하고 통제한다고 여기는 이 한복판에 낯선 어떤 사건이 들어 닥치니까 마리아 몸이 아랫배가 부풀 듯이 이것은 곧 하나님의 예언이 부푼 거에요. 이것은 뭐냐 하면 마리아의 마음과 생각보다도 뭐가 더 크다? 하나님의 예언, 예언을 이루는 하나님의 의견, 마리아의 의견보다 하나님의 의견과 하나님의 결정사항과 의사가 더 큰 거에요. 더 우세한 거에요.


이것은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의 어머니 이름이 엘리사벳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엘리사벳과 사가랴 이 부부도 세례 요한의 아빠 엄마지요. 이 사람도 마리아하고 같은 마음이에요.


왜냐하면 그들은 애기를 못 낳아요. 못 낳는데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스케쥴이 하나님의 계획이 일방적으로 훅 들어온 겁니다. 마리아의 예언이 부풀어옴으로써 기존의 그 사가랴의 집안의 모든 예상을 뒤엎어버리고 심지어 그렇게 태어난 세례 요한의 인생도 껍데기만 세례 요한이지 안쪽에서는 하나님의 예언이 가득 찼기 때문에 예언대로 세례 요한은 그냥 모든 자기 인생 자기 역사는 산산조각 찢어져야 되겠지요.


세례 요한이 죽을 때 본인이 그런 죽음 죽고 싶어서 미리 예상했습니까? 자기 목이 쟁반에 잘려서 죽는다는 것. 그것도 왕이 요구한 것이 아니고 그 여자애가 요구한대로 자기 운명이 여자애에게 종속된다는 것, 그처럼 그렇게 수치스러운게 없겠지요. 지난 주일 낮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은 인간이 죽음보다 더 싫은 것은 내 몸이 타인에 의해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이런 것이 더 모욕감을 느끼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어서 누구나 선악을 알기 때문에 죽던 살던 내가 결정하고 싶고 내 결정에서 내가 유지되고 싶어하는데 내 뜻대로 내 결정에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타인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내 인생이 꼬이든지 어떻게 되게 되면 그것처럼 자존심 상하는 일이 없을 겁니다. 그것처럼 수치스러운게 없을 거죠.


예수님도 스스로 돌아가셨습니다. 사람 손에 붙잡혀서 돌아가셔야 될 이유는 주님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맡겼기 때문에 이 죄악에 맡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쨌든 간에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마리아는 자기 원대로 뜻대로 되지 않고 훅 하나님의 예언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의 자기 역사, 자기 의미, 자기 자존감은 와장창 다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자, 그렇다면 그다음에 우리가 생각할 것은 이 예언 아까 예언 여러 가지 이야기했지만 다시 한번 적어볼까요. 다윗의 집, 다윗의 후손되기. 그 다음에 야곱의 집. 그 다음에 왕 노릇하는 그런 기능적인 왕 노릇이라는 기능적의 완성.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함.


이런 요소들이 예언의 내용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데 이런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정황이 뭐냐 하면 바로 이 세상의 죄라는 거에요. 이 세상의 죄가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죄가 뭐냐? 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되지 않는 것, 하나님의 예언되지 않는 것, 하나님의 예언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


예언되지 않는 것보다도 그 반대하는 것도 예언되었다 치면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반발하는 것 그 세력으로 이 세상이 가득 차 있던 겁니다. 이 세상이. 충만했던 거죠. 이 사실을 그동안 인간은 모르고 마치 이 세상이 나를 먹여 살릴 수 있는 따뜻한 온실인냥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거기서 생일잔치도 하고 환갑잔치도 하고 결혼도 하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죄라는 것, 죄가 있으면 여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있지요. 진노를 유발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를 유발하고 지옥불로 데려가는 그런 요소로 가득 찼음에도 불구하고 이걸 전혀 못 느끼는 거에요.


신종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이 좀 죽어나갈 때 이때 사람들이 정신 차리지 만약에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함께 있어도 아무 증상이 없으면 이 세상은 그냥 좋은 세상이에요. 유별나게 신종 코로나가 19가 COVID-19 이 어떤 증상을 발휘하니까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이지 아무 증상이 없으면 신종 코로나 이 바이러스가 없다고 한다면 그나마도 오직 유일하게 기대 걸 수 있는 세상은 이 세상밖에 없다고 이렇게 사람들은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이 바이러스 없어도 바이러스 증상은 결국은 뭐였던가요? 기침한다. 폐렴같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결국 증상이 뭐였던가요? 죽음이지요. 공동묘지로 가는 거지요. 죽음이지요. 그러면 죽음 자체가 뭐냐 하면은 이 땅이 수상하다는 증상이잖아요.


그러면 신종 코로나 있기 전까지는 사람은 죽었어요? 안 죽었어요? 죽었지요. 사람이 그냥 늙어죽는다 하지 말고 늙어 죽던 이 세상이 정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죽음이라는 증상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전부다 바보, 등신이 되어 가지고 자기가 정상적인 인간인 줄 알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죽어가고 있으면서.


성경 말씀은 인간은 왜 죽는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때문에 죽는다고 분명히 명문적으로 진짜 손가락 가지고 글씨 쓰듯이 그렇게 분명하게 글자로 알려줬음에도 불구하고 줬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이 세상을 이 세상에 미련 두고 집착하고 있다 이 말이죠. 죽으면서도.


인간자체가 악마의 바이러스에 걸리면서도 사람들 생각하기를 자기 자존심만 챙기는 거에요. 악마의 바이러스가 가득 찬 것도 그것도 귀하다는 겁니다. 왜? 그게 나니까. 악마의 바이러스로 가득 차 있는 내 모습이 곧 ‘나’가 되어버리죠. 자기 자신을 부정하거나 부인할 줄 모르고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했겠어요? 죄를 죄라고 가르치지 않았던 다시 말해서 예언이 도입되어야 죄가 드러나니까 예언을 차단시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차단시키면서 약속과 언약을 차단시키면서 이대로 사는 것도 정상이다라고 우겼던 배후에 누가 있느냐? 악령이 있었던 겁니다.


성경에서 성령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그냥 이야기하면 안 되고 악령의 존재를 전제로 해서 이야기되어야 돼요. 악령의 존재를. 그 점을 먼저 잠시 보겠습니다.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지만 잠시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그 다음에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했다.”


여기에 “내가” 라고 하신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현재는 누가복음 1장에서는 마리아 몸에 들어가 계신 그 분을 말합니다. 마리아의 몸에 훅 생겨버린 그 분. 아기 모습으로 태아의 모습으로 있는 그 분이 말하기를 자신의 기능이 뭐냐 하면 귀신을 쫓아내서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일을 하신 분이 지금 마리아의 몸에 그냥 들어온게 아니고 훅 들어오신 거에요. 그냥.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는 성령으로 훅 우리 몸에 악마의 바이러스 죽음의 바이러스 죄의 바이러스밖에 없는 우리 안에 성령을 통해서 주님이 훅 들어오신 거에요. 마리아의 그 팔자나 우리 팔자나 동일한 팔자가 되는 겁니다. 이미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우리의 모든 자존감과 나의 찬란한 역사 지키기 그런 것은 다 그런 시도는 헛된 시도에요. 소용 없는 겁니다. 그 공중에 손가락 썼던 그 글씨가 아예 공중이 아니라 우리 안에 들어왔다고 생각해보세요.


자, 그러면 여기서 말씀드리는 것은 인간이 악령이 있다는 말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신천지 교인, 요새는 교도라고 하니까 교도들의 그 의식을 보면 악령이 들어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를 잘 알 수 있어요.


신천지 교도들의 특징은 부적같은 것을 지님으로서 자기의 모든 불안감을 해소하려는데 있어요. 부적같은 것. 어떤 부적이나 어떤 물건. 신기한 물건을 하나 소유함으로서 구원받으려고 하는 거에요. 자기가 영원히 행복해지고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가기 위해서 뭔가 하나 소유해야 된다. 뭔가 소유. 소유. ‘소유’. 뭔가 소유해야 한다는 거에요.


신천지 교도가 소유한 것은 신천지 교단 자체거든요. 교단 자체. 신천지 교단을 소유함으로써 내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내가 살 수 있는 마지막까지 버틸 수 있고 챙길 수 있는 방법을 뭔가 소유하는 거에요. 왜냐하면 그들에게 그들은 요한계시록에 꽂혀있거든요.


요한계시록에 보니까 세상에 지옥이 있고 멸망을 당한다 하니까 그 딱 보는 순간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이 생각 드는 거에요. 신천지 교도들이.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늘 마음 속에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살아야겠다. 또는 살아남아야겠다. 살아남아야겠다.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부적이나 안 그러면 신기한 효과 있는 것. 성경의 해석이라든지 이런 것. 신천지 교단. 이런 것들을 소유하게 되면 나는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거에요. 문제가 뭐냐 하면 살아남는다는 이게 안 무너지려고 하는 거에요. 나는 망가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나는 지옥가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이게 바로 악령이 계속해서 신천지에 힘을 실어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살기 위해서 무슨 짓도 다한다. 살기 위해서. 성경에서는 죽으라고 이야기하는데 여기 신천지는 살아야겠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얼마나 악마적입니까? 이게 신천지만 해당되는 이야기겠어요? 오늘날 한국 교회는 해당 안 됩니까? 다 해당되는 이야기에요. 교회 안가는 사람도 해당되는 이야기에요.


종교가 없어도 마스크하는 것 보세요. 교회 안 다녀도 자기가 알아서 손 씻고 하는 것 보세요. 나라에서 손 씻으라 시키는거 다 해요. 왜? 살기 위해서. 그런데 인간은 살기 위해서 태어난게 아닙니다. 죽기 위해서 태어난 거에요.


그러면 자기가 죽는 이유는 뭘까요. 죽는 이유를 한번 대보란 말이죠. 살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썼는데 결국은 나이 70, 80, 90 되서 죽는 이유는 뭐에요? 앞뒤가 안 맞잖아. 앞뒤가 안 맞잖아요. 뭐 진화론이 어떻고 과학이 물리학이 어떠느니 과학을 논하고 철학을 논하고 백날해도 늙어 죽는데 어떡해. 늙어 죽는데. 죽는 문제 어떻게 할 건데요.


죽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죽고 난 뒤에는 아무도 모른다. 자기 혼자 모르지. 성경에서는 다 이야기했는데요. 인간은 죽는 것이 그냥 죽는 것이 아니에요. 살라고 죽는 것이 아닙니다. 악마의 바이러스, 죄의 바이러스 죄값으로 죽어요. 죄값으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죽는다고요. 그 하나님이 지금 마리아의 몸에 지금 임신해 있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 내막을 하나님의 예언으로 예언을 통해서 펼쳐내고자 하는 겁니다. 물론 인간은 이런 이야기가 듣기 싫어서 강력하게 밀어내겠지요. 나 사는데 보탬이 안 된다고 하겠지요. 그러나 인간이 밀어낸다고 하나님의 일이 겁나가지고 멈출 분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강제적으로 일방적으로 인간이 싫어하는 종말을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인간세계 역사 속에 종말을 넣어버린 거에요. 마리아와 의논도 없이 그냥 일방적으로. 또 세례 요한, 엘리사벳과 의논하지 않고 사가랴와 의논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종말을 집어넣은 겁니다.


제가 지난 오후 설교에서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교회 수십 년 다니면서 열심히 기도했는데 하나님께 받은 택배 안에는 택배를 받았는데 택배 안에 택배상자 안에 뜯어보니까 아무것도 없더라 했어요.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30년, 40년 교회 다니면서 주시옵소서 했는데 막상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버린 그 택배상자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복음대로 목회하고 복음대로 설교하게 되면 아마 하나님께서 이쁘장한 교회하나, 100명 200명 욕심안내도 50명이라도 이쁘장한 교회 되겠지. 하나님이 의도한 것은 이런 소망마저 작살내시고 아무것도 없는 빈 상자에요. 그냥 빈 공기만 들어있는 상자.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은근히 기대하고 그래도 교회 와서 기도하면 뭔가 주시겠지. 예수 십자가 믿고 복음 믿으면 뭐 주시겠지 뭔가 주실게 있을거야 은근히 기대했던 사람은 얼마나 여기서 실망스럽겠습니까? 아무것도 없다는데.


그런데 아무것도 안준다는 것은 누구에게? 나에게 아무것도 안준다는 것은 나 자신을 제대로 알아라 이 말이죠. 그게 복이에요. 뭔가 내가 받을만한 가치나 권리가 있고 교회 다녔으니까 그 긴긴 역사가 효과 있어서 뭔가 얻어 챙길 것이고 그럼 결국 뭐겠어요? 나만 살겠다는 그 의도 자체가 과연 나만 살겠다는 그 ‘나’가 하나님께 구원받을 대상이 되느냐 하는 문제, 구원받을 가치나 권리가 있느냐하는 문제.


주께서는 너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려주는 그것마저 더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비로소 아무것도 내가 챙기고자 했던 그 생각 자체가 오후 설교에 보면 인생 헛 산 거에요. 엉터리로 산거에요. 엉터리로. 아무것도 안줍니다. 왜? 아무것도 안 줄 뿐더러 오히려 뭉개뜨리지요. 무너지게 만들지요.


종말을 앞당겨서 받은 사람 다시 말해서 십자가가 앞당겨서 온 사람만이 이게 바로 영생에 들어가는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내가 받을 것은 없고 주께서 일방적으로 집어넣어준 것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말씀이고 약속이고 언약이고 하나님의 예언이 되는 거에요.


본인이 안 무너지니까 자꾸 뭔가 주시겠지를 기대하는 거에요. 생활이 어렵다. 직장에 짤렸다. 수입이 없다. 그래도 수십년동안 교회 다닌게 있으니까 뭔가 주시겠지. 아무것도 없는데요. 몸이 아프다. 그동안 복음 위해서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마지막 때는 건강케하시겠지. 안 건강하고 늙어죽는데요. 아파 죽는데요.


얼마나 그동안 신천지를 비롯해서 한국교회가 하나님과 인간을 상대로 사기를 쳐왔습니까. 그게 뒷 배후에 악령이 이미 여기에 상주해서 이 세상을 꽉 쥐고 있어서 그런 거에요. 마치 바이러스가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이 세상에 꽉 차있는 것처럼 이런 악마의 사기술이 이 세상을 꽉 차서 사람들로 하여금 십자가 복음의 광채 그 진수를 못 보게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속고 사는 거에요.


그래서 악령은 지금도 복음 못 전하게 하기 위해서 극구 복음 전하는 그들을 밀어내고 배척하고 그만해라 안 듣겠다고 몸부림치고 그러지요. 자기 역사, 자기 자존심과 자기 의미를 무너지기 싫어서 빼앗기기 싫어서. 택배상자 속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욥은 아무 것도 없는 정도가 아닙니다. 원치 않는 오히려 고통이 배달되는 거에요. 왜 고통 주십니까? 욥이 하나님께 대드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간단해요. “내 것에 내 맘대로 사용하는데 네가 왜?” 이게 정답이에요.


욥은 자기 몸이 자기 것이라고 여겼어요. 지난 과거 지난 역사가 있다고 생각하고 고고학적 역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몸을 계속 자기 것이라고 오해한 겁니다. 내 건데 주님께서 내 것에 십자가 고통을 주신 건데 물론 나중에 그 십자가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된 언약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욥은 아프니까 아프다고 이야기한 거에요 그냥. 욥 입장에서는 왜 아픈지 모르겠다는 거에요. 여전히 구약적 인물이기 때문에 그런데 신약에서는 바로 그것은 신약에서는 성령을 받으면 성도는 바로 그 정도를 이겨내 벗어날 수 있고 극복해야 되는 겁니다.
 홍민희 (IP:59.♡.122.247)20-03-30 23:59 
강남-누가복음 1장 32절 (예언과 면역체계) 200317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자기만의 교유한 자기 면역체계를 고집하는 것. 그러면 그게 하나의 등치가 되겠지요. ‘나’라는 이름의 등치가 되겠지요. 그 등치를 가지고 인간은 뭘 하느냐? 나름대로의 자기의 악의 구역을 피해서 자기의 살 구역으로 이동한다. 이동하고 싶다. 이 더러운 세상에서 피하고 싶다 나오겠지요.


그런데 그게 구원입니까? 전혀 그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의 스스로 작용하는 예언 요소가 없어요. 마치 이건 뭐와 같으냐 하면 자기만의 고유한 면역체계를 그걸 지켜내면서 더럽고 죄 많은 세상에서 벗어나서 좋은 곳에 가겠다는 말은 마리아가 전혀 아기 예수님을 임신하지 않은 채 그 몸뚱아리 가지고 천국 가겠다하고 똑같은 사고방식입니다.


하늘에서 주신 예언의 요소가 자기 속에 스며들어와서 그냥 스며들어와서 부분으로 멈추는게 아니에요. 스며들어온 그 예언이 지금껏 자기가 고집하는 자신의 주관을 이겨야 돼요. 부풀어 올라야 된다고요. 부풀어.


인간의 몸이 지금 뭐를 이해하셔야 되느냐 하면은 내 몸 안에 그냥 비어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살고 싶다 하는 이것이 그냥 내 마음이지만 그 안에 뭐가 작용하고 있느냐 하면은 악령의 수상한 공기가 또는 여기 공기가 있어서 여기서 악령의 중력장을 형성하고 있어요. 중력장.


중력장이라고 하는 것은 무조건 물체를 잡아당기잖아요. 발목 잡는다 이 말이지요. 사는게 남는 거야 이 인간아 하는 그러한 요구 조건이 어쨌든 너만 살면 그만이야. 너만 이 악한 신종코로나 피해서 잘 지내면 결국 살아남는게 남는거야 그게 이익이야 라고 외치는 그런 중력장이 형성되어 있다 이 말이죠. 우리 안에서.


예언이 우선이 아니라 예언은 없애버리고 예언 자리에 절대적인 ‘나’가 계속 유지하고 지배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세상은 멸망해도 자기는 멸망 안 하고 싶고 안 당하고 싶은 거에요. 그러나 정말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임신했다면 자기가 무너짐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할 것이 아니고 그걸 뭐로 보느냐 하면 아름답다로 봐야 돼요. 아름답다.


아름다운 소식으로 여겨져야 돼요. 아름다운 소식으로. 물론 마리아가 처음에는 그게 당황스럽겠지만. 나중에는 그걸 알겠지요. ‘아름다운 소식’. 아름다운 소식을 두자로 줄이면 뭐가 되느냐 이게 바로 복된 소식, ‘복음’이 되는 겁니다.


이 말을 풀이하게 되면 달리하면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여야한다. 아름답게 보여야 한다. 주께서 세상을 작살내는 그 모습이 최고의 예술작업으로 느껴져야 된다 이 말이죠. 최고의 극상의 순금으로 느껴져야 된다. 아름다움으로. ‘극치의 미’로 느껴져야 된다 이 말입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누가복음 2장에 그 나오는 그 시므온이라는 이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의 지시를 받아서 2장 29절 성령의 지시를 받아서 하는 말이 “이제는 종을 평안히 놓아 준다” 이 말이죠. 평안히 놓아준다는 것은 하나님의 하는 일이 정말 인간이 해낼 수 없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을 지금 아무 차질 없이 잘 진행시킴을 알게 된 겁니다. 성령 받아서 알게 된 거에요.


그 아름다움의 일의 극치가 누가복음에 의하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이어지는 주의 빈틈없는 작업. 십자가로 이어지는 빈틈없는 작업. 이 작업을 보고 복음,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볼 수 있어야 돼요.


그중에 내 자존심과 내 가치, 의미가 무너지는 그것을 보면서 내가 그렇게 지키고 싶은 나의 역사가 하염없이 그냥 여지없이 작살나는 것을 보면서 참 하나님께서는 하는 일이 정말 아름답게 느껴져야 된다 이 말이죠. 심지어 자기가 죽는 것까지.


사도 바울이 자기가 죽는 것을 무서워했습니까? 아니면 원했습니까? 원했지요. 왜? 그것조차도 아름다운 복음에 속하는 일이니까요. 두 번째 시간에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예언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예언이라는 것, 들어옴으로써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생각해보는 겁니다.


아까 예언에서 제가 언급했는데 그냥 다시 이야기하면 다윗의 자손이라는 이러한 취지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 오셨고 그 다음에 야곱의 집, 야곱의 집은 이스라엘이죠. 이스라엘. 이스라엘을 이어가는 겁니다. 그 다음에 왕 노릇, 왕의 등장. 네 번째가 나라의 그 나라의 영원함. 한때 등장하고 그 다음에 끝나는게 아니고 영원함.


자, 그렇다면 이 예언을 파악하는 환경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악마가 지배하도록 허락하신 거에요. 이 세상에서는 뭐가 없느냐? 다윗의 자손이 오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방해공작이 있었던 겁니다. 방해공작. 다윗의 자손. 메시야가 오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포도원을 만들어 놨는데 농부한테 세를 받는데 그 농부가 하나님이 포도원 주인 되는 것을 싫어해서 종을 품삯 받으러 온 종을 죽여버리고 오면 죽여버리고 마지막에 아들 보내니까 아들마저 죽여버렸다는 그런 내용이 나오지요. 마태복음에.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나옵니다. 마태복음 21장에 나오는 그 포도농부의 비유에 의하면 그동안 다윗의 자손 오는 것을 방해하는 세력이 이미 상주하고 있다. 이 땅에. 아까 그 신종 코로나가 이 세상에 인간과 함께 계속 살고 앞으로도 계속 살게 되는 것처럼 인간은 백신을 만들든지 말든지 하여튼 신종 코로나 한번 나타나면 없어지지 않아요. 계속 있어요. 같이 살아가요.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는 인간과 악령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거에요. 살아가면서 그들이 악령이 놉니까? 뭐 하품 크게 하면서 아무 일 없이 할 일 없이 그냥 빌빌 거려요? 아니에요. 극구 반대해요. 예수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극구 반대한다고요.


인간은 다윗의 자손에 관심이 없어요. 다윗의 자손이 뭔지도 몰라요. 옛날 이야기인줄 알고 있어요. 그러나 악마는 알아요. 다윗의 자손이 오면 안된다는 거에요. 두 번째는 다윗의 자손 세 번째는 왕의 등장했는데 네 번째 따져 봅시다.


다윗의 자손으로 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이게 요한계시록에 보게 되면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비밀을 글자로 굳어져 있던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작업을 하시는 것이 이게 다윗의 자손이 해야 될 거에요.


요한계시록 5장에 5장 5절에 보면 이 책을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갇혀 있으면서 계시를 받았지요. 책을 봤는데 4절에 보면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사도 요한이 책을 받기는 받았는데 그걸 열 수가 없어요. 봉인되어 있으니까 닫혀있으니까 자물쇠로 잠겨 있으니까 운거에요.


그 책을 편다는 것은 책에 활자로 굳어져 있던 현실이 바깥 현실을 구성한다는 뜻이거든요. 실제 현실로 형성되어 지고 그 말씀대로 모든 것이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울었더니 장로 하나가 나와서 이미 장로라는 것은 구약 때 순교자를 말하는데 구약 때 순교자가 와서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되어 있어요.


여기 이겼다는 말이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와가지고 예수님이 와가지고 단추 떼듯이 톡톡 떼면 될 문제가 아니고 뭔가 전쟁을 해야 될 문제가 있는 거에요. 전쟁. 이 전체 이 세상에 상주하고 있는 신종코로나 바이러스와 싸우듯이 뭔가 싸우지 아니하면 열리지 않는 내용이 바로 이 세상의 진짜 현실이 된다 이 말입니다.


현실은 더 굳게 콘크리트 됐다고 할까요. 콘크리트화 됐다. 완전히 사방이 철벽으로 갇혀 있는데 하나님께서 위에서 그걸 그 콘크리트의 벽을 두꺼운 장막을 깨는 작업을 하신 거에요. 깨신 작업을. 그 두꺼운 장막이 뭐냐 하면은 바로 죽음이고 그리고 율법에 의한 저주요 악마의 권세요 죄의 권세고 그런 것들이죠. 그 안에 갇혀있는 겁니다.


또는 그걸 우리 실제적인 표현을 한다면 육에 갇혀있고 또 가족에 갇혀있고 이 나라 눈에 보이는 세상에 갇혀있고. 보는 것이 다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보는 것을 다가 아니라고 하는 것 조차도 사실은 보는데서 출발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고 여기는 상상 안에 인간은 또 갇혀있고.


무슨 말이냐 하면 보는 것이 다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성령 받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는 거에요. 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고 그 뒤편에 무슨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성령 받지 않은 악령 받은 인간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겁니다. 이 너머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너머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말은 보는 세계를 전제로 해가지고 그 너머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보는 세계를 전제로 해서. 이것이 있는데 이것이 다가 아닐거야라는 생각을 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러나 이 보는 것 자체가 이게 엉터리라는 생각을 못하는 거에요. 보는 것도 맞고 그 너머에 우리가 믿지 못 하는게 있을거야. 그게 우리 인간이 갖춰야 될 우리의 겸손함이야 라는 새로운 윤리로 등장하는 거에요. 그러나 이 자체가 바로 이런 생각 자체가 갇혀 있는 거에요. 이런 생각 자체가.


보는 것이 보인다는 이것조차도 이게 죄라고 규정할 수 있는 기준 자체가 없어 버리면 이 자체가 환상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보이는 세계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논해도 그 자체가 환상이 되는 겁니다. 교회에서 보이는 세계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그것을 상품으로 그것을 하나의 상품으로 걸고 그걸 미끼로 해가지고 운영하는데 그 자체가 엉터리에요.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다윗의 자손이 오기 전까지 이 세상은 이런 식으로 가득 차 있는 겁니다. 그러나 다윗의 자손은 결국은 뭐냐 하면은 그 장벽을 깨는 거죠. 이기는 거죠. 이건 뭐냐? 전쟁하는 분, 전쟁하는 분이에요. 다윗의 자손은 뭐라고요? 전쟁하시는 분. 누구하고 전쟁한다고요? 우리로 하여금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 못하게 만드는 다른 모든 그러한 배후의 요소가 그러한 어떤 인격체와 전쟁하는 거죠. 이게 시편 110편에 보면 나옵니다.


시편 110편 1절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자, 여기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걸 사도행전 2장에서는 2장 34절에서는 뭐냐 하면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되어 있지 않고 ‘주께서 내 주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요.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 34절 보면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아 참 이상하지요? 구약 유대인들이나 인간들의 사람들의 상식은 절대적인 그분에게만 하나님, 신이라는 또는 주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이 인간들의 상식입니다. 논리고. 최고의 자리는 두 사람 되면 안 되고 한사람으로 봐야 되지요.


그런데 시편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는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여기서 이 시편 110편을 보게 되면 인간의 시간성으로 보게 되면 ‘까지’ 라는 말 자체가 어떻게 인간세계에서 쓰여 지느냐 하면은 완료는 되지 않았고 완료될 것을 목표로 움직여 나갈 때까지라는 그 말을 쓸 수 있다고 보지요. 보통 인간세계의 시간론에서는.


그런데 사도행전에 와서 보게 되면 여기 까지라는 말은 주님 하시는 기능을 주의 심판주 노릇하는 그 기능을 가지신 분이 드러나는 그 드러나는 그 위치를 묘사할 때 지상의 시간으로 그 위치를 표현해주는 겁니다.


주의 자리가 어떤 자리냐 라는 그 질문에 대해서 이 땅에 있는 모든 원수를 다 정복하는데 성사되신 분 만이 그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은 주가 됐습니다 라는 설명을 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까지’ 라는 시간적 부사를 사용하는 거에요.


어디 까지라는 말은 시간의 한정됨이 아니고 현재 갖고 있는 누리고 있는 위치가 어떤 기능을 완료했기에 이런 위치에 도달했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지상에서 벌어진 일들을 설명하면서 원수를 정복하기 까지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이 ‘까지’ 라는 이러한 표현이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나와요. 거기에 보면 5절에 보면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이 그 천년이 차기 까지”. ‘까지’ 라는 말 천년이 차기 까지 살지 못하리라 이 말을 사람들은 어떻게 잘못 해석하느냐 하면 천년이 차고 난 뒤에 그 천년이 차고 그 뒤에 7절에 보면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나와서 땅의 사방을”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천년이라는 기간이 지나고 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잠시 사탄이 풀려가지고 인간을 괴롭힌다라는 식으로 인간들이 생각하는 시간적인 그 시간의 개념가지고 이 ‘까지’를 설명하는데 그렇게 설명하면 안돼요.


이 ‘까지’라는 말은 현재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이 어떤 기능을 완료했는가. 뭐를 대상으로 싸움에 승리했는가. 어떤 대상을 상대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 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동원된 시간적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기 때문에 완료성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하는 어떤 기능자는 이미 그 안에 시간에 대한 완료자로서 등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슨 일을 하느냐를 표현하기 위해서 지상에서 ‘까지’ 라는 말을 사용하셨다 그렇게 이해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 110편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원수를 함락할 때까지 오른편에 있다가 그 다음부터는 다시 네 자리로 내려가 이런 뜻으로 설명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까지’ 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수가 발등상 되기 까지 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의 기능은 원수를 밟는 것이다. 발판되게 하는 것이다. 원수로 발등상 되게 하는 그 기능이 너의 기능이다.


그의 기능이 완료가 된다면 너는 영원히 얼마까지가 아니라 영원히 너는 오른편에 앉아 있어야 된다 라는 식으로 지금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 거에요. 성령 받아서. 베드로가 설명하는데 우리가 뭐 베드로가 설명해서 틀렸다하면 안되지요. 사도니까.


그래서 종말인겁니다. 종말이라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완료된 상태가 종말이거든요. 그렇다면 종말이 된다면 종말에서 오른편에 계신분이 우리에게 성령을 준다면 비로소 성령 받은 사람은 어떤 안목이 열리는데 그 안목이 뭐냐 하면은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의 원수와 한통속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다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제가 살아가고 있다라고 현재를 이야기했는데 사실은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정확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원수와 살아 왔었다라고 왔었다고 과거 완료로 설명해야 돼요. 완료형으로 설명해야 옳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직 죽지 않았지만 이미 우리는 죽은 자로 완료적 신분을 부여받았거든요.


따라서 나는 옛날 살아생전에 악마와 한통속이었었다라는 다시 말해서 지금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위상에 위치에 있다. 왜?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으니까. 주와 함께 하늘에 앉혀있으니까 오른편에 앉아있으니까 우리는 과거완료로 설명해야 옳다 이 말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을 보게 되면, 5절에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과거완료로 되어 있지요.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 얻게 될 것이다가 아니라 얻은 것.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미 완료된 거에요. ‘앉히시니’.


로마서 8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아신 자들을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완료형입니다. 로마서 8장 30절에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미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그러니까 창세전에 지금까지 모든 것을 이미 완료에서는 시간이 정지되어버린 거에요. 정지화면이죠. 그림처럼. 한 화폭에 다 담아있는 것처럼. Stop이 되어 있어요. 시간이 흐르지 않는 상태. 그게 바로 특징이 사건 안에 특징이 그런 거에요. 사건 안에서는 시간이 여기 들어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을 쪼개버리고 시간의 흐름을 중단시켜 버리고 시간의 이어짐을 차단시켜버리는 역할이 사건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다윗의 자손이 오는 것은 결국 시간의 흐름을 아직도 붙들고 있는 이 악령의 세계에 대해서 시간을 중지시키고 완료성으로 만들기 위해서 오실 분이 다윗의 자손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 일을 하필이면 왜 다윗이 해야 되느냐 하는 생각이 들겠지요. 뭐 사울의 자손 또는 노아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왜 하필이면 다윗의 자손이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다윗에게 약속한 게 있어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만 약속한 게 있습니다.


다른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이런 사람에게 약속한게 아니라 다윗에게만 약속한게 있는데 뭐냐 하면은 다윗의 자손, 다윗의 아들이죠. 다윗의 아들이 하나님께서 자진해서 되겠다 이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은 육이 없지만 내가 다윗이라는 육, 다윗의 아들로 태어나는 육신을 입겠다 라고 다윗에게 제일 먼저 약속을 한 거에요.


하나님께서 누구 자식을 낳겠다가 아니라 그건 아브라함에게 그런 약속했잖아요. 아브라함아 너 자손이 많아지겠다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 자신이 사람의 아들로 오겠다는 거에요. 사람의 아들 인자죠. 사람의 아들로 오겠다.


그래서 인자라는 것은 다윗부터 시작하는 거에요. 예수님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 오겠다는 말은 나는 사람이 아니지만 사람의 아들로 왔다는 뜻이에요. 그 엄청난 이 예언의 내용들이 지금 마리아를 임신케 한 그러한 방식으로 지금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전쟁하러 오신 거죠. 그 전쟁을 누구하고 하느냐?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누가복음 1장 52절에 보면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내리쳤다는 것이 굉장히 폭력적이죠. 그리고 폭력적이면서 폭력적이라고 하는 것은 폭력의 대상이 있다는 말이고 그 대상이 누구냐? 여기에 권세 있는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럼 권세 있는 자가 왜 하나님 앞에 얻어맞아야 될 대상이 되는가? 거기에 보면 거기 51절에 보면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에 권세 있는 자가 필요 없다가 아니에요. 권세 있는 자를 만드는 이유는 교만이라고 하는 것을 인간의 사회에 심어서 교만 덩어리가 인간세계에서 실제로 눈에 보이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신 거에요.


자, 권세 있는 자 보이느냐? 보입니다. 저게 교만한 자야.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럼 우리의 생각은 뭐냐? 아니 권세 있다고 다 교만한 게 아닙니다라고 변명하고 싶지요. 권세, 교만한 자가 권세 있는 자가 아니라 권세를 가지게 되면 누구나 교만한 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우리가 놓여있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면 교만하지 않은 자가 누구냐? 그거는 권세있는 자에게 날마다 얻어터지는 자가 교만하지 않은 자겠죠. 특히 누가복음에 46절에 나오는 이 찬양이 누구를 그대로 표절했느냐 하면은 바로 사무엘상 1장에 나오는 한나의 찬양을 그대로 표절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반복해서 주어지는 거죠. 반복하면서 그 심도, 깊이는 더하게 되는 겁니다.


사무엘상 2장에 나오는 한나가 찬양하는 그 대목 2장 1절에 나옵니다. 똑같아요. 교만한 말 이렇게 해서 권세있는 자 가난한 자 내치시고. 그대로 오늘 마리아가 하는 찬양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그런데 여기서 왜 여기서 한나가 그 당시에 이러한 찬양을 했느냐 하면 그것은 바로 한나에게 어떤 원통함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원통함.


한나의 찬양에 그게 나옵니다. 한나의 그 여기에 보면 한나의 원통이 있다는 말은 원수가 있다는 말이거든요. 한나가 어떤 분노를 갖고 있고 분함이 있는데 그것은 사무엘상 1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사가랴, 엘리사벳 누구죠? 바로 세례 요한의 아빠 엄마죠. 세례 요한의 아빠 엄마가 잉태치 못했습니다. 잉태치 못했다는 걸 분명히 해놓고 아기를 낳죠.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아예 잉태고 뭐고 결혼한 적도 처녀가 임신을 해버리죠. 마리아가.


이런 것은 인간의 육을 장악하고 있는 악마들이 육을 장악했다는 그 이유 때문에 얼마나 권세 있고 교만한 척을 하고 있는가를 지금 폭로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잉태치 못하는 처녀의 몸을 통해서 예수님이 태어나게 하신 거에요.


인간은 육으로 태어나는데 겸손하지 이렇게 생각하는데 세상의 공자나 맹자가 하는 소리고요. 인간의 몸이 있는 한 인간은 교만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지금 주님께서는 말씀하시 고 계시는 겁니다.


성령 없이 자기 혼자 도를 닦아가지고 명상에 몰입해가지고 나는 겸손하다 이래가지고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게 아니에요. 나는 안 무너지면서 내가 완전히 하나님께 깨지지 않으면서 내가 겸손해야지. 그런 겸손으로 구원받아야지 이런 애초부터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건 악령의 존재를 무시하는 거에요. 우리 속에 악마의 바이러스를 지금 모독하고 있는 겁니다.


한나는 하나님께서 잉태치 못하게 했어요. 잉태지 못하니까 잉태치 못한 이유가 있어요. 왜냐? 그래야 잉태했다고 우기는 브닌나라는 하나님의 원수가 등장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 땅에 이 땅이 그냥 빈공간이 아니라 지금 주께서 전쟁을 하려고 하잖아요.


주께서 주에게 또는 여호와께서 주에게 전쟁을 하게 한단 말입니다. 전쟁하려면 하나님의 원수가 있어야 되고 원수는 그 실제성이 드러나야 돼요. 그냥 인간들이 사는 세계로서는 끝난 게 아닙니다.


인간들 세계 같으면 인간 대 인간으로 협상하고 회의하고 국제회의 해가지고 좋게 그냥 꾸역꾸역 꾸려나가면 되겠지요. 진정한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나지 않지 않습니까. 없다고 여기죠. 하나님의 원수가 없다고 여기는 것을 하나님의 원수가 있게 하는 거에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세계의 종교인들 다 회의한다 합시다. 천주교, 기독교, 이슬람교 뭐 티벳 불교 또는 그냥 불교, 소성불교, 대성불교, 기독교 모든 종교가 다 합쳐서 원불교까지 다 합쳐서 주요 종교라는 것을 다 모아서 인도의 종교 힌두교까지 와서 회의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세상에 신은 있고 신은 사랑이다 이게 결론이에요. 우리는 전부다 하나의 신의 백성이다. 그거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인간세계에 뭐가 없어요? 원수가 없는 거에요. 악마가 없는 거에요. 악령이 없는 거에요. 여기에 기독교도 가담했다는 사실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천주교도 가입되어 있고.


그러나 하나님은 악마가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악마 본인을 숨기기 위해서 악마가 없다고 자꾸 인간들을 설득시키는 겁니다. 에덴동산에 악마 없었습니까? 악마가 안 들어왔습니까?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만 있고 뱀은 없었습니까? 뱀이 있었잖아요.


이 뱀을 요한계시록 12장은 이걸 옛뱀이라고 해요. 옛뱀. 옛뱀 용이라고 했다 이 말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에덴동산에 누가 들어왔어요? 악마가 들어왔잖아요. 악마가 있다 이 말이죠. 악마가 인간을 지배했고 그 죄가 왕 노릇했고.


다윗의 자손이라는 의미는 다윗은 친히 하나님께서 다윗의 아들로서 이 땅에 나오겠다는 겁니다. 아들 이 땅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을 다윗에게 준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호칭할 때 인자라고 하신 거에요. 이렇게 할 때 그 한나가 예언하면서 나오는 분이 누구냐 하면은 바로 다윗이에요.


그러면 그 한나의 분노와 원통함, 원통하고 억울한 것. 얼마나 기도했으면 술 먹고 기도한 것처럼 보였을까. 그 정도로 분해서 기도하는데 그 분노가 결국 원수를 원수 되게 드러나게 하고 여기서 어떤 전쟁의 분위기로 몰아세우죠. 전쟁하는 분위기.


원래 이스라엘이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과 인간이 전쟁관계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싸우는 관계에요. 신과 인간이. 그런데 인간은 그러고 싶지 않지요. 신과 싸우고 싶지 않고 신에게 잘 보이기를 원할 겁니다.


그러나 이미 인간이 모르고 있는 이 상황,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장악하고 있으니까 인간들은 좋은게 좋게 넘어가는 그런 신, 그런 여호와를 원하겠지요. 실제로 진짜 여호와가 이렇게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 누구의 아들로 왔을 때 인간들은 그분을 어떻게 대우했습니까? 좋게 넘어갔습니까? 죽였습니까? 죽였잖아요.


하나님의 모든 일은 바로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생각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를 하나님이 인간에게 살해당함으로써 모든 면면을 다 드러내겠다는 의도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차근차근하게 십자가로 이어져가는 하나님의 자기 역사를 누가복음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자기만의 고유한 면역체계에 빠져있어요. 본인의 마음에 만족했을 때만 아름답다고 여깁니다. 자기 개인적인 만족에. 그러나 자기가 무너지는 것을 아름답게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러나 복음의 내용에는 자기의 무너짐이 있어야 되고 곧 죽음이 있어야 되고 죽음에서 살려냄의 내용이 포함될 때 그게 복음이 되는 겁니다. 살려냄이 되려면 일단 죽어줘야 돼요. 비참하게 죽어야 되지요. 죽을 때 아플 때 아름다운 아픔이라고 해서 그게 안 아픈게 아니잖아요. 아파요.


하지만 성령을 받게 되면 그것조차도 아름다운 하나님의 뭉개버리는 하나님의 작업인 것을 수용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아까 동영상할 때 했지만 그게 바로 하나님에 대한 찬미가 되는 거에요. 하나님의 성전에서 모든 것이 찬미할 수 있다는 것.


다시 말씀 정리합니다. 이 세상에 비밀이 있는데 그 비밀이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갇혔을 때 요한계시록이라는 그 비밀인데 뜯어낼 수가 없어요. 이게 완전히 이기는데 완료 모든 전쟁이 마감될 때 이겼던 그 상태의 놓여 있을 때나 이 세상의 진정한 모든 비밀은 다 공개가 되면서 알려집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게 공개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이게 실제화된다는 겁니다. ‘실제화’. 어떤 실제화? 말씀이 실제화된다. 말씀은 어디 안의 말씀이다? 바로 하나님의 예언 안에 함축되어 있는 말씀이 펼쳐지게 되면 이게 실제 현실이 되는 겁니다.


사도 요한이 봤는데 예수님께서 악마를 이겨가지고 악마를 이겼으니까 꽁꽁 묶어놨던 이 세상의 실상이 단축되듯이 하나하나 봉인되지요. 한꺼번에 다 열수가 있습니다만은 1,2,3,4,5,6,7로 뗍니다.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하나하나 천사를 보내가지고 이걸 떼어버려요.


떼어버리면 그 갇혀있던 내용이 활개 치면서 바깥에 나오게 되면 그 세계는 어떻게 되느냐? 멸망당해야 하는 세계로 현실화되는 겁니다. 멸망당하는 세계. 신나게 무너져내리는 세계. 신나게 고통받는 세계. 신나게 심판받는 세계. 신나게 저주받는 세계. 이 자체가 주님보시기에 복음, 아름다운 소식이에요. 이게 아름다운 소식.


이런 내용을 성령을 통해서 받은 사람 그것이 요한계시록에서는 바로 성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성도, 또는 교회. 이들은 자기가 죽는 것조차도 아름다와요. 요한계시록에 12장에 보면 자기가 죽는 것조차도 아름다워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하소연하고 그 응답으로서 세상은 또다시 새로운 단추를 떼듯이 봉인되고 봉인되면 준비됐던 멸망을 다 쏟아붓죠. 계속 쏟아붓는 거에요. 종말화시키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마리아가 임신한 예수님의 예언이 마치 하나하나 진척이 되면 될수록 세상은 그냥 세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멸망 될 세상의 풍경, 하나의 그런 광경으로서 펼쳐지는 그러한 현상이 누가복음을 통해서 앞으로 계속 이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게 다윗의 자손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다윗의 자손 누가복음 1장을 다시 보게 되면 다윗의 자손의 위치를 저희에게 주시리니 전쟁하는 하나의 원수를 정복하는 그러한 기능 자리를 그분이 차지하실 것이니. 그 다음에 영원히 다윗의 집에 왕 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야곱의 집이라고 했어요. 집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거주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안 사는데 집이라는 것은 무의미하니까 누가 집에 있다. 그냥 집에 있다하면 안 되고 누구의 집이야? 누가 살고 있어? 이렇게 물어야 이게 집의 의미가 드러나겠지요. 누가 거주하느냐?


여기에 누가 거주하느냐하면 야곱이 거주한다 야곱의 집이란 말입니다. 야곱의 집. 그러면 야곱은 누구십니까 하면 옛날 야곱은 야곱을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언약이 계속 예수 그리스도로 와서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이 됐다는 말은 야곱 언약도 예수님께 완성이 되는 거에요.


그러면 야곱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 야곱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님 안에 있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지 예수님 바깥에 따로 있는 오늘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예수님 자신이 먼저 이스라엘 되고 그 이스라엘 된 속성이 파급되면서 현실에 등장한 것이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게 되면 예수님 자신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나타나고 있어요. 요한복음 1장 그 끝에 보면 나다나엘과 만나는 대목입니다. 그 대목에서 나다나엘이 말하기를 1장 49절에 보면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할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보라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인자 위에 사다리 야곱의 꿈이란 말이죠. 천사들이 왔다갔다 하는 것처럼 이제는 예수님이 바로 야곱이 되고 이스라엘이 되는 거에요.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거 아시죠? 그때 야곱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름이 이스라엘로 붙히면서 살아온 겁니다.


아까 제가 신천지 이야기했는데 신천지 사람들의 심리가 뭐냐 하면 자기가 살기 위해서 어떤 역경이나 어떤 요한계시록의 파멸 가운데에서 본인만이 살기 위해서 부적처럼 쥐고 있고 알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했지요. 그게 신천지를 그렇게 크게 만들었던 겁니다. 나만 살기 위해서.


그러나 그들이 결국 믿는 것은 신천지라는 집단을 믿은 거에요. 집단을. 그러나 성경에서는 신천지 집단을 위해서 성경이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위해서 있느냐 하면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몸이 있어요. 예수님이 만든 이스라엘 바로 이것만이 영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만이 왕이 되기 위해서는 그냥 간 게 아니고 소위 인간이 신천지 교도들처럼 나는 구원받아야 되겠다는 이러한 의도를 전부 뭉개버리는 그러한 절차와 과정을 거쳐서 예수님이 왕노릇 된 거에요.


그러면 예수님을 왕이라고 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이렇게 구원받은 것은 나의 의도가 이렇게 포함된 것이 아닙니다라는 고백을 끄집어낼 수 있는 사람만이 진짜 이스라엘이에요. 내 의도대로 구원되었네 라는 소리를 못하는 거에요. 내 기대한대로 구원됐네 이 소리를 못하는 겁니다.


내가 나를 구원시키기 위해서 내가 천당 가기 위해서 수작을 벌려 버리면 그건 전부다 예수님의 원수가 되어버려요. 내가 참된 이스라엘이냐 아니냐 하는 그 규정은 주님의 왕으로 대언한 뒤에 일방적인 어떤 계획에 의해서 그 다음에 결과로써 주어지는 것이지 미리 예상한다고 해서 그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구원받고자 하는 그것이 죄라는 뜻이고 그게 악마의 정신이다 이 말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구원받기 위해서 성경보고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 오고 그거는 신천지 교도들하고 똑같은 생각이에요. 자기만 살겠다는 부적이라든지 아주 이상한 것 신기한 것 비밀한 어떤 비밀을 내가 쟁취하고 소유함으로서 나는 살았다 이러고 싶은 거에요.


그러니까 그 본성이 뭐냐? 살겠다는 그것이 본성으로 안 뭉개진 거에요. 살겠다. 어떤 식으로? 어떻게? 복음 알아서. 이 자체가 비복음적이에요. 이 자체가 비복음적입니다. 자기는 조금도 안 깨졌거든요. 자기는 여전히 훌륭한 사람 되어버리고 그렇지요.


누가복음 1장 그 대목 다시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장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그렇게 이야기 하니까 35절에서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자기는 자기가 알고 있는 과거가 나오지요.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남자와 동침을 해서 결혼을 해야 합방해서 애기를 낳는다. 이런 과거 내가 알고 있습니다에서 멈추는게 아니에요. 이런 과거. 남자와 여자가 동침을 해야 애기를 낳는다는 이 사실은 결단코 이게 정당한거 맞지요? 라는 생각을 나의 역사로 나는 간직하고 있습니다라는 뜻을 지금 마리아가 천사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35절에 보니까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네게 임하고’. ‘성령이 마리아에게 임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어버리면 너는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그러므로 거룩한 자가 태어나게 된다’ 이 말입니다. 이 말은 천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내가 너한테 일 시킬 때 너하고 사전에 너하고 의논하거나 협의하는 것 없이 일방적으로 했다 이 말이에요.


그것이 바로 예언의 진품이고 예언이 이 땅에 올 때 그런 방식으로 와야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악한 세상이기 때문에 의논대상이 안돼요. 협의대상이 안된다고요. 너희들의 의견은 무엇이냐 이런거 물을 이유도 없어요.


그냥 막 침투하고 막 공격하고 막 쳐들어오는 거에요. 전쟁이라는게 원래 그래요. 신사적인 전쟁 없습니다. 한쪽이 한쪽을 적으로 보는데 무슨 거기 상대방을 존경하겠습니까. 존경 없어요. 원수인데 뭘. 말살될 대상인데 무슨 존경을 합니까. 전쟁하러 오는데요.


잉태치 못하는 것을 계속 강조하는데 잉태치 못하는 것은 육에 속했다는 단지 그 상황 자체가 하나의 원수되는데 충분한 조건이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육에 속했다는 그 자체가. 육에 속한 것을 그것을 정당화하거나 뭐 어쩔 수 없습니다라고 그런 변명하지 말라는 거에요.


육에 속했기 때문에 육적인 생각을 하는 것을 마치 잘못한게 아닌 것처럼 여기지 말라는 거에요. 하나님의 예언은 우리 육에다가 완전히 긁어지나가 버립니다. 물론 예언이 긁어진다는 그 자국이 뭐냐? 내 자국이 아니고 십자가 지셨다는 자국을 우리 안에 남기는 거에요.


따라서 예언이 들어왔다는 말은 우리 성도 안에 이 세상이 멸망할 흔적과 자국이 들어있다는 뜻이죠. 멸망하는 것이 들어있다라는 데에 멈추는게 아니고 멸망되야 마땅하다라는 그 증거를 성도만이 그것을 표현할 수가 있고 발현됩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그 예언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결과로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 자신만이 야곱이고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모집된 부름 받은 택함 받은 자의 집단만이 새로운 이스라엘을 형성하는 겁니다.


그리고 3절 다시 보게 되면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이르게 되어 있으니까 이 말은 성령이 임하지 않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없으면 이거는 때려 죽어도 골백번 다시 죽고 태어나도 그거는 절대로 이 비밀을 알 길이 없다는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면서 이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이걸 알기 위해서 우리가 성령오기를 기다려야 됩니까? 라고 저한테 질문을 한다면 성령이 오기를 기다리는 자격이 우리한테는 없어요. 기다려봤자 소용 없고.


성령이 오게 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데 이 결과가 무엇을 우리에게 알려주느냐 하면은 적어도 우리의 육적인 본성에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겁니다. 어제 대구 강의에서도 했지만 두 개의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는 사람, 다 들을 수 있는 사람.


그 소리 다 들을 수 있고 그리고 그 차이를 아는 사람만이 이게 성도답고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마리아 같은 경우에는 다 알아요. 자식을 낳으려면 남자와 동침해야 된다는 사실을. 남자와 동침=자식. 이것도 알고 있고 무엇도 아느냐 하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능력으로 임신 가능함. 이 둘 다 이게 예언의 능력, 이 둘 다를 다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마리아가 되고 성도가 된 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어느 것이 우세하냐? 당연히 주의 능력이 우세하지요. 왜? 원수를 이겼으니까요. 하지만 인간의 능력으로 봐서는 인간의 자력으로 봐서는 우리는 이 능력을 이길 수가 없어요. 육의 죄의 힘이 더 센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에 보게 되면 나에게 선을 원하지만 선보다 악이 더 우세하다는 말을 사도바울이 성령 받은 사도바울이 두 가지 소리를 다 듣고 있으니까 알고 사실을 아니까 이야기 하고 곤고하다 해놓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내가 찬양한다. 기뻐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과 인간의 실상을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비로소 알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리아에게 임했던 것이 이게 거짓말이 아니고 이게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고 진실이라면 이런 성령의 진실됨과 세례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되고 있음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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