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2장 9절 (죄의 증상) 200505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2장 8절.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함축된 개념들이 연이어서 계속해서 연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 세계에서 사용하지 않는 개념들이 등장하는데요. 그걸 한번 이렇게 적어보겠어요. 8절에서 보게 되면 ‘천사’. 천사 등장하지요. 그 다음에 주의 영광, 광채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다음에 기쁨의 큰 소식. ‘기쁨의 소식’ 이 단어.
또 등장하는 것은 다윗의 동네. 다윗 옛날 사람이잖아요. 죽은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다윗의 동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구주’. 구주 등장하고 그 다음에 등장하는게 뭐냐 하면 “그리스도 주시니라”. 일반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 통용되지 않는 개념들이 조합을 이루어서 이런 몇가지 문장들로 이렇게 연결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런 단어들 하나를 만약에 그 의미를 모르고 누락시킨다든지 그냥 건너뛰어버리면 이 전체 문장이 이해가 되지를 않는 겁니다. 딱 짜임새 있게 적재적소에 필요한 단어를 박아놨기 때문에 뭐 이거 하나 모르고 넘어가지 이러면 전체가 전부다 왜곡될 수밖에 없어요.
오늘 이것을 8절부터 11절까지 설명하면서 이 개념 하나하나를 다 이렇게 부각되도록 도드라 지게 나타나려고 하게 되면 결론부터 먼저 알면 되겠지요. 결론부터. 도대체 이러한 단어의 조합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느냐? 뭐를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이런 단어조합이 꼭 필수적으로 있어야 되는가? 그것은 이겁니다.
새로운 소속을 제공하는 겁니다. ‘새로운 소속’. 소속이라는 말은 여러분 아시지요. 내가 어디에 포함되어 있다. 새로운 신분을 받는다 뭐 그런 뜻인데 새로운 소속인데 그 새로운 소속을 제공받습니다. 누가 받느냐 하면 여기 나오는 목자, 목자라는 사람은 양치는 사람이죠.
양치는 사람이 천사를 만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어떻게 됐단 말입니까? 그 양치는 사람이 새로운 신분, 새로운 소속을 부여받게 되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일단은 쉽게 가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새롭다는 것은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느냐? 새롭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게 되면 다르다가 돼요. 새롭다는 말은 다르다는 뜻이에요.
다른 질서, 다른 체제, 다른 원칙 또는 원리 또는 원칙. 합쳐서 다른 세계. 이 다른, 다른, 다른 세계가 새로움을 구성하면서 그 새로운 세계에 여기에 소속되는 것. 새로운 세계. 처음부터 다시. 왜냐하면 시간을 제가 어겼기 때문에. 다시 합시다.
여기 누가복음 2장 8절에서 11절까지 이 내용 가운데서 일반 인간세계에서는 통용될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단어들로 조합을 이뤘다 했지요. 그 조합을 이뤘을 때 왜 그래야 되는가? 인간들이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는데 왜 그래야 하는가? 그건 새로운 소속을 제공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새로운 소속을.
그럼 새로운 소속을 제공받는 사람은 여기서 받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은 목자입니다. 목자는 그 들판에서 양치는 사람이었어요. 제가 그 들판을 가봤잖아요. 벌써 몇 번째 제가 욕 많이 얻어먹는데. 비행기 타고 그 목자의 들판을 갔어요. 그리스도 정교 지나 예배당도 있고요.
목자, 들판. 그 양치는 들판의 목자들이 새로운 소속을 제공받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하나 단어가 새로 나와요. 새롭다는 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은 다른 질서, 다른 체제, 다른 원칙, 다른 원리, 다른 세상 뭐 다른 세계. 이게 새로움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여기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기존에서 새롭다 다르다 이것을 기존의 인간세계에서의 갖고 있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느냐? 그게 다른 단어로 의외, 예상 밖. 이걸 ‘우연’. 이걸 함축하면 ‘사건’. 우연적인 사건. 내가 예단하고 예상 못한 새로운 사건의 마주침, ‘만남’.
만남이죠. E.T 영화에 보면 외계인이 손가락 가지고 애하고 손가락 마주치는게 있지요. 그게 미켈란젤로가 그렸던 성 베드로 성당에 있는 그림. 하나님께서 할아버지처럼 나타나고 아담은 누워 있는데 손가락 내미는 유명한 그림이 있지요. 그거 본다고 내 모가지 아팠어요. 그처럼 천지창조에 관한 그런 이야기인데. 천지창조 인간의 창조는 뭐로 이루어진다?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거에요. ‘만남’.
만남을 오늘 누가복음에서는 뭐로 보느냐 하면 타자의 등장 또는 타인, 남. ‘타자의 등장’. 내가 기존에 속해있지 않은 다른 타자의 등장으로 마치 천지창조하듯이 새로운 세계가 침투한 거죠. 침노했다, 침투했다, 공격했다 전부다 같은 말입니다.
새로운 신분을 제공할 때에 여기에 새로운 신분을 제공한 그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은 바로 아까 쭉 나열한 단어 중에서 거기에 8절에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9절에 누가 나옵니까? 주의 사자 천사가 등장하죠. ‘천사’. 천사는 인간들이 사는 범주나 범위, 인간의 인식의 범위 안에는 천사가 없어요. 천사가 없습니다.
천사가 없으면 누구도 없게요? 악마도 없지요. 천사 없고 악마 없어요. 인간들이 그러면 천사라는 그런 상상할 수 있지 않겠는가? 천사. 악마를 상상할 수 있지요. 그러나 천사를 상상하고 악마를 상상하는 것과 실제로 있는 것하고는 이거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에요. 상상이야 뭔들 못해요.
신은 있습니까? 상상한 거에요? 질문을 너무 과격하게 질문했나. 신은 상상한 거에요. 신이 있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누가 있다는 뜻이에요? 인간이 있다 내가 있다는 뜻이에요. 내가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있기에 나에게 일어난 여러 가지 곤란한 질문, 그리고 난처한 질문에 대한 유일한 통합되는 해결책으로 한꺼번에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이 뭐냐 하면 신이라는 개념입니다. 하나님이라는 개념이에요.
하나님 개념 있어가지고 누구 좋아라고? 내가 마음 편하게 살기 위해서 신이라는 것을 설정해 놓고 그 신에 대해서 모든 것 구차하거나 어려울 때나 계속해서 묻거나 요구하고 기도라는 이름으로 계속 주고받는 거에요.
마치 돌멩이가지고 하늘에 돌 던지면 그 돌이 도로 어디로 떨어집니까? 본인한테 떨어지죠? 내가 질문하고 답변은 누구한테 얻고? 내가 알아서 정리하는 겁니다. 신이라 하는 것은 그냥 자루, 보릿자루처럼 그냥 가만 계시면 돼요. 가만 계시고 내가 아쉬운 모든 것을 내가 하면 된단 말이죠.
그렇게 신이 있다는 것, 신이 있다는 것은 인간세계에서 뭘 이야기해주느냐 하면 나에게 있어서 타인이라는 것, 타자, 남. 남이라고 하는 것은 보릿자루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서로 사랑한다 죽고 못 살 때는 난리더니만 뭐 죽고 못 살고 서로 좋아한다. 서로가 서로를 착각한 거에요. 서로가 서로를 착각했다고요.
나중에 바람피우고 난 뒤에는 준영이. 준영이가 누구인지 우리 집에 데려와 네 집에 데려가 이사 오고 난리잖아요. 부부의 세계. 남이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설정, 내가 필요에 의해서 설정한 거에요. 그 남 중의 일부가 뭐냐? 신이라는 겁니다. 천사라는 거에요. 신, 천사, 부처 모든 종교라는게 다 그런 거에요. 나 좋아라고 있는 겁니다. 나 좋아라고.
그러니까 이미 신을 거론하든 부처를 거론하든 뭘 거론하든 나의 소속은 익히 내가 아는 익히 아는 내가 구축한 내 세계는 꿈쩍도 안 해요. 변동이 없다 이 말이죠. 나 좋아라고 믿는 거에요. 나 좋아라고. 우리 집구석 좋아라고 교회 다니고 하는 거에요. 나 좋아라고. 나 죽어서 천당 가라고. 다 나를 위해서 교회가 있고 성당이 있고 다 있는 겁니다.
이거는 그냥 신이라 하는 것은 내가 남들을 할 때 남한테 엎어지지 않는 것처럼 신에게도 마찬가지에요. 신은 이용 대상이지 내가 거기에 엎어질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신을 믿고 교회 나가고 그럴 수밖에 없느냐 하면 계속해서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자평하기 때문에 그래요.
평생을 매일같이 살면서 계속해서 자기를 평가하고 측정해요. 내가 지금 어느 정도 수준이냐? 이 정도하면 내가 잘 살았다 할 수 있느냐? 그러니까 힘들어도 얼추 견디고 버틸만하다고 일방적으로 자기에게 자평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이 길을 건널 때 여러분이 길을 건널 때 반대편에서 오는 것도 봐야 되지 않습니까. 반대편에서. 목을 이렇게 들고 길을 건너는데 이쪽에서 크로스하는데 저쪽에서 차가 오는가 보면서 차가 안 온다고 생각하고 그냥 건너버리면 내가 보지 못한 곳에서 차가 들이닥치면 완전히 박치기하지요. 죽는 겁니다.
우리가 예상하는 반대편에서 내가 타인을 설정해서 그 타인을 내가 원하는 신이고 예수고 뭐도 마찬가지에요. 삼위일체고 뭐고 내 필요를 위해서 했는데 내가 놓쳐버린 것, 내가 미리 생각하지 못한 것, 내가 설정한 내 범주, ‘나’라는 자아의 범주에 바깥에서 갑자기 반대편에서 차가 온다면 박치기하겠지요?
그 박치기가 누가복음 8장입니다. 여기에서 목자가 천사를 요청한게 아닙니다. 그렇지요? 인간들은 자기를 자평할 때 항상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면 이런 생각을 해요. 자기 인생을 늘 매일같이 평하면서 글로 쓸께요. 뭡니까? 나름 선방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나름 선방했다.
이 정도 같으면 버티고 견딜만 하다고 스스로 자위하는 거에요. 자평할 때 그냥 객관적으로 하는게 아니에요. 주관적으로 견뎌볼 때까지 한번 견뎌보겠다고 아주 용을 쓰면서 인내를 하면서 자기 인생에서 나중에 자기가 내린 결론은 뭐냐? 이 정도 인생 같으면 내가 선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되거든요.
그동안 이런 선방하기까지 얼마나 교회 가서 기도를 많이 하고 헌금도 많이 했겠습니까? 얼추 내가 이 정도로 자신에 대해서 관리를 잘했기 때문에 이 정도 버티고 산다고 생각하는데 그 소속이 누구 소속이냐 하면 천사 만나기 전에 목자의 상태입니다. 이게 목자의 상태에요.
목자나 오늘날 우리나 그걸 다 직업군이에요.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목자는 지금 집에 도 닦고있는게 아니에요. 기도원에서 기도하고 있는게 아닙니다. 뭐하고 있어요? 그냥 자기일하고 있지요? 밤에 아르바이트하는 거 같아요. 밤 근무, 야근하고 있는 겁니다.
야근하고 있는데 그러면 야근할 때 왜 사람은 일합니까? 자기 인생 선방해야지요. 견딜 때까지 견뎌봐야지요. 익히 아는 내 질서, 내 세계, 내 체계, 내 체계 같은데서 내가 버티고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제가 아까 새로운 소속할 때 새로움이 뭐라고 했습니까? 새로움은 다름, 다르다고 했지요. 다른 체계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다른 체계’.
지금 이 체계가 무슨 체계입니까? 자본주의 사회지요. 자본주의 사회는 대구 강의할 때 언급을 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네트워크가 돈에 의해서 이미 질서가 잡혀있어요. 돈 되는 것만 반짝 반짝 불이 오고 돈 안 되면 불이 꺼지는 거에요. 돈이 되는 유투브는 이렇게 등장하고 하다가 돈 안 되면 유투브가 날라가버리는 겁니다.
그 돈 되는 지점에서 나를 호출했을 때 그걸 호명이라고 하는데 호명 또는 호출했을 때 나는 살아있는게 되는 겁니다. 돈 되는 것과 관련성 있으면 살아있는게 되고 사표내고 집구석 앉아 있으면 그거는 죽어있는 거에요. 누가 뭐래도 나 숨 쉬고 있다 나 폐활량 이 정도다. 아 소용없습니다. 나 혈압 있다 맥박 이거 인정 안 해줘요.
세상에서 인정하는 것은 지금 너는 돈과 관련되어 있느냐 그걸 묻는 겁니다. 그 체계가 바로 자본주의 사회고 모든 229억이 모두 자본주의 사회에요. 그러면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목자는 왜 일합니까? 아 나는 양이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어. 양을 돌보고 싶어서. 이래서 지금 목자가 양치는 겁니까? 뭐 양 못 쳐서 환장한 일 있습니까? 뭘 얻기 위해서 하는 겁니까? 돈 벌기 위해서 하고 일하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자, 인간은 일을 왜 하느냐 하면 아까 이야기했지요. 나름대로 자기 인생을 선방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이 정도 인생 같으면 견딜만하다라고 자기 인생을 늘 자평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일을 하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여기서 목자가 천사를 만날 하등의 접촉될 근거와 이유는 조건은 목자 쪽에서는 제시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우연이라고 해요.
인간 쪽에서 조건을 걸고 제시하는 것은 필연이에요. 기도하면 응답이다. 이건 우연이 아닙니다. 이거는 자기가 상상한 거에요. 기도하면 응답받을 것이다. 이건 상상한 거고. 자기가 뭔가 몸부림쳐보는 겁니다. 안되더라도 뭔가 쑤셔보는 거에요 그냥. 상상의 하나님 가짜 하나님한테 그냥 빌고 하는 거에요. 그러나 그렇게 해봐야 자기 소속은 달라지겠어요? 안 달라지겠어요? 소속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자, 강의 처음부터 정리하게 되면 천사가 우연히 찾아온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함이다? 목자의 소속을 바꾸기 위해서다. 기존의 네가 알고 있는 질서와 세계관이 다른 세계의 사람으로 소속을 바꾸기 위해서 천사가 오신 겁니다. 천사가 온 거에요. 그리고 천사가 오는 것을 예상했다? 예상하지 않았다? 예상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건 우연이 되고 우연이 될 때는 이게 사건이 되는 거에요.
사건의 특징은 아무리 존재감을 가지고 나올 수 없는게 사건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건은 존재를 부수는 거에요. 사건이 터져버리면 내 존재는 거기서 의식되지를 못하게 되는 겁니다. 김수희가 불렀던 노래에 이런게 있지요. 애모라는 노래에 보면 이게 있어요. “나 당신 등 뒤에 있을래. 나 그대 앞에 서게 되면” 갑자기 왜? 갑자기 작아지지요.
이거는 작아진다는 말은 키가 갑자기 빠졌다는 말이 아니고 예상 못할 사건에 의해서 타인의 등장입니다. 예상 못한 타인의 등장에 의해서 그동안 비교되는 타인으로 말미암아 내가 축소되는 물리적인 키가 작아지는게 아니고 ‘나’라고 하는 내 의식이 축소되는 것을 의미하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당신만 있다면 나는 지금 죽어도 좋아. 이걸 김수희는 이야기한 겁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소멸시킴으로 오는 그 쾌감, 그 즐거움, 그 희열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사랑의 희열은 내가 있으면 그 사랑의 희열이 방해 받아요. 나같은 건 없어요. 당신만 잘 된다면 더는 소원 없습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뭐 사랑을 해봐야 알지. 사랑해본 적이 없지요. 그냥 감만 보다가 살던지 감만 보다가 헤어지든지 자기걸로 끄잡아당길려고 애를 쓰지 뭐.
순간적으로 뿅 하고 가는 그런 사랑은요 이게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기 때문에 잠시 사건이라 하는 것은 오래 가지를 않아요. 퍽! 폭죽 터지듯이 퍽! 옛날 그 카메라 촬영할 때 마그네슘 터질 때 퍽 하고 터트리고 그 다음 없어지잖아요. 그처럼 한순간이에요. 한순간.
그래서 지금 이 강의에서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우연한 사건 앞에서 ‘나’라는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거 유지. 그거 유지가 바로 이 땅에 살면서도 다른 세계에 소속됐다는 징후라고 이야기해요. 징후, 징조, 증상. 이거는 정신과에서 그런 단어를 많이 써요. 정신과라든지 아니면 보통 일반 병원에서도. 징후, 증상. 징후, 증상 이렇게 하지요.
예를 들면 제가 기침을 이렇게 한다면 침이 침방울이 튀기죠. 침방울 하나하나가 나에게서는 나왔지만 내 것입니까? 내 것 아닙니까? 침 튀는 하나하나 내 것 같으면 내가 12개 20개 100개 되잖아요. 그게 나는 아니다 이 말이죠. 나는 아니죠. 너무 어려워서 이해 안 됩니까?
내 몸은 하나인데 기침을 하게 되면 재채기하게 되면 침이 튀잖아요. 그럼 침방울이 한 1000개라 합시다. 내가 졸지에 1000개 되는건 아니지요. 1000개 되는건 아니지요. 그때 의사 선생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감기 들리셨군요 라고 증상을 이야기하지요. 증상이 내가 없으면 증상이 안 나타나는건 맞아요. 하지만 증상은 나입니까? 나 아닙니까? 내게서 나왔지만 나는 아니지요. 그거는 뭐냐 하면은 감기증상이죠. 감기. 감기다 이 말이죠.
감기 걸린 사건이 일어난 거에요. 머리 나빠도 이 정도는 이해될 거에요. 지금 뭐가 문제냐 하면 교회에서 하나님 믿으면 하나님 내 것 되잖아요. 예수 내 것이지요. 이게 엉터리라고 말씀드리는 거에요 제가. 이거는 하나님, 예수, 부처 이 모든 것 누구 좋으라고? 내 존재 내 편리와 내 인생 하나 선방하기 위해서 아쉬운 것 빌라고 간 거에요. 복 받을라고 간 거에요.
그런데 증상이라는 감기 들라고 기도 얼마나 했어요? 감기 들라고. 제발 신종코로나 걸리라고. 기도했어요? 안했어요? 감기 들라고 한적 없지요? 그런데 날씨 추워지면 기침 나지요? 침방울 튀지요? 침방울 튀는게 자기 주특기 아니잖아요. 갑자기 하잖아요. 갑자기.
사랑은 재채기란 말이에요 제 말은. 사랑은 재채기고 이거는 하나의 사랑이라는게 없어요. 사랑은 증상으로만 나타난다 이 말이죠. 어떤 증상?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증상.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증상. 기도하고 헌금하고 교회 충성하고 봉사하고 목사 섬기고 하는게 전부다 다 헛짓이라는 것.
그게 다 아무짝도 없는 내가 내 이익을 위해서 이기주의 사고방식에 불구하다는 것이 들통나는 증상, 징후. 종교라는 것도 그런 거에요. 교회 다니는 것도 그렇고. 아무짝도 소용없는 것을 갑갑해서 해보는 거에요. 그냥 해본 거에요 그냥. 교회 가본 거고. 예배 드려본 거에요. 무슨 수 있나 싶어서. 죽으면 천당가나싶어서 해보는 거에요.
그거는 출발점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나의 이익에서 나오지요. 나의 이익. 그 나의 이익의 체계가 아까 다른 체계라고 했는데 기존 인간의 체계가 뭐냐 하면은 아까 자본주의라고 했지요. 자본주의는 미래의 이익을 추구하는 체제에요. 미래의 이익을. 그럼 자본주의 이전에는 뭡니까? 물물교환이죠. 형님먼저 아우먼저 농심라면 정신이잖아요. 밤중에 동생주고 형주고 농심라면 나오는 그 사례가 그거 아닙니까. 전설이. 서로서로 사는 거에요.
그러나 자본주의는 서로서로가 안돼요. 누가 누구 것을 약탈해야 되고 착취해야 내가 살아요. 주식투자가 그런거고 도박판이 그런 거에요. 가계 10군데가 있으면 9군데가 죽어줘야 내가 산다니까. 나와 내 가족이 살아요. 그걸 쉽게 말해서 경쟁사회라고 하는데 경쟁사회에서 양보라 하는 것은 양보는 미덕이 아닙니다.
양보는 패배를 의미하지 그걸 좋게 꾸미지 마세요. 져 놓고 뭐 내가 양보해줄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그냥 지는 거에요. 이세상은 오디션 세계입니다. 계속 오디션 결승 준결승 나는 세계에요. 그 세계에서 목자가 지금 나름대로의 하청업자지만 하청인이지만 나름대로의 자기 인생을 마음 푹 낮춰가지고 그래도 나름대로 스스로 자평하기를 남 말고 스스로 자평하기를 선방하자. 그래서 밤중에 양 치러 일하러 나간 거에요.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잘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천사가 왔지요. 천사가 오는 것은 네가 기존의 세계와 기존의 질서 속에서 너무 힘들게 살았다는 거에요. 이제는 소속을 천국의 백성으로 바꾸어 주기 위해서 천사가 나타난 겁니다. 그걸 천사가 나타난 것을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이죠.
자, 사랑은 재채기 사랑은 이거는 내가 예상 못한 순간적으로 엣취 하고 나온 것. 내가 내 쪽에서 취소시킬 수가 없어요. 내 쪽에서 미리 발목을 잡을 수가 없어요. 천사가 왔는데 나 천사 안 봐. 이럴 수 없다 목자가. 밤중에 천사가 왔으면. 천사가 나타났으면 그 천사 앞에서 자기는 지극히 그동안 자기가 선방했던 인생은 졸지에 아무것도 아닌게 되지요.
그걸 가지고 여기에 9절에서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목자가 나타난 어떤 모습을 보였지요. 9절 마지막에 어떤 모습을 보였습니까? 크게 그 다음에 뭡니까? 무서워 그 다음에 뭡니까? 무서워한지라. 무서워했다고 되어있지요.
이거는 내가 원했던 타이밍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내가 미리 내가 기대한 손님이 아니란 말이죠. 띵동 하고 문 여니까 문 열기 전에 미리 택배기사가 왔는지 누가 왔는지 화면에서 보고 대화를 하잖아요. 우리집도 그런게 있는데 고장났어요. 고장나서 고쳐지지도 않는데 미리 본단 말이죠. 왜? 무서움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저게 도둑인지 나에게 이익을 줄 사람인지 손실을 줄 사람인지. 그걸 미리 알고 이익인지 손실인지. 알아주기 위해서 왔단 말이죠. 그럼 왜 오셨습니까? 도를 믿으세요 이러면 문 열어줄 이유가 없지요. 하나님은 어머니이십니다 이러면 안 열어주지요. 여호와의 증인 오면 안되지요.
그런데 그럴 수 없이 문, 내가 있는 내가 평소에 살아가면서 내가 형성된 나의 아우라 또는 내 영역 여기서 여기까지는 자아의 필드, 나의 자아의 장이라고 쳐져 있는 어떤 범위가 있어요. 범주가 있다고요 인간은. 여러분들이 홍삼 선전할 때 보면 홍삼이 무슨 홍삼이더라? 유명한 홍삼 뭐죠?
정관장 홍삼 선전 보면 사람마다 뭔가 동그라미 캡슐 안에 들어있는거 있을 거에요. 이게 필드, 장이거든요. ‘나’라는 것이 내 몸뚱아리만 ‘나’가 아니에요. 내가 아는 사람, 내 전화번호에 기입된 사람들 그 영역이 그게 내가 영향력을 내가 임팩트를 주는 영역, 그게 나의 영역이에요. ‘나의 영역’. 이 영역에서의 특징은 뭐냐?
무서움이 전혀 없어요. 왜? 내 관리대상이니까. 내가 알아서 이건 친구 안 할 사람, 이건 친구했는데 그만 둘 사람, 이건 친구 허용할 사람. 이렇게 자기관리에 쭉쭉 들어간단 말이에요. 그런데 무섭지가 않아요. 그런데 갑자기 쳐들어온 거에요. 그럼 뭐가 찢어진 거에요? 캡슐이 찢어진 거에요. 이게 사건의 증상입니다. ‘징후’ 또는 ‘사건의 증상’.
자, 그렇다면 내가 관리하는 나의 영역 안에서 여러 가지 남들이 타인들이 있을거 아닙니까. 전부 이미지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을 때에 나와 친구들 사이에 또는 나와 내 자식들 나와 내 남편 내 아내 사이에 뭐가 주고받느냐 하면 타인은 나에게 뭘 보내느냐 하면 시선을 보내고 나는 그들에게 그 신에 대해서 응답을 하는 식으로 나의 영역을 유지하는 겁니다.
타인이 나에게 뭐냐 하면은 적어도 너 정도라면 이 정도는 해줘야지 라고 요구사항이 있어요. 요구하는게 있고 나는 그 요구에 부응해야 될 책임감을 가지고 우리는 ‘나’라는 세계를 형성하는 겁니다. 아버지가 있다가 딸이 밤 12시에 들어오니까 “다 큰 애가 적어도 9시 이전에 들어와야 될 그런 의무가 있잖아.” 라는 뜻이에요.
일찍 안 들어오고 뭐하고 있지. 왜 이제 들어와 일찍 들어와 하는 것은. 그럼 딸이 하는 말은 “아버지 미안해요.” 무슨 뜻이에요? 나는 아버지 잃기 싫어요. 나는 아버지를 남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라는 뜻이에요 그게. 그래야 그 딸이 아직까지 자기 생활비 벌기까지는 무전취식이 가능하거든요. 아니 7살 먹은 애가 짜장면 먹는데 엄마가 돈 받았어요? 안 받았어요?
돈 안 받았지요. 왜? 아직까지 무전취식은 아직까지 용납을 해줘요. 나이 서른 넘으면 내쫓아 버려요. 내쫓는다는 말은 내 영역에서 네가 부담이 된다는 겁니다. 네가. 아침에 일어나서 아무것도 안하고 집구석에 누워있으면 그거 보기만 해도 내가 구상한 어느 정도 선방한 인생에 대해서 이 하나의 흠집이 생겨버리면 저거 빨리 남자가 와가지고 데리고 안가나. 치웠으면 좋겠다. 쓰레기 치우듯이 좀 치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부모님도 이렇게 빌빌거리면 참 이런 말하면 안 되지만 좀 살만큼 살았으면 좀 알아서 가주세요. 김정은도 안 죽고 이것도 안 죽고 둘 중에 누구 하나 죽었으면 좀 치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죠. 이게 응답하고 보는게 있어요. 그래서 거기에서 형성되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그걸 가지고 이걸 ‘주체’라고 하는 겁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주변에 나한테 요구하는 것과 그 사람이 책임을 주는 가운데서 ‘나’라는 것이 형성되는 겁니다. 그래서 가정교육을 잘 받아야 된다는 말이 그 말이에요. 요구하는 레벨이 낮을 때는 남들은 개판되어 버리는 거에요.
그런데 여기 오늘 본문에서 갑자기 이 캡슐이 찢어졌어요. 찢어져버렸어요. 이거는 내가 원치 않은 타인의 등장입니다. 타인의 등장이에요. 상당히 침략당하고 침노한 겁니다. 무서워 떨었습니다. 그런데 무서운데 10절에 보니까 천사가 하는 말이 무섭다고 이야기했지만 오늘 강의의 핵심 부분에 들어갑니다. 어려워요.
목자들은 분명히 무서워했습니다. 예상 밖의 일이니까. 자기의 자아의 장이 찢어졌으니까. 했는데 10절에서 천사가 하는 이야기가 그 사건을 뭐라고 규정하느냐 하면은 큰 기쁨의 무슨 소식이라고 되어 있습니까?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이게. 사람 겁나게 만들어 놓고 천사가 규정하기를 뭐라고 되어 있어요? 기쁨의 좋은 소식이래요.
왜 인식이 이렇게 차이 나는 거죠? 사람 간 떨어지게 만들어 놓고 왜 자기는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하느냐? 그것은 바로 이겁니다. 여기서 단편적인 정답을 미리 말씀드리면 심판을 즐겨라. 보통 즐길 때는 기분 좋을 때는 즐기는 거죠. 기분 좋을 때는. 그런데 심판과 즐기다가 이 즐기다라는 상황이 매치가 돼요? 안돼요? 매치가 안 되지요.
왜냐하면 심판한다는 것은 몽둥이 들고 온다는 뜻이거든요. 회초리 들고 아들아 너 이 회초리 즐겨라. 말이 안 되잖아요. 나를 치는데. 나를 치면서 어떻게 즐길 수가 있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평소에는 누가 나를 심판했다? 안했다? 심판 안하지요.
심판 안하고 뭘 하느냐? 변명했죠. 핑계 댔잖아요. 왜? 내 필드 안에 타인이 자꾸 요구를 하니까 나는 계속해서 친구하고 놀다보니까 11시 늦어서왔습니다. 아빠 앞으로 9시까지 올게요. 그럼 아빠가 하는 말이 네가 그런 소리 하는 것이 벌써 이번달만 해도 5번이다 이렇게 나오겠지요? 하지만 계속 변명하고 핑계 대는 것은 뭐냐 하면은 아버지가 주어지는 부모가 주어지는 심판을 자체적으로 완화시키게 한 자기 면역체계가 가동되는 겁니다. 철통같은 자기 방어체제.
이걸 사드라고 이야기해요. ‘사드’. 아버지의 은총을 그걸 계속해서 귀여움을 이용해서 내것을 따로 챙기고 포기 안하겠다는 자기 위주의 방어체제가 가동되는 겁니다. 줄거 주고 받을거 받되 반드시 플러스 마이너스 나한테 남는게 있어야 돼요. 줄거 주고 다 줘버리면 안된다 이 말이죠.
제가 아는 이야기인데요 아버지가 키워줄 때 그 아버지 하는 말이 공부시켜주고 시집보내줬으면 이제부터 제가 아버지께 용돈 50만원 드리겠습니다. 분명히 문서화는 안했지만 몇번이고 다짐을 했다고요. 그런데 그 딸이 시집가고 난 뒤에 입 닫아버려. 없어요. 없습니다. 없어요. 그러다가 자기 애 생기니까 엄마 애 하나 잘 키워주게 되면 내가 노년을 모시겠습니다. 또 이렇게 나왔어요.
그래서 인간은 항상 거래에 나서는데 줄거 줄거 거래하되 항상 어느 이윤같은 것은 나한테 떨어져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바보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거에요. 나한테 손해 돼. 의리, 의리, 의리. 의리같은 소리하다 다 부도나고 말아먹지. 의리는 필요 없어요. 인간에게는 의리라는게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 내가 십일조할테니까 30배 60배 100배 주시옵소서.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그것 때문에 교회 가잖아요. 평소에 행세 교회 간다고 안변합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 교회 간다고 그게 안 샐까요? 새지요. 왜 그럼 교회 가느냐? 핑계거리. 진짜 하나님 만나면 변명과 핑계거리 나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고 자기를 방어하는 그 방어수를 계속 발휘하기 위해서 그렇게 그런 위선적인 행동을 하는 거에요.
그런데 여기 보면 심판을 즐겨라 되어 있는 거에요. 심판을 즐겨라. 심판을 즐기려면 인식이 완전히 바뀌어져야 돼요. 뭐냐 하면은 심판을 뭐로 봐야되느냐 하면 이걸 사랑으로 봐야 돼요. 이게 오늘 강의 제일 중요한 대목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때린다는 것을 이게 소속이 바뀌기 위한 필요한 절차에 하나님께서 나를 집어넣었다고 보는 거에요. 때려주는 거에요. 물론 사랑이 올 때는 이걸 때린다는 것을 모르죠. 그냥 그대 앞에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이게 슬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너무 좋아서 하는 이야기거든요. 다시 말해서 나는 당신 앞에서 작아져도 저는 괜찮아요. 괜찮다는 거에요.
어떤 트롯트 가수가 너무 좋을 때는 자기보다 한참 나이가 어른 트롯트 가수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오빠 이런다고요. 영웅이 오빠 이런다고요. 나이 60된 아줌마가 영웅이 오빠. 심지어 어떤 40대는 너무 심하게 동원이 오빠. 12살 먹은 애 보고.
이게 뭐냐 하면은 나는 네가 너무 좋아서 비타민 같아서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더 이상 내가 나한테 자평하는 것을 중지하겠다는 겁니다. 내가 나에 대해서 자평하는 것을 내가 측정하는 것을 내가 네 앞에서는 내가 중지해버리겠다는 거에요. 중지해버리면 자기는 뭐냐? 고정화되겠지요. 하나의 고정화. 딱 정지 스탑이 되겠지요.
그럼 뭐냐 하면 바로 사랑 앞에서 나는 스톱이 되면서 이대로 이렇게~ 이대로 그냥 죽어도 좋아요 돼요. 죽어도 좋아요. 이게 이제 보통 우리 인간세계에서 사랑이 오게 되면 이렇게 되거든요. 그냥 이대로 같이 죽자. 이대로 같이 물에 빠져죽든지 절벽에 떨어져죽어도 나는 상관없어요. 당신만 있다면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이럴 때는 증상, 징후지요. 그런데 이건 인간세계에서는 우리가 예상이 돼요. 같은 인간끼리 남녀가 사랑할 때는 이런 사랑을 경험해봤기 때문에 우리는 예상이 되는데 실제로 천사가 사는 그 세계와 더러운 인간이 사는 이 세계가 마주칠 때는 그 증상이 우리가 아는 사랑이 아니고 뭐로 오느냐 하면은 바로 심판으로 온단 말이죠. 무서움으로 와요. 무서움으로. 무서움으로 온다고요.
그 말은 여기에 11절에 봅시다.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구주는 구세주입니다. 구원자. 다윗의 동네에 온 구세주는 그걸 가지고 다윗 언약이라 이렇게 해요. 다윗 언약. 언약 여러분 언약 아시지요? 노아가 방주 만드는 것은 무슨 언약? 노아 언약. 아브라함이 희생제물 바치는 것은 자기 아들 바치는 것은 무슨 언약? 아브라함 언약. 할례를 행하는 것은 아브라함 언약.
그리고 인간이 원하는 것 말고 원하지 않는 자가 내 자식이 되는 것은 이삭 언약. 이삭 언약입니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 자체가 사건이 되고 하나의 징후, 침 튀김 하나의 징조로 변하고 진짜 원래 있는 내 존재는 하나님이 내 존재를 바꾸는 것은 그걸 야곱 언약, 야곱 언약이라고 하는 거에요. 야곱 언약.
이 언약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인데 하나님의 약속이 올 때는 우리가 달성할 수 있다? 없다? 나는 너의 기도와 헌금과 봉사와 충성과 이런 것들 일체 나는 받지 않고 너를 구원하겠다는 뜻이에요 이게. 너의 노력과 선행과 자비하심과 착함 이웃사랑 하나님 사랑 일체 나는 그것 없이 일방적으로 너를 구원하겠다.
그러면 우리가 묻지요. 왜 나의 희생과 봉사 왜 그걸 나의 찬양과 예배를 왜 안 받습니까? 너는 심판의 대상이지 네가 참고할만한 것들이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 이건 아껴야 되겠네. 이건 참 귀한 거다. 헨델의 메시아같은 경우는 이건 천국에서 CD로 만들어서 한번 틀어봐? 이런거 없어요. 내 주를 가까이 찬송가 너무 은혜로웠어. Amazing Grace 이 노래 너무 좋아서 천국 가서 합창만 만들어봐 이런거 없습니다. 일체 인간의 것은 받지를 않아요.
그것을 즐기라는 거에요. 그것을 즐겨라. 내것을 받지 않고 구원되었음을 즐겨라. 내것을 받지 않고 소속이 바뀐 것을 즐겨라. 그렇게 되려면 내가 그동안 나름대로 인생을 선방하고 자평하고 나름대로 인생 남 보기에 남들 보기에 인간답게 산다는 그러한 칭찬, 뭐 칭찬까지는 아니겠지만 너 그러니까 내가 같이 놀아줄게 그런 그들의 내면을 맞추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들과 놀고 같이 놀고 같이 즐기려고 하면 어느 정도 뭔가 돈이 있어야 되거든요. 그런 사회적인 그러한 이러한 분위기가 맞춰져야 되는데 그거 유지하기도 헉헉 거리면서 그야말로 오리가 물속에서 열심히 발을 동동 굴리는 것처럼 그렇게 얼마나 애를 써왔습니까? 그런데 그런 식으로 내가 너희들을 구원하지를 않는다. 그런 것은 네가 이 세상 살 동안만 해라. 천국에는 그거 아무짝도 소용없고 그거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니까 천사가 하는 말이 네가 애쓰거나 용쓰지 않아도 천국에 하나님 나라에 간다면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다는 이야기에요.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다. 그럼 이 기쁨을 더욱더 키우기 위해서 우리는 뭐해야 됩니까? 잠시 침묵. 자본주의 안에 푹 젖어들어야지요.
내가 얼마나 돈밖에 모른다는 것을 죽을 때까지 처절하게 경험해야 됩니다. 나의 인품같은 것은 사회에서 안 알아준다는 것. 나의 도덕이라든지 이웃사랑 봉사 희생 일체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 오직 신용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재산을 갖고 있느냐? 오직 그것뿐이라는 사실을 아주 절감하게 살아가면서 이게 나의 본성과 부합했다는 사실을 이건 체험을 해야죠. 체득을 해야 됩니다.
개과천선한다고 천당 보내주는게 아니에요.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것은 천사 만났다고 목자가 갑자기 전국 양목협회장 되고 이런거 없습니다. 협회장 돼봐야 나중에 데모하고 광화문 앞에서 데모할 수 있어요. 그런거 없어요. 그냥 아무 내 수익이나 내 생활의 변동이 아무것도 없어요. 천사 만났다고 가스레인지 하나 더 들어오고 세탁기 하나 새로 바꿔주고 그런거 없어요. 몸이 건강하고 그런거 없습니다.
사건은 사건으로 사건의 의미가 있지 사건이 사건을 존재화시키지 마세요. 이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치명적인 오류입니다. 은혜 받았다고 그걸 써먹을 생각해요. 은혜 받았으니까 우리 고3 우리 애는 이번에 수능에 좋은 점수. 그런 짓은 절에 가서 하세요 절에. 요새 절이나 교회나 마찬가지지만. 그거는 정말 위장술이죠. 트릭 쓰는 거에요. 페이크에요. 속임수입니다. 가짜에요.
사건은 사건화되어야 되지 그걸 존재화시키면 안 됩니다. 어떤 그 아주 머리 쓰는 딸아이가 우연한 사건으로서 학교에서 계단에서 넘어져가지고 팔이 부러졌어요. 팔이 부러져서 병원에 있으니까 예상 못한 일들이 일어났어요.
갑자기 친구들이 꽃을 한 다발 들고 와가지고 선생님도 오고 부모도 와가지고 맛있는거 해주고 평소에는 그렇게 아이스크림 못 먹게 하더니만 “그래, 네가 아이스크림 먹고싶다고 했지. 딸기 줄까? 뭐 줄까?” 뭐 이렇게 소원대로 다 해주니까 애가 다 낫았는데 그 다음에 또 아픈 증상을 또 위장하는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증상, 사건으로 머물러야 되는데 존재에서 그 유사한 증상을 유발해가지고 자기 인생을 선방할려고 그런 식으로 조작하는거 그러면 안돼요. 사건이 왜 왔느냐 하면은 심판 ‘너는 내가 보기에 너는 심판받아야 돼’라는 것이 사랑으로 다가오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가 확인할 것은 왜 나는 이 세상에 하나님이고 예수건 간에 돈이 최고냐. 아무리 교회 다녀도 돈 앞에서는 예수님 앞에서는 큰소리쳐도 돈 앞에서는 큰소리 못 치는 나는 왜 그런 인간으로 내가 보기에도 내가 지저분하게 진짜 야박하게 살아가느냐. 그걸 돌아가실 때 까지 계속해서 실감나게 체험하세요.
믿음 있다고 취직 안 시켜줍니다. 믿음 있다고 아픈 몸이 건강하고 그런 거 없어요. 믿음 있다고 소송에서 이기고 그런 거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보면 첫사랑을 잊지 말라고 하죠. 첫사랑. 첫 징후, 증상 잊지마라.
그런데 세상에서는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첫끝발이 개끝발이라 하거든요. 첫끝발이 개끝발이다. 병원 개업해놓고 처음에 손님 온다고 해가지고 화분 해놓으면 손님 올 줄 알고 목사들은 개척교회 하면 꽉 차잖아요. 개척교회 안 해봤지요? 개척교회 해보세요. 개척교회 할 때 친구 와가지고 꽉 차고 온 사돈의 팔촌 와가지고 전부다 헌금 막 하고 할 때 진짜 그게 교회 부흥되는 기분을 느끼죠. 그 다음 주일날 자기 부인하고 단둘이 달랑 두명 남아있어요. 첫끝발이 개끝발이라니까요.
인간은 아무리해도 내가 아무리 착하고 싶어도 환경이 나를 가만두지를 않습니다. 이 자본주의 환경이 나를 가만 두지를 않아요. 남들이 남의 시선이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고요. 무시하고 자연으로 뭐 산속에 가가지고 혼자서 도 닦아도 소용없어요. 언젠가 장날 되면 내려와야 돼요. 약초 들고 내려와야 되잖아요.
어떤 인간도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의 체제, 이 기본 체제 자본주의에서 못 벗어납니다. 목사가 아니라 집사 누구라도 중들도 마찬가지고요. 돈 있어야 교회를 하지요. 그러니까 밥 먹고 살려면 돈 없으면 못 먹고 산다는 이것이 더 긴급해요. 긴급. 시급한 거에요. 속일 수가 없어요.
아무리 착각해가지고 주여 주님이 최고입니다. 아무리 헛소리하고 상상해도 막상 배고프면 밥 먹어야 되지요. 그러니까 미리 살을 여러분 많이 쪄놔야 돼요. 어려울 때 좀 안 먹어도 나름대로 선방하지. 빼빼 마르면 밥 안 먹으면 더 힘들잖아요.
목자가 천사 만나고 출세했다는 그러한 말도 안 되는 그런 상상하지 마시고 목자는 뭐냐 하면 다른 세계에 이미 소속됐다는 증상, 징후, 재채기 그리고 심판이 곧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목자는 계속 존재해야 됩니다.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2장 9절 (죄의 증상) 200505b-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 마지막에 제가 이런 말씀 드렸지요? ‘심판을 즐겨라’. 심판을 견디라가 아닙니다. 심판을 견디게 되게 되면 아직도 내가 스스로 자기를 자평하려는 그것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게 되요. 그러나 심판은 아빠가 패겠다는데 견디게 되면 그 관계가 남남이 되어버려요 정말.
정말 남남이 되어 버리니까 심판의 이유가 있을 거에요. 그 이유를 알면 돼요 때릴 때. 심판을 즐기면 되는데 그 심판을 즐기는 방식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11절에 나옵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오늘 강의 제목이 다윗의 동네라고 정해봤습니다. ‘다윗의 동네’. 오늘 제목은 다윗의 동네에요. 다윗의 동네니까 여기는 일단은 여기는 뭐냐 하면 베들레헴이겠죠. 베들레헴.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남서쪽으로 6km지점에 있어요. 여러분 가시면 아주 굉장히 검문소가 많아요. 거기에 장벽이 쳐져있고 거기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지금 살고 있고 자치구가 되어 있어요. 자치구가. 물론 우리 외국사람들은 왔다갔다 할 수 있어요.
그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태어났고 예수님이 태어났던 거기에 거대한 성당이 지어져 있습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그곳은 바위로 되어 있고. 다윗의 동네에 베들레헴에 태어났을 때에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주의 동네에요. 주님의 country다. 주님의 country를 이 지상에다가 임시적으로 만든 겁니다. 한시적으로. 왜? 이게 사건이니까.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니까. 있다가 없어지니까. 임시적으로 빤짝할 때 번개칠 때 거기에 주께서 임시적으로 만드신 거에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신축성 있는 시공간이다. 신축성이란 말은 뭐냐 하면은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가 할 수 있는 공간. 시공간이 시간과 공간이 신축성 있다는 말은 이거는 우리한테 뭐를 이렇게 혼란시키느냐 하면은 시계 있잖아요. 시계. 날짜 있잖아요. 이게 변동이 있을 수 있다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내가 있는 이 땅이 땅이 아닐 수가 있고 꺼질 수가 있고 없어질 수가 있다라는 것을 미리 예상하라는 거에요. 이게 신축성이에요. 내 땅이 발판인데 발판이 졸지에 날라가 버릴 수가 있다 말입니다. 이 신축성 있는 시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시공간은 이거는 다른 세계를 마련하게 되면 여기서 이 시공간으로 말미암아 안과 밖이 이렇게 구분됩니다. 안과 밖.
다윗의 동네라는 것은 예수님의 동네를 보여주는 징후, 사건이고 그 다음부터는 예수 안에 있는 사람과 예수 바깥에 있는 사람의 그 경계선을 천사가 내린 사건에 준해서 내가 정하겠다. 사건에 준해서 거기에 준해서 정하겠다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예배당 크게 지어놓고 어린애들이 그 강대상 올라가게 되면 거기 청소하는 사찰 집사가 막 나무라지요. 이거는 거룩한 공간이기 때문에 네가 가서는 안된다. 구약 성경에 보게 되면 제사장들이 드나드는 공간 따로 있고요 다른 사람들은 못 들어가는 공간이 따로 있어요. 그걸 가지고 성과 속. 성, 속을 구분하는 겁니다. 거룩한 공간과 속된 공간을 구분 짓는 겁니다.
왜 속된 공간을 구약에 있어서 구분 짓느냐 하면은 한마디로 말해서 더럽기 때문에 그래요. 속된게 더럽기 때문에. 더럽다. 더럽다, 지저분하다. 이걸 성경의 초반에서 이걸 부정 탄다 또는 부정스럽다. 깨끗지 못하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그래서 정말 이 성경이 어려워요. 얼마나 어려운지 제가 한번 예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창세기 7장에 보게 되면 창세기 7장에 거기 노아방주 이야기하면서 방주에 7장 2절에 보게 되면 얼마나 어려운지 제가 질문을 던져 볼게요. 제가 일단 읽고 질문해볼게요.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럼 저의 질문은 이겁니다. 부정한게 뭣 때문에 부정하다는 겁니까? 그 부정하다는 기준이 뭡니까? 제가 여러분께 질문 던졌습니다. 답변해보세요. 도대체 부정하다는 것이 무엇에 근거해서 부정하다는 거에요? 여러분 답변 못하지요? 답변 못하지요? 같은 질문입니다. 무엇에 근거해서 정결하냐? 답변 못하지요? 답변할 수가 없어요.
왜 답변을 못하느냐 하면 신축성 있는 시공간 때문에 그래요. 인간의 세계는 해는 해대로 달은 달대로 늘 일상적으로 해 떴다 내일도 뜰 것이다 모레도 뜰 것이다. 인간의 시공간은 이거는 뉴턴적 시공간이라고 해가지고 이미 고정적 확실히 정해진 거에요. 거기에 맞추어서 시공간이 맞추어서 태양은 늘 태양이고 달은 달이고 여기에 맞추어서 모든 생활을 안전성 있게 우리는 계획을 짤 수가 있고 우리는 살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시공간 뒤틀려버리면 무너져버리면 소용없지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없는 상태에서는 우리가 얼마든지 해외여행 가는 스케줄을 짤 수가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연휴 때 해외여행 일본여행가고 미국 여행가고 어디 다른데 여행가는 스케줄을 누가 망쳤습니까? 문재인? 아니지요. 김정은? 누가 망쳤어요? 신종 코로나가 망쳤어요. 이건 예상 못한 거잖아요.
우리가 요청하지 않은 타인이잖아요. 내가 요청하지 않은 타인. 내 인생을 내 인생에 허락 없이 내 인생에 침노했잖아요. 우리는 내것 안에는 내것을 기준으로 해서 나와 함께 있는 것 안, 그 바깥에 있는 것을 타인. 내가 요청 안 한 타인. 이렇게 규정하는데 그 기준이 신축성 있게 무너진 겁니다.
천사가 없는 세계가 우리 세계에요. 상식적이야 이거는. 너무나 상식적이고 초등학교 때 천사 안 배웁니다. 천사 배웁니까? 천사 몇학년 때 나오지요? 교과서에. 천사 나오면 악마 나와야돼요. 천사, 악마 몇학년 어느 교과서에 나옵니까? 안 나오잖아요. 천사 없는게 당연한 거에요. 천사라 하는 것은 과학적이지 않을 세계관.
그러니까 이걸 미신, 미신이라 미신. 천사 있는 것은 미신이고 천사 없이도 돌아가는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과학적이라면 천사를 대체해야 되는 다른 개념으로 대체되는 거죠. 그게 진리고 그게 정답이고 과학이 진리가 되는 거에요. 모든 것은 과학의 힘으로 인간의 지혜로써 미래를 개척하고 발달해나가고 고난 역경이 있으면 그걸 극복하고 넘어서는 것이 인간이 사는 이유고 존재의 가치가 거기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천사가 쳐들어와버렸으니까 우리는 생각하기를 아 시공간이 있는데 천사가 여기 들어왔겠지. 아니거든요. 그거 아니거든요. 천사 고유의 자기 세계의 시공간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바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시공간이라고 했으니까 시공간은 뭐냐? 시간+공간이에요.
시공간 공간에서 천사의 시간은 시간이 흐르지 않아요. 이거 아주 환장할 일이에요. 시간이 흐르지 않아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니까 딱 기분 좋은 말이 뭐냐? 늙지 않는다는 뜻이겠지요. 늙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제가 또 질문해보겠어요. 아담과 하와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몇 살 얼굴이겠어요? 아담과 하와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몇 살 얼굴입니까? 2살? 3살? 닭이 먼저에요? 달걀이 먼저에요? 그 질문하고 똑같은 질문이에요.
시공간이 인간의 시공간에는 닭이 달걀이 있어야 닭이 되고 또 달걀이 생긴다는 서로 물리고 물려서 짝이 없으면 관련성이 없으면 서로의 존재가 깨지는 그런 관계가 되는 거에요. 서로 질문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질문이 되고 답이 되는 그런 물려있는 상태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들 때는 그러한 모순점이라는 것이 모순점이 없어요. 닭이 뭐냐? 달걀이 뭐냐? 모순점이 있다는 것은 인간은 피조된 상태라는 뜻이에요. 내가 인간이 만들 때 모순되게 만들 일은 없을 거 아닙니까. 만들어졌기 때문에 모순점이 발견되는 겁니다.
여러분 죽으면 어디 갑니까? 이 질문하고 똑같은 거에요. 죽으면 어디 갑니까? 선악과 왜 심어놨어요? 그 해로운 선악과를. 이거하고 똑같은 질문이에요. 질문을 하는 내뱉는 질문자가 질문을 한다는 것은 이미 질문 속에 해결될 수 없는 미지의 것이 모순된 것이 불가능한 답변이 담긴 채 질문이 나오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질문하는 본인도 해답이라고 얻어봤자 그 해답이 내가 원하는 해답이기 때문에 그건 해답일 수가 없지요. 내 자체가 문제가 있는데 문제 있는 내가 납득이 된다하면 그게 문제가 있는거죠. 납득이 안되야 문제가 있는거 아니겠습니까. 논리적으로.
따라서 여기에 천사가 신축성 있게 온다는 말은 지붕이 그냥 무너진 거에요. 그 순간. 지붕이 무너지게 되면 목자에 있어서의 인생은 내가 자본주의 내가 돈 벌고 살겠다라는 것이 내 인생의 의미고 목적이 안 되고 이게 무너진거 깔려버린거에요. 그 시공간에.
그 시공간에 12절에 보면 뭐냐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너희에게 뭐가 된다? “표적”, 영어로 sign. sign이 된다. 따라서 목자의 존재하는 이유는 구주가 태어난 것과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내가 이 땅에 왜 태어났을까? 돈 벌고 밥 먹고 살기 위해서. 그거는 우리의 시공간이고.
천사가 뭉개버린 시공간에서는 뭐가 생겼느냐 하면은 인간이 왜 살아야 하는가? 아기 예수 그리스도가 천지를 창조한 그 세계 중심으로 천국이 짜여진다는 사실을 징조로서 싸인으로서 알리기 위해서 사는 거에요. 목자가. 그 알알이 된 거에요. 우연한. 사건을 통해서. 내 시공간을 다른 시공간이 밀고 들어와버린 거에요. 신축성있는 밀고 들어와버린 거에요.
그럼 그 세계에 들어갈 때 말로 하지. 점잖게. “목자야 이리 오너라. 나 천사거든.” 애들 동화책에 보면 애들이 천사 보면 놀랍니까? 안 놀랍니까? 안 놀래요. 애들에게 천사라고 하는 것은 텔레토비, 보라돌이 정도에요. 뽀~하는 것도 있고 세 명 있지요? 보라돌이 정도밖에 안돼요. 같은 친구 같은 사이에요. 사자나 양들도 돼지도 친구가 되는 거에요. 애들 세계에서는.
애들 세계에서는 뭐를 모르기 때문에 그러느냐 하면은 구주께서 이 땅에 오셨잖아요. 구주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구주 이 땅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안과 밖 사이에서 그 경계선에서 뭐가 있느냐 하면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애들이 몰라서 그래요. 우리도 모르고.
우리 세계에서 우리 시공간에서 주님 시공간 가려면 필히 죽음을 감당해야 돼요. 그건 감당할 수 없어요. 죽어야 돼요. 죽게 되면 뭐도 죽느냐 하면은 ‘나 죽어서 천국가야지’라는 소망도 같이 없어져야 돼요. 사라져야 돼요. 왜? 우리가 상상한 거니까. 내 중심이니까. 내 중심이 되게 되면 나 중심의 안과 밖이 유지되기 때문에 그거는 기존의 시공간이 아닙니다.
예수님 중심의 시공간 되려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아버지한테 갈 때에 어떤 절차와 과정을 밟고서 갔느냐를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어떤 절차를 밟아서 아버지께로 갔습니까? 일단 십자가 죽으시고 그 다음에 사흘만에 부활했잖아요. 이거 상상한 겁니까? 아니면 팩트 입니까? 이거는 팩트잖아요. 신은 상상한 거고 하나님 천사 다 상상하지만 남겨진 증상은 팩트에요. 팩트의 증상이 남겨요.
그게 뭐냐 하면은 죽었다 사흘만에 부활한다. 그래서 사도들은 사도행전에서 이걸 잘한거에요. 예수님 어떤 분이 죽었는데 사흘만에 살아났습니다. 그런 위인 있으면 다른 사람 있으면 오라해요. 그런 사람 없어요. 죽을뻔한 사람 있지만 죽었다가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사흘만에 살아날 사람 그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시공간이 다르기 때문에. 이쪽 시공간에서 저쪽 시공간으로 가려면 필히 죽어야 됩니다. 필히 죽을 때 늙어 죽으면 안 되느냐? 안됩니다. 어떻게 죽어야 되느냐? 심판 받아야 돼요. 그래서 심판을 즐기라는 거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버지께 받은 심판이기 때문에.
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 다윗의 동네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동네를 미리 보여주는 한 싸인인데 하나의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어떤 사건? 목자나 어떤 평범한 인간이 평소에 자기가 돈 벌고 살고 자기 가족끼리 사는 것이 이게 인간의 할 도리고 이게 전부라고 생각했던 목자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네가 존재한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네가 싸인으로서 존재해야 된다.
네가 일생이 하나의 싸인을 보여주는 일생이여야 한다는 식으로 그 싸인의 본래의 내용은 빨리 달려가서 베들레헴에 있는 강보에 쌓인 구유에 뉘인 아기를 봐라. 그 아기하고 너하고 너의 미래하고 관련성 있다는 말입니다. 이 관련성이 있다는 거에요.
천사가 와서 이렇게 안내를 해주는 이유는 인간의 힘으로 이런 내용을 알 도리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천사가 사는 동네는 주님의 동네거든요. 천사가 와서 목자한테 광채를 비추니까 목자는 놀랬고 무서워했고 내가 살던 나의 나와바리, 나의 영역, 나의 아우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어떤 사건이 터져버렸지요.
그 사건을 통해서 자기 자신에게 새로운 소속이 새로운 신분이 주어졌습니다. 그 신분은 뭐냐 하면은 바로 아기 예수와 관계가 끊어졌는데 아기 예수의 관계를 천사가 와서 이어주는 거에요. 이어줄 때 그냥 이어주는 것이 아니고 이쪽 세계, 인간의 세계에서 저쪽 세계에 가려면 그걸 간다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이 어떤 길이냐? 예수님이 몸소 보여준 길인데 죽어야 사는 거에요. 죽어야 사는거.
그럼 우리 쪽에서 준비할 것은 번개탄이나 이런거 다량의 수면제, 밧줄 뭐 그런거 준비하면 천국 갑니까? 내가 나를 죽여버리면 천국 갈 수 있겠어요? 내가 나를 심판해버리면 안돼요. 내가 있는데 내가 나를 심판한다, 심판한다 거창하게 이야기했지만 제가 첫째시간에 이걸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렇게 아주 순하게 이야기했어요. ‘자평한다’.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평한다. 나는 지금 괜찮은 인간인가? 이 정도하면 얼추 욕 안 얻어먹지. 남한테 뭐 칭찬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남한테 환영 정도는 받지 뭐 이런 식으로 자평할 수 있는 거에요. 자평한다는 것은 심판한다는 뜻인데 인간이 자기를 심판할 때 뭐로 심판하느냐 하면 내가 알고 있는 선과 악으로 심판해요. 선과 악으로.
이게 창세기 3장에 보면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악마와 한패 먹었다하는 증거입니다. 인간은 선과 악으로 자기를 평가하고 측정한다면 그것 자체가 이거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인간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보고 하는 이야기가 너는 창조자가 아니기 때문에 너는 너에 대해서 창조한 적이 없기 때문에 창조 평가를 해도 내가 평가하지 네가 너 자신을 절대로 평가하지 말라는 뜻으로 너를 만들어놨다 이 뜻이에요. 만들어놓은 거에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따먹었다 이 말이죠. 선악을 따먹으면서 악마가 이야기한 것은 뭐냐 하면 이제 독자적으로 자율적으로 내가 선이 뭐고 악이 뭐냐를 내가 알아서 그 선과 악의 기준에 의해서 나를 악한 쪽이 아니라 선한 쪽으로 나를 만들어내게 되면 하나님께서 나를 선한 인간이라고 선한 천국에 넣어줄 것입니다라는 아이디어를 악마가 우리한테 계속해서 세뇌해가지고 심어준 거에요. 끊임없이 교회 목사 설교를 통해서.
착해야 영광 돌리고 착해야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자가 되고 착해야 거룩한 자가 되고 거룩한 자가 되야 거룩한 자만 모이는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우리 자신을 윽박지르는 겁니다. 그게 악마 짓이라는 사실을 모르죠. 왜? 인간에게는 두 자. 양심이라는게 있잖아요. ‘양심’. 양심 없다 짐승, 양심 있다 인간. 이렇게 되거든요. 도덕적, 윤리적으로.
세상에 양심 있는 인간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해. 어떻게 양심 갖고 N 제곱의 방, N 세제곱의 방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 그 얼굴 까! 이렇게 하지요. 얼굴 까봐야 그 얼굴이 아담얼굴하고 내 얼굴하고 똑같은건데 뭐. 얼굴 까라! 저 낯짝 보자 부끄러운 줄 모르는 인간들 보자. 이렇게 하는데 어떤 분이 제 동영상에 평을 댓글을 이렇게 달아놨어요. 유투브에. 김정은이 왜 죽어야 돼 내가 죽어야지. 댓글 다신 분이 있어요. 그 말이 맞아요.
우리가 선과 악을 논할 때에 도대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본인이 스스로 자기를 속이고 있어요. 나를 이쁘다하면 선이고요 나를 미워하면 악이에요. 이게 내 중심이라니까요. 내 중심. 남들은 그렇고. 본인 개인적으로 선은 뭐냐 하면 유쾌한게 선이고 악은 뭐냐 하면 불쾌한게 악이에요. 불쾌한게 악이에요.
온도15도, 풍속0, 습도35 이거 선입니다. 그런데 아마존 유역에는 습도90%, 온고 47도 아마존 유역에서 백날 있어도 그거는 짜증나는 악이 되는 거에요. 몸의 컨디션. 아무리 착해도 이빨 아프면 그거는 악이에요.
나를 괴롭게 하면 무조건 악이고 나를 좋게 하면 무조건 선인데 그 좋다 나쁘다의 그 양은 과거가 본인이 과거 동안에 내가 어떤 식으로 나 다움을 유지했느냐의 레벨에 따라서 선과 악의 천태만상, 노래가 또 나와요. 천태만상 모든 것이 사람마다 개성이 있어가지고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가치가 다 달라요. 다 달라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뭐 조그만 차타고 가게 되면 차 없는데서 조그만 차 갖고 있으면 아후 차 너무 좋아 너무 좋아 이러고 있는데 이미 어릴 때부터 고급차 타던 그 재벌집 애가 작은 차 타게 되면 나보고 죽으란 말이야 이러고 있다고요. 자기가 불쾌하다 이 말입니다. 물론 차도 작은 차도 작은 차 나름이지. 미니같은 건 또 괜찮아요. 나 조그만 차 타. 뭐타? 미니. 상당히 잘 사는 사람이죠.
인간이 자아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그거는 과거가 결정하는 겁니다. 과거가 어떤 환경 속에서 자라왔느냐에서 결정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인간은 환경을 못 벗어난다. 다른 말로 인간은 자기가 살아온 시공간을 못 벗어난다. 재벌 3세보고 목자 하라고 하면 하겠어요? 내가 죽으면 죽었지 이런 짓 못한다. 밤에 잠 안자고 무슨 짓이야? 이렇게 하겠지요. 나보고 죽으란 말인가 이렇게 하겠지요.
그러나 목자는 하잖아요. 왜? 자기 레벨에서는 이것도 자기가 선이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께서 하는 말이 왜 인간에게 왜 아무것도 안 받느냐하는 이유는 인간이 나빠서가 아니라 인간이 아담이 형성된 그 인간의 세계 자체가 부정, 더러워서 그래요. 인간끼리는 안 더러워요. 인간끼리는 착한 사람은 깨끗하고 나쁜 사람은 더럽고 그래요.
대구에 있는 경북여고가 있는데 경북여고의 교훈이 뭔지 알아요? 진선미에요. 진선미. 경북여교 출신들이 한국의 정권을 꽉 잡았어요. 이순자 여사부터 해가지고. 서울, 강남에 좀 산다는 아줌마들은 60대 이상의 아줌마들은 전부다 경북여고 출신이라고 보면 되요. 경기여고 경북여고 둘 중에 하나로 보면 돼요.
옛날에는요 남자 고등학교 경기고등학교, 서울고등학교 그 다음에 경북고등학교였어요. 경북고등학교 그 다음에 부산고등학교 이랬지. 어디 다른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는 취급도 안했다. 세광고등학교 이런 건 취급도 안했다.
옛날에 우리는 클 때 서울에 있는 유명한 대학은 서울대, 연고대하고 한양공대 외에는 대학 취급도 안했습니다. 성균관대 우끼지마라. 뭐 동국대 동국 따라지. 동국대 나온 사람한테 미안합니다만. 전부 다 서울 다 가버리니까는 다 일류가 다 되고 말았어요. 왜냐하면 이거는 사람은 환경이라는 것을 벗어날 수가 없어요.
우리 형님 의사 우리 형수님도 의사 다 의사인데 나는 노래 부른다. 이건 망한 거에요. 이 집안에 이런 농땡이가 나오다니. 그러나 노래하는 가수 되기 위해서 수만명이 지금 하고 있는데 뜨는 것도 얼마나 힘든데 그거는 어느 정도 갖춘 사람한테는 그거는 진짜 농땡이라고 보는 겁니다.
자기의 주어진 환경에 의해서 자기가 조작된 거에요. 인간은 늘 조작되게 살아가는 거에요. 조작되길 원하고 있고 또. 서로 위장하고 있고. 따라서 하나님의 새로운 시공간, 다윗의 동네 주의 동네는 인간의 선악을 일체 고려하지 않습니다. 묻지 않습니다.
다시 쉽게 말해서 목자야 너 양치면서 나쁜 생각했지? 이런거 묻지 않아요. 목자야 양을 분명히 45마리 맡겨놨는데 너 한 마리 잡아먹고 44마리 너 주인한테 삥쳤지? 이런거 안 물어요.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찾아오는 거에요. 그게 심판이고 곧 그게 강요된 사랑입니다. 심판은 강요된 사랑이에요.
본인이 요구한 사랑이 아니고 찾아온 사랑이 심판입니다. 나 너 죽일란다. 너 죽는다고 너무 섭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너의 구세주도 이 동네에서 죽었어. 너와 같이 죽었어. 너를 구원하는 구세주가 잔소리해서 구원하는게 아니야. 네가 살라고 살라고 애쓰는 너를 위해서 철딱서니 없는 너를 위해서 내가 대신 죽음으로써 그 피 값으로 대신 치뤘다는 그 피 값, 현찰이죠.
그 피 값으로서 우리를 죄를 다 치뤘다는 것으로 간주해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거에요. 그걸 대구강의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갉아먹는다고 했지요. 주께서 우리의 죄를 갉아 먹어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자기 안에서는 그 갉아먹은 죄를 의로 바꾸어 놓고 그 의로 바뀜으로 말미암아 그 갉아먹힌 나는 그 의로 바뀐 그 일부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나는 주 안에서 의인된다는 그러한 절차를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죽음이라는 말은 일체 안 받는다는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세요. 너를 죽인다는 말은 일체 너의 것은 네가 봉사, 충성, 헌금, 십일조 일체 안 받아요. 찬미고 뭐고 안 받습니다. 그거는 그냥 맹숭맹숭 미안해가지고 해보는 거고 그런거 없이 구원돼요. 그런거 없이. 착하냐 교도소 몇 번 갔다 왔느냐 N번방 N의 제곱 세제곱 그런거 묻지 않고 그냥 찾아와서 구원하는 거에요. 찾아와서.
왜냐하면 하나의 물방울, 기침방울이니까. 기침방울에게 무슨 의미를 주겠어요. 기침 본인이 주님이 있는데. 주님이 기침하고 주님께 튀어나오는 하나의 싸인이거든요. 표적이 된단 말이죠. 표적 붙들고 목 조르고 똑바로 하란 말이야. 이렇게는 없단 말입니다. 자기 쪽에서 내놨으니까. 이게 바로 그렇게 될 때 우리가 그 심판을 즐기는 거에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즐기는 거에요. 나를 기대 거는 사람, 나에게 뭔가 은근히 희망 거는 사람이 있는걸 아는데 적어도 이 정도라면 이렇게 해야지 이렇게 바르게 살아야지 기대하는거 아는데 그거 무시하고요. 그거 개무시하고 우리는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즐겨야 돼요. 그게 바로 성경에 있는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 같은게 바로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에요.
지난 제 낮 설교의 본문이 뭐였습니까? 서로 성도가 서로 한마음 된다고 했지요. 한마음이 무슨 마음이었어요? 한마음이 나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이다로 한마음 또는 성도가 서로 만나면 나를 제발 되도 않는 영어 썼지요. 플리즈. 제발 나를 죽여주옵소서.
이 본문 할 때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십자가 마을이나 성도 만날 때 죽이라고 온 말에 대해서 반겨야 돼요. 나를 제발 나한테 좋은 조언을 해주시옵소서. 나가 죽어 인간아. 이것보다 더 좋은 조언이 없어요. 왜? 그걸 즐기자 이 말이죠.
내 자체로서 우리는 자꾸 스스로 잘난 사람으로 포장을 하니까 내가 원치 않는 타인이 와가지고 나를 밟아줘야지요. 상당히 메조키스트적인 면이 있습니다만은 밟아줘야지요. 인간도 아닌데 자꾸 인간 행세하려고 하니까. 그런데 이러한 기쁜 소식을 이 세상에 아까 예수님이 죽어야 떠난다 했지요.
그러면 여러분한테 질문해볼까요? 예수님께서 왜 곱게 떠나지 않고 왜 죽어야 떠나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으면 아기 예수 태어나서 나중에 어른 되어서 십자가 지시고 가실 때 왜 곱게 안가시고 왜 처참하게 사람들에게 못에 찔리고 이렇게 처참하게 죽어야 될 이유가 뭡니까? 그 이유가 뭐지요?
아까 이 세상이 전체가 뭐라고 했습니까? 아까 더럽다 부정탄다 했지요? 부정이라고 했지요. 부정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인간들이 이 세상을 뭐냐 하면은 하나의 보험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보험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동조자 모집이에요.
보험과 복음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은 동조자는 내가 의지할만한 사람들을 계속해서 모집하는 거에요. 동조자. 오늘 보람상조 안 오셨잖아요. 이게 보험이거든요. 보험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면 얼추 그만큼 사는데 유리하고 안심이 된다는 겁니다. 안심이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복음 들으면 그래 뭐 내가 이목사 말대로 막 살고 죄 막 짓고 죄 짓는 즐거움으로 산다는 것을 믿겠습니까? 이런 소리하니까 나도 이제부터 나도 실컷 죄나 짓자. 그래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있으니까 나는 마음 놓고 지금 오늘 죽어도 천당이다.
이렇게 할 때 이게 가만히 들어보면 뉘앙스가 꼭 보험 들어놓은 기분. 복음이 아니고 뭔가 든든한 보험 들어놓은 기분들지요. 또 신천지처럼. 이게 뭐냐 하면은 내가 나를 아끼고 내가 나에게 보호하되 뭐하느냐? 은신처를 만드는 거에요. 은신처.
이번 신종코로나 난 뒤에 미국에서 감당한 부동산이 뭐냐 하면은 지하벙커였어요. 지하벙커. 요한계시록에 마지막 때를 대비해가지고 지하벙커에 수십만 달러를 주고 사가지고 3년 동안 버틸 수 있는 생수부터 심지어 기관총까지 준비해놨어요.
기관총을 왜 준비하느냐 하면은 다른 벙커에서 양식 떨어졌다고 오면 쏴죽이려고 기관총까지 다 마련해가지고 그 안에 모든 샤워시설부터 수영장까지 다 마련 그런 시설을 마련한 이유가 뭐냐 하면은 은신처를 마련하는 거에요.
인간은 은신처라고 하는 것은 결핍을 의미하고 결핍은 욕망에 충족되지 못한다는 뜻이거든요. 뭔가 무섭다는 거에요. 무서우면 돈 있는 사람들이 그 무서움을 대비하기 위해서 은신처를 실제로 마련하고 실제로 혼자 돈 안 되면 여럿이 부족, 여럿이 투자, 돈 모아가지고 그런 벙커를 만드는 그것도 안산홍 집단에서 하고 있어요. 지금 신천지는 이것 때문에 못하고 있는데 앞으로 신천지도 할 거에요.
우리끼리 괌에 터 사가지고 대한민국 6.25 전쟁나면 못 사니까 빨리 비행기타고 배타고 물 건너 배타고 물 건너 비행기타고 와가지고 괌에 와가지고 자기들끼리 이상적 공동체 건설합시다하는 것. 그런 아이디어들이 사람을 어떻게? 현혹케하는 거에요. 이게 하나의 보험이고 이걸 동조자 모집하는 겁니다. 교회가 크게 교회 크게 하고 싶다. 결국 이런거거든요.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그냥 추상적으로 그런거 하지 말고 실질적으로 내 도피성 돈 내라 이 돈이 내 몸을 마지막 때에 주님 재림할 때 환란 때 버틸 수 있는 손에 쥘 수 있는 부동산 이렇게 해준다면 그 교회 다닐께요라고 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교회에서 교육관에다가 심지어 학원까지 만들고 모든 구비시설 해가지고 마지막 때 대비해가지고 우리끼리는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하고 자기가 자기한테 처방을 내리는 겁니다.
그런 방식. 은신처 마련. 이것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이거 이야기하면 안 되는데 누구보고 이야기하는거 같아서 미안한데 자신을 노출할 자신이 없다. 자신을 노출할 자신이 없어요. 은신처에 계속 숨어 있으니까. 저 사람이 나에게 도움될까? 도움 안될까? 이익이 될까? 이익이 안될까? 그거 계산해가지고 지금에 있는 시공간에서 유지하면서 노출 안되고 숨어 자꾸 기어들어갈려고 하는 거에요. 우리 끼리.
이 고산 바닥에 우리끼리 아는 사람끼리 유력한 여자들 모여서 여우회인가 만들었지요? 부부의 세계라는 드라마 보면 나와요. 드라마 안본 사람은 이야기할 것도 없고. 고산 바닥에 김희애 넣어 주냐 안 넣어주냐 하면서 사격하면서 하잖아요. 자기들끼리 자기 레벨 맞는 사람끼리 부족, 부족하면 서로 상부상조죠. 그렇게 해서 하는 그걸 가지고 교회 다니는 것도 그렇고 뭔가 자기를 보호하려는 시도 그것은 바로 보험이지 복음이 아닙니다.
이거는 인간이 타고난 거에요. 내가 나 보호하는 것, 나 방어하는 것 이거는 타고난 것이기 때문에 이거는 못 고칩니다. 아까 선과 악의 선이 뭐라고 합니까? 선은 자기를 좋게하는 거죠. 자기 보호하는게 선이에요. 종교 이런거 묻지 않아요.
무조건 나한테 위로하고 잘 대해주고 나를 격려하고 나의 말 친구 되어주면 무조건 선이고 아무리 복음 알아도 나한테 시비걸면 악이 되고 이게 인간의 선악 자기 중심의 선악이 있기 때문에 결국은 아무리 십자가 복음 어떻다 해도 나 좋은 쪽으로 그것을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할 뿐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보험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은 이게 뭐냐 하면은 복음이에요. 보험은 은신처, 숨지요. 복음은 반대로 숨는 것의 반대말은 뭐가 되겠습니까? 노출이죠. 노출. 드러내는 겁니다. 노출할 자신 없지요. 숨어있는데. 복음은 노출하는 거에요.
뭐냐 하면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 이기는 거에요.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 이기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하고 다른 사람하고 이렇게 막 말싸움하고 할 때 결국은 큰소리하는 사람이 이긴다하지만 결국 가만 따져보면 누가 이기느냐 하면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 이기는 거고 그걸 가지고 어른이라고 해요 어른.
나이와 관계없이 어른이에요. 이태가 있어도 이태가 어른일 수 있어요. 아쉬울게 없는게 어른입니다. 결핍이 있으면 아무리 어른이라도 아이에요. 공포에 휩싸입니다. 나이가 서른 중반쯤 37살쯤 되었으면 그냥 점잖게 양복입고 서른 몇 살 해야 될 걸 배는 자기 할아버지처럼 배는 이만큼 키우고 머리는 이상한 듣도 보도 못한 스타일로 해가지고 안경 끼고 뒤뚱뒤뚱 이렇게 걷고 왜 그렇게 해야 됩니까? 이게 무섭기 때문에. 결핍이 너무 많아서 그래요.
두렵기 때문에 세상이. 언제 옆에서 나타나서 총 쏠지 모르고 겁이 나서 그런 짓하고 있는 거에요. 겁이 나서. 아쉬운게 없는 사람이 이기는 거고 그 사람이 어른이에요. 뭐 아쉬운거 없지요? 애 셋이나 있으니 뭐 아쉬울게 있습니까.
그러니까 복음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은 이 뒤틀린 시공간 속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주님 안에 있는 사람은 이 더러운 구정물 세계 속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에 그 자체가 어떤 행동을 하든 거룩한 사람이 돼요. 이 거룩함은 거룩함을 노출시키는 겁니다. 이 세상에.
그래서 성도를 빨리 안 죽게하는 거에요. 이 땅에 어떤 것에 대해서 아쉬운 것이 없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본인이 본인을 지켜야 돼요. 아무도 나를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도 나 대신 머리 감겨줄 수 없고요 누가 나 대신 이빨 아플 수도 없고 누가 나 대신 암에 걸릴 수도 없어요.
암에 걸려도 내가 걸리고 머리 깎아도 내가 깎아야 돼요.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실존주의라는 거에요. 샤르트르의 실존주의가 이겁니다. 옛날에 샤르트르가 오기 전에 샤르트르는 프랑스 철학자 오기 전에는 존재라고 해가지고 같은 인간이니까 서로 사랑하자.
존재 위주로 철학을 했다면 샤르트르는 자본주의를 조사하면서 인간은 더불어 있어도 그건 위선과 위선의 모임이지 실제로는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기가 최고의 의미를 둔다. 인간은 자기밖에 모른다 이걸 실존주의. 내가 여기 있다는 것.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 상황 속에서 나만 여기에 진짜 있다는 의미를 나에게만 부여할 수 있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나 가족한테도 내가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거에요.
가족은 왜 있느냐? 가족을 위해서? 아니. 나를 위해서 가족이 있다. 실존입니다. 그게 왜 샤르트르가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샤르트르만 그런 생각 갖고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들이 바로 그런 시공간 속에 정신 속에 우리가 놓여있는 겁니다. 실패하기 싫은 거에요. 남이 저 사람 인생 조져놨대. 그 소리하기 싫은 거에요.
저 사람 저렇게 살다가 결국은 망했대. 이 소리가 듣기 싫은 거에요. 남들 앞에서. 그래서 잘되면 노출하고 못되면 숨어버리고 은신하고. 노출할거냐 은신할거냐는건 본인이 선택하는 거에요. 본인이 어느 것이 선하냐 악하냐를 따져서 선택하는 거에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못난 목자를 통해서 베들레헴에 가서 거기에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하고 여기 16절 봅시다. 16절에 보면 그 아기 예수가 태어난 것을 봤거든요. 한 2,2km쯤 돼요. 제가 차 타고 가봤는데 2.2km 쯤 되는데 들판에서 목자길이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팩트이기 때문에 사실이기 때문에 말하는 거에요.
“마리아가 듣고 전하여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목자가 천사에 의해서 어디에 말려들었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계시에 합류가 된 겁니다. 목자가. 포함이 되어버렸어요. 목자의 행적같은 모든 것이.
자,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어려운게 남아있어요. 진짜 이거 어려운데 왜 그러느냐 하면은 다윗의 동네를 아직 설명 안했어요. 다윗의 동네. 오늘 제목은 다윗의 동네인데. 다윗의 동네라는 말은 다윗은 이미 죽었지요? 그럼 다윗의 동네는 무슨 동네냐 하면은 죽은 다윗에게 약속한 분의 동네. 다윗에게 약손한 분의 동네가 다윗의 동네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메시아입니까? 메시아 아닙니까? 구원자입니까? 구원자 아닙니까? 다윗은 구원자가 아니에요. 구원자는 누구냐 하면은 다윗의 후손이 구원자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후손이 구원자라는 말은 다윗과 다윗 사이에 여기에 똑같은 공통적인 원리와 원칙 질서가 똑같이 이어집니다.
그 질서가 뭐냐 하면은 질서를 위해서 다윗은 뭘 했느냐하면은 다윗은 간음해야 했어요. 밧세바. 자기 부인 말고 다른 부인을 건드렸습니다. 이게 밧세바죠. 밧세바. 그 다음에 다윗은 그 밧세바 그 부인이 남편이 있었어요. 남편도 아주 망나니 맞바람 피는 남편이 아니고 충실하게 하나님을 잘 섬기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남편이었어요.
하나님을 잘 섬기는 남편은 집에 주의해야 한다. 집에 아내 때문에 자기가 죽는 수가 있어요. 하나님만 섬기는 이 사람이 다윗에 의해서 살해당합니다. 살해당하는데 뻔뻔스럽게도 나는 그 사람 안 죽였다고 발뺌할 수 있는 알리바이를 마련해놓고 죽여버려요. 알리바이를. 내가 안 죽였다. 적군이 와서 죽였지. 자기는 등을 밀어놓고. 제일 가까운데 가라고 명령해라.
가까운데 가니까 그 적들의 화살이 뭐 하나님의 천사의 도움으로 피해가고 그런거 없었어요. 그냥 죽였어요. 왜? 우리아 장군이 그냥 죽어버렸어요. 간음했던 여인 남편이 장군이거든요. 장군인데 장군 부인은 다윗이 차지하고 그 남편은 다윗에 의해서 자기의 범죄 흔적을 지워버리기 위해서 그 남편을 살해해버렸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누구의 아들이라고요? 바로 이분의 아들이에요. 예수님이. 이 말은 예수님 안에 뭐가 있다? 이러한 다윗의 범죄가 예수님 안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왜 죽었습니까? 죄 때문에 죽었지요. 누구 죄 때문입니까? 다윗의 죄 때문에 죽었지요.
그러면 다윗의 죄는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본인이 죄 지었다고 합니까? 뻔뻔스럽게도 누구의 죄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까? 시편 51편에 아시는 분 이야기해보세요.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시편 51편 한번 읽어보세요. 시편 51편에 거기에 성경에 분명히 뭐라고 되어 있어요? 크게 한번 읽어보세요.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편 51편 5절에 보면 내가 그러니까 이게 다윗이 뭐냐 하면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에 나단 선지자가 와가지고 당신이 바로 범인이라고 지적을 딱 하니까 나단은 수사반장 최불암이에요. 최불암. 파~! 있잖아요.
최불암이 와가지고 지적을 딱 했을 때 하는 말이 했을 때에 나 안했다고 딱 당신이다. 이미 하나님은 다 알고 있어. 당신 찍었어. 당신 죽었어 딱 하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거는 내 죄 맞는데 이거는 내 죄가 아니고 누구의 죄다? 나도 인수인계 받은 죄라는 거에요. 인수인계 받은 죄다. 이게 무엇을 뜻할까요?
어떤 인간도 다윗이 지은 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아직 환경이 그런 상황이 안 왔기 때문에 그런 죄를 안 지었을 뿐이다 이 말이죠. 이걸 가지고 성경에서 로마서 5장에서 만남, 만남의 장소에요. 아담의 속성과 예수님의 속성이 바로 십자가에서 만나는 겁니다.
한쪽은 죄로 등장하고 한쪽은 그 죄 때문에 희생되는 의. 희생된다는 의미에서 의. 죄와 의의 만남에서 거기서 시공간에서 시공간을 기존의 시공간에서 소속이 바뀌는 새로운 시공간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그 길이 뭐냐? 예수님이에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올 수 없는 곳에 내가 죄를 대신 처리해줌으로써 내가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에요. 예수님 안에서 다윗 죄가 살아 있는 겁니다. 자, 다윗의 죄가 뭐냐? 여러분들의 실력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물어봅시다. 1번이야 2번이냐 객관식입니다. 쉽습니다. 둘 중에 하나에요.
다윗의 죄는 뭐냐? 1. 자기 죄를 뻔뻔스럽게 자기 엄마한테 핑계 대는 죄. 이거 1번. 2. 자기 어머니가 모친이기 때문에 자기가 어쩔 수 없이 죄인으로 태어났다. 2번. 어느 것이 다윗의 죄입니까? 둘 중에 하나. 어느게 죄에요? 2번이에요 2번. 증상이라니까 죄의 증상이에요. ‘죄의 증상’.
갑자기 제목을 바꿀라. 내가 여기 다윗 말고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은 우리가 결국 늙어죽는다는 말은 우리 자신이 뭐다? 이 세상이 더럽고 죄 증상, 싸인으로서 표적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거에요. 사는게 곧 죽는 일이에요. 열심히 살려고 하는 그것이 살거나 안 살려고 하는 것 관계없이 내가 살아간다는 그 자체가 왜 우리가 죽어야 할 이유를 계속 생산해내는 일입니다.
이걸 어떻게 하자? 새롭게 여기자? 짜증난다? 뭐 그딴 소리 있느냐? 그게 아니고 뭘 하라? 즐기자. 즐기자. 나한테 어떤 책임도 나한테는 없다. 이걸 즐기자라는 거에요. 내 인생이 이렇게 꼬이고 어렵게 된 것은 내가 잘못을 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또 잘한다고 해서 이게 회복될 가능성도 없고 꼬이는게 풀릴 가능성은 없어요.
결국 우리가 남아있는 것은 결국 우리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지만 신종코로나로 죽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결국 정해져있어요. 우리 가는 길은. 100세 살았다고 자랑하면 안돼요. 결국은 죽습니다. 죽는데 죽는 이유를 알고 죽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말씀을 오늘 목자 이야기를 결론 내린다면 목자는 죽은 자고 그 죽은 자를 천사가 복음으로 살려내는 이야기, 이게 바로 오늘 이야기입니다. 이게 오늘 이야기에요. 우리 보기에 목자가 아까 뭐 자본주의 돈 해가지고 자기 밥 먹고 살고 아르바이트하고 그런 이야기 했지요. 그런 복잡한 이야기할게 아니고 그 자체가 죽은 거란 말이죠. 기존의 인간의 시공간. 모든 공간. 하지만 거기에 천사가 침투해서 그걸 뭉개버릴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자, 끝으로 누가복음 2장 13절 한번 보겠습니다. 2장 13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갑자기 숫자가 많아졌어요. 숫자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허다해요. 하나 둘 셀 수가 없어요. 이걸 셀 수 없는 것을 수학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무한이라고 합니다.
무한이 아닌 숫자가 헤아리는 연속성과 무한의 연속성의 차이가 있어요. 무한의 연속성과. 새로 책 나올 책 이름을 잊어버렸다. 에스더 책이 나오는데 그 책에 보면 무한에 관한 수학 무한에 관한 내용이 나올 거에요. 무한은 셈하기가 안돼요. 하나 둘 이렇게 셈하기가 안된다 이 말이죠.
허다한 천사가 왔다는 말은 이 땅의 시공간에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허다한 천사가 와서 하는 말이 14절 뭐라고 합니까? 다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자, 땅에서는 기뻐하는 자입니까? 기뻐하심을 입은 자 수동태에요? 수동이에요? 피동이에요? “기뻐하심을 입은 자”에요.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기뻐할만한 것이 없는데 인생 꼬이고 뭐 이래가지고 짜증나는데 주님께서는 주님의 스스로 기뻐함을 여기다 덮쳐버린 겁니다. 마치 소스를 탕수육에다가 소스를 붓듯이 그냥 일괄적으로 기뻐하심을 부어버리니까 그 다음부터 우리 인생은 기뻐하심, 기뻐하심을 계속 생산해내는 식으로 계속 끌고가시는 거에요. 우리 꼬라지가 엉망이라도 계속 주님께서는 그 자체가 기뻐하심이에요.
이게 바로 우리 한순간 순간이 이게 우리가 측정해서 되는게 아니고 우리를 계산해서 하는게 아니고 이거는 하나의 증상, 재채기, 기침. 오늘 제목을 뭐라고 하려고 했지. 다 잊어버렸다.‘죄의 증상’. 하나의 우리가 이 땅의 죄의 증상을 다윗은 즐겼어요. 내가 죄인됨을.
그러니까 자기가 핑계대듯이 엄마 핑계댄게 아니고 비로소 내가 몰랐던 사실. 내가 이쪽세계만 알았지 저쪽세계는 몰랐잖아요. 내가 잘못해서 죄 지은게 아니고 죄 지을 수밖에 없어서 죄인이라는 점을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선지자 만나고 난 뒤에 비로소 나한테는 책임감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렇게 기뻐한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속였는지 아니면 누가 속였는지 우리가 아는 것은 남들과의 서로 눈 마주치면서 긁어모았던 그런 정보에 불과한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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