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신의 국경에서 20042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5. 5. 08:08
2020-04-21 23:53:17조회 : 213         
신의 국경에서 누가복음 2:1 200421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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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 (IP:59.♡.122.247)20-05-04 23:41 
강남-누가복음 2장 1절 (신의 국경에서) 200421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2장 1절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이렇게 시작되고 있지요. 성경에서 사람 이름 나오고 지명 나오면 사람들은 또 골치 아파합니다.


꼭 그것까지 우리가 알아야 하느냐. 그냥 좋은 교훈, 좋은 말씀만 주셔가지고 실천할 수 있는 것만 주시면 되지 뭐 아구스도가 어떠니 어느 아저씨인지 모르겠지만 또 구레뇨가 뭐가 그 사람을 꼭 알아야 되느냐라는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 이름이 나올 때는 이게 뭐냐 하면 역사라는 겁니다. 역사가 돼요 사람 이름은. 역사가 되면 이거는 역사는 뭐냐 하면은 보편적이다. 역사는 보편적이에요. 보편적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모든 것을 다 억누른다. 보편적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모든 사람들의 차이를 다 없애버리는 거에요. 신종 코로나 같은 것이 대표자에요. 모든 것을 다 없애버리죠.


그리고 공중파 TV같은 것. 선택의 여지가 없이 TV 틀면 공중파 TV MBC KBS SBS 그냥 나오잖아요. 그냥. 이게 보편적인 거에요. 개인의 차이를 없애버립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가이사  아구스도라는 사람 구레뇨라는 사람 이 사람이 등장함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생각을 들게 하는가 하면은 신자라는 것. 성도, 신자죠.


신자가 있어야 될 이유가 있는가? 신자가 꼭 있어야 될 이유가 있는가? 이유를 빼버리면 신자가 있어야 되는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한번 갖게 되는 거에요. 보통 사람들은 성경에서 성도 나오고 신자 나오면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면은 나는 신자일까? 나는 아닐까? 여기에 신경을 쓰겠지요.


목사님 저 신자 맞아요? 목사님 저 창세전부터 예정된 사람 맞습니까? 내가 죽으면 구원 받습니까? 아니면 지옥 갑니까? 궁금증이 나는 신자일까? 신자 아닐까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이거는 보편성이 아니고 이건 관심사가 뭐냐 하면은 보편성이 아니고 개별자에게 관심 있죠. 개별자.


그러나 성경에서 역사가 등장한다는 것은 이 보편성이 개별자를, 개별적인 의식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에 신자라는 것이 있어야 될 이유를 이 세상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신자가 나타나야 될 이유를 77억 인구들이 다 모여서 아무리 연구하고 해도 신자가 있어야 될 이유를 인간 속에서는 뽑아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왜 이 땅에서 기독교 신자가 몇 명이고 천국 가는 사람은 몇 명이고 신천지는 14만 4천이고 그 이야기 왜 나오느냐? 그것은 자기 기만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기만’. 자기 기만이란 무슨 뜻입니까? 스스로 자기를 속여보는 거에요. 속여보는 거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관심사가 나 죽으면 천당갈까 지옥갈까 관심사 출발점이 자기 개별자에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거는 이런 질문 나온다는 자체가 이 자체가 아무리 목사로부터 당신 신자 맞습니다라는 소리 듣더라도 이거는 자기 기만이에요.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겁니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되는가? 보편성에서부터 출발해야 되지요. ‘보편성’.


모든 인간의 역사는 내가 불교신자가 되든 내가 기독교 신자가 되든 상관없이 예수님 태어날 때 가이사 아구스도라는 그러한 황제가 로마의 황제였다. 끝이에요. 개별자 내가 어떻게 되든 간에 역사는 모든 것을 다 차이를 다 없애버려요. 이 기만을 완전히 깨버려요. 역사가 모든 기만을 깨버립니다.


역사가 모든 기만을 깨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역사가 보편성이 모든 개별성을 깨기 때문에 “나는 신자입니다” 하는 그것은 그 모든걸 깨는 그 깨는 작업에 의하면 그것이 황당한 거짓말이 될 뿐이에요. 나는 죽어서 천당갑니다가 거짓말 된다고요. 누가 물어봤어? 너한테? 내가 아는 것은 그 당시 아구스도가 로마 황제였어. 그 앞에 그게 주도권을 갖고 있어요.


이제 누가복음 2장에서 역사를 언급하는 이유를 알겠지요? 내가 천당 가기 위해서 성경을 이용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성경 어디 봐도 내가 천당 간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예레미야에 있습니까? 이사야에 있습니까? 없지요? 에스겔에 한윤범이라는 이름 나옵니까? 안 나오잖아요. 어디서 성경 보면서 자기를 기만해요. 거기 내 구원이라는게 어디 있어요? 없어요.


출발점이 잘못된 거에요. 성경의 출발점은 뭐냐 하면은 모든 인간은 역사 속에 잠겼다. 잠겨있다. 따라서 그 말은 뭐냐? 신자가 꼭 있어야 될 이유는 이 지상에서는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고 싶은 사람은 있지요. 천국 지옥 있다면 이왕이면 천국가고 싶은 사람 있어요. 아마 대다수일거에요.


그러나 그것은 자기 기만, 속임수에 불과하고 자기 욕구에 불과하지 역사는 그것을 인정해준 적이 없습니다. 어떤 역사적 근거에도 나 천당가는 근거는 없습니다. 혼자 착각하고 있는 거에요. 이 말은 하나님의 성도라 하는 것은 내가 나를 구원받고 천당가고 싶다는 그 욕구에 의해서 발생되지 않습니다. 내 욕구에 의해서.


더 어려운 말로 해볼까요? 목사님 저는 죽어서 천당가고 싶어요. 지옥가기 싫어요라고 하는 사람 있다면 제가 묻지요. 당신이 구원받고 싶은데 왜 예수님 태어날 때에 로마 황제가 가이사 아구스도이어야 하는지 증명해보세요.


내가 천당가고 싶은데 하필이면 나 천당가고 싶은 것과 그 당시 예수님 당시 이름도 어렵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로마 황제가 될 당의성, 당의성이란 말  알지요? 마땅히 그래야 될 이유를 당신 입에서 증명해보세요. 증명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이거는 제가 말한게 아니라 하나님이 욥에게 한 거에요. 하나님 저를 판정해 주세요. 저는 억울합니다. 저는 죄 지은게 없는데 고통받고 있습니다 할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 네가 정당한 것과 별이 북두칠성이 있어야 될 둘의 연관성을 한번 지어봐라. 그 둘을 한번 이어봐라.


욥 네가 의롭다는 것을 별이 북두칠성이 있다는 것과 정확하게 그 자료를 집어넣어서 그 북두칠성이 있다는 그 정보 자체를 집어넣어서 나 구원받는데 있어서 의로운데 있어서 필히 북두칠성이 있어야 돼. 내 앞에서 증명해봐라. 욥은 증명을 못합니다. 그게 바로 네 기만이야. 자기 기만이라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는 필히 달은 있어야 되고 별은 있어야 돼요. 예수님의 구원에서 모든 것이 증명이 돼요. 예수님의 구원에 있어서는. 하늘의 별도 달도 해도 이른비 늦은비 전부다 이스라엘 약속의 땅, 이방 민족의 배척, 본디오 빌라도의 그러한 공격, 백성들의 저주, 십자가 죽음 이 모든 것이 하나 빠짐없이 몽땅 어디로 쏠립니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셔야 하고 그래서 예수님은 사흘만에 부활한다는 것이 증명이 돼요. 제가 골로새서 1장 16절 언급 안 해도 아시겠지요?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딱  정리되지요. 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라고요? 하나님의 형상이죠.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로 집결된 그 상태가 형상이어야 돼요. 모든게.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그런 인간은 없어요. 그렇다면 여기 역사의 보편성으로 먼저 출발을 하더라 이 말이죠.

출발을 이렇게 했을 때 이 역사적 기록을 왜 하느냐?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역사가 무슨 ~성이라고 했습니까? 좀 어려운데 다시 복습합시다. 역사의 성격은 ~~적이다? 보편적이죠. 그 역사적 성격을 그래도 합류하면서 역사를 벗어난 역사. 초역사죠.


역사성을 품으면서 역사의 발목잡기를 떼내고 거기서 극복하신 역사. 그게 뭐냐? 십자가죠. 십자가가 역사인 동시에 보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보편적인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도 이게 선별적이에요. 역사한테 발목 잡히지 않는 역사성. 그게 바로 역사를 딛고 역사를 째고 이겨낸 역사가 차마 못 따라온 또 다른 역사로써 십자가죠.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역사적으로 이야기하죠. “십자가가”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갈라디아서 3장 1절 그 다음에 “눈앞에 보인다” 했지요. 마치 역사적으로 우리가 피아노가 보인다는 것처럼 십자가 보인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디 보이는데? 이렇게 되지요. 어디 보이는데? 안 보이는데?! 안 보인다는 거에요. 그런데 십자가는 역사를 그냥 십자가 사건이 그냥 하늘에서 폭죽 터지듯이 터진게 아니고 역사를 경유해서 터졌지요.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을.


그 다음부터는 십자가가 보이는 방법은 역사가 인간들이 조립하는 역사를 째는 거에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역사 가운데서 뭐도 포함되느냐 하면 나는 역사적으로 나는 구원받았다는 이 사실, 나는 구원받았다는 이것을 누가 쨉니까? 십자가가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쓰레기가 있기 때문에. 그 치매 걸린 할머니의 특징이 뭐냐? 온 동네에 다니면서 하루 일과가 온 동네에 버린 쓰레기란 쓰레기는 집구석에 다 갖다놓는 거에요. 그 할머니의 그러한 것이 치매 걸릴 때만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 할머니가 치매 걸리기 전에도 멀쩡할 때도 동네에서 혹시 쓸모 있는데 갖다버린거 있잖아요. 그런거 소유하고 싶다는 본능이 정신이 약간 이상할 때 그게 노골적으로 드러난 거에요. 쓰레기 모으는 거에요. 그럼 우리는 안 모을까요? 우리도 쓰레기 모으는 거에요.


초등학교 2학년 되가지고 이제 학교는 안가고 온라인 수업한다고 할 때에 할아버지나 엄마가 옆에 붙어가지고 정신 바짝 차리고 집중력 있게 해! 이거 쓰레기 아니에요? 애가 집중력 있게 공부하게 되면 그게 어디 안에 들어오지요? 애가 성적이 좋으면 어디 안에 들어옵니까? 내 안에 들어오지요. 계속 그게 누적되고 쌓이지요.


그러면 자기의 개별성은 점점 뭐가 됩니까? 하나의 벙커가 되겠지요. 우리는 그걸 가지고 뭐냐 하면 그걸 역사라고 하는데 역사 아닙니다. 그거는 개별성이죠. 역사는 보편성이 있어야 돼요. 벌써 강의 얼마 안 지나서 다 잊어버렸지요.


역사는 전체 어떤 차이 개성도 용납하지 않는 거에요. 역사는. 신종 코로나라는 역사는 어떤 빈부격차라든지 성별을 구별하지 않아요. 아 너무 이쁜데. 너무 이뻐도 죽었어요. 너무 이뻐도 코로나 걸리면 죽어요. 너무 이뻐도. 아 너무 쓸모 있다. 쓸모 있어도 죽어요 그냥.


신종 코로나 치료하다가 의사들 얼마나 많이 죽었습니까? 의사가 삼십몇살까지 공부한다고 수억이 들어가거든요. 그런데 신종코로나 때문에 죽었잖아요. 3억5천만원 다 날라가는 거에요. 성경에서 가이사 아우구스 그리고 구레뇨가 수레아 총독 되었을 때에 여기 2장 1장에 보면 천하로 호적하라 해놓고 호적 앞에 한글로 글자 하나 들어가죠.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앞에 글자 한번 보세요. ‘다’ all, 모두, 다 보편성입니다. 모두 하나도 예외 없이 다 하라는 거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장차 천국 가는 백성은 보편성에 의해서 구원되지 개별적으로 내가 얼마나 천당 가고 싶은가 그러한 희망과 절규하듯이 간구함, 아무 소용없어요.


십자가라는 역사성의 그 성격을 합류하면서 그 역사성이 네가 요구해서 구원되는게 아니라는 거에요. 요구해서. 너는 네 구원에서 뭐를 떼라? 손을 떼라는 겁니다. 너 자신을 기만하지 말고. 우리 자신을 기만한다는 말은 날마다 나를 조작한다는 뜻이에요. 나를 계속 구성하고 있는 거에요. 재료는 뭐다? 쓰레기다.


자기 안의 쓰레기 해가지고 계속 쓰레기 모아놓고 주여 이 정도 하면 구원받겠지요? 이 정도 성가대 했으면 구원받겠지요. 계속해서 쓰레기를 모으고 목사는 쓰레기 모으라고 계속 닦달하고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그러고 있지요.


성경은 역사성인데요. 보편성인데. 모두 다 똑같은 입장으로 만들어 버려요. 똑같은 입장으로.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인데 호적 안 해도 되겠지. 하나님의 아들인데 호적 안 해도 됩니까? 허경영이는 주민등록 없어도 되겠어요? 공중부양하는데. 특별대우 받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되고 싶은 사람은 대부분이지만 신자는 단 한명도 없다가 아니라 있을 이유가 없어요. 신자가 내가 신자가 될 이유는 나에게서 찾지 마세요. 나와 엮이지 마세요. 내가 신자 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막상 신자가 되게 되면 신자라는게 십자가의 보편성입니다. 개성같은 거 묻지 않고 남, 여 따지지 않고 성령주셔서 구원받거든요.


그렇게 되면 ‘나’라는 개별자로 시작하잖아요. 구원받기는 내 개별적인 욕구로 구원받습니까? 보편성 때문에 구원받습니까? 십자가는 보편성. 다시 이야기하면 십자가는 왜 보편성이냐? 역사를 통과했기 때문에 역사는 거쳤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개별자가 이 사람이 신자가 되었다고 합시다. 이 신자 된다는게 굉장히 어색합니다. 진짜 오랜만엔 솔직한 이야기하지요. 신자가 되게 어색해요. 몸에 안 맞아요. 몸에 안 맞는다고요. 그래서 교회에서는 뭐냐 하면은 실제로는 신자가 몸에 안 맞는데 교회에서는 몸에 맞도록 거기에다가 윤리적 도덕적으로 이거 뭡니까 인공조미료 MSG를 뿌리는 거에요.


신자가 되면 화평과 양성과 하나님의 형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착하면 도덕적인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 다음에 나빴던 사람이 착해집니다. 자꾸 인공감미료는 계속 치는 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어색하지는 않으면서도 신자는 신자대로 되는 노력을 인간들이 뭐하겠어요? 자기 기만과 자기 조작에 계속 나가겠지요.


원래는 어색해야 되는데요. 어색해야 되는데 이게 안 어색하게 교회가 앞장서서 인간을 사기꾼으로 만드는 거에요. 신자도 아닌데 그 모델이 누구겠습니까? 모델이 옆에 더 경건하게 보이는 권사님이나 장로님, 그런 분들이 모델이 되고 목사님이 모델이 되겠지요.


그러나 성경에는 신자의 모델이 누구지요? 신자의 모델이 바로 스데반 집사나 사도 바울이죠. 그리고 예수님이죠. 사도 베드로. 스데반 집사 어떻게 살았습니까? 세례 요한이 어떻게 살았어요?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었지요? 돌에 맞아 죽었잖아요.


세상에 어느 신학교에서 스데반 집사를 목표로 목회자 됩시다 하는 신학교 어디 있어요? 없지요. 큰 교회 예배당하고 좋은 차타고 이게 목표가 된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주의 종은 도와주신다. 하나님 일 하게 되면 모든 좋은 것에서 함께 한다.


어디서 희한한 구절 다 뽑아가지고 가장 좋은 것을 서로 나눠라. 구약 봐라. 제사장에게 제일 만물. 햄버거도 제일 먼저 나온 것, 제일 좋은 것 먼저 먹잖아. 교인들은 새 차 타면서 목사는 헌 차 타면 되겠느냐 이런 거.


어색해야 돼요. 왜냐하면 이 개별자한테는 이게 도저히 낯선 것 낯선 규정을 하는데 신자라는 규정을 할 때 그 모델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가 모델이 돼서 신자로 보편성을 가지고 하니까 나처럼 십자가 길을 가라고 신자 되게 한 거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늘 좁은 길이 싫어요. 본성상 우리는 외롭고 쓸쓸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외롭고 쓸쓸한 것은 그것은 나중에 나이 들어서 병들고 나이 들어가지고 은퇴해가지고 이제는 다방에 위스키 한잔 낭만을 위해서 최백호 같으면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게 외로운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취미는 무엇입니까? 고독. 이건 말이 안되지요. 고독이 무슨 취미가 되겠어요. 사랑의 쓸쓸함에 대해서요 이런거요. 신자라 하는 것은 왜 어색하냐? 인간의 힘으로 나타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예상하는 내 신분이 아니기 때문에 굉장히 어색합니다. 이 어색함.


여러분들은 실력이 되기 때문에 여지없이 어렵게 하겠습니다. 여지없이 어렵게 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뭐냐 하면 말해지는 나. ‘말해지는 나’. 피동형이죠. 이거와 대조되는 것은 ‘말하는 나’. 이 두 종류의 인간성이 등장합니다.


말하는 나가 되게 되면요 이거는 뭐냐 하면 누구를 증거하느냐하면 나를 증거해요. 말해지는 나는 누굴 증거하느냐? 이거는 내가 원하지 않는데 그런 나가 되고 말았어요 라고 ‘나’가 ‘나’말고 다른 분을 증거하지요. 내 인생을 내가 책임져야 되는데 이제는 그러지 못하고 내가 책임 못 지고 책임자가 따로 있을 때 나는 그분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겁니다.


누가 마태복음 10장 20절을 한번 읽어보세요. 마태복음 10장 20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자, 여기에 성령께서 말씀하신다 이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굉장히 간편한데 앞에 뭘 갖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말한다 하면 얼마나 간편해요.


그렇게 이야기 안하고 앞에 뭘 붙이느냐 하면은 말하는 너는 아니거든. 말하는 너는 아니야. 말하는 내가 말하고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어색하지 않아요. 이거는 내가 개별적으로 죽어서 천당 가고싶어서 환장한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유지되야 내가 천당 가고싶은 내가 스스로 내가 책임자고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결과로서 구원받느냐 안 받느냐 내 손에 달린 거거든요 이게. 이게 뭐냐? 모든 이 땅에 태어난 개별자의 특징이에요. 태어날 때부터.


내가 어떤 목표가 있고 그 천국 간다는 목표 구원받겠다는 목표가 있으면 그거는 어디까지나 내 일이야 내 일. 그럼 내 일에서 내가 손 뗄 수 있습니까? 안되지요? 그러면 노력을 누가해야 돼요? 내가 빡시게 내가 노력해야 되는 거에요. 목사님 말씀만 하옵소서 내가 듣겠나이다. 주여 말씀만 하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그 말씀을 가지고 내가 지켜나가는 겁니다.


이게 날마다 해놓고 자기 조종. 내가 어떤 모습일까를 날마다 조종, 자기 기만하는 거에요. 자기 설정을 계속 바꾸어나가는 거에요. 어색하지 않게. 여러분 남의 옷을 입어보세요. 이상하게 어색하지요.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우리의 옷은 무엇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 했습니다.


내 옷이 아니란 뜻입니다. 내 옷이 아니고 내가 죽여버린 그 분의 옷을 내가 입고 있는 거에요. 그 옷을 입을 때마다 우리는 뭘 느끼느냐 하면 아 참 내가 이 옷의 주인공을 내가 죽였잖아 하는 식이에요. 여러분 그 어떤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나중에 이야기 들으면 어떤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요.


어떤 사람이 어떤 여자하고 간음을 했어요. 간음을 했는데 그 사람이 누구하고 결혼했느냐 하면 자기가 간음한 여자하고 결혼했어요. 이거 누구 이야기입니까? 이거 누구 이야기에요? 다윗 이야기죠. 그러면 보통 세상에서는 어떻게 합니까? 보통 세상 같으면 자기가 바람피웠으니까 남편 죽였잖아요. 요새 같으면 드라마 같으면 독살한거죠. 다윗은 독살은 안했지만 죽였단 말이죠.


그러면 이것을 감추기 위해서 아오지 탄광을 보내던지 아니면 앉아가지고 봉투 딱 내가지고 이거면 돼? 이거 먹고 다시 우리집에 얼씬도 하지 말아라. 근본도 없는 것들 뭐 이래가지고 미국으로 보내든지. 애를 지우든지 보내라고 쉬쉬 하는게 보통이죠.


그런데 다윗은 어떻게 됩니까? 다윗이 어떤 여자의 남편을 내가 죽였다를 까발리는 그것을 까발리는 식으로 누구하고 결혼해요? 밧세바하고 결혼하잖아요. 밧세바. 이게 다윗의 잘잘못을 하지 마세요.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선악이기 때문에 이것은 구원하고 관계없습니다.


이게 십자가의 보편성은 생명나무 차원이기 때문에 이것이 다윗이 받은 사명입니다. 좀 사명치고는 좀 화려하지요. 번잡스럽고 복잡하고. 그것이 다윗의 사명이에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앞당겨서 그렇게 보여주는 겁니다.


다윗이 가슴 치면서 “아 그때 밧세바 네가 이렇게 코가 좀 낮았으면” 이런 후회 안 해요.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진다는 것에 있어서 너무나 동떨어진 어색함. 나의 의로움과 정당성 이것을 끌어모아서 천국 따내겠다는 이 기본적인, 개별적인 이 모든 것.


이 모든 것과 너무나 판이한 다른 원리가 나를 아예 지배할 때 나는 나에 대해서 말 못하고 무엇에 대해서? 내가 나 되게 한 그분에 대해서 말하여지는 존재에요. 끝까지 나는 말하는 존재는 개무시당하는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게 되면 우리가 이 점을 알지요. 나는 주님 덕분으로 구원받았지. 은혜입니다. 말을 하면서도 어느새 3초도 4초도 안 지나서 이게 뭐로 변하느냐 하면은 슬금슬금 나 예수님 증거 하니까 나 믿는 자 맞잖아 이렇게 또 옮겨가요. 아 이거 골치 아파.


이게 육신의 본성이 바로 말해지는 이것이 목표가 되는데 어느새 육신이 있기 때문에 내 기만과 내 조성에 내용으로 쓰레기로서 들어와버린 거에요. 오늘 제목을 저는 이렇게 봅니다. 오늘 제목을 소설책 이름은 같은데 ‘신의 국경에서’.


신의 국경에 검문소 있겠지요. 신의 국경에 뭐가 있느냐 하면 신의 국경에 율법이 있어요. 율법. 율법이 포진된 검문소에서 내가 뭐냐 하면 나는 나의 죽음을 발견한다. 국경선에서. 그러면 이 율법을 통해서 내가 나의 죽음을 발견하는게 아니고 율법을 통해서 나 이렇게 잘났다 라고 하고 싶지요?


그거는 진짜 검문소 신의 국경의 검문소가 아니고 자기가 그걸 피해가 버렸어요. 나를 잃어버리기 싫어서. 다른 사람이 내가 신자 아니라고 하는게 그게 너무 겁나서. 남한테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내가 내 목적 달성에 실패하는 것처럼 느껴져가지고 그게 겁나서.


보편 대다수 사람들이 인정받고 싶은 그것이 마치 더 진리 같애. 대다수가 이야기해주니까. 넓은 길이 진리 같애. 좁은 길보다 넓은 길이 진리 같애요. 모든 사람이 예수 죽이라 할 때에 적극적으로 참여는 안했지만 죽여라 할 때 같이 동참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12제자잖아요. 12제자. 예수님의 12제자.


그들은 역사가 어떻게 보편적으로 일괄적으로 흘러가는걸 모르고 역사가 신종 코로나라는 것을 모르고 개별적으로 주님과 좋은 관계에 있으면 특별대우 받아서 천당 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의 보편성은 역사라는 보편성 배후에 무슨 보편성이 있느냐? 바로 악마의 통치, 악마의 통치라는 보편성이 있는 줄은 베드로가 몰랐던 거에요. ‘악마의 보편성’.


너는 너 자신에게 충실하라. 네 인생에 책임지라는 그렇게 선악적인 사고방식으로 계속해서 나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포기 못하게 만드는 그렇게 세뇌시키는 악마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어떤 분이요 저한테 메일로 이런 질문을 했어요.


뭐냐 하면은 자기는 감리교 3학년인데 몇년만 지나면 자기가 목사가 된대요. 그런데 우리 감리교 교단에서 어떤 사람은 목사도 하면서 밥벌이 안 될 때는 또 아르바이트 해가지고 목사 하면서도 생계유지 한탕 두탕 또 뛰어가지고 이렇게 해야 되는데 진짜 주의 종은 이렇게 목회에만 전념 안하고 또 다른 밥벌이하듯이 이렇게 해도 됩니까?


우리 감리교 교단에서는 다 용인하고 있는데 목사님 의견은 어떻습니까? 저한테 그런 질문을 했어요. 오랜만에 메일 보낸다 해가지고. 답변을 이렇게 했어요. 그게 교회냐고 다 물어보라고요. 그게 교회냐? 그게 감리교 교단이라는게 과연 교회냐? 그게 진짜 성경에 나오는 교회냐?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쪽에서 대다수는 이야기하는데 목사님 의견은 어떻습니까? 지금 참고로 정보를 얻으려고 하는 거에요. 그 교회가 교회 아니라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왜그러느냐 하면은 그 교단이 인정해줄 때 자기는 목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또 어떤 사람은 식사하다가 이런 질문 했어요. 요새 왜 목사님들은 왜 성경을 모르고 잘 몰라요. 교인들이 물어보면 목사들이 성경대로 왜 답변을 잘 못합니까? 이런 질문을 어떤 분이 식사하다 그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답변했지요. 목사가 성경 알게 되면 목사 안수를 못 받습니다. 그걸 몰랐어요? 목사가 교회에 신경 쓸 때 목사 안수를 주지, 말씀에 성경에 신경 쓰면 절대로 선배 목사가 목사 안수를 안줘요.


왜 교회를 신경을 써야 되느냐 하면 교회는 바로 개별자를 두둔하거든요. 개별자를 두둔함으로서 구성된 것이 교회다 이 말이죠. 보편성이 아니에요. 십자가 보편성이 아니에요. 역사의 보편성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요구한 바를 우리가 충족해드리겠습니다 이것 때문에 생긴 가게가 교회 아닙니까? 업소란 말이죠 업소. 개별자를 인정해주는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에는 어떤 신자도 없어요. 예수님 당시에 주도권을 쥐는 것은 가이사 아구스도에요. 왜? 다 호적을 다 해야 되니까. 심지어 거기서 누구도 예외 없었다? 예수님의 가족도 예외가 있었다? 없었다? 없었던 거에요.


예수 믿었다고 신종 코로나 안 걸린다. 예수 믿는데 뭐 나는 마스크 벗을래. 말도 안되는 소리. 그런 객기를 부리지마세요. 그거는 마귀가 예수님 시험할 때 하는 거랑 똑같습니다. 신종 코로나 안 걸릴래. 이미 안 걸려도 이미 죽었어. 안 걸려도. 태어날 때부터 죽었어 너는. 이미 죽은 자에요. 새삼스럽게 신종코로나 걸려서 죽었다 하지마세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신종 코로나 아니면 번개탄 피우든지 간에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러한 역사의 보편성은 누가복음 3장 봅시다. 여기 3장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3장 1절.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보세요. 또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이렇게 나오지요. 여기 또 역사 나오지요. 우리 아까 좋은 말씀 서로 사랑하라 그런 말씀 주지. 이거 왜 나오느냐 이렇게 따지겠지요? 왜 서로 사랑하라 뭐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만 있으면 우리는 내가 구원받고 싶은데 좋은 말씀 주셨으니까 그 말씀 지키면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내 쪽에서 백성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버리죠. 그래 하나님을 사랑하고 몸과 뜻을 다 해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 나는 구원받을 수 있다라는 아이디어가 뭡니까? 나는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잠재되어 있다고 선언하는거죠. 스스로 자인하는거죠. 이게 아까 자기 기만이죠. 자기 기만이죠.


그런데 아까 신의 국경에서 검문소에서 뭐라고 했어요? 뭐가 있다? 검문소에 뭐가 있었다? 율법이 있었지요. 율법은 우리를 뭐라고 합니까? 우리를 자기 죽음을 발견하지요. 죽은 자가 율법지킬 수 있습니까? 진짜 오랜만에 바른 소리 한다. 아니 죽은 자가 율법을 지킬 수 있어요? 죽은 자가.


죽은 자는 애초부터 죽은 자였음을 입증할 뿐이지 새삼스럽게 죽은 자보고 말씀지키라는 그런 요구를 하지를 않아요.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율법은 지킬 수 있다가 아니라 너는 아니야. 너는 끝났어 그게 뭐냐 하면 율법의 보편성이에요.


재주 있는 사람은 지키고 재주 없는 사람은 못 지키는게 아니고 율법의 보편성입니다. 그게 신의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의 국경에서 이미 검문이 되었다. 국경에서 이미 차단이 되었다 이 말이죠. 여기 이스라엘이 있으면 유다와 이두메, 에돔지방. 이두메지방. 에돔이라고 해요. 아켈라오라는 사람이 분봉왕. 이게 언제냐하면 B.C 4년부터 예수님 한창 활동할 때. B.C 33년인가 그렇게하고요.


여기에 이 지역과 이 갈릴리 지역은 누구냐 하면 안디바. 헤롯의 아들들이에요. 헤롯아킬라오. 헤롯안디바가 통치한 것. 저 위에 있는 시리아 가는데 그 북쪽에 있는 것은 헤롯 빌립. 헤롯 빌립은 누구하고 관계있느냐 하면은 세례 요한 잡아죽인 사람하고 관계있는 사람이에요. 여기에 뭐냐 하면은 로마 원로인 직령지에요. 직접 통치하는.


자, 이런 사람이 여기에 누가 배치합니까? 주님이 배치했지요. 주님이 배치했기 때문에 이 배치는 아까 공부할 때 우리가 복습 한번 해 봅시다. 이 세상의 역사적 배치는 무슨 사건을 유발하기 위한 연계된 것이다? 십자가를 위해서 이런 사람들이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은 누굴 통치한다? 그 당시의 모든 인간들을 통치하는 거에요. 유대인들이 자기는 율법 지켜 가지고 무슨 백성? 택한 백성이라고 했지요. 주께서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걸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인정하지를 않아요. 신자는 없어요.


그리고 여기 또 누가 있느냐? 12제자도 12제자 아무리 예수님 따라도 그들은 결국 아켈로 안디바 빌립의 통치를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받지요. 그들이 데모했습니까? 촛불집회했습니까? 12제자가. 모여 봐야 12명밖에 안돼. 경찰 보내가지고 밀어버리면 끝나는 거에요.


오늘날 우리가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어떻게 뭐 교회를 열고 이 나쁜 바이러스야 악마의 바이러스야 오라! 우리가 이기리라! 끝내 이기리라! 자기가 박세리도 아닌게. 양말 벗고 들어가봐야 그거 안쳐줍니다. 역사라는 보편성을 끄집어내는 힘은 오직 이 모든 것이 초점을 맞춘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 외에는 없어요.


그리고 거기에 따라 십자가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율법의 완성으로 십자가는 결국은 너로 하여금 네가 기대하지 않았던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혀줌으로서 너는 이미 신자가 된 거에요. 다시 말해서 네가 원하는 예상 못한 신자가 된 거에요. 예상한 신자가 아니고 예상 못한 신자에요. 그래서 신자라는 것이 우리에게 무척이나 어색합니다. 정말 어색해요.


쭉정이는 가라 이 말이죠. 예수 믿고 착각하지 말고 가라 이 말이죠. 어떤 사람은 가라 가라 해가지고 다 가버리고 한명도 없으면 어떡합니까? 한명도 없으면 어떡하겠어요? 그러면 한명도 없다고 해서 십자가의 보편성이 취소될 수는 필요는 없지요.


십자가의 보편성들이 그대로 드러날 수 있다면 한명이 없어야 한다면 한명도 없어야 되지요. 한명도 없어야 되지 뭐. 그래서 역사적으로 모든 것이 보편성이 있는 것은 오늘 제목은 신의 국경에서 지만 다른 거 더 구체적으로 하면 이겁니다. ‘현장성’.


앞에 뭘 붙여야 돼요. ‘나는 죽고 현장만 남기기’. 이게 주의 뜻이에요. 나는 죽고 내가 죽고 내 안에 현장만. 현장이 뭐냐 하면 이게 우연입니다. 우연이라서 필연이 아니에요. 우연이라서 그 현장을 계속 끌고나갈 수 있도록 내가 조치를 못해요 현장은. 이게 우연한 사건이기 때문에. 우연한 사건입니다.


여기 적절한 노래가 있어요. 우연이가 불렀던 우연히. 트롯트가 대세인데. 우연이가 부른 우연히 그 가사에 보게 되면 우연히 헤어졌던 남자를 또 만난 장소도 나이트라. 나이트에서 만났거든요. 그런데 자기 버리고 헤어졌던 남자가 이제 와가지고 눈물을 뚝뚝뚝 흘리면서 사과를 하니까 그 우연이가 뭐라고 합니까? 괜찮다고 하면서 등을 탁탁 두드려주지요. 괜찮다고 하면서. 나 벌써 용서했다고.


그런데 그 남자 그 나이트에서 만나길 미리 예상했습니까? 지금쯤 가면 옛날 헤어진 사람 있을걸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몰랐지요. 그야말로 노래 제목대로 우연히죠. 우연이라고요. 그러면 그 남자가 그 때 자기를 용서한 여자가 너무 좋아서 그 다음 일주일 뒤에 가면 그 여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일본말로해서 시마이.


다시 그 여자를 내 필연성 속에 내 인생에 다시 그 여자를 집어넣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의 순간적인 만남이었고 사건으로 그냥 폭죽놀이였어요. 그냥 터지고 끝난 거에요. 천국은 우리가 소유할 수가 없어요. 천국은. 그게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겁니다. 누가복음 이 대목하면 여러분들이 아 그런 뜻이구나 하는 거에요.


8절에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목자들이 천사들이 나타나는걸 예상했습니까? 못했습니까? 예상 못했지요. 왜냐하면 인간은 개별자 속에서 예상만 하기 때문에 보편성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요.


그러나 천사가 내려오는 것은 개별자의 목자들의 요구조건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또 엉터리 설교처럼 해가지고 목자가 밤새 기도했다 이러지 마세요. 목자는 양치는 아르바이트하고 있었지 지금 기도한게 아니에요 지금. 그냥 우연히라고요 우연히.


제가 이스라엘 가가지고 제일 감동받은 것을 지금 몇 번째 이야기하느냐 하면 바로 그 목자의 들판 보고 제가 예루살렘보고 놀랜게 아니고 목자의 들판보고 난 뒤에 제가 놀래버렸어요. 물론 순서가 그것부터 먼저 봐서 그렇지만. 그때 아 저 들판에 천사가 온 거죠. 그것도 하나의 사건으로서. 하나의 사건으로서요.


사건이 아닌 것은 우상입니다. 만약에 제가 보고있는데 천사가 나풀나풀 거리면서 들판에 나오기를 내가 기대한다면 이것은 내 개별자 생각이에요. 우연인데 나이트가면 또 그 여자 만날거다 이거는 말이 안돼요. 용서받는 것은 예상 못한 우연한 사건이었습니다.


우연히 구원받는 거에요. 우연히. 내가 노리고 구원 받은게 아니고. 우연히 받아서 그 다음부터는 내가 내 자체가 나한테 어색해. 뭘 봐도 구원받을 수가 없어요. 말씀에 의하면 천하의 죄인이 따로 없어요. 내 욕심대로 살고 모든 게 내 중심으로 살아요. 어딜 봐서 성도에요 이게. 어딜 봐서 구원받습니까?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섰지요. 이 대목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이 이런 식이에요. 모든 성경이. 인간은 말씀을 지킬 수가 없는 거에요. 오히려 내가 지키는게 아니고 말해지는 거에요. 말해지는 것. 그래서 목자가 예수님 태어나는데 쫓아가지요. 왜 쫓아가느냐? 내가 말하기 위해서 가는게 아니고 말 되어지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가게 하신 그분의 말을 자기가 운반, 매개체로 가는 거에요. 그것이 나의 증인이 아니고 나로 하여금 여기 있게 한 그분의 증인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 있게 한 그것이 무슨성이라고 했습니까? ‘현장성’. 현장성은 반드시 뭐가 죽고? ‘나는 죽고 현장만’ 내가 죽어야 현장만 남아요. 내가 죽어야 현장만 남아요.


나는 살인자에게 살인당하고 나는 죽지요? 그런데 형사가 강력계 형사가 보니까 그 범인을 찾아냈어요. 왜? 나는 죽어서 내가 저 사람이 죽였어요 말을 못해. 이미 죽었으니까 말을 못하는데 현장에 남아 있는 핏자국부터 해가지고 그 손자국에 있는 지문조사 DNA조사 해가지고 범인을 잡잖아요.


나는 하나의 이 땅에 주님의 증인으로써 과감하게 죽고 나를 죽임으로써 주께서 얻고자하는 것은 현장성만 얻고자하는 거죠.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 집사가 그렇지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죽었는데 예수님은 누굴 찾습니까? 돌로 때린 사람을 찾는게 아니고 스데반 집사를 영접하지요. 영접하는 거에요. 하나님의 일은 매사가 그런 식이에요.


나를 죽여버리는 거에요. 왜? 내가 현장성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나 살라고 하다보니까 가려버린 거에요. 자, 이러한 인간에게는 잘했나 못했나를 묻는게 아닙니다. 네가 제대로 했어? 네가 주의 증인 제대로 했어? 왜 너 증인해 주의 증인해야지라고 닦달내는게 아닙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활성화라고 해요. ‘활성화’.


활성화는 어디에 써야 되느냐 하면은 바이러스한테 해당되는 거에요. 바이러스. 만약에 집에 조그만 인공지능을 사놨는데 건전지 밧데리를 집어넣어야 작동되는거라 합시다. 한두달간 잘 가다가 그 다음부터는 인공지능을 ‘수지’라고 합시다. 수지야 오늘 TV에 뭐하지? 묻는데 답변을 안해요. 보니까 밧데리 다 됐어요.


밧데리 넣게 되면 그 인공지능이 착합니까? 나쁩니까? 아니면 활성화되는 거에요? 활성화 되지요. 성령이 오게 되면 오게 되면 뭐냐? 우리는 활성화되지요. 성령의 충만함이 없으면 우리는 뭐냐 하면은 엉뚱한 소리한다고요. “주여 제가 어찌하여 제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갑니까?” 이런 엉뚱한 소리하고 있다고요.


갑자기 자기 증인. 나는 살려고 노력했는데 주께서 왜 안도와주십니까? 이렇게 나온다고요. 내가 나쁜 짓 안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하게 됐으니까 저한테 뭐라고 하지마세요라고 뭔가 공포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기쁨이 없이 그냥 막 아주 버티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니까 성령에 취해버리니까 갑자기 뭡니까? 활성화되지요. 이거는 내 일이 아니고 누구 일이다? 주님의 자신의 몸을 주께서 활성화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뭐다? 인공지능이다. 또 우리는 바이러스다. 10분 쉽시다.

 홍민희 (IP:59.♡.122.247)20-05-04 23:41 
강남-누가복음 2장 1절 (신의 국경에서) 200421b-이근호 목사



이제 누가복음 2장이 슬슬 눈에 들어오지요? 왜 역사인가. 그리고 아 주님께서는 우리 보고 우리가 노력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활성화시켰다는 것. 활성화의 반대말은 뭐냐? 비활성화겠죠. 활성화시킨다. 비활성화시킨다. 이걸 성경적으로 하면 충만하다 충만하지 않다라는 뜻인데 성령에 충만하다 충만하지 않다.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에 성경 표현에 충만해서 죽었거든요. 평소에 사도 바울이 화장실 가서 죽을려고 활성화되지는 않았고요. 활성화 그 시점도 그것도 하나의 우연이에요. 사건이 되는 거죠. 스데반 집사가 스스로 자기가 성도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대고 설치는게 아니다 이 말이죠. 스데반 집사의 구원은 없어요. 주께서 말해지는 거죠.


그 현장성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은 현장성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있다’가 아니라 ‘여기에 주님이 계시다’를 보여주는 현장성이죠. 주님이 계시다. 주님이 계시다를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그동안 방해 놓는 거에요. 나 개별자가.


주님이 계신데 주님이 계시는 방법은 내가 여기 있는 이것이 나로 있고 싶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고 있는 것이 내가 살고 싶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계시다라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 있다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현장성을 하는 겁니다. 이건 하나의 사건이에요. 90년을 살아도 90년 자체가 사건이에요. 이거는 필연적이 아니고 우연적이에요. 늘 우연적이에요.


내일을 우리는 보장 못해요. 내일 살지 안 살지 보장 못합니다. 내일 못산다는 것을 너무 안타까워하지 마시고 반대로 생각해야 돼요. 지금 내가 없어야 되는데 여기 내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고 눈물 나도록 이게 고맙소. 김호중이 부른 ‘고맙소’. 눈물 나도록 고맙고 감사합니다. 내가 여기 왜 있지? 없어도 되는데 왜 있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기하기 짝이 없어요. 내가 왜 있지? 고맙습니다 하는 것. 그것도 활성화될 때 하는 이야기고요. 활성화. 성령의 충만화될 때 이야기죠. 성령의 충만함의 특징은 전에 이야기했는데 성령의 충만함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취한다’에요. 취한다. 취한다에 보통 취한다가 아니라 앞에 뭐가 붙습니까? 술에 취하는 것과 성령에 취하는 것을 상호 비교시켜놨어요. 에베소서 2장에 보면.


보통 여러분들은 술을 절대 입에도 안 대잖아요. 맥주도 안 되잖아요. 보리음료는 입에 대지만 맥주는 입에 안 대잖아요. 술 먹으면 특징이 뭐에요? 바로 자기가 자기를 잊어버리잖아요. 성령에 취함도 뭐냐 하면은 자기를 잊어버려요. 내가 내일 어떻게 하지? 나는 어떻게 해야 내가 성공한 인간이 되지 그거 다 잊어버려요. 내가 어떻게 착하면 성화되어서 천당 가지? 이거 다 잊어버리는 거에요.


나를 증거하기 위해서 내가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잘나고 내가 이렇게 구원에 성공했다 그거 자랑질하려고 남한테 인정받으려 살아가는 것이 내 사는 목적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활성화되는게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 활성화되는 현장에서 활성화되는 현장 자꾸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우리의 육신은 보통 강력한 육신이 아니지요.


바로 이 현장성을 우리가 조작해낸다는 겁니다. 이 구분, 구분 짓기 힘들어요. 성경에 보면 천사의 그 감격스러움을 내가 인위적으로 조작해내는 거에요. 물론 여기서 큰 교회 파이프 오르간이 하나의 보탬이 되겠고 수백명의 할렐루야 성가대가 조작하는데 감흥을 줘가지고 내가 스스로 기만하는데 보탬이 되는 그런 흥을 돋을 수가 있겠지요.


그리고 그걸 오감만족이라고 하는데 몸에 있어서 오감만족, 오감만족하는 것은 바로 미각 시각 청각 촉각 후각 이 다섯가지. ‘안이비설신’ 불교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그게 우리 속에 새로운 잠자는 나의 혼을 깨운다는 거에요. 워치만 니의 신학에 의하면 육과 혼과 영 삼분설 되가지고 육에서 혼으로 일단 전파하고 그리고 혼에서 영으로 전파하고 점프 두 번해서 구원받는다는 것.


그러니까 이분설이나 삼분설 그 자체가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 구원이죠. 여기에 관심이 있습니다. 내 구원 내가 살고자 할 때 무엇이 가려집니까? 바로 주님이 여기 계시다는 것 그게 그다지 안 기뻐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기쁘지 주님이 여기 있다라는 것을 본인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10절에 봅시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했지요.


지난번 강남 제가 혼자서 녹화할 때 사실 혼자 한 게 아니고 제 아내하고 옆에 같이 있었어요. 동영상 켜고 올 때 내 등짝 보이는게 싫다고 해가지고 같이 있었는데 그때 강의할 때 큰 기쁨이라는 것은 예상 못하고 예언이 나를 통해서 튀어나옴으로서 큰 기쁨이 되는 거에요. 활성화죠.


바이러스의 활성화는 외피와 알레르기에 있는 바이러스 외피를 뚫고 알레르기가 튀어나오는 알레르기는 변신 변형이 일어나요. 변형이 일어난 그것이 와서 10만배나 폭발해버릴 때 이게 바이러스의 활성화거든요. ‘활성화’.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내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되돌아오는 기쁨은 기쁨이 아니에요. 나를 찢어버리고 나오는 것이 기쁨이라고. 나를 찢어버리고. 여기서 말한 큰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예상 못한 겁니다. 그냥 우연이에요. 우연히. 분명히 이건 조작이 안 되는데 그런 일이 있고난 뒤 그 다음부터는 육신으로 돌아와서 또 조작을 하는 거에요.


그래서 여기서 도대체 인간의 자아라는 것이 얼마나 이렇게 지독한가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하면 이렇게 돼요. 제가 그림으로 설명할게요. 인간의 기본은 쾌락입니다. ‘쾌락’. 쾌락이라고 하는 것은 기쁨과 불쾌함 또는 기쁨과 편안함. 몸의 편안함과 불편함. 이게 기본적인 쾌락이거든요.


이거는 뭐냐 하면 이거는 자아 유전이에요. ‘자아 유전’. 애가 태어나면서 엉덩이 축축하면 울지요. 기저귀 갈아달라고. 그리고 인간의 본능적으로 배고프면 엄마한테 달려들지요. 갓난애들. 그때 엄마의 젖을 먹고 갑자기 불쾌에서 뭘로 됩니까? 기쁨으로 전환되지요. 인간은 기쁨과 불쾌 이것이 성인이 되도 제일 기저 상태. 밑의 상태 그대로 가는 겁니다. 그대로 가는 거에요.


대구강의에서 제가 이걸 언급했어요. 대구강의에서 제가 공리주의라고 이야기했는데 뭐라고 했습니까? 공리주의는 무엇이 진리고 무엇이 선이라고 했습니까? 내가 편하고 내가 컨디션 좋으면 이건 진리가 되고 내가 행복하면 진리고 내가 불쾌하고 편하지 못하면 이거는 진리가 아니라고 했지요.


편한 것을 가지고 영어로 ‘GOOD’이라고 해요. ‘GOOD’. 좋다. 그 반대말이 ‘BAD’. ‘나쁘다’. BAD BOY 하잖아요. 나쁜 인간. GOOD과 BAD로 이렇게 결정되는 거에요. 이게 밑에 깔렸다 이 말이죠. 깔린 거에요. 이것이 아무리 교회에서 말씀 듣고 백날해도 기본의 선은 뭐냐 하면은 나한테 잘해주면 천사고 내 돈 떼어먹으면 전부 다 악마에요.


나한테 욕하면 악마고 나한테 잘해주면 전부다 성령이고 천사고 하나님이 찾아오신 거에요.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구성하는 거에요. 이게 공리주의라고 하는 겁니다. ‘공리주의’. 그래서 국가가 공리주의라고 할 때는 뭐냐? 많은 사람이 행복해하면 그것이 그 국가의 진리가 된다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누가 손해되겠어요? 없는 사람, 못 배운 사람, 가난한 사람 이렇게 하겠지요. 그래서 그래서는 안 된다. 제일 없는 사람부터 먼저 배려하자 이게 롤스의 의무주의라 하는 거에요. ‘의무주의’. 다시 말해서 피자 한판을 세 사람이 나눌 때 가장 공평한 방법은 피자한판을 세 조각으로 나누고 그 다음에 제일 불만 많은 사람부터 먼저 셋 중에 하나를 고르게 하는 최고다 이 말입니다.


제일 따지는 사람. 제일 욕심이 많은 사람에게 먼저 고르게 하는 거에요. 그래야 말이 없어요. 만약에 욕심 많은 사람 나중에 하게 되면 네가 먼저 잘랐지. 누가 무슨 의도로 잘랐어? 이러면서 말이 안돼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무지의 베일. 커텐이 있는데 커텐 뒤에서는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그 사회에서 가장 약자한테 먼저 우선권을 주는 거에요. 약자한테. 기회를 주고.


70만원을 그 사람한테 주는 거에요. 70만원 80만원 100만원을 그 사람한테 먼저 주는 거에요. 그래야 입을 닫을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저쨌든 간에 이거는 전부다 뭐와 관련 있느냐 하면은 이거는 뭐냐 하면은 생존과 관련 있어요. 생존할 때 몸 아프고 나서 링겔 꽂고 몸 아프면 생존 아니지요. 차라리 죽는게 낫지요. 어떻게 돼요?


건강하고 돈도 많고 여유 있고 자기 취미생활 맘껏 할 수 있는 그런 상태에서 생존하는 것. 이게 목적인거에요. 이게 진리가 되는 거에요. 이게 대다수입니다. ‘대다수’. 그래서 이걸 대다수라는 말을 했지만 정확하게 말해서 모든 인간들끼리 공통점. 어떤 인간이든. 신자든 신자 아니든 거기서는 고개 끄덕일 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것이 서로 동일시되는 요소가 이미 인간세계에 살아 있는 거에요 이게.


쾌락이 있는데 이 쾌락을 전에 대구 강의할 때 이걸 이 쾌락이 개별적, 사적 쾌락이죠. 태어날 때 개인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형이 있는데 처음에는 자기 밖에 없었지. 동생이 나오게 되면 누굴 질투합니까? 이미 동생을 질투하고 때리고 하는 거에요. 왜냐하면 아빠 엄마의 모든 관심사가 자기에게 쏠리다가 애 낳고 동생 낳고 나니까 애한테 하니까 자기한테 뭘 느낍니까? 결핍을 느끼는 거에요.


결핍을 느낀다는 말은 전에 내가 누렸던 기쁨이 양이 안찬다. 그 기쁨만큼 되지를 않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은 이걸 다시 되찾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데 정신분석학에서 세 가지를 합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이 절대적인 것에 도달하지 못해서 우회로 비켜가는 것. 이걸 가지고 신경증이라고 합니다. ‘신경증’. 일반적으로 신경증이라고 하면 잘 익숙한 단어가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지어냈지만 가장 적합한 단어가 뭐냐? 신경질. 확 와 닿지 않습니까? ‘신경질’. 그 다음에 또 하나는 뭐냐 하면은 도착증. 도착증세. 도착이라고 하는 것은 물신. 그러니까 이 쾌락이 여의치 않으니까 대체물을 찾는 거에요. 대체물을. 대체물 그걸 이뤄가지고 자기가 스스로 기만하는 자기 속이는 거에요. 이 정도 되면 나 성화된 거 맞지? 본인이 본인의 믿음의 표준으로 삼는 거에요.


자꾸 뭐하죠? 변명하죠. 핑계대고 변명하죠. 정면 돌파하는 것. 정면 돌파. 용감하지요? 이게 바로 정신병. 이게 정신병이에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 현장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아무리 나이트클럽 찾아도 그 남자 그 여자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두 사람이 만나면 된다고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말 여러분들 어렵지만 들어보면 납득이 되는게 그때 자기를 차고 배신했던 남자를 우연히 만나가지고 등 두드리면서 나 벌써 용서했노라. 노래 한번 들어보세요. 우연히. 할 때 그때 마침 나왔던 음악이 색소폰 불던 음악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그 현장에 있던 둘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그때 그 나이트클럽에 있던 인원수가 76명. 76명과의 엮어진 구조와 음악소리.


그때 음악에서 그것도 2절 중간쯤. 2절 중간쯤하고 있는데 거기에 웨이터 가다가 엎어져가지고 맥주 깨는 소리. 이런 변수. 이런 변수들이 모여서 하나의 함수를 이루어서 그때 여자가 그때 그 정신에 정신이 사나워서 그런지 그래 내가 용서했다는 소리가 나오지 막상 무대 만들어놓고 그때 그 기분 날라가버렸어요. 없어요. 없어요. 억지입니다.


참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얼마나 좋아하는지. 나는 찬송부를 때 그때 있을 거에요. 하지만 찬송을 또 불러 보세요. 그때 감흥 전혀 살지 않습니다. 이미 지나갔어요. 이미 지나가버린  거에요. 천사가 큰 기쁨 봤다. 그렇다면 우리 같으면 그 천사가 큰 기쁨 본 것에 사람들이 그냥 있겠습니까?


큰 기쁨을 되풀이해서 경험하고 싶어서 그 사람의 목자나 그 후손들이 다시 그 장소에 가겠지요. 하늘 쳐다보겠지요. 누구 오기를? 천사 나타나기를. 큰 기쁨 소리고 천사가 하늘에서 무슨 소리 했습니까? 13절에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천사들이 했지요.


듣고 난 뒤에 이 소리가 너무 좋아서 천사님 한번만 더 해주시기 바랍니다. 휴대폰 꺼내가지고 녹음 준비해가지고 다시 한번 녹음 제대로 큐 싸인 들어갑니다.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지요. 왜냐하면 목자가 죽어야 주님이 사니까.


그 목자의 현장에 목자의 큰 기쁨의 현장은 누구 소유냐 하면은 주님이 시작하기 때문에 주님의 소유가 됩니다. 주님의 소유가 돼요. 목자가 또 받을 자격 없습니다. 목자는 그냥 당한 거에요. 이용당한 거에요. 재료로써. 주님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폭격기를 퍼붓는가 하면은 우연히 누가복음 2장 보다가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이 한글로 된 이 글자를 보면서 성령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당시의 천사가 있던 그 기쁨을 이 짧은 한국말 번역된 그 말씀을 보는 순간 “야! 이것이 바로 현장이다!” 지금 내가 듣고 있는 이것이 현장이라고 주께서 바이러스를 활성화 시키듯이 인공지능 활성화시키듯이 활성화 시키면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말해지도록 주께서 그렇게 다뤄진 거에요. 말씀의 활성화되도록. 목자의 손에서 떠나버렸어요.


이것은 주님에게 뭐가 있느냐? 면허권이 있어요. 주님의 특권이 주님한테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 속에서 활성화되는 거에요. 말씀이.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그냥 목사님이 이스라엘 가라고 하는데 나도 가서 한번 볼까? 가봤자 저는 그걸 보고 느꼈지만 다른 사람은 “와 이리 덥노? 35도가 넘고 왜이리 더워? 짜증난다 빨리 가자”.


아까 짜증난다 뭐였습니까? 신경질. 쾌락을 얻고자 하다가 빨리 가서 호텔 가가지고 샤워해야지. 이게 바로 기본 쾌락일 수 있어요. 그래서 인생이란 어떻게 사느냐? 옛날 있었던 그가 미지의 쾌락을 다시 되찾기 위해서 셋 중에 하나 신경질을 내면서 하는거. 이 신경질 둘로 나눌 수 있는데요. 신경질 이 세 가지 아셨지요? 신경질만 다시 분해해보겠습니다.


이것만 분해해서 신경질이 신경증세가 신경질이 이 두 개로 나눌 수 있어요. 물론 쾌락과는 갈수 없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또 새로 생기는 거에요. 그것 가지고 안 즐겁잖아. 더 즐거워야 돼. 이 마약이 문제가 그거잖아요. 그걸로 끝내는게 아니고 그걸로 인하여 그걸 했기 때문에 새로운 기쁨의 시작이 돼요.


새로운 욕구가 또 새로 시작되는 거에요. 늪에 빠져버리는 거에요. 늪에 빠지는 것. 남자들은 알지요. 당구 200치면 잘 친다 했지요. 200쳐보세요. 뭘 노립니까? 300. 300치면 끝입니까? 500. 당구 안쳐봤지요? 그러면 뭐했어요? 검도했어요? 아이고 우리 동네에서 잘 치면 되지요. 아니지요. 우리나라 대표. 아니지요. 올림픽. 이 욕구.


바둑 두는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바둑 두는 사람도 마찬가지. 어릴 때부터 3살 때 4살 때 엄마 따라서 바둑 했고 공부 포기하고 바둑 뒀는데 3살 때부터 이 22살, 25살 되가지고 몇 년이지? 거의 20년에서 15년 동안 공부하고 그중에서 한 달 500이상 버는 사람 우리나라 330명 바둑기사 가운데서 50명밖에 안됩니다. 50명.


나머지는 축구선수하고 똑같은 거에요. 나머지는 다른 직업을 찾아야 돼요. 신진수 박정환 이정도 되야 1억하지 그 외에는 옛날 이창호 그 다음에 이세돌 그런 사람이나 몇 억 벌지 그 다음에는 없어요. 이거는 가수도 마찬가지고 트롯트하는 사람이 2만명이 넘는데 그중에서 7명 나왔잖아요.


이게 뭐가 되느냐? 쾌락이 이게 환상을 이루고 이 환상, 영어로 하면 Dream 한자로 말하면 꿈이죠. 꿈을 보고 인간은 살아가는 거에요. 꿈을 보고. Boys be ambitious! 야망을 가져라. 이게 바로 환상이고 환상을 가지고 영업하는 곳이 교회 아닙니까. 헛꿈인데. 헛꿈이거든요.


꿈을 꾸면 꿀수록 점점 더 성질만 나는 거에요. 성질만. 이 성질의 하나에서는 히스테리 또 하나는 강박증. 둘 다 신경증에 속하는데 히스테리는 뭐냐 하면은 와악!! 고함 지르는게 히스테리에요. 노처녀 히스테리. 와아아아악!!! 누나 왜그래? 나가!!!!! 히스테리. 얻고자하는 것이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신체가 자동적으로 신체가 반응을 나타내는게 히스테리에요. 이거는 병명이 없어요. 그냥 성질나는 거에요.


강박증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이것은 약간의 꼼수를 부리는 거에요. 그래야 내가 마음 낮춰야지 내가. 내가 욕심내면 안돼. 성경에 보면 마음을 낮추라고 했으니까 마음 낮추면 마음은 편하겠지. 이거 복음 아는거 같애요. 이거 사기. 받고 싶지만 주께서 주셔야 되는 것이 내 쪽에서 양보하지.


이 강박증 특징은 뭐냐? 원하는게 있으면서도 안 원하는 체 마치 포기했는 양. 포기 안했는데 포기했던 것처럼 여기는 것. 돈?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 3만원 줄 때 아무것도 아니지. 30억 줘보세요. 엄마야! 하고 받지. 모든 인간은 이처럼 정신병자입니다. 정신병은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편집증, 정신분열증 두 가지인데 사실은 같은 거에요.


왜그러느냐 하면은 편집증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곧 신이다 에요. 내가 곧 신이다. 소위 교회 교인들 보면 다 들어 있어요. 하나의 인격 속에 내가 곧 신이다. 내가 말씀이고 요한복음 보니까 너희가 신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내가 신이다. 이걸 위트니스 파에서 전하는 거에요.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 여러분들 예수입니다. 이게 위트니스.


워치만 니의 제자면서도 친구라고 우기는, 우기는 거에요. 우기는게 위트니스에요. 그런데 워치만 니는 위트니스보고 친구라 한적 없어요. 희한하죠? 자기는 워치만 니 동원해가지고 지방교회라는걸 만든 거에요. 그것이 알고 싶지도 않지요. 결국 그것이 장사가 된다 이 말이죠. 그 지방교회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그 지방교회를 그대로 배운게 누구냐 하면은 이만희입니다.


지방교회를 한번 들어보세요. 들어보게 되면은 그러므로. 아멘!!! 그래서. 아멘!!! 무슨 이야기 했다고 지금 아멘. 그렇게 해서 스스로 집단적으로 최면에 빠지는 거에요. 집단 최면. 이만희 하고 똑같애요. 여러분들이 신이 되고싶지요? 여러분들이 구원받고 싶지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적극적인 모션을 취해야 됩니다.


내가 한마디 할 때에 힘을 모아서 신천지 왔다 간 사람은 아니까 아멘 해줘야 스스로 자기에게 믿음이 생기는 거에요. 그래야 14만 4천에 여러분 합격할 수 있습니다. 노리는 것이 뭐냐 하면 자기 구원이죠. 자기 개별성입니다. 뭘 가립니까? 주의 일하시는 현장성을 가려버리는 거에요. 내가 여기 있다가 되어버려요. 내가 있다에 대해서 주님이 여기 계시다.


그러니까 주님이 계시는데 나를 위해서 계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주님 계시려면 나 있다 없다가 생각나지 않아야 돼요. 왜냐하면 주님이 부활하고 난 뒤의 주의 있음은 주님의 죽으심에 의해서 호출 당한 사람들이 있음이 예수님의 있음이거든요. 왜? 십자가로 함께 있기 때문에. 복음 빠지고 우리끼리 모이는 것은 없어요. 십자가 이후에.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가 되지 내 신앙인 것을 내가 구원받은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모셔오는 건 안돼요. 어떤 목사는 간증하기를 새롭게 하소서 왜 그리 간증하는 사람 많은지 안 볼라했는데 요즘 또 보이데. 한 사람이 나는 신문배달 구두 닦기했는데 주의 임재하심이 나를 가득 찼다는 거에요. 주의 임재하심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가득 찼다는 거에요.


이 모든 종교의 승려들 특징입니다. 무당들의 특징일 수도 있고요. 그거는 뭡니까? 자기 말하는 거에요? 자기 말해지는 겁니까? 자기가 말한 거지요. 왜 그러냐하면 성경 말씀은 내가 아니요가 나와야지. 내가 아니요가 내용으로 들어가있어야 돼요.


다윗이 내가 내 아내 전남편을 내가 죽였습니다가 있어줘야 이게 본인이 알아서 자기 부인하는게 아니고요. 이건 정신병자고 내가 이만큼 낮추면 주께서 살아계시지 이건 정신병자고 역사적인 보편성에 의해서 실제로 죽인거 맞아요. 실제로 죽인게 맞기 때문에 따라서 나는 실제로 구원받은 거 맞아요. 왜? 내손으로 죽였으니까. 와 이 천하의 뻔뻔함.


그럼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겠어요? 다윗보고 너 잘했단 말인가? 주님이 잘했지. 주님이 잘하셨어요. 앞에 주님이 잘했기 때문에 나는 잘했다 할 수 없는 존재. 주님의 잘했음이 나의 못함을 이기고 주의 잘했음이 활성화되는 거에요. 나는 바이러스, 인공지능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에요.


좀 더 설명하게 되면 여기에 강박증이라고 하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강박증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서 그래 나는 이 말씀 못 지켜. 나는 늘 죄인이야라고 뭔가 자기 조정을 시도할 때 이걸 굉장히 복음적으로 생각되겠지만 이게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조작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조작이 돼요.


그래서 문제는 뭐냐? 그래서 기쁘던가요? 문제는 그거에요. 그래서 기쁘던가요? 아니면 좀 억지스러운가요? 내가 이렇게 해서라도 나는 신자이고 싶어한가요? 아니면 예상 밖의 기쁨이 있던가요? 차라리 우리 육신이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밖에 없지요. 이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주의 성령이 오셔서 너는 기껏 하는 것이 너는 신경증세 환자에 불과해서 너 스스로 네가 복음 아는 사람이고 싶지라는 그러한 통보가 왔을 때 그게 큰 기쁨이에요.


그래야 항상 내 외부에 의해서 내가 다루어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기 때문이에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를 순종으로 할 수 없고요 주께서 그렇게 순종하게끔 조성해나갑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라 하셨습니다라고. 대전 사시다가 서울 오라고 하라 하셨습니다. 물론 그전에는 이거는 내가 가야돼. 내가 가야돼. 본인이 결정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면 그 결정이 내 결정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거기에 서울 살라는 그 모든 조성된 모든 변수들이 내가 심어놓은게 아니거든요. 내가 심어놓은게 아니다. 요즘에 어떤 사람들은 말해요. 하려고 했는데 뭘 이렇게 예배 참석하려고 했는데 마침 신종 코로나 해가지고 마침 신종 코로나거든. 마침. 자기 예상은 뭐냐 하면 다음 주에는 교회 가야지 했는데 마침 코로나해가지고 1월말부터 안 나온 거에요. 1월말부터. 마침.


내가 보기에는 진짜 성령에 취했으면 진짜 믿음 좋은 거 맞아요. 이게 뭐냐? 우연이거든요. 우연히.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늘 이렇게 우연히를 통해서 나 자신을 다시 본다는 것은 자기 지나온 모든 과거도 필연은 전혀 없었고 우연과 우연의 연쇄, 연결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고백하는 거에요. 뒤늦게.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그러나 그 전에는 어떻게 봤습니까? 남하고 비교하느라 바빴잖아요. 나는 이정도 밖에 안돼. 동창생인데 나는 이런데 쟤는 저렇게 잘됐느냐. 아휴 부러워라. 나도 어떤 뭔가 돼야지. 아까 정신병에 의해서 그게 뭡니까? 그게 환각이 되는 겁니다. 환각 또는 환상, 꿈.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이거는 결핍. 없음을 자꾸 바라보는 거에요. 없음을.


네 이상적인 모습이 뭐냐? 일단 그려보지만 막상 이상적인 모습이 되어버리면 아무 기쁨이 아니고 그걸 클리셰라고 하지요. ‘클리셰’. 클리셰가 뭐냐 하면은 문학에서 상투적인 것. 진부한 것. 진부해요. ‘구해죠 홈즈’. 집 구하는 프로그램이거든요. 멋있어 보이지요. 가보세요. 이 넓은 집 줬단 말이죠. 한번 살아보라고요. 한 달도 안가가지고요 클리셰해요. 진부해요.


그리고 신경질나요. 뭐 때문에? 청소 누가 하느냐. 나는 전원생활하고 싶어. 나는 아파트 지겨워. 시멘트가 싫어! 전원생활 해보세요. 한 달 아니고 일주일만 가보세요. 잡초는 누가 뽑아요? 파리, 모기는 왜 그리 들끓는지? 쓰레기는 언제 치우는지. 집 자체가 짐이에요. 집 자체가. 따라서 두 사람 살거든 10평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10평 이상 되면 짐이에요.


아주 주님이 적절하게 주시지요. 적절하게. 세 사람 살면 15평 정도. 청소하기 내가 이거는 하나의 팁인데 청소하는데 별 힘이 들지 않을 때 가장 적합한 평수에요. 청소하는데. 뭐 낭만, 뷰가 좋다. 뷰가 좋은게 아니라 비유가 좋아. 남산이 보인다. 아이고 봐도 지루해. 바다가 보인다. 바다가 보이면 우울증 걸립니다. 전부 다 남이 갖고 있던 환상이 그걸 모방해서 그래요. 마귀가 그렇게 한 겁니다. 마귀가.


중요한 건 현장성입니다. 신의 국경에 검문소. 국경에서. 주님께서 이 목자가 이것 봤다고 해서 목자가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아니에요. 왜냐하면 구원받을려면 영원한 보편성 속에 포함이 되어야 되는데 자기는 그런 천사를 만났을 뿐이지 그게 보편성 속에 들어갈려면 아직 무슨 차례를 기다려야 되느냐 하면은 역사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보편적으로 누려줘야 돼요. 보편적으로.


그러려면 어디까지 기다려야 되는가? 십자가라는 역사적 사건이 있어야 돼요. 십자가 역사적 사건. 아기 예수 봤다고 구원받는 거 아닙니다. 십자가를 받아버리면 구태여 그 십자가 사건 안에 천사가 왔던 큰 기쁨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 기쁨은 바로 기쁨은 어떻게 기쁨 얻느냐 하면은 우리가 육신이기 때문에 육신=정신병자죠. 정신병자. 신경질 내죠. 육신을 깨트린다는 말은 내가 말한다에서 내가 말하여진다라고 전환되면서 여기서 뭐냐 하면은 여기서 기쁨이 쏟아집니다.


하나의 예를 들까요? 내가 예수 믿을 때 너무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 눈물 흘렸다가 되지요? 오직 나는 이제부터 사나 죽으나 주님만 증거하겠습니다 했지요? 몇 분 가지도 않아서 ‘나’라는 것은 주님을 만났고 주님을 증거 하는 사람 되었다 속에 들어가지요? 그러면 이 기쁨이 기쁨은 사건이고 우연성이기 때문에 ‘나’라는 이 육신의 개별성 안에 이게 들어올 수 있습니까? 못 들어옵니까?


못 들어와요. 못 들어오는데 이미 인간은 과거에 준해서 살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그때 구원받았다 11월 3일날 구원받았다. 들어왔지요? 기쁨이 남아있습니까? 전혀 없지요? 에프킬라입니까? 모기 있을 때 치면 모기향 냄새나는데 가버리고 없어요. 향수 뿌렸는데 분명히 향수인데 오후 되면 다 날라가버렸지요. 없지요. 없다 이 말이죠.


결국 남아있는 것은 옛날에 내가 신자다. 옛날 신자니까 시간상 한번 구원받았으면 구원받았고 한번 성령 있으면 성령이 보증받았기에 영원히 구원받는다라는 논리에서 앞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해서 내가 구원받았다 되면 이건 누구 증인돼요? 주님의 증인되는게 아니고 필연적이고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나의 증인되는 거에요.


나의 증인된 것을 정신분석하면 뭐냐 하면은 ‘내가 곧 신이다’ 에요. ‘신이다’ 하는 이게 정신병자. 정신병자. 복음 이야기하니까 우리 교회 참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많은 사람이 갔어요. 처음부터 노림수가 이근호 목사 설교 듣고 내가 신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왔는데 그 의도 자체가 여기에 있는 큰 쾌락, 구원받고자하는 쾌락을 얻고자 왔는데 그리고 그 이야기한대로 믿는다고 고백했는데 믿는다고 고백을 했는데.


자꾸 그 믿음이 주님을 증거하는게 아니고 구원받은 나를 증거합니다라는 그 소리 듣자마자 그 다음부터는 전부다 하나 둘씩 다 떠나고 말았어요. 내가 글씨 쓰지도 않았는데. 돌멩이 들고 다 가버렸어요. 가면서 하나같이 하는 소리가 또 있어요. “너만 신자냐?” 내가 언제 신자라고 했어요. 나는 신자라고 한적 없는데 “너만 믿냐?” 나는 믿는다는 소리 안했거든요.


나의 믿음은 행함입니다 이런 소리 했지. 내 믿음은 없는 거에요. 없다 했는데 괜히 자기가 너만 신자냐? 내가 뭐랬는데? 십자가 마을만 정통인가? 복음 아는가? 십자가 마을 그런 소리 하는 사람 없잖아요. 그래서 어떤 분은 화가 나가지고 글을 일부러 썼어요. 십자가 마을은 이단이다. 한번 찾아보세요. 십자가 마을에 아직 있을 거에요. 십자가 마을은 이단이다. 어쩔래?


우리는 끝까지 주님이 여기 계심의 방해자로 있는 거에요. 그게 쪼가 맞아. 나는 주님의 있음의 방해자고 그래서 우리는 주와 함께 있는 겁니다. 주와 함께 있지 않으면 내가 주의 있음의 방해자라는 인식이 안 생기게 되어있어요. 문제는 이 말도 흉내낸다는 거에요. 정신병자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게 기쁘냐 이 말이죠. 그야말로 무거운 짐이 날라가냐 문제입니다. 날라갔죠. 몇시에? 문제는 그게 날라갔는데 2분도 안지나가지고 그 기쁨 날라가버렸어. 날라가야 돼요. 왜? 그래야 주님만 살아있고 난 안 살아있는게 되니까요. 내가 스스로 나를 활성화시키면 안돼요. 주께서 활성화시켜줘야 돼요.


또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목사님 또 6분후에 활성화 안 시켜주면 어떻게 됩니까? 활성화 안 시켜주면 어떻게 되느냐하는 말은 자기가 결정을 한거에요. 분석을. 뭐라고 분석을 활성화, 활성화됨 또는 두 번째 활성화 안됨을 누가 측정했어요? 본인이 측정했지요?


이건 뭐냐 하면은 본인의 기억, 본인의 과거입니다. 본인의 기억, 과거는 자아 형성에서 나온 거에요. 주님의 사건에서 나온게 아니고 이미 존재가 된 사건이 아니고 존재가 된 상태에서 있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다른 환경을 조성해줘요. 다른 환경을.


나는 두 달 전에 믿었다 그거 말고 그거는 옛날 이야기에요. 나는 석 달 전에 이런 나쁜 짓했다. 그건 옛날 이야기에요. 그거 지나가버립니다. 옛날 죄지은 거 자꾸 왜 끄집어내요. 오늘 죄지은 거 왜 감추고. 오늘 죄지은 거 있잖아요. 나 구원받았다 이거 있잖아요. 그거는 왜 그거는 자꾸 감추고 자기가 생각하기에 옛날에 죄 지은거 왜 자꾸 그걸 기억해가지고 자기를 괴롭혀요. 학대하고. 오늘 죄지은 거는 모르고.


아까 햄버거 먹었지요? 햄버거 먹었을 때 우리는 어떤 죄를 짓느냐 하면은 그때 지난번 햄버거 먹을 때 그 기쁨의 맛이 나와야 되는데 라고 정신병자적인 기대를 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그 맛이 안 났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저번에 햄버거 먹을 때는 벤츠차가 앞에 그 햄버거 집 앞을 지나간 경우고 지금 오늘 벤츠차가 안 지나갔거든요.


그때 그 현장을 고스란히 할 재간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피동적이기 때문에. 그때 그 순간은 내 솜씨가 아니고 주님의 솜씨거든요. 주님의 솜씨는 주님께 맡겨야지 내가 그때 그 쾌락과 즐거움을 또다시 내가 그걸 추적해서 내 것으로 소유하겠다하는 것은 이것은 나로 인하여 내가 즐거워하겠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잘났잖아 자기 증인 노릇밖에 안되는 거에요. 그거는 개별성이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보편성이 아닌 거에요. 누가 뭐래도 가이사 아구스도가 명을 내렸고 누가 뭐래도 천하의 고넬료가 수레아, 지금은 시리아죠. 시리아 총독, 시리아는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고넬료라는 시리아 총독이 정식 총독은 아니였고요. 총독이 두 번 되거든요. B.C 6년경에 한번 사절단 오고 그 다음에 A.D 6년 본격적으로 시리아 총독이 되었어요.


그래서 그때에 다 총독 될 때에 3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이걸 이제 쉽게 말하면 모든 사람이 의료보험 20만원 이하의 70%에게 돈 받으러 동사무소로 가게 함에 가게 할 때에 요셉도 70만원 받으려고 동사무소 갈 때에 그때 예수님이 잉태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총독이 어떤 황제가 있다는 자체가 우리 구원과 무관한게 아니다 이 말이죠. 주께서 조성하게 되면 배치가 다 엮여져있게 되어있어요. 따로 이점 이점 이점 뽑아서 나 이것 때문에 내가 되었다 하지 마세요. 내가 그때 눈물로 결심해서 손 모아서 기도해서 되었다 이러지 마세요. 자칫하면 손가락 부러지는 수가 있습니다 나중에.


어떤 9살 먹은 애가 멕시코 애인데 길거리에서 기도하는 것을 사진기사가 찍었어요. 길거리에서. 사진기사 찍고 난 뒤에 물었어요. 찍는데 배경 좋아 멋지게 혼자서 코로나 물러가라고 기도했거든요. 기도하는데 사진기자가 물었어요. 왜 집에서 안하고 길에서 하느냐? 할 때 소녀가 하는 말이 집에서 시끄러워가지고 기도가 안 들릴까봐서 밖에 나와서 한다는 거에요.


그러면 기도하기까지 구성요소를 누가 정한 거에요. 본인이 정했지요. 본인이 정했으면 그것이 기억에 사라질까요? 남을까요? 남겠지요. 만약에 그 애를 기도 때문에 마침 신종 코로나 멕시코 그 동네 물러갔다면 그 아이가 뭘 생각하겠습니까? 그때 기도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 하겠지요. 그러면 그때 기도할 때 집안에서 기도했으면 큰일 날 뻔했지요? 왜? 밖에 나가서 기도했기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질 때는 인간은 얼른 그것과 관련된 원인과 결과를 다 수집해요. 자기가 아는 범위 내에서. 이거는 누구 증인입니까? 주님의 증인을 빙자한 자기 증인이죠. 정신병자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장애자에요. 정신적으로 삐뚤어져있어요. 그러니까 마귀가 얼마나 기고만장하겠어요.


예수님보고 베드로 백날 해도 베드로는 내 손에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어떤 경험을 하게 합니까? 네가 너 일이 네가 결정한 것이 아니고 악마의 의해서 결정했다는 것을 악마한테 넘기지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어떻게 해요? 세 번씩이나 부인하지요. 악마를 물리치게 하는게 아니에요. 주님께서.


베드로로 하여금 악마가 뭐를 노리고 인간의 정신을 통제하고 있느냐를 베드로를 통해서 대신해서 보여주는 거에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잖아요. 얼마나 고마운지. 왜? 우리 모습을 보는 거에요. 우리 모습을. 지금 환경이 괜찮으니까 이런 환경 속에서 자기가 믿는 것처럼 되지요?


그러면 만약에 우리가 그 권세의 환경 왔을 때에 노골적으로 내가 주님의 성도가 있는데 성경에서는 이렇게 되어있어요. 어떤 소녀 하나가 불 쬐고 있는데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그걸 솔직한 말로 가시나거든요. 어떤 가시나가 건방지게 베드로 보고 “아저씨! 그때 예수님 옆에 같이 있었잖아요?!” “이거 가시나 이거!!”


주님께서는 미천한 가시나를 통해서 하게 하는데 그게 누구의 생각이에요? 주님께서 악마에게 그렇게 하도록 허용한 거에요. 3년 동안 다녔고 물위를 걸었고 장모 병이 낫고 완전히 다 무너져버렸어. 다시 말해서 신의 국경에서는 나는 뭐로 발견되야 된다? 애초부터 죽은 자로 발견되게 해주시는구나.

죽은 자로 발견된다는 것은 에이 죽었구나 이게 아니라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신이고 하나님이고 예수고 다 이용했다는 그 사실이 주님을 가린다는 뜻에서 죽은 자에요. 악마의 노릇을 하고 있다는 죽은 자. 이거는 우리가 평생 할 각오하세요. 이거 뜯어고칠 생각하지 마세요 이거. 이거는 죽어야 되는 겁니다. 이거는 육체가 죽어야 되지 살아있으면서 개과천선해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자, 그러면 계속 봅시다. 5절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자, 오늘 공부한 것을 적용시키고 마칩시다. 여기에 마침 여관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지요? 아무것도 없지요? 호텔도 없다 이 말이죠. 사람이 있을 곳이 없었음이라. 이걸 가지고 히브리서 같은데나 이걸 뭐라고 하면은 예수님께서 비천하게 태어났다. 비천하게 태어났다.


그러면 이 요소는 결국 뭐냐 하면은 십자가 죽을 때만 십자가가 아니라 이미 태어날 때부터 십자가가 기저에 깔린 거에요. 출생 자체가 비천하게 태어났으니까. 그러면 이 비천하게 태어났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은 모든 인간의 꿈이 어떻게 하면 내가 비천해질까 그런 꿈을 꾸겠어요? 아니면 반대로 나가겠습니까? 반대지요.


방향이 반대로 가면 만남의 가능성이 있어요? 없어요? 전혀 없어요. 인간이 추구하는 것과 소위 교회에서 기도하면서 교회 다니면서 나 천당갈려고 추구하는 것과 실제로 우리가 구원받는 것과 만날 가능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부 없어요. 만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왜? 반대 방향으로 가기 때문에. 개별적인 구원을 추구하기 때문에. 없어요.


없다는 걸 아는 사람이 이미 주님과 같은 쪽에 있습니다. 없다는 걸 아는 사람이. 그러나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아니야 있을 거야라고 계속해서 꿈과 희망을 포기를 못하고 있습니다. 나 구원될 수 있을거야. 대다수가 이야기합니다. 그놈의 대다수 대다수. 베드로가 왜 부인했습니까? 대다수가 다 예수님 죽이는 것에 찬성했으니까 걸려들면 자기가 목이 달아나잖아요.


신의 국경에서는 목이 달아나야 돼요. 그런데 베드로는 거기까지는 안돼요. 아직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없어요. 안돼요. 그러면 베드로가 나중에 성령 받았다는 말은 뭘 뜻합니까? 통과했다는 거에요. 신의 국경선에서 통과된 거에요.


통과 됐으니까 이제는 다윗이 밧세바 남편 죽였다는 그것을 주께서 활용하는 것처럼 베드로가 자기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세 번 부인한 것도 충분하게 주께서 성경으로 기록하면서 활용해 주시는 것에 대해서 영광스럽게 생각해야죠. 영광스럽게. 이게 얼마나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거에요. 초과한 겁니다.


그래서 지난 오후설교 때 끝에 이런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께서 유대와 갈릴리에 다니면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셨을 때 참 주님께서 좋은 일했다 얼마나 감사하냐 하지만 막상 당한 당사자는 어떤 생각 갖는다 했습니까? 사적인 일을 공개적으로 떠벌려가지고 불편하게 했지요. 불편하게 했지요.


왜냐하면 인간은 숨어 지내는 것을 소원으로 하고 있는데 주님이 난데없이 와가지고 이봐 옛날에 창기였어. 이게 뭐 자랑이라고. 이봐 삭개오는 세리였어. 돈만 알았어. 이게 뭘 자랑이라고 떠벌릴 때에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그런데 막상 본인 삭개오와 세리는 예상 밖의 큰 기쁨으로 주님께..


“잘하셨습니다. 활용당하는 것이 나의 본분인 것을 주께서 찾아오니까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것이 곧 나의 사망, 나의 죽음입니다.” 천국에 넘어가는 그 국경선에는 이런 현상이 이런 현장성이 현상이 일어나고 그 현상을 지금 이 자리에서 현장성으로 주께서 성령으로 늘 생산해내고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증인되야 될텐데 우리는 자꾸 미끄러져서 도로 나의 증인으로 전락하는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자체가 이걸 알게 된 자체가 성도임을 이제는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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