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2장 1절 (신의 국경에서) 200421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2장 1절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이렇게 시작되고 있지요. 성경에서 사람 이름 나오고 지명 나오면 사람들은 또 골치 아파합니다.
꼭 그것까지 우리가 알아야 하느냐. 그냥 좋은 교훈, 좋은 말씀만 주셔가지고 실천할 수 있는 것만 주시면 되지 뭐 아구스도가 어떠니 어느 아저씨인지 모르겠지만 또 구레뇨가 뭐가 그 사람을 꼭 알아야 되느냐라는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 이름이 나올 때는 이게 뭐냐 하면 역사라는 겁니다. 역사가 돼요 사람 이름은. 역사가 되면 이거는 역사는 뭐냐 하면은 보편적이다. 역사는 보편적이에요. 보편적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모든 것을 다 억누른다. 보편적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모든 사람들의 차이를 다 없애버리는 거에요. 신종 코로나 같은 것이 대표자에요. 모든 것을 다 없애버리죠.
그리고 공중파 TV같은 것. 선택의 여지가 없이 TV 틀면 공중파 TV MBC KBS SBS 그냥 나오잖아요. 그냥. 이게 보편적인 거에요. 개인의 차이를 없애버립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가이사 아구스도라는 사람 구레뇨라는 사람 이 사람이 등장함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생각을 들게 하는가 하면은 신자라는 것. 성도, 신자죠.
신자가 있어야 될 이유가 있는가? 신자가 꼭 있어야 될 이유가 있는가? 이유를 빼버리면 신자가 있어야 되는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한번 갖게 되는 거에요. 보통 사람들은 성경에서 성도 나오고 신자 나오면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면은 나는 신자일까? 나는 아닐까? 여기에 신경을 쓰겠지요.
목사님 저 신자 맞아요? 목사님 저 창세전부터 예정된 사람 맞습니까? 내가 죽으면 구원 받습니까? 아니면 지옥 갑니까? 궁금증이 나는 신자일까? 신자 아닐까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이거는 보편성이 아니고 이건 관심사가 뭐냐 하면은 보편성이 아니고 개별자에게 관심 있죠. 개별자.
그러나 성경에서 역사가 등장한다는 것은 이 보편성이 개별자를, 개별적인 의식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에 신자라는 것이 있어야 될 이유를 이 세상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신자가 나타나야 될 이유를 77억 인구들이 다 모여서 아무리 연구하고 해도 신자가 있어야 될 이유를 인간 속에서는 뽑아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왜 이 땅에서 기독교 신자가 몇 명이고 천국 가는 사람은 몇 명이고 신천지는 14만 4천이고 그 이야기 왜 나오느냐? 그것은 자기 기만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기만’. 자기 기만이란 무슨 뜻입니까? 스스로 자기를 속여보는 거에요. 속여보는 거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관심사가 나 죽으면 천당갈까 지옥갈까 관심사 출발점이 자기 개별자에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거는 이런 질문 나온다는 자체가 이 자체가 아무리 목사로부터 당신 신자 맞습니다라는 소리 듣더라도 이거는 자기 기만이에요.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겁니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되는가? 보편성에서부터 출발해야 되지요. ‘보편성’.
모든 인간의 역사는 내가 불교신자가 되든 내가 기독교 신자가 되든 상관없이 예수님 태어날 때 가이사 아구스도라는 그러한 황제가 로마의 황제였다. 끝이에요. 개별자 내가 어떻게 되든 간에 역사는 모든 것을 다 차이를 다 없애버려요. 이 기만을 완전히 깨버려요. 역사가 모든 기만을 깨버립니다.
역사가 모든 기만을 깨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역사가 보편성이 모든 개별성을 깨기 때문에 “나는 신자입니다” 하는 그것은 그 모든걸 깨는 그 깨는 작업에 의하면 그것이 황당한 거짓말이 될 뿐이에요. 나는 죽어서 천당갑니다가 거짓말 된다고요. 누가 물어봤어? 너한테? 내가 아는 것은 그 당시 아구스도가 로마 황제였어. 그 앞에 그게 주도권을 갖고 있어요.
이제 누가복음 2장에서 역사를 언급하는 이유를 알겠지요? 내가 천당 가기 위해서 성경을 이용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성경 어디 봐도 내가 천당 간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예레미야에 있습니까? 이사야에 있습니까? 없지요? 에스겔에 한윤범이라는 이름 나옵니까? 안 나오잖아요. 어디서 성경 보면서 자기를 기만해요. 거기 내 구원이라는게 어디 있어요? 없어요.
출발점이 잘못된 거에요. 성경의 출발점은 뭐냐 하면은 모든 인간은 역사 속에 잠겼다. 잠겨있다. 따라서 그 말은 뭐냐? 신자가 꼭 있어야 될 이유는 이 지상에서는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고 싶은 사람은 있지요. 천국 지옥 있다면 이왕이면 천국가고 싶은 사람 있어요. 아마 대다수일거에요.
그러나 그것은 자기 기만, 속임수에 불과하고 자기 욕구에 불과하지 역사는 그것을 인정해준 적이 없습니다. 어떤 역사적 근거에도 나 천당가는 근거는 없습니다. 혼자 착각하고 있는 거에요. 이 말은 하나님의 성도라 하는 것은 내가 나를 구원받고 천당가고 싶다는 그 욕구에 의해서 발생되지 않습니다. 내 욕구에 의해서.
더 어려운 말로 해볼까요? 목사님 저는 죽어서 천당가고 싶어요. 지옥가기 싫어요라고 하는 사람 있다면 제가 묻지요. 당신이 구원받고 싶은데 왜 예수님 태어날 때에 로마 황제가 가이사 아구스도이어야 하는지 증명해보세요.
내가 천당가고 싶은데 하필이면 나 천당가고 싶은 것과 그 당시 예수님 당시 이름도 어렵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로마 황제가 될 당의성, 당의성이란 말 알지요? 마땅히 그래야 될 이유를 당신 입에서 증명해보세요. 증명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이거는 제가 말한게 아니라 하나님이 욥에게 한 거에요. 하나님 저를 판정해 주세요. 저는 억울합니다. 저는 죄 지은게 없는데 고통받고 있습니다 할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 네가 정당한 것과 별이 북두칠성이 있어야 될 둘의 연관성을 한번 지어봐라. 그 둘을 한번 이어봐라.
욥 네가 의롭다는 것을 별이 북두칠성이 있다는 것과 정확하게 그 자료를 집어넣어서 그 북두칠성이 있다는 그 정보 자체를 집어넣어서 나 구원받는데 있어서 의로운데 있어서 필히 북두칠성이 있어야 돼. 내 앞에서 증명해봐라. 욥은 증명을 못합니다. 그게 바로 네 기만이야. 자기 기만이라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는 필히 달은 있어야 되고 별은 있어야 돼요. 예수님의 구원에서 모든 것이 증명이 돼요. 예수님의 구원에 있어서는. 하늘의 별도 달도 해도 이른비 늦은비 전부다 이스라엘 약속의 땅, 이방 민족의 배척, 본디오 빌라도의 그러한 공격, 백성들의 저주, 십자가 죽음 이 모든 것이 하나 빠짐없이 몽땅 어디로 쏠립니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셔야 하고 그래서 예수님은 사흘만에 부활한다는 것이 증명이 돼요. 제가 골로새서 1장 16절 언급 안 해도 아시겠지요?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딱 정리되지요. 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라고요? 하나님의 형상이죠.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로 집결된 그 상태가 형상이어야 돼요. 모든게.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그런 인간은 없어요. 그렇다면 여기 역사의 보편성으로 먼저 출발을 하더라 이 말이죠.
출발을 이렇게 했을 때 이 역사적 기록을 왜 하느냐?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역사가 무슨 ~성이라고 했습니까? 좀 어려운데 다시 복습합시다. 역사의 성격은 ~~적이다? 보편적이죠. 그 역사적 성격을 그래도 합류하면서 역사를 벗어난 역사. 초역사죠.
역사성을 품으면서 역사의 발목잡기를 떼내고 거기서 극복하신 역사. 그게 뭐냐? 십자가죠. 십자가가 역사인 동시에 보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보편적인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도 이게 선별적이에요. 역사한테 발목 잡히지 않는 역사성. 그게 바로 역사를 딛고 역사를 째고 이겨낸 역사가 차마 못 따라온 또 다른 역사로써 십자가죠.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역사적으로 이야기하죠. “십자가가”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갈라디아서 3장 1절 그 다음에 “눈앞에 보인다” 했지요. 마치 역사적으로 우리가 피아노가 보인다는 것처럼 십자가 보인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디 보이는데? 이렇게 되지요. 어디 보이는데? 안 보이는데?! 안 보인다는 거에요. 그런데 십자가는 역사를 그냥 십자가 사건이 그냥 하늘에서 폭죽 터지듯이 터진게 아니고 역사를 경유해서 터졌지요.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을.
그 다음부터는 십자가가 보이는 방법은 역사가 인간들이 조립하는 역사를 째는 거에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역사 가운데서 뭐도 포함되느냐 하면 나는 역사적으로 나는 구원받았다는 이 사실, 나는 구원받았다는 이것을 누가 쨉니까? 십자가가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쓰레기가 있기 때문에. 그 치매 걸린 할머니의 특징이 뭐냐? 온 동네에 다니면서 하루 일과가 온 동네에 버린 쓰레기란 쓰레기는 집구석에 다 갖다놓는 거에요. 그 할머니의 그러한 것이 치매 걸릴 때만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 할머니가 치매 걸리기 전에도 멀쩡할 때도 동네에서 혹시 쓸모 있는데 갖다버린거 있잖아요. 그런거 소유하고 싶다는 본능이 정신이 약간 이상할 때 그게 노골적으로 드러난 거에요. 쓰레기 모으는 거에요. 그럼 우리는 안 모을까요? 우리도 쓰레기 모으는 거에요.
초등학교 2학년 되가지고 이제 학교는 안가고 온라인 수업한다고 할 때에 할아버지나 엄마가 옆에 붙어가지고 정신 바짝 차리고 집중력 있게 해! 이거 쓰레기 아니에요? 애가 집중력 있게 공부하게 되면 그게 어디 안에 들어오지요? 애가 성적이 좋으면 어디 안에 들어옵니까? 내 안에 들어오지요. 계속 그게 누적되고 쌓이지요.
그러면 자기의 개별성은 점점 뭐가 됩니까? 하나의 벙커가 되겠지요. 우리는 그걸 가지고 뭐냐 하면 그걸 역사라고 하는데 역사 아닙니다. 그거는 개별성이죠. 역사는 보편성이 있어야 돼요. 벌써 강의 얼마 안 지나서 다 잊어버렸지요.
역사는 전체 어떤 차이 개성도 용납하지 않는 거에요. 역사는. 신종 코로나라는 역사는 어떤 빈부격차라든지 성별을 구별하지 않아요. 아 너무 이쁜데. 너무 이뻐도 죽었어요. 너무 이뻐도 코로나 걸리면 죽어요. 너무 이뻐도. 아 너무 쓸모 있다. 쓸모 있어도 죽어요 그냥.
신종 코로나 치료하다가 의사들 얼마나 많이 죽었습니까? 의사가 삼십몇살까지 공부한다고 수억이 들어가거든요. 그런데 신종코로나 때문에 죽었잖아요. 3억5천만원 다 날라가는 거에요. 성경에서 가이사 아우구스 그리고 구레뇨가 수레아 총독 되었을 때에 여기 2장 1장에 보면 천하로 호적하라 해놓고 호적 앞에 한글로 글자 하나 들어가죠.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앞에 글자 한번 보세요. ‘다’ all, 모두, 다 보편성입니다. 모두 하나도 예외 없이 다 하라는 거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장차 천국 가는 백성은 보편성에 의해서 구원되지 개별적으로 내가 얼마나 천당 가고 싶은가 그러한 희망과 절규하듯이 간구함, 아무 소용없어요.
십자가라는 역사성의 그 성격을 합류하면서 그 역사성이 네가 요구해서 구원되는게 아니라는 거에요. 요구해서. 너는 네 구원에서 뭐를 떼라? 손을 떼라는 겁니다. 너 자신을 기만하지 말고. 우리 자신을 기만한다는 말은 날마다 나를 조작한다는 뜻이에요. 나를 계속 구성하고 있는 거에요. 재료는 뭐다? 쓰레기다.
자기 안의 쓰레기 해가지고 계속 쓰레기 모아놓고 주여 이 정도 하면 구원받겠지요? 이 정도 성가대 했으면 구원받겠지요. 계속해서 쓰레기를 모으고 목사는 쓰레기 모으라고 계속 닦달하고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그러고 있지요.
성경은 역사성인데요. 보편성인데. 모두 다 똑같은 입장으로 만들어 버려요. 똑같은 입장으로.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인데 호적 안 해도 되겠지. 하나님의 아들인데 호적 안 해도 됩니까? 허경영이는 주민등록 없어도 되겠어요? 공중부양하는데. 특별대우 받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되고 싶은 사람은 대부분이지만 신자는 단 한명도 없다가 아니라 있을 이유가 없어요. 신자가 내가 신자가 될 이유는 나에게서 찾지 마세요. 나와 엮이지 마세요. 내가 신자 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막상 신자가 되게 되면 신자라는게 십자가의 보편성입니다. 개성같은 거 묻지 않고 남, 여 따지지 않고 성령주셔서 구원받거든요.
그렇게 되면 ‘나’라는 개별자로 시작하잖아요. 구원받기는 내 개별적인 욕구로 구원받습니까? 보편성 때문에 구원받습니까? 십자가는 보편성. 다시 이야기하면 십자가는 왜 보편성이냐? 역사를 통과했기 때문에 역사는 거쳤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개별자가 이 사람이 신자가 되었다고 합시다. 이 신자 된다는게 굉장히 어색합니다. 진짜 오랜만엔 솔직한 이야기하지요. 신자가 되게 어색해요. 몸에 안 맞아요. 몸에 안 맞는다고요. 그래서 교회에서는 뭐냐 하면은 실제로는 신자가 몸에 안 맞는데 교회에서는 몸에 맞도록 거기에다가 윤리적 도덕적으로 이거 뭡니까 인공조미료 MSG를 뿌리는 거에요.
신자가 되면 화평과 양성과 하나님의 형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착하면 도덕적인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 다음에 나빴던 사람이 착해집니다. 자꾸 인공감미료는 계속 치는 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어색하지는 않으면서도 신자는 신자대로 되는 노력을 인간들이 뭐하겠어요? 자기 기만과 자기 조작에 계속 나가겠지요.
원래는 어색해야 되는데요. 어색해야 되는데 이게 안 어색하게 교회가 앞장서서 인간을 사기꾼으로 만드는 거에요. 신자도 아닌데 그 모델이 누구겠습니까? 모델이 옆에 더 경건하게 보이는 권사님이나 장로님, 그런 분들이 모델이 되고 목사님이 모델이 되겠지요.
그러나 성경에는 신자의 모델이 누구지요? 신자의 모델이 바로 스데반 집사나 사도 바울이죠. 그리고 예수님이죠. 사도 베드로. 스데반 집사 어떻게 살았습니까? 세례 요한이 어떻게 살았어요?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었지요? 돌에 맞아 죽었잖아요.
세상에 어느 신학교에서 스데반 집사를 목표로 목회자 됩시다 하는 신학교 어디 있어요? 없지요. 큰 교회 예배당하고 좋은 차타고 이게 목표가 된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주의 종은 도와주신다. 하나님 일 하게 되면 모든 좋은 것에서 함께 한다.
어디서 희한한 구절 다 뽑아가지고 가장 좋은 것을 서로 나눠라. 구약 봐라. 제사장에게 제일 만물. 햄버거도 제일 먼저 나온 것, 제일 좋은 것 먼저 먹잖아. 교인들은 새 차 타면서 목사는 헌 차 타면 되겠느냐 이런 거.
어색해야 돼요. 왜냐하면 이 개별자한테는 이게 도저히 낯선 것 낯선 규정을 하는데 신자라는 규정을 할 때 그 모델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가 모델이 돼서 신자로 보편성을 가지고 하니까 나처럼 십자가 길을 가라고 신자 되게 한 거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늘 좁은 길이 싫어요. 본성상 우리는 외롭고 쓸쓸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외롭고 쓸쓸한 것은 그것은 나중에 나이 들어서 병들고 나이 들어가지고 은퇴해가지고 이제는 다방에 위스키 한잔 낭만을 위해서 최백호 같으면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게 외로운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취미는 무엇입니까? 고독. 이건 말이 안되지요. 고독이 무슨 취미가 되겠어요. 사랑의 쓸쓸함에 대해서요 이런거요. 신자라 하는 것은 왜 어색하냐? 인간의 힘으로 나타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예상하는 내 신분이 아니기 때문에 굉장히 어색합니다. 이 어색함.
여러분들은 실력이 되기 때문에 여지없이 어렵게 하겠습니다. 여지없이 어렵게 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뭐냐 하면 말해지는 나. ‘말해지는 나’. 피동형이죠. 이거와 대조되는 것은 ‘말하는 나’. 이 두 종류의 인간성이 등장합니다.
말하는 나가 되게 되면요 이거는 뭐냐 하면 누구를 증거하느냐하면 나를 증거해요. 말해지는 나는 누굴 증거하느냐? 이거는 내가 원하지 않는데 그런 나가 되고 말았어요 라고 ‘나’가 ‘나’말고 다른 분을 증거하지요. 내 인생을 내가 책임져야 되는데 이제는 그러지 못하고 내가 책임 못 지고 책임자가 따로 있을 때 나는 그분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겁니다.
누가 마태복음 10장 20절을 한번 읽어보세요. 마태복음 10장 20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자, 여기에 성령께서 말씀하신다 이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굉장히 간편한데 앞에 뭘 갖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말한다 하면 얼마나 간편해요.
그렇게 이야기 안하고 앞에 뭘 붙이느냐 하면은 말하는 너는 아니거든. 말하는 너는 아니야. 말하는 내가 말하고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어색하지 않아요. 이거는 내가 개별적으로 죽어서 천당 가고싶어서 환장한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유지되야 내가 천당 가고싶은 내가 스스로 내가 책임자고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결과로서 구원받느냐 안 받느냐 내 손에 달린 거거든요 이게. 이게 뭐냐? 모든 이 땅에 태어난 개별자의 특징이에요. 태어날 때부터.
내가 어떤 목표가 있고 그 천국 간다는 목표 구원받겠다는 목표가 있으면 그거는 어디까지나 내 일이야 내 일. 그럼 내 일에서 내가 손 뗄 수 있습니까? 안되지요? 그러면 노력을 누가해야 돼요? 내가 빡시게 내가 노력해야 되는 거에요. 목사님 말씀만 하옵소서 내가 듣겠나이다. 주여 말씀만 하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그 말씀을 가지고 내가 지켜나가는 겁니다.
이게 날마다 해놓고 자기 조종. 내가 어떤 모습일까를 날마다 조종, 자기 기만하는 거에요. 자기 설정을 계속 바꾸어나가는 거에요. 어색하지 않게. 여러분 남의 옷을 입어보세요. 이상하게 어색하지요.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우리의 옷은 무엇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 했습니다.
내 옷이 아니란 뜻입니다. 내 옷이 아니고 내가 죽여버린 그 분의 옷을 내가 입고 있는 거에요. 그 옷을 입을 때마다 우리는 뭘 느끼느냐 하면 아 참 내가 이 옷의 주인공을 내가 죽였잖아 하는 식이에요. 여러분 그 어떤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나중에 이야기 들으면 어떤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요.
어떤 사람이 어떤 여자하고 간음을 했어요. 간음을 했는데 그 사람이 누구하고 결혼했느냐 하면 자기가 간음한 여자하고 결혼했어요. 이거 누구 이야기입니까? 이거 누구 이야기에요? 다윗 이야기죠. 그러면 보통 세상에서는 어떻게 합니까? 보통 세상 같으면 자기가 바람피웠으니까 남편 죽였잖아요. 요새 같으면 드라마 같으면 독살한거죠. 다윗은 독살은 안했지만 죽였단 말이죠.
그러면 이것을 감추기 위해서 아오지 탄광을 보내던지 아니면 앉아가지고 봉투 딱 내가지고 이거면 돼? 이거 먹고 다시 우리집에 얼씬도 하지 말아라. 근본도 없는 것들 뭐 이래가지고 미국으로 보내든지. 애를 지우든지 보내라고 쉬쉬 하는게 보통이죠.
그런데 다윗은 어떻게 됩니까? 다윗이 어떤 여자의 남편을 내가 죽였다를 까발리는 그것을 까발리는 식으로 누구하고 결혼해요? 밧세바하고 결혼하잖아요. 밧세바. 이게 다윗의 잘잘못을 하지 마세요.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선악이기 때문에 이것은 구원하고 관계없습니다.
이게 십자가의 보편성은 생명나무 차원이기 때문에 이것이 다윗이 받은 사명입니다. 좀 사명치고는 좀 화려하지요. 번잡스럽고 복잡하고. 그것이 다윗의 사명이에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앞당겨서 그렇게 보여주는 겁니다.
다윗이 가슴 치면서 “아 그때 밧세바 네가 이렇게 코가 좀 낮았으면” 이런 후회 안 해요.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진다는 것에 있어서 너무나 동떨어진 어색함. 나의 의로움과 정당성 이것을 끌어모아서 천국 따내겠다는 이 기본적인, 개별적인 이 모든 것.
이 모든 것과 너무나 판이한 다른 원리가 나를 아예 지배할 때 나는 나에 대해서 말 못하고 무엇에 대해서? 내가 나 되게 한 그분에 대해서 말하여지는 존재에요. 끝까지 나는 말하는 존재는 개무시당하는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게 되면 우리가 이 점을 알지요. 나는 주님 덕분으로 구원받았지. 은혜입니다. 말을 하면서도 어느새 3초도 4초도 안 지나서 이게 뭐로 변하느냐 하면은 슬금슬금 나 예수님 증거 하니까 나 믿는 자 맞잖아 이렇게 또 옮겨가요. 아 이거 골치 아파.
이게 육신의 본성이 바로 말해지는 이것이 목표가 되는데 어느새 육신이 있기 때문에 내 기만과 내 조성에 내용으로 쓰레기로서 들어와버린 거에요. 오늘 제목을 저는 이렇게 봅니다. 오늘 제목을 소설책 이름은 같은데 ‘신의 국경에서’.
신의 국경에 검문소 있겠지요. 신의 국경에 뭐가 있느냐 하면 신의 국경에 율법이 있어요. 율법. 율법이 포진된 검문소에서 내가 뭐냐 하면 나는 나의 죽음을 발견한다. 국경선에서. 그러면 이 율법을 통해서 내가 나의 죽음을 발견하는게 아니고 율법을 통해서 나 이렇게 잘났다 라고 하고 싶지요?
그거는 진짜 검문소 신의 국경의 검문소가 아니고 자기가 그걸 피해가 버렸어요. 나를 잃어버리기 싫어서. 다른 사람이 내가 신자 아니라고 하는게 그게 너무 겁나서. 남한테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내가 내 목적 달성에 실패하는 것처럼 느껴져가지고 그게 겁나서.
보편 대다수 사람들이 인정받고 싶은 그것이 마치 더 진리 같애. 대다수가 이야기해주니까. 넓은 길이 진리 같애. 좁은 길보다 넓은 길이 진리 같애요. 모든 사람이 예수 죽이라 할 때에 적극적으로 참여는 안했지만 죽여라 할 때 같이 동참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12제자잖아요. 12제자. 예수님의 12제자.
그들은 역사가 어떻게 보편적으로 일괄적으로 흘러가는걸 모르고 역사가 신종 코로나라는 것을 모르고 개별적으로 주님과 좋은 관계에 있으면 특별대우 받아서 천당 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의 보편성은 역사라는 보편성 배후에 무슨 보편성이 있느냐? 바로 악마의 통치, 악마의 통치라는 보편성이 있는 줄은 베드로가 몰랐던 거에요. ‘악마의 보편성’.
너는 너 자신에게 충실하라. 네 인생에 책임지라는 그렇게 선악적인 사고방식으로 계속해서 나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포기 못하게 만드는 그렇게 세뇌시키는 악마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어떤 분이요 저한테 메일로 이런 질문을 했어요.
뭐냐 하면은 자기는 감리교 3학년인데 몇년만 지나면 자기가 목사가 된대요. 그런데 우리 감리교 교단에서 어떤 사람은 목사도 하면서 밥벌이 안 될 때는 또 아르바이트 해가지고 목사 하면서도 생계유지 한탕 두탕 또 뛰어가지고 이렇게 해야 되는데 진짜 주의 종은 이렇게 목회에만 전념 안하고 또 다른 밥벌이하듯이 이렇게 해도 됩니까?
우리 감리교 교단에서는 다 용인하고 있는데 목사님 의견은 어떻습니까? 저한테 그런 질문을 했어요. 오랜만에 메일 보낸다 해가지고. 답변을 이렇게 했어요. 그게 교회냐고 다 물어보라고요. 그게 교회냐? 그게 감리교 교단이라는게 과연 교회냐? 그게 진짜 성경에 나오는 교회냐?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쪽에서 대다수는 이야기하는데 목사님 의견은 어떻습니까? 지금 참고로 정보를 얻으려고 하는 거에요. 그 교회가 교회 아니라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왜그러느냐 하면은 그 교단이 인정해줄 때 자기는 목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또 어떤 사람은 식사하다가 이런 질문 했어요. 요새 왜 목사님들은 왜 성경을 모르고 잘 몰라요. 교인들이 물어보면 목사들이 성경대로 왜 답변을 잘 못합니까? 이런 질문을 어떤 분이 식사하다 그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답변했지요. 목사가 성경 알게 되면 목사 안수를 못 받습니다. 그걸 몰랐어요? 목사가 교회에 신경 쓸 때 목사 안수를 주지, 말씀에 성경에 신경 쓰면 절대로 선배 목사가 목사 안수를 안줘요.
왜 교회를 신경을 써야 되느냐 하면 교회는 바로 개별자를 두둔하거든요. 개별자를 두둔함으로서 구성된 것이 교회다 이 말이죠. 보편성이 아니에요. 십자가 보편성이 아니에요. 역사의 보편성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요구한 바를 우리가 충족해드리겠습니다 이것 때문에 생긴 가게가 교회 아닙니까? 업소란 말이죠 업소. 개별자를 인정해주는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에는 어떤 신자도 없어요. 예수님 당시에 주도권을 쥐는 것은 가이사 아구스도에요. 왜? 다 호적을 다 해야 되니까. 심지어 거기서 누구도 예외 없었다? 예수님의 가족도 예외가 있었다? 없었다? 없었던 거에요.
예수 믿었다고 신종 코로나 안 걸린다. 예수 믿는데 뭐 나는 마스크 벗을래. 말도 안되는 소리. 그런 객기를 부리지마세요. 그거는 마귀가 예수님 시험할 때 하는 거랑 똑같습니다. 신종 코로나 안 걸릴래. 이미 안 걸려도 이미 죽었어. 안 걸려도. 태어날 때부터 죽었어 너는. 이미 죽은 자에요. 새삼스럽게 신종코로나 걸려서 죽었다 하지마세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신종 코로나 아니면 번개탄 피우든지 간에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러한 역사의 보편성은 누가복음 3장 봅시다. 여기 3장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3장 1절.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보세요. 또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이렇게 나오지요. 여기 또 역사 나오지요. 우리 아까 좋은 말씀 서로 사랑하라 그런 말씀 주지. 이거 왜 나오느냐 이렇게 따지겠지요? 왜 서로 사랑하라 뭐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만 있으면 우리는 내가 구원받고 싶은데 좋은 말씀 주셨으니까 그 말씀 지키면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내 쪽에서 백성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버리죠. 그래 하나님을 사랑하고 몸과 뜻을 다 해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 나는 구원받을 수 있다라는 아이디어가 뭡니까? 나는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잠재되어 있다고 선언하는거죠. 스스로 자인하는거죠. 이게 아까 자기 기만이죠. 자기 기만이죠.
그런데 아까 신의 국경에서 검문소에서 뭐라고 했어요? 뭐가 있다? 검문소에 뭐가 있었다? 율법이 있었지요. 율법은 우리를 뭐라고 합니까? 우리를 자기 죽음을 발견하지요. 죽은 자가 율법지킬 수 있습니까? 진짜 오랜만에 바른 소리 한다. 아니 죽은 자가 율법을 지킬 수 있어요? 죽은 자가.
죽은 자는 애초부터 죽은 자였음을 입증할 뿐이지 새삼스럽게 죽은 자보고 말씀지키라는 그런 요구를 하지를 않아요.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율법은 지킬 수 있다가 아니라 너는 아니야. 너는 끝났어 그게 뭐냐 하면 율법의 보편성이에요.
재주 있는 사람은 지키고 재주 없는 사람은 못 지키는게 아니고 율법의 보편성입니다. 그게 신의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의 국경에서 이미 검문이 되었다. 국경에서 이미 차단이 되었다 이 말이죠. 여기 이스라엘이 있으면 유다와 이두메, 에돔지방. 이두메지방. 에돔이라고 해요. 아켈라오라는 사람이 분봉왕. 이게 언제냐하면 B.C 4년부터 예수님 한창 활동할 때. B.C 33년인가 그렇게하고요.
여기에 이 지역과 이 갈릴리 지역은 누구냐 하면 안디바. 헤롯의 아들들이에요. 헤롯아킬라오. 헤롯안디바가 통치한 것. 저 위에 있는 시리아 가는데 그 북쪽에 있는 것은 헤롯 빌립. 헤롯 빌립은 누구하고 관계있느냐 하면은 세례 요한 잡아죽인 사람하고 관계있는 사람이에요. 여기에 뭐냐 하면은 로마 원로인 직령지에요. 직접 통치하는.
자, 이런 사람이 여기에 누가 배치합니까? 주님이 배치했지요. 주님이 배치했기 때문에 이 배치는 아까 공부할 때 우리가 복습 한번 해 봅시다. 이 세상의 역사적 배치는 무슨 사건을 유발하기 위한 연계된 것이다? 십자가를 위해서 이런 사람들이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은 누굴 통치한다? 그 당시의 모든 인간들을 통치하는 거에요. 유대인들이 자기는 율법 지켜 가지고 무슨 백성? 택한 백성이라고 했지요. 주께서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걸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인정하지를 않아요. 신자는 없어요.
그리고 여기 또 누가 있느냐? 12제자도 12제자 아무리 예수님 따라도 그들은 결국 아켈로 안디바 빌립의 통치를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받지요. 그들이 데모했습니까? 촛불집회했습니까? 12제자가. 모여 봐야 12명밖에 안돼. 경찰 보내가지고 밀어버리면 끝나는 거에요.
오늘날 우리가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어떻게 뭐 교회를 열고 이 나쁜 바이러스야 악마의 바이러스야 오라! 우리가 이기리라! 끝내 이기리라! 자기가 박세리도 아닌게. 양말 벗고 들어가봐야 그거 안쳐줍니다. 역사라는 보편성을 끄집어내는 힘은 오직 이 모든 것이 초점을 맞춘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 외에는 없어요.
그리고 거기에 따라 십자가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율법의 완성으로 십자가는 결국은 너로 하여금 네가 기대하지 않았던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혀줌으로서 너는 이미 신자가 된 거에요. 다시 말해서 네가 원하는 예상 못한 신자가 된 거에요. 예상한 신자가 아니고 예상 못한 신자에요. 그래서 신자라는 것이 우리에게 무척이나 어색합니다. 정말 어색해요.
쭉정이는 가라 이 말이죠. 예수 믿고 착각하지 말고 가라 이 말이죠. 어떤 사람은 가라 가라 해가지고 다 가버리고 한명도 없으면 어떡합니까? 한명도 없으면 어떡하겠어요? 그러면 한명도 없다고 해서 십자가의 보편성이 취소될 수는 필요는 없지요.
십자가의 보편성들이 그대로 드러날 수 있다면 한명이 없어야 한다면 한명도 없어야 되지요. 한명도 없어야 되지 뭐. 그래서 역사적으로 모든 것이 보편성이 있는 것은 오늘 제목은 신의 국경에서 지만 다른 거 더 구체적으로 하면 이겁니다. ‘현장성’.
앞에 뭘 붙여야 돼요. ‘나는 죽고 현장만 남기기’. 이게 주의 뜻이에요. 나는 죽고 내가 죽고 내 안에 현장만. 현장이 뭐냐 하면 이게 우연입니다. 우연이라서 필연이 아니에요. 우연이라서 그 현장을 계속 끌고나갈 수 있도록 내가 조치를 못해요 현장은. 이게 우연한 사건이기 때문에. 우연한 사건입니다.
여기 적절한 노래가 있어요. 우연이가 불렀던 우연히. 트롯트가 대세인데. 우연이가 부른 우연히 그 가사에 보게 되면 우연히 헤어졌던 남자를 또 만난 장소도 나이트라. 나이트에서 만났거든요. 그런데 자기 버리고 헤어졌던 남자가 이제 와가지고 눈물을 뚝뚝뚝 흘리면서 사과를 하니까 그 우연이가 뭐라고 합니까? 괜찮다고 하면서 등을 탁탁 두드려주지요. 괜찮다고 하면서. 나 벌써 용서했다고.
그런데 그 남자 그 나이트에서 만나길 미리 예상했습니까? 지금쯤 가면 옛날 헤어진 사람 있을걸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몰랐지요. 그야말로 노래 제목대로 우연히죠. 우연이라고요. 그러면 그 남자가 그 때 자기를 용서한 여자가 너무 좋아서 그 다음 일주일 뒤에 가면 그 여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일본말로해서 시마이.
다시 그 여자를 내 필연성 속에 내 인생에 다시 그 여자를 집어넣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의 순간적인 만남이었고 사건으로 그냥 폭죽놀이였어요. 그냥 터지고 끝난 거에요. 천국은 우리가 소유할 수가 없어요. 천국은. 그게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겁니다. 누가복음 이 대목하면 여러분들이 아 그런 뜻이구나 하는 거에요.
8절에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목자들이 천사들이 나타나는걸 예상했습니까? 못했습니까? 예상 못했지요. 왜냐하면 인간은 개별자 속에서 예상만 하기 때문에 보편성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요.
그러나 천사가 내려오는 것은 개별자의 목자들의 요구조건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또 엉터리 설교처럼 해가지고 목자가 밤새 기도했다 이러지 마세요. 목자는 양치는 아르바이트하고 있었지 지금 기도한게 아니에요 지금. 그냥 우연히라고요 우연히.
제가 이스라엘 가가지고 제일 감동받은 것을 지금 몇 번째 이야기하느냐 하면 바로 그 목자의 들판 보고 제가 예루살렘보고 놀랜게 아니고 목자의 들판보고 난 뒤에 제가 놀래버렸어요. 물론 순서가 그것부터 먼저 봐서 그렇지만. 그때 아 저 들판에 천사가 온 거죠. 그것도 하나의 사건으로서. 하나의 사건으로서요.
사건이 아닌 것은 우상입니다. 만약에 제가 보고있는데 천사가 나풀나풀 거리면서 들판에 나오기를 내가 기대한다면 이것은 내 개별자 생각이에요. 우연인데 나이트가면 또 그 여자 만날거다 이거는 말이 안돼요. 용서받는 것은 예상 못한 우연한 사건이었습니다.
우연히 구원받는 거에요. 우연히. 내가 노리고 구원 받은게 아니고. 우연히 받아서 그 다음부터는 내가 내 자체가 나한테 어색해. 뭘 봐도 구원받을 수가 없어요. 말씀에 의하면 천하의 죄인이 따로 없어요. 내 욕심대로 살고 모든 게 내 중심으로 살아요. 어딜 봐서 성도에요 이게. 어딜 봐서 구원받습니까?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섰지요. 이 대목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이 이런 식이에요. 모든 성경이. 인간은 말씀을 지킬 수가 없는 거에요. 오히려 내가 지키는게 아니고 말해지는 거에요. 말해지는 것. 그래서 목자가 예수님 태어나는데 쫓아가지요. 왜 쫓아가느냐? 내가 말하기 위해서 가는게 아니고 말 되어지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가게 하신 그분의 말을 자기가 운반, 매개체로 가는 거에요. 그것이 나의 증인이 아니고 나로 하여금 여기 있게 한 그분의 증인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 있게 한 그것이 무슨성이라고 했습니까? ‘현장성’. 현장성은 반드시 뭐가 죽고? ‘나는 죽고 현장만’ 내가 죽어야 현장만 남아요. 내가 죽어야 현장만 남아요.
나는 살인자에게 살인당하고 나는 죽지요? 그런데 형사가 강력계 형사가 보니까 그 범인을 찾아냈어요. 왜? 나는 죽어서 내가 저 사람이 죽였어요 말을 못해. 이미 죽었으니까 말을 못하는데 현장에 남아 있는 핏자국부터 해가지고 그 손자국에 있는 지문조사 DNA조사 해가지고 범인을 잡잖아요.
나는 하나의 이 땅에 주님의 증인으로써 과감하게 죽고 나를 죽임으로써 주께서 얻고자하는 것은 현장성만 얻고자하는 거죠.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 집사가 그렇지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죽었는데 예수님은 누굴 찾습니까? 돌로 때린 사람을 찾는게 아니고 스데반 집사를 영접하지요. 영접하는 거에요. 하나님의 일은 매사가 그런 식이에요.
나를 죽여버리는 거에요. 왜? 내가 현장성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나 살라고 하다보니까 가려버린 거에요. 자, 이러한 인간에게는 잘했나 못했나를 묻는게 아닙니다. 네가 제대로 했어? 네가 주의 증인 제대로 했어? 왜 너 증인해 주의 증인해야지라고 닦달내는게 아닙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활성화라고 해요. ‘활성화’.
활성화는 어디에 써야 되느냐 하면은 바이러스한테 해당되는 거에요. 바이러스. 만약에 집에 조그만 인공지능을 사놨는데 건전지 밧데리를 집어넣어야 작동되는거라 합시다. 한두달간 잘 가다가 그 다음부터는 인공지능을 ‘수지’라고 합시다. 수지야 오늘 TV에 뭐하지? 묻는데 답변을 안해요. 보니까 밧데리 다 됐어요.
밧데리 넣게 되면 그 인공지능이 착합니까? 나쁩니까? 아니면 활성화되는 거에요? 활성화 되지요. 성령이 오게 되면 오게 되면 뭐냐? 우리는 활성화되지요. 성령의 충만함이 없으면 우리는 뭐냐 하면은 엉뚱한 소리한다고요. “주여 제가 어찌하여 제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갑니까?” 이런 엉뚱한 소리하고 있다고요.
갑자기 자기 증인. 나는 살려고 노력했는데 주께서 왜 안도와주십니까? 이렇게 나온다고요. 내가 나쁜 짓 안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하게 됐으니까 저한테 뭐라고 하지마세요라고 뭔가 공포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기쁨이 없이 그냥 막 아주 버티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니까 성령에 취해버리니까 갑자기 뭡니까? 활성화되지요. 이거는 내 일이 아니고 누구 일이다? 주님의 자신의 몸을 주께서 활성화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뭐다? 인공지능이다. 또 우리는 바이러스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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