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2 (탈출의 경로)200204a-이근호 목사
먼저 오신 분에 대한 보너스. 수련회 첫 시간 제목이 ‘추락’이었죠. 그러나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전혀 추락이라는 감을 못 잡잖아요. 우리가 어디서 추락이라는 느낌을 떨어지는 느낌을 받느냐. 사실은 그 질문이 나왔어야 되요. 떨어진다는 것은 be+ing. 현재진행형이거든요.
멈추지 않고 계속 떨어진다. 계속 떨어진다는 이 생각과 현실에 비추어 볼 때는 사람들은 떨어진다고 이렇게 수직적으로 떨어진다는 생각은 못하고 수평적으로 이렇게 살다가 뭐 이사 가고 일본에 이사 가고 미국에 이렇게 수평적 이동을 한다고 생각하지요. 수평적 이동.
그게 이번 주일 낮 설교 때 할 때에 인간이 자아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시간과 공간성에서 인간의 공간성이 하늘이 없으니까 인간은 하늘이 없으니까 옆으로만 이동하는 거에요. 옆으로만. 인간의 공간성은. 물리학자들이 천문학자들이 하늘을 보는 것은 사실은 위를 보는게 아니에요. 옆으로 보는 거에요. 지구 바깥의 옆으로 보는 거다 이 말이죠.
가면 갈 수 있는 어떤 곳. 그리고 제가 오후설교 때 했지요. 오후설교 때 뭐냐 하면은 김민기의 봉우리라는 노래 이야기 했지요. 봉우리. 노래가사 한번 본적 있습니까? 자기가 쟁취했다는 것이 자기 집의 언덕배기에 불과했다는 거에요. 자기는 봉우리를 쟁취했다고 여겼지만. 언덕배기에 불과하죠. 이게 뭐냐 하면은 바로 이게 수평적 개념의 공간적 개념이에요.
그러면 이 수평적 공간 개념을 이것이 틀렸다 아니다 그래서 아니야 그래서는 안되는거야 라고 지적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단, 예수님께서 빌립보서 2장에서 하늘에서 땅으로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없지요.
시간과 공간을 그걸 뭉개버리고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된 그 자아를 뭉개버릴 때 예를 드는 것이 주일날 설교에서 누굴 예를 들었느냐 하면은 이스라엘 예를 들은 거에요. 이스라엘은 바로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본 겁니다.
약속의 땅으로 보고 수평적 이동을 하는 거에요. 나 바벨론에 잡혀갔다. 그러면 수평적 이동에 되게 되면 무슨 희망이 있느냐 하면은 잡혀가더라도 다시 수평적 이동으로 오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희망이 생기지요.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홍해를 건너서 시나이반도를 건너서 수평적 이동을 하지요. 뭐 계단 올라가고 이런 것 없잖아요. 바로 거기서 거기 옆에서 옆 아닙니까. 공중에서 인공위성으로 보면 그 자리가 그 자리죠. 이집트 있고 이렇게 이스라엘 가나안 땅 있고. 이동이 가능한 거에요.
하나님께서는 옆에서 옆으로 이동이 그냥 가능하다는 그러한 인식 자체가 잘못된 것을 알리기 위해서 여기에다가 뭐냐 하면 옆인데 살아서는 못가는 두개의 갭을 만든 겁니다. 하나는 홍해고 하나는 요단강이죠. 아 까짓것 옆에서 옆으로 못가? 이게 따라오던 애굽 군사들 사고방식입니다.
여기서 이집트에서 시나이반도까지 홍해를 못 건넌다. 못 건넌다 하는 이 건널 수 없다는 이 갭이 있다는 말은 헤엄을 못 쳐서 건너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누가 개입을 하느냐 하면은 여기 모세의 지팡이가 개입하지요.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서 못 건넌다.
그러니까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갈수 있는 곳이 인간의 시간, 공간 개념으로 갈수 없는 곳이다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시간 개념은 뭐냐 하면 언젠간 약속대로 이 땅에 돌아오겠지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 시간개념 공간개념이 이스라엘 망하게 한 거에요. 지금도 인간들은 이스라엘이 갖고 있던 시간개념 공간개념을 똑같이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추락이라고 제가 한 것은 바로 뚝 뭔가 떨어지고 있다는 것, 이 떨어지고 있다는 그 경로는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이 여기에 이 세상에 합류했잖아요. 인간 사는 세계에.
합류해놓고 빌립보서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떨어져서 합류했다고 보는 거에요. 떨어져서. 예수님이 추락했다는 거에요. 그럼 예수님의 원래 자리는 뭡니까? 하나님 계신 자리죠. 하나님이 계신 자리로 갈려면 예수님이 대신 올라가는게 아니고요. 하나님 계신 옆에 오른쪽에 가버린다고요. 내려올 때는 이렇게 내려왔지만 갈 때는 오른편에 가버려요.
그러면 이 추락 개념이 없는 사람은 상상하는 하나님의 천국 개념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 오른편의 자리가 천국이다라는 이런 개념은 어떤 인간의 머리에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없어요. 그래서 주님이 추락한 그 경로를 볼 때 인간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경로에 따라서 추락중이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말은 십자가에서 더 내려간 음부까지 내려간거죠. 우리 보기에 십자가에서 멈춘게 아니고 사실은 더 내려간거에요. 하나님이 저 음부까지 내려간거에요. 사도신경에 나오지요. 저 아래쪽까지 내려갔다가 그 아래쪽에 내려갔는데 그쪽이 뭐냐 하면은 인간들이 우수수 주룩주룩 우수수 떨어지는 그곳입니다.
그 떨어지는 방향을 인간이 스스로 바꿀 수가 없어요. 중력이 떨어지는 그 중력을 스스로 못 돌려가지고 알아서 가봤자 갈 곳이 없어요. 왜? 이곳은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아들의 나라이기 때문에 특수한곳이기 때문에 떨어져서 갈 데가 없어요. 계속 떨어질 수 밖에 없어요. 그 떨어지는 그 추락의 자리.
그 마지막 최후의 추락의 자리가 이미 어린양이 죽은 성전의 자리로서 철렁하고 그물로 받아주게 되면 바로 그것이 최후의 추락의 자리인 동시에 인간이 현재 떨어진 장소인 동시에 결국은 하나님과 영원히 사는 임마누엘 하나님과 함께 사는 천국의 모형으로서 우리에게 성전이 그렇게 마련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추락이라는 말한거에요. 인간들은 추락이라는 말을 못 느끼는 이유는 예수님의 경로를 생각 못하고 자기 몸을 자기가 알아서 움직일 수 있다 미국 이민가면 되잖아. 호주가면 되잖아. 호주에 산불 나라. 자꾸 어디 가서 내 몸 하나 이동할 수 있고 그리고 시간은 언제 오겠지 하는데 이 시간은 시간의 어떤 그곳으로 가기 때문에 시간을 기다려봐야 기다림뿐이죠. 그냥 기다림 자체를 기다릴 뿐이에요. 기다림 자체를. 막연하게. 갈 때까지 가보자.
자, 이제 본격적으로 누가복음 해보겠습니다. 이거는 수련회 때 여러분들이 궁금해할까 싶어서 왜 추락이냐? 나는 추락을 못 느끼고 중력을 못 느끼고 멀쩡하게 옆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왜 자꾸 추락이라고 하느냐? 그것도 현재진행형으로 하느냐?
그것은 성도로 하여금 떨어지는 감을 성도만 알게 하는 거에요. 추락할 때 앞에 형용사를 하나 넣었죠. ‘현기증 나는 추락’. 그래야 이게 현재진행형이 살고 있죠. 현기증. 확실히 빈혈같은거 있으면 막 떨어지는. 주가 떨어질 때 같이 쭉쭉 떨어지는 그런 거 못 느꼈습니까.
자존심 확확 떨어질 때 현기증 못 느꼈어요? 이게 어디까지 꼴아박는가 한번 보자. 그게 맞는 장소로 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성전이 죽어야 마땅한 대신 죽으신 분을 찾아가는 그 죽으심이 찾아가는게 아니고 죽으심이 나를 땡기는거에요.
너 대신 내가 죽었다는 사실, 완료되었다는 사실을 확인시키지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오른편에 가실 분과 합류하기 위해서 지금 가고 있으니까 그 떨어짐 우리 떨어짐이 얼마나 반가운 떨어짐인지 몰라요.
자, 누가복음 하겠습니다. 오늘부터. 누가복음을 보면서 여기에 누가 그 다음에 복음이라는 말 나오지요. 복음이라는 기쁜 소식인데 왜 이게 기쁜 소식과 소식을 구분해야 되요? 그냥 소식을 하면 이 판단을 누가 하느냐 하면 내가 판단을 해버려요.
저게 기쁜 소식인지 슬픈 소식인지 내가 알아서 판단해서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내가 판단하겠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러나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 소식과 반대가 됩니다. 예상 밖의 소식이에요. 예상 밖의. 내가 판단할 여지가 없게 만드는 거에요.
그러면 이 복음이 구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신약에 왔잖아요. 신약은 세상의 끝날이 신약입니다. 시간을 관장하는 것은 언약이지 우리의 시간개념이 아니에요. 마지막 언약이 오게 되면 모든 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총정리, 총마감이 되어버립니다. 마감.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한 지점에 대해서 이렇게 다 응집이 되어있어요. 볼록렌즈에 햇살이 쫙 응집되듯이 초점이 모아지듯이 쫙 당겨버리죠. 총정리가 되는 거에요. 신약이. 누가복음은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마태복음도 마찬가지지만 세상에 있는 유일한 특별한 세상의 모든 사실을 다 포함시킨 책. 그게 무슨 책입니까?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기록되어 있는 그리고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 책의 기록을 위하여 일어나야만 하는 그 책. 무슨 책입니까? 성경이죠. 그 성경의 최종 마감이 이 복음 안에 응집되어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복음 안에. 이 복음은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것을 총정리했다 이렇게 되지요.
그 한국에 느와르 영화 소위 깡패들 싸움하는 영화 보게 되면 사채업자들이 못된 사채업자들이 돈 안 갚으니까 삽 하나 던져주고 "정리해." 이 말이 뭡니까? 갖다 묻어버려 이거 아닙니까. 그 정리에요. 그 정리.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조폭이 되어가지고 삽 하나 예수님보고 총정리해버리라는 거에요. 그래서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복음이란 인간은 어디 막혀있느냐? 인간은 살아있는 살아있다는 몸에 스스로 막혀있거든요.
인간이 죽고 난 뒤에 일어날 일을 누가복음에 담았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인간이 몸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미지의 것으로 남아있는 죽음 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누가복음은 삽질해가지고 정리한거니까 그것을 우리에게 미리 알려주는 거에요.
알려주게 되면 이 정리에 준해서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은 이 정리에 의해서 세상의 모든 일은 일어나야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일어날 일어났던 일이 아니라 이대로 앞으로 이 설계대로 앞으로 시작되어야 될 거에요.
누가복음이 물론 일어난 일도 있습니다만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장차 그렇게 될 일도 써놨어요. 어차피 마감이니까요. 마감되는 일이니까. 이걸 아주 더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공동묘지 재방문.
삽으로 묻었으니까 사채업자가 모두 죽여버렸으니까 공동묘지가 되어 버린 볼록볼록 세상 모두가 공동묘지된 것을 하나님께서는 성령 받은 성도로 하여금 이걸 재방문시키는 겁니다. 볼록볼록한 이거 잔디밭 밟고 다니라고 밟고 다니는 거에요. 세상. 안 죽은게 없이 다 죽었어요. 모든게.
마지막에 모든게 다 죽어있거든요. 그 죄값으로 다 죽어있단 말이에요. 죽어있는 공동묘지를 이렇게 재방문시키는 것이 뭐냐 하면 여기 누가복음 1장에 나오는 성령 받은 사람들이 성도들이 재방문의 기회를 줍니다. 재방문의 기회를.
주께서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성도는 존재보다 뭐가 우선이냐 하면은 사명이 우선이에요. 존재보다 사명이 먼저 있었고 그 사명을 위해 너는 태어나야만 한다는 겁니다. 이 원칙이. 존재보다 사명이 우선돼요.
그 사명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성과를 전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성과를 알리는 거에요. 그러니까 성도는 어떻게 살거냐가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전할거냐가 문제에요. 나 어떻게 살지? 그런 질문을 하면 삽으로 묻어버려야 돼. 아직까지 끝났는데 아직 끝이 아니라고 지금 혼돈스러워하는 인간이에요.
볼록볼록한 공동묘지를 다시 방문한다는 이 말은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국민학교 다녀놓고 저는 초등학교란 말 싫어요, 저는 국민학교 다녔어요. 국민학교 다녀놓고 40년 후에 다시 2학년 2반을 가보는 거에요. 이미 오후 한 6시 되서 애들 다 하교하고 난 뒤에 가보면 거기에 키 작은 걸상과 의자만 빈티지 모습을 띠면서 그냥 나란히 거기에 있지요.
애들은 없고 옛날 같이 하하호호 하면서 했던 급우들 있잖아요. 옛날 같이 공부했던 그 자리에 그 급우들은 한명도 없고 그냥 나이 60 넘어가지고 그냥 방문해보는 거에요. 50년 뒤에 국민학교 가보면 그 같은 교실 말이죠. 그대로 책걸상 있을 거 아니냐는 말이죠. 물론 키가 커서 앉지는 못하지만.
그러면 거기에 급우들 하나도 없지요? 공동묘지 아닙니까 그래. 공동묘지. 떠들던 기억, 선생님 없다고 얼마나 떠들었습니까. 왁자지껄. 그런데 그 소리도 안 들려. 왜? 공동묘지는 다 죽었으니까. 선생님도 물론 죽고. 걔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그건 모르겠고.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애들이 떠난 빈자리. 죽은 그 뒤의 자리.
그것만 쳐다보면서 아 주께서 삽질했구나. 다 묻어버려. 모든 인간을 죄값을 다 죽여버렸구나라는 사실을 통보하는 일을 하는 거에요. 이 일은 보람상조보다 더 쉽습니다. 한번 참석해야하는데. 이 일은 보람상조보다, 보람상조도 귀찮아. 장례식도 끝났어요. 보람상조보다 더 쉽다니까요.
유족들하고 의논할 것도 없어요. 계약대로 하면 차 3대 보낸다고 했는데 두 대 밖에 안 보냈습니다. 그런 이야기할 필요 없어 그냥 끝났어요. 여러분 그것도 못합니까? 공동묘지 뛰어다니는 것도 못해요? 그게 바로 누가복음 내용입니다.
자기 백성 보내가지고 증거케하는 거에요. 누가복음과 같은 누가복음 쓴 사람이 쓴 책이 무슨 책이냐 하면은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성과를 전하기 위해서 성령받은 거에요. 성령을 그냥 공짜로 준게 아닙니다. 공짜로 준게 아니고 예수님의 성과죠.
예수님의 성과에서 누구는 빠져야 되요? 선교하고 전도하는 내 성과는 절대로 끼어들면 안되겠지요. 용납이 안되지요. 예수님의 성과를 전달하는 임무 때문에 오순절날 성령이 임했습니다. 오순절날 성령이 임해가지고 세상 보는 것을 뭐로 보느냐? 집단공동묘지로 보는 안목을 줘요.
그래야 사람들에게 설득을 한다든지 죽은 사람을 무슨 설득을 해요? 설득을 한다든지 아부를 해가지고 교인 몇명 더 꼬셔볼까? 그러한 노림수는 성령한테는 용납이 안됩니다. 성령한테는 용납이 안되지요.
그러면 다 죽었는데 해가지고 천국 갈 사람을 어떻게 그러면 여기서 모집합니까? 할 때 여기서 공동묘지에서 다 죽었다 하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존재, 존재가 되겠지요. 존재들이죠. 존재들의 뭐가 떨어지느냐 하면 사건이 떨어집니다.
이번에 수련회할 때 여러분들이 한번 이렇게 배웠던 것 해봅시다. 1,2,3,4,5,6,7 자연수입니다. 벌써 수학 나오면 아 골치 아퍼. 토하고 그런거 아니겠지요? 2n. 제일 뒤에 n이 있죠. 그러면 여기에 2를 곱해보면은 2가 되고 4가 되고 8이 되고 2n이 되겠지요. 여기 만약에 이걸 제곱을 해버리면 이거는 1은 1이 되고 2는 4가되고 3은 9가되고 되겠지요.
분명히 1,2,3,4로 헤아릴 수 있는 하나의 존재, 두개의 존재, 3명 공동묘지에 넷, 묘자리 네개 다섯개 이렇게 하다가 1,4,9 이렇게 이 숫자보다 더 많은 숫자 나타나면 이게 뭐냐? 이게 바로 사건입니다.
똑같은 평수인데 다섯평 자리인데 사람은 다섯명 들어갔는데 사건은 다섯 곱하기 다섯 25가 될 수도 있어요. 오히려 3제곱이 될 수도 있고. 제한된 공간에 사건은 무한. 이게 뭐냐 하면 진무한입니다.
진무한. 진짜 무한이라고 하는 것은 1,2,3,4 끝에 오는 것이 아니고 제한됐는데 사건의 수는 끊임없이 많아지지요. 설교 본문은 하나인데 그 설교 가지고 1년 하라고 하면 1년 내내 새로운 것이 나오지요. 왜? 설교는 주님이 만들어내는 사건이기 때문에.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그거 읽어보면 그 본문은 안 달아야 됩니까? 끝나는거에요? 이해 다 되신거에요? 그게 아니고 저녁 먹는 것도 창세기 1장과 관련되어 있고 목욕하는 것도 창세기 1장에 관련되어 있고 어디 놀러가는 것도 신종코로나 바이러스도 창세기 1장관 관련되어 있어요. 전부다.
관련지을 수가 있다 이 말이죠 관련지을 수가. 내가 애들 말 안 듣는다고 나무라면서 "야! 생각의 의자에 앉아 있어. 불 끄고." "아버지 미안해요." 찔찔찔찔 울고. "앞으로 네가 잘못했을 때는 네가 알아서 자동적으로 생각에 의자에 앉는다." "예."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니라. 모든게 다 관련되어 있는 거에요. 모든게.
그래서 말씀은 언어가 아니에요. 사건이 이렇게 중첩되어 있기 때문에 두가지 세가지가 아니라 제곱이 아니라 무한대로 중첩되어 있는 것이 말씀이에요. 사람은 말씀을 못 지키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얼마나 포개져 있는가를 본인이 알 길이 없어요.
그래서 어느 정도 지켰다고 해서 지키는게 아닙니다. 그 깊이와 높이를 다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인간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사건을 유발해서 그 사건이 또다시 우리에게 덮쳐버리면 우리는 하나의 사건이 되지요. 그 사건이 된다는 말은 주님이 찾아오면 우리는 하나의 의미가 되는 겁니다. 의미가.
다 죽었으니까 죽음이라는 의미밖에 없어요. 무의미해요. 무의미한 공동묘지를 그 아주 철부지 천진난만한 애들이 막 뛰어노는 광경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영국에서 만들어져가지고 애들 유아하는게 있지요?
어떤 무덤같은 집을 짓고 애들 KBS 오후에 보면 나오는거 있잖아요. 텔레토비 있지요? 4명입니까? 그 장면 생각해보세요. 공동묘지에 잔디밭을 순진무구한 애들이 막 뛰어 다니는 거에요. 그걸 누가복음에서는 성령 받은 성도들이 등장해서 뛰어다니는 겁니다.
이게 사도행전과 관련되어 있지요. 오순절날 사도들이 뛰어다니는 거에요. 뭘로 뛰어다니겠어요? 자기가 알아서 어떻게 실적 얻겠다 뛰어다닙니까? 아니면 뛰어다니는 자체가 사건이겠어요? 뛰어다니는 자체가 사건이에요. 그래서 본인이 본인을 그 사건을 기억을 못해요.
성전미문에 앉은뱅이 앉았다. 앉았는데 그거는 그 다음 지시가 주어져야 돼요. 어떻게 할지는 그거는 성령께서 주께서 그 자리에서 그 다음 중첩된 사건을 주어지게 되면 앉은뱅이가 듣기 참 섭섭한 이야기가 나오지요. 네가 원하는 돈과 은은 내게 없다. 미안하다.
돈 있어도 나는 안줘.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마침 돈이 없어요. 돈이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내게 있는 사건을 네게 주노니 나는 너를 사건화하겠다. 하나님의 성령을 줘서 성령으로 하여금 이제는 자기가 앉은뱅이냐 몸 아프냐 거렁뱅이냐가 하는게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존재라면 나 이렇게 잘 살았다 하고 남에게 자랑질을 하겠는데 이미 존재는 이미 사건 앞에 죽은 자로 간주되기 때문에 부자든 뭐든 얼마나 서울대학 나온 것과 관계없이 전부다 죽은 자에요.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네 성과가 아니고 예수님의 성과에요.
예수님의 성과를 네가 지금 몇살 살았어? 사는 동안에 계속 사건화시켜서 전파하게 하는 거에요. 물론 남을 약올리는 것이 사람은 포섭하거나 설득하거나 교회 오도록 만드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존재를 의미를 더 키워주는게 아니에요.
나는 이렇게 괜찮은 사람이니까 목사님 저는 꼭 천당가야되요. 천국가야되요. 그건 자기 의미를 버리지 않고 그 의미를 천국까지 키우려는 시도거든요. 그러면 뭐가 없느냐 하면은 공동묘지라는 취지가 날라가버려요.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의미가 날라가버리고 나만 살았다가 되어버리니까 이런 것은 하나님의 언약 원칙에 위배되는 겁니다.
그건 누가 좋아하느냐? 악마가 되게 좋아하지요. 악마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거 구라다. 나는 착하거든. 이게 악마가 흠집내는 거잖아요. 예수님의 성과같은 소리하고 있네. 예수님은 실패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다 이룬거 아니야. 다 이룬게 아니고 모자란게 있어. 이게 이제 악마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시비거는 겁니다.
지난 지난번 낮설교 때 그런 이야기 했지요. 십자가 때 양쪽에 강도 있지요. 그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예수님을 의심하는 이유가 그거에요. 다 이루었다를 못 받아들이겠다는 거에요. 다 이루었다는 꼬라지 봐라. 이게 다 이룬거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미 다 죽고 난 뒤에 되어질 일을 사건화시켜서 성령을 통해서 성도한테 주는 거에요. 죽고 난 뒤의 일. 그러니까 구원받은 강도는 뭘 알았어요? 죽고 난 뒤의 예수님이 낙원에 가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죽고 난 뒤에 그 사실을 그 강도가 어떻게 알았어요? 어떻게 알았는지 알고 주의 나라 임할 때에 저를 기억해달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성령 받았다는 말은 살아생전의 내가 보자 애 합격하겠습니다. 이번 앞으로 5년 뒤에 출산하고 이걸 아는게 아니고 죽고 난 뒤에 나는 지금 어디가 있느냐를 성령을 통해서 미리 지정해주는 겁니다. 그것을 주 안에서라고 사도바울의 편지에서는 주 안에 있다 주 안에. 인천 주안 말고. 주 안에.
주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사는 거에요. 옛아담은 죽고 이제는 새아담의 몸으로서 지체로서 살아가는 거에요. 이걸 죽기 전에 미리 알게 된 거에요. 죽기 전에 미리 알게 된 겁니다. 시험지 유출된 거에요.
합격통지서 미리 유출되서 미리 빼내버렸어. 물론 우리가 빼낸게 아니고 성령께서 특혜를 줘서 빼내가지고 너 명단 있다. 생명책에 네 명단 있어. 봐. 하고 집어준거에요. 집어주면 나는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단순히 그게 기쁜게 아니고 그것도 기쁘지만 그게 아니라 세상은 어떻게 잘난 인간들도 전부 다 죽어있다는 공동묘지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옛날 국민학교 2학년 2반 교실에 불과한 거에요. 애들 다 컸어. 이제 늙어서 그 키 낮은 의자, 책상과 걸상밖에 없어요. 한때 인간들이란 이름을 가진 존재자들이 한때 여기에 살았었었었다를 알려주는 거에요. 왜? 이미 죽은 이후의 이야기니까.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좋은 소식이 아니고 기쁜 소식이죠 이게. 놀랠만한 소식이에요. 아 내가 그전까지는 예수 믿었는데 죽을 때까지 유지해야하는데 유지해야 천당 가는데 아이고 그런데 만약에 치매 걸리면. 아 안돼 안돼 치매 걸리면 안돼.
자꾸 자기 자신을 존재를 살릴려고 이렇게 살았잖아요. 그런데 그게 바로 가짜라는 거에요. 그게 가짜에요. 이미 산거에요 이미. 이미 완료가 되어 버린거에요. 내가 어떻게 살거냐가 아니고 어떻게 구원받을거냐가 아니라 무엇을 증거하느냐 아무것도 아닌 나를 이렇게 구원시킨 그분의 성과 있잖아요. 그 공로를 증거하는 거에요.
공동묘지에 텔레토비처럼. 보라돌이 이렇게 해가지고 잔디밭에 뛰어다니면서 으음~~~하면서 돌아다니면서 삐지고 돌아다니면서 그 일 하는 거에요. 그 성령 받은 사람치고 사명 없는 사람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 사람의 구원의 존재보다도 사명이 우선이에요. 사명을 위해서 구원받았지 내 구원받기 위해서 구원된 것이 아닙니다.
자, 그렇다면 세상에 있는 그 소위 신학자들 총신이고 뭐 장신이고 신학자들, 그 신학교에서 배출된 목사들의 생각은 어떤 생각이냐? 여기에 대해서 제가 71회 다니엘 비역사적 해석이라는 논문발표한 그 현장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현장에서 제가 서론부분을 시간에 하도 제약 시간을 하도 짧게 줘요. 아주 반칙이라. 일부러 이야기하지 마라고 하는 것 같애. 절차가 불공정해요. 누구 말대로. 절차가 불공정한 절차를 만들어 놓고 이걸 보고 그 두꺼운 것을 다 하라고 하니까 할 수 없이 제가 제일 중요한 서론부분을 다루었어요.
서론부분이 뭐냐 하면 성경은 믿으라고 준게 아니고 믿지 못하게 하려고 줬다. 이 대목입니다. 성경은 어떤 인간도 구원되지 못함을 알리기 위해서 성경을 준거에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길이 있다? 없다? 길이 없는 거에요. 길이 없는 거에요. 길이 없어. 구원의 길이 없는 겁니다.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데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갈 때 그 바늘구멍은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길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바늘구멍을 등장시킨 거에요. 예수님께서.
만약에 그 바늘구멍이 길이라고 한다면 바늘구멍 코가 이만해야 돼요.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 이야기를 현장에서 들었던 제자들은 어떻게 들었느냐 하면은 길이 없음으로 제대로 알고 들은 거에요.
그래서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에요. 그래 사람은 할 수 없다. 사람은 할 수 없어요. 길이 없어요. 천국 가는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볼록볼록 공동묘지에요 전부다. 이미 죽은 거에요. 성령을 받지 아니하고서는 어떤 사람도 길이 없는 거에요.
그런데 왜 이 서론부분을 왜 거기서 이야기 했느냐 하면 이 한국교회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길이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길이 있다고. 그러면 길이 있다고 여기는 그 신은 어떤 신이에요? 성경에서는 길이 없는 거에요. 낙타 바늘구멍처럼 길이 없는 겁니다.
그리고 사람은 할 수 없다고 했거든요. 사람이 할 수 없다는 내용이 이 책의 내용이에요. 믿을 수 없는 내용만 있는 거에요. 믿을 수 없는 내용만.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뭐냐 하면은 교회에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서 뭐를 하느냐 하면 할 수 있다로 이야기하는 거에요. 할 수 있다라고만 이야기할 수 있죠.
그럼 할 수 있다로 이야기하려면 이 성경 말씀을 가지고 뭐를 하느냐? 성경 말씀을 가지고 인간 쪽에서 시도하게 되면 여기서 구원의 길이 열린다고 가르칠 수밖에 없지요. 그게 오늘날 목사들 머리 속에 있는 신학 속에 있는 이게 악마적 요소죠. 사기죠 사기. 사기입니다. 사기를 친 거에요. 길이 없는데 있다고 가르친 거에요.
그러면 길은 어디 있느냐? 길은 여기 있다가 아니라 길=예수님이 되요. 예수님 오셔서 두가지를 했는데 하나는 길이 없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이. 길이 없음을. 네가 아는 하나님하고 내가 아는 아버지는 다르다. 이거 대구강의에서 했거든요. 여기서 다시 하지는 않겠습니다.
네가 아는 하나님하고 내가 아는 하나님하고 다를 뿐더러 더 나아가서 네가 아는 하나님은 그게 뭐냐? 악마가 되는 거에요. 악마기 때문에 인간들에게 길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해서 길을 열어준 거에요.
아 나는 구원받지 못했는데 어떡하지 어떡하지라고 하는데 그건 엄살입니다. 인간은 구원 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본인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자기는 자기만큼은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이미 악마가 그렇게 인간에게 그렇게 부추겨놨어요. 마음을 붕 뜨게 만들어 놨어요. 자기를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왜냐하면 내 마음 내가 몰라요. 내가 부인하고 싶어도 마귀가 나를 부인하지 못하게 만들어 가지고 왜 네가 성급하게 자기를 포기해. 포기하지마. 너는 가치 있는 존재야. 자꾸 내 안에서 격려를 해주기 때문에 악마는 하나님께 네가 잘 보이면 그 댓가는 주어진다는 거에요. 그런 희망을 가지라는 거에요. 자꾸만 격려하는 거에요.
성경말씀 있잖아. 성경말씀 원어 연구하고 문법, 문맥상 해석하게 되면 여기서 뭔가 진리나오고 그거 네가 확보하게 되면 네가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뭡니까? 길이 없다는 거에요. 그게 길이 없다는게 뭐냐 하면은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 길이 없는 거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왔다는 자체가 주님 앞에 버림받은 입장이기 때문에 버림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이 속한 이 세상자체가 이미 버림받았다고 선언을 당했기 때문에 버림받은 자는 버림을 받아야 되지. 손들고 구원해주세요 할 수 있는 어떤 권한도 없어요. 완전히 막혀있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시간을 많이 보내가지고 서론부분을 그렇게 강조한겁니다.
역사 끝에 뭐 있겠지. 역사 끝에 뭐 있겠지가 아니라 역사 속에 누가 들어있어요? 자기가 들어 있잖아요. 내가 아는 역사와 네가 아는 역사 다 달라요. 말로는 역사 안에 있다 역사 끝에 있다 하는데 역사가 어떤 내용이냐 하는건 자기가 알아서 선택해서 들어갈 내용과 뽑을 내용을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결정해요.
중요하다 싶은건 뽑아내서 자기 역사 만들고 안 중요한 것은 버려버리고. 안 중요한 것이 또 남한테는 중요하거든요. 사람마다. 10사람이면 10사람마다 역사가 다 다르다니까요. 10사람 역사가. 북한에서 보는 일제강점기 역사와 한국에서 보는 일제강점기 역사는 다 달라요.
역사 속에서 본인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자기를 미화시키고 긍정하고 자기 존재를 가치를 확보하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지나간 기억들을 해석해버리는 겁니다. 여러분의 과거도 믿지 마세요. 길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로 길을 해서 완전히 인간과 끊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베드로가 갈려고 해도 갈 수가 없어요.
두번째. 두번째 이 길이 끊어졌는데 길=예수님이죠. 예수님 자체가 길이 된다는 말은 죽음은 인간에게 죽으면 끝이죠. 나의 죽음은 나의 끝입니다. 맞지요? 나의 죽음은 나의 끝이라고요. 모든게 죽어서 공동묘지 되었는데 여기 죽음에서 삐질삐질 틈이 생겨요. 갈라짐이 생긴다고요.
그럼 길은 뭐냐? 길은 곧 길은 뭐가 되요? 길은 예수님이 길이 되요. 예수님이 다리가 된다는 말이 아니고 Bridge Of Trouble Water 이게 아니고 예수님 자체가 틈을 벌어지게 하는 거에요. 그러면 없던 길이 예수님 자체에서 길이 생겨버린 것입니다.
없는데 예수님 쪽에서 길을 십자가 길을 만든 거에요. 그렇게 되면 인간의 모든 지혜도 막혀있고 모든 기적도 막혀있는데 오직 구원받는 자에게는 십자가만이 뭐가 돼요? 구원이 능력이 되는 겁니다. 무엇이 올바름입니까? 무엇이 진리입니까? 예수님 자신이 진리에요. 무엇이 생명입니까? 예수님에게서 영생을 얻는게 아니고 예수님 자체가 생명이에요.
나라는 인간은 주님하고 거래하지 마세요. 그러면 내가 안 죽은게 돼요. 이미 죽어서 없어졌어요. 없어지고 예수님이 자신의 성령으로서 죽어 없어진 이 자리에 예수님의 확대가 일어나요. 예수님의 지체가 일어나게 되면 여기서 길이 생기고 여기서 진리가 생기고 생명이 생기는 거에요.
이것이 뭐냐? 이것이 성도란 말이죠. 이게. 죽은 자 속에서 예수님이 들어와서 주께서 구원사건을 일으켜요. 사건을. 그리고 그것이 누구 성과입니까? 예수님 본인의 성과가 된다 이말입니다. 예수님 본인의 성과.
그러면 매일이 뭐냐 하면은 매일이 놀랄 소식이죠. 그게 매일같이 복음이 되는 거에요. 내가 복음을 믿는게 아니고 내 자신이 복음이 되어 버린다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있던 조건하에. 혼자 또 복음되면 내가 예수인가? 이렇게 되는게 아니고.
예수님이 만든 그 틈 안에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겁니다. 우리가 틈이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때 예수님의 말을 못 알아들었잖아요. 똑같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의 말을 사도행전 28장의 말씀처럼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해야돼요 이게.
왜냐하면 구원받은 사람은 내가 그 사람을 설득하는게 아니고 주님이 나에게 찾아온 것처럼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그 사람 자체가 예수님이 만들어준 함께 있음의 틈이 되어야 되거든요. 틈이라 하는 것은 틈이 생기기 전까지 아무것도 없어요. 어떤 징후도 징조도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주님이 손을 대버려서 여기서 갑자기 균열이 일어나면서 거기서 뭐가 나온다? 예수님의 손바닥이 나오고 손길이 나오는 거에요.
시편 8편 한번 봅시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라고 되어 있죠. 해와 달과 별을 뭐로 만들었다고 했습니까? 주님의 핑거 주님의 손길. 주님의 손으로 만들었지요.
어제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만 사람이고 하는 것은 사람은 호흡을 주시는 분이 주님이기 때문에 호흡을 취해버리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지요? 흙으로 만든 인형이라고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그래서 수 헤아릴 가치가 없다고 했지요.
인간이 주도적으로 어떤 숫자를 헤아릴 권리가 권한이 없고 누가 구원받을지 구원 안 받을지 숫자 헤아릴 권한은 누구한테 있다? 주님한테 있어요. 그래서 사도행전에 “영생주기로 작정한 자들은” 그 다음의 말이 재미있어요. “다 믿더라”. 다 같이 믿더라. 다 같이. 누락이 없이, 빠짐이 없이. 숫자의 훼손됨이 없이. 숫자가 이렇게 결함이 없이. 온전하게 다 되더라.
그럼 누구 작품이란 말이죠? 성도는 없는데 이 없는 성도를 있게 만드는 거에요. 없는 성도를. 따라서 성도만이 알아요. 내가 성도될 수 있는 어떤 여건이 내 쪽에서는 발견되지를 않았는데 주님 쪽에서 주님이 예수님의 성과에 의해서 성도가 되었음을 공동묘지에다가 텔레토비처럼 전하는거에요.
오늘 제목을 텔레토비로 할까. 텔레토비처럼 증거하는 거에요. 증거하는 것. 증거할 때 그냥 증거하게 되면 이건 강의시간이 되고 사건으로 다가오는 사건 자체가 주님 증거하는 모습으로 나와야 되요. 두 사람이 만약에 마주치게 되면 한쪽은 내 성과는 이만큼 살았다고 버틸 거에요. 내가 스스로 행동 조심해서.
그런데 성도는 뭐라고 합니까? 지금 어떤 사건 속에서 누굴 증거해요? 예수님의 성과를 증거하겠지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닌 나를 주께서 하게 하셔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수직적으로 내려와서 가시는 그 경로를 얻은 자. 경로를 성령에 의해서 얻게된 자의 그 스토리, 그게 예수님과 성도들의 그게 바로 누가복음입니다. 이 세상에 빠져나갈 수 없는데 빠져나가는 경로를 보여주고자 성령 받은 성도들과 그리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여기 누가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이 사도행전하고 같이 사도행전도 주님과 사도들의 그 움직임과 활동이죠. 그것처럼 누가복음도 마찬가지 입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거기에 광야에서 양치는 들판에서 양치는 목자 나오지요?
목자가 목자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인간인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이 알려준 경로가 나오지요. 누굴 봐야 됩니까? 베들레헴에 가서 후딱 누굴 봐라? 베들레헴에 난 아기를 보라. 지난 낮설교 때 했지만 누가복음 2장에 28절 오후설교였구나.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그래서 제가 이렇게 했지요. 어떤 아주머니가 아기 안고 있는데 아기 안고 있는 아주머니 버스타도 만나고 지하철 타도 만나고 다 만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시므온이 어떤 아주머니가 애기 안고 있는데 갑자기 그 앞에서 시므온이 무슨 고백을 하느냐 하면은 2장 27절에 보면은 시므온이 무엇에 감동으로 되었어요. 2장 27절 성령의 감동이죠. 왜 자꾸 누가복음에서 성령에서 계속 성령이 어떤 조건처럼 계속 선행되느냐.
이건 길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으로 감동해서 죽고 난 뒤에 일어날 일을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성령으로 감동해가지고 이 땅에서 탈출할 수 없는 세상의 탈출의 경로를 보여주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주여 이제 종은 편안하게 놓아주시는 군요. 이제 종을 편안하게 놓아주시는 군요. 참 이게 어려운 이야기에요.
어떤 아주머니 애기 안고 있는데 한번 실험해보게 세번째 애기 들고 한번 와보세요. 아빠가 애기안고 있는데 보자마자 "아이고 이제 해결됐다. 이제 모든 인간의 인생의 모든 난제가 해결됐다!" 이게 무슨 이런 조화가 있어요. 이런 조화가.
아 왜 그래야 돼지요? 이것은 시므온이라는 사람을 흉내내지 마세요. 나도 따라해야지 하지 마세요. 시므온과 아기 예수 사이에 점점점점 보이지 않는 관계가 이게 바로 구원의 탈출의 경로가 되는 겁니다. ‘탈출의 경로’. 오늘 제목을 탈출의 경로해야 되겠다.
탈출의 경로를 보면서 그 경로 나도 알고 있는데 이렇게 공감을 한다면 같은 성도란 말이죠. 나도 시므온처럼 나도 항상 이제 종을 놓아주시는 군요. 해놓고는 또 누구 하나 만나고 난 뒤에 화가 나서 정신이 혼란스러워서 나 이제 지옥갈거야. 악마가 나를 잡아죽이는구나.
자꾸 성경에 나오는 것을 성경에 나오는 연기를 본인이 연기를 할려고 하는데 연기가 안 해도 돼요. 그것은 보이는 거잖아요. 보이는 것 말고 보이지 않는 관계. 상상도 못한 관계. 망가져도 상관없는. 왜? 나는 존재가 되면 안 되니까. 그 사건. 이런 사건을 사건되게 복음사건되게 하는 보이지 않는 관계성.
그게 바로 이 종을 편안히 놓아주는 군요. 그래서 이런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에서 특징은 뭐냐 하면은 뻔뻔함의 극치. 뻔뻔함의 극치에요. 이걸 사도바울의 편지에서는 이걸 두자로 뭐라 하느냐? 이게 자유에요. ‘자유’. 사도행전 그야말로 뻔뻔함의 극치를 이룹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죽기를 무서워하잖아요.
그런데 성령받은 사람들은 이미 우리는 죽었고 죽고 난 뒤의 상황을 성과를 전도할려고 이제 떠나도 되는데 안 떠나고 계속 이 땅에서 남겨지고 있는 거에요. 성과를 전하는 존재가 아니고 성과를 전하는 사건이 되라고 내 자체가 하루하루 사는게 사건이 되라고. 언제 죽어도 괜찮은데 사건인거에요.
여러분들 살아있는게 기적입니까? 내가 죽는게 기적이에요? 죽은 인간에게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게 기적처럼 느껴져야돼요. 어?!아직도 살아있네. 살아있는게 당연시 여겨지지 않고 기적으로 여겨져야 됩니다. 그걸 성령받은 사람은 그걸 알고 안 그런 사람은 모르지요. 성령 받지 않고 살아있기 때문에 맨날 생각하는 것이 구원받을려고 굉장히 애를 써요.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하게 되면 누가복음에 보는 해석의 안목은 어떠해야 하는가? 아주 보다 냉정하고 냉철하고 냉혹해야 돼요. 왜? 공동묘지로 보기 때문에. 그게 정확합니다. 이게 정확한거에요. 이게 초과적이에요. 이 세상에서 이성과 지성으로 알 수 없는 거에요. 이건 그걸 넘어선거에요.
이런 성도의 갖고 있는 지위를 뭐라고 하느냐 이걸 초월적 지위라고 해요. ‘초월적 지위’. 초월적 지위라고 합니다. 이 땅에 없는 지위, 영어로 하면 포지션. 사도바울의 편지에서 보면 주 안에서. 주 안에서. 성령 안에서. 초월적 지위.
그러니까 보다 냉정하게 보고 냉철하게 봐야 돼요. 세상 성령 받지 않는 사람들이 보는 가장 냉철한 것은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보다 예수님보다 돈이 더 확실한 현찰이 더 확실한 그거다. 그러면 베네수엘라한테는 그런 소리 못하죠. 그러면 거기는 금이 더 확실하다 이렇게 되겠지요.
가장 확실한 것은 재산이 전부다. 인간은 돈이 인간을 만든다 하는 그들의 마지막 냉철함은 그게 전부에요. 까짓것 뭐 하나님이 돈 생기나. 교회가 돈 생기나. 그러나 초월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은 더 냉철하게 보는 거에요. "너 돈 가지고 죽잖아. 죽고 난 뒤에 어떻게 되는지 알아?" "몰라." "너 모르잖아." 모른다고. 전부를 모르는 거에요.
그걸 모르는게 아니고 죽고 난 뒤에 모르면 다 모르는게 돼요. 왜? 죽고 난 뒤의 사실을 모르면 모든 것이 악마의 사기극에 말려든 거에요. 사기극에. 중국 가서 죽었다는 유명한 사기꾼 이름이 뭐에요? 수조원 사기친 사람 있잖아요. 하여튼 조희팔이죠. 조희팔한테 속아 넘어간거에요. 세상 사람들이 악한 영에. 왜냐하면 돈이 최고의 가치는 돈이거든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걸 알고 시편에서는 뭡니까? 돈이 너의 생명을 구할 수 없다라고 되어 있지요. 잠언에서도 나오고. 돈이 너를 천국 보내지 못한다. 돈이 죄를 사하지 못 한다 되어 있지요? 십일조 바쳤는데. 십일조 가져가! 던져 버리고.
인간은 본인을 몰라요. 박사가 3개 4개 되도 모른다고요. 아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은 알아요. 냉철하게 보면 성령 받은 사람은 알아요. 이게 누가복음이 이게 바로 진리라는 사실. 그 들판의 있던 목자가 이 세상의 어떤 철학박사나 과학박사보다도 노벨상 받은 사람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어요. 초과적인 것이니까.
그리고 시므온이 아기 예수 보고 남들은 그냥 애기인데 그 사람보고 이제 내 영혼을 편히 쉬게 해주셔서 주여 감사합니다. 도대체 얼마나 알기에 성령의 감동이죠. 얼마나 알기에 이제 편안함을 느낄까요. 그 다음부터 두 번 다시 시므온은 고민하지 않았다. 그런 소설 쓰지 마세요. 내가 어떻게 됐느냐 그 관계.
아기 예수가 지니고 있는 그것만이 내가 아니고 그분이 진리고 길이고 생명이고 그분이 없는데서 틈을 만들어 준거에요. 그 틈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는 안목은 성령을 받아야 눈이 마주쳐요. 눈이. 저쪽 틈에서 나온 주님의 그 눈동자와 내 눈동자가 딱 마주침. 까꿍.
여기서 까꿍. 오바 까꿍. 둘 다 까꿍이 된거에요. 다 이룬 거에요. 죽은 자가 영안이 열린 겁니다. 다시 산 거에요. 내가 영생을 받은 것이 아니고 영생이 나를 만드신 거에요. 내가 사랑을 한 게 아니고 나를 사랑되게 한 거에요. 주님이 나를 사랑되게 소망되게 믿음 되게 하신 거에요.
복음의 신발이 되게 하신 거에요. 구원의 투구가 되게 하셨고 진리의 띠로 다루시는 겁니다. 철갑옷이 안에 사람도 없는데 밤에 박물관을 돌아다닌다니까요. 철갑옷이. 철커덩 철커덩. 박물관이 돌아왔다 영화보세요. 밤중에 혼자 돌아다닌다니까요. 안에 보면 사람도 없는데 투명인간 같애.
우리는 이미 투명인간이에요. 나를 움직이는 것은 내가 갑옷을 움직이는게 아니고 갑옷이 나를 움직인다니까요. 병행을 하는 것. 갑옷이 붙어있던 이 몸은 육의 몸에 붙어있는데 이 자석은 안쪽에 있는 주님의 자석과 서로 당기니까 주님의 움직임에 같이 움직이는 거에요.
우리는 이 육은 죽을 때까지 있는 이 육은 나풀거리는 커텐의 천처럼 우리는 육이고 육 바깥에 뭐가 있느냐 하면 바깥의 영에 맞닿아있지요.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죄만 생각하고 죄밖에 지을 줄 모르는 맨날 고민하고 절망하고 낙담하는 이 바깥의 그렇게 된 그 육을 주께서는 사용하셔서 바깥의 이런 복음의 비밀들을 발산하는 기능으로 역할로 우리를 사용하시는 거에요.
여기는 우리 2년 뒤 5년 뒤 없어요. 그냥 정지화면. 하나의 화폭에 다 담겨 있어요. 하나의 화폭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있다고요. 이게 주 안에서 일어난 사항. 주 안에서. 그래서 제가 설교시간에 강조한 것은 뭐냐 하면은 노력하지 말라고 했지요. 사건이 노력 안 해도 차가 들이받는 것처럼 사태와 사건이 들이받는다고요.
자아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서면 또 자아가 또 생겼어요. 생기니까 차가 와서 박으니까 아야~하는 거에요. "내 마음 너무 아파요 주님." 아이고 자아가 또 생겼구나. 아파하는 자아가 또 발생됐구나. 네가 있는게 아니고 존재 네가 있는게 아니고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네가 또 잊어버렸구나. 네가 아픈게 아니고 아파도 내가 아프지. 너는 하나의 아파야 될 사명이라면 아파라 이 말이죠.
아파도 괜찮기 때문에. 슬퍼해도 괜찮거든요. 어쨌든 우리가 전한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죽음 뒤에 일어날 일을 복음이란 명칭으로서 쫙 적는 겁니다. 텔레토비처럼 돌아다니는 거에요. 이 누가복음 전체를. 10분 쉽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