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191227b 마가복음14장 43-52절(피리소리)-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내용을 또는 비밀을, 세계를 내비치고 있습니다. 알려주십니다.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죠. 그런데 반대로 얽혀있기 때문에 인간이 보이는 것을 통해서 어떤 결실 또는 결과가 나타나야 돼요. 인간의 보이는 것들이 한곳의 지점을 공격을 해줘야 해요. 인간의 현재 보이는 세계가. 그 보이는 세계의 공격점. 보이는 것이 수렴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보이지 않는 세계가 열리고 계시가 되는 겁니다. 서로 만나는 두 선이 만나는 이 지점(☓)에서 보이는 것들은 한곳에 다 합류해야 돼요. 모아져야 돼요. 보이는 것들은.
그러면 여기 제자들이나 그리고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예수님 잡은 사람들의 공통점이 발생되겠죠. 예수님으로 인하여. 뭐냐 하면은 예수님과는 같이 해서는 안 되는 존재이구나. 예수님과 함께 해서는 안 돼. 이걸로 총정리가 된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중간에 십자가 사건이 있잖아요. 보이는 것들은 과학적인 인식이 되지만, 그 안에 담긴 진짜 가치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과는 상종할 인물이 못됨. 이걸로 그 성격과 본질이 완전히 굳어졌죠. 보통 성과가 아닙니다. 큰 성과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다 마찬가지에요. 나라는 존재 안팎이 다 나의 일부거든요. 나라는 존재 안팎. 나는 예수님만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바로 내가 끌릴 수밖에 없는 어떤 존재자가 등장하게 돼버리면 예수님 제치고 그 사람이 우선이 되는 겁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다시 말해서 인간은 어떤 방법이나 어떤 도를 닦고 어떤 수도를 해도 예수님과 함께 하겠다는 그것은 좌절되어야 하고 꺾여야 되는 겁니다.
그것이 이 보이는 세계의 목표의식입니다. 이 보이는 세계는 하나의 통일된 목표의식이 있어요. 목표의식이 있고, 이것이 그냥 체계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뭐로 나오느냐 하면은 직관으로 나와요. 충동으로. 직관으로. 툭 치면 딱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은 “나는 예수님과 구태여 함께 할 필요는 없다.” 이 공통된, 통일된 목표의식은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지나친 충실성입니다. 또는 충성감입니다. “충성!”하고 거수경례하죠. 이 세상에 대한 절대적인 충실성. 한결같다 이 말입니다. 한결같다.
인간은 변덕스럽다, 저 사람은 성격이 좋은데 나는 안 좋다, 뭐 그렇게 작은 차이를 가지고 저 사람과 나를 따로 구분할 수 있는 여지는, 주님 앞에서는 그런 차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그 나물에 그 밥이에요. 똑같아요. 차이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동일하게 망해야 마땅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걸 아까 시편 88편 8절의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자기 아는 자로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주님은 그들에게 체포당하고, 그리고 여기에 보면 나로 저희에게 가증한 존재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소위 관찰하고, 나도 예수님이 누군지 보기는 봤다고 하는 사람들의 직관과 그들의 공통된, 통일된 평가는 뭐냐, 예수님은 가증한 존재, 필요치 않는 존재, 우리를 힘들게 하는 존재, 우리에게 쓸데없는 존재라는 것으로 이미 평이 결정지어졌습니다. 그런데 괜스레 교회에서 예수님을 좋은 분으로 상상하거나 주님에게 호응을 표시한 그림 같은 것으로 이렇게 허상을, 환상을 만들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이미 누가 뭐래도 주님을 원치 않는 그러한 직관과 다른 인간들과 통일된 의식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아주 충실하다니까요. 지나치게 충실하죠.
한국 지도가 이렇게 있다면 아래쪽은 남한이고 위쪽은 북한 아닙니까? 휴전선 근방에서 북쪽으로 가는 아주 간단한 방법은 풍선이나 열기구타고 날아가면 되죠. 글라이더 타고 날아가면 되거든요.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 나오는 손예진처럼. 현빈 만나고 그러면 되는데. 이 휴전선이 뭐냐 하면은 남쪽의 임계점이죠. 지나친 충성으로 인하여 이거는 어떤, 만약에 귀순이나 넘어간다면 이미 할 도리를 다해봤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내가 얼마나 주님에 대해서 반발을 갖고 있는가를,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의 한계는 다 들통 난 입장에 있을 때 주님께서는 자기의 제자들을 찾아오십니다. 아, 주님의 멋진 계획이었습니다. 멋진 계획이에요.
주님께서 뭘 의도하느냐 하면은 주체 바뀜을 시도하는 겁니다. 주체 바뀜을. 나는 어떡하면 좋아요? 이게 아니라 이제는 주님이여,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하는 반문이 나오는 겁니다. 주체가 바뀌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대해서 내가 계속해서 충실하도록 주께서 몰아붙여요. 충실하도록. 주님을 사랑할거냐? 세상을 사랑할거냐? 쉽게 말해서 세상 속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으니까. 안팎자체의 일부니까. 나를 사랑할거냐? 주님을 사랑할거냐? 또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거냐? 나를 기쁘게 할 거냐? 갈등을 하는데요. 아무리 해봤자 입니다.
이미 결론은 났어요. 괜히 갈등함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척하지 마세요. 그건 괜히 폼 잡는 거죠. 괜히 폼 잡는 거예요. 어떤 유튜브 내용이 인기가 있었는데, 종이로 뭘 만드는가 하면은 종이로 비행기를 만들어놓고, 종이비행기를 날릴까, 말까? 이 내용이에요. 딴 내용은 없어요. 이 내용으로 한 20분 동안 하는 거예요. 날릴까? 말까? 끝. 결국은 날릴지 안 날릴지 모르는 채로 끝인 거예요. 아주 감질나게 만들었어요.
불교에 이런 교리가 있죠. 병 안에 새가 갇혔는데 어떻게 하면 그 새가 병을 뚫고 나올 수 있느냐? 이것은 콜럼버스가 달걀을 어떻게 똑바로 세울 수 있느냐?라는 것이 있죠. 봉인된 병에 새가 갇혔는데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느냐? 불교는 이것이 그들의 영원한 숙제였습니다. 근데 주님의 방법은 간단했어요. 병을 깨면 되죠. 근데 불교의 방법은 뭐냐 하면은 새가 영혼이 된다든지, 새의 어떤 변신을 시도하는 거예요. 병이 깨져야 되거든요.
근데 이 병을 누가 깨야 돼요? 새가 머리 박는다고 병이 깨지지 않잖아요. 지 머리만 아프죠. 그리고 병이 깨져봐야 소용이 없는 게 이 새가요, 병 깨진다고 이 새가 다른 새가 되는 것이 아니고 못돼먹은 새 그대로 나오는데, 병 깨져봐야 이 새는 소용이 없는 거예요. 병이 깨지려면, 힌트는 뭐냐, 아까 했어요. “우리는 안팎으로 세상의 일부다.”라고 했죠. 자, 세상을 깨게 되면 뭐도 같이 깨진다? 세상의 일부인 우리도 같이 깨지잖아요.
그러면 그동안 우리는 어디를 의존해서 살아갑니까? 직장에 의존했어요. 직장에. 직장에 의존해서 살아갑니다. 지금 수련회 참석 못하죠. 직장을 의존해요. 내가 의지하려고 하는 그것이 나의 연장이거든요. 나의 확장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나라가 잘 돼야 내가 잘 된다는 이 말을 하잖아요. 이 말은 무슨 뜻이에요? 병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병의 일부이고 싶고, 이 병에서 잘되고 싶은 거예요. 이 병이 만약에 애굽이라면 히브리인들은 애굽에서 나올 생각이 없어요. 그냥 애굽에서 잘 먹고 잘살고 싶어요. 우리는. 우리의 마음은.
예수 믿어봤자 소용이 없다고 했죠. 예수 믿어봤자 주체가 안 바뀌죠. 예수 믿어봤자 우리의 직관은, 우리의 모든 목표의식은 한통속이에요. 이 세상과 한통속이라니까요. 괜히 폼 잡지 마세요. 세상이 잘 되면 우리는 기뻐요. 제가 수요일에 쓰레기인줄 아는 자만이 웃는다고 했는데, 이론은 그런데 우리가 진짜 쓰레기가 되면 기가 찰 거예요. 웃는 게 아니고, What shall I do? 나 어떡하면 좋아요? 분명히 울 거예요. 그 정도로 우리는 친밀해요. 주님이 망한다고 하는 이 세상과 우리는 너무 친밀하게, 한통속이라니까요. 같이 얽혀있어요. 제목은 ‘한통속’입니다. 그냥 한통속으로 같이 얽혀있다고요.
길게 이야기할 것 없이 짧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말씀이 말씀대로 되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이루려하심이라고 했으니까. 이러한 병과 우리가 하나가 되어 못 빠져나오고 하는데, 근데 지금 어떻게 빠져나오느냐? 라는 질문을 했지만, 사실은 우리는 이렇게 병이 있다는 사실도 몰라요. 병에서 빠져나올 생각도 없고. 이대로가 그냥 좋아요. 이대로가 좋은 거예요. 빠져나오긴 뭘 빠져나와요? 빠져나오면 못사는데. 이 새는 병에 사는 것에 익숙해졌고 최적화되어 있어요. 병 밖에서는 못살아요.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가자고 할 때에 기가 찬 거예요. 왜? 평생토록 거기에 적합한, 최적화된 생활을 했는데 거기서 나와 가지고 어떻게 살아요? 어디 거지꼴 나는 수가 있거든요. 안 되죠. 거기에 이미 젖었는데요. 뭐 어떻게 살아요? 생뚱맞게 이민 가서 못살잖아요. 그냥 마음뿐이지. 사람은 아무리 멀리가도 귀소본능이 있어가지고 자기가 이 몸을 키워줬던 그 지역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멀리가도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사람이 재혼을 하게 되면 그냥 재혼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처음에 있던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재혼하게 되어 있어요. <그 사람이 갖고 있었던 것+괜찮은 것+α=재혼>, 재혼했는데, 근데 처음 이 사람보다 더 못해. 그럼 삼세판이라고 세 번해야 되는가. 사람이 1,2.3... 자꾸 순서를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은 망가졌다는 겁니다. 하나가 마음에 안 드니까 2를 찾고, 2가 마음에 안 드니까 3을 찾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말은 2, 3을 찾자마자 1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을 되풀이 할 뿐이에요. 1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을. 처음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을 되풀이 할 뿐이에요. 자식이 셋 있는데 어릴 때 엄마아빠를 힘들게 했다면 자식이 커서 아무리 잘해줘도 엄마는 믿지를 못합니다. 언제 어릴 때 그 행세를 또 할까 싶어서. 항상 조마조마하고 온전히 믿지를 않아요. ‘니 본색이 어디에 가나. 그때 행악질이 또 나올 걸.’ 이래 나온다 말이죠.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주님께서 성도를 다룰 때, 구원할 때 어떻게 하는가의 방식을, 우리가 예상하는 방식하고 너무 다르다는 것을 제가 계속해드리는 겁니다. 우리는 항상 병에서 새가 나오는 것을 생각해봤자 이거는 다 헛소리고, 실제로는 우리의 몸이 여기에 최적화되어 있고, 이 세상에 한 덩어리가 되어 있기 때문에 분리자체가 안 됩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분리거든요. 분리자체가 안 되는데요. 여기에 적합한 몸을 가지고, 사고방식과 통일된 목표의식을 가지고 어디 가서 삽니까?
그냥 의식이 아니고 아까 무슨 의식이라고 했습니까? 어떤 의식? 목표의식이에요. 그 목표의식이라는 것은 제가 아까 이야기를 했죠. 지침에서 그 다음에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법이죠. 뭐. 법에서 이게 뭡니까? 일자가 되죠. 일자一者. 신이 되죠. 아무리 신이 되어도 처음의 지침을 벗어나지 않고 이걸 더 확대시키는 거예요. 이 지침이라는 것은 내 도덕률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도덕률에서. 나의 도덕률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세계라면 나는 그걸 천국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라는 마음이 모든 인간에게 있는 거예요. 나의 기존의 가치를 인정해준다면 나는 천국에서 얼마든지 주님을 찬미하면서 나는 살 마음이 있다, 라는 것을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여호와 증인이 아닙니까? 자신의 잘남을 계속 키워주면 그게 천국이 된다는 이야기에요. 그 사람들의 주장은. 근데 이게 여호와증인들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쪽 사람들은 노골적이고 우리도 다 그런 마음이 있잖아요. 나 이뻐 해주고, 나 사랑해주고, 나 칭찬해주고, 그런 마음이 있잖아요. 그런 지침의 결과가 애들한테는 뭐냐 하면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아닙니까?
우리 손녀가 있는데, 우리 딸이 너무 앞서서 생각을 했던 모양이에요. 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오든 말든 애가 다 컸으니까 생각을 안 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웬걸,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24일이 되니까 얼마나 따져 묻는지. 몇 시에 오느냐, 언제 오느냐, 무슨 선물을 갖고 오느냐, 따지는데. 아무 선물을 준비를 안 해놨던 거예요. 그러면 니가 1시간 동안 눈을 감고 있으면 온다고 했는데, 애가 눈은 감았는데 눈감은 척을 한 거예요.
오늘날 교회에서 메시야 기다리는 것하고 똑같아요. 자기 자신은 변할 생각은 않고 예수님이 오시면 천국 온다고 해가지고 계속 실눈을 뜨고 기다리는 거예요. 잠 잘 때 온다고 해도 잠 잘 마음이 없어. 오늘날 교인들이 너무 깨어있어요. 깨어있음에 충실해. 깨어있음에 충실한데 본인한테는 전혀 깨어있지 않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한테 충실해. 오늘날 교회 교인들이. 다시 온다는 거예요. 지가 어떤 인간인지를 하나도 모르고.
여기 주님의 방식에 대해서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멜른이라는 마을이 있어요. 독일 마을인데, 인구가 오만 명이 되는데, 그 마을에 관광객들이 오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그림형제가 썼던 동화, 피리 부는 소년이야기가 그 마을의 집에 있었어요. 그 마을에 가면 쥐 형상을 새겨 넣은 보도블록을 군데군데 해놓고 그것을 따라가면 피리 부는 소년 집이 나온다는 거예요.
그 피리 부는 소년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이 동네가 제분업이 발달을 해가지고 전 독일에다가 밀가루를 공급하는데, 여기에 제분업의 주원료 밀이 있으니까 뭐가 들끓겠습니까? 쥐떼가 들끓는 거예요. 그래서 시장이 공고를 냈어요. “쥐떼를 해결해주면 오만 원을 드리겠습니다.” 옛날에는 그 금액이었던 모양이죠. 어떤 허름한 소년이 고깔모자를 쓰고 자기가 해주겠다는 거예요. 다 해주면 오만 원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방법에 대해서는 묻지 마라. 내가 알아서 하겠다. 피리를 불었죠. 갑자기 송창식의 피리 부는 사나이가 생각나는데.
피리를 부니까 쥐들이 그 소년의 피리 소리를 따라서 숲속으로 다 가버렸어요. 갑자기 이 마을에 쥐가 한 마리도 없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 소년이 시장보고 약속한 돈 오만 원을 달라고 하니까, 이제 와서 시장이 돈이 또 아까운 거예요. 정치인들이 다 그런 거예요. 전에 말한 약속을 안 지키거든요. 국회의원이 되고 나면 딴소리하잖아요. 오만 원을 안 주니까 독이 오른 이 소년이 피리를 불어요. 피리를 부니까 그 동네의 애들이 다 따라가서 사라져버렸어요. 엄마는 난리가 났고요.
마치 출애굽 같아요. 출애굽. 그 애굽의 바로 왕 앞에서 모세가 피리를 부니까 히브리인들이 다 따라 나온 것처럼. 이게 하나님의 구원방식이에요. 오늘날도 동일하게 이 원칙대로 합니다. 주님은 피리를 불었고 인간들의 그 한계점, 임계점, 주님보다 이 세상이 더 좋다는 그 임계점을 뛰어넘는 다른 요소에 의해서 이게 빠져나오는 겁니다. 빠져나오면서 그 다음부터 생기는 것이 뭐냐 하면은 세상 자체가 둘로 분류가 돼버려요. 하나의 세상인데 이게 둘로 분류가 되어 있어요. 피리 부는 소년에 의해서 빠져 나온 그 아이들의 세상과,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가거든요. 아이들의 세상과 그 다음에 뭐가 있느냐, 남아있는 기성 어른들의 세계가 돼버리죠. 남아있는 기성 어른들의 세계.
이렇게 분류가 되는 핵심에 뭐가 있느냐, 그림형제동화에서는 바로 피리 부는 소년이 있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누가 있겠어요? 예수님의 죽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이 마치 피리의 곡조, 가락처럼, 각 심령에다가 울리도록 하는 것은 누구 담당이냐 하면은 그것은 바로 성령님의 담당이죠. 주님이 피리를 불면 성령님이 하나의 음성에너지를 가지고 우리 마음속까지, 영혼까지 오게 됩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what shall I do? 이게 어떻게 돼요? 없어지고, 그냥 따라가는 거죠.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고 그 피리 부는 소년의 세계, 예수님의 세계를 따라 나가는 겁니다. 자, 나갈 때요, 아이들은 순수하다고 하지만. 오늘날 성도가 성령을 따라 나올 때, 성도는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따라 나올 때 인간은 죄인이죠. 이걸 성도만이 알아요. 죄의 개념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아까 이야기한 도덕률에 있는 죄가 있는 반면에 십자가, 피리소리, 복음에 의한 죄가 나오겠죠.
이 도덕률에 의한 죄는 뭘 겨냥하느냐 하면은 선과 함께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 나오는 죄가 돼요. 선을 장려하고 악을 줄이면 나는 의인이 된다는 그게 선악지식에서 나오는 죄라면, 이 복음의 죄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인간이 태어남 그 자체가, 모든 게 죄가 되는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죄가 되는 거예요. 아담에 속했다는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거예요. 아담은 피리 부는 소년에 의하면 기성세대죠.
우리는 기성세대의 일부로서 나오는 거예요. 기성세대의 일부로서. 세상이 이렇게 죄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표본으로서 나오는 거예요. 여기에 하나님의 의가 함께 있어버리면 그 의로 인하여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 죄가 의로 평가받는 겁니다. 이 죄가 의로 평가받는 거예요.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그 관계성, 피리 부는 소년과 함께 있다는 그 관계성으로 인하여 그게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피리 부는 소년이 이렇게 피리를 불게 되면 먼저 그 피리 소리의 효과가 확실해야 되겠죠. 그게 뭐냐 하면은 말씀은 예수님에 의해서 무슨 수순에 이르게 되느냐 하면은 말씀 완성이 되는 거예요. 말씀완성이 되는 겁니다. 말씀이 완성되는 거예요. 이제부터는 무척 쉽죠.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는 이유는 우리 안에 뭐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바르게 살아서가 아니라 말씀완성을 위하여 우리의 모든 존재나 이 죄성罪性이 관계 지어져 있기 때문에 그래요. 말씀완성에 기여했다고 보면 돼요. 우리가 뭐 보태준 것은 없지만, 하여튼 주께서 그렇게 한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의 완성을 위하여 우리는 죄인의 역할로 가담이 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근데 이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피리를 불 때 빠져나올 피리 말고 다른 피리, 유사한 피리를 부는 거예요. “너 죄인이니까 회개하라.” 이런 피리를 불어보는 거예요. 그러면 정작 천국 가는 사람에게는 그게 먹혀들어가겠어요? 안 먹혀들어가겠어요? ‘뭐 웃기고 있네. 저거 복음 아니네.’ 복음이네, 복음 아니네, 이미 주님의 피리 소리, 성령의 피리 소리를 들은 사람한테는 이게 분간이 되죠.
그런데 흉내 내는 사람, 복음 흉내 내고, 십자가를 흉내 내는 사람한테는 뭘 건드리느냐 하면은 나의 이 잘남을 건드리는, 나의 잘남을 건드려서 스스로 내가 뭘 지키려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 사람은 들통 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으면 참 좋겠는데. 다시 말해서 “나 예수 믿어줬잖아요. 십자가 믿잖아요.” 그런 반발로 나온다면 그 사람은 지금 기성세대에요.
자, 기성세대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나의 도덕률, 나의 잘남을 훼손하기 싫은 거예요. 그걸 버티고 싶은 거예요. 이걸 지키고 싶은 거예요. 나의 정당성을. 그런데 여기 피리 부는 소년 따라서, 주님 따라서, 성령 따라서 오신 사람은 뭘 자랑하고 뭘 지키고 싶은 거예요? 피리, 십자가, 나 아니고 누구? “나, 주님 없이는 못 살아요.” 이래 되죠.
인간이 자기의 잘남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도 있지만, 남들이 그렇게 인정해줄 때 우리는 기가 삽니다. 사람이 외롭지 않다는 것은, 군중 속에 있다고 외로움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다주고 나에게 잘했다고 칭찬할 때 우리는 외로움이 없어지는 거예요. 외로움은 결구 뭐다? 탐심이 되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 존재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지난 수요일인가 이야기를 했죠. 인간은 대화를 해야 되는데, 나를 욕하는 대화는 싫어요. 나에게 그냥 잘해주는 대화를 해야 하는데, 잘해주는 대화가 없을 때는 여기에 뭐가 들어간다고 했어요? 고양이와 개가 들어가는 겁니다. 프란체스코 교황, 그 사람은 개도 고양이도 안 키운 모양이에요. 그 사람은 새가 들어가요. 지가 새하고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그걸 뭐 자랑이라고 이야기하는지. 새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요새 생물학자도 할 수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꽃하고 이야기하고. 꽃집하면 꽃하고 다 이야기해요.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요. 치킨집하는 사람은 치킨하고도 이야기해요. 타짜는 화투하고도 이야기해요. 장땡이 나와야 하는데. 장땡 나와라.
왜 그러냐 하면은 외롭지 않고 싶은 거예요. 외롭지 않고 날 위해주는 사람이 있고 싶은 거예요. 그 안에서 자기 정당성을 보장받고 싶은 거예요.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를 했죠. 여기에 누가 있다? 내가 여기 있음을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주님의 계심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 아니고 내가 있고 싶은 것을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개고양이는 만만하죠. 밥 주는데 지가 좋다고 꼬리 안 흔들 수 없죠. 살맛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가족 세 식구가 있고, 아빠, 엄마, 딸 있고 개 한 마리 있으면 온 식구는 누구보고 이야기합니까? 개하고 이야기해요. 서열이 개가 우선이고, 그 다음이 딸이고, 엄마고, 제일 밑바닥이 아빠에요. 당 서열이 이렇게 되는 거예요. 당 서열이.
그래서 제 이야기대로 한다면 결국은 성령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뭡니까? 언어죠. 언어. 피리소리죠. 피리소리. 성경은 성령으로 써졌죠. 이 말씀이 우리 내부에서 계속해서 피리소리로 들려져야 하는 겁니다. 이 말씀이. 만약에 남들이 다 나를 무시하고 자기끼리 할 때, 갑자기 마태복음 7장이 생각이 나죠. 좁은 길로 가라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어떤 사람은 뭐 잘 먹고 잘살고 돈 자랑할 때, 모래위에 지은 집같이 무너질 것이다. 그런 생각이 이거는 뭐 금방금방 떠올라야하죠. 금방금방. 어떤 사람은 전세를 놨는데 임대사업자가 사기쳐가지고 전세 값도 못 주고 돈 없다, 내 배 째라고 나올 때, 마태복음 8장 20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하시더라”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그게 번쩍 생각이 나야 되겠죠.
그런데 이 피리소리가 오래 안 간다는 겁니다. 3초 내지 5초 삐리릭~~하면 끝나요. 삐리릭~~ 이러다 그만 새버리고 다른 소리가 우악하고 덤벼드네. 다른 소리가. 그래도 한 순간이라도 피리소리가 들려오거든 천만다행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여기 다른 소리는 악마의 소리인데, 악마의 피리소리는요, 주님께서 일부러 보내신 거예요. 일부러. 일부러 보낸 이유는 아까 말씀드렸는데요. 한계점까지 간다는 거. 한계점까지.
니 성질대로, 니 멋대로 해봐라. 결국은 니 힘으로 이 벡터(방향을 가지고 있는 양), 인간계에서 천상계로 가는 방법은 이 세상에 애초부터 희망이 없고 아예 그런 길이 없음을, 니가 지금 아직도 감을 못 잡고 있고, ‘설마 그럴까? 이정도로 낮추고 낮췄는데 알아주겠지.’ 자꾸 자기의 도덕률에 의한 자기의 잘남을 그런 식으로 미련을 못 버리는 거예요. 자기 잘남에 대한 미련. 자기 성과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는 거예요. 이게 이 세상에 최적화되어 있으니까.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간다고 했을 때에 오직 뭐만 있습니까? 십자가 외에는 다른 길은 없어요. 십자가 외에는. 그럼 피리소리는 무슨 소리입니까? 결국 십자가소리죠. 십자가에서 나오는 소리에요. 십자가가 십자가로 되려면 우리 인간은 주변에 전부 다 기성세대, 인간이 갖고 있는 기성세대 이 소리에 왕왕하고 거기에 항상 놓여있는 겁니다. 진짜 3초든 5초든 주님의 십자가 소리가 들리거든 이게 웬 기적인지! 웬 이런 소리가 다 들리지?
이게 무슨 소리지? 내 마음에 그 소리가 왜 와 닿지? 오히려 깜놀!! 오히려 깜짝 놀라야 돼요. 우와!!! 내가 예상 못한 다른 소리에 내가 현혹이 된다는, 내가 거기에 빠져버린다는 거예요. 그 피리소리는 선악이라는 것에서 벗어난 겁니다. 선악을 벗어난 소리가 들려야 돼요. 선악에서 벗어난 피리소리가 들릴 때 이것은 오락, 게임에서 나의 승리, 나의 성공에서 벗어난 존재인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자, 피리 부는 소년이야기를 잘 들었죠.
그렇다면 아까 이야기한 것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병에서 새가 어떻게 빠져나오느냐, 병이 있다는 그 자체를 이미 성령 받은 사람한테는, 피리소리를 들은 사람한테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병에서 새는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병이 위에서 꽉 막혀있기 때문에. 그걸 갈라디아서에서 그렇게 강조한 거예요. 율법에 있는 사람은 도저히 율법의 죄 속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오히려 빠져나오기보다는 그 안에서 철저히 그게 죄를 죄인 줄 모르고, 오히려 반대로 그걸 의롭다고 여기고 착각하면서, 아무 생각도 없이 빠져나온다는 생각조차도 못 갖게, 그냥 죽은 자로서 살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병에 새가 들어있다, 라는 생각 자체도 이거는 누가 와야 해요? 이미 병이 있고 여기에 새가 있다는 그것은 이미 들어왔다가 빠져나가신 분의 안목이 되는 겁니다. 그분의 마음가짐, 그분의 영혼, 그분의 영이 아니면, 이렇게 병이 있고 율법에 갇혀있고 지옥에 갇혀있다는 것을 그분의 영이 오지 않으면 알 수가 없어요. 그리고 뭘 알아야 하느냐 하면은 우리는 갇혀있다는 것만 아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에 못 빠져나간다. 갇혀있다.+못 빠져나간다.
어떤 수를 쓰고 어떤 노력을 해도 못 빠져나간다는 것을 알아야 그래야 제대로 된 갇혀있음의 극단, 갇혀있음의 한계가 돼요. 철저하게 갇혀있어야 돼요. 철저하게. 갇혀있으려면 옴팍 갇혀있어야 돼요. 완전히 갇혀있어야 돼요. 이렇게 해서 뭐 빠져나왔다는 그런 헛소리는 듣지 마세요. 못 빠져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가 못 빠져나오는 여기에 주님의 성령이 왔거든요. 이미 길을 냈잖아요. 그 만들어진 길을 따라서 성령이 오십니다. 그 길의 모습은 피리소리라고 했죠. 그게 십자가죠. 십자가로 니가 빠져나올 때 우리는 뭐로 달라져야 하느냐 하면은 우리 옛사람은 죽은 자가 되어야 해요. 우리가 죽은 자가 되어야 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이미 우리 운명은 다한 겁니다.
예수님이 죽을 때 그냥 죽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아버지한테 버림받았죠. 버림받은 자는 그냥 버림받은 자에요. 이미 우리가 버려진 거예요. 뭐 김밥 먹어도 식혜 먹어도 버려진 거예요. 뭐 먹었다고 새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버려진 거예요. 버려졌으니까, 이게 에스겔 37장에 나옵니다. 이미 버려졌으니까 말씀대로 하면 되는데요. 37장에 바짝 마른 뼈들이 나와 있죠. 사람들은 그냥 뼈들이에요. 납골당입니다. 납골당도 아니고 뼈들을 모아놓은 겁니다. 뼈들에게서 살아날 가망성은 전혀 없는 바짝 마른 거예요.
무엇이 살아 있느냐, 말씀의 완성이 뼈에서 살아나게 해요. 그러니까 없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고,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죽음에서 나와요. 죽음에서 나오거든요. 예를 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 때 끝까지 예수님을 정신병자로 착각하고 귀신들린 자로 봤잖아요. 우리 성도도 남들 앞에서 끝까지 정신병자로, 미친 인간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세요. 끝까지 그래요. 끝까지. 보는 눈이 세상적인 눈인데, 그들 눈에 우리가 죽은 자죠.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보듯이 우리를 그런 식으로 보고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을 오히려 고맙고 감사히 여겨야 됩니다. 이만희처럼 부활한다는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돼요.
제가 하는 다시 하는 말은 어딜 봐도, 우리의 모습 어디를 봐도 신자다움, 성도다움, 예수님의 백성다운 모습이 그들에게 발견된다? 발견되지 않는다?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기대를 않습니다. 발견되지 않습니다. 발견됨에 대해서 어떤 기대도 하지 마세요. 그건 괜한 우리의 욕심이에요. 왜냐하면 구원은 내 몫이 아니고, 죽은 자의 몫이 아니고 산자의 몫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미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우리하고 거래를 안 합니다. 왜? 우리 죽은 자하고는 거래를 안 합니다.
죽은 자, 시체한테 “여기 수표에 써라.” 손가락뼈에 볼펜 끼워가지고 디리릭..해가지고 “나는 너에게 20억을 준다.” 해도 이거는 아무 효력이 없어요. 물론 약 먹여가지고 몰래 계약서에 지문을 찍은 게 드라마에 나오는데, 그건 법적으로 효력이 없어요. 약 먹여서 잠잔 사이에 몰래 찍은 거라고 하면 끝나거든요. 그래서 악마는 맨날 흉내만 내게 해요. 우리를 악마가 선악과 약을 먹여놓고, 기도해라 기도지문 쫙 찍고. 십일조 지문 쫙 찍고. 뭐 이렇게 해가지고, 마치 눈 뜨게 해놓고 “봐라! 니가 이정도로 선교하고 전도하고 예배드리고 헌금 많이 하고 니가 이정도로 전도 많이 했다.” 업적을 한상 그득하게 차려가지고 다 니가 한 거라고 하죠. 니가 개척교회해서 백 명, 이백 명 모았다. 다 꿈같은 소리지만. 니가 자식 이렇게 잘 키우고. 니가 아빠 노릇 잘했다. 이런 걸 한상 차려주는 거예요. 니 의미 있다고.
에스겔 37장에서 마른 뼈 나왔죠. 그런 것을 우리가 꿈으로 봤으면 좋겠는데, 로마서 4장에는 더 심하게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가 자궁이 죽었어요. 애를 못 낳는다고요. 애를 못 낳는 이미 죽은 자궁이거든요. 죽은 태인데 애를 낳는데요. 남편 아브라함이 믿었다 이 말이죠. 애를 낳는다고요. 왜냐하면 봤거든요. 분명히 눈으로 보고 있다고요. 늙어서 애를 못 낳는 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남편이 뻔히 보면서도. 이게 보이는 세계가 아닙니까? 보이는 세계에 뭐가 침투했느냐 하면은, 피리소리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온 거예요. 약속이. 이 약속은 보이는 세계와 섞인다? 안 섞인다? 섞이지를 않아요. 그냥 사용할 뿐이에요.
그렇다면 무슨 말이냐 하면은, 적극적으로 봐야 돼요. 태가 죽었으니까 비로소 뭐하다? 산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안 죽었으면 우리는 믿지 말자.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잖아요. 그러니까 메시야죠. 그러니까 구세주잖아요. 아기예수 가지고는 안 돼요. 십자가에요. 사도바울이 지금 아기예수를 가지고 전도한 게 아니잖아요. 뭘 증거 했습니까? 십자가, 죽었다는 거예요. 죽었다는 것이 있는데 왜 안 믿느냐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말이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죽었다는 거예요. 부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를 말하는 거예요. 구원의 능력은 십자가지 부활이 아니에요.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하지 부활이 눈앞에 보인다고 하지 않아요. 그 부활을 하나의 미끼로 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피리 부는 소년이 애들을 다 데리고 갔잖아요. 그러니까 어른들은, 피리 부는 소년이 만약에 약속이라면 어른들은 지옥이다. 이렇게 믿어야 될 게 아닙니까? 우리는 죄인 맞다가 인정되어야 되죠.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우리가 그렇게 간수하고 아까워하고 붙들고 살라고 하는 이것은, 이미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산자다? 죽은 자다? 죽은 자라는 것이 기쁘게 믿어지는 거예요. 기쁘게. 참 죽은 놈 만나봐야 소용이 없다는 식으로.
내 인생에 대해서, 뭐 노래가사가 그런 게 있던가요. 내 인생에 박수를 보낸다, 사랑에 한 표 던진다, 라는 그런 노래들이 있어요. 현숙의 노래인데, 몰라도 되지만 효녀 가수 현숙이 부른 노래에 그런 노래가 있어요. 효녀인지 아닌지는 뭐 누가 압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그 뒤에 나온 모든 말씀들은 예수님이 서서히 꺼져가는 거죠. 사라져가죠. 이 세상에서. 분리잖아요. 그런데 결국은 그 마지막 모습이 뭐였습니까? 죽은 모습이에요. 십자가가 죽은 모습이에요. 부활한 모습은 딱 세 번이에요. 우리 생각 같으면 부활했으면 같이 살면 되는데 그렇지 않아요.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렸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누가 들어도 망상의 일종이죠. 예수님의 부활이.
주님께서 부활했다가 사라진 것은 뭐냐 하면은 부활을 쳐다보지 말라 이거에요. 물론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갔어요. 올라간 것을 쳐다보지 말라고 천사들이 당부했지요. 뭘 보라는 거예요? 지금 니가 누굴 쳐다볼 그런 입장이 안 된다는 거예요. 너는 무슨 자다? 십자가에서 이미 나와 함께 죽은 자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속대로 판정을 그렇게 내렸다는 거예요. 죽은 놈이 무슨 도덕률이 있고 죽은 놈이 무슨 양심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죽은 놈이 무슨 착한 일을 해요? 죽은 놈이 무슨 믿음을 가져요?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우리 안에 성령이 오고 주님이 올 때, 비로소 죽은 자였는데 어떤 분이 내왕하셔서, 방문하셔서 일으킨 효과, 일으킨 결과물이 성도라는 겁니다. 이게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우리한테 힘든 것은 뭐냐 우리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 임계점까지 가야된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죄인 중에 괴수이며, 아버지 장례치를 때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례하고 니는 나를 따르라고 할 때, 그것이 성경말씀에 있다가 아니라 그게 실감나는 경험을 성령께서는 손잡고 온 동네를 다니면서, 피리 부는 소년께서 옛날 우리가 살았던 동네를 다 다니면서 “바로 이런 것 경험하면서 니는 죽은 자로 살았어.” 새삼스럽게 우리 손모가지를 붙들고 계속해서 30, 40, 50, 60, 70, 80, 살게 하시면서 다 구경시켜주는 겁니다.
“결국 니가 80살고 90살아봐도 남는 게 뭐 있더냐?”라고 묻죠. 나 잘났어, 나 외로운 것은 싫어, 그런 것만 남았잖아요. 그게 바로 기성세대죠. 피리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그 세계. 낯선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기존에 왁자지껄 이미 알고 있는 그 세계 속에서, 애굽 나라의 세계 속에서 어린양의 피 바르는 이야기는 생뚱 맞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우리가 강퍅했다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우리가 알게 되는 겁니다. 그동안 강퍅한 줄도 모르고 살았던 이것이 지옥가도 마땅한 존재였음을, 성령을 통해서 이제는 마음 놓고, 안심 놓고 이런 존재라는 것을, 이제는 구원받은 상태에서 원 없이 나는 이런 인간입니다, 라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죄악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는데, 주께서 찾아오심으로서 주의 말씀 안에 들어서 이제는 주의 가신 길과 합류하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주와 함께 걸어가면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세계인 것을 다시 한 번 깊이 체험하면서 우리를 죽은 자로 만들어서 살게 하시는 은혜를 더욱더 감사하고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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