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피리소리 19121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1. 1. 20:16
2019-12-28 00:02:54조회 : 206         
피리 소리 마가복음 14:43 191227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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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70.138)20-01-01 15:17 
광주강의20191227a 마가복음14장 43-52절(피리소리)-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4장 43절을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 그 다음에 48절을 보게 되면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라고 물으시죠. 인간들은 예수님을 체포, 잡는다,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잡히셨다. 잡혀준 거예요. 너희들은 지금 검과 몽치를 갖고 나왔는데, 이게 잡히려고 하는 사람한테는 적절한 수단이 될 수가 없죠. 그냥 알아서 내가 잡혀줄게, 라는 그런 뜻이 있다는 것을 인간들은 몰랐던 거예요. 반항할거야, 저항할거야, 우리가 잡힐 때 저항하듯이 아마 예수님도 저항할거야, 라고 생각한 겁니다.

 

인간이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이것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은 자기가 만든 지침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인간이 세워놓은 원칙 같은 것이 있거든요. 근데 이 지침, 지침서, 지침대로 한다는 이것이 죄가 되는 이유는, 예수님이 잡혀줌으로 말미암아 이게 뭐로 드러나느냐 하면은, 예수님을 체포하는 이것이 죄로 드러나는 겁니다. 그들이 평소에 갖고 있는 이 지침은 스스로 생각해도 이걸 죄라고 할 수 없겠죠. 그런데 그들이 갖고 있는 생활방식 이 자체가 죄가 되려면 그들이 하는 능동적인 모든 것이 일거에, 전부다 소용없는 헛짓인 것을 폭로하는 그런 계기가 있어야 되겠죠.

 

인간들이 지침서를 이렇게 만들 때에 예수님 앞에서 죄가 되는데, 이게 죄라는 것을 모르고 어떤 지침대로, 자기의 원칙, 자기의 삶의 패턴대로 살려고 할 때, 이것은 결국 무엇을 드러내느냐 하면은 “나 여기 있다.”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지침서를 만드는 겁니다. “나 여기 있다.” 근데 예수님께서 잡혀줌으로 말미암아, 인간과 예수님의 만남에서 뭐가 부각이 되겠어요? 잡았다가 부각되겠어요? 잡혀주신 분이 계시다는 것이 부각되겠습니까? 예수님이 잡혀주신 분이 되죠.

 

그러면 여기서 한번 정리해봅시다. 이렇게 정리가 되죠. 내가 여기 있음을 드러내지 말고 복음, 또는 말씀, 또는 예수님이 여기 있음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 이게 주님의 지침이에요. 이런 게 어려운데요. 주님의 지침은 인간 쪽에서 뭔가 움직여줘야 해요. 동작을 해줘야 돼요. 동작을 해놓고 그게 일거에 아니라고 해줘야 주님의 지침이, 뜻이 그 현장에 드러나는 겁니다. 예를 들면 히브리인들을 볼모로 잡고 있는 그 애굽 나라에 히브리인들 때문에 열 가지 재앙이 주어지죠. 그때 바로의 마음이 열 가지 재앙에 갈 때까지 바로는 계속 자기 지침이 있었던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인간이 자기의 지침, 삶의 원칙이 왜 있습니까?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강조를 나타내기 위해서. 근데 방금 뭐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따로 주어지기를 원하는 거예요. 우리의 뜻은 이건데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라고, 자꾸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게 아니고 인간 쪽에서 먼저 움직여줘야 해요. 움직거려주고, 그 열 가지 재앙이 처음부터 다 주어진 게 아니고 첫 번째 재앙, 두 번째 재앙 할 때마다, 재앙은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재앙이 내릴 때마다 그 바로 왕의 마음은 어떻게 됐죠? 성경에 나온 표현대로 하면 강퍅하죠. 강퍅. 계속해서 강퍅하죠. 또 하나 떨어지고 강퍅하고 또 하나 주어지고 강퍅하고.

 

그러면 마지막 열 가지 재앙 때 주께서 등장하셨던, 히브리인들 집 문 앞에 발랐던 어린양의 피, 문설주에 발랐던 어린양의 피 안에는 무엇이 포함이 되어 있느냐 하면은, 인간계, 인간계가 뭐하다? 인간계가 이 정도로 강퍅했다는 내용이 포함된 표현방식이 어린양의 피가 되는 겁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런 뜻이에요. 십자가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인간은 아주 고집스럽게 강퍅함. 강퍅이라는 것을 다른 말로 쉽게 하면 교만이고 자만이죠. 인간은 이렇게 자만하고 교만하다는 사실이 그 어린양 피안에 합류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돼요? 그 맏이가 죽잖아요. 죽어 마땅하죠. 왜? 자만했으니까. 건방지니까 죽어 마땅한 거예요. 오늘날 십자가 안 믿으면 죽어 마땅한, 지옥 가는 이유를 이제야 아시겠죠? 장로님 아시겠죠? 십자가 안 믿는 사람이 지옥 가는 이유를 아시겠죠. 십자가 안에 무슨 요소가 포함이 되어 있습니까? ‘인간계는 모두 강퍅했음’이 포함이 된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이 먼저 움직였고 그 다음에 그걸 대비해서 하나님 쪽에서 어떤 조치를 취하게 되면 그 둘의 만남에서, 거기서 교만과 자만과 강퍅이 드러나게 되어 있으며 뭔가 증거가 있어야 되잖아요. 강퍅한 인간이기에 이거는 지옥가도, 멸망해도 마땅함의 영원한 증거가 바로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있잖아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너희들의 강퍅함이 뻔히 드러나는데 왜 딴소리냐?” 그 증거로서 십자가를 들이대죠.

 

사도바울이 사도행전에서 전한 십자가는 무슨 용이냐? 공격용이에요. 공격용. 십자가는 공격용입니다. 니 주제를 파악해라! 니는 니를 알라! 공격하는 거예요. 흔히 교회에서 말하는 구원용이 아니고 공격용입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지침은 그냥 지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지침이 뭘 형성하느냐, 범주를 형성해요. 카테고리, 범위를 형성한다고요. 그 범위. 그 범위에서 일자一者, 또는 유일자唯一者, 최종적인 하나의 형이상학을, 형이상학하면 좀 어렵죠. 그러면 최종적인 절대신의 지침들이 피라미드처럼 쌓아 올라오게 되면, 마지막 최종적인 가치체제, 최고의 가치, 신이죠. 신. 인간들은 신입니다. 신이 있죠. 그것을 일자라고 하는데, 절대자, 유일한 절대자(오직 유唯).

 

그 유일한 절대자의 범주를, 범위를, 지침서에서 일자一者는 인간의 모든 범위와 범주와 한계, 이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신으로부터 확장된 거죠. 위에서부터 점으로 시작했다면 점점 옆에 월남치마 펼치듯이 쫙 이렇게 펼쳐지는 거예요. 이 범주에 대한 성경은 뭐다? 공격용이죠. 왜 이 범주, 카테고리, 지침을 제가 언급하느냐 하면은 인간의 모든 지침들은 단독적, 단독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전부다 연계되어 있습니다. 전부다 서로서로 관계 지어져 있어요. 구속영장을 신청했는데 구속영장이 기각이 되었다. 그것은 뭐냐 하면은 증거인멸이나 도주의 우려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이 모든 한국 국민들에게 동일하게 적용이 될까요? 안 될까요? 다 적용이 되겠죠. 그게 일자에요. 이게 범주에요.

 

이걸 지침이라고 했는데, 지침을 한자로 말하면 뭐가 되겠어요? 법이 되겠죠. 법은 모든 것이 연계되어 있어요. 하나의 법을 당겨버리면 다른 법도 줄줄이 다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줄줄이 소시지 있죠. 소시지처럼 다 올라오겠죠. 다 연결되어 있어요. 여기 법을 전공하신 분도 있지만. 하나의 법이 단독으로 성립될 수가 없어요. 결국 이 지침은 법의 절대성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까 일자, 다른 말로 신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이걸 화살표(⟶)로 합시다. 인간계에서 천상계로 지침을 가지고 또는 법을 가지고 나아가고자 하는 겁니다. 인간계⟶천상계로, 점점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겁니다. 인간계⟶ ⟶ ⟶천상계

 

따라서 인간계에 속한 모든 인간들은 보다 더, 하나의 범주에 관계된 것이 확산이 되면 확산될수록, 신의 세계에 완벽에 가까운, 절대 진리에 가까운 법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인할 수가 있는 겁니다. 어떤 법. 예를 들면 ‘칸트’라는 철학자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인간 속에는 태어날 때부터 알 수 없는 법이 있다. 그 법은 무슨 법이냐, 그게 도덕법이 있다는 거예요. 도덕법.

 

이거는 보이지 않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것이 실제 현실에서는 도덕법에 기초해서 모든 법이 주어졌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전부 다 동의할 수밖에 없죠. 그러니까 위대한 철학자가 되는 겁니다. 칸트가. 인간에게 있어서는 이거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은 남한테 해로우면 우리는 나쁘다. “거기에 대해서 이의가 있는 사람은 손들어보세요.”라고 하면 아무도 이의를 걸지 않죠. 그렇죠.

 

문제는 칸트가 모르는 것이 있었어요. 도덕법은 신으로부터 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모른 거예요. 이 도덕법이 신으로부터 온 게 아닙니다. 창세기 2장이나 3장에 보면 도덕법이 어디서 왔어요? 악마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아무도 동의를 안 해요. 왜냐하면 이미 악마에게 물들어있기 때문에.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한통속이라고 합니다. 이미 한통속이거든요. 주님께서 인간세계에 올 때에 인간 속에 그냥 정찰기 보내서 한번 훑고 지나갑니까? 인간 속에 들어와 버렸습니까? 주님이 아예 들어와 버렸죠. 그럼 이거는 뭐냐 하면 얽혔다고 하는 겁니다. 얽혔다. 얽힌 관계라고 할 수가 있어요.

 

아까 했던 강퍅을 다시 해봅시다. 강퍅한 것과 주님의 조치가 얽혀있죠. 얽혔다는 말은, 대척관계에 있으면 둘이 뭐 으르렁거리다가 헤어지면 그만이에요. “다음 기회에 우리가 붙자!” 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 되는데, 이게 얽혀버리면 깨려고 하니까 이쪽이 딸려온다고요. 이 얽힌 관계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걸 부부관계라고 하는 겁니다. 연애하는 관계하고 달라요. 부부관계는 뭐냐 하면은 얽혀버린 거예요. 게다가 자식까지 낳아버리면 이거는 얽혀도 보통 얽힌 사이가 아니에요. “우리 둘이 기분 나빠서 헤어지는 것은 좋은데, 애들 마음에 상처받는 것은 누가 책임질 거야?” 이런 문제가 또 생겨버린다 이 말이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한테 잘못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헤어질 관계가 아니라고요. 자기들이 헤어지고 싶어도 예수님께서 얽힌 관계로 찾아왔기 때문에, “그래, 당신 잘났다. 그래. 가!” 하고 돌아서면 그만인 줄 알았는데, 세상에! 사흘 만에 부활해서 같이 얽혀서 심판을 노리고 들어올 줄을 상상도 못한 거예요. 이거는 예수님을 믿고 안 믿고 간에, 이제는 이게 얽힌 관계에서는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안 믿을 때로, 예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빼도 박도 못해요. 예수 안 믿는 것은 자기 자유일지 모르지만 심판받는 것은 각오해야 합니다. 나는 평생에 절에만 가서 교회에 간적은 없기 때문에 나는 책임이 없다는 이런 소리를 할 수가 없어요.

 

어떤 누구도, 우리가 예수님보고 얽혀주세요, 라고 요청한 적이 없어요. 그냥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인간의 지침 속에, 인간의 법속에, 법의 감정 속에, 절대적인 도덕법속에 이미 들어와 버렸다 이 말이죠. 도덕법은 인간이 만든 게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도덕법에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상벌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도덕에 의해서 인간이 지옥가고 천국가고 이런 게 없어요. 하나님이 만든 게 아니기 때문에. 칸트가 그 점을 몰랐습니다. 칸트는 인간에게 도덕법이 있다는 것에 누구도 고개를 끄덕이고 동의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온 천하가 동의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아닌 거죠. 오히려 인간은 도덕법으로 모든 것이 한통속으로 다 얽혀있다는, 다 연결되어 있다는 이 점을 인간 쪽에서 먼저 움직이는 것을 보시고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거예요. “너희들이 갖고 있는 도덕법으로 나를 붙잡을 수 있는지 한번 해봐라.” 이 말이죠. 그래서 인간이 도덕법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인줄 알아봤고 메시야인줄 알아봤습니까? 주님을 환영하고 우대했습니까? 실패했죠. 도덕법으로 예수님을 코앞에 두고도 못 알아봤죠.

 

그러면 이 말을 듣고 우리 안에 있는 도덕법을 우리가 유지해야 됩니까? 버려야 됩니까? 우리가 이 도덕법을 버리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절차, 수순에 들어가고 싶어도 예수님이나 악마는 전부 다 영적존재에요. 인간이 마음대로 바꿔치기 하고 명령할 대상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그냥 덮친 거죠. 그냥 강간한 거예요. 그냥. 도덕법, 이거는 악마가 인간을 덮칠 때 했던 악마의 탐심입니다. 오늘 제목은 ‘악마의 탐심’, 악마의 탐심은 이렇게 화살표가 인간 쪽에서 신으로 가는 거예요. 인간→ ⟶신

 

여기에 힘이 있어요. 힘+방향을 가진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벡터(vector, 크기와 방향을 갖는 양)라고 해요. 그냥 방향이 없는 것을 스칼라(scalar, 크기만 갖는 양) 양과 양의 결합으로 되어 있지만 방향이 있다는 것이 정말 신기한 거죠. 어떤 힘이, 예를 들어서 내가 팥죽을 많이 먹었다. 스칼라 양이죠. 스칼라 양. 한 그릇 말고 두 그릇을 먹었다. 배부르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이제 뭐하지?” 벡터죠. 배부른 상태에서 “이제 뭐하지?” 행동에 방향이 있죠. 그 방향을 마중 나와서 얽힌 관계로서 앞에 주님이 서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배부른 상태에서 앞에 주님이 있으면 이거는 나의 방해물이 됩니다. 배불렀으니까 그다지 주님이 필요치가 않아요. 넘어뜨려버리는 겁니다.

 

나한테 도덕이 있는데, 내가 그만큼 의로운데, 새삼스럽게 주님한테 잔소리를 들을 일이 없잖아요. 남편이 아내한테 기분 나쁜 부분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은 잘했는데 잔소리할 때, 이거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잘했는데 잔소리할 때. 이거는 아내도 마찬가지고요. 못했는데 잔소리했으면 미안하기라도 하죠. 그게 아니고 잘했는데 잔소리할 때. 야간근무 마치고, 새벽 여섯 시에 나가서 밤 열한 시까지 일하고 와서 파김치가 되어 엎어졌는데, “당신 신발 똑바로 벗었나?” 이러면 진짜 화나는 거예요.

 

그게 뭐? 지금 아무것도 아닌데. 나는 쓰러질 판인데. 아무것도 아닌데 신발 똑바로 해놓으라고 한다는 건 말이 안 되거든요. 이거는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맞벌이 아닌 맞벌이 하면서 혼자 돈 벌려고 애썼는데, “애들 밥은?” “애들 밥은 니가 해먹이라!” 내가 누구 사정을 알아서 한 게 아니고요. “니가 해 먹여. 니가. 빨래 니가 알아서 해. 나 지금 힘든 거 눈에 안 보여?” 이건 뭐냐 하면은 당당하다는 뜻이에요. 누구한테 잔소리들을 형편이 아니라는 겁니다. “누가 누구한테 잔소리를 해? 내 잔소리는 너한테 잔소리해야 해! 니 때문에 나 고생하다가 죽겠다. 이래 가지고 쓰러져죽겠다. 아파죽겠다.” 이렇게 되는데, 근데 이건 뭐 고생도 안하고 집에서 놀면서 잔소리한다면, 이건 뭐 어디 뻔뻔스럽게 잔소리 하냐고 그렇게 되겠죠.

 

이미 인간은 도덕법으로 자기정당성이 보장이 되어있는 겁니다. 자기가 잘났어요. 악마가 인간을 그렇게 만든 거예요. 도대체 얼마나 잘났는지 보자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인간세계 속에 들어와서 얽혀버린 겁니다. 대충 잔소리만 하고 끝난 것이 아니고 공격을 한 겁니다. 얽혀버렸죠. 거기에 대해서 인간은 예수님을, 우리가 의로우니까 잔소리 계속 해대지 말라고 밀치죠. 그때 나온 것이 뭐냐 하면은 바로 탐심이 나오는 겁니다. 욕심이죠. 욕심은, 인간계에서 천상계로 나아가자고 하는 이 모든 것이 탐심이 되는 겁니다.

 

평생 동안 천주교 수도원에서 안 나오고 거기서 농사지으면서 평생을 살겠다고 서원한 사람. 그거 탐심이에요. 내 안에 예수의 음성을 듣고 나는 예수 안에 살고. 이게 탐심이라니까요. 그런 소리하면 안 돼요. 인간 입에서 그런 소리하면 안 돼요. “주여,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끝나는 문제를 가지고, 거기서 도를 닦겠다는 거예요. 청빈한 삶. 옷 떨어지면 떨어진데다가 덧대고. 덧댄 데에 또 덧대고. 가난하게 반찬도 없이 밥만 먹고 살아가는 그 모습. 그것은 인간의 도덕에 의해서, 이 도덕의 절대적인 법에 의해서, 니가 더 도덕적이냐? 내가 더 도덕적이냐? 보이지 않는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남과의 게임,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게임. 과거에 나는 이렇게 살았는데 지금의 나는 훨씬 더 나아졌다는 게임. 게임이거든요. 게임은 일종의 오락이거든요. 오락. 오락입니다. 오락이냐 아니냐를 어떻게 아느냐, 오락생활을 평생 동안 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계속 하게 돼요. What shall I do? 나 어떡해? 나 어떡하면 좋아요? 이게 상담이잖아요. 상담. 나 어떡하면 좋아요? 지금 그 사람은 오락하고 있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이 현장에 있음을, 말씀의 현장을 드러내야 할 건데, 그 사람은 지금 일종의 오락, 게임을 하려고 하는데, 이 게임에서 본인이 패자가 아니고 승자이고 싶은 거예요.

 

그럼 내가 승자, 다른 말로 하면 성공자, 내가 성공하려면 주인공이 누굽니까? 남이에요? 나예요? 인생의 주인공이 나죠. 내가 이렇게 승자로 내가 여기 있음을 남들이 좀 봐달라는 겁니다. 그게 마음대로 안 되니까, What shall I do? 왓 쉘 아이 두? 나 어떡해? 나 어떡하면 좋아요? 이걸 좀 풀이하게 되면, 내가 어떻게 하면 이 게임에서 승자가, 이긴 자가 될 수가 있습니까? 라는 그 이야기다 이 말이죠.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할 때 어떻게 합니까? 다들 기도를 안 하고 있으니까 물을 사람이 없네요. 기도할 때 기도의 바탕에 있는 우리의 심보가 뭡니까? “주여, 답답하니이다~” 고어를 써서 답답합니다가 아니라 답답하니이다.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뭘?” “이 소자가 괴롭습니다.” “왜? 왜 괴로운데?” “쓰러지겠습니다.” 경상도 말로 “쓰러져부러라!”이러죠. 경상도 표준말로 한다면. 저는 경상도 사투리를 하지 않습니다. 쓰러져라! 이 말이죠.

 

우리가 기도를 안 한다고 하지만 매일같이 기도해요. 그것도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What shall I do? 나 어떡해? 나 어떡하면 좋아요? 애가 이렇게 아프다는데 나 어떻게 하면 좋아요? 눈에 띄는 모든 상황이 항상 이 질문을 나에게 또는 신에게 하기 마련이에요.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 이렇게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내 안에 도덕법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잘났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이만한 벌을 받을 만큼 나쁜 짓을 한 적이 없다는 도덕법 의식. 선과 악의 의식 또는 지식.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도덕법 속에, 이러한 게임, 오락 판에 뛰어들었죠. 제가 오락이라고 해가지고 뭐 심심풀이로, 시간남아서 하는 오락이 아니고, 전 인생 자체가 게임이고 오락입니다. 자기 인생을 게임과 오락하지 않는 인생은 아무도 없어요. 자, What shall I do? 이거의 반대말은 뭘까요? 나 어떡하면 좋아요? 나 답답해서 어떻게 살죠? 물음이죠. 반대말은 뭐냐, 주여, 이게 웬 은혜입니까? 은혜가 어려우면 이게 웬 선물입니까? 안 주셔도 되는데 왜 이렇게 선물을 주시죠. 이게 오락을 깨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 선물을 받았다는 말은, 주인공이 나라는 말입니까? 안 그러면 주인공이 따로 계시다는 뜻입니까? 주님이 여기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피조물인 우리를 활용해주시잖아요. 그런데 도덕법으로 무장된 인간은, “주님, 내 앞에서 다 비켜라!” 내가 이런 존재임을 나는 평생 드러내는 것으로, 내 인생게임에서 나는 보람을 느끼겠다는 겁니다. 젊을 때는 이렇게 하다가 이게 좀 미진하게 되면, 결혼해서 자식 놓고 이걸 또 해요. 자식 놓고. 나는 이미 물 건너갔지만 내 자식은 내가 못 다한 한을 이룰 것이다. 우리 단이는 뭔가 기대에 부응할거야. 요새 부응 잘하고 있습니까? 부응하는 건지 부흥하는 건지.

 

내 자식은 뭔가, 내가 미진한, 내가 승자가 되는 것을 메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부모가 벌인 그 게임 판을 누구한테 대대로 물려줍니까? 니도 나처럼 이 게임 판을 해라! 하고 물려주는 거예요. 마치 부모가 인생퍼즐을 하는데 인생퍼즐이 안 맞아요. 안 맞으니까 그 긴 인생퍼즐을 그대로 자식한테 갖다 맡기는 겁니다. 이게 50줄 퍼즐인지 250줄 퍼즐인지 모르지만, 그 조각을 니가 맞춰보라는 거예요. 자식보고. 니가 한번 맞춰봐라!

 

주님께서 이런 오락과 게임으로 일관한 인간세계에 그냥 공격을 해버려요. 이미 게임과 오락에서 자기를 승자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나는 좌절할 권리는 없고 성공할 권리만 있다고 우기는 그 판 자체를,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두자로 강퍅이라고 몰아세우죠. 강퍅이라고 몰아세우는 겁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그들은 예수님과 좋은 관계로 여겼던 거예요.

 

그러나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을 3년 동안 관찰하고 관조하고 그 강의에 열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세밀하게 관찰하고 관조하고, 지켜보고, 그 예수님의 강의에 귀담아들었는데, 그들의 결과는 뭐였습니까? 51절에, “한 청년이 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절에,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이래 되어 있죠. 이게 결과입니다. 3년 동안 관찰하고 관조하고 강의에 열중한 그 결과가 이 결과에요. 성경공부 아무리 참석을 하고 성경 백독, 만독을 해도 결과는 뻔합니다. 자기 마음 안에, 자기 마음이 비어있는 것이 아니고 꽉 차있는 게 이 도덕률로 꽉 차있는 거예요. 이 도덕률로.

 

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는데 언제까지 선물을 주시는가 하면은 산타클로스 존재를 믿을 때까지 선물을 받게 되어 있어요. 만약에 어떤 딸이나 아들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17세, 18세 될 때까지 계속 믿는다고 한다면 그 부모는 끝까지 12월 24일 밤에 그 자식한테 선물을 줘야 돼요. 왜? 믿기 때문에. 만약에 너무 천재가 나타나가지고 두 살 아이인데 산타클로스 없다고 존재론적으로 증명을 한다면 그 해부터 선물은 끝나는 겁니다. 왜냐하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존재자체가 선물자체기 때문에 그래요. 존재가 없는데 선물을 받는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자, 선물을 받는 근거가 뭐냐 하면은 산타클로스 존재를 인정해주는 조건하에 선물을 받게 되어 있다고요. 선물이 없는 이상은 받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내가 산다는 것을 인정을 하지 않는다면, 그 말은 뭐냐 하면은 내 인생은 누구로 인하여 산다? 내 인생은 나로 인하여 산다는데, 뭐 주님께서 함께 할 이유가 없죠. 그렇잖아요.

 

그 말을 다시 정리해보면 성령께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뭘 이야기합니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얽힌 관계가 더 크게 다가오는 거예요. 선물 받아서 좋았다가 아니라 이거는 내 인생은 주님을 피해 발을 빼서 도망칠 수 없는, 이미 얽힌 관계인 것을 점점 더 알게 되는 거예요.

 

그냥 예수님을 관찰하고 관조하고 강의에 열중해서 들으면, ‘내가 이쯤해서 예수를 믿을까? 아니면 손을 뗄까? 예수님 포기할까?’ 자기 결정, 자기 도덕적인 결정을 ‘이만하면 착한데 더 이상 내가 믿을 필요가 없잖아. 내가 이만큼 착한데 잔소리들을 필요가 없지.’라고 내리겠는데, 그거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존재보다 누구 존재가 부각이 되는 거예요? 여기에 주님의 계심이 아니라 여기에 누가 있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거예요. 내가.

 

지난 강남강의를 혹시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제목이 공리의 구조죠. 공리의 구조에서 인간들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명확한 진리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공리라는 겁니다. 나는 여기 죽어있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다는 것을 인간들끼리 고개 끄덕이면서 동의했던 공리가 그거에요. 나는 여기 있다. 앞으로 중요한 것은 여기 있는 내가 뭐하면 되느냐? 그게 중요하다.

 

이렇게 했는데, 성경은 그 공리를 피해서 가버리죠. 이게 바로 너희의 헛방이다. 그게 바로 헛것이다. 니가 있다는 근거를 대기 위해서 몇 가지의 요소를 집어넣었느냐? 과학적으로, 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니가 여기 있다는 것을 몇 가지의 논리로 증명할 수 있는가? “한 이만 오천 가지입니다.” “그러면 이십오만은 아니잖아.” “그러면 이십오만을 해서 이것은 분명합니다.” “근데 이백 오십만은 아니지.” 세상을 통틀어서 다 동원해볼 때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과학은 그걸 증명할 수 있는 그 능력이 없어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과학의 임계점이라고 합니다. 임계점이라고 하는 것은 한계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근데 한계를 우리가 찾아서 이른 것이 아니고, 화살표로 가는 것이 아니고, 고맙게도 위에서 오는 화살표가, 하나님께서 임계점을 우리에게 주신 거예요. 경계선을. 경계점을. 선악을 아는 것은요, 이걸 누가 알아야 하느냐 하면은 하나님이 아시면 돼요. 우리는 몰라도 되는 거예요.

 

한번 적어볼까요? 너무 중요하고 어려운데요. 선악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만, only온리, 오직 하나님이에요. 오로지 하나님만 아셔야 하고 우리 인간은 몰라야 한다. 이게 주의 뜻입니다. 이게 주의 뜻이에요. 쉬운 예로서 고급 장갑이 있잖아요. 허름한 장갑 말고. 고급 장갑이 있어서 오른손에 낄 장갑이 따로 있고 왼손에 낄 장갑이 따로 있죠. 그걸 혹시 바꿔 낀 적이 있습니까? 억지로는 들어가는데 오래 끼면 안 맞잖아요. 그렇죠. 악마가 이걸 교체를 시켜버렸어요. 하나님이 알아야 될 것을 인간 속에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손에 그 장갑이 맞을 턱이 없죠.

 

그러면 하나님나라에서 원하는 백성은 뭐냐 하면은 제 손에 제 장갑을 낀 사람만 천국에 올려 보내는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조치인 겁니다. 장갑 다 하나씩 나눠주고 껴봐야 되는데. 이게 안 돼요. 딱 맞아야 되는데 안 맞고 잘못되어 있는 거예요. 허름한 장갑 말고 고급 장갑. 하나님에게 꼭 맞는 장갑은 누구냐 하면은 독생자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오셔가지고 인간 세계의 얽힌 곳에 끼어들었죠. 얽혀서 끼어들었죠.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요,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겁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무죄가 아니고 유죄가 되도록 말씀하셔요. 행동과 모든 말씀이 유죄가 되도록. 죄가 있도록.

 

인간들보기에, 판단해보기에 죄가 있도록 하시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인간들 속에 잘못된 장갑을 낀 손에서 나온 도덕률이, 도덕감각이, 그 도덕감각을 평가해서 예수님이 무죄한 분이 아니고 유죄한 분으로 정리되어서, 결론지어져서, 그 유죄함을 통해서, 시작으로 해서 인간 모두 전체를 유죄한 걸로, 지옥가도 할 말이 없는 존재로 확산시키기 위해서 주님께서 그렇게 분란을 일으키신 겁니다. 그렇게 조치를 하신 거예요.

 

예를 들어서 인간들의 탐심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의 도덕률에 의하면 너무 과한 욕심을 내는 것을 탐심이라고 하죠. 이게 맞는 이야기입니까? 예수 믿지 않는 것이 탐심이에요. 예수님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내세우는 것, 예수님보다 내 관심을 먼저 내세울 때, 자동적으로 그게 탐심이 되는 겁니다. 흔히 성경에서 ‘세상’이라고 하잖아요. 여러분들이 세상이라고 할 때 세상 따로 있고 인간 따로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일부에요. 우리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의 부분으로서 우리가 거기에 이미 포함이 되어 있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이에요. 세상. 우리 자신이. 그 세상에서 우리는 아무 부담이 없이, 뭔가 막혔다는 것이 없을 정도로 그냥 잘 먹고 잘살잖아요. 쉽게 말해서 세상 사람들과 우리 인간이 스스럼없이 대화가 잘 통한다 이 말이죠. 서로 다툴 때도 있지만 근본적인 개념 자체에서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개념 자체에 대해서.

 

그러나 주님의 모든 말씀은 이게 옳다, 그르다가 아니고, “그래서 너는 죄가 있는 거야.”라는 식으로 모든 예수님의 말씀이 해석이 되어야 해요. “그러니까 니가 죄가 있는 거야.” 물을 마셨다. “제가 물을 마셨습니다.” “그러니까 죄야.” 그러니까 죄 인거예요. 내가 물을 마셨다고 하면 안 되고 죄인이 물을 마셨다. 이렇게 돼야 돼요. 그런데 이게 또 용어만 외워가지고, 어디서 들은 풍월은 있어가지고 죄인이라고 하지 말고, 진짜 죄인이 물을 마셨다고 하면, 니가 어딜 봐서 죄인이야? 라고 되물으면 할 말이 없죠. 글쎄, 제가 물을 마신 것밖에 없는데 그게 왜 죄가 되지? 모르죠. 그러면 우리가 답답해가지고 What shall I do? 나 어떡하면 좋아요? 또 이렇게 나와요.

 

아까 얽혀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세요. 자, 출애굽기 20장 11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그 안식일의 취지가 뭐냐 하면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6일 동안 하는 이것은 의미 없어요.

 

결국 모든 목표는 뭐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에 이르기 위해서 너는 1일부터 해서 6일 동안에 너는 힘들게 일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일했습니다. 나는 힘들게 일했습니다.”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요. 중요한 포인트는 뭐냐 하면은 그 일곱째 날에 아무 일도 안 했느냐를 묻는 겁니다. 안식일 그 계명자체가. 안식일 그 계명자체가 아무 일도 하지 말라가 포함되었다면, 결국 목표는 뭡니까? 주께서 인간에게 이르게 하는 목표는 뭐냐, 니가 가야될 세계는 어떤 세계다?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되는 나라에 가는 거예요.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되는 나라에.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뭘 이렇게 공부를 한다고 하면, 정말 아무 일도 안 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고, 아무 일도 안 해도 되는 세계가 좋아서가 아니라, 나는 아무 일도 안 해도 괜찮아. 정당해. 지금 이걸 목표로 인간은 살아가게 돼요. 뭐가 있느냐 하면은 주님이 어떤 조치를 하셔서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어떤 결과로, 어떤 열매로, 우리가 그런 세계에 참여되고 합류가 되는데, 이게 좋은 것이 아니고 내가 평소에 너무 고생을 많이 해서 이제는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나 자신이 그리워진 거예요. 내가 그걸 보고 싶은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해도.

 

현재 우리 인간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은 아무것도 안하면서도 죽어가고 있다. 죽어가고 있죠. 예를 들어서 진도에 하루에 이천 명씩 관광객이 들어온다고 하잖아요. 이 세상에서는 그게 다 누구의 덕이라고 합니까? 송가인 덕이 아닙니까? 그럼 송가인이 지금 아무것도 안하고 있습니까? 그게 아니고 굉장히 바쁘잖아요. 근데 송가인이 아무것도 하나 안하나 관계없이 송가인은 죽어가고 있다는 말은 죽었다 이 말이죠.

 

그 안에 어떤 주님의 얽힌 것이 있는데 이미 그건 죽어있는 존재에요. 그 유명한 가수가 죽어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송가인이 자기 장송곡을 노래해야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죠. 대동강아~~ 노래 부르고, 용두산아~~ 맨날 노래 부르는데, 그게 죽어가는 모습입니까? 본인스스로 생각하기를, 팬들이 보기에 아니죠. 그러니까 가리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 일방적으로 얽혔는데 가리고 있다. 그 가린 것을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강퍅 또는 탐심. 교만. 자만. 탐심이 되는 겁니다.

 

50절을 봅시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그 다음에 뭡니까? “도망 하니라”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 하니라. 제자들의 평소의 마음가짐이 여차하면 도망가야지, 라는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그런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니에요. “내가 주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이래 했잖아요. 그런데 막상 상황이 딱 들이닥치니까 누구 생각합니까? 자기 살 생각만 하죠. 왜냐하면 그 현장에 주님이 나타나있는 현장을 보지 않고, 내가 여전히 나는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싶은 그러한 마음가짐이 항상 우선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평소에.

 

그러니까 본인이 살아있음을 죄라고 여겨본 적이 없다 이 말이에요. 내가 살라고 도망치는 이것이 죄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없었는데 주님께서 일을 일으키니까, 아아!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 발각이 된 거예요. 이 제자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정말 고마워요. 이 세상에 누가 내 본심을, 본색을 드러내줄까요? 이 세상에서. 그리고 이러한 것이 제자들한테는 이미 얽혀있다는 사실. 다른 사람은 그냥 도망치면 그만이지만, 제자들에게는 주님의 사랑이 얽혀있어요. 도망쳐라!

 

49절에 보면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여기에 ‘함께’죠. 함께. 주님이 늘 함께 있었죠. 사실은 3년 동안 함께 있었잖아요. 누가 관찰하고 누가 관조하고 누가 예수님의 강의를 들었는지 한둘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함께 있음이었죠. 주님도 함께 있었던 거예요. 함께 있으면서 병고쳐주고 강의하시고 갔잖아요. 분명히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뒤에 무슨 말씀이 있느냐 하면은,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그들이 예수님을 처음부터 잡을 마음이 없었는데, 없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제가 처음 강의할 때 잡히셨다 했죠. 주님이 잡히려면 인간들은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을 체포하는 역할은 인간들이 해줘야 하는 거예요. 인간들의 역할을. 성경을 이루려 함이라고 했는데 성경구절이 여기에 없어요. 그래서 시편 88편 8절에 보면 그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주께서 나의 아는 자로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로 저희에게 가증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의도적으로 주님께서 인간세계에서 체포당함으로써 여기에서 뭐가 형성되느냐 하면은 ‘주님의 자리가 죄악 속에서 마련되심’ 이것이 성경을 이루려 하심입니다. 예수님 자리가 인간들 자리 속에 들어오시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 예수님 자리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은 뭐가 돼요? 죄인이 되죠. 그것이 구약에서 어떤 기능이냐 하면은 바로 성전개념의 완성, 성전 의미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성전만이 거룩하고 나머지기는 거룩하지 않고, 속되고, 저주스러움이라는 것이 예수님이 스스로 죄인 손에 잡힘으로 말미암아 성취하신 겁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 (IP:122.♡.170.138)20-01-01 15:19 
광주강의20191227b 마가복음14장 43-52절(피리소리)-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내용을 또는 비밀을, 세계를 내비치고 있습니다. 알려주십니다.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죠. 그런데 반대로 얽혀있기 때문에 인간이 보이는 것을 통해서 어떤 결실 또는 결과가 나타나야 돼요. 인간의 보이는 것들이 한곳의 지점을 공격을 해줘야 해요. 인간의 현재 보이는 세계가. 그 보이는 세계의 공격점. 보이는 것이 수렴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보이지 않는 세계가 열리고 계시가 되는 겁니다. 서로 만나는 두 선이 만나는 이 지점(☓)에서 보이는 것들은 한곳에 다 합류해야 돼요. 모아져야 돼요. 보이는 것들은.

 

그러면 여기 제자들이나 그리고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예수님 잡은 사람들의 공통점이 발생되겠죠. 예수님으로 인하여. 뭐냐 하면은 예수님과는 같이 해서는 안 되는 존재이구나. 예수님과 함께 해서는 안 돼. 이걸로 총정리가 된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중간에 십자가 사건이 있잖아요. 보이는 것들은 과학적인 인식이 되지만, 그 안에 담긴 진짜 가치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과는 상종할 인물이 못됨. 이걸로 그 성격과 본질이 완전히 굳어졌죠. 보통 성과가 아닙니다. 큰 성과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다 마찬가지에요. 나라는 존재 안팎이 다 나의 일부거든요. 나라는 존재 안팎. 나는 예수님만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바로 내가 끌릴 수밖에 없는 어떤 존재자가 등장하게 돼버리면 예수님 제치고 그 사람이 우선이 되는 겁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다시 말해서 인간은 어떤 방법이나 어떤 도를 닦고 어떤 수도를 해도 예수님과 함께 하겠다는 그것은 좌절되어야 하고 꺾여야 되는 겁니다.

 

그것이 이 보이는 세계의 목표의식입니다. 이 보이는 세계는 하나의 통일된 목표의식이 있어요. 목표의식이 있고, 이것이 그냥 체계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뭐로 나오느냐 하면은 직관으로 나와요. 충동으로. 직관으로. 툭 치면 딱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은 “나는 예수님과 구태여 함께 할 필요는 없다.” 이 공통된, 통일된 목표의식은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지나친 충실성입니다. 또는 충성감입니다. “충성!”하고 거수경례하죠. 이 세상에 대한 절대적인 충실성. 한결같다 이 말입니다. 한결같다.

 

인간은 변덕스럽다, 저 사람은 성격이 좋은데 나는 안 좋다, 뭐 그렇게 작은 차이를 가지고 저 사람과 나를 따로 구분할 수 있는 여지는, 주님 앞에서는 그런 차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그 나물에 그 밥이에요. 똑같아요. 차이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동일하게 망해야 마땅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걸 아까 시편 88편 8절의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자기 아는 자로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주님은 그들에게 체포당하고, 그리고 여기에 보면 나로 저희에게 가증한 존재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소위 관찰하고, 나도 예수님이 누군지 보기는 봤다고 하는 사람들의 직관과 그들의 공통된, 통일된 평가는 뭐냐, 예수님은 가증한 존재, 필요치 않는 존재, 우리를 힘들게 하는 존재, 우리에게 쓸데없는 존재라는 것으로 이미 평이 결정지어졌습니다. 그런데 괜스레 교회에서 예수님을 좋은 분으로 상상하거나 주님에게 호응을 표시한 그림 같은 것으로 이렇게 허상을, 환상을 만들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이미 누가 뭐래도 주님을 원치 않는 그러한 직관과 다른 인간들과 통일된 의식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아주 충실하다니까요. 지나치게 충실하죠.

 

한국 지도가 이렇게 있다면 아래쪽은 남한이고 위쪽은 북한 아닙니까? 휴전선 근방에서 북쪽으로 가는 아주 간단한 방법은 풍선이나 열기구타고 날아가면 되죠. 글라이더 타고 날아가면 되거든요.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 나오는 손예진처럼. 현빈 만나고 그러면 되는데. 이 휴전선이 뭐냐 하면은 남쪽의 임계점이죠. 지나친 충성으로 인하여 이거는 어떤, 만약에 귀순이나 넘어간다면 이미 할 도리를 다해봤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내가 얼마나 주님에 대해서 반발을 갖고 있는가를,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의 한계는 다 들통 난 입장에 있을 때 주님께서는 자기의 제자들을 찾아오십니다. 아, 주님의 멋진 계획이었습니다. 멋진 계획이에요.

 

주님께서 뭘 의도하느냐 하면은 주체 바뀜을 시도하는 겁니다. 주체 바뀜을. 나는 어떡하면 좋아요? 이게 아니라 이제는 주님이여,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하는 반문이 나오는 겁니다. 주체가 바뀌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대해서 내가 계속해서 충실하도록 주께서 몰아붙여요. 충실하도록. 주님을 사랑할거냐? 세상을 사랑할거냐? 쉽게 말해서 세상 속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으니까. 안팎자체의 일부니까. 나를 사랑할거냐? 주님을 사랑할거냐? 또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거냐? 나를 기쁘게 할 거냐? 갈등을 하는데요. 아무리 해봤자 입니다.

 

이미 결론은 났어요. 괜히 갈등함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척하지 마세요. 그건 괜히 폼 잡는 거죠. 괜히 폼 잡는 거예요. 어떤 유튜브 내용이 인기가 있었는데, 종이로 뭘 만드는가 하면은 종이로 비행기를 만들어놓고, 종이비행기를 날릴까, 말까? 이 내용이에요. 딴 내용은 없어요. 이 내용으로 한 20분 동안 하는 거예요. 날릴까? 말까? 끝. 결국은 날릴지 안 날릴지 모르는 채로 끝인 거예요. 아주 감질나게 만들었어요.

 

불교에 이런 교리가 있죠. 병 안에 새가 갇혔는데 어떻게 하면 그 새가 병을 뚫고 나올 수 있느냐? 이것은 콜럼버스가 달걀을 어떻게 똑바로 세울 수 있느냐?라는 것이 있죠. 봉인된 병에 새가 갇혔는데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느냐? 불교는 이것이 그들의 영원한 숙제였습니다. 근데 주님의 방법은 간단했어요. 병을 깨면 되죠. 근데 불교의 방법은 뭐냐 하면은 새가 영혼이 된다든지, 새의 어떤 변신을 시도하는 거예요. 병이 깨져야 되거든요.

 

근데 이 병을 누가 깨야 돼요? 새가 머리 박는다고 병이 깨지지 않잖아요. 지 머리만 아프죠. 그리고 병이 깨져봐야 소용이 없는 게 이 새가요, 병 깨진다고 이 새가 다른 새가 되는 것이 아니고 못돼먹은 새 그대로 나오는데, 병 깨져봐야 이 새는 소용이 없는 거예요. 병이 깨지려면, 힌트는 뭐냐, 아까 했어요. “우리는 안팎으로 세상의 일부다.”라고 했죠. 자, 세상을 깨게 되면 뭐도 같이 깨진다? 세상의 일부인 우리도 같이 깨지잖아요.

 

그러면 그동안 우리는 어디를 의존해서 살아갑니까? 직장에 의존했어요. 직장에. 직장에 의존해서 살아갑니다. 지금 수련회 참석 못하죠. 직장을 의존해요. 내가 의지하려고 하는 그것이 나의 연장이거든요. 나의 확장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나라가 잘 돼야 내가 잘 된다는 이 말을 하잖아요. 이 말은 무슨 뜻이에요? 병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병의 일부이고 싶고, 이 병에서 잘되고 싶은 거예요. 이 병이 만약에 애굽이라면 히브리인들은 애굽에서 나올 생각이 없어요. 그냥 애굽에서 잘 먹고 잘살고 싶어요. 우리는. 우리의 마음은.

 

예수 믿어봤자 소용이 없다고 했죠. 예수 믿어봤자 주체가 안 바뀌죠. 예수 믿어봤자 우리의 직관은, 우리의 모든 목표의식은 한통속이에요. 이 세상과 한통속이라니까요. 괜히 폼 잡지 마세요. 세상이 잘 되면 우리는 기뻐요. 제가 수요일에 쓰레기인줄 아는 자만이 웃는다고 했는데, 이론은 그런데 우리가 진짜 쓰레기가 되면 기가 찰 거예요. 웃는 게 아니고, What shall I do? 나 어떡하면 좋아요? 분명히 울 거예요. 그 정도로 우리는 친밀해요. 주님이 망한다고 하는 이 세상과 우리는 너무 친밀하게, 한통속이라니까요. 같이 얽혀있어요. 제목은 ‘한통속’입니다. 그냥 한통속으로 같이 얽혀있다고요.

 

길게 이야기할 것 없이 짧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말씀이 말씀대로 되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이루려하심이라고 했으니까. 이러한 병과 우리가 하나가 되어 못 빠져나오고 하는데, 근데 지금 어떻게 빠져나오느냐? 라는 질문을 했지만, 사실은 우리는 이렇게 병이 있다는 사실도 몰라요. 병에서 빠져나올 생각도 없고. 이대로가 그냥 좋아요. 이대로가 좋은 거예요. 빠져나오긴 뭘 빠져나와요? 빠져나오면 못사는데. 이 새는 병에 사는 것에 익숙해졌고 최적화되어 있어요. 병 밖에서는 못살아요.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가자고 할 때에 기가 찬 거예요. 왜? 평생토록 거기에 적합한, 최적화된 생활을 했는데 거기서 나와 가지고 어떻게 살아요? 어디 거지꼴 나는 수가 있거든요. 안 되죠. 거기에 이미 젖었는데요. 뭐 어떻게 살아요? 생뚱맞게 이민 가서 못살잖아요. 그냥 마음뿐이지. 사람은 아무리 멀리가도 귀소본능이 있어가지고 자기가 이 몸을 키워줬던 그 지역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멀리가도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사람이 재혼을 하게 되면 그냥 재혼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처음에 있던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재혼하게 되어 있어요. <그 사람이 갖고 있었던 것+괜찮은 것+α=재혼>, 재혼했는데, 근데 처음 이 사람보다 더 못해. 그럼 삼세판이라고 세 번해야 되는가. 사람이 1,2.3... 자꾸 순서를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은 망가졌다는 겁니다. 하나가 마음에 안 드니까 2를 찾고, 2가 마음에 안 드니까 3을 찾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말은 2, 3을 찾자마자 1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을 되풀이 할 뿐이에요. 1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을. 처음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을 되풀이 할 뿐이에요. 자식이 셋 있는데 어릴 때 엄마아빠를 힘들게 했다면 자식이 커서 아무리 잘해줘도 엄마는 믿지를 못합니다. 언제 어릴 때 그 행세를 또 할까 싶어서. 항상 조마조마하고 온전히 믿지를 않아요. ‘니 본색이 어디에 가나. 그때 행악질이 또 나올 걸.’ 이래 나온다 말이죠.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주님께서 성도를 다룰 때, 구원할 때 어떻게 하는가의 방식을, 우리가 예상하는 방식하고 너무 다르다는 것을 제가 계속해드리는 겁니다. 우리는 항상 병에서 새가 나오는 것을 생각해봤자 이거는 다 헛소리고, 실제로는 우리의 몸이 여기에 최적화되어 있고, 이 세상에 한 덩어리가 되어 있기 때문에 분리자체가 안 됩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분리거든요. 분리자체가 안 되는데요. 여기에 적합한 몸을 가지고, 사고방식과 통일된 목표의식을 가지고 어디 가서 삽니까?

 

그냥 의식이 아니고 아까 무슨 의식이라고 했습니까? 어떤 의식? 목표의식이에요. 그 목표의식이라는 것은 제가 아까 이야기를 했죠. 지침에서 그 다음에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법이죠. 뭐. 법에서 이게 뭡니까? 일자가 되죠. 일자一者. 신이 되죠. 아무리 신이 되어도 처음의 지침을 벗어나지 않고 이걸 더 확대시키는 거예요. 이 지침이라는 것은 내 도덕률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도덕률에서. 나의 도덕률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세계라면 나는 그걸 천국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라는 마음이 모든 인간에게 있는 거예요. 나의 기존의 가치를 인정해준다면 나는 천국에서 얼마든지 주님을 찬미하면서 나는 살 마음이 있다, 라는 것을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여호와 증인이 아닙니까? 자신의 잘남을 계속 키워주면 그게 천국이 된다는 이야기에요. 그 사람들의 주장은. 근데 이게 여호와증인들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쪽 사람들은 노골적이고 우리도 다 그런 마음이 있잖아요. 나 이뻐 해주고, 나 사랑해주고, 나 칭찬해주고, 그런 마음이 있잖아요. 그런 지침의 결과가 애들한테는 뭐냐 하면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아닙니까?

 

우리 손녀가 있는데, 우리 딸이 너무 앞서서 생각을 했던 모양이에요. 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오든 말든 애가 다 컸으니까 생각을 안 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웬걸,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24일이 되니까 얼마나 따져 묻는지. 몇 시에 오느냐, 언제 오느냐, 무슨 선물을 갖고 오느냐, 따지는데. 아무 선물을 준비를 안 해놨던 거예요. 그러면 니가 1시간 동안 눈을 감고 있으면 온다고 했는데, 애가 눈은 감았는데 눈감은 척을 한 거예요.

 

오늘날 교회에서 메시야 기다리는 것하고 똑같아요. 자기 자신은 변할 생각은 않고 예수님이 오시면 천국 온다고 해가지고 계속 실눈을 뜨고 기다리는 거예요. 잠 잘 때 온다고 해도 잠 잘 마음이 없어. 오늘날 교인들이 너무 깨어있어요. 깨어있음에 충실해. 깨어있음에 충실한데 본인한테는 전혀 깨어있지 않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한테 충실해. 오늘날 교회 교인들이. 다시 온다는 거예요. 지가 어떤 인간인지를 하나도 모르고.

 

여기 주님의 방식에 대해서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멜른이라는 마을이 있어요. 독일 마을인데, 인구가 오만 명이 되는데, 그 마을에 관광객들이 오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그림형제가 썼던 동화, 피리 부는 소년이야기가 그 마을의 집에 있었어요. 그 마을에 가면 쥐 형상을 새겨 넣은 보도블록을 군데군데 해놓고 그것을 따라가면 피리 부는 소년 집이 나온다는 거예요.

 

그 피리 부는 소년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이 동네가 제분업이 발달을 해가지고 전 독일에다가 밀가루를 공급하는데, 여기에 제분업의 주원료 밀이 있으니까 뭐가 들끓겠습니까? 쥐떼가 들끓는 거예요. 그래서 시장이 공고를 냈어요. “쥐떼를 해결해주면 오만 원을 드리겠습니다.” 옛날에는 그 금액이었던 모양이죠. 어떤 허름한 소년이 고깔모자를 쓰고 자기가 해주겠다는 거예요. 다 해주면 오만 원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방법에 대해서는 묻지 마라. 내가 알아서 하겠다. 피리를 불었죠. 갑자기 송창식의 피리 부는 사나이가 생각나는데.

 

피리를 부니까 쥐들이 그 소년의 피리 소리를 따라서 숲속으로 다 가버렸어요. 갑자기 이 마을에 쥐가 한 마리도 없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 소년이 시장보고 약속한 돈 오만 원을 달라고 하니까, 이제 와서 시장이 돈이 또 아까운 거예요. 정치인들이 다 그런 거예요. 전에 말한 약속을 안 지키거든요. 국회의원이 되고 나면 딴소리하잖아요. 오만 원을 안 주니까 독이 오른 이 소년이 피리를 불어요. 피리를 부니까 그 동네의 애들이 다 따라가서 사라져버렸어요. 엄마는 난리가 났고요.

 

마치 출애굽 같아요. 출애굽. 그 애굽의 바로 왕 앞에서 모세가 피리를 부니까 히브리인들이 다 따라 나온 것처럼. 이게 하나님의 구원방식이에요. 오늘날도 동일하게 이 원칙대로 합니다. 주님은 피리를 불었고 인간들의 그 한계점, 임계점, 주님보다 이 세상이 더 좋다는 그 임계점을 뛰어넘는 다른 요소에 의해서 이게 빠져나오는 겁니다. 빠져나오면서 그 다음부터 생기는 것이 뭐냐 하면은 세상 자체가 둘로 분류가 돼버려요. 하나의 세상인데 이게 둘로 분류가 되어 있어요. 피리 부는 소년에 의해서 빠져 나온 그 아이들의 세상과,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가거든요. 아이들의 세상과 그 다음에 뭐가 있느냐, 남아있는 기성 어른들의 세계가 돼버리죠. 남아있는 기성 어른들의 세계.

 

이렇게 분류가 되는 핵심에 뭐가 있느냐, 그림형제동화에서는 바로 피리 부는 소년이 있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누가 있겠어요? 예수님의 죽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이 마치 피리의 곡조, 가락처럼, 각 심령에다가 울리도록 하는 것은 누구 담당이냐 하면은 그것은 바로 성령님의 담당이죠. 주님이 피리를 불면 성령님이 하나의 음성에너지를 가지고 우리 마음속까지, 영혼까지 오게 됩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what shall I do? 이게 어떻게 돼요? 없어지고, 그냥 따라가는 거죠.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고 그 피리 부는 소년의 세계, 예수님의 세계를 따라 나가는 겁니다. 자, 나갈 때요, 아이들은 순수하다고 하지만. 오늘날 성도가 성령을 따라 나올 때, 성도는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따라 나올 때 인간은 죄인이죠. 이걸 성도만이 알아요. 죄의 개념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아까 이야기한 도덕률에 있는 죄가 있는 반면에 십자가, 피리소리, 복음에 의한 죄가 나오겠죠.

 

이 도덕률에 의한 죄는 뭘 겨냥하느냐 하면은 선과 함께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 나오는 죄가 돼요. 선을 장려하고 악을 줄이면 나는 의인이 된다는 그게 선악지식에서 나오는 죄라면, 이 복음의 죄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인간이 태어남 그 자체가, 모든 게 죄가 되는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죄가 되는 거예요. 아담에 속했다는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거예요. 아담은 피리 부는 소년에 의하면 기성세대죠.

 

우리는 기성세대의 일부로서 나오는 거예요. 기성세대의 일부로서. 세상이 이렇게 죄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표본으로서 나오는 거예요. 여기에 하나님의 의가 함께 있어버리면 그 의로 인하여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 죄가 의로 평가받는 겁니다. 이 죄가 의로 평가받는 거예요.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그 관계성, 피리 부는 소년과 함께 있다는 그 관계성으로 인하여 그게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피리 부는 소년이 이렇게 피리를 불게 되면 먼저 그 피리 소리의 효과가 확실해야 되겠죠. 그게 뭐냐 하면은 말씀은 예수님에 의해서 무슨 수순에 이르게 되느냐 하면은 말씀 완성이 되는 거예요. 말씀완성이 되는 겁니다. 말씀이 완성되는 거예요. 이제부터는 무척 쉽죠.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는 이유는 우리 안에 뭐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바르게 살아서가 아니라 말씀완성을 위하여 우리의 모든 존재나 이 죄성罪性이 관계 지어져 있기 때문에 그래요. 말씀완성에 기여했다고 보면 돼요. 우리가 뭐 보태준 것은 없지만, 하여튼 주께서 그렇게 한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의 완성을 위하여 우리는 죄인의 역할로 가담이 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근데 이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피리를 불 때 빠져나올 피리 말고 다른 피리, 유사한 피리를 부는 거예요. “너 죄인이니까 회개하라.” 이런 피리를 불어보는 거예요. 그러면 정작 천국 가는 사람에게는 그게 먹혀들어가겠어요? 안 먹혀들어가겠어요? ‘뭐 웃기고 있네. 저거 복음 아니네.’ 복음이네, 복음 아니네, 이미 주님의 피리 소리, 성령의 피리 소리를 들은 사람한테는 이게 분간이 되죠.

 

그런데 흉내 내는 사람, 복음 흉내 내고, 십자가를 흉내 내는 사람한테는 뭘 건드리느냐 하면은 나의 이 잘남을 건드리는, 나의 잘남을 건드려서 스스로 내가 뭘 지키려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 사람은 들통 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으면 참 좋겠는데. 다시 말해서 “나 예수 믿어줬잖아요. 십자가 믿잖아요.” 그런 반발로 나온다면 그 사람은 지금 기성세대에요.

 

자, 기성세대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나의 도덕률, 나의 잘남을 훼손하기 싫은 거예요. 그걸 버티고 싶은 거예요. 이걸 지키고 싶은 거예요. 나의 정당성을. 그런데 여기 피리 부는 소년 따라서, 주님 따라서, 성령 따라서 오신 사람은 뭘 자랑하고 뭘 지키고 싶은 거예요? 피리, 십자가, 나 아니고 누구? “나, 주님 없이는 못 살아요.” 이래 되죠.

 

인간이 자기의 잘남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도 있지만, 남들이 그렇게 인정해줄 때 우리는 기가 삽니다. 사람이 외롭지 않다는 것은, 군중 속에 있다고 외로움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다주고 나에게 잘했다고 칭찬할 때 우리는 외로움이 없어지는 거예요. 외로움은 결구 뭐다? 탐심이 되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 존재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지난 수요일인가 이야기를 했죠. 인간은 대화를 해야 되는데, 나를 욕하는 대화는 싫어요. 나에게 그냥 잘해주는 대화를 해야 하는데, 잘해주는 대화가 없을 때는 여기에 뭐가 들어간다고 했어요? 고양이와 개가 들어가는 겁니다. 프란체스코 교황, 그 사람은 개도 고양이도 안 키운 모양이에요. 그 사람은 새가 들어가요. 지가 새하고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그걸 뭐 자랑이라고 이야기하는지. 새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요새 생물학자도 할 수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꽃하고 이야기하고. 꽃집하면 꽃하고 다 이야기해요.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요. 치킨집하는 사람은 치킨하고도 이야기해요. 타짜는 화투하고도 이야기해요. 장땡이 나와야 하는데. 장땡 나와라.

 

왜 그러냐 하면은 외롭지 않고 싶은 거예요. 외롭지 않고 날 위해주는 사람이 있고 싶은 거예요. 그 안에서 자기 정당성을 보장받고 싶은 거예요.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를 했죠. 여기에 누가 있다? 내가 여기 있음을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주님의 계심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 아니고 내가 있고 싶은 것을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개고양이는 만만하죠. 밥 주는데 지가 좋다고 꼬리 안 흔들 수 없죠. 살맛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가족 세 식구가 있고, 아빠, 엄마, 딸 있고 개 한 마리 있으면 온 식구는 누구보고 이야기합니까? 개하고 이야기해요. 서열이 개가 우선이고, 그 다음이 딸이고, 엄마고, 제일 밑바닥이 아빠에요. 당 서열이 이렇게 되는 거예요. 당 서열이.

 

그래서 제 이야기대로 한다면 결국은 성령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뭡니까? 언어죠. 언어. 피리소리죠. 피리소리. 성경은 성령으로 써졌죠. 이 말씀이 우리 내부에서 계속해서 피리소리로 들려져야 하는 겁니다. 이 말씀이. 만약에 남들이 다 나를 무시하고 자기끼리 할 때, 갑자기 마태복음 7장이 생각이 나죠. 좁은 길로 가라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어떤 사람은 뭐 잘 먹고 잘살고 돈 자랑할 때, 모래위에 지은 집같이 무너질 것이다. 그런 생각이 이거는 뭐 금방금방 떠올라야하죠. 금방금방. 어떤 사람은 전세를 놨는데 임대사업자가 사기쳐가지고 전세 값도 못 주고 돈 없다, 내 배 째라고 나올 때, 마태복음 8장 20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하시더라”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그게 번쩍 생각이 나야 되겠죠.

 

그런데 이 피리소리가 오래 안 간다는 겁니다. 3초 내지 5초 삐리릭~~하면 끝나요. 삐리릭~~ 이러다 그만 새버리고 다른 소리가 우악하고 덤벼드네. 다른 소리가. 그래도 한 순간이라도 피리소리가 들려오거든 천만다행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여기 다른 소리는 악마의 소리인데, 악마의 피리소리는요, 주님께서 일부러 보내신 거예요. 일부러. 일부러 보낸 이유는 아까 말씀드렸는데요. 한계점까지 간다는 거. 한계점까지.

 

니 성질대로, 니 멋대로 해봐라. 결국은 니 힘으로 이 벡터(방향을 가지고 있는 양), 인간계에서 천상계로 가는 방법은 이 세상에 애초부터 희망이 없고 아예 그런 길이 없음을, 니가 지금 아직도 감을 못 잡고 있고, ‘설마 그럴까? 이정도로 낮추고 낮췄는데 알아주겠지.’ 자꾸 자기의 도덕률에 의한 자기의 잘남을 그런 식으로 미련을 못 버리는 거예요. 자기 잘남에 대한 미련. 자기 성과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는 거예요. 이게 이 세상에 최적화되어 있으니까.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간다고 했을 때에 오직 뭐만 있습니까? 십자가 외에는 다른 길은 없어요. 십자가 외에는. 그럼 피리소리는 무슨 소리입니까? 결국 십자가소리죠. 십자가에서 나오는 소리에요. 십자가가 십자가로 되려면 우리 인간은 주변에 전부 다 기성세대, 인간이 갖고 있는 기성세대 이 소리에 왕왕하고 거기에 항상 놓여있는 겁니다. 진짜 3초든 5초든 주님의 십자가 소리가 들리거든 이게 웬 기적인지! 웬 이런 소리가 다 들리지?

 

이게 무슨 소리지? 내 마음에 그 소리가 왜 와 닿지? 오히려 깜놀!! 오히려 깜짝 놀라야 돼요. 우와!!! 내가 예상 못한 다른 소리에 내가 현혹이 된다는, 내가 거기에 빠져버린다는 거예요. 그 피리소리는 선악이라는 것에서 벗어난 겁니다. 선악을 벗어난 소리가 들려야 돼요. 선악에서 벗어난 피리소리가 들릴 때 이것은 오락, 게임에서 나의 승리, 나의 성공에서 벗어난 존재인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자, 피리 부는 소년이야기를 잘 들었죠.

 

그렇다면 아까 이야기한 것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병에서 새가 어떻게 빠져나오느냐, 병이 있다는 그 자체를 이미 성령 받은 사람한테는, 피리소리를 들은 사람한테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병에서 새는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병이 위에서 꽉 막혀있기 때문에. 그걸 갈라디아서에서 그렇게 강조한 거예요. 율법에 있는 사람은 도저히 율법의 죄 속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오히려 빠져나오기보다는 그 안에서 철저히 그게 죄를 죄인 줄 모르고, 오히려 반대로 그걸 의롭다고 여기고 착각하면서, 아무 생각도 없이 빠져나온다는 생각조차도 못 갖게, 그냥 죽은 자로서 살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병에 새가 들어있다, 라는 생각 자체도 이거는 누가 와야 해요? 이미 병이 있고 여기에 새가 있다는 그것은 이미 들어왔다가 빠져나가신 분의 안목이 되는 겁니다. 그분의 마음가짐, 그분의 영혼, 그분의 영이 아니면, 이렇게 병이 있고 율법에 갇혀있고 지옥에 갇혀있다는 것을 그분의 영이 오지 않으면 알 수가 없어요. 그리고 뭘 알아야 하느냐 하면은 우리는 갇혀있다는 것만 아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에 못 빠져나간다. 갇혀있다.+못 빠져나간다.

 

어떤 수를 쓰고 어떤 노력을 해도 못 빠져나간다는 것을 알아야 그래야 제대로 된 갇혀있음의 극단, 갇혀있음의 한계가 돼요. 철저하게 갇혀있어야 돼요. 철저하게. 갇혀있으려면 옴팍 갇혀있어야 돼요. 완전히 갇혀있어야 돼요. 이렇게 해서 뭐 빠져나왔다는 그런 헛소리는 듣지 마세요. 못 빠져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가 못 빠져나오는 여기에 주님의 성령이 왔거든요. 이미 길을 냈잖아요. 그 만들어진 길을 따라서 성령이 오십니다. 그 길의 모습은 피리소리라고 했죠. 그게 십자가죠. 십자가로 니가 빠져나올 때 우리는 뭐로 달라져야 하느냐 하면은 우리 옛사람은 죽은 자가 되어야 해요. 우리가 죽은 자가 되어야 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이미 우리 운명은 다한 겁니다.

 

예수님이 죽을 때 그냥 죽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아버지한테 버림받았죠. 버림받은 자는 그냥 버림받은 자에요. 이미 우리가 버려진 거예요. 뭐 김밥 먹어도 식혜 먹어도 버려진 거예요. 뭐 먹었다고 새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버려진 거예요. 버려졌으니까, 이게 에스겔 37장에 나옵니다. 이미 버려졌으니까 말씀대로 하면 되는데요. 37장에 바짝 마른 뼈들이 나와 있죠. 사람들은 그냥 뼈들이에요. 납골당입니다. 납골당도 아니고 뼈들을 모아놓은 겁니다. 뼈들에게서 살아날 가망성은 전혀 없는 바짝 마른 거예요.

 

무엇이 살아 있느냐, 말씀의 완성이 뼈에서 살아나게 해요. 그러니까 없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고,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죽음에서 나와요. 죽음에서 나오거든요. 예를 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 때 끝까지 예수님을 정신병자로 착각하고 귀신들린 자로 봤잖아요. 우리 성도도 남들 앞에서 끝까지 정신병자로, 미친 인간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세요. 끝까지 그래요. 끝까지. 보는 눈이 세상적인 눈인데, 그들 눈에 우리가 죽은 자죠.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보듯이 우리를 그런 식으로 보고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을 오히려 고맙고 감사히 여겨야 됩니다. 이만희처럼 부활한다는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돼요.

 

제가 하는 다시 하는 말은 어딜 봐도, 우리의 모습 어디를 봐도 신자다움, 성도다움, 예수님의 백성다운 모습이 그들에게 발견된다? 발견되지 않는다?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기대를 않습니다. 발견되지 않습니다. 발견됨에 대해서 어떤 기대도 하지 마세요. 그건 괜한 우리의 욕심이에요. 왜냐하면 구원은 내 몫이 아니고, 죽은 자의 몫이 아니고 산자의 몫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미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우리하고 거래를 안 합니다. 왜? 우리 죽은 자하고는 거래를 안 합니다.

 

죽은 자, 시체한테 “여기 수표에 써라.” 손가락뼈에 볼펜 끼워가지고 디리릭..해가지고 “나는 너에게 20억을 준다.” 해도 이거는 아무 효력이 없어요. 물론 약 먹여가지고 몰래 계약서에 지문을 찍은 게 드라마에 나오는데, 그건 법적으로 효력이 없어요. 약 먹여서 잠잔 사이에 몰래 찍은 거라고 하면 끝나거든요. 그래서 악마는 맨날 흉내만 내게 해요. 우리를 악마가 선악과 약을 먹여놓고, 기도해라 기도지문 쫙 찍고. 십일조 지문 쫙 찍고. 뭐 이렇게 해가지고, 마치 눈 뜨게 해놓고 “봐라! 니가 이정도로 선교하고 전도하고 예배드리고 헌금 많이 하고 니가 이정도로 전도 많이 했다.” 업적을 한상 그득하게 차려가지고 다 니가 한 거라고 하죠. 니가 개척교회해서 백 명, 이백 명 모았다. 다 꿈같은 소리지만. 니가 자식 이렇게 잘 키우고. 니가 아빠 노릇 잘했다. 이런 걸 한상 차려주는 거예요. 니 의미 있다고.

 

에스겔 37장에서 마른 뼈 나왔죠. 그런 것을 우리가 꿈으로 봤으면 좋겠는데, 로마서 4장에는 더 심하게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가 자궁이 죽었어요. 애를 못 낳는다고요. 애를 못 낳는 이미 죽은 자궁이거든요. 죽은 태인데 애를 낳는데요. 남편 아브라함이 믿었다 이 말이죠. 애를 낳는다고요. 왜냐하면 봤거든요. 분명히 눈으로 보고 있다고요. 늙어서 애를 못 낳는 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남편이 뻔히 보면서도. 이게 보이는 세계가 아닙니까? 보이는 세계에 뭐가 침투했느냐 하면은, 피리소리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온 거예요. 약속이. 이 약속은 보이는 세계와 섞인다? 안 섞인다? 섞이지를 않아요. 그냥 사용할 뿐이에요.

 

그렇다면 무슨 말이냐 하면은, 적극적으로 봐야 돼요. 태가 죽었으니까 비로소 뭐하다? 산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안 죽었으면 우리는 믿지 말자.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잖아요. 그러니까 메시야죠. 그러니까 구세주잖아요. 아기예수 가지고는 안 돼요. 십자가에요. 사도바울이 지금 아기예수를 가지고 전도한 게 아니잖아요. 뭘 증거 했습니까? 십자가, 죽었다는 거예요. 죽었다는 것이 있는데 왜 안 믿느냐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말이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죽었다는 거예요. 부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를 말하는 거예요. 구원의 능력은 십자가지 부활이 아니에요.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하지 부활이 눈앞에 보인다고 하지 않아요. 그 부활을 하나의 미끼로 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피리 부는 소년이 애들을 다 데리고 갔잖아요. 그러니까 어른들은, 피리 부는 소년이 만약에 약속이라면 어른들은 지옥이다. 이렇게 믿어야 될 게 아닙니까? 우리는 죄인 맞다가 인정되어야 되죠.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우리가 그렇게 간수하고 아까워하고 붙들고 살라고 하는 이것은, 이미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산자다? 죽은 자다? 죽은 자라는 것이 기쁘게 믿어지는 거예요. 기쁘게. 참 죽은 놈 만나봐야 소용이 없다는 식으로.

 

내 인생에 대해서, 뭐 노래가사가 그런 게 있던가요. 내 인생에 박수를 보낸다, 사랑에 한 표 던진다, 라는 그런 노래들이 있어요. 현숙의 노래인데, 몰라도 되지만 효녀 가수 현숙이 부른 노래에 그런 노래가 있어요. 효녀인지 아닌지는 뭐 누가 압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그 뒤에 나온 모든 말씀들은 예수님이 서서히 꺼져가는 거죠. 사라져가죠. 이 세상에서. 분리잖아요. 그런데 결국은 그 마지막 모습이 뭐였습니까? 죽은 모습이에요. 십자가가 죽은 모습이에요. 부활한 모습은 딱 세 번이에요. 우리 생각 같으면 부활했으면 같이 살면 되는데 그렇지 않아요.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렸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누가 들어도 망상의 일종이죠. 예수님의 부활이.

 

주님께서 부활했다가 사라진 것은 뭐냐 하면은 부활을 쳐다보지 말라 이거에요. 물론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갔어요. 올라간 것을 쳐다보지 말라고 천사들이 당부했지요. 뭘 보라는 거예요? 지금 니가 누굴 쳐다볼 그런 입장이 안 된다는 거예요. 너는 무슨 자다? 십자가에서 이미 나와 함께 죽은 자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속대로 판정을 그렇게 내렸다는 거예요. 죽은 놈이 무슨 도덕률이 있고 죽은 놈이 무슨 양심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죽은 놈이 무슨 착한 일을 해요? 죽은 놈이 무슨 믿음을 가져요?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우리 안에 성령이 오고 주님이 올 때, 비로소 죽은 자였는데 어떤 분이 내왕하셔서, 방문하셔서 일으킨 효과, 일으킨 결과물이 성도라는 겁니다. 이게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우리한테 힘든 것은 뭐냐 우리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 임계점까지 가야된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죄인 중에 괴수이며, 아버지 장례치를 때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례하고 니는 나를 따르라고 할 때, 그것이 성경말씀에 있다가 아니라 그게 실감나는 경험을 성령께서는 손잡고 온 동네를 다니면서, 피리 부는 소년께서 옛날 우리가 살았던 동네를 다 다니면서 “바로 이런 것 경험하면서 니는 죽은 자로 살았어.” 새삼스럽게 우리 손모가지를 붙들고 계속해서 30, 40, 50, 60, 70, 80, 살게 하시면서 다 구경시켜주는 겁니다.

 

“결국 니가 80살고 90살아봐도 남는 게 뭐 있더냐?”라고 묻죠. 나 잘났어, 나 외로운 것은 싫어, 그런 것만 남았잖아요. 그게 바로 기성세대죠. 피리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그 세계. 낯선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기존에 왁자지껄 이미 알고 있는 그 세계 속에서, 애굽 나라의 세계 속에서 어린양의 피 바르는 이야기는 생뚱 맞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우리가 강퍅했다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우리가 알게 되는 겁니다. 그동안 강퍅한 줄도 모르고 살았던 이것이 지옥가도 마땅한 존재였음을, 성령을 통해서 이제는 마음 놓고, 안심 놓고 이런 존재라는 것을, 이제는 구원받은 상태에서 원 없이 나는 이런 인간입니다, 라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죄악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는데, 주께서 찾아오심으로서 주의 말씀 안에 들어서 이제는 주의 가신 길과 합류하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주와 함께 걸어가면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세계인 것을 다시 한 번 깊이 체험하면서 우리를 죽은 자로 만들어서 살게 하시는 은혜를 더욱더 감사하고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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