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00327a 마가복음14장 72절(닭)-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4장 72절입니다.
72절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그렇게 되어 있죠. 사람이 “내가 누구냐?”라는 질문 안에는 나만 들어있어요. “내가 누구냐?”하는 그것에는 자기 자신만 들어있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자기백성 제자들을 통해서, “내가 누구냐?” 안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은, 주님이 누구신가가 포함되도록 하는 겁니다. 주님이 누구신가? 라는 것은 너희들이 나중에 부활되고 난 주님보고 물을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내 백성이라고 지정한 그 사람한테 가서 물으라는 거예요. 뭐라고 묻느냐 하면은 “베드로님! 당신이 누구십니까?”라는 질문과 “주님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과 같은 질문이 되게 만들어요.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거든요.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라는 것과 똑같은 원칙입니다.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그 이야기와 주님이 누구신가와 같이 하도록 주님께서는 여기 공작, 작업을 벌이시는 겁니다. 작업을. 작업을 벌이는데, 작업을 벌이려면 이 관계가 서로 링크되어야 하겠죠. 연결되어야 하는 겁니다. 연결된다는 말을 이렇게 쉽게 생각하는데, 그냥 만났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만났지만 연결되지 않은 사람이 훨씬 더 많아요. 만났지만. 심지어 30년 만났지만 연결되지 않은 사람도 굉장히 많습니다. 십자가마을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지만. 만났는데, 아는 사람인데, 식사도 같이 했는데 연결되지 않은 경우가 있어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먼저 찾아왔죠. 베드로가 고기 잡는 사람이지만 주님이 누구신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베드로에게 먼저 연결을 시도한 겁니다. 근데 베드로는 연결로 보지 않고 뭐로 보느냐 하면은 단순한 만남으로 본 거예요. 만남으로. 마태복음 17장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해같이 영광스럽게 되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됐습니다. 나 여기서 살래요.” 이렇게 나왔다 이 말이죠. 그랬던 베드로가 산 밑에 내려와서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나 저 사람 모른다.” 71절에 보면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만났죠. 분명히 만났는데 뭐가 안 됐습니까? 연결이 안 됐습니다. 어느 정도 연결이 되어야 하느냐 하면은 내가 이런 사람이다, 라는 그 내용 안에 공히, 같이 주님은 이런 분이다, 라는 것으로 연결되는 그러한 내용이 현재 베드로에게 없어요. 지금 베드로는 계속해서 뭘 주장하느냐 하면은 자기 계보를 계속해서 고집하고 있습니다. 자기계보, 자기계열, 내 중심의 계열. 그걸 고집하고 있어요. 자기계보, 자기계열을 이렇게 고집하게 되면 여기에 뭐가 생기느냐 하면은, 보통 자기계열은 누구겠어요? 나와 관련되어 있는 내 자녀, 내 손자손녀, 내 부모, 1촌간, 2촌간, 8촌간, 이게 계열이잖아요. 나머지는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게 적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 계열과 자기계보를 고집하는 순간 뭐가 발생되겠어요? 자기계열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자기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자기원수. 예수님도 자기백성이 아니면 나머지기는 뭐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저주받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보면 여러분들이 다 아시다시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 다음이 뭡니까?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되어 있죠.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하고 편지를 썼잖아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이런 말을 한 것 자체가 사도바울이 뭇매를 당해도 마땅합니다. 이거는 뭐 사람한테 짓밟혀도 마찬가지에요.
만약에 4월 15일에 대선 투표하는데 투표장에 가서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면 투표함가지고 얻어맞고 질질 끌려 나가고 짓밟혀도 너무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너무 과격해. 너무 과격해요. 사도바울이 이런 저주라는 단어와 주를 사랑하지 않는 단어와 이렇게 연결시킬 때, 어떤 사람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이미 사도바울 입장에서는 확정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 그런 것 필요 없어요.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이미 확정 났어요. 저주받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이 원리를 모든 인간들이 뭘 챙기고 있습니까? 살아가는 게 자연스럽든 인위적이든 지금 뭘 챙기고 있어요? 자기계보 자기계열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런 아지트를 아주 고상한 말로 해서 가정이라고 합니다. 가정. 컴백 홈! 하잖아요. 컴백 홈Come Back Home! 집으로! 내 가정 내 집이다 이 말이죠. 내 가정, 내 집은 내 계보와 내 계열과 관련되어 있는, 구성되어 있는 구성원이거든요. 그런데 사도바울이 말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그 확정된 저주를 집어넣어버리세요.
그러면 뭘 깨는 겁니까? 여기 내 계보, 내 계열은 서로서로 사랑하기라는 원칙이, 기본원칙이 거미줄처럼 촘촘히 깔려있는데, 그 모든 관계가 결국 예수님 앞에서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저주를 형성하는, 그러한 공장생산라인처럼 그렇게 느껴지는 거예요. 우리가 실컷 우리끼리 사랑했는데 나오는 생산물은 뭐였다? 저주였다. 이토록 과격한 말을 지금 함부로 하니, 사도바울은 목베어죽으나 맞아죽으나 죽는 것은 너무나 이 땅에서 당연한 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날 죽이라고 아주 환장하신 것처럼, 모든 내뱉는 언사가, 언동이, “이래도 나를 안 죽여? 이것들아! 아직도 너희들이 언제까지 참을 거냐?” 이런 식이에요. “너희들 본심에 준하면 나는 멀쩡하게 있을 수 없는데. 아니, 본심대로 해! 본심대로. 너희들이 추구하는 것 있잖아. 니 계보, 니 계열.”
지금 한진 그룹 회장 뽑는 거 선거하고 있죠. 유력한 후보가 누구냐 하면은 땅콩회항한 조현아 하고 오빠 조원태, 남매들 있죠. 이쪽이 총수가 될 가망성이 많다는 거예요. 왜? 자기계열, 자기 계보잖아요. 그런데 자기계보, 자기계열에는 누가 포함이 되었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수제자인 베드로도 여기에 포함이 되어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연결이 뭔지도 모르고 예수님을 만난 거예요. 만났으니까, 베드로는 자기 만남의 한계가 자기계보, 자기계열을 유지하는데 만남이 유용하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하나 쓸게요. 유용성. 다시 말해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유용하다, 무용하다? 유용하게 필요하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어디에 필요합니까? 내 계보를 유지하고 내 계열을 유지하는데 유용하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연결이에요? 만남이에요? 그냥 만난 거예요. 자, 연결, 만남이라고 하니까 좀 어려운데, 그러면 이걸 좀 더 어렵게 해보겠습니다. 좀 더 어렵게. 응시. 응시라는 말을 쉽게 하면 쳐다보는 게 응시죠. 자세히 보든 상세히 보든 쳐다보는 거. 둘이 만났을 때 서로 응시했다. 그러면 이거는 연결이 아니고 만남이에요. 그냥. 그냥 만난 거예요. “안녕하세요?” “예” “다음에 연락합시다.” 만난 거죠. 그런데 강의 초반부터 좀 지저분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만, 여러분이 좀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공원에 가면 노인네들 운동하라고 운동기구들이 나와 있죠. 공원에.
공원에서 운동하다가 어떤 어르신네가 보니까 화장실은 없고 해서 그냥 용변을 보고 있다 이 말이죠. 용변을 보고 있는데 그 옆에 있는 아파트에서 어떤 아줌마가 베란다 문 열고 그걸 지켜보고 있는 거예요. 둘 다 눈이 마주쳤어요. 그러면 이거는 만남입니까? 응시입니까? 문제가 너무 어려운데, 이거 만남이겠어요? 응시에요? 만남입니까? 연결입니까? 만남이죠. 한참 용변보고 있고 아주머니도 그걸 지켜보고 있다 이 말이죠. 근데 그 어르신네가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줬을 때, 한쪽은 바지 쥐고 있고 한쪽은 손 흔드는 게 되잖아요. 그 아주머니도 손을 흔들어주면 그거는 만남입니까? 연결입니까? 연결인 거예요. 연결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수치를 내용으로 집어넣었기 때문에.
주님보시기에 베드로는 기껏 해봐야 만남밖에 안 돼요. 왜냐하면 뭘 고집하느냐 하면은 자기계보, 자기계열을 정당한 것으로 우수한 것으로 지킬만한 것으로 자기계열, 자기계보를 지키는 겁니다. 내가 이 가족과 계열이 또 나라는 자체가, 내가 소중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 연결이 아니고 만났을 때 예수님을 필요 없다가 아니고 유용한 것으로 본 거예요. 유용하게 봤는데 어떤 순간이 왔을 때, 예수님이 체포가 되니까 이 유용성을 뭐로 바꿨습니까? 이 유용성의 반대말이 뭐예요? 무용성이죠. 어느 순간, 변화산에서는 예수님을 유용하게 봤는데, 예수님이 체포되는 그 현장에 갔을 때는 갑자기 유용한 것이 아니고, 나한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나한테 흠집이 될 수 있는 사람으로 간주한 거예요.
그러니까 연결됐으면 못 끊는데, 볼 것 다 봤거든요. 손들고 웃었잖아요. 웃었는데, 이게 그냥 만남이 돼버리면 유용할 때는 채택이 되다가 무용할 때는 나는 이 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으로 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미션 임파서블 초반에 나오는 것처럼 “이 테이프는 5초 내에 자동 폭파됩니다.”, “이 사명에 대해서 우리는 모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제5전선 빰빰빰빰~~~ 베드로가 나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어요. 71절에 보면 베드로가 그냥 모른다고 한 게 아니고 강조합니다. 저주하여 맹세하되 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 그러면 유용한 예수님을 그냥 만남의 요소에서, 리스트에서 빼버리면 남는 게 뭐냐 하면은 내 계보, 내 계열은 내가 알아서 지킨다가 되겠죠.
베드로가 이러한 태도가 돼버리면, 아까 제가 처음에 말씀드린 “내가 누구냐?”에서는 주님의 누구냐가 없고 내가 누구냐, 라는 그걸로 모든 의미가 종결됩니다. 내가 누군데? 끝. 왜? 주님은 나는 모르는 거니까.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내가 누구냐, 라는 것은 안다. 끝. 이래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마가복음 14장 70절로 해서 72절까지는 우리한테 상당히 중요한 대목인데요.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은, 베드로를 뭐로 보느냐 하면은, 베드로의 위치, 자리가 무슨 자리냐 하면은 이게 불신자의 자리로 주님께서 그렇게 정해놓아 버렸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베드로가 예수님하고 3년 동안 같이 있었잖아요. 3년까지 있었는데 주님께서는 뭐로 본다? 불신자로 보는 거예요. 불신자로 보는 절차를 주님 쪽에서 시행했다는 점이 오늘 본문에서 중요합니다. 누구든지 불신자가 되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자기를 신자라고 여긴다면 이거는 베드로 자기의 계보에 지나지 않고 자기의 계열에 지나지 않아요. 자기계보, 자기계열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링크가 안 돼요. 연결이 안 돼요. 그냥 유용 하냐, 무용 하냐, 그걸 따져가지고 내 계보나 착실하게 그걸 다지려고 생각하지, 예수님이 나한테 필요하며 믿고 안 필요하면 안 믿겠다는 자기 것을 고수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은 베드로를 통해서 보여주는 불신자의 자리죠. 그럼 제가 아까 이야기한, 베드로 나는 누구냐가 그 다음에 누가 돼요? 예수님이 누구냐가 되죠. 그럼 예수님이 누구냐, 라는 말과 베드로 나는 이런 인간이다, 라는 말에는 베드로의 이런 불신요소가 하나의 내용으로 필수적으로 담겨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중요한 거예요. 주께서는 불신자를 구원하시는데, 불신자를 구원한 때는 불신자다워야 하거든요. 그 역할을 누가 맡느냐 하면은 베드로가 맡는 거예요. 근데 베드로는 자기가 그런 역할이 있다는 사실을 감히 못해보죠. 못하죠.
베드로 본인이 뭔가, 내가 남들처럼 살아가는 것, 다시 말해서 나는 나 자신의 고귀함을 지킨다는 이것이, 이 자체에 복음의 내용이 담겨있으려면 남들처럼 살아가는 이 자체가 뭐가 되느냐 하면은 부끄러움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부끄러움이. 베드로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 저분은 주님이십니다, 라는 말을 못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부끄럽기 때문에. 이 부끄러움은 어떻게 보면 자기방어처럼 보이죠. ‘아이고, 부끄러워라.’ 부끄러움은 자연적으로 움츠러들고 자기방어가 되죠.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부끄럽다고 소극적으로 숨는 모습을 보입니다. 숲속에 숨었고 그리고 가렸고. 그런데 마가복음의 베드로에게서는 이 부끄러움이 뭐냐 하면은 소극적인 것이 아니고 주님에 대한 공격성의 하나의 기저, 토대가 되는 거예요. 이 부끄럽다는 게. 부끄럽다는 게 겸손이고 소녀답다는 게 아니라, 이게 주님의 가치를 저돌적으로 대들게 하는 요소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요소에 대해서는 베드로 자신이 감당 못합니다. 왜냐하면 부끄럽다는 것은 본인의 이성의 판단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거지, 나 이제부터 부끄러워볼까? 이런 거 없거든요.
온 몸 자체가 부끄럽기 때문에 사람들이 있는 공개석상에서 나는 예수님을 안다고 차마 말 못하겠다는 겁니다. 왜? 이야기하려니까 부끄럽고 두렵고 뭐 그렇다는 거예요. 부끄럽고 두렵다는 이것은 결국 뭐냐 하면은, 이거는 본인도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부끄러움을 우리가 아는 단어로 하면 이게 뭡니까? 수치죠. 주님이 어떤 존재였다? 수치스러운 존재다. 그래서 베드로가 성령 받고 난 뒤에, 사도가 되고 난 뒤에 베드로 너는 누구냐? 라고 할 때에,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고 말한 게 아니고 나는 예수님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본성을 지닌 존재였습니다, 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주님의 부끄러움이 나의 부끄러움을 덮어줘서 구원받은 겁니다. 이래 되겠죠.
만인이 다 부끄럽다고 여기는, 베드로 본인도 부끄럽게 여기고, 모든 사람이 다 부끄럽게 여기고. 그걸 로마서 1장에서는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부끄러운 것이나 오히려 복음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주님을 공격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그것을 자랑으로, 주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부끄러움을 당하심을 자랑하는 거예요. 부활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사람에게 버림받았다는 그 자체가 즐겁고 고맙고 감사한 겁니다. 그 자체가. 사람에게 버림받았다는 그 자체가 주님의 수치 당하심 앞에서 나의 수치는 수치도 아님을 아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하지만 베드로에게 주님이 찾아온 것은 베드로 나는 이런 인간이다, 라는 것이 아니고 이런 인간이라는 것을 통해서 그 안에 예수님이 진정 누구였던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님을 그냥 이런, 나중에 성령이 와서 예수님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없으면 예수님에 대한 모든 신학과 모든 그것들은 하나의 그냥 지식이 돼버려요. 그래서 고맙습니다가 없으면, 고맙습니다가 없는 상태에서 성경을 천 독, 만 독, 해도 그것은 지식이에요. 자기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한 하나의 링크가 아니고, 연결이 아니고 그냥 만남이에요.
아까 예를 다시 부끄러운 예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그 아주머니가 어르신네의 용변 보는 것을 볼 때에, 그 어르신네가 ‘어머나 내가 챙기지 못했구나!’해서 후다닥 자크 올린다고 하다가 찔려가지고 아프고, 이렇게 당황스러운 것이 아니고 손을 흔든다는 것. 이것은 뭐냐 하면은 주님의 응시니까, 서로 보고 있으니까, 보고 있는 주님을 보고 자기 수치스러움을 내놓고 손을 흔드는 거예요. 그 응시는 어떤 응시냐 하면은 하나 됨을 확인하는 응시. 보고 계시는데 그냥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 됨을 위한 연결로서 보고 계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수치가 더 이상 복음 앞에서는, 주님 앞에서는, 십자가 앞에서는 부끄러운 이유가 전혀 없죠. 부끄러울 이유가. ‘아이고, 내가 이런 짓을 하다니!’ 그렇게 호들갑떨 이유가 하나도 없다니까요. 오늘 마가복음 14장에서는 지금 베드로는 주님과 헤어질 작심을 합니다. 헤어질 작심을. 헤어져야 나머지기 자기의 고귀한 자기계보와 자기계열만큼은 자기가 챙길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여러분들이 그 다음 논리를 아시겠죠. 베드로를 불신자 되도록, 베드로를 예수님 쪽에서 빠이빠이 하려고, 그냥 우리는 연결된 적이 없고 그냥 한때 만났습니다, 하는 정도로, 여기서 갈라서려고 하는 이 베드로를 주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다시 하나로 연결시키느냐, 그게 중요한 내용이 되어야 되겠죠. 그건 뭐냐 하면 바로 인간은 자신을 물질로 보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신을 물질로 보지를 않아요. 인간은 자신을 뭐로 보느냐 하면 신비로운 존재로 봐요. 신비로운 존재. 그게 영적인, 절대적인, 신처럼 행세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면 안 돼!” 그러면 안 건드리면 되죠. 근데 안 건드리고 욕을 하게 되면, 건드린 것처럼 마찬가지로 화가 나죠. 이게 좀 어렵습니까? 좀 쉽게 해보겠습니다. 화가 왜 나느냐? 아니, 화를 왜 냅니까? 화를 왜 내죠? 어떤 때 화를 냅니까? 그거는 내가 생각하고 품고 있던 내 가치를 충족시키지 않을 때 화가 나는 거예요. 충족시키지 않을 때.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죠.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데, 그러면 교인들은, 성도가 아니고 교인들입니다. 교인들은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저주받으니까,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받으니까 사랑하기로 마음을 먹죠. 사랑하기로 마음을 먹으면서 속으로 뭐냐 하면은 분노와 화를 억누르고 있습니다. 억누르게 되는 겁니다. 사랑한 댔잖아요. 사랑하잖아요. 얼굴은 전혀 사랑하지 않는데 말은 지금 큰소리를 치고 있어요. 그거는 왜 그러냐 하면은, 왜 나에게 저주라는 단어를 왜? 나는 그 단어를 싫어하는데 왜 그 단어를 나한테 강요하느냐? 그 말이거든요. 그래서 화가 나는 거예요.
그렇다면 저주라는 말을 사람들은 뭐냐 하면은, 저주라는 것은 현재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못한 것을 가지고 저주받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보다 더 못한 거. 그러면 인간이 자신을 물질로 보는 것. 흙이라든지, 돌멩이라든지, 이 돌대가리야! 이런 것은 애들도, 한 살 먹은 애들은 잘 모르지만 나머지기 그 다음 애들은 다 알잖아요. 돌대가리, 물질로 표현하는 이런 것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잖아요. 물질로 볼 때 인간은 수치를 느끼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지금 뭘 사용했느냐 하면은, 주님께서 사용한 것은 불신자인, 자기밖에 모르는 베드로를 지금 주님과 하나로 연결시켜서 자기 힘으로 안 되는 구원을 어떻게 시키느냐, 그걸 지금 보여주는 거예요.
뭐로 보여주느냐 하면은, 물질로 보여주는 것을 닭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닭. 이 닭대가리야! 오늘 강의제목은 닭입니다. 뭐 두자, 세자 할 것도 없어요. 그냥 닭이에요. 닭은 사람보다 못하다는 그것이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닭은 함부로 할 수도 있어요. 목을 비틀 수도 있어요. 먹을 수도 있어요. 닭한테 그다지 애정을 줄 필요도 없어요. 그런데 이 닭이 예수님이라면, 중간에 논리를 하나 집어넣으면 예수님이 베드로를 빼고, 베드로 계열 말고 닭 계보를 찾으신다면? 닭 계보를 만드신다면? 나의 닭들아! 닭의 계열을 한다면? 결국 이것은 베드로가 주님을 배신할지라도 주님이 자기 백성 만들기에는, 니가 배신할지라도 중지되거나 멈춰지지 않는다고 본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하시는 그 말씀을 베드로는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겠죠. 누가복음 거기에 나오잖아요. 여러분들이 안 봐도 다 아시죠. “베드로야! 사탄이 지금 너를 삼키려고 부르짖고 있다. 하지만 내가 기도함으로서 니가 보호받는다.” 이렇게 하니까, “주님, 주님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내가 알아서 주님한테 목숨 바치도록 이미 결심과 각오를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결심이 돼있습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는 인간인 예수님과, 그 당시에 예수님이 인간이셨으니까, 인간인 예수님과 인간인 베드로 사이에 의리죠. 의리. 의리 만남이라는 말이죠. 인간 대 인간들끼리, 서로 말 통하는 인간들끼리 얼마든지 해결할 문제다 이래 생각하는 거예요.
나라는 인간이 주님이라는 하나의 인간을 만날 때, 소위 서로 의사소통을 통해서 충분히 이 모든 구원문제나 천국 가는 문제가 해결된다고 자부한 거예요. 베드로가. 여기에 제 3자가 끼어들 틈이 없어요. 돌멩이가 끼어든 것은 세례요한한테나 하는 소리지. 돌멩이 같은 거 필요 없고 개돼지 같은 거 필요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갑자기 예수님과 인간인 베드로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그중에 뭐를 삽입해버려요? 닭을 집어넣는다고요. 닭을. 닭을 집어넣어버렸어요. 예수님의 링크가, 예수님의 연결고리가 베드로 생각에는 예수님과 자기는 하나라고 생각한 거죠. 좋게 지냈으니까. 물위까지 걸었고 여러 가지 기적을 베풀어줬으니까 얼마나 대단해요.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 자신의 계열과 계보를 굉장히 고귀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주께서 챙겨줬으니까. 주께서 챙겨주심이 있으니까.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그동안 받은 것이 이만큼 많은데 우리가 예수님을 배신할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니 배신이야. 배반하는 거야” 송강호처럼 이런다고요. 배신할 이유가 없어요. 갑자기 개그가 왜 나와. 웃지도 않는 개그. 주님을 왜 배신해요? 주님과 우리는 하나인데. 근데 하나인데 그게 연결이 아니고 뭡니까? 베드로 본인이 고귀한 거예요. 본인이. 본인이 소중해서 본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유용하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악착같이 주님을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베드로 계열이 작살이 나버리고 어느 계열로 빠집니까? 닭 계열로 빠져버려요. 예수님이 하는 모든 예언과 모든 그것은 나를 통해서 나타난 것이 아니고 닭을 통해서 나타난 거예요. 아니, 닭은 삼계탕이나 끓여먹으면 되지, 왜 닭을? 고귀한 인간이 있는데 인간은 놔두고 주께서는 베드로 대신에 닭을 그 자리에 집어넣느냐 이 말이죠. 닭은 모든 인간에게, “이 닭 같은 인간아!”라고 하면 자기에 대한 수치로 보거든요. 수치. 어떻게 고귀한 인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도 없이 하룻밤 먹잇감밖에 안 되는 닭하고 어떻게 비교가 되냐 이 말이죠.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차버리는 것은, 예수님 나를 니가 그토록 싫어하는 닭처럼 간주하는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베드로를 통해서, 베드로, 니가 누구냐 하는 것은 예수님이 곧 누구냐를 보여주는 증인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닭과 링크해버려요. 연결시켜요. 닭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주님의 지시대로 움직였다는 겁니다. 두 번 울라고 해서 두 번 울었어요. 예수님이 지시한 닭의 가치는, 재료가 되는 닭 그 자체는 벼슬이 있고 이래 생겼겠죠. 하지만 닭 그 자체를 보지 말고 그 안에 뭐가 담겨있어요? 주님의 예언이 담겼어요. 주님의 예언이. 주님의 제대로 된 피조물 역할을 다하고 있는 거예요. 닭이. 그러니 베드로 이건 뭐냐 이 말이죠.
제가 지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를 했죠. 인간이 인간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됨을 드러내는 이유는 인간이야말로 하나님께 반항할 수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반항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돼요.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는 죽는 그리스도기 때문에. 멋있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는, 이거는 닭을 의식하는 거예요. 돌고래, 코끼리를 의식하는 것이 아니고 못돼먹은 인간을 고려해볼 때나 생각할 수 있는 메시야상입니다. 인간이 배신하고 배반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그리스도의 진가가 이 땅에서, 고난 받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면 이 말은 무슨 말이냐, 고난 받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드러났다는 말은 그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잘난 것 하나도 없다. 잘난 게 하나도 없다는 것으로 완전히 확정이 되겠죠. 그러면 잘난 것 없는 인간이 성령을 받아서 만약에 성도가 된다면, 다른 사람이 성도보고 “니 누구냐?”라고 부르면, “나로 하여금 잘난 것도 없는 인간의 절차를, 그런 과정을 우리에게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수치당해도 마땅합니다, 라는 것을 알려주는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하겠죠. 나는 닭보다 더 못한 인간임을 알려주신 주님을 베드로가 이제 증거 하게 되는 겁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예수님을 차버린다는 그 자체가 베드로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만남에서 멈추고 있던 그것이 만남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겁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응시하는 거예요.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거든요. 자, 구약의 아가서 했죠. 수련회 때 아가 했잖아요. 아가서에서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 사이의 대화를 한번 보세요. 전부다 뒷전보고, 서로 안보면서 이야기하던가요. 서로의 눈을 보죠. 사랑이라는 것은 상호 보고 있는 사이가 사랑인 것입니다. 보고 있는 거예요. 왜? 하나니까.
또 예를 들어볼까요? 같은 예가 세 번이지만. 한쪽 손은 바지 움켜쥐고 손을 흔들어주는 거예요. 손을 흔들어주는 거. 저 위에서 아주머니는 “아저씨! 볼일보고 가세요.” “예. 감사합니다.” “아저씨, 사진 찍을까요?” “찍어도 괜찮아요.” 이런 거. 내가 규정하는 내가 아니라 저쪽에서 보고서 하는 규정에 내가 흔쾌히 나를 헌신해버리는 겁니다. 헌신해버리는 거. 그쪽의 관심에 내가 희생해버리는 거예요. 이게 사랑의 관점입니다. “내가 나를 보는 것은 개무시해주세요. 개무시. 아예 무시해주세요. 당신이 보는 것으로 족합니다. 거기에 제가 그냥 드리겠습니다.” 이래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악마가 너를 노리지만 내가 기도해서 너를 살린다.”라고 할 때, 베드로는 “고맙습니다.”라고 하면 끝나는 문제에요. 지가 자꾸 버티면 안 돼요. 자기 자신이, 내가 어떻게 할 계획이 나오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주께서 그렇게 한다면, 주님께 그것이 내 할 일이라면, 주께서 하는 일에 그냥 내가 헌신하겠습니다. 이러면 될 텐데, “아니 되옵니다. 제가 주님께 목숨 바쳐서 주님 앞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이게 베드로의 일관된 거예요. 일관된 거.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고난 받는다고 하니까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베드로보고 사탄아 물러가라고 했잖아요. 사탄아 물러가라고 했다 이 말이죠.
그 사탄은 베드로로 하여금 귀신들려서 게거품 물게 하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로 하여금 어떠한 만남은 되도 뭐는 용납이 안 된다? 예수그리스도와의 사랑에 연결을 못하도록 악마가 아주 발광을 해요. 발광을. 예수 믿어서 연구는 해라. 신학박사 되어서 연구는 하고 공부는 하되, 서로 마주보며 웃을 수 있는,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는 그것은 못 참겠다. 마귀가 나서서 기어이 훼방 놓고 말겠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로 하여금 사탄에게 그냥 맡겨버렸어요. 사탄이 우는 사자와 같이 베드로를 가지고 놀았으니까.
뭐 예수님께서 베드로보고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아이고, 이 웬수야! 웬수야! 그렇게 니한테 잘해준 게 얼만데, 이제 와서 니가 배신을 하냐?” 이러지 않았죠. 예수님은 그냥 닭과 연결시켜버리는 겁니다. 니는 말을 안 들었지만 닭은 말을 들었다는 거예요. 니는 닭보다 더 못됐어. 왜? 닭은 두 번 울었는데 베드로는 세 번 부인했잖아요. 2+1아닙니까? 하나를 더했어요. 하나 더 나댔다 이 말이죠. 오버한 거예요.
그래서 성경해석을, 우리가 이 본문을 보면서 성경해석을 할 때 가장 기본 되는 것은 뭐냐, 자신의 물질성을 인정하는 겁니다. 인정하는 안목을 가지고 성경을 보는 거예요. 자기의 물질성을. 물질성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은 소극적이다 이 말이죠. 누가 와서 여기에 있는 것을 다른 장소로 옮겨주지 아니하면 무능한 거예요. 베드로 본인이 무능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에서부터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구약성경은 재해석되어야 하죠. 나는 무능하다.
자, 그럼 여기서 좀 더 진도 나가봅시다. 여러분들이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돼버리면 둘 중에 어느 것이 맞는지 한번 물어볼게요. 예수님은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게 맞을까요? 아니면 죽음 자체가 억울했다. 어느 쪽일까요? 도대체 문제 자체가 뭔지, 묻는 취지도 모르겠죠. 딱 폼을 보니까 뭡니까? 억울한 죽음은 아니죠. 왜 그러는가 하면은 인간이 죽는다는 것이 모든 인간에게는 내가 죽는다는 것이 그렇게 분통터지고 억울한 것이거든요. 세월호 타고 가다 자기 자식이 물에 빠졌을 때, 진도 앞바다에 물에 빠졌을 때 “아이고, 주님 잘했습니다.”라고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거예요. 안 죽어야 되는데 죽었다는 겁니다.
그럼 죽음은 뭘 합류하고 있어요? 우리 애가 죽었다는 말은 그냥 죽지 않고 억울해서 죽었다가 되는 거예요. 억울해서 죽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 자체는 억울한가요? 아니면 마땅한가요? 그걸 묻는 거예요. 억울한 겁니까? 마땅한 겁니까? 죽음의 죽음을 마땅하다고 이렇게 정답을 내려줘야, 그 다음부터는 나한테 억울한 것이 손톱만큼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으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어요. 아니, 돌멩이가 돌 되는 그것이 뭐가 억울하고 닭이 닭 되는 것이, 닭 모가지 비트는 게 닭으로서는 그게 뭐가 억울하냐 이 말이죠. 물질밖에 안 되는 인간을 물질로 돌리는 것이, 흙에서 온 것을 흙으로 돌리는 그것이 뭐가 억울하냐 이 말이죠.
주님의 죽으심은 억울하지도 않은 것을 억울하다고 여기는 인간을 위해서, 자기백성을 위해서 죽으신 거예요. 따라서 지금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그 체포와 죽음 당함에 대해서 지금 벌벌 떨면서 맥도 못 추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억울해서 그렇습니까? 자기 죽는 게 억울해서 그래요? 자기 죽는 것이 억울해서 그래요. 예수님께서는 그걸 고쳐야 된다는 거예요. 그걸 고쳐야 돼요. 왜냐하면 베드로 대신 예수님 말씀을 들었던 닭은, 닭이 두 번 울었잖아요. 이게 시끄럽다고 모가지 비틀어서 삼계탕 만들 수가 있어요. 말씀대로 닭이 두 번 울었다고 해서 주께서 닭을 살려둘 이유가, 훌륭한 닭이라고 해서 닭 머리에다가 미스 진 닭이라고 왕관 씌우고 할 이런 일이 없어요.
누가 중요하냐 하면은 닭이 중요하지 않고 닭을 사용하신 주님이 더 중요한데, 문제는 인간들이 자기가 자꾸 죽는 것이 억울하다고 생각을 하니까 이게 가리어지는 거예요. 예수님의 소중함이 나의 소중함 때문에 훼방되고 가리어지는 것이, 이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할 때는 물질로 해석을 해야 되는 거예요. 이 말은 현재 내가 소중하다는 그 자리를 벗어나서 예수님이 응시하는 그 응시의 대상으로 자기를 바라볼 수 있어야 돼요. 내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식으로 하면 안 되죠. 왜? 인간은 자꾸 자기가 억울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내 억울함을 품고 예수님을 바라다보면 예수님은 그냥 내 한을 풀 때만 유용한 예수가 되어가지고 이거는 만남에 머물지 연결이 안 돼요.
만약에 옷을 멋있게 신사복 차려입고, 머리도 아주 멋있게 박새로이 머리처럼, 박새로이 모르죠? 아주 멋있게 번쩍번쩍해가지고 이래서 아파트 베란다에 장미 한 송이 입에 물고, 잘 물어야 돼요. 안 그러면 장미가시 찔려요. 물고, 베란다에 있는 앞치마 입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줄리엣 에게 손을 얹는 것, 이거는 얼마든지 연출할 수 있거든요. 둘 다 잘난 체하니까. 아까 그 예가 중요한 게 잘난 체 할 게 뭐 없잖아요. 성경해석 할 때, 응시할 때 멋있는 주님을 응시하는 이거는 환상에 불과합니다. 그런 예수님은 마귀가 만들어낸 장난감 같은 예수님이에요. 그거는 장난감이에요.
진짜 예수님은 이사야 53장의 말씀처럼 모든 사람이 외면해버리는 거예요. 꼴 보기 싫다고. 유용하지 않다고 해서, 쓸모 짝이 없다고 해서 외면해버리는 거예요. 지금 베드로는 그렇게 예수님하고 친하게 지냈지만 베드로가 이 순간에 예수님을 외면한 이유가 뭡니까?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죠. 자기한테 지금 맥없이 죽는 저 예수는 유용하지 않는 거예요. 그럼 그동안 베드로는 뭡니까? 평소에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을 계속 뭐로 생각하느냐 하면은 나한테 언젠가는 유용할 수 있는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뭔가 내다보면서, 어떤 고대를 하면서, 예수님의 가치를 계속 얻고자 하는 자기 기대감, 그 때문에 계속 예수를 만나준 거예요.
왜냐 하면은 예수를 계속 만나야 자기가 뭐가 되기 때문에? 멋있게 되기 때문에. 자기가 잘되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가면 열두 보좌에 앉아서 다스릴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기 머리가 닭대가리밖에 안 된다는 그것을 생각 못한 겁니다. 베드로의 복은 뭐냐 하면은 내가 저 닭보다 더 못하다는 거예요. 저 닭보다 더 못한 거예요. 닭보다 못하기 때문에 제대로 이제는 예수님을 해석할 수 있고, 증거 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거예요. 바라볼 수 있는 거예요. 그게 필수 절차가 그래요. 필수 절차가. 필수 코스가 그런 거예요. 어떤 사람의 글처럼 우리 딸 애 방에 들어가면 다 쓰레기다. 그걸로 그 글은 끝났어요. 그 글은 끝났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그런 글을 쓰겠습니까? 신학을 드러내기 바쁘지.
이것이 바로 자기파괴죠. 자기파괴. 인간은 절대로 자기를 파괴시키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주님이 자기파괴를 예수님의 자기계보, 자기계열에다가 베드로를 강제로 응시하면서 집어넣으니까 주님의 자기파괴 안에 베드로도 덩달아 같이 파괴동창생이 되어가지고 하나의 링크가, 연결이 돼버렸어요. 예수님이 여기 계시고 예수님께서 지시를 했습니다. 예수님의 지시인데, 누구한테 했는가 하면은 닭에게 지시를 내렸어요. 그러면 닭에게 예수님께서 지시를 내렸다 이 말이죠. 그러면 닭한테는 하라고 이야기하고 베드로한테는 안 된다고 지시를 내렸죠. 베드로한테는.
그러면 하라 하는 것과의 취지는 무엇과 만나야 되느냐 하면은, 왜 안 되는 것은 왜 안 되는 것인지 그것과 하나의 세트를 이루어서 만나줘야 이 하라의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하라는 것은 예수님의 원하신 바이고. 하지마라, 안 된다는 것은 그것은 예수님,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야. 네 계보, 네 계열은 내 나라 천국에서는 용납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안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하라, 안 된다는 만남에서 종합된 것이 있을 거예요. 종합된 게. 종합된 게 누구냐 하면은 바로 사도로서 베드로가 되겠죠.
그러면 다른 사람이 베드로 너 누구야? 라고 할 때에, 베드로는 나는 주님한테 이렇게 당했던 자라고 하는 그 말도 옳고요. 이 소자한테, 베드로한테 한 것이 곧 누구한테 한 것이다? 나에게, 예수님인 나에게 한 것이다, 라는 이런 공식이 성립이 된 거예요. 사람은 이렇게 나타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의 손에 나타나지 않죠. 들쭉날쭉 이잖아요. 인간이 예수님의 부활을 잡을 수가 있습니까? 못 잡죠. 제가 주일에 그런 말씀했잖아요. 나를 잡지 말라고요. 니가 잡을 대상이 아니다. 내가 니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이 말이죠. 인간의 세계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거든요. 그러니까 베드로보고 닦달내고 사도바울보고 시비를 걸고 오늘날 성령 받은 성도보고 닦달 내는 거예요. “니 뭐 잘났어?” “나 못났어.” “어느 정도?” “닭보다도 나는 못났어.”
하지만 안 된다는 이것도 결국 뭐냐, 어디에 포함이 됩니까? “너는 이렇게 되어야 돼.” 이것에 포함되는 내용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아, 나는 안 되는구나! 그래서 나는 됐구나! 내가 예수를 못 믿는구나! 그래서 내가 성도구나! 내가 예수를 못 믿기 때문에 성도구나!’ 그래서 나라는 자체가 주의 증인되는 그 구성요소 속에, 바로 나는 그냥 유용하려고 믿었는데 그게 아주 개박살 난 거예요. 그게 파괴된 거예요. 작살난 거죠. 유용에서 응시를 하면서, 내 잘남을 응시한 것이 아니라 내가 숨기고 싶은, 이건 내가 들키고 싶지 않은, 이런 것이 노출되면서 주께서 쓰신다는 사실입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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