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닭 20032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4. 8. 08:55
2020-03-27 22:45:09조회 : 240         
닭 마가복음 14:72 200327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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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70.138)20-04-08 00:56 
광주강의20200327a 마가복음14장 72절(닭)-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4장 72절입니다.

72절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그렇게 되어 있죠. 사람이 “내가 누구냐?”라는 질문 안에는 나만 들어있어요. “내가 누구냐?”하는 그것에는 자기 자신만 들어있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자기백성 제자들을 통해서, “내가 누구냐?” 안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은, 주님이 누구신가가 포함되도록 하는 겁니다. 주님이 누구신가? 라는 것은 너희들이 나중에 부활되고 난 주님보고 물을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내 백성이라고 지정한 그 사람한테 가서 물으라는 거예요. 뭐라고 묻느냐 하면은 “베드로님! 당신이 누구십니까?”라는 질문과 “주님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과 같은 질문이 되게 만들어요.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거든요.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라는 것과 똑같은 원칙입니다.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그 이야기와 주님이 누구신가와 같이 하도록 주님께서는 여기 공작, 작업을 벌이시는 겁니다. 작업을. 작업을 벌이는데, 작업을 벌이려면 이 관계가 서로 링크되어야 하겠죠. 연결되어야 하는 겁니다. 연결된다는 말을 이렇게 쉽게 생각하는데, 그냥 만났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만났지만 연결되지 않은 사람이 훨씬 더 많아요. 만났지만. 심지어 30년 만났지만 연결되지 않은 사람도 굉장히 많습니다. 십자가마을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지만. 만났는데, 아는 사람인데, 식사도 같이 했는데 연결되지 않은 경우가 있어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먼저 찾아왔죠. 베드로가 고기 잡는 사람이지만 주님이 누구신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베드로에게 먼저 연결을 시도한 겁니다. 근데 베드로는 연결로 보지 않고 뭐로 보느냐 하면은 단순한 만남으로 본 거예요. 만남으로. 마태복음 17장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해같이 영광스럽게 되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됐습니다. 나 여기서 살래요.” 이렇게 나왔다 이 말이죠. 그랬던 베드로가 산 밑에 내려와서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나 저 사람 모른다.” 71절에 보면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만났죠. 분명히 만났는데 뭐가 안 됐습니까? 연결이 안 됐습니다. 어느 정도 연결이 되어야 하느냐 하면은 내가 이런 사람이다, 라는 그 내용 안에 공히, 같이 주님은 이런 분이다, 라는 것으로 연결되는 그러한 내용이 현재 베드로에게 없어요. 지금 베드로는 계속해서 뭘 주장하느냐 하면은 자기 계보를 계속해서 고집하고 있습니다. 자기계보, 자기계열, 내 중심의 계열. 그걸 고집하고 있어요. 자기계보, 자기계열을 이렇게 고집하게 되면 여기에 뭐가 생기느냐 하면은, 보통 자기계열은 누구겠어요? 나와 관련되어 있는 내 자녀, 내 손자손녀, 내 부모, 1촌간, 2촌간, 8촌간, 이게 계열이잖아요. 나머지는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게 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 계열과 자기계보를 고집하는 순간 뭐가 발생되겠어요? 자기계열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자기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자기원수. 예수님도 자기백성이 아니면 나머지기는 뭐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저주받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보면 여러분들이 다 아시다시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 다음이 뭡니까?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되어 있죠.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하고 편지를 썼잖아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이런 말을 한 것 자체가 사도바울이 뭇매를 당해도 마땅합니다. 이거는 뭐 사람한테 짓밟혀도 마찬가지에요.

만약에 4월 15일에 대선 투표하는데 투표장에 가서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면 투표함가지고 얻어맞고 질질 끌려 나가고 짓밟혀도 너무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너무 과격해. 너무 과격해요. 사도바울이 이런 저주라는 단어와 주를 사랑하지 않는 단어와 이렇게 연결시킬 때, 어떤 사람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이미 사도바울 입장에서는 확정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 그런 것 필요 없어요.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이미 확정 났어요. 저주받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이 원리를 모든 인간들이 뭘 챙기고 있습니까? 살아가는 게 자연스럽든 인위적이든 지금 뭘 챙기고 있어요? 자기계보 자기계열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런 아지트를 아주 고상한 말로 해서 가정이라고 합니다. 가정. 컴백 홈! 하잖아요. 컴백 홈Come Back Home! 집으로! 내 가정 내 집이다 이 말이죠. 내 가정, 내 집은 내 계보와 내 계열과 관련되어 있는, 구성되어 있는 구성원이거든요. 그런데 사도바울이 말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그 확정된 저주를 집어넣어버리세요.

그러면 뭘 깨는 겁니까? 여기 내 계보, 내 계열은 서로서로 사랑하기라는 원칙이, 기본원칙이 거미줄처럼 촘촘히 깔려있는데, 그 모든 관계가 결국 예수님 앞에서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저주를 형성하는, 그러한 공장생산라인처럼 그렇게 느껴지는 거예요. 우리가 실컷 우리끼리 사랑했는데 나오는 생산물은 뭐였다? 저주였다. 이토록 과격한 말을 지금 함부로 하니, 사도바울은 목베어죽으나 맞아죽으나 죽는 것은 너무나 이 땅에서 당연한 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날 죽이라고 아주 환장하신 것처럼, 모든 내뱉는 언사가, 언동이, “이래도 나를 안 죽여? 이것들아! 아직도 너희들이 언제까지 참을 거냐?” 이런 식이에요. “너희들 본심에 준하면 나는 멀쩡하게 있을 수 없는데. 아니, 본심대로 해! 본심대로. 너희들이 추구하는 것 있잖아. 니 계보, 니 계열.”

지금 한진 그룹 회장 뽑는 거 선거하고 있죠. 유력한 후보가 누구냐 하면은 땅콩회항한 조현아 하고 오빠 조원태, 남매들 있죠. 이쪽이 총수가 될 가망성이 많다는 거예요. 왜? 자기계열, 자기 계보잖아요. 그런데 자기계보, 자기계열에는 누가 포함이 되었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수제자인 베드로도 여기에 포함이 되어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연결이 뭔지도 모르고 예수님을 만난 거예요. 만났으니까, 베드로는 자기 만남의 한계가 자기계보, 자기계열을 유지하는데 만남이 유용하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하나 쓸게요. 유용성. 다시 말해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유용하다, 무용하다? 유용하게 필요하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어디에 필요합니까? 내 계보를 유지하고 내 계열을 유지하는데 유용하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연결이에요? 만남이에요? 그냥 만난 거예요. 자, 연결, 만남이라고 하니까 좀 어려운데, 그러면 이걸 좀 더 어렵게 해보겠습니다. 좀 더 어렵게. 응시. 응시라는 말을 쉽게 하면 쳐다보는 게 응시죠. 자세히 보든 상세히 보든 쳐다보는 거. 둘이 만났을 때 서로 응시했다. 그러면 이거는 연결이 아니고 만남이에요. 그냥. 그냥 만난 거예요. “안녕하세요?” “예” “다음에 연락합시다.” 만난 거죠. 그런데 강의 초반부터 좀 지저분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만, 여러분이 좀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공원에 가면 노인네들 운동하라고 운동기구들이 나와 있죠. 공원에.

공원에서 운동하다가 어떤 어르신네가 보니까 화장실은 없고 해서 그냥 용변을 보고 있다 이 말이죠. 용변을 보고 있는데 그 옆에 있는 아파트에서 어떤 아줌마가 베란다 문 열고 그걸 지켜보고 있는 거예요. 둘 다 눈이 마주쳤어요. 그러면 이거는 만남입니까? 응시입니까? 문제가 너무 어려운데, 이거 만남이겠어요? 응시에요? 만남입니까? 연결입니까? 만남이죠. 한참 용변보고 있고 아주머니도 그걸 지켜보고 있다 이 말이죠. 근데 그 어르신네가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줬을 때, 한쪽은 바지 쥐고 있고 한쪽은 손 흔드는 게 되잖아요. 그 아주머니도 손을 흔들어주면 그거는 만남입니까? 연결입니까? 연결인 거예요. 연결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수치를 내용으로 집어넣었기 때문에.

주님보시기에 베드로는 기껏 해봐야 만남밖에 안 돼요. 왜냐하면 뭘 고집하느냐 하면은 자기계보, 자기계열을 정당한 것으로 우수한 것으로 지킬만한 것으로 자기계열, 자기계보를 지키는 겁니다. 내가 이 가족과 계열이 또 나라는 자체가, 내가 소중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 연결이 아니고 만났을 때 예수님을 필요 없다가 아니고 유용한 것으로 본 거예요. 유용하게 봤는데 어떤 순간이 왔을 때, 예수님이 체포가 되니까 이 유용성을 뭐로 바꿨습니까? 이 유용성의 반대말이 뭐예요? 무용성이죠. 어느 순간, 변화산에서는 예수님을 유용하게 봤는데, 예수님이 체포되는 그 현장에 갔을 때는 갑자기 유용한 것이 아니고, 나한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나한테 흠집이 될 수 있는 사람으로 간주한 거예요.

그러니까 연결됐으면 못 끊는데, 볼 것 다 봤거든요. 손들고 웃었잖아요. 웃었는데, 이게 그냥 만남이 돼버리면 유용할 때는 채택이 되다가 무용할 때는 나는 이 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으로 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미션 임파서블 초반에 나오는 것처럼 “이 테이프는 5초 내에 자동 폭파됩니다.”, “이 사명에 대해서 우리는 모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제5전선 빰빰빰빰~~~ 베드로가 나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어요. 71절에 보면 베드로가 그냥 모른다고 한 게 아니고 강조합니다. 저주하여 맹세하되 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 그러면 유용한 예수님을 그냥 만남의 요소에서, 리스트에서 빼버리면 남는 게 뭐냐 하면은 내 계보, 내 계열은 내가 알아서 지킨다가 되겠죠.

베드로가 이러한 태도가 돼버리면, 아까 제가 처음에 말씀드린 “내가 누구냐?”에서는 주님의 누구냐가 없고 내가 누구냐, 라는 그걸로 모든 의미가 종결됩니다. 내가 누군데? 끝. 왜? 주님은 나는 모르는 거니까.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내가 누구냐, 라는 것은 안다. 끝. 이래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마가복음 14장 70절로 해서 72절까지는 우리한테 상당히 중요한 대목인데요.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은, 베드로를 뭐로 보느냐 하면은, 베드로의 위치, 자리가 무슨 자리냐 하면은 이게 불신자의 자리로 주님께서 그렇게 정해놓아 버렸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베드로가 예수님하고 3년 동안 같이 있었잖아요. 3년까지 있었는데 주님께서는 뭐로 본다? 불신자로 보는 거예요. 불신자로 보는 절차를 주님 쪽에서 시행했다는 점이 오늘 본문에서 중요합니다. 누구든지 불신자가 되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자기를 신자라고 여긴다면 이거는 베드로 자기의 계보에 지나지 않고 자기의 계열에 지나지 않아요. 자기계보, 자기계열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링크가 안 돼요. 연결이 안 돼요. 그냥 유용 하냐, 무용 하냐, 그걸 따져가지고 내 계보나 착실하게 그걸 다지려고 생각하지, 예수님이 나한테 필요하며 믿고 안 필요하면 안 믿겠다는 자기 것을 고수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은 베드로를 통해서 보여주는 불신자의 자리죠. 그럼 제가 아까 이야기한, 베드로 나는 누구냐가 그 다음에 누가 돼요? 예수님이 누구냐가 되죠. 그럼 예수님이 누구냐, 라는 말과 베드로 나는 이런 인간이다, 라는 말에는 베드로의 이런 불신요소가 하나의 내용으로 필수적으로 담겨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중요한 거예요. 주께서는 불신자를 구원하시는데, 불신자를 구원한 때는 불신자다워야 하거든요. 그 역할을 누가 맡느냐 하면은 베드로가 맡는 거예요. 근데 베드로는 자기가 그런 역할이 있다는 사실을 감히 못해보죠. 못하죠.

베드로 본인이 뭔가, 내가 남들처럼 살아가는 것, 다시 말해서 나는 나 자신의 고귀함을 지킨다는 이것이, 이 자체에 복음의 내용이 담겨있으려면 남들처럼 살아가는 이 자체가 뭐가 되느냐 하면은 부끄러움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부끄러움이. 베드로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 저분은 주님이십니다, 라는 말을 못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부끄럽기 때문에. 이 부끄러움은 어떻게 보면 자기방어처럼 보이죠. ‘아이고, 부끄러워라.’ 부끄러움은 자연적으로 움츠러들고 자기방어가 되죠.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부끄럽다고 소극적으로 숨는 모습을 보입니다. 숲속에 숨었고 그리고 가렸고. 그런데 마가복음의 베드로에게서는 이 부끄러움이 뭐냐 하면은 소극적인 것이 아니고 주님에 대한 공격성의 하나의 기저, 토대가 되는 거예요. 이 부끄럽다는 게. 부끄럽다는 게 겸손이고 소녀답다는 게 아니라, 이게 주님의 가치를 저돌적으로 대들게 하는 요소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요소에 대해서는 베드로 자신이 감당 못합니다. 왜냐하면 부끄럽다는 것은 본인의 이성의 판단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거지, 나 이제부터 부끄러워볼까? 이런 거 없거든요.

온 몸 자체가 부끄럽기 때문에 사람들이 있는 공개석상에서 나는 예수님을 안다고 차마 말 못하겠다는 겁니다. 왜? 이야기하려니까 부끄럽고 두렵고 뭐 그렇다는 거예요. 부끄럽고 두렵다는 이것은 결국 뭐냐 하면은, 이거는 본인도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부끄러움을 우리가 아는 단어로 하면 이게 뭡니까? 수치죠. 주님이 어떤 존재였다? 수치스러운 존재다. 그래서 베드로가 성령 받고 난 뒤에, 사도가 되고 난 뒤에 베드로 너는 누구냐? 라고 할 때에,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고 말한 게 아니고 나는 예수님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본성을 지닌 존재였습니다, 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주님의 부끄러움이 나의 부끄러움을 덮어줘서 구원받은 겁니다. 이래 되겠죠.

만인이 다 부끄럽다고 여기는, 베드로 본인도 부끄럽게 여기고, 모든 사람이 다 부끄럽게 여기고. 그걸 로마서 1장에서는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부끄러운 것이나 오히려 복음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주님을 공격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그것을 자랑으로, 주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부끄러움을 당하심을 자랑하는 거예요. 부활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사람에게 버림받았다는 그 자체가 즐겁고 고맙고 감사한 겁니다. 그 자체가. 사람에게 버림받았다는 그 자체가 주님의 수치 당하심 앞에서 나의 수치는 수치도 아님을 아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하지만 베드로에게 주님이 찾아온 것은 베드로 나는 이런 인간이다, 라는 것이 아니고 이런 인간이라는 것을 통해서 그 안에 예수님이 진정 누구였던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님을 그냥 이런, 나중에 성령이 와서 예수님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없으면 예수님에 대한 모든 신학과 모든 그것들은 하나의 그냥 지식이 돼버려요. 그래서 고맙습니다가 없으면, 고맙습니다가 없는 상태에서 성경을 천 독, 만 독, 해도 그것은 지식이에요. 자기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한 하나의 링크가 아니고, 연결이 아니고 그냥 만남이에요.

아까 예를 다시 부끄러운 예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그 아주머니가 어르신네의 용변 보는 것을 볼 때에, 그 어르신네가 ‘어머나 내가 챙기지 못했구나!’해서 후다닥 자크 올린다고 하다가 찔려가지고 아프고, 이렇게 당황스러운 것이 아니고 손을 흔든다는 것. 이것은 뭐냐 하면은 주님의 응시니까, 서로 보고 있으니까, 보고 있는 주님을 보고 자기 수치스러움을 내놓고 손을 흔드는 거예요. 그 응시는 어떤 응시냐 하면은 하나 됨을 확인하는 응시. 보고 계시는데 그냥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 됨을 위한 연결로서 보고 계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수치가 더 이상 복음 앞에서는, 주님 앞에서는, 십자가 앞에서는 부끄러운 이유가 전혀 없죠. 부끄러울 이유가. ‘아이고, 내가 이런 짓을 하다니!’ 그렇게 호들갑떨 이유가 하나도 없다니까요. 오늘 마가복음 14장에서는 지금 베드로는 주님과 헤어질 작심을 합니다. 헤어질 작심을. 헤어져야 나머지기 자기의 고귀한 자기계보와 자기계열만큼은 자기가 챙길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여러분들이 그 다음 논리를 아시겠죠. 베드로를 불신자 되도록, 베드로를 예수님 쪽에서 빠이빠이 하려고, 그냥 우리는 연결된 적이 없고 그냥 한때 만났습니다, 하는 정도로, 여기서 갈라서려고 하는 이 베드로를 주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다시 하나로 연결시키느냐, 그게 중요한 내용이 되어야 되겠죠. 그건 뭐냐 하면 바로 인간은 자신을 물질로 보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신을 물질로 보지를 않아요. 인간은 자신을 뭐로 보느냐 하면 신비로운 존재로 봐요. 신비로운 존재. 그게 영적인, 절대적인, 신처럼 행세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면 안 돼!” 그러면 안 건드리면 되죠. 근데 안 건드리고 욕을 하게 되면, 건드린 것처럼 마찬가지로 화가 나죠. 이게 좀 어렵습니까? 좀 쉽게 해보겠습니다. 화가 왜 나느냐? 아니, 화를 왜 냅니까? 화를 왜 내죠? 어떤 때 화를 냅니까? 그거는 내가 생각하고 품고 있던 내 가치를 충족시키지 않을 때 화가 나는 거예요. 충족시키지 않을 때.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죠.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데, 그러면 교인들은, 성도가 아니고 교인들입니다. 교인들은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저주받으니까,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받으니까 사랑하기로 마음을 먹죠. 사랑하기로 마음을 먹으면서 속으로 뭐냐 하면은 분노와 화를 억누르고 있습니다. 억누르게 되는 겁니다. 사랑한 댔잖아요. 사랑하잖아요. 얼굴은 전혀 사랑하지 않는데 말은 지금 큰소리를 치고 있어요. 그거는 왜 그러냐 하면은, 왜 나에게 저주라는 단어를 왜? 나는 그 단어를 싫어하는데 왜 그 단어를 나한테 강요하느냐? 그 말이거든요. 그래서 화가 나는 거예요.

그렇다면 저주라는 말을 사람들은 뭐냐 하면은, 저주라는 것은 현재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못한 것을 가지고 저주받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보다 더 못한 거. 그러면 인간이 자신을 물질로 보는 것. 흙이라든지, 돌멩이라든지, 이 돌대가리야! 이런 것은 애들도, 한 살 먹은 애들은 잘 모르지만 나머지기 그 다음 애들은 다 알잖아요. 돌대가리, 물질로 표현하는 이런 것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잖아요. 물질로 볼 때 인간은 수치를 느끼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지금 뭘 사용했느냐 하면은, 주님께서 사용한 것은 불신자인, 자기밖에 모르는 베드로를 지금 주님과 하나로 연결시켜서 자기 힘으로 안 되는 구원을 어떻게 시키느냐, 그걸 지금 보여주는 거예요.

뭐로 보여주느냐 하면은, 물질로 보여주는 것을 닭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닭. 이 닭대가리야! 오늘 강의제목은 닭입니다. 뭐 두자, 세자 할 것도 없어요. 그냥 닭이에요. 닭은 사람보다 못하다는 그것이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닭은 함부로 할 수도 있어요. 목을 비틀 수도 있어요. 먹을 수도 있어요. 닭한테 그다지 애정을 줄 필요도 없어요. 그런데 이 닭이 예수님이라면, 중간에 논리를 하나 집어넣으면 예수님이 베드로를 빼고, 베드로 계열 말고 닭 계보를 찾으신다면? 닭 계보를 만드신다면? 나의 닭들아! 닭의 계열을 한다면? 결국 이것은 베드로가 주님을 배신할지라도 주님이 자기 백성 만들기에는, 니가 배신할지라도 중지되거나 멈춰지지 않는다고 본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하시는 그 말씀을 베드로는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겠죠. 누가복음 거기에 나오잖아요. 여러분들이 안 봐도 다 아시죠. “베드로야! 사탄이 지금 너를 삼키려고 부르짖고 있다. 하지만 내가 기도함으로서 니가 보호받는다.” 이렇게 하니까, “주님, 주님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내가 알아서 주님한테 목숨 바치도록 이미 결심과 각오를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결심이 돼있습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는 인간인 예수님과, 그 당시에 예수님이 인간이셨으니까, 인간인 예수님과 인간인 베드로 사이에 의리죠. 의리. 의리 만남이라는 말이죠. 인간 대 인간들끼리, 서로 말 통하는 인간들끼리 얼마든지 해결할 문제다 이래 생각하는 거예요.

나라는 인간이 주님이라는 하나의 인간을 만날 때, 소위 서로 의사소통을 통해서 충분히 이 모든 구원문제나 천국 가는 문제가 해결된다고 자부한 거예요. 베드로가. 여기에 제 3자가 끼어들 틈이 없어요. 돌멩이가 끼어든 것은 세례요한한테나 하는 소리지. 돌멩이 같은 거 필요 없고 개돼지 같은 거 필요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갑자기 예수님과 인간인 베드로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그중에 뭐를 삽입해버려요? 닭을 집어넣는다고요. 닭을. 닭을 집어넣어버렸어요. 예수님의 링크가, 예수님의 연결고리가 베드로 생각에는 예수님과 자기는 하나라고 생각한 거죠. 좋게 지냈으니까. 물위까지 걸었고 여러 가지 기적을 베풀어줬으니까 얼마나 대단해요.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 자신의 계열과 계보를 굉장히 고귀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주께서 챙겨줬으니까. 주께서 챙겨주심이 있으니까.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그동안 받은 것이 이만큼 많은데 우리가 예수님을 배신할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니 배신이야. 배반하는 거야” 송강호처럼 이런다고요. 배신할 이유가 없어요. 갑자기 개그가 왜 나와. 웃지도 않는 개그. 주님을 왜 배신해요? 주님과 우리는 하나인데. 근데 하나인데 그게 연결이 아니고 뭡니까? 베드로 본인이 고귀한 거예요. 본인이. 본인이 소중해서 본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유용하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악착같이 주님을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베드로 계열이 작살이 나버리고 어느 계열로 빠집니까? 닭 계열로 빠져버려요. 예수님이 하는 모든 예언과 모든 그것은 나를 통해서 나타난 것이 아니고 닭을 통해서 나타난 거예요. 아니, 닭은 삼계탕이나 끓여먹으면 되지, 왜 닭을? 고귀한 인간이 있는데 인간은 놔두고 주께서는 베드로 대신에 닭을 그 자리에 집어넣느냐 이 말이죠. 닭은 모든 인간에게, “이 닭 같은 인간아!”라고 하면 자기에 대한 수치로 보거든요. 수치. 어떻게 고귀한 인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도 없이 하룻밤 먹잇감밖에 안 되는 닭하고 어떻게 비교가 되냐 이 말이죠.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차버리는 것은, 예수님 나를 니가 그토록 싫어하는 닭처럼 간주하는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베드로를 통해서, 베드로, 니가 누구냐 하는 것은 예수님이 곧 누구냐를 보여주는 증인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닭과 링크해버려요. 연결시켜요. 닭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주님의 지시대로 움직였다는 겁니다. 두 번 울라고 해서 두 번 울었어요. 예수님이 지시한 닭의 가치는, 재료가 되는 닭 그 자체는 벼슬이 있고 이래 생겼겠죠. 하지만 닭 그 자체를 보지 말고 그 안에 뭐가 담겨있어요? 주님의 예언이 담겼어요. 주님의 예언이. 주님의 제대로 된 피조물 역할을 다하고 있는 거예요. 닭이. 그러니 베드로 이건 뭐냐 이 말이죠.

제가 지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를 했죠. 인간이 인간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됨을 드러내는 이유는 인간이야말로 하나님께 반항할 수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반항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돼요.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는 죽는 그리스도기 때문에. 멋있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는, 이거는 닭을 의식하는 거예요. 돌고래, 코끼리를 의식하는 것이 아니고 못돼먹은 인간을 고려해볼 때나 생각할 수 있는 메시야상입니다. 인간이 배신하고 배반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그리스도의 진가가 이 땅에서, 고난 받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면 이 말은 무슨 말이냐, 고난 받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드러났다는 말은 그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잘난 것 하나도 없다. 잘난 게 하나도 없다는 것으로 완전히 확정이 되겠죠. 그러면 잘난 것 없는 인간이 성령을 받아서 만약에 성도가 된다면, 다른 사람이 성도보고 “니 누구냐?”라고 부르면, “나로 하여금 잘난 것도 없는 인간의 절차를, 그런 과정을 우리에게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수치당해도 마땅합니다, 라는 것을 알려주는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하겠죠. 나는 닭보다 더 못한 인간임을 알려주신 주님을 베드로가 이제 증거 하게 되는 겁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예수님을 차버린다는 그 자체가 베드로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만남에서 멈추고 있던 그것이 만남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겁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응시하는 거예요.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거든요. 자, 구약의 아가서 했죠. 수련회 때 아가 했잖아요. 아가서에서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 사이의 대화를 한번 보세요. 전부다 뒷전보고, 서로 안보면서 이야기하던가요. 서로의 눈을 보죠. 사랑이라는 것은 상호 보고 있는 사이가 사랑인 것입니다. 보고 있는 거예요. 왜? 하나니까.

또 예를 들어볼까요? 같은 예가 세 번이지만. 한쪽 손은 바지 움켜쥐고 손을 흔들어주는 거예요. 손을 흔들어주는 거. 저 위에서 아주머니는 “아저씨! 볼일보고 가세요.” “예. 감사합니다.” “아저씨, 사진 찍을까요?” “찍어도 괜찮아요.” 이런 거. 내가 규정하는 내가 아니라 저쪽에서 보고서 하는 규정에 내가 흔쾌히 나를 헌신해버리는 겁니다. 헌신해버리는 거. 그쪽의 관심에 내가 희생해버리는 거예요. 이게 사랑의 관점입니다. “내가 나를 보는 것은 개무시해주세요. 개무시. 아예 무시해주세요. 당신이 보는 것으로 족합니다. 거기에 제가 그냥 드리겠습니다.” 이래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악마가 너를 노리지만 내가 기도해서 너를 살린다.”라고 할 때, 베드로는 “고맙습니다.”라고 하면 끝나는 문제에요. 지가 자꾸 버티면 안 돼요. 자기 자신이, 내가 어떻게 할 계획이 나오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주께서 그렇게 한다면, 주님께 그것이 내 할 일이라면, 주께서 하는 일에 그냥 내가 헌신하겠습니다. 이러면 될 텐데, “아니 되옵니다. 제가 주님께 목숨 바쳐서 주님 앞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이게 베드로의 일관된 거예요. 일관된 거.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고난 받는다고 하니까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베드로보고 사탄아 물러가라고 했잖아요. 사탄아 물러가라고 했다 이 말이죠.  

그 사탄은 베드로로 하여금 귀신들려서 게거품 물게 하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로 하여금 어떠한 만남은 되도 뭐는 용납이 안 된다? 예수그리스도와의 사랑에 연결을 못하도록 악마가 아주 발광을 해요. 발광을. 예수 믿어서 연구는 해라. 신학박사 되어서 연구는 하고 공부는 하되, 서로 마주보며 웃을 수 있는,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는 그것은 못 참겠다. 마귀가 나서서 기어이 훼방 놓고 말겠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로 하여금 사탄에게 그냥 맡겨버렸어요. 사탄이 우는 사자와 같이 베드로를 가지고 놀았으니까.

뭐 예수님께서 베드로보고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아이고, 이 웬수야! 웬수야! 그렇게 니한테 잘해준 게 얼만데, 이제 와서 니가 배신을 하냐?” 이러지 않았죠. 예수님은 그냥 닭과 연결시켜버리는 겁니다. 니는 말을 안 들었지만 닭은 말을 들었다는 거예요. 니는 닭보다 더 못됐어. 왜? 닭은 두 번 울었는데 베드로는 세 번 부인했잖아요. 2+1아닙니까? 하나를 더했어요. 하나 더 나댔다 이 말이죠. 오버한 거예요.

그래서 성경해석을, 우리가 이 본문을 보면서 성경해석을 할 때 가장 기본 되는 것은 뭐냐, 자신의 물질성을 인정하는 겁니다. 인정하는 안목을 가지고 성경을 보는 거예요.  자기의 물질성을. 물질성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은 소극적이다 이 말이죠. 누가 와서 여기에 있는 것을 다른 장소로 옮겨주지 아니하면 무능한 거예요. 베드로 본인이 무능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에서부터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구약성경은 재해석되어야 하죠. 나는 무능하다.

자, 그럼 여기서 좀 더 진도 나가봅시다. 여러분들이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돼버리면 둘 중에 어느 것이 맞는지 한번 물어볼게요. 예수님은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게 맞을까요? 아니면 죽음 자체가 억울했다. 어느 쪽일까요? 도대체 문제 자체가 뭔지, 묻는 취지도 모르겠죠. 딱 폼을 보니까 뭡니까? 억울한 죽음은 아니죠. 왜 그러는가 하면은 인간이 죽는다는 것이 모든 인간에게는 내가 죽는다는 것이 그렇게 분통터지고 억울한 것이거든요. 세월호 타고 가다 자기 자식이 물에 빠졌을 때, 진도 앞바다에 물에 빠졌을 때 “아이고, 주님 잘했습니다.”라고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거예요. 안 죽어야 되는데 죽었다는 겁니다.

그럼 죽음은 뭘 합류하고 있어요? 우리 애가 죽었다는 말은 그냥 죽지 않고 억울해서 죽었다가 되는 거예요. 억울해서 죽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 자체는 억울한가요? 아니면 마땅한가요? 그걸 묻는 거예요. 억울한 겁니까? 마땅한 겁니까? 죽음의 죽음을 마땅하다고 이렇게 정답을 내려줘야, 그 다음부터는 나한테 억울한 것이 손톱만큼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으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어요. 아니, 돌멩이가 돌 되는 그것이 뭐가 억울하고 닭이 닭 되는 것이, 닭 모가지 비트는 게 닭으로서는 그게 뭐가 억울하냐 이 말이죠. 물질밖에 안 되는 인간을 물질로 돌리는 것이, 흙에서 온 것을 흙으로 돌리는 그것이 뭐가 억울하냐 이 말이죠.

주님의 죽으심은 억울하지도 않은 것을 억울하다고 여기는 인간을 위해서, 자기백성을 위해서 죽으신 거예요. 따라서 지금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그 체포와 죽음 당함에 대해서 지금 벌벌 떨면서 맥도 못 추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억울해서 그렇습니까? 자기 죽는 게 억울해서 그래요? 자기 죽는 것이 억울해서 그래요. 예수님께서는 그걸 고쳐야 된다는 거예요. 그걸 고쳐야 돼요. 왜냐하면 베드로 대신 예수님 말씀을 들었던 닭은, 닭이 두 번 울었잖아요. 이게 시끄럽다고 모가지 비틀어서 삼계탕 만들 수가 있어요. 말씀대로 닭이 두 번 울었다고 해서 주께서 닭을 살려둘 이유가, 훌륭한 닭이라고 해서 닭 머리에다가 미스 진 닭이라고 왕관 씌우고 할 이런 일이 없어요. 

누가 중요하냐 하면은 닭이 중요하지 않고 닭을 사용하신 주님이 더 중요한데, 문제는 인간들이 자기가 자꾸 죽는 것이 억울하다고 생각을 하니까 이게 가리어지는 거예요. 예수님의 소중함이 나의 소중함 때문에 훼방되고 가리어지는 것이, 이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할 때는 물질로 해석을 해야 되는 거예요. 이 말은 현재 내가 소중하다는 그 자리를 벗어나서 예수님이 응시하는 그 응시의 대상으로 자기를 바라볼 수 있어야 돼요. 내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식으로 하면 안 되죠. 왜? 인간은 자꾸 자기가 억울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내 억울함을 품고 예수님을 바라다보면 예수님은 그냥 내 한을 풀 때만 유용한 예수가 되어가지고 이거는 만남에 머물지 연결이 안 돼요. 

만약에 옷을 멋있게 신사복 차려입고, 머리도 아주 멋있게 박새로이 머리처럼, 박새로이 모르죠? 아주 멋있게 번쩍번쩍해가지고 이래서 아파트 베란다에 장미 한 송이 입에 물고, 잘 물어야 돼요. 안 그러면 장미가시 찔려요. 물고, 베란다에 있는 앞치마 입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줄리엣 에게 손을 얹는 것, 이거는 얼마든지 연출할 수 있거든요. 둘 다 잘난 체하니까. 아까 그 예가 중요한 게 잘난 체 할 게 뭐 없잖아요. 성경해석 할 때, 응시할 때 멋있는 주님을 응시하는 이거는 환상에 불과합니다. 그런 예수님은 마귀가 만들어낸 장난감 같은 예수님이에요. 그거는 장난감이에요.

진짜 예수님은 이사야 53장의 말씀처럼 모든 사람이 외면해버리는 거예요. 꼴 보기 싫다고. 유용하지 않다고 해서, 쓸모 짝이 없다고 해서 외면해버리는 거예요. 지금 베드로는 그렇게 예수님하고 친하게 지냈지만 베드로가 이 순간에 예수님을 외면한 이유가 뭡니까?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죠. 자기한테 지금 맥없이 죽는 저 예수는 유용하지 않는 거예요. 그럼 그동안 베드로는 뭡니까? 평소에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을 계속 뭐로 생각하느냐 하면은 나한테 언젠가는 유용할 수 있는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뭔가 내다보면서, 어떤 고대를 하면서, 예수님의 가치를 계속 얻고자 하는 자기 기대감, 그 때문에 계속 예수를 만나준 거예요.

왜냐 하면은 예수를 계속 만나야 자기가 뭐가 되기 때문에? 멋있게 되기 때문에. 자기가 잘되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가면 열두 보좌에 앉아서 다스릴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기 머리가 닭대가리밖에 안 된다는 그것을 생각 못한 겁니다. 베드로의 복은 뭐냐 하면은 내가 저 닭보다 더 못하다는 거예요. 저 닭보다 더 못한 거예요. 닭보다 못하기 때문에 제대로 이제는 예수님을 해석할 수 있고, 증거 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거예요. 바라볼 수 있는 거예요. 그게 필수 절차가 그래요. 필수 절차가. 필수 코스가 그런 거예요. 어떤 사람의  글처럼 우리 딸 애 방에 들어가면 다 쓰레기다. 그걸로 그 글은 끝났어요. 그 글은 끝났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그런 글을 쓰겠습니까? 신학을 드러내기 바쁘지.

이것이 바로 자기파괴죠. 자기파괴. 인간은 절대로 자기를 파괴시키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주님이 자기파괴를 예수님의 자기계보, 자기계열에다가 베드로를 강제로 응시하면서 집어넣으니까 주님의 자기파괴 안에 베드로도 덩달아 같이 파괴동창생이 되어가지고 하나의 링크가, 연결이 돼버렸어요. 예수님이 여기 계시고 예수님께서 지시를 했습니다. 예수님의 지시인데, 누구한테 했는가 하면은 닭에게 지시를 내렸어요. 그러면 닭에게 예수님께서 지시를 내렸다 이 말이죠. 그러면 닭한테는 하라고 이야기하고 베드로한테는 안 된다고 지시를 내렸죠. 베드로한테는.

그러면 하라 하는 것과의 취지는 무엇과 만나야 되느냐 하면은, 왜 안 되는 것은 왜 안 되는 것인지 그것과 하나의 세트를 이루어서 만나줘야 이 하라의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하라는 것은 예수님의 원하신 바이고. 하지마라, 안 된다는 것은 그것은 예수님,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야. 네 계보, 네 계열은 내 나라 천국에서는 용납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안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하라, 안 된다는 만남에서 종합된 것이 있을 거예요. 종합된 게. 종합된 게 누구냐 하면은 바로 사도로서 베드로가 되겠죠.

그러면 다른 사람이 베드로 너 누구야? 라고 할 때에, 베드로는 나는 주님한테 이렇게 당했던 자라고 하는 그 말도 옳고요. 이 소자한테, 베드로한테 한 것이 곧 누구한테 한 것이다? 나에게, 예수님인 나에게 한 것이다, 라는 이런 공식이 성립이 된 거예요. 사람은 이렇게 나타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의 손에 나타나지 않죠. 들쭉날쭉 이잖아요. 인간이 예수님의 부활을 잡을 수가 있습니까? 못 잡죠. 제가 주일에 그런 말씀했잖아요. 나를 잡지 말라고요. 니가 잡을 대상이 아니다. 내가 니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이 말이죠. 인간의 세계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거든요. 그러니까 베드로보고 닦달내고 사도바울보고 시비를 걸고 오늘날 성령 받은 성도보고 닦달 내는 거예요. “니 뭐 잘났어?” “나 못났어.” “어느 정도?” “닭보다도 나는 못났어.”

하지만 안 된다는 이것도 결국 뭐냐, 어디에 포함이 됩니까? “너는 이렇게 되어야 돼.” 이것에 포함되는 내용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아, 나는 안 되는구나! 그래서 나는 됐구나! 내가 예수를 못 믿는구나! 그래서 내가 성도구나! 내가 예수를 못 믿기 때문에 성도구나!’ 그래서 나라는 자체가 주의 증인되는 그 구성요소 속에, 바로 나는 그냥 유용하려고 믿었는데 그게 아주 개박살 난 거예요. 그게 파괴된 거예요. 작살난 거죠. 유용에서 응시를 하면서, 내 잘남을 응시한 것이 아니라 내가 숨기고 싶은, 이건 내가 들키고 싶지 않은, 이런 것이 노출되면서 주께서 쓰신다는 사실입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 (IP:122.♡.170.138)20-04-08 00:56 
광주강의20200327b 마가복음14장 72절(닭)-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지금 베드로 같은 경우에 왜 예수님을 부정했느냐 하면은, 베드로 같은 경우에 뭘 느꼈느냐 하면은 힘을 느꼈던 거예요. 힘. 내가 그동안 나 스스로가 다독거려가면서 나름대로의 지킬 것을 지켜가면서 살아왔던 힘의 장, 필드field죠. 힘의 장을 느낀 겁니다. 그 당시의 세상권세라고 할 수 있죠. 이 세상권세가 흐르는 장은 베드로에게는  현실이고 이 현실은 뭐냐 하면은 유일한 현실이죠. 유일한 현실. 그냥 현실이 아니고 유일한 현실입니다.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이 있다고 현실이 아니고 내가 어느 정도 힘의 장 안에 연결이 되어 있는가, 힘의 장 안에 속해져있는가, 그걸 현실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나+힘이죠. 외부의 힘. 외부의 힘이 결합해서 이게 현실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저하고 당황스럽고 울었다는 말은, 그만큼 나중에 자기 자신이 후회했다는 말은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근데 거기에 대해서 베드로하고 비교되는 것을 한번 봅시다. 이 장면에서 닭을 봅시다. 닭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주저함이 없다는 거예요. 꼬끼오! 눈치 보면서 꼬끼오하지 않잖아요. 주저함이 없는 거예요. 주저함이 없다. 주저하지 않아요. 그러면 닭과 연결된 베드로는 지금 주께서 관계하지 않고 바로 닭하고 관계하기 때문에, 그것은 뭐냐 예수님 자신이 기존에 대해서 주저함이 없는 거예요.

현실의 힘, 힘의 장에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현실에 어떤 힘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아요. 모르는 게 아니고. 그걸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현실에 힘이 있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무슨 힘이 되느냐 하면은, 방금 이야기한 그것을 저는 공간의 힘이라고 하죠. 공간의 힘은 무엇과 만나느냐 하면은, 공간의 힘을 전제로 해서 뭐가 있느냐 하면은 여기에 사명의 힘, 해야 될 힘, 이 사명의 힘이 누구냐 하면은 닭입니다. 울 때는 울어야 되거든요. 그 다음에 마지막 최종적인 힘이 뭐냐 하면은 존재의 힘. 그래서 사명 받은 자, 사명 받은 자가 그 존재의 모든 것을 비로소 드러내는 겁니다.

외부적인 순서는 공간의 힘, 현재 악마적인 권세가 있는 공간의 힘에 닭이 주저 없이 울어버리죠. 울어버리고, 그게 존재의 힘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원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는 것은, 이게 순서가 예수님의 존재가 뭐보다 우열하다? 니가 현실로 여기는 것보다 더 센 것을 니가 믿느뇨? 라는 식으로 이렇게 오는 거예요. 그러면 사명을 받았다는 것은, 내가 사명을 행한다. 이거는 안 돼요. 반대로 해야 돼요. 사명이 나를 갖고 논다. 사명이 나를 갖고 노는 거예요. 사명이. 닭이 이렇게 했다고 해서 닭이 구원받고 이런 것 없어요.

사명의 힘이 비록 닭이라고 할지라도 주님 앞에 순종이 되더라 이 말이죠. 마치 나귀가 순종하듯이. 사명의 힘이 더 나오더라. 그러면 사명은 닭이 존재냐? 아니에요. 나귀가 존재냐? 아닙니다. 베드로의 존재냐? 아니에요. 누구의 존재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존재가 사명으로 나타나고, 그 예수님의 존재가 현재 인간들이 꼼짝 말라고 하는 공간의 힘보다 더 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거는 뭐 여러분들이 충분히 이해를 하겠죠. 근데 아까 마지막에 쓴 것을 봅시다. 내가 사명을 받은 것이 아니고 사명이 나를 갖고 논다. 이래 되어 있습니다. 사명이. 사명 배후에는 주님이 계시죠.

자, 그럼 여러분들이 ‘백설 공주’라는 동화를 아시죠. 둘 중에 어느 것이 되고 싶은가 보세요. 첫째는 백설 공주. Snow White. 백설 공주 되고 싶다. 두 번째는 일곱 난쟁이 되고 싶다. 어느 것이 되고 싶어요. 백설 공주 되고 싶은가? 일곱 난쟁이 되고 싶은가? 우리 인간의, 성도의 몫은 백설 공주까지 나가면 안 됩니다. 요거는 누구의 역할이냐 하면은 주님이 하신 역할이에요. 우리가 하는 것은 어디서 멈춰야 하는가 하면은 일곱 난쟁이에요. 일곱 난쟁이. 일곱 난쟁이의 특징은 빈 공간을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일곱 난쟁이가 백설 공주를 포위해서 돌봅니다.  

특히 백설 공주가 계모의 독약을 먹고 죽었을 때에 일곱 난쟁이가 와가지고 돌봐주죠. 그때 일곱 난쟁이는 자기 자신을 바라봅니까? 아니면 한 가운데에 있는, among이라고 하죠. 둘러싼 그 자리, 그 빈자리를 보는 거예요. 그러면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뭘 안 봐요? 사명을 받은 자의 특징은 나를 안 쳐다본다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하면 백설 공주 되는가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고 뭐냐, 어떻게 하게 되면 나는 빈 공간을 자아내는가, 내 안에, 나는 아무것도 없음을 어떻게 드러내는가, 에요. 그걸 가지고 사람들이 실없는 인간이라고 해요. 비실비실 웃는 거. 실속 없는, 실없는 인간. 그다지 내세울 것이 없는 인간. 존재. 이게 일곱 난쟁이에요.

주님이 하신 일을 훼방하고 방해할 때, 백발백중 방해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내 안에 내 것이 있기 때문에 백퍼센트 그 사람은 주의 일을 훼방하고 있습니다. 나의 것으로 시작해서 나의 것으로 되돌아오거든요. 빈 공간을 형성하는 것. 그러면 그것은 뭐냐 하면은 바로 예수님의 존재죠. 그러니까 이것은 결국 공간 안에 무슨 자리를 마련하느냐 하면은 빈자리를 마련하는 겁니다. 숲속의 공터. 숲속인데 가보니까 호수가 하나 있고 옆에 보니까 빈 공간이 하나 있다. 얼마나 낭만적입니까? 노르웨이 숲속의 빈 공간. 그런데 요새는 드론 때문에 그런 낭만이 다 깨져요. 드론이 위에서 다 잡아버리니까. 

공간 안에 빈자리. 이 비어있는 것이 우리를 계속해서 새로운 현실화시키고 있습니다. 새로이 우리에게 사명을 주는 거예요. 자,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주신 사명 또는 사도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이 빈자리를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을 갈고리가지고 긁어내는 거예요. 끊임없이 긁어내는 겁니다. 여러분,  속이 꽉차있는 사람이 이길까요? 속이 텅텅 비어있는 사람이 이길까요? 텅 빈 것이 이길까요? 꽉차있는 것이 이길까요? 어느 것이 이기겠습니까? 텅 빈 것이 이겨요. 텅 빈 것의 대표적인 것이 신종코로나에요. 바이러스입니다.

바이러스의 특징은 세포가 없어요. 그냥 DNA만 있어요. DNA만. DNA만 있는데 자기 세포가 필요하면 어디로 가는가, 남의 것을 이용해요. 그 남의 것을 이용하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숙주라고 이야기하죠. 들어 가가지고, 특히 신종코로나는 폐에 작용한다니까. 폐에 들어가서, 거기서 똑같이 생긴, 텅 빈 것들을 폭발시켜버려요. 신종코로나하고 닮은 게 뭐냐 하면은 바로 신천지에요. 무조건 남에게 들어가는 숙주에요. 숙주. 신천지들은 거룩한 사명감이라고 하니까  이걸 좋아하겠다. 자기가 성도라고. 그런 뜻이 아니고. 이 사람들은 사실은 자기 것이 있죠. 나는 구원되고 싶은, 내 구원을 차지하고 있잖아요. 그것조차도 있으면 그거는 주님이 주신 사명이 아닙니다.

바로 신종코로나같이 텅 빈 것이 꽉차있는 것을 이기죠. 속을 드러내니까. 이 역할을 누가 하느냐 하면은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겁니다. 성령께서는 속을 항상 긁어내는 거예요. 호박죽 하듯이 호박씨를 긁어내고. 수박 다 긁어내듯이. 항상 나의 것을 긁어내는 겁니다. 그러면 평소에 사람들이 나는 나다, 라고 할 때에, 뭔가 안에 들어있어야 남한테 이야기를 할 수 있거든요. 나는 해놓고, 나는 무엇이다. I am (  ). 괄호를 채우잖아요. 나는 무엇이다. 나는 의사다. 나는 판사다. 무엇이라고 채우잖아요. 나는 공백이다. 비어있다. 나는 구멍이다. 이런 소리 안 한다 이 말이죠. 나는 무엇이다, 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서 여러분들이 실력이 있으니까, 그 다음 15장하고 관련되어 있으니까, 이제부터는 좀 더 난해하게 가겠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에요. 하도 강의를 많이 해서 여러분들이 들으면 다 알거예요. 나는 무엇이다, 라고 하는 것은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이렇게 하지를 못해요. 먼저 네모⯄부터 있어요. 어린애가, 16개월 이전의 어린애는 ‘나는’이라는 게 없습니다. ‘나는~’ 같은 게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물질로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이 없어요. 나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물질이 아니고 정신세계일 때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몸은 있고 신체는 있는데 나라는 게 없어요. 나가 어디에 있어요. 나가. 나라는 색깔이 빨간색인지 노란색인지 모르죠. 나라는 게 없다니까요. 나라고 할 때는 이미 육체에서 넘어서는 다른 수상한 영적 요소가 스며들었기 때문에 나가 된 거예요. 그 나라고 하는 것은 누가 채워주느냐, 부모, 엄마아빠가 채워주는 거예요. 엄마아빠가. 너는 이씨 집안이다. 너는 착한 거야. 너는 훌륭한 거야. 너는 멋져. 너는 자랑스러워. 이게 계속, 계속 들어오는 거예요.

남아공에서 조직신학 박사학위 받은 사람이 부산 영도에 있는 고신대학교 교수로 왔어요. 부인이 한국여자에요. 딸 둘 아들 하나 세 명 낳았습니다. 반응이 없는 거보니까 인간극장을 안 보시나 봅니다. 그걸 보면서 제가 인상 깊게 본 것은 뭐냐 하면은 13살, 11살, 6살 이래 되는데, 걔들을 생각할 때, 그 기독교가정의 부모가 애들에게 뭘 심어주고 있으며, 뭘 담았으며, 걔들은 부모가 심어준 것을, 심어줄 때 부모는 어떤 연출, 어떤 행동을 하면서 심어주는가를 유심히 관찰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아침마다 가정예배를 드린다니까요. 가정예배를. 아침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자식들에게 뭘 하느냐 하면은 “너는 멋있어!” 혼혈아거든요. 남편은 흑인이고 부인은 한국여자니까. 하지만 너는 멋있어. 잘했어. 훌륭해. 괜찮아. 이걸 계속 심어주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들이 모이면 뭡니까? 나는 닭대가리가 아니다. 이거겠죠.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되겠죠. 이거부터 채워져 있고, 그걸 누가 보장하느냐, 이게 참 중요한 건데, 이게 뭐냐 타이밍이 보장해준다고요. 타이밍이.

그러면 13살 먹은 큰 딸이 어릴 때부터 나는 훌륭하다, 자랑스럽다, 너는 자랑스러운 존재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자랑스러운 존재인데 그 딸이 나중에 32살 때 시집갔는데 남편이 술 먹고 때리면서 너 같은 못난 여자는 처음 봤다고 이래 버리면 지금 뭐가 안 됩니까? 때린 것 때문에 이혼할까요? 뭣 때문에 안 맞습니까? 자기는 평생 지금 뭐가 누적되어 있어요? 자랑스럽죠. 근데 자기남편이 자기보고 못났대. 그러면 그 남편 때려치우고 갈아치우기 해야 되죠. 뭐로 갈아치웁니까? “역시 당신은 멋있어. 자랑스러워. 내 자랑은 당신이야.”라는 사람으로 이렇게 부속품을 끼어 넣으면 자기의 뭐가 유지가 됩니까? 나라는 것이 유지가 될 수 있어요. 나라는 것이. 어릴 때 나를 자랑스러운 나로 부모로부터 양육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어디에 가도 기안죽고 자랑스러워요.

반대로 생각해봅시다. “니는 못났어. 나가 죽어라 인간아!”라고 어릴 때부터 하면, ‘나는 나가 죽어야 돼. 나는 얻어맞아도 마땅해. 나는 무가치해.’ 이러고 있다면 그게 나에요. 그게 나거든요. 이런 사람이 나중에 직장생활을 하면서 상사가 제대로 일처리 깔끔하게 못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어떤 대꾸할 마음이 없겠죠. 왜? 나는 못났으니까. 나는 잘난 게 없으니까. 대꾸도 못하고 예하고 그냥 물러나는 거죠. 그걸 학교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왕따죠. 왕따는 누가 만드느냐 하면은 본인이 만들거든요. 왕따는 남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왕따를 본인이 요청해요. 이미 교육계에서, 정설된 것은 아닌데. 내가 보기에는 왕따 라고 하는 것은 본인이 나를 좀 패주기를 바라는 그런 기대감이 있어요. 나를 안 패주면 나답지가 않아. 내가 알던 내가 아니에요. 인간은 자기에게 맞는 환경을 찾아가게 되어 있어요. 자기에게 맞는 요소를.

그래서 부속품을 끼어 맞추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평생토록 남을 의식해서, 내가 누군지는 몰라.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죠. 나한테 딱 맞는 그걸 해주기를 바라면서 평생 인간은 돌아다니잖아요. 내게 맞는 것. 내게 딱 맞는 거. 내가 정답이라고 용인하고 수용할 수 있는 것. 이게 뭐냐 하면 거기에 의해서 안 속으려고 해요. 안 속는 자가 뭐한다? 방황하는 거예요. 안 속는 자가 방황하는 겁니다. 반듯한 자가 타락하는 거예요. 왜? 자기 자신이 이게 나라는 것이 허무다, 라고 하는 것을 모르면, 계속해서 이거는 속빈 것이 아니고 속이 꽉차있으니까, 바로 뭡니까? 그 무게에 의해서 그냥 추락되는 것이죠. 그냥.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정말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큰 복을 주신 거예요. 나는 베드로다, 라고 하잖아요. 베드로 안에 뭘 집어넣었습니까? 닭을 집어넣었어요. 닭을 집어넣었다 이 말이죠. 아니죠. 닭보다 더 못하죠. 왜 닭보다 더 못한 것을 집어넣었느냐 하면은, 왜 베드로를 닭보다 못한 존재로 했느냐 하면은, 적어도 나는 닭보다 낫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기보다 더 못한 것을 집어넣는 겁니다. 그래야 자기가 닭보다 더 못한 것 자체가 이게 긍정이 되면 이게 뭐가 되는가 하면은 사명이 되거든요. 사명은, 내 존재를 알리기 위한 사명은 이 세상에 없어요. 누구 존재입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존재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일단은 나는 네모⯄다를 유지를 해줘요. 유지를 하고 이 내용을 빼버려요. 성령을 통해서 이걸 빼버린다고요. 뺄 때 그냥 빼게 되면 내가 인정을 안 할 게 아닙니까? 그 귀한 것을 평생토록 이정도 인간이 되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애를 쓰고 노력했는데, 그 아까운 것을 빼버리면 안 되잖아요. 뺄 때는 죄를 지적해주면서 빼줘야 되죠. 죄를 지적하면서. 그 죄가 뭐냐, 주일 낮에 이야기했던 거죠. 그 죄가 뭐냐 하면, 오목사님이 수정해서 녹취를 잘 해주셨는데, 내가 나 되기 위해서 주님마저 배척하고 주님한테 반항했던 그 죄. 그 죄만 우리가 용서가 돼요.

왜 그러냐 하면은 배신했던 자로부터 용서가 되어야 비로소 용서의 의미가 발생됩니다. 만약에 내가 나쁜 짓을 해서 용서받았다면 그 다음부터는 그 용서가 시시해요. 왜냐 하면은 내가 수정이 가능하니까. 그 죄를 내가 알면 그만이잖아요. 근데 내가 빼도 박도 못하는 내 본성 자체 때문에 지은 죄가 뭐냐 하면은 바로 주님을 배반할 때는 혼신의 모든, 발바닥부터 해가지고 모든 머리까지 총동원해서 주님을 배신했다고요. 왜냐 하면은 주님은 나를 공격하기 때문에. 공격하는 타인이기 때문에. 내가 온 힘을 다하여. 모든 요소를 빠짐없이 다 동원해서, 총동원을 다 해서 주님을 밀었다 이 말이죠.

따라서 죄라고 하는 것은 모조리 다 드러난 거예요. 더 이상 남아있는 죄가 없어요. 왜? 모든 죄의 힘을 다 모아서 나를 지키고 싶어요. 나를. 이 가치 있는 나를. 그렇게 딱 일을 해놓고 그 다음에 주께서 만약에 용서를 해버리면 그 용서야말로, 뭐 새롭게 용서받는 죄는 더 이상 나올 수가 없죠. 모든 마감된 죄를 용서해줬기 때문에. 내 죄가 우세가 아니라 뭐가 우세가 되느냐 하면은 용서가 우세가 되는 거예요. 율법을 줄 때 율법을 줌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그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는, 나 잘났으니까 잘났다를 증명하기 위해서 율법을 동원했잖아요. 그 율법으로 인하여 우리가 뭐가 됐습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게 되어 있잖아요. 심판을.

그러니까 심판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 확연하게 확 드러났어요. 드러나고 난 뒤에 예측 못한 용서가 주어졌으니까, 더 이상 우리가 새삼스럽게 용서받을 일을 우리는 만들 수가 없어요. 만들 수가 없죠. 최종적인 것을 용서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게 되면 여기서 내용이, 나는 ⯄다의 그 ⯄의 내용이 주님의 용서로 바뀌겠죠. 그럼 앞에 내가 있던 자리는 뭐냐, 나를 용서하시는 분. 나를 용서하시는 분이 나의 모든 것을 차지하게 되고, 바깥으로 용서를 드러낸다는 말은 나는 뭘 해도 뭐가 된다? 죄인이 된다. 그것이 바깥의 내용으로 나타나겠죠. 뭘 해도 죄인이 된다.

따라서 신종코로나 확진자가 되었다. 내가 신종코로나에 걸렸다. 이게 심판이 아니고, 주님의 용서의 새로운 방식이 되는 겁니다. 용서의 방식치고는 좀 이상하죠. 콜록! 콜록! 이게 용서의 방식이에요. 용서의 방식이 되는 겁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거예요. 범사에 감사. 부모로부터 잘났다, 훌륭하다, 대단하다고 칭찬 듣고, 어릴 때부터 가정예배 드리면서 말씀으로 내가 잘났다는 그 증거로 주의 말씀을 총동원시켜놨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나에요. 이 나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내가 그 당시 어릴 때, 아무것도 몰랐을 때 부모라는 타인이 나한테 정해준 거예요. 나는 일방적으로 당한 거죠. 일방적으로 당했다 이 말이죠. 훌륭하다. 잘났다.

그래서 이미 나는 훌륭하다, 잘났다, 그런데 내가 죄를 지으면 죄가 안 돼요. 이 죄가 뭐냐 하면은 죄가 아니고 실수한 거예요. 실수했다는 것은 아차 한 거예요. 아차. 그래서 정신 바짝 차리고 또다시 그런 죄를 안 지으면 나는 도로 내 갈 자리는 뭐로 간다? 훌륭한 자리로 가겠죠. 이게 일곱 난쟁이가 할 짓입니까? 이게 백설 공주나 할 짓이지 일곱 난쟁이가 할 짓이에요. 자, 그렇다면 좀 더 진도를 나가 볼게요. ‘나’가 있다. 주위의 가족들이 니는 기독교신자라고 나한테 알려줬어요. 남들이 신자래요. 내가 신자인지 아닌지는 남들이 일러줘야 해요. 그러면 신자다. 신자라고 하는 내용을 보니까 신자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플러스(+) 뭘 믿는다? 부활을 믿는 것을 신자라고 이야기하면서 그걸 믿느냐고 나한테 강요하더라 이 말이죠.

그럼 나는 좋은 것은 좋다고 여기고 신자라고 인정을 해줬어요. 신자라고 인정하고 그걸 타인한테 이야기한다고요. 나 이거 고백했는데 신자 맞지?  숙제해서 참 잘했어요, 도장 맡으려고 돌아다닌다고요. “참 잘했어요.” 도장 받으려고. 근데 이 사람이 뭘 모르느냐 하면은 십자가가 누구 십자가냐 하면은 예수님 십자가에요. 부활은 누구 부활이냐 하면은 예수님 부활이라고요. 예수님의 부활. 뭐냐 하면은 이 죽음은 예수님 죽음이에요. 내 죽음이 아니고. 지난 수요일에 했죠. 인간은 안 죽는다고요. 인간은 안 죽어요. 인간은 예수님의 죽음을 부여받을 때만 인간은 죽음을 알아요. 지가 숨 끊어진 것은 지가 죽어도 뭐가 죽는지 몰라요.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 예수님이 개인적으로 아버지한테 버림받는 그 의미가 담겨야 이게 바로 죽음이다 이 말이죠. 인간은 죽어도 죽음을 몰라요. 자살해도 죽음을 몰라요. 아이고, 약을 먹었는데 왜 이리 답답하지. 번개탄 피워놓았는데 왜 숨을 못 쉬겠지. 숨을 못 쉬는 거지, 지가 죽음을 아는 것이 아니라니까요. 죽음을 모르니까 부활도 모르는 거죠. 부활이 뭐 소생하는 줄로 이래 생각하는데, 이거는 소생이 아니거든요. 

인간에게, 성도에게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나가 있고 이 ⯄에 십자가와 부활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이게 나를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와 부활이 들어가는 이런 십자가와 부활은 없어요. 십자가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 십자가부활이라고 했습니까? 누구의 십자가? 예수님 십자가. 누구의 부활? 예수님 부활. 그러니까 나는 없어지고 이게 뭡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부활, 이게 복음이다 이 말이죠. 복음. 이게 복음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뭐 됐다? 이게 죽은 자거든요. 죽은 자니까, 아까 제가 했잖아요. 물질화됐다고. 돌멩이처럼 물질화된 거예요. 물질에서는 그 내용 앞에 나라는 것을 붙일 수가 없어요. 물질에서는. 그래서 사도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또는 나는 죽고 누가 산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은 내가 있던 자리를 누가 차지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의 나가 차지한 거예요. 내 이름이 있던 자리에 누구 이름이 들어왔다? 내 이름은 죽은 이름이기 때문에 이름이 필요 없어요. 누구 이름? 예수님의 이름이 죽은 나를 가지고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와 자신의 부활을 뭐하더라? 사명으로 증거 하시는 일을 하시더라. 증거 하는 일을.

이게 뭐냐 하면은 사명의 힘이에요. 힘. 여러분, 많이 어렵죠. 이게 많이 어려워요. 그동안 우리가 힘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앞에 말은 안하지만 (소유)의 힘이라고 여긴 거예요. 내 소유가 아니었으면 힘으로 간주 안 했어요. 그래서 앞에 또 하나가 더 붙어요. (내가) (소유한) 힘. 힘을 주시옵소서, 라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그냥 힘주시지 말고 내가 항시 간직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그것도 내가 간직한 힘을. 그렇게 해서 나온 공식이 뭐냐 하면은 나는 선하다. 나는 절대적이다. 이게 뭐냐, 악마의 모습이 되는 겁니다.

집에 자녀가 몇 명입니까? 여섯 명입니다. 집에 자녀가 몇 명입니까? 한명입니다. 우와! 나는 다섯 배나 많다. 이게 뭐예요? 내가 자식을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자식을. 내가 자식을 소유하니까 나는 이 소유된 힘을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죠. 혼신의 노력을.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은 어미의 희생이라고 하는 겁니다. 비바람이 부는 날 시장에 나가 장사해서 하나 팔아야 아들 양말짝이라도 신을 수 있다. 굉장히 고귀해보이잖아요. 이걸 또 안 하는 것은 짐승만도 못해. 인간이니까, 짐승도 지 새끼를 키울 줄 아는데 인간이 어떻게 지 새끼를 버리나. 우리보기에는 굉장히 대단한 것 같지만, 고린도전서 16장에 니 자식을 잘 키워놓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이런 대목이 없어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뭐하다? 저주를 받는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맞아 죽어도 싸다는 거예요.

현실의 힘을 왜 무시하느냐, 현실의 힘은 모든 인간이 각자 소유된 힘을 비축해서 그 비축된 힘을 가지고 천국을 뚫든지, 영생을 가지든지 뭐 수작을 벌여야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인간이 내가 어떤 이런 힘을 소지한다고 본다면 그들이 생각하는 천국은 뭐였습니까? 내 힘을 잘났다고 긍정해주고 인정해주는 나라를 생각하겠죠. 그것이 바로 뭐냐, 그 신이 뭐냐, 그것이 대자연의 신이에요. 그걸 수요일 호세아 설교에서는 무슨 신이라고 했습니까? 바알. 이 말은 대신하면 대자연은 살아 꿈틀거린다. 마치 누구처럼? 나처럼. 인간이 사는 것은 대자연의 순환처럼 나도 따라 살게 되면 그것이 가장 인간들의 바른 진리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바른 진리.

겨울이 되어 모든 것이 사라져도 봄이 되면 부활이 되듯이, 내가 역경을 당했지만 용기를 가지고 다시 일어서게 되면 이것이 바로 신의 도움이다. 그 신에다가 예수 이름 집어넣고, 지 맘대로 하나님 이름 집어넣고, “하나님이여! 제가 힘들지만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바알종교에요. 이게. 이게 바알종교거든요. 제가 댓글 달았죠. 이 악한 세대가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 악마스럽다고요 "이 어두운 세상이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있다고 하는 그 현상". 즉 인간들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그 현상이 제대로 악마스러운 풍경이다(존재의 초과-성도의 칼럼에서).

악한 세대가 그리스도를 왜 찾아요? 뻔하지 뭐. 힘 달라고 하는 거예요. 왜? 내 소유된 힘이 나다우니까. 그게 나니까. 남들이 자꾸 나에게 묻는 게 니 누구냐고 물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가진 힘을 가지고 나는 ⯄다, 라고 이야기하는 그것 외에는. 의사소통이 될 리가 없어요. 의사소통이 될 리가 없다고요. 아줌마들 찜질방에 모여가지고 반바지입고 이야기할 때, 병아리 모양으로 머리 해놓고 이야기할 때 뭡니까? 주로 무슨 이야기해요? 니 가진 힘의 장과 내가 가진 힘의 장, 이것 끄집어내놓고 “아줌마, 참 행복하겠네요.” 그 이야기한다고 세 시간 네 시간 그냥 흘러간다고요. 그것도 아주 문학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해요. 문학적으로. 지 힘을 가진 것. 제가 문학책 안 보는 이유를 알겠죠.

문학책을 이만큼 두꺼운 것을 봐도, 세계명작을 봐도, 이걸 짜부라트려서 짜게 되면, 뭔가 즙을 만들면 달랑 두 문장 세 문장밖에 안 나와요. 고생했는데 도움 받았다. 그것밖에 안 나와요. 내가 고생 많이 했는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착하다고 도와줬다. 그 이야기 빼놓고는 다른 문학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문학이. 드라마도 보면은 고생 되게 해요. 고생 되게 해놓고 마지막 끝에 보면, 그렇게 나쁜 짓하다가, 사기모의부터 해가지고 직접 차가지고 박고 온갖 것 해놓고 끝에 보면, 그런데 나는 용서받았다. 용서받은 인간은 미쳐서 정신병원에 갔다. 끝. 마지막에 그거 하나 이야기하려고 아침드라마 ‘맛 좀 보실래요?’가 그렇게 길어요. 돈가스 집을 했는데 또 왜 그렇게 잘 되는지. 애는 하나 놓고도 돈가스에는 달인이라. 너무 뻔한 거예요. 자화자찬이라고 하죠. 자화자찬. 자기를 자기가 칭찬하는 것.

다시 말해서 백설 공주 보려고 동화책보지 일곱 난쟁이 이걸 소망해서, 일곱 난쟁이 보려고 백설 공주 보는 것이 아니잖아요. 여러분들이 신발 안 맞는 신데렐라 언니 보려고 신데렐라 보는 것이 아니잖아요. 왕자하고 결혼했던 신발이 딱 맞았던 신데렐라를 보려고 그거 보죠. 그러니까 애들이 동화 해석을 할 때 이미 나는 잘났다는 게 있어요. 우리 외손녀가 신데렐라를 봤는데 신데렐라에 꽂혀가지고. 엄마가 그 다음에 물었어요. “엄마가 예쁘냐? 신데렐라가 예쁘냐?” 2초도 안 걸려서 신데렐라가 예쁘다고 대답했어요. 그 다음부터 겨울왕국 Let it  go~~ 옷 입고 돌아다닌다고요. 나는 이쁘다. 이거 미친 거 아니에요. 이쁘면 구원받습니까? 아니, 이쁘면 용서받아요? 이 세상에서는 용서가 되지만.

천국에서는 이건 이쁜 인간이 아니고 이쁜 닭이에요. 닭은 이쁜 것은 소용이 없어요. 모가지 비틀면 소용이 없으니까. 사명입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사명입니다. 주께서 지시했죠.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부러워 한 것이 진리가 아님을, 나를 미천하게 만들어서, 그들이 주를 증거 한 거예요. 니가 잘나면 잘날수록 주님하고 멀어진다는 거예요. 주님은 닭하고 하나가 되었지, 잘나고 큰소리치고 허세부리는 베드로하고 관계를 안 역었거든요. 베드로가 닭이 되어야 해요. 다시 말해서 닭이 되라고 해서 꼬끼오하고 그런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베드로의 그 잘남을 다 끄집어냅니다. 그냥 끄집어내면 안 되죠.

“이렇게 내가 너를 도와줬건만, 장모의 병도 낫게 해주고 오병이어도 해주고 했건만, 결국은 그것이 모아 모아서 예수님, 나를 부인하는데 전부 다 집약했다. 그게 뭐냐 하면은 힘이다. 바로 니가 이 세상에 있는 힘의 방향은 예수님을 밀쳐서 넘어트리고 죽여 버리는 그런 데 소모되게 하는 그 힘의 장에서 너는 나라는 것, 나는 이렇다가 이게 양성되고 생성된 것이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죠. 주님을 미워하는 힘을 지금 요청하고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바라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일은, 어떻게 하느냐, 극단의, 극한까지 몰아세웁니다. 주님께서. 극한까지. 극한이 바로 십자가극한이에요. 부활은 잊으세요. 부활은 없는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이지 우리 부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이에요.

그래서 십자가까지 가죠. 이게 빌립보서 3장에 나오죠. 내가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 주께서 어디로 몰아넣는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몰아넣는 거예요. 내가 다 이루었다 함이 아니고 나로 하여금 주께서 붙들어서 십자가로 가게 하는 거예요. 극한까지 몰아넣는 겁니다. 그러면 극한까지 몰아넣으면 “나는 죽는다.”, 이건 성립되지 않습니다. 나는 안 죽어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나한테 없는 거예요. 죽음은 누구 죽음밖에 없어요? 예수님 죽음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진짜 죽음을 아시는 분이 죽고 난 뒤에 부활이 있으면, 모든 인간은 선한 자로, 지옥 가는 자는 악한 자로 다시 부활되어야 되는 거예요.

제가 언제 주일날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세상에! 세상에 신종코로나보다 더 독하게 저주스러운 것은 우리가 안 죽는다는 거예요. 우리가 죽어서 없어질 것 같으면요, 좀 사기치고 나중에 실컷 맛있는 거 먹고 난 뒤에, 하고 싶은 거 다하고 난 뒤에, 무슨 영화입니까? 프랑스 외딴 섬에서 탈출하면서 자유를 외치는 영화, 빠삐용처럼. 빠삐용처럼 그냥 손을 놓으면 돼요. 놓을 때 얼마나 시원하겠어요. 높은 데 가면 뛰어내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잖아요. 이왕 다 한 거, 우리에게는 자살할 수 있는 자율권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걸 가지고, 그거는 자율이지만 힘에 속했으니까, 그 자유는 뭐냐 강요된 자유입니다. 마치 주님이 죽인 것이 아니고 악마가 애초부터 우리를 죽이도록, 악마가 니 속에서 작용했다는 겁니다.

무덤에서 사는 귀신들린 청년 안에 있는 그 귀신이 얼마나 빽빽하게 들어있으면 청년에게서 나온 귀신들이 어디에 다 들어갔습니까? 돼지 떼에 들어가서 돼지 떼들이 갈릴리 바다로 들어가서 죽었다고 했죠. 그러니까 귀신들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지 않았어요. 촘촘히, 겹치고, 겹치고, 겹쳐있는 겁니다. 이게 너무 과도해가지고 나중에 청년도 정신이 혼란해서 고함치고 이랬죠. 귀신이 좀 없어지면 고함까지는 안 지르지만, 점잖게 이성을 따지고 논리를 따지면서 결국은 귀신으로 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주님의 죽으심이 없으면 그거는 이미 진정한 의미의 죽음이에요. 예수님의 생명이 없으면 진정한 의미의, 진실 된 의미, 극한적인 최후의, 확정된 의미로서의 그 인간은 죽은 겁니다. 그러니 죽은 자 하고 사명 자하고는 대화가 될 수가 없죠. 죽은 자들은 끝까지 자기 자아를 못 버리기 때문에 항상 말할 때, “나는”이라고 시작하죠. 나는, 이게 뭡니까? 내가 잘났다는 것을 니가 내 대신 잘났다고 동조를 해달라고 요청을 하면서 대화를 하겠죠.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은 이 앞에 누가 있다고 했습니까? 주께서 이걸 하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오토바이 타고 빠라빠라~~하면서 중앙선 넘어가서 경찰이 잡았어요. “니 왜 이런 짓을 하느냐?”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그 정도 되면 오토바이 타세요. 어느 인간이 오토바이 타면서 주께서 하게 하셨다고 하는 그런 인간 없거든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주께서 하는 것은 전부 다 긁어내는 거예요. ‘야, 이거 하면 재미있겠다.’ 그런 것 없어요. 긁어내는 거예요. 주께서 까라하면 까야 돼요. 주께서 시킨 대로 해야 되는 거예요. 왜? 나는 난쟁이니까. 오늘 제목 바꾸고 싶어요. 일곱 난쟁이로. 그거보다는 닭이 낫네. 나는 닭이니까. 세 번 못 울어요. 두 번 울어야 돼요. 세 번 우는 것은 베드로차지고. 두 번째 울어야 돼요.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리라. 주님의 계획이 다 있었어요. 다 계획이 있다고요.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15장 봅시다. 1절,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이거 오늘 강의한 것과 연결시켜봅시다. 지금은 예수님하고 베드로하고 할 때 뭘 집어넣었습니까? 닭을 집어넣었죠. 상당히 예수님께서 개인적이죠. 베드로 개인하고 만났으니까. 개인으로 만났는데, 이 개인과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주위에 뭐가 있었느냐 하면은 15장으로 들어가면 여기에 어떤 집단이 나오죠. 집단. 아까 말한, 베드로가 벌벌 떤, 베드로가 너무 겁이 나서 함부로 못했던 것은 무엇을 의식해서입니까? 나는 ⯄의 힘을 소유하고 있다고 할 때,  바로 이 힘을, 여기서나 통하는 게 힘이잖아요. 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힘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는 나라는 이름으로 이 힘에 종속된, 노예가 된 거예요. 여기서 왁~하고 나오면 놀라는 거예요. 신종코로나가 유행하니까 교회가 알아서 봉쇄해주세요, 라고 하죠. 그런데 교회라는 것은, 제가 알기에는 교회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은 사람, 사명자의 집합체가 교회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머리는 누구죠? 주님이죠. 이 교회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본인이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결정을 한다? 주님의 지시에 대해서 하는 거죠. 그럼 주님의 지시에 대해서 하면, 여기서 우리는 뭐냐 하면은 바깥에 나와야 할 것이 있죠. 왜? 긁어내니까. 나는 아니오, 가 나오겠죠. 아니오. 그러면 이 세상의 권세가 문 닫으세요, 라고 할 때에 문 안 닫는 것이 아니고, 문을 닫으면서 뭐라고 생각을 해야 돼요? ‘이러니까 내가 지옥가야 되지.’라고 하면 그게 교회가 되는 거예요. 어느 교회처럼 문 열어놨다가 벌금 300만원 내고. 이런 것을 고집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란 죽음에 대해서 장렬한 게 아니에요. 죽음에 대해서 공손한 겁니다. “저 죽어 마땅합니다.” 이거지. “죽음이여, 오라!” 자기죽음입니까? 자기죽음이면 자기 부활됩니까?

마리아, 마르다 오빠 나사로가 자기가 지금 병에 걸려서 죽을 때에, 여동생이 “빨리 예수님 불러야 되지. 예수님한테 전화할까?” 뭐 이렇게 할 때에 나사로가 이랬습니까? “부르지 마! 부르지 마! 나 지금 순교할 찬스인데 니가 왜 바쁜 예수님을 왜 불러. 부르지 마!” “오빠, 그럼 죽어 가는데?” “나 죽고 싶어. 죽음이여 오라!” 이랬습니까? 그냥 죽으세요. 그냥. 그냥 죽었다고요. 제발 장렬함이라는 이 좋은 이미지를 내 ⯄에다가 집어넣지 마세요. 우리는 치사하고 쪼다고 비겁하고 얍삽해요. 우리는. 그냥 닭이 아니고 얍삽한 닭이고 치사하기 짝이 없는 닭이에요. 그게 우리 외형으로 나와야 된다고요. 이런 나를 구원했잖아요. 이런 나를.

아까 처음에 했죠. 우리는 수치스럽고 부끄러워서 아무것도 못한다고요. 부끄러운 것은 감추고 싶어요. 전에 했잖아요. 인간은 숨는 데 귀재라고요. 숨는 데 귀신들이에요. 귀신들. 누가 설쳐대고 있습니까? 우리가 겁내는, 우리가 한통속이 되어 있는 권력자들이 아주 기고만장하게 날뛰고 있습니다. 왜 날뛰느냐, 그들의 목적이 있어요. 무슨 목적이냐, 바로 예수님을 죽여라. 뭐 북한처럼 경제개발5개년 계획 그런 것 아니에요. 그들의 계획이 뭡니까? 누굽니까? 예수님을 죽여라! 우리의 의로움을 방해하는 거, 이스라엘, 우리(나)는 ⯄다. 이거에 방해되는 것은 다 죽여라. 이게 현실세계의 힘의 장입니다.

아까 제가 그걸 가지고 무슨 힘이라고 했습니까? 세 가지 이야기했는데 처음에는 공간의 힘이죠. 인간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어느 공간에 배속되어서 사는 거예요. 배속. 군에 갔다 온 사람들은 알죠. 군에 가서 훈련받고 집에 간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군대생활 해야 된다는 거예요. 4주정도 훈련받았으면 많이 했는데, 4주는 특기생들만 하는 것이고, 4주 훈련받고 집에 가지 말고 이제는 본격적으로 군대 생활해야 돼요. 어떤 공간을 배속 받아요. 힘의 공간. 날 때부터 부모의 힘에서 국가의 힘을 배속 받습니다. 여기에 반항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누구냐 하면은 여호와증인들이에요. 이 여호와증인은 어디에 갑니까? 여호와증인, 신천지는 자기 것에, 힘의 공간에 들어가죠. 그러니까 그들이 아무리 해도 구원을 못 받는 이유가 이 공간의 힘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 다음에 뭡니까? 사명의 힘이라고 할 때는 자기의 실상을, 나라는 실상이 전부 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죄인임이 노출되는 거죠. 사명이 임할 때는 손을 흔들어야죠. 베란다에서 보고 있으니까. “안녕하세요?” “아, 예 안녕하세요?” 이렇게 해야 돼요. 완전히 죄인 중에 괴수가 된 거예요. 사명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나는 이렇게 훌륭하다, 나는 주의 종이다, 이게 아니죠. 어디에 가야 돼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죠. 그냥 죄인인 거예요. 그 다음에 뭡니까? 존재의 힘. 수요일에 했죠. 주님이 바로 여기 계시다. 창세기 26장에 보면 야곱이 형 피해서 갈 때 꿈에 사다리가 내려왔잖아요. 그때 바로 야곱이 뭐라고 했습니까? 주님이 어디에 계시다 했습니까? 주님이 바로 여기에 계시다. 이게 얼마나 도발적인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왜? 주님은 하늘에 있잖아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 여기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죠. 인간과 같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죠. 진짜 하나님은 인간과 같이 있는 하나님이에요. 인간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수치당하는.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증거가 뭐냐, 십자가라는 사건과 그리고 빈 무덤이라는, 사흘 만에 되살아났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내가 신앙인이 맞아, 이게 믿음이 맞아? 자꾸 의심이 될 때는, 본인이 얼마나 뜨겁나, 얼마나 훌륭하냐를 따지지 마시고, 도대체 내가 사는 이 공간에 주께서 무슨 일을 벌이셨는가를 보세요. 그러면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십자가가 보이잖아요. 예수님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니가 얼마나 훌륭했고 니가 얼마나 착실했는가를 묻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가 일어났다는 그 십자가와 나와 응시관계, 그냥 만남이 아니라 아는 지식이 아니라 서로 엮여져 있고 링크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십자가 때문에 나는 천하에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하게도. 그게. 이미 용서받았기에 바깥으로 배설물이 나오는 거예요. 배설물로. 주일날에 했잖아요. 손가락으로 막아도 어떻게 됩니까? 손가락으로 막아도 삐져나오는 거예요. 그냥 허허 웃죠. 그냥. 손가락사이로 빠져나오는 겁니다. 그걸 누가 작사, 작곡했느냐 하면은 방탄소년단의 사장 방시혁이 만든 겁니다. 서울 미대 나온.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가? 관계없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힘이 될 수가 있는데.

어쨌든 간에 우리는 공간의 힘에서 그 다음에 사명의 힘, 나는 없고, 나는 없다는 말은 내가 비어있다는 말이 아니고 옛날에 잘난 죄를 바깥으로 죄라고 이야기하면서 보여주고, 안에는 성령이 와서 계속 긁어내고. 내가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는, 주님은 유용하다고 했는데 그런 내가 주님 앞에 무용한 자, 아무 가치 없기 때문에 마치 닭처럼 사용하시겠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베드로 자리에 닭을 집어넣으신 주님의 그 취지와 깊은 의미를 우리에게 적용되게 하옵소서. 이제는 주님과 서로 만나는 사이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이, 눈을 마주치는 사이, 마주보며 대화하는 사이, 그런 사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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